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60)

-이제민 구제-

정월이 지나자 황제는 정상적으로 조회에 참석했고,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날 밤 일도 차츰 잊혀졌다. 사실 울화가 치밀어 각혈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점점 더 크게 번져 갔다.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민란을 일으킨 역당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소이다.”

조당의 싸움도 날로 치열해졌다. 황제는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저들이 말하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야.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역당 세력이 힘을 받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얘기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결할지 논하는 게 핵심이지.

“무평의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죄를 물으시옵소서.”

“민란부터 평정하심이······.”

“누구를 보내야 하겠소이까?”

끊이지 않는 논쟁 속에서 돌연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신이 가겠나이다.”

젊은 목소리였다. 모두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앞으로 나서며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진안?”

황제가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웬 말썽이냐?”

“폐하,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신이 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신이 아직 나이가 어려 중임을 감당할 수 없는 건 압니다. 신 역시 중임을 바라진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이재민을 구제할 문신과 반란을 평정할 무장을 고르실 때까지, 신이 폐하를 대신해 무평으로 가 백성을 위문하고 역당의 세력을 진압하겠나이다.”

하긴. 반란이 일어나면 황제나 태자가 친히 출정하곤 했지. 지금 같은 때에 황족이 무평으로 간다면, 재해를 겪고 있는 백성은 큰 위로를 받을 테고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두려움에 떨게 될 거야.

조당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허튼소리 마라! 진소, 서둘러 구휼을 시행하고 반란을 평정할 이를 인선해 사흘 내에 짐에게 보고하시오. 다들 그만 퇴청하시오!”

황제가 퇴청하자 대신들도 무평으로 갈 대신을 논하기 위해 조당을 나왔다. 조당을 나오던 이들 중 두 대신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두 대신이 다시 앞쪽을 쳐다보았다. 젊은 군왕이 다른 대신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내시가 군왕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부르는 눈치였다.

“전진을 위한 후퇴인가?”

대신 하나가 나지막이 말하자 다른 대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장난을 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닌데.”

“정말 가려는 것 같소?”

먼저 입을 연 대신이 놀라 물었다.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사흘 후 나온 황제의 공식 발표는 말이 안 되는 그 일을 사실로 입증해 주었다. 진안 군왕은 초무사(招撫使) 신분으로 떠나게 되었다.

“천지신명께서 도우셨구나.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해.”

소식을 들은 귀비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환히 웃었다.

“역시 고 전시가 일을 제대로 대비해 놓고 갔구나. 자기가 떠나자마자 바로 쫓겨나게 하다니. 고 전시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인사할 건 해야지.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하거라.”

잠시 머뭇거리던 궁녀가 입을 열었다.

“마마, 두 분 대인이 그러시는데, 이번 일은, 그분들이 하신 게 아니랍니다.”

귀비가 멈칫했다.

“무슨 말이야?”

“소인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본디 군왕이 지난번에 폐하 앞에서 구휼이 우선이라는 말씀을 올린 걸 문제 삼아 일을 키우려 했는데, 대인들께서 입을 열기도 전에 군왕이 초무사로 가겠다고 자청했답니다.”

자청을 했다고?

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생각이지? 공을 세우고 싶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무려 경성을 떠나는 일이라고! 무려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일이란 말이다! 혹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공이고 명성이고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데.

“전하,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십니까? 정녕 전하의 뜻이란 말씀입니까?”

경왕부. 경왕의 병을 보러 온다는 핑계로 방문한 이 태의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폐하를 설득하느라 애를 좀 먹었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 내가 틀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구휼을 시행하여 재해에 관한 걱정이 사라지면 백성이 안심할 줄 알았는데, 한번 불안해진 마음을 위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돈과 곡식을 풀어도 난민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이니 내가 틀렸죠. 그래서 직접 가 보고자 합니다.”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습니까? 이유가 그럴듯하죠? 폐하께서도 얘기를 듣더니 동의하셨어요.”

“전하의 말재주를 누가 당해 내겠습니까.”

진안 군왕은 이 태의의 말에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었다.

“하온데, 전하.”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4년 전 산길에서 야밤에 늑대 떼를 만난 일을 잊으셨습니까?”

“4년 전이요?”

찻잔을 손에 쥔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돌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지해진 군왕의 표정을 보며 이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을 만난 지도 곧 4년이 다 되었군요.”

이 태의는 멈칫하더니 곧 분노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하, 지금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태의가 불쾌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경성을 떠난 후 맞닥뜨리게 될 위험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황자들이 아직 어렸던 4년 전에도 궁을 나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황자 하나는 어느덧 장성했고, 다른 하나는 병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지금이었다. 황제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는 하나 정세는 아직 불안했다. 이런 때에 경성을 떠난다니, 그것도 그 먼 곳으로 간다니, 게다가 이재민을 구제하고 반란을 평정하러 간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나도 진지한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진안 군왕은 자세를 바꿔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을 안 지 벌써 4년이에요. 그 여인이 없었다면, 내가 죽은 지 4년은 되었겠네요.”

이 태의가 불길한 소리 말라는 듯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전하는 하늘이 보우하시는 분인데 돌아가시다니요. 그 여인이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여인뿐이죠.”

진안 군왕의 단호한 표정에 이 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미련을 보이시면서, 어찌 경성을 떠나신단 겁니까?”

“미련을 보이긴요. 이 태의, 그 나이에 참 이상한 생각도 잘하십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 태의는 어이가 없는 듯 눈을 흘겼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은 남을 이상하게 본다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그 낭자 얘기뿐이면서. 무슨 생각인지는 바보가 봐도 훤히 알겠는데, 누굴 속이려고!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더니 곧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그 낭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지.

“전하, 폐하께서 병환이 도지셨으니, 이번 기회에 경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태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으며 이 태의의 말을 잘랐다.

“궁으로 돌아가도 소용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문밖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궁 안도, 더 이상 내게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전하, 폐하는 무탈하십니다. 설령 훗날······ 아무튼 태후마마도 계시잖습니까.”

“그러면 뭐요? 태후께서 귀비보다 오래 계시겠습니까? 평왕보다 오래 계시겠습니까?”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다시 이 태의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 대인이 방도를 생각해 보세요.”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하, 저는 태의입니다. 병자를 고칠 뿐이지요.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이 태의가 느릿느릿 말하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압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초 이 태의도 날 구하지 않았겠죠. 그 많은 이들이 다들 날 못 구한다고 했는데.”

이 태의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잘랐다.

“그건 별개의 일입니다. 전하의 병은 고치기 힘든 병입니다. 저 말고는 못 고쳐요.”

진안 군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압니다. 이 대인은 마음이 착하고 의술도 고명하죠.”

웃음을 터트리는 눈앞의 젊은이를 보며 이 태의는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 이리 장성하셨을까.

부왕, 부왕, 구해 주세요.

침상 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가 눈앞에 보였다. 중얼거리는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이 태의는 차마 아이를 뿌리치고 나갈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멀리 떠나시면, 무탈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안 군왕은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난 ‘어쩌면’ 같은 말이 싫습니다. 남한테 결정권이 있고, 난 그저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절반의 기회가······.”

“귀비와 평왕이 날 죽이지 않을 기회요?”

진안 군왕이 돌연 언성을 높였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봄처럼 따스하던 실내에 찬 바람이 몰아쳤다.

저분은 군왕이야.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든 병약하고 힘없는 존재지만, 어쨌거나 황실의 혈통이 흐르는 귀한 분이지.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 태의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들이 내게 그런 기회를 주길 바라고 기대하진 않을 겁니다.”

군왕의 냉랭한 목소리가 정수리를 때렸다.

“두렵습니다.”

돌연 군왕의 목소리가 바뀌며 분위기가 변했다.

두렵다고?

이 태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젊은이의 시선은 문밖을 향해 있었다. 2월 어느 날 오후의 햇빛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오며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네, 두렵습니다. 그날 밤 궁문 밖에 서서 어둠 속에 있는 캄캄한 황궁을 보고 있노라니 두려웠습니다.”

“경성을 떠나 마주할 일들보다도, 야밤에 늑대 떼를 만나는 위험천만한 일들보다도 두렵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 태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을 떠나면 벌어질 일들은, 내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칼을 쥘 수 있으니까요. 칼을 들이밀면 칼로 막고, 화살을 쏘면 화살로 막으면 됩니다. 저들이 날 죽이려 들면 나도 저들을 죽이면 되고요.

하지만 그날 밤엔, 그저 황궁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손엔 칼이 있었지만 아무 힘이 없었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이 태의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진안 군왕은 팔을 활짝 벌리고 긴 소매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두려운 건 위험이 아닙니다. 위험은, 익숙하니까요. 내가 진정 두려운 건 위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이죠.

그래서 차라리 궁을 떠나 기습과 살육의 위험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경성에서 안온하게 지내고 싶지만은 않기도 하고요. 그랬다간 언젠가는 영문도 모른 채 궁으로 불려가, 옥좌에 앉은 평왕을 보게 되고 말 겁니다.

난 다섯 살에 영문도 모르는 채 입궁했고, 영문도 모르는 채 부모님과 작별해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사랑을 받고, 영문도 모르는 채 버려졌죠.

이번엔, 더 이상 영문도 모르는 채 가만히 기다리지만은 않을 겁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사실 사소한 일들뿐이었어요. 남에게 기대어 살다가는, 그날 밤처럼 일이 생겨도, 난 입궁할 자격조차 없겠죠.”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은 웃으며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 여인이 나더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냐고 묻더군요. 4년 전이랑 똑같아요. 그때도 그 여인의 조언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그 여인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이 태의가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들었다.

“전하, 정 낭자가 전하를 도울까요?”

“날 돕는다고요? 그 여인은 늘 나를 도와줬습니다. 아, 아니지, 아주 많은 사람을 도왔어요.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죠.”

“전하,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그 여인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면, 예를 들어 그 여인이 능하다는 신비한 비술인지 뭔지를 써서 귀비와 신황이 전하를 두려워하고 해치지 않도록······.”

진안 군왕은 다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웃음을 거둔 후 이 태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대인, 방금 이 대인은 마음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시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초조한 투로 말했다.

“착하지만, 아둔하진 않습니다. 전하를 두 번이나 해치려 하고, 친아우를 죽이려 했다는 약점을 잡힌 이를 그 여인이 감화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모종의 방법으로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없도록.”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마음이 놓이는 일이자 가장 무서운 일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뿐이죠.”

진안 군왕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얼굴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이 태의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이건 내 일입니다.

그 여인의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가서 말할 겁니다. 떳떳하게 말할 거예요. 다만 이 일은, 나와 다른 이의 은혜와 원한, 생과 사가 걸린 일일 뿐 그 여인과는 무관합니다. 그 여인이 알 필요도 없고, 날 도울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 대인과 마찬가지죠.”

나?

이 태의가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대인한테 내 병을 고쳐 달라고, 내게 약을 지어 달라고 했죠. 그뿐입니다. 그건 내게 국한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이 대인이나 정 낭자와 무관합니다. 이번 생사는 두 사람과 무관한 일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한테 불공평하죠.”

이 태의는 잠자코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이 세상에 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죠.”

이 태의는 잠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다가 결국 긴 한숨을 토한 후,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럼 오늘, 이 이수(李修)는 전하께서 긴 여정을 무탈하게 마치고 개선하시길 바라며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 태의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만사형통하시길 바라옵니다.”

무평에 가겠다고 황제를 설득했으니,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하긴 쉬웠다. 문제는 경왕에 관한 일이었다.

“경왕부에 두겠다니?”

태후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마마.”

진안 군왕이 한쪽 무릎을 꿇고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경왕으로 책봉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경왕부에 있어야죠.”

“그런 말은 집어치워라! 그 애는 경왕이고, 애가의 육가아기도 해.”

“마마.”

진안 군왕은 태후의 팔을 끌어안았다.

“마마께서 육가아를 아끼신다면, 궁 밖에 있게 두세요. 경왕부는 밝고 탁 트여 있습니다. 육가아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소손이 커다란 연무장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거기서 육가아를 돌볼 이들도 많이 있고요.”

“허튼소리. 황궁엔 그런 게 없다더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마마, 경왕은 궁 밖에 있어야 자유롭게 지냅니다.”

“이 궁에서 누가 감히 그 애의 자유를 빼앗는단 말이냐!”

태후는 진안 군왕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놓지 않았다.

“마마, 경왕은 다른 사람이 자유롭지 않은 걸 원치 않을 겁니다.

마마, 경왕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황궁에 있든 경왕부에 있든 광활한 황야에 있든 경왕한텐 다 똑같아요. 마마, 다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라요. 누이들도 이제 다 컸고 안비마마는 회임을 하셨습니다. 폐하는 정사를 돌보느라 늘 바쁘시죠. 마마, 가뜩이나 신경 쓰셔야 할 일이 많은데, 경왕까지 폐를 끼치게 할 순 없습니다.”

태후가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너도 참, 육가아가 무슨 폐를 끼쳐.”

진안 군왕을 뿌리치려던 태후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 공주들이 다 컸지. 봄이면 여기저기 뛰놀며 장난치기 좋을 거야. 안비도 회임을 했으니 차츰 몸이 무거워질 테고. 황상은 병도 있고 정사로 바쁘니······.

“마마, 마마께서 계시는 한 경왕은 어디에 있나 잘 지낼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태후의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손이 정 낭자한테도 부탁했거든요.”

정 낭자?

“뭘 부탁해? 경왕을 고쳐 주지도 않겠다는데.”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고쳐 주지 않는 게 아니라, 고칠 수 없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태후의 말을 교정해 주자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해!”

“고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의술에 정통하잖습니까. 신비한 비술도 알고요.”

진안 군왕이 헤헤 웃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는 또 콧방귀를 뀌었다.

“액막이를 하겠단 말이냐?”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애가는 여인일 뿐 군자가 아니니라.”

“마마, 소손을 놀리지 마십시오.”

태후는 진안 군왕을 노려본 후, 못 말리겠다는 듯 진안 군왕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너도 참. 누굴 닮아 그리 성격이 괴팍한지 모르겠구나. 편히 지낼 수 있는데 굳이 고생을 자처하겠다니.”

“폐하께서 말씀하셨어요. 소손은 태후마마를 많이 닮았다고요.”

진안 군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후가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고 난 태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옆에 시립해 있던 궁인들을 보며 명했다.

“너희들이 경왕부로 가거라. 애가를 대신해 경왕을 잘 돌봐야 한다.”

궁인들이 얼른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이것 봐. 아쉬우니 어쩌니 해도 그런 건 없어.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궁인들을 불러 당부하는 태후를 바라보는 진안 군왕의 입가엔 시종일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굳어 있는 듯 딱딱한 웃음이.

“아씨, 아씨.”

다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온 반근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사환에게 건네는 것조차 잊은 채 대청 쪽으로 뛰어갔다.

“왜 아씨께 경왕을 돌봐 달라고 했는지 알아냈······.”

회랑 아래로 달려온 반근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대청에는 정교랑과 범강림 외에 젊은이도 하나 앉아 있었다. 그가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멀리 떠나야 해서 그런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반근이 차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에 와 있습니까?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요.”

진안 군왕이 찻잔을 들며 묻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우연이죠.”

“제가 집에서 같이 밥 먹자고 누이를 불렀습니다.”

범강림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돌려 대문 밖을 쳐다보았다.

“다들 새 옷을 입었군.”

진안 군왕이 시립해 있는 사환과 몸종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집안에 무슨 경사라도 있소?”

정교랑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 듯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이 멋쩍어하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아이 생일이라서요.”

“큰 도련님, 그럼 진작 말씀하시죠. 저희는 빈손으로 왔잖아요.”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애인데 무슨 생일을 챙겨. 그냥 다 같이 식사나 한 끼 하는 거지. 그런 말 마.”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난 빈손으로 온 게 아닌데.”

그가 향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범강림이 얼른 예를 표했다.

“어찌 감히요. 당치 않습니다.”

“귀중한 건 아니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건을 밀어 주었다.

“마침 두 개를 사서 말이오. 하나는 돌아가서 경왕한테 줘야지.”

범강림이 고개를 들었다. 반근도 뭔지 궁금한 듯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호루라기인데······.”

호루라기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지만, 때때로 선물이란 얼마나 귀중한지보다 누가 선물했는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진안 군왕 같은 귀인이 준 선물은 아무리 가벼운 것일지라도 천금처럼 귀했다.

더구나, 경왕을 주려고 산 것이라지 않았던가. 범강림은 황급히 예를 표하며 사양했다.

“받아 둬요.”

정교랑이 말했다. 다시 한번 사양하려던 범강림이 말을 바꾸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반근, 아이에게 갖다 줘.”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호루라기를 들고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내가 태후와 폐하께 말씀을 드려 놨어요. 그럼 경왕은 낭자한테 부탁 좀 하겠습니다. 자주 갈 필요는 없고요. 경왕부는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나서서 도와주기만 하면 충분하죠.

정교랑과 범강림도 배웅하려고 일어났다.

“전하,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범강림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범강림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니오. 모레 떠나야 하니 경왕 곁에 있어 줘야지.”

범강림이 얼른 예를 표하며 알았다고 했다.

“전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과 범강림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내실로 들어갔던 정교랑이 작은 함을 들고 나왔다.

“전하, 절 따라오세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따라갔다. 두 사람이 뒷마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범강림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옆방에 있던 황씨가 고개를 내밀고 범강림을 불렀다.

“전하께서 식사하고 가신대요?”

황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범강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강림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무렵, 정교랑과 진안 군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범강림은 따라가지 않았다.

“요즘 잘 지내죠?”

진안 군왕이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잘 지내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전하는 잘 지내셨어요?”

“네.”

미소를 짓던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이제 초무사가 됐으니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잖습니까. 내가 군과 관리들을 이끈다고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장식에 불과하겠지만.”

정교랑도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함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아, 이건 그······.”

진안 군왕이 뭔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던 날,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죽통이었다.

그때 얼핏 보기도 했고 정교랑이 소매로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평범한 죽통으로 보이진 않았다. 죽통 앞쪽에는 구리통도 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하지만 이번엔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전하께 드리는 작별 선물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작별을 고할 땐 아무 말 없더니.

“거짓말. 호루라기에 대한 답례면서.”

“그것도 작별 선물이잖아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대꾸했다.

“떠나면서 준 거니까요?”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대답을 마친 정교랑이 죽통을 들더니 함 속에서 기다란 종이를 꺼내 통 속에 넣었다. 진안 군왕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동작을 지켜보았다.

“이게 뭐예요? 이것도 장난감이에요? 불면 소리 나나?”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었다.

“네.”

정교랑이 손을 들어 한쪽을 겨누며 말했다.

“그런데, 부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소리가 나는데요?”

정교랑은 다른 한 손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렇게요.”

정교랑이 심지에 붙은 불을 죽통에 가져다 댔다.

이렇게?

진안 군왕이 그게 뭔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귓가에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통이 눈앞에서 폭발한 것 같았다. 놀란 진안 군왕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귀가 웅웅 울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소리가 어마어마하네!

정신을 차린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표정은 태연했고, 손에 쥔 죽통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장난감이 참······.”

웃으며 죽통을 쳐다보고 다시 앞쪽을 쳐다보던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백오십 보 밖에 세워진 과녁이 갈라진 채 쓰러져 있었다.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과녁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화염이 남아 있었다.

백오십 보 밖인데, 저리 누더기가 되다니······.

“진짜 무시무시하네.”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장난감이잖아!

“네, 좀 무섭긴 하죠. 이거라면 폭도와 정면으로 맞서게 됐을 때, 상대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할 거예요. 그럼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시큰해졌다.

전부 다, 알고 있구나.

이재민을 구제하고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이 길에, 암살과 음해 또한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는 말하지 않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빈말이라도 걱정하는 척 안부조차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것을 주었다.

정교랑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멍한 채로 아무 말 없이 있자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놀랐어요?”

정교랑이 손에 든 죽통을 들고 흔들었다.

“이건······.”

정교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젊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를 확 껴안았다. 낯선 호흡이 순간 그녀의 몸을 감쌌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하는 정교랑이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때조차도 기껏해야 반근 한 사람만 시중을 들 뿐이었고, 그 시중이라는 것도 어깨를 주무르거나 옷자락을 정돈해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껴안은 것이다. 그것도 남자가.

낯설고, 단단한, 그 기분과 호흡.

순간 정교랑의 몸이 굳었다.

여인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반근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면 안 돼, 소리 지르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면 누가 보잖아. 그럼 아씨의 정조가······.

그 짧은 비명 소리에 진안 군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 손을 풀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나, 난, 난 그, 그냥······.”

진안 군왕이 말을 더듬었다.

“고마운 마음에······.”

반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고마워? 이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법이 어디 있어?

호색한 같으니라고, 이유도 참!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감사할 것 없어요. 답례라고 했잖아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반근이 발을 굴렀다.

저 호색한의 같잖은 이유만 탓할 것도 없네. 아씨는 무례한 일을 당했으면서 어찌 저런 괴상한 생각을 하시지?

분위기가 이상해지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 군왕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호루라기 하나를 이렇게 좋은 물건과 바꾸다니. 그, 그러니까······.”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섞여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코에 감도는 여인의 맑은 향내 때문인가. 그리고 방금 그 이상하고 부드러운 느낌도······.

허튼 생각 하면 안 돼!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머릿속에 호루라기가 떠올랐다. 진안 군왕은 반사적으로 향낭에 손을 넣어 나머지 하나를 꺼냈다.

“저기, 이건 낭자한테 주는 거예요.”

반근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고는 손에 든 죽통을 함에 넣었다.

“여기 탄환이 네 개 더 있어요. 이렇게 탄환을 통 안에 넣어 쓰면 돼요.”

정교랑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여기 심지에 불을 붙이면······.”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고개를 들자,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의 진안 군왕이 보였다.

“조심해요. 이 장난감은, 잘못 갖고 놀면 자신이 다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다가와 섰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보여 줘요.”

고개를 숙인 채 시범을 보이는 낭자와 가까이 서서 진지하게 보고 듣는 소년을 보며 반근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아, 내가 방금 본 무례한 행동은, 환각이었나?

일가를 데리고 나와 진안 군왕을 배웅하고 난 범강림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 왜 그래? 얼굴이 좀 이상한데?”

반근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반근의 대답에 범강림이 한숨을 쉬었다.

“이노야 내외도 참······.”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지.

그때 마당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보니, 황씨의 품에 안긴 아이가 호루라기를 불며 새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는 관심이 쏠리자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아이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도 웃음을 지었다.

새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계속 마당을 맴돌았다.

“그래, 그래. 밥부터 먹자. 밥 먹고 또 불어.”

황씨가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모두가 대청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새소리가 들렸다.

“어허!”

아이를 맡기고 걸음을 옮기던 황씨가 아이를 혼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유모의 품에 안긴 아이의 입과 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거, 내 거.”

자신의 호루라기를 빼앗긴 줄 아는지 아이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어린 몸종이 얼른 달려와 호루라기를 건넸다.

저 애가 부른 게 아니었나?

황씨가 멈칫하는 사이, 또다시 새소리가 들렸다. 뒤쪽에서 걷고 있던 정교랑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입에서 호루라기를 뗐다.

“나도 있어.”

정교랑이 손에 호루라기를 들고 아이를 향해 흔들며 미소 지었다.

* * *

2월 초사흘, 경성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군왕께서 왕부로 돌아오셨다.”

통보 소리가 들리자 경왕부 사람들이 나와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진안 군왕을 깍듯이 맞이했다. 군왕을 바짝 뒤따르는 내시의 손에는 황제의 칙명을 담은 성지가 높이 들려 있었다.

“전하,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대청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이 두봉을 벗고 두 팔을 활짝 벌리자, 궁녀들이 조복을 벗기고 길을 떠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자. 금군을 데려가 관서군과 합류할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요대까지 찬 진안 군왕이 손을 휘휘 내젓자 궁녀들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전하, 뇌천군도 관서군과 함께 갈 겁니다.”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천군도 그동안 밖에서 고생이 많았지.”

웃으며 당치 않다고 대답한 내시는 진안 군왕이 선반에 있는 작은 함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정 낭자의 댁에서 가져오신 물건이군. 오는 내내 보물을 대하듯 꼭 껴안고 계시더니, 돌아오자마자 자물쇠를 채우셨지. 언제부터인가 허리춤에 걸 수 있는 기다란 향낭 속에 넣어 두셨고.

“전하, 이게 무엇이옵니까?”

“호루라기 두 개와 바꾼 선물이다.”

내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묻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호루라기 두 개?

내시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왕은?”

진안 군왕이 옷자락을 탁탁 털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물었다.

오전 내 실컷 놀고 난 후 씻고 탁자 앞에 앉은 경왕은 옆에 누가 앉든 말든 관심도 없는 듯 앞에 차려진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경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형이 어디 좀 다녀와야 해. 아마 반년이 좀 걸리거나 일 년은 돼야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겁먹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어. 여러 사람이 널 지켜 줄 거야.”

경왕이 응,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진안 군왕의 말에 대답한 건 아니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시와 궁녀는 이미 물러간 후였다. 진안 군왕이 향낭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죽통을 꺼냈다.

“봐, 그 여인이 선물한 거야.”

경왕은 그제야 눈길을 주며 죽통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높이 들며 피했다.

“이건 네가 가지고 놀 수 없어. 너무 위험해.”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지만 경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렸다. 대청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똑바로 앉은 진안 군왕은 죽통을 뒤로한 채 금세 다른 물건에 집착을 보이는 경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향낭을 허리에 찼다.

“전하, 이제 출발하셔야 하옵니다.”

문밖에서 내시가 주의를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안 군왕은 궁녀들이 붙잡고 있는 경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염려 말고 가세요. 경왕은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나이 든 궁녀가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경왕을 쳐다보았다.

“경왕 전하, 군왕과 작별 인사 하셔야죠.”

경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목공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진안 군왕이 앞으로 다가가 경왕을 안아 주었다.

그래, 이런 사람만, 이렇게 가까운 사람만, 가서 안아 주고 싶은 거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으니까. 가장 나약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가슴을 상대에게 보여 줄 수 있으니까.

“이만 갈게.”

진안 군왕은 벌써 숨이 막히는 듯 발버둥 치는 경왕을 토닥여 주고, 손을 푼 후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 *

작가의 말:

‘송나라 개경(開慶) 원년, 수춘부에서 돌화창을 발명했다. 돌화창은 굵은 대나무 통으로 총신을 만들고, 그 총신에 점화용 화승을 넣어 발사한다. 총성이 어마어마하여 백오십 보 밖에서도 들렸다. - <송사(宋史), 병지(兵志)>’

돌화창을 발명한 진규(陳規)는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송나라 장수로 안구(安丘) 출신의 저명한 군사가입니다.

<교랑의경> 19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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