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권 - 110화 (110/160)

교랑의경 19권

-상경-

2월의 덕승루는 봄처럼 따스했다. 아름답게 장식한 구름다리를 지나가는 옷자락 소리가 사락사락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는 금세 멈추었다.

“언니?”

걸음을 멈춘 주 낭자를 보고 춘령이 영문을 모르겠는 듯 불렀다.

“오늘은…….”

잠시 머뭇거리던 주 낭자가 돌아섰다.

“손님 안 받을래.”

춘령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언니, 진십삼 공자도 와 계시잖아요.”

주 낭자는 벌써 발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이레 후면 예부시(禮部試: 향시 급제자들이 응시하는 예부성 주관 과거 시험)잖아.”

주 낭자가 고개를 돌려 구름다리 저편의 별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때 어떻게 유희를 즐길 수 있겠어?”

그거야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순간 울화가 치민 춘령이 속으로 욕했다.

속으로는 가고 싶으면서. 그러니 기생어미한테도 누가 온 건지 물어봤겠지. 화장도 마치기 전에 서둘러 옷부터 갈아입은 게 누군데!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연극을 해?

“언니.”

춘령이 앞으로 다가가 초롱초롱한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진 공자가 특별히 언니를 보러 온 거라면요?”

“허튼소리!”

주 낭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춘령은 겁을 먹은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 춘령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주 낭자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분의 명성을 더럽힐 거야.”

춘령이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언니는 진 공자한테 정말 잘하네요.”

주 낭자가 웃음을 지었다.

“환락가에서 일하는 처지니 모든 게 진실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손님을 대할 땐 자기 자신에게 진심이어야 해. 연극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해야 손님의 돈을 받을 수 있어.”

춘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주 낭자를 바라보았다. 주 낭자를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같잖다는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연극을, 너만 하는 줄 알아? 그리고 네 연극은 너무 형편없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춘령이 순간 눈을 번득이고, 휙 뒤돌아 구름다리 이쪽으로 걸어왔다.

문을 열자, 별실 내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훅 쏟아져 나왔다.

“어떤 문제가 나오든 시정(時政)은 빠지지 않을…….”

떠들던 목소리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뚝 그쳤다. 별실 안에 있던 서생들과 공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춘령이 겁먹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주 낭자께서 오늘은 손님을 안 받으시겠대요.”

그 말에 별실에 있던 이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모처럼 빠져나와 칠현금 연주나 잠깐 들을까 했더니.”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급제하시길 기원한다며, 급제하고 나면 공자님들께 가무를 보여 드리겠대요.”

춘령이 공손하게 말을 전하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주 낭자는 엄한 스승님 같다니까.”

“역시 주 낭자야. 성리학의 대도를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네.”

저만 잘난 줄 아는 이 머저리들!

춘령은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웃고 떠드는 공자들 사이에 진 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춘령은 멈칫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창가에 선 진십삼은 술잔을 손에 쥐고 창에 기대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저기 좀 봐.”

진십삼이 불쑥 입을 열며 손을 뻗어 밖을 가리켰다. 웃고 떠들던 이들이 다가와 거리를 함께 내다보았다. 거리를 지나는 금군의 무리 뒤로 황실 의장이 달린 마차가 지나갔다.

“평왕이네!”

“진안 군왕께서 초무사로 책봉되어 오늘 무평으로 떠나시잖아. 폐하께서 평왕에게 대신 배웅하라 명하셨대.”

누군가의 말에 진십삼이 설명해 주었다.

“맞아. 진안 군왕께서 무평으로 가겠다고 자청하셨대.”

“뜻밖이네. 송자동자한테 그런 담력이 있을 줄이야.”

뜻밖이라고?

진십삼이 냉소를 지었다.

송자동자가 단지 자식을 낳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황궁에서 총애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아남았을 것 같아?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만백성을 위무하고자 군왕께서 모범을 보이신 거지.”

그 말에 진십삼은 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폐하와 만백성을 위해서라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그냥 저 자신을 위해서지. 황제가 갑자기 병이 난 일로 적잖이 놀랐나 보네. 황제의 은총이 오래 가지 않을 듯하니 공을 세울 길을 찾으려는 게야.

종친의 몸으로 공까지 세우려 하다니, 바라는 게 많네.

진십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는 의장 행렬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고 단숨에 비웠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랑 가까이 지내더라고. 군왕의 마차가 정 낭자 저택 앞에 있는 걸 여러 번 봤대.”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해 준 것도 군왕을 위해서겠지.”

짚이는 게 있긴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십삼이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졌다.

“난 먼저 가 보겠네.”

다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진십삼은 이미 문을 나선 후였다.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춘령은 황급히 비켜서다가 실수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진십삼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가 버렸고, 사환은 두봉을 끌어안으며 급히 뒤쫓아 갔다.

“갑자기 왜 저래?”

“이번에 꼭 붙어야 하니 공부하러 가는 게지.”

별실에 있던 이들은 웃으며 떠들어댔고, 문밖에 꿇어앉아 있던 춘령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문을 잡고 일어섰다.

왜냐고? 너희가 그 여인 얘기를 꺼내서잖아! 그 여인!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 여인은 왜 죽지도 않는 거야? 왜 아무도 그 여인을 어쩌지 못하는 거냐고! 왜 점점 그 여인 뜻대로 다 되는 거 같지? 이젠 황족까지 연이 닿다니!

황족과 연이 닿았는데 진 공자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춘령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화괴라는 주 낭자의 명성도 결국은 허울뿐이네. 아무리 가식을 떨어도 황족이나 귀인과는 연결이 안 되잖아.

“어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춘령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어섰다. 춘령이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을 보니 점원이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귀공자 하나를 안내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건 누구예요?”

춘령이 물었다.

“저분은 말이지.”

지나가던 점원이 춘령의 말에 아래쪽을 힐끔 쳐다보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고씨 가문의 십사공자야.”

“고씨 가문이요? 그 황실 외척 고씨 가문?”

점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마마와 귀비마마, 평왕 전하가 있는 고씨 가문 말이다. 고 전시께서 경성을 떠나시니 고씨 가문 도련님들도 덕승루를 마음껏 드나드네.”

점원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고씨 가문이란 말이지…….

춘령은 다시금 아래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2월의 강주엔 흐린 날씨에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두봉만 걸친 정육랑은 우산을 들고 급히 뒤따라오는 몸종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 대청 문 앞에 당도했을 무렵, 안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망할 놈이!”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노야, 이제 막 약을 드셨잖아요. 의원이 이번 늦겨울에 또 병이 도지면 큰일 난댔어요.”

정 대부인이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힐끔 보며 물었다.

“사낭이 뭐라는데요?”

“둘째 내외가 교랑을 못살게 군다는군.”

정 대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이 교랑을 괴롭힌다고요? 제정신이래요? 그 불운덩어리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모른대요?”

정 대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정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거 무슨 헛소리요!”

“내 말이 틀려요?”

따지려 들던 정 대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엄연한 사실인데.”

정 대노야는 정 대부인을 상대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다시 서찰을 들었다. 정 대노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문밖에 있던 정육랑이 안으로 들어오자, 또다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 대노야가 서찰을 도로 내던지는 소리였다.

“짐 챙기시오. 내 경성으로 가야겠소!”

경성으로?

정 대부인은 황당한 듯 고개를 돌려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고, 정육랑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들어왔다.

* * *

2월 말, 먹구름이 드리운 경성 하늘에서 내린 것은 눈송이가 아니라 빗방울이었다. 비가 내려 쌀쌀한데도 공기 중에선 봄기운이 느껴졌다.

내일은 예부시, 그러니까 성시(省試)의 급제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정사낭은 벌써 반나절째 서재에 앉아 있었다. 시험은 보름 전에 끝났지만, 곧이어 전시(殿試: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사람이 군주를 알현하며 보는 마지막 시험)를 봐야 하니 유희를 즐길 순 없었다. 아직은 차분히 공부에 매진할 때였다. 그럴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성시에서 급제하지 못한다면…….

소리 없이 내리는 비도 정사낭의 귀에는 무척이나 시끄럽게 들렸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이던 정사낭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밖에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순간 뜨끔한 정사낭이 다시 탁자 앞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도 사라졌다.

잘못 들었나 보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탁자 위에 있는 서책으로 눈길을 돌리던 정사낭은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듯 또다시 일어섰다. 그때 문에 벌컥 열렸다.

“사공자님!”

시녀의 밝은 목소리가 울리자 정사낭은 화들짝 놀라 도로 앉았다. 까르르 웃는 시녀의 웃음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반근 언니, 공자님 좀 놀리지 마!”

반근이 시녀를 밀어내고 앞으로 가며 말했다. 정사낭은 얼굴이 붉어졌으면서도 침착한 척 서책을 집어 들었다.

“무슨 일이냐? 난 공부 중이었는데.”

시녀가 웃음기를 거두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가 가엾은 듯 쓸쓸한 목소리로 불렀다.

“공자님…….”

“언니, 공자님 놀리지 말라니까.”

반근이 시녀를 보며 발을 탁 구르더니, 정사낭 앞으로 다가가 예를 표하며 활짝 웃었다.

“경하드려요, 공자님.”

순간 정사낭의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며 눈앞에 불꽃이 터졌다. 방이 붙는 건 내일이지만, 지금쯤이면 급제자 명단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인맥과 수완이 있는 이들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고, 정사낭의 누이인 정교랑은 물론 인맥과 수완이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급제인가?

“반근, 내가 공자님을 놀리려는 게 아니야. 공자님은 사 태부(동진의 재상 사안謝安. 침착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장령들의 사기를 돋움)를 좀 보고 배우실 필요가 있어.”

“사 태부가 누군데?”

시녀와 반근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정사낭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급제에 쏠려 있었다.

급제했구나.

정사낭이 마침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기 시작했다.

“급제자가 삼백육십오 명이다. 사백십팔 명이 응시했고.”

정 이노야가 호들갑 떨 것 없다는 투로 말하자 정사낭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시험에 급제하지 못해 부끄러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부끄러움이었고, 기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급제한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꼴등으로 붙었다가, 전시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간 경우도 있잖아요. 듣자니 노야께서도 성시에 이백구십 등으로 붙었다가, 전시에서 백삼십사 등까지 올라가셨다던데요.”

그 말에 정 이노야의 안색이 급변했다. 뭐라 따지기도 전에 정칠랑이 먼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넷째 오라버니보다 잘 봤네.”

“네, 맞아요. 그 해엔 응시자가 적어서 삼백 명밖에 안 뽑았거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삼백 명 중에 이백구십 등?

“아, 그럼 아버지는 꼴찌에서 십 등이었네요.”

속으로 셈을 마친 정칠랑이 말했다. 열이 받은 정 이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한 집안에서 진사를 둘이나 배출한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

정 이부인이 나서며 수습하려고 했다.

“딱히 어렵진 않은 것 같은데요?”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대꾸했다.

가만있자, 얘가 어느 집 아랫것이었더라? 왜 이리 버릇이 없어? 정씨 가문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부아가 치민 정 이노야는 대체 어느 집에서 어렵지 않단 소리를 지껄이냐고 호통을 치려 했지만, 시녀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 이 아이는 우리 집안 아랫것이 아니었어! 장씨 집안에서 왔지!

하긴, 장강주 집안이면 조상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연이어 진사를 배출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나. 조상은 관두고 장강주 대에만 해도 벌써 넷이나 배출했는데.

스승님이자 연장자께서 주신 아랫것이니, 함부로 꾸중할 수도 없고.

따끔하게 호통을 치려던 정 이노야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전시 준비에 힘쓰거라.”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공자님, 우리 방 보러 가요.”

시녀도 정 이노야의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사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과를 아는데, 뭐 하러 굳이 보러 가?”

반근의 물음에 시녀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방이 붙은 곳이 아주 떠들썩하거든. 묘회(廟會)나 꽃등 놀이 때처럼 사람도 많고 재미있어. 급제자 중에 사윗감을 고르려고 나온 사람들도 많고.”

대청에 있던 어린 낭자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경성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했던 마당의 꽃나무에서도 이제는 꽃봉오리가 생겨나는 걸 보면, 추운 겨울에서 초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때였다. 그런데도 정씨 가문 낭자들은 묘회나 꽃등 놀이는 언감생심이고 저택의 대문조차 나가 본 일이 없었다.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으며 사건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던 경성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차라리 강주가 나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시녀에게서 방을 붙은 곳이 무척이나 떠들썩할 거란 말을 들으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아씨, 우리가 사공자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어떨까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요?”

시녀가 이번에는 정사낭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응낙한 마당에 정사낭이 응낙하지 않을 리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분들은…….”

시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에게로 향했다. 다들 한껏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같이 가요.”

어린 낭자 셋은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정칠랑은 금방 도로 털썩 앉으며 뾰로통한 얼굴로 흥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사랑과 정오랑은 앉아야 할지 일어서 있어야 할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아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럼 어서 옷 갈아입고 같이 출발하세요.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시녀가 큰 소리로 외치며 같이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같이 가자고 저러는데 굳이 거절하는 건 좀 아니지.

정사랑과 정오랑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우르르 나가는 모습을 본 정칠랑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가 정사낭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난 오라버니랑 같은 마차 탈래요.”

정사낭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럿이 함께 출타하다 보니 여종들이며 몸종들까지 덩달아 분주해지자 홀로 소외당한 집안 안주인 정 이부인도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반근, 반근.”

종종걸음으로 나온 정 이부인이 여종들에게 분부를 내리고 있는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여종들에게 하던 말을 끝마친 후에야 정 이부인 쪽으로 왔다.

“부인, 분부라도 있으세요?”

“사낭이 급제를 했으니 그래도 축하는 해야지.”

정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세요, 부인.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전 아씨를 모시고 방을 보러 다녀올게요.”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던 시녀가 두어 걸음 걷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부인도 같이 가시겠어요?”

시녀가 눈웃음을 치며 묻자, 정 이부인은 눈을 흘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냐. 애들 놀러 가는데 내가 거길 뭐하러 가.”

시녀가 웃으며 뒤돌아 나갔다. 시녀의 모습이 마당 문 밖으로 사라지자, 정 이부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나더러 준비하라고? 돈은 자기가 내고? 그럼 난 뭐가 돼?

문서로 박아 놨으면 뭐해, 허울뿐인 주인인 것을.

정 이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벼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공자님, 저기까지 어떻게 가죠?”

사환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딱 보니까 처음 보러 온 모양이네.”

옆에 있던 서생이 아둔한 사환과 어리숙한 공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게. 우린 오밤중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그 말에 저쪽에 있던 서생이 고개를 돌렸다.

“원조 형, 이번엔 오밤중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군.”

서생은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급제를 경하드리오, 원조 형!”

그 외침 소리에 한원조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옆에서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원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곁을 지키던 사환과 시종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례지만 혼처가 있으시오?”

같은 질문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있습니다, 있어요.”

한원조가 웃으며 대답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원조와 동료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 급제한 사윗감을 찾느라 아주 난리군.”

웃으며 이야기하던 서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원조, 삼 년 전 일 기억나나? 그때도 사윗감으로 점찍혀서…….”

“아니라니까 그러네. 몇 번을 말해.”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진 상공 댁은 아니야. 진 상공의 딸 중에 그 글씨를 아주 잘 쓴다던 어린 낭자의 신랑감도 이번에 진사 급제를 했는데, 합격자 방이 붙은 곳에서 고른 건 아니라더군. 그럼 그때 자네를 사위로 맞이하려던 건 대체 누구지?”

“몇 번을 말하나. 글쎄, 그런 거 아니래도.”

답답하다는 듯 해명하려던 한원조가 돌연 말을 멈추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보세요. 저 급제자를 낚아챘어요!”

시녀가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정사랑과 정오랑은 물론이고 정칠랑까지 흥분되는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나이도 많으면서 뭘 뺏고 저래?”

정사랑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빼앗아야죠. 진사 급제를 하면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일가족 전체의 세금이 줄어들거든요. 세금이 줄면 그만큼 재산을 불릴 수 있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 그렇담 재물을 불러들이는 복덩이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이 또다시 떠들썩해지면서, 서너 명이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칠랑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정사낭 역시 그런 누이들의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는 나랑 같이 방을 보러 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들을 구경하러 온 것이냐?”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방을 보고 싶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사낭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앞쪽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방에 붙은 이름 석 자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결과를 아는데, 굳이 뭐하러 봐.”

정사낭의 말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정교랑이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부르자, 시종 네다섯 명이 즉시 다가와 일제히 대답했다.

“네, 아씨.”

“길을 좀 내야겠어. 나랑 오라버니가 가서 볼 수 있도록.”

시종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험상궂은 얼굴을 앞세우며 인파 속에서 길을 열었다. 순식간에 길이 나자 정사낭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 설마 저 시종들의 이름을 모르는 거야?”

정사낭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몰랐네요. 돌아가면 기억해 둘게요.”

정사낭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정교랑을 보호하며 방이 붙은 곳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은, 누구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다시 닫히는 인파를 보며 한원조가 생각에 잠겼다.

저 여인과 젊은 서생도 방을 보러 가는 건가?

“원조, 원조.”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며 한원조의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생각이 끊겼다.

“저기 좀 봐. 저기 저 사람 말이야.”

동료가 한원조의 어깨를 치며 한쪽 옆을 가리켰다.

시녀는 여전히 마차에 탄 채로 어린 낭자들에게 이런저런 구경거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저 여자애 말인데, 왠지 낯이 익지 않아?”

동료가 한원조를 보며 물었다.

“그때, 자네를 찾아왔던 그 몸종 아닌가?”

“가세. 우리가 지금 이런 거나 구경할 때인가? 얼른 돌아가 이제 마음 푹 놓고 전시 준비에 매진해야지.”

한원조는 웃으며 화제를 돌리고 돌아섰다. ‘전시’라는 두 글자에 퍼뜩 정신이 든 두 동료는 순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가세, 가자고.”

두 사람은 몰려드는 인파를 거슬러 나와 한원조를 따라 자리를 떴다.

정교랑와 정사낭은 어느덧 급제자 명단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석차를 아는지라 이름이 대략 어디쯤 있을지 알고 있는데도 정사낭의 시선은 맨 앞 수석의 이름으로 향했다.

진호.

“그 진 공자네. 나이도 어린데 저리 대단할 줄이야.”

정사낭이 놀라움과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이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비교할 필요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도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비교하는 거 아냐.”

정사낭은 웃으며 맨 마지막 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이 보이자 순간 가슴이 쿵쾅대며 흥분됐다.

“저기 봐. 내 거야, 내 거.”

과연 자신의 이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냥 들었을 때와는 다른 기쁨이 있었다. 흥분한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빼고 석차를 확인하더니 입을 삐죽였다.

“맨 끝에 있으면서도 저리 좋아하다니, 수석이라도 했으면 까무러쳐 실려 나가는 건 아닌가 몰라.”

“공자님!”

경성 밖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말 두 필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사환이 앞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보세요. 주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뒤쪽 말에 타고 있던 공자가 모자를 벗고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이번 예부시의 수석 급제자 진호였다.

수석 급제자 진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야, 주 시금, 오느라 고생 많았네.”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간 진십삼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은 아직 비옷 차림이었지만, 옷에 묻은 빗방울은 이미 바람에 마른 후였다. 모자를 벗은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구,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진 성원(省元)께서 친히 마중까지 나오시고.”

주육낭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자, 자, 더 불러 봐. 그래야 비도 오는데 꼭두새벽부터 여기까지 마중 나온 보람이 있지.”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뒤에서 화관(花冠) 하나를 불쑥 꺼냈다. 진십삼이 놀라 소리쳤다.

“어이, 뭘 하려는 거야?”

진십삼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어느새 말을 몰아 온 주육낭이 손을 뻗어 말고삐를 홱 낚아챘다.

“난 그런 거 쓰기 싫다고!”

진십삼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육낭의 완력을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진십삼의 머리에 화관이 씌워졌다.

“다들 진 성원이라 부르는데, 꽃장식 정도는 해 줘야지!”

주육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전시가 남았잖아! 꽃장식은 무슨!”

진십삼은 손을 뻗어 빼내려 했지만, 주육낭이 막았다.

“어이, 절름발이, 겁이 나서 그래? 꽃까지 꽂았는데 전시에서 십 등 안에 못 들까 봐?”

진십삼은 어이가 없는 듯 주육낭을 뿌리쳤다.

“자극할 필요 없어. 소용없으니까.”

진십삼은 말을 몰아 앞장서 가면서도, 머리에 꽂은 우스꽝스러운 화관을 벗지 않았다.

“난 분명 십 등 안에 들어 꽃을 꽂을 거야. 이 꽃은 너무 흉해서 싫은 것뿐이야.”

“흉하긴 하네.”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어떤 꽃을 골라야 예쁜지도 모르겠고 해서…….”

“길에서 꺾은 거지? 돈 주고 산 거 아니고?”

주육낭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몰아 앞으로 쫓아갔다. 말 두 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성을 향해 달려갔다.

“어이, 뉘시오?”

정씨 저택의 문지기가 다짜고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소년을 황급히 막으며 소리쳤다.

평범한 옷차림에 어깨에는 커다란 짐 보따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먼 길을 달려온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런지 젊은 나이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험상궂어 보였다.

소년은 문지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대문을 발로 차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놀란 문지기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리를 질러댔다.

“여봐라.”

하지만 짐 보따리를 짊어진 소년은 벌써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후였다.

아, 아니…….

“왜들 보고만 있소?”

문지기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쪽에는 시종 넷이 팔짱을 끼고 서서 이야기 중이었다. 웃고 떠들던 시종들은 이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는 듯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문지기는 정 이부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자였다. 문지기는 편한 자리인 만큼 정 이부인이 특별히 배정해 준 터였다.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명첩을 확인하는 일은 체면이 서는 일이었고, 저택을 방문한 이들이 상으로 주는 돈을 은밀히 챙길 수 있으니 이점이 많았다.

정월인지라 찾아오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다들 문지기를 무시한 채 곧장 시종들을 찾는 바람에 문지기는 장식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문지기는 대문 앞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 온 사람은 아예 시종도 거치지 않고 대뜸 안으로 난입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저 시종들은 눈이 멀었나, 왜 보고만 있어?

“누군지 몰라? 문지기 노릇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사람 얼굴부터 익혀라. 저분은 주씨 가문 도련님이야.”

저쪽에 있던 시종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주씨 가문?

문지기가 멈칫했다.

“정씨 가문으로 시집왔던 주씨 가문 부인께서 돌아가신 후, 주씨 가문 사람이 정씨 저택을 찾아올 땐 문을 두드리는 법이 없다. 발로 뻥뻥 차면서 들어오지.”

시종이 웃으며 설명했다.

“어엇, 주 공자님? 돌아오셨네요!”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가 소리를 듣고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시녀의 웃는 얼굴과 스스럼없는 진심 어린 환대가 어색한 듯 주육낭은 도리어 멈칫했다.

“난…….”

주육낭이 입을 열려 했지만 시녀는 벌써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씨, 주 공자께서 오셨어요. 아씨께 드릴 선물도 한 아름 안고 오셨네요.”

시녀의 말에 주육낭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선물을 가져오긴 누가!

반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를 우리자, 시녀는 반근을 향해 손짓하며 자신이 남아 시중을 들겠다는 뜻을 표했다. 반근은 시녀의 호의를 눈치채고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고마움을 전한 후 물러났다.

“이, 이건 내 선물이 아니야.”

주육낭이 대뜸 해명부터 하자, 찻잔을 들고 있던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시녀 역시 쿡 웃음을 터트리며 옆에 놓인 커다란 짐 보따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공자님께서 우리 넷째 도련님을 대신해 가져다주신 거예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결의를 맺은 오라비들은 모두 떠났고, 제대로 된 형제들은 없으니 많이 상심했겠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육낭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사람 걸 가져온 거야. 너무 많아서, 내 건, 못 가져왔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반근, 놀려서 뭐해.”

정교랑이 찻잔을 내려놓고 시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주육낭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시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꾹 참으며 일어나 물러갔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죠?”

정교랑이 물었다.

오라버니!

시녀에게 놀림을 받아 일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라버니! 날 오라버니라고 불렀어!

너무나 급격한 감정 변화에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응. 너, 너는 잘 지내지?”

주육낭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정교랑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고 웃었다.

“잘 지내요.”

정교랑이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들어요.”

주육낭은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이번에도 다시 돌아갈 거예요?”

정교랑이 물었다.

“가야지. 보름이나 한 달쯤 후에, 갈 거야. 그 벽력탄인지 뭔지 나오면.”

주육낭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실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육낭은 그만 일어나 작별을 고하고 싶기도 하고, 또 그러지 않고 싶기도 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로 옮겨 왔네. 여기서는 좀 지낼 만해?”

주육낭이 불쑥 물었다.

“네. 어디서 지내나 똑같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지. 미련한 질문을 했네. 내가 일부러 말 걸고 싶어 물어본 것 같잖아.

주육낭은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이만 갈게. 그 사람한테 전할 물건 있으면 준비해. 내가 가기 전에 한 번 들를게.”

정교랑은 좋다고 대답하며 배웅을 위해 일어났다.

“공자님, 왜 이렇게 서둘러 가세요.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마당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이 망할 것이! 방금 날 놀렸다 이거지?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시녀 쪽으로 걸어갔다.

“육공자님, 전 공자님을 위해 그런 거예요.”

시녀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실까 봐, 입을 열도록 도와드린 거라고요.”

또, 또!

주육낭이 시녀를 노려보았다.

“신경 꺼라.”

주육낭은 협박조의 한마디를 일갈한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정씨 저택의 대문을 나와 말에 오른 주육낭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얼굴이었다.

오라버니라…….

주육낭이 곧 입을 삐죽거렸다.

근데, 좀 이상한데.

순간 주육낭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오라버니? 날 부르는 게 아닌 거 아냐? 서사근에 대해 물은 거였나?

주육낭은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어쩌자고 그렇게 대답을 빨리 한 거야!

이런 망신이 있나! 다시는 보러 가지 말아야지!

주육낭은 채찍을 매섭게 후려갈기며 질풍처럼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는데 주 부인이 사람을 시켜 불렀다.

“또 거기로 달려갔었던 거야?”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러더니 또 안쓰러운 듯 덧붙였다.

“이 얼굴 튼 것 좀 봐.”

“어머니.”

주육낭이 자신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동상 걸린 거 아닙니다. 바를 연고가 있거든요. 손도 하나 안 텄어요.”

주육낭이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모친에게 보여 주고, 자신도 쳐다보았다.

이 연고도 그 애가 준 거지. 일부러 나 주라고 챙겨 보낸 건 아니지만.

아, 진짜 성가셔 죽겠네. 왜 빠지는 곳이 없어.

주육낭이 손바닥을 벅벅 비볐다.

“……육낭!”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모친을 바라보았다.

“돌아온 김에 혼사를 정하자꾸나. 다음에 돌아왔을 때 혼례를 올리도록.”

주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순간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아직 어립니다. 무슨 혼례를 올려요.”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가려 했다.

“어리긴 뭐가 어려. 열아홉이나 됐으면서!”

주 부인이 초조한 듯 소리쳤다.

“스물아홉도 안 늦습니다.”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리고 가 버렸다. 그때 밖에서 들어오던 주 노야가 주육낭을 막았다.

“찾고 있었는데, 어딜 다녀온 게냐?”

“물건을 좀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주 노야의 물음에 주육낭이 답했다. 주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응 하고 대꾸하고는, 마중 나오던 주 부인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당신 말이 맞았소. 그 두 내외가 교교의 재산을 몽땅 차지했다는군.”

걸음을 옮기려던 주육낭이 다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뭐라고?

“내가 뭐랬어요. 정 이부인이 자랑하고 싶어 아주 몸살을 앓더라니까요. 내가 모임에 안 나갔어도 얼마나 우쭐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아요.”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긴.”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주육낭이 두 사람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육낭, 정가네 이방 놈이 교랑의 재산을 몽땅 차지했다. 명의까지 제 후처 이름으로 바꿔 놨다는구나. 그런 바보가 또 있나 몰라.”

주 노야가 껄껄 웃었다.

“아버지,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가서 뭐라 말씀이라도 하셔야죠.”

주육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리까지 나설 게 뭐 있어? 그 애가 좀 대단하니? 대처할 방법이 있겠지.”

주 부인이 대꾸했다.

그 애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맬 때도 우린 그 애 재산을 빼앗기는커녕 죽도록 시달리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그런데 병도 없이 멀쩡한 데다 명성까지 자자한 지금 그 두 내외가 대놓고 그 애 재산을 빼앗았잖아.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면 뭐겠어?

“대처할 수 있다 해도, 어쨌든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가서 괜찮은지 안부라도 물으셔야죠.”

안부?

무려 귀판관도 내쫓고 마는 신선의 제자인데, 무슨 안부를 더 물어?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주육낭이 홱 뒤돌아 가 버렸다.

“아니, 너 어디 가는 게냐?”

주 노야가 소리쳤다.

“그자들한테 따지러 갑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거기 서!”

주 노야가 소리치며 따라가 붙잡았다.

“따지긴 뭘 따져? 이건 그쪽 집안의 일이야! 네가 저들의 죄를 묻겠단 거냐? 딸의 재산을 가로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딸의 재산은 본디 부모의 재산인 것을 빼앗을 게 뭐 있어? 부모님께 드리지 않는 게 도리어 죄거늘!

지금은 일이 잠잠해졌으니 괜히 가서 소란 피우지 마라. 소란을 피워 일을 키우는 날엔 교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볼 거야.”

“그래, 그래. 그쪽 집안의 일에 우리가 관여할 거 없어. 관여할 수도 없고.”

주먹을 부르쥔 채 서 있던 주육낭은 결국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주 노야가 몇 번 소리쳐 불렀지만 주육낭을 붙잡을 순 없었다.

“정말 악연이라니까.”

주 부인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저 녀석이 아주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네. 이러다 정말 야차를 며느리로 들이는 거 아니야?

“어이, 어이! 거기.”

정씨 저택의 문지기들이 벌컥 열린 문을 향해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를 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아니, 또 그쪽이오?”

문지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 소리가 또 한 번 들리더니 한쪽 문짝이 아예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겁한 문지기들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주 공자님, 지금 아씨께서는 글씨 연습을 하고 계세요.”

서재의 문이 열리면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서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주육낭이 보였다.

“짐 챙겨. 나랑 가자.”

주육낭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또 저 소리잖아!

저 말을 못 들은 지 벌써 사 년이 다 됐네. 이제 다시는 들을 일 없겠다 싶었는데, 또 아씨를 강제로 어디에 데리고 가려고 저러는 거야?

시녀와 반근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육낭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늦게 주육낭의 뒤를 쫓아온 시종들도 주육낭을 향해 전투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지금은 사 년 전과는 달라. 지금은 그때처럼 쉽게 아씨를 데려가긴 힘들걸?

“어디로요?”

정교랑이 물었다.

“우리 집에 가서 지내.”

주육낭이 짧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아,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교랑이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고 정교랑을 설득할 말을 한가득 준비해 왔던 주육낭은 말문이 턱 막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또 이러네! 이 여인은 어쩜 이렇게 말에 앞뒤가 없어? 그때도 괜히 저런 짤막한 말만 듣고 오해했잖아.

“말하기 전에 밑밥 좀 까면 안 되나.”

주육낭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도 밑밥 같은 거 안 깔아주잖아요.”

정교랑이 붓을 내려놓고 문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근.”

시녀와 반근이 웃으면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당장 짐 쌀게요.”

“교랑을 데리고 네 집으로 가겠다고?”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겠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정 이노야가 매를 부르게 생긴 표정의 주육낭을 노려보았다.

“왜 네 집에 데려가겠단 것이냐?”

“왜 우리 집에 데려가면 안 됩니까? 고모부님께서는 13년 전에도, 제 고모와 누이를 우리 집으로 내쫓았지 않습니까. 누이가 좀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우리 집으로 데려가는 건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육낭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정 이노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네 이놈, 헛소리하지 말아라.”

“고모부님, 제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제 부모님께서는 모두 건재하십니다.”

주육낭이 냉소를 보였다.

정 이노야가 뭐라 더 대꾸하려 했지만, 주육낭은 더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고모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손아랫사람의 본분을 다 지킨 겁니다. 전 고모부의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손아랫사람의 본분? 본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정씨 가문 조카였으면, 벌써 흠씬 두드려 패고 마당에 무릎 꿇렸어. 그것도 모자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게 했을 텐데!

정 이노야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씨 가문은 참으로 염치도 없구나!

당초 그네들이랑은 연고도 없던 강주에서도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제는 자기 구역라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어!

이를 부득 갈던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경성에 들어온 이후로 주씨 가문과 겉치레로라도 인사 한번 나눈 적이 없어. 심지어 경성에 주씨 가문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뻔했지.

그래, 현실은 현실이야. 언젠가 들이닥칠 일은, 결국 들이닥치게 돼 있어.

“노야, 지금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빼돌리러 온 게 명백하잖아요. 어서 다시 빼앗아 와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이부인이 안채에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떻게 뺏어? 외조모 댁에서 애를 데려가 며칠 재우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면서 막아? 게다가 주씨 가문은 무장 출신이라 무식하고 염치도 없는데. 괜히 저들 앞을 막았다가 길 한복판에서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우기라도 할까? 저들은 창피를 모르는 자들이라지만, 나에게는 체통과 체면이라는 게 있소!”

정 이노야가 눈을 흘기면서 대답했다.

“그, 그럼 만에 하나 교랑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정 이부인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저놈이 감히 그럴쏘냐! 그때는 우리가 저놈을 관아에 고발해야지! 사흘이 지나면 다시 교랑을 집으로 데려올 것이야. 만약 그때가 돼도 교랑을 못 데려가게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게 구는 놈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인 게야!”

정 이부인이 아, 하고는 엉거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노야. 그러고 보니 교랑이 저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 저 애가 가 버리면, 우리가 집에서 먹고 마시는 데 쓸 돈은 어떡해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이 소리치면서 문밖으로 뛰어갔다.

“반근, 반근!”

정 이부인의 외침을 듣던 정 이노야는 기가 차서 숨이 턱 막혔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이 집안의 웃어른이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안 되겠다. 저 계집애 소유의 문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지금부터 진정한 주인 노릇을 좀 해야겠어.

주육낭이 몇 년 만에 또 정교랑을 남의 집에서 빼앗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씨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여종과 몸종들은 마당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정교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사 년 전 그날에 비해, 주 부인의 감정에는 기쁨 대신 황공함이 가득했다.

“어느 방을 내어주실 건가요?”

“가구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그쪽 거처에 몸종은 몇 명이면 되나요?”

여종들의 질문이 쉼 없이 쏟아지자, 주 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어지러웠다.

“의원을 불러오거라. 내가 진짜 병이 나서 그런다.”

주 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병이 나긴 무슨. 당신은 어째 교교가 우리 집에서 지내기만 하면 병에 걸렸다는 거요?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는 게 아니라, 교교를 불운 덩어리로 여기는 게 아니오!”

어휴, 이 몸이 어찌 감히요! 난 정말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고 있다고요!

주 부인이 몸을 살짝 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종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지시했다.

“부인,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아씨께서는 편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세요. 그러니 하인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요. 마당을 청소하는 몸종 두 명이랑, 심부름꾼 한 명만 있으면 돼요.”

편하게? 내가 어찌 그러겠나.

주 부인은 어떻게 그러냐며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하기에는, 어떻게 해도 적절하지 않을 듯싶어 주 부인은 결국 시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모든 것을 시녀의 말대로 준비했다.

“교교, 여기서 편하게 지내려무나. 괜히 정씨 내외 눈치 보면서 거기 있지 말고. 그놈들이 또 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이 숙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대청 안에서 주 노야가 의분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눈치 보지 않았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감사의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주 부인이 웃으면서 정교랑이 지낼 거처가 다 정리되었음을 알렸다.

“그럼, 외숙부님과 외숙모님께 잠시 신세 좀 질게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니다, 아니야.”

“신세는 무슨, 내가 감히…….”

한 사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사람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주 노야 내외는 정교랑을 거처까지 직접 안내했다.

“저게 어딜 봐서 외손녀가 외조모 댁에 와서 지내는 거야? 꼭 부처님을 집으로 모셔온 것 같네.”

회랑 아래에 선 주씨 가문 자매들이 감탄했다.

“우리도 가서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찌 됐든 자매지간이긴 하잖아.”

한 소녀가 물었다.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생각에 잠겼던 자매들은 끝내 가지 않기로 했다.

“에이, 됐어. 부처는 모시는 것만 해도 충분해.”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 주씨 가문의 연무장에서는 사내들이 한창 무예를 수련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우렁찬 기합 소리는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멈췄다.

“육낭, 가자.”

한 형제가 주육낭에게 말했다. 탄탄한 어깨를 드러내고 있던 주육낭은 무거운 석쇄(石鎖: 돌로 만든 운동기구) 앞에 서서 알겠다고 대꾸했다.

“먼저들 가. 난 조금만 더 하다 갈게.”

“3년 동안 실제 전장을 경험하고 오더니, 더욱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구나.”

형제 몇 명이 감탄하면서 연무장을 떠났다.

연무장이 조용해지자, 주육낭은 석쇄를 두어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는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때 어린 몸종 하나가 연무장을 향해 뛰어오다가 주육낭을 보자마자 다시 왔던 방향으로 도망쳤다.

“도망가긴 왜 도망을 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주육낭이 호통치자, 어린 몸종은 불안한 기색으로 제자리에 걸음을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몸종이 예를 표하면서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정 아씨께서…….”

몸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종의 뒤로 시녀가 걸어왔다.

“어? 주 공자님, 아직 여기에 계셨네요? 지금쯤이면 다들 갔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대꾸하지 않고 느긋하게 땀을 닦았다.

“수련은 다 하신 거예요?”

시녀가 또 물었다.

“그래.”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시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곁눈질로 느꼈다.

보긴 뭘 봐! 뭘 보냐고!

“수련 다 하셨으면, 옷이라도 좀 걸쳐서 몸을 가리시는 건 어때요? 곧 있으면 아씨께서 활쏘기를 하실 시간이라서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육낭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흘깃 쳐다보고 읊조렸던 말이 생각났다.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이 사환의 손에 들려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몸에 두르고 다급하게 소매 한쪽에 팔을 집어넣었다.

딸가닥거리는 나막신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무채색 저고리에 꽃이 수놓아진 치마를 입고 소매를 동여맨 여인이 어깨에 활을 멘 채 천천히 연무장 안에 들어왔다.

주육낭이 옷을 입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저, 거꾸로…….”

정교랑이 들어옴과 동시에 사환이 말하자, 주육낭은 사환이 정교랑에게 반대쪽으로 돌아서라고 말하는 줄 알고 사환에게 발차기를 날리며 호통쳤다.

“거꾸로 돌긴 뭘 돌아! 괜한 소리를 왜 해!”

“아니, 도련님이 옷을 거꾸로 입었다고요.”

바닥에 주저앉은 사환이 잔뜩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숙여보자, 옷을 정말로 거꾸로 입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은 더욱 화끈거렸다.

주육낭이 민망해하며 서둘러 옷을 다시 벗었을 때,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가던 정교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주육낭이 급하게 마구잡이로 옷을 몸에 걸치고는 눈을 부릅떴다.

“좋은 아침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문안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은 개뿔! 사내의 헐벗은 몸을 보면서 문안 인사를 하는 여인이 어디 있다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투덜댔다.

“주 공자님, 그래도 사 년 전보다는 몸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이며 아랫것이며 하나같이 창피를 모르니 원!

주육낭이 옷을 고쳐 입고 허리끈을 꽉 묶을 때쯤, 그의 등 뒤로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성큼성큼 걸어 연무장을 벗어났다.

정교랑이 매일 아침 활쏘기를 한다는 소식은 금세 주 노야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연무장에 있는 과녁들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집안의 자식들에게 한 시진 일찍 아침 수련을 끝내라고 명했다.

“왜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주 노야에게 대꾸했다.

“저희가 무예를 수련하는 건 무장 가문의 자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여인은 그저 활쏘기 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교가 하는 일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호통쳤다.

이튿날, 다른 형제들은 주 노야의 말대로 한 시진 일찍 수련을 끝냈지만, 주육낭은 혼자 연무장에 남아 수련을 계속했다. 때마침 주 노야는 출타하여 집에 없던지라, 그를 말리던 다른 형제들도 결국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주육낭은 며칠 전보다 한술 더 떠서, 정교랑이 활쏘기를 하는 와중에도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정교랑이 오기 전에 미리 옷을 챙겨 입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주 공자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주육낭이 석쇄를 연달아 몇 번이고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시녀가 감탄했다.

어깨가 으쓱해진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거들먹거리면서 병기를 올려두는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주 공자님은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다 다룰 줄 아세요?”

시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주육낭이 말없이 곤봉 한 개를 뽑아 들고 정교랑 쪽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벌써 세 번째 과녁 앞으로 옮겨갔다. 초봄의 푸르스름한 하늘빛 아래에 서 있는 정교랑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주육낭이 곤봉과 칼을 번갈아 가면서 휘두르자, 그의 옷자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꽃잎처럼 휘날렸다. 그의 몸놀림을 구경하던 시녀가 연신 손뼉을 치면서 환호했다.

숨이 살짝 거칠어진 주육낭이 장창으로 병기를 바꾸고 고개를 슬쩍 돌려보더니, 잠깐 멈칫했다.

어디 갔지?

“주 공자님, 전장에서는 어떤 병기를 쓰세요?”

시녀가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주육낭이 물었다.

“저희 아씨요? 저희 아씨는 전장에 나가시지 않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과녁을 가리키면서 다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어디 갔냐고 물은 것이다.”

시녀가 그제야 아,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글쎄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누가 윗전 시중을 저따위로 들어?

“괜찮아요. 저희 아씨는 제가 시중들 필요가 없거든요. 주 공자님, 주 공자님, 전장에 나갔을 때는 장창을 쓰세요, 아니면 칼을 쓰세요? 저것도 한 번만 써 주시면 안 돼요? 저건 무슨 병기예요?”

시녀가 선반을 가리키며 묻자, 주육낭은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리 가.”

주육낭은 시녀를 더 상대하지 않고, 겉옷을 손에 쥔 채 연무장을 떠났다. 사환과 몸종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연무장을 떠난 주육낭은 시녀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시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주육낭은 그제야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근육통이 온 어깨를 주물렀다.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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