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60)

-소문-

이번에 고씨 가문이 정 낭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이야. 그 여인의 앞길을 막았던 자들의 말로를 생각해 보면…….

평왕의 나이가 찼고, 태자 책봉 상소문이 이미 중서문하성을 통과한 상황이다. 폐하 또한 태자 책봉을 준비하고 계시니, 황실의 외척인 고씨 가문이 경성을 떠날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

선황께서 일찍이 붕어하신 탓에, 폐하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셨어. 그러면서 자연스레 친정에 의지한 태후 때문에 고씨 가문의 세력이 오늘날처럼 커진 것이야.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돼.

태후께서 얽혀 있는 관계다 보니, 아무리 폐하라도 고씨 가문을 함부로 대하실 순 없지. 조정 대신들 또한 몇 번씩이나 고씨 가문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결국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어. 하지만 그 여인이 고씨 가문을 상대한다면…….

만에 하나 그 여인이 한 발도 물러서지 못하겠다면서 고씨 가문과 대립할 경우, 마지막 승자가 누가 되든 간에 필시 둘 중 하나는 경성을 떠나게 되겠지.

매정하게 들릴 말이겠지만, 고씨 가문이나, 정 낭자나 모두 머리 아픈 존재들이야. 그러니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진소가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버지!”

같은 시간, 진(秦)씨 가문.

진십삼은 진 시강과 함께 마당에서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정말로 폐하께서 윤허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진 시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 이유가 있겠느냐? 십삼,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게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게냐?”

진십삼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 관인이 어디 정 낭자에게 어울릴 사내입니까. 고 관인은 분명 구겨진 체면을 위해서 이런 강제 혼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인연을 맺는 겁니까, 원수를 맺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게다. 자고로 천자란 만백성의 천자이지, 한 사람만의 천자가 아니란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별들은 너무 밝아서 제성(帝星)의 밝기를 덮을 때가 있지. 그건 좋지 않은 현상이야.”

비록 고씨 가문이 황실 종친이기는 하나, 지금처럼 세력이 막강해지는 것은 황실에서 반기지 않을 일이야. 고씨 가문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진십삼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정 낭자가 원수를 지지 않고 정말로 혼사를 치르면요?”

진 시강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 낭자가 고 관인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게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질문이 우스웠는지,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진십삼은 대꾸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집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사서 고생하며 자신을 괴롭힐 필요 있어요?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다 똑같아요.

“울긴 뭘 잘했다고 우는 게요! 다 당신 때문이잖소!”

이번 일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진진한 추측을 내놓는 사람들과 달리, 주씨 가문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어제부터 주 부인의 울음소리는 한시도 끊이지 않았고, 주 노야의 성난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주육낭은 부모님의 언쟁을 지켜보는 게 불편한지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정교랑도 걸음을 멈췄다.

“교교!”

주 부인이 정교랑을 보자마자 황급하게 문가로 달려왔다.

“교교, 난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는데, 태후가 동의하지 않아서…….”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주 부인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주 부인, 왜 그러세요? 부인께서 정 이부인 대신 궁에 들어가셨다길래, 저희 아씨께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거예요.”

시녀가 서둘러 주 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감사 인사? 감사 인사를 어떻게 하려고?

화들짝 놀란 주 부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내 다리를 부러트릴 작정인가?

시녀의 말이 끝나자, 몸종 두 명이 크고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저희 아씨가 직접 담그신, 몸에 좋은 술이고요. 여기 있는 건 비단, 이쪽은 장신구들이에요. 잘 보관해두셨다가 선물할 때 쓰세요.”

눈앞에 놓인 화려한 선물들과 시녀의 말에 주 부인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이지? 내게 감사하다고? 심지어 마실 거, 입을 거에 장신구까지 내주면서?

감옥에서는 처형 직전의 사형수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내준다던데, 설마…….

“교교!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다오!”

주 부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서 정교랑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이 무슨 짓이오! 당장 부인을 모시고 물러가거라.”

주 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치고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주 부인을 방에서 나가게 했다. 주육낭이 나서서 주 부인을 다독이고는 그녀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났다.

“네 말은, 교랑이 정말로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게야?”

주 부인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육낭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애는 남 탓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 탓하기보다는, 아예 그 사람을 죽여 버리지.”

주 부인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주육낭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자기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한 겁니다.”

“내가 그 애를 도왔다고? 내가 태후의 심기를 건드려 아예 교지까지 내렸는데?”

주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태후의 결정이잖아요. 어머니는 그 애를 위한 일을 하셨고, 어머니의 마음이 그 애한테 닿았으면 된 겁니다.”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여전히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정교랑이 선물한 술동이를 들어 술잔에 조금 따르고 주 부인에게 건넸다.

“어머니, 그 애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빚은 술인데, 한 번 맛보세요.”

주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애가 선물한 것인데, 저게 뭐일 줄 알고!

“그 애가 만든 건 이 세상에서 제일 구하기 힘든 겁니다.”

주육낭이 주 부인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은 잠시 술동이를 쳐다보다가, 주 부인에게 주려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놀란 주 부인이 주육낭의 손에 든 술잔을 빼앗으며 눈물을 흘렸다.

“육낭, 육낭, 괜찮니?”

주육낭이 주 부인을 향해 씩 웃었다.

“이 술은 너무 순하네요. 무원산만 못해. 그래도 어머니께서 드시기 딱 좋은 맛이에요.”

주 부인을 진정시킨 주육낭이 다시 대청 쪽으로 걸음을 돌리자, 주 노야와 정교랑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우리도 두려워할 거 없다. 태후가 네게 명을 내릴 배짱이 있다면, 우리도 그 명을 거역할 배짱이 있느니라.”

주 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교지를 어기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은 자식들의 혼사이기도 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한들 우리를 비웃는 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린 태후를 비웃을 게야.”

고 관인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바람에 지금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태후가 웃음거리가 되어 버리면…….

“무서울 게 뭐 있어! 기껏해야 우리 주씨 가문이 짐 싸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주 노야가 무릎을 세게 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정교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는데, 이깟 일로 우리가 왜 손해를 봐야 하나요.”

정교랑의 말을 듣자, 주 노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큰소리를 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는 게 가장 좋긴 하지.

“교교, 우리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다. 칼산을 넘고 불바다를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절대 후퇴란 없을 것이야.”

주 노야가 다시 한번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외숙부님,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번 일은 작은 일이기도, 아주 간단한 일이기도 해요. 거절할 수 없는 혼사라면 그쪽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도 방법이죠.”

그쪽이 하자는 대로 하자고?

“어떻게?”

주 노야가 물었다.

“혼사를 치르면 되죠.”

정교랑이 말했다.

혼사를 치르겠다고?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다.

“또 무슨 짓을 할 작정이야? 우리가 손해 볼 필요는 없다면서, 왜 네가 손해 볼 짓을 하려고 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웃긴 뭘 웃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박장대소하는 진십삼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주육낭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진십삼은 웃음을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나는 혼사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웃을 수밖에 더 있나.”

진십삼이 말했다. 주육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십삼이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에이, 급할 거 없어. 본인도 급하지 않은데, 자네가 급할 게 뭐 있다고.”

진십삼이 너스레를 떨었다.

“본인이야 당연히 급하지 않겠지! 그 여인은 멍멍 짖는 개하고 혼인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여인이야.”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주육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자네가 그 개가 되는 건 어떻겠나?”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는 소리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환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전하,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사환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진안 군왕이 됐다고 손을 저었다.

“비가 오니까 좋네. 올해는 작황이 조금 나아지겠어.”

진안 군왕이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사환은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 후,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일찍 쉬시지요. 이대로 더 밤을 지새우셨다가는 몸에 무리가 가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탁자 앞으로 돌아가 관보를 손에 쥐었다.

“괜찮다. 내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사환은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탁자로 다가가 등불을 켰다. 그러고는 화로에 올려진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왔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과 소속을 고한 후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경성에 갔던 자가 돌아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손에 쥐고 있던 관보를 내려놓았다.

“어서 들라 하여라.”

비 내리는 밤의 방 안은 시종이 물건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떠들썩해졌다.

“이건 태후마마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신 옷입니다.”

시종이 물건을 꺼내며 말했다.

“여기에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마마께서 이리도 먼 곳까지 옷을 보내주신 게냐.”

진안 군왕이 웃었다.

“옷뿐만이 아닙니다. 저건 황후마마께서 보내 주신 신발이옵니다.”

시종이 웃으면서 다른 한쪽에 놓인 보따리를 가리켰다. 진안 군왕이 시종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신발은 특별히 군왕 전하를 위해 만든 거라고 하셨습니다. 발에 맞는 신발이 있어야 길을 걸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내디딜 수 있다고요.”

시종이 이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보따리를 풀고 신발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신발에는 황금색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여의(如意).

“마마께 감사드리옵니다. 반드시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신발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시종들이 물건을 정리하고 물러나자, 실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선물은 다 보냈느냐?”

진안 군왕이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는 잘 지내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이번에는 시종의 표정이 조금 난감해 보였다.

“잘 지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시종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가 고 관인과 덕승루에서 화괴 다툼을 했습니다.”

멈칫하던 진안 군왕이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 여인과 다툴 배짱이 있었던 게냐? 어떤 방식으로 화괴 다툼을 하였느냐? 누가 더 배짱이 두둑한가? 아니면, 누가 더 돈이 많은가?”

시종이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지막에 결국 미인을 얻은 자는, 물론 정 낭자겠지?”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 관에 한 달이랍니다. 그 일로 경성이 아주 발칵 뒤집혔어요.”

진안 군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태후께서 고 관인과 정 낭자에게 혼인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시종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돌연 멈췄다.

밤사이 봄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방 안에 켜 둔 등불이 점차 어두워졌다.

“낭자에게 정혼자가 생기면 내가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고십사 그놈은, 낭자와 인연을 맺기에는…….”

진안 군왕이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붓을 탁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투성이잖아!”

진안 군왕이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던져버렸다. 탁자 주위에는 구겨진 종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언제 딱 한 번이라도 정 낭자의 의지였던 적이 있나! 무슨 일이든, 항상 정 낭자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물어볼 틈도 없이 일어났어. 죄다 다른 이들이 원해서 일어난 일들이지!”

진안 군왕이 이를 부득 갈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이토록 쓸데없고 우스울 줄이야.”

깊게 심호흡을 한 진안 군왕이 곧장 문밖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 있던 시종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여봐라. 가서 유 대인에게 알리거라. 본왕이 지금 당장 석당(石唐)을 만나러 가겠노라고.”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석당은 이번 무평 민란의 우두머리 중 두 사람을 뜻했다. 석당은 본디 두산(竇山)의 산적들인데, 혼란을 틈타 이번 민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부에서 최선을 다해 가뭄을 구제하고, 진안 군왕까지 천자를 대신하여 무평으로 와 민란을 평정하니,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 대부분이 투항한 상황이었다. 투항하지 않은 자들은 두산으로 올라가 피신했다. 두산은 산세가 워낙 험한 곳인지라, 석당 패거리는 이를 무기 삼아 계속해서 투항을 미뤄왔다. 관부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끝끝내 순순히 항복하지 않는 그들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며칠 전에 석당 패거리가 투항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와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지만, 산적들과 합의를 보러 가는 사람을 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과 어떤 식으로 합의를 봐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진안 군왕이 직접 산적들과 대면하겠다고 하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전하,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석당 일당이 오늘은 담판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또 싫다고 하고, 담판하러 오는 사람이 누구는 됐고, 누구는 안 되느니 하며 까탈스럽게 굴지 않느냐.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관부가 못 미더워서겠지. 그러니 본왕이 직접 가겠다는 게다. 이 정도면 그들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이는 거니까.”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하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이십니다. 두산 산적들은 워낙 잔인하고 교활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산적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산적이 두렵다고 해서, 이대로 질질 끌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진안 군왕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단 말이다.

“황당하군!”

편한 옷을 입은 채 단잠을 자다 깬 고능준이 시종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쥔 서신을 탁자 위로 세게 내리쳤다.

먼 길을 다급하게 달려온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야!”

고능준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고능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경성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정 낭자가 내 며느리가 된다는 말이야?

이거 참!

지금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초래할 결과야. 결과를 추측하려면, 이 일의 시발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먹지 말고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아라.”

고능준이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시종이 알겠다고 한 뒤,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그 관기의 계략에 빠졌다는 게냐?”

고능준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모(毛) 수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배후 같은 건 없었고, 순전히 고 관인을 피하기 위한 관기의 계략이었습니다.”

시종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고능준이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이번 일을 찬찬히 곱씹었다.

“폐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고?”

고능준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께서 폐하께 여쭤보셨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의 혼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구나.”

“대인, 많이 안 좋은 일일까요?”

시종이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고는 성난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일일 때는 내 생각이 나지 않고, 나쁜 일일 때만 내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생각나더냐.”

시종은 고개만 숙일 뿐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상 황제가 이번 혼사를 반대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번 혼사에 대해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황제가 이번 일을 아예 나 몰라라 하니, 그제야 모 수재가 고능준에게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무려 정 낭자야. 다른 여인도 아니고. 무려 신선의 비방을 얻은 여인이라고.

일이 예상한 대로,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땐, 분명히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야.

시종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모 수재의 어두운 표정과 잔뜩 화가 난 고능준의 반응을 보자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시종은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고능준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각자 계산하는 바가 있겠군. 그럼 우리 고씨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잘만 계산하면,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어.”

정 낭자 같은 여인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게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 낭자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문에 들어오게 되느냐는 거야.

이런 경우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운명의 굴레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의 이점을 생각해 봐야겠어.

안 좋은 점이야 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실컷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둘 수는 없느니.

시종이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을 챙기거라.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다.”

고능준의 말에 시종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외직에 있는 관리들은 부임지를 마음대로 떠날 수는 없다. 특히나 황제의 부름도 없이 경성으로 가는 것은 더욱 금기시된 일이었다. 심지어 관리의 고향이 경성이라고 해도, 부임지를 떠나 경성으로 갈 수는 없었다.

“노부인의 건강이 요즘 안 좋다고 했지?”

고능준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칙을 피해갈 방법이 하나 있다면, 바로 충효를 핑계로 대는 일이었다.

시종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왜 노야께서는 탄핵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성으로 가시겠다는 거지?

“노야, 이번 일, 정말로 나쁜 일이 아닙니까?”

시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고말고.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내가 직접 가서 정 낭자를 한 번 봐야겠다. 다만…….”

말을 멈춘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창밖의 시커먼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왠지 조금 불안하구나.”

“불안하시다고요? 왜요?”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힘드니, 직감이라고 할 수밖에. 정 낭자와의 혼사는 사소한 일이지만, 자꾸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뭘 잘못하셨는데요?”

시종의 질문에 고능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경성을 떠난 게 잘못이야. 경성에 남은 인사들을 통해 잘 대비했다고 여겼는데, 결국 사람에 관한 일이다 보니, 말 한마디의 차이, 혹은 간발의 차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수가 있어.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들은 지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구나.”

고 관인이 덕승루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고 관인!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기생 어미 막씨가 흥분한 어투로 소리쳤다.

퉤! 저 늙은 요부가 누굴 욕하는 거야? 내가 왜 여길 오면 안 되는데? 그 정씨 놈들이 무서워서 여기도 못 올까 봐?

정사낭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잘만 놀러 다니는데, 나 고십사는 왜 사람을 피하고 숨어다녀야 해?

고 관인은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여길 안 오겠나? 덕승루가 얼마나 좋은 곳인데.”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은 벌써 온 경성에 소문이 났다. 고 관인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고 관인을 향해 축하한다는 인사를 쏟아냈다.

고 관인은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축하해라, 축하해. 이런 미담은 단연 만천하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 마땅하지.

“고십사!”

포효에 가까운 목소리에 덕승루 내에 작은 진동이 울린 듯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모를 젊은 사내가 서슬 퍼런 얼굴로 활을 들고 문가에 서 있었다.

저게 누구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주육낭!”

문밖에서 누군가가 사내를 향해 소리치자, 그제야 사람들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주육낭!

뒤늦게 주육낭을 쫓아온 진십삼이 그의 팔을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은 말게!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얘기하면 되잖나.”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을, 말로 해서 되겠는가!”

주육낭이 고함쳤다.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

덕승루 대청 안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은 거의 화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분한 모습이었다.

“고십사!”

주육낭은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경위를 설명하려는 기색도 없이 진십삼을 뿌리치고 활을 들었다. 주육낭은 정확히 고 관인을 향해 화살을 올리고 활을 겨누었다.

“군자는 죽을지언정 모욕은 당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내 손으로 네놈을 죽여 주마!”

깜짝 놀란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진십삼이 몸통을 세게 부딪힌 덕에, 주육낭의 화살은 고 관인을 빗겨 나가 옆에 있던 기둥에 박혔다. 화살이 어찌나 세게 날아갔는지, 기둥에 박힌 화살의 깃털이 격하게 흔들렸다.

화살이 빗나가자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육낭은 아예 활을 내던지고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 들어 고 관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청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살인이야!”

덕승루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한데 섞여 한창 어지러운 틈을 타, 진십삼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높은 층계에 올라가 아수라장이 된 대청 안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당한 일에는 황당하게 맞서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를 미담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미담 또한 얼마든지 추문으로 바꿀 수 있는 법.

말이란 전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던가. 말할 용기가 있는 자,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말하는 자, 그자가 바로 승자이리라.

“그 강주 바보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태후가 내던진 찻잔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태후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내시를 노려보았다.

“바깥에서 또 뭐라고 하더냐?”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고 관인이 여색을 몹시 밝히기에, 태후께서…….”

“그 입 다물라!”

내시가 순순히 대답하려고 하자, 귀비가 호통쳤다.

“민간에서 나불대는 헛소리를 어찌 태후마마께 고하려 드는 게냐!”

내시가 고개를 더욱 숙이고는 입을 꾹 닫았다. 화가 난 태후가 냉소를 지었다.

“말하거라. 왜 말을 못 해? 그들이 말할 수 있다면, 애가도 들을 수 있느니라.”

귀비가 서둘러 태후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마마, 기껏해야 태후마마께서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한다는 말일 겁니다. 그것 외에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귀비가 내시를 향해 손짓하자, 내시가 재빨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애가가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했더냐? 그 여인이 그런 일들을 벌여서 고씨 가문의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방법까지 생각했겠어? 그 여인이 먼저 우리 고씨 가문을 건드린 건데, 어째서 그 여인만 억압받고 억울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게냔 말이야!”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주 공자와 정말로 진지하게 혼담을 주고받은 거라면 모르겠으나, 가짜 혼담으로 태후마마의 눈을 속이지 못하게 되니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네요. 참으로 오만방자한 아이입니다.”

귀비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맞아. 그 여인이 오만방자한 게야! 그 여인은 항상 그런 식이었어. 이제는 아주 안하무인이 되었구나!

“다 황제가 그 여인을 봐줘서 이리된 것이야!”

태후가 소리치며 당장 황제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이번에 태후께서 드디어 짐의 고충을 알게 되셨구나.”

소식을 들은 황제가 웃었다.

“태후께서는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시는 거지만, 짐은 매일 고집 세고 교만한 조정 대신들을 상대하고 있느니라.”

내시는 황제를 따라 미소를 지으면서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터무니없이 황당한 일이었는데, 이 지경이 된 것도 참 황당하구나. 그러게 누가 고씨 가문더러 정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라 했더냐? 짐도 정 낭자를 멀찍이 피하고 사는데 말이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귀비가 물었다.

황제가 태후궁에 도착할 때쯤, 귀비는 태후와 황제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태후께서 폐하께 정 낭자를 질책해 달라고 하셨지만, 폐하께서는 일찍이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사소한 혼사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도 이번 일에 더는 관여하지 말고, 황당한 일을 벌인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비가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좋은 기회에도 폐하께서는 정 낭자의 기세를 꺾기는커녕,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우리 고씨 가문을 비웃겠다는 뜻이지?”

“마마, 폐하께서는 웬만하면 정 낭자의 기세를 꺾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쨌든 정 낭자는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비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귀비가 정교랑을 알게 된 이후로 정교랑은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귀비는 차라리 정교랑에게 그런 비술이 있다고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수차례 위험이 있었지만, 우연이든 운이 좋았든 간에 결론적으로는 끝까지 황궁에 남은 진안 군왕처럼, 귀비는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끝까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귀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정녕 그 여인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게냐?”

“마마, 고 대인께서 지금 경성으로 돌아오는 중이라는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귀비가 크게 기뻐했다.

“또 뭐라고 하더냐?”

“고 대인께서 이번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 화낼 필요가 없으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하셨습니다. 태후께서 교지를 내리시기도 했고, 정 낭자의 부모가 있는 한 이번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요. 그 외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든 말든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건 대인께서 경성에 도착하신 후에 의논하자면서요.”

이것도 사소한 일이라고? 예전에는 진안 군왕도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니, 이번엔 정 낭자도 사소한 일이라고 하네? 고 대인한테는 도대체 어떤 일이 큰일이라는 말이야!

귀비가 음, 대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는? 아직도 태후궁에 계시느냐?”

“폐하께서는 안비와 함께 산책하고 계십니다.”

내시가 대답하다가 멈칫하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황후마마께서도 같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가 거긴 또 왜 있는 게야? 육가아 같은 아이를 하나 더 데려다 키우고 싶어 그러나?”

말을 뱉은 귀비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육가아 같은 아이를 하나 더 얻고 싶어서,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질책하지 않으셨어.

정 낭자가 지닌 비술 덕분에 폐하의 옥체는 점점 더 강건해지고, 황후도 갑자기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지.

폐하는 고씨 가문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계시고, 폐하께서 평왕을 꾸짖는 횟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어.

게다가 태자 책봉은 아직도 지지부진하기만 하고.

뭔가 잘못됐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귀비가 두 손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오만 가지 생각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귀비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허공을 둘러보았다.

설마 폐하께서 뭔가를 알아채신 게 아닐까? 그때 평왕이 아우를 해쳤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아신 건가?

예전에는 황자가 평왕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 일을 덮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안비에게도 황자가 생겼잖아.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랬어. 안비가 회임한 태자가 무척 귀중하다고. 태백성이 인간계로 내려온 것이라고.

그래. 지금 진안 군왕이나 정 낭자의 혼사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그건 다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들이니까.

내 아들, 우리 평왕이 무탈하게 옥좌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

“마마, 마마?”

누군가가 귀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귀비가 비명을 지르면서 정신을 차리자, 내시가 귀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사죄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한 귀비의 모습에, 내시는 하는 수 없이 귀비의 어깨를 톡톡 치며 그녀를 부른 터였다. 그러나 아랫사람 신분으로 귀비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엄청난 결례이기에,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귀비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호통쳤다.

“마마.”

내시가 몸을 일으키고 귀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그때 말씀하신 그 일은 다 준비되었습니다. 며칠 내로 해결될 겁니다.”

그 일?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귀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 떠난 떠돌이 말입니다.”

내시가 조용히 귀띔했다.

집을 떠난 떠돌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지…….

그제야 생각났는지, 귀비가 내시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엥? 귀비마마께서 한시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근심하던 큰일이 왜 갑자기 사소한 일이 된 거지?

“그만 가자.”

귀비가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내시에게 당부했다.

“안비를 잘 지켜보거라.”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미담 좋아하네. 누구 좋으라고 그걸 미담으로 포장하나? 이젠 더욱 우스운 추문이 되었으니, 그들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진십삼이 웃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에이, 낭자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죠. 이건 낭자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니까, 저는 감사 인사 못 받겠습니다.”

진십삼이 답례하며 웃었다.

“제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었어도, 낭자는 아주 잘 지냈겠지요. 이번 일은 단지 제가 차마 더는 지켜보기 힘들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마차가 준비됐어요.”

반근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과 주육낭은 가볍게 인사하고 멀어져가는 정교랑과 반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십삼의 웃음이 미묘하게 굳었다.

“똑같은 것 같단 말이지.”

“뭐가 똑같아?”

주육낭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당한 일, 미담, 추문. 이 모든 게 정 낭자의 눈에는 또 다 똑같은 거겠지.”

다 똑같다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말했잖나. 저 애는 개한테 시집을 간다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거라고.”

주육낭이 두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저 여인은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아. 자기와 혼사를 치를 사람이 누군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개가 되고 싶잖아. 왜? 자네는 싫은가?”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주육낭을 향해 물었다. 주육낭의 얼굴이 미세하게 상기됐다.

아내를 빼앗긴 원통함! 그 여인은 내 아내요!

덕승루에서 자신이 외친 말들이 귓가에 맴돌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육낭은 고개를 홱 돌리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마음 놓고 나한테 그 연극을 시킨 거야?”

진십삼이 멈칫했다.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고 그래.”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놀랍게도 주육낭은 예전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담이든 추문이든, 그 애한테는 다 같은 일이겠지만, 자네와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자네의 집안에서도 다르게 생각할 테고.”

주육낭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십삼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육낭, 이제는 자네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자네 집안과 우리 집안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건가?”

시작이라…….

사실 지금이 시작은 아니었지. 시작은 아주 오래전, 정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준 이후부터였어.

진십삼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육낭의 귓가에 주 노야의 말이 맴돌았다.

진씨 가문의 십삼은 더는 옛날의 절름발이가 아니다.

진씨 가문…….

그래. 진십삼은 진씨 가문이었지. 황실의 친척인 공주부 진씨 가문. 진십삼은 그런 진씨 가문의 열셋째다. 진호는 황실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중신인 진씨 가문의 자제야.

진씨 가문은 우리 주씨 가문과 다르고, 진십삼도 나와 달라. 우리 집안은 그 여인 하나 때문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것이고, 또한 그 여인이 좌지우지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해.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나는 진씨 가문의 자제이니, 나라는 존재를 가문에서 뚝 떼어 놓고 보기는 힘들지. 그래도 그 여인에게는 모든 게 다 똑같으니까, 나 또한 그 여인에게 있어서 남들과 다름없을 거야. 하지만 이왕 다 똑같을 거면, 왜 굳이 고씨 가문에게만 좋은 일을 해야 하지? 누가 봐도 이번 일은 두 가문이 원수를 지는 건데, 왜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연을 맺는 것처럼 보여야 하지? 정 낭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고씨 가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하나?”

진십삼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난 절대 고씨 가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정 낭자에게는 모든 게 다 똑같다고 해도, 난 달라. 그 여인이 정해 둔 원칙이 아니었다면, 오늘 활을 잡은 사람은 내가 되었을 거고, 내가 바로 자네가 저지른 황당한 일을 벌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육낭, 내가 자네한테 그 역할을 시켰다는 것이 화가 났다면, 기꺼이 사죄하겠네.”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공수의 예를 표했다. 주육낭은 잠자코 진십삼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틀린 것 같기도 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그 연극을 하고 싶었고, 나도 날 위한 일을 한 것뿐이야.”

말을 마친 주육낭이 돌연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이름을 불렀다.

“진호!”

진호.

“자네와 있을 때는 내 이름이 진호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주복, 말하게.”

“자네가 눈치 빠르고 잔머리를 잘 굴린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 안 그럼 네놈의 다리를 부러트려 줄 테니까.”

주복의 말에 진호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듣게 잘 설명했잖나. 그리고 이게 뭐 숨겨야 하는 일도 아니고. 나는 정 낭자가 고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네.”

진호가 잠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원치 않아. 정 낭자 또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니, 낭자도 이 혼사를 원치 않을 거야.”

뭐라는 거야.

진십삼의 말에 주복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호의 모습에 그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참 딱해.

“자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쨌든 그 애가 자네와 혼사를 치를 일은 없겠군.”

주육낭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설마 자네한테 시집가는 걸 원하겠나?”

진호가 웃으면서 원하겠느냐는 물음에 힘을 실었다.

그 여인이 뭘 원하는지는 귀신이나 알겠지!

주복은 답답한 마음에 정교랑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허구한 날 이상한 일만 하러 다니는 애인데, 그 애가 뭘 원하는지 누가 알겠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술이나 빚으러 다니질 않나.”

주육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야, 곧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 돌아오니까.”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고?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고?”

주복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게. 시간이 참 빨라.”

진호가 팔짱을 낀 채 감탄했다.

모든 게 참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야.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기분이 나빠.

4월 중순의 경성에는 정 낭자와 고 관인에 관한 이야기와 정씨 가문에서 일어난 재산 다툼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뜨거운 화제가 또 한 번 저잣거리를 달궜다.

거리에 있던 사람은 아우성을 치며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났소?”

누군가가 뛰어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아니. 아무 일도 아니오.”

이상하게도 대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평소대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기세로 신나게 이야기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들 별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야!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더욱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왜 뛰는지 묻기 전보다 더욱 빨리 달리는 듯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다들 각자 크고 작은 주전자를 손에 들고 뛴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과 주전자를 보고 누군가가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오늘이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었어!”

그 외침과 함께,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따라 뛰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그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 뭐 어쨌다고? 남의 집안 기일에 다들 왜 몰려가는 거야?”

누군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보다 못한 행인이 그에게 말했다.

“술을 뿌리는 날이잖소. 일 년 중 딱 오늘 하루만 무원산을 마실 수 있다고.”

행인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 사람을 타박했다.

“무원산 양이 얼마나 적은데. 몰려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는 몫이 적어지는 것을 모르시오? 멍청한 사람 같으니라고.”

무원산!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 무원산!

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을 욕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다들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먹을 수 있다는 무원산이 바로 오늘 나오는 거였구나! 어쩐지 다들 손에 그릇을 들고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뛰더라니.

큰길가로 몰려나온 더 많은 인파가 성 밖으로 이동했다. 성문 위에 서 있던 병졸들은 성 밖을 향해 달려가는 인파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작년에 노제를 지냈을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네.”

병졸 중 한 명이 감탄했다.

“사람이 죽은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추모 행렬이 있을 줄이야. 죽을 만한 가치가 있네.”

다른 병졸이 성벽을 짚으며 말했다.

물론 모두가 이런 거창한 추모 행렬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무원산 술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누군가가 냉소를 보이면서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이 반박했다.

“술 때문이라 한들, 그게 뭐 어때서? 무원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이오. 그러니 당연히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도 같이 기록되겠지.”

“그러니까 말이오. 나도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술 때문이든, 물 때문이든 아무렴 상관없다오.”

“자네가? 그러려면 일단 정 낭자 같은 의누이부터 구해 봐.”

성문 위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뭣들 하는 게야!”

상관의 목소리가 성벽 한쪽에서 전해져 왔다.

병졸들은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고 대열을 맞춰 섰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추모 행렬을 쫓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근처에는 벌써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무원산 술을 뿌리기 시작했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성벽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주위가 시끄럽긴 해도 무원산 형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범강림이 가장 앞에 서 있고, 그의 뒤로 정교랑과 황씨가 서 있었다. 황씨는 소보아(小寶兒)를 붙잡아 주며 서봉추 형제에게 술을 올리고 큰절을 하도록 해 주었다.

소보아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황씨의 손길이 답답했는지, 손을 뻗어 무덤의 비석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황씨가 서둘러 소보아를 제지하려 하자, 범강림이 말했다.

“놀게 놔 두시오. 그렇게라도 부자가 함께할 수 있으니까 좋구먼.”

그 말을 들은 황씨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눈물을 훔쳤다.

범강림은 지전(紙錢) 뭉치를 정교랑에게 건네고, 화로에 지전을 던져 넣는 정교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이, 이번 혼사는 어떻게 생각해?”

범강림이 불쑥 물었다.

고씨 가문이 태후에게 사혼을 청하자 주씨 가문의 여섯째 아들이 아내를 빼앗긴 원통함을 호소했다는 얘기에, 경성의 도박장들은 정교랑이 결국 권력에 굴복하여 고씨 가문에 시집갈지, 소꿉친구였던 사촌과 혼사를 치를지에 대해 흥미진진한 도박판을 벌였다.

범강림이 누이를 그리워하는 형제들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무덤 앞에서 이야기했다.

“소꿉친구라니요.”

정교랑이 웃었다. 소꿉놀이를 하고 놀 어린 시절, 그녀의 옆은 쓸쓸하고 고독하기만 했다.

범강림도 웃음을 터트렸다.

“저잣거리 소문이 그래. 이렇게 말해야 구미가 당기잖아.”

“큰 도련님이 이젠 농담도 잘하시네요.”

반근이 뒤에서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교랑 일행의 대화 소리에 차갑기만 했던 무덤 주위의 분위기가 한결 따뜻해지는 듯했다.

“누이는 어떻게 생각해?”

범강림이 물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역시…….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짓더니 지전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럼, 누구한테 시집을 갈 거야?”

범강림이 또 물었다.

“누구든 괜찮아요.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정교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누구든 괜찮다니!

범강림은 그런 정교랑의 태도에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말이 그래! 이럴 줄 알고 일찍이 부인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었는데, 부인은 누이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으니 원.

“그럼 누이가 혼사를 올리고 싶었던 상대는 있어?”

범강림이 이어서 물었다.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없잖아요.”

범강림이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왜 생각해 볼 필요가 없어? 시집을 안 가고 싶은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인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누이는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

정교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혼사가 무슨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못한 황씨가 나섰다.

시누이가 어렸을 때 바보여서 도관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러니 어미가 딸에게 해 주는 말들도 들은 적 없겠지. 시누이는 사람이나 일에 대처하는 자세도 상당히 이상했는데, 아마 어렸을 적부터 이런 것들을 옆에서 알려 준 사람이 없어서겠지?

“여인에게 혼사는, 평생의 행복이 달린 문제예요. 그러니 아무에게나 시집을 갈 수도 없고, 아무나 시집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신랑감을 아주 정성껏 골라야 하죠.”

황씨가 말했다.

“올케가 큰 오라버니를 고른 것처럼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황씨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범강림을 바라보았다.

“네. 이이 같은 사람을 골랐으니, 이번 생은 복에 겨웠다고 할 수 있죠.”

범강림이 민망한지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누이 얘기를 하는 도중에, 왜 그 얘기가 나오는 거야.”

“올케는 운이 정말 좋았네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내가 잘 고른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도 꼭 신랑감을 잘 골라야 해요. 아무한테나 시집가도 된다고 하지 말고요.”

황씨가 말했다.

아무한테나 시집가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게 누구든 다 똑같다는 말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가문을 멸족에 이르게 할, 가문의 원수가 될 사람에게 날 시집보내셨는데, 그런 내가 아무렴 누구에게든 시집을 못 갈까. 혼사가 무슨 대수라고.

“그럼, 오라버니와 올케는 내가 누구에게 시집을 갔으면 좋겠어요?”

범강림 부부가 놀란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걸 우리한테 묻는다고?

“우리가 원하는 건 소용없어요. 아가씨가 원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야죠.”

황씨가 말했다.

“나요? 난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내게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일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들이에요. 너무 자질구레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러니까, 아씨께서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기는 한 거네? 원하시는 게 있다니!

반근이 감격스럽기도 궁금하기도 한 마음에 물었다.

“어떤 일인데요, 아씨?”

“살아가는 것.”

정교랑이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

범강림과 황씨가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살아가는 게 어려우세요?”

반근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삼백 년 후에도 정씨 가문이 혈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정교랑이 무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손에 쥐고 있던 지전을 화로 안에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화로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범강림이 무덤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아. 살아가는 게 어렵긴 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차가운 비석이 되어 버리니까. 이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래. 죽었으면 죽은 거지, 더는 이 세상에 없으면 없는 거지.

범강림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닫았다. 그도 정교랑을 따라 손에 남은 지전을 전부 화로에 던져 넣었다.

참으로 훌륭한 산이로구나.

진안 군왕이 눈앞에 나타난 산을 보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수비는 좋겠지만, 공격은 어려운 곳이군.”

불어오는 거센 산바람에 진안 군왕의 두봉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가지 않으시는 게…….”

관리 몇 명이 진안 군왕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재차 만류하자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석당 그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투항할 의지와 성의는 있다는 거겠지. 나는 그들의 성의를 믿소.”

진안 군왕이 허리춤에 걸린 향낭 주머니를 한 번 만지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어서 따라가거라! 어서!”

관리들이 병사들을 재촉하자, 열댓 명의 병사들이 흙먼지를 휘날리며 진안 군왕을 뒤쫓아갔다. 관리들이 잔뜩 마음을 졸이며 진안 군왕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대인, 전하께서 호위 네 명만 남기고 산채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희에게는 돌아가라고 명하셔서 어쩔 수 없이…….”

앞장서 있던 병사가 하는 말에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일을 어쩐담!”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모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초조해하는 사이, 한 관리가 콧방귀를 뀌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군왕은 혼자서 공로를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충언과 만류를 무시하고 홀로 들어가신 거잖소. 그러니 정말 무슨 일이 난다고 한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우리가 군왕을 억지로 보낸 것도 아니니, 혹여 정말 무슨 일이 난다고 해도 자업자득인 셈이야. 그러니 우리까지 황천길로 끌어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지.

“병사들에게 석당의 산채를 포위하고 나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전하거라.”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산 아래에 횃불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야영을 위해 천막을 치고 막사를 만들었지만, 막사 안에서 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안 군왕은 이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뿐더러, 사람을 시켜서 오늘은 산채에서 하루 묵고 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거기에 감금당한 건 아니겠지? 정말로 석당 두 사람과 환담을 하며 밤을 지새우겠답시고 산채에 남았으려나?”

“자기가 제갈공명이고, 석당 두 사람이 사마의인 줄 아나? 일부러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술수를 부리는 건지!”

“이건 허튼짓이오!”

“벌써 밤이 되었으니, 산채를 공격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불리하오.”

“군왕 전하께서도 참 철없는 분이구려.”

다들 속수무책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한탄만 늘어놓고 있었다.

“해가 밝기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오. 그리고 해가 밝는 즉시 산채를 공격합시다.”

관리 하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군왕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생기지 않든 관리들은 필시 산채를 공격해야만 했다. 어떤 결론이 나든 한마음으로 충성을 바쳤다는 성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리 하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 있는 커다란 산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간 뒤겠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자신이 데리고 온 시종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 남기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석당 두 사람이 이토록 겁쟁이들인 줄은 몰랐군.”

진안 군왕이 웃음기가 서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연회석에 앉아 있던 모습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데려온 시종들을 모두 잃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갇혀 있는 처지였다. 그뿐 아니라, 문가와 창가에는 당장이라도 진안 군왕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화살이 그를 향해 촘촘하게 겨눠져 있었다.

“전하, 틀렸습니다. 정말 겁쟁이들이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없었겠죠. 이번 기회에 전하께 교훈을 하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시라고요.”

사내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하자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충고 고맙네. 하지만 겁쟁이가 아니라면, 등불을 밝히는 건 어떻겠나? 죽기 전에 적어도 나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명색이 군왕인데, 나를 죽인 사람도 모르고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나.”

진안 군왕의 대답에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만약 제가 누구인지 아신다면, 죽음에 억울함이 없겠습니까?”

사내가 비웃었다.

누군가가 사내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몸수색을 마쳤습니다. 시위들이 암살용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군왕의 몸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을 겁니다.”

웃음기가 더 짙어진 얼굴의 사내가 입을 뗐다.

“좋습니다. 등불을 밝혀서 내 얼굴을 보여 주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시간도 드리지요.”

“고맙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자 옷자락이 스치며 사락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환경에 오래 있었던 사내는 등불을 밝히지 않아도 진안 군왕의 크고 건실한 체격을 느낄 수 있었다.

“참 불쌍한 군왕일세.”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서 불빛이 반짝이더니 심지에 불이 붙었다.

밝은 불빛이 갑작스레 보이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심지에 붙은 불은 금방 꺼지고 작은 불씨만 남았다.

작게 남은 불씨에서 뭔가 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어이, 군왕 전하, 무슨 심지가 그렇소? 불이 붙기도 전에 꺼져 버리다니. 이렇게 된 이상 내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운명이려니 하시오. 그만 황천길로 가시구려.”

사내는 냉소를 지으며 석궁을 들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진안 군왕의 윤곽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황천길에 오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굉음이 들리더니 환한 빛이 폭발했다.

누군가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지?

문가에 서서 석궁을 당기고 있던 사람들에게 방에서 튕겨 나와 바닥에 쓰러진 사내가 보였다. 곧이어 느껴지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숨 막히는 화약 냄새 때문에 그들은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앞에 불빛이 또 한 번 번쩍이더니 치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지?

이건 자과(子窠)라는 화약탄이에요. 안에 든 건 화약이고요. 이걸 안쪽에 넣어서……. 그리고 이건 심지고, 이렇게 불을 붙이면 돼요.

이거라면 폭도와 정면으로 맞서게 됐을 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죠.

진안 군왕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르고 넋이 나간 채로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화구를 조준했다.

“황천길에 오르게나.”

산채 전체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폭발음이 난 곳을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두목님, 두목님!”

아수라장이 된 곳을 향해 뛰어오던 두 사내가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불길에 비친 주위에는 온통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젊은 사내 하나가 멀쩡한 모습으로 불길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은 신선이 강림하기라도 한 듯 성스러워 보였다.

“저게 뭐지?”

“큰 소리 한 번 났을 뿐인데, 저렇게 큰 불덩이를 내뿜었다고?”

“군왕은 분명히 빈손이었는데!”

“저게 뭐야?”

비명과 신음, 겁에 질린 채 내지르는 소리, 그리고 정체불명의 굉음이 산채에 울려 퍼졌다.

빈손으로 들어간 군왕이 불덩이를 만들어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지 못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저, 저건 신선의 보호잖아!”

두목 두 사람이 중얼거리면서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연신 땅에 이마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저분은 신선의 보호를 받는 게 분명해! 신선의 보호를!”

산 위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자, 산 아래에 있던 관리들과 병사들은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와 위쪽을 내다보았다. 뒤이어 산 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그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산을 올라라!”

황급한 호령과 함께, 병사들이 재빨리 줄지어 산 위로 돌진했다. 양쪽에 있던 횃불이 천막 앞에 서 있던 관리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한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4월 하순, 무평 민란을 평정했다는 기쁜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황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황궁 안을 가득 메웠다.

“황실 자제들이 응석받이로 자라서, 전장에 나가 천하를 평정했던 선조의 용맹함이 없어졌다고들 비웃었는데, 우리 위낭을 좀 보거라. 이 일 이후로 또 누가 감히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봐야겠군.”

황제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진안 군왕께서 표기장군(驃騎將軍: 관직명)의 용맹함으로 적진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황제의 말에 맞장구쳤다. 옆에 있던 귀비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표기장군은 무슨. 일개 산적들을 어찌 흉악한 오랑캐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야.

황제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아니다. 그 정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귀비는 황제가 말은 그렇게 해도, 속마음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가는 남들이 어찌 말하든 상관없다. 우리 위낭이 용맹하든 용맹하지 않든 다 상관없어.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알고. 보여주기식으로 산 아래까지만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직접 사람을 이끌고 산채 안까지 들어간 것이냐?”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진안 군왕은 일부러 별 위험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공을 축소하여 서신을 썼다. 하지만 무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황제는 곳곳에 배치된 소식통들을 통해 이번 무평 민란에 관한 모든 내막을 하나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다.

석당의 산채는 이번 민란에서 가장 큰 세력이 마지막까지 은신하던 곳이었다. 진안 군왕이 홀로 산채에 들어가 석당을 투항시키고 민란을 평정했다는 이야기는 듣기에도 몹시 위험했지만, 실제로는 더 위험했으리라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석당 산채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진안 군왕뿐만이 아니었다. 민란을 주도했던 사람 중, 이미 관부에 의해 격파된 세력이 산채에 중재인을 보낸 일이 있었다.

중재인들은 석당 두 사람이 우유부단한 틈을 타 몰래 진안 군왕을 암살하려고 했다. 만약 진안 군왕이 산채에서 암살 당한다면 이는 석당 일행이 저지른 짓으로 치부될 테니, 석당 두 사람은 결코 투항할 수 없고 반역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민란 잔당들의 계략은 제법 뛰어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일이 흘러갈 뻔했지만, 마지막에 진안 군왕이 중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불발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석당 두 사람은 결국 투항을 결심하고 민란의 잔당을 척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 뒤, 석당 두 사람은 산채 문을 활짝 열고 관부의 병사들을 환영했다.

“폭죽으로 그놈들을 죽였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게 무슨 어린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태후가 호통쳤다.

그러게 말이야.

황제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종 네 명이 모두 살해됐다는 건, 그놈들이 훨씬 우위를 차지한 상태여서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었다는 뜻인데, 그 상황에서 위낭이 우두머리를 죽였어?

위낭에게 그놈을 어떻게 죽였냐니까, 폭죽으로 죽였다고 대답했지.

이씨 가문의 폭죽으로.

“내가 경성을 떠날 때, 야간에 신호를 보낼 용도로 폭죽을 가져왔다. 당초 무원산 형제들의 노제를 지낼 때, 이무가 정 낭자가 하늘로 쏘아 올린 폭죽을 보고, 저리 높이 쏘아지는 폭죽을 직선으로 발사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만든 게 바로 오늘날의 돌포탄이지. 그 후로 이씨 가문에서 만드는 폭죽도 전부 개량하여 더욱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어. 좀 전에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손에는 무기 하나 없고,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 보니 마구잡이로 향낭에 넣고 다니던 폭죽을 던졌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딱 그놈을 맞혔지 뭐냐.”

이 말은 산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산채를 뚫고 들어왔을 때 진안 군왕이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듣고도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얼굴이 모두 새까맣게 탄 것을 보아 화약 폭발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재인들은 빠르게 진안 군왕의 시종들을 모두 죽인 뒤, 무기도 없는 진안 군왕을 상대했을 터.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폭죽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폭죽 소리가 워낙 크고, 폭발 때문에 불길까지 번지게 되어 몹시 당황한 중재인들은 진안 군왕을 놓치게 되었고, 뒤늦게 민란 잔당의 속셈을 알게 된 석당은 산채에 남아 있던 중재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민란 잔당들은 석당을 사지로 몰기는커녕,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됐다.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황제가 고개를 저으면서 감탄했다.

그런 행운은 용감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거겠지.

“진안 군왕이 신선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진안 군왕이 인간계에 강림한 신선과도 같다면서,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군왕을 향해 큰절을 올리면서 신선처럼 떠받들었다네요. 그래서 석당 두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조정에 투항한 것이라고요.”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하늘의 뜻을 의미한다는 말에,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하지만 황제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상황이 그렇잖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주위에 있던 잔당들이 한꺼번에 바닥에 쓰러졌을 테니. 더구나 군왕은 짐이 보낸 칙사가 아닌가. 짐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한 것이니, 하늘의 뜻이고말고.”

“성질나 죽겠어!”

귀비가 소리치면서 탁자를 뒤엎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급기야 귀비는 탁자에 대고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어느 자식이 친아들인지 구분도 못 하시나! 누구는 하루가 멀다고 칭찬하고 지켜 주기 급급한데, 왜 친자식한테는 하루에 세 번을 꾸중해도 부족한 것처럼 트집을 잡지 못해서 안달이시냐고! 뭐? 하늘의 뜻? 하늘의 뜻이라고? 나중에 남의 자식이 하늘의 뜻이 되면, 그때도 웃을 수 있으시려나?”

내시들이 황급하게 귀비 주위를 에워싸며 그녀를 만류했다. 내시들은 바닥에 깨진 찻잔과 접시 조각들이 귀비의 발에 밟히기라도 할까 몹시 두려운 기색이었다.

“마마, 폐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좋아하셨잖습니까. 이번 일은 폐하께서 군왕을 천자의 대리로 보낸 것이므로 기뻐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군왕을 애지중지 떠받들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마마, 너무 과한 걱정은 삼가시는 게…….”

“본궁은 과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본궁은 화가 나는 게야!”

귀비가 격노하면서 소리치고는 휘장을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아주 쓸모없는 놈들밖에 없어! 시종들도 다 죽였다면서! 그렇게 좋은 기회인데도 군왕을 죽이기는커녕 폭죽 따위에 목숨을 잃어? 네놈들은 어쩜 그리도 쓸모없는 것들을 구해 온 게냐? 이 일을 광대놀이 정도로 여기는 게야?”

내시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손사래를 쳤다.

“마마, 마마, 말씀을 삼가십시오. 삼가셔야 합니다.”

귀비가 악을 쓰면서 휘장을 세게 끌어내리고 뒤돌아서서 탁자를 향해 발길질했다. 하지만 실수로 발가락을 세게 부딪히게 되자 악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 마마, 큰일 났습니다”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황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귀비와 어지러운 방 안을 보고 깜짝 놀란 궁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또 얼마나 큰일이 났느냐?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싹 다 말해보라고! 괜히 하루에 하나씩 이야기하지 말고, 한꺼번에 이야기하란 말이다!”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궁녀가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귀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태백성을 품는 태몽을 꾸셨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궁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번에는 또 뭘 품에 안았다고 하디?”

“마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하옵니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허튼소리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정말로 그런 꿈을 꾸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에 태백성이 정말로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고?

귀비가 바른 자세로 고쳐앉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월식이 태백성과 만나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진안 군왕이 무평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급보와 함께 온 경성에 퍼졌다.

일반적으로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서북에서 오랑캐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보다 큰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무평 민란은 달랐다.

민란을 평정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천자를 대신해서 백성을 위로하러 무평으로 간 진안 군왕이 홀로 석당 산채에 쳐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딱 네 명만 데리고 들어갔대.”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진안 군왕 혼자서 의연하게 산채로 들어갔대.”

흥미진진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 뒤로 박자감 있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눈부신 금빛이 번쩍하더니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에 대한 도가의 존칭)께서 나타났습니다. 태상노군께서 주문을 외우고는 신광검을 촥 하고 휘둘렀더니, 악당들이 한 번에 사방으로 튕겨 나가더군요. 그 후 진안 군왕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와서는, 소매를 홱 털고 호통쳤습니다. ‘네 이놈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이더냐! 당장 조정에 투항하도록 하여라!’”

이야기꾼이 손에 쥔 나무판을 탁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찻집 안에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청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별실 안. 젊은 사내 한 명이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육낭, 뭐가 웃겨서 웃는 건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흥미진진한데 뭐.”

주복이 웃으면서 탁자 위에 놓인 건과를 한 움큼 집어 들고 자신의 입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편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어 이야기꾼의 말에 집중했다.

“진안 군왕은 본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왕비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관음보살께서 웃으며 금으로 만든 박을 품에 안겨 줬다더군요. 꿈에서 깬 수왕비는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진안 군왕이지요. 보살님께서 안겨 준 동자이기에 진안 군왕을 곁에 두면 아이도 잘 생기고, 재물 운도 좋아진다고……···.”

이야기를 듣던 주복이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릴 기세로 입을 벌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돈주머니를 탁자 위로 던졌다.

“그만 가세.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진안 군왕과 얼마나 원한이 깊은 자기에 저러나 모르겠군.”

주복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진호를 따라 나왔다.

“재밌잖아. 군왕 전하께서 정말로 복이 많으시긴 한가 봐. 폭죽으로 적을 물리치다니. 이런 경우는 아마 전무후무하겠지?”

“폭죽으로 적을 무찔렀다는 말, 자네는 믿나?”

진호의 물음에 주복이 진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웃었다.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자네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두 눈으로 봤다고 해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람들은 제 눈으로 본 것을 믿는다지만, 그 눈 또한 믿을 바가 못 되지(所信者目也, 而目猶不可信 - 공자).”

“에이,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이 해결되긴 했잖아.”

주복이 말했다.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방금 나온 찻집을 돌아보았다.

찻집에 잔뜩 몰린 사람들 때문인지, 이야기꾼은 침까지 튀기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군왕 전하에게 복이 많다면, 친왕은 어떻겠나?”

진호가 냉랭하게 말하자 주복은 진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군왕 전하는 복을 타고났으니, 나중에 태묘(太廟: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편전에 위패를 모실 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친왕은 딱히 복을 타고나지 않았어도, 태묘 정전의 끄트머리라도 차지할 수 있는 거고. 십삼, 군왕과 친왕은 한 글자 차이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뜻으로 복을 타고난 자가 갈리지 않나.”

“하늘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나 훤히 알고 있으면, 본분을 지킬 줄 알아야지. 지금의 군왕은 제 본분을 잊었어.”

진호가 말했다.

“본분을 잊긴 뭘 잊어. 폐하께서 백 명의 관리들을 동원하여 귀환을 환영하고, 평왕에게 천자를 대신해 군왕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령했는데, 무평을 구제하러 간 병사들과 관리들이 한사코 사양했다더군. 이 얼마나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자들인가? 적어도 본분은 알고 있다고 해야지.”

주육낭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진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고작 민란 하나 평정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군왕이 상대한 자들은 백성들이거나 기껏해야 산적들 정도야. 민란 하나로 천자가 귀경길을 환영할 정도라면, 우리 서북 군사들의 공로는 어떻게 환영할 건데?”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어깨로 주복을 밀쳐냈다.

“잘난 체는. 그건 본분을 지킨 게 아니야. 이번 일로 공로를 세우고 명성을 얻은 것도 모자라 폐하 앞에서 겸손함까지 지킨 게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주 잘 아는 자니 고명하다고 할 수밖에.”

주복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자네는 허구한 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게 힘들지도 않아? 똑똑한 건 알겠는데, 정작 그 머리를 제대로 쓸 곳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그 여인의 일을 어떻게 도울지나 빨리 생각해 봐.”

그 여인의 일.

진호가 대꾸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건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하는 일이지. 하지만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필요로 한 적이 없어.

주씨 저택으로 돌아온 주복과 진호는 때마침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서는 정교랑과 마주쳤다.

“어디 가?”

주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경왕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복은 대수롭지 않게 알겠다고 걸음을 옮겼지만, 진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 낭자.”

정교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계속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진안 군왕 전하께서 뭘 하셨기에, 경왕을 돌봐 주기로 한 거죠?”

진호가 웃으면서 물었다.

“내게 부탁을 했는데, 마침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에게 부탁하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었군요.”

정교랑은 웃으며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랐다.

“뭐 하는 거야?”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팔꿈치로 진호를 툭 쳤다.

“궁금하잖아.”

진호가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궁금할 게 뭐 있다고?”

주복이 물었다.

“낭자가 누구에게 시집갈지 궁금해.”

진호가 웃었다.

주복이 덕승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탓에 고씨 가문은 낭패를 봤지만, 덩달아 소란을 피우지는 않고 조용히 지내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고 대인이 나설 모양이야.”

진호가 말했다.

“어제 중매인이 정씨 가문에 갔다던데, 그쪽 사람들은 참 낯짝도 두꺼워.”

주복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런 때엔 낯짝이 두껍지 않은 게 멍청한 거지.”

진호가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리면서 말했다.

“이래서 고 대인의 수가 평범하지 않다고들 하는 거야.”

“그럼, 우린 뭘 해야 하지?”

주복이 진호가 건넨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물었다.

나도 이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건가?

진호가 고개를 들어 주복을 쳐다보았다.

오후의 햇볕이 붉게 달아오른 소년의 거친 얼굴을 비췄다. 소년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가 뜨거운 햇볕 탓인지, 아니면 좀 전에 들이켠 따뜻한 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하다는 거야.”

진호가 웃으면서 자신의 손에 쥔 찻잔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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