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성-
“뭐라? 안비가 회임을 해?”
고능준 역시 귀비가 보내온 소식에 깜짝 놀랐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했으면 한 게지. 낳아 봤자 핏덩이 친왕인 것을. 친왕이 여럿 더 생긴들 무슨 대수겠느냐.”
“아닙니다, 대인. 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서찰을 가져온 궁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듣자니 그날 폐하와 안비께서 진안 군왕이 가져온 간식을 드시고 용종을 잉태하신 거래요.”
“터무니없는 소리!”
고능준은 코웃음을 치며 푹신한 침상에 몸을 기댔다.
“대인, 진안 군왕이 가져온 간식은, 정 낭자가 손수 만든 거라고 했어요.”
궁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 낭자?
고능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사사건건 안 빠지는 데가 없어? 그 여인의 간식을 먹은 덕분이라고? 그래서 황제의 후궁이 회임을 했다?
“이거야말로 큰일이구나.”
고능준이 느릿느릿 말했다.
곡강지에서 돌포탄 시험 발사를 마친 후, 또 하나의 어마어마한 병기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경성 구석구석으로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막 피어오르지 뭐요. 그 돌포탄에 맞은 자리는 혈육이 낭자한 게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라니까.”
“요괴가 등장하기라도 했나?”
“비슷하지. 신선의 제자가 만들어 낸 병기잖소.”
“글쎄 아니라니까. 이번엔 아니오. 폭죽 파는 이씨네 가문 사람이 만든 거래.”
술집과 찻집에서 이런저런 소문이 퍼져 나가는 사이, 안 그래도 이름난 이씨 가문 폭죽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점포 안팎은 몰려든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 돌포탄과 비슷한 폭죽 있소?”
“저게 그거요?”
“저것 좀 보여 주시오.”
점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아우성을 쳐대는 바람에 폭죽은 진작 동이 났고, 주인이며 점원들은 발을 땅에 디딜 새가 없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이씨 가문에서는 힘들다고 불평하는 이 하나 없었고,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무는 노을이 졌을 때 태어났어. 그때 지나가던 승려 하나가 들어와서는 점을 봐 주겠다더니, 무성(武星)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했지.”
늙은 아낙이 마당에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이들이 함께 웃어 주었다. 물론 같잖다는 투로 비웃는 이도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애초에 그 어미를 죽였어야 했다고 하지 않았나? 오줌통에 빠트려 익사시키려고 했다며?”
누군가가 입을 삐죽이며 옆 사람에게 쫑알거리자 옆 사람이 손을 뻗으며 탁 쳤다. 저쪽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낙 하나가 걸어왔다.
“이무의 색시구나. 어서 이리 오렴.”
늙은 아낙이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이제 아주 보물단지가 됐네.”
“아무렴. 이제 고명부인이 될 사람인데, 누가 감히 견주겠어?”
다들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하는 듯 소곤거리며 아낙을 에워쌌다.
떠들썩한 거리나 이씨 저택과는 달리 옥대교의 정 낭자 집 대문 앞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오늘도 글씨 연습을 안 하는 거요?”
삼삼오오 다가온 사람들이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오늘은 글씨를 안 쓴다는 알림이 안 붙었소만······.”
대답하던 이가 저택의 대문 쪽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던 이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게 누구요?”
정교랑의 저택 앞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저게 바로 그 배은망덕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귀판관이오.”
거리에 있던 이가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회랑 아래에 선 반근은 바깥에 대고 퉤 침을 뱉었다. 그러더니 겁이 더럭 나는지 또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못 봤다는 걸 확인한 반근이 홱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잘못한 걸 알았나 보네. 이미 늦었네요.”
“틀렸어.”
건들거리며 지나가던 시녀가 반근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올리고 말했다.
“잘못을 깨달은 게 아니야. 그저 자기 마음 편하자고 저러는 거지.”
반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듯 시녀를 쳐다보다가 얼른 시녀를 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저자가 아씨를 뵙겠다고 하면, 아씨께서 만나 주실까?”
반근의 물음에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반근, 그 말도 틀렸어. 만나고 안 만나고는 아씨께 달린 일이 아니야. 저자한테 뵙겠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지에 달렸지.”
반근은 이해가 가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대문 밖에 있던 사환이 들어와 풍림이 세 번 예를 올린 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볼 것도 없겠지.
대문이 열리고, 늘 보아 익숙한 몸종이 걸어 나왔다. 거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 낭자가 글씨 연습을 하려나 보군.”
“볼 수만 있고 물을 수는 없는 건가?”
“물을 수도 있지. 자네도 이무처럼 보고 나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정 낭자가 제자로 받아 줄지도 몰라.”
“그렇다면 좀 이따 정 낭자한테 내 글씨를 보여 줘야겠군. 가르침을 얻을지도 모르잖아.”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곧 입을 다물고 정 낭자를 따라 붓을 들었다.
“옷 빨 거면 서둘러.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면 물이 온통 새까매질 거야.”
저쪽에서 아낙들이 소리쳤다. 이쪽에서 조용히 글씨 연습을 하는 동안, 저쪽 거리에서는 아낙들이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한원조가 시선을 거두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가 보시겠습니까?”
사환의 물음에 한원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풍림도 예를 세 번 올린 후 떠났는데, 내가 가서 만나라고? 뜻이 다른 자와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해 놓고.
조당에서 오간 말들은 이미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소식이 빠른 역관에서 누군가가 아주 생동감 넘치는 말투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놀라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다잖아. 귀신은 결국 귀신이야. 경성으로 올라오자마자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서,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들이받은 거지. 상대는 무려 신선이었는데!”
그건 한원조가 찬성할 수 없는 말이었다.
풍림이 어찌 명성을 탐하는 인물이란 말인가. 다만 지금은 형세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기면 왕이지만 지면 역적이 되는 법.
사실 그다지 생경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친에게 들은, 그 여인이 요승을 상대하던 때의 이야기도 똑같았다. 아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손을 썼다 하면 기필코 상대를 죽음으로 내모는 여인이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하고, 매섭게, 사정을 두지 않고.
어떻게 된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보살의 마음으로 은혜를 갚는 한편, 정의든 악이든 가리지 않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살인을 하다니.
“강주 바보······.”
한원조는 나지막이 읊조린 후 뒤돌아 걸음을 내디뎠다.
“가자.”
말에 오른 한원조는 몇 걸음 가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파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앉아 글씨를 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문가에 시립해 있던 반근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과 희열도, 가는 길이 다른 걸 알았을 때의 슬픔과 원망도 없이, 그저 행인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원조는 시선을 거두고 말을 재촉하며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부친의 일로 한원조는 역관에 머물고 있었다. 한원조가 돌아오는 모습을 본 역승이 얼른 나와 웃으며 맞이했다.
“한 수재, 누가 찾아왔습니다.”
부친이 하루에 세 차례나 황제를 알현한 이후로, 이들을 찾는 사람은 많았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려는 동향 사람도 있고, 연줄을 대려는 동문도 있었다. 물론 이제부터 연을 맺으려 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더 많았지만. 상대가 귀찮아하는데도, 어쨌든 인맥을 넓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정 낭자로 인한 일이지.
“아버지는 안 계십니까?”
한원조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계시오만, 한 수재를 찾아왔다고 해서요.”
역승은 공손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한원조가 고개를 들자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걸어 나오는 사내가 보였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부자는 아니어도 결코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지?
“한 은공.”
이대작이 앞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은공’이라는 말에 한원조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는 사내를 보며 한원조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은공이라······. 누가 누구의 은공인지도 모르겠군.
한원조와 이대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다. 이대작은 별말 없이 허리를 숙인 채 대뜸 비전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원조가 그날 자신이 태평거에서 돌려준 배당금인 걸 한눈에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은공, 일단 제 말씀부터 들어 보시지요.”
이대작이 한원조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한원조가 이대작을 쳐다보았다.
“저도 은공과 아씨 사이의 지난 일은 이제 막 들었습니다. 은공께서 아씨의 은인이시라고······.”
“아니오. 정 낭자가 내 은공이오.”
한원조가 이대작의 말을 끊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대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아씨와 은공 사이의 일입니다. 이 돈은 저와 은공 사이의 일이고, 아씨와는 무관합니다.”
한원조가 또다시 멈칫했다.
이 무슨······.
“아씨는 은공께 신세 진 걸 갚고자 하셨습니다. 은공께서 지나가는 길에도 불의를 못 참고 정의롭게 나서 주신 덕분입니다. 아씨께선 저를 숙수로 고용해 은공께 은혜를 갚으셨지요. 이 배당금은 본디 제 것입니다. 제가 은공께 드리는 거고요.”
그렇게 된 거였다고?
“숙수의 것이라 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너무 과합니다.”
한원조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이대작은 비전을 내밀었다.
“은공, 속 좁게 이러지 마십시오.”
이대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에는 받으셨잖습니까.”
한원조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은공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은공께서 아씨 때문에 이 돈을 돌려주신 걸 잘 압니다. 저 역시 다른 뜻은 없고, 그저 은공께 알려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이 돈은 아씨와 무관한 것이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막 입을 열려는데, 이대작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염려 마십시오, 은공. 제가 돈을 돌려드리려는 것은 은공께서 오해하셨기 때문이지, 은공을 협박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 은공의 마음을 잘 알고, 은공의 뜻을 이해합니다.
제가 돌려드리려는 이 돈은 이전의 것입니다. 이제 은공께서는 더 이상 태평거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시니, 염려 마십시오. 이것으로 계산을 끝내고, 은혜만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돈이나 재물에 관해서는 얽히는 일 없을 겁니다.”
한원조가 잠자코 이대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다면 이제 지나간 일은 언급하지 말고, 여기서 끝내기로 하죠.”
한원조가 웃으며 말하자 이대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은공.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대작은 뭐라 덧붙이는 말도 없이 깔끔하게 일어났다. 한원조가 이대작을 바라보았다.
“살펴 가십시오.”
이대작이 뒤돌아 걸어갔다. 하지만 이대작은 문가에 다다르자 결국 못 참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은공, 그러니까 제 말씀은, 우리 아씨는 좋은 분이란 겁니다.”
한원조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숙수가 여기 올 때,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가 있진 않았습니까?”
이대작이 들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반근 낭자가 그러더군요. 긴말 섞지 말고, 용건만 말하라고요.”
이대작은 손을 모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우리 아씨는 좋은 분이세요.”
한원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이지요.”
한원조를 힐끔 보고 뒤돌아 나가려던 이대작이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 깜빡했습니다.”
이대작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은공, 반근 낭자가 자신과 은공의 은혜도 이제 끝났다고 했습니다. 자신 역시 뜻이 다른 사람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전에 드렸던 논어를 돌려달랍니다.”
한원조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여인들이란······.
“이제 당분간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한다는 둥 하며 낭자를 비난할 사람은 없겠네요.”
겨울날의 오후. 진십삼은 정교랑의 대청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웃으며 말했다.
“난 애초에 그런 적도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십삼은 말없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만약, 이무가 돌포탄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요?”
진십삼이 물었다.
이번에 풍림에게 가한 반격에는 아무래도 이무가 만든 돌포탄의 공이 컸다. 정교랑의 불꽃놀이를 보고 만든 것이라고 한 덕이었다.
아무 상관 없는 듯 보이지만 상관이 있었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래서 풍림이 우연 치고는 심하다고 딱 잘라 말했구나. 참으로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쳐.
만에 하나 돌포탄이 제때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또 만에 하나 이무가 불꽃놀이를 보고 가르침을 얻은 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큰일이 났을 터였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요. 그러니 생각할 필요도 없죠.”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 만약 내가 다리를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혼담을 꺼냈을 때 동의했을까?
진십삼이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만약 당신이 내 원칙을 알았다면, 그래도 나더러 다리를 고쳐 달라고 했겠어요?
그러니까 괜히 이것저것 생각하며 근심할 것 없다고요.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요. 그러면 그런 거죠.”
만약이란 없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단 말이로구나.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차를 따르며 탄식을 감췄다.
이 여인은 참······.
11월 말의 서북 용곡성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굵은 눈발까지 휘날렸다. 관청에 화로를 들였는데도 딱히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주육낭은 벌써 탁자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먹물이 말라 가는데도, 붓을 손에 쥔 채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대인, 서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린 병졸의 목소리에 주육낭은 화들짝 놀라 붓을 떨어뜨렸다. 주육낭이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서찰을 황급히 접었다. 숨기긴 해야겠는데 어디다 숨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바닥에 떨어진 붓도 빨리 줍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허둥댔다.
서사근은 벌써 성큼성큼 들어와 있었다.
“주 대인, 말을 열 필 내어 달라고 하셨습니까?”
서사근이 예를 표하고 물었다. 주육낭은 손을 들어 코를 만지며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위에서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편자를 단 군마였으면 하오만.”
“열 필은 너무 많습니다. 여덟 필까지는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서사근의 말에 주육낭이 음 하고 대꾸했다.
실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사근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인사하자 주육낭이 또 음 하고 대꾸했다. 뒤돌아 밖으로 나가는 서사근을 보며 주육낭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꽉 쥐었다. 서사근이 문을 나가고 휘장이 내려지면서 시야를 가릴 때까지.
주육낭이 손을 들어 탁자를 쾅 내리치고 이를 갈며 혼잣말을 했다.
“그거 한번 물어보면 죽냐!”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참, 대인.”
서사근이 다시 들어오자 주육낭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쳐다보았다.
“이제 곧 섣달입니다. 누이 쪽에 새해 선물을 보낼까 하는데, 누이한테 보내실 건 없습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있고말고!
“누이의 물건은 내 이미 보냈소만.”
주육낭이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서사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공수의 예를 표한 후 뒤돌아 나갔다.
“같이 좀 보내 달라고 하면 죽냐!”
주육낭은 이를 갈며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고개를 돌려 탁자 밑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낡고 오래된 함이 하나 있었다.
주육낭은 함을 집으며 깔개 위에 벌러덩 눕고는 함 속에서 작은 구리거울을 하나 꺼냈다.
“이건 오랑캐의 왕궁에서 쓰는 진품이라고.”
주육낭이 혼잣말을 하며 손에 든 구리거울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주육낭의 움직임에 따라 햇빛이 반사되어 얼굴에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구리거울의 뒤에는 평범한 구리거울과는 다른 꽃문양이 있어 고풍스러우면서도 품위가 있고 세련된 구석이 있었다.
“예쁘긴 한데 티가 안 나네. 아무튼 꽤 돈 나가는 거야. 돈? 하긴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하긴, 그 무엇도 네 눈엔 아무것도 아니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십삼 말로는 정씨 가문에서 상경하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라고 했어. 지금쯤이면 다들 당도했겠지? 성가시게 굴진 않으려나?”
혼잣말을 하던 주육낭은 이를 갈며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히다가 먹물이 굳은 걸 그제야 발견하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먹을 갈았다.
주육낭은 먹을 갈고 나서 칼을 들 듯 붓을 들었다가 이를 갈며 도로 내려놓았다.
밖에 있던 위병이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눈치채고 휘장을 들어 올리며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주육낭이 보였다. 주육낭은 맥이 탁 풀린 듯 축 늘어진 채 앞에 놓인 구겨진 종이를 들어 근처에 있는 화로 속으로 하나씩 집어 던지고 있었다.
“대인, 웬 장난을 치십니까?”
위병이 놀라 물었다. 주육낭은 위병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은 종이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졌다. 위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끔 한 번씩 저런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
“대인, 집으로 서찰과 새해 선물을 보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역참의 병졸들이 곧 경성으로 출발할 텐데, 제가 가져다줄까요?”
위병이 뭔가 생각난 게 있는 듯 물었다.
“보냈잖아. 뭘 더 보내?”
주육낭이 심드렁한 투로 친병의 말을 반박했다.
“빠뜨린 게 있다고 하시더니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친병이 투덜거렸다.
“대인, 대인, 종 장군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주육낭은 벌떡 일어나 마지막 남은 종이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은 후, 옆에 걸어 둔 두봉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편 같은 시각 경성의 따뜻한 대청에 앉아 있던 진십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버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십삼이 물었다.
“정 낭자가 만든 간식을 먹고 용종을 가졌다고요?”
진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궁에 그런 소문이 돌더구나.”
진십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또 진안 군왕이 말한 거예요?”
“군왕이 정 낭자에 대해 수시로 떠들고 있어.”
“좋은 뜻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
진십삼은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십삼, 그건 네가 틀렸다.”
진시강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으며 진십삼을 제지하고,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좋은 뜻으로 그런다는 건 폐하도 알고 계셔.”
“그래 봤자 군왕 자신을 위해서겠죠!”
진십삼이 부친에게 건성으로 예를 표한 후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던 진십삼은 막 안으로 들어오던 진 부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자마자 또 어딜 가려고?”
진 부인이 아들의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정 낭자한테 그렇게 가고도 부족해?”
진십삼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장난치지 마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장난을 쳐. 정 낭자의 일인데 장난이라니.”
진 부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십삼은 헤헤 웃으며 모친을 향해 예를 올리고, 뒤돌아 자리를 떴다.
“또 무슨 일인데요?”
진 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정 낭자의 신기한 비술이 또 하나 늘었소.”
진 시강이 서책을 들며 대답했다. 진 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황궁에 계신 분이 회임했다더니, 그게 설마 정 낭자의 공이에요?”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진짜 보통 재주가 아니네. 자식을 낳게 해 주는 낭자라니. 혼담을 넣으려 드는 이가 또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겠네.”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감히 혼담을 넣어?”
진 시강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태후 입에서 나온 평가와 귀판관을 쓰러뜨린 일이며 신비궁과 돌포탄까지. 모두가 원하는 여인이지만, 누가 감히 데려갈 수 있겠는가.
“우리 가문이요.”
진 부인의 대답에도 진 시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음, 하지만 상대가 우리 가문과는 혼인하지 않는다잖소.”
그 말에 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시집을 안 올까요? 우리 십삼이 그렇게 잘해 주는데, 정말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그렇겠지. 원칙이 있잖소. 이미 공언한 것이니 지키는 수밖에. 군자는 언행이 일치해야 하오.”
진 시강은 부인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진 부인이 서책을 홱 낚아챘다. 진 시강이 고개를 들자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방법을 강구해야죠! 정 낭자가 시집 안 가면, 십삼도 장가 못 든다고요!”
“진 공자님, 또 오셨어요? 세밑까진 안 오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커다란 두봉을 걸친 채 막 대문을 나서던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난 너희 낭자가 아니잖느냐. 한번 내뱉은 말이라고 무조건 지킬 필요는 없지. 난 언제든 주워 담을 수 있어.”
진십삼의 말에 시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쪽에 있는 반근은 벌써 문을 활짝 열며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때 경왕부에 가서 간식 만들어 줬어요?”
진십삼이 물었다. 차를 우리던 반근은 그 말에 진십삼을 힐끔 쳐다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 옆에 있던 간식을 밀어 주었다. 진십삼이 반근을 흘끔 보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속 좁고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이더냐?
“아니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또 그자일 줄 알았습니다.”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폐하께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폐하께 간식을 올리면서, 낭자가 만든 거라고 했답니다.”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이 아, 하고 대꾸했다.
“황궁 비빈이 임신을 하자, 다들 낭자의 간식을 먹은 덕분이라고 한대요.”
진십삼이 말했다. 그러자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간식 점포라도 하나 더 열까요?”
정교랑이 말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늘 웃고 있던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면 뭔데요?”
늘 웃지 않던 정교랑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물으며, 간식 하나를 집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몸을 돌리고 먹었다.
진십삼은 소매로 얼굴 반쪽을 가리면서도 몸까지 살짝 튼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만 드러내고 있는데도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정교랑이 눈을 돌려 쳐다보았다.
소매로 가린 저 입의 입꼬리가 올라간 건 아니겠지?
진십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소매를 내린 정교랑의 표정은 단정하기만 했다. 진신삼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진안 군왕과 왕래를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은 잠시 말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는······ 마음이 올곧지 않습니다.”
그자는 마음이 올곧지 않다고?
한쪽 옆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반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군왕이라면 경성을 떠나 봉지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든 경성에 남아 있으려 하잖습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경왕이 안타까워 그렇죠.”
반근이 못 참고 끼어들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리며 경멸하는 투로 대꾸했다.
“경왕이 안타깝다는 말로, 늙은이와 어린애를 속이는 게지.”
늙은이와 어린애를 속인다?
반근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반근이 아무리 아둔해도 진안 군왕을 경성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게 누군지는 잘 알았다. 진십삼이 말하는 건 황제나 태후, 자신과 같은 백성이었다. 참으로 대역무도한 말이었다.
“낭자 앞이라 스스럼없이 말한 것이니, 망언을 늘어놓아도 비웃지 마십시오.”
“비웃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십삼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경왕이 안타까워 그러는 거면, 경왕부를 봉지로 옮겨 가면 되잖습니까?”
진십삼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실 일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있어선 안 됩니다. 낭자가 신경 쓰지 않는 걸 노려 멋대로 상처를 주려는 이들이 있어요.”
“고마워요, 공자.”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웃으며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제 진짜 가 보겠습니다. 새해 명절에 인사하러 들를게요.”
정교랑이 다시 예를 표하고 일어나 배웅했다.
진십삼이 가자마자 범강림이 들어왔다.
“왜 대낮에 벌써 왔어요?”
황씨가 놀라 물었다.
신비궁이 많이 파손되었기에, 이제 막 한숨 돌리던 범강림은 더욱 바빠졌다. 게다가 돌포탄을 만들고 발석거를 개조하느라 이무 쪽에서도 장인 열댓 명을 데려갔기에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었다.
“아가 주려고 장난감 만들어 왔지.”
범강림이 함 두 개를 꺼내며 말하자 황씨가 웃으며 받았다.
“이거 갖다 주려고 일부러 온 거예요? 그것도 두 개씩이나.”
범강림은 황씨에게 하나만 건네고, 다른 하나는 정교랑에게 주었다.
“이건 누이 거.”
“벌써 다 만들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황씨는 얼른 아기를 안고 있던 어린 몸종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괜찮아 보여? 설계도대로 여러 번 수정했어.”
범강림이 회랑 아래에 앉으며 물었다. 정교랑이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교랑은 예를 표하고 열어 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반근의 눈에 이상하게 생긴 죽통이 보였다.
“이거 맞아요. 오라버니가 잘 만들었어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강림은 그제야 웃음을 터트리고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반근, 안에 있는 선반에서 이무가 저번에 가져왔던 함을 가져와.”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함을 가져왔다. 정교랑이 그 속에서 긴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범강림이 가져온 죽통에 넣었다.
“아씨, 이게 뭐예요?”
반근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러자 정교랑은 손에 든 죽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소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지?”
뭐냐고?
반근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고 정교랑의 안색을 살핀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뭐가?
어두컴컴한 게 저녁때쯤 눈보라가 칠 것 같은 하늘이었다.
뭐가 있다는 거지?
반근이 고개를 돌렸다. 벌써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선 정교랑은 계속해서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전에 없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지금 저게 나타나지?”
“뭐가 나타났는데요?”
반근이 물으며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예쁜 게 있나?
반근은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정교랑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뭘 보시는 거지? 딱히 달라 보이는 건 없는데.
“그런데 지금 보여선 안 되는데.”
“그럼 언제여야 하는데요?”
정교랑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아방.”
갑자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오싹한 듯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리자, 대문 앞에 선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모자를 벗고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반근은 얼른 예를 표하면서도 문지기를 보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나, 문 여는 소리 못 들었어?”
문지기가 억울한 듯 해명했다.
잠깐 넋을 놓은 사이에······.
반근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멍한 표정이었다.
남들 눈엔 정교랑이 늘 멍하니 있는 듯 보였지만, 반근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평소 아씨는 멍해 보여도 정신이 또렷했지만, 지금의 아씨는 두 눈이 어지럽고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씨?”
반근이 의아해하며 손을 뻗어 부축했다. 정교랑의 팔을 붙잡던 반근은 더욱 기겁을 했다.
떨고 있어! 아씨께서 떨고 계시다니!
“아씨, 왜 그러세요?”
반근이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에 진안 군왕도 놀라 얼른 문턱을 넘고 달려 들어왔다.
“왜 그래요?”
진안 군왕의 눈에도 정교랑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뽀얗던 얼굴엔 더욱 핏기가 없었고,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하던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심연이 엿보였다.
정교랑이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방! 여기 봐! 해에 흑점이 많이 늘었어. 저게 바로 태백성(太白星: 금성을 이르는 말)이지?”
“저건 양산(杨汕)이야!”
귓가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럼 내가 별이란 말이야? 내가 별이라면 아방 넌 달이야. 우린 나올 때도 들어갈 때도 언제나 함께할 거니까.”
정교랑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며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씨! 아씨!”
반근이 점점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목소리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교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웃음을 거둔 후 똑바로 섰다.
“난 괜찮아. 조금 추울 뿐이야.”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똑바로 서서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섣달엔 더 추워요. 오늘은 날씨가 안 좋으니 옷을 두툼하게 입어요.”
정교랑을 쳐다보던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안 군왕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물었다.
“이건 뭐죠?”
정교랑이 손을 내리자 죽통이 소매 속으로 들어가 가려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뒤돌아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은 곧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아방이라고 부르지 마요.”
반근이 화로에 숯을 더 넣자 대청 안이 한결 따스해졌다.
“내가 실수했어요.”
진안 군왕이 문밖 회랑 아래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정방이라고 부를게요.”
정교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나는 길에 인사나 할까 하고 들렀어요.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 갈게요.”
정교랑이 알았다고 하며 밖으로 나왔다.
“저기, 별일 없는 거죠?”
머뭇거리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고 물었다.
“일이 좀 있긴 한데, 괜찮아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정교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간식, 내가 만들었다고 했어요?”
이거 때문이었나?
진안 군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알았으니 다행이야.
“아니요, 아닙니다. 그날 낭자가 너무 달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숙수를 시켜 다시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폐하께 말씀드릴 때 낭자가 알려 준 대로 했다고 말씀드렸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때문에 화난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망설이며 물었다.
“물론 아니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젓자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방.”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얼른 손을 도로 거두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난 괜찮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슬프지 않다고 하지 않는 대신,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인즉, 슬프겠지만 버텨 내겠단 뜻이리라.
대문 앞에 서서 공손히 예를 표하며 배웅하는 여인을 보고, 진안 군왕은 마차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나아갔다.
불행하게 태어났다가 간신히 결의를 맺은 오라비들이 전사했다. 간신히 오라비들의 명예를 되찾아 주었지만 또다시 풍림의 광적인 질책에 시달렸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바라던 대로 되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이를 악물며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는 상황은 그 누구라 해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으리라.
날씨가 흐린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종들이 길을 열자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그런데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휘장을 살짝 들어 보았다.
섣달이 되자 경성은 한층 떠들썩해졌다. 거리의 점포에는 형형색색의 등롱이 걸려 있어 저녁 무렵이면 무지개가 뜬 것 같았고, 낮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옷차림의 어린 낭자들이 한 점포를 에워싼 채 웃고 떠들었다. 두모 속 웃는 얼굴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여인은 웃는 것조차 하지 않아. 한 번 또 한 번, 늘 안 좋은 일만 있었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였다.
뭘 해야 할까?
진안 군왕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자 마차 앞에 앉아 있던 내시가 얼른 마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리 오너라.”
진안 군왕의 손짓에 내시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네 친구가 기분이 안 좋다면, 네가 어떻게 해 줘야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지겠느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질문을 받은 내시는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내기에서 일부러 져 주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 여인이 어디 돈을 신경 쓸까! 더군다나, 내기를 할 리도 없고. 내시 친구밖에 없는 내시들에게 물어봤자지! 내시들의 관심사는 결국 돈이니까.
“썩 꺼져라.”
진안 군왕이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진안 군왕의 마차가 거리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태사국 사천대. 겨울이라 실내에는 화로를 놓아두었다. 관원 몇 명이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천체 관측 기구가 놓여 있었지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안에 있던 관원들이 재빨리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모습으로 천체 관측 기구를 들여다봤다.
“대인.”
누군가가 겁먹은 목소리로 불렀다. 관원들은 그제야 학생(學生)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자세를 편히 고쳐 앉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천문을 계산할 땐 방해하지 말라니까.”
관원 하나가 인상을 쓰며 나무라자, 사천대 학생이 얼른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대인, 제가 방금, 본 것, 같습니다.”
학생이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뭘 봤는데? 기록해 두면 되지 않느냐.”
관원 하나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태백성을 본 것 같은데······.”
술을 마시고 있던 관원들은 학생의 말에 풉 하고 술을 내뿜었다.
태백성이라니!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관원 네다섯 명이 대청 중앙에 있는 관성대로 달려가 겨울 오후의 찬바람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흐린 날이다 보니 해도 컴컴했다.
관원 몇 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웬 헛소리를 하는 게야?”
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와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사천대 학생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정말 봤습니다. 방금 전에요. 어쩌면 지나간 것일지도······.”
학생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관원들이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을 끊었다.
“지나갔다니! 네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인 건지 아느냐?”
관원 하나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태백성이 지나갔다잖소. 대인도 말조심하시오.”
다른 관원도 나지막이 경고했다. 옆에 있던 이가 방금 말한 관원을 탁 치고 노려보며 경고했다.
“어허, 그래도 그런 말을!”
관원은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잘 살펴봅시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게 진짜고 귀로 듣는 건 가짜야.”
관원이 학생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관원들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살펴보고 그런 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며칠이나 배웠다고 잘난 척이냐!”
관원들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하늘을 살피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신중해야 한다. 애들 장난이 아니야. 명심해라. 말 한마디에 나라가 번성할 수도 있고, 말 한마디에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어.”
학생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만 가 봐라. 올해는 날씨가 유독 춥구나.”
“저녁 당직은 누구지?”
“누가 하나 똑같지 뭐. 오늘은 날이 흐려서 보이는 것도 없어.”
관원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며 찬바람 속에서 옷을 단단히 여몄다.
학생은 관성대 앞에 서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더니 먹구름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 않게 됐다.
“정말 잘못 본 건가?”
학생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기엔······.
“복지(复之).”
누군가가 소리 높여 불렀다. 학생이 얼른 쳐다보자 관성대 아래에 있던 젊은이가 손짓했다.
“어서 가자. 몸 좀 녹이러 가야지.”
젊은이가 손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학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오늘 당직이라 못 가.”
학생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젊은이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날이 흐리잖아. 볼 게 뭐 있어?”
젊은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데도 학생은 잠자코 공수의 예만 표했다. 젊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를 떴다.
“하늘은, 사실 보기 좋잖아.”
학생은 혼잣말을 하며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려 밤하늘은 컴컴하기만 했고, 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각 옥대교의 정교랑 저택. 등불은 이미 꺼졌고 대부분 단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뒷마당에서는 여인 하나가 깔개를 깔아 자리를 마련하고 비스듬히 기대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반근이 두꺼운 담요 하나를 가져왔다.
“아씨, 하나 더 덮으세요.”
반근이 나지막이 말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은 술잔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술 따라.”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깔개를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술을 마시며 하늘을 보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볼 게 뭐가 있지?
반근도 정교랑을 따라 고개를 들고 올려다봤다.
“아버지, 뭐가 보여요?”
어둠 속 관천대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높은 관천대에는 등불 하나도 없었다.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빛뿐이었다.
“천명(天命)을 보았느니라.”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도 보이는 거예요?”
사내는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관천대 주위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서재가 어둠 속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아방, 그야 당연하지. 우리 정씨 가문이 뭘 하는지 잊지 마라.”
“먹을 것도 만들고, 놀 것도 만들고, 책도 읽고, 역사도 기록하고, 병사도 이끌고······.”
여자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그리고 동산 오라버니의 아버지는 병을 치료해요.”
사내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건 잔재주일 뿐이다. 아방, 명심해라. 우리 정씨 가문의 진짜 재주는 바로 천도(天道: 천지자연의 법칙)를 관찰하는 것이다.”
천도를 관찰한다.
찬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바람이 불어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자 정교랑은 머리를 매만지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이 광풍 속에서 서서히 틈이 생기더니 별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천도가 왜 어지럽지?
대주의 기록에 따르면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것은 열여덟 번뿐이었다. 열일곱 번은 이미 발생했고, 열여덟 번째이자 대주에서 마지막으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것은 대경의 고조가 대주를 멸하기 일 년 전 일이다.
말하자면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일로 대경의 고조는 하늘의 뜻에 따라 대주를 대신해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그때까지는 아직 수십 년이 남았는데, 왜 지금 나타난 거지? 지금 건 발견을 못 해서 기록이 누락됐나?
“아씨, 술이요.”
반근이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정교랑은 술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은은하게 보였다.
“아버지, 그래서 천도는 보셨어요?”
사내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천도가 바로 천명이니라.”
“아버지, 천명은 또 왜 보시는 건데요?”
“천명에 순응하기 위해서이자 천명에 역행하기 위해서지.”
천명에 순응하고! 천명에 역행한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면 정씨 가문에서 하는 일은 천명에 순응하는 일일까? 역행하는 일일까? 순(順)은 무엇이고 역(逆)은 또 무엇일까?
전에는 내가 누군지 몰랐고, 지난 기억을 생각해 본 적 없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서는 지난 기억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난 기억을 떠올려야 할 것 같네.
“아버지, 전 왜 그렇게 많은 걸 배워야 해요?”
“왜냐하면, 아방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될 거니까. 남들과 달라.”
중요하고 다르다는 건, 황후가 될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때 다들 그렇게 말했어.
아, 아니, 다들 그런 건 아냐.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어. 그저 웃기만 하셨지.
거짓말이 아냐.
정말 그런 거였다면, 아버지께서 입을 열고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셨을 거야. 입을 열지 않으셨다면, 그건 아마도······.
정교랑이 손을 뻗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그 많은 걸 배워야 했던 건, 내가 황후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 아냐. 그럼 무엇 때문이지? 어째서였을까?
그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은 또 무엇을 위한 거지?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건 뭘 예고하는 거지? 천하가 어지러워진다? 왜 지금 이때 천하가 어지러워지지?
한편 같은 시각 사천대의 밀실 안 탁자에는 서책 뭉치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고, 바닥에도 천문지 몇 권이 떨어져 있었다. 태백성을 봤다던 학생 또한 탁자 앞에 서서 놀란 눈으로 여기저기 떨어진 종이들을 훑어봤다. 종이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고 그림들도 있었다.
“세상에, 내가 뭘 계산한 거지?”
학생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화로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말단 관리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조심 좀 해라. 이 물건들 함부로 어지럽히면 경을 쳐. 네 목이 달아난단 말이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들어 학생을 쳐다보던 말단 관리는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뭘 계산한 거지?”
학생은 또다시 멍한 채로 중얼거리며 말단 관리를 쳐다보았다. 놀란 표정은 어느새 기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가?”
말단 관리가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월식입니다.”
학생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월식이라고요!”
월식?
월식은 흉조였다. 위에서부터 시작하면 군주가 도리를 잃고, 옆에서 시작하면 재상이 기운을 잃으며, 아래에서 시작하면 장수가 법을 어긴다고 했다.
천문과 역법, 점성술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사천대 말단 관리는 흉조라고 읊조리다 말고 곧 코웃음을 쳤다.
“뭐 놀랄 일이라고. 저번에도 일식을 계산하지 않았더냐?”
그랬는데 어쨌지? 그때도 틀렸잖아.
“됐다, 됐다. 날이면 날마다 이거 계산하고 저거 계산하다가 결국엔 역법도 틀렸잖아. 썩 나가거라.”
말단 관리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날이 다 밝았다. 그만 나가거라. 여기 있는 이 천문, 역법, 도참, 위서, 천상은 하늘과 통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날이 밝기 전에 썩 나가.”
학생은 하는 수 없이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동녘이 막 밝아오기 시작하고 세상은 아직 어두울 무렵인지라 매서운 찬바람이 불었다. 학생은 옷을 단단히 여미고 종이를 품속에 고이 챙긴 다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정말 잘못 본 건가? 오늘 계산도 틀린 거고?
날이 환히 밝았을 무렵, 경왕부 안.
진안 군왕은 축 늘어진 채로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 앞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는 경왕을 쳐다보았다.
“육가아, 대답해 봐. 그 여인이 정말 나한테 화난 걸까?”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물론 경왕이 대답할 리는 없었다.
“내가 보기엔 아닌 거 같아.”
진안 군왕이 말했다.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안 군왕은 경왕이 던지는 공을 계속 받아쳤다.
“전하.”
내시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사천대에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는 걸 본 자가 있다고 합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
글공부를 하는 자는 경서와 역사서, 제자(諸子)·시문집(詩文集)을 두루 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문과 지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통달해야 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공부를 하는 이는 다 알았다.
진안 군왕이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다.
“지금?”
“아닙니다.”
내시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랍니다. 딱 한 사람만 본 데다, 그것도 학생인지라 의견이 받아들여지진 않았고요.”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 태백성이······ 하늘을······.
“그렇구나! 그거 때문이었어?”
진안 군왕이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렇다고? 뭐가 그거 때문이란 거지? 맞는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내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맞아,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거였어.”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시가 그 말에 흠칫 놀라 물었다.
“전하, 전하께서도 보셨습니까?”
그래, 봤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의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을 때, 그 여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봤어. 평소와는 다른 표정이었지.
그 여인은 일식을 예측할 수 있었으니,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 또한 알아봤을 거야.
그렇다면,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게 아니었잖아! 나 때문이 아니었다고!
“전하.”
내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불렀다. 하지만 고개를 든 진안 군왕은 환히 웃고 있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다니!
내시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 서둘러 다시 불렀다.
“전하.”
진안 군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하, 정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면······.”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단 말입니다!”
그건 흉조였다. 나라가 불안하고 천자가 위태로운데, 어찌 웃는단 말인가.
진안 군왕은 웃음을 거두고 싶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긴 힘들었다.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게 아니었어. 나 때문이 아니라고.
“손님, 이쪽입니다.”
고개를 들고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던 곽원(郭元)이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접대하는 점원이 문을 열자 곽원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라.”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곽원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꿇어앉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닥에 있는 정교한 꽃문양뿐이었다.
“네가 사천대의 곽복지(郭复之)더냐?”
곽원이 예를 표한 후 네 하고 대답했다.
“네가 월식이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지?”
곽원은 오늘 아침에 사천대 관원들에게 실컷 욕을 얻어먹은 일과 계산이 잘못됐다며 지적하던 일들이 떠올라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이나 배웠다고! 그럼 황도(黃道)와 백도(白道)도 예측할 수 있더냐?
조금은요.
조금?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어쩌면 내가 정말 틀렸을지도.
“괜찮으니 대답해 봐라. 편히 말해도 된다. 나 역시 편히 듣겠노라.”
곽원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네. 보름에 월식이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물론 틀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가서 너 대신 물어보고, 답을 알려 주마.”
물어본다고? 누구한테?
곽원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어느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옷자락이 곽원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곽원은 다시 멍하니 고개를 돌려 눈앞에 차려진 연회 음식을 쳐다보았다. 실로 풍성한 음식이었다.
경성으로 올라와 사천대의 학생이 된 지 벌써 삼 년이었지만,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워낙 고급 음식점이다 보니 곽원으로서는 발을 들일 기회조차 없었다.
저 귀인이 계산은 하고 가셨나 모르겠네.
곽원이 산해진미를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진안 군왕은 벌써 마차에 앉아 있었다.
“전하, 정 낭자한테 물어보러 가시려고요?”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진안 군왕이 힐끔 쳐다보았다.
“당연히 물어봐야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묻진 않을 것이다.”
내시가 퍼뜩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똑똑한 일이지. 특히 그 남이 황제라면 더더욱.
근래 들어 경사가 이어지면서 조회 때도 모처럼 논쟁이 없었고, 황제도 모처럼 근정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안비마마께 가 보시지요. 요즘 식사를 잘 못 드신다고 하옵니다.”
한쪽 옆에 있던 내시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밥을 못 먹어? 태의를 부르거라.”
내시가 네 하고 대답했다.
“가희와 예인들도 부르고. 짐이 안비의 처소로 가서 같이 봐야겠다.”
황제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답하고 나가던 내시는 문가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깜짝 놀라 어이쿠 소리를 내며 욕이나 해 주려고 고개를 돌리던 내시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전하.”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진안 군왕은 내시를 향해 손을 휘휘 젓고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만에 군왕을 보는지라 황제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입궐을 해? 탄핵을 당할까 두렵지도 않느냐?”
황제가 짐짓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여느 때처럼 헤헤 웃지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폐하.”
진안 군왕은 예를 올린 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뭘 그리 수상쩍게 굴어?”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폐하.”
진안 군왕이 황제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하려고 하자, 황제가 웃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탁탁 쳤다.
“군자는 남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 없어야 하느니라. 체통을 지켜야지. 앉거라.”
진안 군왕이 황제 옆에 앉았다.
“폐하, 소문을 들은 게 있사옵니다.”
진안 군왕이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지한 표정의 진안 군왕을 보니 황제도 호기심이 생기는 눈치였다.
“소문이라니?”
진안 군왕이 황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듣자니 월식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가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황제가 놀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월식?”
진안 군왕은 황제의 말에 놀란 듯 얼른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폐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황제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사방을 쭉 훑어보다가 내시를 보며 물었다.
“왕래귀(王來貴), 네 입이 가볍더냐?”
왕래귀라는 이름을 가진 내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끔뻑이며 잠자코 황제를 쳐다보다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서며 물었다.
“폐하, 지금 소인에게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내시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대전에 들었을 땐 소인의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사옵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지금은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넌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왜 황제는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을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거지?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는 그랬다. 황제가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아래에 있는 신하가 들려주고 싶고, 알려 주고 싶은 일에 불과한 법이니까.
내시가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최근 천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진안 군왕은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황제는 또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네가 이번엔 천문에 관심이 생겼나 보구나.”
진안 군왕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며칠은 지리에 관심을 보이고, 또 며칠은 칠현금에 관심을 보이다가, 또 며칠은 바둑에 관심을 보이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공부가 그토록 지지부진하지는 않으리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겠지.
“어쩌다 또 천문에 관심이 생긴 것이냐?”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잖아요.”
진안 군왕이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재미있어서라고? 그 여인 때문이겠지. 말할 때나 행동할 때나 늘 그 여인이 빠지지 않잖아. 그 여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다 관심을 갖고 해 보려 드니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번엔 왜 간식까지 만들어 가져왔겠어? 이젠 집에서 술을 빚는다고 하려나? 어엿한 사내가 체통을 지켜야지!
“재미는 무슨.”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궁에서 나갔으니 단속할 사람이 없다 이것이냐? 공부는 아예 내팽개친 게야?”
진안 군왕이 겁먹은 듯 코를 만졌다.
“폐하, 지금 그런 말씀을 할 때가 아닙니다. 무려 월식이란 말입니다. 제가 사천대에 가서 물어봤더니, 거기서도 논쟁이 벌어졌답니다. 월식을 계산해 냈다는데, 진짜라고 하기도 하고 계산이 틀렸다고 하기도 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대요.”
그랬군.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들 말을 뭐 하러 듣느냐? 사천대가 언젠 안 그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역법이니 천상이니 하며 싸우기만 하지. 그런데 결과는? 짐은 그놈들이 뭘 계산해 낼 것이라 바라지도 않는다. 괜히 짐의 잘못이라며 물고 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젠 다르잖습니까.”
진안 군왕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아둔해도, 아둔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황제가 진안 군왕을 힐끔 보고 눈치를 챘다.
“위낭, 혼인을 하고 싶으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낭,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
“네, 그래도 경왕이 아직 어리잖습니까. 아직 너무 어려서 지금은 제가 떠날 수 없습니다. 경왕이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것도 싫고, 누군가 때문에 경왕이 놀라는 것도 싫습니다.”
황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결, 결국 그 모양일 텐데.”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달라질지도 모르죠.”
그래.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황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느니라. 태후께 가 보거라.”
진안 군왕이 네 하고 대답한 후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폐하, 안비마마께 가시겠습니까?”
내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황제는 손으로 탁자를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 가겠다. 안비에게 상으로 가무를 내리거라.”
내시가 네 하고 대답했다.
월식이라······. 올해는 일식에 이어 월식까지 있구나. 정말이지······.
황제의 얼굴에 차츰 수심이 드리웠다.
그리 재수가 없을 린 없는데.
“여봐라.”
황제의 부름에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정 낭자를 부르거라.”
하지만 신나게 중서성으로 달려와 황제의 말을 전하던 내시에게 돌아온 것은 진소의 매서운 질책이었다.
“또 누가 그 여인을 발고한 것이냐? 아니면 이미 관직을 받기라도 했다더냐?”
진소의 호통에 내시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엔 왜 또 절차를 무시하고 그 여인을 궁으로 부른단 말이냐?”
“폐하께서 하문하실 게······.”
“국사를 물으신다더냐? 그렇다면 문무백관이 있지 않느냐. 사사로운 일을 물으신다더냐? 그렇다면 황성사가 있지 않느냐.”
진소가 내시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여인을 부르신단 말이냐?”
내시는 호통에 놀라 몸을 움츠리고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폐하께서 황당한 짓을 벌이시면, 폐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너희들이 나서서 말씀을 올려야지!”
내시는 겁에 질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아났다. 달아나는 내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진소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폐하께서 조정 대신을 가까이 두시는 것도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여인이 아닌가! 겉보기엔 영예로워 보이지만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순 없었다.
진소의 반대에 부딪히자 황제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조정의 법도가 지엄하니 반박할 논리가 없지 않은가. 또다시 진소의 심기를 건드려 사직을 청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참······. 강직한 진소조차도 걸핏하면 사직을 청하고 들다니. 사람은 다 변하기 마련이구나.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발고한 것도 아니고, 관직을 받은 것도 아니라, 짐이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짐이 관직과 작위를 내려야겠구나. 그때는 뭐라고 하나 어디 두고 보자.”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었고, 지금 당장 긴박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진안 군왕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라 하거라. 아마 지금쯤 눈물을 앞세운 태후의 압박에 시달리거나 태후 때문에 눈물을 뽑아내고 있을 게다.”
아마도 후자겠지.
“나한테 묻는다고요?”
정교랑의 저택 안.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궁금하시대요. 보름에 정말 월식이 있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안 군왕은 멈칫하다가 정교랑을 골똘히 보며 물었다.
“아니, 그게 보여요?”
정교랑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고 흔들어 보였다.
“그게 어떻게 보여요. 계산을 해야죠.”
“손가락을 꼽으면서요?”
진안 군왕은 더욱 호기심이 이는 표정이었다.
“아니요. 역법으로 계산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아, 소리를 내며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폐하께 그렇게 말씀 올리면 될까요?”
진안 군왕이 머뭇거리며 묻자 정교랑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남 앞에서 못 할 말도 아닌데. 어차피 모두가 보게 될 거예요.”
“난 낭자한테, 성가신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다시 웃음을 짓고 손을 거두어 옷소매를 몸 앞으로 모았다.
“정씨는 천도를 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천도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교랑이 느릿느릿 말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화를 두려워한 적도, 화를 피한 적도 없지. 단 한 번도.
황제가 정 낭자를 부르려 하자 진소가 반박하며 질책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폐하께서 또 정 낭자를 부르셨다고? 무슨 일로?”
고능준의 물음에 수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시가 말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진소 역시 묻기도 전에 대뜸 호통부터 쳤고요.”
고능준이 손을 휘휘 내젓자 수하가 물러가고, 측근이 앞으로 다가섰다.
“궁에 가서 물어봐라.”
측근이 알았다고 대답한 후 나갔다.
황궁 안에 있던 귀비는 질문을 받고서야 그 일을 안 듯 고능준보다 훨씬 격하게 반응했다.
“또 무슨 일로? 안비 하나가 회임한 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이냐?”
“마마,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옆에 있던 내시가 놀라 얼른 쉿 하는 동작을 했지만, 귀비는 손에 들고 있던 손난로를 내던지고 홱 돌아섰다. 내시와 궁녀가 조심스레 주웠다.
“그까짓 회임이 뭐? 품계를 올려 주고 친정 가문에 작위를 내린 것도 모자라 산해진미로 시중을 들고 가희에 무희까지 보내 기분을 달래 줘? 누구는 애 안 낳아 봤나!”
귀비는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무슨 귀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큰 나무통이나 만드는 집안 출신이!”
내시가 하는 수 없이 웃으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마마, 폐하께서 어디 안비마마가 귀해 그러시겠습니까. 또 자식을 얻게 되셨으니 기쁘셔서 그렇죠.”
내시는 이미 사내의 몸이 아니었으나 이 세상 사내는 다 똑같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이러다간 폐하께서 신선께 도를 여쭈실지도 모르겠구나. 황궁의 체통이 어찌 되려고!”
거기까지 말한 귀비는 풍림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어린 계집 하나 상대하지 못하다니. 쫓겨나도 싸지!”
내시가 귀비를 타이르며 함께 웃어 주었다.
“마마, 이렇게 된 이상 긴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일단 폐하께서 무슨 일로 정 낭자를 부르셨는지 먼저 알아보시지요.”
귀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가까이 다가와 아뢰었다.
“방금 태후궁에서 나와 안비의 궁으로 가셨습니다.”
귀비 손에 든 비단 손수건에 주름이 갔다.
“가자. 우리도 안비를 보러 가자꾸나.”
한숨을 내쉬고 난 귀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한편 같은 시각 진안 군왕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아, 참.”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요즘에도 집안사람들이 혼사 얘기를 합니까?”
혼사? 갑자기 그건 왜?
반근이 고개를 들었고,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하거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경하드립니다, 전하.”
진안 군왕이 얼른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얘기를 꺼내긴 했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 어릴 때 부모님 때문에 궁으로 보내져 늘 남이 결정하는 대로 살았어요. 나 스스로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진안 군왕은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내가 결정권을 쥐고 싶어요.”
정교랑이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과 혼인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질문을 던진 진안 군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녀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듯한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이 질문은 좀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네. 친구끼리는 이런 얘기 안 하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만나면······ 알겠죠.”
하긴, 만나 보면 알겠지. 무슨 이유가 그리 많이 필요할까.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나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아마 그렇겠죠.”
진안 군왕이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그 이상한 화제를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이젠 내가 결정할 거라 거절했어요.”
“스스로 결정하겠다고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진안 군왕은 문득 가슴이 뛰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요, 나 스스로 결정해야죠. 저들 마음대로 아무나 밀어 넣지 않도록.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요.
걱정? 이 여인이 걱정할 일이 뭐 있을까. 자기 일도 아닌데.
진안 군왕은 순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참, 나랑 내기 하나 해요.”
진안 군왕이 또 무언가 떠오른 눈치였다.
“나랑 내기를 하겠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진안 군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보름날 월식이 있을지 없을지 내기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나랑 그거로 내기를 하자고요?”
“네, 그거로 내기해요. 난 못 믿겠어요. 낭자가 그렇게 정확하다고는······.”
진안 군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축시 사각에 달이 서쪽에서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10분의 5만큼 식(蝕)이 진행돼요. 육각에는 8할까지 먹히면서 달이 유지(酉地: 방위도상 서쪽)를 모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래도 내기할래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이 여인이 이런 말투로 나한테 얘기하는 건 처음 봐. 그 내시의 말이 맞는 것 같네.
“할래요. 지는 사람이, 상대한테······ 1천 관을 주기로 하죠.”
반근은 진안 군왕의 말에 놀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내기? 1천 관? 그만한 액수는 돈으로 치지도 않는 분들께서.
반근이 두 사람을 쓱 훑어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고 나서 시치미 떼기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씩 웃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대문을 나선 후에도 진안 군왕 얼굴의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고 되려 진해지기만 했다.
틀림없이 질 거야.
진안 군왕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전하.”
다소 큰 소리가 나자 진안 군왕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내시 하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바로 입궐하시겠습니까?”
“입궐은 왜?”
진안 군왕의 물음에 내시가 멈칫했다.
“전하, 정 낭자가 전하께 월식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다. 일단 입궐은 됐다. 그보다 먼저 볼 사람이 있어.”
이번엔 곽원이 먼저 도착했다. 이번에도 전과 같은 방이었지만, 산해진미는 차려져 있지 않았다.
곽원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니 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두봉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곽원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내가 대신 물어봤느니라.”
기쁨이 묻어나는 경쾌한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웃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저 대신 무엇을 물어보셨는데요?”
곽원이 어리둥절한 채로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금실로 연꽃을 수놓은 병풍 앞에 서 있는, 준수한 소년의 모습에 눈이 부셨다.
“월식 말이다.”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네 계산이 맞았어. 보름날 축시 사각에 달이 서쪽에서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10분의 5만큼 식이 진행된다. 육각에는 8할까지 먹히면서 달이 유지를 모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귀에 익은 전문용어가 들리자 곽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축시 사각에 달이 서쪽에서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10분의 5만큼 식이 진행된다. 육각에는 8할까지 먹히면서 달이 유지를 모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곽원은 진안 군왕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한 다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걸 계산해 냈단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그럼 월식이 눈으로 보고 예측하는 것이더냐?”
진안 군왕이 말했다.
계산했다니, 이렇게 정확하게 계산해 내다니.
곽원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전하를 뵈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전하.”
곽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이제 내가 너에게 알려 주었으니, 넌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곽원은 다시 멈칫하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사천대의 학생이라 하지 않았느냐? 천문과 역법을 익히고 윗전을 대신해 하늘과 통하는 게 너희의 직무다. 천문 현상을 계산해 냈으니, 이제 가서 폐하께 아뢰고 대처하시게 해야지.”
곽원은 진안 군왕을 멍하니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망설였다.
“저는······.”
“하기 싫은 것이냐? 아니면 용기가 없는 것이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하기 싫냐고? 용기가 없냐고?
“저는 재능이 일천하고 학식이 부족하여 아는 것이 없사온데······.”
곽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건 상관없다. 너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있거든. 그 여인이 네가 추론한 것이라 말해도 된다고 허락했느니라.”
진안 군왕이 곽원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대인들께서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곽원이 고개를 들었다.
“윗전에 아뢰는 것은 네가 해야 할 일이자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다. 저들이 동의할지 말지, 인정할지 말지는, 저들의 일이고.”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으며 옷자락을 털고 허리를 숙여 곽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불안함과 억울함이 넘실대며 반짝이는 어린 학생의 눈이었다.
“도박을 걸어 보지 않겠느냐? 그저 학생 신분에 만족하고 싶은 것이냐? 그것도 그 보잘것없는 놈들 밑에서? 아니, 이번 일이 지나고 나며 아마 사천대에서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 어디 가서 평생 일지나 쓰는 하급 관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
곽원이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바꾸었다.
“물론, 그래도 대수로울 건 없지만.”
진안 군왕이 웃으며 손뼉을 치고 일어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섰다.
“그래도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네가 말하는 걸 듣는 이는 너 자신뿐이겠지. 네가 쓴 글을 보는 이도 너 자신과 후대 사람들뿐일 테고.”
적막한 곳에서 조용히 내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무릎 위에 올려 둔 곽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서 두봉 자락이 휘날리더니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도박을 걸어 볼까. 윗전에 아뢴 후 정말 월식이 일어나면, 단번에 명성을 얻을 텐데.
물론 월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황제가 문신을 죽이지 않는다고는 하나 사천대 관원은 신분이 특수하여 예외였다. 게다가 천문 현상의 변화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문신 신분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예도 없지는 않았다.
곽원은 오래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손님?”
점원의 부름에 곽원이 고개를 돌리고 점원을 쳐다보았다.
“뭐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요?”
점원이 공손한 말투로 묻자 곽원은 멈칫했다.
“저기, 계산은 하고 가셨소?”
점원은 곽원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같이 차려 주시오.”
곽원이 자리에 똑바로 앉으며 말하자 점원이 얼른 대답하고 물러갔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죽더라도 일단 먹고 죽자!
곽원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해가 지고 또다시 해가 떠올랐다. 조회를 마친 중서성은 여느 때처럼 각 관청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심사하느라 분주했다.
하급 관리 하나가 상소문을 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천대에서 모처럼 천문에 관한 글이 올라왔군. 또 역법이 틀렸다며 새로 정하자고 하려나?”
상소문을 펼치던 하급 관리의 목소리가 돌연 줄어들었다.
“15일에 월식이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유사(有司)에 내리시어 대책을 마련하고 천계(天戒: 하늘의 경계)를 삼가 살피시옵소서.”
월식?
하급 관리가 벌떡 일어섰다.
월식이 있을 거라고?
월식은 흉조였다. 위에서부터 시작하면 군주가 도리를 잃고, 옆에서 시작하면 재상이 기운을 잃으며, 아래에서 시작하면 장수가 법을 어긴다고 했다.
“이게 정말인가? 그렇다면 보통 큰일이 아닌데!”
하급 관리가 쉰 목소리로 외치고는 상소문을 들고 뒤돌아 뛰어나갔다.
* * *
작가의 말: 본문 내용 중 정교랑이 예측한 월식에 관한 내용은 <기주지(蕲州志)>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