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60)

-민란-

대황자와 진안 군왕의 상소를 본 황제는 이어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상소들을 훑어보았다. 대전 안의 내시들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세밑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황제의 주름살도 점점 깊어져 갔다. 부국강병과 강건한 신체, 연이은 경사도 월식으로 인한 근심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문 현상이 또다시 경고하고 있는 지금, 커지는 근심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엄청난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상소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재민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피해를 본 면적 또한 광범위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무엇보다도 민란이 문제였다.

“지금 무평 지역에서 창고의 문을 열고 곡식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겨울은 어떻게든 나겠지만 봄까지 버티고 여름철 수확까지 기다리기는 힘들 겁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엇보다도 민란까지 일어났으니······.”

고개를 든 황제는 어느새 바짝 다가와 앉은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 역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수척해지셨습니다.”

멈칫하던 황제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다 봤느냐?”

황제가 진안 군왕에게 물으며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황자는 아직도 내시의 시중을 받으며 상소문을 보고 있었다. 다 읽은 상소문은 몇 개 되지 않아서, 대황자 앞에는 아직 읽지 않은 상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황제의 시선을 느꼈는지 대황자의 동작이 빨라졌다.

“다 봤습니다. 나이는 그래도 제가 더 많잖습니까.”

진안 군왕이 말했다. 황제가 웃으며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내시가 얼른 진안 군왕이 읽은 상소문을 옮겼다. 황제는 상소문을 천천히 넘겨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이 간결하고 명확하구나.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

“알고 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간단하다니?”

진안 군왕의 말에 황제가 눈썹을 꿈틀이며 물었다.

“보고 이해하는 건 간단하죠. 어떻게 행할 것인지는 어렵지만요.”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 확실히 쉽지 않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고, 자신의 앞에 놓인 상소문을 진안 군왕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걸 보거라. 네 생각엔 어떤 것 같으냐?”

진안 군왕이 상소문을 받았다.

그때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대황자가 일어서 있었다. 허둥대느라 탁자에 있던 상소문 몇 개가 떨어지며 난 소리였다. 내시 둘이 황급히 꿇어앉아 상소문을 주워 품에 안았다.

“아바마마, 소자도 다 봤습니다.”

대황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말하자 황제는 음 하고 대꾸한 후, 내시에게 상소문을 내려놓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고는 진안 군왕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민란과 구휼 중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제가 물었다.

“당연히 민란부터 평정해야죠.”

대황자가 선수를 쳤다.

“민란이 일어나면 구휼을 방해하지 않습니까. 우선 민란을 일으킨 자들을 진압하여 엄벌에 처하고, 구휼을 베풀어 조정의 인자함을 널리 알리시옵소서.”

황제는 대황자를 힐끔 보고 말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구휼이 먼저입니다. 따지고 보면 민란은 재해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죠. 그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폭도들이 들고일어날 테고, 구휼에 들어가는 비용도 더 커질 겁니다.”

황제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대황자는 긴장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아바마마.”

대황자가 못 참고 입을 열었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과제가 많고 관청의 일도 이제 막 인계받았지만, 그래도 조회 때는 최대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도록 해라.”

황제가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폐하, 신은 종친일 뿐입니다.”

“종친이어도 대조회에는 참석해야지.”

황제의 말에 진안 군왕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만 가 보거라. 일이 바쁠 텐데.”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황제는 물러가는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대황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시선에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상소문을 읽고 지시할 때, 어려운 말로 학문을 자랑해서는 안 되느니라.”

황제는 대황자가 방금 확인한 상소문을 들며 말을 이었다.

“명심하거라. 조정 대신은 오랜 세월 학문을 닦은 자 중에 고르고 골라 선발된 이들이다. 학문으로 치면 그 누구보다 훌륭하지. 네가 문장이나 고전으로 그들을 당해낼 것 같으냐?”

대황자는 머쓱하여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했다. 계속해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글은 공허하구나. 말에 핵심이 없어. 대신들은 하나같이 간교한 자들이다. 저들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저들한테 휘둘리고 말아.

저들은 글재주도 뛰어나고 정무도 훤히 숙지하고 있다. 저들 앞에서 문자를 쓰려 들지 마라. 너 같은 이가 열 명이 있다 해도 저들한텐 못 당해. 그러니 단점을 피하고 장점을 키우거라. 뭐든 솔직히 말하고, 복잡한 일이라 해도 아주 간단한 말로 전해야 해. 자신이 묻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전하는 게 핵심이야.

진안 군왕이 쓴 것들을 보면······.”

대황자는 귀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멍한 채로 상소문을 받았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황제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새해가 되면 너도 이제 열넷이다! 벌써 왕부까지 있으면서! 그 많은 선생을 두고 돌아가며 가르치는 데다 매일 조당에도 나오는데 왜 조금도 발전이 없어?”

황제도 더는 못 참겠는지 초조한 마음을 드러내며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탁자 위로 내던졌다. 대황자는 놀라 움찔하며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식을 들은 귀비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궁을 서성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들어왔다.

“어떻게 됐느냐? 평왕은 어떻대?”

귀비가 다급히 물었다.

“마마, 전하께서는 왕부로 돌아가셨습니다.”

내시가 고했다.

“부르지 않고!”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불렀습니다만, 오지 않겠다고 하시며 급히 떠나셨습니다.”

내시는 머리를 조아리며 저도 모르게 팔뚝을 어루만졌다. 평왕을 급히 붙잡다가 평왕이 휘두른 채찍에 맞아 상처가 난 터였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귀비는 더욱 걱정되는 눈치였다.

“어서 사람을 보내 살피거라. 괜찮은지 알아봐.”

다른 내시가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폐하도 참. 아직 어린애인데 모르는 게 있으면 잘 가르치시지 않고. 그리 호통을 치실 게 뭐 있어?”

귀비는 이를 악물었다.

“평왕이 좀 똑똑해? 뭐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데.”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셔서 그렇겠지요. 조정 일이 워낙 복잡하니 말입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타일렀다.

“심기가 불편한 건 신하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아니냐. 그게 평왕과 무슨 상관이야?”

귀비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본궁이 듣기로는, 진안 군왕 때문이라던데?”

“그건 아닙니다. 진안 군왕도 상소문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군왕은 나이가 더 많지 않습니까. 폐하께 칭찬 한두 마디를 들은 후 바로 갔습니다.”

“본궁이 그럴 줄 알았다. 아주 간사하기 그지없는 놈이야. 그 녀석이 폐하를 뵙기만 하면 평왕이 미움을 받잖아.”

콧방귀를 뀌던 귀비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께서 조회에도 들어오라고 하셨다지?”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한 후, 웃으며 귀비를 위로했다.

“마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은 본디 남을 띄워 주고, 자기 사람에게는 질책을 아끼지 않는 법이지요. 폐하께서 평왕께 엄격하신 건 그만큼 기대가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기뻐하셔야······.”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비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기뻐하기는 개뿔! 그럼 다른 때는 기대가 크지 않았다더냐? 왜 하필 오늘 그리 꾸중하신 건데? 역정을 내시도록 누가 부추긴 게 아니더냐!”

내시는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조정의 일이라 해서 본궁이 모를 줄 알아? 사람을 감정으로 대하지 말고 일의 본질을 보라고들 하지만, 사람과 일이 어디 그렇게 딱딱 나눠진다더냐? 그런 말은 죄다 사람을 속이는 헛소리야!

사람은 누구나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은근히 비교하게 돼 있어. 진안 군왕이 잘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그리 초조해하고 역정을 내셨겠느냐?

그 녀석이 폐하 앞에 얼쩡거리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리 말했거늘, 본궁의 말을 무시하더니.”

말을 무시한 게 아니라, 내쫓을 방법이 없었을 뿐인데.

고개를 숙인 내시가 속으로 투덜댔다.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숙한 척해서 총애를 받더니, 이젠 어떤지 봐라. 아주 야심이 더 커졌어.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조정 일에도 그럴듯하게 견해를 내놓고 있지 않느냐.”

“마마, 아무리 잘해 봤자 일개 종친에 불과합니다. 상이나 받을 뿐이지 뭘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듣다 못한 내시가 말했다. 귀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평왕한테 싫증 나시게 할 순 있지.”

어쩌면 말이야. 아, 아니, 어쩌면이 아니야. 아마 그게 목적일 테지. 경왕이 있는 한, 상이든 선물이든 총애는 부족함이 없을 텐데.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열심히 움직이는 이유가 대체 뭐겠어?

어쩌면, 평왕의 목숨을 노리는 것일지도 몰라.

귀비는 저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돋았다. 순간 이황자한테 사고가 나던 때가 떠올랐다. 소식을 듣고 달려와 태의의 말을 듣던 진안 군왕의 눈에 언뜻 서늘한 빛이 스쳤다.

대황자에게로 향한 그 시선은 사냥감을 보는 독사의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독니를 드러내고, 일격에 목숨을 끊어놓을 순간을 기다리는 눈빛.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속은 없는 군왕 따위를 자신이 왜 그토록 꺼려하고 싫어하는지 다들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들이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황자가 어쩌다가 그 꼴이 되었······. 하지만 진안 군왕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어!

진안 군왕의 눈에 스친 그 서늘한 눈빛은 벌써 여러 해 동안 귀비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눈빛을 떨칠 수 없어 귀비는 마음 편히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 했다.

그놈은 절대 살려 둬선 안 돼! 평왕이 등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치우는 건 너무 무모해!

“가서 고 전시한테 전하거라. 경성을 떠나려거든 혼자 떠나지 말고 진안 군왕도 데려가라고.”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한 후, 천천히 물러났다.

한편 같은 시각, 귀비의 명을 받아 평왕부로 달려온 내시는 말을 전했음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꾸중을 들었으니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마마께선 걱정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평왕부의 대총관이 말했다.

“그래도 전하를 한번 뵙고, 말씀을 올려야 하네.”

귀비의 내시가 말했다. 그러자 평왕부 대총관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오만불손하게 굴었다. 귀비의 내시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궁에 있을 땐 내 앞에서 강아지처럼 굴더니, 이젠 아주 제법 사람 행세를 하네! 내가 평왕을 뵙겠다는데 감히 내 앞을 막아?

무슨 생각이지? 이제 평왕부를 좌지우지하게 됐으니, 혹여 누가 평왕의 신임을 나눠 가질까 겁나기라도 하는 건가?

네놈 따위가 감히!

가만있자.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놈이지만, 장차 평왕께서 등극하시면 이 왕부에서 평왕 시중을 들던 내시들은 황제의 심복이 되는 게 아닌가.

잠저(潛邸)에서부터 시중을 들던 자는 다른 이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 대인,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안에서 어린 내시 하나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같이 들어가면 되겠군.”

귀비의 내시는 얼른 안으로 발을 옮기려 했지만 유 대총관이 막아섰다.

“전하께서 안 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데, 기어이 노여움을 사려 하십니까? 그랬다가 매질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마마께 가서 하소연하실 겁니까? 아니면 혼자 속으로 삭이실 겁니까?”

유 대총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마마께 하소연하자니 모자 관계를 이간질하는 꼴이 되고, 혼자 속으로 삭이자니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 아닌가.

내시는 멈칫하여 생각에 잠겼다.

가만, 그런데 전하께서 사람을 때리실 리가.

평왕 전하는 누구보다 예에 밝고 법도를 따지시는 분이 아닌가. 좀 진부한 면이 있긴 해도 선량한 분인데.

유 대총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사람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 껍데기일 뿐이지요.”

유 대총관은 목소리를 낮추며 내시의 어깨를 탁탁 쳤다.

“오늘은 회포를 풀기 힘들 듯합니다. 전하께서 급히 찾으시는데,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순 없잖습니까.”

말을 마친 유 대총관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귀비의 내시는 유 대총관을 쫓아가며 어이, 어이, 하고 몇 번 불렀지만, 다른 시종들에게 막혀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인, 가시지요.”

평왕부의 시종들이 공손하게 말했다. 내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마당을 나서는데 저쪽에서 두 사람이 낡은 멍석을 들고 뒤쪽으로 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던 내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 유 대총관이 한 말이 귓가를 스쳤다.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데, 기어이 노여움을 사려 하십니까? 그랬다가 매질이라도 당하면······.

설마?

내시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대인.”

양쪽에 있던 시종들이 내시를 막아서며 경고하는 투로 말했다.

“가시지요.”

내시는 험상궂은 표정의 시종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평왕부이니, 평왕 한 사람의 천하리라.

내시는 눈을 내리깔고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마께 염려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전하는 괜찮으십니다.”

유 대총관이 대문 밖으로 따라 나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보자 내시는 또다시 소름이 끼쳤다.

사람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 껍데기일 뿐이지요.

그 껍데기 속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을지 누가 알랴. 평왕 전하는 이미 장성하셨으니······.

내시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후다닥 마차에 올라 눈썹을 휘날리며 내달렸다.

“그 말인즉, 진안 군왕이 벌써 현명하고 유능하며 평판 좋은 종친 노릇을 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죄를 청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는 고능준은 막료가 수집해 기록한 문서를 탁자 위로 내던지며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종친의 평판이 좋아 봤자 좋을 게 뭐 있나? 명줄만 재촉할 뿐이지.”

“마마께서는 전하께 안 좋을까 염려하십니다.”

막료의 말에 고능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희들에게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비단결처럼 고운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휘장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모습은 선경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큰일을 제대로 모르고, 사소한 일만 똑똑히 안다고들 하지.

녀석이 제아무리 뛰어나고 제아무리 발악한들, 평왕한테 안 좋을 게 뭐 있겠나? 평왕이 누군데? 국본이 될 몸이란 말일세. 아직 태자의 자리에 오른 건 아니지만 다들 마음속으론 훤히 알잖나. 장차 이 나라의 군주가 될 분이라는 걸.

군주가 좀 아둔하다고 해서 대신들이 불만을 표하겠나? 하지만 종친이 똑똑하고 유능하면 모두가 불만을 드러내기 마련이지.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가장 먼저 황제부터가······.”

거기까지 말한 고능준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말 한마디에 친형제까지 죽음으로 내몬 게 방씨 가문의 황제인데, 하물며 직계의 적통도 아닌 황족이 대수일까.

“녀석이 교만에 빠져 화를 자초하도록 폐하께서 그리 잘해 주시는 건지 누가 알겠는가.”

막료는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천자의 의중은 예측이 힘들고, 황실은 무정한 곳이었다.

“내 말대로 경성에 남겨 두게. 사사건건 뽐내서 이름을 드높이게 두라고. 나야 오히려 고마울 뿐이니······.”

고능준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마마께서 스스로를 괴롭히시니 안타까운지고. 남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 자신 스스로 괴롭힌다는 옛말이 딱 맞는군.”

막료가 미소를 지었다.

“마마도 대인께서 당하신 변고로 마음이 불안하여 그러실 테지요. 대인, 정녕 외직을 자청하시려는 겁니까?”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세상이 넓어 보이는 법일세. 지금 경성에 남아 있어 봤자 폐하의 염증만 더해질 뿐이야. 차라리 멀리 피해 있는 게 낫지. 폐하의 눈에 안 보이니 거슬리는 게 줄어들 테고, 진소 또한······.”

고능준은 ‘진소’라는 말에 힘을 실으며 이를 악물었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인사야. 권력을 손에 쥐고 득의양양하라지. 어디 두고 보자고. 아무튼 경성 쪽은 얼추 대비를 해 놨으니, 내가 떠나도 큰 어려움은 없을 걸세.”

막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진안 군왕은······.”

“마마께서 그리 불안하시다니, 내보내는 수밖에.”

고능준은 다른 문서 한 장을 손에 들며 말을 이었다.

구휼이 먼저입니다. 따지고 보면 민란은 재해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폭도들이 들고일어날 겁니다.

진안 군왕이 황제 앞에서 대답한 말이 불과 반나절도 안 되어 고능준의 탁자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막료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막료의 얼굴에는 근심을 벗어 던진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경성에 계시든 안 계시든 크게 문제 될 건 없겠군.

“그럼 구휼 쪽에 손을 쓰게. 말만 앞세우면 쓰나. 좋은 평판을 얻고 싶으면, 좋은 평판을 얻으러 가야지.”

고능준이 문서를 탁자 위로 휙 내던지며 말했다.

옥대교 앞에서 말을 멈춘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교랑의 저택 대문을 쳐다보았다. 대문 앞은 아무도 없어 썰렁하기만 했다.

“이제 곧 새해라 글씨 연습을 안 하는 것이더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고, 무엇보다도 정 낭자가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함께 살잖습니까. 그러니 여기까지 나와 글씨를 쓰긴 힘들지요.”

진안 군왕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깜빡했네. 지금은 여기 안 살지, 참.

“전하, 그래도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시종이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진안 군왕은 말을 앞으로 몰며 말을 이었다.

“거긴 낭자의 집이 아니다. 여기가 낭자의 집이지. 난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

오늘은 벌써 섣달 스무여드레였다. 색지와 홍등으로 장식한 저택에서는 세밑 분위기가 물씬 났고, 맛좋은 음식 냄새도 가득했다.

범강림은 분주하게 움직이던 일을 멈추고, 갑작스레 방문한 귀빈을 넓고 환한 대청에서 맞이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안 가져갔군.”

진안 군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집안의 배치와 장식품은 그대로였고, 여인이 쓰던 방석마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네. 누이가 물건을 안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있든 쓸 물건은 있기 마련이라고요.”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음, 차는 좀 달라졌는데.”

범강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오셨을 땐 늘 반근이 차를 우렸습니다. 반근은 떠나고 없는데, 여기 남은 어린 몸종들은 반근의 솜씨를 못 따라가고 있지요.”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내가 왔을 땐 늘 반근이 차를 우렸다고?”

“네.”

“그럼 다른 사람이 왔을 땐?”

다른 사람?

“저희 집에 오시는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전부 반근이 차를 우리죠.”

범강림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또다시 아, 소리를 내며 웃고는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회랑 아래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황씨가 옆에 있는 어린 몸종을 힐끔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가 드시던 차, 아직 남은 거 있니?”

어린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준비해 놨다가 반근이 오거든 차부터 우리라고 해.”

황씨의 말에 몸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이쪽에서 그런 대화들을 하고 있는데 대청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황씨도 얼른 따라 일어났다. 진안 군왕이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하, 벌써 누이를 부르러 갔습니다만.”

범강림이 배웅을 나가려 하며 고하자, 진안 군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거 아닙니다. 다만······.”

진안 군왕이 범강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범 군감이 형제들과 함께 늑대를 죽이던 때가 기억나는군. 일곱 형제가 늑대 떼를 전부 물리치던 게 엊그제 일 같소.”

그 말에 멈칫하던 범강림이 곧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지.

“다른 이들은 소문을 듣고 범 군감의 형제들이 일당십의 용사라 하지만, 난 내 눈으로 목격해 알고 있지.”

진안 군왕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로 들려왔다. 범강림은 과찬이라고 말하며 진안 군왕에게 예를 표했다.

“범 군감은 지금도 그때처럼 몸놀림이 날렵한지 모르겠군.”

진안 군왕이 범 군감의 어깨를 쳐다보며 말하자, 범강림이 멈칫했다.

“범 군감의 창법이 일품이라지. 나와 한번 겨뤄 보는 게 어떻소?”

범강림은 그제야 진안 군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손사래를 치며 감히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의 태도는 단호했다.

“명령이라면?”

범강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문으로 들어선 반근은 깜짝 놀랐다.

“언니, 다들 뒷마당에 있어요.”

어린 몸종이 겁을 먹은 듯 쭈뼛거리며 말했다.

“전하는 가셨고?”

“아니요. 전하도 뒷마당에 계세요.”

대답을 마친 어린 몸종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정교랑을 향해 얼른 예를 올렸다.

뒷마당에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지?”

반근은 중얼거리며 얼른 정교랑을 따라 뒷마당으로 갔다.

뒷마당에 있는 작은 연무장에서 두 사람이 겨루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두꺼운 옷은 벗은 채였다. 날렵한 몸놀림에서 활력과 생기가 넘쳤다.

“한 분은 큰 도련님이고, 다른 한 분은 누구지?”

반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소매를 걷어 올린 터라 소년의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소년은 나무 막대를 쥐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범강림에 비하면 다소 왜소한 체구였지만 근육은 탄탄하고 다부져 보였다.

나무 막대의 움직임에 따라 소년이 휙 몸을 돌렸다.

“전하!”

반근이 놀라 외쳤다. 그 외침에 앞쪽에서 둘을 에워싼 채 구경하고 있던 황씨 등도 고개를 돌렸다. 범강림 역시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막대를 휘두르자, 범강림의 손에 있던 긴 막대가 저쪽으로 날아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군왕이 숨을 몰아쉬며 활짝 웃었다.

“역시 수련을 위한 수련과는 다르구려.”

군왕은 예를 표하는 범강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범 군감은 이런 수련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 힘겨워 보이던데.”

“전하께서 큰 도련님보다도 뛰어나신 거예요?”

반근이 놀라 물었다.

“그건 아냐. 오라버니는 사람을 죽이는 무예를 익힌 거고, 전하는 그저 무예를 익히신 거라 그래.”

사람을 죽이는 무예는 사람을 죽일 때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때가 아니고, 죽일 수 없는 상대이기도 하니 싸움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창법이 이렇게 훌륭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셨는지 하체가 안정적입니다. 실전 경험이 조금 부족할 뿐이지요.”

범강림이 진안 군왕에게 다시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짜 폭도와 일대일로 겨루면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소?”

진안 군왕의 질문에 범강림이 멈칫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승산은 전혀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군왕이 폭도와 가까운 거리에서 겨루는 상황이 온다면, 호위들이 전부 죽을 정도로 위험에 빠졌다는 뜻이다. 상대 역시 그런 일을 벌일 때는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일 테니 명을 끊어놓기 전엔 물러서지 않으리라.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옆에 있던 시종이 건네는 옷을 받아 걸쳤다.

“도움을 청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범강림과 황씨는 이미 물러난 후였다.

“우선 씻고 나서 말씀하세요.”

정교랑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여기서 씻으라고? 겨울에 찬 바람을 쐬었으니 풍한에 걸릴까 봐 그러나.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씨와 범강림도 정교랑의 말을 듣고 얼른 여종들과 몸종들을 시켜 준비하게 했다.

뜨거운 물로 간단하게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진안 군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전하, 그래도 새 옷이니 불쾌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범강림이 말했다.

“불쾌하지 않소. 상등 옷감을 썼군.”

진안 군왕이 양팔을 활짝 벌리자 시종들이 겉옷을 입혀 주었다. 진안 군왕은 머리를 빗고 관을 올린 후 밖으로 나왔다.

대청에는 숯을 넣은 화로가 놓여 있고, 새로 우린 차도 놓여 있었다.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보는 여인 옆에 놓인 향로에서는 푸른 연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봄처럼 따스하고 평온한 정경이었다. 진안 군왕은 그 정경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움직임 소리를 들은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전하, 앉으세요.”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예를 표하며 다른 쪽 문을 열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차는 제대로 맛이 나는군.”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난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범강림이 얼른 예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쪽에서는 지낼 만합니까?”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웃었다.

“아, 또 깜빡했네요. 낭자를 불편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어색하게 할 사람도 없고.”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벌써 폐를 많이 끼쳤네요. 긴말 안 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세 사람에게 다시 차를 올리는 반근을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낭자한테 부탁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어떻게 어렵죠?”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은 자세를 단정히 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려 예를 표했다. 깍듯한 예에 범강림이 흠칫 놀랐다.

“방백종이 정 낭자께 부탁드립니다. 경왕을 돌봐 주십시오.”

진안 군왕이 말했다.

경왕을 돌봐 달라고?

범강림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경왕을 다시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 괴물 취급을 받으며 갇혀 있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궁 밖에 두자니 안심이 안 되고요. 먹고 마실 줄도 모르고, 추운지 더운지 아픈지 괴로운지도 모릅니다. 은혜도, 원한도 기억하지 못하니 어쨌든 정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나한텐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요.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생각나는 건 친구뿐이네요. 그래서 부탁을 좀 할까 합니다.”

친왕을 돌봐 달라고? 그, 그런 일을 누가 감히 감당한단 말인가!

범강림은 다시금 예를 표하는 진안 군왕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이더러 경왕을 돌봐 달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누이가 경왕을 돌보면, 자기는 뭘 하려고? 돌봐 달란 말이 아니라 병을 치료해 달라는 말인가?

“그럴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한 건가? 이렇게 깔끔하고 시원시원하게?

범강림이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감격을 표하거나 무언가를 더 묻지도 않은 채 대뜸 목패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있으면, 평왕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안에 있던 이들은 전부 일어나 배웅하러 나갔고, 진안 군왕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질문하고 답하고, 청하고 응낙하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원시원하네.

“누이.”

범강림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상엔, 언제나 일이 있기 마련이죠.”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 마요. 대단한 일은 없을 거예요.”

누이의 말을 들으니 범강림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가씨, 밥 먹고 가요.”

황씨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케, 신경 쓰지 마요. 난 저쪽에 가서 먹을게요.”

반근은 어느새 두봉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걸쳐 주었다. 아기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온 범강림과 황씨는 정교랑이 마차를 타고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보, 그 전하 말인데······.”

잠시 망설이던 황씨가 못 참겠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한테 엄청······ 잘해 주는 것 같아요.”

“누이는 뭐 잘해 주지 않나? 누가 됐든 인간성이 남아 있고 예의를 지킬 줄 알면, 누이는 다 잘해 주지. 도움을 준 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누이는 열 배, 백 배, 천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잖소.”

멈칫했던 황씨가 실소를 터트리며 손을 들어 범강림을 탁 쳤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범강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무슨 얘긴데?”

황씨는 범강림을 잠시 노려보다가 아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말을 말아야지!”

황씨가 아기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범강림은 영문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같은 여인인데 어쩜 저리 달라. 누이 말하는 것 좀 봐. 얼마나 간단명료한지.”

정씨 가문의 새 저택 마당은 새집이라 그런지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부인, 부인, 고기와 찬거리를 사 간 돈을 달라고 재촉합니다.”

여종 하나가 대청으로 급히 들어와 말했다. 벌써 대청에 들어와 있던 여종 서넛이 돌아보았다.

“부인, 향초 값도 더는 미룰 수 없어요. 벌써 신을 모셨는데 향불을 꺼트릴 순 없잖습니까.”

“부인, 예약해 놓은 장신구는 어떻게 할까요? 점포에서 사람이 와 재촉하네요. 필요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주겠다면서요.”

여종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올렸다.

“그만, 그만!”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탁자에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대청 안에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칠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 장신구는 왜 새 옷이랑 같이 안 왔어요?”

정 이부인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께서 좋은 거로 골랐다고 하셨잖아요.”

정칠랑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금방 보내 주마. 그만 나가 보거라. 어미가 바빠서 그래.”

정 이부인이 손을 휘휘 내젓자, 정칠랑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나가려 했다. 그때 어린 몸종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부인, 큰 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그 말에 대청에 있던 이들이 전부 반색을 했다.

“어서 가자, 어서.”

정 이부인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여종들도 정 이부인을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정칠랑만 대청에 홀로 남아 씩씩거렸다.

“뭐 하는 거야? 다들 왜 나가는 건데?”

“큰 아씨를 마중 나가는 거죠.”

옆에 있던 어린 몸종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정칠랑은 눈을 부라리며 몸종을 노려보았다.

“마중을 나가? 대체 왜? 걔가 무슨 아버지라도 돼?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온 가족이 배웅하고 마중을 나가게?”

“무슨 일이냐? 칠랑, 갑자기 아버지는 왜 찾아?”

문밖에서 정 이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밑 휴가에 들어간 정 이노야가 평상복 차림으로 건들건들 움직이며 들어왔다. 사랑스러운 딸을 본 정 이노야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아비가 너와 아우를 데리고 나가 장터 구경을······.”

“아버지!”

정칠랑이 정 이노야의 말을 끊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걔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아랫것들을 데리고 마중도 나가고 배웅도 하는 것 좀 보세요!”

“걔라니?”

정 이노야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언니 말이에요.”

정칠랑이 못마땅한 투로 대답했다. 정 이노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것.”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콧방귀를 뀌었다.

“밖에서도 버릇없이 굴며 사고를 치더니, 집에서도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구나. 체통을 지켜야지!”

한편 같은 시각 정 이부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교랑과 함께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춥지는 않고? 저녁엔 뭐 먹고 싶니?”

정 이부인은 정교랑이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살뜰한 모습이었다.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여종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교교, 이제 곧 새해잖니. 집안에 사야 할 게 적지 않은데······.”

“수고가 많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대답에 더욱 환히 웃었다.

“한 식구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해.”

정교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반근이 건네는 따뜻한 차를 받았다. 정 이부인은 목록 하나를 내밀며 무엇을 살 건지 하나하나 소상히 일러 주고, 새로 보내 준 옷이며 장신구는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하던 정 이부인은 정교랑보다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교교.”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돈이 적잖이 들 것 같은데······.”

반근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우리 정씨 가문은 분가를 안 했잖니. 집안 재산은 전부 대방 손에 있어. 집을 떠나면서 받은 돈은 오는 길에 다 썼고 말이야. 여기 도착해서도 돈이 많이 들었고······.

새해를 사치스럽게 맞이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게 맞이하는 건 또······.”

정 이부인은 말을 빙빙 돌리며 앓는 시늉을 했다.

“원하는 게 뭐죠?”

“돈이야.”

정교랑이 말을 자르며 묻자 정 이부인은 엉겁결에 솔직히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돈이 필요할 땐, 반근한테 말하면 돼요. 돈은 다 반근한테 있거든요.”

반근?

정 이부인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아니에요.”

반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이 내리자 마차 한 대가 대문을 통과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냐?”

정씨 가문에서 따라온 시종이 소리쳤다. 이어 시종은 대문 근처에 서서 대화 중이던 두 시종을 보며 물었다.

“너희는 왜 묻지도 않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시종은 정교랑을 따라 이곳으로 온 이들이었기에 정씨 가문의 시종과는 잘 모르는 사이였다. 물론 당초 강주에서 본 적이 있긴 했다. 듣기로는 주 노야의 사람이라고 했다.

명목상으로는 문지기지만 형식적일 뿐이었고 가끔 청소나 하는 정도지 문은 늘 정씨 가문 사람이 지켰다.

“그 반근 낭자야.”

“그 반근?”

정씨 가문의 시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퍼뜩 깨달았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고, 온몸에 금은을 두르고 있으며 심부름 따위는 전혀 안 하는 그 하녀?”

“반근 낭자, 반근 낭자.”

두 여종이 문 앞에서 외쳤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반쯤 풀어 헤친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왜요?”

놀란 두 여종이 뒷걸음질을 쳤다.

“부, 부인께서 잠깐 오라고 하시는데.”

여종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여종은 시녀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갈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시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딱히 기분 나빠하는 내색 없이 말했다.

“알았어요. 옷 갈아입고 머리부터 좀 빗고요.”

내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정 이부인은 시녀가 왔다는 말에 얼른 일어나 나가 보려 했다. 정 이노야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딸자식을 마중 나가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시녀 같은 아랫것도 직접 마중을 나가려고? 체면은 어디로 집어 던진 게야?

정 이부인은 정 이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걸 보고 눈웃음을 지으며 달래 준 후, 얼른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을 뵈옵니다.”

위아래도 모르진 않는 걸 보니 그래도 똑똑하구나. 안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매질해 죽여도 시원치 않은데!

정 이노야는 차가운 냉소를 짓고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은 책을 향해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가 있었다.

“이제 곧 세밑이라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안 그래도 부인께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우선 일손이 부족한 건 오늘 심부름할 몸종이랑 여종, 사환을 골라 놨으니, 내일 데려올 거예요.”

“정말 잘됐네. 집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으니 많이 필요하진 않아. 청소랑 허드렛일 정도만 하면 돼. 그보단 새 물건들을 사들이는 게 더 급한데······.”

“네, 필요하신 만큼 양껏 사세요. 정산은 나중에 제가 한꺼번에 할게요.”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의 바르고 깍듯하며 목소리도 사근사근하여 듣기 좋구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부류는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

“반근, 더 사야 할 건 없는 것 같니?”

“소인은 안 봐도 돼요. 부인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쪽에서 정 이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 이부인이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들어왔다.

“노야, 올해는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갈지 모르겠네요. 선물을 한 백 개쯤 준비하면 될까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백 개?

강주 집에서 친구와 지인들한테 전부 선물을 보낼 때도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았는데.

“아휴, 아무튼 많이 준비해서 나쁠 것 없어요. 남으면 뒀다 쓰면 되죠. 그 애한테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디 한번 펑펑 써 봐야겠네.

정 이노야가 손뼉을 쳤다.

그게 문제였어!

“문제라니요?”

정 이부인은 여전히 여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장부를 꺼냈다.

먹을 거며 마실 거며, 새 옷이며 장신구까지 전부 아무 문제 없어.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뭘 더 사야 하나 고민하는 정도일까.

물론 금은보화가 우선이지. 그래야 나중에 칠랑의 혼수로도 쓰고······.

아니지, 칠랑 혼수는 급한 게 아니잖아. 그때쯤이면 제 언니도 시집을 갔을 텐데, 설마 동생을 초라하게 보내겠어?

일단 일상에서 쓸 것부터 마련하자. 새해를 맞이하려면 접대해야 할 곳도 많은데, 경성에서 창피당하면 안 돼.

탁 하는 소리가 정 이부인의 생각을 끊었다. 정 이부인이 놀란 눈길로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말 못났군. 그리 쫓겨나 망신을 당했으면서 또 그리 좋아 어쩔 줄 모르시오?”

정 이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였다.

“당연히 좋죠. 아주버님이랑 형님처럼 재산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그럼 안 좋아요?”

정 이부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교교가 정말 통이 크네요. 아무래도 부녀지간이라 더 가까워서 그러는 건지······.”

당초 강주에서 조 집사가 세 치 혀를 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로 인해 형님네로 불똥이 튀었지.

“가깝긴 뭐가 가까워!”

정 이노야가 못마땅한 듯 소리쳤다.

“세상에 저런 자식이 어디 있소? 당신도 그게 무슨 꼴이야? 그 계집 앞에서 누가 웃어른이고 누가 손아랫사람인지 모르겠더군. 돈 좀 줬다고 그리 좋아 죽나?”

“네, 그 애가 내 체면을 살려 줬잖아요. 내 말도 잘 듣고요. 그러니 좋아할 수밖에요.

노야, 노야는 그 애의 친부지만 난 계모일 뿐이에요. 그 애가 날 깍듯이 대접하며 공경하길 바랄까요? 아이고, 됐네요. 난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그렇다고 날 깍듯이 대하고 공경하는 것도 아니잖아!

정 이노야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체통을 지켜야지! 이 집에서 진정 귀한 이가 누군지 몰라 그러시오?”

“당신이 귀하죠. 당신이 귀해요.”

정 이부인은 웃으며 정 이노야를 달랜 후, 얼른 장부를 살폈다.

“올해는 적당히 넘기면 안 돼요. 우리의 체면이 걸렸다고요. 여긴 경성이지 강주가 아니잖아요.”

체면? 체면이라는 게 남아 있나? 저잣거리를 지나 어사대까지 압송되던 그때, 체면은 진작 바닥이 난 것을.

정 이노야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던지고 일어났다.

정 이노야가 손에 들고 있던 폭죽을 마당으로 던졌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도 폭죽이 팡 터지며 불꽃이 번져 나갔다.

“저기 저 폭죽 좀 보세요. 저기요.”

유모가 아이를 안고 땅에서 빙글빙글 돌다 터지는 폭죽을 보며 떠들었다.

“경성이 좋긴 좋아.”

금실로 바느질한 갈색 두봉을 걸친 정 이부인이 말했다. 두꺼운 여우털 덕분인지 안색이 더욱 밝아 보였다. 정 이부인은 여우털 두봉이 마음에 쏙 들어 잠시도 벗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하늘 높이 올라가 팡팡 불꽃을 터트리는 폭죽과 땅을 빙빙 맴돌다 불꽃을 터트리는 폭죽을 번갈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절로 기분이 좋아져 눈을 떼기 힘들었다.

“강주에서는 저런 거 못 봤어.”

“부인, 이건 이씨 가문의 폭죽 중에서도 상등품이에요.”

옆에 있던 여종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알아봤는데, 시중에서는 하나에 십 문을 줘도 없어서 못 산대요.”

누군가가 거들었다.

하나에 십 문이라고?

연이어 펑펑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던 정 이부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다 얼마야!

“우리 집 폭죽은 돈 주고 산 거 아니에요. 이씨 가문에서 친히 보내온 거죠. 우리 큰 아씨는 이씨 가문 사람의 스승이잖아요. 폭죽은 아무것도 아니죠. 새해 선물은 또 어찌나 많이 보냈는지······.”

말로만 듣던 경성의 거상이!

어디 이씨 가문뿐이겠는가. 요 며칠 정씨 가문의 저택을 찾아오는 이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부 높으신 분들의 명첩을 들고 찾아온지라 벌써 크고 작은 상자들로 고방이 가득 찼을 정도였다.

정 이부인은 손으로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까무러칠 만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역시 경성에 오길 잘했어! 진작 왔어야 했는데!

“교교, 교교.”

정 이부인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회랑 아래에 서서 좌우에 있는 두 몸종의 시중을 받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정사낭도 서 있었다.

“교교, 춥진 않니? 폭죽이 무섭진 않고? 이쪽으로 오렴.”

정 이부인이 정교랑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언제 온 건지 정칠랑이 쪼르르 달려와 정 이부인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머니, 저도 무서워요.”

정 이부인은 눈을 부라리며 정칠랑을 떼어내고, 계속해서 정교랑을 불렀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표했다.

“전 밤을 못 지새워서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일찍 쉬렴.”

정 이부인은 다정한 말을 건넨 후, 사환들을 시켜 폭죽을 그만 터트리도록 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며.

“그럼 이웃집에서 터트리는 폭죽은 어쩌려고? 아예 경성 사람들 죄다 터트리지 말라고 하지 그러시오?”

옆에 있던 정 이노야가 냉랭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자 정 이부인이 그를 노려보았다.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지!”

정 이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저쪽의 정교랑은 벌써 자리를 떴고, 정 이노야의 말소리를 들은 어린 몸종 둘만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숙부님.”

보다 못한 정사낭이 나섰다.

“사낭, 이제 곧 과거 시험이 아니냐. 새해라고는 하나 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공부하러 가거라.”

정 이노야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한 후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유모의 품에 안겨 불꽃을 잡으려고 버둥거리는 아들을 받아 안았다.

“뭐 하는 거예요? 맘에 안 들면 그냥 신경을 꺼요.”

정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으르렁댔다.

“왜 그 애 심기를 건드려요?”

“죄다 그 애한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처럼 보는 그 표정이 영 눈에 거슬려서 그렇소. 신비롭게 뭔가 있는 것처럼 꾸며대니 남한테 발고를 당하지.”

정 이부인이 웃으며 정 이노야를 쿡 찌르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아직 안 들어갔어요.”

하지만 정 이노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저 애를 무서워할까 봐? 꾸중이 아니라 매질을 한들 누가 감히 뭐래? 난 저 애 아비야. 감히 아비 말을 거역해?”

“아버지, 저 때리지 마세요.”

정칠랑이 부친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하자, 정 이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칠랑을 어찌 때리누. 우리 칠랑은 말도 잘 듣는걸.”

품에 안긴 아들은 벌써 지루한지 마당 쪽으로 가자고 팔을 내밀었다.

“그래, 가자. 아비가 폭죽 터트려 주마.”

정 이노야가 아들을 안고 웃으며 층계를 내려갔다.

“애 잘 봐요. 괜히 놀라게 하지 말고.”

정 이부인이 뒤에서 당부했다. 정칠랑도 정 이부인에게 매달리며 졸랐다.

“어머니, 저도 갈래요.”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붙잡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 얼굴이나 손에 불꽃이 떨어져 행여 흉이라도 지면 큰일 나. 우리 칠랑의 어여쁜 얼굴을 망치면 안 되잖아.”

정칠랑은 밝게 웃으며 정 이부인에게 기댔다. 그러고는 사환들의 손에서 폭죽을 받아 직접 불을 붙이는 정 이노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폭죽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마당에서 들리고, 크고 작은 환호 소리와 탄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마당 문을 나온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밝게 빛나는 등롱과 눈처럼 내리는 불꽃이 하늘과 땅에서 어우러지며 화려하게 반짝였다. 꽃을 수놓은 화려한 옷을 입은 일가족이 밝게 웃으며 명절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반근.”

시녀가 고개를 돌리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고하는 투로 반근을 불렀다.

“뭐 볼 게 있다고. 어서 가자.”

반근은 얼른 대답하며 시선을 거두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누이.”

정사낭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이, 불꽃놀이 좋아해? 나도 한번 해 볼까?”

정교랑이 정사낭을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해 이씨 가문에서 만든 폭죽은 정교랑이 무원산 형제들을 위해 만들었던 폭죽에 버금갈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이무의 뜻인지 이씨 가문의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씨 가문에서는 폭죽과 함께 배당금을 보내왔다. 물론 정교랑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시녀가 맡아 관리했다.

여기저기서 팡팡 터지는 불꽃이 명절 분위기로 한껏 달아오른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밤하늘의 절반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정씨 가문의 저택이 불타던 그때처럼······.

그때가 양씨 일족에게는 더없이 기쁘고 경사스러운 순간이었으리라.

“난 불꽃을 별로 안 좋아해요.”

정교랑이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오라버니, 걱정 마요. 난 괜찮아요. 기대한 적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죠.”

정사낭이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그만 공부하러 가요. 나도 자러 갈게요.”

정교랑은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고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한텐 오라버니가 있잖아요. 관심이나 정은 얼마나 많은지보다 얼마나 진심인지가 중요해요. 진심이라면,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죠.”

그래, 나도 있잖아.

정사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이, 푹 쉬어. 난 공부하러 갈게.”

두 사람은 서로 예를 표한 후, 각자 자리를 떴다.

방을 지키고 있던 두 여종과 두 몸종이 돌아온 정교랑 일행을 향해 얼른 예를 표했다. 화로 덕에 방 안은 따스했고, 향로에서도 새 향내가 났다. 자리끼와 따뜻한 야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시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언니.”

어린 몸종 하나가 밖에서 급히 달려와 물었다.

“준비한 돈, 나눠 줄까요?”

폭죽을 터트린 후 아랫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소쿠리에 돈을 준비해 둔 터였다. 폭죽을 다 터트리기도 전에 정교랑은 쫓겨나다시피 돌아와야 했지만.

시녀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나눠 줘.”

시녀는 지금 마당에 서 있는 대여섯 사람을 쓱 훑어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씨의 돈은 아씨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한테 나눠 줘야지. 너희끼리 나눠 가져.”

그 말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반근 낭자, 그 말은, 그 돈을, 우리 몇 명한테 전, 전부 다 주겠다고?”

나이 든 여종 하나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물으며 자신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요. 받기 싫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마당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털썩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낭자.”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올리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기쁨과 흥분이 묻어났다.

돈이 한 소쿠리 가득 있잖아! 이 집안 하인 스물넷이 공평하게 나눠 가졌어야 할 돈인데, 우리 다섯이 다 가지라니!

아휴, 수지맞았네!

시녀가 손을 내저었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가서들 놀아요. 오늘 밤엔 마음껏 즐겨요.”

여종들과 몸종들은 감사 인사를 올리고, 돈을 나눠 줄지 물어보러 뛰어왔던 어린 몸종을 에워싼 채 돈을 들고 떠났다.

정월 초하루 아침, 정 이부인은 어찌나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돈을 한 소쿠리나!”

“네, 부인. 그것도 넘칠 정도로 가득 담았는데, 그걸 다섯이 죄다 나눠 가졌답니다! 다섯 명이서요. 부인, 그들이 평생 상으로 받는 돈을 다 합쳐도 그 정도 될까 말까인데 말입니다!”

옆에 있던 여종이 흥분하여 목청을 높였다.

그날 밤 다섯 사람은 은밀히 돈을 나눠 가졌지만, 소식은 하룻밤도 안 되어 쫙 퍼져 나갔다. 집안 하인들은 전부 눈이 시뻘게져 야단법석을 떨었다.

난 왜 그때 큰 아씨 옆에 안 있었지?

아니, 근데 큰 아씨는 왜 일찍 들어가신 거야?

“망할 것 같으니라고. 그걸 왜 펑펑 써 버린 건데?”

“큰 아씨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고, 전부 그 반근이 말한 거래요.”

요 며칠 지켜본 덕에 정 이부인도 어느 정도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반근은 정씨 가문의 지출만 관리하는 게 아니었다. 정교랑의 손에 있는 점포도 전부 반근이 도맡아 관리했다.

말하자면 강주에 있는 조 집사와 같은 인물이었다.

역시 똑같아. 돈을 돈으로 안 여기는 모양새 하며······. 어쨌든 자기 사람한테 쓴 거니까, 뭐.

정 이부인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 환하게 웃었다.

통 큰 거야 좋지. 쩨쩨한 게 무서울 뿐.

“자,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두 여종도 기쁜 얼굴로 의궤를 열어 새 옷을 꺼냈다. 여종들은 옷을 갈아입혀 준 후 머리도 새로 빗겨 주며 치장을 도왔다.

“그러고 보니······.”

정 이부인이 손을 멈추고 아름답게 치장한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말했다.

“세밑에 말까지 꺼냈으면서, 정작 사들인 물건은 별로 없잖아?”

한편 같은 시각 서북에서도 새해의 첫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용곡성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성문 안팎을 가득 메운 백성들은 대군이 큰길에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용곡성의 새해는 대군이 보름 동안 기습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성문 앞에는 작은 산이 두 개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는 노획한 전리품을 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군의 수급(首級)을 쌓은 것이었다.

살아 돌아온 가족과 상봉하는 기쁜 마음과 죽어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는 비통한 마음이 성문 앞에서 어우러졌다.

“출정할 때 군량미를 별로 안 가져가 걱정이 많았지.”

장수들이 인파 속을 헤쳐 나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부족하긴 했어. 행군 속도를 높이려고 우리가 또 절반이나 버렸으니······.”

그 말을 들은 다른 장수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 대승을 거둔 거야?”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장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다 주 시금 덕분이지.”

장수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다가 무리 속에 있는 청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육낭, 이리 와라.”

사방이 시끌시끌하고 복잡했지만, 청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빛을 받고 있는 청년의 얼굴은 모진 고초로 거칠고 수척했지만, 또 그만큼 옹골차고 다부져 보였다.

고개를 돌리는 주육낭을 보고, 장수가 손짓했다. 주육낭이 말을 몰고 달려와 자신을 부른 장수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각직(閣職: 관직명).”

장수는 웃음을 터트리고,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군량이 부족해 진퇴양난의 처지였는데, 여기 이 주 시금이 병사 스물을 이끌고 단산을 기습하여 오랑캐들의 곡식을 빼앗았네. 덕분에 오랑캐는 큰 피해를 보고, 우리는 배를 채우게 됐지.”

다들 놀라며 감탄했다.

“과찬이십니다. 척후병의 정찰이 뛰어났고,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워 준 덕분입니다.”

주육낭의 얼굴에서는 우쭐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용맹하면서도 공을 탐하지 않는다니, 실로 뭇 청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닌가. 이런 젊은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장수들은 주육낭을 칭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 안으로 들어와 거리를 걷노라니 장수들의 식솔들이 마중을 나왔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는 자리인 만큼 눈물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장수 가족들의 상봉 역시 성 밖에서 벌어진 병사 가족들의 상봉과 다를 바 없었다.

“육낭, 육낭.”

마중을 나온 주씨 가문 숙부님들과 백부님, 형님들을 만나 인파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주육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쪽 인파 속에서 서사근이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주육낭을 보고 서사근은 포권의 예를 취하며 환영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뭐지? 나도 가족으로 여기는 건가?

주육낭이 어색해하며 망설이는 사이, 서사근이 몸을 돌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가족도 없는 처지니······. 올 때만 해도 일곱 형제였거늘, 눈 깜짝할 사이에 홀로 남겨졌군.

인파를 헤치며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주육낭은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육낭!”

누군가가 주육낭의 어깨를 탁 치며 부르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가자. 종 장군께서 너희를 뵙겠다고 하신다.”

주씨 가문의 사내 하나가 말했다.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 앞에서 관청으로 들어가는 장수들을 바라본 다음 얼른 뒤따라갔다. 주육낭은 문을 들어서기 전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지만, 거리에서는 더 이상 서사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린 관청에서는 공로를 치하하는 연회가 한창이었고, 밤하늘에는 폭죽이 연이어 팡팡 터졌다. 불꽃이 어찌나 화려한지 거나하게 취한 이들조차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높이도 날지?”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얼른 고개를 돌린 주육낭은 종승포가 보이자 얼른 술잔을 내려놓고 예를 표했다. 종승포는 손을 뻗어 주육낭의 어깨를 두드려 준 다음, 일어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히 경성에서 급히 보낸 이씨 가문의 폭죽이다. 이씨 가문 폭죽 중에서도 최신의 최상급 폭죽으로 보냈다더군.”

종승포가 웃으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오늘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서지.”

주육낭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종승포는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씩 웃었다.

“훌륭하구나. 신비궁도 잘 쏘고, 폐하께서 직접 시금으로 진급시키신 것도 그렇고. 가히 명실상부해.”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장군.”

주육낭이 진지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겸손할 것 없다. 받아 마땅한 것이야. 없는 일을 지어내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듣자니 경성에 또 새로운 물건이 나왔다더구나.”

종승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서 시험해 보고 싶지 않으냐? 이번엔 두 계급 진급할지도 모르는데.”

“운이 따라 주는 건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이번엔 다른 이에게 기회를 주죠.”

주육낭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종승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녀석이 고집은. 알았으니 짐 챙겨라. 같이 경성으로 공을 치하받으러 가자. 간 김에 소리 한 번에 만인을 울린다는 물건도 겸사겸사 챙겨 오고.”

말을 마친 종승포가 자리를 떴다.

경성으로 가자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주육낭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는 종승포를 쳐다보았다.

경성이라······.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터라 서북은 정월의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골목에서는 파바박 폭죽 터지는 소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들려왔다.

“더 좋은 날도 올 거야.”

서사근이 마당에 앉아 손수 신발을 기우며 말했다. 새로 지은 겨울옷을 입은 아이들 네다섯 명이 마당에 빙 둘러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사근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저씨, 더 좋은 날이라고요?”

아이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그래. 지금은 국경 지대의 절반만 평정했지만, 훗날 나머지 절반까지 평정하고 나면 우리 군은 더욱 강해질 거다. 서쪽 오랑캐들도 다시는 함부로 우릴 넘보지 못하겠지. 여름이든 겨울이든 사시사철 언제나 백성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살 거야. 그런 게 바로 더 좋은 날이지.”

밖에서 두 아낙이 솥 하나를 들고 고기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자, 아이들이 와 하는 소리를 내며 우르르 에워쌌다.

“나리, 나리 드리려고 고기를 삶았어요.”

이웃집 아낙이 말했다. 서사근은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벌써부터 침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먹으라고 했다.

“아휴, 어떻게 그래요. 이러지 마세요.”

아낙들이 손사래를 치며 아이들을 내쫓았다.

“나리도 아직 안 드셨는데, 어디 너희들이 먼저 먹어?”

서사근이 웃음을 지었다. 아낙 하나가 서사근 손에 들린 실과 바늘을 발견하고,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리, 정초부터 웬 바느질이에요.”

“해진 곳이 좀 있는데, 마침 한가해서요.”

서사근이 말했다. 그러자 아낙들은 얼른 솥을 내려놓고 서로 뺏으려고 옥신각신했다. 그러면서 정초에 지켜야 할 금기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하여간 사내들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니까.”

아낙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리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색시 맞이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은······.”

서사근이 씩 웃었다.

“가정을 꾸릴 생각은 없소.”

이렇게 돈 많고 권력 있고 인품까지 좋은 사내는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든데,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다고? 에이, 고르고 고르느라 그렇겠지.

두 아낙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중매를 설 궁리를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문밖에서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이 하나가 손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딱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청년이었기에 두 아낙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주 시금, 어쩐 일입니까? 들어와 앉으시지요.”

서사근이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주육낭은 들어오지 않고 대문 근처에 서서 물었다.

“곧 경성에 가는데, 전해 줄 거라도 있소?”

서사근이 멈칫했다가 곧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바로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주육낭은 대문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주육낭의 주위를 빙 둘러싼 아이들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주육낭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서사근을 기다리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마당이었지만 기분 탓인지 황량해 보였다. 사람이 줄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서사근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걸어 나왔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형님 거랑 누이 걸 나눠서 담았으니, 보면 바로 알 겁니다.”

주육낭이 음 하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측근이 얼른 손을 뻗어 받았다.

마당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왜 가정을 안 이루는 거요?”

주육낭이 불쑥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멈칫했던 서사근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형제들은 지하에 쓸쓸히 있는데, 내 주변에만 사람이 북적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요. 뭐, 모르는 일이죠. 나이가 들면 또 생각이 바뀌어 가정을 꾸릴지도요.”

말을 마친 서사근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육낭은 어색하게 음 하고 대꾸한 후 뒤돌아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던 주육낭이 대문 근처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소. 내 생각엔, 그들도 자기 형제가 쓸쓸히 지내는 건 원치 않을 것 같거든.”

말을 마친 주육낭은 후다닥 나와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서사근이 따라 나오기 전에 서둘러 출발했다.

벌써 정월 초열흘이었지만 경성은 여전히 새해 분위기에 취해 있었고, 다가오는 정월 대보름을 준비하느라 더욱 떠들썩했다.

“대보름이 되면 거리에 형형색색의 등롱이 걸리고, 폐하께서도 궁 밖으로 나와 백성과 함께 즐기신대.”

여종들이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들은 전부 정 이부인이 강주에서 데려온 자들로, 경성에 온 후 아직 거리 구경도 못 해 본 터였다.

“반근 낭자가 그러는데, 집안사람들도 다 구경 나가게 할 거래.”

구경을 나갈 생각을 하자 다들 흥분되는 눈치였다.

“반근 낭자가 벌써 누각에 자리를 잡아 놨대.”

불과 며칠 만에 온 집안 사람들이 반근을 입에 달고 살게 되면서, 정작 정 이부인과 정 이노야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을 반근이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반근은 시원시원하고 시시콜콜 따지는 법이 없었다. 말만 하면 깔끔하게 내줬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큰 아씨 방 청소는 했나?”

여종 하나가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나머지 사람들이 붙잡았다.

“이미 늦었어. 큰 아씨 쪽을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 차례까지 올 것 같아?”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 소쿠리 가득 든 돈을 다섯 사람에게 나눠 준 그날 밤 이후로 정교랑의 거처 근처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여종이나 몸종은 말할 것도 없고, 정 이부인마저 자주 들락거렸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대청에서 정 이노야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당에 서 있던 여종들은 잽싸게 흩어졌다. 잠시 후 안에서 몸종 하나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노야께서 아씨한테 손님을 맞이하라고 하셨다고? 무슨 손님? 친척이야?”

빈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관료 집안의 여식이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드물었고, 친척 아니면 가까운 벗들이나 만나는 정도였다. 하지만 경성에는 정 이노야의 친척이 없었다.

“노야의 벗이라고 하세요.”

어린 몸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무슨 친구?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집까지 찾아오는 친구가 있어?”

이거 정 이노야가 사람을 너무 쉽게 사귀는 거 아니야? 그러잖아도 아씨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나 와서 만나자고 하면 어떡하자는 건지.

정교랑이 말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반근 역시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따라 나왔다.

정 이부인도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 정오낭을 전부 데리고 와서, 자리에 앉은 두 사내에게 예를 표했다.

어린 몸종이 들어와 큰 아씨가 오셨다는 말을 전하자, 소란스럽던 대청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정 이노야마저도 말을 더듬었다.

항렬로 따지자면 정교랑은 집안에서 넷째였지만, 그렇게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교랑이 갑자기 정사랑이 되어 버리면, 방금 인사한 나머지 딸들의 이름은 또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정 이노야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쪽의 두 사내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정 낭자.”

사내들이 웃으며 인사하자 정교랑이 몸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관고원(官誥院)의 어르신들이다.”

정 이노야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어르신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자 두 사내는 얼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마친 정 이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저 어르신들이 답례로 또 초청을 할 거야. 그럼 교교, 네가 우리랑 같이 가자꾸나.”

정 이부인은 옆에서 옷소매를 잡아끄는 정칠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머지 애들은 아직 어리기도 하고, 경성은 처음이니 겁먹을까 봐 그래.”

“네.”

정교랑의 대답에 정 이부인이 활짝 웃었다.

누가 얘더러 괴팍한 성격이래. 괴팍하긴, 말도 이렇게 잘 듣는데.

같은 시각 다시 자리에 앉은 대청 안 손님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중지(重之), 자네는 참 복도 많군.”

그중 한 사내가 정 이노야의 자(字)를 친근하게 부르며 말했다.

“처자식이 전부 화목하여 보기 좋아.”

정 이노야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아랫것들을 시켜 얼른 주안상을 준비하라고 했다.

“아, 주안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중 한 사내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중지의 집까지 온 김에 정통 과로신선 맛이나 한번 보자고.”

정 이노야가 멈칫했다.

과로신선이라······.

“아, 그래, 그렇지. 과로신선이 중지 자네 집안 거잖아.”

먼저 말했던 사내가 웃으며 거들었다. 하지만 과로신선 얘기가 나오자 정 이노야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선거와 태평거 그리고 약포까지. 참, 이제는 이씨 가문의 폭죽까지 쳐야겠군. 거기서 폭죽만 보낸 게 아니잖아. 배당금을 약조하는 계약서를 시녀가 챙기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 사업들이며 돈이며 집에서 먹고 입고 쓰는 것까지 전부 시녀가 관리하고 있으니, 아내가 무릎만 안 꿇었을 뿐이지 그 시녀한테 얼마나 비굴하게 살랑거리는지 몰라. 내 짐짓 못 본 척하고 있었다만,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다!

여기가 누구 집인데! 일개 시녀 따위가 이 집을 좌지우지하다니! 체통은 어쩌려고!

친구들 앞인지라 정 이노야도 못마땅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찻잔을 들었다.

“지고(志高) 형, 농담하지 마시게. 그건 내 것이 아닐세.”

정 이노야의 목소리에는 시기심이 묻어났다. 두 사내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중지, 우리 앞에서 궁색한 척을 왜 하나?”

지고라고 불린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돈 빌려달라고 안 하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도 중지, 신선거 별실에서 한 끼 하고 싶을 땐 자네한테 도움 좀 청하겠네.”

다른 사내도 웃으며 말했지만, 정 이노야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정 이노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글쎄 나한텐 결정권이 없다니까. 전부 내 것이 아닐세.”

“중지, 거긴 자네 큰딸의 것이 아닌가?”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 웃음기를 거두며 물었다.

“그렇지.”

정 이노야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자네 큰딸 거면 그게 곧 자네 집안 거지.”

사내들이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집안 거면 그게 곧 자네 거고.”

정 이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앞에 있는 사내들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중지, 우리랑 형, 아우 하는 사이니 이 말은 꼭 해야겠군.”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방금 한 말, 다시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게.”

“무슨 말을?”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재산은 자네 것이 아니라는 말.”

다른 사내가 대답했다.

“아닌 것을 아니라 한······.”

정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 끊겼다.

“중지! 그 재산들은 자네 큰딸 명의로 되어 있잖나! 자네가 생전에 있는 한, 그런 말은 남 앞에서 절대 하면 안 돼. 그럼 자네 큰딸이 불효의 오명을 쓰게 된단 말일세!”

정 이노야가 멈칫하여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중지.”

다른 사내가 정 이노야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성인께서 말씀하셨잖나. 부모께서 생존해 계시면 사사로운 재물을 갖지 않는다(父母存, 不有私財 - <예기禮記, 곡례曲禮>). 율법에도 정해져 있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을 따로 나누지 않지(父子無異財 - <진서晋書, 형법지刑法志>).”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을 따로 나누지 않는다!

정 이노야의 시선이 다른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손을 뻗어 정 이노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중지. 영애를 생각해서라도, 말을 신중히 하게.”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날이 밝자 거리에 사람이 많아졌다. 고씨 가문은 고능준이 외직 부임을 자청하고, 황제가 이를 윤허한 일로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씨 저택의 대문 앞은 여느 때처럼 북적였다. 앞쪽 대청이고 뒷마당이고 가릴 것 없이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물론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분주하기만 했다.

“무대도 꽉 찼으면 좋았으련만.”

누군가가 저쪽 정자 근처의 텅 빈 무대를 보며 말했다.

“지난해에 일식과 월식이 연달아 일어난 데다 눈 피해도 크고 민란까지 일어났잖나. 천자께서 나라와 백성이 불안에 떨 일을 근심하시며 유희를 금하셨네. 새해에 폭죽을 터트리고, 대보름 때 꽃등 놀이를 하도록 윤허하신 것만도 다행이지.”

옆에 있던 이가 말했다.

“그래도 집에서 자기들끼리 가무를 즐기는 건 괜찮지.”

누군가가 대청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는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나, 주 낭자까지 모셔 왔잖아?”

대청에 흩어져 앉아 있던 사내들도 고개를 돌렸다.

“모시기 어렵다지 않았어?”

“어려워도 누가 초청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대청 밖의 소란은 대청 안까지 전해졌다. 대청의 휘장 뒤에서 눈을 감고 앉아 어린 두 시녀에게 안마를 받고 있던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입춘이 지나고 출발하려 하십니까?”

옆에 있던 막료가 물었다.

“그럴 수야 있나.”

고능준은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난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벌을 받으려는 걸세. 보름이 지나면 바로 출발해야지.”

“정세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도 좋지요. 평왕이 하루가 다르게 장성하시잖습니까. 벌써 열네 살이 되셨습니다. 지난해에 일식과 월식이 있었으니 올해는 개혁을 단행하겠지요. 겸사겸사 태자로 책봉되실 수 있을 겁니다.”

“태자로 책봉되면 내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될 걸세.”

“네. 대인께선 외척 신분이니 조당에 오래 계실 수 없겠죠. 이번에 외직으로 부임하시면 폐하의 뜻에 순응하면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일이 잠잠해지고 나서 돌아오신다면, 누가 감히 대인을 막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막료가 웃음을 터트리자, 눈을 감고 있던 고능준도 따라 웃었다.

“그러니 나쁜 일을 만나도 초조해할 것 없네.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될 수 있거든. 물론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될 수 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고능준은 돌연 손을 들어 웃음을 제지하고 눈을 뜬 다음 시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

“바깥의 칠현금 소리가 듣기 좋군.”

양옆에 있던 두 사람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대청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 중인 낭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덕승루의 주 낭자입니다.”

막료의 말에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꽃 중의 꽃이라는 화괴의 명성에 걸맞은 낭자로구나. 얼굴은 모란처럼 아름답고 피부는 작약처럼 고우며, 갖춰 입은 옷은 화려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아.

“훌륭하구나, 훌륭해.”

고능준이 말했다. 칠현금 연주를 칭찬하는 것인지 사람을 칭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고능준은 어린 시녀에게 기댄 채 손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고, 여유로운 정월 분위기를 즐겼다.

한편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손을 잡고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마중을 나온 여종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고원의 가지고(賈志高) 대인은 경성 분으로, 선조 중에 종친과 인척을 맺으신 분이 있습니다. 여러 사업을 하며 가세를 키우셨지요.”

여종 하나가 정 이부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억해 두겠네. 반근이 또 뭐라고 하던가?”

“다른 말은 없었고, 부인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랍니다.”

편하신 대로? 경성 관리의 식솔들과 교제하는 일인데 어찌 강주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정 이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정교랑과 그 옆의 하녀를 바라보았다.

둘 다 반근인데, 왜 그 반근은 안 데려오고?

후당에는 벌써 사람이 꽤 여럿 와 있었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다 전부 화려한 차림이었다.

가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했다.

“정 부인, 오셨어요?”

“가 부인.”

정 이부인도 얼른 답례했다. 답례를 마치기도 전에, 가 부인의 웃는 얼굴은 벌써 정교랑을 향해 있었다.

“정 낭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듣고 보니 어째 말이 좀 이상한데······.

가 부인은 다정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정 이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일어나 웃으며 인사했다. 물론 그 환대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두 짐작하고도 남았다.

“주 부인, 저번에 주 부인 댁에서 접대할 땐 생질녀를 왜 안 불렀어요? 그때도 불렀으면 좋았을 것을.”

대청 안의 화기애애한 장면을 보며 문밖에 선 부인 하나가 옆에 있던 주 부인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주 부인의 시선은 정 이부인의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 낭자는 벌써 두봉을 벗고, 그 나이대에 맞는 고운 겨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차림새며 얼굴에서 푸르른 새봄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주 부인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정 낭자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주 부인은 바늘에 눈을 찔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난 저 애한테 잘해 줬어. 진심으로 잘해 줬다고. 난 저 애를 해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주 부인은 가슴을 쓸며 불경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주 부인, 주 부인?”

옆에 있던 부인이 주 부인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손을 뻗어 붙잡았다.

“왜 그래요?”

퍼뜩 정신을 차린 주 부인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옆에 있던 부인이 뭔지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부러워서 그러죠? 부러워할 것 없어요. 저 여자는 후처일 뿐이잖아요. 주 부인은 엄연한 진짜 외숙모고요. 주 부인이 저쪽으로 가서 서면 저 여자가 어딜 감히 서 있겠어요?”

부럽다고? 저 둘이 오는 줄 알았으면 난 절대 안 왔을 거야.

주 부인은 다시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정 이부인이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난 부럽지 않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웃음도 안 나왔을 거야.”

주 부인이 중얼거렸다.

가엾은 정 이부인······. 지금 자기 뒤에 있는 게 돈을 벌어들이고 복을 나눠 주는 보살인 줄 알겠지? 그건 분명 야차야!

“여기서 실없는 소리나 할 때가 아니에요. 어서 생질녀한테 인사 좀 시켜 줘요. 운 좋으면 나도 무슨 깨우침을 얻을지 모르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이 주 부인을 떠밀며 재촉했지만, 주 부인은 몸을 돌렸다.

“갑자기 몸이 좀 안 좋네요. 먼저 돌아가야겠어요.”

주 부인은 옆에 있던 부인이 붙잡기도 전에 쌩하니 가 버렸다. 그 후로 주 부인은 쭉 병을 핑계로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월 내내 모든 연회 초청을 거절했다.

해가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장신구를 들여다보던 정 이부인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노야, 벌써 일어나셨어요?”

정 이노야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당신도 일찍 일어났으면서.”

정 이부인이 웃으며 다가와 앉았다.

“노야, 오늘도 연회가 있거든요. 어떤 금비녀가 나한테 어울릴지 골라 봐요.”

정 이부인은 손에 든 비녀 다섯 개를 정 이노야 앞으로 내밀며 흔들었다. 각기 크기는 달라도 전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비녀였다.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눈엔 다 예뻐 보여서요. 근데 이렇게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몇 개는 남겨 뒀다가 칠랑 시집갈 때 혼수로 줘야죠.”

시녀가 아무렇게나 던져 준 후진 비녀 몇 개를 내 딸의 혼수로 남겨 주겠다고?

“그따위 물건이 마음에 든단 말이오?”

정 이노야는 벌컥 화를 내며 손을 들어 비녀를 내던졌다.

“취향 한번 천박하군!”

정 이부인이 얼른 주우며 못마땅한 투로 따졌다.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내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러네요. 나한테 이런 거 사 준 사람도 없고. 난 가난한 서생 집안 출신이라 돈만 보면 눈이 벌게지거든요.”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런 거 사 준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정 이노야의 귀에 박혔다. 어쩐지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쓴 물건이 그리 형편없었단 말인가? 일개 시녀가 준 것에도 못 미칠 정도로?

무엇보다도 정 이부인의 ‘가난한 서생’이란 말이 정 이노야의 심기를 확 뒤틀어 놓았다.

“죽으려고 환장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울컥한 정 이부인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왜 정초부터 저주를 하고 난리예요? 하나 죽은 것도 모자라 이젠 후처까지 죽었으면 좋겠어요?”

정 이노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차마 때릴 수는 없고 욕을 하자니 벌써부터 밖에서 수군대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욕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체통을 지키시오!”

정 이노야는 하는 수 없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정 이부인은 입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손에 든 금비녀를 다시 집어 들어 밝아오는 새벽빛에 비추어 보았다.

“내가 어디 여기서 만족할 줄 알아? 물론 이런 사소한 것도 기꺼이 챙겨야겠지만.”

정월의 관청은 여느 때보다 훨씬 한산한 분위기였다.

“오늘은 일찍 마치고 동문으로 양고기탕 먹으러 가세. 오후엔 금전 골목으로 놀러 가고.”

말단 관리 하나가 옆에 있던 관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관리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찍 가긴 그른 것 같네. 저녁은 돼야 할 걸세.”

“무슨 일로?”

먼저 얘기를 꺼낸 관리가 이해 안 간다는 투로 묻자, 그 관리가 턱짓으로 관청 쪽을 가리켰다.

“근면 성실한 대인께서 아직 바쁘시잖나.”

근명 성실한 대인?

말단 관리가 멈칫하며 관청 쪽을 쳐다보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굳은 표정을 한 채 밖을 쳐다보는 관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보게, 경조부에 가서 이 문서들을 찾아오게.”

관원이 큰 소리로 명하자, 말단 관리는 옆에 있던 말단 관리를 향해 거 보라는 듯 혀를 날름거리고 얼른 대답하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목록을 받은 다음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서책들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러잖아도 무질서하던 탁자가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대인, 말씀하신 서책들을 경조부에서 빌려왔습니다.”

말단 관리의 말에 정 이노야는 음, 하고 대꾸한 후 서책을 받아 펼쳐 보았다.

“대인, 앞으로도 날은 많으니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말단 관리가 아첨하는 투로 말했다.

다들 이 정동이라는 자는 저 멀리 별 볼 일 없는 고을을 전전하다가 황제의 상을 받아 대리시로 부임했다고 했다. 이 경성의 관청이 어디 그리 만만한 곳이던가.

새로 부임한 관리는 의욕에 차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수하에 있는 경험 많은 이들에게도 본때를 보여 주려고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공무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은 안건들을 전부 처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대로 못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우쭐했던 기세도 한풀 꺾일 수밖에.

정동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을 대비하는 듯했지만, 그건 공연한 걱정이었다. 귀한 분께서 난처하게 하지 말라며 친히 귀띔해 주시기도 했거니와 그 귀한 분이 아니었더라도 정씨 성에 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내, 정 낭자를 딸로 둔 이 사내를 만만히 볼 사람은 없었다.

높으신 대인들조차도 깍듯하게 대하는 분을 난처하게 하기는!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이는 풍림 하나로 족하지!

말단 관리가 어지러운 생각들을 떨치려 하는데 저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동이 탁자를 내리친 것이었다.

“찾았다!”

정동이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고개를 든 정동은 어리둥절해하는 말단 관리를 보고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그만 나가 보게.”

말단 관리를 내쫓고 난 정 이노야는 심호흡을 하고, 더 빨리 서책을 넘겨 보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서책들은 하나둘 밀려나 끝내 네다섯 권만이 남았다.

실내가 어두컴컴한지라 시야도 다소 흐릿해졌지만, 문서 위에 쓰인 ‘정씨 교랑’이라는 네 글자는 정 이노야의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역시······. 본인의 이름을 남겨 놓았군. 주씨 가문이 아니라.”

정 이노야는 탁자를 다시 한번 무겁게 내리쳤다.

“실로 아둔한 바보로구나!”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조부모와 부모가 생존해 있는데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누는 불효를 저지를 경우, 도형(徒刑 - 강제노동형) 3년에 처한다(祖父母, 父母在, 別籍異財, 不孝, 徒三年 - <당률唐律, 명례名例>).

이럴 수가! 툭하면 남한테 질책을 당하고 공격을 받더니만, 저 스스로 꼬투리 잡힐 일을 남겨 놓았군!”

엄한 말투였지만 정 이노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슬아슬했는데 실로 다행이야. 내가 제때 돌아온 데다 적절한 때에 귀띔해 주는 이까지 있었어. 까딱 잘못했다간 누가 또 이를 빌미로 일을 만들었을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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