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60)

-유일무이-

해 질 무렵, 진십삼은 취기가 오른 채 집에 돌아왔다.

“자네, 어딜 갔던 거야?”

주육낭이 소리쳤다.

“자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진십삼이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주육낭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진십삼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그 여인이 선물한 그림 좀 보여 줘.”

주육낭은 진십삼을 끌고 가다시피 하며 서재를 향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러 온 거야?”

주육낭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잠가 둔 거야? 안 그랬으면 내가 훔쳐 가려고 했는데.”

주육낭이 언짢다는 듯이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훔쳐 갈까 봐 잠가 뒀지.”

진십삼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서재 앞까지 끌고 오자, 진십삼은 걸음을 멈추고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 그림은 한 달에 딱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어. 괜히 그림 망가져.”

주육낭이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엄청 귀한 것처럼 말하네. 여차하면 내가 한 장 더 그려 달라고 하면 그만이야.”

“그래, 좋아. 그럼 가서 한 장 그려 달라고 해.”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서재 문을 열고는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했다.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서재 안의 등불 하나가 켜졌다.

“잠깐, 잠깐. 일단 술부터 좀 가져와 봐. 술 없이 무슨 꽃을 감상한다고.”

주육낭이 말했다.

“이봐,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꽃에 취할 수도 있다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시녀들에게 등불을 밝히라고 말했다.

서재 안의 등불이 하나씩 차례로 밝혀졌다. 은은한 불빛 아래, 진십삼의 시야에 모란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앞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화폭을 감상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그림이란 말이지. 이건 날 위한, 나만의 모란이야.

진십삼의 눈앞에 모란 한 송이가 천천히 피어났다.

모란이 피어나?

진십삼이 멈칫하고 놀랐다.

위씨 저택에 있는 모란은 천 겹의 붉은 꽃잎이 감싸고 있다던데(魏家華者, 千葉肉紅華, 重重層層 - 구양수歐陽修 <낙양목단기洛陽牧丹記>), 정 낭자가 나한테 그려준 모란이 그 품종이었나?

등불이 점점 밝아지면서, 진십삼의 눈앞에 보이는 모란이 조금씩 피어났다. 그리고 붉은 모란 위로 날갯짓을 하던 나비 한 마리가 모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모란을 낮에 본 사람들은 강렬한 색상을 띤 꽃에 미인이 따라 준 술에 취하듯 홀리고, 밤에 본 사람들은 옷가지를 흠뻑 적시는 짙은 꽃향기에 취한다(國色朝酣洒, 天香夜染色 - 이정봉李正封).

방 안의 모든 등불이 켜지자, 진십삼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서 화폭을 들고 서 있는 주육낭을 발견했다.

“내 거야.”

주육낭이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주육낭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나를 끌고 오면서 연기한 게, 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였어?”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는 자신의 뒤에 펼쳐진 화폭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고. 내 모란이 더 유일무이해.”

“내 거야말로 유일무이하거든? 내 모란 한 송이가 네 거 백 송이를 이긴다.”

주육낭이 지지 않겠다는 투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그가 든 화폭으로 시선을 옮기고 미소를 지었다.

“틀렸어. 그 여인이 유일무이한 거야.”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하지.

주육낭도 자신의 손에 들린 화폭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해.

두 사람은 술 한 동이를 금세 비웠다. 편한 자세로 앉아 여전히 입이 귀에 걸린 채 웃고 있는 주육낭을 보고 있자니, 진십삼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정 낭자가 자네한테 이렇게나 잘해 줄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내가 누이한테 잘해 주는 거지.”

진십삼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오늘 고 관인을 만나러 갔었어.”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고 관인!

주육낭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늦게 집에 왔구나. 사환 말로는 십삼이 지인을 만나러 갔다던데, 그 지인이 바로 고 관인이었군.

진십삼이 이번 일에 대해 고씨 가문에 잘 설명할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 보겠다고 했지. 진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둘 다 황실의 친척이기도 하고, 특별한 왕래는 없어도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고 관인이 정교랑을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쯤은 늦출 수 있겠지.

“자네, 뭐라고 했나? 고씨는 뭐라고 했고?”

주육낭이 물었다.

“나야 솔직히 말했지. 고 관인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고.”

해가 지자, 덕승루의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되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목소리와 노랫소리가 한데 섞여 덕승루를 감쌌다.

“언니.”

주 낭자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화려하게 단장한 관기 한 명이 웃으면서 주 낭자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춘령이 씩씩대며 관기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노(路) 아씨, 저희 언니가 쉬고 계시잖아요.”

춘령이 외쳤다. 관기는 춘령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앉아 있던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 벌써 자려고요?”

관기가 물었다.

관기들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지라, 대낮에 내의를 입고 밤이 되어야 화려한 단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창 손님을 맞을 시간인 지금도, 주 낭자는 머리를 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내의만 입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늘은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쉬겠다는 모습이었다.

주 낭자가 응, 하고 대꾸했다.

“언니는 여유롭고 한가해서 참 좋겠어요.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아양 떠는 우리와는 다르잖아요.”

관기가 웃으며 말했지만, 주 낭자는 관기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노 아씨, 그럼 빨리 나가세요. 다른 언니들이 왕 관인을 빼앗아 가면 어쩌려고 여기 있어요?”

춘령이 말했다. 관기는 춘령을 잠시 흘겨보고는 계속해서 주 낭자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제 칠현금이 고장 났는데, 언니는 요즘 칠현금을 쓸 일이 없잖아요. 오늘 좀 빌려도 되죠?”

“기루에 남는 게 칠현금일 텐데, 왜 굳이…….”

주 낭자가 춘령의 투덜거림을 끊고 대답했다.

“가져가.”

주 낭자가 책을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관기를 쳐다보았다.

“언니, 언니의 칠현금은 엄청 귀중한 거잖아요.”

춘령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으로 주 낭자에게 투덜거렸다.

“귀중?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물건은 똑같은 물건일 뿐이야. 동생의 칠현금 솜씨가 뛰어나니, 내 칠현금을 욕되게 하지 않겠지.”

주 낭자가 말했다. 관기는 주 낭자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재빨리 칠현금을 품에 안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언니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해요? 이러니까 고 관인과 정 관인 모두 언니한테 푹 빠지지.”

관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노 아씨, 말재주가 없으면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럼 손님이 몇 명 더 늘 테니까.”

춘령이 말했다. 관기가 고개를 돌리고 춘령을 흘겨보았다.

“나 참, 몸종 주제에 왜 그렇게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지 원.”

“제가 아씨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듣기 좋은 말을 해 줘요?”

춘령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춘령.”

주 낭자가 춘령을 나무라자, 춘령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관기도 춘령을 붙잡고 말싸움을 계속하기는 귀찮았는지, 별다른 말 없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칠현금을 안고 물러났다.

“언니.”

춘령이 주 낭자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너도 그만 물러가렴. 난 책을 조금만 더 보다가 잘게.”

주 낭자의 말에 춘령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주 낭자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아무런 목적 없이 책을 읽은 건 너무도 오래전 일이네.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직접 책을 펼쳐 들고 나를 가르치셨던 기억이 나.

사내는 공로와 명성을 위해 책을 읽는다지만, 여인들이 책을 읽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하지만 열심히 읽어 보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셨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지.

교방사에 들어온 후로 읽은 책과 여기서 익힌 칠현금 혹은 다른 기예들, 그 모든 건 나 나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사내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거였어.

아니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사내들의 환심을 얻는 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잖아?

정적이 흐르는 방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적막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노 아씨, 저희 언니께서는 주무신다고…….”

춘령이 관기를 막아서는 말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관기의 호통이 들려왔다.

“지금 자긴 뭘 자. 언니가 잠이 오게 생겼니?”

관기가 문을 벌컥 열고 술 냄새를 풍기며 주 낭자 앞으로 다가왔다.

“언니, 큰일 났어요.”

노 낭자의 다급한 모습에 주 낭자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전에 왕 관인이 그러는데, 누가 고 관인을 찾아가 화괴 다툼을 했던 이유가 다 언니 때문이라고 했대요.”

노 낭자의 말에 주 낭자는 피식 웃었다.

“원래 내 탓이 맞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노 낭자는 마음이 급했는지, 주 낭자의 말을 끊더니 조심스럽게 문밖을 내다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진십삼 공자님이 고 관인을 찾아가 모든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고, 정 공자님을 이용해 고 관인을 떨쳐내려던 언니의 계략이었다고 했대요. 정 공자님은 언니랑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인데 억울하게 언니의 덫에 걸려들었다면서, 언니가 일부러 정 공자님을 이 일에 끌어들여 두 가문의 분쟁을 부추겼다고 했대요.”

노 낭자의 입에서 진십삼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마자, 주 낭자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노 낭자의 말들에 주 낭자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노 낭자의 입 모양으로 보아서는 계속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주 낭자는 그저 귓가가 시끄럽다고 느낄 뿐,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번에 엄청난 가문 두 곳의 미움을 한 번에 산 거잖아요.”

“난 아직 접대 중이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손님들 아직 안 갔는데,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일부러 몰래 온 거예요.”

“언니, 언니.”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꽉 쥐고 앞뒤로 흔드는 느낌에, 주 낭자는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아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흔들고 있던 춘령을 쳐다보았다.

“언니, 괜찮아요?”

춘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주 낭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내가 한 짓이라고 했다고.”

주 낭자가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언니,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진 관인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춘령이 주 낭자보다 더 많은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곧 주 낭자의 손에 붙잡혔다.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 그분의 말씀이 옳아. 다 내 잘못이야.”

주 낭자가 소리쳤다.

“언니! 언니, 아니에요. 언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진 관인이 언니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 진 관인이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모함하냐고요! 진 관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춘령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정 낭자를 위해서…….

주 낭자가 힘없이 웃었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아. 고 관인을 찾아가서 그렇게 말하는 게 옳지.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보살피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지켜 주고 싶어 하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해치는 건 말도 안 되죠! 언니는 일편단심 그분만 생각하는데,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언니가 왜…….”

“입 다물어!”

주 낭자가 소리 질렀다.

울부짖던 춘령이 주 낭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고는 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들어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주 낭자도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놀란 눈치였다.

무지막지한 여자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

아무도 듣기 싫어하는 그런 목소리가, 종달새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칭찬받던 내 목소리라니. 모두가 혐오하는 그 목소리가…….

그날 벌어진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난 그분 때문에 고 관인을 접대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옷소매를 쥐고 있던 주 낭자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모든 것을 떨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그러시는 게 옳아. 진심이니까. 하지만 여기 덕승루에 진심 따위란 없어.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헛소리 하지 마.”

춘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언니.”

“그런 헛된 말과 헛된 일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주 낭자의 말에 춘령은 재빨리 이마를 땅에 찧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언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춘령이 숨이 넘어갈 듯 울먹였다. 주 낭자는 다른 손에 들린 책을 세게 쥐면서 옆에 있던 구리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난 꼭 잘 지낼 거야. 보란 듯이 아주 잘.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고 관인이 던진 금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시녀 두 명이 서둘러 금잔을 주웠다.

“썩 꺼져!”

고 관인의 욕을 듣자, 두 시녀는 사형을 면제받은 죄인들처럼 기뻐하며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요 며칠 집에 갇혀 있던 터라 고 관인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성질이 괴팍해졌다. 고 관인에게 맞아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른 시녀가 두 명 있었는데, 결국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일로 고씨 저택의 하인들은 고 관인의 시중을 들 때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행여나 고 관인에게 맞아 죽는 재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에서였다.

“제 생각에는 진십삼 공자의 말이 틀림없습니다. 이번 일이 좀 수상쩍긴 하잖습니까.”

식객이 말했다.

“수상쩍다니? 수상쩍다 한들, 뭐가 달라지는데?”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고 관인의 반응에 식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더는 남의 손에 놀아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 낭자와 악연을 맺는 것을 몹시 기뻐하는 자가 있을 겁니다. 노야께서도 떠나시기 전에 당부하셨지요. 지금은 정 낭자를 상대할 때가 아니라, 태자 책봉이 더 시급…….”

“태자 책봉이 뭐 급하다고. 이미 기정사실인 것 아닌가. 평왕을 태자로 세우지 않으면 누굴 세울 수 있는데? 그 바보를 태자로 세우기라도 할까.”

고 관인이 식객의 말을 끊고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뭐든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게…….”

식객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고 관인은 냉소를 지었다.

“신중이라. 그러니까 그 정씨를 신중히 대해야 한다는 말일세. 진십삼의 말이 맞아. 나도 그 정씨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나나 정씨나 다 남의 손에 놀아난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그 정씨가 몹쓸 계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남의 손에 놀아난 것을 알면서도, 왜 나에게 사과하지 오지 않지?

어쩔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나오기는 개뿔. 정씨 입장에서는 이 일을 황당한 일로 만들어야 제일 좋잖아.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정씨를 공격할 때 이번 일이 이용될 테니까.

어차피 황당한 일이라면, 정씨가 내게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해도 될 텐데, 왜 나만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거냐고! 딱 보면 모르겠나? 정씨가 얼마나 악독하고, 우리 고씨 가문에게 오만불손한지.”

그날 이후로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기고 몸을 사리며 지내 온 생각을 하자, 고 관인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그가 자신 앞에 있던 찻잔을 세게 바닥에 던졌다.

“참으로 원통하구나!”

“참으로 원통하구나!”

같은 시간, 정 이노야도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의 앞에도 찻잔과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지만, 식기가 아까워 차마 집어 들어 깨트리진 못했다.

저 식기들도 다 돈이다. 집안 살림이 빠듯해서 밥해 먹는 것도 어려워질 지경이야.

며칠만 더 기다리면 돼. 며칠만 더 기다리면 월말이니, 점포들이 막대한 수익금을 내게 쥐여주겠지.

“노야, 고 관인이 만나 주지 않던가요?”

정 이부인이 물었다. 정 이노야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이나 만남을 청했는데, 있는 인맥을 싹 다 끌어모아도…….”

정 이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이게 다 그 몹쓸 것과 사낭이 불러온 화야!”

정 이노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화를 냈다.

“그 몹쓸 것은 지금도 주씨 가문에서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을 테고, 사낭은 요양한답시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으니, 원! 저들은 편하게 지내면서, 왜 골치 아픈 일은 다 내 몫이냔 말이오!”

정 이노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정사낭의 진사 자격을 박탈시켜달라는 상소문을 한 번 더 올려야겠소. 남들은 내가 보여주기식으로 고 관인을 찾아가는 줄 알아.”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누군가가 침을 뱉었다.

“퉤! 이 썩을 놈아! 감히 내 아들의 진사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정 이노야 부부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째 형님의 목소리 같지 않소?”

정 이노야의 물음에 정 이부인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노야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대노야잖아요!”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흔적이 묻어나는 행색의 정 대노야가 지팡이를 짚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정 대노야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혀 쿵쿵 소리를 내며 정 이노야의 고막을 때렸다.

“이 썩을 놈아, 무슨 낯짝으로 자기 집 자식들과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이 썩을 놈아, 네놈이 그 둘을 고소하러 가기 전에,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눴다고 내가 먼저 네놈을 고소할 것이야!”

주 노야는 정 이노야의 약점을 잡기 위해 사람을 시켜 정씨 저택을 지켜보게 했다. 그래서 정 대노야가 정씨 저택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임에도 주 노야는 그가 온 소식을 바로 알게 되었다.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다고? 그자가 뭐 하러 여길 와?”

소식을 들은 주 노야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하러 왔겠어요? 다 교랑의 돈 때문이죠. 그 사람이, 그 많은 재산을 정 이노야 부부 둘이서 꿀꺽하게 놔둘 사람이에요? 그랬다가는 배 아파 죽을걸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돈이면 배가 아플 만도 하지.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그자가 또 교교의 재산을 노린다고? 강주에서 교교의 혼수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던데, 그 교훈으로도 부족했나?”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 이노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 이부인이 먼저 냉소를 보이며 비아냥댔다.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딱 보니까 생선 냄새를 맡고 온 고양이네.”

“악독한 것! 지금은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이혼장은 내가 대신 써 두었으니 당장 우리 정씨 가문에서 꺼지거라!”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늘 남에게 항상 온화한 모습만 보이던 정 대노야였다. 물론 이따금 엄격한 가장으로서 정 이노야를 호되게 꾸짖을 때도 있었지만, 정 이부인에게는 한 번도 실례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훗날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욕을 한 일은 없었다.

정 이부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정 대노야가 자신에게 심한 욕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창피하고 화가 난 나머지 통곡하기 시작했다.

“천벌 받을 놈! 강주에서 우리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경성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못살게 굴어? 어디 한번 내쫓아 봐! 당신네 집 대문 앞에서 목매달아 죽을 테니까!”

정 대노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콧방귀를 뀌면서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정 이부인의 울부짖는 소리에 정 이노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정 이부인을 다독이며 정 대노야를 향해 발을 굴렀다.

“형님, 뭐 때문에 이리 급하게 경성까지 쫓아왔느냔 말입니다!”

“무슨 일? 아우 네가 이 요부의 말에 홀려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으면서 문서 몇 장을 정 이노야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정 이노야는 그 문서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정 대노야가 경성에 온 이유를 알아챘다. 신선거 등 점포에 관한 문서의 사본이었다.

“형님, 어떻게 된 일인지는 형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모두 교랑의 것입니다.”

정 이노야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잘 알고 있다. 이게 다 교랑의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는 게 아니냐!”

정 대노야가 호통쳤다.

“교랑이 아둔하여 저와 형님이 건재한데도 자기 이름을 점포 문서에 올렸지 뭡니까. 율법에 따르면 부모가 생전에 있을 때, 그 자식은 절대로 자신의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의 구분이 없다는 율법 말입니다. 교랑이 따로 재산을 가졌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 되면, 분명히 불효를 이유로 교랑을 발고했을 겁니다.”

정 이노야의 말에 정 대노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잘났구나. 부모가 생전에 있을 때, 자식은 절대로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구나. 한데 부모가 살아 계신대도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눌 경우, 그 자식을 삼 년 형에 처한다는 율법은 모르는 것이냐? 이 재산들을 팽씨의 명의로 돌려놓다니, 대체 저의가 뭐야!”

정 이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울음을 멈춘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저의가 뭐냐고요? 대노야가 우리 교교의 재산을 탐낼까 봐, 교교를 지켜 주려고 그런 거예요. 교교의 혼수까지 뺏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경성의 재산이라면 오죽할까!”

정 대노야가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는 말은, 너희가 일부러 호적을 따로 만들고 재산을 나눈 일을 인정하는 게지?”

정 이노야가 멈칫하며 대답하지 못하던 사이, 정 이부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정해요.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정 이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턱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대노야, 설마 남들도 고발하지 않는 죄목을 가져다 이이를 고소할 생각은 아니겠죠? 이건 교교의 재산이라고요. 모두 교교의 것이니까 허튼 생각 마세요.”

이 영감탱이가 혼수 싸움으로 고생했던 건 그새 잊은 거야?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에게 경고하듯 ‘교교’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맞아. 그 문서들에 내 이름을 올린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교교의 손에서 넘겨받은 재산이니, 대노야도 쉽게 그 재산들을 빼앗을 생각은 못 하겠지. 우리가 대노야를 무시하고 이렇게 손쉽게 재산을 나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대노야가 교교의 혼수를 노렸을 때 이미 된통 당했던 경험 덕분이야.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사니까, 남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야. 가족의 일원으로서 대노야도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겠지. 이 재산이 모두 내 이름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교교의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감히 이 재산을 탐내거나 우리를 고소할 수는 없을 거야. 재산은 모두 내 명의로 돌려두었으니 남들이 트집 잡을 기회는 원천차단한 셈이고. 가족들 또한 무슨 상황인지 뻔히 알지만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어.

교교도 국법이 지엄하고, 이를 어길 수 없으니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 거겠지.

이대로 오랜 시간이 흐르면……. 아니지, 오랜 시간이 지날 필요도 없어. 재산은 이미 내 소유가 되었잖아? 이제 내 거라고! 나는 황금을 낳는 거위를 가진 셈이야!

정 이부인이 눈빛을 반짝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정 이노야가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저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형님, 천 리 길을 달려온 이유가 고작 그것 때문입니까? 아비로서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정사낭부터 손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정 대노야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늦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네놈을 관아에 고소했으니.”

“정말로 관아를 찾아가 고소했다더냐?”

주 노야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소인이 돌아올 때 일부러 관아에 가서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정 이노야를 고소했답니다. 관아도 이 일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대요. 아, 정씨 저택도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정 대노야가 관아에 고소장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 이노야 내외가 미친 사람들처럼 정 대노야와 치고받으며 싸우고 있어요.”

사환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정 대노야가 데리고 온 사람 수가 적어서 그런지, 싸움에서 좀 밀린답니다.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여러 개 남겼고요.”

누가 밀리든 말든 그건 주 노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 노야 입장에서는 둘 중 한 명이 맞아 죽거나, 둘 다 죽는 게 제일 좋았다.

그런데 정대낭 그자는 왜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이는 거지?

주 노야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교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무섭지도 않나. 어떻게 또 교교의 것을 빼앗을 생각을 한 게야?”

주 노야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노야, 정 이노야도 뺏을 수 있는데, 정 대노야라고 해서 못할 건 또 뭡니까? 두 형제가 다 한통속인 게지요.”

사환이 입술을 삐쭉이면서 대답했다. 그때, 주 노야가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다시 말해 보아라!”

화들짝 놀란 사환이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예전에는 정씨 가문 사람들을 찰지게 욕하면 욕할수록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어쩔 땐, 욕하시다가 흥이 오르면 상금을 주시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은 왜 한통속 정도의 욕설에 역정을 내시는 거지?

“한, 한통속이라고.”

사환이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주 노야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좀 더 앞에.”

“아, 정 이노야도 뺏을 수 있는데, 정 대노야라고 해서 못할 건 또 뭐겠습니까?”

사환이 서둘러 대답했다. 주 노야가 손뼉을 치더니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맞아, 맞아. 그거야, 바로 그거라고! 아우가 먼저 교교의 것을 빼앗았으니까, 형이 그걸 다시 빼앗는다면 교교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아우의 것을 빼앗는 게 돼. 그리고 어쩌면, 정대낭 그자가 재산을 빼앗아서 교교한테 돌려줄지도 몰라!”

주 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 대노야의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맞아, 분명히 그럴 거야. 정이낭은 교활하게 효도를 빌미로 교교의 재산을 빼앗았어. 남의 가정사다 보니, 그 누구도 정이낭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형이라면 가능해!”

주 노야가 연이어 손뼉을 치면서 감탄했다.

“정대낭 그자도 참. 한 번 된통 당하더니 똑똑해졌구나. 하마터면 네놈의 속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어.”

“그렇게 된 거였군요.”

주 노야의 말을 들은 사환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주 노야에게 아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노야께서 정 대노야보다 훨씬 똑똑하십니다. 정 아씨께서 노야의 저택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습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칭찬이라기에는 어딘가 이상한데?

“됐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사람을 모으거라.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정 대노야가 왔는데, 사돈으로서 인사를 안 할 수야 없지.”

주 노야가 시녀를 향해 손짓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청 안으로 들어서던 주 부인은 주 노야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노야, 괜찮으세요?”

주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정씨 가문에 사람이 왔다고 노야가 인사를 하러 갔지? 노야가 정씨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두들겨 패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인데.

“괜찮소, 괜찮아. 더 늦게 가면 우리만 손해니까 서둘러야 하오.”

주 노야가 다급하게 문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서두르거라! 있는 무기 싹 다 챙겨 들어라.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정대낭이 선창을 했으니, 나도 빨리 가서 장단이라도 맞춰야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정대낭 혼자 독식하게 둘 순 없어.

주 노야는 민가를 습격하러 가는 도적 떼처럼 흉악무도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주 부인은 서둘러 하인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주 부인이 혀를 찼다.

“당초 정씨 가문은 한 집안에서 분가하지 않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곧 있으면 그 집도 분가하게 생겼구나. 아니지, 분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면까지 내팽개치고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게야. 형제끼리 관아를 드나드는 불명예스러운 짓까지 벌이려 하다니.”

주 부인이 중얼거리며 혼잣말했다.

“부인, 돈이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한다잖아요.”

옆에 서 있던 여종의 말에 주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돈?

꼭 돈이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하는 건 아니야. 그 애가 자기 재산을 모조리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못할 게야.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렵겠지.

“정 대노야의 마음을 움직인 건, 돈이 아니라 그 여인이야.”

그런데 정 이노야 부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게지. 그 여인의 부모라는 점을 이용하면서도, 그 여인이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게 참…….

“하지만 급할 거 없다. 곧 있으면 그들도 깨닫게 될 테니.”

주 부인이 합장한 채 잠시 불경을 읊조렸다. 주 부인은 이렇게 해야만 정교랑을 떠올리기만 해도 놀라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뭘 하고 있느냐?”

주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여종은 주 부인이 말한 그 여인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그 여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교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십삼 공자님이 오셔서요.”

여종이 조용히 대답했다.

“진십삼 공자라. 이렇게 대놓고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빨리 진십삼 공자한테 시집이나 가라지.”

주 부인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이어서 물었다.

“육낭은?”

여종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기에, 노야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인사하러 가셨습니다.”

사환이 대답했다.

주씨 집안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사환의 말을 들었다면, 분명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정 대노야가 왔는데 사람을 끌고 인사하러 갔다고? 인사하러 가는데 시종들을 모조리 대동하는 이유가 뭐야? 싸움을 걸거나 난리를 피울 때나 사람을 데려가지 않나?

하지만 주육낭은 주 노야가 사람을 데리고 정씨 가문에 간다는 것은 곧 싸우러 간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대꾸 없이 시선을 거두고 진십삼을 향해 말했다.

“헛수고할 필요 없어. 고 관인은 아예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이던데. 지금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생각과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없을 거야. 복수하지 않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괜히 자네가 가서 좋은 말을 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숙이고 들어가서 좋게 말하면 할수록, 그자는 더욱 기를 펴고 당당해질 테니까.”

진십삼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진십삼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최소한 낭자가 자기보다 당당하다고 여기진 않을 테니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아요.”

다 똑같아요. 상관없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고씨 가문은 다르다고요.”

유 교리나 풍림과는 다른 일이야. 그 사람들은 모두 관리지만, 고 관인은 관리일 뿐만 아니라 황실의 친척이다.

풍림 등은 황실의 신하에 불과하지만, 고씨 가문은 황실의 친척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황실 입장에서는 신하보다 친척이 더 가깝지.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정교랑이 먼저 물었다.

“평왕?”

정교랑이 뱉은 간단한 두 글자는 질문하는 것 같기도, 주육낭의 말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평온했지만, 진십삼은 정교랑이 뱉은 두 글자 때문에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평왕?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평왕 덕분에 그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럼, 만약 평왕이 없어진다면?

자신이 한 생각에 진십삼은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정 낭자와 대립했던 사람들의 끝이 안 좋아서? 유 교리만 봐도, 정 낭자의 식당 하나를 탐했다는 이유로 패가망신을 당했으니.

정 낭자가 칼을 빼냈다 하면, 무조건 그대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혀서? 서북 군정 일만 해도 그래. 보잘것없는 장수 하나가 의형제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이유로 서북 인사를 손바닥 뒤집듯이 모조리 갈아엎었어. 그 장수는 목숨을 잃었고, 장수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서북에서 쫓겨났지.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만약 평왕이 없었으면…….

“귀비가 낳은 황자가 평왕이고, 귀비의 성씨가 고씨야.”

주육낭의 목소리가 진십삼의 귓가에 들려왔다.

“평왕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진십삼이 돌연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소리친 진십삼 때문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십삼은 주육낭과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귀비가 평왕의 친모라는 말을 하는 중이었는데, 뭐가 무관하다는 거야?”

주육낭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묻자 진십삼이 찻잔을 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폐하께서 외척에 대한 경계를 늦추신 적 없기도 하고, 외척은 조정의 중신이 될 수 없으니까, 그들의 권력은 결코 막강하지 않다는 뜻이야.”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평왕에 관한 소개고, 평왕과 고씨 가문의 관계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왕이 그런 사람이구나.”

평왕이 누구인지 물어본 거였군. 역시 내가 공연한 생각을 했어.

진십삼이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낭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고 관인의 불만을 아예 없애는 건 헛된 바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 역시 그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고 관인을 찾아간 이유는, 조금이라도 여유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마워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웃었다.

“이 정도에 고맙다고 하면 괜히 서먹하잖아요.”

“이 틈을 타서 다른 꿍꿍이를 품으면 더 서먹해진다.”

주육낭이 경고 섞인 눈빛으로 말하자,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 대노야가 주씨 저택에 들어설 무렵, 젊은 사내 두 명이 웃으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한 명은 준수하고, 다른 한 명은 몹시 용맹한 면모를 뽐냈다. 얼핏 보아도, 숨길 수 없는 경성 명문가 자제의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정 대노야가 둘 중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저건 주육낭이고, 저 옆에 있는 사람은…….

이때, 정 대노야의 시선을 느낀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내 같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족의 기개가 느껴졌다.

정 대노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두모와 두봉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정 대노야의 얼굴에는 정 이부인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같은 몰골로는 도저히 누구를 만날 수가 없겠어. 특히 언뜻 보아도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저 사람들은 더욱.

“진십삼 공자가 이제 돌아가려 한다고?”

주 노야와 집사의 대화를 들은 정 대노야가 몸을 움찔했다.

진씨 가문의 열셋째! 진씨 가문!

“공주부 진씨 가문을 말하는 거요?”

정 대노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주 노야가 몸을 돌리고 자랑스레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번에 상경하여 만난 주 노야는 줄곧 지금처럼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짓던 악독한 표정보다는 한결 나았지만, 사실 정 대노야는 주 노야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쳐다보든,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댁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겠지.”

정 대노야의 말에 주 노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곧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진십삼은 정교랑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라 거짓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 노야는 화를 삼키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정 대노야는 한 방 먹였다는 듯 득의양양한 얼굴로 주 노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호기심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말에 오른 진십삼은 주육낭과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했는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햇빛에 비친 진십삼의 모습이 눈부실 정도로 멋스러웠다.

저렇게 멋스러운 사내라면 사윗감으로 삼는 것조차 꿈도 꿀 수 없는 일인데, 저런 사내가 교랑에게 마음이 있다니.

시녀와 반근은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다는 이야기를 사환을 통해 전해 듣고 정교랑에게 귀띔도 한 터라, 정 대노야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정 대노야의 몰골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 실례 좀 하리다.”

정 대노야가 민망한 듯 말하고는 소매로 얼굴 반쪽을 가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연기 좀 그만하시오. 실례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했어야지.”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온갖 불쌍한 척을 다 하면서, 자신이 온 힘을 다해서 교교를 대신해 공정함을 따지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거겠지.

늙은 여우 같은 놈.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와서는!

정 대노야가 헛기침을 했다.

“주 노야, 교랑과 잠시 집안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소이까?”

정 대노야가 ‘집안일’이라는 세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누가 뭐래도 교랑의 성은 정씨지, 주씨가 아니야.

주 노야가 속으로 침을 뱉었다.

“아이고, 교랑이 정씨라는 걸 아직 기억하고 계셨나 보오?”

주 노야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교교가 주씨 가문이 낳은 요괴라고 할 땐 언제고.

“주 노야, 피차일반이외다.”

정 대노야가 주 노야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꼭 네놈은 교랑이 정씨 가문이 낳은 요괴라고 말한 적 없는 것처럼 말하네.

보다 못한 시녀가 마른기침을 하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주 노야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갔다. 정 대노야는 그런 주 노야를 힐끗 쳐다본 후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랑.”

정 대노야는 정교랑의 이름만 부를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 대노야가 갑자기 두 손을 공손히 올리고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사낭의 일은 정말 고맙게 됐다.”

정교랑이 답례했다.

“대노야, 별말씀을요. 제가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이에요.”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많긴 하나, 그걸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정 대노야가 다시 한번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교랑, 예전의 일은, 이 백부가 네게 미안했다.”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일도 그래요. 서로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이니까,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그냥 가볍게 하는 말이겠지?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패배한 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승리한 자의 여유일 테지.

어쩌면 이 애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순간일지도 모르겠군. 잘못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며 사죄하는 것.

정 대노야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같은 시간, 정 이노야 부부도 마음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얏, 아프잖소!”

정 이노야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던 정 이부인을 밀쳐냈다. 정 이부인이 바닥에 넘어지면서 아이고, 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내 머리!”

정 이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외쳤다.

“형님이 제대로 미친 게 틀림없어! 감히 사람을 때려? 집에서 때린 거면 그러려니 하겠다만, 머나먼 경성에까지 시종들을 대동해 나를 때리러 와?”

정 이노야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미친 게 아니라, 돈에 눈이 먼 거죠.”

정 이부인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떤 돈인지는 제대로 보고 눈이 멀어야 할 거 아니오!”

정 이노야가 대꾸했다. 정 이부인은 금방이라도 분통이 터져 죽을듯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내 재산을 빼앗으려고 들어? 아직도 여기가 강주인 줄 아나? 대노야는 어디서 저런 근본도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저러는 거죠?”

말을 하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주씨 가문!”

“주씨 가문도 빌어먹을 놈들이야!”

주씨 가문 이야기만 들어도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정 이노야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연신 팔을 문질러 대는 정 이노야 때문에 방 안에는 소매가 쓸리는 사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도 주가 놈이 때린 거야!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감히 형님에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천륜을 거스르는 대죄니라!”

주 노야가 정씨 저택의 대문을 자기 집 들어오듯 당당하게 들어와서 내뱉은 첫마디였다.

주 노야가 대문을 넘을 때, 형님의 손에 붙들려 맞고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형님을 때린 걸 알고 있었지?

그 후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에게 주먹을 날리고. 허구한 날 무식하게 무예 수련만 하는 무장이라 그런지, 힘도 무식하게 세서 그놈 주먹 한 방에 난 그대로 고꾸라졌어.

“노야, 대노야가 주씨 집안과 손을 잡은 게 틀림없어요!”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정 이노야는 흠칫 놀랐다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놈 모두 창피한 줄을 모르는군. 강주에서는 둘이서 짜고 교랑의 혼수를 탐하지 않나, 이번에는 교랑의 재산까지 빼앗으려고 들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이노야를 잡아 일으켰다.

“노야, 서둘러야 해요. 주 노야가 좀 전에 대노야를 데리고 간 걸 보면, 분명히 교랑한테 가서 허튼소리로 현혹하려 들 거예요. 교랑이 오해하기 전에, 우리도 빨리 가서 설명해야 한다고요! 어서요, 어서!”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무작정 힘으로 끌고 나갔다. 정 이노야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소리쳤다.

“멍청한 여편네야! 내 팔!”

“십사 관인! 십사 관인!”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고 관인이 사환을 향해 손에 쥔 술잔을 냅다 던졌다.

“이 잡놈아,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그리 기쁘더냐!”

고 관인이 화를 냈다.

시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술잔을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술잔에 맞은 시종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연신 사죄했다.

“십사 관인, 그게 아니라요. 부윤(府尹: 지방 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 대인께서 엄청난 일을 알려 주시겠다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엄청난 일? 그리 큰일이라면 내 의사를 물을 게 아니라, 바로 아버지께 서신을 썼겠지.”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정씨와 관련된 일입니다. 지금 정씨 집안에 난리가 났어요. 정씨의 백부가 정씨의 부친을 관아에 고소했답니다!”

형제끼리 관아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은 몹시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특히나 관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일을 기피했다.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 하는데, 어떻게 나랏일을 할 수 있냐는 어사대의 탄핵을 받을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 관인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던 거로군.”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이 가산을 몽땅 손에 쥐고 있었던 거였어. 그러니까 그런 황당한 일에 큰돈을 뿌리지.

자식이 사유재산을 두어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그 부친과 짜고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눴다?

“충효를 모르는 파렴치한 여인이구나. 올곧지 못한 행동을 했으니, 집안 어른들이 관아를 드나들며 싸움을 벌이는 게지.”

고 관인이 비웃었다.

“관인, 관아에서 이 사건을 진행할지 말지 물어 왔습니다. 혹 관인께서 불편하시다면,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겠다면서요.”

사환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하나? 당연히 사건을 진행해야지. 집안의 어른들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닌데.”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관인의 말씀은, 이 사건을 크게 만들자는 뜻인지요? 아니면, 모(毛) 수재에게 한 번 물어보심이 어떻습니까?”

모 수재는 고능준이 고 관인에게 붙여 준 식객이었다.

고 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노야께서 경성을 떠나시기 전에, 정씨 가문과 싸우지 말고, 그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게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괜히 저들과 싸우면 우리의 품위만 떨어진다고요. 그러니 이번 사건은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일이 커지면, 보통 망신이 아니잖습니까.”

사환이 고 관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에라이, 정씨가 내 체면을 바닥까지 떨궈놨는데, 나는 정씨 체면을 생각해 줘야 해? 그것도 모자라서, 정씨 가족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게 보살펴 주라고?

내가 등신 천치인 줄 알아?

“아버지께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정씨 가문이 화목해야 정씨의 부친이 문제없이 대리시 관직에 부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 부친이 대리시 관직에 올라야만, 정씨 일가가 얼마나 부도덕한 자들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본디 풍림이 난리를 칠 때부터 정씨 일가를 패가망신시키려 했는데, 그 여인이 운 좋게 빠져나온 거야. 그런데 지금은 또 돈 때문에 자기들끼리 집안싸움을 하겠다지 않느냐. 참으로 염치도 없는 자로구나.”

고 관인이 냉소를 지었다.

“가산 분쟁처럼 쓸데없는 사건은 굳이 아버지께 여쭙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큰일만 아버지께 확인받아도 충분해. 이번 사건은 관아에서 알아서 법대로 진행하라고 전하거라.”

“교교!”

정 이노야 부부는 족히 반나절을 허비한 끝에 주씨 저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정교랑의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정 대노야를 보자, 두 사람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됐다.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네 재산을 빼앗으려고 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재산을 빼앗는다고? 그러면 왜 그 문서에 적힌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닐까?”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었다.

“내 이름이 쓰여 있긴 해도, 교교와 미리 다 상의한 거예요.”

정 이부인은 다급한 말투로 소리친 후 정교랑 앞에 잰걸음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는 억울하기도, 화가 나기도 한 듯 정교랑에게 사정했다.

“교교, 너나 나나 다 잘 알고 있잖아. 그 재산은 다 네 것이야.”

“제 것이라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 이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네 것이지. 그때 너랑 이야기했잖니. 남들이 네 아버지가 경성에 올라온 것을 탐탁지 않아 해서, 괜히 네 불효를 빌미로 아버지를 탄핵할까 봐 내 이름으로 바꾼 거잖아.”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요? 이 재산은 다 교교의 것이에요. 대노야, 전에 교교의 혼수를 뺏으려고 했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교교가 가진 재산까지 다 탐내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정 대노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정 이노야 부부에게 말했다.

“혼수는 내 잘못이 맞다. 교랑 어미의 혼수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던 건 명백한 내 잘못이야.”

“알면 됐네요!”

정 이부인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혼수는 혼수고, 교랑의 재산은 교랑의 재산이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랑이 사유재산을 둔 것은 교랑의 잘못이 맞아.”

정 대노야가 이어서 말했다.

저놈이 감히 교교의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해?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 정도로 가난이 두려운 거야?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그게 잘못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봐봐! 네놈한테 반문하잖아! 이 여인이 화가 났다는 뜻이야!

정 이부인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 대노야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이지. 교랑,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계실 땐, 자식이 사유재산을 두면 안 된다는 율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 정씨 가문엔 선조의 유훈을 따라 분가를 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어. 그래서 네 부모도 사유재산을 따로 가지지 못하는 거고.”

“그렇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우리 교교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지만,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었다.

“그렇군요. 전 몰랐어요.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잘못된 거라면 바른대로 해야죠.”

뭐라고?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지만, 반대로 정 대노야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어. 역시!

“교랑, 너 미쳤니? 어떻게 네 재산을 저 사람한테 줄 수 있어!”

정 이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노야께 당연히 드려야 하는 거라면 드려야죠. 그때 당신이 내 재산을 당신에게 줘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줬던 것처럼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당연하게 뭘 줘? 이거 바보 아냐?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재산은 전부 다 네 것인데, 왜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거야? 넌 주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돼. 네가 대노야를 무서워할 게 뭐 있어!”

“교랑, 형님을 무서워할 필요 없다. 내가 네 아비이니, 당연히 너를 위하고 네 것을 지켜 줄 것이야. 네 것을 형님에게 줄 필요는 없어. 네가 안 준다 해도 형님은 너를 어찌할 수 없을 게다!”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부녀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을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자는 듯이 말했다.

정 대노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정 대노야가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과연 네놈이 나를 어찌할 수 있을지 내 두고 보마!”

말을 마친 정 대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정 이노야가 분을 이기지 못하며 눈을 부릅떴다.

“교교. 저 봐라, 저 봐. 저 사람이 저리 기고만장하게 나온다니까? 좀 전에는 우리를 때리러 집까지 찾아왔어.”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팔을 끌어안고 억울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은 하소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됐는지, 정 이노야는 단도직입적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교랑, 말만 해 다오. 어떻게 하면 좋겠니?”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미 말했는걸요.”

말했다고?

정 이노야 부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잘못된 거라면, 바른대로 하면 된다고요.”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바른대로 하면 된다고?

“뭐가 바른 건데?”

정 이노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관아에서 결정해 주겠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관아에서 결정해 준다고?

정 이노야가 아직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정 이부인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목청을 높였다.

“교랑, 너 지금 대노야가 관아에 우리를 고발한다는 거에 동의한다는 말이니? 이건 우리 가정사인데, 어째서 남들 앞에서 난리를 피우겠다는 거야?”

“남들에게 말 못 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가족끼리 논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관아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정 이노야 부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변함없는 정교랑의 표정에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린 확실히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누고, 사유재산을 은닉했어. 이건 논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야.

어떤 게 이치에 맞는 결론인지, 관아에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눈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관아까지 가지 않아도 뻔한 결과인 것을, 대노야가 일부러 집안 망신을 시키겠다고 관아까지 일을 끌고 간 거니까.

보통의 경우라면 대노야를 말려야 정상인데, 교랑은 대노야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아예 대놓고 대노야한테 관아에 우리를 고소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관아에서 결정토록 하자고?

정교랑!

“너! 지금 우리를 가지고 논 거니?”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재산을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가 그 오랫동안 기뻐했던 게 다 헛짓거리였던 거야?

“몹쓸 것! 대노야와 주씨가 네게 얼마나 좋은 걸 약조했기에 이러는 게냐? 어떻게 그들과 한통속으로 나를 음해할 수 있어!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것이 다 있나!”

정 이노야가 분을 못 이기며 소리쳤다.

밖에서 기다리다 지친 주 노야는 정 이노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치 전투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를 들은 장수처럼 시종들을 데리고 곧장 대청 안으로 쳐들어왔다.

“불효막심한 건 네놈이지!”

주 노야가 소리를 내지르며 정 이노야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감히 사유재산을 숨겨? 그리고 그 죄를 친딸에게 덮어씌워? 내가 네놈의 형님을 대신해서 한 수 가르쳐 주마!”

주 노야의 주먹에 맞은 정 이노야가 바닥에 고꾸라지자,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정 이노야를 향해 달려갔다. 정 이노야 부부가 더 소란을 피우기 전에, 주 노야는 시종을 시켜 두 사람을 문밖으로 끌어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줄곧 문 앞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좀 전에 이노야 부부가 주씨 가문에 발을 들이려 했을 때도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한바탕 실랑이 끝에도 정씨 가문에서 데려온 시종들은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고, 정 이노야 두 내외의 몸뚱이만 겨우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대부분 군인 출신인지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두 사람을 손쉽게 대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욕설 소리가 차츰 멀어지자, 주 노야는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다정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지, 교교? 네 외숙이 있는 한, 너는 무서워할 게 아무것도 없단다. 절대로 이 집에서는 정씨 놈들이 난리를 피울 수 없을 게야.”

마당에 서 있던 주 부인은 주 노야의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놀라긴 뭘 놀라? 사람도 죽인 애가,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놀라겠어?”

주 부인이 고개를 들고 정씨 부부가 떠난 대문을 내다보았다. 점점 더 멀어지는 정씨 부부의 목소리에, 주 부인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합장을 하고 불경을 읊었다.

가엾은 정 이부인…….

그러게 내가 저 여인은 금강야차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일찍이 말했거늘.

“노야, 저 몹쓸 것이! 저 몹쓸 것이 우리를 해친 거예요!”

주씨 저택의 대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자신을 부축하러 다가온 여종들을 밀쳐내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울면서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정 이노야는 거의 제힘으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인지라 사환들이 양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주씨 시종들에게 마구잡이로 밀쳐진 정 이노야의 옷과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주 노야와 그 시종들에게 흠씬 얻어맞은 정 이노야의 얼굴에는 오전에 맞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른 상처가 더해졌다. 사환들에게 부축을 받는 정 이노야의 몰골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노야, 노야.”

정 이부인은 속상한 마음에 정 이노야를 붙잡고 울먹거렸다. 정 이노야는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듯, 그런 자신의 몰골에 전혀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 그 몹쓸 것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리라!”

정 이노야가 이를 부득 갈면서 소리쳤다. 그러고는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 정 이부인을 재촉했다.

“일단 돌아가세.”

정 이부인도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걱정할 것 없소. 관아에서는 절대로 이번 사건을 수리하지 않을 거요.”

정씨 저택에 돌아온 정 이노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읊조렸다.

“왜요? 그 계집은 분명 우리를 일부러 고소한 거예요!”

정 이부인이 울면서 소리쳤다.

“일부러 우리를 고소한 거라고 해도, 관아의 벼슬아치들이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을 것 같소? 그 계집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내 기필코 천륜을 어긴 대죄로 그 계집을 곤장형에 처하게 만들 것이오. 누가 날 막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다른 사람이 나를 고발해서, 그 계집이 직접 관아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난 엄연한 그 계집의 아비야! 지난번에 나를 탄핵했던 풍림이 지방으로 좌천된 게 얼마나 됐다고 감히 나를 건드려? 풍림이 가는 길에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와 보라 그래!”

정 이노야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의 단호한 태도에 정 이부인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정교랑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애가 좋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재산을 넘겨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요. 우리가 그 애를 얼마나 진심으로 잘 대해 줬는데, 어쩜 이럴 수가 있죠?”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대청에서 갑자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으로 잘 대해 줬다고 하였느냐? 본인 스스로 그 말을 믿기는 하고?”

정 이노야 부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대청 안을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서는 정 대노야가 한껏 여유로운 자세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여긴 우리 집이라고요!”

정 이부인이 버럭 화를 냈다. 정 대노야가 같잖다는 듯 정 이부인을 흘겨보았다.

“이 저택은 정씨 집안의 소유야. 정씨로 된 모든 재산은 다 내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에나!

정 이부인은 정 대노야가 이토록 철면피인 줄은 처음 알게 되었다.

“형님, 적당히 하십시오.”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내가 네놈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정 대노야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이제 네놈이 이 모든 걸 멈추고 싶다고 해도, 절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정 이노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침을 뱉으려고 입술을 떼던 찰나,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집사가 황급히 뛰어왔다.

“또 뭐가? 누가 또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더냐!”

부아가 치밀어오른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집사를 향해 소리쳤다.

“노야. 그게, 관졸들이 쳐들어, 아니, 관졸들이 찾아왔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정 이노야가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관졸들이 뭐하러 여길 와?”

“원고와 피고를 데리러 왔다고 합니다.”

집사가 울상을 지으며 대청 안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정 대노야를 흘깃 쳐다보았다.

뭐가 어째?

정 이노야가 경악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청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켰다.

“자, 가자. 이번 사건을 제대로 진행해 보자고. 네가 얼마나 파렴치한 불효자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겠다!”

정 대노야가 소매를 홱 털고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정 이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집사를 쳐다보았다.

“관리들이 미친 게야? 어떻게 이 사건을 수리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럴 리가 없어!”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니. 그러게 내가 경성에 가지 말라고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여긴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는데,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정 대노야가 천천히 정 이노야의 곁을 지나치면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 이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정 대노야의 뒷모습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빌어먹을, 내 꿈에도 몰랐구나. 내가 넘어야 할 경성의 칼산이 형님이었고, 나를 심판대에 올리는 사람이 내 친딸일 줄은! 이 간사한 놈들아! 간사한 놈들!”

정 이부인이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대성통곡했다.

“이 사기꾼들아! 거기에 들어간 내 돈이 얼만데! 그건 내 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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