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사람을 놀리다-
새롭게 어사중승 자리에 부임한 풍림의 거처는 인명(仁明) 골목에 위치했다. 경성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저잣거리까지 두 골목을 가로지르면 도착할 수 있고, 저잣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명 골목은 경성에서 가장 살기 좋고 조용하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인명 골목 곳곳에 매서운 북풍을 타고 온 눈꽃이 내려앉았다.
풍림은 하인 둘과 둘둘 만 이불 한 채만 달랑 들고 상경한 터였다. 아무 가구도 없이 등롱 몇 개만 켜져 있으니 커다란 저택은 더욱 음산하고 쓸쓸해 보였다.
사환이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바깥의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촛불이 거의 꺼지기 직전, 사환은 재빨리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약 드시지요.”
사환이 조용히 말하며 침상 위에서 벽을 보고 돌아누운 풍림을 쳐다보았다.
“됐다.”
풍림이 대답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노야.”
사환이 애원 섞인 목소리로 풍림을 불렀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풍림이 말했다. 윗전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지라 사환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훔쳤다.
벽을 보고 누워있던 풍림은 천천히 눈을 뜨고, 촛불로 인해 벽에 그려진 검은 음영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여인이 정 낭자일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풍림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둘이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불꽃이 튀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풍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처럼 느껴지자, 볼 한쪽이 얼얼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내 목숨을 구한 것도,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자신이 아니라던 그 여인이, 백성을 현혹하고 천자를 위협한 그 요부와 어찌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태생부터 달라 보이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일 수가 있느냔 말이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지?
변해?
아니다. 그 여인이 변했다고 하기엔, 실상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한창을 만났을 때처럼, 역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던 게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전부였으니까.
풍림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던 사환이 화들짝 놀랐다.
“노야.”
사환이 놀란 눈으로 풍림을 부르자, 풍림이 맨발로 바닥을 디디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풍림이 말했다.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환이 풍림의 옷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노야, 노야.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다. 내 직접 물어볼 것이 있어.”
풍림이 대답했다.
“노야,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밖에 눈도 오고요.”
사환이 벌써 문가에 다다른 풍림을 향해 소리쳤다.
풍림이 문을 열자, 거센 찬바람이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그의 온몸을 덮쳤다. 풍림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추자, 뒤에 있던 사환과 다른 사환이 재빨리 풍림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그를 말렸다.
“노야,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 시간에 어찌 거길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이 시간에 여인을 만나러 가는 건 큰 실례지.
풍림은 문을 닫지 않고 잠시 문 앞에 서서 온몸을 덮쳐오는 눈을 그대로 맞았다.
“노야, 오늘은 일단 좀 쉬시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환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환이 서둘러 문을 닫고, 맨발인 풍림을 안쪽으로 모셨다.
어두컴컴한 풍림의 저택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같은 시각, 등불이 환하게 켜진 다른 저택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 바깥의 한기를 두른 사내가 실내로 걸어 들어왔다. 실내에 둘러앉아 있던 네다섯 사람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됐소?”
“알아냈습니다. 3년 전, 풍림이 묵었던 역참에 불이 났던 그날, 강주로 돌아가던 정 낭자가 우연히 풍림과 같은 역참에 묵었다고 합니다. 정 낭자가 역참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들을 현장에서 화살로 쏘아 즉살하고, 불길이 더 거세지기 전에 역참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하더군요. 그중 풍림이 있었기에 풍림이 그 여인을 생명의 은인이라 여기는 거고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말했다. 내막을 알게 된 사람들이 얼른 고개를 돌려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은, 정말로 하늘이 무심치 않았던 게로군. 어찌 그런 우연이.”
일상복을 입고 앉아 있던 고능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막료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감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그런 우연이.”
“누가 보수사에 가서 향불이라도 올렸소?”
막료 중 한 명이 진지하게 물었다.
“향불을 올리진 않았고, 얼마 전에 다리를 지나다가 살코기가 제법 남아 있던 오리목을 비렁뱅이에게 던져준 적이 있소만. 설마, 그때 내가 복을 쌓았나?”
다른 막료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박장대소했다. 천장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그들의 기세는 허공에 휘날리는 눈발마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고능준 또한 탁자를 연신 손으로 내리치면서 웃었다.
“이번에 풍림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게 다 수포가 될 줄 알았는데,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이번 일로 눈엣가시인 두 사람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게 됐어!”
“사람이 세우는 계획은 하늘의 계산보다 못한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로군.”
진소와 진 노태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마주친 두 부자는 손을 내저으며 풍림에 대해 보고한 수하를 물렀다.
“그때 그 여인이 정말로 정 낭자일 줄이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는 붓으로 동그라미와 점을 그려둔 병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불의를 보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지?
정 낭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그럼 열흘 전에 정 낭자가 지나갔을 지점이 바로.
풍림이 친필로 작성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도움을 주었던 일행은 약 이십 명이고, 경성에서부터 한 여인을 호송해 오고 있었다.’
여인!
현장에서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였다? 설마 정말로 그 강주 바보는 아니겠지?
“넌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난 그때부터 그게 정 낭자일 줄 알았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자, 진소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하늘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군요. 일이 이렇게 돼버리면 곤란한데.”
진 노태야도 웃음기를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로 덕분에 실내는 무척이나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얼음장과도 같았다.
“풍림이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 셈이구나. 이번 일로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덮는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여겨질 거다. 사적인 일로 대의를 포기하는 것이니, 어사대 관리들은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 테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정 낭자의 죄를 묻고,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치거나 형을 내린다면, 평생 배은망덕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거야.
충과 효를 동시에 행할 수 없다고들 한다. 충을 행하고자 하면, 효를 잃을 것이고, 효를 행하고자 한다면, 충을 배반해야 하지. 이번 일로 풍림은 충과 효,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얻을 수가 없게 됐어. 결국 모든 걸 잃게 되는 셈이지.
황제 폐하가 인자한 성군이시긴 하다만, 풍림이 이번 일에 충을 따른다 해도, 그의 배은망덕함은 폐하의 마음속에 영원히 뽑히지 않을 가시를 찔러 넣을 것이야.”
진소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의 죄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두 사람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이 남을 겁니다. 그렇다고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황제께 사죄하며 제 발로 경성을 떠난다 해도, 이 일은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니 정 낭자는 언제든 같은 죄목으로 대신들에게 공격받을 테고요.”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고 탄식했다.
“정말로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계산에 미치지 못하는군요.”
실내의 등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창가에 길게 늘어뜨렸다. 창밖의 눈꽃이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그림자 위를 날아다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였다. 곳곳을 뒤덮은 새하얀 눈 덕분에 아침 햇살이 더욱이 밝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온 장 노태야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던 찰나, 노복이 그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려던 장 노태야는 하마터면 허리에 담이 걸릴 뻔했다.
“만평, 무슨 짓이냐?”
장 노태야가 자신의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노야, 풍림의 일에 관해서 들으셨지요?”
노복이 물었다.
“어제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또 왜?”
장 노태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러더니 노복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아차차, 병풍에 그린다는 걸 깜빡했네. 정 낭자가 풍림도 구했지.”
노복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허, 하고는 장 노태야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애초에 정 낭자가 풍림을 구했기 때문에, 지금 둘 다 사지에 놓인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장 노태야가 태연하게 붓에 먹을 찍었다.
“그럼 아닙니까? 풍림이 자신과 자신의 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잖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모를까요. 풍림 그자가 배짱이 손톱만 해서 정 낭자를 보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혼절해 버리는 바람에, 그 사실을 숨길 수도 없게 됐고요.”
노복은 말하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정 낭자가 자기 목숨을 구해 준 게 남에게 말 못 할 창피한 것도 아닌데, 숨길 필요가 뭐 있다고.”
장 노태야는 붓을 들고 병풍에 한 획을 그려 넣은 뒤, 잠시 감상을 하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노야, 정 낭자가 풍림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진 이상, 풍림은 정 낭자를 놓아주고 싶어도 못 놓게 되는 꼴이 됐습니다. 양쪽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지요. 반근은 정 낭자 걱정에 매일같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장 노태야의 모습을 본 노복은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반근? 아둔하기는.”
장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 낭자가 그 애를 팔다시피 했는데도, 반근은 아직도 정 낭자를 잘 모르는 모양이야.”
“노야.”
노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장 노태야를 불렀다.
“양쪽이 함께 망한다?”
장 노태야가 붓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난 그 여인의 계략에 한 번 놀아나 봤다. 그 후로 난 절대 그 여인이 그리 망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노야, 속이 너무 좁으신 거 아닙니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세요?”
노복이 장 노태야를 탓하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이전에 겪었던 일을 교훈 삼아 마음속 깊이 새기는 게다.”
장 노태야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노야,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이 같습니까?”
노복이 초조한 투로 말했다.
“당연하지. 다 똑같아.”
장 노태야가 노복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다 똑같다고?
바보의 아비가 바보의 몸종을 뺏다시피 하여 노야께 드렸던 일과 어사중승이 유명한 여인을 심문하겠다는 일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무정하게 굴 뿐이지. 뭐가 다르다는 게냐?”
장 노태야가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사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풍 중승께서 정 낭자 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사환이 머리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역시 갔군!
왜 갔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 좋은 결과를 보긴 힘들 것이다. 다만 누가 먼저 험한 꼴을 볼지는 정해지겠지.
풍림이 옥대교 저택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풍림의 결정을 추측하고,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대했다.
풍림은 말에서 내려 옥대교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 앞에 쌓였던 눈은 벌써 깨끗하게 치워졌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풍림은 그들이 거리에서 자신을 몰래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정 낭자와 함께 글씨를 쓰러 온 자들이겠지.
풍림이 심호흡을 하고 사환에게 손짓했다.
“노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한동안 요양을 하시다가 다시 오심이…….”
사환이 주저하면서 풍림을 만류했다.
병 때문에 요양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변명거리였다. 병이 낫는 속도가 더디면 더딜수록,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날도 점점 더 뒤로 밀릴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일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거나 아예 잊히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긴 하겠지만, 지금처럼 풍랑 끝에서 칼을 겨누고 정면승부를 할 필요까지는 없게 될 터였다.
시간이 약이야.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거든.
사환이 속으로 생각했다. 풍림이 굳은 표정으로 사환을 노려보았다.
“나 풍림은 언제나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비겁하게 피하거나 숨지 않아.”
사환이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이고 옥대교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문지기가 문을 살짝 열고 풍림과 사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풍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문지기에게 양손으로 명첩을 건넸다.
“풍림, 정 낭자를 뵙고자 왔소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풍림은 마당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택의 대문이 닫히자 풍림을 향한 시선이 차단되었다.
오늘따라 옥대교 저택 앞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제 풍림이 궁문 앞에서 정교랑을 마주친 후로 놀라 혼절했다는 이야기가 벌써 경성의 저잣거리까지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의 소문은 관리들의 소식보다 빠를 때가 많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귀신은 신선을 무서워해.”
“예전에 무뢰배들이 태평거에 우르르 몰려갔을 때를 기억하시오? 그때 금강역사가 발을 한 번 탁 굴렀을 뿐인데, 무뢰배들이 다섯씩이나 죽어 나갔잖소.”
“풍 판관께서는 정 낭자에게 사죄하러 찾아온 거겠지?”
주위에 몰린 구경꾼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붓과 벼루를 품에 안고 정교랑을 따라 글씨를 쓰러 온 서생들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설령 어사대 관리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야. 어사대 관리가 소문에 휘둘려 친히 여기까지 찾아와 사죄할 리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어사대 기개가 있지.”
“그런 게 아닐세.”
서생의 투덜거림을 들은 어떤 사람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가 듣기로는, 정 낭자가 풍림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군.”
그 사람의 말에 서생들이 놀란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풍림은 설마, 대의를 위해 생명의 은인도 버리려는 건가?”
서생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야 모를 일이지.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고 형제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잖나.”
다른 서생이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난 그보다 오늘 정 낭자가 글씨 연습을 할지 안 할지가 더 궁금해.”
또 다른 서생이 말했다.
며칠 전에 풍림이 정 낭자의 죄를 묻겠다고 난리를 쳤을 때도, 정 낭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문 밖으로 나와 글씨 연습을 했다. 하지만 풍림이 직접 자신을 찾아온 오늘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서생들이 일제히 굳게 닫힌 옥대교 저택 대문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 사이로 걸어 나온 사람은 정 낭자가 아니라 사환이었다. 사환은 아무 말 없이 종이 한 장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다.
사람들이 대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자, 서생들은 자신의 신분을 고려하여 자신들이 데리고 다니는 사환을 시켜 대문 앞에 붙은 종이를 보고 오게 했다.
“정 낭자가 오늘은 손님이 있어 글씨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환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말했다. 서생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은인과 원수끼리 할 이야기가 길겠구나.”
“그런 게 아닐세.”
좀 전에 정교랑이 풍림의 은인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또 끼어들었다. 서생들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 낭자 댁에 오신 손님이 둘이라네. 내가 좀 전에 사환한테 물어봤거든.”
그 사람이 손가락 두 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손님이 둘이라고?
대청 안으로 들어선 풍림이 멈칫했다. 먼저 도착하여 대청 안에 앉아 있던 한창과 한원조도 풍림을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대청 안에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풍 대인,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저희 아씨께서는 지금 옷을 갈아입고 계시니, 금방 나오실 겁니다.”
길을 안내하던 사환이 풍림에게 말한 뒤 물러났다. 풍림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어린 몸종이 그에게 차를 한 잔 내주고는 문을 닫고 물러났다.
대청에는 한창, 한원조와 풍림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중승,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한창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풍림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창을 쳐다보면서 냉랭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풍림의 대답을 들은 한창은 민망함을 견딜 수 없어 풍림의 눈을 피했다.
따지고 보면, 풍림이 혼절하게 된 건 한창의 탓이기도 했다. 한창이 풍림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더라면, 진실을 알게 됐다 한들 어제처럼 혼절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까.
내가 좀 소인배처럼 굴긴 했어. 풍림은 바보가 아니니, 정신을 차린 후엔 내 행동에 대해서도 화가 났겠지.
난 왜 그런 식으로 풍림의 성질을 긁었을까? 철없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짓을, 내가 왜.
울분과 수치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풍림과 맞닥뜨린 거야. 풍림도 나처럼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은인에게 치욕을 안기기까지 했지. 순간 울컥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어. 풍림을 놀리며 정 낭자를 대신해 분풀이한 것으로 내심 위안 삼고 싶었을지도.
풍림의 안색이 급변했을 때 나는 잠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곧바로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지. 풍림이 혼절하여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도리어 내가 더 놀라 정신을 못 차렸다고.
상대는 무려 조정의 중신이 아닌가. 분통이 터져 죽는 건 관두고, 화병만 났다 하더라도 난 그것으로 끝이었을 테지. 내 안위는 물론이거니와 무고한 정 낭자에게까지 불똥이 튀었을 거야. 정 낭자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일 수밖에.
풍림 저자가 건강해서 참으로 다행이군. 참으로 다행이야. 사치스럽고 안일한 생활에 익숙해진 경성 관리들과는 달리, 몇 년간 지방 곳곳을 누빈 덕분에 아주 강건한 몸을 가졌어. 분통이 터져 혼절까지 했으면서, 태의가 놓은 침 몇 방에 금세 깨어나서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수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한창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다.
“중승, 한창이 사죄드립니다.”
한창이 풍림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옆에 앉아 있던 한원조도 허둥대며 한창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풍림이 한창을 흘깃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당치 않습니다. 이 일은 대인의 탓이 아닙니다. 내 탓이지요.”
풍림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자, 한창은 머쓱해하며 허리를 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한창이 말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경솔했던 사람은 한 대인이 아닙니다. 자책하고 원망해야 할 사람도 대인이 아니고요.”
풍림이 천천히 말했다.
뭐라고?
한창 부자가 고개를 들고 풍림을 쳐다보았다.
“그럼 누구입니까?”
한창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나 자신이지요.”
풍림이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창의 얼굴을 보자, 풍림은 정교랑이 역참을 떠나던 그날, 정교랑의 말을 들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풍림은 정교랑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역참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결정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여인이 질문을 던졌던 그때, 만약 내가 백성을 내쫓던 서리를 야단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야.
기회는 다른 사람이 줄 수 있지만, 운명을 결정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야. 그러니 그 여인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거겠지. 자기에게 고마워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고마워하라고.
어제의 그 상황도 똑같지 않은가. 한창이 일부러 내 화를 돋운 것은 맞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금수보다도 못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대청 안의 침묵을 깼다. 뒤이어 문이 열리고, 정교랑이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 앞에 멈춰 선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몹시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뒤에 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세 사람을 쏘아보는 시녀의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정 낭자.”
세 사람이 정교랑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하자, 정교랑은 답례한 뒤 주인석에 앉았다. 문밖에 있던 어린 몸종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세 사람의 찻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세 분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지요?”
정교랑이 물었다.
한창과 풍림이 짧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교랑이 세 사람과 따로따로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두 사람 모두 알아챘다는 표시였다.
“낭자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사죄하기 위해 왔습니다.”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답례만 했다.
대청 안에 정적이 흘렀다. 한창과 풍림은 서로에게 먼저 말하라는 의미로 눈짓을 보냈다.
“정 낭자.”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 사이, 한원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낭자의 은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한원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때 제가 낭자의 집 앞에서 행패를 부리던 자들을 내쫓은 것은 아주 사소하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낭자께서는 동강현에서 제 고모님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제 행동은 더욱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 은혜라고 할 것이 못 됩니다.”
한원조가 말했다.
“아닙니다. 공자의 고모는 내가 진료비를 받고 치료한 거예요. 서로 빚진 것이 없죠.”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구한 은혜를 어찌 돈으로 갈음한단 말입니까?”
한원조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 괜한 생각 말아요. 나와 한 공자 사이의 은혜도 돈으로 갈음할 수 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자신의 말을 인용해 그대로 받아칠 줄 몰랐는지, 한원조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멍해진 한원조의 모습을 보고 한창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원조가 태평거에서 한 행동이 지나치기는 했지. 그러니 정 낭자가 이렇게라도 화풀이를 하는 게야.
“낭자, 다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한 탓입니다.”
한창이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하며 사과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한창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풍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풍 대인은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요? 저와 대인 사이에는 은혜랄 것이 없어 청산할 것도 없을 텐데요.”
정교랑이 한창 부자를 옆에 둔 채, 자신에게 말을 거는 상황이 풍림은 조금 민망하고 어색했다.
이 여인이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셋을 동시에 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
“낭자, 은혜는 돈으로 청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은혜라는 게 누가 있다고 해서 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요.”
풍림의 말에 정교랑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그러니 말을 입 밖으로 꺼내든 꺼내지 않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겠죠.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니까요.”
“그럼 낭자가 여태껏 한 일들은 어떠한 의도가 있었던 겁니까? 없었던 겁니까?”
풍림이 물었다.
“저희 아씨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댁이 무슨 상관이죠?”
반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풍림이 씁쓸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저 풍림은 나랏일을 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책임과 권한을 행해야 합니다. 낭자가 지금껏 한 일들은 더 이상 사사로운 일이라 볼 수 없지요. 조정에 관한 일이자 나랏일이니 제가 따져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풍림이 느릿느릿 말했다. 한창은 그런 풍림을 쳐다보며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사대 관리들은 늘 호랑이처럼 두려울 것 없이 당당했다. 그들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남의 몸에 칼을 꽂아 넣는 것이었다. 한마디 한마디 말로 저렇게 자기 자신의 몸에 칼을 꽂아 넣는 어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풍림으로서는 말을 해도 고통스럽고, 말을 하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일일 터였다.
정교랑이 빙긋 웃으며 반근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게 궁금했군요. 내가 한 일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제를 지내서 사람들을 모은 것도 의도한 바입니까?”
풍림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신비궁을 바쳐 의형제가 상을 받게 한 일도 의도한 바고요?”
“네.”
“액막이로만 칠현금을 연주하고, 사람에게 들려주는 연주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요?”
“네.”
질문은 힘겨운데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한창 부자는 대청 안 분위기가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문답 때문에 한창 부자는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낭자가 행한 모든 일은 전부 의도한 거라는 말입니까?”
풍림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사람은 다 저마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문답이 끝나자, 대청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작 몇 번의 문답이었을 뿐이지만, 풍림은 조회에서 힘든 싸움을 끝낸 사람처럼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정 낭자, 원하는 게 있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도가 지나쳤습니다.”
풍림이 탄식하며 말했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없습니다.”
풍림이 움찔하더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목청을 높였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습니까?”
한창 부자마저 화들짝 놀라 풍림을 쳐다보았다.
“낭자는 백성을 현혹하여 폐하를 협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귀신이니 신선이니 하는 말이 도는 걸 뻔히 알면서 피하기는커녕 은근히 부추겼습니다. 백성을 선동하고 조정 대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며 조정과 군권에 관한 대사를 좌지우지해 놓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단 말입니까?”
풍림이 버럭 호통을 쳤다.
“풍 대인.”
듣다 못한 한창이 풍림을 제지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리도 어린 여인을 매섭게 몰아세운단 말인가.
“좋게좋게 말씀하시지요.”
어사대 관리들이 탄핵을 설파할 때는 천자조차도 막을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일개 지방 현령이 대수겠는가. 한창의 말이 풍림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풍림은 엄숙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며, 정교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교랑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대장부는 일을 행할 때, 강직함 속에 원하는 바를 취해야 합니다.”
풍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교랑이 풍림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대장부가 아니라, 여인일 뿐인걸요.”
일관된 정교랑의 태도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풍림은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 낭자, 부디 자진하여 경성을 떠나십시오.”
풍림의 말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러운 대답이겠지만, 당분간은 경성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수십 명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가면서도,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떨림조차 없었던 귀판관 풍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렇다면 이 풍림이 낭자를 경성 밖으로 모시는 수밖에요.”
풍림이 천천히 말했다.
풍림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일으키고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림이 문을 열자 훅 들어온 찬바람에 한창 부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엉거주춤 일어서며 풍림을 붙잡으려 하던 한창은 결국 그대로 손을 내렸다.
정치와 도의가 걸린 싸움에 정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오래된 벗이 한순간에 원수가 되고, 부자가 연을 끊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 낭자, 왜 경성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겁니까?”
아직 얼떨떨한 표정인 한창의 귓가에 한원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창은 이 주제를 지금 굳이 이어 말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한원조를 제지하려던 찰나, 정교랑이 좀 전의 시원시원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직 떠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한원조는 정교랑의 말투가 낯설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알고 지낸 여인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없는 편도 아니었다.
자신은 쉽게 얘기해 줄 생각이 없으니, 어디 한번 맞혀 보라는 식의 말투,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표정은 정혼자가 보낸 서신에서도 자주 보이던 것들이었다.
때로는 빙긋 웃음을 짓게 하는 말투지만, 그 말투가 때로는 사람을 참 답답하게 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고모님께서 여러 번 낭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낭자가 지냈던 저택을 사들여 낭자의 명패를 걸어 두시기도 했지요.”
한원조가 화제를 바꿔 말했다.
“그 고모님은 나와 비슷한 면이 있네요.”
정교랑이 한원조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모님께서는 은혜를 갚고자 저택을 사들이셨고, 정 낭자는 은혜를 갚고자 내게 태평거의 지분을 줬지.
“제 고모님은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평범한 여인입니다. 낭자와는 감히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지요.”
한원조의 말을 들은 한창이 격노하며 호통을 쳤다.
“원조!”
호통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반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창을 쳐다보았다.
“성현의 가르침을 그리 배웠더냐!”
한창은 한원조를 나무라고, 정교랑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제가 아들놈을 잘못 가르쳐, 낭자께 무례함을 보였습니다.”
한창이 사죄하자, 한원조는 하는 수 없이 한창을 따라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한 대인께서는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한창이 고개를 들고 한원조를 노려본 뒤 입을 열었다.
“낭자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왔습니다. 제 누이를 살려 주신 은혜와 반강현의 요승을 처단해 주신 은혜, 그리고 제 아들놈을 너그러이 보살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대인의 감사 인사는 잘 받겠습니다.”
정교랑이 한원조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그럼, 당신은요?”
한창에게 묻고 한창의 감사를 받은 후, 다시 한원조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한창은 정교랑이 자신과 한원조를 별개로 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창은 아들의 생각을 잘 알았다. 보아하니 이 어린 낭자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창이 또다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공자도 나더러 경성을 떠나라고 하려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너무 솔직한 게 아닌가?
“아니요. 저는 단지 낭자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을 뿐, 낭자가 경성을 떠나고 말고는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원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두 분, 다른 용무가 있을까요?”
두 사람은 정교랑의 말 한마디와 함께 밖으로 모셔졌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밖으로 내쫓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창이 정신을 차렸다. 온몸을 덮쳐오는 겨울바람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고개를 들자, 한창은 어느새 자신이 역관 앞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야.”
사환이 황공한 표정으로 명첩 몇 개를 들고 왔다.
“또 명첩을 보낸 사람이 있다고?”
한창의 물음에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이 정교랑을 만나러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사환이 받은 명첩은 한창이 반강현에서 한 달 내내 받는 명첩의 개수 정도였다.
경성은 어마어마한 고관대작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니, 자신의 윗전은 모래알보다도 못한 존재일 거라고 사환은 생각했었다. 그런데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황제 폐하께 세 번씩이나 불려가고, 명첩이 끝도 없이 들어오자 사환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귀한 재질로 만든 명첩과 그 위에 쓰인 으리으리한 존함 때문에, 사환은 손이 무겁다 못해 벌벌 떨릴 정도였다.
“거기 두어라.”
한창이 말했다. 사환이 공손하게 명첩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노야, 명첩을 전하러 온 자들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환이 조용히 귀띔했다. 한창은 하는 수 없이 붓을 들고 일일이 회신을 써 내려갔다. 그는 막료를 데려오지 않은 일을 크게 후회했다.
회신을 모두 쓰고 난 한창은 사환에게 명첩을 돌려주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방에서 나와, 2층 회랑에 서서 거세게 휘날리는 눈발을 내다보았다. 아침에 그쳤던 눈이 정오 즈음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한창은 설경을 보면서 잠시 넋을 놓았다.
안 봐도 뻔하군. 아마 지금쯤 귀판관 풍림이 정 낭자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저 눈발처럼 경성 구석구석까지 퍼졌겠지.
“아버지, 또 누가 명첩을 보낸 겁니까?”
한창의 등 뒤에서 한원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림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한창이 말했다.
“알아볼 게 뭐 있다고요. 어차피 내일이면 온 경성 사람이 다 알게 될 텐데.”
한원조가 말했다.
잠시 조용해진 두 부자는 말 한마디를 던진 채 대청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풍림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 낭자가 많이 속상해하겠지?”
한창이 대뜸 말했다.
“아버지, 속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원조가 대답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된 풍림인들 속상하지 않을까. 은인이 난관을 맞닥뜨린 모습을 지켜보게 된 우리인들 속이 편할까.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 원.
두 부자 사이에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불어온 매서운 바람에 한원조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서둘러 한창을 부축하며 안으로 모셨다.
“아버지, 날이 찹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한원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래층에 사람들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한 대인, 숙주 한 대인.”
무리 중 한 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어제 연달아 세 번씩이나 황궁을 드나든 한창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내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한창은 한원조와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폐하께서도 무척 궁금하신가 보구나.
한창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해 주고 난 한원조는 마차가 눈길 속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역관 밖에 서 있던 한원조는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자신을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옥대교 방향을 내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 낭자가 고모와 다른 건 맞잖습니까.
“한 수재.”
누군가가 한원조를 향해 손짓하면서 그를 부르자, 한원조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한원조가 모르는 사람 서너 명이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원조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공수의 예를 표하고, 별다른 대꾸 없이 역관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창과 한원조는 이럴 때일수록 사람을 사귀는 데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벗으로 삼고 싶더라도, 이번 일이 지난 뒤에 사귀어도 늦지 않으므로.
이번 일, 너무 오래 가진 않겠지? 그보다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지가 더…….
한원조가 두봉을 단단히 여미고 바람을 피해 층계를 올라갔다.
마차 한 대가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며 성 밖을 향해 내달렸다.
마차의 앞뒤로 신체 건장한 시종 여덟 명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모자가 달린 검은색 두봉을 두르고 있었다. 호위들의 차림새만 보아도 마차에 탄 이가 꽤 부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시종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가 무척 단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 나 저 마차 알아. 저건 정 낭자의 마차잖아.”
길가에 있던 사람이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 낭자가 왕씨네 마차를 자주 빌려 탔지.”
‘정 낭자’라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성 밖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성을 나간다고?”
“풍림 때문에 화가 나서 잠시 나가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저대로 경성을 영영 떠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겨울바람 속에 묻혔다. 정교랑의 마차는 금세 성문을 빠져나갔다.
“아씨.”
반근이 손난로를 하나 더 꺼내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괜찮아. 눈이 올 때는 별로 안 추워.”
정교랑이 말했다. 괜찮다는 말에도 반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교랑의 두봉 속으로 손난로를 밀어 넣었다.
“아씨께서 똑똑하시고 맞는 말씀만 하시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저는 이렇게 하고 싶은걸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사람은 저마다의 집념이 있지. 머리로 안다 해도 행동하는 것과는 별개야.”
마차가 관로를 벗어났는지 반근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반근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온통 희뿌옇기만 했다.
아씨께서 어딜 가시려는 거지?
안쪽에 앉아 있던 정교랑도 휘장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예전에는 눈 오는 날을 싫어했어.”
정교랑이 갑자기 말했다.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눈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정교랑의 말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께서 좋다면, 좋은 거예요.
“좀 추운 것만 빼면요.”
반근이 말했다.
“추운 게 좋지. 사람이 별로 없잖아.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조용하고 자유로워.”
정교랑이 여전히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조용하고 자유롭다라…….
역시 아씨께서는 그 빌어먹을 풍림과 한원조 때문에 화가 나신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데도 밖에 나오신 거겠지.
반근은 속으로 풍림과 한원조를 사정없이 욕했다. 두 사람을 실컷 욕한 반근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정교랑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쉿, 잘 들어 봐.”
잘 들어 보라고?
반근이 재빨리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말발굽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이때, 갑자기 우르릉 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휘청거렸다. 반근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며 정교랑의 품에 안겼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금세 사라졌고, 마차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마부가 고함을 치자, 말들도 더는 울부짖지 않고 조용해졌다.
아직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한 반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아씨, 좀 전에 그 소리는 무슨 소리였어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가 났던 거 맞지? 내가 환청을 들은 건 아니지?
“천둥 번개였어요?”
반근이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럼 뭐였어요?”
반근이 자세를 고쳐 앉고 물었다.
“웃음소리.”
정교랑이 대답했다.
웃음소리라고?
정교랑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늘의 웃음소리.”
어쨌든 천둥이 지나간 소리라는 거잖아요.
반근은 속으로 투덜댔지만, 정교랑이 웃는 모습을 보니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하늘의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네요.”
반근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은 게 아니야. 하늘이 한 번 웃으면, 만인이 울게 되거든.”
만인이 울게 된다고?
반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어.”
정교랑이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이 울지 않으면 내가 울어야 하는걸. 누군가는 울게 되어 있는 세상이야.”
해가 뜰 때쯤,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반근이 마당으로 나왔을 무렵, 마당에 쌓여 있던 눈은 벌써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반근 누나, 저기 과녁 준비해 뒀어.”
사환 하나가 반근에게 뛰어오며 말했다.
“오늘은 아씨께서 활쏘기를 안 하신대.”
반근이 대답하고는 이를 갈면서 험상궂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풍림과 한원조 때문이야.”
반근의 뒤에 서 있던 시녀와 황씨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께서 오늘 활쏘기를 하지 않으시는 건, 큰 도련님께서 아씨의 활을 궁노원으로 가져가 수리하시기 때문이야. 풍림과 한원조의 일은 아무 상관도 없어. 어제 하루 밤낮을 욕했으면서 아직도 욕할 게 남았나 봐?”
시녀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반근에게 말했다.
“당연히 남았지! 내 평생을 두고 욕해도 부족해.”
반근이 입술을 삐쭉이며 대꾸했다.
시녀와 반근이 대화하는 사이, 정교랑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당에 서 있던 시녀와 반근 그리고 황씨는 정교랑의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씨, 출타하시려고요?”
시녀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기다린다고?
오늘 조회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황제에게 주청을 올리는 관리는 극히 드물었고, 조당에 서 있는 대신들은 이따금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주청을 올린 관리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드디어 어사중승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왔구나!
모두가 속으로 외쳤다.
어사중승이 일어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해졌다. 재미난 구경을 보는 사람처럼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도 있었고,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표정들을 짓고 있든 간에, 그들의 시선은 전부 녹색 관복을 입고 걸음을 옮기고 있는 어사중승에게로 향했다.
“신 풍림, 폐하께 주청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신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나라를 좀먹고 있는 강주 정씨 여인의 죄를 묻고자 대리시에 조사를 청하옵니다.”
신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나라를 좀먹고 있는 강주 정씨 여인의 죄를 묻고자 대리시에 조사를 청하옵니다.
이 말에 놀라는 조정 대신은 없었다. 아무리 놀라운 말이라 해도 두 번째로 말할 때는 그 기세가 한풀 꺾이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강주 정씨 여인은 불과 며칠 만에 벌써 몇 번이나 입에 오르내린 터였다.
게다가 어제 황제가 한창을 불러 풍림과 정 낭자에 관한 일을 하문한 일은 하룻밤도 안 되어 황궁에서 소문이 새어 나왔다.
오늘 벌어진 광경은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대신들은 풍림이 앞으로 나설지 안 나설지 궁금해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황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훨씬 관심이 모아졌다.
황제에게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소문만으로 그 죄를 물을 순 없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리시에 명해 조사하십시오.”
풍림이 바로 반박했다.
“조사에 명분이 없잖소.”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옥좌 아래에 선 대신들은 확신했다.
적어도 아직은 폐하께서 정 낭자의 편에 서 계시는구나.
하지만 진소의 얼굴에선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의 보호는 믿음직한 게 아니었고, 쉬이 변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이 황제는 심지가 굳건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와 수십 년을 함께 지낸 진소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들은 진소가 황제의 총애 덕에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단순히 황제의 총애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반박할 수 없는 탄탄한 실적을 황제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면, 매년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쌓이는 탄핵 상소 앞에 진소는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정 낭자가 공격을 받는 것은 아직 정 낭자의 기반이 탄탄하지 않아서였다.
허무맹랑할지라도 정 낭자가 폐하께 더 많은 기대를 안겨 드려야 해. 그 기대가 있는 한 폐하는 당분간 정 낭자의 편에 서실 테니까.
기대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자 양날의 검이기도 하지.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므로.
진소는 미간을 찌푸리며 풍림을 쳐다보았다. 풍림은 황제의 말에도 전혀 움츠러들거나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폐하, 신이 왜 기필코 정씨 여인을 축출하려 하는지 아십니까?”
황제가 그런 질문에 대답할 리 없었다. 풍림 역시 황제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지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 갔다.
“신은 정씨 여인의 부친인 정동도 발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조당 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또 연좌의 시작인가?
내막을 아는 고능준 등 몇몇 사람만 설핏 미소를 드러냈다.
“오래도 숨겼다 꺼내는군요. 난 또 까먹은 줄 알았네.”
고능준 곁에 있던 동료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풍 중승이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죠.”
다른 동료가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풍림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로 들어왔다.
풍림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조당이 조용해졌다. 가뜩이나 안 좋던 진소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특히 황제의 안색을 본 후로는 더더욱.
그랬던 게로군.
진소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풍림이 경성으로 올라와 정 낭자와 마주치며 일이 시작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뿌리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러면 일이 곤란해지는데.
“정동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며, 거리낌 없이 딸아이의 이름을 떠들어댔습니다. 천자 앞에서는 영예로워하며 백성 앞에서는 위세를 떨쳤지요.
소경문에게 둘러싸여 신위군이 따르는 술을 받아 마시는 정동의 모습에, 백성들은 놀라면서도 부러운 표정으로 정동을 에워싸고 구경했습니다.
역참에서 갑자기 내쫓겨 분노로 씩씩대던 백성들은 정동이 정 낭자의 부친이라는 말을 듣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쫓겨난 일을 되레 영광으로 여기고, 여기저기 소문을 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에 조당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흥미진진해졌다.
풍림이 아주 작심하고 떠들어대는군! 기어이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해! 은인은커녕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해도 저렇게까지 독하게 굴 필요 있나.
저러니 다들 귀판관이라고 하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 좀 봐.
진소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고개를 들어 옥좌 위의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안색도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전부 정동의 잘못이군. 그런데 어찌하여 정 낭자의 죄를 묻겠다는 거지? 그 아비를 탄핵하면 되잖소.”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폐하.”
풍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그 아비에게 상을 내리고 관직을 승급시켜 주었습니까?”
그야 당연히 짐이지.
황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정 낭자가 자신이 세운 공으로 폐하를 협박하여 받아낸 겁니다.”
풍림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건 맞는 말이야. 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상을 마구 하사하진 않아.
풍림이 그 점을 인정하자 황제는 풍림의 말 속에 있던 ‘협박’이라는 단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승 대인, 그게 어떻게 협박이 된단 말이오?”
진소도 더는 참고 있을 수 없었다. 세 치 혀로 칼을 휘둘러대는 풍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대리시에서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황제가 정 낭자에 살의를 품을 것 같았다.
“공을 세웠는데도 상을 내리지 않는 것과 죄가 있는데도 벌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이치잖소! 폐하를 상벌도 분명히 하지 않는 분으로 만들려는 거요?”
진소가 따졌다.
“정 낭자는 그 마음이 올곧지 않으므로, 정 낭자가 세운 공은 곧 죄가 되기도 하오.”
풍림은 고개를 돌리고 진소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의형제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던 그 의도가 불순하고, 폐하께 신비궁을 바친 그 의도가 불순했소.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아비 역시 상경도 하기 전부터 딸자식을 앞세워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며 천자께서 내리시는 상이 당연하다는 듯 횡포를 부리고 있잖소.”
옳거니!
고능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 이 자리가 조당이 아니었다면 손뼉을 치며 잘한다고 응원해 주었을 것이다.
역시 귀판관 아니랄까 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말만 구구절절 내뱉는군.
“풍림, 멋대로 추측하지 마시오!”
진소 역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풍림도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목청을 높였다.
“진소, 어디 본관이 좀 더 멋대로 추측해 볼까요? 그대가 이토록 열심히 정씨를 두둔하며 정씨와 벗하고자 하는 건 조정을 자기 소유로 여겨서가 아니오이까?”
그 말에 진소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렇지!
고능준은 또다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이번에는 고능준도 다소 놀란 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풍림도 바보는 아니로군. 황제의 약점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구구절절 정곡을 찌르고 있어.
그 여인 얘기를 먼저 꺼내 폐하를 압박하고, 폐하께서 품으셨던 불만을 은근히 도발하는 거지. 그러고는 철퇴를 들어 진소를 내리치고 말이야. 벗하기 위해서라는 죄목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으니까.
천하의 관료는 모두 황제의 것이고, 부귀영화와 앞길 역시 오로지 황제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신하가 조정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황제가 가장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건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조정 대신들은 벗이 되어 서로를 지켜주고, 동문수학한 동창끼리 서로 돕고 협력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속으로 훤히 아는 사실이라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고, 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공론화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황제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옳거니! 풍림, 아주 잘하는구나! 더 세게 물어라!
네가 이번에 정 낭자와 진소를 동시에 내쫓아 준다면, 나 고능준이 삼 년은 더 널 경성에 데리고 있어 주마.
이렇게 훌륭한 개를 그냥 보내긴 아쉽거든.
“폐하, 신은 무고한 언사로 조정 대신을 모함한 풍림의 죄를 묻고자 합니다.”
진소 역시 분을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예를 표한 후 소리쳤다. 진소는 자신을 향하는 탄핵과 질책 앞에서 전진을 위한 후퇴로 사직을 청하며 항의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즉각 반박하곤 했다.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중승 대인이 억측을 내놓은 것이니, 곧이듣지 마시오.”
“신은 풍림을 모독죄로 발고하고자 합니다.”
진소는 끝까지 가 볼 작정이었다.
“중승, 그대가 결례를 보였소.”
황제가 풍림을 보며 말했다.
“신은 소임을 다했을 뿐, 결례를 보인 일이 없습니다.”
풍림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대신이 조당에서 강경하게 대치했다. 그 누구도 황제의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황제 또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대신들이 황제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정동의 일은 어사대에서 검증하시오.”
황제가 하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우선 대리시에 명해 정씨 여인부터 조사하시지요.”
풍림이 즉시 말을 받았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과오이나, 부모가 제대로 못 배운 것이 자식의 과오라는 말은 금시초문이외다.”
진소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씨 여인이 활개를 치며 백성을 현혹하지 않았다면, 어찌 정동이 안하무인으로 오만방자하게 굴겠소? 같은 이치로, 진소 그대가 중서성에 있지 않았다면, 그대의 부친이 경성에서 사사로이 저택 두 채를 사들일 수 있었겠소이까?”
그 말이 떨어지자 조당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고능준은 거의 뒤로 넘어갈 뻔했다. 너무 좋아서······. 잘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말도 없을 정도였다.
줄곧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던 진소도 그 말에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양옆에 있던 대신들은 진소가 그대로 혼절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진소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진소가 대전 중앙으로 걸어 나와 옷을 털고 꿇어앉았다.
“신은 능력이 변변치 않아 조정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릴 수 없으니 이는 곧 불충입니다. 신은 열세 살에 유학길에 올라 스물일곱에 출사하여 관리로 반평생을 보냈습니다. 관직에 있느라 부모님께 효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부친께 이런 치욕까지 안겨 드리게 되었으니 실로 불효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소는 예를 올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신처럼 불충하고 불효한 자는 조당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어질고 재능 있는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사직을 청합니다. 신은 뒤로 물러나 부친을 봉양하며 효를 다하겠습니다.”
진소가 또 사직을 청하다니!
이번에는 고능준뿐 아니라 조당에 있는 모두가 속으로 외쳤다. 황제조차도 멈칫할 정도였다. 불과 며칠 만에 사직을 청하는 진소의 말을 두 번이나 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역시 이런 장난은 한번 그 맛을 보면 중독을 피할 수 없나 보군. 그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진소조차도 예외는 아니었어.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실제로 사직하고자 사직을 청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황제에게 어서 입장을 표명하라는 규탄에 가까웠다.
풍림이 내게 이런 수모를 안겼으니, 이제 조당에서 벌어질 일은 하나뿐이다. 풍림이 떠나지 않으면 내가 떠난다. 내가 남는 한, 풍림은 반드시 떠나야 한다.
정씨 여인의 일을 논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쩌다 갑자기 조정 대신이 사직을 청하게 된 거야?
황제는 머리가 지끈지끈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래서 어사가 주청 올린 일은 단칼에 끝내야 한다니까. 시간을 끌었다간 결국 누굴 물어뜯을지 몰라!
풍림 저자도 참······. 대단하긴 대단한 자야. 상경한 지 불과 사나흘 만에 진소 아버지 소유의 저택까지 조사하다니. 아차, 어쩌다 생각이 여기로 왔지?
황제는 속으로 뜨끔했다.
“진 대인, 말이 심하구려. 나라와 집안 모두 그대를 필요로 하니, 짐은 그대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겠소.”
황제가 풍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풍 중승은 경솔한 언사로 결례를 보였으니, 벌로 석 달 치 녹봉을 삭감하고, 추후 죄를 묻겠소.”
일이 이 지경이 되자 계속해서 조회를 진행하기란 불가능했다. 황제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서둘러 퇴청을 선언했다.
“폐하, 정씨 여인에 대해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풍림은 퇴청하라는 황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아무래도 오늘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접어야겠군. 하여간 정씨 여인 때문이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말만으로 죄를 논할 순 없지.”
황제가 말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풍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시 입을 열려 하자, 황제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리시에 명해 사실 관계를 조사한 후 결정하겠소.”
해냈구나!
대전에서 허리를 숙인 채 황제를 배웅한 고능준은 가볍게 손바닥을 쓸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를 배웅하는 풍림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잘했다! 내 오늘은 돌아가서 그대를 위해 한잔하겠네.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 진소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진소가 오늘은 허둥대며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폐하께선 아직 진소를 내칠 마음이 없으시니 참으로 안타까운지고. 저자가 사직 상소를 올린다 한들 폐하께선 어르고 달래고 타이르며 거절하시겠지. 그렇게 몇 번 고집을 부리고 나면 결국 풍림이 외직으로 쫓겨나고, 진소는 다시 조당으로 돌아올 거야.
하지만 사직을 청하는 일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되면 폐하께서도 결국 성가시다는 생각이 드시겠지.
은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흐려지고 잊히기 마련이고, 돈독했던 정도 풍파를 겪으면 소원해지기 마련이거든. 감정이야말로 가장 야박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지.
고능준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옷소매를 털었다.
오늘 조회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작됐으나 전혀 뜻밖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풍림이란 자가 대단하구나. 신선의 제자라는 강주 정씨를 문 것도 모자라 진 상공까지 들이받다니, 어사중승 자리가 무색하지 않도다.
“아무래도, 귀신을 속이긴 쉽지 않은가 보군.”
고능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소식을 들은 진십팔랑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일어나 조부의 거처로 달려갔다.
“안에 노야께서 계세요.”
마당에 있던 여종이 얼른 진십팔랑을 막아서며 말했다. 진십팔랑은 여종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열자 진소와 대화 중인 진 노태야의 모습이 보였고, 집사도 몇 명 불려와 앉아 있었다.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전부 팔거라.”
진 노태야가 계약서 몇 장을 밀어 주며 말했다.
“아버지, 이건 아버지의 사유 재산이 아닙니까. 어찌 이 아들 때문에 팔려 하십니까.”
“내 사유 재산이라고는 하나 어쨌거나 시중 가격보다 싸게 사들였으니 내 잘못이다. 네 형제들을 얼른 경성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에 너무 성급했어.”
“더구나 그때는 제가 상경하기도 전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무관한 일입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께서 수모를 겪으셨어요.”
진소가 엎드려 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어찌 네 탓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 잘못이다. 삼가고 조심했어야 했어. 어사는 본디 풍문을 듣고 주청을 올리는 자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말하기 나름이지. 사실이 어떠한지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
목멘 목소리로 끊임없이 자책을 늘어놓는 진소의 목소리가 안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더는 못 듣겠는지 진십팔랑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뒤돌아 뛰어나갔다.
이게 어떻게 조부님 잘못이야? 조부님의 돈이잖아. 아버지께서 뇌물을 수수한 것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아버지 잘못이야? 아버지가 경성으로 오시기도 전에 조부님이 사들이신 저택인데.
그럼 누구 잘못이지? 아버지께서 그 여인의 편을 드셨기 때문이야. 그래서 어사중승이 아버지를 물고 늘어진 거라고.
다 그 여인 때문이야, 그 여인! 그 여인 때문에 이런 사달이 벌어졌어.
그러게 경성만 떠나면 이 일은 여기서 매듭짓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안 떠나는 거야? 대체 왜!
“십팔랑, 어디 가?”
뛰어나가는 진십팔랑을 보고 뒤에서 진단랑이 소리쳤다. 하지만 진십팔랑은 이미 쏜살같이 뛰어나간 후였다.
같은 시각 대리시승(大理寺丞)은 어사대의 통보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이렇게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니.”
대리시승이 중얼거렸다.
“염라대왕이 삼경에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 누구도 오경까지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대인, 서명하시지요.”
수하가 말했다.
귀판관이 생명의 은인에게 참으로 모질게도 구는군. 하여간 이런 인사와 잘못 엮이면 재수 옴 붙는다니까.
하긴, 그 유명한 진 상공까지 궁지로 몰아 사직을 청하게 만들었으니 말 다 했지.
대리시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와라.”
수하가 얼른 일어나 대답하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대리시승이 말렸다.
“천천히 가도 된다. 그래도 식사는 조용히 마치게 해 줘야지.”
“귀판관에 비하면 시승께서는 보살님이 따로 없으십니다.”
수하가 웃으며 대꾸하고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물러갔다.
“어쨌거나 신선의 제자가 아니더냐. 매사에 여지를 남겨 둬야 훗날 좋은 얼굴로 만나는 법, 지나치게 몰아세울 건 없지.”
대리시승이 중얼거렸다.
대리시승의 느긋한 태도에도 정교랑의 식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쾅쾅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두봉을 두르고 두봉에 달린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여인이 대뜸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겁니까? 대체 누구요?”
문지기가 소리쳤다.
상대가 여자다 보니 막무가내로 막을 수 없어 잠시 주춤한 사이, 진십팔랑이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문지기의 고함을 들은 시종 둘이 문간방에서 달려 나왔다.
시종들은 남녀유별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다짜고짜 손을 뻗어 진십팔랑을 우악스럽게 끌어냈다. 진십팔랑의 비명이 마당에 울려 퍼지는 바람에 저택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기를 안은 황씨는 물론이고 정교랑도 밖으로 나왔다.
“진 아씨, 어찌······.”
반근이 소리쳤다.
정교랑을 힐끔 보고 난 두 시종은 그제야 손을 풀고 한쪽 옆으로 가서 섰다. 그러면서도 진십팔랑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진십팔랑은 씩씩거리며 모자를 홱 벗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왜 안 떠나는 거죠? 잠시 예봉을 피해 물러났다가 때를 기다리는 거, 모르겠어요?”
또 아씨를 질책하려는 사람이 왔네.
시녀는 세 점포를 관리하느라 바빠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반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재주가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지금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지 알아요?”
진십팔랑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탄핵당했고, 조부님도 수모를 당하셨다는데······.”
진십팔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잘랐다.
“그건 나 때문이 아니에요. 나와는 무관한 일이죠.”
진십팔랑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이 받기도 하고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정교랑, 정말 매정하네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이보세요.”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황씨가 어린 몸종에게 아기를 맡기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손님으로 온 거면 안으로 들어가 얘기하고, 싸우러 온 거면 그만 돌아가시죠.”
“댁한테 말한 거 아니잖아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꾸했다.
“근데 지금 댁이 내 집에서 얘기하고 있잖아요.”
황씨도 열이 확 받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진십팔랑은 그제야 황씨를 돌아보고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싸움이요? 내가 감히 어떻게 이 사람이랑 싸우겠어요. 난 대체 그쪽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진십팔랑이 코웃음을 쳤다.
“이해할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이해하는 걸로 충분하니까.”
정교랑을 따라 대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반근이 멈칫했다. 진십팔랑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졸 몇 명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여기가 정 낭자 댁입니까? 저희는 대리시에서 나왔습니다.”
대문 앞에 선 관졸들이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로 물었다. 진십팔랑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반근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까, 아씨께서 기다리시던 게 저들이었어?
“조사하러 온 거예요? 하옥하러 온 거예요?”
진십팔랑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건, 조사를 해 봐야 알지요.”
관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족이 같이 가도 되나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가능합니다. 공당에 함께 나가지만 않으면 돼요.”
관졸은 사근사근 웃으며 대답하다가 얼른 웃음기를 거두었다. 웃음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좋지만, 대리시 관졸이란 자가 웃음을 지으면 오히려 상대가 불쾌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올케. 반근이랑 나만 가면 돼요.”
황씨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모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올케는 오라버니한테 가서 말을 전해 줘요.”
정교랑이 덧붙였다. 황씨는 얼른 알겠다고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너, 너무 겁내지 마요.”
누가 더 겁을 내는 건지 모르겠네.
옆에 있던 관졸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욱 공손한 태도로 정 낭자라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역시 신선의 제자라 다르구나. 보통 사람들과 달라.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한 저 표정 좀 봐.
“난 겁나지 않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쫓아오며 소리쳤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진십팔랑을 힐끔 보고, 별다른 말 없이 뒤돌아 대문을 나섰다.
마차 한 대가 관졸들에게 둘러싸인 채 거리를 지나갔다. 눈이 내리고 난 거리에는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쳤다.
두봉으로 몸을 단단히 감쌌는데도, 날이 밝자마자 문 앞으로 나와 서 있던 한원조는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마차를 보고 앞으로 다가서려던 한원조가 비틀거렸다.
“공자님.”
사환이 잽싸게 부축했다. 한원조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을 무렵, 마차는 벌써 저만치 간 후였다. 찬바람이 불자 한원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옷소매 속에 있는 두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속세를 따를 수 없으니, 진실로 근심 속에 평생 고생하리라(吾不能變心而從俗兮, 固將愁苦而終窮).”
천천히 시를 읊고 난 한원조가 쓴웃음을 지었다.
굴원의 이 시구를 여인을 위해 읊을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군.
같은 시각 경왕부에서는 이따금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원의 공터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경왕은 눈밭을 뛰어다니며 웃고 장난을 쳤다.
“전하, 전하.”
내시 하나가 급히 달려와 솜옷 하나만 입은 진안 군왕을 보고 소리쳤다. 진안 군왕은 한겨울에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탄탄한 팔뚝을 드러낸 채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진안 군왕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정 낭자가 대리시로 갔습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아주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구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돌려 경왕을 쳐다봤다. 내시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내시의 눈에는 허리를 곧추세운 군왕의 뒷모습만 보이고, 한바탕 웃고 난 후 표정이 굳어진 진안 군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끝이 없군, 끝이 없어. 달리 무슨 수가 있으랴. 인생이 본디 그러한 것을.
정말 재수 없게 됐네.
대리시 소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느릿느릿 읊던 서리의 질문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대리시 소경은 공당 아래에 선 여인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속으로 대리시승과 어사중승을 욕했다.
하여간 대리시승이 문제야. 까다로운 일을 맞닥뜨리면 꼭 나를 앞세운다니까.
“정씨, 어사중승 풍 대인이 물은 죄에 대해 인정하느냐?”
대리시 소경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풍 대인의 말씀에 따르면, 네가 그 일을 했다고 전부 인정했다던데?”
소경이 물었다.
“네. 그 일은 제가 한 게 맞아요. 다만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죠.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소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 그저, 절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건 제가 한 일 그 자체일 뿐이죠. 다른 이가 절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역시 저와는 무관하고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인, 제가 그런 일들을 한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풍 중승이 비난한 점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정을 한다는 거야? 못 한다는 거야?
이래서 이 사건의 심문이 까다롭다는 거였군. 그럼 어디 천천히 해 보자.
소경은 무슨 생각이 머릿속을 번뜩 스쳤는지 앞에 있는 경당목을 집어 들려 했다.
“대인.”
뒤에 있던 서리가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사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후당 안. 소경은 대리시를 찾아온 어사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고요? 오늘이라 하셨습니까?”
소경이 언성을 높였다.
“중승 대인께서 오늘 중으로 결론을 내라 하셨소.”
어사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 말입니까? 오늘?”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소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농담하십니까? 심문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중승 대인께서 이 안건은 심문하기 쉽다고 하셨소. 죄를 인정하면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돌려보내란 말이외다.”
어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멈칫하던 소경이 곧 말뜻을 이해했다.
대리시 감옥은 어사대 감옥과 비교가 안 되지. 어쨌거나 어사대는 관리를 조사하는 곳이니까.
여인의 몸으로 대리시에 온 것만 해도 명예가 땅에 떨어진 셈인데, 감옥에 들어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잖아.
귀판관이 인간미가 영 없는 자는 아니었어. 그래도 은인을 기억하고 있긴 하구나. 뭐,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꼴 같긴 하지만.
“저 여인이 인정하라 하면 한답니까?”
소경은 콧방귀를 뀌고 옷소매를 털며 홱 뒤돌아 공당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두고 보시구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가요. 올케가 대리시로 끌려갔다고요.”
황씨는 초조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벌써 데려갔단 말이오?”
황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가자고 범강림을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리시구려. 어제 중요한 일이 생겼소. 우선 이 일부터 처리해야 해.”
범강림의 말에 멈칫하던 황씨가 버럭 화를 냈다.
“벼슬에 눈이 멀었어요? 뭐가 그리 바쁘다고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와요?”
경성의 낯선 환경 속에 전전긍긍 불안하게 지내느라 꾹 눌렀던 서북 여자의 드센 성격이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황씨가 범강림의 팔을 홱 낚아챘다.
“누이의 일이 더 중요해요? 아니면 이 망할 곳의 일이 더 중요해요?”
문밖에 있던 이들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누이의 일이 중요하지. 누이의 일이 중요하고말고.”
범강림이 난처해하며 아내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이면 되오, 잠깐이면.”
범강림은 그 말만 남긴 채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떴다. 관청 안에 남은 황씨가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대인, 어서 가 보세요. 여긴 저희한테 맡기시고요.”
관청 밖에 있던 병졸들이 얼른 범강림을 쫓아와 말했다. 범강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야 없지. 병기는 아주 중한 물건이야. 애들 장난감이 아니라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범강림과 병졸들은 궁노원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꽁꽁 묶인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두 사내를 에워싼 채였다.
“이무!”
범강림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벼락같이 달려와 그중 한 사내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어서 말해!”
범강림이 호통을 쳤다. 범강림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대인께서 왜 저러시지? 방금 전까진 잘해 주셨잖아?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듯 죄인을 심문하시더니.”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인이 왔거든. 집안에 일이 생겼나 봐.”
옆에 있던 이가 목소리를 죽여 가며 대답했다. 둘은 뭔지 알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이들도 퍼뜩 깨달은 눈치였다.
이거 뜻밖인데. 범 군감이 공처가일 줄이야.
“냉큼 말하래도!”
다들 언성을 높이며 사내들을 다그쳤다. 범강림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를 붙잡아 홱 일으켜 세웠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성문을 지키던 감문관 이무라는 사실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전 그저 투석기(投石機)를 빌렸을 뿐입니다.”
“빌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무기를 빌린단 말이냐?”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이무가 고개를 떨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에 감문관을 할 때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그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었지만, 집에 불을 낸 일로 죄를 짓고 쫓겨나 관복까지 벗게 된 지금은 그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았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강림이 다시 그를 걷어찼다.
“빌려? 누굴 속이려고? 바른대로 말해라. 서쪽 오랑캐 놈들의 세작이더냐?”
범강림의 호통에 이무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대인,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라고?”
범강림이 이무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 산산조각이 난 발석거(發石車) 앞에 세웠다.
“그럼 이 발석거는 왜 하나하나 분해해 놨지? 분해해서 성 밖으로 빼돌린 다음 작동 원리를 베끼려는 게 아니냐?”
이무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 분해한 게 아닙니다. 제가 포탄을 시험하다가 망가뜨린 겁니다.”
범강림이 냉소를 지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투석기가 범강림의 시야에 들어왔다. 투석기 같으면서도 투석기 같지 않은 투석기에 시커먼 돌포탄이 끼워져 있었다.
“이거 말이냐? 이 돌포탄이 투석기를 박살 냈다고?”
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범강림에게 걷어차였다.
“누굴 세 살 어린애로 알아? 전장도 한번 안 나가 본 숙맥인 줄 아나! 돌포탄 스스로 어떻게 발석거를 망가뜨려!”
“대인, 이 돌포탄은 여느 돌포탄과 다릅니다.”
이무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투석거 앞에 섰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폭발하는데, 그 힘이 어마어마해서 발석거가 못 버팁니다.”
범강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포탄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을 붙여? 돌포탄에 불이 붙는단 말이냐? 어떻게?”
손이 뒤로 묶인 이무가 어깻짓으로 가리켰다.
“이쪽에요.”
범강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절자를 꺼내 눈 깜짝할 새에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인 다음엔?”
범강림이 이무가 가리킨 도화선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범강림의 동작이 너무 빨라 이무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화절자가 눈에 들어왔을 무렵, 불꽃이 일며 도화선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대인, 안 됩니다!”
이무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궁노원에 울려 퍼졌다.
한편 대리시에서는 여전히 정교랑을 심문 중인 소경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정씨, 죄를 인정하겠느냐!”
소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경당목이 탁자로 떨어짐과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귀가 웅웅 울리고, 땅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대인, 지진입니다!”
충직한 서리가 소경을 끌어안으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다. 후당에 숨어 있던 어사도 머리를 감싸 쥔 채 뛰어나왔다.
곧이어 귓가를 때리던 굉음이 사라지고, 땅도 다시 고요해졌다. 모두가 불안에 떠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런, 정 낭자는?”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인은 여전히 공당 안에 서 있었고, 공당 밖에 시립해 있던 어린 몸종이 언제 들어간 건지 여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안과 밖, 어두운 곳과 밝은 곳, 사람이 적은 곳과 많은 곳. 양쪽의 모습이 확연하게 갈렸다.
“죄를 인정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문밖에 선 소경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 났다! 큰일 났어!
조정 대신들은 궁을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와야 했다. 내시들도 대전 양옆에 서서 수군거렸다.
“궁노원이 갑자기 훼손되다니?”
대전 안에서 격노한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랑캐의 세작이 궁노원까지 접수했단 말이냐? 그렇다면 이젠 짐의 황궁도 자유자재로 드나들겠구나!”
조정 대신 몇 명이 또 황급히 걸어왔다. 내시들이 대전 안을 엿보며 뭐라 수군거리자, 조정 대신 중 하나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며 옷을 털고 발을 탁 굴렀다. 내시들은 얼른 똑바로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모았다. 곧이어 안으로 들어가는 조정 대신들의 관화가 보였다.
“폐하, 범 군감이 왔습니다.”
대전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황제는 그 말에 얼른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늘 대체 왜 이러지?
조회 때는 어사중승이 기어이 정 낭자를 조사해야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진소를 압박해 사직을 청하게 만들어 정신을 쏙 빼놓는 바람에 조회를 마치고도 한참 만에 진정이 됐다. 점심 수라를 들고 나서 잠시 오수를 청할까 했는데 눕자마자 또 일이 터진 것이었다.
지진이라니!
이 엄동설한에 지진이 일어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상자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근정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곧 소식이 왔다.
지진이 아니었구나.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도다. 연말은 무탈하게 넘길 수 있겠어. 대신들이 부덕의 소치라며 떠들어대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되겠구나.
하지만 안도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궁노원에 일이 생기다니. 무려 궁노원에! 거긴 부국강병을 이룰 병기를 만드는 곳인데!
“범 군감!”
범 군감을 본 황제는 흠칫 놀랐다. 본디 시골 출신인 데다 용모도 썩 출중하지는 않은 범 군감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숯가마 속에서 기어 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더냐?”
범강림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급히 달려오느라 의관을 정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언짢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젓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궁노원의 작업장이 훼손되다니?”
방 두 칸이 훼손된 건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지만, 그중 한 고방에 신비궁과 신비궁을 만들 재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방금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신비궁 삼백 개가 못쓰게 됐다고 했다.
황제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려 삼백 개라니!
“범 군감, 궁노원처럼 중요한 곳에 어찌 세작이 잠입한 것이냐!”
“폐하, 세작이 궁노원에 잠입한 게 아니라, 궁노원에서 세작을 잡은 겁니다. 발석거 두 대가 유실되어 어제 조사를 시작했다가, 오늘 아침에 용의자를 잡아 현재 심문 중입니다.”
발석거까지!
황제가 또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속히 조사하라!”
같은 시각, 무장한 병사들이 궁노원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범강림 등 관리 몇 명이 황제를 알현하는 동안, 나머지 관리들은 이번 사달을 일으킨 이무와 발석거를 훔친 장인을 고문하고 있었다.
“저희는 세작이 아닙니다.”
이무와 장인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럼 이건 대체 무슨 기관이냐?”
관리 하나가 호통을 쳤다.
“이건 기관이 아닙니다.”
이무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럼 뭔데!”
관리의 호통에 이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저했다.
이무가 망설이며 뜸을 들이는 모습을 본 병졸이 즉시 손을 들어 칼등으로 이무의 얼굴을 매섭게 후려쳤다. 이무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가뜩이나 피멍이 들었던 얼굴에 또다시 핏자국이 더해졌다.
이무가 울컥 피를 토했다.
“말해!”
관리가 호통을 쳤다.
“네놈은 신비궁 백 개를 망가뜨렸어. 죽는시늉으로 엄살떨 생각은 접어라!”
아파서 혼절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말없이 있었다.
궁노원 관청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 한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관청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황성사의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물어보셨소이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궁노원 관리들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지금 심문 중이오.”
궁노원 관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 제거(提舉: 관직명) 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심문이 힘들면 우리 황성사로 넘기라 하셨소. 괜히 국사를 방해하지 말고.”
황성사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우리 궁노원의 일이오.”
궁노원 관리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궁노원 병졸 하나가 이무 앞에서 몸을 굽히며 물었다.
“이무, 너도 군에 있었던 사람이니 황성사가 어떤 곳인지 잘 알 거다. 저들 손에 들어가면 죽느니만 못한 고초를 겪을 거야.”
병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할 말 있으면 냉큼 해. 어차피 죽을 몸, 고생하지 말고 깔끔하게 가는 게 좋아.”
이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저쪽에 꿇어앉아 있던 장인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인, 대인, 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제가 저자의 돈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발석거 두 대가 필요하다고만 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멀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 세작이 아닙니다. 저자가 세작인 줄도 몰랐고요. 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인. 살려 주십시오.”
장인의 통곡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황성사에서 나온 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이무에게로 다가갔다.
“이무, 할 말이 없느냐?”
그 말에 이무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황성사 관리를 올려다봤다.
“할 말이 있습니다.”
이무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전 세작이 아닙니다. 전 폐하를 알현해야겠습니다.”
황성사의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넌 네가 누군 줄 모르느냐?”
“소인은 폐하께 보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보물? 뭘 바치겠다는 거냐? 그래 봤자 다른 놈의 이름일 테지. 그런 핑계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접어라.”
이무는 웃음을 터트리며 일어나 앉으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폐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이 이무가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허튼소리!”
풍림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풍림이 몸을 돌려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정씨 여인이 남긴 폐단입니다. 다들 저마다 신기한 기술을 들먹이며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나오지 않습니까.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上有所好 下必甚焉 - 맹자).”
진소가 사직을 청하며 두문불출하는 상황이었기에 대전에서는 풍림 한 사람만이 목청을 높이며 떠들고 있었다.
하긴, 이 세상 사람이 모두 정 낭자일 수는 없는 법인데.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만들었다는 소식에 반색하던 황제는 멋쩍은 얼굴로 기쁜 표정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황성사에 명해 조사토록 하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결론을 내렸다.
“폐하, 이무가 그 물건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친히 폐하께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황성사 제거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황당한지고!”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풍림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자가 무슨 기술을 개발했는지 심형원(審刑院), 대리시, 황성사에서 조사하면 밝혀질 일이오. 조사하여 죄가 있으면 벌을 내리고, 공이 있으면 국법에 따라 상을 내릴 텐데, 어찌하여 걸핏하면 폐하를 알현하겠다는 게요!
얼마나 뛰어난 기술인지 조사하기도 전에 함부로 보물이니 뭐니 운운하는 바람에 폐하까지 마음이 흔들려 혜안을 잃으셨습니다. 이는 정씨 여인의 선례 때문에 심지가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정씨는 중노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바치겠다 공언했고,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그러니 무엇보다 백배 강력하다는 말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씨가 신비궁으로 상을 받은 일로, 마음이 흔들린 이가 많은 것도 사실일 테지. 그 말만 믿고 친히 만나 주는 건 경솔한 일이야. 그랬다간 조당이 저잣거리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황제의 위엄이 있는데 그럴 수야 없지.
그러고 보면 정씨가 남긴 폐단이긴 하군.
황제가 막 입을 열려는데, 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소이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조회에 나오는 일이 드물고, 조회에서 입을 여는 일은 더 드문 장순이었다.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던 고능준은 장순을 보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쩐지 긴장이 됐다.
물론 고능준도 딱히 장순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사건건 맞서는 진소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애초에 장순과 고능준은 엮일 일이 없는 사이였다. 학문에 심취한 장순은 도리를 논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지라 고능준에게 영향을 미칠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그 손에 꼽을 정도 중 한 번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만.
저자가 왜 나서는 거지?
정신을 차린 고능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순을 쳐다봤다.
“뭘 증명했단 겁니까?”
풍림이 물었다.
“그자가 바치겠다는 병기의 위력 말이외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소?”
장순의 말투는 담담했다.
“뭐가 증명됐다는 겁니까?”
풍림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순이 옷소매 속에서 손을 내밀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자 말이오.”
모두가 장순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범강림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지목을 받은 범강림은 순간 당황했다.
“저요?”
“그래, 자네 말일세. 자네가 직접 보지 않았는가?”
장순의 물음에 범강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맞습니다. 소관이 봤습니다!”
범강림이 돌연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방 두 칸이 날아갔습니다. 신비궁 백 개로도 못 당할 위력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범강림은 털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폐하, 실로 어마어마한 병기입니다!”
그래. 눈 깜짝할 새에 방 두 칸을 날릴 정도면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건 사실이지.
황제는 몸을 들썩였다. 이번에도 범강림의 말이 황제를 흥분시켰다.
“이무를 들라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내시는 풍림이 나설 기회를 주지 않고 얼른 목청 높여 대답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장강주!
풍림이 고개를 돌려 장순을 바라봤다. 하지만 장순은 풍림을 바라보지 않고, 두 손으로 홀판(笏板: 대신들이 조회 때 드는 막대)을 든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한 번도 입을 연 적 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기밀 유출을 방지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궁노원 군기사의 작업장은 커다란 연못인 곡강지(曲江池) 근처에 위치했다. 황실의 공원이자 군사 무기를 만드는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일반 백성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경성 안에 있다 보니 궁노원에서 흘러나온 굉음에 경성 사람들은 다들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금군 복장을 한 병사 십여 명이 거리를 질주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붐비던 거리는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뭔가 큰일이 났구먼!
경성은 그 어느 곳보다 소식이 빨리 퍼졌다. 나는 듯이 뛰어가는 금군과 함께 궁노원에서 일이 생겼다는 소식도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하인 하나가 큰 저택으로 구르다시피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소리를 듣고 안에서 사내 몇 명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대문 쪽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칼을 든 금군이 우르르 들어왔다.
사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전부 포위해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관이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무슨 일입니까?”
새파랗게 질린 이 대노야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네가 이신이냐?”
무관의 물음에 이 대노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인은 폭죽 공방을 운영하며 성실히 납세하였습니다. 결코······.”
이 대노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관이 말을 잘랐다.
“이무가 네 아들이냐?”
이무였구나!
<교랑의경> 1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