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60)

-일생일대의 중요한-

“이제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씨 저택의 대청 안에 앉은 정 대노야가 물었다. 그는 오늘 정교랑을 만나러 왔지만, 정교랑이 경왕부에 간 탓에 여기서 정교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서 정말로 중매쟁이를 보냈다는 말이오?”

주 노야가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도 모자라서 이젠 중매쟁이까지 보낸다? 고씨 가문은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군.

“중매쟁이까지 보낼 정도라면, 우리 아예 육낭과 교교의 혼사를 치릅시다.”

주 노야가 비장하게 말했다. 정 대노야가 주 노야를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더는 여기 경성에 남아 있기 힘들겠구려.”

“그럴 리가 있나. 고작 이런 황당한 일로 폐하께서 우리를 쫓아내시기라도 할까? 아직 어린 자식들이 벌인 황당한 일이잖소, 다들 젊을 때 한 번씩 풍류를 즐긴 때가 있는 것을. 게다가 사적인 일을 조당에까지 끌고 갈 수는 없는 법이지. 폐하께서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시는 분은 아닐 거요.”

주 노야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자 정 대노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은 틀렸소.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건 폐하가 아니라, 평왕이오.”

평왕?

주 노야가 흠칫 놀랐다.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정 대노야가 말했다.

아 참, 그게 평왕이었지!

이번 일은 황제와 무관했다. 정씨와 고씨 가문이 인연을 맺든 원수를 지든, 황제는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황제는 나이가 있어 언젠가는 옥좌에서 내려올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태후와 연관이 있는 일이고, 이번 혼담의 성사 여부는 태후의 체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사실 주 부인이 울며 황궁 밖으로 나왔던 때부터 이미 태후의 체면은 많이 깎인 상태였다. 하지만 태후는 어쨌거나 태후였다. 황제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 황궁 여인의 입김이 조당을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평왕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평왕은 유일한 황태자 후보이며, 훗날 제위에 오르면 꽤 오랜 시간 황제로 지낼 것이다. 그러니 평왕의 감정은 오랫동안 조당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는 자연스럽게 평왕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줄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이 일을 해결하는 건 쉽지만, 우리 주씨 가문의 미래를 대가로 맞바꿔야겠지.

“그래서 교교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던 건가.”

주 노야가 겸연쩍은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 대노야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주 노야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이러니까 다들 천둥소리는 커도 빗방울은 작다고 얘기하지. 온갖 큰소리는 떵떵 쳐놓고, 지금 와서 겁을 내시오? 외숙이라 성씨가 달라서 그런지, 영 못 미덥군.”

주 노야는 절대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대노야 못지않은 기세로 소리쳤다.

“어이, 정씨, 지금 누가 겁낸다는 겐가? 이게 다 자네 아들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니야! 자네 아들 일에 괜히 우리 교교까지 휘말리게 해 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드디어 싸우네. 이래야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답지.

문밖에 서 있던 여종과 몸종들이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정교랑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팽팽한 기 싸움을 멈췄다.

“교교.”

정 대노야와 주 노야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문가에 서 있는 정교랑을 보고, 주 노야가 한발 먼저 정교랑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 노야의 이런 치사한 행동에도 정 대노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교교에게 잘 대해 주고 말고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 누구 목청이 더 큰가를 비교하는 게 아니야.

“네 혼사니,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만 해 다오. 나는 전적으로 네 뜻을 따르마.”

주 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짧게 네, 하고 대꾸하고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정교랑이 말하고는 정 대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백부님이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간다고?

지금 정씨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나무아미타불, 드디어 가는구나.”

정교랑이 주씨 저택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주 부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경을 읊고는 합장했다.

“왜 갑자기 돌아간다고 하는 거지?”

여종 한 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 부인은 정교랑이 왜 떠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정교랑이 자신과 한 지붕 아래서 살지 않게 됐다는 것, 더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됐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쁠 뿐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정 이노야가 아직 집에 있을 텐데. 백부인 정 대노야가 가둬 두었다고는 하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 부모가 갇혀 있는 것을 보기 힘들어 돌아가는 게 아닐까?”

다른 여종이 의아하기도, 궁금하기도 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아니면, 혼사 때문에 돌아가는 거 아니야? 좀 전에 노야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이번 일은 무조건 혼사로 맞대응을 해야 한다던데.”

여종 중 한 명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럼 누구한테 시집가는 거야?”

여종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옆에서 불경을 읊던 주 부인도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당연히 우리 육공자님이지.”

여종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고, 내 아들아! 내가 결국 너를 제물로 바치게 되었구나!

주 부인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술 주전자를 찾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에 술을 조금 따른 뒤, 고개를 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술을 한 잔 들이켜자, 주 부인은 갑자기 온몸이 편안해지면서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술은 정교랑이 직접 빚어 주 부인에게 선물했던 술이었다.

술은 좋은 술이다만, 술만 있고 그 여인은 눈앞에 없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교랑, 방법이 떠오른 거냐?”

집으로 돌아간 뒤, 정 대노야가 정교랑에게 물었다.

“말만 해 다오. 누구에게 시집가고 싶으냐?”

주씨 그놈은 분명히 겁을 먹은 게야. 그러니 절대로 먼저 혼담을 넣으러 오지 않을 테지.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어. 그놈이 먼저 혼담을 꺼내지 않아도 교랑이 먼저 그 혼사를 원한다고 말만 한다면, 멱살을 잡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 혼사를 성사시킬 테다.

교랑의 어미가 죽었던 그해에, 우리가 반격할 힘이 없어서 고스란히 맞기만 한 줄 알아? 목숨 걸고 싸운다면, 우리도 두려울 게 없어!

하지만 교랑이 정말로 고씨 가문에 시집가겠다고 하다면, 그것 또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중매쟁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고 대인은 진지하게 이번 혼사를 생각하는 것 같더군. 본인이 경성에 도착하면 꼭 직접 와서 인사를 하고 상세한 내용을 논의하자고 할 정도이니. 고씨 가문이 이대로 자세를 낮추고 교랑을 데려간다면, 아예 만회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야.

물론 모든 건 교랑의 의지에 달렸지. 교랑이 이 혼사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줏대 없는 인간이라 비웃더라도 고씨 가문과 화기애애하게 혼담을 주고받을 거야.

“누구에게 시집갈지는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우선 지금은 당장 백부님께서 제 아버지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강주로 돌아가라고?

예상치도 못했던 정교랑의 말에 정 대노야는 생각을 멈추고 잠시 넋을 놓았다.

지금 당장?

“경성에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강주로 돌아가세요.”

하긴, 경성에 있으면 누구든 혼담을 넣으러 오겠다고 쉽게 찾아올 수 있어. 문을 막는다 해서 혼담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강주로 돌아간다면, 혼담을 넣으러 오가는 거리 때문에 시간을 꽤 오래 끌 수 있을 거야.

맞아. 이런 일에는 시간을 끄는 게 상책이지. 난 왜 이런 간단한 생각조차 못 했을까.

“무거운 일일수록 가볍게 처리하는 게로구나.”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감탄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며 정 대노야의 감탄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어떻게 강주로 돌아갈지는 백부님께서 방법을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정 대노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아주 간단하지.”

정 대노야가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을 덧붙였다.

“고능준 대인을 따라 하면 돼.”

4월 말, 대리시 판관 정동이 상소를 올렸다. 강주에 계신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동이 대리시 관아에 앉아 있던 일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사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며칠이 늦어졌고, 곧이어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를 별적이재 죄목으로 관아에 고소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드디어 송사가 끝났다 했더니, 병이 나서 며칠 동안 집에서 쉬겠다고 했고, 이제는 모친이 위중하여 강주로 돌아가게 생겼다.

“부인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다가, 이제는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시간 끄는 일에 재미가 제대로 들렸군.”

관리 하나가 상소문을 슬쩍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고향으로 보내줘야 할까요, 보내지 말아야 할까요? 정 이노야가 경성에 들어오게 된 건 고 대인 덕인데, 지금 이자를 보내 주면 나중에 고 대인께 어찌 설명해야 할지.”

다른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상소문을 슬쩍 쳐다보던 관리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럼 어쩌겠나? 모친이 위중하다는데, 우리가 그를 붙잡고 늘어질 수라도 있어? 고 대인도 똑같은 이유로 경성에 돌아오시는 건데, 정동이라고 못할 건 또 뭔가? 이 일은 우리가 붙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야. 진 상공께서도 이미 동의하신 일이고.”

상소문에 큼직하게 찍힌 중서문하성의 붉은 인장이 다른 관리의 눈에 뒤늦게 들어왔다.

“질질 끌려면 끌라지. 시간을 늦출 수 있는 건 잠시뿐, 평생이 아니야. 강주가 아무리 멀다 해도, 빠른 말로 달리면 열흘 만에 도착하는 곳이지.”

마차 행렬이 떠났는데도 정사낭은 여전히 자리에 서서 마차 행렬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교교, 너도 지금 같이 강주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지금 돌아간다 한들, 네게 뭐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

주 노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요. 부탁을 받은 일인데,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되죠.”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이 떠나지 않은 탓에, 아직 손목을 치료해야 하는 정사낭도 경성에 남기로 했다.

“누이, 이번 일은 많이 어려운 일이야?”

돌아오는 길 내내 침묵을 지키던 정사낭이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물었다.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뒤, 정사낭은 계속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했다. 그가 먼저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때의 일이 응어리처럼 맺혀 있었다.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오지 않았을 거라고 정사낭은 생각했다.

정교랑이 정사낭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지었다.

“사실, 다들 공연한 걱정을 하는 거라니까요. 이번 일은 정말 사소한 일일 뿐인데.”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고 관인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정교랑은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 누이 눈에는 어떤 일이 큰일인데?”

정사낭이 물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일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정사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문 현상 말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일식과 월식 말이야? 그건 다들 말했잖아. 흉조가 들어맞아 민란과 재해도 있었고.”

정사낭의 대답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른 천문 현상이 더 있었어요.”

정사낭이 흠칫 놀랐다.

일식과 월식 외에 또 다른 천문 현상이 있었다고? 그게 뭐지? 왜 나는 몰랐지?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일을 발설하는 자가 없어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그건, 그 천문 현상이 정말 사소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곧 큰일로 번질 거라는 뜻이죠.”

5월 초, 경성의 날씨는 이미 무더웠다. 아직 찌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고씨 가문의 서재에는 벌써 얼음물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 먼 길을 달려온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낸 고능준은 시원한 얼음물 덕분에 냉기가 더해진 서재 안의 공기에 편안함을 느꼈다. 몸은 시원하고 편안했지만, 마음은 화가 나고 초조하기만 했다.

“멍청한 것! 어찌 정 이노야를 강주로 보낸 게냐!”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대인,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하 몇 명이 쭈뼛쭈뼛 말했다.

“진 상공이 통과시킨 안건입니다. 늘 아버지와 대립하였고, 애초에 정동이 경성으로 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던 인물이지요. 아마 진작부터 정동을 경성 밖으로 내쫓고 싶었을 겁니다.”

고 관인이 옆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경성 밖으로 내쫓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더냐? 그렇다고 해서 죄다 경성 밖으로 내쫓을 수 있어? 내가 네놈들을 여기 남겨 둔 이유가 뭔데!”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정말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이유가 대인의 이유와 똑같았잖습니까. 모친이 위독하다고요. 만약 저희가 다른 방법을 동원해 정동을 경성에 붙잡아 두었다면, 진소 등에게 대인을 공격할 칼자루를 쥐여주는 셈이라, 저희는 대인께서 난처한 상황에 놓이실까 봐…….”

“내가 난처해? 그놈이 나를 공격하면 내 당연히 백방으로 방법을 강구하여 그자를 막아냈겠지. 다들 이렇게 앞뒤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정동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게로군.”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아버지, 정동이 경성을 떠났다고 해서 바뀔 건 없습니다. 저희가 강주로 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정동 그자한테 어디 도망갈 배짱이나 있겠습니까.”

고 관인이 말했다.

정 이노야의 존재는 단순히 혼사를 논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너희 눈에는 오로지 혼사밖에 없지? 그깟 혼사가 무슨 대수라고!”

고능준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이 어딜 봐서 평범한 여인네들처럼 혼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여인으로 보이더냐. 정녕 혼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왜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가문과 혼사를 올리지 않았겠어!

관두자.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이 아니면 꼭 이렇게 구멍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지금 일이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일단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겠다.

“여봐라. 내 명첩을 정 낭자에게 보내거라. 내 직접 정 낭자를 보러 갈 것이야.”

고능준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직접 그 여인을 보러 가시려는 겁니까? 그깟 여인이 무슨 자격으로…….”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던 중, 고능준이 그의 말을 끊었다.

“네놈보단 자격이 충분하니라!”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명첩을 내던지자 깜짝 놀란 고 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환이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명첩을 들고 문밖으로 물러갔다.

고능준이 경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에 퍼졌다. 그리고 그의 사환이 정교랑을 찾아갔다는 소식도 곳곳에 포진한 밀정들에게 빠짐없이 포착되었다.

“고 대인이 그의 아들놈보다 훨씬 말재주가 좋긴 하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들 어쩌겠습니까. 정 낭자가 고능준에게 시집갈 것도 아니고!”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실소를 터트렸다.

“헛소리 마라.”

진 노태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진소를 꾸짖었다. 진소가 진 노태야에게 결례를 보였다고 가볍게 예를 표한 뒤,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고 관인이 아직도 이렇게 나오는 것은 명백한 보복입니다. 이런 식으로 혼사를 맺어 봤자, 고능준이 아무리 빈틈없이 일을 진행한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죠. 고능준이 그 둘을 평생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혼사를 치른 뒤 정 낭자가 겪을 고생길이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정 낭자가 바보도 아니고, 어찌 교활한 고능준의 말 몇 마디만 듣고 이 혼사에 응하겠냐는 말입니다.”

진 노태야가 부채를 흔들면서 웃었다.

“다른 여인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정 낭자라면 고생길이 훤히 보이든 말든 별로 대수로이 여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여인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를 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이야.”

진 노태야가 부채를 천천히 흔들면서 말했다.

같은 시간, 진호는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아. 그 여인은 항상 예상치도 못한 결정을 내리곤 하지. 고 대인이 그 여인을 설득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진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 낭자가 고 대인의 설득에 넘어간다면, 필경 혼사를 치르게 될 터.

혼사라…….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십삼.”

진 부인의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머니, 소자가 지금 당장 급히 나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 이리 와 보거라. 네게 물을 게 있어서 그래.”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진호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하자, 진호는 차마 진 부인을 외면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어머니?”

“어딜 가는 게냐?”

진 부인이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채로 묻자,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어머니, 소자는 소자가 가고 싶은 곳을 갑니다.”

진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기도 하고?”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호를 몇 걸음 따라가며 말했다.

“십삼, 때로 어떤 일은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단다. 꼭 말로 해야만 할 때가 있어.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지 않니?”

진호는 진 부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서둘러 말을 타고 저택을 떠나갔다.

“애한테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십삼도 이미 다 컸소. 벌써 관직에 있는 몸이니, 자꾸 실없는 소리로 아이를 놀리지 마시오.”

진 시강이 방 안에서 걸어 나오며 진 부인을 다정하게 나무랐다. 그러자 진 부인은 부채를 흔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크긴 뭘 커요? 정말 다 컸다면, 마음에 둔 사람을 벌써 품에 안았겠죠. 이런 점은 제 아비를 하나도 닮지 않았네.”

진 부인이 부채로 반쪽 얼굴을 가린 채, 진 시강을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진 시강은 일부러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뒷짐을 지었다. 주위에 있던 여종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며 몰래 웃었다.

진 시강 내외는 잠시 환담을 나누고 방을 나섰다. 이때, 여종이 주복이 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육낭, 십삼은 좀 전에 급히 나가던데.”

진 부인이 정중하게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는 주복에게 웃으면서 말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 진사가 되어 관직을 얻은 후로는 접대도 잦고 말이야.”

“네.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저도 군에서 그랬습니다.”

주복이 대답하고는 다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말을 타고 떠나는 주복을 바라보던 진 시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진 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 뭐하러 애를 속이는 거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주씨 가문의 저 녀석이 미인을 얻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럼 우리 십삼은 어떡해요.”

진 부인의 대꾸에 진 시강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소인배의 마음이오.”

“자식 혼사 일에 사내대장부고 뭐고 따질 필요 있나요. 어차피 공평한 싸움이 아니니,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겠죠.”

진 부인이 웃으면 말하자, 진 시강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당신이 이러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당신은 지금 사람의 힘으로 인연을 맺으려는 거잖소.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하고는 싱긋 웃었다.

“십삼이 나에게 온 것 자체가 하늘의 뜻이니까요.”

주복이 다소 쓸쓸해 보이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가 온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거의 도망치다시피 경성을 떠나자, 정교랑의 혼사 이야기는 금세 잊혀진 듯했다.

지금 경성의 저잣거리를 뜨겁게 달구는 주제는 진안 군왕이 홀로 산적의 산채에 들어갔으나 신선의 보호를 받아 악당들을 단번에 물리쳤다는 이야기여서, 고 관인과 정씨 가문 사이의 혼사 이야기는 지나간 일처럼 아무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경성은 그런 곳이었다. 새롭고 신선한 일들이 매일 넘쳐나고, 아무리 시끌벅적한 사건이라도 눈 깜빡할 새에 잊히는 곳.

“아버지, 그 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복이 대청 안에서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며 시녀의 노랫소리를 감상하던 주 노야를 보며 말했다.

“어떤 일 말이냐?”

주 노야가 느긋하게 물었다.

“교랑의 혼사요.”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 그건 급할 거 없다. 교교가 알아서 할 거야. 우리는 교교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돼.”

주 노야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가볍게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 주복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그, 그래도 가서 물어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복이 물었다.

“물을 게 뭐 있다고. 지금 시간을 끄는 거잖냐. 이대로 쭉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 노야가 말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두려우신 거겠지.

정 대노야와 함께 평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주 노야는 이대로 정교랑과 혼사를 맺을 경우의 후환이 두려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정교랑 또한 굳이 주씨 가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니, 주 노야는 더욱 몸을 사리는 듯했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복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을 질질 끌어서 뭐해! 이런 일일수록 쾌도난마로 결판을 내야지!

아버지께서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물어보러 가겠습니다.

주복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맞아. 내가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그 애를 도와주는 건데, 못 물을 게 뭐 있다고!

결심이 확고해질수록, 주복의 발걸음도 점점 더 빨라졌다.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다.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어.

주복이 주씨 저택을 나설 무렵은 진호가 반근이 우려준 차 한 잔을 전부 비울 때쯤이었다.

여름이 되자 활짝 열린 대청 문에 얇은 방충망이 더해지고, 창밖은 푸른색과 붉은 꽃이 한데 모여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냈다. 처마 밑에 있는 둥지에서는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진호가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호가 미소 지으며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고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사실, 낭자에게 주육낭과 혼례를 하라고 권해야 마땅한데.”

진호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조용히 부채질을 하던 반근도 진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말로 혼사를 올릴 거 같아서요. 낭자가 진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거 같아서.”

“혼사에 진짜 가짜가 있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진호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혼사가 장난도 아니고, 진짜 가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혼사를 애들 장난처럼 여기고 싶습니다.”

반근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낭자의 원칙도 장난이 되어버리니까요.”

진호가 웃으면서 정교랑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원칙을 말하는 거지?

반근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진호는 마치 정교랑과 반근이 대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정 낭자, 지금이라도 원칙을 조금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 일에는 고위급 관료와 막강한 권력이 연관되어 있으니, 주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건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집안이라면 괜찮잖습니까. 우리 집안이라면,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거고, 굳이 낭자가 스스로 손해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호가 한꺼번에 말을 다 한 뒤, 조심스럽게 눈앞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나서게 해 줘요.”

“뭘 나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멈칫했던 진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설마 못 알아들은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괜찮아. 더 명료하게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것은 몹시 이치에 맞는 일이자 미담으로 남을 일이기도 하죠. 태후와 평왕의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면 그들도 아무 말 못 할 테고요. 게다가 저희 진씨 가문은…….”

진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이 소리 내어 진호의 말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진호 스스로 말하는 것을 멈췄다.

“그 일로 왔던 거예요?”

진호가 말을 멈추자, 정교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이제 마음 쓰지 말아요. 더는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예를 표했다.

또 이러네.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이 단정한 자세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얼핏 계산해 보아도, 정교랑을 제일 많이 만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진호는 잘 알고 있었다. 선상 연회, 꽃등 놀이, 화괴의 춤 감상과 꽃놀이까지, 진십삼은 정교랑과 가장 다양한 일을 함께한 사람 또한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낯설기만 할까. 정 낭자와 마주 보고 앉을 때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사람.

“알겠어요. 그럼 내가 신경을 쓸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알려 줘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으며 예를 표하자, 진호도 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호가 말을 타고 정씨 저택을 떠날 무렵, 저택 근처에 다다른 주복이 그를 발견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십삼이 여기에 있었네. 혹시 또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낸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던데.

생각에 잠겨 말을 천천히 움직이던 주복이 무언가를 보고 다급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내다보았다.

정씨 저택의 문 앞에 또 누군가가 멈춰 서더니 여름 햇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내였지만, 누가 보아도 한눈에 주목할 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말에서 내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주복은 사내의 용모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멀리서도 그 사내의 여유로움과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졌다. 사내가 층계를 올라 대문을 두드리자, 금세 문이 열렸고 사내는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아니, 저 사람이 언제 경성으로 돌아온 거지?

주복은 티 나지 않게 저잣거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노점상들의 호객 소리와 바쁘게 오고 가는 행인들 사이에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정씨 저택 주위에 도사리고 있음이 주복의 예리한 시선에 느꼈다.

“군왕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진안 군왕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사환의 말을 듣고 달려나온 반근이 소리쳤다. 마당에 들어선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늘 밑에 선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나랏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지.”

정말 이상하네. 이 저택에는 오늘 처음 들어온 건데, 왜 이렇게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지?

아니야,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고, 좀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은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걸어 나온 여인과 몸종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익숙하니, 장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구나.

“정말이에요? 이런 엄청난 일에, 왜 미리 연통도 없으셨어요?”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창피한 일을 저지르고 왔는데, 무슨 낯짝으로 거창한 환영을 바라겠느냐. 마음 같아서는 성 밖에 땅굴을 파서 몰래 기어들어 오고 싶었다.”

진안 군왕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반근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무슨 창피한 일인데요?”

“너는 어째 점점 더 말 많은 반근을 닮아가는구나. 내가 큰소리 떵떵 치고 혼자서 산적을 잡으러 산채에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폭죽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쳐 나오지 않았더냐. 그 창피한 일을 굳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반근은 배를 잡고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웃었고, 정교랑도 진안 군왕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창피할 일이 아니죠.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니,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에요.”

칭찬의 말을 수없이 들은 진안 군왕이었지만, 정교랑의 입에서 나온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이 피어올랐다.

“오늘 전하께선 저희 아씨의 축하를 받기 위해 오신 건가요?”

반근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길을 안내했다. 반근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오늘 낭자와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회랑 아래까지 걸어갔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으응? 뭐라고?

반근은 무언가를 들었으면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반근은 넋이 나간 채로, 마당에 서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마당에 정적이 흘렀다. 반근의 놀란 얼굴을 본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정방, 내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여유롭고 솔직한 모습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 말을 한 게 맞구나. 군왕 전하도 고씨 가문이 태후를 이용해서 강제로 혼인하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반근이 놀란 건 진안 군왕의 청혼 때문이 아니었다. 요 며칠 청혼하러 온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되는데, 이토록 솔직하게 청혼한 사람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고씨 가문이든, 주 노야든, 진호든, 모두 완곡하게 혼담을 꺼냈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 준다는 건 참 기쁜 일이야.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전하께서 마음을 써 주시는 건 감사하나, 이런 사소한 일에 굳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사소한 일이에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웃었다.

맞아요, 아씨. 혼사는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요.

반근이 속으로 한탄했다.

“벌써 잊었어요? 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낭자가 혼사를 치른다면, 좋은 신랑감을 골라 주겠다고 했죠.”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대청에 마주 앉자, 반근은 차를 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아마 삼 년 전이었지?

반근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는 내가 아씨 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에서 아씨의 혼수 때문에 서로 혼사를 치르겠다고 난리를 쳤지. 맞아, 아씨께서 혼담이 오간다고 말씀하시니, 군왕께서 담벼락 위에 매달려서는 아주 친절하게 자기가 신랑감을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어.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알아보기 힘들면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확실히 알아봐 줄게요. 중매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절대 못 속이게 한다고 장담합니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내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골라 봐도…….”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최선인 것 같단 말이죠.”

정교랑이 또 웃었다.

“누구라 해도 상관없어요. 별일 아니니까, 굳이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정방,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게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도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근래에 여러 곳에서 낭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사람들이 당신의 신랑감으로 적합할지, 그 집안에 시집을 가면 좋을지 나쁠지는, 내가 판단할 게 아니라 낭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혼사를 치른 후의 생활은 오롯이 낭자의 것이니까요.”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볼 뿐,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이건 당신의 일이고,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뭐라고 낭자를 돕겠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그래서 낭자에게 청혼하러 온 겁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반근은 결론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시 나는 이분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어.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된 뒤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 나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기로 했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한낮의 햇살이 정교랑을 비췄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인상은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정교랑이 입는 옷은 언제나 비슷했다. 진안 군왕을 처음 알게 된 그날 밤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교랑은 가슴께까지 오는 수수한 색깔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위로 짙은 색의 겉옷을 걸치고, 날이 더워지는 여름에는 촘촘히 짜인 얇은 반소매를 걸쳤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아주 옅은 색의 연분홍 연지가 발려 있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나무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 정교랑은 늘 별다른 장신구 없이 작은 은빗 하나를 머리 옆에 꽂고 다녔다. 정교랑의 의상과 장신구는 무척이나 간소해서, 그녀의 시중을 드는 반근보다도 단출해 보였다.

정교랑은 항상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서 있었는데, 그 자세는 황궁의 상궁들조차 지적할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바른 자세였다.

그날 산에서 늑대 떼를 함께 물리쳤을 때도, 모닥불 옆에 서 있을 때도, 같은 자세였어.

조용하고 담담하게 서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위험한 일들을 겪고, 간혹 아름다운 것을 보기도 하고, 무언가를 얻었다가 잃는 경험도 하고.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만 생각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해져.

이 세상에 내가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단 둘.

한 명은 내가 지키지 못해 잃게 된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곧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내가 이 여인의 뒤에 서서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야.

진안 군왕이 앞으로 또 한걸음 내디뎠다.

“내가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당신과 혼인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진안 군왕이 한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나 방백종이,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나 방백종이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반근은 멍한 채로 뭔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혼사가 이런 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그 행렬이 가히 십 리에 이를 정도로 풍성한 혼수. 여인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혼사에 대해 얘기할 때는 수줍어서 자리를 피하는 여인도 있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혼사 준비를 하는 여인도 있었다. 신랑감을 고르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부모도 있고, 이 사람 저 사람 꼼꼼하게 재고 따지는 부모도 있고,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려니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드는 부모도 있고, 딸이 드디어 좋은 배필을 찾아 혼사를 치르는 기쁨을 느끼는 부모도 있었다.

물론 반근은 정교랑이 이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여태껏 정교랑의 혼담은 모두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위해, 놀이를 위해,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이용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들 또한, 아마 지금 혹은 나중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충분히 계산한 뒤 혼담을 넣으러 온 것일 터였다.

기쁨이나 행복, 아쉬움은 없고, 정교랑의 혼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나 계략, 암투만이 존재했다.

내가,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나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반근은 이상하게도 코끝이 찡해져 왔다.

“정방, 당신의 혼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다던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근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소한 일은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의 눈에는 혼사가 사소한 일이에요?”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이 사람도 참 웃긴 사람이네.

반근이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씨께서 혼사를 사소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건 수없이 많지만, 보통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거나,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거나, 아쉽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는데, 저 말을 이렇게 좋아하는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진안 군왕은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표정에서도 진심 어린 기쁨이 묻어났다.

정교랑도 어쩐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에게 혼인은 일생일대에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자유를 빼앗겼는데, 혼사라는 건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보내는 일이니 꼭 내 손으로 직접 결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방, 나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진안 군왕이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에게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당신이 사소하게 여기는 일로, 내 한평생 가장 중요한 일을 이뤄 줄 수 있나요?”

당신의 사소하게 여기는 일로, 내 한평생 가장 중요한 일을 이뤄 줄 수 있나요?

반근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다고?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된다고?

이, 이게 뭐람?

“뭐긴 뭐야. 낭군과의 약속이라는 거지.”

방 안에 환하게 켜진 등불 아래에서 시녀가 중얼거렸다.

“언니.”

반근이 당황한 기색으로 시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렇게 혼사가 성사된다고?”

“청혼했어?”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면서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한참 전에 저택을 떠났다. 반근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시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 아씨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어.”

반근이 대답했다.

“아씨는 대답하셨고?”

시녀가 물었다. 반근이 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아씨께서 좋다고 하셨어.”

시녀가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보이면서 말했다.

“그럼 끝난 건데, 뭘 또 묻는 거야?”

“그럼, 아씨께서는 정말로 진안 군왕한테 시집을 가시는 거야?”

반근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씨께서 아직까지 거짓말하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시녀가 웃었다.

맞아. 아씨께서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어.

반근이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군왕이니까, 고 관인보다 대단한 사람이겠지?”

시녀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반근의 이마를 쿡 찌르며 뒤로 밀었다.

“군왕이든, 천하에서 가장 센 사람이든, 공주부의 진 공자든, 죽마고우라는 주 공자든, 누가 더 대단한지는 아무 소용 없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씨께서 좋다고 하시는 사람이야.”

반근이 이마를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면서 언니, 하고 소리쳤다.

“꿈에서 그만 깨어나. 얼른 아씨의 혼례복을 준비하러 가야지.”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혼례복이라니, 정말 시집을 가시는구나.

아씨께서 정말로 혼례를 치르시는구나.

이마를 부여잡고 있던 반근이 갑자기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는 그런 반근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서럽게 우는 반근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왔다.

“됐어, 그만 울어. 경사스러운 일인데, 왜 울고 그래.”

시녀가 반근을 다독였지만, 반근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밤사이 반근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창가 너머의 마당을 맴돌았다.

해가 뜨자, 쿵쿵쿵 발걸음 소리가 고능준의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고 관인이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와 말했다. 시녀 두 명이 고능준의 옷을 갈아입혀 주고 있던 터라, 고능준은 고 관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제 진안 군왕이 그 천것의 집에 갔는데…….”

고 관인이 말하던 도중, 고능준이 몸을 돌렸다. 눈썹을 치켜세운 고능준이 고 관인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첫째, 그건 큰일이 아니다. 둘째, 다시는 네 아내 될 사람을 천것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고 관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었다.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소자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사죄를 마친 고 관인은 얼른 재빨리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요 며칠 그 정, 정 낭자 댁에 진십삼도 갔는데, 진십삼은 저와 정 낭자 사이의 일을 좋게 풀어 보고자 애쓰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쳐도, 진안 군왕이 정 낭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는…….”

“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나 보지.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느니라.”

고능준이 소매를 털고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마차?

“아버지, 정말로 정 낭자를 찾아가시려고요? 정 낭자를 이리로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고 관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정 낭자에게 매달리는 거지, 정 낭자가 우리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 낭자가 직접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냐.”

고능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우리가 그 여인에게 매달리는 거야?

고 관인이 고능준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찰나, 문밖에서 사환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노야, 궁에서 온 겁니다.”

사환이 공손하게 고능준에게 서신 한 장을 건넸다. 그 자리에서 서신을 펼치고 내용을 본 고능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고 관인이 물었다.

고능준은 소매를 털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천천히 서신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마차를 준비할 필요 없다.”

“네?”

고 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또 갑자기 마차가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거지? 가지 않으시려는 건가?

“갈 필요 없다.”

고능준이 금세 조금 전과 같은 평온함을 되찾고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교랑과의 혼인을 윤허해 달라고 했다는구나.”

뭐라고?

고 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혼사를 논의하는 데 장장 이 년이 걸렸다는 죽마고우 주육낭으로 부족해서, 이제는 진안 군왕까지 합세했다고? 게다가 이번에는 이 일을 폐하의 앞으로 가져갔어?

내 체면을 밟으려고 안달이 난 놈들이 수두룩하구나. 도대체 내가 그놈들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근정전의 창문과 문이 굳게 닫혔고, 전직(殿直)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수위를 섰다. 근정전 안에서 시중을 들던 내시들이 모조리 회랑 아래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근정전 내부에서는 필시 극비 사안을 논의 중일 터였다.

하지만 근정전 내에서 논의 중인 내용은 나랏일이나 군사 기밀과 관련된 극비 사안이라고 보기 어려운, 지극히 사적인 황실의 가정사였다.

황제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네가 바란다는 상이 짐에게는 몹시 의외로구나.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든 게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갑작스레 생긴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래도록 그 마음을 잘도 꼭꼭 숨겨 두었구나.”

황제가 웃으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사실 예전에는 딱히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진안 군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낭자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부였죠. 낭자와 뭘 어쩌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인이 다른 사람한테 시집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진안 군왕은 민망한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올려 옷깃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음, 그러니까 너는 그 여인이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여인을 위해서…….”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주씨 가문 녀석처럼, 그 여인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서는 게지. 그 여인을 곤경에서 구해 내려고.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 이건 신을 위한 겁니다.”

그가 한결 편안해진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경왕을 위한 거기도 하고요.”

황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인이 너한테 시집오면, 경왕을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황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소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그 여인이 꽤 오래전부터 꾸며왔던 계략일지도 모르겠군.

진안 군왕이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폐하, 그 여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왕의 병을 치료해 줄 일도 없지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이냐?”

“신이 그 여인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진안 군왕이 곧바로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대답에 흠칫 놀란 황제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품었다라…….

그렇다면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미모나 지혜, 하다못해 신기한 비술이라든지.

“신이 그 여인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진안 군왕이 말을 덧붙였다.

믿는다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왕의 병은 치료할 수 없겠지만, 그 여인은 의술에 통달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통달한 게 의술이 아니라 그 어떤 술법이라 해도 좋습니다. 정 낭자가 준 차를 경왕에게 우려 줬더니, 신기하게도 경왕의 짜증과 초조함이 덜해지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낭자의 옆에 있는 한, 경왕은 칠현금 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끔은 정 낭자가 죽을병에 걸린 이를 살려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하다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 또한 진안 군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근정전 안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위낭, 그럼 네가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더냐?”

황제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귀비마마를 믿지 않습니다.”

황제는 마치 진안 군왕의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평왕 전하도 믿지 않습니다.”

진안 군왕이 덧붙여 말하자, 황제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진안!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평왕이 제 아우를 죽이기라도 한다는 게냐!”

황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황제의 호통에도 진안 군왕은 겁먹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조용히 몸을 숙이고 정중하게 예를 올릴 뿐이었다.

“폐하, 신이 어찌 감히…….”

“어찌 감히? 그럼 너는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지, 똑바로 대답해 보아라!”

진안 군왕은 허리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에 격노한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네 눈에는 형제나 가족이나, 다 악의로 가득 찬 악인들로 보이는 게로구나! 진안, 짐은 네게 크게 실망했다!”

“폐하, 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이젠 변명까지 하는 게냐? 네가 음험한 생각을 품은 것이 분명하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변명을 해!”

황제가 노여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 신은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만약 폐하께서 계시지 않고, 태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경왕은 어떡합니까! 경왕이 그렇게 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폐하께서도 무척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 다들 밤낮없이 경왕 주위에 매달려 그 아이를 돌봐야만 마음을 쓴다는 게냐? 진안, 애초에 출궁하겠다고 했던 것은 너다. 그때 출궁하겠다고 했던 건, 일부러 보라는 듯 연기한 것에 불과하더냐? 실은 남들이 너를 붙잡고 궁에 남아 달라고 애원하길 바랐던 게야? 네가 지금 와서 원망할 게 뭐가 있느냐? 짐이 언제 너더러 경왕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느냐? 짐이 언제 네게 억지로 경왕을 부탁한 적이 있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그만 돌아가거라. 경왕을 궁에 다시 들여올 테니, 남들이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진안 군왕은 진노한 황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한바탕 화를 낸 황제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진안 군왕에게 크게 호통쳤다.

“이제야 두려워진 게냐! 어서 짐에게 대답해 보아라!”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네, 두려워졌습니다.”

왜 고개를 저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거지?

“폐하께서는 경왕을 너무도 잘 보살펴 주십니다. 폐하께서 이렇게나 잘해 주시니, 신은 두려워졌습니다. 언젠가 이런 보살핌이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을 알기에 두렵습니다.”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어대에서 성큼성큼 내려와 손가락으로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네 이놈! 오늘 짐을 저주하려고 온 게냐? 짐이 아직 건재하거늘, 뭐하러 벌써 우는소리를 하는 것이냐!”

황제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두 팔로 황제의 다리를 와락 안았다.

“신은 두렵습니다! 신은 정말로 두렵습니다! 그러게 폐하께서는 왜 경왕과 신을 이리도 잘 보살펴 주셨습니까! 왜요! 오직 폐하께서만 경왕과 소자에게 잘 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신은 너무도 두렵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이렇게 끌어안은 적이 처음이었던 황제는 당황스럽고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녀석이 정말!”

황제가 진안 군왕을 떨쳐내려고 다리를 한 번 흔들었지만, 진안 군왕은 황제의 다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짐이 지금 사람을 부르면, 너는 이 자리에서 금오위 병사들의 손에 목이 달아날 것이야!”

황제가 호통쳤다.

“목이 달아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신의 마음이 편해지겠지요.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질 테니까요. 폐하, 신이 죽을 고비를 넘겨보지 않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얼마 전에 산채에 홀로 남겨졌을 때도 신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계신 한, 모든 게 다 평안할 테니까요.”

진안 군왕이 황제의 다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말했다. 황제는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진안 군왕을 보며 화가 났으나,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황실은 손이 귀했다. 황실에 겨우 아이가 생겼을 때는, 황제의 나이가 지긋할 때였다. 게다가 어린아이들은 너무도 여리고 허약했기에 황제는 아이들을 살짝 건드리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에게 있어서는 아이들과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친밀한 부자지간의 감정표현이었다.

진안 군왕은 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아이였다.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는 몹시 어렸던지라, 늘 집에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통에 태후가 그를 어르고 달래기 일쑤였다. 그리고 황제를 마주칠 때마다 어린 진안 군왕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두려움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차츰 소년이 되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더는 전처럼 황제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황제를 깍듯한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궁에서 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된 진안 군왕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황제 앞에서 능글맞은 모습을 보이면 보였지, 한 번도 이렇게 바짓가랑이를 잡고 떼를 쓴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아이가 떼를 쓰는 건가? 그래, 짐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떼를 쓰는 거겠지.

하지만 떼를 쓰기에는 너무 커버렸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던 황제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재빨리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호통쳤다.

“체통을 지키거라! 네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곧 혼사를 치를 사내가 지금 이게 무슨 꼴이더냐!”

“폐하께서 계신 한, 소자는 영원히 어린아이입니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황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진안 군왕을 내려다보았다.

위낭은 어렸을 때 왕부를 떠나게 되어 가족과 소원해졌지. 그렇다고 해서 궁에 이 아이와 가까운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 당연히 의지할 사람은 짐뿐일 수밖에.

그리고 얼마 전 무평 산채에서는, 정말로 죽을 뻔했어. 대수롭지 않게 말하긴 했지만, 당시 얼마 위험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아. 참 많이 놀랐겠구나.

모든 사람이 짐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짐에게 이토록 의지하는 사람은 없었지.

그리고 경왕도.

경왕…….

경왕이 그렇게 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폐하께서도 무척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잘 알고 있지.

“저리 가거라. 혼사를 치르는 즉시 네 신부와 함께 경성을 떠나거라. 다시는 짐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깜짝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황제의 말을 이해했는지, 진안 군왕은 활짝 웃으며 황제의 다리를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자는 경성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 남아 있고 싶습니다.”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면서 말하자, 황제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냉큼 꺼지거라.”

진안 군왕이 해맑게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두어 걸음 뗐을 때, 황제가 진안 군왕을 불러 세웠다.

“태후께는 네가 직접 말씀드리거라. 괜히 짐을 욕받이로 쓰려고 하지 말고.”

진안 군왕이 알겠다며 예를 표하고는 서둘러 근정전을 떠났다. 근정전의 구석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내시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짐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 이렇게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미소 지었다.

정 낭자가 고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고능준이 경성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정 낭자가 고씨 가문의 혼담을 승낙할 가능성이 반반이었는데, 그가 돌아오고 나니 그 둘이 혼사를 치르지 않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지.

고능준 그자는 짐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자야. 의외로 자상한 면모가 있어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사람들이 그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그건 둘째 치고, 고씨 가문 자체로도 충분히 막강한 세력을 가지는데, 거기에 배짱 좋고, 안하무인일 정도로 교만하며, 능력까지 출중한 정 낭자가 합세하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이야 내가 그 기세를 억누르고 있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어린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된다면?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주씨 가문에 시집가게 둘 수도 없지. 태후께서 버티고 있는 한 이미 엉킨 실을 풀 수는 없고. 그렇게 된다면,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결국 경성을 떠나야만 할 테고, 고씨 가문의 기세는 날로 거세지겠지.

하지만 진안이 이 판에 뛰어든 이상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태후께서 절대로 진안에게 경성을 떠나라고 하실 리는 없으니, 그 누구도 쉽게 진안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야.

진안이 이대로 정 낭자와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곧 고씨 가문과 원수를 지게 될 터, 하지만 그 덕분에 고씨 가문과 정 낭자가 손을 잡는 경우는 없을 테니 어린 태자에게는 좋은 일이지.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녀석, 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채고 어린아이처럼 그리 떼를 쓴 건가?

자상함을 논하자면, 위낭도 빠질 수 없지. 게다가 아주 예리하기까지 해. 조정에 관한 일이나, 사람에 관한 일이나, 아주 예리한 녀석이야. 참으로 훌륭한 젊은이인데, 내 혈육이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아깝군.

가만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진안과 혼인하는 게 썩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리되면, 정 낭자와 고씨 가문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게 될 것이고, 어린 황위 계승자에게도 좋은 일이 되는 게야.

이게 바로 힘의 균형인 게지.

황제가 몸을 돌리고 옥좌 위로 올라갔다.

짐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 자리에 앉은 자로서 어찌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겠는가.

진안 군왕은 급한 발걸음으로 황궁 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 근정전에서 황제에게 보였던 기쁜 웃음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다시 혼자 있을 때의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역시 전하께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으십니다.”

진안 군왕을 따라오던 내시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각자 필요한 것을 얻는 것뿐이니, 당연히 실수할 게 없지.”

각자 필요한 게 있으니, 각자 필요한 것을 얻을 뿐이다.

고능준도, 정씨 가문도, 주씨 가문도, 황실도, 모두가 다를 게 없어.

차이가 있다면, 각자 필요한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얻느냐와 그것을 얻은 뒤에도 초심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느냐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진안 군왕의 뒤에 바짝 붙었다. 진안 군왕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내시 몇 명이 그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서 예를 표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내시 한 명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안 군왕의 발걸음이 멈췄다.

“황후마마께서 전하께 축하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재차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

“소원을 이루시게 되어서요.”

진안 군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언제쯤 황후마마께 축하 인사를 올릴 수 있느냐?”

진안 군왕이 앞뒤 없이 물었으나, 내시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조만간일 겁니다.”

진안 군왕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시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고 진안 군왕이 태후궁을 향해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동의하실까요?”

한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진안 군왕과 대화했던 내시가 허리를 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황제 폐하도 설득했으니, 태후마마는 더 쉽겠지. 아마 말 한마디면 될 것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왕을 위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네가 애가를 놀리는 게야?”

“마마, 소손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다 경왕을 위해서입니다.”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소손은 절대로 육가아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평생토록 육가아와 함께할 거예요.

그리고 소손은 정 낭자가 육가아를 치료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소손은, 소손처럼 육가아를 대해 줄 사람이, 육가아를 진심으로 위하고 보살펴 줄 사람이 소손의 아내였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육가아를 무서워하고 혐오스러워합니다. 어쩌면 잠깐은 육가아를 아껴 주는 척 연기를 할 수 있겠지만, 어찌 한평생을 연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 낭자는 육가아를 무서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정 낭자도 예전에는 바보였으니까요. 그런 정 낭자보다 육가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마,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은 또 없습니다.”

그래. 태어나기를 바보로 태어나, 십여 년간 바보로 살다가 갑자기 완치된 사람은 아마 그 여인 말고는 없겠지.

태후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또 누가 애가와 황상처럼 진심으로 육가아를 생각하고, 육가아를 아껴 줄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는데, 생판 남인 사람이 어떻게 육가아를 그 정도로 보살필 수 있겠어. 사람 마음이 그러한 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거늘, 어찌 그 마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정 낭자 말고 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밖에 더 되리.

“마마, 부디 소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마마, 제발 소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태후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앞에서 애원하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곧 나를 돕는 일과도 같지. 내가 벌인 이 우스운 일이 웃어른의 고충으로 바뀔 수 있을 게야.

“일어나거라. 그럼 애가는 육가아에게 보모를 한 명 구한 것으로 치마.”

태후가 진안 군왕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정 낭자의 혼사가 결정되었다. 아직 구두로만 정해져 정식적인 혼담 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뜻밖의 시작에, 뜻밖의 결말이로군.”

진소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설 때, 진소는 찻잔을 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랑과 진안 군왕의 혼사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진소는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정 낭자와 진안 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잠깐,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진안 군왕이 황제에게 상으로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던 것부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안 군왕의 청을 들어준 데까지 고작 반나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소는 소식을 전해 주는 수하들이 있기에 가장 먼저 소식을 알았지만, 항상 집에 있는 진소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좀 전에 진 시강 댁에 갔었는데, 진(秦) 부인이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말도 다 못 끝내고 급하게 진십삼을 찾으러 갔거든요.”

진소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씨 가문이라면 당연히 이 소식을 알고도 남았겠지.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거예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진소가 한참 동안 손에 쥐고 있느라 다 식어 버린 차를 단숨에 비웠다.

“지난번 고 관인 때도 이미 다 정해진 일이었잖소. 일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소? 그 여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뜻밖의 전개로 흘러가니, 암만 추측하려 해도 추측할 수가 없지.”

그건 그렇지.

“사실, 그래도 군왕이 고 관인보다는 낫잖아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뭐가 낫다는 거요? 하나는 체면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조력자를 구하기 위해서인데, 어떤 게 더 낫다는 말이요?”

진소가 물었다.

고 관인은 어떻게든 정 낭자의 기세를 누르고 자신의 체면을 되찾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고,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원하는 이유는 고 관인에게서 정 낭자를 뺏으려는 게 아니라 경왕을 위함이니.

모두 각자가 필요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지.

“그건 모를 일이죠. 교랑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걸 잊지 마요. 미모만으로도 경성에서 교랑을 이길 만한 여인은 몇 없다고요.”

미인?

진소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한 번도 정교랑의 용모를 기억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하마터면 정교랑이 여인이라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그런 여인인데, 누가 그런 걸 눈여겨보겠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단랑은 눈여겨봤거든요?”

진소 부인이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하자, 진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진안 군왕이 단랑 같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지금껏 무사히 장성할 수 있었을까.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종친 신분에 명성을 드높이고 공로를 세울 수 있었을까.

진소 부인이 진소를 흘겨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난 단지 교랑이 좀 더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에요. 적어도…….”

진소 부인이 훗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군왕 전하가 고 관인보다는 잘생겼잖아요.”

진소가 실소를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조금은 더 낫지.”

적어도 그 여인이 고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보다는 나아. 그래서 폐하께서 이 혼사를 윤허하신 것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고씨 가문에서 또 난리를 치진 않겠죠?”

진소 부인이 물었다. 진소가 빈 찻잔을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씩 웃었다.

“고능준이라면, 절대로 또 난리를 치진 않을 거요.”

“아버지, 이 일을 이대로 끝내시겠단 말씀입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고 관인이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황제에게 정교랑과의 혼인을 상으로 청했던 그 순간부터, 고능준은 무척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정교랑을 직접 찾아가 혼담을 넣으려던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진안 군왕은 도대체 뭘 믿고 우리 고씨 가문의 뺨을 후려친답니까?”

고 관인이 계속해서 목청을 높이는데도, 고능준은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폐하.”

고 관인이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예?”

고능준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를 믿고 그런 게지.”

고 관인이 아, 하고는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진안 군왕을 너무 총애하십니다! 아무리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앞뒤는 가려가면서 결정을 내리셔야죠.”

“왜? 황제가 진안 군왕을 총애하니, 얼마나 좋으냐?”

고능준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버지! 그럼 우리는 이대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인정해야지. 그러게 내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보아라, 지금이 얼마나 좋으냐?”

뭐가 좋다고 하시는 거지?

고 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이 책을 내려놓고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무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 아니더냐. 우리의 칼날이 진안 군왕을 향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이 얼마나 좋은 일이야? 이젠 그 두 사람을 한곳에 묶어둔 셈이니, 괜히 귀찮게 따로 손볼 필요가 없어졌어. 좀 좋은 일이더냐?”

“이게 좋은 일이라고요? 정말이에요?”

장씨 저택 안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장 노태야가 성가시다는 듯이 귀를 파는 시늉을 하자, 몸종은 더욱 바짝 다가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연달아 물었다.

“그럼 정말 아씨의 혼례복을 만들어도 되는 거예요? 네? 진짜로요?”

“안 된다.”

장 노태야의 대답에 몸종은 흠칫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노태야?”

“뭐가 그리 급한 게냐? 이제…….”

장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수를 세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두 명 나왔을 뿐인데.”

장 노태야가 웃으며 옆에서 찻잎을 굽고 있는 노복을 향해 물었다.

“아니면 한 번 맞혀 볼까나? 다음에 나타날 사람이 누구일지?”

노복이 풉 하고 웃자, 더욱 초조해진 몸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태야, 그럼 군왕 전하께서 저희 아씨와 혼사를 치르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몸종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물었다.

“군왕 전하의 운명이 좋을지 나쁠지에 따라 달렸지. 운이 좋다면, 네 아씨를 쟁탈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새로 나타나 전하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더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전하께서 네 아씨를 떠맡게 되는 꼴이니 전하의 운명이 무척 나쁘다고 해야겠지.”

노복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몸종이 발을 동동 굴리면서 소리쳤다.

“노태야! 저 좀 그만 놀리세요! 노태야께 더 안 여쭤볼래요. 노야께 여쭈러 갈 거예요!”

몸종이 몸을 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성을 내면서 떠나는 몸종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놀린 게 아닌데 말이지. 그 여인이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데. 그 여인과 혼례를 치르게 되면 분명히 손해라는 손해는 다 보고, 방패막이밖에 안 될 텐데, 그걸 어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냔 말이야. 얼른 피해도 모자랄 판에 하나같이 행여나 뒤질세라 그 여인을 갖고 싶어 안달이니. 참으로 바보 같은 자들이로구나.”

노복이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노태야,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요. 노태야께서도 그 여인 덕분에 지금 얼마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반근처럼 좋은 몸종도 하나 얻고, 그 여인에게 보낸 몸종도 매년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온갖 선물이며, 먹을 것이며 보내오지 않습니까. 몸종 하나를 보냈더니, 좋은 몸종 둘을 얻게 된 셈이죠.”

노복의 말에 장 노태야가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네 말은 그럼 지금 내가 바보라는 소리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혼인 소식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반나절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탓에 아직은 소식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주복이 정씨 저택 앞에서 대문을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말에서 뛰어내려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진호가 보였다.

“십삼, 자네가…….”

주복이 입을 열었지만, 진호는 그를 무시한 채 곧장 정씨 저택의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절름발이 소리를 들었던 진호였지만, 지금은 다른 명문가 자제들에 뒤지지 않는 기마와 활쏘기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전장에서 쓰는 석궁의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 정도의 팔 힘을 가진 진호인지라 그가 온 힘을 다해 문을 치자 주복이 무식하게 문을 발로 차서 열 때만큼 큰 소리가 울렸다.

쿵 소리와 함께, 완전히 닫히지 않았던 측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팎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육공자님.”

문지기들이 주복을 보자, 곧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내가 친 거 아니거든?

주복이 속으로 외쳤지만, 자존심 센 그가 해명을 늘어놓을 리는 없었다.

“아, 실례했네. 문짝을 바꾸든가 해야 하지 않겠나? 영 튼튼하지가 않군.”

자신의 행동에 놀랐는지, 진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여유로운 척을 했다. 문지기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정 낭자는 안에 있는가? 진…….”

진호가 느긋하게 이어서 말하던 찰나, 주복이 그를 세게 밀치고는 소리쳤다.

“남의 집 문짝까지 부쉈으면서 시치미는. 여기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거야?”

주복이 진호를 지나치고는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진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웃으며 주복을 따라갔다.

사환 하나가 두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정교랑에게 알렸다. 대청으로 나온 정교랑이 두 사람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자, 두 몸종이 차를 내왔다.

“반근은 어디 갔어요?”

진호가 정교랑의 뒤로 물러난 두 몸종을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저 자리는 항상 작은 반근의 자리였는데. 큰 반근은 점포들 때문에 바쁘다 보니, 자주 못 보는 데 익숙하고.

“볼일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두 반근이 다 바쁘다는 말인가?

진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새 반근을 한 명 더 들일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한 명 선물할게요.”

정교랑이 진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주복이 마른기침을 했다.

“왜? 자네도 보내려고? 내가 먼저 말했으니 내가 먼저네.”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지한 얘기 좀 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주복이 진호를 흘겨보면서 화를 냈다. 진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진호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드디어 말하는구나, 드디어!

주복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가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점점 더 세게 주먹 쥐었다.

“낭자도 알다시피 지금…….”

진호가 이어서 말하던 찰나, 주복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정 안 되면, 서북으로 가자. 서북도 나쁘지 않아. 공로도 세우고 업적도 쌓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꼭 경성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정교랑과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았다.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진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안 되는데? 죄도 없는 우리 주씨 가문을 벌하기라도 하겠어?”

“그야 당연하지. 언제부터 사람을 벌하는 데 이유가 필요했나? 육낭, 이 일은 이제 더는 애들 장난이 아니야.”

진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애들 장난이래? 내가 너와 혼사를 치르겠다면 치르는 거야.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

드디어 말했다, 드디어 말했다고!

게다가 내 입으로 말했어! 십삼이 나 대신 말한 게 아니라,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했단 말이다!

“자네는 안 돼.”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안 된다고? 이 자식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고씨 가문이 나섰을 때부터 자넨 이미 글렀어. 지금은 진안 군왕까지 나섰으니, 자네는 더더욱 안 되지.”

이어지는 진호의 말에 주복이 흠칫 놀랐다.

진안 군왕?

진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낭자, 오늘 오전에 진안 군왕이 폐하께 낭자와의 혼사를 청했습니다.”

진호의 예상과는 달리, 방 안의 분위기는 이 소식을 전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 낭자의 표정은 여전하네. 정 낭자야 뭐, 항상 이랬으니까. 아마 황제가 정 낭자를 후궁으로 들이겠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자, 주복은 소식을 듣고도 놀란 표정이 아니라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뭘 알겠다는 표정인 거지?

“어제 진안 군왕이 그 얘길 하려고 온 거였구나.”

어제? 진안 군왕이? 여길 왔다고?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진호는 한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진호의 귓가에 어머니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십삼, 십삼,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대!”

진안 군왕?

진호가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잰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온 진 부인을 쳐다보았다. 항상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진 부인이지만, 지금은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눈빛이었다.

“어제 정 낭자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한 거 맞아?”

어제는…….

“아직 부득이하게 혼사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사소한 일이니, 별로 급하진 않습니다.”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소한 일이라니!”

진 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마음에 품은 여인과 혼인을 맺는 것이 언제부터 사소한 일이디?”

“네, 네, 어머니, 이제 더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 아주 큰일이네요. 지금 당장 정 낭자와 얘기해 보러 가겠습니다.”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 부인이 손으로 그를 떠밀며 재촉했다.

“어서 가거라, 어서. 설령 진안 군왕이 아니라, 황자가 나선다고 해도 우리 진씨 가문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진호는 여기서 자신이 조금만 더 늑장을 부렸다가는, 아예 진 부인이 직접 정교랑을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내였다면, 벌써 소매를 붙들어 매고 정 낭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을 거다.”

진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소매를 붙들어 맬 정도면, 거의 뺏어오는 거 아니에요?”

진호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무려 정 낭자인데,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빼앗아 올 만하지 않겠어?”

진 부인이 진호를 흘겨보았다.

소자도 당연히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빼앗아 오고 싶죠.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소자는 감히 정 낭자를 뺏을 수 없는 겁니다. 소자 때문에 정 낭자가 난처해질까 봐, 멸시당할까 봐, 기분이 안 좋아질까 봐서요.

정 낭자가 저를 싫어하게 될까 봐, 정 낭자가 저를 미워하게 될까 봐서요.

“어서 가 봐. 진안 군왕까지 나온 판국에, 일이 더 지체되어서는 안 돼.”

진 부인이 진호를 또 떠밀며 재촉했다.

진안 군왕! 역시나 또 그자로구나!

그럴 리 없기는,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지.

“마음이 점점 더 커지다 보니, 본인 신분도 망각했나 봅니다.”

진호가 천천히 말했다.

이 일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거겠지. 오히려 그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했을 거야.

그가 나섰다고 해도 우리는 겁낼 거 없어. 나와 정 낭자가 힘을 합치면, 절대로 난처한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거야. 예전에도 우리 둘이서 해냈었잖아.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말만 해요.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면 됩니까?

낭자, 말만 해요. 우리 둘이 뭉친다면 아무것도 무서워할 게 없어요. 낭자가 입을 열고 내게 말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꼭 그 일을 해낼 테니까, 말만 해 줘요.

제발, 제발 말 한마디만 해 줘요. 제발요.

진호는 자신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정교랑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진안 군왕이 온 이유가 정말 이 일 때문이었나?”

진호의 귓가에 주복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주복의 목소리가 급기야는 고막을 쿵쿵 때려왔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혼인을 청한 게, 두, 둘이서 이미 얘기가 된 일이었어?”

주복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는 둘이서라는 몇 글자를 몹시 힘겹게 뱉어냈다.

“맞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맞다고 대답했어.

주복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대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무슨 말을 더 물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사람은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은 안 돼요. 그 사람은 낭자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호가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아요.”

저 빌어먹을 똑같다는 말!

“아니요. 그자는 다릅니다.”

진호가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해. 별거 아니야. 다 똑같아. 고 관인이 정 낭자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생각하자. 별일 아니야.

“그자의 말을 믿지 말아요. 이건 단순히 신분이나 지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신분과 지위 말고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죠.

그자는 군왕이니까 고씨 가문보다 존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권력도, 세력도 없어요. 황실에 기반이 있는 자가 아니기도 하고, 폐하께서 고씨 가문만큼 중용하는 자도 아니고요.

자신의 신분이 너무도 고귀해서, 낭자가 시집가게 되면 아무도 낭자를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좋은 날만 계속될 거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면 안 됩니다. 다 거짓말이니까요!

그자가 낭자를 원하는 이유는 고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낭자가 있어야만 자신이 조정에 설 자리가 생길 테니까요. 낭자와 고씨 가문, 그리고 태후까지 등에 업게 되면, 폐하께서는 분명히 그자를 중용할 것이고, 고씨 가문을 견제하는 도구로 쓰실 겁니다.

그런 식으로 그가 황제에게 중용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 상호 견제라는 게 뭡니까? 힘과 권력이 대등해지는 것이, 상호 견제 아닙니까.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면, 폐하께서는 이제부터 진안 군왕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자를 이용해서 고씨 가문을 견제하겠다는 뜻은, 똑같이 고씨 가문을 이용해서 진안 군왕을 견제하겠다는 뜻이죠.

지금부터 폐하는 진안 군왕을 감싸주지 않을 거고, 고씨 가문이 그를 어떤 식으로 견제하든 방관하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낭자를 곁에 묶어 두고, 둘이서 고씨 가문을 상대하도록요.

그럼 두 세력은 끊임없이 싸우다가, 결국 양측 모두 큰 손해를 보게 되겠죠. 그 사이에 태자가 제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면, 태자는 황권에 위협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없앨 겁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듯이 쉬지 않고 말하는 진호 때문에 함께 안에 있던 사람들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교랑, 그가 그런 식으로 한 말을 믿지는 않을 거죠? 그렇죠?”

정교랑이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진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 말들을 믿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똑똑하면서, 왜 이런 것들은 알지 못하고 그의 말을 믿느냔 말입니다!”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진호가 흠칫 놀라고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그럼 뭐라고 했는데요?”

“내게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라면서, 내가 그 일을 이뤄 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혼인은 정 낭자에게 있어서 사소한 일이지만, 진안 군왕에게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 일을 이뤄달라고 부탁했다고?

진호는 잠시 넋이 나갔다.

이런 뻔뻔한 자식!

“그 사람한테는 중요한 일이겠죠.”

진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모든 것을 통찰한 듯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봐요. 그자는 딱 그런 뜻으로 청혼한 거라니까요? 낭자를 얻는 게, 그 사람한테는 몹시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요.”

“그래요?”

정교랑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아니, 그 뜻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빌어먹을, 그 자식이 낭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칭찬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

정교랑이 또 한 번 웃음 짓고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어떤 뜻이든 간에,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더는 평정심을 찾지 못한 진호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낭자가 고마워할 거 없어요. 내가 마음 쓴 것도 없고요. 내, 내 뜻 잘 알겠어요? 아무튼, 이 혼사는 절대로 승낙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요.”

진호가 혼자 피식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자가 폐하께 낭자와의 혼사를 청한다 하더라도, 설령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더라도, 이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해결할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걸요. 그리고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결국 이 말을 듣게 되었네. 낭자의 입을 통해서 똑똑히 들었어.

실내에 숨 막힐 정도의 적막감이 맴돌았다.

정교랑의 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두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왜 이 안에 들어온 뒤로 쭉 오금이 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말들이 비바람처럼 쏟아지고 있어. 그런데도 온몸이 굳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져.

좀 전과 달리 지금은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마치 실내가 깊은 늪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서서히 잠기는 느낌이 들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로 늪에 빨려 들어가는 절망감까지 느껴질 정도야.

살려 주세요, 저희 좀 살려 주세요.

저희 생각이 틀렸어요.

반근은 늘 아씨의 뒤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차를 따르는 것조차 잘 안 하길래, 참 마음 편하고, 몸 편한 하녀라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틀렸어요. 이 자리는 하나도 편하지 않아요. 너무 고통스럽고 무서워요.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숨이 막힌 몸종들이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기 직전, 진호가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낭자가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거예요?”

진호가 애써 웃음을 짜내면서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단지 혼사를 치르려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저 말에는 분명히 다른 뜻이 숨어 있을 거야. 빨리 생각해 내야 해, 빨리.

진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떼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혼사, 혼사를 치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죠. 적어도 이 소식이 퍼지면, 어쩌면, 아마도…….”

진호가 말을 더듬다가 대뜸 방 밖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빌어먹을! 어쩌면은 무슨! 아마도가 어디 있어!

혼사가 소꿉놀이야? 광대놀이야? 오늘 한다고 했다가, 내일 다시 처음부터 얘기하자고 할 리가 있겠냐고!

이 소식이 퍼지면, 그때 가서 없던 일이 될 수 있겠냐고!

혼사는 인륜지대사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만 하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는 일인데. 아무렇게나 말을 바꾸면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냐고!

실내에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두 몸종은 숨 막히는 정적을 참지 못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에게 시집을 가려는 겁니까?”

진호가 목소리를 낮춘 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진 공자, 이건 내게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누구와 혼사를 올리더라도 다 똑같을 거라고 누누이 말했었잖아요.”

정교랑의 담담한 목소리가 진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렇지. 정 낭자는 항상 저 말을 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저 말을 지켰지.

왕십칠에게도, 고 관인에게도 시집갈 수 있는데, 진안 군왕이라고 해서 못 갈 건 없지.

“그럼 난 어떻습니까?”

진호가 몸을 돌려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나한테 시집와요. 나한테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진 공자, 당신은 달라요.”

왜 이럴 때만 다른 건데요! 왜 이럴 때만 나는 똑같다고 하지 않는 거냐고요!

진호가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고 자신의 다리를 세게 내리쳤다.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줬으니까.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줬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 사람들과 다르고 모두와 다를 거야. 그래서 나와 거리를 두고, 나를 밀어내고, 나를 피하는 거겠지.

“그럼 나도 있잖아! 나도!”

방 안에 들어선 이후 진안 군왕이 그 일 때문에 온 거냐며 묻고는 줄곧 입을 다물고 앉아 조용히 듣기만 하던 주복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교랑, 나한테 시집와!”

주복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 이미 그 사람과 약조해서요.”

어제?

주복이 멈칫했다.

어제 내가 길가에 잠깐 멈춘 사이, 군왕이 말에서 내려 먼저 정교랑을 만나러 들어갔던 그때?

고작 그런 간발의 차로?

만약 어제 내가 그를 제치고 먼저 여기에 들어왔더라면, 만약 내가 먼저 청혼을 했더라면, 어쩌면 내가 이 여인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리 단순하게 결정했다고?

주복은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방 안에 들어와 진호를 통해 그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다. 진호와 정교랑이 무슨 대화를 하든 간에 옆에서 눈만 끔뻑일 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누가 먼저 왔냐를 따지는 거예요? 정방, 내, 내가 먼저 당신을 알게 됐잖아요.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예요. 내가 먼저라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아니라는군. 낭자가 또 아니라고 했어.

그게 아니라,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해결할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걸요. 그리고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낭자는 계속 나를 부정하고 그 자식을 인정하고 있어. 낭자가 그 자식을 인정한다고.

진호가 아무런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정교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저택 본채의 대청이 아니라 정교랑의 거처였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강주로 돌아갔지만,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정교랑은 널찍한 본채로 옮기지 않고 여전히 다소 협소한 거처에서 생활했다.

세 사람에 몸종 둘까지 좁은 방 안에 있다 보니, 진호와 정교랑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한 걸음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게다가 진호는 정교랑의 코앞에서 정교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교랑이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 번도 가깝지 않았던 사람처럼, 단 한 번도.

진호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구나. 난 모르는 일이다 보니 낭자에게 웃음을 샀네요.”

“공자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우습지 않아요.”

정교랑의 대답에도 진호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 우습지 않단 말입니까. 난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운걸요.

진호가 고개를 들어 문밖의 여름 경치를 내다보았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진짜예요, 진 공자님. 저희 사돈댁 일이 진짜 그렇다니까요?

저희 노부인께서 그 바보의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이름이 교랑이에요. 교교라고도 하고요.

교교. 병주에서 홀로 강주까지 돌아온 교교.

진호가 손으로 바둑판 위에 선 하나를 슥 그었다.

교교는 어떤 사람일까?

반근이 썼던 공책도 돌려보내고, 새로 들인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라고 짓다니.

진호가 연못 가득 뒤덮은 연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바보는 정말 속 좁고 뒤끝 있는 사람인가 보네.

아씨, 벌거벗고 있던 사람이 또 왔어요.

진호가 고개를 들자 문 안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흩날렸다.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품이 큰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이 사람이 바로 도관에 10년 가까이 버려져 있다가, 홀로 천 리 길을 돌아온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뚝딱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차와 음식에 까다롭고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보기도 전에 소문으로 알 수 있다던 그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일단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만 목숨을 살려 낸다는 그 교교 낭자구나.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젓다가 헛웃음을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니야, 어쩌면, 사실은, 예전에…….

진호가 또 고개를 저었다.

예전 그때, 낭자가 보수사의 차를 맛보고 싶다기에, 내가 명해 선사와 바둑 한 판을 두고 얻어온 차나무를 선물하러 왔을 때…….

그때야. 맞아, 그때가 틀림없어.

내가 차나무를 선물하려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데, 낭자의 앞에 다구가 놓여 있었고, 낭자의 반대편에 놓인 방석에는 사람이 앉았다 간 흔적이 있었어.

그때만 해도 낭자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낭자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때 그 손님이, 바로 진안 군왕이었구나.

낭자, 차를 마시고 있었군요?

진호가 킁킁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여태 마셔왔던 차와 다른 향이었다.

이건 무슨 차예요?

그쪽이 마실 차는 아니에요.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요.

진호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때 나는 정 낭자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엄두도 못 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정 낭자와 마주 앉아 낭자가 직접 우려 준 차까지 마셨구나.

선착순이라, 선착순. 뒤늦게 낭자를 알게 된 사람은 나였구나.

늦은 사람은 나인데, 어떻게 그와 비교를 하겠어. 그자를 먼저 알게 됐다는데, 내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이길 수 있겠어.

정말 우습구나. 참으로 우스워.

“정 낭자, 그렇다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진호가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답례하자,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만 해 줘요. 낭자는 한동안 혼례 준비로 무척 바쁠 테니까요.”

진호가 정교랑의 뒤에 있던 두 몸종을 쳐다보고는 정교랑에게 물었다.

“반근들이 다 바쁜가 본데, 몸종은 충분해요? 어머니께 몇 명 더 골라오라고 부탁드릴까요?”

“아니에요. 바쁠 게 없어서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하긴, 혼사는 집안일이니까요.”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복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웃었다.

“경성에는 사촌 오라비 일가도 있고, 집안에 사람도 많이 있을 테니, 혼사 준비에는 차질이 없겠군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호가 정교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답례했다.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던 진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돌렸다.

“아 참, 아직 간식 안 줬어요.”

진호가 웃으면서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간식?

주복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알겠어요.”

정교랑이 시녀들에게 과일 절임을 찬합 가득 채워 진호에게 주라고 했다.

“갈게요.”

진호가 찬합을 받아들고는 정교랑을 향해 씩 웃었다.

진호가 몸을 돌리고 대청 밖으로 나갔다. 느릿느릿 걷던 진호의 발걸음은 차츰 빨라졌고, 가림벽을 지나자 더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멀뚱멀뚱 서서 진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갔어? 이대로 간다고?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자, 그의 시선을 느낀 정교랑도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새카만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눈동자.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공자님, 조심히 가십시오.”

문 앞에서 웃고 떠들던 시종들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주육낭을 보고는 곧바로 예를 갖추어 그를 배웅했다. 주복은 시종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 세워 두었던 말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챈 주복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빠르게 걸어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말고삐를 쥐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 말굽 소리를 내며 진호의 옆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십삼!”

주복이 외쳤지만, 진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두 팔로 무언가를 감싼 채 걸어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보던 주복은 어쩐지 오늘따라 그가 더욱 왜소하고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팔로 뭘 안고 있는 거지?

아, 간식이 담긴 찬합이겠군.

“십삼, 십삼.”

주복이 진호를 서둘러 쫓아갔다. 진호의 걸음걸이가 워낙 빨랐던지라 주복은 어쩔 수 없이 큰 보폭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진호 가까이 다가간 주복이 진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진호가 앞만 보고 걷는 탓에 주복은 진호의 힘에 부쳐 두어 걸음 끌려가고 말았다.

“왜?”

진호가 주복에게 붙잡힌 게 영 언짢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복은 입만 우물쭈물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복은 진심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도 간식을 달라고 하지 않은 거야?”

진호가 웃으면서 찬합을 더욱 꽉 끌어안고는 한쪽 팔로 주복을 막으면서 재차 말했다.

“내 거 뺏을 생각은 마. 갖고 싶으면 자네도 낭자한테 달라고 해. 이건 낭자가 내게 고맙다는 의미로 준 거니까.”

진호의 말을 듣자, 새하얗기만 했던 주복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그때도 그 여인의 혼사 때문이었어. 정씨 가문에서 혼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여인을 아무한테나 시집 보내려고 했을 때도, 나와 십삼이 다급하게 그 여인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을 찾아주려고 난리를 쳤지. 지금처럼.

옛날 생각에 주복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난 일이 있어서, 두 사람과 놀아 줄 수 없어요.

저거 가져가서 먹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다른 데 가서 놀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구나.

주복이 진호와 진호의 품에 있던 찬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아.

“십삼.”

주복은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진호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주복은 더는 진호를 붙잡지 않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점점 더 멀어지는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 않지. 그 여인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건 무척 잔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쭉 어린아이처럼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사실 그게 잔인하다기보다는, 이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야. 잔인한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어이, 비키쇼!”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여기서 한참을 서 있더니만.”

“바보야 뭐야? 저리 비키라니까!”

때때로 행인들과 마차가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면서 길 한복판에 서 있던 주복의 옆을 지나갔다.

시끄러워 죽겠네!

주복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자리를 떴다.

“공자님, 말은요?”

“걸어서 돌아오신 거예요?”

“공자님, 공자님?”

주복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누군가가 주복의 팔을 붙잡았고, 그 덕분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육낭, 무슨 일이니?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어딜 다녀온 게야?”

주 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주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복이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애한테 갔다 왔어요.”

주복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주 부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주 노야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왜 그따위 몰골을 하고 있어?”

주복이 또 한 번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애 혼사가 정해졌어요.”

정해졌다고?

주 노야 내외가 깜짝 놀랐다.

“누구랑? 누구랑 혼례를 올리기로 했는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진안 군왕이요.”

주복의 대답에 주 노야 내외가 흠칫 놀랐다.

주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우리 육낭이 아니라? 이 녀석이 기뻐서 저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진안 군왕이라…….

“진안 군왕이라고?”

주 부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진짜야?”

“가짜일 리 있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 애도 좋다고 했고요.”

주복이 대답했다. 곧이어 마당 안에 주 노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이라니! 우리 교교, 역시 우리 교교는 남다를 줄 알았어!”

“노야, 노야, 무려 종친이에요!”

“그야 당연하지! 게다가 황실과 아주 가까운 종친이야! 나중에는 친왕 작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노야, 그럼 우리 교교가 왕비가 된다는 뜻인가요?”

“왕비라, 우리 교교는 황비를 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지.”

“어서, 어서 교교한테 사람을 보내서 제대로 좀 물어보거라.”

주복은 시종일관 멍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서 마당 안이 시끌벅적해졌다가 조용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 물어보셨으면, 전 이만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주복이 그제야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두어 번 돌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몸을 흔들거리며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주복이 귀가와 동시에 축제 분위기가 된 주씨 가문과는 반대로, 진씨 가문에는 진호가 돌아온 뒤로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가서 좀 봐야 하지 않겠어?”

여종 몇 명이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가지 말아라! 가서는 안 된다.”

진 부인이 손으로 여종들을 제지했다.

“하지만 십삼공자님께서…….”

여종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아니니? 나한테 와서 우는소리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십삼이 원칙을 어기고 싶다 해도 정 낭자가 원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십삼이 속상해서 좀 울고 싶다는데, 괜히 우리가 가서 방해하지 말자고.”

진 부인의 말에 여종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게 평소 같지가 않아서 말이죠.”

진 부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겠니. 십삼은 어렸을 때부터 정상인이 되고 싶어 했어. 그러다 보니 십삼은 정상인의 이상적인 반응을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꾸며 냈을 뿐, 진정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

하지만 지금 십삼은 그런 정상인들의 반응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거니까, 당연히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게지. 아마 지금 십삼은, 절대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걸 거야.”

진 부인이 말하다 말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십삼 얘기는 그만하자. 두 사람 얘기만 들어도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니까.”

여종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속상했지만, 진 부인의 말을 듣고는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속상한 일을 두고 윗전 앞에서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여종들의 표정은 몹시 우스꽝스러워졌다.

“부인,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나이가 꽤 있는 여종이 진 부인을 타이르듯 말하자, 진 부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농담한 게 아니야.”

진 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십삼의 반응이 이상한데도 내가 가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비정상이라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내가 그 비정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나까지 십삼에게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면, 자신이 비정상적이란 걸 남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십삼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

진 부인의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얘기에 여종들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여종들이 진 부인의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진 부인은 걸음을 옮겼다. 여종들도 서둘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어머니한테 들켜버렸네요. 우는 게 정말 못났는데, 너무 창피한걸요.”

“십삼, 누가 너 우는 거 보러 왔대? 이 어미는 너를 위로하러 온 거야.”

진 부인이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십삼한테 간식 좀 갖다 줘. 위로 좀 해줘야지.”

대청 문 앞에 다다르자, 진호가 팔걸이 책상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본 진호는 자신의 손에 쥐여 있던 과일 절임을 높이 흔들었다.

“이미 있어요, 그 여인이 만들어 준 거예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자 진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정 낭자도 참.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또 너한테 선물을 준다니? 괜히 더 속상하게?”

진 부인이 일부러 화난 투로 말했다. 진호가 웃으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정 낭자는 원래 그렇잖아요. 낭자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소자가 어떻게 그 여인에게 일편단심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진 부인이 입술을 삐쭉였다.

“그럼 계속 일편단심 해라. 나는 바빠서 이만.”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몸을 돌리자, 여종들도 재빨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몸을 돌린 진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 대신에 그녀의 미간에는 슬픔이 드리워졌다.

진 부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과일 절임을 천천히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참 달다.”

진호는 천천히 과일 절임을 씹으면서 자신의 품 안에 있던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랑 똑같아, 예전이랑 똑같아.

그러니까 급할 거 없어. 이 혼사도 절대로 성사되지 않을 거야. 그때는 그 얼토당토않던 놈을 정혼자라고까지 불렀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

진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찬합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정교랑,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죠? 그렇죠, 맞죠?

이틀 뒤, 사예감(司禮監) 사람들이 정씨 가문 저택에 들어섬과 동시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혼사를 올린다는 소문이 경성 전역에 퍼지면서 저잣거리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덕승루 화괴 다툼에서 고 관인이 정교랑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는 미담이 퍼진 지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덕승루에 웬 혈기왕성한 사내가 찾아와 고 관인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원수라며 화살을 쏘았다.

사내가 쏘아낸 화살은 경성 사람들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신랑감이 등장한 것이다.

황족, 군왕, 종친.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인물들 중엔 무관도 있고, 문관도 있고, 조정의 권력가도 있으며 죽마고우인 어린 무장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종친까지 나서서 정교랑과의 혼인을 원한다고 했다.

정교랑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벌써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았을 텐데, 정교랑의 혼인을 둘러싼 새로운 우여곡절 덕분에 경성의 이야기꾼들은 신이 나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도 잊은 채 새로운 판본의 <신선 낭자 혼례기>를 써 내려갔고, 경성의 다리 위, 찻집, 식당, 주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황궁 안. 평왕은 아무리 정사가 바빠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름이 났겠군.”

평왕이 냉소를 보이자,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가던 진십팔랑이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린 내시가 평왕의 옆으로 비켜서서 아첨의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던데, 어찌나 듣기 거북하던지, 정말…….”

평왕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원을 이룬 게야.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 본왕도 당연히 군왕을 축하해 줘야지.”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던 평왕은 진십팔랑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는 글씨 연습을 더 하지 않으셔도 돼요. 문서를 쓰실 때 조금만 신경 써서 쓰시면 될 거예요.”

진십팔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십팔랑은 궁에 있는 공주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고 있었다. 똑똑하고 부단한 노력을 쏟는 평왕을 가르칠 때와는 달리 공주들을 가르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평왕이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학문의 길에 오른 자는 단 하루도 게을러서는 아니 되며,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으니 본왕은 자만해서는 아니 되오. 부디 낭자도 본왕을 도와주길 바라오.”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이러시니, 뭇 학자들이 창피하겠사옵니다.”

“과찬이오.”

평왕은 입으로는 과찬이라고 말하면서도 몹시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찬이라니요. 전하처럼 이렇게 변함없이 학문을 수양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해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겉과 속이 달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이지요. 처음에 아무리 큰소리를 쳐 봤자, 결국에는 그저 그렇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마치 정 낭자처럼요.

처음에는 정말로 어떤 집안으로 시집을 가든 상관없고,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여러 소문으로 사람들의 신임과 명성을 얻고는 결국 황족한테 시집을 가는 것처럼요.

진십팔랑이 다시 붓을 쥐고 입꼬리를 올렸다.

정 낭자도 알고 보면 그저 그런 사람인 거지요.

말 몇 마리가 역참 문 앞에 도착하면서 역참 앞이 시끌벅적해졌다.

“정 대노야, 이 몇 필은 어떠십니까?”

역승이 물었다. 정 대노야가 말들을 힐끗 보고는 역승에게 물었다.

“마차를 몰기에 최상급인 말들이오?”

역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직접 고른 놈들입니다.”

“역승의 눈썰미를 믿어 보지.”

정 대노야가 웃으며 역승에게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었다.

“수고 많았소. 차나 한잔 마시면서 목 좀 축이시오.”

역승이 돈주머니를 받고는 활짝 웃었다.

“정 대노야,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역승이 서둘러 말 장수를 불러오자, 정 대노야의 사환은 흥정도 없이 말을 사들였다.

“정 대노야는 돈을 참 시원시원하게 쓰시네. 말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얼마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또 말을 바꾸시다니.”

“심지어 가격도 안 따지신다니까? 수고비라면서 돈을 이만큼씩이나 주시고. 우리 역참에 매일 저런 분들만 왔으면 좋겠네.”

“듣기로는 집안 어르신이 몸이 편찮으셔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라던데.”

“이야, 그렇다면 엄청난 효자시군.”

창밖으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지나가자, 정 이부인이 분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뭐라고? 정 대노야가 돈을 시원시원하게 쓴다고?

저 인간이 언제부터 그리 돈을 시원시원하게 썼다고? 웃기지도 않아. 예전에는 자기 입에 들어가는 차에만 돈을 들였지. 그뿐이야? 집안사람들이 자기가 아끼는 차를 한 잔이라도 더 마셨다가는 아주 살덩이를 떼는 것처럼 아까워했어!

돈 쓰는 데 시원시원한 사람들이라고? 조 집사도 그러고, 반근도 그러더니, 이제는 정 대노야까지.

어떻게 저렇게 돈을 펑펑 쓰겠어? 그야 자기네들 돈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 애는 정말 바보가 틀림없어. 그 돈을 내 손에 맡겨 준다면, 절대 저런 식으로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텐데!

정 이부인이 씩씩대면서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여종이 재빠르게 부축한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부인, 조심하세요.”

조심하라는 말에 정 이부인은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세간의 소문처럼 정말로 정강이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인대가 늘어지고 뼈에 금이 간 탓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다리는 띵띵 부어 있었다. 뼈가 다 붙기도 전에 이렇게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나게 되니, 정 이부인은 정말로 가는 길에 뼈가 부러지진 않을까 근심이었다.

“부인, 식사하세요.”

문밖에서 여종이 밥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가 급하다고 벌써 밥을 차려? 입맛 없다.”

정 이부인이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좀 드셔야죠. 말을 바꾼 것을 보아하니, 곧 길을 재촉할 듯해요. 또 길에 오르면, 언제 다시 쉴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여종이 말했다.

정 이부인은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정 이부인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말리면서 다독였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여종들은 위로보다는 타이르는 말을 많이 했다.

여종들은 이미 정 대노야가 기세를 역전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소문을 통해 정 이노야가 관직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정말 정 대노야의 말대로 정 노부인의 건강이 몹시 위태로운 거라면, 어쩌면 이 길은 정 노부인을 마지막으로 보러 가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 이노야는 관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강주에서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삼년상을 치르고 난 삼 년 후의 일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우리는 이부인을 모시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노야지.

여종들이 정 이부인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밥을 먹였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정 대노야는 떠나자는 말이 없었다.

“가는 거요, 마는 거요? 갈 거냐고 말 거냐고!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또 금방 해가 져서 야영해야 할 텐데!”

정 이노야가 정 대노야의 방 안에 들어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방 안에 있던 정 대노야는 서신 한 장을 손에 쥔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집에서 온 겁니까?”

정 대노야의 표정을 본 정 이노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어머니께서 벌써…….

“사낭이 보낸 것이다.”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그 요망한 것이 결국 태후에게 졌나? 그럼 축하할 만한 일인데.

정 이노야가 기대 섞인 눈빛으로 정 대노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교랑의 혼사가 정해졌다는군.”

정 대노야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말했다.

혼사가 정해졌다고?

“누구랑요?”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어!

딸내미의 혼사가 정해졌는데, 친아비는 아무것도 모르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진안 군왕.”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

고 관인도 아니고, 무려 진안 군왕이라니!

정 이노야는 귓가가 웅웅 울리는 듯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큰 경사라서 그런지, 정 이노야는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어서, 어서 마차를 준비해서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어, 어서요.”

정 이노야가 외쳤다.

꼭 빨리 가야 해. 일단 혼사부터 치르고 보자. 만에 하나 강주에 계신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 혼사는 기약 없이 미뤄질 수도 있어.

황실와 혼인을 맺다니. 무슨 준비를 해야 하지?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 같아서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야!

정 이노야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댔지만, 정 대노야는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님, 뭐 하는 겁니까? 빨리 가야죠!”

정 이노야가 재촉했지만, 정 대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니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집안 어른도 없이 여식의 혼사를 치를 수는 없잖습니까.”

맞아. 교랑이 혼사를 치르는데, 집안 어른이 없어서야 쓰나.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교랑이 우리를 강주로 돌려보냈단 말이지.

그 애는 무슨 일이든 빈틈없이 처리해 왔어. 혹 교랑이 이 혼사를 예상했다면, 과연 우리를 강주로 돌려보냈을까?

설마 이 혼사는 교랑의 예상 밖의 일인 건가? 그럼 우리는 지금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정 대노야가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건 사낭이 단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한 서신일 뿐이다. 경성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쓰여 있지 않았어. 그리고 교랑이 우리에게 일부러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고.

교랑의 말을 들어야 해. 교랑이 당장 경성을 떠나 강주로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정 대노야가 서신을 접어서 소매 안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지금 떠나겠다.”

정 이노야가 그제야 싱글벙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먼저 역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그래? 무슨 일이냐? 경성으로 가는 게 아니더냐?”

“이노야, 경성으로 간다는 말씀이 없으셨는데요? 대노야께서는 강주로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강주로 돌아간다고? 어째서 강주로 돌아간다는 거야?

“정말로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당연히 우리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터. 우리는 강주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될 일이다.”

정 이노야가 담담하게 마차 안에 앉은 정 대노야를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보 아니야?

내가 바보가 된 건지, 형님이 바보가 된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네.

“정괴! 미친 거요?”

신부 측 집안 어른들이 조용히 있는 동안, 신랑 측의 집안 어른들은 무척 시끌벅적했다.

“궁에 있는 아이들 중 처음으로 올리는 혼사네요.”

귀비가 웃었다. 자리에 있던 비빈들은 모두 웃으며 귀비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태후는 더욱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전부 다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

태후가 말하고는 이 소식을 수왕부 쪽에 전했는지를 물었다. 귀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했어요. 사흘쯤 후엔 수왕비도 이 소식을 알게 될 거예요.”

태후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왕비가 진안 군왕의 친모라고는 하나, 경성에 오면 손님이나 다름없으니, 어찌 됐든 이 혼사는 우리 쪽에서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그야 당연하지요. 진안 군왕은 태후마마의 슬하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귀비가 말했다. 태후가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진안 군왕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군왕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 궁에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황후마마의 궁에 있습니다, 마마.”

궁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위낭은 황후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는데, 육가아가 변을 당한 후로 육가아를 대신해 황후에게 효를 다하는 게로구나.

황제가 예전에 이런 말을 하면서 감탄했지.

육가아가 황후에게 그리도 효심이 지극하다고. 변을 당하게 됐던 이유 또한 황후를 위해 매화를 꺾으려다가…….

태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당초 군왕은 내 다리의 이쯤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았는데, 금세 그렇게 훌쩍 커 버렸어. 아이가 크는 속도는 참 빠르기만 한데, 무탈하게 키워 내는 건 참으로 어렵지.”

태후가 화제를 바꾸고 손짓을 해가며 진안 군왕의 키를 묘사했다.

태후와 비빈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밖에서 안비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비는 황궁에서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대상이었다. 황제가 밤마다 같이 있어 주고, 좋은 것만 먹고 마시며, 무엇을 원하든 황제가 다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배가 꽤 부른 안비가 웃으며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자, 태후가 다정한 손짓으로 안비에게 예는 생략하라고 말했다.

“어쩐 일로 나온 게냐. 날씨가 한창 더울 때인데.”

태후가 물었다.

“태의가 신첩에게 자주 걸어 다니라고 하기도 했고, 혹시 신첩이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하여 와 보았습니다.”

태후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귀비도 웃기는 했지만, 동시에 조소 섞인 눈빛으로 안비의 배를 쳐다보았다.

“안비가 도울 일이 뭐 있누. 몸 관리를 잘하는 게 우리를 돕는 게지.”

태후가 웃었다.

화기애애한 대화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태후궁에 모여있던 비빈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안비가 힘겹게 몸을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내시 두 명을 시켜 안비를 거처까지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귀비마마.”

안비가 자신보다 조금 더 앞서 걸어가고 있던 귀비를 불렀다. 귀비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안비 동생, 무슨 일 있어?”

귀비가 웃으며 묻자 안비는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귀비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더위를 너무 잘 타다 보니까, 얼음을 좀 더 쓰고 싶어서요.”

안비가 말했다.

후궁의 일들은 황후 대신 귀비가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후궁에서 먹고 쓰는 것들은 모두 정해진 양이 있었지만, 당연히 원칙보다는 사람이 중요했다.

“농담도 참, 그런 걸 물어볼 필요가 뭐 있어.”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태후궁 내시들이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마, 저쪽 정자에 가서 계속 말씀을 나누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날씨가 워낙 덥지 않습니까.”

어머, 귀한 몸이시라 이거지. 이젠 햇볕 아래 잠시 서 있는 것도 못 견디겠다 이거야?

귀비가 속으로 냉소를 짓고는 다시 한번 안비의 배를 쳐다보았다. 귀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 앞에 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마마, 저희 걸으면서 이야기 나눌까요?”

안비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손으로 귀비를 앞으로 안내했다. 귀비가 웃으면서 안비를 앞서가며 걸음을 옮겼다.

“그야 당연히 마마께 말씀을 드려야죠.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되니까요.”

안비가 좀 전에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네년이 어긴 원칙이 이미 수두룩하거늘.

귀비가 속으로 또 한 번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 일찌감치 말씀드려 놓고, 또 나한테 와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아나.

“동생이 괜한 걱정을 하네.”

귀비가 웃으면서 층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귀비가 층계에 발을 내디디는 것을 보고, 안비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괜한 걱정이라니요, 다 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실까 봐서죠.”

어찌 이렇게 버릇없는 말을!

귀비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안비의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 저거 하나 믿고 이러는 거겠지.

“동생, 그렇지 않아.”

말을 마친 귀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안비는 잠시 자리에서 주춤하며 층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배 위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 펴고는 이를 악물며 걸음을 내디뎠다.

“마마, 제 설명을 들어주…….”

안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귀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팔이 잡힌 귀비는 화들짝 놀라면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쳤다.

“뭐 하는…….”

귀비가 입을 열자마자, 안비는 귀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귀비는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귀비의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아직 태후궁에서 멀리 가지 않은 비빈들이 깜짝 놀라 층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멀리서 태후궁을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도 그 광경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비가 층계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본 진안 군왕이 경악한 얼굴로 앞을 내다보았다.

저게 지금 무슨 일이지?

“위낭.”

황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때, 본궁이 네게 주는 혼례 선물은 마음에 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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