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60)

-누이를 지켜-

올해 경성의 봄은 예년의 봄보다 훨씬 시끌벅적했다. 덕승루 화괴 다툼으로 오만 관을 허공에 뿌렸다는 일화는 벌써 무수히 많은 이야깃거리로 파생되었다. 이 사건이 경성을 한창 달구고 있을 때, 또 다른 사건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다.

“정씨 가문에서 또 난리가 났다던데.”

“또 무슨 난리? 이번엔 덕승루에 화대를 얼마나 냈다고 하오?”

“집안에 그런 딸내미가 나오다니. 나였다면 벌써 창피해 죽었을 거요.”

“아닐세. 이번에는 정씨 가문 대노야가 정 낭자의 부친을 관아에 고소했다고 하더군. 호적을 따로 만들어 사유재산을 은닉했다고!”

“이야, 정 이노야도 간덩이가 제대로 부은 사람이네.”

“그런데 그럴 만도 하지. 오만 관을 화대로 날릴 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잖소. 그 누구라 해도 눈 딱 감고 자기 거로 만들고 싶을걸?”

“그런데 고소까지 한 걸 보면, 정 대노야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것 아니오?”

“정 낭자의 가족이 그런 행보를 보일 줄 누가 알았겠어? 어쩌다 저잣거리 한량 같은 가족을 둬서는. 신선의 제자라는 명성만 모욕을 당하게 생겼네.”

“모욕? 세상 어느 신선의 제자가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하나? 그것도 모자라 화대로 오만 관을 쓰고? 정말 황당하고 우스운 이야기지.”

“아무튼, 정씨 집안에 멀쩡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이번 기회로 제대로 알게 됐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텐데, 정씨 일가는 분명히 엉망진창인 게야.”

방 안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씨 저택에서 저런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지가 꽤 됐던 터라,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기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 관인께서 드디어 기뻐하실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덜 얻어맞게 됐어요!

“망신이야, 집안 망신!”

고 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무릎을 치며 웃었다.

“이보다 더 망신스러운 일이 있겠나? 신선의 제자라는 건 헛소문인 거고, 분명 황당한 이야기로 남들을 현혹하고 다니는 무당일 게다.”

“그러니까요. 신선은 사람이 먹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 밥을 먹는 자는,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인 게지요.”

시종이 아첨의 웃음을 보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감히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누가 제일 큰 웃음거리가 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고 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한껏 화기애애한 방 안으로 식객 한 명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십사 관인, 관아의 말을 들어 보니 이번 정씨 형제의 사건을 수리하자고 했던 게 관인의 뜻이라고 하던데요?”

식객이 다급하게 물었다. 고 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가, 아주 시끌벅적해지겠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망신을 줘야지.”

식객이 머뭇거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관인, 이러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 이노야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져 자칫하면 경성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나? 왜? 자네는 아직도 그자를 보호하고 싶은 겐가?”

고 관인이 식객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제가 보호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자가 경성에 있어야만 정 낭자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정 이노야가 경성 밖으로 쫓겨나면, 정 낭자를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식객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고 관인은 반대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억제?”

고 관인이 웃음을 거두고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여인네 하나일 뿐인데, 억제하기 힘든 겐가, 아니면 억제하기 싫은 겐가? 정말로 그 여인을 억제하고 싶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그 계집을 눌러 죽일 수 있어.”

“관인,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항상 물샐 틈도 없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식객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지만, 고 관인은 그의 말을 끊고 냉소를 지었다.

“퉤! 물샐 틈도 없기는! 자네도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 여인도 고작해야 여인네일 뿐이야. 아버지와 자네들이 너무 과한 걱정을 하는 게 틀림없다니까. 그 여인의 수법이 얼마나 물샐 틈이 없든 간에, 한낱 여인네가 도대체 뭘 어쩔 수 있겠나?”

고 관인이 여유롭게 두 팔을 벌리고 팔걸이 의자에 기댔다.

“더 말할 필요 없네. 일개 여인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내가 똑똑히 보여 줄 테니.”

바깥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정씨 저택은 몹시 고요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요함은 예전의 고요함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칠랑이 마당 앞에 서서 대청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따뜻한 봄날인데, 지금은 가을 겨울의 스산함이 느껴질 정도로 마당엔 냉기만이 맴돌았다.

대청 안에서 말싸움 소리와 정 이부인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이렇게 됐네. 강주에서도 이랬고, 경성에 와서도 똑같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부모님과 백부, 백모님과의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나 봐. 그 여인이 우리 집에 들어온 뒤로는 쭉 그랬어.

전에는 그 여인이 바보라서, 나와 우리 집안을 무시당하게 하는 존재여서 싫었어. 그래서 가족들이 다 그 여인을 싫어하며 혐오했고,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라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특히나 경성에 온 이후로 그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겠어. 경성에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가문의 연회에 참석했는데, 다들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아첨 떨고 있다는 걸 느꼈어.

언니들에게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혼담을 넣은 가문들은 예전의 우리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훌륭한 가문들이야.

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모든 게 그 여인 덕분이라는 걸 모를 리는 없지.

여기 경성에서는 사람들이 그 여인을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아. 오히려 그 여인을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떨지. 그 덕에 우리 자매들도 남들이 떠받들게 됐고.

우리가 누구 덕분에 이런 대접을 받든, 좋은 일인 건 맞잖아? 그러니 여기에서 지내는 생활이 점점 더 좋아져야 정상인데, 집안 어른들의 관계는 왜 점점 더 나빠지는 거지? 대판 싸운 뒤에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던 때를 지나, 기어코 관아까지 가서 싸우게 되다니.

정 이부인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정칠랑은 생각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았다. 대청 문이 열리고, 정 대노야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마당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정칠랑을 보자, 정 대노야는 멈칫했다.

칠랑은 아우 내외가 애지중지 키운 탓에 철이 안 들고 제멋대로지. 그래도 그렇게 큰 덕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해맑기만 한 앳된 소녀였는데. 그 명랑했던 칠랑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무리를 잃어 쓸쓸하고 외로운 기러기처럼 불안해 보이는군.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다 정씨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닌가. 다 우리 정씨 가문의 후세를 위한 일이야. 그런데 어째 우리 아이들의 표정이…….

어서 이 모든 게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야지. 그러면 우리 정씨 가문도 순탄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고, 우리 후손들도 더욱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을 테니.

정 대노야가 정칠랑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칠랑, 경성에서는 좀 지낼 만하더냐?”

정칠랑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대답하지 않았다.

“육랑이 네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단다. 너희에게 주라며 챙겨 준 선물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급하게 오느라 못 가져왔구나.”

정칠랑이 정 대노야를 빤히 바라보면서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백부님, 왜 우리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거예요?”

정칠랑이 울며 묻자, 정 대노야가 정칠랑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네 백부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다. 네 부모는 더 큰 잘못을 했고.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 너희들을 위해, 우리는 더 이상 잘못된 행동을 계속해서는 안 돼.”

말을 마친 뒤, 정 대노야는 곧바로 정사낭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사낭의 거처 주변은 시녀의 명을 받은 주씨 가문의 시종 네 명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래서 정 이노야는 거처 밖에서 큰소리로 정사낭을 향해 호통치고 욕하기는 해도, 거처 근처까지 오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정사낭의 거처는 몹시 조용했다. 정사낭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여종들은 모두 시녀가 직접 고른 하인들이었다. 정사낭의 거처 안팎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정사낭만을 위한 단독 부엌도 따로 있었다.

정 대노야가 정사낭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식사 시간이어서 맛있는 냄새가 마당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언니, 밥 다 됐어. 사공자님은 아직도 식사 안 하시겠대?”

두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근심스러운 말투로 대화하고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정 대노야가 잠시 주춤했다.

정 대노야는 덕승루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았다. 예전과 달리, 그는 이번에 경성에 들어오고 나서 곧장 정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 정 대노야는 경성의 여러 찻집과 술집, 학당과 저잣거리, 그리고 사찰과 도관을 두루 돌아다니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그는 정교랑과 고씨 가문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직접 수소문하여 자초지종을 알아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손해 보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정 대노야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정사낭은 잠을 자는 듯했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결국 입을 열었다.

“먹을 생각이 없으니, 그만 가져가거라.”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누군가가 의자에 앉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밥을 안 먹는 건, 그 여인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 게냐? 얼마나 험한 꼴을 더 보여 주고 싶은 게야?”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정사낭은 흠칫 놀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사낭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 떠올랐는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였다.

“아버지, 소자가 불효자입니다. 괜히 집안에 폐만 끼치고.”

정 대노야가 정사낭의 팔을 내리고 천천히 한쪽 소매를 걷자, 붕대로 칭칭 감은 후 나무막대기 두 개로 고정한 정사낭의 손목이 드러났다.

“정말 예전처럼 좋아질 수 있는 게냐?”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이가 그렇다고 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아프진 않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셨다. 자신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걸 알았다면, 고 관인이 손목을 부러트리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신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보자마자 한 첫마디가 이렇게 다정한 말일 줄은, 정사낭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사낭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단 밥부터 먹거라. 다친 몸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푹 쉬고. 이렇게 제 몸을 상하게 하다니, 네 누이 보라고 이러는 게냐?”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정사낭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또 한 번 생각나서 창피해하며 사죄했다.

“아버지, 소자가 불효…….”

정사낭이 입을 열자마자, 정 대노야가 그의 말을 끊었다.

“뭐가 불효라는 말이냐? 네 동기들과 함께 덕승루에서 만찬을 즐기고, 화괴를 불러와 흥을 돋우려고 했다가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한 것? 풍류를 아는 사내라면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일인데, 뭐가 창피하고 뭐가 불효라는 게야? 그깟 화괴 다툼이 뭐라고? 학업과 과거 시험도 따지고 보면 경쟁인데, 화괴를 두고 경쟁할 수 있고말고. 그런 게 바로 젊은이지.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정사낭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네 누이가 이미 말했다. 이건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그런데 네가 이렇게 대범치 못하게 내려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 건, 네 누이와 대적하겠다는 뜻이냐? 네 누이가 사소한 일이라고 한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게야?”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호통쳤다.

“아버지, 그건 누이가 저를 지켜 주려고…….”

정사낭이 창피해하며 설명하려 했지만, 정 대노야는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네 누이가 너를 지켜 주려고 그랬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너는 왜 네 누이를 지켜 줄 생각을 못 하는 게야?”

누이를 지켜?

정사낭이 멍한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누이에게 폐만 끼치는 내가 어떻게 누이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지…….

“네 누이가 너를 지키고자 네가 옳다고 말했으면, 넌 옳은 게다. 그러니 너는 세상 사람에게 네 누이가 말한 게 옳다고 알려 줘야 해. 그게 바로 네가 누이를 지키는 방법이다. 가족이 무엇이더냐? 가족이라면 다 같이 한 마음이 되어 바깥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정 대노야가 갑자기 정사낭의 어깨에 손을 세게 얹고 목청을 높였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거라! 겁먹고 움츠러들 게 뭐 있어!

어깨 펴고! 세상 사람들에게 네가 옳다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라고 하거라! 어깨 펴고! 네가 남 보기에 창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란 말이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정사낭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폈다.

“아버지.”

정사낭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 대노야를 불렀다.

“교랑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비록 네가 교랑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교랑이 너를 지킬 때, 겁쟁이처럼 숨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원래 잘못을 저지르며 현명해지는 것이야. 그러니 이번 잘못이 헛되지 않게, 이번의 손해가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절대로 네 가족을 고통스럽게 한 원수가 통쾌함을 느끼게 둬선 안 된다.”

정사낭이 정 대노야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울먹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소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습니다.”

“아씨, 어때 보여요?”

반근이 정사낭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며 다친 부위를 정교랑에게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손으로 정사낭의 손목을 천천히 문질렀다.

“공자님, 아프세요?”

정사낭은 자신의 다친 부위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정사낭을 쳐다보며 시녀가 쿡 웃었다. 정사낭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프네.”

정사낭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픈 게 안 아픈 것보단 나아요. 안 아프면, 큰일 나는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교랑이 정사낭의 다친 손목에 침을 놓고 새로 약을 바르자, 반근이 붕대를 다시 감아주었다.

“근데 어쩐 일로 공자님이 직접 여기까지 오셨어요? 안 그래도 아씨께서 그쪽으로 가시려던 참이었는데.”

반근이 붕대를 감으며 물었다.

“오늘 나가서 동기 몇 명과 술을 마시기로 했어. 여기는 지나가는 길에 들렀고. 이러면 괜히 누이가 우리 집까지 오지 않아도 되잖아.”

정사낭이 웃으면서 말했다. 반근과 시녀가 다소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공자님, 밖에 나가 술 드시려고요?”

“왜? 마시면 안 되나?”

정사낭이 똑같이 놀란 눈치로 반문하고는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누이, 나 술 마셔도 돼?”

“술은 아직 안 되고, 차나 음료 정도는 괜찮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알겠어. 누이한테 먼저 물어봐서 다행이네. 시간이 늦었으니, 난 이만 가볼게.”

정사낭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도 정사낭을 배웅하려 몸을 일으키고 그와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누이는 어디 나가지도 않는 것 같던데, 내가 나가는 길에 사다 줄 건 없어?”

정사낭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 밖에 안 나가시더라도, 저희가 있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사낭이 그제야 알겠다며 인사한 뒤 대문을 나섰다. 정사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녀가 안심이 되는 듯 픽 웃었다.

“아씨, 참 좋네요.”

시녀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좋다는 거야?”

정교랑이 묻자, 시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께서는 뭐든 다 아시니까 참 좋네요.”

시녀가 정교랑의 소매를 끌면서 말했다.

“아씨, 우리도 나가서 놀아요.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한 거 있죠.”

정씨 가문 사람 중 절반은 마음이 홀가분했고, 나머지 절반은 수심에 가득 찼다. 같은 시간, 정 대노야의 고소장을 수리한 관아의 판관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인, 이번 건은 어려운 사건입니까?”

며칠 사이에 수염이 다 빠질 정도로 수염을 쓰다듬는 판관이 걱정스러웠던 수하가 차를 올리며 물었다.

형제들의 재산 싸움이면, 좋은 사건 아닌가? 모든 관아에서 쌍수 들고 환영하는 사건이 바로 이런 사건이지 않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관리가 배에 기름칠할 수 있는 이런 귀한 사건은 당연히 좋은 사건이잖아. 이런 사건을 맡으면 다들 싱글벙글 기뻐하기 바쁘던데, 판관 대인은 왜 저렇게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계시는 건지.

“형제간의 재산 싸움 말이냐? 가산을 놓고 싸우는 게 뉘 집 형제인지를 봐야지.”

판관이 말하면서 탁자 위에 놓인 고발장을 손으로 탁탁 쳤다.

“무려 정씨야. 정씨.”

수하가 목을 빼고 고발장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정씨가 왜요?”

판관이 수하를 흘겨보았다.

“정씨가 왜냐고? 왕 공사, 자네가 어떻게 우상공사(右廂公事: 관직명)가 된 줄 아는가?”

왕 공사가 아첨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 알다마다요. 다 대인께서 소인을 챙겨 주신 덕분이지요.”

판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틀렸어. 자네를 도운 건 정씨 낭자였네.”

예?

왕 공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초 유금천은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기도 했고 부윤의 측근이기도 했는데, 하필이면 이 정씨 여인을 건드려서 지방에 좌천된 게야.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아직 산속에서 광부들이나 관리하고 있었겠지.”

판관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듣기론 고 대인의 심기를 건드려서라고…….”

왕 공사가 놀란 얼굴로 말하자, 판관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모자란 인사를 봤나. 경성에 들어온 지 그렇게 오래됐으면서,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안 했어? 여기는 경성이고, 관아일세. 자네처럼 귀도 먹고 말까지 못해서야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는 게야!”

부아가 치밀어오른 판관이 호통쳤다. 왕 공사가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자, 판관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왕 공사가 나간 뒤에도 판관은 여전히 탁자 위에 놓인 고소장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 낭자에게 미운털이 박혔다가는, 아니, 고 관인에게 미운털이 박혔다가는!

정 낭자에게 미움을 샀다가는 풍림과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고, 고 대인의 미움을 샀다가는 유금천과 같은 꼴이 날 것이야. 이번에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안팎으로 사람대접을 못 받겠구나.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어.

부윤 대인, 이 간사한 놈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감자를 내게 던져줄 수 있어!

“안 되겠다. 민사 소송이긴 하나, 어쨌든 정 이노야는 관리니 이 사건을 대리시로 넘겨야겠어!”

판관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쫓겨났던 왕 공사가 다시 뛰어 들어왔다.

“대인, 귀덕낭장 주 노야께서 오셨습니다.”

귀덕낭장 주씨!

판관이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역시 정 낭자도 사람을 보내왔군.

“이번 사건이 판결 내기가 어렵소이까?”

귀덕낭장 주 노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역시 정 낭자가 보낸 사람다워. 기세가 대단한 것이 고 관인 쪽에서 보낸 사람 못지않군.

판관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요?”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묻자 주춤하던 판관이 주 노야에게 되물었다.

“그럼, 주 대인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물을 필요가 뭐 있소? 정동 그자가 사유재산을 은닉했다는 증거가 확실하잖소. 정동의 부인 이름으로 재산을 두었다는 건, 부모가 생존에 계신데 재산을 따로 나눈 별적이재(別籍異財)의 죄에 해당하지.”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판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예, 예.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별적이재라고……. 으응?”

판관이 자연스럽게 주 노야의 말을 따라서 대답하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고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한 거지?

“감히 별적이재라 할 수 없기는. 이게 바로 별적이재인 것을.”

주 노야의 말에 판관이 주 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주 노야, 정동은 정 낭자의 부친이잖습니까.”

“부친인 게 뭐? 부친이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자식 된 자로서 아비의 죄를 덮어줘야 한다는 말이오? 아버지가 중하다고 해서, 종족을 배반해도 된다는 소리요? 지금 정 낭자에게 종족을 배반하고 죄를 숨겨 주었다는 죄명을 씌우겠다는 것이오? 정 낭자가 그럴 사람이오?”

주 노야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판관이 주 노야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지요.”

주 노야가 나간 뒤, 판관이 무언가 결심한 듯 탁자를 내리쳤다.

“여봐라.”

왕 공사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판관이 고소장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고소장을 받아오려고 재빨리 판관에게 다가갔다.

“대인, 이걸 대리시로 보내시려고 그러시지요? 소인이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왕 공사가 웃으면서 말하자, 판관이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이런 아둔한 자를 봤나. 이 좋은 일을 왜 대리시로 보내나? 원고와 피고를 공당으로 소환하게. 본관이 친히 판결을 공표할 테니.”

좋은 일? 수염이 다 빠질 정도로 잡아 뜯으며 근심하던 일이 갑자기 좋은 일이 됐어?

왕 공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발장을 받아왔다.

이래서 경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복잡하다고 하는 거구나.

“노야!”

관부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문서를 본 정 이부인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정 이부인의 뒤에 서 있던 두 여종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고생했소.”

정 대노야가 관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시종이 관졸에게 수고비를 건넸다. 관졸들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기쁘게 수고비를 받아 갔다.

“문서는 모두 바꿔 두었으니, 정 대노야께서 잘 보관하십시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관졸들이 정중하게 말하자 정 대노야가 그들을 배웅하면서 말했다.

“신선거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시간이 된다면 잠시 들렀다 가시게.”

저 봐, 저 봐. 벌써 주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좀 봐!

정 이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난 며칠간 신선거 주인으로 지내면서도 돈이 아까워 남들을 초대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까지 아낀 게 결국 남 좋은 일만 됐어!

관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정 대노야가 몸을 돌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형님, 괜한 것에 손대서 다치지 마십시오.”

정 이노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천륜과 이치에 맞게 가져가는 것이야. 너야말로 괜한 것에 손대지 마라.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주도면밀하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대리시에 끌려가 관직도 못 지켰을 것이야.”

정 대노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요? 형님이 지금 이러는 게 날 위한 것이라고?”

정 이노야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내, 내가…….”

정 이노야가 거친 숨을 내쉬다가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한테 말씀드릴 겁니다.”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릴 건데? 네가 친딸이 일궈낸 재산을 어머니 명의로 두지 않고, 네 부인의 명의에 달아 사유재산을 은닉했다고 말할 것이냐? 어머니께서 너를 천륜을 어긴 대죄로 네놈을 또 한 번 관아에 고소하면 어쩌려고?”

어머니의 성정이 생각난 정 이노야가 잠시 주춤했다.

어머니께서는 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지. 내가 어머니를 고명 부인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다 믿으시고 나를 제일 아끼셨어.

하지만 나와 함께 경성으로 오지는 못하셨으니, 형님 내외가 어머니를 챙겨 드리면서 나에 관한 무슨 안 좋은 말을 늘어놨을지 어떻게 알아.

이 상황에 내가 천륜을 어긴 대죄로 또 한 번 관아에 드나들게 된다면, 난 분명 경성에서 내쫓길 거야.

“적당히 하거라.”

정 대노야는 황당해하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무덤덤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노야, 점포에는 제 돈도 들어가 있어요. 제 돈은 돌려주셔야죠.”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정 대노야가 혀를 찼다.

“있다고 우기면 답니까?”

“대노야, 진짜예요. 그 몹쓸, 아니, 교랑이 화괴 다툼에 돈을 다 쓰는 바람에 점포 운영이 어려워졌는데, 제가 혼수를 팔아가면서 점포를 지켜냈다고요. 심지어 제 장신구들까지 팔았어요.”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대노야의 뒤를 쫓아가며 사정했다. 하지만 정 대노야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점포에 쏟은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장부를 그리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데 빼돌린 돈이 얼마일지 누가 알아? 내가 돈을 도로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워 어쩔 줄 모를 판에,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

세상에! 정말 억울해 죽겠네!

“대노야! 양심을 걸고 하늘에 맹세컨대 진짜라니까요!”

정 이부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손으로 가슴을 쳤다.

“양심을 걸고 하늘에 맹세한다니까요! 정말로!”

사람이 어쩜 저렇게 속이 시커멀 수가 있어! 세상에 도리가 존재하긴 하는 거야?

내 돈! 내 장신구들! 그리고 장부에서 매일 늘어나는 복리까지! 며칠만 기다리면 한 달을 채우는데, 며칠만 더 기다리면 그 돈이 다 내 손으로 들어오는데!

아이고, 하느님!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이렇게 살 바에는 내가 나가 죽어 버려야지!”

정씨 저택의 마당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4월 초,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이었다. 퇴조를 알리는 악공들의 중주가 울리자 옥좌에 앉아 있던 천자는 조당을 떠나고, 진소 등의 중신들은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중요 사안들에 대해 토의했다. 그리고 조회에 참여했던 나머지 문무백관들은 황궁 밖으로 나갔다.

고 관인은 여느 때처럼 여러 관리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아첨을 들으며 웃고 떠들었다.

“고 관인이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병가를 내어 조회에 참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 관리가 먼발치서 고 관인 무리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다른 관리가 음, 하면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나. 고 관인이 병이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조회에 불참할 사람은 아니지. 정말 다친 사람도 병가를 내지 않고 조회에 참석했지 않나.”

대답하던 관리가 턱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먼저 말을 꺼낸 관리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직을 제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사들이 웃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정 진사 말인가?”

관리가 웃으면서 정사낭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긴 뒤 말을 덧붙였다.

“관복의 소매가 긴 것이 아쉽군.”

정사낭의 소매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단 한 명뿐이 아니었지만, 정사낭은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듯 동료들과 웃으며 걸어갔다. 심지어 어떤 이가 일부러 그에게 망신을 주려고 다가와 다친 곳은 어떻냐고 물었을 때, 정사낭은 시원스럽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웃기까지 했다.

“별일 아니네. 조금 상처가 난 것뿐이니.”

조금 상처가 난 것뿐이라고?

“분명 손목이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을 묻던 관리가 놀란 얼굴로 반문하자, 정사낭이 쾌활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서로 술 마시고 흥이 올라 살짝 손발을 쓰며 다툰 것뿐이네. 그런 자리에서 근육과 뼈가 상할 정도로 싸우면 쓰나. 자네가 그리 말하면, 고 관인이 뭐가 되겠나!”

자신이 고 관리를 모함한다는 식의 발언을 듣자, 관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가세, 가자고. 오늘처럼 다 같이 모이는 것도 힘든데, 내가 한턱내겠네.”

정사낭이 웃으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만 관으로 화괴를 얻은 자가 한턱내겠다는 소리를 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몰려왔다.

“주 낭자도 오는 거요?”

누군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정사낭의 낭랑한 웃음소리에는 젊은이 특유의 득의양양한 기세가 잔뜩 서려 있었다. 정사낭의 웃음소리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족히 사백 명은 넘는 진사 가운데 이름을 알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사낭은 이 어려운 것을 단 며칠 만에 해냈다. 물론, 덕승루 화괴 다툼으로 명성을 얻은 것이지만.

“역시 젊은이의 의지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군.”

누군가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의 표정만 보면 젊은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뱉은 말에는 젊은이를 향한 부러움이 가득했다.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람에, 황당한 일이군. 저리도 창피한 줄을 모른다니. 쯧쯧. 체통을 지켜야지.”

다른 누군가가 몹시 언짢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뭐라 떠들든 간에, 화괴 다툼은 기껏해야 젊은 나이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일로 여겨지게 됐다. 썩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사낭의 사생활이고, 아직 젊은 사내다 보니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다. 조정 대신 중에서도 젊은 시절에 황당한 일을 벌인 자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과 귓가를 스치는 말들 때문에 고 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녀석이 얼굴에 철판을 깐 게 분명합니다. 감히 고 관인을 상대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는 연극 따위를 꾸미다니. 관인, 언제부터 저놈과 이번 일에 대해 논하지 않기로 하신 겁니까?”

시종이 씩씩대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고 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시종을 향해 호통쳤다.

“내가 바보더냐?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아? 너 같은 잡것이 그걸 다시 내게 읊어 주는 의도가 뭐야? 일부러 내 면전에 대고 욕하려는 게냐?”

일부러 아부를 떨려고 씩씩거리며 했던 말인데, 고 관인의 노여움을 살 줄 몰랐던 시종은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고 관인은 더는 시종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멀어지는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저런 체면도 없고 창피도 모르는 놈을 봤나!

하지만 정말로 창피를 모르는 사람만이 더욱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사낭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지낼수록, 화괴 다툼 사건은 더욱 별일이 아니게 되는 셈이니, 고 관인도 자연스럽게 이번 일을 웃어넘겨야만 했다.

고 관인이 이번 일을 웃어넘기지 못한다면, 도리어 하찮은 일들을 걸고넘어지는 소인배이자 풍류를 제대로 즐길 배짱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고 관인이 이를 부득 갈면서 읊조렸다.

“퉤!”

누군가가 고 관인의 뒤에서 화가 난 듯 큰 소리로 침을 뱉었다.

지금 누구한테 침을 뱉는 게야?

화가 잔뜩 나 있던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인상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평왕 전하.”

고 관인이 웃는 얼굴로 예를 표했다. 조복을 입은 채, 뒷짐을 지고 걸어오던 소년이 거만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고 관인은 평왕이 화가 났지만, 자신에게 콧방귀를 뀌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평왕 앞에 서 있던 이가 고 관인 자신이 아니었다면, 평왕은 아마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을 테니까.

“전하? 어찌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고 관인이 물었다.

“기분 좋지.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아? 설마, 진안 군왕이 무평 민란을 잠재우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아직 못 들었나?”

무평 민란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았다는 소식이 대조회에서 알려지고, 곧이어 경성 곳곳에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식은 내궁에도 금세 전해졌다. 진안 군왕이 승전보를 알리는 인편에 태후와 황후에게 올릴 선물을 보낸 덕분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궁전 안, 귀비가 오랫동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이들은 그녀가 깨부순 찻잔 조각을 흔적도 없이 치우고, 귀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놈이 보낸 선물 중에 내게 보낸 선물은 없었다고?”

내시가 난감한 얼굴로 귀비를 따라 궁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마마, 선물은 현지에서 파는 조그마한 장식품일 뿐입니다.”

“아무리 약소한 선물이어도, 격식을 지켰다는 게 중요한 것이야.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약삭빠르게 사람들의 환심을 샀는데. 경왕이 다친 요 몇 년 동안도 그랬어. 본궁에게도 늘 깍듯하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는데 이번엔 왜 하필 내 선물만 빼먹었느냔 말이야!”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그러게요. 이것 참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진안 군왕이 격식 차리는 데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데, 혹시 선물을 전달하던 이가 실수한 건 아닐까요?”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번 일이 정말로 이상하긴 해. 평소대로라면 진안 군왕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닐 텐데.

“이상해? 이상할 것도 없지. 예전에는 안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사람을 가리겠다는 뜻이야. 많이 컸다 이거지. 혼자 밖으로 나가 정무를 처리하고, 병사들까지 거느리게 됐잖아. 게다가 이번엔 승리까지 손에 거머쥐었으니 얼마나 재주가 좋아? 그리고 제일 무엇보다도…….”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말하다가 서성이던 것을 멈췄다.

“명망을 얻었다는 게야.”

“마마, 이게 무슨 명망이라고요.”

내시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아니야? 이런 게 명망이지! 이젠 온 경성 사람이 다 알잖아. 송자동자는 자식만 낳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싸움도 잘하고, 칙사 노릇도 제대로 한다는 것을!”

귀비가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마마, 그렇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내시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마마께서 점점 근심이 많아지시네. 특히나 진안 군왕과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 더욱 그래. 별것 아닌 일에도 저리 이성을 잃으시니.

고 대인께서 경성을 떠나기 전에 마마를 잘 돌봐 드려야 한다고 하신 게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구나.

마마께서 정말 좀…….

“뭐가 바뀌겠냐고?”

귀비가 고개를 홱 돌리고 내시를 노려보았다.

귀비는 조회에 나가지 않아도, 황제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귀비의 귓가에 황제의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짐이 그럴 줄 알았소. 진안 군왕은 절대로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

이러셨겠지. 귀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 상공께서 폐하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셨습니다.”

내시가 서둘러 말했지만, 귀비는 내시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쨌든 폐하는 그리 말씀하셨잖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든, 꺼내지 않든 간에, 폐하께서는 분명히 속으로 그리 생각하실 게다!”

어쩜 내 주위에는 이리도 멍청한 것들만 있는 건지.

귀비의 침이 얼굴에 잔뜩 묻은 내시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4월인데, 태자 책봉 이야기는 왜 아직도 결론을 못 내렸지?”

귀비가 물었다.

“아, 태자 책봉은 이미 중서문하성을 통과했는데, 폐하께서 무평의 재해와 민란이 잠잠해진 후에 다시 논하자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다시 논하자고? 다시 논할 게 뭐 있다고?”

귀비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황후마마께서 4월은 태후마마의 탄신일이 있는 달이라, 이번 진안 군왕의 승전보와 함께 성대하게 축하하자고…….”

내시가 말끝을 흐렸다.

“황후? 황후가 말했다고? 황후가 언제부터 말을 할 줄 알게 됐어?”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그치자 내시는 귀비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미소 지었다.

“마마, 황후마마의 병세가 많이 나아진 듯합니다. 그저께는 태후마마를 뵈러 가시기도 했고요.”

이젠 바깥출입까지 한다고?

“본궁은 왜 그 일을 몰랐던 게야? 그렇게 큰일을 왜 본궁이 모르느냔 말이다!”

귀비가 경악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궁에서 일어난 일인데, 내 눈을 피해갔어?

황후가? 그 병약한 여인이 다시 후궁을 쥐락펴락하겠다고?

* * *

작가의 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보통 팔 품 이하의 관리여서 대조회를 참여할 자격이 안 됩니다. 작품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이어서 넣은 장면이니,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교랑의경> 20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