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다음날, 주육낭은 평소처럼 연무장에 끝까지 남아 있었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정교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내 말이 맞잖아. 그 여인은 활쏘기를 놀이로 여길 뿐이라고. 당연한 일은 무슨!”
주육낭이 눈썹을 치켜뜨며 읊조리고는 장창을 선반에 걸었다.
“겨울에 가장 추울 때인 삼구(三九)나, 여름 더위가 한창일 삼복(三伏)에도 수련은 게을리하면 안 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여도 끈기 있게 수련해야지, 저렇게 마음대로 해서 쓰나!”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 전시 결과가 발표되어 정 아씨께서 전시에 급제한 공자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시러 가셨답니다. 급제자들이 열흘 후에 머리에 꽃을 꽂고 말을 타고 거리를 순회할 때 필요한 선물 말입니다.”
사환 한 명이 씩씩대는 주육낭에게 재빨리 설명했다.
어제였던 3월 7일, 성시를 치른 진사들이 황제가 주재하는 전시에 참여했다. 그리고 오늘,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난 후 결과가 공개됐다.
“정사낭의 순위는 고작해야 삼백 등쯤이라고 하던데, 진십삼처럼 일갑(一甲) 팔 등도 아니면서 축하할 게 뭐 있다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투덜거렸다.
“정 아씨께서는 진십삼 공자를 위한 축하 선물을 준비하시는 것 같던데요.”
같잖다는 표정을 짓던 주육낭이 멈칫했다.
그놈을 위한 선물?
“고작해야 일갑 팔 등인데, 추, 축하할 게 뭐 있다고. 나는 무려 연달아 삼급을 뛰어넘어 진급한 관리거늘!”
“옷을 갈아입으시오!”
3월 16일, 어가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급제 행렬의 진행자가 고성으로 외쳤다. 벌써 관복을 받은 진사들은 녹색 관복 차림에 관화를 신고, 손에는 홀판을 쥔 채 허리를 곧추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던 수재 학생도, 황토를 가르며 고생스럽게 밭농사와 경작을 하는 농부도, 발길 닿는 대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장사하는 장사꾼도 아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최고인 사(士), 관리가 된 것이었다.
급제한 진사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손자까지도 관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니 실로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카나 사촌 같은 친인척들도 진사의 도움으로 세금을 감면받거나 강제 노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 용문(龍門)에 오른다는 뜻인 등용문이라는 말로 과거 급제를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들도 권세를 얻기 마련이었다.
“성은에 감사드리시오!”
진행자의 외침에 따라, 정식으로 천자의 신하가 된 사람들이 성문 위에 있는 황제를 향해 깍듯하게 큰절을 올렸다.
“꽃을 꽂으시오!”
금색 테두리의 궁화(宮花: 황제가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하사하는 꽃 장식품)가 진사들 앞으로 한 송이씩 놓이자, 연로한 자든 젊은 자든 가릴 것 없이 모두 한쪽 구레나룻에 가지런히 꽃을 꽂았다.
“풍악을 울리시오!”
일찍이 준비를 마친 황실의 영인(伶人)들이 흥겨운 연주를 시작하자, 나이 어린 환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폭죽을 터트렸다. 숙연했던 천가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하고 흥겨워졌다.
“관인(官人)들께서는 말에 오르시지요.”
황궁에서 한 마리 한 마리 심사숙고하여 고른 말들 위로는 붉은 비단이 올려져 있었고, 새 옷으로 단장한 마부들이 진사들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드디어 관인이 되었구나!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진사 몇몇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의식을 마친 진사들의 축하 행렬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장원 급제한 진사가 가장 앞에서 행렬을 이끌고, 사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황궁 밖을 향해 이동했다. 금군 병사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트고, 황실의 영인들도 풍악을 울리며 뒤따랐다.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행렬을 이끌자, 온 경성이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어서 와서 봐봐! 이제 온다!”
황제가 친히 나와 있어 다소 숙연했던 어가 주위의 분위기와는 달리, 온 경성의 사람들이 몰려와 환호하는 거리 위는 열기로 가득했다.
금군 병사들이 행렬을 호위할 뿐 아니라, 오성병마사의 병사들과 관부의 관졸들까지 길가 양옆에서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손에 곤봉을 쥔 병사와 관졸들이 질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백성들의 열띤 성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름 전부터 좋은 자리를 선점한 규방 여인들은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진사 행렬을 향해 던졌다. 허공에 띄워진 각양각색의 손수건들은 마치 선녀가 흩뿌리는 알록달록한 꽃잎처럼 보였다.
행렬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는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백성들이 진사 행렬의 흥겨움을 한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날아간 손수건은 가끔 진사들의 얼굴에 떨어지기도 했다. 앞쪽에서 가고 있던 진사 한 명이 손을 들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손수건을 걷어냈다. 사내의 이런 작은 동작 하나에도, 길 양옆에 있던 여인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손수건을 걷어낸 진사는 올해 서른다섯이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내내,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시험에만 전념했던 사내가 용기를 내어 여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렬을 구경하기에 좋은 건물의 이 층에 자리한 여인들은 사내의 눈길 한 번에도 폭죽 터지듯 까르르 웃으며 추파를 던졌다.
그런 여인들의 반응에 진사는 흥분되는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했으니 이번 생은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진사의 귓가에 들려왔다.
느리게 간다고? 이 와중에 느리게 간다고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
진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본디 그의 뒤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와야 할 사람이 언제부턴가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온다면 아예 말의 뒤꽁무니에 부딪힐 기세였다.
뒤따라오던 진사는 꽤 젊고, 초록색 관복이 그 용모를 더욱 환히 빛나게 하는 청년이었다. 얼굴 옆에 놓인 궁화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구레나룻에 꽂힌 궁화가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진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청년의 준수한 외모는 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서른다섯의 진사는 이제야 만 열아홉이 된 젊은 청년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의 젊음뿐만 아니라, 준수한 용모와 으리으리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방진(方進) 형.”
청년이 진사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말고삐를 살짝 당기고는 공수의 예를 표하고 사과했다. 청년의 미소에 길가의 여인들은 더욱 열띤 호응을 보내왔다.
갑작스러운 여인들의 환호에 방진의 말은 하마터면 놀라서 뒤집힐 뻔했다. 다행히 마부가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진(秦) 아우, 앞에서 워낙 천천히 가서 그렇네.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방진이 손으로 앞과 뒤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아마 뒤쪽도 서두르진 않을 걸세.”
진십삼의 바로 뒤에 있던 진사도 진십삼과 멀리 떨어져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십삼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방진의 어깨너머를 내다보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뭘 찾는 거지? 왜 저렇게 서두르나?
방진은 내심 궁금했지만, 지금은 남의 일을 궁금해할 때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의 환호 속에 행렬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행렬의 앞쪽에서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저긴 무슨 일이야?”
“덕승루의 주 낭자가 진사들을 축하하기 위해서 춤을 선보이고 있대.”
주 낭자가 춤을 선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뒤쪽까지 퍼졌다. 사람들이 목을 쭉 빼고 앞을 내다보는 사이, 진사 행렬은 천천히 덕승루에 가까워졌다.
덕승루 앞에는 화려한 색상의 휘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무대 대신 큰 북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주 낭자가 북춤을 추려나 봐!”
“이리들 와봐! 주 낭자가 북춤을 춘대!”
“주 낭자가 꽃등 놀이 때 말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기는 처음이잖아! 천금을 줘도 보기 힘든 주 낭자의 북춤이야!”
황실의 영인들이 한발 앞서 나간 덕에, 진사들은 주 낭자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급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앙되게 북을 치는 주 낭자의 몸짓에서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삭막한 겨울인지라 화려한 색상의 비단옷은 단연 눈에 띄었고, 굴곡진 주 낭자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가 머리에 쓴 관에 달린 구슬 장식은 햇빛에 비칠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흔들거렸다.
가장 앞쪽에서 주 낭자의 춤을 구경하던 진사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는 통에, 뒤에 있던 진사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끌던 마부들도 넋이 나간 것처럼 주 낭자의 춤사위에서 눈을 떼지 못해 행렬은 잠시 멈춰 버렸다. 다행히도 금군 병사들이 재빨리 나서서 재촉한 덕에 전체 대열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주 낭자의 시선이 향하는 사람은 진십삼이었지만, 진십삼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짤막한 감탄만 내뱉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 낭자의 춤사위에 매료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거둔 뒤로는 덕승루 앞을 유유히 지나쳐 주 낭자가 점점 더 멀어질 때까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주 낭자의 춤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오직 그만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정말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춤이로군.”
방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또 한 번 고개를 돌렸다. 방진의 뒤로는 진십삼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십삼이 미소를 짓고 앞을 내다보며 돌연 손을 들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뭘 보라는 거지?
방진이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앞쪽에는 거리와 건물의 창가에 걸터앉아 환호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딱히 주 낭자만큼 이목을 끌면서 축하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신선거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방진이 저 멀리로 시선을 돌리자, 오색찬란한 휘장으로 장식한 식당 하나가 보였다.
신선거?
경성에 들어온 뒤로 줄곧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 왔던 그였으나, 신선거는 방진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며칠 전 성시를 치르고 난 후에, 집안 가족들이 그를 데리고 신선거에서 조촐한 축하 연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서늘한 초봄에 먹는 뜨끈한 과로신선은 정말로 맛있었지.
하지만…….
“진 아우가 과로신선이 먹고 싶다면, 일단 경림연(瓊林宴: 황제가 과거 급제한 진사들을 위해 여는 연회)부터 다녀와야지.”
방진이 목소리를 낮추고 웃으며 말했다. 신선거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여전히 앞쪽을 내다보던 진십삼이 싱긋 웃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방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자, 신선거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진사 행렬이 가까워지자, 가장 앞에 서 있던 관리인이 두 손을 높이 들어 포권의 예를 표했다.
“신선거에서 관인들을 위해 술 한 잔 바치겠습니다!”
술을 바친다고?
진사들이 놀란 얼굴로 생각했다.
술이라고 해 봤자 특별할 게 뭐 있다고,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사람들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갑자기 거리가 왁자지껄해지더니 엄청난 인파가 신선거 앞으로 몰려왔다.
“혹시 여기 주인어른이 직접 빚은 술이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관리인이 웃으며 공수했다.
“맞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흥분했다.
“혹시 그 술이 무원산입니까?”
관리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히 아니지요. 무원산은 오직 무원산 형제들만을 위한 술입니다. 관인들을 위한 술은 또 따로 있지요.”
점점 더 몰려오는 인파에 사람들을 막고 있던 관졸과 금군 병사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물었다.
“저기 신선거에서 또 술을 바친다는데?”
누군가가 대답하고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저 진사들, 관직을 얻자마자 길바닥에 널브러져서 황제가 여는 경림연에도 못 가는 건 아니겠지? 혹 그렇게 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기담이 될 텐데 말이야.”
깊이가 얕은 금잔들이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금잔을 가득 채운 술의 표면이 겨울 햇살 아래서 빛을 내며 일렁이자,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빚은 미주처럼 보였다.
“마시고 취하진 않겠지?”
가장 먼저 금잔을 손에 쥔 장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혹여나 경림연에서 추태를 부릴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한데 이 술이 그렇게 대단한가?
장원이 잠시 머뭇거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맹수처럼 달려들 기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 안 마실 거면, 날 주게나!”
사람들의 외침이 천둥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장원이 살짝 손을 떨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의 손에 쥔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술이 정말로 그렇게 좋다고?
“이 관인양(官人酿)은 관인들께서 선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리기 위해 빚은 술인지라 관인들의 흥취를 살짝 돋울 뿐, 신선대에 오르시는 발걸음을 어지럽힐 정도는 아닙니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며 설명했다.
조금이라도 더 머뭇거렸다가는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주위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장원이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가자, 장원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장원이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술일세!”
장원이 뭐라고 더 하기도 전에, 주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술을 마신 것처럼 통쾌해하며 소리쳤다.
참으로 좋은 술인데, 하필 관인들만 마실 수 있는 술이라니.
“설마 이 술도 판매하지 않을 계획이요?”
주위의 구경꾼들이 외쳤다. 관리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 신선거에서는 사사로이 술을 양조하여 판매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술은 주인어른께서 성의를 표하실 때 쓰시는 겁니다.”
구경꾼들은 아이고 소리를 연발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진사들이 한 명씩 나서서 금잔을 가져가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럼 저 술을 마시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수밖에 없겠군.”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치다가 허벅지를 치면서 한탄했다.
관리인이 누군가에게 금잔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치면서 예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진 공자님.”
관리인의 말 한마디와 함께, 신선거의 점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큰소리로 따라 외쳤다.
정 낭자도 참!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금잔을 받아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진십삼은 빈 잔을 건넨 후 행렬을 따라 다시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사들의 감탄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사람들의 선망과 부러움이 섞인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 술잔을 들이키는 진사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이 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오직 그만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경림연이 끝나고, 진십삼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등불이 서서히 밝아질 때였다. 그가 살짝 취기 오른 얼굴로 대문을 넘어섰다.
“십삼공자님, 축하드립니다.”
집안의 하인들이 양쪽에 서서 공손하게 진십삼에게 예를 올렸다.
“상을 내리거라.”
진십삼이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사환들이 미리 준비된 소쿠리를 들고 나와 소쿠리에 든 돈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 관인, 축하드립니다.”
돈을 받은 하인들이 활짝 웃으면서 진십삼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진십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손짓했다.
“상을 내리거라.”
십삼공자에서 진 관인으로 바뀌었다. 진십삼은 큰 도약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새로운 삶을 얻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청 안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대청 안에 앉은 진 시강과 진 부인은 하인들에게 에워싸인 채 걸어오는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소자,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십삼이 옷매무시를 단정히 정리하고 진지한 얼굴로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렸다.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바라보던 진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진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장수나 재상이 되는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오로지 아들이 유유자적하고 쾌활하게 지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의 오랜 바람이 현실이 되었구나.
“십삼.”
진 부인이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는 아들을 불렀다. 진십삼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어머니, 소자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친히 저를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너 데려다준대? 어미는 네가 받은 축하 선물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게야.”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십삼은 고개를 저었다.
“축하 선물 보는 게 뭐 급하다고요. 내일 봐도 늦지 않는걸요?”
“안 돼. 다른 사람들 건 내일 봐도 되지만, 정 낭자가 무슨 선물을 했을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진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선물은 이미 한 거 아니었어요?”
진십삼이 물었다.
설마 관인양을 특별히 집에 좀 더 보내준 건가?
“어서 와 봐.”
벌써 진십삼 거처의 마당에 발을 들인 진 부인이 굳게 닫힌 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반근 낭자가 신신당부했었어. 네가 와야만 선물을 열어볼 수 있다고.”
진짜로 더 있어? 거리에서 관인양을 선물한 것 외에도, 또 선물이 있단 말이야?
진십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공자님.”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이 예를 올렸다. 진십삼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문을 밀었다.
대청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회랑 아래에도 불이 켜진 등불은 두세 개뿐인지라 어둑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 안으로 드시지요.”
시녀들이 등롱을 손에 들고 차례로 들어가면서 진십삼에게 길을 안내했다. 하나, 둘, 세 개의 등불이 차례로 켜지고, 대청 안이 점점 더 밝아져 왔다. 대청이 점점 더 밝아질수록, 진십삼은 점점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화려하기도, 은은하기도 한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진십삼의 눈앞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모란이잖아!”
문가에 서 있던 진 부인이 놀라기도 기쁘기도 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모란이 엄청 많네!”
모란! 만개한 꽃, 반쯤 핀 꽃, 봉오리가 생겨 막 피어나려는 모란까지!
진십삼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3월은 낙양의 모란이 한창 만개할 시기였다. 세간의 묘사에 따르면, 낮에 보는 모란은 화려해서 눈이 부시고, 밤의 등불 아래서 보는 모란은 은은하고 온화한 멋을 자아낸다고 했다.
진십삼은 어릴 때 낙주에 가서 모란을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도 모란이 참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이 되어서는 다리가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꽃놀이를 즐길 흥취가 생기지 않아서인지, 언젠가 낙주에 다시 한번 가 볼 마음만 품고 있었을 뿐, 끝내 낙주에 다시 찾지는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 이 순간, 진십삼은 낙주에서 봤던 모란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란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낙주가 아닌 바로 그의 대청 안에서.
진십삼의 대청에는 흡사 모란원 야유를 즐기는 듯한 정취가 풍겼다.
모든 등불이 차례로 켜지자, 진 부인도 드디어 실내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감탄했다.
대청의 중앙에 족히 육 척 길이는 넘어 보이는 화폭이 가로로 펼쳐져 있었다. 시녀 네 명이 화폭의 모서리를 한쪽씩 잡고 있었고, 다른 시녀들은 등불을 손에 들고 화폭의 주위에 서 있었다. 일렁이는 등불 때문인지, 백 송이 가까운 모란들이 마치 살아있는 꽃처럼 두 사람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세상에나.”
진 부인이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중얼거렸다. 격하게 요동치는 마음에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모습으로 모란 화폭을 바라보던 진 부인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진십삼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소매를 살짝 털고는 두 팔을 벌린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화폭 앞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았다.
“술을 가져오너라, 술!”
진십삼이 한껏 흥이 오른 모습으로 외쳤다. 그가 연신 손뼉을 치다가 화폭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지난날 궁색할 때는 자랑할 것 없더니, 오늘 아침에는 우쭐하여 생각에 거칠 것이 없어라. 봄바람 따라 의기양양 말을 타고 달리니, 오늘 하루 장안에서 온갖 꽃을 다 보았네.”(昔日齷齪不足誇, 今朝放蕩思無涯. 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 - 맹교, <등과후登科後>)
봄바람 따라 의기양양 말을 타고 달리니, 오늘 하루 장안에서 온갖 꽃을 다 보았네!
이번 생은 딱 오늘만을 위한 것이로구나. 오늘이 있으니,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지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를 때였다. 분위기에 흠뻑 취해 술을 마시던 진십삼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화폭을 바라보다가, 손에 든 술 주전자를 입에 기울이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한 진십삼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모란에 홀린 것처럼,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회랑 아래서 화폭만 바라보고 있던 진 부인이 한숨을 토했다.
“봉화에 불을 붙여 여인의 미소 한 번을 얻어내는 것처럼, 여인의 마음을 달래어 환심을 사는 건 늘 사내인 줄로만 알았는데, 비로소 오늘에야 깨달았구나. 여인도 똑같이 사내의 마음을 흔들고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을.”
진 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일 하나를 마무리 지었네.”
새로 들어온 진사 사백여 명을 위한 일들을 마무리 지은 뒤, 한결 편안해진 듯한 표정의 진소가 입을 열었다. 물론, 이 일이 끝났다고 해서 진소가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에 아직 속 썩이는 일들이 많죠?”
진소 부인이 차 한 잔을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고능준이 쫓겨났다고는 하나, 고능준과 얽힌 정사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났다. 고능준 수하에 있는 세력이 고의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를 내쫓은 진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결과였다.
이재민 구제와 민란 진압과 관련된 무평에서는 도통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고, 황제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괴팍해져 갔다. 조당에서 황제와 진소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서, 진소에게 알 수 없는 화풀이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이젠 조정에서 노야의 세력이 가장 막강하니, 폐하의 화풀이도 자연스럽게 노야께 향하는 거겠죠.”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난 절대 고씨 가문을 조정에 들일 수 없소. 이런 상황도 잠시뿐일 거요. 제일 굵은 가지를 쳐냈으니, 잔가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알아서 정리될 테지.”
진소가 거침없이 대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서북 군정처럼 말이오. 그쪽도 이젠 다 정리가 되었잖소.”
“고생 많으셨어요, 노야.”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이 속상했지만, 진소 부인은 애써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서북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여인이 먼저 생각난단 말이지. 겉보기에는 그 여인과 무관한 일처럼 보이지만, 서북 군정에는 그 여인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어.
강문원을 해치우자 서북 쪽의 인사는 자연스럽게 물갈이되었어. 그 여인이 만들어 낸 신비궁과 돌포탄 덕분에 서북 군영이 연달아 대승을 거두면서, 새로이 서북 군정 자리를 차지하게 된 장수들이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사실 서북 군정 일도 그 여인이 큰 공을 세운 것과 다름없군.
“십팔랑의 혼사는 26일에 치르기로 했어요. 정 낭자 쪽에도 청첩을 보냈고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아, 딸아이의 혼사도 있었지. 그것도 잘 신경 써야 하고.
“십팔랑이 혼사를 치른 후에도 당장은 사위와 함께 노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지?”
진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묻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왕 전하께 계속 서예를 가르치고 있어서요.”
진소 부인의 얼굴에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가나 칭찬을 듣는 딸아이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들의 큰 자랑거리였다.
“지금 후궁의 일도 모두 귀비마마가 장관하고 계시고, 황실의 공주들도 슬슬 공부를 시작할 때라 십팔랑에게 공주들의 서예 공부까지 맡기셨거든요.”
부인의 자랑에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혼사를 치렀으면, 집에서 남편을 도와 아이 훈육에 힘쓰고 어른들을 공경하며 현모양처로 살아야 하거늘, 어찌 계속 경성에 남아 있겠다는 거요? 그게 뭐가 좋다고.”
“아예 안 간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서 조금 더 지내다 아이가 생기면 자연스레 내려가겠죠. 나도 십팔랑이 갑자기 이렇게 훌쩍 가 버리는 게 아쉽고요. 그렇게 멀리 가 버리면, 몇 년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질 텐데.”
진소 부인이 진소를 나무라듯 말하자, 진소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어째 십팔랑이 예전과 비교하면 뭔가 달라진 것 같단 말이지.”
“벌써 시집갈 만큼 나이가 찼는데, 아직도 예전의 어린애 같을 수가 있나요?”
진소 부인이 실소를 터트렸다. 진소가 머쓱하게 웃고는 느릿느릿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개괄하자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 하였소(詩三百, 一言蔽之, 曰思無邪. - <논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해내기 어려운 일이 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오.”
시간은 흘러 어느새 3월 26일, 진십팔랑의 혼삿날이 되었다. 진씨 가문 저택 곳곳에는 경사스러운 붉은 비단 장식이 걸렸다. 바깥마당의 소란스러움에 비해, 안쪽 마당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온했다.
“십팔랑, 화장한 얼굴 볼래요?”
혼례를 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아낙들이 진십팔랑의 어깨를 살짝 옆으로 틀며 구리거울을 보여주었다. 구리거울 속에는 심혈을 기울여서 단장한 여인이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진십팔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도 왔대.”
“어서 가서 구경하자.”
문밖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렸다.
도착했나 보네.
“정 낭자가 십팔랑보다 한 살인가 더 어리지 않나? 그 낭자도 이제 슬슬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됐는데.”
“어떤 집안이랑 혼사를 치를지 모르겠네.”
“태후께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누가 그 여인에게 혼담을 넣겠어.”
밖에서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자, 진십팔랑은 어쩐지 짜증이 났다.
하여간 여인들이란. 눈에 보이고 신경 쓰이는 게 온통 혼사밖에 없지? 그 여인은 혼사 따위 안중에도 없을 텐데.
여인의 몸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언변으로 어사대 관리를 물러나게 하고, 기이한 병기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 태후의 미움을 샀다고는 하나 황제의 인정을 얻었고, 종친과 교분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 눈엔 아마 더 큰 세계가 있겠지.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키자, 수다를 떨던 아낙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십팔랑에게 혼례복을 입혀 주었다.
진십팔랑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3월 말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마당에는 초록 잎이 나기 시작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개했다.
자리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진십팔랑은 단번에 정교랑을 찾아냈다. 정교랑은 나무 그늘 아래, 눈에 띄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고 두 여인과 소녀들 뒤에 있었지만, 단연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저 여인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저 여인이 진안 군왕에게 경왕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면, 나는 귀비에게 공주들의 서예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저 여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잖아? 내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저 여인과 똑같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을 거야.
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축하 선물을 하사하셨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여인이 혼례를 치를 때 황제의 선물을 받는 경우는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십팔랑, 정말 축하해요.”
아낙들이 진십팔랑을 에워싸고 축하했지만, 진십팔랑은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그건 다 제 아버지 진소 덕분이죠.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이자, 아낙들이 혼례 때 쓰는 무거운 관을 진십팔랑의 머리 위에 올렸다. 붉은 면사포가 시야를 가리자, 진십팔랑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의 저택으로 찾아와 신부를 데리고 혼례 마차에 올라탔다. 신부의 출가를 배웅하러 왔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날 준비를 했다.
정 이부인은 주위에 있던 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안면을 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세 딸아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분주한 모습이었다. 한창 분주하게 인사를 한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교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랑, 여기서 동생들 잘 지키고 있어.”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사랑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정교랑을 찾았다. 그리고 곧 문가에서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교교.”
정 이부인이 잰걸음으로 다가가 정교랑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부인.”
반근이 얼른 다가와 정교랑을 잡았던 정 이부인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예를 표했다.
“어딜 가려고?”
정 이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진단랑이 신부 측 가족 신분으로 후행(後行)을 가게 된지라 정교랑도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집에 돌아가자꾸나. 네 외숙 댁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올 때도 됐잖니.”
정 이부인이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부인.”
반근이 재빨리 정 이부인의 손을 막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정교랑이어서 그런지,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끄는 동작을 취하자 숨어 있던 더 많은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정교랑이 입을 열려던 찰나, 구석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걸어 나와 정 이부인의 손을 단번에 쳐냈다.
“그만 돌아가야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주육낭이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치고는 정 이부인을 노려보았다.
“저리 좀 가시죠?”
저 자식은 어떻게 여인들만 들어오는 뒷마당까지 들어온 거야?
정 이부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무식한 놈이 예전엔 나한테 계모니 뭐니 하는 욕까지 했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놈과 또 다투면, 물론 저놈도 사람들의 질책을 받겠지만, 내 체면 또한 처참하게 구겨질 거야.
주육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정교랑도 정 이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집안 어른한테 말버릇이 저래?”
“집안 어른?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저 사람은 주씨 가문의 육공자잖아. 정 이부인은 저 사람한텐 집안 어른이 아니지.”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그렇지, 정 낭자는 왜 나서지도 않지?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무례는 무슨. 주씨 가문이잖아, 주씨 가문이 정 낭자와 정 낭자의 모친 일로 정씨 가문이랑 얼마나 피 터지게 싸웠는지 몰라서 그래? 저 두 가문은 서로 얼굴만 봐도 눈이 뒤집히는 원수지간이야.”
“하나는 외숙, 하나는 친부네인데, 자식들이 나선다고 뭘 어쩌겠어?”
작은 소리로 오가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반근은 정교랑을 탓하는 말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근은 민망하고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 정 이부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다음, 다시 턱을 치켜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직 주씨 가문만이 아씨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 줄 수 있어. 그리고 주씨 가문만이 아씨를 위해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고.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아씨께서는 그럴 수 없잖아.
반근의 귓가에 시녀의 말이 맴돌았다. 반근이 앞을 내다보자,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정교랑을 재촉하는 주육낭이 보였다.
하늘색이 어둑해졌을 무렵, 반근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주육낭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게 되었다. 순간 반근은, 아주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기고만장한 기세로 정씨 가문의 마당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누이의 억울함조차 풀지 못한다면, 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반근을 쳐다보자, 반근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주육낭.”
진 상공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주육낭을 불렀다.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옷을 입고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진십삼이 보였다.
“이 자식, 신랑처럼 차려입고 뭐 하는 거야?”
주육낭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진십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신랑이랑 동기(同期) 급제자라 오늘 친영 행렬에 초대됐어.”
진십삼이 대답하고는 말에서 내려와 정교랑을 향해 싱긋 웃었다.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내일 혹시 시간 돼요? 성 밖에서 오 리 떨어진 도관에 벚꽃이 예쁘게 폈다는데, 같이 꽃놀이하러 갈래요?”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주육낭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 시간 없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자네는 자네 할 일이나 하러 가. 자네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주육낭의 어깨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혹시 또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럼 같이 가는 겁니다?”
진십삼이 빙긋 웃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자 주육낭이 진십삼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냈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신랑 따라서 친영 행렬로 왔다니까.”
진십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봐도 모르겠는데? 친영 행렬은 다 떠나고 없는데, 자네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뺀질거리고 있으니.”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폭죽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마차와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혼례 행렬을 구경하던 거리의 사람들이 신랑 신부에게 축복을 보냈다.
진십삼이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는 급하게 행렬의 뒤를 쫓아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자.”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서 말하던 찰나, 정교랑이 멀어지는 혼례 행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보였다.
표정 역시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처연했다.
저 애 나이가 올해 열여덟이니, 진십팔랑보다 한 살 적군. 세간의 분위기가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지만, 여인이 열아홉에 시집을 가는 것도 꽤 늦게 가는 편이지.
태후 때문에 혼담을 넣는 사내가 없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똑같을 거야.
“뭐 볼 게 있다고.”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혼례복이 예뻐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삼백 년 전의 혼례복도 꽤 예쁘네. 아닌가, 혼례복은 언제나 예쁘긴 하지.
정교랑이 멀어지는 혼례 행렬을 내다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혼례복이라…….
주육낭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나도 안 예뻐. 가자, 가자.”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주육낭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따라갔다.
“정말 성질나 죽겠네!”
마차에서 내린 정 이부인이 이를 부득 갈며 소리쳤다.
“부인, 고정하세요. 주씨 가문 사람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다독였다.
“주씨 가문이 원래 그렇다고? 주씨 가문이 그렇게 판을 치도록 그 애가 부추긴 게 아니라면, 무장 출신인 주씨 가문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나대겠어! 내가 바본 줄 알아? 그 애가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나온 이상, 나도 의리 같은 거 지킬 생각 없어!”
“숙모님.”
갑자기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 이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정사낭이었다.
“사낭, 어디 나가려고?”
정 이부인이 미소를 쥐어 짜내며 묻자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동문수학한 동창끼리 한 번 모이기로 해서요.”
대답을 마친 정사낭은 정 이부인에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한번 모여서 축하도 하며 즐겨야지. 우리 신선거에 가서 즐기는 건 어떠니? 거기 가면 돈도 안 들 텐데.”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사낭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숙모님, 누이는 사실 좋은 사람이에요. 누이에게 잘 대해 주신다면, 누이도 두 분께 더욱 잘할 겁니다.”
망설이던 정사낭이 눈을 딱 감고 하려던 말을 뱉었다. 정 이부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낭, 그 말인즉 우리가 교랑에게 잘 못 한다는 뜻이니? 이런 식으로 매도하면 우리가 억울하지”
“잘 대해 주고 말고는, 두 분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정사낭이 이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뒤, 정 이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저 녀석 저거, 진사가 되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네. 집안 어른을 대하는 예의가 없어, 예의가!”
정 이부인은 정사낭에게 들릴 만큼 목청을 높여 욕을 해댔지만, 정사낭은 입을 꾹 다물고 저택의 문을 나섰다.
거리로 나온 정사낭이 잠시 자리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네, 숙모님. 진사까지 됐으니 이제 저도 어깨 펴고 살아야죠. 누이가 또 두 분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가는,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도련님, 반근 누나가 신선거에 별실을 예약해 두었대요.”
사환이 해맑게 말했다.
자신이 모시는 공자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그 시중을 살뜰히 들은 사환에게도 큰 공이 있는 셈이었다. 시녀가 상으로 사환에게 돈을 두둑이 챙겨주자, 사환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정사낭과 사환이 깜짝 놀라서 소리치려는데, 그 사람이 돌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공자님! 제발 저희 아씨 좀 도와주세요!”
소녀가 울부짖으며 땅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정사낭은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소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환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춘령? 무슨 일이야?”
사환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춘령?
어둠 속에서 땅에 납작 엎드린 소녀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정사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소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든 소녀의 얼굴은 벌써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춘령이구나.
“춘령, 무슨 일이냐? 어서 일어나서 얘기해 보거라.”
정사낭이 허공에 엉거주춤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나 춘령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정사낭을 향해 몇 걸음 기어갈 뿐이었다.
“사공자님, 저, 저는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사공자님,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화려한 장식등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경성의 화려한 봄밤에 서서히 막이 올랐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덕승루의 불빛,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치맛자락과 허리끈이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여인들의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와 교태 섞인 웃음소리가 이따금 덕승루 밖으로 새어 나왔다.
주 낭자의 규방은 덕승루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주 낭자가 창문을 닫자,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차단됐다.
구리거울 앞에 놓아둔 향에서 은은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방 안은 한층 더 조용하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하지만 거울 앞에서 단장하고 있던 주 낭자는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진한 분향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형(阿衡)!”
여인의 목소리가 주 낭자의 귓가에 전해지는 동시에, 누군가가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고개를 내밀고 헉 소리를 냈다.
“아직도 화장을 못다 한 게야?”
주 낭자가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는 눈앞에 앉은, 서른이 넘은 미모의 여인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며 어머니라고 불렀다.
“서둘러야지. 지금이 벌써 몇 시인데 눈썹도 안 그렸어? 이리 오렴, 어미가 직접 그려 주마.”
여인이 다급하게 눈썹 붓을 들어 올리고, 주 낭자의 얼굴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다. 하지만 주 낭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여인의 손길을 피했다.
“어머니, 오늘은 손님을 접대하고 싶지 않아요.”
웃음기가 서려 있던 여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형, 어미가 네게 말했지? 돼먹지 못한 계집들이 하던 짓을 배워서는 안 돼. 유명세가 조금 생겼다 싶을 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 말이다. 기녀는 어디까지나 기녀야. 기녀의 교만이 지나치면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안 돼.”
주 낭자는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이 다시 웃음을 쥐어 짜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 낭자를 설득했다.
“아형, 다른 때면 어미도 너를 억지로 접대시키진 않을 거야. 손님을 받든 안 받든, 연회를 가든 안 가든, 다 네 마음대로 해도 돼. 하지만 오늘 온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잖니. 그분은 딱 너 하나 보겠다고 오시는 건데, 넌 벌써 두 번이나 거절했어. 오늘은 정말로 더는 못 미뤄.”
“이미 몇 번을 왔으니까, 어쩌면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르죠.”
주 낭자가 대답했다.
“그래, 그분이 안 오신다면, 넌 오늘 손님을 받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미리 단장해야 하지 않겠니?”
여인이 웃으면서 주 낭자를 재차 다독이자, 주 낭자는 결국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썹 붓을 손에 쥐었다.
“역시 우리 아형은 사려가 깊다니까.”
여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보이며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여인이 남기고 간 진한 분향 때문에 주 낭자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는 눈썹 붓을 허공에 내던지고, 향을 한 움큼 쥐어 향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왜 하필 그런 사람을 마주쳤을까?
요 몇 년 동안 주 낭자에게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 그녀를 두렵게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그날이 결국 오고야 만 것이다. 교방사의 기녀가 어떻게 평생 깨끗한 몸으로 지낼 수 있으랴.
하지만 주 낭자는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주 낭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힘이 이제 절반 정도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매정하게도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정말 싫은걸.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왜 하필 그날 방을 잘못 들어갔을까? 딱 한 번 잘못 들어간 방 때문에, 영영 그 방에서 몸을 뺄 수 없게 될 줄이야.
사실 좋게 생각하면, 주 낭자가 그만큼 무한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한 번만 보아도 잊지 못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라는 뜻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얼굴이 죽도록 싫었다.
주 낭자가 구리거울을 쳐다보았다. 버들잎처럼 가느다란 눈썹에 고작 붓을 한 획 얹었을 뿐인데, 벌써 그녀의 매혹적인 눈매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재촉하긴 뭘 재촉해.”
주 낭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문 앞에 꿇어앉은 춘령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언니, 연회석 초대가 있어요.”
“오늘은 손님을 안 받을 거야.”
주 낭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씨 가문 사공자님의 초대예요.”
춘령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자 주 낭자가 멈칫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는 또 누구람?
“안 받아, 안 받는다고.”
주 낭자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대꾸했다.
“언니.”
춘령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기어가며 불안한 기색으로 주 낭자에게 재차 말했다.
“언니, 언니, 초대에 응하시는 게 어때요? 이따가 혹 그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주 낭자가 몸을 살짝 떨고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넋을 놓았다.
“아형, 아형.”
여인의 간드러진 콧소리가 들려오자, 주 낭자가 화들짝 놀랐다.
“언니, 언니.”
춘령이 더욱 놀란 모습으로 주 낭자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형, 고 관인께서 오셨어.”
문 앞에 서서 환한 미소로 말하던 여인은 아직 단장을 마치지 못한 주 낭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서둘러!”
주 낭자가 놀란 기색을 애써 숨기면서 눈썹 붓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 공교롭게도 제가 이미 다른 초대에 응해서요.”
여인이 멈칫하고는 곧바로 물었다.
“다른 사람의 초대? 그게 누군데?”
그, 무슨 공자라더라?
주 낭자가 춘령을 바라보자, 주 낭자의 의중을 파악한 춘령이 재빨리 대답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님이요.”
정사낭? 뭐 하는 놈이지?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 유명한 가문의 자제 중에 내가 모르는 사내는 없을 텐데. 정사낭이라는 이름은 꿈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
이 어미가 화괴 노릇을 했을 때, 너는 젖도 못 뗀 갓난쟁이였는데, 기어코 나랑 이런 장난질을 하겠다 이거지?
여인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거절하고 고 관인한테 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미 초대에 응했는데,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되죠.”
주 낭자가 뒤지지 않는 기세로 대꾸했다.
“악역은 이 어미가 대신해 줄게. 네가 식언이나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을 게야. 내가 그 정 공자한테 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잘 말해 주마.”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정 공자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지 내가 한번 봐야겠구나.”
여인이 중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덕승루의 별실 안. 젊은 사내 몇 명이 정좌로 앉아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구경했다. 사내들의 얼굴에서는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야, 문유. 자네가 우리를 여기로 초대하다니, 정말 대단한데?”
사내 하나가 정사낭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감탄했다. 정사낭이 어색한 미소를 보이면서 대답했다.
“아니 뭐, 앉아서 이야기도 좀 하고.”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칠현금 연주도 듣자고.”
사내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더욱 기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칠현금을 연주하는 기녀도 하나 부르겠다는 건가?”
덕승루를 방문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덕승루의 기녀들이 경성에서 으뜸이라는 것은 사내들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덕승루에서는 아무 기녀나 데려와도 그 가무와 칠현금 연주가 사람을 매혹할 정도로 가히 일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기녀를 초대하는 비용 또한 그만큼 비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정사낭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는 불안한 기색으로 문가를 쳐다보았다. 긴 기다림 끝에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란 정사낭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느 분이 정 공자님이실까요?”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방 안으로 들어선 미모의 여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정사낭이 초대한 기녀인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해도, 역시 덕승루의 기녀답게 아름답네.
방 안의 사내들이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정 공자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젊은 데다, 지방 말씨를 쓰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여인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를 어쩐다. 공자님께 죄송해서 어쩌면 좋죠? 공자님이 고르신 주 낭자는 오늘 선약이 있어 여기에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화괴 주 낭자를 말하는 건가?
“이 녀석도 참, 아무나 고르면 될 것이지, 오자마자 무턱대고 귀한 화괴를 부르면 어떡해? 네가 무슨 수로 주 낭자를 초대한다고.”
한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정사낭에게 속삭였다.
정사낭은 그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주 낭자를 초대했을 때는, 선약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주 낭자는 이미 내 초대에 응했습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경악한 얼굴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죠. 주 낭자는 다른 약속에 가야 해서, 오늘은 도저히 정 공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음기를 거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런 도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먼저 초대를 했고, 주 낭자도 제 초대에 응했다니까요?”
정사낭이 허리를 펴고 목청을 높였다.
얼씨구? 물러설 생각이 없다 이거야?
별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정사낭을 따라왔던 사내들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 공자님,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요. 주 낭자가 공자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죠?”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더니 같잖다는 눈빛으로 정사낭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설마…….
사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주 낭자와 일찍이 알고 있던 사이인가?
“주 낭자가 그 손님을 받고 싶지 않아서, 공자님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거지요?”
여인이 계속해서 물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그저 덕승루에 술을 마시러 온 것뿐인데, 왜 내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겁니까? 어서 주 낭자를 이 방으로 데려오면 그만인 것을.”
정사낭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여인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제가 여기서 공자님 같은 분을 몇 명이나 봤을까요? 여인의 미소 한 번을 얻기 위해서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연극을 펼치는 걸 셀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잠깐 사내의 피가 끓을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답니다. 피가 끓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떨 땐 그 잠깐의 충동이, 평생 감당하지 못할 후환을 초래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덕승루에 처음 온 사내들은 여기까지의 대화를 듣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정사낭 저 녀석이 기루에서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화괴가 다른 사람보다 정사낭에게 더욱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농담을 하는 거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당최 못 알아듣겠으니, 어서 주 낭자나 빨리 내 앞으로 데려오란 말입니다.”
정사낭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강경하게 대답했다.
저 시골 촌뜨기 놈이!
여인은 화괴 출신인지라 젊은 시절부터 항상 사내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왔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그 미모가 차츰 퇴색되자, 교방사로 들어와 기녀들의 교습을 담당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내에게 무시당해 본 일이 없던 여인이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새파랗게 젊은 시골 촌뜨기 하나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입을 아프게 하자, 여인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공자님이 정 그렇게 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겠다면,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여인이 돌연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주 낭자를 찾아오지 마세요!”
그러자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정사낭의 사환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감히 우리 관인께 말버릇이 그게 뭐요!”
관인?
여인이 정사낭을 쳐다보자 사환이 우쭐대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우리 도련님이 이제는 나랏일을 하는 관인이다! 너같이 보잘것없는 늙은 교방사 기생 어미 따위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여인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관인, 저희 덕승루에는 관인이 차고 넘쳐서, 굳이 관직을 들먹이면서까지 저를 겁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정말로 겁을 주려거든,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부터 잘 돌아보셔야지요.”
“어이, 우리 관인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사환이 머쓱해하며 화를 버럭 냈다.
같은 시간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 미인의 품에 기대어 있던 뚱뚱한 사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내가 눈을 뜨자, 별실 안의 연주 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상석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눠 앉아 장난을 치며 술을 마시던 사내와 기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 별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별실 안의 모든 이목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어린 몸종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주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 관인께 아뢰옵니다. 저, 저희 아씨께서는 이미 정 관인의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춘령이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정 관인?”
사내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어느 정 관인 말이냐? 얼마나 대단한 사내길래 주 낭자의 선택을 받은 것이야? 나는 벌써 서너 번이나 주 낭자를 초대했는데, 어쩜 한 번을 오지도 않고?”
사내가 자신 앞에 놓인 술에 절인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손끝으로 과일을 으스러트렸다. 사내의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으깨진 과일의 즙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느 정 관인이냐고?
이번 과거에서 진사 급제한 강주 정씨, 정문유 말이다. 물론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고, 어떤 관직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강주 정씨라는 사실이지. 그의 누이가 바로 강주 낭자라는 호칭을 가진 정 낭자고. 도교 이 진인의 수제자이자, 장강주와 같은 선상에서 언급되는, 귀판관마저 사지로 몰아 지방으로 좌천시킨 그 강주 정씨 여인 말이야.
춘령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지.
혹시 모르지. 정사낭의 정체를 그쪽한테 알려 줘도, 정사낭 쪽에서 그쪽 기세에 눌려서 도망칠 수도 있잖아. 그럼 연극은 시작되지도 않을 거고, 나 또한 헛수고만 하게 될 뿐이야.
“그러게, 정 관인이라는 자가 누구길래 그렇게 대단해?”
별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아냥대면서 소리쳤다.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춘령의 몸이 떨리는 듯했다.
“소, 소인은 잘 몰라요.”
춘령이 말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무튼, 아씨께서는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대단한 분’이라는 칭찬은, 여인이 사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찬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내 앞에서,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여인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모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별실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단해?”
고 관인이 웃음을 멈추고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내 명첩을 들고 가서 그 대단하신 정 공자님께 전하거라. 오늘 밤에, 내가 그의 주 낭자를 잠시 빌려 가겠노라고.”
“제가 이부(吏部) 관리도 아니고, 공자님의 장모도 아닌데, 공자님의 관직이 뭐든 제 알 바 아니잖아요.”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한 사환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오른 교방사 기생 어미가 눈썹을 높이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희 덕승루가 매일 접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댁 같은 관인 나리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협박이 두려울 리 있겠어요?”
여인이 정사낭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지막 한마디를 날렸다.
“우리 덕승루는 댁 같은 관인을 접대할 수 없으니, 그만 나가고 다른 곳을 찾아보시지요!”
한낱 기생 어미한테 내쫓기다니!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낭, 사낭, 어서 가자. 역시 이런 곳은 오지 말았어야 해.”
사내들의 말을 들은 여인이 사내들의 차림새를 대충 훑어보았다. 가난하고 궁상맞아 보이는 사내들의 모습에, 그녀는 턱을 더욱 높이 치켜들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게요. 저희 덕승루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죠. 아, 미리 물어보질 못했는데, 당신, 우리 아형을 초대할 돈은 있어요?”
여인이 냉소를 지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진 정사낭이 이를 악물며 좌불안석했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문 앞에 선 여인은 가히 만개한 모란, 또는 흐드러지게 핀 작약에 비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한 색의 비단 치마를 입고,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장신구를 한 주 낭자의 모습은 인간계에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아형이 정 공자님의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오늘은 제게 선약이 있는지라 다른 날에 공자님을 즐겁게 해 드릴게요.”
주 낭자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더욱 다급해진 기색의 정사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례했다.
“아, 그, 그게 아니라…….”
정사낭이 말을 더듬는 사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문 앞에 멈춰 섰다.
별실 안의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자, 거만한 표정의 가노 한 명과 그의 뒤로 서 있는 어린 몸종이 보였다. 그 뒤에 선 춘령은 몹시 겁먹은 얼굴이었다.
여인은 가노를 보자마자, 냉소와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던 표정을 싹 바꾸고 아첨의 미소를 보이면서 그를 맞이했다. 별실 안의 사람들을 쓱 훑어보던 가노가 한쪽에 서 있는 주 낭자를 발견했다. 일순간 그의 거만한 표정에 분노가 더해졌다.
“언니.”
춘령이 주 낭자 옆으로 달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 낭자, 역시 여기에 있었군요.”
가노가 콧방귀를 뀌며 주 낭자에게 말했다. 주 낭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어느 분이 정 공자십니까?”
가노가 눈앞에 있던 주 낭자를 무시하고 턱을 치켜든 채 물었다.
“나요.”
정사낭이 말했다.
“정 공자님, 저희 관인께서 오늘 주 낭자를 잠깐 빌리시겠다고 하시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가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과 말할 거 없어요. 나 주형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주 낭자가 곧바로 대꾸했다.
아니, 주 낭자?
정사낭이 저도 모르게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저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뭐 있어. 아형, 어서 가 보렴. 앞으로 이런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은 좀 걸러서 만나고.”
여인이 웃으면서 한마디 보탰다.
“잠깐.”
정사낭이 소리쳤다.
“주 낭자는 내가…….”
정사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걸어온 가노가 손에 쥔 명첩을 정사낭에게 건넸다.
“아이고, 제가 깜빡했습니다그려. 이건 저희 관인의 명첩입니다”
정사낭의 방향으로 펼쳐진 명첩에 금박으로 새겨진 한 글자가 사내들의 눈을 찔렀다.
고(高)?
정사낭과 사내들이 멈칫했다.
“어느 고씨지?”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아는 그 고씨는 아니겠지? 태후와 귀비의 친정인,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그 고씨 가문?
“공자님들이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상주(相州) 고씨 가문입니다.”
사내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가노가 거들먹거리면서 대답했다.
역시! 세상에나!
정사낭과 사내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춘령 말로는 몹시 대단한 관인이 주 낭자를 겁박하고 있는데, 주 낭자는 곧 죽어도 그 관인을 접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어.
주 낭자는 유 교리가 친부를 모함하는 바람에 멸문의 화를 입고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교방사에 보내졌다고 했지. 본디 경성 관리 집안의 귀한 규수였지만, 그 일로 기녀를 업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그런데 몇 년 전, 친부의 억울함을 풀게 되어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뺄 기회를 얻었다고 했어. 하지만 그녀는 탈적을 한다 해도 이미 자신은 교방사에 발을 들인 몸이라,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다면서 계속 기녀로 살아가기를 택했고.
그러고는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자신의 순결함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만을 바랐는데, 춘령이 말한 그 관인 때문에 그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지.
“정말로 아씨께서 순결을 잃으신다면, 필시 죽음을 택하실 거예요.”
춘령이 울면서 말했다.
“그 관인이 정말 엄청난 사람인가 봐요. 기생 어미도 그 관인한테는 찍소리도 못한다니까요. 그 관인이 꼭 아씨와 함께 밤을 보내야겠다며 몇 번이고 덕승루를 찾아왔는데, 아씨께서 온갖 변명을 생각해내면서 그 자리를 피하셨어요. 그런데 몇 번 거절을 당한 게 화가 났는지, 그 관인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씨를 데려오라고 했죠. 아씨도 마음을 굳게 먹고 비수 한 개를 내의에 숨기셨어요. 정말 그 관인을 만나게 된다면, 자결하실지도 몰라요.
저는 어렸을 때 인신매매로 교방사에 팔려온 몸종이에요. 그런데 다행히도 아씨를 만나, 아씨께서 친동생처럼 챙겨 주신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했어요. 차라리, 고마운 아씨를 대신해서 제가 죽을 수만 있다면…….
공자님, 저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미루고,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피할 수 있게 하는 것 외에는 아씨를 도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공자님, 제발 이 춘령과 아씨를 도와주세요.”
정사낭의 귓가에 춘령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눈앞에 펼쳐진 명첩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춘령이 엄청난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이 정도로 엄청난 사람일 줄은 몰랐네. 고씨 가문이라…….
가노가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덧붙였다.
“주 낭자, 이토록 형편없는 안목을 가졌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주 낭자가 냉소를 보이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난 저 공자님을 몰라요. 난 기껏해야 교방사의 기녀일 뿐이고, 저분이 날 초대했으니, 그 초대에 응했을 뿐이지요. 나 주형의 눈에는 다 똑같은 분들입니다. 나를 위해 돈을 낼 수 있다면 다 똑같은 손님들이지요. 값을 더 많이 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낼 뿐, 어찌 나 같은 기녀가 손님들의 귀천을 따지겠습니까.”
주 낭자의 반응에 정사낭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편 춘령은 속으로 미칠 듯이 기뻤다.
주 낭자가 저런 말을 한 이유는, 정사낭을 깔봐서가 아니라 그를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도 정사낭이 고 관인의 질투를 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정사낭 역시 자신이 이용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소매를 홱 털며 자리를 떠야 정상이지만 절개 곧은 주 낭자가 이렇게까지 나서서 자신을 보호하니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주 낭자가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면 정사낭 또한 염증을 느껴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인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차가운 말을 뱉게 되면, 사내의 마음은 도리어 더욱 뜨거워지기 마련이었다.
밀면 안 가고, 때려야 간다는 옛말이 있었다. 세상에는 꼭 그렇게 제 복을 차며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이번에는 내가 정말 운이 따르나 보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다 나를 돕고 있어.
나는 입도 벙긋 안 하고 상황만 만들었을 뿐인데, 연극이 이렇게나 순조롭게 진행되다니. 심지어 내가 생각했던 상황보다 더욱 흥미진진해졌잖아?
다들 이렇게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정사낭뿐 아니라 그의 동창들도 크게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아휴, 오늘 밤은 왜 이렇게 기복이 심해?
소문으로만 듣던 덕승루에 와서, 기녀가 연주하는 칠현금 소리를 들으며 동창들과 얼큰하게 술이나 마실 생각에 좋아했더니. 그 기녀가 주 낭자라는 말에 한 번 놀라고, 주 낭자가 정사낭과 구면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지.
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사낭이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하는 상황이 됐어. 그런데 그 상대가, 다름 아닌 상주 고씨 가문의 자제라니! 무려 고씨 가문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경성에서 고씨 가문과 대적할 생각을 하겠어?
아, 조당에는 고씨 가문과 대립할 만한 자들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거긴 나랏일을 논하는 조당이잖아. 조당을 주름잡는 진 상공이라 해도, 그리고 그의 간덩이가 열 개라고 해도, 기루에서 고씨 가문과 화괴 다툼을 벌일 생각은 절대 못 할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고씨 가문과 대립하는 건 차치하고,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하는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아휴,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네. 정사낭 저 자식이 물귀신처럼 일부러 우리를 데려온 건가?
하지만 정사낭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놈도 이제 막 상대를 알게 된 것 같단 말이지. 과거에 급제해서 흥이 난 김에 덕승루에서 가장 좋은 기녀를 불러 우리끼리 회포를 풀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 기녀를 선점한 사람이 고 관인이었던 거로군. 저놈도 참, 재수가 없네.
“사낭, 그냥 가자.”
사내들이 정사낭을 조용히 다독이면서 그를 슬슬 밀었다.
지금 가면 단순한 오해로 끝나는 거야. 어쩌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은,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어. 고씨 가문 같은 으리으리한 집안이 우리 같이 새로 들어온 햇병아리 진사들을 상대할 리도 없고. 혹여 마주치게 되더라도, 우리가 알아서 살살 기고 피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기어코 정사낭이 이들과 맞선다면, 이제 겨우 급제한 승진길이 영영 끊기고 말 거야. 정사낭 하나 해치우는 건, 고씨 가문에서는 손가락 하나 튕기는 정도의 쉬운 일일 테니까.
별실 안의 사내들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본 가노가 거만한 미소를 짓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배울 게 없어서 남들 기녀 다툼하는 거만 배웠나.”
춘령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춘령은 정사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돌려서 이미 방을 나선 주 낭자의 뒤를 쫓아갔다.
“언니.”
춘령이 울먹이면서 주 낭자를 불렀지만, 주 낭자는 눈썹을 치켜뜨고 조용히 호통쳤다.
“울긴 왜 울어? 네 본분을 잊은 거야?”
춘령이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닦고 울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애써 눈물을 참는 서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뒤돌아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처량하기 짝이 없는 춘령의 표정은 너무 속이 상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서 말해, 어서 말하라고! 저런 미인이 널 위해서 이렇게 의리를 지키는데, 과거에 급제한 진사라는 놈이 권력에 굴복하고 의리를 무시하면 되겠어?
“잠깐!”
가노가 낄낄거리며 별실 문턱을 넘어서던 찰나, 정사낭이 소리쳤다.
“저희 관인께서는 문객을 받지 않습니다. 죄송해서 정 사과를 드리고 싶다면, 바깥에 나가서 큰절을 세 번 올리십시오.”
가노가 고개를 돌리기도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이런 일이 워낙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정사낭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주 낭자와 선약을 한 자는 나요!”
뭐라고?
이미 방을 나갔던 사람들이 일제히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사낭을 돌아보았다. 정사낭의 옆에 서 있던 사내들도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정사낭이 가슴을 쫙 펴고 외쳤다.
“주 낭자는 내가 먼저 초대했고, 주 낭자 또한 내 초대에 응했소. 기녀라면, 말에 신용이 없어도 된단 말이오?”
정사낭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 기루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뭐든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오?”
정사낭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오늘 내가 먼저 주 낭자를 초대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오. 그러니, 내가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어찌할 셈이오?”
춘령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통곡했다. 기쁨에 겨워 눈물까지 났다.
그렇지, 잘한다! 정사낭, 내가 너한테 쏟은 몇 년이 아깝지가 않아!
기녀라면, 말에 신용이 없어도 된단 말이오? 그리고 이 기루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오?
정사낭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놈이 바보일 줄은 몰랐네.”
기생 어미가 중얼거리고는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삿대질했다.
“저놈을 당장 내쫓아라!”
곁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던 덕승루의 건장한 점원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뭐 하는 거야!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사환이 두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문을 막아서며 외쳤다.
“우리 관인이 누구인지는 알고들 이래?”
“모른다, 어쩔래! 네놈의 잘난 관인이 건드린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기생 어미가 사환의 앞을 가로막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환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기색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몰라!”
“그럼 그분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알고?”
기생 어미가 이를 악물고 냉소를 지었다. 사환도 똑같이 냉소를 지으면서 반문했다.
“우리 관인의 누이가 누군지는 알아?”
사환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사환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기생 어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사환에게 재차 물었다.
“우리 관인의 누이, 우리 집안 큰 아씨가 누군지 아느냔 말이다!”
사환이 더욱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정말 희한하네. 출신 가문이나 부친의 관직을 놓고 견주는 건 들어 봤다만, 제 누이를 들먹이며 견주는 건 또 처음 보네.
“쯧, 바보 맞네. 이 바보들이 감히 우리 덕승루에 와서 난리를 피워?”
기생 어미가 욕을 하면서 사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사환이 악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왜 사람을 때리고 그러시오!”
정사낭이 사환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뭐? 왜 사람을 때리냐고?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당연히 맞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지!”
기생 어미가 정사낭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정사낭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했지만, 여인의 날카롭고 긴 손톱이 그의 턱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그의 턱에서 피가 몇 줄기 흘러내렸다.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날이다!”
사환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기생 어미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가무를 익힌 기생 어미는 가벼운 몸짓으로 사환을 피했다.
“정말 미친 게로구나!”
기생 어미가 소리쳤다. 고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확보한 그녀는 고십사 공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발을 세게 굴렀다.
“저놈들을 개 패듯이 때려서 내쫓아 버려라! 죽고 싶더라도 누울 자리를 봐 가며 난리를 피워야지!”
내쫓으라는 말과 때려서 내쫓으라는 말의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여인의 외침에 무언가를 움켜쥐려던 점원들의 손 모양이 주먹을 쥔 모양으로 변했다. 곧이어 점원들은 아직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 정사낭을 향해 거침없이 주먹을 날렸다.
정사낭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지만, 점원들은 더욱 악랄하게 정사낭을 폭행했다.
별실 안이 아수라장이 되자, 정사낭을 따라왔던 사내들도 혼란스러워졌다. 그들 중 두 사내는 싸움을 뜯어말렸고, 다른 두 사내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밖으로 도망쳤다.
우당탕거리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버선발로 뛰쳐나가는 사내들까지 보이니, 덕승루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져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몇몇 손님들은 아예 위층으로 올라와 싸움 구경을 했고, 좌우에 있는 별실에서 유흥을 즐기던 지체 높은 이들은 민망하여 차마 직접 나오지는 못하고 사환들을 내보내기도 했다.
기녀를 두고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일은 덕승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오늘 별실 앞에 서 있는 기녀는 경성 제일 화괴인 주 낭자였다. 주 낭자는 부른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평범한 기녀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근래에 고십사 관인이 주 낭자를 점찍었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그 누구도 주 낭자를 부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였다.
아무리 배짱 있는 사내라고 해도, 누가 감히 목숨을 걸고 호랑이의 먹이를 탐내겠는가. 그런데, 주 낭자를 부른 사람이 있다고?
역시나 예상대로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네.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한담.
“그만 때려요! 때리지 말라고요!”
깜짝 놀란 주 낭자가 소리쳤지만, 주 낭자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혼란을 틈타 춘령이 한쪽에 고꾸라져있던 사환에게 달려가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사환이 바닥에 깔린 채 점원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정사낭을 발견했다. 사환은 울며불며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춘령이 온 힘을 다해서 사환을 끌어안고 붙잡았다.
“바보예요? 빨리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죠! 혼자 무슨 힘이 있다고!”
춘령의 말을 들은 사환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가요, 빨리! 안 그러면 당신네 공자님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춘령이 사환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환이 층계를 구르다시피 뛰어 내려가자, 춘령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숨이 넘어갈 뻔했다.
그래, 빨리 가, 빨리!
빨리 잘난 너희 신선 낭자를 불러오라고! 빨리 사람을 불러와서 판을 더 크게 벌여!
춘령이 허둥지둥 뛰어가는 사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무나 붙잡고 사정하는 주 낭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짜냈다.
“때리지 마세요. 그만들 하세요.”
그러더니 여기저기 부딪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사낭에게로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공자님, 사공자님! 어서 가세요! 어서요! 빨리 고 관인께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요! 그렇지 않으면 고 관인께서 공자님의 손을 부러트린다고 했단 말이에요!”
손을 부러트려? 이제야 진사가 되어 앞길이 창창한 젊은 청년인데, 손이 없어지면 폐인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고십사 공자가 얼마나 괴팍하고 폭력적인지는, 그를 접대했던 기녀들의 말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런데 오늘처럼 체면을 구긴 날엔,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어쩌다가?
아수라장이 된 별실 안을 쳐다보던 주 낭자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정사낭이 있는 별실에 비하면, 고 관인의 별실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기녀라면, 말에 신용이 없어도 된단 말이오?
그리고 이 기루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오?
시종이 정사낭이 했던 말을 고 관인에게 그대로 알리자, 호화로운 별실 안에 적막이 맴돌았다. 물론, 정사낭의 말에 압도되어서 조용해진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어디서 굴러온 바보 새끼야?”
고 관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잠시 뒤, 그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술잔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퉁퉁한 손가락으로 옆에서 자신을 접대하던 기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의리를 따질 사람이 없어서, 기녀와 의리를 따져? 기녀에게는 정이 없고, 광대에게는 의리가 없다는 말도 모르나?”
기녀가 눈가에 웃음이 가득 띠고 아양을 떨며 고 관인의 팔을 끌어안았다.
“십사 관인, 관인을 향한 소인의 마음은 진심인걸요.”
고 관인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기녀의 볼록한 볼살을 꼬집으며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
“기루에서 도리와 원칙을 찾는 사람이 있다니. 여기가 무슨 학당이라더냐? 원리원칙을 따질 거면 여기 올 사람이 어디 있어? 지위도 높고 돈도 많으니, 제멋대로 해 보겠다고 여길 오는 거 아니겠어? 한데 돈도 없는 비렁뱅이가 무슨 미인을 얻겠다고? 아까는 화가 좀 났는데, 그놈이 바보였을 줄은 미처 몰랐군. 바보 때문에 화를 낼 필요는 없지.”
고 관인의 말에 별실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 새로 진사가 된 자라고 들었습니다만.”
누군가가 말했다.
진사?
고 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사리 분별도 못 하는 놈이 벼슬을 했다가는, 훗날 조정에 큰 해를 입힐 게 자명하지!”
고 관인이 정색하며 침을 뱉었다.
“가서 그놈에게 썩 꺼지라고 전하거라. 그래도 고집을 부릴 거면, 나중에 이 몸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며 투덜대지도 말라고 해. 어쩌다가 덕승루가 이렇게 개나 소나 와서 난리를 피워도 되는 곳이 됐담?”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기생 어미가 밧줄로 묶어 내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종이 서둘러 말했다.
“기생 어미도 늙긴 늙었네. 정신머리가 예전 같지 않아. 이런 사소한 일에 무슨…….”
고 관인이 웃으면서 말하던 찰나였다. 문밖에서 쿵쾅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서 벌컥 문이 열렸다.
여인 하나가 바람처럼 별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별실 안이 일순 조용해지면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꽃보다 아름다운 미모에 눈부신 장신구를 한 여인이었지만,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가슴께까지 오는 치마로 인해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헐떡이는 숨과 함께 위아래로 흔들렸다.
저런 모습도 색다른 재미가 있네.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어이구, 우리 주 낭자 왔는가? 나비처럼 날아온 걸음걸이치고는 조금 늦었구려.”
고 관인의 태도는 느긋했다. 주 낭자가 흥분한 표정으로 고 관인에게 말했다.
“고 관인, 제가 여기 같이 있어 드리면 되잖아요. 어서 정 공자님을 놓아주세요.”
고 관인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뭐라?”
고 관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서 정 공자님을 풀어 달라고요! 제가 여기 같이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주 낭자가 다급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소리쳤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다치게 했다는 거지?”
고 관인이 음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주 낭자, 아무리 마음에 둔 사내가 걱정된다 해도, 아무나 붙잡고 그런 청을 하는 건 좀 아니잖소.”
고 관인이 마음에 둔 사내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고 관인의 비아냥거림을 눈치챈 주 낭자는 더욱 긴장하여 무릎을 꿇었다.
“다 이 주형의 잘못입니다. 멋대로 손님을 안 받겠다며 자리를 피해서는 안 됐어요. 이건 정 공자님과 무관한 일입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이 일은 그분과 무관하다고요.”
고 관인의 미소가 더욱 냉랭해졌다. 그의 품에 안겨있던 기녀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자리를 피하고, 별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몇 년이나 기녀로 지내는 동안 늘 노련한 솜씨로 사내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주 낭자는 이성을 잃은 나머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여인을 흠모하지만 몇 번이나 퇴짜를 맞은 사내 앞에서, 그녀가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다른 사내를 감싸는 일을 견딜 수 있는 사내는 몇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몇 번이고 퇴짜를 맞았던 사내는, 하필이면 살면서 거절이라는 것을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고 관인은 술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음미했다.
“여봐라.”
문밖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서 기생 어미에게 전하거라.”
고 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 낭자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앞에서 다른 사내 때문에 희로애락을 보이는 여인의 고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고 관인은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가서 기생 어미에게 전하거라. 더는 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리고 너희가 가서 그놈의 손 하나를 부러트려 버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주 낭자의 숨이 턱 막혔다.
“고 관인, 고 관인?”
주 낭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 참.”
고 관인이 손을 들어서 시종을 불러 세웠다. 그가 시종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주 낭자가 사정하는데, 내가 그 청을 무시할 수는 없지. 어찌 됐든 미인의 체면은 지켜 줘야 하니까.”
주 낭자가 긴장한 기색으로 고 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지. 곤란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고 관인의 말에 주 낭자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뭐라고?
“그래서 무슨 짓이라도 좀 해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나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잖아?”
고 관인이 느긋하게 이어서 말하고는 시종에게 다시 손짓했다.
“그러니까 괜히 가서 더 때리지는 말고, 그 정씨 놈의 한쪽 손만 박살 내버려라. 주 낭자의 체면이 있으니 손만 박살 내고 그대로 바깥에 내던지면 된다.”
“고 관인!”
드디어 상황 파악을 한 주 낭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녀는 시종의 뒤를 쫓아가려고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다른 시종 두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고 관인, 안 됩니다! 그러지 마세요!”
두 시종을 제외한 다른 시종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람 하나를 죽일 듯 살벌한 기세로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본 주 낭자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시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안 돼요!”
시종들이 모두 나가자마자, 주 낭자의 눈앞에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주 낭자의 귓가에는 점점 더 멀어지는 시종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안 돼, 안 된다고!
포근하고 평온한 경성의 봄밤은 이리저리 치이면서 앞으로 내달리는 말 한 필 때문에 소란스러워졌다. 사환은 그의 뒤로 들려오는 욕지거리를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며 말고삐를 꽉 쥐고 계속해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정씨 저택으로 가야 하나?
빨리 가요, 빨리! 안 그러면 당신네 공자님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어린 몸종이 외치는 소리가 사환의 귓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사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정씨 저택으로 갈까? 잠깐, 공자님께서 집을 나서기 직전에 정 이부인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그쪽이 이 상황에 우리를 도와줄까? 아니야, 아니야. 정씨 저택으로 가면 안 돼.
큰 아씨께 가야 해. 큰 아씨께 도움을 청해야 해! 큰 아씨는 지금 주씨 저택에 묵고 계시니까, 그리로 가야겠다. 내가 길을 기억할 때까지, 반근 누나가 몇 번이고 길을 알려 주고 같이 가 준 덕분에 주씨 저택이 어디 있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때는 반근 누나가 왜 그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나 싶었는데, 누나한테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야!
사환은 채찍을 세차게 휘두르며 이제야 막 장사를 시작한 야시장 점포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