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식-
보름날 월식이 있을 거란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웬 호들갑이야?”
고능준은 심드렁한 태도였다.
“사천대에서 한 해에도 서너 번씩은 일식이다 월식이다 예측을 내놓지 않는가. 열 번에 세 번 맞히는 것도 정확하다고 한다면 보수사의 향불이 더 영험하지.”
대청에 있던 수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올해는 일식이 있었는데 월식까지 있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고능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말 월식이 일어난다면······. 덕정(德政)을 펼치지 못한 것이니 재상의 책임을 묻고 죄기소(罪己疏: 군주가 죄를 자책하는 글)를 내리시겠지.”
느릿느릿 말하던 고능준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물었다.
“진소 쪽에서는 뭐라던가?”
“중서성에서 일단 천문에 관한 상소를 막긴 했습니다. 예삿일이 아닌지라 사천대와 논의 중입니다만, 사천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천대에선 아직도 결론을 안 내렸단 말인가? 그럼 상부에 보고한 건 뭐지?”
“그래서 월식이 있다는 겐가? 없다는 겐가?”
진소가 앞에 있는 사천대 제거(提擧: 관직명)를 보며 물었다. 진소 역시 노기 띤 목소리였다.
“없습니다.”
사천대 제거가 말했다.
“있을 수도 있으나, 아직 결론이 난 건 없습니다. 천문 현상에 관한 일을 인력으로 살필 순 없사옵니다.”
누군가가 주의를 주었다.
세 치 혀를 잘못 놀렸다고 죽을 순 없으니, 뒷길을 열어 두겠다는 심산이었다.
진소 역시 사천대 관리들의 행각을 잘 알았기에, 상소를 탁자 위로 집어던졌다.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진소가 호통을 쳤다.
“이는 학생 곽원이 멋대로 지껄인 말이옵니다!”
사천대 제거와 소감, 판관 등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자를 불러오너라!”
진소의 호통에 서둘러 달려나갔던 수하가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돌아왔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곽원이 절차를 무시하고 폐하를 알현한다 하옵니다!”
“황당한지고!”
진소가 대로하여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이거 성가시게 됐군.”
“성가시게 돼도 어차피 곽원 그놈의 일이야.”
사천대 사람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리며 진소를 뒤따라갔다.
근전정 안.
황제가 자신의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높이 들고 있는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말투는 단호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몸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긴장한 건지 흥분한 건지 모르겠군.
“학생 곽원이 보름날 밤 월식이 있을 거라는 계산을 했습니다. 이에 폐하께 아뢰니 만백성에게 고하고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나가 대비하시옵소서.”
학생?
황제가 퍼뜩 깨달았다.
진안 군왕이 사천대에서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 게 이래서였군. 일개 학생이 월식을 예측해 냈으니 사천대 관원들이 곧이들을 리가 없지. 질책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게야.
황제가 곽원을 알현하고 있는데, 진소가 사천대 관원들을 데리고 근정전에 당도했다.
“폐하, 천문 현상에 관한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말을 듣지 마시옵소서.”
“폐하, 사천대에서 계산 중인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사옵니다.”
“곽원 한 사람의 주장일 뿐입니다.”
근정전이 소란스러워졌지만 황제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관리들은 월식이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싸웠지만, 황제는 이미 훤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논쟁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 없었다.
황제는 수시로 문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진안 군왕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하루 밤낮이 지났거늘. 정 낭자의 계산이 아직도 안 끝났나?
“폐하! 학생 곽원이 목숨을 담보하겠나이다!”
그 소리에 황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황제가 다시 눈길을 돌렸다. 나머지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곽원을 쳐다보았다.
“이번 달 보름 축시 사각에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할 겁니다. 제 말이 틀릴 경우, 하늘에 불경죄를 짓는 게 되니 목을 바쳐 사죄하겠나이다.”
어린 학생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려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근정전 안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네가 이순풍인 줄 아느냐?”
사천대 제거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냉소를 지었다.
하여간 젊은이들은 혈기가 너무 왕성해서 탈이야. 혈기가 왕성한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혈기만 앞세우는 건 아둔한 일이지.
“폐하, 망언을 늘어놓은 곽원의 죄를 물으시옵소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근정전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밖에서 내시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내시는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황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황제가 눈썹을 꿈틀이며 반색을 했다.
무슨 일이지?
모두의 마음속에 의문이 들었다.
“지금 어디 있느냐?”
황제가 나지막이 물었다.
“중서성에서 막는지라 지금 들어오긴 힘들다고 하옵니다.”
내시의 말에 황제가 탁자를 탁 내리쳤다.
“점점 가관이구나!”
근정전에 시립해 있던 관리들이 황제의 말에 일제히 입을 열었다.
“신 등의 죄가 크옵니다.”
황제가 관리들을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눈치 빠른 내시 하나가 재빨리 곽원의 손에서 상소문을 가져왔다.
“좋다. 그렇다면 짐이 네 상소를 받아들이겠노라.”
황제가 손을 뻗어 상소문을 받자, 관리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폐하, 천문 현상에 관한 일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옵니다!”
진소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외쳤다.
“천상에 관한 일은 애들 장난이 아니지. 그러니 월식이 일어나면 짐이 기꺼이 벌을 받겠소. 하늘에 죄를 인정하고 복을 기원할 거요. 그리고 월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진 후, 아래에 꿇어앉은 곽원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자를 벌하겠소.”
월식 예측으로 인한 소란은 저녁 무렵까지도 이어졌다. 황제가 상소문을 내려놓고 피곤에 지쳐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 옥체를 생각하시옵소서. 저녁 수라를 들이시지요”
내시가 목멘 목소리로 권하는데도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한 술이라도 뜨셔야 하옵니다.”
내시는 아예 바닥에 꿇어앉아 빌었다.
“점심 수라도 안 드셨는데 저녁 수라까지 거르실 순 없습니다.”
“짐이 대체 뭘 잘못했단 말이냐? 어찌하여 하늘에서 이리 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는지.”
황제가 중얼거렸다.
근자엔 분명 좋은 일이 많았는데.
어마어마한 병기를 두 개나 만들었고, 짐의 몸도 많이 좋아져 후궁이 용종까지 가지지 않았던가. 공을 탐하던 이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정에서 소란을 피우던 이도 쫓아냈지. 서북에서도 승전보가 속속 당도하고 있으니 더없이 좋은 때인데.
왜 하필 지금······.
“조정이 문제인가? 짐이 그토록 정성을 쏟았건만, 하늘은 왜 짐을 벌하시려는지.”
황제가 중얼거렸다.
일식에 이어 월식까지 일어나면 기강이 무너지겠지. 사천대에서 잘못 계산한 줄 알았거늘, 이제 보니······.
“진안 군왕이 또 뭐라고 하더냐?”
황제가 물었다.
“다른 말은 없으셨고, 정 낭자도 월식이 있을 거라 예측했다 하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했다.
그렇다면 이번 월식은 길조일까? 흉조일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흉조지.
황제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 낭자를 불러 하문하시겠습니까?”
내시의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물었는데 뭘 더 묻는단 말이냐? 그 여인 혼자만 계산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학생이 계산해 낼 정도인데 천하에 계산해 낼 수 있는 이가 없겠느냐? 그 여인을 불러 재차 하문하면서 겁먹은 티를 내기보다는 그 학생의 장단에 맞춰 통쾌하게 도박을 걸어 보는 게 낫지.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게야.”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잠시 머뭇거리던 내시가 물었다.
“혹 그 학생이 정 낭자를 안다면······.”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짐도 그리 생각하여 황성사에 조사를 명했다. 곽원이라는 자는 경성 사람이 아니야. 그 부친이 역법을 수정한 공을 세운 덕에 여섯 살 때 음직으로 천문관 관직을 받았지. 후에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가르침을 줄 이가 없었어.
성년이 된 후 상경하여 사천대의 학생이 되었는데 벌써 삼 년이 흘렀다더구나. 사천대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모양이야. 천문 관측에 심취한 탓에 사천대 동문 중에도 잘 모르는 이가 많다니 정 낭자와의 교분은 더 말할 것도 없지.”
거기까지 말한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정 낭자가 불꽃놀이를 선보였을 땐 마침 혼천의를 지키고 있어야 해서 그 불꽃을 보지도 못했다더구나.”
그러니 이무처럼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겠지.
내시는 웃음을 지었다.
농담까지 건네시는 걸 포니 폐하의 심기가 아주 불편하진 않으신 모양이군.
“이제 보니 천문 현상을 예측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가 보다. 정 낭자 말고도 할 수 있는 이가 있었어.”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정 낭자 말고도 조정에 그런 인재가 있단 말이다.
황제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정 낭자 또한 사람이니라. 신선이 아니야.”
하지만 황제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일식에 이어 이번엔 월식이라니. 어느 모로 봐도 좋은 일은 아니지. 두고 보면 알 거야. 보름이 지나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겠지. 늘 그랬듯 황제가 부덕해 벌어진 일이라며 죄기소를 내리라고 떠들어댈 텐데.
죄라고? 짐이 무슨 죄를 지었는데?
내키지 않는구나. 도무지 내키지가 않아.
황제는 탁자 위에 놓인 지필묵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황제가 정 낭자를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는 일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폐하는 결단력이 빠른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걸겠다는 황당한 말을 늘어놓는 학생의 말에 바로 응낙하셨어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신 게 틀림없습니다.”
깊은 밤. 진 노태야의 방에 앉은 진소가 말했다. 진 노태야도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넌 폐하께서 정 낭자를 못 만나시도록 막았지만, 다른 이까지 막을 순 없었을 거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우렸다.
“아무래도 정말 월식이 있을 건가 봅니다. 월식은 본디 불길한 일인데, 이번엔 일식에 이어 생기는 월식이니 더욱 불길하지요.”
“해는 양(陽)의 정기로 실함을 지켜 이지러지지 않으니 이는 곧 군주의 상징이다(日者陽精, 守實不虧, 君之象也). 일식과 월식은 통치에 부당함이 있음을 뜻하지.”
진 노태야에게 차를 올리던 진소가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조정에 잘못이 있어 하늘이 경고한다면, 폐하께서 마음을 수양하고 덕을 닦으셔야 할 것입니다. 대대적인 변혁을 실시하여 재앙을 없애야 합니다. 이는 또한 기회기도 하지요.”
진 노태야는 차를 받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날 폐하께서 정 낭자를 부르시려고 한 게 이 때문이었군.”
고능준이 말했다.
“그 학생 혼자 한 일입니까? 아니면 정 낭자가 뒤에서 도운 겁니까?”
가희들이 물러가고 나자 막료들이 자리에 흩어져 앉았다.
“이미 알아봤는데, 그 학생 혼자 한 일이라더군요. 사천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그래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나 봅니다.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불러 하문하려 하셨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진안 군왕한테 가서 물어보라 하셨고요. 아마 정 낭자도 월식이 있을 거라 했겠죠. 그러니 폐하께서 그 곽원이라는 학생의 청을 응낙하신 겁니다.”
고능준은 안심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그 여인한테 일식과 월식까지 좌우하는 재주가 있나 했네.”
고능준의 농담에 막료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한바탕 웃음을 짓고 난 후, 막료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월식이 있는 건 분명하군요. 일식과 월식이 연이어 일어나다니, 심히 불길한 징조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조정에 잘못이 있다면 문제가 뭔지 찾아야겠지. 문무백관을 불러 진언을 들어봐야 할 거야.”
고능준이 웃으며 금잔을 들어 올렸다.
“이는 또한 기회기도 하지.”
안에 있던 이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웃으며 각자 술잔을 들어 올렸다.
월식이 일어날 거라는 선포가 있자 경성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일식, 일식 하더니 어쨌어? 그 사람들이 말하던 날짜엔 아무 일 없고, 다른 날에 갑자기 일어나 식겁하게 했지.”
“어쨌든 일식이 있었던 건 맞잖아. 시간이 안 맞았을 뿐이지. 아무튼 대비해야 해. 언제 일어나도 놀라지 않게.”
사천대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월식 예고로 인한 공황 분위기가 다소 희석되는 면이 있기도 했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섣달 보름은 예정대로 다가왔다. 그날 밤 달이 천천히 이지러지기 시작하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탄식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경성 전역에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절을 올리기 직전 시간을 확인했다.
축시 사각, 참으로 정확하구나!
그때 황제와 같은 동작을 하는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곽원이었다. 침착한 모습의 황제에 비해 곽원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정신 없는 모습이었다.
아버지, 소자가 드디어 아버지의 명성에 부응하게 되었습니다! 천문관이라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단 말씀입니다!
곽원은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북소리와 징 소리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 물론 정교랑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씨, 이러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요?”
반근이 물었다.
“놀라지 않아. 오히려 가깝게 느끼지.”
회랑 아래에 서서 예를 마친 정교랑은 손을 단정히 모은 후 하늘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달을 보며 말했다.
“가깝다고요?”
반근이 물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거잖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환기시켜 주는 거지. 그런데도 가깝지 않아?”
반근은 그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은 사람을 속이지 않으니, 두려워할 것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을 속이는 건 사람이니, 사람이 두렵죠.”
반근이 기쁘게 웃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도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두려워할 것 없어. 천도(天道)기도 하니까.”
반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서도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교랑 옆에 서서 하늘의 달을 올려다봤다.
동녘이 밝아지면서 흉조로 인한 공포도 서서히 걷혔다. 천구(天狗)를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달을 지켜낸 것이다. 북소리와 징 소리가 잦아들고 온 경성이 기쁨에 취했다.
하지만 월식으로 인한 여파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천문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실정(失政)으로 인한 일이니 폐하께서는 죄기소를 내려 만백성을 위로하시옵소서.”
“조정의 부덕이 꼭 군주의 부덕이라 할 순 없지요. 신하들이 덕을 닦지 않는 것 또한 부덕이외다.”
“신하들이 덕을 닦지 않는 것은 군주의 명이 지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당에서는 이런 논쟁이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대황자는 이따금 발을 움직였고, 옥좌에 앉은 황제조차도 성가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보라니까. 다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니까. 천자한테만 죄를 인정해라, 벌을 받아라 하며 난리야.
“위(魏)나라 문제(文帝) 7년 8월에 일식이 있었고, 8년 2월에도 일식이 있었으며, 커다란 별이 보였소이다. 문제 재위 기간의 천문지(天文志)만 보더라도 일식이 열여덟 번 이상 있었지요. 문제는 선정을 베풀어 재위하는 삼십 년 동안······.”
“그건 문제가 덕을 닦은 덕분이지요. 과거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자, 진시황은 운석 근처에 살던 이들을 모두 주살하고 그 돌을 없앴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반면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심수(心宿: 전갈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걱정하였지만, 민정을 살피며 백성을 위하자 형혹성이 3도가량 옮겨갔고요.”
“올해 일식이 일어난 후 서북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폐하 또한 옥체가 더욱 강건해지셨소이다. 이것이 천벌이란 말이외까?”
황제 귀에 듣기 좋은 말이었다. 고능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뭐랬나. 폐하의 부덕 때문이 아니라니까!
“폐하, 천문에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고 민심이 흉흉하니 달래셔야 하옵니다. 상공에게 그 책임을 묻고, 사죄하는 글을 내리게 하시옵소서.”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 말에 조정 대신 몇 명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국사를 위해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백성을 위무하는 것은 재상의 직책이외다.”
고능준이 진소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진 상공,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사죄하는 글을 쓴다? 진소가 어디 그럴 사람이던가! 사죄하는 글을 내리면 백성 앞에 그 죄를 인정하는 꼴인데, 아무 죄도 없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사람은 없었다.
진소의 성정상 황제가 죄기소를 내리도록 고집할지언정 자신이 죄를 인정할 리는 결코 없었다.
폐하의 나랏일과 집안일이 전부 뜻대로 풀리고 있는 걸 보면 하늘이 폐하를 벌하려 드는 건 결코 아니야. 그런데도 진소가 폐하를 압박한다면 그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진소가 독한 마음을 먹고 죄를 인정할 수도 있지. 그럼 더 좋고. 언젠가는 이 일을 따져 물을 기회가 올 테니까. 부덕한 신하가 무슨 자격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드는 거냐고.
고능준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천문 현상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 두려움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겁주는 데 쓰였다. 한나라 성제(成帝)가 재상 적방진(翟方進)을 죽였듯이.(편집자 주: 수화 2년, 형혹성이 심수에 접근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황제가 입을 재앙을 大臣이 대신 입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성제는 적방진에게 그 동안의 가혹한 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내리면서 자결을 명함. 적방진은 바로 목숨을 끊었고, 성제는 적방진의 자결을 숨기는 한편 여러 차례 조문하였다고 함.)
따지고 보면 매사가 기회지. 진 대인, 미안하게 됐소이다. 이번 기회는 이 사람이 가져가겠소.
“신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진소가 대전에서 돌연 목청을 높였다.
“신은 만천하에 사죄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은 폐하의 조정이 부덕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고능준도 분노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급보입니다!”
이때 황성사 제거 만류방(萬留芳)이 목청 높여 소리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형남(荊南)의 무평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조당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황제 역시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류방, 뭐라 하였느냐?”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만류방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높이 들어 올렸다.
“폐하, 형남 무평의 유소동(劉小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라······.
순간 고능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올여름 무평에 가뭄이 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겨울에 이르러서는 이레 동안 폭설이 이어져 사상자가 부지기수인지라 이재민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상소문을 읽는 황제의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표정은 놀라움에서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일을, 이런 일을 짐은 어찌하여 몰랐단 말이냐!”
황제가 상소문을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 방금 알아본 바로는 보름 전에 무평에서 구휼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사온데 상부에서 막았다 하옵니다.”
“누가 감히?”
“정사당의 고능준입니다.”
관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고능준의 얼굴에서 더 이상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평이 폭설로 피해를 입은 일은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경사가 연달아 생긴 데다 곧 세밑인지라 조금만 미루었다가 상소를 올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고능준이 본 상소에서는 재해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았기에 반란은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태가 그리 심각한 줄 알았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고능준이 그걸 막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상해, 이상해. 뭔가 문제가 있어. 나한테 올라온 문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온전한 문서가 아니었던 거야!
재해 상황에 대해 소상히 적은 문서는 분명 진소의 손으로 들어갔겠지. 저들이 작심하고 벌인 일이렷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확 깨달은 고능준은 고개를 들어 진소를 바라보았다. 마침 진소도 고능준을 보고 있었다. 늘 점잖아 보이던 진 상공의 눈에 설핏 냉소가 스쳤다.
그랬군. 진소가 천문 현상을 들어 하늘이 벌을 내린다며 폐하께 죄기소를 내리시라 고집한 이유가 그래서였어. 저자가 원하는 게 어디 폐하의 죄기소였겠나.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겠지. 이번 기회에 거슬리는 자를 쳐내려 했던 게야!
또 누가 있을까?
고능준의 시선이 어느새 문밖으로 물러나 있는 만류방의 몸에 고정됐다.
이런 급보를 만류방 같은 환관 놈이 가져오다니! 조정의 일을 다루는 상소문에 개입하여 손을 쓰는 건 내시에게 엄청난 금기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마어마한 유혹이 있지 않은 이상 만류방이 이런 짓을 할 리가!
고능준은 이를 악물었다.
진소 네 이놈!
겉으로는 군자인 체하며 이리 음험한 수완을 부리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더냐!
고능준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귓가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를 인정할 때가 아니었다.
“폐하, 신이 본 상소에서는 재해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능준은 한숨을 내쉬고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한들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
“재해 상황이 심각한지 아닌지는 짐이 판단하는 것이오!”
황제가 일갈했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야 죄를 인정하는군!
“일식에 이어 월식까지 있었는데 다들 죄를 인정하지 않더군. 짐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며 짐이 부덕하여 정사를 잘못 돌봤다고 비난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재해가 일어났는데도 짐을 속이고 있으니 하늘이 보다 못해 그런 천문 현상으로 경고한 게 아니오! 아주 잘난 신하들이야!”
진소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홀판을 높이 들었다.
“신은 성총을 가린 고능준의 죄를 청하옵니다. 고능준을 벌하여 하늘에 그 죄를 고하시옵소서. 또 폐하의 덕정에도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사면령을 내리시고 진언을 들으시옵소서.”
황제는 냉랭한 얼굴로 조당을 훑어보았다.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소. 일식과 월식에 이어 재해까지 일어나며 천벌이 계속되고 있는데 짐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짐이 하늘에 죄를 고하고 사면령을 내리겠소.”
황제의 말에 고능준은 속으로 비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까지 죄를 인정했으니 황제를 그러한 지경으로 내몬 신하의 죄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늘 기러기 사냥을 하던 이도 기러기 부리에 눈을 쪼이는 날이 있다더니.
그래, 좋다. 어디 두고 보자!
“신의 죄가 크옵니다.”
하늘에서 나타난 흉조로 인해 황제는 죄기소를 내렸고, 고능준은 죄를 인정하며 사직을 청했다.
폭설이 내린 무평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未知)일 뿐, 하늘의 변화를 미리 알고 있는 지금은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여기 돈이요.”
옥대교의 정교랑 저택 안. 시종들이 회랑 아래에 내려놓은 돈 상자를 가리키며 진안 군왕이 말했다.
“1천 관입니다. 낭자, 세어 봐요.”
반근과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교랑 역시 미소를 지었다.
진짜 기뻐하네! 일부러 돈을 잃어 주는 게 은근히 효과가 있구나.
진안 군왕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청에 들어섰다.
“그런데 낭자가 계산한 덕이란 사실을 다들 모르니 좀 아쉽네요. 그래도 폐하는 알고 계시지만요.”
“어떻게 내가 계산한 덕이라고 할 수 있죠? 천도는 늘 변함이 없어요. 내가 정확한 게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천대의 곽원 그 녀석만 운 좋게 됐네요. 벌써 소감으로 올라가 천문을 맡게 됐어요. 저택을 하사받았으니 이젠 성 밖의 누추한 집에 세 들어 살지 않아도 되겠죠.
다들 곽원을 가리켜 이순풍의 재림이라고 한대요. 진짜 이순풍은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농담하지 마세요, 전하.”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네, 네. 농담한 겁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웃겼어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반근은 입을 가리고 웃었고, 옆에 있던 시녀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시녀는 곧 인상을 찌푸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청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은 홀가분하면서도 일이 뜻대로 되어 편안한 표정이었다.
황제에게 미리 귀띔하여 준비하게 했다. 동시에 정교랑의 공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면서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실로 일거양득이었다.
“내가 결정권을 쥐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육가아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와 살 걸 그랬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께서 결정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혼사에 관해 얘기할 때였나? 대체 무슨 생각이지?
“네, 난 그럴 수 있어요.”
진안 군왕은 일부러 가볍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낭자도 나한테 혼담을 넣으려고요?”
“아니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는 다른 사람을 방패로 쓰는 걸 자신이 결정권을 쥐었다고 여기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럼 전하께서는 경왕을 언제까지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평생이요?”
정교랑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그 애를 이용해 날 지키는 건가? 내가 그 애에 기대 나 자신을 지킨다고?
진안 군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그 애를 지켜 주는 거야. 내가 육가아를 지켜 주는 거라고.
“내가 지켜 주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지켜 주죠?”
정교랑이 느릿느릿 물었다.
어떻게 지켜 주냐고? 내가 어떻게 지켜 줬더라?
아바마마, 소자가 형님한테 놀러 오라고 했어요. 형님이 멋대로 도망친 거 아니에요.
형님, 내가 형님 궁에 있을게요. 누가 물으면 형님이 나 대신 뭐 찾으러 출궁했다고 하면 돼요.
제가 형님한테 같이 놀자고 했어요. 그래서 형님이 수업 내용을 못 외운 거예요.
형님, 집 생각은 그만해요. 나도 친어머니를 뵌 적 없어요.
귓가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타인의 의심을 풀어 주었고, 그의 쓸쓸함과 두려움을 녹여 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늘 그 애가 날 지켜 줬던 거야. 내가 그 애 옆에 있어 주며 그 애를 지켜 준다기보다는, 그 애가 내 옆에 있어 주며 날 지켜 줬다고 하는 게 맞아. 그리고 결국, 내 앞에서 다치고 말았지.
내 앞에서 다치는 꼴을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난 지금껏 그 애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어.
그 애를 지켜 준다고?
진안 군왕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지켜 준다고 할 수 있나?
“전하?”
귓가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걱정 어린 내시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그 낭자의 집에서 나왔었구나.
진안 군왕이 일어나 마차에서 내렸다.
왕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은 길가에 선 채로, 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왕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더욱 그렇네. 저 애한테 기대 태후와 폐하의 동정을 사고 은총을 받고 있지. 저 애를 핑계로 태후와 폐하께서 주선하려는 혼사를 막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난 저 애를 위해 뭘 해 주었지?
저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공을 들고 뛰어다니던 경왕이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이쪽저쪽에서 내시들이 달려와 얼른 경왕을 일으켜 세웠다.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춘 채, 다시 뛰어다니는 경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총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정 역시 점점 잊혀질 것이다. 타인에게 기대 얻는 안온함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다. 남에게 진정으로 두려운 상대가 되고, 함부로 해칠 수 없는 상대가 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으리라.
종친으로서 동정을 받으면 안온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종친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위험 역시 안온함의 일종일 수 있지 않을까.
동정을 받는 삶을 산다면 사람들은 쉽게 은혜를 베풀겠지만, 동시에 쉽게 그 은혜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면, 날 아무렇게나 대했던 이들도 좀 더 신중해지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닥칠 결과를 생각해 보지 않을까.
그 녀석은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그렇게 장성하고 나면 훗날엔 등극할 것이다. 그 녀석은 내게 은총을 베풀 리 없다. 되려 날 혐오할 테지.
혐오를 억누를 수 있는 건 오직 두려움뿐.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진안 군왕이 돌아서며 외쳤다. 옆에서 수행하던 내시들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군왕께서 경왕과 놀아 주시지도 않고?
내시들은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쫓아갔다.
“전하, 어딜 가려 하시옵니까?”
“수업에 가야겠다. 쭉 이해가 안 가던 수업이 하나 있는데 가서 스승님들께 가르침을 청해야겠어.”
내시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저, 저기, 전하께서 가시면 스승님들이 많이 놀라실 텐데요.”
그중 한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놀랄 게 뭐 있느냐. 내가 똑똑해진 게 아니라, 누가 너무 아둔한 것을.”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들었다.
“조복을 준비하거라. 종친의 몸이고 황명을 받드는 처지가 아니더냐. 천재지변이 빈번히 일어나고 국사에 근심이 많으니, 나 역시 소임을 맡아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려야겠다.”
진안 군왕을 멍하니 쳐다보던 내시의 눈에 웃음기가 번졌다.
“전하, 그럼 밖에 있는 자들을 불러들일까요?”
그 내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지금 그들이 오면 내가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어. 좀 더 기회를 기다려 보자. 그 기회가, 멀리 있진 않을 것이다.”
한편 같은 시각 황궁에 있던 귀비는 분을 삭이지 못하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귀비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근심과 분노를 표했다.
“기회라지 않았느냐? 진소에게 맞설 기회이자 폐하께 태자 책봉을 주청할 기회라더니?”
내시들은 귀비의 뒤를 다급히 쫓으며 차와 손난로를 올리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귀비가 걸음을 멈추고 손뼉을 탁 치며 언성을 높였다.
“진소도 멀쩡하고 태자를 책봉하라는 주청도 못 올렸어. 되려 자신만 죄를 짓고 집에 틀어박혀 있잖아!”
“마마, 마마, 진정하십시오. 고 전시는 별일 없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마마. 잠시 비바람을 피해 있는 것일 뿐이지요.”
“폐하께서도 고 전시를 엄벌에 처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거기까지 들은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며 돌아섰다.
“마마께 내가 왔었다 전하거라. 공부하러 가야겠다.”
내시들은 황급히 네 하고 대답하며 허리를 숙이고 대황자를 배웅했다.
“왜 온종일 저리 초조해하고 근심하시는지 모르겠네.”
대황자는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
“누가 쓰러지든 말든, 누가 죄를 짓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난 대황자고, 부황의 유일한 황자다. 태자 자리가 남한테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내시가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 낭자가 왔습니다.”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황자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진십팔랑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진 낭자, 듣자니 정 낭자의 글씨는 천하제일이라더군요.”
대황자는 진십팔랑을 보며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런데 날 가르치고 싶지 않답니다.”
진십팔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천하제일의 글씨를 쓰실 필요가 없어요. 천하 만백성이 편안히 살며 즐겁게 일하고, 순조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게 전하께서 하실 일이죠. 좋은 글씨를 쓰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오도록 하시고요.”
천하가 내 수중에 들어온다니, 실로 흥분되는 일이로구나.
대황자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매를 잡고 손을 들었다.
“진 낭자, 시작하지요.”
진십팔랑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자신의 탁자 앞으로 와서 붓을 들었다.
이번 월식으로 조정에서는 몇몇 사람의 희비가 갈렸고, 민간에서도 섣달의 세밑 분위기가 다소 옅어졌다.
성문 밖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음식점에서는 두 사내가 마주 앉아 대작 중이었다.
“뭘 예고한 건데?”
둘 중 한 사내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당에 군자가 들어오지 않았고, 소인배가 물러가지 않았음을 예고하지.”
“관지(寬之), 그런 얘기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게.”
노정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경고의 어투로 말했다.
“이번 일을 기회라 여기지 말란 말일세. 한 번만 더 그 여인을 두고 소인배니 화근이니 하는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아무도 자네를 못 구할 거야.”
풍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형세가 유리할 땐 나아가고, 형세가 불리할 땐 물러나야지. 관지, 자네는 말하는 법만 배우고 말하지 않는 법은 안 배웠군.”
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인에게 말하는 법을 배웠거늘, 삼 년 후엔 그 여인 때문에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되었구나.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풍림의 표정이 차츰 바뀌었다.
“오늘은 배웅을 나온 것이니 긴말 않겠네.”
풍림의 표정을 본 노정은 앞에 놓인 고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자, 어서 먹자고. 자네가 경성을 떠났던 게 벌써 삼 년 전이니 맛을 못 본 지 꽤 됐잖나. 이번에 돌아와서는 회포도 풀기 전에 또다시 헤어지게 됐고.”
이번에 가면, 언제 또 볼지 모르겠지만.
노정은 문득 지난 일이 떠올랐다. 얼마 전만 해도 자신 역시 배웅을 받는 처지였고, 그때의 자신은 풍림보다 훨씬 비참했다.
황제는 외직으로 부임하라 했을 뿐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지만, 당시 노정은 고능준에게 쫓겨나 역병이 도는 남쪽 땅으로 가는 처지였으니 돌아올 길은 요원했다.
당시 노정에게도 배웅해 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가슴속 울분과 씁쓸함, 공포와 두려움은 오롯이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때 노정은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의 명 또한 완전히 뒤바뀌었으니, 실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할 만했다.
그 여인 덕이었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여인이야. 어디 그뿐인가. 같은 사람을 살려 놨다가 도로 사지로 내몰 수도 있는 여인이지.
노정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풍림을 보고 이어 자신을 쳐다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식당 밖을 쳐다보던 노정의 안색이 싹 변했다. 노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는가?”
노정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풍림도 멈칫하여 표정이 싹 바뀌었다.
경성 쪽에서 말 몇 필과 마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문 앞에 섰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여인 하나가 내렸다. 겨울에 마차에서 막 내린 탓에 모자를 쓰지 않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햇빛이 좋은 날이었지만 세찬 겨울바람에 볼이 시렸다.
“교교.”
주 노야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넌 여기서 기다리거라. 이 엄동설한에 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갈 필요 없다. 그자들은 느릿느릿 여기서 쉬고 저기서 쉬며 편히 오고 있지 않느냐. 새해를 경성에서 맞이하려고 이제야 길을 서두르는 게지.”
주 노야는 눈앞에 있는 식당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던 풍림, 노정과 눈이 마주치자 주 노야 역시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만 가자. 이 식당엔 재수 없는 놈이 먼저 와 있구나. 들어가선 안 되겠다.”
주 노야가 목청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서둘러라. 야외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게 낫지, 여기 있다간 재수 옴 붙겠다!”
풍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지.”
노정은 손을 뻗으며 풍림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풍림은 어느새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주 노야의 호들갑에도 정교랑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 낭자, 외람되지만 이번 일식과 월식의 기현상을 어찌 보십니까?”
풍림이 하늘을 가리키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인배 때문에 하늘이 노해 기현상이 일어났겠지요.
이는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뒤따라 나오던 노정이 그 말에 탄식하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주 노야는 퉤 하고 침을 뱉었고, 반근 역시 분노로 안색이 싹 바뀌었다.
저번에 대문 앞에 한참을 서 있길래 내심 죄책감을 느끼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아씨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네.
“본인의 결점을 잘 아네요.”
정교랑의 말에 이번에는 풍림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반면 주 노야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풍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관지.”
노정이 얼른 풍림을 막으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노정이 정 낭자를 뵙습니다.”
정교랑은 조용히 답례한 후 뒤돌아 마차에 올랐다. 주 노야는 얼른 정교랑을 뒤따르면서도 풍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입을 삐죽이는 걸 잊지 않았다.
“관지, 해도 너무하는군.”
노정이 그래도 따라가려는 풍림을 막으며 말했다. 풍림은 벌써 마차 안에 앉은 여인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원. 떠나는 마당에도 재수 없게 구네. 저런 놈과 마주쳐 말까지 섞었으니 보통 재수 없는 게 아니야.
어서 가자. 마차를 제대로 몰아라. 아씨 놀라시게 하지 말고.”
주 노야가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정신없이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저 여인의 외숙인가 본데, 하는 짓을 보면 꼭 시종 같군.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 인륜과 천륜이 무너져 천도가 무질서해졌구나. 저 여인이 떠나지 않으면 필시 조정에 화가 미치리라.”
풍림이 느릿느릿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노정은 반사적으로 풍림을 잡아끌려 했지만, 풍림이 재빨리 피했다.
“풍림.”
노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풍림은 노정의 생각처럼 주씨 가문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뒤돌아 자신의 말 쪽으로 걸어가 말에 올라탔다.
“관지.”
노정이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섰다.
“노 형.”
풍림이 말에서 공수하며 말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초심을 잊지 마시게. 그럼 이 풍림은 이만.”
노정도 공수를 하고, 풍림이 말 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있는 정교랑 일행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림이 그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뜻이 다른 자와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는 법.
풍림은 그쪽을 향해 조용히 공수한 후 손에 든 채찍을 휘둘러 말을 타고 정교랑 일행의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주 노야는 풍림의 뒤에 대고 다시 한번 침을 탁 뱉었다.
“배은망덕하고 속은 시커먼 놈 같으니라고. 군주까지 기만한 놈이니 폐하께서 목을 베어 하늘에 사죄하셨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장담컨대 마차에 탄 정교랑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주 노야가 멀어져 가는 풍림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마차가 다가왔다.
“노야, 정 이노야가 왔습니다.”
그 마차의 일행 속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한 사환이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 주 노야는 또다시 침을 퉤 뱉었다.
“시간대 한번 기가 막히는구먼. 시끌시끌하고 재수 없는 일이 다 마무리되니까 이제야 편히 즐기러 오나 보네.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주 노야가 욕을 해댔다.
정 이노야가 저지른 잘못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미 풍림이 쫓겨났고 돌포탄으로 큰 공까지 세운 후였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라는데, 누가 감히 그 여인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을까.
따라서 정 이노야는 상경한 후 대리시에 들러 일을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는 터였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거나 아예 역참에 있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그만이었다. 한 귀로 듣고 흘릴 훈계나 몇 마디 듣고 나면 예정대로 승진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게 다 훌륭한 딸을 둔 덕분이지!
주 노야는 또다시 욕지거리가 올라오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씩씩거리며 쳐다보았다.
“칠랑, 저기 좀 보렴. 저기가 바로 경성이야.”
정 이부인이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격스럽고 흥분한 표정이었다.
정칠랑이 차창에 엎드려 밖을 쳐다보았다. 겨울의 희뿌연 시야 사이로 거대한 성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와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머니, 추워 죽겠어요. 찬 바람에 얼굴까지 상할 거 같아요.”
정칠랑이 볼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정 이부인은 그런 정칠랑을 품에 안았다. 옆에 있던 어린아이도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겁낼 게 뭐 있어. 우린 이제 경성에 입성하잖니. 칠랑, 경성에 있는 연지분이며 고약은 이 세상에 최고로 좋은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다 있어. 어미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꾸며 줄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말에 정칠랑은 신이 나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이 차창 밖을 쳐다보는데,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봐, 네 언니가 마중 나왔잖니.”
정 이부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정칠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탄 여인은 내리지 않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에 탄 채 공수의 예를 표했다.
“걸음이 참 느리기도 하시오. 난 또 늦게 와서 조왕신께 제사도 못 지내려나 했네.”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애들이 어린데 겨울에 먼 길을 오려니 여간 고생이 아니구려. 누구처럼 경성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아니라.”
마음 편히 지내?
주 노야는 울컥해서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누구 때문에 경성에서 목이 달아날 뻔했는데! 네놈이 불러온 화 때문 아니더냐!
담비 모피를 걸치고 전혀 고생하지 않은 얼굴로 혈색 좋게 나타난 꼴을 보아하니 정 이노야는 경성까지 오는 내내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었다. 주 노야는 절로 이가 갈렸다.
그래, 네놈도 한번 우리처럼 마음 편히 지내 보거라!
돌연 손을 쳐든 주 노야는 짐짓 단정한 모양새로 여유롭게 앞쪽을 내다보는 정 이노야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모처럼 가족이 상봉했으니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재회 현장에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이노야는 무장 출신의 주 노야에게 따귀를 맞고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말이 놀라 히이잉 소리를 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정 이부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난 조정을 망쳐 놓고 군주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놈을 때린 것이다!”
주 노야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우뚝 선 채 말을 이었다.
“이놈을 체포해라! 어사대로 압송하겠다!”
정칠랑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부친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귓가에는 모친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앞쪽을 쳐다보자 경성은 여전히 어렴풋하고 희미하게 보였다.
정칠랑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맞은편에 있는 마차였다. 마차 안에선 시종일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래로 드리워진 마차의 휘장이 정칠랑의 눈에는 시커먼 동굴처럼 보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가 금방이라도 그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경성은, 정말 무서운 곳이야.
정칠랑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은 정칠랑은 어느새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곳은 마차 안도, 역참이나 술집도 아니었다. 이름도 못 외울 관원들의 사택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들로 배치된 방은 봄처럼 따스했다.
그곳은 정칠랑이 어제부로 들어와 살게 된 경성의 저택이었다. 바보 언니가 마련해 준 집.
저택은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그냥 쓱 훑어보기만 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죄다 정교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어제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 때문에 다들 집이나 감상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칠랑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정칠랑이 일어나 앉는 소리를 들었는지 휘장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칠랑 아씨.”
여종들이 급히 들어와 정칠랑을 다독여 주었지만, 정칠랑은 그들을 밀어내고 창가 쪽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들어오자 정칠랑은 몸을 움찔거리며 마당을 쳐다보았다. 정원은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남방과는 다른 호방함이 엿보였다.
이곳이 경성이구나. 그 바보 언니가 있는 경성.
“칠랑 아씨, 일어나자마자 찬 바람을 쐬면 못써요.”
여종들은 얼른 정칠랑을 잡아끌며 창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그때 정칠랑이 돌연 손을 뻗어 막으며 소리쳤다.
“넷째 오라버니.”
정칠랑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쪼르르 뛰어나갔다. 대청에서 기다리던 정사낭이 웃으며 인사했다.
“서원에 가 있느라 오늘에서야 왔네. 누이, 여기는 지낼 만해? 난······.”
정사낭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칠랑이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넷째 오라버니, 아버지가 잡혀갔어요!”
정사낭이 멋쩍어하며 정칠랑을 위로했다.
“아냐, 잡혀가신 거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가시나무를 지고 스스로 죄를 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정 이노야가 상경하자 그 딸과 딸의 외숙인 주 노야가 직접 마중을 나갔다. 성문 밖으로 나간 주 노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 이노야를 꾸짖고, 친히 어사대로 압송해 갔다.
어사대로 가는 길에 주 노야는 남들 눈을 피하지 않고 보란 듯이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따라서 소문은 벌써 경성에 쫙 퍼진 터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의도는 정 이노야를 위함이었다. 어쨌든 풍림이 정 이노야를 탄핵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풍림은 떠났다지만 그 일까지 함께 해결된 건 아니었으므로 언제 누가 또 그 일을 꺼내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깔끔하게 매듭을 짓는 편이 나았다.
죄를 자청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태도였다. 주 노야의 표현 방식에 다소 과장된 면은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정칠랑은 그런 이치를 몰랐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 계집이 일부러 아버지를 해친 거예요. 아버지를 죽이려 드는 거라고요.”
정사낭의 귀에는 그 말이 거슬렸다.
“칠랑,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숙부님이 그런 일을 벌여 하마터면 네 언니가 죽을 뻔한 건 알아?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까지 있었어. 그건 엄연히 숙부님 잘못이야. 남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하신 거잖아. 그리고 어사대에서 나온 사람한테 잡혀가는 것보다는 주 노야의 손에 이끌려 어사대로 가는 게 나아.
그리고 네 언니도 어사대에 있었어. 게다가 네 언니는 잡혀갔던 거야.
너도 시시비비는 가릴 줄 알아야지. 어떻게 네 언니를 욕해?”
정사낭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칠랑은 놀란 눈치였다. 대청 안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오라버니는 날 안 좋아하는구나. 그 계집만 좋아하는 거죠?”
정칠랑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정사낭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다시 정칠랑을 달래 주려 했다. 그때 몸종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노야께서 돌아오셨어요.”
뜨거운 물수건을 얼굴 위에 펴 놓고 살살 문질렀다. 몸종의 손놀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지만 정 이노야는 그래도 흠칫 놀라 헙 숨을 들이마셨다. 정 이노야가 손을 들어 몸종의 뺨을 후려쳤다.
“썩 꺼져라.”
몸종은 뺨을 부여잡으며 말없이 물러났고, 정 이부인이 물수건을 받아 정 이노야에게 직접 얹어 주었다.
“그 주가 놈, 정말 손이 맵네요.”
정 이부인이 씩씩거렸다. 주가 놈이라는 말에 정 이노야는 자신이 당한 굴욕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을 여럿 데려왔다고 유세 떤 거야. 어디 더 데려와 보라지.”
주 노야가 데려온 험상궂은 시종들과 발길질 한 번에 픽픽 쓰러지던 자신의 힘없는 시종들을 떠올리자 정 이노야는 울컥하는 마음에 이가 갈렸다.
호랑이도 산에서 나와 평지로 내려오면 개한테 물린다더니!
“노야, 진정하세요. 우리 친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곧 올 거예요.”
정 이부인이 얼른 말했다.
“지금 와 봤자 무슨 소용이야!”
정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한 후 수건을 쟁반으로 내던졌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군.”
“그땐 같이 올 방법이 없었잖아요. 우린 느릿느릿 움직이는 데다 오는 내내 이것저것 쉬지도 않고 샀어요. 그 사람들까지 같이 왔으면 아마 내년은 돼야 도착했을걸요.”
사들인 물건 얘기가 나오자 정 이노야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물건들!”
경성으로 오는 동안 발길이 닿는 곳마다 관리들이며 향신(鄕紳: 향촌에 살던 과거 급제자나 퇴직한 벼슬아치)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제공하고 쉴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여기저기 유람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떠나기 전에는 선물을 한 보따리씩 주는 통에 마차 한 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선물을 받았다.
전부 정 이부인이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이었다. 정 이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 보관해 두었어요. 아직 옷도 못 지은 능라는 뒀다가 봄옷으로 지을까 해요. 노야께서 받은 건 새해 선물로 보내도 되겠어요. 돈 아끼고 좋잖아요.”
정 이부인은 신이 나서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지만, 정 이노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잘랐다.
“보내긴 뭘 보내?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갈 텐데!”
정 이부인이 멈칫했다.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간다고? 그건 내 거야! 누가 감히 가져가?
그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라, 서둘러. 물건들을 전부 옮겨라.”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끌벅적한 소리였다.
정 이부인이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험상궂게 생긴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고, 그 가운데 주 노야가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들어왔다.
또 저놈이!
“노야!”
정 이부인이 놀란 눈으로 정 이노야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또 뭘 하려는 거예요?”
분을 참다 못해 눈까지 시뻘게진 정 이노야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마당에 떡하니 서 있는 주 노야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어사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다더냐?”
주 노야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물었다.
“역마 몇 필을 빌리고 식사 몇 끼 얻어먹은 게 다라고?”
주 노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
“대답해!”
주 노야의 윽박에 놀란 정 이노야는 쭈뼛거리며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고, 옆에 있던 어사들이 달려들어 주 노야를 막았다.
“주 대인, 진정하십시오.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로 하시지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사대로 끌려온 사람이 어사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원.
정 이노야는 화가 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고집부려 봤자 소용없어. 네놈이 저지른 일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상부에 보고됐단 말이다!”
주 노야는 분기탱천하여 채찍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리 주씨 가문에 어찌 너처럼 망신스러운 놈이 태어났는지!”
누가 너희 주씨 가문에서 태어나!
정 이노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주 대인,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할 말이 있거든 좋게 말로 하시지요.”
어사들은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주 노야를 달랬다.
“이미 받은 선물을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인데.”
상의를 마친 후 어사 하나가 말했다.
“지나치게 소상히 조사하기도 그렇고 말입니다.”
어사가 무슨 말인지 알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 일을 소상히 조사하다 보면 선물을 보낸 이도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경성으로 오는 동안 정 이노야 일행이 거쳐온 지역이며 연을 맺은 관리가 어디 한둘이던가. 선물을 받은 일로 조사를 시작하면 일이 보통 커지는 게 아니었다.
“돌려보낼 수야 없지요.”
또 다른 어사 하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정 이노야를 바라보았다. 정 이노야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 노야의 눈빛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망할 놈이 또 무슨 치욕을 안겨 주려고?
“무평에 재해가 생겨 조정에서 구휼 중이오. 관부에서는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고, 향신들 또한 죽을 끓여 이재민들에게 나눠 주고 있소. 정 이노야도 조정과 백성을 위해 성의를 보여 주시구려.
집안의 재물을 전부 기부하시오. 본디 백성에게서 온 것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이니, 백성에게 돌려주란 말이외다.”
“그건 내 거예요!”
정 이부인의 앙칼진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정 이노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은 가산을 몰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물건을 거침없이 옮기고 있었다.
“주가 놈아! 무슨 짓이냐!”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털며 소리쳤다. 주 노야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냐! 뭘 하려는지 몰라서 물어? 그동안 관리 노릇을 얼마나 개같이 한 거야?”
정 이노야는 주 노야의 호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성문 밖에서 주 노야한테 따귀를 맞고 어사대로 끌려간 그 순간부터 정 이노야는 자신의 행적으로 인해 경성에서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관직에 몸담으며 관직 사회의 순리를 익힌 정 이노야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따지고 보면 정 이노야가 저지른 일이 무슨 엄청난 일이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관직 사회라는 게 그랬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파고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죄다 문제가 되고, 문제가 없다고 해서 덮으려 들면 모반의 뜻을 담은 시를 지어도 황제가 흡족하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이번 일을 끝까지 파고들게 할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결국 목숨까지 내놓게 될 테니까.
“노야, 노야.”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의 팔을 다급히 잡아끌며 재촉했지만, 정 이노야는 부인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직접 하겠다!”
크고 작은 상자들이 들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정 이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쏟았다.
“내 보물들을!”
그녀는 정 이노야가 주 노야한테 붙잡혀 어사대로 끌려갈 때보다 더 상심한 듯했다.
한쪽 옆에 선 정칠랑은 두려움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정사낭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모친의 통곡 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경성. 경성은 하나도 좋은 게 없어.
걘 나쁜 사람이야! 그 바보는 나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조만간 그 바보한테 당하고 말 거야!
정육랑이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칠랑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사낭이 갑자기 손을 확 놓더니 옆으로 움직였다.
왜 그러지?
고개를 든 정칠랑의 눈에 문밖을 향해 환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정사낭의 모습이 보였다.
“누이!”
정사낭의 목소리에서는 기쁨이 감춰지지 않았다.
누이?
정사낭의 시선을 따라 정칠랑도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중문과 대문 사이에 있는 가림벽 앞에 사람이 몇 서 있었다. 그중 한 여인은 커다란 두봉을 두르고 있었다. 여인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인상이었다. 여인은 이쪽의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싹 소름이 돋은 정칠랑은 뒷걸음질을 치며 여종들에게 기댔다.
“누이, 어떻게 왔어?”
정사낭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내 집이잖아요. 곧 새해기도 하고 아버지도 오셨으니, 가족이 함께 보내야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돌아갔다고?”
진안 군왕 역시 내시의 입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곧 새해잖습니까.”
내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새해를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간 멍한 눈치였다.
“위낭.”
저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얼른 대답하며 다가갔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반 시진도 채 안 되어 또 보고하게 하다니. 거기 있는 사람이 몇인데 경왕 하나 제대로 못 보살피겠느냐? 괜히 걱정할 것 없느니라.”
황제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가는 내시를 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한 후, 대황자와 다른 쪽에 앉았다.
“이 과제는 네가 직접 한 것이냐?”
황제가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황제는 칭찬을 해 주고 종이를 넘겨 보며 말을 이었다.
“관청에 갔었느냐? 일을 인계받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던데.”
“네,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싶어서요.”
진안 군왕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안 군왕과 황제를 번갈아 보는 대황자의 눈빛에 불쾌함이 스쳤다. 대황자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긴장감과 함께.
“네가 제일 명민하다는 건 짐도 안다. 마음을 쏟지 않을 뿐이지.”
황제가 종이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마음을 쓰도록 해라.”
진안 군왕이 네 하고 대답하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저 녀석이 제일 명민하다고? 어떻게 저 녀석이 제일 명민해?
제일 명민한 건 나야! 내 과제야말로 최고라고!
대황자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대황자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최고는 바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