소설리스트

118화 (118/160)

-사고-

관청을 나서던 진소는 회랑 아래에서 관리 서너 명이 내궁 쪽을 내다보며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진소가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지금 뭐하고들 있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관리들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궁에 무슨 일이 생긴 듯합니다.”

진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무슨 일이 생겼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비빈 중 한 명이 넘어졌답니다.”

앞으로 나선 관리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것도 일이라고!

진소가 입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손을 휘저었다.

“알아냈소, 알아냈어. 안비께서 넘어졌다고 하오.”

뛰어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소리쳤다.

모여 있던 관리들이 다급하게 그를 향해 입을 다물라는 눈짓에 손짓까지 했지만, 뛰어오던 사람은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진소가 옆에 서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소는 그 사람을 꾸짖지 않고 다소 놀란 기색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안비께서?”

뛰어온 사람은 혼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비께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층계에서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복중에 있는 용종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맴도는 태후궁에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회랑 아래 모여 있던 비빈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전각 안을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빈들은 이따금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태후궁의 모든 창문과 문이 굳게 닫혔고, 전각 안에는 황후와 황제, 그리고 태후가 있었다.

태후가 창백해진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슨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두 손을 꽉 쥐고 있던 황후는 긴장한 동시에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황제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비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도대체 해낼 수 있다는 게냐, 없다는 게냐!”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아무도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은 궁녀들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제지했다. 황제는 소매를 홱 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리저리 서성였다.

“폐하, 정 낭자를 모셔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후의 목소리가 황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정 낭자?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황후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병약한 탓에 늘 창백했던 황후의 안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창백해 보였다.

황후가 황제를 쳐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신첩은…….”

황후는 더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신첩은 더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제발 정 낭자를 청해 오시지요. 정 낭자에게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후, 허튼소리 말게!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태후가 눈을 번쩍 뜨고 외쳤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제는 마음속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두렵소. 짐도 너무나 두렵소.

아이들이란 너무도 연약해 손에 쥔 모래와도 같구려.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리 세게 쥐어 봐도, 결국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고 있기에는 너무도 힘든 존재구려.

“정씨를 부르거라.”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들려오던 안비의 울부짖음이 돌연 멈췄다. 전각 안에 있던 황제, 황후 그리고 태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일제히 안쪽을 쳐다보았다.

이 태의가 안쪽에서 걸어 나오자,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태의, 목숨을 구할 수 없는 게 확실하오?”

목숨을 구할 수 없어야만, 정 낭자를 모셔 올 수 있다는 뜻이겠지.

황제의 말뜻을 이해한 이 태의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을 때도 아니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은 맞으나, 정 낭자를 모셔 올 필요는 없습니다.”

이 태의의 뒤로, 태의국의 의원들과 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안비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셨으나…….”

의녀는 말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태(死胎)였습니다.”

짙은 어둠이 황궁의 하늘을 가렸다. 황궁 곳곳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첩첩산중 같은 궁궐은 등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산해 보였다.

여름밤의 바람이 궁중 사이를 훑고 지나가며 낮게 울리는 소리는 궁궐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만들어 내는 낮은 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사람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안비는 넘어지면서 복중 태아를 잃게 되었다. 황제가 무척 기대하고 애지중지하던 그 황자를.

기절했다가 깨어난 안비는 죽네 사네 하며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녀가 약도 먹지 않고, 식사도 거부한 채 죽겠다고만 하는 통에, 안비의 궁 근처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안비 옆에서 그녀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안비가 사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안비의 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외궁에 위치한 근정전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여름인데도 근정전의 문과 창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회랑 아래 서 있는 내시들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근정전의 문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멀리서 사람들 한 무리가 등불을 켠 채 근정전 쪽으로 다가왔다.

“황, 황후마마십니다.”

내시들이 근정전을 향해 오는 사람이 황후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서둘러 황후를 맞이했다. 황후는 내시들의 통보를 생략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 근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근정전 내부에는 등불 두 개만이 켜져 있어 실내가 몹시 어두웠다. 옥좌 위에 앉아 있던 황제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잠든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폐하, 그만 돌아가 쉬시지요.”

황후의 말에 황제가 음, 하고 대꾸했다.

“짐은 조서를 조금만 더 보다가 가겠소. 오늘 조금 더 보면, 내일은 조금 덜 봐도 될 테니.”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정신 또한 맑아 보였다. 황후가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나랏일이 어디 오늘 더 본다고 해서, 내일 더 줄어드는 것이랍니까. 오늘 조서를 많이 보면 볼수록, 내일은 더 많은 조서가 올라올 텐데요.”

황제가 느릿느릿 눈을 뜨고 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말대로라면, 짐이 조서를 적게 읽으면 읽을수록, 조서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오?”

황후가 웃으며 황제의 손을 꼭 잡았다.

“신첩이 하고 싶은 말은, 급하지 않다는 겁니다. 폐하, 차근차근하셔도 됩니다.”

황제가 다른 손으로 맞잡은 황후의 손을 다정하게 포갰다.

“급하지 않으면 안 돼서 그렇소. 시간이 짐을 기다려 주지 않는구려.”

황후가 황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폐하,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신첩을 보세요. 신첩은 그리 오랜 세월을 병상에서만 보냈는데, 지금은 또 건강이 차츰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 폐하께서 신첩과 함께 있어 주셨던 것처럼, 신첩도 항시 폐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 길을 둘이 함께 걷는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그러니 급할 것 없습니다. 두려워하실 필요도 없고요. 신첩이 있지 않습니까. 신첩이 폐하와 함께하겠습니다.”

짐에게 아직 시간이 많다고? 짐도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소.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는데, 이 나이가 되어서 또 태자를 얻지 않았는가. 드디어 하늘이 짐의 노력을 인정했다고 생각했거늘, 그게 아니었어.

그렇게 어렵게 얻은 태자를, 또 잃었으니까.

또 잃었어.

어쩌면 성인이 된 그 순간부터, 황자를 낳는 일이 짐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것 같구나. 하지만 기대를 할 때마다, 번번이 실망했지.

지금 돌이켜보면, 짐에게는 꼭 두 가지 감정밖에 없는 것 같아.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두 감정만 반복하며 교차할 뿐,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결국엔 실망밖에 남지 않는데도. 왜 아직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지지 않는 거지?

짐은 왜 또 다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일까?

“폐하,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어요.”

황후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황제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쉬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폐하께 의지하고 있는데요. 신첩과, 육가아 그리고 태후마마까지.”

육가아.

황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소자는 어느 게 대하인 줄 압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나중에 크면, 꼭 이 지도를 따라 여기저기 다녀 보겠습니다. 소자가 아바마마를 대신해서 이 지도를 따라…….

육가아, 우리 육가아.

그래, 짐은 초조해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짐이 없어지면, 우리 육가아는 어떡하라고. 다른 사람은 다 제 앞가림을 해도, 우리 육가아는 그럴 수 없으니, 평생 남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지자, 황제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좋소. 오늘은 이만 가서 쉬고, 내일 할 일은 내일 하리다. 황후가 훌륭한 조언을 해 주었소.”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조언이라 해도, 알아듣는 이에게만 들리기 마련이지요.”

황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황후가 황제의 뒤를 따라가자,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은 한시름 놓은 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길을 안내하고자 등롱을 밝혔다.

근정전을 나선 황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오늘 황성사의 당직은 누구더냐?”

내시 한 명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폐하, 소인 하정(何正)이라 하옵니다.”

“하정? 좋은 이름이구나.”

황제가 내시의 이름을 곱씹으면서 웃자, 하정은 서둘러 감사하다며 예를 올렸다.

“하정은 들으라. 오늘 안비가 당한 변을 철저히 조사토록 하여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근정전 주위는 바람까지 멈춰 버린 듯 조용해졌다.

“폐하, 이 일은 사고일 뿐입니다.”

황후가 조용히 말하면서 황제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사고가 너무 많소. 짐은 더는 사고를 보고 싶지 않구려.”

같은 시각 정씨 가문의 저택은 예전보다 등불이 더 환히 밝혀져 있었다.

정교랑의 혼례 준비를 위해 범강림과 황씨도 정씨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정씨 저택은 밤낮으로 시끌벅적했다.

“반근, 밤 좀 그만 새.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것 좀 봐.”

“안 돼. 아씨의 혼례복은 꼭 시간 맞춰서 다 만들어야 한다고.”

“네가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잘하고 있나 지켜봐야지. 영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시녀와 반근이 담소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밤바람과 흔들리는 등불이 두 사람에게는 마치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구나.

시녀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었다.

아씨를 따르고 나서부터 놀람과 슬픔, 답답함과 불안함 같은 감정들은 느껴 봤지만, 평범한 아씨들을 모실 때의 감정 같은 건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어.

이런 감정이 조금 늦게 우릴 찾아오긴 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고개를 든 시녀는 단정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아씨, 이제 정 대노야께 서신을 써도 될까요?”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필요 없어.”

정교랑이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 사람 사이의 조화, 그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준비됐어.”

하늘빛이 밝아질 무렵, 진소가 아침상이 차려진 대청으로 걸어 나왔다.

“정 낭자한테 안 가보시려고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난 안 가도 될 듯싶소.”

진소가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잠시 멈칫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예단은 잘 신경 써주시오.”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어떤 예단을 준비할지 말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진소에게 무언가를 나지막이 전했다. 진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환은 예를 표하고 곧바로 물러났다.

식사를 마친 진소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단은 급할 거 없소.”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살짝 떨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정 낭자에게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너무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서 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

진안 군왕이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하고, 폐하와 태후 모두 그 혼사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제발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혼사를 치르게 해 달라고 속으로 얼마나 부처님을 찾았는지.

하지만 매번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빌더라도, 또 되묻게 돼.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까? 정말로?

그러니 이번에도 결국…….

사실 이번에도 결국 무슨 일이 나고 말았다고 차라리 마음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입을 한 대 때려야 할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오. 다만, 어제 안비가 황자를 잃었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안비가 황자를 잃었다고?

“잃다니요?”

진소 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황제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안비의 황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경성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황제가 아끼는 만큼, 태아가 무사할 수 있도록 애지중지 보호했을 텐데, 어쩌다가 잃은 거지?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소. 별로 놀랄 일도 아니오.”

진소가 말했다.

안 그래도 황제는 자식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순산했다 하더라도 무탈하게 자란 아이는 평왕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는 자식을 잃은 것이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조정 대신들에게는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잃은 자식이 몇 명이 됐든, 황위를 이을 황자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진소 부인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정 낭자와는 무슨 상관이죠?”

진소 부인이 묻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관이냐니?”

진소가 반문했다. 진소 부인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긴, 그게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난 또 정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서.”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한 입 마셨다.

“그래도 영향을 받긴 하겠지.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 보니, 이 혼사는 미뤄질 수도 있겠소.”

진소 부인은 그건 별일 아니라는 듯 잠시 진소와 담소를 나누었다.

평온한 진 상공의 저택과는 달리, 고능준의 거처는 난리가 났다.

대청 안에 놓여 있던 밥상이 엎어지고, 접시와 음식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벌써 산산조각이 난 찻잔과 그릇들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왜 그걸 이제야 알리는 게야!”

고능준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매섭게 소리쳤다. 그 앞에 있던 사환과 식객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대인, 원래 이 일은 마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조용히 입을 열던 사환은 그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고능준에게 따귀를 호되게 맞고 말았다. 이마에 핏대가 선 고능준이 바닥에 고꾸라진 사환을 향해 고함을 쳤다.

“원래는 마마와 관련이 없었다고? 그런데 지금 궁에 갇힌 사람이 누구더냐!”

태후궁.

하룻밤이 지났지만, 태후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맴돌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두 궁녀가 조심스럽게 태후를 부축하고, 다른 궁녀가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죽을 떠먹여 주었다. 그러나 태후는 몇 입 넘기지도 못하고 손을 휘휘 저으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마마, 어제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하옵니다.”

궁녀들이 울면서 태후를 달랬다.

“못 넘기겠다. 지금 어떻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궁녀들이 태후를 달래는 동안, 황후가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황상은?”

태후가 황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통 침수에 못 드시긴 하였으나, 밤새 신첩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기분도 많이 나아지셨고요. 조금 전에는 안비를 보러 그리로 가셨습니다.”

황후가 궁녀가 손에 쥐고 있던 태후의 죽을 건네받았다.

“그래, 가야지, 가 봐야지. 어제 황상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안비가 울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게다. 황제가 갔으니 다행이구나. 갔으니 다행이야. 애가는 황제가 그리 무정한 사람이 아닐 줄 알고 있었다.”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마마, 폐하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마마께서 그것을 모를 리 없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워낙 마음이 약하시다 보니,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신 게지요.”

황후의 말에 태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역시 황후가 황상을 제일 잘 아는구나.”

태후가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미모는 본래 빼어나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수년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병상에만 누워 있던지라, 그 모습이 더욱 야위고 수척해 보였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황후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초췌해졌다.

“경영(景榮), 몸이 이제 막 나아지기 시작했을 텐데, 갑자기 이런 일을 겪고 밤까지 지새우면 쓰나. 그 몸으로 어떻게 버티려고.”

태후가 하염없이 울면서 황후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조심스럽게 태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 마마께서 더욱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황후가 직접 태후를 위로하니, 태후는 금세 죽을 비우고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고 황제가 태후궁에 도착했을 때는, 태후는 황제를 향해 탁자를 세게 내리칠 정도로 기운을 회복했다.

“누가 감히 그 애를 가둬 두라고 했소! 뭣 하러 그 애를 가뒀느냔 말이오!”

태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소. 그 자리에서 사고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자리에 있었느냐? 무엇을 보았지?”

황제가 불쑥 물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두 내시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가 곁에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거처에 잘 모셔다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황제가 물었다. 겁에 질린 두 내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거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려던 찰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마마, 저들에게 마마께서 듣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것을 말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을 들은 태후는 흠칫 놀랐다가 곧 격노하였다.

“황상, 지금 그 말은 무슨 뜻…….”

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가 기침을 하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마, 폐하!”

두 내시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외침이 태후의 목소리를 덮었다.

“소인들이 본 바로는, 귀비마마와 안비마마께서 처음엔 대화를 잘 나누시다가, 층계를 내려갈 때 잠시 다툼이 있으셨습니다. 그 뒤 귀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살짝 밀치셨는데…….”

태후가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허튼소리! 네 이놈들!”

태후는 황제를 질책하는 것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시들을 향해 삿대질했다.

“마마, 소인들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들이 어찌 감히요.”

내시들이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말했다. 태후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곧 눈이 뒤집히면서 혼절했다.

전각 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밤낮으로 바빴던 태의국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태의 몇 명이 서둘러 태후궁으로 향하자, 이제야 안비의 궁에서 돌아온 이 태의가 길을 비켜섰다.

“태후께서는 괜찮으신가?”

“괜찮으시네. 갑작스러운 근심과 걱정에 화병까지 도져 쓰러지셨을 뿐이지.”

“지금 갑자기 화병이 났다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안비의 황자 때문이 아니라, 귀비 때문인 듯하네만.”

태의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 태의가 회랑 아래에 잠시 서 있다가 태의국의 곁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 태의가 문을 열자, 곁채 안에 서 있던 태의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이 태의인 것을 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이 대인, 안비마마의 맥상(脈象)은 괜찮으시지요?”

이 태의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비마마의 맥상이 어떠한지는 오 대인이 제일 잘 알잖소.”

이 태의가 천천히 말끝을 늘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오 태의가 웃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 태의는 잠시 오 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 대인.”

오 태의가 고개를 들고 이 태의를 보면서 웃었다.

“이 대인, 분부하실 일이라도?”

이 태의가 한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거요?”

오 태의가 흠칫 놀랐다가 이 태의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약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혈흔이 묻은 면포 조각이었다.

오 태의는 웃으면서 면포를 약상자 안으로 마저 쑤셔 넣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인. 역시 누군가의 말처럼, 이 대인께서는 우리 사람이시군요.”

이 태의는 오 태의를 쳐다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오 태의의 약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태의의 약상자는 다른 태의들이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유심히 보다 보면 그의 것이 다른 태의들의 것보다 더 넓고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성 오씨 가문에 사산한 태아를 키우는 능력도 있었군.”

이 태의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오 태의는 이 태의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자랑할 게 못 되지요.”

오 태의가 두 손을 한 번 비비고는 약상자를 어깨에 멨다.

“이 대인께서도 쉬셔야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 태의가 이 태의의 옆을 지나치면서 약상자를 가볍게 두드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 처리할 게 남아서요.”

“오신(吳訊)!”

이 태의가 갑자기 흥분해서는 자신을 지나쳐 가려던 오 태의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 누군가가, 정말로 이 몸이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던가?”

이 일을 발설한다고?

안비가 품고 있었던 것은 애초에 황자가 아니었으며, 진작 죽은 태아였다고.

어제 안비가 낳은, 태아의 형상을 띄었다는 그 사태가, 실은 오 태의와 의녀가 밖에서 구해 온 고깃덩이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그 고깃덩이가 지금 오 태의의 약 상자 안에 있다고.

이 일의 진상을 발설한다?

오 태의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이 태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 대인께서 이 일을 발설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 대인께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분이잖습니까.”

오 태의가 읊조리듯이 이 대인의 말에 대꾸했다.

이 일을 발설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까. 그럼 내가 그자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이 태의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오 태의가 웃으면서 공손히 예를 표한 뒤,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대인, 혹시 알고 계십니까? 어쩔 땐 사람을 해칠 줄 모르는 게, 사람을 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대인, 아직도 약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군왕을 생각하고, 이황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태의가 오 태의를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잡았던 손을 툭 하고 떨구었다.

그런 거였어? 사실 나도, 그 아이들을 해친 공범이었나?

“폐하, 신첩은 어쩔 수 없이 폐하께 듣기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폐하, 태후마마께서도 안비가 황자를 잃은 일에 대해 무척 속상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태후께 그리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휘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황후의 목소리에 서서히 정신을 차린 태후가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이윽고 기침 소리와 함께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태후는 긴 한숨을 쉬었다.

“황후에게 울음을 그치라 전하고, 안으로 들이거라.”

휘장이 걷히자, 황후가 잰걸음으로 태후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훔쳤다. 황제는 한 발치 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태후를 잠시 쳐다보고는 꿇어앉았다.

“소자의 죄가 큽니다.”

“황상의 죄가 아니오. 이건 누구의 죄도 아닌 일이오.”

태후가 버둥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황후가 서둘러 태후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게 도왔다.

“황상, 애가도 황상의 고충을 잘 알고 있소.”

황제가 허리를 숙이고 태후를 향해 어마마마, 하고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황상, 다 사고일 뿐이오. 사고 말이오. 하랑(荷娘)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겠소! 그리고 지금 하랑의 입장에서는 그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더더욱 없잖소!”

태후가 눈물을 주륵륵 흘리면서 사정했다.

“마마, 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이 일에 관하여 묻고 조사하려는 거고요. 짐이 이러는 것은, 모두에게 이 일이 사고라는 점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황제의 눈빛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결심이 엿보였다.

태후가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냔 말이오.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일이…….”

울부짖던 태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게 위낭이 출궁한 후에 일어난 일들이야.

“그러게 애가가 위낭을 출궁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소. 위낭이 궁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가 발생할 리도 없었을 텐데. 다 그대들이 위낭을 내쫓은 거 아니요.”

태후의 말에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마, 위낭을 출궁시킨 사람은 짐이나 마마가 아닙니다.”

황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천천히 말했다.

애가나 황상이 위낭을 출궁시킨 게 아니라니?

“아, 그렇지, 그래. 아무튼, 애가는 절대로 위낭을 출궁시킬 생각이 없었어. 다 위낭이 출궁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귀비가 자주…….”

태후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이건 우연이고, 이건 사고야.

세상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폐하, 이건 사고예요! 도끼를 잃었다고 이웃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 될 일입니다!”

“이건 사고가 아니야!”

귀비가 자신의 앞에 있던 꽃병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꽃병은 귀비가 방 안에서 집어 던질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이미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건 누군가가 고의로 본궁을 모함하려는 게야!”

더는 부술 게 없어진 귀비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궁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귀비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의 화장이 다 번지고, 놀람과 분노가 혼재한 귀비의 얼굴은 몹시도 흉해 보였다.

“안비, 이 독한 계집!”

귀비가 밖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안비, 정녕 아깝지도 않더냐!”

귀비가 숨을 헐떡이며 성을 냈다.

태아가 아깝지도 않더냐! 안비가 정녕 미친 게야? 무려 황자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귀비는 다시 한번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밖으로 나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문밖의 내시들이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서 안간힘을 써 가며 문을 막아섰다. 안에 있던 궁녀들과 내시들도 한꺼번에 귀비에게 몰려가 울며 그녀를 붙잡았다.

“본궁을 가둬 두겠다고? 본궁을 조사하겠다고?”

귀비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두려움이나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만이 존재했다.

“이딴 수작에 누가 넘어가? 누가 믿는다고 이딴 수작을 부리는 게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본궁에게 수를 써? 웃기지도 않는구나! 누가 그걸 믿는다고! 폐하께서는 절대로 믿지 않으실 게다!”

참으로 우습구나, 참으로 우스워!

본궁이 안비의 태아를 노렸다고? 본궁이 황자를 해쳤다고 모함을 해?

분을 참을 수 없어 미칠 노릇이네!

그래, 맞아. 안비가 품은 황자를 해치려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 밤낮 가릴 거 없이 안비가 태아를 잃게 해 달라고 저주를 하기도 했어.

하지만 본궁이 제대로 뭘 하기도 전에, 안비 그 고약한 것이 본궁을 음해해?

고약한 것! 고약한 것!

“태후를 뵈어야겠다! 태후궁의 내시들은 봤을 것이야. 안비 그 고얀 것이 일부러 넘어진 걸 봤을 거라고!”

귀비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마마, 뵐 수 없습니다.”

내시와 궁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귀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삿대질을 하면서 호통쳤다.

“이 멍청한 것들, 이 쓸모없는 것들아! 본궁이 나갈 수 없다고 해서, 네놈들도 나갈 수 없단 말이냐!”

“그게 아니옵니다, 마마. 저희나 바깥에 서 있는 내시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태후궁에는 갈 수 없습니다.”

내시 한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귀비가 흠칫 놀랐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왜? 태후마마께서도 안비를 해쳤다고 하시더냐?”

귀비가 조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게 아니오라, 태후마마께서 상심이 깊어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탓에, 황후마마께서 태후마마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황후마마께서 태후마마의 안정을 위해서 아무도 태후궁에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후궁의 일들은 모두 황후마마께서 관장하겠다고 하셨고요.”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귀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황후?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궁에 들어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후궁의 일을 모두 황후가 관장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

참으로 우습구나, 우스워.

황후가 관장한다고? 병상에 누워 족히 일고여덟 번은 죽었다 살아난 그 황후가?

뭔가 이상한데.

귀비가 고개를 저으면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뭔가 이상해. 분명히 뭔가가.

옆에 서 있던 내시도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황후!

내시는 항상 초췌하던 황후의 몸 상태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호전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황후의 건강이 좋아진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황자를 한 명 더 낳을 것도 아니고, 낳는다 한들 그 어린 황자는 평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갓난아이에게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있어서,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조정 대신들 또한 그 어린 황자에게 큰 기대를 걸 리 만무했다. 설령 황후가 그 갓난아이를 키워 낸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서 내시는 황후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후가 갑자기 황궁 안을 거닐고 다니는 것이, 죽기 직전 잠깐 기력이 살아나는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틀렸다. 황후의 건강이 좋아진 것이 평왕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건 맞지만…….

사실은, 어쩌면, 황후가 노린 사람은 귀비마마였을지도!

황후의 목표는 귀비마마였다.

귀비마마였다고!

난리통인 귀비의 전각과는 반대로, 태후궁은 몹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깊이 잠든 태후가 나지막이 코를 골자, 침상 앞에 꿇어앉아 있던 황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황제가 입을 열면서 고개를 돌리자,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잠든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다소 헝클어진 귀밑머리에 손을 댄 채 잠든 황후의 모습은 더욱 초췌해 보였다.

황제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의 눈가에 황후를 아끼는 애정이 서렸다.

조용히 병상에서만 수년을 보낸 터라, 궁인들뿐 아니라 하마터면 짐도 황후를 잊을 뻔했어. 평화롭고 기쁠 때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지만, 모두가 혼란스럽고 불안해할 때 조용히 위아래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니는 이가 바로 황후라니.

이런 사람들이 있지. 기쁘고 행복할 때는 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다가도, 곤경에 처했을 때, 사람을 일으켜 주고 지지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존재. 그런 사람은 오직 황후뿐이야.

황제가 손을 내밀어서 조심스럽게 황후를 살짝 건드렸다.

“경영, 여기서 자지 마시오.”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황후가 화들짝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폐하, 신첩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황후가 잠든 태후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황제는 그런 황후를 향해 아니라고 손짓했다.

“결례는 무슨. 밤낮을 꼬박 지새운 것을 잘 아는데. 황후도 어서 가서 좀 쉬시오.”

황제가 다정하게 말하자,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럼 신첩은 잠시 쉬러 가겠습니다. 신첩의 몸으로는 더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다른 비빈들처럼 눈물을 비추며 기어코 남겠다고 말하지 않는군.

다들 제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짐과 태후를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데, 황후는 솔직하게 제 몸이 버티지 못한다고 말해.

이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된 모습인가. 이게 바로 진심이라는 게지.

“신첩이 또 앓아눕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어찌합니까.”

황제가 휘장을 내리는 황후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신첩은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태후궁에서 잠시 쉬겠습니다. 여기 있어야 태후마마를 모시기 좋을 것 같아서요.”

황후가 황제를 태후궁 밖으로 배웅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폐하, 안비의 궁에서 잠시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비의 궁이라…….

황제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폐하, 신첩은 다 압니다. 안비가 계속 울기만 하는 바람에 폐하께서도 마냥 듣고만 있기 불편하시다는 걸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안비를 멀리하시는 것도 좋지 아니합니다. 그럼 이렇게 해 보시는 건 어떨지요? 안비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쉬시는 거예요. 그럼 폐하께서 긴말하지 않으셔도, 안비는 충분히 폐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침수에 드셨는데도 폐하를 붙잡고 우는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고요.”

황후가 다정하게 황제의 팔을 끌어안고 말했다.

“신첩은 이럴 때 폐하께서 혼자 계시는 게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사람이 슬플 때는 외로운 게 더 무서워.

황제가 웃으면서 황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후의 손을 토닥였다.

“짐이, 그리하리다.”

황제가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황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폐하, 황성사에게 궁 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해 주세요.”

황제는 조정과 황실에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사고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일이 썩 좋은 일은 아니잖습니까. 괜히 남들이 우리를 비웃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비웃는다고.

이미 몸이 반쯤 무덤에 잠긴 늙은 황제가 새싹을 틔우고 싶어 한다며 비웃고, 노쇠한 몸으로 황자를 얻고 싶어 한다며 비웃겠지.

그럴 줄 알았어. 괜히 기뻐하는 걸 줄 알았다니까. 그 나이 먹고 창피하지도 않나.

사람들이 비웃을 말들을 떠올리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황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 일은 짐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

황후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문가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

“마마, 안으로 들어 잠시 쉬시지요.”

내시 한 명이 공손히 말했다.

황후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됐다. 본궁은 충분히 쉬었느니라.”

“이번에는 내가 잘못 짚은 것 같소.”

진소가 대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녀가 건넨 차를 받아오면서 말했다.

“어떻게 잘못 짚었는데요?”

진소 부인이 묻고는 시녀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자,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전부 밖으로 나갔다.

“폐하께서 이 일로 타격이 크셨을 줄 알았는데, 기분도 괜찮아 보이고, 정신없어 보이지도 않소. 적어도 예전처럼 툭하면 넋을 놓는 상태가 아니셨소.”

진소가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익숙해진 거겠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소를 타박하듯 말했다.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속상한 일은 몇 번을 겪어도 똑같이 속상하죠.”

진소가 자신의 실언을 숨기고자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십팔랑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 황자를 잃은 일은 누군가가 고의로 저지른 것 같다던데요.”

진소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차를 마시던 진소는 부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십팔랑? 십팔랑이 언제 돌아왔소? 그런 허튼소리를 멋대로 하고 다니면 쓰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궁을 드나드는 십팔랑이 어찌 그런 말을.”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혀를 찼다.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이 나한테만 한 말이에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해명했지만, 진소는 곧바로 진십팔랑과 평소에 대화를 나누는 형제자매들을 모두 불러왔다.

“아버지, 제가 왜 허튼소리를 하겠어요. 누구나 다 알 만한 일 아니에요? 배후가 있던 게 아니라면, 황궁의 경계는 왜 갑자기 삼엄해졌으며, 안비, 태후 그리고 귀비마마 세 분은 왜 갑자기 병이 났다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죠? 아버지,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아마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나도 알다마다.

황궁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폐하의 정서가 안정적이었던 이유가, 슬픔을 대신할 게 생겼기 때문이로군.

이건 사고가 아니다. 하늘이 황제를 벌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야.

이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찾아내어 그자를 벌하면, 불안하고 억울하고 화가 난 폐하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겠지. 폐하는 그렇게 해야만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죽은 황자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 또 한 번 아이를 잃은 불행을 직시할 수 있는 게야.

이번 일은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자의 잘못이고, 하늘의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라고.

“그렇다면 이번 일은 폐하께서 끝을 봐야만 끝이 나겠구나.”

진소가 천천히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너무나도 졸렬한 수작이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은 황자의 목숨으로 폐하를 위협하고 귀비마마를 모함했으니까요. 이렇게 심각한 일인데, 어떻게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소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말은, 배후가 안비라는 것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두말할 필요가 있나요?”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게다.”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바보 아니에요?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잖아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물으려던 찰나, 사환 하나가 다급히 진소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진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또 왜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고능준이 폐하께 알현을 청했다고 하오.”

진소가 대답했다.

“고 대인께서 당연히 폐하를 뵈어야지요. 귀비마마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잖아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진소가 웃음 지었다.

“고능준은 귀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기 때문에 황제를 뵈러 가는 것이 아닐 게야. 아마도 이 수작이 너무 빤히 보이기 때문에 가는 거겠지.”

“아버지.”

진십팔랑이 입을 열었지만, 진소는 그녀의 말을 끊고 진소 부인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고.”

진소 부인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이어 갑자기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정 낭자도 그 자리에 불렀소.”

정 낭자!

진십팔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인은 왜 불러요? 이 일도 그 여인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이게 정 낭자와 무슨 관련이 있겠어. 궁에 병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정 낭자를 부른 거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일지는 몰라도, 결국 이 일도 정 낭자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로군.

정말이지…….

진소 부인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손으로 살살 쳤다.

마차에서 내려 궁문을 넘던 고능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황실 금군에게 검문을 받고, 어린 내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정교랑을 발견했다.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을 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이번에 내가 경성에 돌아온 이유는 낭자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이제야 낭자를 보게 되었군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공수의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몸을 살짝 낮추며 답례했다.

“바깥이라 충분히 정중한 예를 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선 낭자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고능준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잘못이 없던 일에 사과할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고능준과 정교랑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내시는 언성을 높이거나 재촉하지 않고 웃으며 완곡하게 말했다.

“고 대인, 정 낭자, 폐하께서 두 분을 기다리십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 다음번에 꼭 댁에 방문하겠습니다.”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두 사람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앞뒤로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금세 근정전 앞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춰 선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고능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 낭자는 황궁 여인들의 병을 봐주러 입궁한 게 아니었나? 왜 여기로 온 거지?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에게 말을 물으려던 찰나, 근정전의 문이 열렸다.

“고 대인,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근정전 안에서 걸어 나온 내시가 예를 표했다. 고능준은 하는 수 없이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폐하를 기다렸다가 같이 내궁으로 가려는 걸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는 정 낭자가 진료하는 것을 직접 봐야 마음을 놓으실 테니.

근정전 안으로 들어선 고능준은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몇 달 만에 돌아온 근정전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야.

망각은 좋은 것이기도 나쁜 일이기도 하지. 원래 세상만사란 이렇게 복과 화가 동시에 오는 법이니, 얼마나 뛰어난 수완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

고능준이 옥좌 위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읍을 했다.

“폐하, 사실 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뻔한 수작에다가, 남을 음해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일인데, 내가 이리 조급하게 황제한테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황제를 욕보이는 것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 궁에서 전해져 오는 소식들이 점점 더 이상해져서 말이야.

귀비는 역시 소문대로 궁에 연금됐고, 황제는 여전히 안비의 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태후는 일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탓에 황궁 소식이 이래저래 끊기게 되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성사 사람들이 아직도 궁 안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닌다는 사실이지. 보아하니, 황제는 이 뻔한 수작을 진지하게 파헤치려는 것이로군.

황제는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를 지극히 아꼈지.

그러나 사실 황자를 아낀다기보다는, 폐하 자신을 아꼈던 것이리라.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는 단순한 황자가 아니라, 황제의 희망이었으니까.

희망은 모두가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황제에게는 더욱 간절한 희망이 있었겠지. 신체 건강하고, 무병장수하는 희망.

지금 벌어진 일은 너무도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인지라, 믿는 구석이 있지 않는 한 절대로 벌일 수 없는 짓이야. 황제의 희망을 철저히 짓밟고, 만천하의 사람들을 장님 취급,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폐하,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시샘과 화를 부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 대인이 실성을 했나?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거야?

황제도 놀란 기색으로 고능준을 내려다보았다.

“고 대인의 말은, 황자가 짐의 잘못으로 변을 당했다는 뜻이오?”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능준은 근정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제는 몹시 침착했다. 그에게서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함이 느껴졌다.

황제가 저리 침착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나는 저토록 냉정한 황제를 보러 온 게 아니야.

내가 보러온 것은 분노하는 황제의 모습이지. 적어도 황제가 분노해야만 생각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으니. 내가 기대했던 모습은 저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남이 설계해 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이 절대 아니라고.

“그럼 안비가 짐의 총애에 기대어, 황자를 저버리고 귀비를 음해했다는 말이오? 안비가 무엇을 위해 그리하지? 귀비를 음해한다고 한들, 안비가 지금보다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나?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들, 황자 없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황자만 살아 있다면, 안비는 궁에서 갖은 영예를 누리며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황자가 없어진 지금, 안비가 앞으로 궁에서 어떻게 지낼지는 그대 같은 궁 밖의 사내보다 더 잘 알지 않겠소!”

황제는 말을 하면 할수록 흥분하여 탁자에 손을 올리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직 부족해.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고 큰절을 올렸다.

“폐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안비가 아무리 귀비와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앞길이나 다름없는 황자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지요. 그래서 이 일이 더욱 수상하다는 겁니다.”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은 태의가 몇 명입니까?”

옆에 서 있던 내시가 경악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 대인이 단단히 미쳤구나!

팍 소리와 함께,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능준, 그 말은 짐이 애초에 황자를 가지지도 못했고, 이 모든 것이 다 안비의 계략이라는 것이더냐?”

황제가 고능준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짐이 이럴 줄 알았어. 꼭 저런 말로 짐을 비웃을 줄 알았다고! 다들 짐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비웃고, 애초에 아들을 가지지도 못할 거라고 비웃을 줄 알았느니!

저 봐라, 저 봐. 이제는 생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내 면전에 와서 저런 말을 지껄이는군.

고능준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신은 그래서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화를 불렀다고 한 것입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上有所好 下必甚焉 - 맹자).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지요. 일부러 허튼수작을 부려 폐하의 눈을 속이는 것이요!”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이고 목청을 높였다.

“폐하, 당시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는 몇 명이며, 누구입니까? 다른 태의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가 몇 명이냐고?

황제가 속으로 잠시 생각을 했다.

몇 명이었지? 한 명이었던 것 같은데.

궁에 있는 비빈들은 회임했을 때 특히 조심하는 편이라, 자신에게 익숙한 태의 하나만을 부를 터. 태의 하나가 맥을 짚고 진단을 내렸다면, 더는 다른 태의로 바꾸지 않았겠지.

“폐하, 태의 몇 명이 그리 말했습니까? 태의국에서는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습니까? 진맥했던 기록은 남아 있는지요?”

고능준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의 물음이 연달아 황제의 고막을 때렸다.

태의 몇 명이었냐고? 한 명이었지.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냐고? 아니, 당시 소식을 듣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따로 검증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어.

설마…….

아니야,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

격노한 황제가 층계를 내려와 고능준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내시들은 이 정도로 진노한 황제를 처음 보는지라, 겁에 질려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헛소린들 뭐 어때?

내가 황제를 보러 온 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죄를 벗기 위함이 아니야. 그거야말로 웃긴 소리지. 귀비의 일은 변명을 할 필요도, 감정에 호소할 필요도 없는데, 죄는 무슨.

나는 단지 황제가 조금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야. 정신을 차리게 하는 김에 의심의 씨앗도 심어놓고.

고능준이 속으로 웃었다. 그는 체통도 잊은 채 삿대질하는 황제를 쳐다보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두려울 게 있겠나? 이렇게 멍청하고, 빤히 보이는 수작 따위를 진지한 일로 만들다니.

황제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니, 정신 좀 차리라고 따끔하게 자극해야지.

아무리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창문과 문도, 격노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과 시위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 낭자는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숨기려나?

내시들이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여전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정교랑의 표정은 내시들보다도 훨씬 더 담담해 보였다.

역시 신선의 제자답네. 천자가 격노하는 소리를 들어도 두려운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다니. 저 여인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재미있네.

정교랑이 속으로 생각하며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신들은 저런 식으로 황제를 대했구나. 저 안에 있는 고 대인도 역사서에 짙은 한 획을 그었지.

황제가 고 대인을 존중해 그를 중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 대인이 황제의 면전에서 황제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황제가 내궁으로 피신하여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황제는 고 대인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현명한 성군과 강직한 충신이라는 미담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지.

사서에 몇 줄로 묘사되어 있던 일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정말 재미있네. 화가 난 황제가 내궁으로 피신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려나.

정교랑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황제가 화를 내며 근정전 밖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내시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긴 회랑을 따라 잰걸음으로 떠나가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안비의 궁.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안비가 시녀의 시중을 받으면서 천천히 약을 먹고 있었다. 내시의 말을 들은 안비가 연신 기침을 했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안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의자에 앉아 있던 황후는 내시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약부터 먹게. 일단 자네의 맥상을 잘 조절해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 대인이 태의국에 있는 모든 태의를 데리고 와서 자네의 맥을 짚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 나는 게야.”

안 그래도 새하얗던 안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약 그릇을 가져와 궁녀가 먹여주기도 전에 사발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던 도중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하던 안비가 몸을 떨며 외쳤다.

“마마, 마마.”

황후가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댄 채 웃으면서 눈을 떴다.

“자네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진안 군왕이 보낸 간식을 먹고 회임했다는 이야기를 할 배짱이 있고, 태의가 태아의 맥이 불안정하다고 했을 때도 황자를 얻었다고 말하고 다닐 배짱도 있잖나. 안비, 자네의 배짱이 그렇게 두둑한데, 이제 와서 무서울 게 뭐 있어?”

안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마마, 마마, 신첩은 배짱이 두둑한 것이 아니오라, 아둔한 것이옵니다.”

“아둔하기는. 아둔하더라도 꼭 살길이 없으란 법은 없네.”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안비가 황후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하온데, 하온데, 폐하께서 의심을…….”

안비가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당연히 의심하시겠지. 폐하께서 제일 잘하시는 게 바로 의심이 아닌가.”

황후가 말했다. 안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마마, 그때 신첩에게 약조하셨지요. 꼭 신첩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요. 신첩은 아직 죽기 싫습니다.”

“시끄럽다.”

황후가 짧게 말했다. 안비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쏟으며 황후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선 당연히 의심하시겠지. 하지만, 우리보다 누군가가 더 빨리 의심을 받을 것이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네.”

황후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본궁의 운이 아주 조금 더 좋았을 뿐이야.”

그리고 때로는, 운이 아주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충분하지.

근정전 안.

고능준 또한 화가 난 채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쳐다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늦기 전에 황제를 알현했다는 것이 몹시 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록 그가 경성에 돌아오게 된 계기가 아들과 정교랑의 터무니없는 혼사 이야기 때문일지라도.

그가 경성이 아니라 부임지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일이 손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그러니까, 그 혼사가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지.

천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욕을 내뱉던 황제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짐이 드디어 알겠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어. 이번 일은 정말로 짐의 잘못이긴 하지.”

황제의 반응에 고능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폐하, 신이 좀 전에는 도가 지나친 말을 했사옵니다. 사실 황자를 잉태했다는 건 죄가 될 수 없…….”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하려던 찰나, 황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너희가 믿는 구석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짐이 이제야 알았다.”

조금 전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인지,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능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지?

갑작스럽게 변한 황제의 태도에 고능준은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왜 갑자기 또 차분해진 거야? 정말 많은 일이 황제의 예상을 벗어났나 보군. 이번 사고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모양이야.

“고 대인, 그대들은 다른 사람들의 추측이 두려운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추측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잖소.”

황제가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옥좌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대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이번 일이 귀비를 음해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투명하게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야. 귀비가 스스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리도 없고.

귀비가 어째서 안비를 해치려 하겠소? 안비가 황자를 회임해서?

황자? 귀비가 황자를 회임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귀비의 황자는 벌써 다 큰 성인이 되어 왕에 봉해졌어. 그런데 안비가 회임했던 황자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태어난다고 한들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예측하기도 힘든 일인데, 어찌 이런 불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귀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안정적인 앞길을 해치는 일을 하겠소?”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고능준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황제의 말투는 어딘가 거슬리고 이상했다.

“영명하시옵니다, 폐하.”

고능준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황제가 옥좌에 등을 기대면서 고능준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그러하겠지. 절대로 귀비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을 게야. 이 일은 단순한 사고이거나, 애초에 안비가 귀비에게 앙심을 품고 계략을 짠 것이라고 말이야.”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귀비에게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게야. 설령 귀비가 이런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도 귀비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고능준은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황제의 머리가 정말로 어떻게 된 것이 맞군! 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어! 머리를 쓰기는 했는데, 아주 어리석은 쪽으로 머리를 썼어!

의심의 씨앗을 뿌리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의심을 하라고 한 건 아니었다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생각하기도 힘들 터인데!

“폐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범인이고, 모든 사람이 남을 해치는 자들입니다.”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홀판을 든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목청을 높이고 말을 이어갔다.

“폐하, 지금 도끼를 잃었다고 이웃을 의심하는 마음을 품을 때가 아닙니다! 폐하, 어찌 사적인 의심을 품는 동시에 공정하게 이 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귀비가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위치에 있기에 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안비라고 해서 그리 못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말장난처럼 이리저리 둘러대는 게 참으로 엉망이구나!

“짐이 잘 알겠소.”

황제가 고능준을 향해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능준의 말을 듣고도 격노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짐은 그대의 뜻을 잘 알겠으나, 이번 일은 다른 때와는 다르오.

고 대인, 이번 일은 당연히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의도가 너무도 빤히 보이니 그 졸렬함이 극에 치달은 일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많은 사람이 모르고, 짐도 몰랐던 일이지만, 오직 귀비만 알고 있던 일이 있소.”

뭐라고?

고능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 대인도 그 일을 알고 있었는지, 짐은 모르겠구려.”

“폐하!”

고능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고능준, 월식이 있기 전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것을 알고 있소?”

뭐라고?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태백 천상?

머릿속을 정리하던 고능준은 근정전에 들어서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고능준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가를 쳐다보았다.

그 여인! 그 여인은 후궁 비빈들의 병을 봐주러 온 것이 아니었어!

“태백성이 나타나 월식과 만나면, 태자가 위태로워지지.”

황제의 목소리가 고능준의 귓가에 전해졌다.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고능준이 몸을 살짝 떨었다.

“폐하,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

“정씨를 들라 하여라.”

황제가 고능준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내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근정전의 문을 열자, 정교랑이 천천히 근정전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정씨, 짐이 그대를 부른 건 물어볼 것이 있어서다.”

황제가 예를 표하고 있던 정교랑에게 곧바로 물어보았다.

“지난해 섣달 보름이 되기 전,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는가?”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고능준은 할 말을 잃은 채 한쪽에 잠자코 서서 황제와 정교랑의 문답을 지켜보았다.

“그럼, 태백성이 나타나 월식과 만나면 태자가 위험해진다는 게 사실인가?”

황제가 이어서 물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태백성이 등장하고, 객성(客星: 혜성, 신성 등)이 구진(勾陳: 작은곰자리)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나는가?”

황제가 다시 물었다.

고능준은 황제의 앞선 두 마디를 들을 때까지 크게 와닿는 것이 없었으나, 황제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몹시도 귀에 익은 말이구나.

태조가 등극하던 해, 태사국의 천상도(天象圖)에 태백성이 보였다. 진(秦) 지역에서는 이를 진왕이 천하를 갖게 될 징조로 여겼고, 실제로 진왕은 훗날 형제들을 제치고 천하를 손에 쥐게 되었다.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다니.

고능준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나도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 귀비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고능준의 귓가에 담담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능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 대인, 이제 알겠소?”

고능준이 가볍게 탄식했다.

“폐하, 신은 모르겠습니다.”

고능준이 정교랑을 흘깃 쳐다보았다.

“박학다식한 고 대인이 어찌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오?”

황제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폐하, 물론 태백성에 관해서는 알겠습니다. 다만, 조정에 사천대와 태사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어찌 왜 조정 관리들에게 이를 묻지 않고 정 낭자에게 하문하시는지요?”

고능준의 말이 끝나자, 정교랑이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 대인의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정교랑이 속으로 생각했다.

고 대인이 던진 질문을, 황제라고 던지지 않았을까. 설마 황제가 정말로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제가 내게 묻는 것은, 단지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일 뿐인데.

증명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다른 누군가가 이 얘기를 했다는 뜻이지.

보아하니, 사서에 기록된 고 대인에 관한 내용이 정확한 건 아닌가 보네. 황제를 도망치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아닌 것으로 보여.

뭐, 그럴 수 있지. 사서도 결국 사람이 쓴 것일 테니, 기록한 자의 편애와 감정이 섞이기 마련이니까. 사실과 다르게 누군가를 미화하거나, 누군가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 사서라고 해도 다 믿을 게 못 되네.

황제가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짐도 잘 알고 있소.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말일 뿐이고,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아무 말이나 귀담아듣거나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짐은 사천대의 말을 들어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어 그 말을 증명해 줄 정 낭자를 부른 것이오.”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그럴 리가 없어!

사천대에서 태백성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나 고능준이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단 말이야! 사천대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내게 숨길 리가 없어! 심지어 이렇게 오랫동안 숨겼을 리는 더욱 없다고! 작년의 일, 무려 작년의 일이라니.

“사천대 제거 등을 들라 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고능준의 귓가에 차례로 들려왔다.

역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어. 또, 또 이런 느낌이야.

이 느낌은 처음이 아니지. 지난해 월식 때도 그랬어. 원래 월식 사건을 빌미로 진소를 조정에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도리어 진소가 무평 설해(雪害)를 빌미로 나를 조정에서 내쫓았지.

무평 설해.

수하가 내게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소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무평 설해 말이다.

이번에도 똑같아. 태백성이 나타났다는 것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니.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걸 내게 숨겨서 뭐에 쓴다고?

이 일은 무평 설해처럼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는데, 왜 내게 숨기고, 황제에게 숨겼던 거야? 지금 와서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신 곽원은…….”

근정전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자, 고능준은 생각을 접고 정신을 차렸다. 근정전 안에는 세 사람 외에도 사천대 관리들 몇 명이 서 있었다.

곽원. 예전에 목숨 걸고 월식을 보았다고 했던 그자로군.

태백성에 대해서도 저자가 말했나?

고능준이 예를 올리고 있던 곽원을 쳐다보았다.

저자라면, 목숨 걸고 월식을 알렸던 공로가 있으니 황제는 저자의 말을 몹시 신뢰할 것이야.

“신이 그때 태백성을 보긴 하였으나, 잘못 본 줄로 알았기에 감히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 당시 곽원이 태백성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으나, 신을 포함한 다른 관리들은 태백성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어 월식 예측 날짜가 다가오기에, 월식에만 집중하느라 태백성을 잊고 있었습니다.”

“태백성에 대해 논의한 적은 없었지만, 신들이 곽원이 했던 말을 기록하여 기밀로 보관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기밀이 새어 나가게 되어…….”

어찌 된 일인지 그 기밀이 새어 나가게 되어?

고능준이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당연히 누군가가 고의로 그 말을 퍼트린 거겠지!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오랫동안 그 이야기를 홀로 간직하고 있다가 시기적절할 때 퍼트린 것일 수도 있겠군. 시기적절할 때라면, 당연히 내가 경성을 떠났을 때겠지.

마치 큰 깨우침을 얻은 사람처럼, 고능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폐하, 그 천문 현상에 관해서는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능준이 눈 딱 감고 이를 악물며 말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태자가 없다고? 태자가 없었어? 그대들의 눈과 마음은 벌써 평왕을 유일한 태자로 모시지 않았는가?”

“폐하께서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태자 책봉을 명하지 않으셨으니, 평왕은 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절대 마음속으로도 평왕을 태자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능준의 말에 황제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좋아. 그대의 말이 맞소. 짐이 태자를 책봉하겠노라 만천하에 공표하지 않았으니, 아직 태자가 없는 건 맞지. 그 말은 곧, 누구나 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테고.”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고능준을 내려다보았다.

“태백성이 등장하고, 객성이 구진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난다 했소.

이는 태백성을 품은 안비의 황자가 나타났으니, 아직 확정되지 않은 태자 평왕이 위태로워진다는 뜻일 수 있지. 또 안비의 용종이 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 어떤 의미에선 용종을 사산한 게 태자가 위태로워진다는 뜻일 수도 있소.

어떻게 보든 간에 태자가 위험해진다는 건 사실이오.

고 대인, 짐이 다시 묻겠소. 안비가 겪은 사고가 아직도 사소하고 멍청한 수작으로 보이시오?”

이게 어딜 봐서 멍청한 수작입니까! 이건 누가 보아도 아주 치밀하게 짠 판이 아닙니까!

고능준이 손에 쥔 홀판을 부러트릴 기세로 세게 쥐었다.

참으로 대단한 판이로구나!

황궁의 경계가 아무리 삼엄해도 황궁 안의 소식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비빈이 사고로 황자를 잃었다는 소식이 아니었다. 비빈이 황자를 잃게 된 게 사고가 아니라 황제를 두고 투기하는 후궁 비빈들의 계략이라고 해도, 그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을 것이다. 굳이 황궁이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경성의 권문세가라면 다들 한 번쯤 겪어 봤을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 현상에 관한 참언(讖言: 앞일에 대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말)이 연관된 일이라면, 백성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신선과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태백성이 나타나고, 객성이 구진 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난다는 말은 백성들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 말은 황궁에 있는 황자가 천하의 군주가 될 것이라는 뜻인데, 지금 황궁엔 황자가 둘이잖소. 둘 중 누가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다는 거지?”

“예전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평왕 전하가 되겠지.”

작년 천문 현상이 가리킨 태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황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맞소, 맞아. 그리고 예전에 했던 그 말과도 딱 들어맞잖아. 월식이 있는 날, 태백성이 보이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고.”

“그러면 도대체 누가 태자라는 거요?”

“거 아둔하기는. 당연히 위태로워진 황자가 태자인 셈이지.”

“아, 그럼 안비가 잃은 그 황자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태자였다는 말이오?”

“그야 당연하지. 그게 아니고서야 귀비가 다급해질 이유가 뭐 있겠소? 안비가 낳을 황자가 하늘이 점지한 태자라는데, 평왕이 어떻게 태자가 되누?”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찻집과 식당 사이를 비집고 이 층에 있는 별실까지 흘러들어왔다. 별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천상, 참언 같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황제가 고씨 가문에 대한 총애를 조금 거두려고 하는가 보오.”

“거둘 때가 되긴 했지.”

그 자리에는 고씨 가문의 처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조하며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혀를 차면서 불만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 뭐하나?”

손에 술잔을 쥐고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고씨 가문의 세력은 그 집 사람이 다 죽어야만 잠잠해질 것이야. 푸르른 산이 있는데, 어찌 땔감 걱정을 하겠나? 잊지 말게. 이제 폐하께 남은 황자는 평왕뿐이야.”

그렇지. 이제 황제에게는, 오직 평왕밖에 남지 않았어.

고씨 가문의 서재 안.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같은 말을 뱉어냈다.

“그래, 우리 고씨 가문이 무서울 게 뭐 있다고!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죽은 황자의 목숨값으로 평왕을 죽이겠다 해도, 어디 우리 고씨 가문이 눈 하나 깜짝할 줄 알고!”

고 관인의 굵직한 목이 오늘따라 유난히 비대해 보였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고능준이 고 관인을 흘겨보았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는 늘어놔서 뭐 하느냐?”

“욕이라도 해서 화풀이라도 하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다고요! 이게 지금 다 무슨 일이랍니까?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냔 말입니다. 아버지, 황제의 총기는 이제 기운이 다한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런 어리석은 일을!”

고 관인이 씩씩대면서 화를 냈다.

“황제가 어리석은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바둑판을 잘 짜 둔 사람이 고명하다고 할 수밖에.”

고능준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말하면서 가끔 다리를 주무르는 것뿐이었다. 어제 반나절 내내 근정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아버지, 어제 그러지 마셨어야 합니다. 왜 아버지께서 무릎을 꿇으신 겁니까. 아버지께서 무릎을 꿇으시면, 귀비마마가 정말로 이 일을 꾸몄고,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고 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외쳤다.

“허튼소리. 그 일과 내가 무릎을 꿇는 것이 무슨 상관이더냐?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이것아. 그리고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에서 꿇은 것이야.”

내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무릎 꿇고 사직을 청하거나, 죄를 뉘우치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말했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황제가 그 말을 내게 물은 순간, 나는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우고,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후로는 황제가 내게 무슨 말을 묻든 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 황제가 들을 생각이 없다면, 나 또한 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말이야.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천상 참언 따위를 믿고 귀비가 황자를 해쳤다고 몰아세워?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다고!

“황성사 사람들이 귀비마마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껏 황성사의 조사를 버텨낸 자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작정하고 조사한다면…….”

막료가 머뭇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갓난아기도 아니고, 수십 년을 산 사람들인데 털다 보면 어찌 먼지가 안 나올까.

게다가 귀비마마께서는 이미…….

“조사? 안비의 황자를 해쳤다는 죄목도 마음대로 씌울 수 있는 판국에, 다른 죄목이라고 못 씌울까? 황성사에서 뭘 조사해 내든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할 셈인가?”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그럼 마마께서 뭘 해야 할까요?”

막료가 물었다.

여인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자주 쓰는 수법 같은 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화를 낸다거나, 통곡한다거나, 자해한다거나.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귀신이 문을 두드린다고 무서워할쏘냐?”

고능준의 말을 들은 방 안의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좀…….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으로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평왕! 평왕! 평왕이 있는데 귀비마마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고능준이 답답하다는 듯이 탁자를 내리쳤다.

“가서 귀비마마께 말을 전하거라. 우리 고씨 가문은 이깟 일로 겁먹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지금 무슨 말을 듣더라도 절대로 고개 숙여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신분을 잘 기억하라고 하여라.”

사환 한 명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빠르게 방을 나갔다.

“그럼 평왕은 뭘 해야 합니까? 귀비를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라고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고 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하지만 고능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 일은 평왕과는 무관한 일이니, 귀비를 대신해서 억울함을 호소해서는 안 되지. 폐하는 평왕의 부친이고, 귀비는 생모야.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어. 지금 평왕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은 오직 효도뿐이다.”

막료가 고능준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가 잘못을 인정해서도 안 되고, 우리도 죄를 인정해서는 안 되지만, 자녀들이라면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하지요. 부모 간의 불화가 생겼을 때, 자식 된 도리로서 속상하다고 자책하는 것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평왕이 뭘 하면 되는 거요?”

막료의 말을 듣던 고 관인이 성가시다는 투로 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속상한지 설명하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문책을 받겠다는 상소문을 써야지.”

고능준의 대답에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까지…….”

“뭘 그렇게까지? 자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네놈은 뭐 그리 불만이 많아! 언젠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네놈은 날 위해서 무릎 한 번 꿇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내 일은 너와 무관한 일인 게야?”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고 관인에게 호통쳤다. 고 관인이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건 별개의 일이지요.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저주하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고능준이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 관인을 흘겨보았다.

“네놈이 불러온 화로도 충분하다. 나 스스로 저주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재수가 없으니까.”

제가 불러온 화라뇨. 이건 다 그 몹쓸 정가 계집 때문인데.

그때 덕승루에서 그 계집을 죽였어야 했어. 괜히 살려 둬서 아버지한테 꾸중만 듣고.

고 관인은 다시 한번 후회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이 벌어진 것은 다 폐하 때문입니다. 일찍이 평왕을 태자로 책봉하셨더라면 괜히 다른 사람들이 딴생각을 품을 수도 없었을 텐데.”

고 관인이 재빨리 화제를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폐하께서 확실히 딴생각을 품으신 것 같습니다.”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나간 일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이제 황제는 그런 생각을 품을 여지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평왕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황제가 또 무슨 딴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번 일도 무사히 지나가겠지요?”

고 관인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평왕에게는 별 영향이 없겠으나, 우리 고씨 가문에는 타격이 있을 듯합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이미 많은 조정 대신이 대인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대인께서는 지금 폐하와 대립하고 계신 상태인지라, 폐하께서도 이번 기회를 빌미로 대인의 기세를 꺾으려 들 테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저희에게 오는 타격이 클 듯한데…….”

막료가 말했다.

맞는 말이야. 지금 당장은 황제가 문제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어디든 분출할 곳이 있어야 할 텐데. 귀비가 아니라…….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음해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그야 간단하지. 이번 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가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다.”

고 관인이 멈칫했다.

“그러기엔 적이 너무 많은데요?”

설마, 조정의 문무백관 중 절반이 이번 일에 가담했다? 그건 말도 안 돼. 이렇게 판이 커질 때까지 우리 고씨 가문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

그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누군가가 혼자서 벌인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세 사람 이상이 합심한 일이라면 나 고능준이 몰랐을 리가 없어. 더 나아가서 무리를 지어 손을 맞잡고 나를 해하려고 했다면, 내가 진작에 어떻게든 눈치챘겠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모함인데, 황제가 범인이 귀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태사국에서 태백성의 일을 숨겼던 것.

황제의 말에 따르면, 귀비가 비밀리에 태사국 사람과 내통하여 기밀 정보인 태백성에 관해 알아냈고, 일부러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라고 했다.

태백성이라…….

사천대 관리들이 근정전에서 했던 말은 믿을 만해. 그들 실력으로 태백성을 발견했을 리가 없고, 발견했다고 한들 그걸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놈들, 멍청하긴 해도 신중한 편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사천대가 생긴 지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월식에 관해 목숨 걸고 얘기하는 자가 곽원 하나뿐일 리 있겠나.

월식.

정 낭자.

천문 현상.

이미 알아봤는데, 그 학생 혼자 한 일이라더군요. 사천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그래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나 봅니다.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불러 하문하려 하셨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진안 군왕한테 가서 물어보라 하셨고요.

아마 정 낭자도 월식이 있을 거라 했겠죠. 그러니 폐하께서 그 곽원이라는 학생의 청을 응낙하신 겁니다.

고능준의 귓가에 아득하게 맴돌던 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폐하께서 정 낭자를 부르시려고 한 게 이 때문이었군.”

고능준이 작년에 막료의 말을 듣고 내뱉었던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렸다.

생각지도 못했구나.

작년에 했던 말을 지금 다시 하는 것임에도, 이리도 딱 떨어질 수가 있다니.

“큰일 났다.”

진십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시녀 둘이 화들짝 놀랐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진십삼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진십삼은 시녀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문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린 후였다.

“공자님, 공자님, 겉옷 챙기셔야죠!”

시녀들이 다급하게 비단 겉옷을 챙겨 들고 진십삼의 뒤를 쫓아갔다.

진십삼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시녀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공자님이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시녀가 웃었다. 진십삼이 시녀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네 생각인 게냐, 네 아씨의 생각인 게냐?”

“당연히 제 생각이죠.”

시녀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서 네가 네 아씨를 능가할 수 없는 게다.”

진십삼이 고개를 젓고는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가 진십삼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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