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권 - 115화 (115/160)

교랑의경 20권

-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마마께서 오랜만에 평왕 전하를 뵙고 있기도 했고, 폐하와 함께 세 분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시던 중이라, 그런 사소한 일은 방해가 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황후마마께서는 잠시 앉아 계셨다가 금방 궁으로 다시 돌아가셨고요. 오가는 길에 계속 가마에 타 계셨고, 가마에서 내릴 때는 언제나 궁녀 둘이 양옆에서 황후마마를 부축하고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죽을 때가 되어 잠시 기력을 되찾았나 싶어서요.”

귀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시를 나무랐다.

“허튼소리!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라!”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재빨리 귀비에게 아첨을 떨었다.

“마마 앞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평왕 전하께서 태자가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장차 천자가 되실 거고요. 나중에 황후마마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더라도, 이곳 내궁에서 황후마마는 텅 빈 껍데기일 뿐, 실제로 가장 존귀하신 분은 바로 귀비마마 아니십니까.”

이때다 싶은 내시가 얼른 아부를 떨며 귀비를 안심시켰다.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평왕이 태자로 책봉되지 않는 한, 본궁은 영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다.”

귀비가 문밖을 내다보면서 두 손을 꼭 잡았다.

고 대인의 말씀이 맞았어. 마마께서는 마음의 병을 얻으신 게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거라. 본궁은 진안 군왕이 경성으로 돌아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본궁은 진안 군왕에게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도 더는 듣기 싫다고 전해라.”

귀비가 ‘좋은 소식’이라는 네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귀비의 살기 어린 말을 듣고도 내시는 겁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저하면서 고민할 뿐이었다.

“마마, 너무 급한 거 아닐까요? 천천히 하셔도…….”

내시가 조용히 말했지만, 귀비는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천천히는 무슨 천천히! 십 년씩이나 뜸을 들인 것으로도 부족하더냐?”

내시는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맞는 말이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본궁의 말을 명심해라. 본궁도 네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잘 알고 있어. 본궁에게 신중히 하라고, 더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한 걸음을 놓치면 다음 걸음도 놓치게 되고, 다다음 걸음도 놓치게 된다. 너희들은 진안 군왕 따위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게지? 죽이고 싶을 때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지만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라면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너희들, 이런 생각을 안 했느냐? 벌써 십 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그놈을 해치울 기회가 두어 번은 더 있었어. 그런데 번번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먹는 것으로 해치려 했더니, 이 태의가 정성을 쏟아 고쳐냈고, 사냥하러 나간 틈에 없애 버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평왕이 중간에 나타났다. 드디어 황궁 밖으로 나갈 기회가 생겨 늑대 떼를 불러왔더니, 생판 모르는 행인들과 함께 야영하며 늑대들을 물리쳤지. 쉽게 죽이기에는 그놈 명줄이 보통 질긴 게 아니야.”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놈은 운이 너무 좋고, 명줄이 너무 질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운은 점점 더 좋아지고, 명줄은 점점 더 질겨질 거다. 너희들이 손쉽게 죽이기에, 그놈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귀비의 말에 내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신 말씀이옵니다, 마마. 소인이 당장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겠습니다.”

내시가 잠시 주춤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씀대로, 태자 책봉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소인이 즉시 대인들께 말씀을 여쭈러 가겠습니다.”

귀비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본궁이 급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너무 상대를 얕봐서 그래.”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은 황후를 보러 가야겠다. 이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본궁이 친히 가서 축하해야지.”

귀비의 말에 내시는 서둘러 궁녀들을 불러와 귀비가 편히 환복할 수 있도록 물러났다.

잠시 뒤, 귀비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본 내시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긴 하네.

진안 군왕이 이번에 귀비에게 결례를 보인 것과 황후마마의 병세가 갑자기 호전된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쳤지만, 이내 내시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설령 연관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황후의 건강이 아무리 좋아진다 한들 결국 황후일 뿐이고, 진안 군왕이 제아무리 황제와 태후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이번 기회로 공로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결국 군왕일 뿐이야.

이번 일로 자신을 향한 질투와 시샘만 더하고, 남들에게 더욱 눈엣가시가 된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태자 책봉이 가까워지니, 황제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발악하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댈 수 있도록.

생각해 보니,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의 메뚜기와 죽기 직전에 잠깐 기력이 좋아지는 사람들 같군.

내시가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대낮의 덕승루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에 사내 일고여덟 명이 관기를 하나씩 옆에 끼고 둘러앉았다. 그중 단연 제일 돋보이는 사람은 정사낭의 옆에 앉아 있는 주 낭자였다.

주 낭자는 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고, 별다른 장신구 없이 옥비녀를 하나 꽂고 있었었다. 진한 화장이 아니어서 더욱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 낭자에게서는 다급하게 단장한 티가 났다.

“주 낭자가 사낭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했나 보네. 제대로 치장하기도 전에 달려오다니.”

옆에 있던 관리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주 낭자가 소매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의 영혼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주 낭자는 오로지 정사낭에게만 그런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은 모두 정사낭에 대한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관인께서 아직 다친 곳이 낫지 않아 출타하시기 불편하실 줄 알았어요. 소인 홀로 며칠 동안 심심하고 무료했는데, 관인께서 갑작스레 오시는 바람에 소인은 정말…….”

주 낭자가 아양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정사낭을 탓했다. 주 낭자가 한 손으로 정사낭의 팔을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말을 이어갔다.

“소인은 정말 창피해요. 소인이 꽃단장을 마치고 오도록 부디 공자님께서 기다려 주셔요.”

별실 안에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런 단장도 하지 않고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관기는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단장에 차이가 있다면 손님에 따라 단장하는 정도가 다를 뿐, 관기들은 절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리에 앉은 사내들은 당연히 주 낭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 낭자가 공연히 정사낭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저런 말과 연기를 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주 낭자의 모습이 연기인 걸 알면서도 사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여인이 자신을 위해 연기까지 해 가며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게 즐겁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기 때문이었다.

덕승루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조회를 마치고 평왕을 따라 평왕부로 온 고 관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고 관인과 평왕의 앞에서도 가희와 무희들이 가무를 펼치고 있었다.

“전하, 아버지께서 가희와 무희들을 왕부에 두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고 관인이 먼저 입을 뗐다. 평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평왕부의 총관이 예를 올리면서 먼저 대답했다.

“관인, 왕부에서 양성하는 이들이 아니오라, 태후마마의 탄신일 축하 연회에 가무를 선보이려 잠시 불러온 자들입니다. 전하께서는 늘 자중자애하는 분인데,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겠사옵니까.”

“됐네. 본왕은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자네의 부친처럼 본왕을 어리석은 이로 취급하지 말게.”

고 관인이 서둘러 알겠다며 아첨의 미소를 보였다.

“전하께선 글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십니다. 조정 대신들 말로는 이번에 평왕 전하께서 과거 시험을 보셨더라면 아마 십 등 안에는 충분히 드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평왕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인지라, 평왕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본왕이 그 문제들을 풀어보긴 했네. 별것 아니더군.”

고 관인이 술잔을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생이 평왕 전하께 진사주를 바치겠나이다.”

평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신선거의 진사주가 아닌 것이 아깝군.”

신선거 얘기에 고 관인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신선거에는 대단한 신선이 살고 있나 봅니다.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다니.”

고 관인이 이를 악물고 술잔을 비웠다.

신선거는 정씨 가문의 것이었고, 최근 고 관인과 정씨 가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평왕도 알고 있었다.

“그 낭자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군. 진안 군왕도 그 여인을 연회석에 초대하고 경왕을 부탁한 일로 그 여인이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경왕부를 당당하게 드나든다지? 태후마마께서 경왕에게 붙여둔 궁인들은 그 여인에게 말도 못 건다더군. 무슨 말만 물어도 그 여인이 호통을 친다면서.”

평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고 관인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기색으로 술잔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전하, 이게 다 황실에서 그 여인을 너무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어서가 아닙니까. 여인네 하나가 무당 노릇을 하면서 이리 거만하게 구는데, 이러다가는 폐하께서 그 여인을 궁으로 모셔와 부적을 쓰게 하고 굿까지 할 판입니다.”

그 여인이 진안 군왕과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어. 게다가 바보인 경왕의 병도 말끔하게 고칠 수 있다고 들었고. 이러다 그 여인이 폐하의 눈에 들어, 폐하께서 그 여인의 말을 듣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면 큰일인데.

폐하 앞에 있을 때마다 걸림돌이 되는 진안 군왕 하나로 부족해 천자를 쥐락펴락하는 신선 낭자까지 더해진다면 내 앞날은 아주 엉망진창이 될 게야!

평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네 하나일 뿐인데, 어찌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정녕 말이 됩니까?”

고 관인이 씩씩대며 화를 냈다.

여인네라.

평왕이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없을 리가 있나. 여인네라면 지아비를 하늘로 삼아야 하는 게 숙명 아닌가. 그러니 그 여인에게 신랑감을 하나 찾아주면 그만이지.”

신랑?

고 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평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여인과 혼례를 올리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이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하겠지만 고 관인이라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평왕이 잠시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눈썹을 으쓱하고 말했다.

내가?

고 관인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천것을 누가 좋아한다고.”

고 관인의 반응을 보자, 평왕은 자신의 방법이 꽤나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그 천것을 내가 본 적이 있긴 한데, 용모는 나쁘지 않더군.”

“전하, 용모와는 별개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고 관인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가능한 일이라니? 그 천것의 가문은 어떤 가문이고, 자네의 가문은 또 어떤 가문인가? 경성에서 고씨 가문에 혼담을 넣으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쳐. 정씨 가문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가문과 인연을 맺는 것이야.”

“전하, 저희는 원수지간입니다.”

고 관인이 말했다.

“원수지간이니 자네가 그 여인을 가져야지.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기만 하면, 그 여인은 완전히 자네의 것이 되는 거잖나. 여인은 지아비를 하늘같이 섬겨야 하니, 자네의 말을 듣지 않는 날에는 혼을 낼 수도 있고.”

혼을 낸다는 자신의 말에, 평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눈이 맞아야만 혼례를 올린다고 하던가? 원수지간이야말로 혼례를 올리기 딱 좋은 상대지. 혼례를 올린 뒤에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복수할 수 있지 않은가? 채찍으로 때리든 바늘로 찌르든, 굶기든 수치스럽게 만들든…….”

평왕은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옆에 서서 눈치를 보던 내시가 재빨리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하, 혼인은 인륜지대사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옵니다. 고 대인께서 결정하시도록 놔두시지요.”

“왜 본왕이 결정하면 안 되는데!”

내시가 자신의 말을 끊자, 평왕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내시를 흘겨보며 호통쳤다.

“온 천하가 다 내 신하고 백성인데, 왜 내가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냐!”

고 관인이 서둘러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내시 역시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평왕이 감정을 추스르는 것을 지켜본 후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뒤로 물러났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정 낭자는 워낙 평범한 여인이 아닌지라, 정씨 가문에 혼담을 넣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고 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평왕은 같잖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는 자네가 참 거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정도 배짱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군. 차라리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횡포를 부리는 정 낭자가 더 낫겠어.”

고 관인은 평왕 앞에서 온순한 고양이라도 된 듯 순종적인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그건 다 사람들이 제 아버지의 권력을 질투해서 일부러 저를 헐뜯겠다고 지어낸 말이지요. 제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저와 형제들을 얼마나 엄하게 가르치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왜 이번 화괴 다툼에서 낭패를 봤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분명히 저를 엄하게 혼내실 테니 겁이 나서 그랬던 거지요.”

평왕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제대로 낭패를 보긴 했지. 그러니까 그 틈을 타서 정씨 놈들을 더 세게 팼어야지. 그래야 자네가 당한 망신이 덜 아까웠을 텐데.”

“전하께 우스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여기서 더 말씀하시면, 저는 정말로 사람들을 볼 낯짝도 없어지겠습니다.”

고 관인이 창피하다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정 낭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네는 평생 그렇게 창피해야 할 걸세.”

“혼례는 인륜지대사인지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 정 낭자가 어떻게 자기 멋대로 혼사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어린 나이신데, 벌써 중매를 서려 하십니까?”

고 관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평왕은 그런 고 관인의 웃음이 몹시 아니꼬웠다.

“본왕이 중매를 설 수 없다면, 태후께서 서시면 되잖나.”

평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태후마마요? 아닙니다. 어찌 이런 일로 태후마마를 귀찮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 정 낭자에게 혼인을 명하는 셈이 됩니다!”

고 관인이 놀라기도, 황공하기도 한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황실에서 명한 혼인이라!

평왕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더 좋은 것 아닌가? 본왕 생각엔 정 낭자가 감히 태후의 은총을 거절할 순 없을 것 같은데.”

고 관인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평왕이 더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손짓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네. 본왕이 태후마마께 직접 가서 말씀드릴 테니,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정 낭자와 혼례를 올린다는 것이 억울하다 해도, 어쨌든 본왕을 도운 공은 인정해 주겠네. 이는 본왕이 진심으로 정 낭자를 싫어하기도 하고, 정 낭자가 다시는 진안 군왕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일세.”

고 관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소신이 어찌 억울하다 여기겠습니까.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고 관인이 왕부 대문을 나가자, 그를 배웅했던 왕부 총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이대로 저놈이 평왕 전하를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내시가 총관에게 조용히 묻자 총관이 미소를 지었다.

“결과에 따라 다를 테지. 혹여 저 녀석이 정 낭자를 목표로 전하를 이용하는 거라면, 굳이 저놈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게다.”

“그럼 총관 대인도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찾아가시기를 바라는 건가요?”

어린 내시가 물었다. 총관이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전하의 이 방법이 참으로 좋지 않느냐. 안 그래도 정 낭자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존재고, 진안 군왕과도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결코 우리에게 득이 될 사람이 아니야. 이대로 고씨 가문과 혼례를 올린다면 정 낭자는 고씨 가문의 감시하에 지내게 될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지.”

내시가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에 앉아 있던 고 관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 이리도 총명하실 줄이야.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시다니.”

시종이 옆에서 고 관인을 따라 웃으며 물었다.

“관인께서는 이 방법이 어떠신 것 같습니까?”

고 관인이 자신의 짧고 넙데데한 턱을 매만지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정교랑이 덕승루의 별실 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계집이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

고 관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승루 별실 안의 연회가 끝나자, 얼큰하게 취한 관리들이 서로 웃고 떠들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정사낭을 붙잡았다.

“에이, 단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도 좀 해야지.”

정사낭의 동기들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떠났다.

별실 안이 조용해지자, 한시도 쉬지 않고 웃고 떠들던 정사낭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모두 사라지고 난 후,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주 낭자가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온 따뜻한 봄바람이 별실 안을 가득 메웠던 술 냄새를 내보냈다.

“정 관인, 많이 힘드시죠?”

주 낭자가 정사낭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정사낭이 자세를 바르게 고쳐앉고 찻잔을 받았다.

“고맙소.”

정사낭이 예를 표한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낭자도 힘들었겠소.”

사람들 앞에서 연기한다는 건,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니.

주 낭자가 고개를 저으면서 살풋 미소를 지었다.

“소인은 힘들지 않아요.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정사낭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나 태생부터 당연히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이는 없소.”

그러니 이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지요.

“정 공자님, 소인이 속상해할 말씀은 하지 마세요. 소인은 지금 같은 삶이 바로 소인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 낭자가 웃으면서 정사낭의 팔을 끌어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미인이 다정하게 자신의 팔을 끌어안으려 하자, 정사낭은 당황해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주 낭자를 피했다. 주 낭자의 두 팔이 허공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주 낭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왜 피하시고 그러세요.”

정사낭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 이러지 않아도 괜찮소.”

주 낭자가 의아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관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전처럼 대하면 되오.”

정사낭은 주 낭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주 낭자는 정사낭과 조금 거리를 두고 바른 자세로 고쳐앉은 뒤,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정 공자님, 주형이 공자님께 사죄드립니다.”

주 낭자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아니, 그 일을 말하는 게 아니오. 그 일은 낭자와 아무 상관 없소. 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정사낭이 황급히 아니라고 말했다.

“공자님, 주형이 미우신가요?”

주 낭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아니, 아니오. 내가 왜 낭자를 미워하겠소? 미워하겠다면, 나 자신부터 미워해야지. 주 낭자가 고의로 날 이용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날 위험에서 구해 내려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날 위한 말을 계속 했다는 것도. 그런데도 떠나지 않았던 건 나 자신이었소.”

주 낭자가 고개를 들고 정사낭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이 주형도 그래요. 자신이 참 원망스럽고 밉네요.”

주 낭자가 찻잔을 들어 올리고는 정사낭을 향해 눈짓했다.

“소인, 공자님을 위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정사낭이 서둘러 자신의 찻잔을 높이 들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각자의 찻잔을 비웠다.

“정 공자님.”

몸을 일으키고 별실을 떠나려던 정사낭을 주 낭자가 불러 세웠다. 정사낭이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은 후회하시나요?”

주 낭자의 물음에 정사낭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누이가 그러는데,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경우가 없다더군. 이미 저지른 일, 벌어진 일이라면 앞만 보고 가야 한다고.”

정사낭이 가볍게 묵례한 뒤, 별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 별실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주 낭자는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저는 후회하는걸요.”

주 낭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녁이 되자, 주육낭은 정교랑의 거처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선 주육낭의 눈에 회랑 기둥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정교랑이 보였다. 양쪽으로 은은하게 켜진 등불 때문인지, 낮에 보던 정교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정교랑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천천히 감상하는 것 같았다.

“그건 뭐지?”

주육낭이 물었다.

“메뚜기요.”

메뚜기?

주육낭이 정교랑이 손에 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얇은 대나무껍질로 엮어서 만든 생동감 넘치는 메뚜기 모형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주육낭이 물었다.

“선물 받았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 그 자식이 선물한 거겠지?

주육낭이 입술을 삐쭉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저 여인은 어째 한 번도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어. 항상 내가 물으면, 저 여인이 대답하고, 빈말이나 잡담 한 번을 안 하잖아. 허구한 날 저렇게 말도 없이 지내니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

주육낭은 회랑 아래에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메뚜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주육낭이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별 봐요.”

정교랑이 시선을 옮기지 않고 대답했다.

별을 본다고?

주육낭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예쁘긴 하다만, 저게 무슨 재미가 있다고.

주육낭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마당을 떠났다.

“아씨, 오늘도 늦게까지 별을 보실 거예요?”

반근이 정교랑에게 두봉을 걸쳐주며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잘 봐. 저기 저 별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어. 그런데 아직 충분하진 않아.”

저 별? 어떤 별을 말하는 거지?

반근은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 별이 그 별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반근은 정교랑이 별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로 점점 더 밝아지는 별이 있을 거라고 믿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느 정도여야 충분한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 사이의 조화만 못하지(天時地利人和). 이제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은 갖춰졌으니, 나머지는 사람에게 달렸어.”

“아이고 세상에나, 우리 아가. 벌써 중매인이 되고 싶었던 게냐?”

황궁 안. 태후는 놀랍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평왕을 쳐다보았다.

“마마, 이 일은 단순한 중매가 아니고, 진지한 일입니다.”

평왕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태후가 웃으면서 귀비를 쳐다보았다.

“이것 좀 보게나. 우리 평왕의 진지한 일부터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귀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가아, 괜한 소란 피우지 말아라. 너 같은 어린아이가 말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정 낭자를 고 관인에게 시집보내겠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우스운 일을 미담으로 만들어야지요.”

평왕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스운 일을 미담으로 만든다고?

귀비와 태후가 멈칫했다.

“지금 고씨 가문은 덕승루 화괴 다툼 때문에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고씨 가문은 영원히 웃음거리로 남겠지요. 이번 다툼을 계기로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면,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던 상대에서 애틋한 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미담이 남지 않겠습니까. 마마께서는 고씨 가문이 이대로 경성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보시기만 하실 겁니까? 정 낭자가 경성에 있는 한, 고씨 가문은 영원히 웃음거리로 남을 겁니다.”

태후와 귀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당연히 고씨 가문이 경성의 웃음거리로 남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 혼사가 정말로 괜찮은 방법이로구나.”

고씨 가문이 더는 웃음거리로 소비되지 않고, 어딘가 불길하고 수상쩍은 정 낭자가 고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셈이니. 정 낭자도 고씨 가문의 감시를 받게 된다면, 더는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없겠지. 고씨 가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집안이기도 하고.

참으로 일거양득이구나.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번 같은 터무니없는 일도 인제 그만 끝을 낼 때가 됐어.”

태후가 고개를 들고 문밖을 향해 말했다.

“여봐라. 정씨 가문 부인을 궁으로 불러오너라. 애가가 중매를 서야겠다.”

정 이노야가 경성으로 올라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경성에서 보낸 반년이라는 시간이 그는 마치 꿈만 같았다. 짧은 반년 사이, 관직이 급격하게 바뀐 것도 모자라,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깜짝깜짝 놀랄 만한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어사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풀려나기도 했다. 월 수익이 만 관에 달하는 재산을 손아귀에 넣은 적도 있고, 또 눈 깜짝할 새에 그 재산의 명의가 바뀌기도 했다.

여기 이 집도 그래.

정 이노야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대청은 저택의 본채였다. 대청 안은 여전히 넓고 깔끔했지만, 더는 정 이노야의 거처라고 할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정 대노야가 이곳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대노야께서 이걸 여기다 놔두라고 하셔…….”

“대노야께서 이것들은 치우라고 하시네. 괜히 사치스러워 보이기만 한다고.”

대청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여종들의 대화가 정 이노야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종들은 이 집의 주인이 정 대노야라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대화를 나눴다. 정 이노야는 지금의 상황이 강주에 있을 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이게 강주에 있을 때와 다를 게 뭐야!

정 이노야가 분통을 터트리는 사이, 문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노야, 오 관리인이 왔습니다.”

사환 두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오 관리인!

“들라 하여라.”

대청 안쪽에서는 정 대노야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문밖에서부터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걸어오는 오 관리인의 모습도 보였다.

4월 초에 오 관리인이 온다는 것은, 지난달 점포들의 장부를 정산한다는 뜻이었다.

장부 정산! 수익금!

정 이노야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원래대로면 오늘 이 시간에 오 관리인을 맞이할 사람은 바로 나였는데!

곁채에서 하얀 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침상에 누워 있던 정 이부인은 오 관리인이 정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노야, 내 돈은 어떡해요.”

“울긴 왜 우는 거요! 형님이 경성을 떠나지 않고 아예 정씨 집안을 통째로 경성에 옮겨 놓으면, 그때 가서 울고불고하시구려.”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대노야는 그 애한테 들러붙은 거예요. 그러니 절대로 쉽게 그 재산을 내려놓지 않을 거라고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부인, 반근 낭자도 같이 왔어요. 대노야께서 장부를 바로 반근 낭자한테 주시더라고요.”

여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그 애한테 들러붙은 거라니까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또 다른 여종이 황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야, 부인,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궁?

정 이노야 내외가 놀란 기색으로 여종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부인을 뵙고자 하셨습니다.”

여종이 이어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이마에 올려져 있던 수건이 떨어졌다.

“태후마마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다고?”

“태후마마께서 정 이부인을 불러오라고 했단 말이오?”

자연스럽게 정씨 가문의 가장인 정 대노야가 직접 황궁의 내시를 만났다. 내시가 찾아온 이유를 들은 정 대노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 대노야. 그러니 정 이부인의 입궁 채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 대노야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내시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공손하게 손짓했다. 정 대노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정 대노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시가 눈썹을 치켜뜨고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마마께서 어떤 일로 부르시는지, 저희 같은 아랫것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정 대노야가 서둘러 사과했다. 그의 이마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 대노야가 몸을 돌리고 대청을 나가려던 찰나, 내시가 마른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그러니 정 이부인께도 경사스럽게 입고 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경사스러운 일!

정 대노야는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조용히 알겠다고 한 뒤 침착하게 예를 표하고 대청 밖으로 물러났다.

오 관리인과 시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후당에 서 있었다.

“교랑은 알고 있는 일이더냐?”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정 대노야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는 태후가 정교랑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실은 경사스러운 것과 거리가 먼 일이 분명했다.

“당장 아씨께 알리러 갈게요.”

시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태후께서도 아씨를 싫어하시고, 정 이부인도 아씨를 싫어해요. 그러니까, 절대로 그 두 사람이 아씨의 일에 관여하게 둬서는 안 돼요.”

시녀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본 정 대노야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맞아. 절대로 그럴 순 없지. 절대로 제수가 궁으로 들어가게 해선 안 돼.

그런데 어떻게 막는담?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대청 안에 앉아 있는 내시의 표정을 보아하니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른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정 이부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나?

아니야. 당초 아우가 경성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내가 그렇게 설득했건만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정 대노야의 호흡이 가빠졌다.

절대로 제수가 입궁하게 둬서는 안 돼. 절대로!

“여봐라!”

정 대노야가 문밖을 향해 손짓하고는 조용히 사람을 불렀다. 여종 한 명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정 대노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노야, 분부하시지요.”

곁채 안, 정 이노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정말로 요즘은 매일매일이 꿈을 꾸는 것 같단 말이지. 아주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해!

“노야, 노야. 태후마마께서 나를 보시겠다는데, 내, 내가 가서 뭐라고 해야 하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 이부인은 거의 혼절 직전인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오.”

정 이노야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말했다.

“당신은 무조건 태후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되오.”

정 이부인은 아직도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태후를 뵙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태후가 당신을 보겠다고 한 건 분명히 그 바보 때문일 거요.”

정 이노야는 흥분하면 할수록 정신은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경성에 올라온 후로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항상 그 바보와 연관되어 있었어.

“우리가 이번에 판을 뒤집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태후의 손에 달렸소.”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 이부인이 더욱 긴장했다.

“당신 돈을 생각하시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정 이부인이 답답했는지, 정 이노야가 호통을 쳤다.

내 돈! 그놈들이 사기 친 내 돈!

정 이부인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문밖의 여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정 이부인의 옷을 골라 주었다. 단장하느라 한창 분주할 때, 아낙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이고, 정 이부인, 대노야께서 저도 부인의 시중을 들라고 하셔서요.”

정 이노야 내외가 아낙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방 안으로 들어온 아낙은 대노야의 사람이었다. 정 대노야가 오기 전까지 정 이부인이 관리하던 것들을 모조리 도맡아 관리하게 된 사람이기도 했다. 이 아낙은 평소에는 정 이노야 내외를 보아도 콧구멍이 다 보일 정도로 턱을 높이 치켜들고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정 이노야 내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대노야께서 조심히 물어보셨는데…….”

아낙이 좌우를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궁에서 온 사람 말로는, 경사스러운 일로 부인을 뵙자고 하시는 거래요.”

경사스러운 일!

정 이노야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군. 그래서 형님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이렇게 사람을 붙인 건가? 이미 늦었어! 서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놨는데, 지금 와서 아부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부인, 경사스러운 일이니 옷도 화사하게 입으셔야죠.”

아낙이 이어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슬쩍 쳐다보자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서 금색 비단옷을 꺼내 오거라.”

정 이부인이 재촉했다. 방 안에 있던 여종과 몸종들이 다시 분주해졌다.

뒤늦게 들어온 아낙도 이부인을 돕겠다며 주위를 서성였지만, 정 이부인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아낙에게 눈치를 줬다. 하지만 아낙은 그런 정 이부인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첨의 미소를 보이며 서 있었다.

옷을 다 입은 정 이부인은 단출한 옷 장식과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보고, 자신이 몹시 볼품없고 추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정 이부인은 이를 부득 갈며 분을 삭였다.

내 돈, 내 장신구들!

“가자.”

정 이부인이 열의에 가득 찬 모습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의 뒤를 따라나서자, 아낙도 재빨리 무리를 뒤따라 방을 나섰다. 아낙은 정 이부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여종들 사이를 마구잡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앞다투어 가겠다는 아낙과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여종들 때문에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아, 좀 비켜요!”

한 여종이 짜증을 내면서 아낙을 확 밀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낙은 무리 밖으로 밀려난 게 아니라 무리의 앞쪽으로 밀쳐졌다. 아이고, 하는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던 아낙은 공교롭게도 층계를 내려가고 있던 정 이부인의 등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곧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정 이부인이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세상에나, 부인!”

여종들이 바닥에 굴러떨어진 정 이부인을 부축하려고 혼란스럽게 층계를 내려가던 찰나, 아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낙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정신없이 정 이부인을 향해 내려가던 여종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여인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곁채 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대청 안에 앉아 있던 내시가 저도 모르게 찻잔을 쥔 손을 살짝 떨었다. 내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지?”

문밖에 서 있던 집사가 서둘러 대청 안으로 들어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무,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고?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늦었네.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부인께 좀 더 서둘러 달라고 말해주시게.”

내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 대노야가 대청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대인, 대인, 큰일 났소이다.”

“뭐라?”

황궁 안, 태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언제 다친 게냐?”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조, 조금 전의 일입니다.”

조금 전?

흠칫 놀랐던 귀비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다.

“참 공교로운 일이네요. 왜 하필 태후께서 보자고 하실 때 다리가 부러질까?”

태후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맞아.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잖아?

“이부인이 너무 기뻐하던 나머지 문턱을 넘다가 발을 헛디뎌 층계 아래로 떨어졌고, 정 이부인을 부축하려던 여종들이 한꺼번에 덮치는 바람에, 정 이부인의 정강이를 다쳤다고 합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듣기에는 그럴싸하네. 견문 없는 아낙이 갑자기 황궁에 들어온다는 생각에 황급하고 정신이 없었겠지. 그래도 이번 일은 어딘가 수상쩍어.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궁으로 들어와 태의에게 다리를 보이라고 전하거라.”

귀비가 냉랭하게 웃으며 말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리를 다쳤을 뿐 입을 다친 건 아니잖느냐. 애가가 특별히 황궁의 연탑(軟榻: 침상과 긴 의자를 겸한 가구)을 보낼 터이니, 즉시 입궁하라고 전하거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내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마, 실은 정 대노야가 이부인이 다리를 다친 것이 부끄러워, 감히 마마께 험한 꼴을 보여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상의하실 것이 정 낭자의 일이라면, 정 낭자의 친부모와도 같은 외숙 내외가 경성에 있다면서, 다리를 다친 이부인 대신 외숙모가 태후마마를 뵈러 오는 건 어떠한지 여쭈셨습니다.”

외숙모?

태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긴, 정 이부인도 계모라고 들었으니. 차라리 외숙모와 혼사 얘기를 하는 게 좀 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겠어.

“누가 온들 상관없다. 애가는 할 말만 할 테니, 그들은 듣기만 하면 돼.”

태후가 말했다.

내시가 서둘러 알겠다고 한 뒤, 귀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정 낭자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태후가 결심한 일이니 이 혼사는 필시 이루어질 것이야.

귀비는 내시를 부르려던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뭐라고요? 나더러 어딜 가라고요?”

주씨 저택.

주 부인이 경악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안 가요, 안 가요. 난 가기 싫다고요!”

난 절대로 그 바보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가기 싫다고 해도 가야 하는 일이오!”

주 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란 주 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노야, 궁에서 온 사람이 재촉하고 있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태후를 뵌 적이 없던 것도 아니고, 무서워할 게 뭐라고 그러시오!”

주 노야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주 부인에게 소리쳤다.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요? 예전에 태후를 뵈었을 때는 그 바보 때문이 아니었거든요?

“당신이 가기 싫다는 이유로 교교를 보낼 작정이오? 이건 다 교교를 위한 일이오.”

주 노야가 말했다.

맞아. 이건 그 애를 위한 일이야. 내가 안 간다면, 분명히 그 애한테 죄를 짓는 꼴이 되겠지.

주 부인이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 바보한테 죄를 지으면, 어떤 꼴이 날지는 안 봐도 뻔하잖아.

“그리고 태후를 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겠지?”

주 노야의 물음에 주 부인은 털이 삐쭉 서는 느낌이 들었다.

정 대노야는 정 이부인이 태후에게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을 거야. 그래서 정 이부인은 문을 나서기 직전에 다리가 부러지는 변을 당한 거고.

주 부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정씨 가문이야. 예전에는 정교랑이 왜 그렇게 독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 정교랑이 정씨 가문 혈육이기 때문이야.

정말로 독하네!

“정말 너무도 독하십니다! 형님, 참으로 독하세요!”

정 이노야의 울부짖음이 마당에 울려 퍼졌다. 곁채의 마당 문에서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정교랑의 시녀가 공들여 고른 저택인지라 문짝이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정 이노야가 한 맺힌 목소리로 외쳤지만, 저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정괴(程槐)! 이젠 내 아내까지 다치게 하는 거냐!”

정 이노야가 이름까지 불러 가며 욕을 해댔다. 정 이노야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야. 형님이 이런 짓까지 저지르다니!

세상에나, 세상에. 도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어떻게 자기 제수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트릴 수 있냐고!

“시끄럽다.”

정 대노야의 침착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정괴!”

정 이노야가 온 힘을 다해 문짝을 향해 몸을 부딪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냐? 어떻게 제 아우의 부인을 때려서 다치게 할 수 있어! 정녕 실성을 했군.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하냐고!”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정 대노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정동, 지금 네 부인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이 너를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문틀을 잡고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몸을 살짝 떨었다.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정 대노야의 목소리가 정 이노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지 않으면, 네 다리도 부러질 테니까.”

소식을 듣고 뒤늦게 집에 도착한 주육낭은 주 부인의 마차가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주육낭이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와서 물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주육낭 때문에 방청소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깜짝 놀랐다.

“그 여인은?”

주육낭이 물었다.

“아씨께서는 반근과 같이 나가셨어요.”

시녀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나갔다고? 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갔는데?”

주육낭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어차피 아무에게도 어디 가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나서,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곧바로 문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 밖에 있는 양조장에 가셨어요.”

한 시녀의 대답에 주육낭의 발걸음이 살짝 꼬였다.

그 여인은 왜 자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거야! 아니면, 혹시 내가 물어볼 줄 알고 일부러 말해주고 간 건가?

주육낭이 가벼워진 걸음으로 층계를 폴짝 뛰어 내려갔다. 그는 이가 다 보이도록 활짝 웃고는, 놀란 기색의 시녀들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뭐라? 태후께서 어찌, 어찌 그런 일을.”

소식을 들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주 부인이 이미 입궁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자 황제가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폐하, 그쪽으로 가시겠습니까?”

내시가 서둘러 물었다.

태후궁 안. 주 부인은 태후를 향해 정중하게 큰절을 올린 뒤 몸을 일으켰다.

“애가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의 조카인 정교랑의 혼사 때문일세.”

태후는 인사치레도 하기 귀찮은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예, 마마의 깊은 헤아림에 감사드립니다.”

주 부인의 무릎에 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호를 받은 부인이긴 하나 하등 관리의 아내인지라, 주 부인은 매년 새해에 황제와 태후를 참배하는 행렬의 끄트머리에서나 태후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태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 부인은 자신이 태후를 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몹시 흥분되고 긴장하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상상했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태후를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 때문은 아니었다.

“애가가 어찌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나. 아이들이 참 겁도 없단 말이야. 이게 다 무슨 소란인지.”

태후가 말했다.

맞아요, 맞습니다. 그 여인도 참…….

주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고는 몸을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소인의 죄이옵니다.”

“죄를 따질 일은 아니고, 다 인연인 게지요. 싸우면서 정이 든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한들, 그런 인연도 있는 법. 고 관인이 그 댁 교랑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니, 이대로 두 사람의 혼사를 치를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황당한 일도 미담으로 남겠지요.”

귀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 황당한 일을 벌이는 아이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라고 하게. 괜히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치지 말고.”

태후가 말했다.

“마마,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천생배필인 게지요.”

귀비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웃으며 한창 수다를 떨던 귀비와 태후가 아무런 대꾸도 없는 주 부인을 쳐다보았다. 주 부인은 손뿐 아니라 몸까지 살짝 떨고 있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여인네로군.

태후는 언짢은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고, 그와 반대로 귀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주 부인,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태후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요!

주 부인이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해?

혼사를 거절하면? 그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야만 가능한 일이야. 태후가 내린 명을 거역하는 셈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 혼사를 받아들인다면?

정 대노야는 나를 궁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자기 제수씨의 다리를 부러트렸어. 내가 이 혼사를 받아들이는 걸 결코 원하지 않을 거야. 정 이부인의 다리는 벌써 부러졌어. 내가 그 여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마 다리 하나 부러지는 거로는 끝나지 않겠지.

그래. 태후의 명을 거역한다고 해도, 그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죄는 아닐 거야. 기껏해야 경성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도겠지.

하지만 그 여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을 했다가는, 분명히 목이 달아날 거야!

“마마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 혼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 부인이 허리 숙여 예를 올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태후가 흠칫 놀랐다. 귀비는 주 부인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된다는 게지?”

태후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태후궁 뒤편에 서 있던 황제가 주 부인의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왜 안 되냐고? 정 낭자가 바보도 아니고.

아, 예전에는 바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니야. 태후께서 이 혼담을 넣는 이유가 뭔지는 정 낭자도 빤히 알 터.

정 낭자를 가르친 스승도 필시 교만한 사람이겠지. 요즈음 보이는 뼛속까지 교만한 문인들처럼 말이야. 권력으로 그들을 유혹할 수는 있겠지만,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를 수는 없지. 그들에게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거든.

정 낭자는 의형제의 죽음 때문에 천자인 나와 내기까지 불사하는 여인인데, 태후께서 아무리 황권으로 억압한다 한들 권력에 고개를 숙일 리 없지. 그 여인의 눈에 별로 대수롭지도 않을 혼사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 여인이 이번에는 무슨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려나?

호기심이 인 황제는 세 여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안 되냐고? 그 여인이 싫어하니까!

주 부인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내 다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왜냐면, 교랑은 이미 저희 집 여섯째와 혼담이 오가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주 부인이 기지를 발휘해 대답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혼담을 거절하기에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이유는 바로 이미 들어온 혼담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를 향해 손짓했다. 황제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귀비의 목소리가 전각 안에서 들려왔다.

“주 부인, 참으로 공교롭네요. 태후마마께서 정 이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정 이부인이 갑자기 다리가 부러지지 않나, 주 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갑자기 정 낭자가 주 부인의 아들과 혼담을 주고받고 있다지 않나. 그런데 왜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요? 설마 주 부인이 말한 그 혼담이,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요?”

주 부인의 몸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네, 맞습니다. 귀비마마, 이 모든 게 그 여인 때문이고, 저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잘 아시는군요.

귀비의 말을 들은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호통쳤다.

“주 부인, 귀비의 말이 정녕 사실인 게냐?”

“아니, 아닙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미 혼담이 오갔습니다. 벌써 이 년 전부터 혼담이…….”

주 부인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정씨 가문과 한창 혼수 때문에 서로 앞다퉈 정교랑의 혼사를 논할 때, 주 노야는 진심으로 주육낭과 정교랑의 혼사를 고려했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 년 전에 이미 끝난 혼담이 아닌가요? 이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혼사를 치르지 않았다니요.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가요?”

귀비가 주 부인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떡해! 말을 잘못했나 봐! 내가 말을 잘못했나 봐!

이제 끝장났네, 끝장났어! 내 다리! 내 다리!

귀비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야.

혼담을 넣은 지 벌써 이 년이 지나도록 혼사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 년 전의 그 혼사가 성사됐다고 말하는 건, 제 뺨을 후려치는 꼴이잖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태후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여인이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로 이 세상에 너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됐네, 주 부인. 그만하게나. 그쪽 혼담이 어찌 됐든 애가는 상관없네. 이미 두 사람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애가가 태후라는 지위를 빌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게야. 이건 자네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정 낭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네. 애가는 고씨와 정씨에게 혼인을 명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자네는 돌아가서 정씨 가문에 말만 전하게. 날씨도 딱 좋은 봄날이니, 두 가문 모두 하루빨리 중매쟁이를 통해 혼사를 치르라고.”

“마마, 아니 되옵니다. 그렇게는 아니 되옵니다. 아이고, 사람 죽겠네!”

혼이 달아날 정도로 깜짝 놀란 주 부인은 태후 안전인 것도 망각한 채 고성을 질렀다.

저 여인네는 어찌 저리도 결례를 보이는 것이야! 그 무례한 여인의 가족이 틀림없구나!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만 물러가게!”

“마마, 아니 되옵니다. 소인은 감히 이 혼사를 받들 수 없사옵니다!”

주 부인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러는지 원.”

“당장 내쫓거라! 어서!”

태후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주 부인에게 몰려가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문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수선하게 문밖으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던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젓고는 태후궁을 떠났다.

내시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황급히 손짓하고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할아버지, 태후마마께서…….”

태후궁 근처에 눈 뜬 장님처럼 서 있던 어린 내시가 늙은 내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늙은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내시들의 주둥아리와 눈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봐도 된다고 하는 것만 보고, 우리가 말해도 된다는 것들만 말하도록 하여라.”

늙은 내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후궁 안에서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여봐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야.”

늙은 내시가 덧붙였다.

어린 내시가 안비의 궁에서 황제를 찾아냈다.

안비는 눈에 띄게 배가 불렀다. 안비의 맥을 짚었던 태의들은 모두 안비가 임신한 아이가 황자일 것이라고 거듭 단언했다. 황자를 얻을 거라는 기대에 몹시 기뻤던 황제는 매일같이 안비의 궁에 머물렀다.

원래대로라면 안비는 더 이상 시침(侍寢)할 수 없기에 황제는 안비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었다. 태후도 이 일로 황제에게 두어 차례 귀띔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안비와 함께 동침했다.

“짐은 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소.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가 좋아지는구려.”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은 안비가 환하게 웃었다.

“폐하, 아직은 너무 어린지라 폐하께서 같이 계셔 주시는 것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일부러 골이 난 듯이 말했다.

“허튼소리, 아무리 어려도 알 건 다 알고 있을 것이야.”

황제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안비의 배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네 어미가 네 흉을 본 것이다. 절대로 짐이 한 말이 아니니라.”

안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황제의 팔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폐하께서도 황후마마와 비슷하시네요. 두 분 다 아이들을 좋아하시니.”

황제가 멈칫했다.

황후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들었다만.

황제가 물었다.

“황후가 여기에 자주 오는 것이오?”

“아니요. 태의가 신첩더러 많이 걸어 다니라고 하여서, 걷다 보니 어화원에서 몇 번 황후마마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태의의 말을 들으시고 자주 걸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첩은 감히 황후마마 가까이에 가지 못하기도 했고, 황후마마께서도 신첩을 피해 멀찍이 거리를 두고 계셨기 때문에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이옵니다.”

안비가 대답했다.

“피한다고?”

황제가 묻자 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께서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시다 보니, 행여나 자신의 병세가 신첩의 복중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멀찍이 피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태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황후마마께서는 조심하시더라고요.”

황제가 무엇 때문인지 알겠다는 듯이 헛웃음을 보였다.

황궁의 여인들이란…….

“폐하, 그런 게 아니에요.”

황제의 생각을 꿰뚫었는지, 안비가 그의 팔을 흔들면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절대로 그런 이유로 신첩을 피하시는 게 아니에요. 황후마마께서는 단지, 두렵다고 하셨어요.”

“두렵다고?”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워낙 약하다 보니, 좋아하는 만큼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안비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더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신첩은 알 것 같았어요. 황후마마께서 신첩의 배를 볼 때면, 기쁨이 드러나는 동시에 잔뜩 긴장하시는 기색 또한 역력하시거든요. 그 모습에 신첩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소.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지 사흘을 못 넘기고 죽었지. 나중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어 육가아를 데려다 키우게 되었는데, 결국…….”

황제가 천천히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결국, 예전의 그 육가아마저도……. 한 여인이 연달아 몇 번씩이나 그런 충격을 받았으니…….

황제가 짧게 한숨을 토했다.

“황후가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지.”

황제가 말했다. 안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팔을 안은 채 아양을 떨며 불안 섞인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태의가 안비 모자가 몹시 건강하다고 말하였으니.”

황제는 안비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안비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독였다. 두 사람이 한창 애틋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태후의 말을 전하러 온 어린 내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 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의 혼사가 아닌가. 태후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리하시면 되느니라. 짐이 그런 일까지 관여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어린 내시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안비가 조금 놀란 눈치로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정 낭자의 일인데도요?”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정 낭자가 왜? 정 낭자가 혼사를 올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소?”

안비가 장난스럽게 타박하듯 황제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폐하, 신첩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이 혼사, 괜찮은 걸까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상관없소. 다만, 이 일이 꼭 좋지 않은 일이라 할 순 없지.”

황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희미한 달빛이 떠오르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졌다.

봄밤인지라 날씨가 아직 서늘하군.

금잔 안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켠 진 노태야는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황당한 일이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 부인이 황궁을 나옴과 동시에,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황실에서 가문 간의 혼인을 주도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황실과 주로 마주치는 인사들은 조정 대신들이다 보니 가문 간의 관계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으며, 권문세가의 혼사는 더욱이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태후는 한가로이 집안일이나 신경 쓰는 아낙이 아니기에, 황실의 혼사가 아닌 한 절대로 쉽게 혼인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태후가 친히 먼저 혼사 이야기를 꺼낸 걸 보고, 사람들은 태후가 정말로 진노한 게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황당한 일을 미담으로 승화시키겠다? 고 관인의 이번 한 수는 황당해 보이긴 해도, 참으로 묘수구나. 어쩔 땐 일이 꼭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니까? 황당한 일이니 황당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게지. 물고기는 물고기만의 길이 있고, 새우는 새우만 다니는 길이 있다시피 말이야.”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묘수라고요? 정 낭자 입장에서는 묘수가 아닐 텐데요.”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리기만 할 뿐, 차를 마시지 않은 진소가 대꾸했다.

“주 부인은 울기까지 하며 궁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진 노태야가 풉 하고 웃었다.

“주 부인도 참. 태후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태후의 체면을 챙겨 주려던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잖습니까.”

진소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씨 가문 사람들이라 그런지, 역시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여전히 찻잔을 쥐고만 있던 진소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니,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 * *

작가의 말: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일’이라는 구절은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이정전서 유서이십이(二程全書 遺書二十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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