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60)

-소란-

같은 시간, 주씨 저택은 무척 평온했다. 주육낭의 거처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 앞에 놓인 큰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많다고?”

그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별로 많지도 않아. 너 주려고 삼 년 동안 모아둔 거니까.”

자문자답하던 주육낭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상자를 홱 가져왔다.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럼 내가 삼 년 내내 그 애를 그리워한 것처럼 들리잖아. 그렇게 구구절절 말해서 뭐해!”

주육낭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또다시 긴 한숨을 뱉고는 상자를 앞으로 쭉 밀었다.

“어이, 네 거다.”

주육낭이 무심하게 말했다.

“묻긴 뭘 물어. 주면 그냥 받아. 뭐냐고 묻지 좀 말고.”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상자를 도로 끌어당겼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그 고약한 성격에 나한테 이걸 냅다 던져 버릴지도 몰라.”

미간을 찌푸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돌려줄 테면 돌려주라지. 이건 꼭 내가 그 여인이 받아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잖아. 갖기 싫으면 갖지 말든가!”

혼자서 성을 내던 주육낭이 중얼거렸다.

“진십삼한테 선물을 줘? 진십삼이 자기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주육낭이 한창 구시렁대던 찰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정 아씨께서 오셨…….”

사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육낭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애가 왔어! 그 애가 왔다고!

제 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주육낭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바닥에 있던 상자를 들어 올려서 아무 곳에나 쑤셔 넣으려 허둥댔다.

하지만 부피가 큰 상자를 숨길 곳을 찾지 못한 주육낭은 상자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상자에 발이 걸려 버렸다. 주육낭의 힘이 워낙 센지라, 상자는 발에 차인 것처럼 뚜껑이 열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금은으로 만든 팔찌와 비녀, 반지와 아기자기한 목각인형 같은 것들이 상자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주육낭이 재빨리 쏟아져 나온 것들을 상자 안으로 다시 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가에 멈춰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너 주는 거 아니야!”

주육낭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뭘 저한테 주는 게 아니라고요?”

주육낭이 목을 빼고 사환의 뒤를 내다보았지만, 마당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당에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잡담을 나누며 웃는 시녀 두세 명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 아씨가 왔다며?”

주육낭이 물었다.

“아, 정 아씨 쪽 사람이 왔는데,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사환이 서둘러 대답했다. 주육낭이 사환을 노려보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쪽에서 사람이 온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놀랐잖아!

“아니, 공자님, 정 아씨께서 그 사환의 말을 듣고는 엄청 급하게 나가셨어요. 게다가 시종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데리고 가면서 무기까지 챙기시더라니까요?”

사환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사환이 오열하면서 말하는 바람에, 문지기들은 무슨 덕승루, 화괴, 고 관인, 누굴 때려죽인다는 그런 말밖에 못 알아들었대요. 노야께서는 그래도 걱정되시는지 공자님께서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문지기가 한 말을 떠올리느라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사환은 주육낭이 어느새 자리를 뜬 것도 몰랐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급하게 나갔다는 말에 벌써 뛰쳐나간 후였다.

사환은 주육낭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주육낭은 금세 또 사환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어디로 갔대?”

주육낭이 호통치듯이 물었다.

뒷얘기는 하나도 못 들으셨나 보네.

“덕승루요.”

사환이 재빨리 대답했다.

고통스러운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덕승루 안은 다시 잠잠해졌다.

얼큰하게 취한 것처럼 보이는 사내가 덕승루의 구름다리 난간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좌우를 살피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청을 내려다보았다.

대청 안은 벌써 손님으로 꽉 차 있었고, 흥겨운 술판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대청의 위층에 좌우로 나눠진 별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인? 왜 그러세요?”

사내를 부축하던 기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봐.”

취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웃으면서 기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승루에서 비명이 들릴 리가 있나.”

취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름다리 왼편의 별실에서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 무리가 우르르 나왔다.

“어서 가자.”

맨 앞에 선 남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따라 나왔고, 앞서 나간 남자와 같은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세 사내를 부축하면서 걸어 나왔다.

“보기에는 어째…….”

취객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비비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부축 받는 세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보긴 뭘 보시오! 취한 사람 처음 봐?”

무리 중 가장 앞서 있던 남자가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오면서 취객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어유 무서워라.

깜짝 놀란 취객이 기녀를 품에 안고 얼른 옆으로 길을 비켰다. 별실에서 나온 무리가 그의 바로 앞을 지나갈 때, 취객은 곁눈질로 부축받는 세 사내를 몰래 훑어보았다.

앞에 있던 두 사내는 오줌을 지렸는지 지린내가 나는 것 외에는 멀쩡해 보인다만, 맨 뒤의 사내는 이상하게 사지에 힘도 없고, 고개까지 축 늘어진 것이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취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때, 대청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뭐 하는 자들이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취객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청을 내려다보자, 덕승루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활을 쥔 채 대청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활?

“저놈들이에요!”

사환이 고개를 들고 구름다리를 올려다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자님!”

사환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사환의 애절한 부름이 대청 안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취객의 고막에 꽂혔다.

무슨 일이지?

취객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사환의 뒤를 쳐다보았다. 사환의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손에 쥔 활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구름다리 위를 조준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취객이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촘촘한 화살들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에구머니나!

취객은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안타깝게도 아랫도리에 힘이 쪽 빠졌다. 곧 지린내가 코 속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취객은 술이 깨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별실의 문이 열렸다. 별실 안은 외설적인 소리로 가득했다.

“고 관인, 큰일 났습니다!”

기녀에게 술을 받아 마시던 고 관인이 문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데?”

고 관인이 느긋하게 물었다. 이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자들이오! 거기 멈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진짜 큰일이 났나 본데?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 관인도 기녀를 확 밀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낯선 사내들이 별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대청으로 뛰쳐나온 기생 어미가 활을 든 채 별실 안으로 들어간 사내들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병사도, 관졸도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거예요! 게다가 덕승루에서 사람을 때리다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기생 어미가 목청껏 외쳤지만,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씨께서 오셨다.”

누군가가 말하자, 층계까지 줄지어 서서 활을 든 사내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곧 여인 한 명이 시야에 들어오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과 구름다리나 층계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눈앞이 번쩍 뜨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불을 환하게 밝힌 덕승루는 화려한 옷을 입고 제각각 매력을 뽐내며 요염한 눈짓을 보내는 기녀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짙은 색 치마에 꽃이 수놓아진 단정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가냘픈 소녀 하나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덕승루가 여자 손님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나 등불 놀이를 할 때가 아니면 여자 손님이 덕승루를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외의 대부분의 시간, 특히 해가 지고 난 뒤의 덕승루는 사내와 기녀들의 천하였다.

사내들은 이곳 덕승루에서 저토록 고상하고 단아한 여인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뒤로 무기를 든 건장한 사내들 여럿이 서 있어서 그런지, 여인의 부드러움은 사내들의 강직함에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고, 여인에게서는 기이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입을 벌려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 덕분에 대청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씨.”

두 시종이 등에 업고 온 정사낭을 정교랑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공자님!”

사환이 울면서 정사낭을 향해 기어갔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있는 정사낭을 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얼굴에는 상처가 별로 없고, 있더라도 피부가 까진 정도의 외상이 전부입니다.”

말을 전하던 시종이 머뭇거리며 정사낭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만, 몸을 좀 다쳤습니다. 손목이 부러진 듯합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정교랑이 그녀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덕승루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씨?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했던 기생 어미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 관인의 누이가 누군지는 알아?

기생 어미의 귓가에 사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저 사환, 정말로 누이를 말한 거였어?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게 아니고?

설마 저 여인이 바로 정 공자의 누이?

기생 어미가 여인을 쳐다보았지만, 층계에 서 있던 여인은 기생 어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여인을 보니, 기생 어미는 알 수 없는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어디 있지?”

여인이 물었다.

이제 나한테 잘못을 물으려나 봐! 분명히 내게 매질을 할 거야!

언제나 이랬어.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다 우리 탓이 되지. 원숭이 보라고 닭을 죽여 일벌백계로 삼는 이야기 속에서 닭이 되는 건 늘 우리였어. 누구 잘못이든 상관없이 욕을 먹고 매를 맞는 사람은 바로 우리라고.

기생 어미가 속으로 외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뭐, 뭐 하려는…….”

기생 어미가 목청을 높이던 찰나, 단정하게 서 있던 여인이 걸음을 옮겨서 기생 어미 앞을 지나쳐 갔다. 기생 어미는 흠칫 놀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지나가?

기생 어미가 고개를 돌리자, 시종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면서 치맛자락을 흩날리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의 치마저고리 가장자리에 수놓은 금실이 불빛에 비치면서,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정 관인…….

정? 정씨 가문의 여인?

정씨! 정 낭자!

설마 저 여인이 그 정 낭자!

기생 어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주 바보!

“따지고 보면, 바보 집안이긴 하네.”

기생 어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하는 자들이냐?”

고 관인이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별실 한가운데서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눈 시종들에게 향했다.

잠시의 소란이 지나가자, 별실 안은 조용해졌다.

고 관인은 사내들이 집에서 부리는 시종들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래서 시종들이 아무리 신체 건장하고 흉악해도, 고 관인을 두렵게 하진 못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이 있는 경성이었다. 아무렇게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고 관인의 물음에 시종들은 대답 대신 사내 몇 명을 방 안으로 던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들을 알아본 고 관인은 곧바로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들은 고 관인이 정사낭을 손보라고 보냈던 시종들이었다.

뭔가 일이 틀어졌군.

고 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시종들이 피를 흘리거나 눈에 띌 만큼 큰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내던져졌을 때부터,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보니 뭔가 무거운 것에 맞은 듯했다.

정 뭐랬더라? 아무튼, 저놈을 도와줄 사람들이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네. 그것도 이렇게 많이.

하지만 고 관인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경성에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할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 관인은 별실 안으로 들이닥친 사람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촉이 없는 화살을 들고 쳐들어오지는 않았을 터. 정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작정이었다면, 아마 몸에 박히면 빼내지도 못할 화살을 들고 왔겠지.

고 관인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번졌다.

“정 아무개 공자의 사람이더냐? 지금 뭐 하려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지금 뭐 하는 거죠?”

별실 밖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실소를 터트리던 고 관인이 멈칫했다.

여인의 목소리잖아?

저놈을 도와주러 온 자가, 여인이었어?

고 관인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목소리의 주인이 문턱을 넘어서 별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여인이었네.

여인의 미모를 본 고 관인은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았다.

화려한 별실의 불빛 아래, 이제야 열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여인은 품이 넓은 암청색 치마에 가슴께까지 오는 꽃이 수놓아진 평범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높이 올려묶은 흑발에는 나무 비녀 한 개를 꽂고 있었다. 연지분을 칠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화장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여인의 백옥같은 얼굴에서는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귀걸이나 별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은, 꼭 화폭 속에 조용히 서 있는 천고의 미인 같았다.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넋이 나간 듯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덕승루 안에서 저런 절세 미녀를 보게 되다니.

“당신이 고 관인인가요?”

적막을 깨트리고 여인이 물었다.

여인이 입을 열자, 화폭 속에 조용히 서 있던 미인이 좀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화폭 속의 미인이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미인이구나.

“맞소. 내가 바로…….”

고 관인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여인을 대할 때, 특히 미인을 대할 때 고 관인은 한없이 부드러운 사내였다.

“당신이 내 오라버니를 다치게 한 건가요?”

정교랑이 고 관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때, 들것에 들린 정사낭이 별실 안으로 옮겨졌다.

정사낭이 별실 안으로 옮겨지자, 고 관인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주 낭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 공자님.”

주 낭자는 몸을 휘청이면서 정사낭을 향해 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걸음을 떼자마자 고 관인이 주 낭자의 손목을 홱 낚아채고 자신의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고 관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 낭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고 관인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라버니? 저놈의 누이로구나.

고 관인이 웃으면서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언제부터 사내가 밖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오면 누이가 나서서 싸웠지?

정 아무개 공자네 집안은 참으로 재미있는 집안일세.

“그렇소, 내가 사람을 시켜 때리라고 했소만. 낭자가 뭘 어쩌려고?”

고 관인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일단 왜 그랬는지부터 물어봐야, 뭘 어찌할지 결정할 수 있겠네요.”

정교랑의 대답에 고 관인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여인일세.

급하거나 걱정스러운 표정도 짓지 않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말을 물으러 온 건가?

재미있군.

“좋소. 어디 한번 물어보시오.”

“살인이야! 살인이야!”

발길질을 당하고 깨어난 취객이 허둥대며 소리쳤다.

“살인은 무슨!”

누군가가 취객을 향해 시끄럽다는 듯 고함쳤다.

“활로, 활로 엄청 많은 사람을 쏘아 죽였는데.”

허공에다 손짓과 발짓을 해 가며 무언가를 설명하던 취객이 좌우를 살피고는 멈칫했다.

“어라?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지?”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으니, 취객이 상상했던 혈흔이 낭자한 장면 같은 것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혈흔이 없는 대신, 회랑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한 방향을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 환각이었나?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아래층에서 이쪽으로 활을 쏘는 걸 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고 관인의 별실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속으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왜 때린 거죠?”

여인이 물었다.

“왜냐고?”

고 관인이 웃으면서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보다가, 그녀 앞에 있는 정사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뭘 하는 거요?”

고 관인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물을 게 있다며 찾아온 여인은 여느 사람들처럼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의 시녀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별실 안으로 들어오자, 여인은 기절할 때까지 얻어맞은 정사낭을 앞에 눕혀 둔 채 그에게 침을 놓기도, 팔을 세게 문지르기도 하면서 고 관인에게 말을 묻고 있었다.

“치료하고 있어요.”

정교랑이 대답하고는 고개를 들고 말을 덧붙였다.

“사람을 때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고 관인이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저 정 아무개라는 사내가 바보인 줄은 알았다만, 누이까지 바보일 줄은.

“자, 여기는 덕승루요. 나와 저자는 교방사 화괴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는데, 저자가 나를 당해내지 못하니 맞은 거지.”

고 관인은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그러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하긴, 졌으면 맞아야죠.”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더 물으려던 순간, 여인이 혼절한 사내의 손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사내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사공자님!”

시녀가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사낭은 정교랑을 바라보며 잠시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내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누이, 내가…….”

정사낭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정교랑이 그의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손…….

정사낭은 눈코 뜰 새 없이 날아오는 주먹과 발길질에 혼절한 게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으스러뜨렸던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겁에 질린 나머지 혼절한 것이었다.

손!

내 손!

정사낭이 허공에 들어 올려진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목에는 겹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고, 짤막한 나뭇가지로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사흘이 지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고, 한 달이 지나면 완전히 나을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완전히 낫는다고?

정사낭은 자신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떠올리며 반신반의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공자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아씨께서는 이대작의 절단된 손도 이어붙이셨어요. 공자님은 부러진 것일 뿐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맞아, 그랬지!

정사낭은 이대작의 손을 떠올리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고 관인 쪽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자신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해 버린 정교랑 일행을 쳐다보더니,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정교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신이 바로 정 낭자군요!”

절단된 손을 도로 이어붙이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신의 낭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저 여인의 성씨도 정씨라고 했어!

그 정 낭자였어?

강주 바보!

고 관인이 웃음기를 거두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바보 집안이네.

“정 낭자였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 관인이 웃음을 짜내면서 공수의 예를 표했다.

고 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사낭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비백산한 모습의 주 낭자가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왔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보니 뚱뚱한 고 관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정사낭은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이, 누이. 이건 누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어서 가 봐. 어서 가.”

정사낭은 너무 창피한 나머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연신 외쳐댔다.

아직도 덕승루였다니! 심지어 고 관인 앞이라니!

게다가 누이까지 여기로 불려 와 저런 놈과 이런 험한 꼴을 보게 하다니!

정사낭의 외침과 동시에 별실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싸움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고 관인,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큰소리로 물었다.

기루에 가볍게 놀러 온 것이기에 고 관인은 하인을 많이 데리고 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 집으로 전해지자, 시종들이 무리 지어 덕승루로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고 관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별실 안에서 자신을 활로 겨눈 정교랑의 시종들을 훑어보았다.

“그만하거라.”

고 관인이 입을 열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는 금세 멈췄다.

“정 낭자,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고 관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고 관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달렸지요. 계속 이렇게 주먹다짐을 할 건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다툴 건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고 관인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다툰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화괴 다툼이요.”

화괴를 다툰다고?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일제히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넋이 나가 있던 주 낭자도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누이!”

정사낭이 얼굴을 소매로 가린 채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쳤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건데? 이 일을 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정사낭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 관인이 먼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정 낭자, 지금 뭐라고 했는지요?”

“제 오라비와 화괴 다툼을 하고 있던 거 아닌가요? 그럼 이어서 다퉈야죠.”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말하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고 더욱 놀랐다.

“정 낭자, 농담하는 건 아니지요?”

고 관인이 물었다.

누이가 지금 일부러 내게 이러는 건가?

“누이,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정사낭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버둥대며 외쳤다.

“아닙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전부 이 주형의 잘못이에요. 제가 정 공자님과 정 낭자께 사죄드릴게요.”

주 낭자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울먹였다. 이때 갑자기 쨍그랑 찻잔 깨지는 소리가 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흐느끼던 주 낭자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정교랑이 손을 거두고 산산조각이 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울긴 왜 울어요?”

정교랑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인생에서 풍류를 즐기기에 가장 좋을 소년 시절에, 기루에 와서 화괴를 찾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당신은 화괴로서, 남들이 당신을 두고 다투는 것에 기뻐해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화괴를 두고 다투는 것을 심심풀이로 여기는 사내들이 있다면, 그 상황을 즐겨야죠. 화괴라는 신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즐기고, 즐기며 감당하기 버거운 신분이라면 내려놓으면 그만인 것을. 일이 좀 생겼다고 시끄럽게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니 정말 가소롭군요.”

그런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정교랑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주 낭자는 화괴니까 자신을 두고 다투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처럼 울고불고할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고 관인이 자신을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웃으며 그를 맞이해야 한다. 그게 바로 교방사 화괴가 지켜야 할 본분이리라.

그런데…….

주 낭자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참아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으니, 난 화괴라는 신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고 관인, 저 화괴를 두고 계속 다툴 건가요?”

정교랑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 관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기루에서 기녀를 부르고 화괴를 두고 다투는 일은 분명 방탕한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교랑의 표정을 보며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쩐지 숙연해졌다. 화괴를 두고 다투는 일이 몹시 장엄하고 진지한 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랬다. 이 일은 아주 장엄하고 진지한 일이 되어 있었다.

고 관인은 자신 앞에 앉은 정교랑을 쳐다보며 웃음기를 거두었다.

내가 지금 화괴 다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도 알면서 저런 말을 내뱉다니. 지금 내게 도전장을 내민 건가?

아니, 저 여인이 지금 우리 고씨 가문에 도전장을 내민 건가?

말로만 듣던 그 정 낭자가, 이젠 아예 우리 고씨 가문에 공공연하게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거만해졌구나!

고 관인은 정교랑을 오늘 처음 봤지만, 정교랑이라는 사람이 낯설지는 않았다. 고 관인의 부친인 고능준이 집에서 자주 언급하기도 했고, 밖에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고 관인은 정교랑에게 대단한 스승이 있었고, 그 스승이 정교랑에게 신기한 기술과 비방을 물려주어 정교랑이 민간에 위신을 떨치고, 조정에 흉명(凶名)을 떨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저 여인의 지혜와 담력은 보통 사람에게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정도라고 하셨어. 그러니 우리 고씨 가문에 득이 될 것 같지 않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람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 고씨 가문에서 직접 나서서 저 여인을 처리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워낙 많기도 하고, 저 어린 낭자가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우리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지.

굳이 정 낭자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무슨 일이든 꼭 우선순위를 정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하신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기도 했고, 또…….

우매한 백성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지만, 저 여인에게서는 정말로 불길한 기운이 풍긴다. 누구든 저 여인과 엮였다 하면, 말로가 좋았던 적이 없었지.

고 관인은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예를 들자면 유 교리나 강문원 그리고 풍림이 그랬지.

다른 이는 망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고씨 가문과 별 관계가 없기도 했거니와 나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었지. 단 한 사람, 강문원만 빼고.

강문원은 서북 군정 문제로 아버지께 큰 도움이 됐던 사람이고, 우리 가문이 암암리에 하는 사업에도 큰 보탬이 됐었던 사람이야. 그런 강문원이 쓰러지자, 아버지께서는 살덩이 하나를 떼어내신 것처럼 아까워하셨지.

그런데 그 정 낭자가 나를 피해 가기는커녕, 친히 내 앞으로 와 도전장을 내밀다니.

정말로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건가? 우리 고씨 가문이 저를 건드리기 무서웠던 게 아니라, 건드리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걸 몰라서 저래?

저 여인이 자세를 바짝 낮추어 나한테 죄송하다고 사과하면 내가 관대하게 웃어넘기고 끝날 일이었는데. 그나마 체면을 챙겨 주려고 했던 내 호의도 몰라주고, 저리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로 나오다니!

화괴를 다퉈? 나랑 화괴를 다투겠다고?

“그럼, 정 낭자는 계속 다투겠다는 말입니까?”

고 관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이왕 시작한 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끝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뭘 한다고?”

순식간에 벌어진 난리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기생 어미 막씨는 점원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화괴 다툼을 계속하겠다 합니다.”

점원이 말했다.

계속 다투겠다고?

기생 어미 막씨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점원의 말을 들었다.

“정 낭자가 좀 전에는 고 관인 쪽의 머릿수가 많아 자기 오라비가 불리했던 거라며, 지금은 자기가 사람을 데려왔으니 계속 이대로 싸울지 다른 것으로 다툴지 묻고 있소이다.”

점원이 이어서 말했다. 몹시 보기 드문 일이라 그런지, 흥분한 점원은 눈을 크게 뜨고 설명했다.

어린 누이가 자기 오라비를 위해 사람을 끌고 와서 화괴 다툼에 뛰어들다니. 정말이지, 내가 말하고도 믿기 힘든 일이야!

“화괴 다툼은 무슨!”

기생 어미 막씨가 손을 들어 점원의 머리를 후려치자, 점원의 모자가 삐딱하게 벗겨졌다.

“멍청한 것. 지금 이 상황이 단순한 화괴 다툼으로 보이더냐? 고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맞서 싸우겠단 거잖아!”

드디어, 드디어 맞서 싸우는구나!

무릎을 꿇어앉고 울먹이던 춘령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지만, 춘령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대성통곡했다.

“불쌍한 우리 언니.”

어떻게 다투려나? 계속 싸워?

주 낭자가 멍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화괴 다툼이라!

주 낭자는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인생에서 풍류를 즐기기 가장 좋을 때는 바로 소년 시절이라지. 나 따위가 무슨 대수겠어. 저들이 다투는 건 사내의 풍류고, 체면일 텐데, 나 같은 화괴 나부랭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난 보잘것없는 물건에 불과할 뿐인데.

“싸울 필요까지는 없어요.”

주 낭자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러자 별실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자고로 화괴를 다투는 일이란 본디 풍류를 아는 자들의 고상한 놀이온데, 과격하게 주먹다짐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소인이 교방사의 관기라고는 하나, 오늘은 관부에서 초청한 연회에 온 것이 아니니 여러분께서 신분과 지위를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요.”

주 낭자가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 자리는 밤놀이이고, 소인은 기녀입니다. 기루의 기녀는 돈으로 살 수 있으니, 차라리 값을 부르시지요.”

주 낭자가 입꼬리를 올리고 고 관인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 주형은 값을 더 크게 부르는 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 관인이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도 고개를 돌려 고 관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좋소이다.”

고 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정교랑도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말을 탄 주육낭이 덕승루를 뚫어버릴 기세로 달려 들어왔다. 안 그래도 소란스러웠던 대청이 주육낭 때문에 또 한 번 왁자지껄해졌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육낭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욕하는 이는 없었다. 갑작스레 돌진해 들어온 말 때문에 놀랐던 사람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육낭이 덕승루에 처음 와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대개 낮에만 덕승루를 방문했기 때문에, 밤에 덕승루를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육낭의 코끝에 여인들의 진한 분향 냄새가 훅 끼치더니, 눈앞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깔이 펼쳐졌다.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지만, 덕승루 안의 여인들은 모두 뽀얀 속살이 비치는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진한 냄새와 눈앞의 광경 때문에 주육낭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좀 이상한데. 사람을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운다고 하지 않았나? 대청 분위기를 봐서는 전혀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칼과 화살을 겨누면서 대치하는 시종들도, 싸움을 피해 사방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난장판이 된 덕승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만이 보였는데, 다들 흥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가 아닌가?

바짝 긴장한 주육낭이 다소 경직된 채로 말에서 내려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됐나? 뭐라고 하던가?”

“시작하자마자 일천 관이야.”

“세상에, 일천 관?”

“자네들은 누구한테 걸 텐가?”

다들 뭐라는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렸다.

덕승루가 언제부터 도박장이 된 거지? 하나같이 도박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뭐 하는 거요?”

주육낭이 물었다.

한 사람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서 어떤 사내와 어떤 낭자가 화괴 주 낭자를 두고 다투고 있소.”

어떤 사내와 어떤 낭자가 화괴를 다투고 있다고?

덕승루, 화괴, 고 관인…….

사환이 했던 말을 떠올린 주육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낭자가 설마!

주육낭이 곧장 이 층을 향해 달려갔다.

별실 안에는 기생 어미 막씨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내 여섯 살에 교방사에 들어와서 벌써 서른이 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삼천 관.”

여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천 관에 하룻밤이라고?”

사내가 물었다.

삼천 관에 하룻밤이라니. 그렇게 며칠 밤만 보내면 자유의 몸이 될 돈도 금방 벌겠네.

기생 어미 막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고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화괴 다툼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거액이 오가는 화괴 다툼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누이가 오라버니를 위해 나서서 화괴 다툼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본 적이 없고.

“일만 관에 한 달.”

고 관인이 만 관은 거뜬히 감당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옆에 앉은 집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당장은 가지고 나온 돈이 그리 많지 않으니, 차용증을 쓰겠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기생 어미 막씨는 마다할 생각 없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차용증까지 쓸 필요 있나요. 고 관인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한걸요.”

“나는 화대를 외상으로 내는 망신스러운 일을 한 적이 없소.”

고 관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집사에게 말했다.

“차용증을 써서, 결과가 나오는 대로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게. 반드시 오늘이 지나기 전에 갖다줘야 한다네.”

집사가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곧바로 붓을 들어 차용증을 쓰고 고 관인의 지장을 찍어 별실 중앙으로 던졌다.

별실 중앙에는 주 낭자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양옆으로 고 관인과 정교랑이 내민 비전 증서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이만 관에 한 달.”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전 증서 두 장을 중앙에 던졌다.

고 관인의 입가에 걸려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저 여인이, 지금 일만 관씩이나 더 부르는 거야? 이러는 법이 어딨어!

심지어 저 여인이 던지는 건 현찰 비전 증서야. 몸에 소지하고 다니는 돈이 저렇게나 많다고?

“관인, 조심하십시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집사가 나지막이 아뢰었다.

이런 수작은 많이 봤지.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를 부르다가, 내가 더 높은 액수를 부르는 즉시 발을 쏙 빼서 나만 덤터기를 쓰게 만드는 수작.

삼만 관 정도 부르면, 바로 자기가 졌다며 고개를 숙이려나?

삼만 관으로 화괴를 한 달 빌리는 정도의 일은, 풍류를 아는 나 고십사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고 관인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이만 오천.”

고 관인이 말했다. 집사가 서둘러 차용증을 한 장 더 써서 별실 중앙으로 던졌다.

“삼만 오천.”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정교랑만큼 담담한 모습으로 비전 증서를 중앙으로 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화괴를 한 달 빌리는 데 삼만 오천을 쓴다고? 그 정도 액수면 경성 여인들의 혼수값에 버금가는데!

게다가 왜 아무도 저 여인을 말리는 사람이 없어? 한낱 여인네가 저렇게 돈을 종이 쪼가리처럼 여겨도 되는 거야?

고 관인의 얼굴에 차츰 웃음기가 걷히고,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욕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만 관!”

고 관인이 말했다.

“십사공자님…….”

사만 관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집사가 고 관인의 뒤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액수가 너무 커졌어!

고 관인이 고개를 돌리고 집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집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차용증을 한 장 더 써서 중앙을 향해 던졌다.

“사만 관에 한 달이요?”

기생 어미 막씨가 놀란 눈으로 고 관인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벌써 몇 번이나 놀라 쓰러질 뻔했던 기생 어미 막씨는 아무래도 자신의 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확인차 물었다.

“오만 관에 한 달.”

고 관인이 기생 어미에게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만 관에! 한 달!

그 돈이면 화괴 세 명의 몸값을 족히 내고도 남을 돈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생 어미는 행여 자신의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세라 손으로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중요한 순간에 혼절할까 봐 몇 번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막씨와 반대로, 정사낭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누이!”

정사낭이 정교랑을 향해 거의 울다시피 외쳤다.

오만 관이라니, 그 돈은 누이가 수중에 가진 돈의 전부일 텐데!

누이,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아니지. 누이는 항상 저랬어. 한번 칼을 뽑았다 싶으면 온몸을 내던지고 싸움에 임했지. 아버지와 혼수 싸움을 할 때도 그랬고, 풍림과 조당에서 논쟁을 벌일 때도 그랬어.

누이가 칼을 뽑아 들었다면, 그건 진심으로, 독하게 이 싸움에 임하겠다는 거야. 제대로 싸울 거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거라면, 누이는 먼저 자기 자신한테 독하게 대했어.

어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거지?

누이가 왜 이런 일까지 다퉈야 해. 졌다고 인정하는 게 뭐 어때서!

그렇게 인정하는 게 뭐 어때서!

별실 안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오만 관에 한 달이라는 말을, 오늘 날씨가 좋다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고 관인, 당신 차례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고 관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육만 관! 칠만 관!

고 관인은 속으로 더 큰 금액을 미친 듯이 불렀지만, 그 금액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고씨 가문의 재산에서 오만, 육만 관은 지극히 미미한 액수에 불과했지만, 그건 고 관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어이 그 정도의 돈을 써야겠다고 한다면, 집에서는 분명히 내게 오만, 육만 관을 내어줄 테지. 하지만 절대 그 돈을 화괴 다툼에 썼다고 할 순 없어.

저 여인은 돈의 액수와 상관없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꼭 나를 이기겠단 심산이로군.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나랑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야!

나와 끝장을 보겠다는 건, 우리 고씨 가문과 끝장을 보겠다는 건데. 저 여인이 간덩이가 제대로 부었구나!

미천한 화괴 하나 때문에 우리 고씨 가문과 끝장을 보겠다고? 이 일이 알려진다 한들, 누가 믿겠나?

“고 관인, 값을 더 부를 건가요?”

저 봐, 저 봐. 저게 도발하는 게 아니면 뭐냐고!

눈앞에 있는 여인이 말하는 사이, 옆에 앉은 시녀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손에 쥔 비전 증서 몇 장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귀띔하듯이 말했다.

“저희는 차용증을 쓰지 않고, 현찰로 드려요. 아, 현찰이 부족하다면,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을 담보로 걸겠습니다.”

뭐라고? 가산을 통째로 내놓겠다는 거야?

저년이!

고 관인이 으스러질 듯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목숨까지 걸고 싸우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값을 계속 부른다면, 저 여인도 끝까지 따라 올리겠다는 건가?

얼마나 더 부르려고? 끝도 없이 부르려고?

터무니없는 소리!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고 관인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숫자를 입 밖으로 뱉으려 수십 번 고민했지만, 결국 그 숫자를 삼켰다.

만에 하나, 내가 값을 더 부르자마자 저 여인이 졌다고 하면? 그럼 나만 바보가 되는 거야. 이긴다 한들, 내 체면이 남아나겠어?

체면이 남기는 개뿔! 저 여인이 나와 화괴 다툼을 하겠다고 한 그 순간부터, 이미 내 체면은 바닥까지 떨어진 거야!

난 이겨도 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게다가 그 큰돈을 헛짓거리에 탕진하게 되는 셈인데, 그건 저 여인이 바라던 바잖아!

고 관인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정교랑을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하군, 대단해! 참으로 대단하구나!

“대단하십니다. 부자는 통이 크다더니, 정 낭자가 미인을 얻기 위해 천금을 내던질 줄이야. 감히 제가 더 끼어들 수 없는 자리인 것 같군요.”

고 관인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고 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생 어미 막씨가 거의 날아가다시피 별실 중앙으로 뛰어가 정교랑 쪽에서 던진 비전 증서들을 주웠다.

난 아무렴 상관없어. 고 관인이든, 신선의 제자든 간에, 이번 일로 난 평생 먹고살 돈을 챙기기만 하면 그만이야!

“아형, 어서 낭자께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기생 어미 막씨가 주 낭자를 향해 소리쳤다. 주 낭자는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몸을 일으킨 뒤, 정교랑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기생 어미와 관기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치 정교랑이 이기길 기다렸다는 듯 정교랑을 은인처럼 떠받드는 모습에, 고 관인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한편 주육낭은 드디어 인파를 뚫고 별실 안까지 들어왔다. 그는 별실까지 오는 길에 자신 앞을 막아선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던 차에 별실로 들어서자마자, 딱 봐도 아첨하는 모습으로 정교랑 가까이 가려고 하는 기생 어미와 관기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짓이오! 썩 비켜서지 못할까!”

주육낭이 성큼성큼 정교랑 앞으로 다가가 눈썹을 치켜뜨고 기생 어미 막씨와 주 낭자를 향해 호통쳤다. 그는 두 사람에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의 손짓을 했다.

혐오. 저건 나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눈빛이야.

그래,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겠지. 머리도 엉망일 거고, 눈물 콧물이 한데 섞여 화장이며 옷차림새도 엉망일 거고.

지금 내 꼴, 차마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겠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월 오만 관 값어치를 하겠어?

오만 관. 수많은 사람이 평생을 벌어도 못 만져 볼 액수를, 나는 사내 하나를 한 달만 상대해도 벌 수 있다니.

돈, 참 벌기 쉽네.

“정 공자님, 소인이 다시 단장을 마치고 공자님을 뵈러 올게요.”

주 낭자는 정사낭을 향해 예를 표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너무 빨랐던 건지, 마음이 급했던 건지, 주 낭자의 발걸음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하지만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주 낭자의 실례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화괴 다툼 소동은 끝났지만, 정교랑과 고 관인 사이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정 낭자,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소이다. 낭자와 우리 고씨 가문의 싸움이 이따위 일로 시작하다니.

고 관인은 자신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여인을 쳐다보며 속으로 냉소 짓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듣던 대로 정 낭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소생은 정말로 낭자에게 탄복했습니다. 누군가와 다퉈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모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다투기는 뭘 다퉈. 말 한번 거북하게 하네.

“정 공자의 손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고 관인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는 눈썹을 치켜뜨고 옆에 있던 자신의 시종들을 향해 호통쳤다.

“네 이놈들! 때려서 내쫓으라고 했더니, 어쩌다 남의 손목까지 부러트린 것이냐!”

시종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고 관인에게 사죄했다.

“어떤 놈의 짓이냐?”

고 관인이 고함쳤다. 한 시종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고 관인이 그를 향해 냉소를 보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손을 다치게 했으니 손으로 갚아야 하는 법. 그러니 네놈의 손목을 부러트려 정 관인에게 사죄하거라.”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고 관인의 말에 흠칫 놀랐다. 앞으로 걸어 나온 시종의 얼굴 또한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 관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목숨에 비하면, 손 하나 없이 사는 게 더 낫겠지. 손 없이 사는 건 고통스럽겠지만, 지금 공자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더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내 가족들까지 연루되어 전부 죽은 목숨이 될 테지. 내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당장 내 손목을 부러트리는 게 나아.

생각을 마친 시종은 곧바로 손을 들어 단단한 기둥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잠깐!”

정교랑이 소리쳤다.

자신의 손목을 부러트릴 작정으로 온 힘을 다해 기둥에 손을 휘두른지라 바로 멈추기에는 이미 그의 손이 기둥에 닿기 직전이었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 관인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하지만 시종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종은 자신의 손이 아니라 다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은으로 만든 술 주전자 하나가 그의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주육낭이 짧게 한숨을 쉬고 손목을 두어 번 털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정 낭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고 관인은 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고 관인은 멈칫하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그 말은 무슨 뜻인지요?”

“서로 다투다 보면 다치는 쪽이 있기 마련이고, 재주가 상대보다 못하면 질 수도 있지요.”

정교랑이 고 관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 오라버니가 다친 건, 졌기 때문입니다. 진 사람이 패배를 인정하면 그만이지, 굳이 이긴 사람이 사과할 필요가 있나요? 당신에겐 이겼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릴 담력이 있으니, 우리도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고 맞은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 건, 너무 속 좁은 행동이 아닌가요?”

뭐라고?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했는데, 속 좁은 인간이라고 욕을 하다니?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정교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난 시종이나 하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에요. 시종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윗전이 주는 품삯을 받으며 윗전의 말에 충성을 다한 것밖에 더 있나요? 자신이 벌인 일이라면 자신이 책임지는 게 맞아요. 괜히 하인들을 내세워 분풀이하고 벌하는 건 군자의 도가 아니죠.”

그래서 저 여인이 덕승루에 쳐들어올 때,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내 점원들을 쏜 건가?

그래서 저 여인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시종들을 내팽개치고 바로 고 관인 앞까지 곧장 온 건가?

속으로 생각하던 기생 어미 막씨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남에게 보여주기식으로 하인을 벌하지 않는 윗전도 있구나. 정 낭자라는 사람, 정말, 정말로 남다르네.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은 거라면, 하인들이 아니라 고 관인 당신이 직접 사죄해야죠.”

정교랑이 말을 끝냈다.

저 여인이 감히!

고 관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정 낭자, 지금 그 말, 무슨 뜻으로 한 겁니까? 내가 내 손목을 부러트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은 거라면, 하인들이 아니라 고 관인 당신이 직접 사죄해야죠.

덕승루 대청에서 별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정교랑이 한 말을 전해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 낭자, 지금 그 말, 무슨 뜻으로 한 겁니까? 내가 내 손목을 부러트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어서 고 관인의 대답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생 어미 막씨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야, 오늘 밤에는 평생 놀랄 일을 한꺼번에 다 겪네.

겁먹었다가, 놀랐다가, 기뻤다가 또 놀라고. 아휴, 이걸 몇 번만 더 겪었다가는, 오만 관을 만져 보기도 전에 죽겠어.

고 관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시종들과 정교랑의 시종들은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손에 있던 무기를 바투 쥐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저 여인을 죽인다 한들, 사실 안 될 것도 없잖아?

아무리 저 여인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 해도, 기반이라고 할 게 없는걸. 폐하께서 대로하여 나를 하옥시키시더라도, 내 뒤엔 아버지와 태후, 귀비, 그리고 평왕이 있으니, 난 절대로 죽진 않을 거야.

죽지 않는다면, 감옥에서 풀려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고.

게다가 여긴 덕승루야. 나와 화괴를 다투다가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저 여인의 명성은 나락으로 떨어질 테지. 죽고 난 후라면 조당과 민심을 내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기도 어렵지 않을 거고.

그러고 보니, 지금이 더없이 좋은 기회잖아? 어차피 아버지께서도 저 여인을 없앨 생각을 하셨으니, 내가 조금 서두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

고 관인의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지고, 손아귀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고 관인, 잘못 들었나 본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제 오라버니가 맞은 것은 오라버니가 감당했어야 할 일이죠. 판을 벌이기로 마음먹었으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다툴 배짱이 있다면, 패배를 인정할 배짱도 있어야 하니까요.”

정교랑이 말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고 관인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저년이! 왜 갑자기 거만하게 굴지 않고?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화괴를 얻겠다는 좀 전의 그 건방진 모습은 어디로 간 거야!

왜 지금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거냐고! 당장 내 손목을 부러트리겠다고, 내 목숨을 노린다고 해야지!

에라이!

고 관인은 속으로 정교랑을 미친 듯이 욕했다.

좋다. 네년이 판을 벌이고 싶지 않다면, 내가 벌여 주지.

판을 벌여? 말아?

내가 이 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괜히 남들한테 공격할 빌미만 주고 말 텐데. 저 여인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고 관인이 손에 땀을 쥐면서 고민하던 찰나, 별실 안의 분위기는 그새 한결 부드러워졌다. 고 관인은 자신이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숨 막히는 기 싸움을 벌이고 난 뒤, 고 관인은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해 가며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낭자,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군요. 그럼 저는 두 분이 편하게 쉬는 것을 더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 관인이 성의 없게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교랑이 단정하게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고 관인에게 답례했다. 정교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육낭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 관인을 향해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속으로 삼켰다.

지금 저놈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실, 저 애가 고 관인과 화괴 다툼을 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이미 고씨 가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과 다름없는 셈이야.

주육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고 관인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문을 열자마자 바깥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한꺼번에 별실 안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고 관인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덕승루의 이 층은 이미 봉쇄했지만, 덕승루에 있는 손님을 전부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낮이 아닌 밤이다 보니, 덕승루를 찾는 손님들은 더욱 많았다. 이 층을 봉쇄할 정도로 큰 소동이 일어났으니,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흥미진진한 일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관인, 뒷문으로 가시지요.”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에라이, 이게 무슨 망신이야! 나 고십사가 여자 끼고 술을 마시면서, 언제부터 남들 시선을 신경 써 가며 기루 뒷문으로 드나들었다고!

고 관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생각했다.

분명 채 하루가 안 되어 이 우스꽝스러운 일이 온 경성에 퍼질 것이야.

“화괴 다툼 한 번 한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정정당당하게 덕승루에 걸어 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정정당당하게 나가겠다.”

고 관인이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 고 관인이 걸음을 옮기자,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고 관인 무리가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 모습을 대놓고 구경할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은 없었지만, 고 관인은 자신의 뒤통수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거나 손가락질당하는 일을 한 번도 두려워한 적 없는 고 관인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자신이 패배자로서 남들의 비웃음을 등에 지고 조롱을 듣는 날이기에.

강주 바보!

문 앞까지 걸어간 고 관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덕승루의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덕승루를 떠났다.

고 관인이 자리를 뜨자, 덕승루 안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내가 확실하게 봤어!”

“진짜 고씨 가문의 십사공자잖아!”

“그래서 화괴는 결국 누구 차지인데?”

“쓸데없는 소리. 고 관인이 줄행랑을 친 걸 보면 몰라? 당연히 그 여인이 이긴 거겠지.”

“여인이 화괴를 얻었다고?”

“여인이 아니라, 한 여인이 자기 오라비를 대신해서 화괴 다툼을 한 거래.”

“세상에, 그것도 좀 살벌한데? 무슨 여인이 그래?”

별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왁자지껄함이 차단되었다.

별실 밖으로 내보내진 기생 어미 막씨는 닫힌 문에 기대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별실 안을 향해 물었다.

“정 낭자,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요? 저희 덕승루에 맛좋은 술과 요리가 있거든요. 아니면 가무를 먼저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우리 아형이 금방 단장하고 올 겁니다.”

기생 어미 막씨가 문에 바짝 붙어 주절거렸다.

별실 안에서 젊은이 하나가 화난 목소리로 꺼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기생 어미 막씨는 그제야 문에서 떨어졌다.

기생 어미 막씨는 꺼지라는 말을 듣고도 싱글벙글이었다.

오만 관! 화괴를 한 달 빌리는 데 오만 관씩이나!

기생 어미 막씨가 손으로 소매를 꽉 쥐었다. 자신의 소매 속에 있는 현찰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입이 귀에 걸렸다.

이 오만 관이 있는데, 욕 한두 마디 듣는 게 뭐 어때서? 저 낭자가 나를 흠씬 두들겨 팬다고 해도, 나는 넙죽 엎드려 감사하다고 할 거야.

“그런데 주인어른, 이 일로 고씨 가문의 눈 밖에 나는 거 아닙니까.”

막씨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점원이 입이 귀에 걸린 기생 어미에게 조용히 말했다.

“틀렸어.”

기생 어미 막씨는 웃으며 소매를 다시 한번 세게 쥐었다.

“눈 밖에 난 건 우리가 아니라, 저기 있는…….”

막씨가 손가락으로 등 뒤의 별실을 가리키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 일은 우리 덕승루의 일도 아니고, 우리 아형의 일도 아니야. 정씨와 고씨 가문 간의 싸움이 된 거지. 돈을 더 많이 주는 사람을 따르는 것 외에, 우리가 또 뭘 할 수 있겠어? 그러게, 누가 화괴를 두고 재력을 겨루래? 우리는 그저 장사나 하는 힘없는 사람일 뿐인데, 그 사이에 껴서 뭘 어쩌겠냐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이에 껴 있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야.”

막씨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점원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재빨리 손으로 각자의 입을 틀어막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키득거리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미쳤어?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해?”

주육낭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교랑에게 화를 냈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고 관인이 덕승루 문 앞을 떠날 때까지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던 터라,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정사낭은 좀 전에 집으로 돌려보내진 후였고, 정교랑도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에 주육낭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화괴 다툼을 했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화괴 다툼? 이게 지금 화괴 다툼이라고? 오만 관에 화괴를 한 달 빌리는 게? 수중에 남은 돈 전부를 걸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뭐? 태평거, 신선거에 이춘당까지 담보로 하겠다고? 그런데도 지금 이게 화괴 다툼이라는 거야? 게다가 고 관인에게 제대로 사과할 거면 알아서 손을 부러트리라는 협박까지 했잖아! 이게 무슨 화괴 다툼이야! 목숨 다툼이겠지!”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정교랑을 다그쳤다.

“내가 그 사람한테 손목을 부러트려서 사과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거지.”

정교랑이 주육낭의 말을 교정해주었다.

이 여인은 꼭 혼자 이상한 데에 꽂힌단 말이야.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 조용히 말했다.

“좀 전에 저 사람이 살의를 내뿜는 거 못 봤어?”

정교랑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화괴 다툼 한 번에 살의까지 내뿜었다고요? 그깟 배짱으로 무슨 놀음을 하겠다고.”

“그걸 말이라고!”

주육낭이 버럭 소리쳤다.

“이게 뭐 못 할 말인가요? 화괴 다툼이 떳떳하지 못할 일도 아니고.”

정교랑이 대꾸했다.

“그럼 이게 동네방네 자랑할 만한 일이야?”

주육낭이 정교랑을 흘겨보았다.

“혈기왕성하여 한창 풍류를 즐길 때인 소년이, 미인의 웃음 한 번을 얻기 위해서 용기를 낸 게 뭐 어때서요? 적어도 비겁하게 이리저리 숨는 겁쟁이보다는 훨씬 떳떳하고 자랑스럽지 않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자기가 나설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알고 일을 벌여야지.”

주육낭이 냉소를 보였다.

좀 전에 시종에게 맞아 바닥에 뻗어있던 정사낭을 보자, 주육낭은 거의 혼절할 정도로 화가 났다.

정씨 가문에는 어째 쓸모있는 놈이 단 한 명도 없는 거야!

“능력이 돼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육낭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뭐라고? 저놈이 어딜 봐서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거야? 정말 능력이 있었으면, 시종들한테 개처럼 처맞지 않았겠지!”

“내가 있잖아요.”

정교랑의 대꾸에 주육낭은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더욱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저놈은 네 오라비지, 네 아들이 아니야! 아니, 아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자식의 오만방자함을 부추기진 않아. 사내들끼리 화괴 다툼을 하는 자리에서, 네가 저놈 대신 나설 필요가 뭐 있어?”

주육낭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부추김이에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천천히 가져왔다.

“오라버니가 즐겁다면, 누이인 나도 즐거워요.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주육낭이 어이가 없는 듯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정교랑은 그런 그의 반응에도 미동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그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주육낭이 흠칫 놀랐다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이를 부득 갈았다.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걸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하잖아.

덕승루 이 잡것들이!

주육낭이 벌컥 성을 내며 별실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방바닥에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주 낭자는 새하얀 내의 차림으로 구리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주 낭자는 경성에서 제일 좋은 붓으로 눈썹을 한 올 한 올 그렸다. 가느다란 눈썹과 깊은 눈매에 섬세한 붓질을 더하니, 주 낭자의 얼굴은 더욱 청초해졌다.

주 낭자는 몹시 진지하게 화장을 했다. 화장은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니, 화괴인 주 낭자의 화장 솜씨는 그중에서도 단연 빼어났다.

언제 어디서든, 나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보여야 해. 절대로 좀 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들에게 창피를 당해서는 안 돼. 절대로.

주 낭자는 연지함을 열고, 옅은 분홍빛의 연지를 양 볼에 톡톡 두드렸다. 청아한 얼굴에 연분홍색 연지가 입혀지니, 주 낭자의 얼굴이 한층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주 낭자가 구리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그 미모는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이때, 주 낭자의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춘령이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주 낭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새끼손가락으로 연지를 찍어 입술에 살짝씩 발랐다. 그녀는 구리거울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여인은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울긴 왜 울어. 고 관인과 신선 낭자가 나를 두고 다툰 거잖아. 게다가 오만 관에 한 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내걸었는걸? 경성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지. 이번 한 번으로 네 언니가, 정말로 천하에 이름을 떨칠 기회가 생겼어. 얼마나 기쁜 일이야.”

주 낭자가 말했다. 춘령이 울면서 무릎을 꿇은 채 주 낭자에게 기어갔다.

“다 소인의 잘못이에요. 제가 언니를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했어요. 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 때문에 두 가문의 미움을 샀잖아요.”

춘령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면서 울부짖었다.

“소인이 정 공자님을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소인이 죽일 년이에요, 죽여 주세요.”

춘령의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이내 붉은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춘령은 정사낭이 오늘 덕승루에 오게 된 연유에 대해 주 낭자에게 울면서 사실대로 고백했다.

제 발로 덕승루에 온 게 아니라, 춘령이 모셔 온 거구나.

“왜 정 공자님에게 누를 끼친 거야!”

자초지종을 들은 주 낭자는 걱정이 앞선 나머지 버럭 화를 냈다.

“언니, 언니, 그게 아니라 정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그랬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언니가 혹시나 잘못된 마음이라도 품으면 어쩌나 해서요.”

춘령이 울면서 말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혹 잘못된 마음이라도 품을까 봐.

주 낭자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맞아.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긴 했지.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우는 어린 몸종을 보자, 주 낭자는 깊은 한숨이 나왔다.

“네 탓이 아니야. 꼭 누군가를 탓해야겠다면, 나를 탓하렴.”

주 낭자가 말했다.

“언니! 언니, 아니에요. 언니 탓이 아니에요. 다 제 탓이에요. 제가 지금 당장 정 공자님한테 가서 사죄할게요. 고 관인께도 사죄하고요. 다 제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벌어진 일이잖아요.”

춘령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럼 너는 정 낭자가 정 공자의 누이인 걸 알고 있었어?”

주 낭자의 물음에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정 공자님의 누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신선의 제자라 사람들이 다 그 여인을 두려워한다고 했거든요. 아무도 그 여인을 못 건드린다고요. 소인은 그래서…….”

춘령이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사죄했다.

“한 집안이었구나.”

주 낭자는 중얼거리면서 좀 전에 정교랑이 별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문이 열리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무채색 옷을 입은 여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별실 안으로 들어왔었다. 그녀가 별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그 여인의 모습은, 내가 멀리서 몇 번 봤었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어.

3년 전, 진씨 가문의 연회에서 봤던 그 모습과 3년 후, 일식이 있었던 그날 경성의 거리에서 봤던 그 모습.

그 여인이 바로 그 유명한 정 낭자였구나. 그 여인이 바로 그분이 마음에 둔 여인이었구나.

“언니, 언니.”

춘령의 다급한 부름에 주 낭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춘령, 그렇게 대단한 집안의 사람을 알고 지내면서, 왜 아직도 여기 남아있는 거야.”

주 낭자가 웃으며 춘령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좋은 곳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여기엔 언니가 있잖아요.”

춘령이 주 낭자의 팔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의 팔을 꼭 안고 있는 어린 몸종을 내려다보며, 주 낭자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춘령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바보야.”

주 낭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언니, 제가 당장 그분들에게 사죄하러 갈게요. 그분들이 저를 때리든, 죽이든 저는 다 괜찮아요.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춘령은 주 낭자의 손을 잡고 울먹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주 낭자가 춘령의 손을 잡고 말렸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야.”

춘령이 그래도 고개를 세차게 젓자, 주 낭자가 말했다.

“이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내가 내 본분을 잊고, 내 본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귀한 분이 내가 좋다며 날 찾는데, 내가 까탈스럽게 재고 따지고, 그 사람을 내키지 않아 해서 혼자 죽느니 사느니 한 거니까.”

주 낭자는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내 본분을 잘 지켜서, 그 손님을 마냥 기쁘게 맞이했더라면, 네가 다른 사람한테 가서 도움을 청했을까? 그래도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언니, 그건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왜 언니만 그런 서러움을 속으로 삭이고, 왜 언니만 자신을 몰아세우는 건데요. 소인은 언니가 그런 말 하는 거 속상해요.”

춘령이 울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주 낭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게 내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니.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운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해.”

주 낭자가 말했다.

“언니!”

춘령은 말도 내뱉지 못할 정도로 통곡하며 주 낭자의 손을 꼭 쥐었다. 주 낭자가 춘령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밖에서 대기하는 다른 시녀들을 불러들이자,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와 주 낭자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바닥에 끌리는 긴 치마가 등불 아래에 더욱 화려해 보였다.

“언니!”

춘령이 울부짖었다.

주 낭자는 춘령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시녀에게 칠현금을 안고 따라오라고 한 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춘령이 아예 바닥에 엎드려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가 싶더니, 문이 닫히면서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차단되었다.

춘령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턱 끝에는 아직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춘령의 눈가에는 눈물이 전혀 고여 있지 않았다. 춘령은 여유로운 자세로 팔걸이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고, 옆에 있던 구리거울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봐. 내 잘못이 아니게 만드는 건, 이렇게나 쉬운 일이야.

춘령이 구리거울을 쳐다보면서 허공에다 손을 올리고 연지를 찍어 입술에 바르는 시늉을 했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주 낭자의 어깨너머로 그녀의 표정을 많이 배웠는지, 춘령의 눈가에서는 요염함이 묻어났다.

“언니, 틀렸어.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내가 이 좋은 곳을 두고 어딜 가.”

춘령이 구리거울을 들여다보고 웃으며 읊조렸다.

“아이고, 관인, 억울해요.”

주육낭의 손에 잡혀 별실 안으로 돌아온 기생 어미 막씨가 연이어 소리쳤다.

“소인은 정 공자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어요. 정 공자님이 우리 아형과 약속을 잡은 줄도 몰랐고요.”

주육낭이 막씨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막씨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했다.

“관인, 소인은 하늘에 맹세코 정말 몰랐습니다. 정 공자님이 정 낭자의 가족인 걸 알고 있었더라면, 소인이 어찌 감히 정 공자님께 그리 불경스러운 짓을 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기 하나 때문에 두 가문이 대립하는 일은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덕승루에 좋을 게 뭐가 있다고요!”

“좋을 게 뭐가 있는지는 댁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아니면, 댁더러 이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을 테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늘에 우러러 맹세컨대, 저는 정말로 억울해요.”

기생 어미 막씨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연신 내리치면서 외쳤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어요. 이번 일은 소인이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는 걸요. 이제 저는 안팎으로 사람 취급도 못 받게 생겼어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주육낭이 짧게 대꾸했다.

문이 열리자, 꽃단장한 주 낭자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별실 안으로 들어왔다. 좀 전에 엉망진창인 몰골로 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주 낭자는 아름다운 화괴의 자태를 뽐내며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다 소인 주형의 잘못입니다.”

기생 어미 막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드디어 자기 탓을 하는 사람이 나왔어. 누구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된 거지. 나는 이제 살았다.

“아형, 어서 정 낭자께 말씀드리거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막씨가 주 낭자를 재촉했다. 주 낭자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누군가가 뒤에서 일부러 두 가문 간의 불화를 만들려고 이간질한 게 아니니까요. 다만, 소인이…….”

주 낭자가 말하다가 멈칫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소인이 기녀로서 분수도 모르고 고 관인을 접대하는 걸 꺼렸습니다. 그러다 고 관인의 권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접대해야만 하는 때가 오자, 소인이 염치도 없이 정 공자님께 빌붙고 말았어요.”

주육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보였다.

“참 잘도 빌붙었군.”

“정 낭자는 빌붙을 만한 분이니까요.”

주 낭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주육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

“감히 네가 빌붙을 사람이 아니다!”

주육낭이 허리춤에 숨겨져 있는 칼에 손을 댔다. 주육낭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자, 막씨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살인 날 판이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정 낭자는 금강야차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잖아. 그때 태평거에서도 벌건 대낮에 여러 명을 죽였고!

저 여인은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야!

“예. 소인의 잘못이니, 소인을 어떻게 벌하셔도 좋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기생 어미와는 달리, 주 낭자는 몹시 담담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벌할 게 있나요. 내 오라버니가 원했던 일이니, 당신은 내게 빌붙을 자격이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주 낭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만 가봐요.”

정교랑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주 낭자와 막씨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제가…….”

주 낭자가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며 꺼지라고 호통쳤다. 주 낭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공손하게 뒷걸음질로 밖으로 물러났다.

막씨는 주 낭자가 나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밖으로 따라 나갔다.

“사공자님께서는 본디 반근 누나가 준비해 둔 신선거 별실로 가려고 했는데, 주 낭자 몸종이 찾아와서 울며불며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

정사낭을 집에 바래다준 시녀가 정사낭의 사환을 데리고 덕승루 별실로 돌아왔다.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던 사환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녀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했다.

“공자님은 삼 년 전부터 주 낭자와 그 몸종을 알고 지냈어요. 그때 왕십칠 공자와 함께 덕승루에 온 일로 알게 된 거예요.”

시녀가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리며 사죄했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일찍이 공자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소인의 불찰이에요.”

주육낭이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네 잘못일 리가 있나. 풍류를 즐기겠다는 사람을 네가 무슨 수로 막아?”

“아니에요. 사공자님은 주 낭자와 아무런 교류가 없었어요. 그때 왕십칠 공자와 함께 주 낭자를 본 건 맞지만, 그 이후로는 주 낭자의 몸종하고만 왕래했어요. 그 몸종이 공자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사공자님은 마음이 선한 분이니 더 살뜰히 챙겨 주신 것뿐이에요.”

주육낭이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하! 선한 마음으로? 살뜰히 챙겨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마음이 선해도, 선해서 좋지 않은 점이 있는 거고, 마음이 차갑다 해도, 차가워서 좋은 점이 있는 법이잖아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오라버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당신 말대로라면, 오라버니는 나에게만 착하고, 다른 사람은 매몰차게 대해야 했나요? 그런 바람은 오라버니에게 너무 가혹하죠.”

정교랑이 말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내내 그놈만 감싸고 돌다니!

“그럼, 너는 그놈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라도 한다는 거야?”

주육낭이 어금니를 깨물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노려보았다.

“오라버니를 기쁨으로 여기는 거죠. 오라버니가 기쁘다면, 나도 기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육낭의 어금니에서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 위에 놓였던 손도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우드득 소리가 났다.

“좋겠네. 두 오누이가 다 기쁘다니까 참 좋겠어! 고씨 가문의 체면을 밟고 미인을 얻어서 퍽이나 좋겠네! 정말로 축하할 만한 일이야!”

주육낭이 큰 소리로 외치고 몸을 일으켜서 고 관인 일행이 마시던 술동이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자, 자. 그렇게 좋은 일인데, 축하는 언제부터 하려고? 자! 이럴 때는 술을 마셔야지!”

주육낭이 술동이에 남아 있던 술을 전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주육낭을 올려다보았다.

“공자님.”

시녀가 주육낭을 불렀다.

주육낭은 시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술동이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비웠다. 그는 벽 쪽으로 텅 빈 술동이를 세게 내던지고, 산산조각이 된 술동이를 뒤로한 채 성큼성큼 별실을 나갔다.

“공자님!”

주육낭의 등 뒤로 시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바보!

짜증 나는 바보 같으니라고! 가증스러운 바보 같으니라고!

어디 한번 착해 빠진 네 오라비랑 희희낙락하며 살아 보라고!

주육낭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이내 뛰다시피 덕승루를 벗어났다.

거칠게 성질을 부리고 떠난 주육낭을 보자, 정사낭의 사환은 더욱 겁이 나 입을 열지 못했다. 시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사환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한 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육공자님은 또 화를 못 참고 우시나 본데요?”

정교랑이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술 좀 줘.”

시녀가 서둘러 술 주전자에 있던 술을 정교랑에게 따라주었다. 술잔을 받은 정교랑이 술을 한 모금 음미했다.

“아씨, 너무 화내지 마세요.”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화 안 나.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라는 법은 없잖아.”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선조께서 하신 말씀이 옳아.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남들도 똑같이 해낼 수 있어. 내가 남을 해칠 수 있다면, 남도 당연히 나를 해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를 위한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 또한 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니. 이 세상에 꼭 그래야만 하는 일은 없지.”

선조?

시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가문의 선조를 말하는 건가? 정씨 가문 어른들이 아씨께 선조 얘기를 해 줬을 리가 없는데. 그 사람들은 아씨를 마주치기만 해도 질겁하며 피하기 바쁘잖아.

“그래도 이번 일은 정말 화날 만한 일이에요. 관기의 손에 놀아나 괜히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거잖아요.”

시녀가 정교랑에게 술을 더 따라주며 투덜댔다.

“화낼 거 없어. 병사가 공격해 오면 장수가 막고, 물이 밀려 들어오면 흙으로 막으면 돼. 판을 벌일 배짱이 있으면 벌이는 거고,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패배를 인정하면 그만이지. 별거 아니야.”

정교랑이 말을 끝내고,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시녀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부디 고 관인이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돈 문제로 끝나진 않을 테니까.

* * *

얼굴 한쪽이 저릿해져 왔다. 띠풀(茅草, 모초)에 얼굴을 스친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띠풀이 시야를 가려서 오랑캐들을 자세히 볼 수가 없잖아.

주육낭은 자신 앞을 가리고 있는 띠풀을 뿌리째 확 뽑아 버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이때, 주육낭의 시선 안에 들어와 있던 오랑캐 병사 하나가 갑자기 무언가 발견한 듯 주육낭 쪽을 쳐다보며 동태를 살폈다.

주육낭은 재빨리 몸을 바닥에 바짝 붙였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전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3년째지만, 전장에 나간다는 건 늘 긴장되고 털끝이 삐쭉 서는 일이었다. 물론 전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그런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인기척과 말굽 소리가 사라졌다. 눈치 없는 띠풀이 다시 주육낭의 시야를 가렸다.

음, 어쩌면 띠풀이 내 앞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띠풀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으니까.

주육낭이 가볍게 한숨을 쉬자, 코앞에 있던 띠풀이 주육낭의 얼굴에서 잠시 멀어지나 싶더니, 금세 그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띠풀 한 줄기가 주육낭의 콧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육낭이 재빨리 손으로 띠풀을 빼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띠풀은 콧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육낭은 재채기가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하면 어떡해! 안 돼! 절대로 재채기를 하면 안 돼!

주육낭은 양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안간힘을 쓰며 재채기를 참았지만, 콧구멍 안에 들어간 띠풀은 야속하게도 그의 콧속을 한껏 간지럽히고 있었다.

망했다, 망했어! 안 돼! 이러면 큰일 난다고!

“에취!”

엄청난 소리로 재채기를 한 주육낭은 서둘러 말을 타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으로 띠풀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천근만근 된 듯 일어나지지 않아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주육낭의 귓가에 들려왔다.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포복절도하는 진십삼이 보였다.

진십삼?

그래, 나는 경성으로 돌아왔지. 여긴 서북이 아니야.

꿈이었구나.

주육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인상을 팍 쓰고 진십삼을 향해 말했다.

“진십삼, 꼭두새벽부터 내 집엔 뭐 하러 온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속바지만 걸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바지는…….

“잘 봐. 여기가 누구 집인지.”

진십삼이 웃으면서 손에 쥔 붓을 주육낭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훑어보던 주육낭이 화들짝 놀랐다.

“내가 어째서 자네 집에 있는 거야?”

주육낭의 물음에 진십삼은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난들 어찌 알까? 자네가 꼭두새벽부터 고주망태가 되어서 우리 집 대문을 부술 듯이 발로 차고 들어와서는, 꼭 나랑 달을 봐야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나, 나한테 검무(劍舞)를 보여주겠다고 떼를 쓰질 않나.”

진십삼은 별안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검무 실력은 정말 최악이더군.”

주육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젯밤에…….

어젯밤에 씩씩대면서 덕승루를 뛰쳐나온 후, 집에 가기는 싫은데 마땅히 갈 곳은 또 없다 보니 야시장 노점으로 가 술을 퍼마셨지.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네.

주육낭이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몸도 아파.

주육낭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어깨와 팔을 확인하자, 군데군데 시퍼런 피멍이 든 것이 보였다.

“어이, 내가 취한 틈을 타서 나를 흠씬 두들겨 팬 거 아니지?”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자 진십삼은 혀를 찼다.

“내가 자네를 때릴 수나 있겠나? 자네는 천하무적이라 가슴으로 바위를 깨고, 어깨로 나무를 쓰러트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자네를 내가 어떻게 때려?”

진십삼의 말만 들어도, 주육낭은 자신이 어제 얼마나 추태를 부렸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주육낭이 헛기침을 하고는 옷장에 걸린 옷을 아무거나 꺼내 걸쳐 입었다.

“이 알록달록한 자네 취향의 옷들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내 옷들은 깨끗이 빨아서 말려 놨지?”

주육낭이 투덜대면서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냉큼 말해 봐.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십삼이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술 처먹고 고주망태 된 놈 처음 봐?”

주육낭이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자네처럼 술 처먹는 사내는 처음 봐서 그래.”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술에 취해도 입은 무겁더라고? 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절대로 얘길 안 하더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입을 닫았다는 건, 분명히 아주 중요한 일이고,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겠지.”

이제 갓 진사가 된 사내와 아직 시집도 안 간 여인이 화괴 다툼에 오만 관을 썼다는 거?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기 전에, 아주 창피해 죽을 일이지!

주육낭이 진십삼의 말을 못 들은 척 잡아떼고는 진십삼의 찻잔을 빼앗아 차를 마셨다.

“어이, 어이, 차 다 마셨으면 얼른 가 봐. 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진십삼이 말했다.

“자네가 바쁠 일이 뭐 있다고? 기껏해야 또 벗인가 지인인가 하는 그 서생들이랑 유흥을 즐기러 가는 거 아냐?”

주육낭이 진십삼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까먹은 거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자신의 장포를 손으로 한 번 쓱 쓸어내리고 말했다.

“나는 오늘 약속이 있네.”

내일 혹시 시간 돼요? 성 밖에서 오 리 떨어진 도관에 벚꽃이 예쁘게 폈다는데, 같이 꽃놀이하러 갈래요?

그제야 생각났는지,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지 마!”

갑자기 주육낭이 진십삼의 팔을 낚아채고 소리쳤다.

“아, 그래서 도대체 정 낭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던 건데?”

이번에는 진십삼이 반대로 주육낭의 팔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이 진십삼의 손을 홱 내치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둘 다 어린 나이도 아니면서, 남녀가 유별한데 무슨 단둘이 꽃놀이를 가?”

진십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주복, 이 사람아.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자네 연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라네.”

그때 시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십삼공자님, 정 낭자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명은 너무 기뻐 화들짝 놀란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말 그대로 깜짝 놀란 것이었다.

“여기로 왔다고?”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역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진십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주육낭의 팔을 뿌리치고 말했다.

“자네는 집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여기서 살든가 해. 난 이만 가 볼 테니.”

주육낭은 언짢은 표정으로 진십삼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십삼을 불러 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진십삼을 붙잡지는 않았다.

약속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고?

그 애도 참, 참!

주육낭은 이를 갈면서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머니, 거긴 조금만 늦어도 마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서요. 저는 이만 정 낭자를 데리고 가 보겠습니다.”

진십삼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 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다급해 보이는 진십삼의 모습에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급할 거 뭐 있니?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지금 마저 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로 웃깁니다. 소자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정 낭자에게 마저 이야기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예를 표하자, 정교랑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 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고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부인은 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대청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부인, 그래도 정 아씨가 십삼공자님을 잘 대해 주시는 것 같아요.”

여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 십삼이 정 낭자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기 마련이지.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이야. 사람의 진심은 돌덩이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는데, 원칙 정도야 거뜬히 바꿀 수 있지 않겠어?”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인이 오랜 세월을 무식하게 살아오고, 글공부도 따로 한 적 없지만, 사람은 살아 있고, 원칙은 죽은 거라는 도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 부인이 여종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 십삼이 너무 도도한 게 문제야. 정 낭자가 세운 원칙을 어길 생각조차 하지 않잖아. 하지만 다행인 건, 정 낭자도 십삼 못지않게 도도한 사람이라는 거지.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든 원칙을 갈아엎을 수 있을 만큼.”

진 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물었다.

“십삼 이 녀석! 좀 전에 웃긴 이야기를 하는 내가 웃기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웃기다는 거야? 어휴, 또 십삼한테 당했네.”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진십삼의 방에 있던 주육낭은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공자님, 식사하시겠어요? 부엌에서 식사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시녀가 물었다.

“안 먹는다. 지금 나갈 거야.”

주육낭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사환 한 명이 허둥대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사환이 반가워하며 외쳤다. 자신을 따르는 사환임을 알아본 주육낭이 걸음을 멈췄다. 주육낭의 시선은 사환이 안고 온 보따리로 향했다.

“공자님,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왔습니다.”

사환이 부리나케 보따리를 펼치고 내의부터 겉옷까지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중얼거렸다.

“네놈이 쓸모 있을 때가 다 있구나.”

주육낭이 두 팔을 넓게 벌리자, 시녀들이 서둘러 주육낭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갈아 입혀주었다.

사환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어제 공자님이 소인더러 끝까지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공자님 혼자 어디론가 사라지시는 걸 보고는 정말 제대로 취하셨구나 싶었습니다요.”

주육낭은 사환이 조잘대면서 한참 동안 자기 자랑을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을 굳힌 채 대꾸하지 않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환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정 아씨께서 저더러 공자님께 옷을 갖다 주라고 하셨어요.”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 아씨?

주육낭이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뭐라고?”

사환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실, 공자님께 옷을 가져다드리는 게 소인 생각은 아닙니다. 정 아씨께서 어젯밤부터 공자님을 찾으셨는데, 진 공자님 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셨어요. 소인이 정 아씨께 공자님이 만취하셨다고 아뢰니까, 아씨께서 소인더러 옷가지를 챙겨서 진 공자님 댁에 같이 가자고 하시지 뭡니까.”

다른 때였다면, 사환은 분명히 다 자기 덕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렸을 텐데, 옷을 가져오게 만든 사람이 정교랑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주육낭에게 이야기했다.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사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 애가 내게 옷을 갖다 주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

주육낭이 너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도 했거니와 워낙에 힘이 센 탓에 주육낭의 허리띠를 묶어 주고 있던 시녀들이 그를 따라 앞으로 쏠려갔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시녀들이 주육낭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됐다. 그만들 나가 봐.”

주육낭이 시녀들에게 손짓하고는 사환을 더욱 세게 잡았다.

“맞느냐고 물었다.”

사환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나를 위해서?”

주육낭이 재차 확인했다.

“예.”

사환이 대답했다.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데?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소상히 이야기해 봐.”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사환을 재촉했다.

“어디서부터요?”

사환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 아씨께서 어젯밤부터 공자님을 찾으셨는데…….

어젯밤부터 나를 찾았다고?

주육낭이 입꼬리를 씰룩대다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말했다.

“어제부터 이야기해.”

주육낭은 아직 못다 입은 옷을 여밀 생각조차 안 드는 듯 앞섶을 반쯤 풀어 헤친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어제라면…….

“자세하게, 자세하게 말해 봐.”

주육낭이 또 한 번 당부했다.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뒤로 물러났던 시녀들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공자님, 식사를 대령해오라고 했으니, 천천히 식사하시면서 이야기를 듣는 건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주육낭이 큰 손을 내밀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좋다.”

바람이 불어오자, 벚나무 가득 핀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벚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무 아래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사내도 있고 여인도 있고, 앉은 사람도 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벚나무를 올려다보았고, 어린아이들은 바닥에 떨어지는 벚꽃을 잡겠다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라는 말처럼, 성에서 오 리 밖에 있는 도관도 별다른 것 없이 벚꽃 하나만으로도 유명해질 만하네요. 이 도관을 처음 지을 때 벚나무를 잔뜩 심어 놓은 사람 덕분에, 이 도관은 몇 대 동안 향불 값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두봉과 두모 위에 내려앉은 벚꽃 때문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모습은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무심코 꽂아 둔 버드나무 가지가, 숲을 이루게 된 것일 수도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다 그렇죠.”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녀가 미리 두 사람의 찻잔 위에 씌워 둔 얇은 망사 덮개 덕분에 벚꽃이 찻잔 안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들 그 이야기 들었소?”

행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덕승루에서 화괴 다툼이 일어났다는군.”

“에이, 화괴 다툼이 뭐 희귀한 일이라고. 그건 흔히 일어나는 일이잖소.”

하긴, 화괴 다툼 없는 화괴가 무슨 화괴라 할 수 있으랴.

이야기를 듣고 입꼬리를 올리던 진십삼은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고 간식을 먹어보라고 청했다.

“이것 좀 먹어 봐요. 어머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간식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끝으로 간식을 조금 떼어내 먹었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근데, 맛이 있지는 않아요. 어머니께 불경스러운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 간식은…….”

“이번에는 좀 다르다던데? 어떤 여인이 화괴 다툼에서 이겼대.”

“어떤 여인이 화괴를 하고 싶어서 다툰 거라고?”

“그게 아니라 어떤 여인이 돈을 걸고, 어떤 사내와 화괴 다툼을 해서 이겼다고.”

행인들의 대화를 들은 벚나무 아래 사람들이 일제히 행인들을 쳐다보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진십삼도 말을 하다 말고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내다보며 웃었다.

“저 사람들 말, 들었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낭자는 저런 이야기 믿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직접 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진짜로 믿는 거예요?”

진십삼이 찻잔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정교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게 아니라, 그 화괴 다툼을 한 사람이 나거든요.”

그 화괴 다툼을 한 사람이 나거든요?

진십삼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몸종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정교랑의 두봉과 두모에 튄 차를 닦아 주었다.

정교랑이 담담한 표정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진십삼은 놀라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공수의 예를 표하며 활짝 웃었다.

“미인을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정교랑이 답례했다.

“주복!”

진십삼의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진십삼이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주육낭은 편한 자세로 대청에 비스듬히 누운 채 시녀 둘이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집에 안 갔어? 괜히 자네 집까지 갔다 다시 왔잖아.”

진십삼이 주육낭을 탓하듯이 말했다.

“자네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는 서로 놀라서 마주 보았다.

“말할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진십삼이 먼저 말하고는 대청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두 시녀가 서둘러 고무줄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육낭은 절로 웃음이 나는지 입을 벌리다가 곧 표정을 수습했다.

“너무 속상해하진 마. 그래도 자네와는 꽃놀이를 갔잖나.”

주육낭이 말했다.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뭔 소리야? 그나저나, 그렇게 큰일을 나한테 왜 숨겼어!”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주육낭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그 사람이 살의까지 내비쳤다면서? 그래도 큰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게 큰일이 아니었으면, 어제 자네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이유는 또 뭔데?”

진십삼이 주육낭을 다그쳤다. 주육낭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일을 말하는 거였군. 자네가 알 정도면, 이미 경성에 그 이야기가 다 퍼졌다는 소린가?”

“쓸데없는 소리.”

진십삼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삽시간에 이야기가 퍼질 만한 소재가 다 들어 있잖아. 화괴며, 고씨 가문이며, 게다가 미모에, 돈에, 권력에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천만 명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신선의 제자 정 낭자까지 있는데. 이야기가 안 퍼지는 게 더 이상하다, 이놈아.”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아, 하고 내뱉었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그 골치 아픈 일이 떠올라 표정을 굳혔다.

“정말로 주 낭자 혼자서 벌인 일이야?”

진십삼이 물었다.

“몰라. 아무튼, 걔는 누가 벌인 일이든 관심 없대. 풍류를 즐기는 오라비가 기쁘기만 하면 된다더라.”

주육낭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설마 그거 때문에 정 낭자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혼자 고주망태가 되어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 참, 내가…….”

“그런 거라면, 자네는 정말 그 풍류를 즐긴다는 오라비보다 못한 놈이네.”

진십삼이 주육낭의 말을 끊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발끈하여 진십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번 일 말이야. 정 낭자가 깨진 이를 배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을 만큼 속상한 일이었는데, 거기서 뭘 했다고? 정 낭자한테 성질을 부려? 그게 오라비로서 누이에게 보일 모습이야? 정사낭이 멍청하긴 해도, 적어도 제 누이를 아낄 줄은 아는 사람이야.”

진십삼이 말했다.

“속이 상하긴. 내가 보기엔 아주 기뻐서 환장을…….”

주육낭은 이를 바드득 갈며 말끝을 흐렸고, 진십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정 낭자가 자네처럼 고주망태라도 되어야 속상하다는 말이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 이미 그 지경이 됐는데, 정 낭자가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었겠나? 대부분은 아마 그 자리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 관인에게 빌며 사죄할 생각만 했겠지. 절대 그 오만 관을 화괴 다툼에 쓰진 않았을 거야. 공손히 고 관인에게 받치면서 화를 가라앉히라고 아부를 떨었을 테지. 하지만 주복, 만약 자네였다면, 고 관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을 텐가?”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지.

“자네도 그러지 않는데, 정 낭자가 어떻게 그러겠나?”

진십삼이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 낭자는 단 한 번도 아랫사람의 잘잘못을 따진 적이 없어. 정사낭의 손목을 부러트린 하인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지. 왜 그런 줄 알아? 자신이 일개 하인들과 다투는 걸 하찮다고 여기니까. 그만큼 그 여인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니까. 그런 여인이 퍽이나 고 관인에게 사죄하고 싶었겠다. 더군다나 그 여인의 잘못도 아닌 일에!

누가 봐도 이건 정 낭자가 정사낭을 위해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씌운 거야! 아둔하고 착해 빠진 정사낭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무척 속상해할 테고, 죽을 만큼 자신을 자책하겠지.

그런데 정 낭자가 거기서 고 관인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죄하면, 정사낭은 어땠겠어? 자기 때문에 누이가 이런 일에 휘말리고, 치욕스러운 사죄를 한다는 것에 더 미안하고, 더 속상하고, 더 창피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야. 그런데 정 낭자 같은 사람이, 일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 같아?

자네는 어떻게 정 낭자가 이 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속으로 기뻐한다고 말할 수가 있지? 남의 수작에 놀아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고씨 가문과 입에 담기도 망신스러운 일로 원수를 졌어. 정 낭자가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겠나?

정 낭자가 어째서 화낼 리 없고, 속상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정 낭자도 사람이야. 오욕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지. 제멋대로 구는 사람보다,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 더욱 고통스럽다는 걸 왜 몰라?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정 낭자가 뭘 할 수 있어? 화를 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데? 없어, 아무 소용없다고. 정 낭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 처한 곤경에서 어떻게 살길을 마련할지 고민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정 낭자가 고 관인과 화괴 다툼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최선의 결정이기도 해.

음모여도, 함정이어도, 설령 고씨 가문과 원수지간이 되더라도, 정 낭자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딱 한 가지 중요한 것만 생각한 거야. 화괴 다툼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

화괴 다툼으로 시작했다면, 화괴 다툼으로 끝내자.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일이니, 결과가 어찌 되든 일단 해보자. 모든 일은 결국 화괴 다툼으로 시작하고, 끝을 내자. 정 낭자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화괴 다툼을 하는 게 얼마나 덧없고 황당한 일인지는 온 경성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거다. 황당한 일인 만큼, 서로 승패를 받아들이고, 그냥 한 번 웃고 훌훌 털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고작 화괴 다툼으로 가문 간의 불화가 일어난다면, 그거야말로 더욱 황당한 일이 되는 거지.

고씨 가문이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걸?

어린 여인이 제 오라비를 위해 화괴 다툼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세간에 떠돌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린 여인의 용기에 손뼉을 칠 거야.

만약 그 자리에서 정 낭자가 고개 숙이고 사죄했다면, 신선 낭자도 비굴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샀을 거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나?

자네가 거기서 성질부릴 일이 뭐 있어? 자네까지 설칠 필요가 뭐 있냐고!”

진십삼의 말을 듣던 주육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그거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잖아! 나는 그 애가 고씨 가문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난 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난 그저 그 애 주변에 있는 멍청한 놈들한테 화가 나는 거야. 괜히 그 애한테 골칫거리만 떠넘기니까.”

“다른 건 없고?”

진십삼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 그런데도 그 애가 그 멍청한 놈들한테 잘해 준다는 게 화가 난다! 됐냐? 그래, 맞아! 난 정확히 이것 때문에 화가 났다, 왜!”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버럭 화를 냈다.

주복, 그건 화가 난 게 아니라, 질투야.

“그런데도 그 여인이 그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니까, 우리가 그 여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사낭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정 낭자가 정사낭을 매몰차게 내쳐야만 해? 정 낭자가 정사낭을 먼지 나게 두드려 팼다면, 우리는 정 낭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육낭은 속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금세 풀이 죽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야. 그 여인이 몹시 짜증 나고 밉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창피해하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주육낭의 표정을 본 진십삼이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어쨌든 황당한 일에 불과하고, 어린 낭자가 성질 한번 크게 부린 일로 치부할 수도 있으니까. 고씨 가문 쪽에는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네. 관기의 수작에 두 가문이 놀아난 것이니, 따지고 보면 둘 다 피해자일 뿐이야. 자연스럽게 큰일을 작은 일로, 작은 일은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주육낭은 아무런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먹고 가지? 정 낭자에게 급하게 사과하러 갈 필요는 없어.”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과는 무슨.”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공자님, 공자님.”

사환 한 명이 급하게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두 사람이 또 한 번 화들짝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또?”

“하, 저녁에는 성문이 닫히니까, 등불 아래서 꽃놀이할 생각은 마라.”

주육낭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입을 막 열려던 찰나, 사환이 먼저 말했다.

“공자님, 정 아씨께서는 공자님을 데리러 온 거라고 하십니다.”

사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데리러 와?

주육낭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날 왜 데리러 와?”

진십삼이 피식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탁탁 쳤다.

“네 진심이 보였나 보지. 육낭, 진심을 보이는 게 뭐냐고 물었지? 지금 자네의 마음이 바로 진심이야.”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회상했다.

그 사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긴 한 것 같네. 시키는 대로 할 배짱이 있으니, 쓸모가 있는 게 맞지.

육낭, 저번부터 자네가 계속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이런 게 바로 진심이야.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그 여인을 믿고, 그 여인을 걱정하는 것.

주육낭이 퉤 하고 침을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걸음을 옮기다 말고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아, 좀 전에 자네한테 하려던 말을 아직 못 했네.”

주육낭이 말했다. 진십삼은 좀 전에 대청 안에서 헤벌쭉 웃던 주육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아까 그 애가 왔던 일, 실은 나 때문이었단 거야.”

주육낭은 헤벌쭉 웃으면서 장포를 손으로 쓱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자네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나한테 옷을 가져다주려고 온 거거든.”

진십삼은 흠칫 놀란 얼굴로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진십삼이 뒤늦게 고개를 저으며 읊조렸다.

“그래서 온 거였구나.”

날이 저물 무렵이 되자 거리를 오가는 행인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빠르게 내달리는 말과 마차들 때문에, 정교랑이 탄 마차의 속도가 더뎌졌다. 말을 타고 있던 주육낭은 마차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마차를 따라갔다.

“말, 가져다줘서 고마워.”

머뭇거리던 주육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날씨인지라,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져 있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나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거잖아요.”

“아니야.”

주육낭이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대답했다.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이 이어서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스스로한테 화가 나서 그래.”

“이번 일은,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 뭘 어쩔 수 있겠어.

참…… 재수가 더럽게 없었지.

말고삐를 쥐고 있던 주육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주씨 저택에 도착했고,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어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을 향해 주육낭이 외쳤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 네가 그 멍청한 놈을 지켜주고 싶으면 지켜.”

주육낭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너는 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마, 말해 버렸어! 이렇게 남사스러운 말을 뱉어내다니!

이제 빨리 가야지, 빨리!

주육낭이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주육낭의 발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고 웃으며 물었다.

“간식 먹을래요?”

“또 간식이야? 간식 말고 딴 건 없어?”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뭘 원하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뭘 원하냐고?

“그림.”

주육낭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말이야. 진십삼한테 준 그림 같은 거.”

“알겠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헤벌쭉 웃던 주육낭은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수습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재빨리 정교랑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나도 꽃 그려줘. 밤에 피는 꽃 같은 거. 진십삼한테 줬던 그림보다 더 좋은 거.”

“부인, 부인.”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정씨 저택의 조용한 새벽을 깨웠다.

머리를 단장하고 있던 정 이부인이 언짢은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온 여종을 흘겨보았다.

“여긴 경성이야. 품위 없이 호들갑 좀 떨지 마라.”

여종은 재빨리 걸음을 늦추고 알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인데?”

화려한 비녀로 가득한 장신구 함에서 신중하게 하나를 골라 머리에 꽂은 정 이부인이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좀 전에 반근 낭자한테 가서 돈을 받으려고 했는데,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여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 이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돈이 없긴 왜 없어?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자기가 뭐라고 우리한테 돈을 안 줘?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여종은 연이어 다그치는 정 이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귀가 아파 왔다.

“웬 호들갑이오? 체통을 지켜야지.”

조식을 먹은 뒤, 여유롭게 산책을 한 바퀴하고 대청 안으로 들어온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야, 내 말이 맞잖아요. 주씨 가문은 돈 때문에 교랑을 데려간 거예요. 이젠 우리한테 돈도 한 푼 안 주겠대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 이노야 앞으로 다가갔다.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튼소리. 그 돈은 내 돈인데, 누가 감히 내 돈을 빼돌린다는 거요?”

정 이노야가 집사를 불러서 말했다.

“점포에 보낼 사람을 골라 놨으니, 오늘 당장 점포에 가서 관리인들을 싹 바꾸게. 앞으로 장부는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곧장 우리 손으로 들어올 걸세.”

정 이부인이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구나! 그 점포들이 드디어 완전히 내 것이 되겠어!

“노야, 부인. 노야, 부인!”

대청 밖에서 또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 단속도 좀 하시오. 집안 꼴이 이게 뭐요?”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이부인을 나무랐다.

“알겠어요, 노야. 지금까지는 안주인이라고 하기도 그랬잖아요. 관리인들부터 바꾸고 나면, 안주인 노릇 제대로 할게요.”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이때, 가노 하나가 거의 구르다시피 대청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부인, 큰일 났습니다. 집 앞에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정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가노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정산? 무슨 정산?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정 이부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점포에 납품하는 업자들인데, 뭘 정산해야 한다며 돈을 달랍니다.”

가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산할 게 있으면 반근을 찾아가야지, 왜 우리를 찾아와!”

정 이부인이 화를 냈다.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해서 부인을 찾아왔다는데요.”

가노의 대답에 정 이부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 찾아서 뭐해? 내가 행수도…….”

“부인, 행수를 찾아온 거라고 합니다. 부인께서 그 점포들의 행수 아니십니까.”

정 이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노가 서둘러 말했다. 흠칫 놀란 정 이부인은 문득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때다 싶어서 행수를 찾아?”

“노야, 노야.”

또 다른 가노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또 뭐냐?”

정 이노야는 아침부터 집안이 시끄러워 몹시 짜증이 나 있었다.

“노야, 사람들 말을 들어 보니, 저희 큰 아씨가 화괴 다툼에 오만 관을 썼다고 합니다!”

가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오만 관! 화괴! 큰 아씨!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 그래서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한 거였나?”

옆에 있던 여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만 관! 오만 관을 통째로 화괴한테 썼다고?

“자네 오만 관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

“대학사의 한 달 녹봉이 기껏해야 일백 관이네. 아마 조정 관리들의 한 달 녹봉을 다 합쳐도 사만 관이 채 안 될걸세.”

“하하하. 그렇게 따지면, 조정 관리들은 기루의 관기보다도 돈을 못 버는군.”

이 층에 앉아 있던 노인 몇 명이 시끌벅적한 대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일세.”

노인 중 한 명이 혀를 찼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자,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서 가세! 정씨 가문 사람들이 덕승루에 가서 오만 관을 도로 내놓으라고 깽판을 치고 있다는군!”

누군가가 거리에서 소리쳤다.

정씨 가문이 덕승루에?

이 층에 있던 노인들이 감탄했다.

“이상한 일은 매년 있었지만, 유독 올해는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찻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구경거리를 찾아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황당하네, 황당해.”

이 층에 있던 노인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당한 소리 마요! 기루의 화대를 다시 받아간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네요.”

한편 덕승루 안에서는 기생 어미 막씨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댁들이 사기 친 거잖아!”

기생 어미 막씨의 반대편에 서 있던 아낙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줄 몰랐는지, 오만 관이라는 엄청난 액수 때문에 끓어올랐던 패기는 지금 이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상하네. 이런 일은 고향에서도 있었잖아. 화신 묘회(火神 廟會)에서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현승 댁 사람들하고도 대판 싸웠어. 그때도 구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겁을 먹기는커녕 점점 목에 힘이 들어갔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움츠러들지?

여기 사람들이 간드러지는 경성 말씨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기생 어미라는 여인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고, 일거수일투족에서 농염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가?

아낙들은 이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다.

기생 어미 막씨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틀렸어요. 저희는 사기를 친 게 아니라, 판 거예요.”

팔았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은 곧바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웃음을 터트렸고, 여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다 못한 정씨 가문의 집사가 나서서 말했다.

“이보시오, 이번 일은 확실히 황당한 일이잖소. 우리 아씨와 공자님께서 장난 좀 친 걸 진짜로 받아들이다니요. 부탁이니 오만 관을 그만 돌려주시오.”

돌려달라고?

기생 어미 막씨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농이 지나치시네요. 이미 즐길 건 다 즐겨 놓고, 돈은 도로 돌려달라고요?”

“아직 안 즐겼으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집사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미모를 파는 아이들이에요. 그러니 손님이 눈길만 주어도 즐긴 것과 다름이 없죠. 눈알을 파낸다 한들, 이미 본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즐겼으면 즐긴 값을 내야죠.”

기생 어미 막씨가 여유롭게 웃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 번 봤다고 오만 관씩이나 받는 게 어디 있습니까!”

집사가 급한 마음에 소리치자 기생 어미 막씨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니, 댁의 아씨와 공자한테 가서 물어봐요. 제가 아는 건, 즐길 돈이 있으면 기루에 와서 즐기는 거고, 돈이 없으면 오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즐길 건 다 즐겨 놓고, 이튿날이 되자 후회된다며 화대를 돌려받겠다는 경우와 지금이 다를 바가 뭐죠?”

갈수록 노골적인 기생 어미 막씨의 말을 들은 사내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구경꾼들이 덕승루 안으로 점점 많이 더 들어오자, 집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교활한 것!

조용히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큰소리칠 줄이야! 이게 무슨 망신이람!

“어서 가세.”

집사가 조용히 말하자, 얼굴이 새빨개져 있던 아낙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집사와 아낙들은 도망치듯 덕승루를 빠져나와, 사람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가서 댁 공자님께 꼭 말씀드리세요. 우리 아형이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기생 어미 막씨가 허겁지겁 떠나는 집사 일행에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웃음을 터트리면서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급할 건 없어요. 정 공자님은 손을 다쳤으니까, 다 나으면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한 달 정도는 거뜬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특별히 한 달은 미뤄 드릴게요.”

덕승루 안의 사람들이 기생 어미 막씨의 말을 듣고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거요? 그 교활한 기생 어미가 행여나 순순히 돈을 내놓겠네!”

정씨 가문의 저택 안, 집사의 이야기를 들은 정 이노야가 정 이부인에게 버럭 화를 냈다.

“망신을 당하려고 작정한 거요?”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소리쳤다.

“그래요. 나 미쳤어요! 오만 관을 허공에 뿌렸는데, 제정신일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의 팔을 덥썩 잡고 말했다.

“당신은 대리시 관리잖아요. 어서 그 요망한 덕승루 것들을 잡아들이고, 우리 돈을 되찾아 와요!”

정 이노야가 소매를 홱 내쳤다.

“지금 돈이 문제요? 이건 우리 목숨과 앞길이 달린 문제라고! 당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만 관밖에 없소? 우리가 지금 누구한테 원수를 졌는지는 안 보이시오?”

정 이노야는 치밀어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쏟아냈다.

“무려 고씨 가문이오! 우리 집안이 웃음거리가 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일은 고씨 가문까지 웃음거리로 만들었단 말이오! 고 관인! 고씨 가문! 관기 하나 때문에 그런 망신스러운 일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다툼에서 졌다는 소문이 평생 꼬리표처럼 고 관인을 따라다닐 것이오. 고 관인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그런 일을 당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 않겠소?”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맞아. 고씨 가문이었지.

“노야, 그래도 이번 일은 당신과 무관해요. 두 재수 없는 아이들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노야, 어서, 어서 고 관인께 가서 사죄드려요!”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일찍이 어머니 말씀을 들었어야 해. 그 불운 덩어리는 정말 가는 곳마다 내 앞길을 막고, 우리 정씨 가문에 화를 불러오는군.”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문밖을 향해 외쳤다.

“데려왔느냐?”

“노야, 주씨 가문에서 못 데려가게 막으며, 저희를 때려서 내쫓았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자 대로한 정 이노야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씨 놈들이 감히! 내 딸을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제깟 것들이 뭐라고 못 데려가게 해! 내가 직접 가서 데려와도 똑같이 막을 수 있나 보자!”

“노야, 노야. 주씨 가문 사람들이, 노야께서 오신다 해도 똑같이 때려서 내쫓을 거라고…….”

사환이 말끝을 흐리며 정 이노야를 말렸다.

“그놈들이 감히! 국법을 우습게 여기는 게야?”

입으로는 화를 내고 있지만 정 노야의 발은 제자리에 멈춰 선 후였다. 정 이부인이 자연스럽게 정 이노야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노야, 주씨 사람들은 국법이고 뭐고 무시하는 거 잘 알잖아요. 그냥 거기서 그대로 지내라고 해요. 주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 교랑을 그렇게 키워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노야, 다 주씨 가문 잘못이에요. 그러니 어서 고 관인께 가서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요.”

맞아. 다 주씨 가문 탓으로 돌리면 되겠어!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맞아. 이건 다 주씨 놈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정 이노야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서 겉옷을 가져오너라. 내 당장 고 관인을 뵈러 갈 것이니.”

정 이부인은 분주하게 여종들을 재촉하다가, 정 이노야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사낭은…….”

정 이노야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그런 풍기 문란한 짓을 저지르다니, 내 조정에 죄를 청하여 그놈의 진사 자격을 박탈시키겠소.”

그러면 고 관인도 내가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라 여길 테지.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를 부득 갈았다.

“맞아요. 사낭도 우리처럼 목숨이 간당간당한 맛을 한번 느껴보라고 해요.”

“어서 마차를 준비하거라.”

결심을 내린 정 이노야는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 듯했다.

“노야, 나가실 수 없습니다. 문 앞이 아예 막혔어요. 아침에 온 사람들이 정산을 안 해 주면 관아로 가서 고소하겠다고 난리입니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집사가 말했다.

“고소할 사람은 고소하라고 해!”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부인! 그 점포들은 이제 부인의 것이잖습니까. 정말로 고소하면, 그 점포들은 모조리 관아에 압류당하고 맙니다!”

압류!

“그건 안 된다! 닭이 있어야 달걀이라도 낳지, 닭마저 없어져 버리면 우린 아무것도 없어. 그 점포들은 꼭 지켜내야 해.”

정 이노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요? 아니면, 점포 하나를 팔아서 다른 점포를 지키는 건 어때요?”

정 이부인이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미쳤소? 점포 한 개를 팔아? 점포 하나당 월 수익이 얼마인 줄 알고 하는 말이오? 점포를 팔다니! 그 아이가 강주에서 엉뚱한 데 뿌린 돈으로도 부족하시오?”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그럼 어떡해요?”

정 이부인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 이노야가 말없이 정 이부인을 잠시 쳐다보았다.

뒤늦게 정 이노야의 생각을 읽은 정 이부인이 몸을 살짝 떨며 뒷걸음질 쳤다.

“일단 당신 혼수로 막아봅시다.”

정 이노야가 말했다.

내 혼수!

“얼, 얼마나요?”

정 이부인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일고여덟 명쯤 왔으니까, 합하면 총 이만 관 정도 됩니다.”

집사가 말했다.

이만 관!

정 이부인이 질겁했다.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딨다고요!”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없으면 여기저기서 긁어모아야지. 저기에 금은 장신구들이 한가득이니, 우선 갖다 팔면 되잖소.”

정 이노야가 정 이부인의 화장대를 가리켰다.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장신구 함들을 쳐다보았다.

크고 작은 삼단 장신구 함 속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귀한 장신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전부 정 이부인이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서 모아온 것들이었다.

아직 착용도 못 해 본 것도 있는데, 우리 아들딸, 며느리한테 물려줄 것도 있는데…….

“정말 미치겠네!”

“황당하다고? 정말로 황당한 사람이 누군데. 그 여인과 누가 더 돈이 많은지를 겨루다니. 정 낭자는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일만, 이만, 삼만 관을 벌 수 있어. 정 낭자는 아마 돈을 물처럼 여길걸? 들어오든, 나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찻잔을 비운 진 노태야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시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진 노태야에게 건넸다.

“정 낭자가 황당한 일을 벌이긴 했습니다. 오라비가 화괴 다툼하는 것을 종용하는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그렇긴 해. 그 어린 낭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이는 더더욱 못 하지.”

진 노태야의 말을 들은 진소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드디어 깨우친 게 하나 있구나. 그 여인과 맞설 일이 생기면,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게, 바로 복이야.”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다는 건, 참으로 어렵겠지.”

대전 앞에 도착한 귀비가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이건 신첩이 어제 태후께 받은 간식이에요. 폐하도 한 번 맛보셔요.”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가 손에 쥔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귀비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한발 늦었군. 평왕이 좀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황제가 말했다.

“아쉽네요. 폐하, 평왕이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평왕한테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 한 번 맡겨 보심이 어떨지요? 폐하의 옥체에 무리가 갈까 근심이옵니다.”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오.”

황제의 대꾸에 귀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왕이 오늘 또 폐하께 꾸중을 들었나 보군. 게다가 심한 꾸중을 들은 게 분명해.

“평왕이 아둔한 게 있어도 폐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귀비가 말했다. 황제가 간식을 두 입 먹고 내려놓았다.

“태후께 가 봅시다.”

황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폐하.”

귀비가 황제를 따라 몸을 일으키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정 낭자가 화괴 다툼을 한 이야기는 들으셨는지요?”

황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태후께서 벌써 이야기를 들으셨단 말이오?”

황제가 귀비에게 물었다가 웃으면서 혼잣말했다.

“소식이 꽤 빠르군.”

폐하의 성격이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요즘은 말하는 것도 이상해지신 것 같아.

“폐하, 정 낭자의 행실이 참으로…….”

귀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귀비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이상할 게 뭐 있나. 정 낭자의 행실은 늘 한결같았소. 의형제 몇 명이 죽은 일을 가지고 감히 짐에게 대들었는데, 이번에는 친 오라비가 다쳤소. 게다가…….”

황제가 귀비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린 여인이 그런 일을 벌인 것도 황당하다지만, 경성 관리가 그 여인과 같이 다퉜다는 게 더욱 황당하지 않소?”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소매를 홱 털었다.

“짐은 안비를 보고 갈 테니, 귀비 먼저 태후를 뵈러 가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대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황제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자식이 뭘 잘했다고 고자질까지 시켜?”

황제의 혼잣말이 대전 밖에서 전해져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관요(官窯)에서 만든 귀한 청자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을 뒹굴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탁자 뒤에 앉아 있던 고 관인이 이를 으스러질 듯이 갈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사환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환의 대답을 들은 고 관인은 자신 앞에 있던 탁자를 통째로 엎어버렸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모든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천노(賤獠) 정씨! 천노 정씨!”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예 기둥을 뽑아버릴 기세로 물건을 때려 부수는 고 관인을 보던 식객이 서둘러 사환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십사 관인, 십사 관인.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식객이 고 관인을 다독였다.

“화를 가라앉히라고? 지금 나더러 어떻게 화를 가라앉히라는 거야!”

고십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에 쥔 꽃병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체면 깎이고 명성을 잃은 것도 모자라 남들 미움까지 사? 분명히 그놈들이 나를 걸고넘어진 건데, 어째서 나만 안팎으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거냐고!”

도통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의 고십사가 소리쳤다.

식객이 고십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십사 관인,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관인의 성씨는 고씨가 아닙니까. 강한 자에게는 아첨하고 약한 자는 짓밟는 게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럽니다.”

특히나 강한 사람일수록 평소 짓밟기 어렵다 보니,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난다면 더욱 주목을 받고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런 이치는 고십사도 잘 알았다. 물건을 내던지며 한바탕 분풀이를 한 고십사가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그 강주 바보! 강주 정씨! 사람을 시켜 그 계집의 버릇을 제대로 고쳐 줘야겠군.”

고십사가 이를 부득거리며 손짓했다.

“고 관인, 지금은 안 됩니다. 관인께서 정 낭자와 원수지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됐잖습니까. 게다가 폐하께서도 이번 일이 황당하다고 하신 마당에, 여기서 더 일을 키웠다가는 아예 수습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를 겁니다. 저희가 그 낭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낭자를 해치더라도, 사람들은 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식객이 서둘러 고십사를 말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고십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라이, 그럼 내가 지금 그 여인을 어르고 달래고 안전하게 지켜 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야?”

“그건 아니지만, 화괴 다툼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러니 고 관인도 그 일을 그만 내려놓으셔야 하고요. 그 일은 잠시 잊고 묻지도, 언급하지도 않으셔야 합니다.”

“퉤! 차라리 개처럼 꼬리를 숨기고 깨갱대며 빌빌 기라고 하지 그러나!”

고십사가 욕을 해댔다. 식객의 얼굴에 고 관인의 침이 잔뜩 튀었지만, 차마 소매를 들어 얼굴을 닦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객이 다시 한번 조용히 고십사를 설득했다.

“잠시 참으라는 거지 평생을 참으라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일단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몸을 사리셔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몸을 사려야 하는데!”

고 관인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이 일을 황당한 일로 치부하셨는데, 여기서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가는 고 관인만 더욱 황당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겁니다.”

참다 못한 식객이 고십사를 향해 소리쳤지만, 고십사는 이를 갈며 냉소를 지었다.

“그때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 계집을 죽였어야 했어. 황당한 태도에는 황당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지. 그런데 내가 그런 황당한 일에 갇히다니.”

“관인, 일보 후퇴는 일보 전진을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 여인을 추종하는 자들 또한 똑같이 황당한 자들이니, 잘 두고 보십시오.”

식객이 고십사를 다독이듯 말했다.

고십사가 미간을 찌푸린 채 엉망진창인 방 안을 훑어보고는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문밖에는 따스한 봄날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정말로 재수가 없군!

아버지께서 경성에 계시지 않으니 좀 자유롭게 놀 수 있나 싶었건만, 며칠 놀지도 못하고 이런 재수 없는 일에 휘말리다니.

경성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기는커녕, 경성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어!

강주 정씨!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정씨 저택.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정 이부인이 몸을 살짝 떨었다.

“지금 절기에 꽃샘추위가 올 리가 없는데.”

정 이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앞섶을 여미고, 문밖에서 차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앞장서서 들어오는 늙은 사내의 손에 들린 장부였다. 장부를 쳐다보던 정 이부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인, 모든 점포의 장부입니다.”

오 관리인이 예를 표하며 장부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 이부인이 여종에게 눈짓하자, 여종은 감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재빨리 장부를 받아왔다.

정 이부인이 마른기침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곤경에 처한 상황이니, 모두 한 마음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네. 자네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하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돼. 아무리 자금이 부족하다 해도, 내 절대로 자네들을 홀대하진 않을 테니.”

오 관리인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반근 낭자는…….”

오 관리인의 뒤에 서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반근은 원래 윗전을 모시는 시녀잖나. 그동안엔 경성에 가족이 없으니, 반근이 어쩔 수 없이 교랑을 대신해서 점포를 관리한 거였네. 이제는 우리가 경성에 왔으니, 반근은 본디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정 이부인이 사내의 말을 끊고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만들 가 보게.”

정 이부인이 바깥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아, 온 김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오 관리인과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문밖을 내다보자, 네댓 사람이 자신들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저들은 우리 집안 사람이네. 앞으로 자네들의 일을 도울 걸세.”

정 이부인이 말했다.

일을 도와?

오 관리인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오 관리인 일행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정 이부인은 재빨리 장부를 집어 들었다.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정 이부인 가까이 다가가 장부를 같이 펼쳐 보았다.

“부인, 부인. 점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마어마합니다. 정말 엄청난 액수예요!”

여종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교랑이 어떻게 오만 관을 몸에 지니고 다니겠어. 그리고 그 얍삽한 아랫것들이 꿀꺽한 돈까지 생각하면…….”

정교랑이 날린 오만 관과 하인들이 떼 갔을 돈을 생각해 보니, 정 이부인은 눈이 핑 돌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서둘러 정 이부인의 등을 두드려 주며 그녀를 달랬다.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돈은 금방 다시 메꿀 거예요. 길어야 한 달, 한 달이면 됩니다!”

여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정 이부인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합장했다. 정 이부인은 합장한 자신의 손에 반지와 팔찌가 없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쳐다보았다. 화장대 곳곳을 가득 채우던 반짝이는 장신구가 없으니, 화장대가 몹시도 휑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함에 넣어두지 말걸. 이렇게 쓰지도 못할 줄 알았으면, 실컷 보기라도 하는 건데.”

정 이부인이 아쉬운 마음에 투덜거렸다.

아니지, 애초에 그 애한테 머리를 조아릴 필요도 없이, 서둘러 점포들을 빨리 내 손에 넣었어야 하는 건데! 그럼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다들 그 반근이라는 천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어. 정말로 얄미워 죽겠단 말이지.

“아씨, 정말로 이대로 정 이부인한테 점포를 넘겨주실 겁니까?”

오 관리인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갖고 싶으면 가지라고 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저희는…….”

오 관리인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저희도 점포를 떠나는 게…….”

오 관리인이 말끝을 흐렸다.

오 관리인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다. 몇 년간 태평거와 신선거의 장사가 잘됐던 건 정교랑이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점포를 운영한 오 관리인과 시녀의 뛰어난 수완 덕분이었다. 점포와 관련된 모든 거래처와 점원 관리 또한 오 관리인과 시녀가 도맡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교랑이 없다고 해서 점포들이 당장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 관리인과 시녀, 그리고 원래 있던 점원들이 점포를 모두 떠나게 된다면 모든 점포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할 것은 자명했다.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재산을 빼앗겠다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으니, 오 관리인은 펄펄 끓는 솥 아래의 장작을 빼내듯 점포들의 근간을 흔들어 놓겠다는 마음으로 정교랑에게 물은 것이었다.

“일하기 싫어졌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흠칫 놀란 오 관리인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오 관리인이 피땀 흘려가며 키운 점포인데, 남이 그걸 엉망으로 짓밟아도 괜찮겠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까워서 어떻게 그럽니까.

심혈을 기울여 가며 차츰차츰 키워 온 점포들이었다. 오 관리인에게 그 점포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막대한 부를 안겨 준 일터였을 뿐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짜릿한 성취감까지 안겨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씨, 그건 아씨의 피땀이기도 하잖습니까.”

오 관리인이 말했다.

“내 피땀은 내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해요. 오 관리인의 피땀은 오 관리인의 일이니, 오 관리인은 오 관리인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고요. 피땀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렇게나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 관리인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다 그렸어?”

문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 관리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젊은이 하나가 성큼성큼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오 관리인은 서둘러 정교랑에게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무슨 일 있어?”

오 관리인이 물러나는 모습을 본 주육낭이 물었다.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육낭은 대수롭지 않게 아, 하고 대꾸하고는 정교랑을 재촉했다.

“별일 없으면, 빨리 그림이나 그려 줘.”

“공자님, 아씨께서 이미 다 그리셨어요. 안 그래도 제가 공자님께 갖다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시녀의 손에 들린 족자를 보자마자 주육낭은 픽 웃으며 족자를 받아왔다.

“공자님, 그림이 어떤지…….”

시녀가 말하는 도중에, 주육낭이 몸을 돌려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볼 필요 없어. 나는 딴 데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주육낭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벗어났다.

“뭐가 저렇게 급하시대.”

시녀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시녀가 반근을 보며 물었다.

“아씨께선 어딜 가셔?”

“경왕부에 들르신대.”

반근이 걸어오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같이 다녀올게.”

시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반근이 손으로 시녀를 막으면서 웃었다.

“언니, 바쁜 점포에서 쫓겨나서 드디어 좀 한가해졌잖아. 이참에 마음 놓고 편히 쉬어.”

“아휴. 이젠 내가 정말로 쓸모없어졌나 봐. 안팎으로 내가 필요한 곳이 없네. 어쩌면 우리 노태야 댁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시녀가 일부러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반근 옆에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

시녀가 가슴을 부여잡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씨, 이제 이쯤에서 제가 아씨 다리를 붙들어 안고 통곡하면 되나요?”

“그래, 안아.”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아씨는 너무 놀리기에 좋은 사람이에요. 아씨 댁은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날 수 있는 곳이잖아요. 아씨께선 신경 쓰지도 않으시는데, 제가 뭐하러 아씨께 울면서 빌겠어요?”

시녀가 반근을 향해 손짓했다.

“반근, 집에 올 때 왕씨네 호떡 하나만 사다 줘.”

반근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정교랑을 따라 문을 나섰다.

* * *

작가의 말:

천노(賤獠)는 당대에 쓰이던 욕입니다. 민족의 속성으로 비아냥대는 욕으로, 흔히 쓰이는 천것(賤婢, 천비)이라는 말보다 심한 욕이죠. 남서쪽 땅을 노(獠)라 하기에 남방 사람들을 욕할 때도 오랑캐 노(獠)를 써서 욕했는데, 정교랑이 남방 사람이라 이런 욕을 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자료의 출처는 <당천지남(唐穿指南): 남 앞에 꿀리지 않는 당나라 욕설 지침>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