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권 - 104화 (104/160)

교랑의경 18권

-가르침-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이신은 옆에 있던 이와 시선을 주고받은 후 대답했다.

“네, 제 서자입니다만······.”

이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관이 손짓을 하며 호령했다.

“그럼 맞구나. 체포해라!”

호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이신을 비롯한 그 일가를 전부 바닥에 제압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서로를 불러대는 목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씨 가문의 대저택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어둠이 내릴 무렵, 등불만 하나 켜 놓은 커다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이씨 일가는 전부 이 방 안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신은 수염이며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바닥에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한 사내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후에 지진이 일어났던 게 아니랍니다. 궁노원에서 폭발이 일어나 신비궁 수백 개를 망가뜨렸대요.”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궁노원이 어떤 곳이고, 신비궁이 어떤 무기던가. 방 안에 있던 이씨 일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설마 그놈 짓이더냐?”

이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쏟으려 했다.

“맞습니다.”

그 말에 이신은 눈을 까뒤집고 혼절했다. 방 안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었고, 곡소리와 비명이 이어졌다. 문밖에 있던 위병에게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며 애걸한 후에야 간신히 물 한 그릇을 얻어 이신의 얼굴에 끼얹을 수 있었다.

“끝났구나, 끝났어.”

정신을 차린 이신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다.

“우리 이씨 가문이 그놈 손에 끝나게 됐구나.”

“지난번에도 그 녀석이 거리를 절반이나 태우는 바람에 멸문지화를 입을 뻔했잖아요. 그러게 경성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니까, 다들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만.”

“안 듣긴 누가 안 들어? 마음이 약해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지, 이 판국에 누굴 탓해!”

“애초에 벼슬자리를 구해 주는 게 아니었어요. 상단이나 쫓아다니게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죠.”

서로를 비난하며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계속됐다.

“그 얘긴 그만합시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알아보죠. 그 녀석이 정말 세작이라면, 우린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방 안이 일순간 조용해지나 싶더니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곧이어 여인들과 아이들이 있던 옆쪽에서 한 여인이 끌려왔다.

“아버님, 아버님, 전 몰랐어요.”

여인이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다.

“벌써 집에 안 들어온 지 꽤 돼서 저도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몰랐어요. 돈이 좀 필요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관직을 잃은 데다 아버님의 노여움까지 샀잖아요. 그래서 조그맣게 장사나 할까 한다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제가 혼수를 팔아 장만해 줬어요. 아버님, 뭘 하고 다니는 건지는 정말 몰랐어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역시 은밀히 뭔가를 꾸미는 거였어! 끝났구나, 끝났어.

“우리 이씨 가문에 그리 불효막심한 놈이 나오다니!”

이신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동녘이 밝아 올 무렵,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밥통을 내려놓았다.

“밥들 먹어라, 밥.”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전부 풀이 죽은 채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난 안 먹을래. 어차피 죽게 된 거, 체면이라도 지켜야지.”

누군가가 말했다. 밤새도록 통곡한 이들이 그 말에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다 같이 울고 있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끌어내 목을 벨 건가 봐요!”

아낙이 소리치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더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노야, 노야, 저예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무 도련님도 무사하십니다. 이무 도련님은 무사하세요.”

바닥에 누워 있던 이신이 그 말에 벌떡 일어나 기어왔다. 이씨 일가 사람들은 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지만, 금군 위병들의 삼엄한 경계에 막히고 말았다.

마당 쪽을 보니 사환 하나가 보였다. 사환은 무관에게 무어라 이야기한 후 문서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무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비켜섰다.

사환은 그제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이신이 물었다.

“노야, 이무 도련님께서 폐하께 보물을 바치신답니다. 신비궁보다 훨씬 대단한 보물이래요.”

사환이 소리쳤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세작이 아니란 말이냐?”

누군가가 핵심을 물었다.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작이 아닙니다.”

사환은 소매를 들어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도련님이 곡강지에서 폐하께 그 어마어마한 병기를 직접 검증해 보이신대요!”

사환이 손으로 곡강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이 환하게 밝았을 무렵, 어가는 이미 봉쇄되어 있었다. 황제의 행렬이 지나가고 나서야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폐하께서 곡강지로 가시나 봐!”

“이 엄동설한에 폐하께서 곡강지엔 왜 가시지?”

“누가 보물을 바친다는군. 신비궁보다 더 강력한 거래.”

“정 낭자가 또 보물을 바친다고?”

“정 낭자가 아니야. 누구라더라, 아무튼 다른 사람이라던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한편 곡강지 쪽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대신들은 곡강지에 있는 높은 누대에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오! 폐하께서 옥체를 돌보지 않고 함부로 출궁하시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외다.”

풍림이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이미 이렇게 됐는데 괜히 분위기 깨지 마시구려, 풍 대인.”

고능준이 웃으며 대꾸했다. 고능준 역시 황제의 결정이 못마땅했지만, 황제가 하는 일에 흥을 깰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나서주는군.

황제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나랏일을 맡은 신료가 아첨에 능해서는 아니 됩니다.”

풍림이 고능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놓고 욕을 하는데도 고능준은 진소처럼 펄쩍 뛰며 맞서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외골수와 대놓고 싸워 봤자 손해 보는 건 나 자신이야. 이런 자를 상대할 땐 은밀히 손을 쓰는 게 낫지.

“검증 결과 거짓으로 밝혀지면, 군주기만죄를 더해 일벌백계로 삼으시옵소서.”

고능준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첨은 무슨. 보다시피 법대로 하고 있잖아.

사람 키만 한 방패를 손에 든 금군 무리가 누대로 올라왔다. 금군이 황제와 대신들을 일제히 에워쌌다.

“신비궁보다 강력하다니, 경계도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관 하나가 황제에게 말했다.

이무는 누대에서 시선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마음만 먹어 봐라. 저런 방패로는 절대 못 막지.”

범강림이 이무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저런 방패가 그런 마음을 못 먹게 막을 순 있지.”

이무가 범강림을 보며 씩 웃었다. 하룻밤이 지나는 사이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은 웃어도 표가 나지 않았다. 이무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대인, 발석거에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제의 그 장인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무는 말없이 심호흡을 하고, 절름거리며 발석거 쪽으로 걸어갔다. 범강림이 금군 무리를 이끌고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멀쩡한 내 발석거만 실없이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범강림이 말했다.

한편 높은 누대 위에서는 군기사의 관원이 황제에게 손짓을 해 가며 설명 중이었다.

“······저 발석거는 이무가 만든 돌포탄을 던질 수 있도록 개량한 겁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패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게, 이무가 만든 돌포탄이더냐?”

관원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무와 범강림 등이 발석거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무는 몸을 숙인 채 돌포탄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유효한 돌포탄 다섯 개를 만들었는데, 그저께 하나 쓰고, 어제 범 군감이 실수로 하나 썼답니다.”

이무가 돌포탄을 조심스레 발석거에 넣은 후, 화절자를 꺼내 들었다. 금군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제 궁노원에서 폭발 장면을 목격한 관료들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도화선을 길게 만들어 놨으니, 도망칠 시간은 충분합니다.”

이무가 화절자로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무는 불을 붙이려다 말고 동작을 멈추더니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군감 대인, 한 번 더 해 보시겠습니까?”

범강림이 화절자를 받아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대인, 불을 붙이기 전에 말씀을 해 주셔야지요.”

이무가 뒤돌아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무가 달려가는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도 놀라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높은 누대 위에 있던 황제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도망을 쳐? 전장에서 저리 도망치면 군대의 위신이 떨어질 텐데.”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일었다. 곧이어 천지를 뒤흔들 듯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방패를 들고 서 있던 금군들의 대오도 흐트러졌다. 옆에 있던 대신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이쪽으로 달려와 황제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황제의 눈앞에 별빛이 번쩍이고 귓가가 웅웅 울렸다. 동시에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군대의 위신이 문제가 아니로군. 저리 번쩍이기만 해도 적군이 놀라 삼 리는 후퇴하겠어.

황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한참이 지나고, 수행하는 내시들이 청심환 여러 개를 가져와 먹인 후에야 누대는 예의 평온을 되찾았다. 황제도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건지, 귓가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황당하군! 황당해!”

풍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훌륭하구나. 훌륭하도다.”

황제가 얼른 풍림의 말을 끊으며 연신 칭찬했다.

“폐하, 이제 위력이 어떠한지 보시지요.”

군기사 관원이 말했다.

아, 위력이 더 남았나?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인데.

황제가 관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금군들이 물러나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일 리 밖에 두꺼운 판으로 울타리를 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본디 소와 양 일고여덟 마리를 넣어 둔 곳이었는데, 소와 양은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울타리 역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땅에는······.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내시가 얼른 부축했다. 황제는 벌써 누대의 가장자리로 달려가 있었다. 벽을 짚고 선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꽤 먼 거리이긴 했지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소와 양의 시체는 확인할 수 있었다. 땅은 온통 피로 흥건했다. 곧 다른 대신들도 우르르 몰려왔고, 풍림마저도 그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높은 누대에 정적이 흘렀다.

범강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이 신비궁을 시연했을 당시 천지를 뒤흔들 기세로 열광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이 돌포탄의 위력이 부족하다는 건가?

높은 누대에 선 황제의 낯빛이 차츰 벌겋게 상기됐다. 돌난간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 리 밖에서, 돌포탄 하나로, 소와 양을 몰살하다니. 사정거리는 신비궁에 못 미치지만, 그 위력은······.

신비궁은 한 발에 한 사람만 맞힐 수 있다. 그것도 조준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하지만 이 돌포탄이라면, 하나만 던져도 무리가 떼죽음을 당하리라.

떼죽음!

거리는 좀 멀지만 저쪽의 참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소와 양이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도처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저기 있었다면······.

돌포탄 하나에 끔찍한 참상이 펼쳐지리라.

어마어마하구나! 실로 어마어마해! 신비궁보다 백 배는 강력한 병기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야.

황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허약해 늘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하늘이 이 나라를 보우하시는구나!”

황제가 중얼거렸다.

“하늘이 이 나라를 보우하시는도다!”

황제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고능준이 큰 소리로 외치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도 일제히 예를 표하며 함께 외쳤다.

성공이구나!

높은 누대 위의 동정을 살피던 범강림이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흥건했던 땀이 찬바람에 금세 날아갔다.

“이무, 짐이 상을 내리겠노라!”

높은 누대 위에서 들려온 말에 이무가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퉁퉁 부은 그의 얼굴에서는 흥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오나 저 혼자 받을 순 없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혼자 받을 수 없다? 그럼 네가 만든 게 아니란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그럼 혹시······.

황제와 누대에 있던 대신들의 뇌리에 이름 하나가 언뜻 스치자,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졌다.

“아닙니다. 소인이 만든 것입니다.”

이무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탁자를 쓸었다.

“다만 소인이 이 물건을 만든 것은 영감을 준 사람 덕분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소인은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소인 혼자 공을 독점할 순 없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겸손한 데다 강직하기까지. 훌륭하구나, 훌륭해.

“그래. 짐이 함께 상을 내리겠다. 그자가 누구더냐?”

이무는 절을 올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옥대교의 강주 정씨 낭자입니다.”

탁자를 쓸던 황제의 손이 움찔했다. 누대에 있던 대신들의 표정도 일순간 굳어졌다.

역시! 이번에도! 그 여인이었어!

왜 어디서나 그 여인이!

대신들 뒤에 서 있던 풍림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황제의 행렬이 어가를 느릿느릿 지나갔다. 일 년에 두세 번밖에 하지 않는 출궁이었음에도 마차에 앉은 황제는 바깥의 경치를 내다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귓가에 여전히 쾅 하는 폭발음이 들리는 듯했다. 방금 전, 새로 만든 돌포탄의 위력을 검증하기 위해 이무는 나머지 두 포탄도 마저 던졌다.

아, 아니지. 이무가 그걸 던진다고 하는 게 아니랬는데. 뭐라 부르든 아무렴 무슨 상관이랴.

돌포탄을 던지고 나자, 발석거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물론 소와 양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는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황제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지만, 대신들 중에는 살펴보러 달려간 이가 많았다. 그들 중 여럿이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했다.

마차가 흔들리자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실로 좋은 일이구나. 좋은 일이야.

세밑이 다가오는 이때, 이보다 좋은 새해 선물이 또 있을까. 이무란 자가 참으로 뜻밖이구나.

이무는 폭죽을 만드는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이신의 서자로, 황제가 직접 관직을 하사하여 감문관으로 지내던 자였다. 얼마 전 일어난 화재로 문책을 당해 관복을 벗긴 했지만.

그때 집에서 폭죽 제조 방법을 개량하다가 불을 냈다고 하더니, 이 돌포탄 때문이었군. 괜히 장난질을 하다 불을 낸 게 아니었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씨에게 가르침을 얻었단 말은 또 뭐지? 제자로 거둔 건가?

“폐하께 아뢰옵니다. 저는 감히 제자라 칭할 수 없습니다.”

근정전에서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한쪽 옆에 서 있던 풍림이 눈을 들어 이무를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범강림 군감이 널 체포했다고 했지?”

“네.”

“거참 기이한 우연이로다.”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에 근정전에 있던 대신들은 떠오르는 게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황제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정씨와 아는 사이냐?”

“말하자면 얘기가 깁니다. 저는 정 낭자를 알지만, 정 낭자는 절 모르지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초 정 낭자는 죽은 오라비들을 맞이하고 성으로 들어와 맛좋은 술을 나눠 주며 거리를 돌았습니다. 폭죽을 터트려 넋을 위로하기도 했고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 가던 이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무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손짓까지 했다.

“그날 본 불꽃놀이를 기억하십니까? 대낮에 펑펑 터지던 불꽃 말입니다.”

그날의 불꽃놀이?

궁에 있던 황제는 당연히 못 봤고, 자리에 있는 대신들 역시 그런 구경이나 하자고 밖으로 나갈 인사들은 아니었다. 가족들이 떠드는 얘기를 들었을 뿐인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린 터였다.

“그날 불꽃이 어쨌는데?”

대신 하나가 못 참고 물었다.

“그날 불꽃은 아주 높이 올라갔습니다.”

이무는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 저희 집 폭죽은 다들 최고로 치는데도 기껏해야 삼 층 높이밖에 못 올라갑니다. 그런데 정 낭자의 폭죽은 구 층 높이는 족히 될 정도로 올라갔어요. 폐하, 무려 구 층 높이였습니다!”

구 층 높이가 뭐? 보기 좋다고?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 폭죽은 높이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희 이씨 가문에서도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했지만 삼 층 높이가 최고였죠. 소인은 화약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뜻밖에도 화약은 폭죽보다 더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약을 만드는 게 가능했어요.”

“그게 네 돌포탄과 무슨 관계지?”

또 다른 대신이 물었다.

“소인은 그 불꽃놀이를 보고, 이를 화약에 접목시키면 전장에서 쓸 수 있는 폭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무가 말했다.

“그게 다란 말이냐? 그게 정 낭자가 네게 줬다는 가르침이라고?”

황제가 놀라 물었다.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그게 무슨 가르침이야?

이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황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인은 계속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집에 불까지 냈는데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정 낭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정 낭자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법을 알려 줬단 말이냐?

황제는 궁금했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정 낭자가 소인에게 방법을 가르쳐 준 건 아닙니다.”

이무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인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물으며, 이 화약을 어떻게 쓸 생각인지 물었죠. 순간 소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 깨달음을 얻었고, 돌포탄에 화약을 넣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무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덕분에 소인은 돌포탄을 개량할 수 있었습니다. 전부 정 낭자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 그런 것도 가르침이라 할 수 있나? 겨우 그 정도로?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것도 기이한 우연인가?

“정씨를 들라 하라.”

황제가 고개를 들고 명했다. 내시가 얼른 대답하며 뛰어나갔다. 내시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멈칫하며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정씨가 어디 있지?”

어제 지진이 일어나면서 대리시에서는 정교랑의 심문이 중단됐다. 이어 지진이 아니라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궁노원에 일이 생겼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궁노원에 일이 생겼다면 여러 관리들이 처벌될 게 분명했기에 다들 구경하러 달려갔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재촉하러 왔던 어사조차도 가 버린지라 정교랑만 대리시에 그대로 남겨졌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황제의 입으로 조사하라고 명한 사람이 아니던가.

“뜨거운 물이에요. 아씨, 손 닦으세요.”

감방 안.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온 반근이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이 소매를 걷고 대야에 손을 넣어 씻었다.

“좀 있으면 밥이 올 거예요.”

반근은 대야를 치운 후 정교랑 옆에 꿇어앉아 감방을 죽 둘러보았다.

하룻밤을 지낸 곳이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사실 감방이라 할 순 없었다. 이곳은 본디 옥졸들이 쉬는 곳이었다.

정 낭자의 명성이 마음에 걸렸는지 감옥 사람들은 정교랑을 후히 대해 주었고, 대리시 사람들도 못 본 척 눈감아주었다.

물론, 집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빌어먹을 풍림 그 인간 때문에.”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목소리를 죽여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바깥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모자가 달린 두봉을 두른 사람이 손에 찬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밥이 왔구나.

반근이 얼른 일어서는데, 밥을 가져온 사람은 벌써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밥 먹어야지.”

그 목소리에 멈칫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던 반근이 깜짝 놀라 외쳤다.

“전하, 어떻게 오셨어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고 환하게 웃었다.

“밥 가져다주러 왔지.”

진안 군왕이 손에 든 찬합을 들고 흔들었다. 반근은 찬합을 받고 얼른 자리를 만들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이미 두봉을 두른 채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괜찮네요. 이 정도면 춥지도 않고. 감방은 처음 와 보거든요.”

진안 군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덕분에.”

반근은 말없이 꿇어앉아 찬합을 열어 자리에 하나씩 꺼내 놓았다.

“전하는 드셨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요. 내가 아침을 좀 일찍 먹어서.”

그 말을 들은 반근이 젓가락을 두 손으로 바치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받았다.

“태후마마께서 나한테 잘해 주세요. 황궁 최고의 숙수도 내게 주셨죠. 이거 먹어 봐요.”

진안 군왕이 먹어 보라고 권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봤다.

“그리고 이것도요.”

진안 군왕은 음식을 권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식진 않았어요?”

“아니에요. 난 먹고 마시는 일에 까다롭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빙긋 웃었다.

“네. 단것도 먹을 수 있고 쓴 것도 먹을 수 있죠. 고생도 맛보고 성공도 맛보고.”

“잘 적응하고 만족해야죠.”

정교랑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각자 밥을 먹었다. 한창 먹고 있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전하. 폐하께서 정 낭자를 들라 하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진안 군왕이 얼른 일어나 모자를 쓰고, 정교랑에게 손을 흔든 뒤 뒤돌아 빠져나갔다.

반근이 얼른 진안 군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궁에서 온 내시는 벌써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낭자.”

내시가 미소 띤 얼굴로 실내를 쓱 훑으며 마주 앉은 두 사람과 음식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정교랑을 부르는 동안 황제도 대신들에게 오찬을 내리고, 편전에 앉아 간단한 수라를 들었다. 대신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무란 자의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인 거요?”

“정말 불꽃놀이를 보고, 말 한마디를 들었다고 그걸 만들어?”

“그러게 정 낭자는 비범하다니까. 또 한 사람을 깨우쳤구먼.”

옆에 있던 이의 헛기침에 대화를 나누던 대신들이 고개를 돌리자, 굳은 표정의 풍림이 보였다. 다들 말을 얼버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한데, 그 돌포탄이라는 게 대단하긴 합디다.”

누군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나 말이오. 나중엔 방패를 놓고, 양의 몸에 갑옷까지 둘러 주었는데도 소용없었지.”

또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소가죽이 좀 두껍나? 생각해 보시오. 거기 사람이 있었다면······.”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면······.

조정 대신들의 머릿속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목격한, 피와 살이 낭자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오장육부가 여기저기 널린 장면을 떠올리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대신들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리고 타구(唾具)에 구토를 했다.

몇몇 대신들이 보이는 추태에 나머지 사람들도 밥맛이 뚝 떨어졌다. 얘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내시가 들어왔다.

“정 낭자가 왔습니다.”

여인인 데다 평민 신분인지라 정교랑에게는 조당에서 황제를 알현할 자격이 없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편전에서 황제를 단독으로 만나야 했다.

장지문 너머에 서 있는 조정 대신들의 귀에 여인이 엎드려 절하며 예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씨, 이무를 아느냐?”

“압니다.”

황제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는군.

조정 대신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이무가 만든 돌포탄이 네 공로라고 하던데.”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포탄을 그자가 만들었습니까? 원래 있던 거 아닌가요?”

“정 낭자, 그자가 만든 돌포탄은 이전의 것과 달랐다. 어제 지진이 있었던 건 알고 있겠지?”

황제의 물음에 정교랑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건 이무의 돌포탄이 폭발하며 일어난 일이었다. 이무는 네가 가르침을 주어 만든 것이라고 했어. 정 낭자, 네가 큰 공을 세웠다.”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의 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가르침을 준 적이 없어요.”

이쪽에 있던 풍림이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지었다.

또 농간을 부리는군! 교활한 술수를 부리고 있어!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이무는 네 불꽃놀이를 보고, 네게 자문을 구한 다음,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느니라.”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폐하, 그래서 소녀에게 무슨 공이 있다는 거죠?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입니다.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요.”

황제가 멈칫했다. 이쪽에 있던 풍림도 더는 못 들어주겠는지 홀판을 든 채로 소리쳤다.

“폐하, 정씨의 궤변을 더는 들어주지 마십시오!”

풍림이 장지문을 넘어서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풍림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둘은 곧 각자 시선을 돌렸다.

“폐하, 어떻게 때마침 범강림이 이무를 잡아들였겠습니까? 왜 궁노원에서 폭발이 일어났고요? 현장에서 잡아 즉시 조사하면 됐을 텐데, 왜 굳이 궁노원으로 데려온 겁니까?

우연 치고는 과합니다. 우연이라기엔 계획한 것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폭발로 신비궁만 망가지고,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조정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할 정도였지요.

정씨, 수완이 대단하외다.”

귓가에 풍림의 말이 한마디씩 꽂혔다. 옥좌에 앉은 황제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그래. 우연 치고는 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의 앞뒤가 정교랑과 무관한 듯하면서도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지금 상황을 보아 하니 우연이 너무 겹쳤는데.

“그러고 보니 범 군감이 군감 직에 아주 적격이구려.”

풍림이 또 한마디를 던졌다. 장지문 너머의 조정 대신들이 혀를 차며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역시 귀판관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풍림이 말 한마디로 신비궁을 바친 공을 철저히 짓밟은 탓에, 그 공은 뭔가 의도를 품고 치밀한 계획하에 꾸민 일로 변질됐다.

황제의 눈빛에 담긴 건 더 이상 의혹이 아니었다. 어렴풋하지만 분노가 서린 듯했다.

일개 여인의 손에 놀아난 일이 아니던가. 그것도 조정의 인사와 관계된 일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으리라.

정교랑이 눈을 내리깔고 예를 올렸다.

“군사와 정사는 중한 일입니다. 소녀에게 잔재주가 있다고는 하나, 어찌 군사와 정사를 좌지우지하겠습니까?”

“정 낭자, 참으로 겸손하외다. 이무는 불꽃놀이만 보고 그리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돌포탄을 만들어 냈는데, 어찌 잔재주라 할 수 있겠소.”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풍림을 쳐다보았다.

“아니요. 이건 소녀와 무관해요. 이무의 재주죠. 그게 아니라면, 불꽃놀이를 본 사람이 수천, 수만인데, 돌포탄을 만들어 낸 사람은 왜 수천, 수만이 아니겠어요?”

“그야 낭자에게 물어야겠지요.”

풍림이 냉소를 지었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다르고, 일을 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겠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말하는 이에게 의도가 없기는!”

풍림이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정씨, 그간의 일을 올곧은 마음으로 사심 없이 행했다 말할 수 있소이까?”

“물론 그럴 순 없죠. 전 바라는 게 있어 그런 일을 했으니, 사심이 없다 할 순 없어요.”

풍림이 냉소를 지으며 홀판을 들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풍림이 입을 열려는데, 정교랑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풍 대인께서는 소녀한테 바라는 게 있으니 죄라는 건가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바라는 게 있는 건 죄가 아니지만, 바라는 게 있다고 바른길로 가지 않는 건 죄지요.”

풍림이 대답했다.

“풍 대인, 소녀에게 바라는 게 있어 바른길로 가지 않은 게 소녀의 죄일까요?”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물론이외다.”

풍림이 대답했다.

“풍 대인, 소녀가 왜 바른길로 가지 않았을까요?”

정교랑이 또 물었다.

“그야 낭자가 무슨 저의를 품었는지 물어야겠지!”

“틀렸습니다. 소녀에게 물을 게 아니라, 대인들 자신에게 물으셔야지요.”

저쪽 조당에 있던 대신들이 뭐라 수군거리려 하자, 고능준이 팔을 들어 제지하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제 형세가 뒤바뀐 것 같군. 지금까지는 풍림이 묻고 다른 이가 대답했는데, 이제는 저 여인이 묻고 풍림이 대답하기 시작했어.

“무슨······.”

“대인들께 묻겠습니다!”

그냥 묻는 정도가 아니라, 호통치며 풍림의 말을 자르기까지 하네?

저쪽에 있던 대신들은 흠칫 놀란 눈치였다.

“대인들께 묻겠습니다. 당초 제 오라비들이 죽었을 때, 남은 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던 건 왜일까요?

대인들께 묻겠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감옥에 들어가 고문까지 받아야 했던 건 왜일까요?

대인들께 묻겠습니다. 서북의 논공행상에 관해 무심코 물었단 이유만으로, 불순한 의도를 품고 군공을 놓고 협박한다며 관리 하나를 조당에서 내쫓은 건 어째서일까요?

아래에서는 위에게 고할 수 없고, 위에서는 그 연유를 따져 물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풍 대인, 그런데도 소녀에게 어찌하여 바른길로 가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소녀에게 저의가 무엇이냐고 물으시겠습니까?

그리 물으신다면, 소녀가 답해 드리지요!

소녀의 마음이 올곧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인정하겠습니다!”

편전에 선 여인은 몸을 옆으로 돌려 풍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은 단정히 앞으로 모은 채, 품이 넉넉한 옷을 촤르르 늘어뜨려 입은 채였다. 날카로운 언사를 쏟아내면서도 자세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긴긴 말이 끝나고 난 대전에는 메아리가 울리는 듯했다.

“대인, 더 이상 저 여인에게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저쪽에서 관료 하나가 안색이 미묘하게 변한 채, 고능준에게 나지막이 고했다.

“질문은 풍림 하나로 족하지!”

서북에서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일은 방중화가 죽고 강문원이 다른 임지로 떠나며 매듭이 지어졌다. 그때 일을 다시 거론할 경우 누구에게 또 불똥이 튈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은 고능준 역시 잘 알았다. 고능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홀판을 위로 들었다. 고능준이 막 입을 열려는데, 저쪽에서 정교랑이 그 누구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여기까지가 풍 대인께서 말씀하신 소녀의 첫 번째 죄입니다. 두 번째 죄는 소녀가 공을 세워 폐하를 협박하고자 계획을 꾸몄다는 거였죠.”

고능준이 다시 홀판을 내렸다.

다행이군. 서북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구나. 이 고능준은 함부로 물고 뜯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도 널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원한이 있다면 별개로 논해야겠지만.

고능준은 자세를 바로 하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본관의 말이 틀렸소이까? 그럼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오?”

풍림이 서슬 퍼런 얼굴로 소리쳤다. 정교랑은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다음, 다시 허리를 세우고 풍림을 쳐다보았다.

“대인의 말씀은 틀린 게 없습니다. 소녀에겐 분명 의도가 있었으나, 소녀는 그 의도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남에게 말 못 할 일도 아니고요.

소녀는 보물을 바치고 공을 인정받고자 했으니, 그 마음에 사심이 있지요. 오라비들의 억울함을 위해, 탐관오리에게 불복하기 위해, 소녀는 공을 인정받고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상벌이 분명하길 바랐어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좀 전의 발언과 달리, 이번에는 훨씬 부드럽고 낮은 말투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끼어들지 못했다.

풍림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정교랑을 서슬 퍼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도 소녀의 바람대로 용맹한 오라비들의 명예를 바로 세워 주시고, 상으로 관직과 녹봉을 하사해 주셨습니다. 소녀의 부모에게는 관직과 직위를 하사하고, 소녀에게도 성은을 베풀어 주셨지요.”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린 정교랑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다시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소녀,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소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서,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속인 관료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엄벌에 처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소녀가 보고, 풍 대인이 보고, 천하 만백성이 보았으며, 문무백관이 보았죠.

이는 본보기가 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무는 돌포탄을 바치고, 궁노원의 관료들은 궁노원에서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바로 고했던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사심을 갖고 있습니다. 백성은 편안히 살고자 하고, 병사는 공을 세우고자 하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번 음식을 먹다 목에 걸렸다고 해서 곡기를 끊고 밥을 먹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것을 근거로 그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로 인도하면(因民之所利而利之 - 공자), 아무리 치졸한 짓을 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쓸 수 있죠.

천하 만백성이 폐하는 성군이고 인자하시며 상벌이 분명한 분인 걸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인재 부족을 겁내실 필요가 없고, 소녀 또한 겁내지 않고 기꺼이 재주를 바치고자 할 겁니다. 다른 의도를 품고 뭔가 꿍꿍이가 있어 수작을 부리는 것이니 그 마음이 불순하고, 나라와 백성에 화를 미친다는 죄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무와 같은 무리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신비궁이나 돌포탄과 같은 병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옳거니!

떨떠름한 상황이긴 하나 고능준은 속으로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할 것 같은 저 여인이 저리 달변일 줄이야. 역시 도인의 제자답군.

이쪽에서 속으로 환호를 내지르는 사이, 저쪽 옥좌에 앉은 황제의 용안에도 희색이 감돌았다.

인재가 몰려든다니. 그래, 맞는 말이야. 풍림은 저 여인을 눈감아주면, 백성이 저 여인의 행동을 따라 하며 짐을 협박할 거라고 했어. 그렇다면 그들도 어마어마한 병기를 바칠 테니, 나라와 백성에 큰 공을 세우는 게 아닌가. 짐이 그런 협박을 어찌 마다하리.

백 년, 천 년이 흐르고 나면, 짐 또한 명군의 반열에 들어 역사서에 오르지 않겠는가.

아니, 먼 훗날까지 갈 것도 없이 신비궁과 돌포탄 같은 어마어마한 병기를 얻는다면 부국강병을 이루고 엄청난 공적을 쌓을 텐데, 그 누가 짐을 성군이고 명군이라 하지 않겠는가.

풍림이 한 발 앞으로 나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뻔뻔한 소리 마시오!”

그 호통에 뜨끔한 황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올곧지 못한 마음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풍림이 정교랑을 노려보며 소리치자 정교랑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녀의 마음은 올곧지 않습니다.”

정교랑이 풍림의 말을 끊고, 마찬가지로 목청을 높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중승 대인의 마음 올곧으신지요?”

옳거니!

고능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기변호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반격이로구나!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집니다.

소녀는 폭죽에 불을 붙여 불꽃놀이를 선보였어요. 이무는 그 불꽃놀이에서 착안해 무기를 개량했고요.

소녀는 뭘 만들어 어떻게 쓸 거냐고 물었을 뿐인데, 이무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떠올린 겁니다.

소녀는 별 뜻 없이 말했지만, 듣는 이무가 마음을 쓴 거지요.

소녀는 오라버니들을 위해 불꽃놀이를 한 거지만, 이무는 그걸 보고 자신의 것으로 썼습니다. 이무는 보고 관찰한 다음 생각하고 궁리했어요.

그렇다면 풍 중승께서는 보고 관찰한 다음 무엇을 생각하고 궁리하셨는지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풍림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순간 멈칫했다.

또다시 삼 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려 역참 앞에 서자 분노한 인파가 아우성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금방이라도 산 채로 잡아먹을 듯한 모습이었다.

말도 없이 주먹부터 쓰는 병졸들이야말로 강도들이지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두봉을 두른 여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인의 또렷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불의에 맞서는 행인이요.

자기 한 몸 편하려고, 먼저 도착한 여러분을 밤중에 쫓아냈어요. 대답해 보세요. 여기서 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맞아도 싼 사람이 누구죠?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에요! 맞아도 싸다! 맞아도 싸!

분노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

돈? 돈은 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사람이 굶어 죽어갈 때는 돈이 아니라 당장 먹을 수 있는 밥이 필요한 법이죠. 하룻밤 몸 누일 곳을 찾아 들어온 건데, 그깟 돈을 쥐여 준다고 해서 저 사람들의 잠자리가 해결되나요? 대체 이 한밤중에 노인들과 아이들을 어디로 내쫓겠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돈이 필요한가요?

필요 없소. 필요 없어요.

귓가에 메아리치는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풍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대인, 죄가 있다면 벌을 내리셔야지요.

잘못이 있다면, 대인께선 현명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어왔다.

칼처럼 예리하고 구구절절 명쾌한 말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던 여인이 이번에도 칼처럼 예리하고 구구절절 명쾌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만 이번엔 그 칼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풍림이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품이 넓고 소매가 큰 옷을 입은 채로 단정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두봉을 휘날리며 어둠 속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과 하나로 합쳐졌다.

“틀렸어요.”

정교랑이 불쑥 한마디 내뱉으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틀렸어요. 소녀의 말에 틀린 게 있네요.”

“무엇이?”

넋을 놓은 채 듣고 있던 황제가 얼떨결에 물었다.

“풍 중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한 행동은 이무와 같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같다고? 풍림도 어마어마한 무기를 바쳤나?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풍 대인은 상경하자마자 어사중승의 중임을 맡으셨어요. 소녀의 행동을 보고 관찰한 후에는 폐하께 소녀의 간사함을 엄히 조사하지 않고 눈감아주고 있다며 폐하를 비판했지요. 이 또한 사심이 있어서입니다.”

나 정교랑의 마음은 나 자신을 위해서인데, 그렇다면 풍 중승의 마음은 누구를 위해서인가요?

나 정교랑은 꿍꿍이가 있어 세 치 혀로 군주의 마음을 선동해 사사로운 이익을 꾀했는데, 그렇다면 풍 중승이 세 치 혀로 군주의 마음을 선동한 건 무엇을 위해서죠?

나 정교랑은 명성을 얻었는데, 그렇다면 풍 중승은 무엇을 얻을 건가요?

나 정교랑은 한낱 여인에 평민 백성의 신분으로 이만한 일을 해냈는데, 풍림 당신은 어사중승이자 나라의 동량이면서 군주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죠?

정교랑의 시선이 풍림에게로 향했다. 서슬 퍼렇던 풍림의 안색은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정교랑은 다시 시선을 돌려 옥좌에 앉은 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황제를 쳐다본 다음,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았다.

대전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고능준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달렸다고? 행하는 이에겐 아무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렸다고? 거참.

“풍림은 끝났구나.”

고능준이 말했다.

근정전 안의 숨 막힐 듯한 적막이 오래 간 건 아니었다. 대신들의 마음속 환각이 그러한 건지 모르겠지만.

“풍 대인.”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아까에 비하면 훨씬 부드럽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열일고여덟쯤 된 소녀의 목소리인 걸 알 정도로.

“대인은 어사중승이자 나라의 동량인데, 저 같이 어린 소녀와 어찌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죠?”

안타깝게도 열일고여덟쯤 된 소녀의 말은 노련하고 잔인하며 모질었다.

어쩐지 어색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저 같이 어린 소녀를 어찌 대인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겠어요? 절 너무 치켜세워 주시네요.’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 소녀는 말실수를 한 게 아니었다. 뭔가 비정상적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풍 대인, 저 같이 어린 소녀한테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풍 대인, 대인이 저 같이 어린 소녀와 비교가 될까요?

풍 대인, 대인은 저 같이 어린 소녀와도 비교가 안 되시네요.

풍 대인, 스스로 모욕을 자처하신 겁니다!

장강주는 모진 욕설로 멀쩡하던 노유학자를 죽이더니, 오늘 저 강주 낭자는 조정 대신을 수치심으로 죽이는구나.

옆에 있던 조정 대신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며 저쪽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했다.

예상대로 풍림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몸을 바로 했다.

“폐하, 신은 충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간악한 자의 말에 성총을 흐리지 마시옵소서.”

안색이 창백해진 풍림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애초에 세운 계획은 허사가 되었구나. 그렇다면 잃은 것에 연연할 게 아니라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해. 그나마 건질 만한 게 있나 생각해야지. 물에 빠진 개를 구하려 들면, 덩달아 고통을 겪을 뿐이야.

지금 건질 게 있다면 폐하의 의중을 헤아리고, 폐하께서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자, 고능준은 주저하지 않고 홀판을 들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풍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명예를 탐내다니, 네 죄를 알렷다!”

고능준이 언성을 높이며 호통을 쳤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바로 하는 듯했다.

고능준이 나서자 다른 관료들도 이에 질세라 앞을 다투며 합세했다. 풍림의 안색은 한층 창백해졌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에 든 홀판을 꽉 쥐었다.

“신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풍림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폐하!”

“풍림, 폐하를 시시비비도 가리지 못하고, 상벌이 공정치 않은 혼군이라 말하는 거요?”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고개를 든 풍림은 옥좌에 앉은 황제를 쳐다보며 손에 쥔 홀판을 높이 들었다.

“폐하, 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번지르르한 언사로 아첨하는 무리의 말을 들으신다면, 그 기만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실 겁니다.”

옥좌에 앉은 황제가 마침내 폭발했다.

“풍림,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신비궁으로 세운 공은 안 보이고, 나라를 위해 병기를 바치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은 안 보이면서, 간사하고 사특한 마음만 보이나 보군. 조당을 가득 채운 저 대신들은 눈이 멀어 못 본단 말이더냐? 나라를 위하고 군주를 위한다며 짐을 세운 자를 벌하고, 수고한 자를 의심하라고? 그게 시시비비가 분명하고, 상벌이 공정한 처사라더냐!

고능준, 경들은 왜 보고만 있지? 진소가 탄핵을 당했다고, 다들 겁먹은 것이냐?”

황제는 격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원체 몸이 안 좋기도 하고, 인의와 효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대전에 있던 대신들은 황제의 격노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신이 죄를 지었나이다.”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고, 옆에 있던 내시들은 조용히 차를 따라 주며 위로했다.

정교랑은 조용히 한쪽 옆으로 물러나 조정 대신들의 호된 질책을 받게 된 풍림을 바라보았다. 풍림은 여전히 홀판을 꼭 쥔 채로 조정 대신들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었고,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운지고.”

누군가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니 장순이 보였다.

“어쩔 수 없지요.”

정교랑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밑도 끝도 없이 여섯 자씩 내뱉고는 잠자코 입을 다문 채, 혼란에 빠진 대전을 바라보았다.

“풍림은 끝났습니다.”

진소가 말했다. 황제의 조서를 두 번이나 거절하고 사직을 청하며 집에서 두문불출 중인 진소였지만, 조당에서 일어난 일은 조회를 마치자마자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아둔하지 않으시다. 게다가 보통 사람보다 의심이 많은 분이지. 상대방이 썼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똑같이 돌려주다니(以其人之道, 還治其人之身 - <중용>), 정 낭자가 참으로 독하구나.”

“두 사람 모두 사심을 품고 말과 행동으로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습니다. 다만 정 낭자에 비하면 풍림의 죄가 크다 할 수 있지요.”

거기까지 말한 진소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서 고생을 하네요.”

진소가 말했다.

“그릇이 작은 게지.”

진 노태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소의 태도에 불만을 표했다. 진소는 공손히 대답하고 예를 표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분노한 표정이었다.

“정 낭자는 역시 보통이 아니야. 풍림이 나쁜 짓을 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정 낭자가 심술궂었다. 장차 정 낭자에게 칼을 들이미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게야.”

껄껄 웃으며 말하던 진 노태야가 진소를 쳐다보았다. 진소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 낭자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정 낭자의 말마따나 아무리 치졸한 짓을 하는 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쓸 수 있습니다. 부친, 전 그리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지금은 정 낭자의 기세가 워낙 거침없으니, 다른 이들로서는 앞으로 나설 용기도 없고 그럴 기회도 없을 게야. 풍림이 이럴 때 앞으로 나선 건, 정 낭자가 바라는 바였을지도 모르지.

풍림은 정 낭자를 일벌백계로 삼고 싶었겠지만, 정 낭자인들 안 그렇겠느냐. 이제 풍림이라는 좋은 본보기가 생겼다. 그 누구든 정 낭자의 뜻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이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말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벌이느냐는 폐하의 질문도 감당해야 하고.”

진소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 정 낭자는 참으로······.”

진소는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정 낭자를 돕는다? 애초에 말이 안 되지. 이번에도 정 낭자가 날 도운 셈이잖아.

“얼마 안 가 풍림은 외직으로 나갈 거다. 폐하께서 난처한 일 없으시도록 너도 준비하거라.”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계속해서 차를 마시던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려 뒤쪽의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에 있는 동그라미는 어느새 두 줄이 넘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 노태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붓을 들어 먹물을 묻혔다.

“할아버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자, 문틀에 기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있는 진단랑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쳐다보자 진단랑이 해맑게 웃었다. 진 노태야도 흐뭇하게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할아버지, 뭐 하고 계세요?”

쪼르르 들어와 병풍 앞에 선 진단랑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또 병풍을 검게 칠하시려고요?”

진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붓을 들어 병풍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할아버지, 제가 쓴 글씨 좀 보세요.”

진단랑이 뒤에 숨기고 있던 종이를 꺼내 보였다.

“정 낭자한테 배운 것이냐?”

진 노태야가 종이를 받으며 묻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많이 늘었다.”

“정 낭자는 집에 없어요. 바쁜 거 끝나면 가서 보여 주려고요.”

진 노태야가 고개를 들어 진단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단랑, 넌 정 낭자가 조금도 걱정되지 않느냐?”

진단랑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자신의 글씨만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걱정되지 않아요. 정 낭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나쁜 사람이 아니면, 별일 없다고?

그럼 풍림은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있나? 아니, 정 낭자는 좋은 사람인가?

진 노태야는 빙긋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진단랑의 글씨를 쳐다보았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장 노태야도 붓을 들어 병풍에 획을 추가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장 노태야가 말했다.

“너무 작구나.”

장 노태야가 붓을 들어 획을 하나 추가했다.

“진소 것은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크게 그려야지.”

옆에 있던 노복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풍림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갔습니다.

“이번엔 그래도 영리하게 굴었구나. 자청할 줄도 알고. 폐하께 쫓겨난 게 아니니 그래도 체면은 지킨 셈이야.”

장 노태야가 웃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본성은 순박하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회계와 장부 관리에도 재능이 있고.”

노복이 웃으며 대꾸했다.

“유능한 신하기는 하나, 어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삼사에 있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요.”

하나 이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경성으로 돌아올 기회가 없으리라.

“잘코사니지. 그러게 누가 재수 없게 그 여인을 건드리래?”

장 노태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여인 손에 신세를 망치고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나 세어 봐라. 아주 불운 덩어리야. 건드리면 무조건 다친다니까. 보기만 해도 사흘은 재수가 없어. 나도 그래서 안 보러 가는······.”

장 노태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노태야.”

장 노태야가 얼른 노복을 향해 쉿 하는 손동작을 했다.

“제 주인더러 불운 덩어리라고 한 걸 알면 사흘은 밥을 안 해 줄 거다.”

장 노태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노복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오는 몸종을 바라보았다. 몸종은 들어오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노태야. 저희 아씨는 무사하세요.”

몸종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밝게 웃었다.

“무사하다고? 풀려났단 말이냐?

장 노태야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자, 몸종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노태야, 또 절 놀리시네요. 부인께서 인편을 통해 알려 주셨어요. 아씨께선 무사하시다고요.”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다. 난 아무것도 도운 게 없거든.”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노야께 감사 인사 올리러 갈 거예요. 노야는 노태야의 아드님이시니, 노태야께도 감사 인사를 올려야죠.”

몸종은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장 노태야와 노복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몸종도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으며 다시 웃었다.

“나한테 뭐가 고맙단 말이냐?”

이제 막 조회를 마치고 서재로 돌아온 장순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몸종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근은 아씨를 지켜 주신 노야께 감사드려요.”

“내가 언제 그 여인을 지켜 줬단 게야?”

장순이 인상을 썼다.

“부인께서 말씀하셨어요. 노야께서 조당에 나가 아씨와 큰 도련님을 위해 말씀해 주셨다고요.”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장순이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언제 그들을 위해 말했단 말이냐. 난 조당에서 수다스럽게 떠드는 거 질색이다. 곧 서원 수업도 해야 하는데, 두세 마디면 끝날 일을 이러쿵저러쿵하며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니 원. 누가 그리 한가한 줄 알고!”

몸종은 그래도 머리를 조아렸다.

“관두자.”

장순이 몸종을 보며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 해명하고 말 것도 없고, 해명해도 소용없어.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몸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뒷걸음질로 물러난 몸종은 문가에 다다라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소인에게 특별히 해명해 주신 노야께 감사드려요.”

인사를 마친 몸종이 물러갔다.

장순은 그 말에 멈칫하여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계속해서 서책을 보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고 있을 때, 정교랑은 아직 황궁에 있었다. 조회는 진작 끝났지만, 황제는 여전히 쉬지 못했다.

근정전에서 청심환을 먹으며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히고 있던 황제는 이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는 이번 일로 인한 조당의 풍파를 뒤로한 채, 새로 개발한 병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정 낭자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이무는 이어서 정교랑에게 예를 표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치 않습니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정 낭자, 이무에게 듣자 하니 그날의 폭죽은 다른 것과 달랐다던데, 그 역시 그대가 말한 일도의 이치 때문이냐?”

황제가 물었다.

“스승님께서 재미로 가르쳐 주신 잔재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다른 이는 가지고 놀 수 없는 재미라면 대단한 재주지.”

황제는 감탄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아쉬워한들 도리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걸 소중히 여기는 수밖에.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무를 쳐다보았다.

“서두르면 이 돌포탄을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느냐?”

이무가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폐하, 돌포탄을 만드는 건 쉬우나, 화약의 배합이 쉽지 않습니다. 품이 많이 들어서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색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필요한 게 있거든 편히 요구하거라. 세밑이 되기 전에 변방으로 보내면, 오랑캐 놈들한테 대단한 새해 선물이 되겠지?”

“시간이 부족할 듯싶습니다. 돌포탄을 다루는 게 워낙 위험해서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인의 집에서 폭발이 일어나 큰불이 나지 않았습니까.”

위험하긴 하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본 광경을 떠올렸다.

“인화 물질을 채우려면, 병사들도 어느 정도 기술이 숙련되어야 하고요. 까딱 잘못하면 적을 쳐부수기도 전에 우리가 다칩니다.”

이무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돌포탄을 다룰 병사들을 특별히 양성해야겠구나.”

“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보셨겠지만, 소인이 발석거를 개조했사온데 효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두세 번 쓰고 나면 못쓰게 되죠. 이 속도라면 손실이 너무 큽니다.”

그거야말로 큰 문제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무의 말대로라면 돌포탄을 보급하는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았다. 마차 한 대를 말 열 마리가 끌어야 한다면, 아무리 튼튼한 마차라 해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발석거 말인가요?”

쭉 침묵을 유지하던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게 가르침을 얻었다고 말하고 날 스승으로 여긴다 했는데, 나도 그 말을 헛되이 할 순 없죠. 그렇다면 발석거를 어떻게 개조해야 그 돌포탄을 쓰는 데 적합할지 알려 줄게요.”

돌포탄에 적합하게 발석거를 개조할 방법을 알려 주겠다니!

황제와 이무가 크게 기뻐했다.

역시, 역시! 이래서 바라는 게 있어야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난다고 한 건가?

의형제가 말을 키우기 원하자 말편자를 주었고, 나라를 위해 적을 무찌르기 원하자 신비궁을 만들어 주었지. 이제 그 의형제가 없어진 지금, 이무가 튀어나왔어.

한 번 만나 조언 한마디 구한 일로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나서니, 이 어린 낭자가 보답하려는 게로군.

황제는 황성사에서 알아 온 정보를 떠올렸다. 당초 이 어린 낭자가 무원산 형제들과 결의를 맺을 때도 그 의형제들이 무심결에 잃어버린 사환을 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겨우 그만한 일로 결의를 맺다니. 어디 그뿐인가. 태평거를 주고 오라버니로 대우했으며, 전장에 나가 싸우고 싶다고 하자 전장으로 보내 주었지.

당신이 날 영예롭게 해 준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영광을 안겨 주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건 대체 무슨 보은이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만, 풍림처럼 은혜를 알고도 보답하지 않으면 끝장인 게로구나!

풍림 생각이 나자 황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감히 짐을 혼군이라 욕해? 풍림 이 빌어먹을 놈!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 버렸구나.

이무를 좀 봐라. 저 스스로 좋은 운을 개척하잖아. 그 누구도 제자로 들인 적 없는 이 낭자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어. 억수로 운 좋은 놈이지.

황제가 이무를 쳐다보았다. 이무 역시 정교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제자로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무는 정교랑이 뭐라 대꾸할 틈을 주지도 않고, 쿵쿵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행여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이 낭자가 자신의 말을 번복할까 겁난다는 듯이.

“그럼 다음에 누가 또 교활한 술수로 농간을 부린다고 질책할 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도 되겠죠.”

정교랑의 말에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아직 어린 여인이야. 뒤끝이 있네.

불과 한나절 만에 황성사에서는 이무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확실히 정교랑과는 왕래가 없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성문을 지켰던 병사들까지 찾아 조사한 결과, 그날 이무는 성벽에서 불꽃놀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비웃음까지 샀다고 했다.

불꽃놀이를 봤다고 병기를 떠올리다니 갸륵한지고. 저런 자에게 관직을 내렸던 것 역시 짐의 혜안이로다.

황제는 당시 자신이 직접 인재를 발탁한 게 아니라 그저 관직을 내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듯했다.

불을 냈다고 관직을 박탈한 것은 그저 밑에 있는 관료들이 눈이 어두워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탓이야. 그렇다면 이무는 짐이 먼저 발탁한 후, 정 낭자가 제자로 들인 게 될 테지.

황제는 우쭐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 낭자, 염려 마라.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지.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고. 또다시 그대를 질책하려는 자가 있거든,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건지 잘 생각해야 할 게다.”

황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시가 종종걸음을 걸으며 기쁜 얼굴로 들어왔다.

“폐하.”

내시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

황제가 멈칫했다. 또 무슨 기쁜 일이?

내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방금 안비(安妃) 마마께서 몸이 안 좋아 태의를 불렀는데, 용종을 가지셨다 하옵니다.”

황제가 깜짝 놀랐다.

그, 그 말이 참이더냐?

“정, 정 낭자, 마침 잘됐구나. 같이 가 보자.”

황제의 말에 정교랑은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폐하, 소녀는 갈 수 없습니다. 소녀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만 고칠 수 있습니다.”

황제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이무와 정교랑을 물린 뒤 서둘러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

“태맥이 확실하옵니다.”

태의가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황제는 태의가 물러간 후에도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폐하.”

안비가 침상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며 황제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는, 황제에게 기대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10월 24일 그때였네요.”

10월 24일이라.

황제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그날 안비의 처소에 머물렀어.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진안 군왕이 입궁했던 날이로구나. 간식까지 싸 들고 와서 정 낭자를 편드는 말을 늘어놓았지.

이건 정 낭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냐?

아닙니다. 정 낭자를 위해 만들었던 건 벌써 다 먹었고, 이건 폐하와 마마들께 드리기 위해 새로 만든 겁니다. 거기에 정 낭자가 알려 준 조미료를 더 넣었으니, 폐하께서 한번 맛을 보십시오.

간식!

“그날 짐이 가져온 간식을 그대도 먹었소?”

황제가 돌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 그때 다 먹을 수 없어서 안비에게 오는 길에 가져다주었지.

안비가 멈칫했다. 오래전 일이다 보니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황제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는 잘 아는 안비였다. 안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먹었죠. 폐하께서 특별히 가져다주신 거잖아요. 아까워서 다른 사람은 맛도 못 보게 했어요.”

진안 군왕, 송자동자, 칠현금 연주와 액막이, 정 낭자가 알려 준 대로 만든 음식, 기도, 도교 이 진인······.

순간 황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떠올랐다.

“폐하, 옥체가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동 내한은 폐하보다 나이도 많은데, 근래 삼 년 동안 아이를 둘이나 얻었대요.”

안비가 황제의 팔을 잡고 흔들며 웃었다.

동 내한! 그 약! 정 낭자의 약!

황제의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정말 그때 그 간식 때문에? 어떻게, 이런 경사가!

물론 황제는 정교랑이 도조 이 진인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고, 신선의 제자라는 말은 더더욱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알 수 없이 흥분됐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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