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판관-
한원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대인께서 거절하실 듯싶습니다.”
한원조가 고개를 돌리고 홀로 앉은 수척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오늘 밤은 사람이 많은 탓에, 한원조 부자와 수척한 사내는 한 탁자에 합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말수가 적은 편이라, 간단한 인사 몇 마디를 나눈 것 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한원조 부자는 그 사내가 서둘러 상경 중인 관리일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어디에서 왔는지, 뭘 하러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원조 부자는 사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추측을 늘어놓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
높은 관리에게는 아부를 떨고, 하찮은 이는 냉대하는 작은 역참에서조차 방을 얻지 못하는 걸 보면, 고위직 관료는 아닐 테고.
언행과 태도를 보아하니 몹시 강직하고 자중하는 사람이야. 원조의 말대로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겠군.
한 대인은 대청 안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수척한 사내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도 어제 내리던 눈은 거의 그쳤고, 밤사이에 내린 눈도 두껍게 쌓이지는 않았다. 갈 길을 재촉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새로 바꾼 말을 보고 있자니, 정 이노야는 감격스러운 한편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저, 저, 소 대인. 어찌 감히 제가 역마를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중요한 나랏일을 위해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정 이노야가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정 이노야의 팔을 잡았다.
“정 대인께서는 요직에 부임하고자 경성으로 가시는 게 아닙니까. 그게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명을 받들어 경성으로 가는 건데, 중요한 나랏일이고말고요.”
정 이노야가 웃음을 터트리며 소 공사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럼, 대인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이다.”
정씨 일가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길을 떠나자, 소 공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소 공사 옆에 서 있던 호위가 침을 탁 뱉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퉤! 분수도 모르는 놈. 대인께서 체면 좀 세워 줬다고 감히 어딜 기어올라! 아무나 대인의 어깨를 칠 수 있는 줄 알아?”
소 공사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 고 대인께서 잘 보살펴 주라 하셨잖느냐. 하필 여기서 마주쳤는데, 고 대인의 당부를 무시할 순 없지.”
“고 대인도 참. 어떻게 저런 놈을 보살펴 주시려는 건지. 대인께서도 저놈을 너무 치켜세우신 것 같습니다.”
호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치켜세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치켜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뜨리겠느냐? 어제 대청 안에서 저놈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닐 게다.”
소 공사가 냉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호위가 아, 하며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대인께서 일부러 백성들을 내쫓으신 거로군요. 소인은 내심 대인을 걱정했습니다. 몇몇은 꽤 까다로워 보였거든요. 관직에 있는 몸 같아 보이기도 했고요.”
“이 몸이 욕지거리 몇 마디 듣는 게 대수겠느냐? 본관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소 공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뒤 몸을 돌렸다.
“자, 우리도 어서 길을 재촉해야겠다. 정 대인에게 역마를 내주었으니, 우리는 말을 바꿔서는 안 되겠다. 중요한 나랏일을 하시는 분께서 지체되면 큰일이야.”
호위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정 이노야 일행이 떠날 때는 정 이노야 일행을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역참 앞에 잔뜩 모여 있었다. 놀라워하거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경외감 어린 눈으로 정 이노야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 있는 신선을 낳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해 역참 앞이 왁자지껄했다.
한원조 부자는 역참 앞이 한산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겨우 말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때마침 어제 합석했던 수척한 사내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야윈 말 세 필과 사환 두 명, 그리고 행낭 하나를 가진 단출한 차림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역참 앞에 선 수척한 사내가 멀어져가는 정 이노야 일행을 내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정 대인이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도 모자라,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운 정 대인일세. 참으로 대단한 정 낭자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원조 부자였지만, 관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들 부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또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될까.
선황제 때에는 술에 취한 재상(宰相)이 천자의 호위에게 칼을 내려놓고 술을 따르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선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결국 어사대의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지방 관리로 좌천되었다.
지금의 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설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했던 관리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민가를 강제 철거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잃기도 했다.
또 어느 무장은 역마로 집안 식량을 운반했다는 죄목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휘말리게 된다면 꽤 골치 아픈 일들을 겪을 터였다. 심지어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사람이라면 그 말로는 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리라.
물론,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죽는 건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저런 짓을 저지르는 관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그런 일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 행동했고, 관리들 역시 대충 눈감아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굳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고, 때로는 바로 그 예외가 가장 무서웠다.
한원조 부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관리는 대충 눈감아주는 부류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일까?
역승이 두꺼운 두봉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풍 대인, 풍 대인! 바람이 거셉니다. 이걸 걸치시지요.”
“내 것이 아닌 것은 받을 수 없네.”
풍림은 역승이 건넨 두봉을 거절하고 유유히 역참을 떠났다.
“아이고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저 귀판관(鬼判官) 나리가 드디어 떠나셨네.”
“대인, 이번에는 다행히도 불이 나지 않았습니다.”
“닥치거라. 한 번 불탄 것으로 부족하더냐.”
역승과 역졸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역참 안으로 돌아갔다.
풍림!
한원조 부자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풍림 대인이셨군요.”
한원조가 멀어져가는 수척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2년 전, 삼사 판관 풍림이 어명을 받고 태창로를 조사하러 가던 길에, 누군가가 그가 묵은 역참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화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풍림은 자신의 관을 짜서 태창로로 향했고, 그는 장장 1년 반이나 태창로에 머물며 전운사의 곡식과 자금의 흐름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풍림은 족히 백 명에 가까운 관리들이 전운사 횡령에 가담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의 죄를 물었다. 죄인이 된 관리 중에는 감옥에 갇힌 자도 있고, 아예 자결을 택한 자도 있었다. 풍림이 태창로에 머문 기간 동안, 태창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들과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풍림은 귀판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저분께서도 경성으로 부임하시나 보군.”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다면, 정 대인의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풍림은 정 대인의 모든 만행을 현장에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밤새 대청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댄 이야기도 모두 귀담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풍림은 분명 화가 단단히 났을 터. 그러지 않고서야 좀 전과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풍 대인께서 경성에 들어가자마자 하실 일이 생겼네요.”
한원조가 말 위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웠다…….”
한원조가 숙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병기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형제의 억울함을 푼 후에야 신비궁을 바치다니. 그걸 어떻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관리가 자신의 안위와 이득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관리로서 자질이 부족하지(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 논어).”
튼실한 역마로 바꾸고 경성을 향해 힘차게 박차를 가하던 정 이노야는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 이노야가 저지른 만행은 아직 머나먼 경성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큰길 위에 깔린 눈은 완전히 그치기도 전에 말굽에 밟혀 녹아 버렸다.
사환들이 옥대교 저택의 대문 앞에 얇게 쌓인 눈을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 두었다.
정교랑이 글씨를 쓰는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귀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람들은 낮은 탁자와 깔개로 자리를 마련했고,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은 대충 나뭇가지를 꺾어 와 맨바닥에 앉았다. 글씨를 쓰는 무리 속에는 매일같이 보이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글씨를 쓰는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인파의 바깥쪽에 자리 잡은 진십삼은 정교랑의 손짓을 보면서 허공에 대고 글씨를 따라 그렸다.
“날씨가 부쩍 추워져 먹이 다 녹지도 않아요. 천막을 치거나 좀 더 넓은 대청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글씨를 연습하는 시간이 끝나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진십삼이 말했다. 그가 반근이 건네준 손난로를 쥐고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글씨 쓰는 걸 가르칠 생각 없어요.”
그저 쓰기 위해 쓴다는 건가?
“아니, 나는 낭자가 추울까 봐서요.”
진십삼이 서둘러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힐끔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껍게 입기도 했고, 활쏘기를 끝내자마자 글씨 연습을 하는 거라서요.”
정교랑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안 추워요.”
정교랑의 손은 가느다랗고 새하얬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온통 굳은살과 활시위 자국으로 가득한 손이었다.
진십삼은 이토록 거친 여인의 손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나 누이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 손만 보았던 진십삼이기에 무릇 여인의 손이라면 섬섬옥수인 데다 색을 칠한 손톱에 반지나 가락지를 낀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손톱에 색도 칠하지 않은, 심지어 거칠기까지 한 여인의 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진십삼은 지금 처음 알게 되었다.
“맞다, 이것 좀 봐요. 주육낭이 내게 선물한 단도예요.”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내어 정교랑에게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에게서 단도를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 벼루를 싫어해요.”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반근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단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뭘 좋아하는데요?”
“낭자가 만든 간식이든 차든, 뭐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난 벼루는 싫어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도를 진십삼에게 돌려주었다.
“알겠어요. 다음에는 간식과 차를 선물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십삼이 잠시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교랑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간식 접시를 진십삼에게 밀어 주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가만히 앉아 있던 진십삼이 손으로 간식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었던 탓에, 진십삼은 금세 차와 간식 한 접시를 싹 비웠다.
“이건 낭자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선물한 거죠.”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에요.”
진십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원하는 게 뭔지 알려 줘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한쪽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은 놀라서 진십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진 공자님이 화를 내는 건가? 아니면, 응석을 부리는 건가?
반근은 ‘응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반근이 서둘러 진십삼의 찻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우리 집에서 여는 연회에 낭자를 초대하면, 올 겁니까?”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진십삼이 또 잠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온다고 할 줄 알았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진 않겠죠. 그럼, 내가 급제하면 낭자를 초대할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그때도 간식과 차를 선물해야 하나요?”
진십삼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 주육낭에게 답신을 쓰던 진십삼은 갑자기 오늘 정교랑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지만, 그는 계속해서 붓을 움직였다.
“난 분명 혼자서 며칠 동안이나 꿍해 있었는데, 그 여인의 무구한 표정과 말을 마주하니 헛웃음이 나오더라고. 정말 그 여인에게는 속수무책이야. 아,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 아마 이렇게 놀릴 테지. 난 당연히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심지어 나는 그 여인 때문에 분통 터져 죽을 뻔했던 사람이라고.
그래도 최소한 그 여인이 나를 달래 주긴 했잖아? 달래 준다? 음, 어감이 좀 이상한데.”
진십삼이 잠시 붓을 멈추고 좀 전의 상황을 되새겼다.
맞아, 정말로 나를 달래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 여인에게 빨리 혼담을 넣고 싶었던 저번처럼 말이야. 그 여인이 우리에게 간식 상자를 하나씩 쥐여 주고 달랬던 것처럼. 나도 알아. 자네는 지금쯤 또 웃고 있을 거야. 웃긴 뭘 웃어?”
“십삼, 뭐가 그렇게 웃기니?”
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십삼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진 부인은 회랑 아래에 서서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진십삼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주육낭에게 답신을 쓰고 있었습니다.”
진십삼이 말했다.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보 같은 주육낭에게 서신을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니? 주육낭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겠구나.”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저 웃기지 마세요. 저 지금 무척 바쁘단 말입니다. 답신을 다 쓴 후에는 책도 읽어야 해요.”
진십삼이 점잖은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
“웃기려는 게 아니라, 근 며칠간 네가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다고 들었다.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슬퍼 탄식하는 것도 모자라 어쩔 땐 혼자서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지? 네가 걱정돼서 한 번 와 본 게야. 난 또, 네가 궁에 있는 최 악공과 같은 병을 앓나 했지.”
진십삼은 진 부인이 하나씩 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최 악공이요? 안 그래도 이번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초대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갑자기 병이 나다니요? 무슨 병인데요?”
“상사병이래.”
진 부인이 대답했다.
상사병?
멈칫하던 진십삼이 곧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머니, 제가 상사병이라뇨. 그렇게 돌려서 아들을 욕하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마당에 진 부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황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상사병? 이 무슨 망측한 일이란 말이냐! 저 풍기 문란한 자를 당장 궁 밖으로 내쫓거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아니, 아니, 마마, 그게 아닙니다. 최 악공은 사람이 아니라 칠현금 소리에 홀렸답니다.”
내시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고얀 것들,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어?”
태후가 내시들을 나무라자, 내시들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게냐?”
태후가 물었다.
“말하자면 진안 군왕과도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아, 하면서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안이 뭐 어쨌다고?”
황제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태후궁 안에 있던 비빈들이 다소곳하게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가 두봉을 풀고 한쪽에 앉았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후의 아래쪽 맨 앞에 앉아 있던 귀비를 힐끔 보고는 다시 물었다.
“진안이, 뭐라고?”
귀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황제의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손난로를 두 손으로 세게 쥐었다.
태후 앞으로 불려온 최 악공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흐리멍덩했다. 아무리 악공들이 외모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고 해도, 궁에 들어올 정도의 영인(伶人: 궁중 악공, 광대)이라면 용모도 남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 악공의 볼품없는 모습을 본 황제와 태후, 비빈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와 마마를 뵈옵나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최 악공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악공이란 사람이, 어찌 칠현금 소리에 매혹됐다는 말이냐?”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자가 악공이기에 매혹될 수 있는 게지요. 소리에 정통한 덕에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남들이 그저 뛰어난 연주라고 생각할 때 악공은 그 연주가 왜 뛰어난지, 어떻게 뛰어난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안에 갇히기도 쉽고요.”
황제의 말을 들은 최 악공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가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그 낭자가 그리도 칠현금을 잘 타더냐?”
태후가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물었다.
“특별히 위낭을 위해 연주했다지?”
“네, 맞습니다, 마마. 전하께 칠현금 소리로 액막이를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행여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가 저택 안에 오래 맴돌지 못할까 봐, 아예 영인들의 무대를 취소하셨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액막이?
“도가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액막이도 했으니, 이젠 풍수를 봐 주려나?”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들었을 때도 연주가 좋더냐?”
황제가 태후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내시에게 물었다.
“소인은 음률에 문외한이오나, 몹시 흥겹긴 했습니다.”
내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흥겹다고? 비파 연주도 아닌데, 칠현금을 어떻게 흥겹게 연주한다는 게야?”
태후가 물었다.
“연주가 흥겨운 것이 아니오라, 당시 분위기가 몹시 흥겨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소인들이 대화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영인들이 웃으며 떠들고, 경왕께서도 이따금 소리를 지르시는 통에 무척이나 떠들썩했습니다.”
그럼 아무도 칠현금 연주를 듣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감상은커녕 다들 제 할 말만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어찌 칠현금 연주가 뛰어나다고 하는 거지? 그 많은 사람이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지 못했는데, 왜 최 악공 한 사람만 그 소리에 매혹되었을까?
혹 칠현금 연주에 매료된 게 아니라, 정 낭자에게 홀린 거 아니야? 하긴, 정 낭자가 엄청난 미인이긴 하지.
비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소매로 입을 가리고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태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최 악공처럼 연로한 사내도 홀렸는데, 아직 여색을 모르는 순진한 진안 군왕은 오죽할까.
황제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이 빚었다던 무원산 술처럼 정교랑의 연주 역시 듣는 이를 취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소리일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최 악공, 정말로 병이 난 것이냐? 병이 났으면 태의에게 치료를 받거라. 병이 났으면 난 게지, 괜히 황궁에 유언비어 퍼트릴 것 없다.”
태후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최 악공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 소인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옵니다. 정 낭자의 연주는, 확실히 신묘했습니다.”
“신묘? 백거이가 향산에 머물렀을 때는 저잣거리의 노파조차 그의 시를 찬양했건만,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는 오직 네 마음만을 사로잡았는데 어찌 신묘하다고 한단 말이냐?”
태후의 말에 최 악공이 고개를 들었다. 공허했던 그의 두 눈에서 갑자기 형형하게 빛났다.
“마마, 정 낭자의 연주는 소인이 운지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문외한은 구경만 하고, 전문가는 기술을 본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연주를 들을 때, 최 악공은 당연히 칠현금의 운지법과 기교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 악공이 운지법이나 기교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연주에 매료된 것이라면, 연주자의 실력이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리라.
태후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매혹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 최 악공만 매혹되었냔 말이다. 혹시 우리 위낭도 매혹된 건…….
그때 최 악공이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연주한 건 ‘추풍조(秋風調: 가을 정취를 담은 구슬픈 곡조)’였습니다.”
추풍조가 희귀한 곡조도 아니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태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 마마, 정 낭자의 추풍조는 경왕마저 오한을 느끼며 춥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정 낭자의 연주로 경왕까지 추위를 느꼈단 말이야?
경왕이 춥다고 할 정도라면!
태후가 흠칫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악공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후를 보며, 비빈들 역시 화들짝 놀랐다. 황제 또한 눈을 크게 뜨고 최 악공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왜들 저러시는 거야?”
영문을 모르는 비빈이 옆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경왕은 바보잖아. 배가 고픈지, 배가 부른지, 추운지 더운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
비빈들이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비의 모습이 보였다.
“바보가 듣기에도 춥다고 느낄 정도면, 그 연주 실력이 얼마나 신기에 가깝겠는가. 바보가 들어도 감정을 느낄 정도라면,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연주겠어.”
귀비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바보가 감정을 느낄 정도라니! 감정은, 마음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건데.
바보에게 그런 연주를 몇 번 더 들려주면, 결국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귀비가 손난로를 부술 기세로 손을 꽉 쥐었다. 그녀의 귓가에 태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서 위낭에게 입궁하라고 전하거라! 정 낭자도 들라 하고!”
누가 들어도 다소 황당한 일인지라 황제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했다. 황제는 정 낭자는 됐으니 우선 진안 군왕부터 궁으로 들이라고 명했다.
영문도 모른 채 황급히 입궁한 진안 군왕은 태후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 그건 경왕의 병을 치료하려던 게 아니라, 액막이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찌 경왕이 추위를 느끼느냐? 스산하고 구슬픈 추풍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우리 육가아도 춥다고 느꼈다면? 육가아의 병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게 아니더냐?”
태후가 추궁하듯이 물으면서 눈물을 떨궜다. 진안 군왕은 무릎을 꿇은 채로 태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아닙니다.”
“왜 아니라는 것이냐. 이 녀석아, 언제까지 애가를 속이려는 게야?”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마마, 육가아의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정 낭자가 육가아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도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뒤에 앉아 있던 귀비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연기해 봐라. 네놈이 뭐라고 할지 정말로 궁금하구나.
“그럼 왜 육가아가 춥다고 한 거지?”
태후가 물었다. 진안 군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정 낭자 말로는, 그 곡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여 악운과 속된 것들을 몰아내고,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집에 있는 악귀를 몰아낸다?
사람에게 들려주는 연주가 아니었으니, 현장에 있던 내시와 영인들은 대화를 멈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연주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저 귓가를 스칠 뿐, 마음속까지 닿지는 못했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모두가 아무런 감흥이 없을 때 경왕 혼자서만 춥다고 했다는 것은, 경왕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경왕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최 악공은? 설마 최 악공도 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하급 관리가 이해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한창 떠들고 있던 다른 하급 관리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나 참, 그래도 이해가 안 되오? 최 악공도 당연히 보통사람은 아닌 거지. 그 사람은 칠현금에 통달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악공이니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 그 자리에 악공이 그렇게나 많았다던데, 왜 최 악공 한 사람만 그렇게 됐지?”
“최 악공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소.”
하급 관리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조정 대신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대신들이 발을 세게 구르며 호통쳤다.
“체통들을 지키시게!”
고개를 돌리던 하급 관리들이 조정 대신들을 알아보고는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자리를 피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무원산을 떠들고, 온 조정의 관리들이 신비궁을 말하며, 저잣거리에는 온통 비석에 새겨진 행서 이야기뿐이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잊히기도 전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더해졌구려.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다니.”
조정 대신 중 하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또 무슨 기예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궁금하군.”
다른 관리가 맞장구를 쳤다.
경성에 있는 종친들이 하루가 멀다고 연회를 열다 보니, 군왕이 한 사람만을 위한 연회를 연 것은 딱히 특별한 일 축에도 끼지 못했다. 연회에 초대한 사람이 조정 대신만 아니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다만 군왕이 초대한 이는 경성에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정 낭자였다. 물론 그 역시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쨌거나 경왕의 상태가 그러했으니까. 정 낭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거듭 말했다지만, 신의가 자주 찾아온다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 낭자는 병을 치료한 것도 아니고, 글씨를 쓴 것도 아니고, 칠현금을 연주했다고 했다. 심지어 칠현금 연주로 악공 하나의 혼을 쏙 빼놓았고, 바보인 경왕까지 놀라게 했다고.
특히 사람을 위해 연주한 게 아니라는 진안 군왕의 말로 인해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진안 군왕이 그 말 뒤로 내놓은 해명은 이러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기에 칠현금 소리를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경왕은 마음이 없기에 칠현금 소리에 반응한 것이라고.
그 말인즉슨, 칠현금 소리로는 경왕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뿐더러, 경왕은 마음이 없기에 병이 나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덧붙여진 해명보다는 앞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경왕의 병이 나을지 낫지 않을지는 세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뭇 사람들은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에 더 열광했다.
관청에 있는 관리들이 하는 이야기는 그나마 사실에 가까웠지만, 입에서 입을 거쳐 저잣거리의 찻집까지 흘러간 이야기에는 과장이 많이 섞여 있었다.
“사람이 들으라는 연주가 아니라, 귀신들한테 들려주는 연주였다는군.”
“보통사람은 귀신을 볼 수 없다지만, 개나 당나귀 같은 동물은 귀신을 볼 수 있다잖아.”
“자네 말은 지금 경왕이 개라는 건가?”
“자네 죽고 싶은 게야? 어찌 그런 헛소리를!”
“모르면 좀 가만히 있게나. 마음이 없어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경왕께선 아직 영혼이 모이지 않은 갓난아기 같다는 뜻이야. 갓난아기는 잡념도 없고 세상을 보는 눈도 무척 깨끗하잖아. 그러니 보통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도 느낄 수 있지.”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네. 그런데 칠현금 소리에 홀린 최 악공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최 악공은 바보가 아니라, 신기가 있는 사람이지.”
“왜 최 악공은 개나 당나귀라고 하지 않고?”
“그런 짐승들이 칠현금 소리에 매혹될 리가 없잖아. 최 악공은 칠현금 연주가 신의 경지에 다다랐기에 그런 신기 있는 연주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거지.”
“그러게. 그 자리에 그렇게 많은 악공 영인이 있었는데도, 딱 최 악공 한 명만 넋이 나갔다잖아. 최 악공도 신선의 계시를 받았던 거네.”
“맞아, 맞아. 내가 듣기로는, 최 악공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칠현금 기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대.”
“역시 최 악공은 천하제일의 악공이야.”
“에이, 지금도 최 악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아, 정 낭자는 제외해야지. 그분은 신선의 제자니까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논할 수밖에.”
대화를 듣던 장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보아하니, 정 낭자가 또 한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었구나.”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최 악공의 연주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는 있지만, 특출 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요. 다들 최 악공은 스승의 후광 덕에 영인이 된 거라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심지어 어떤 이는 최 악공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바로 그가 가진 칠현금이라고 했다더군요.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어 큰 깨우침을 얻고 천하제일의 악공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으니, 신선이 도와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쇠를 두드리려면, 우선 쇠가 단단해야 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최 악공이 본디 칠현금에 통달하지 않았더라면,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겠지. 아무리 신선이 최 악공을 깨우쳐 주고 싶다 해도, 최 악공에게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면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장 노태야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감탄했다.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말편자를 만들어 낸 서사근이 생각납니다. 매일 마구간을 드나들며 쇠붙이 말굽을 관찰하고 개량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말편자도 없었겠지요. 신비궁을 얻은 범강림 또한 직접 나설 배짱이 없었다면, 신비궁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거고요.”
“맞네, 맞아. 또 그 왼손잡이 숙수 이대작도 마찬가지지. 오른손을 잃었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비웃음이나 자괴감도 이겨내지 않았나.”
장 노태야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어사대의 탄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건을 조사한 노사안도 있고, 비문을 보고 글씨의 도를 깨우친 서생들도 있죠.”
이어서 말하던 노복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아차, 하마터면 장반근을 놓칠 뻔했습니다. 타고난 손재주로 요리에만 집중해서 득도했으니까요.”
장 노태야가 노복의 말을 듣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나 많단 말이더냐? 너무 많아서 이젠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어졌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병풍에 써 놓아야겠다. 이러다 병풍을 가득 채우는 건 아닐지 모르겠구나.”
장 노태야가 몸을 일으키자, 노복이 웃으면서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노야께서는 그런 잔재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잖습니까.”
노복이 조용히 말했다.
“탐탁지 않아도 어찌하겠느냐? 정 낭자는 여인의 몸이니, 과거를 치를 수 없는 것을. 정 낭자는 그런 잔재주로 돈을 모으려는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빌미로 좋은 혼처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을 해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지낼 뿐이지. 누구 앞길을 막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점이 걱정이죠. 정 낭자에겐 그럴 의도가 없지만,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시샘을 받아 화를 입을까 봐서요.”
노복이 말했다.
대청을 지나가던 두 사람의 귀에 수많은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얽혀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노복의 말을 들은 장 노태야가 걸음을 멈추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노복을 향해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낭자가 그걸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지, 낭자가 방어하고 반격할 줄 모른다고 하지는 않았다.”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장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자각한 장 노태야는 머쓱한 듯 껄껄 웃으며 찻집을 떠났다. 노복이 서둘러 장 노태야의 뒤를 따라가자, 찻집 안은 금세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날 있다던 선약이 경왕부 연회에 가는 거였군요.”
진십삼이 반근이 건넨 찻잔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정말로 미룰 수 없는 약속이었네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룰 수 없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초대에 응했기 때문에 미룰 수 없는 거였죠.”
정교랑이 말했다. 미소를 짓던 진십삼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정교랑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 말은 진짜로 낭자가 한 말입니까?”
“어떤 말이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진안 군왕 말로는, 그 연주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아니라고 낭자가 말했다던데.”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한 말이 맞아요.”
“그 말은 좀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뭐가 적절치 않다는 거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낭자가 진안 군왕에게 말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 될 게 없죠.”
진십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멋대로 남들에게 낭자의 말을 전하는 건 적절치 않아요. 이번 일은 낭자를 신의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라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잖아요. 자고로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인데, 낭자의 명망이 높아진 지금 그런 얘기가 돌면 사람들은 더욱 그 이야기를 부풀릴 테고, 그렇게 되면…….”
진십삼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낭자가 일부러 교활한 술수를 부린 듯 이야기가 왜곡되는 건 좋지 않아요.”
진십삼이 말을 덧붙였다.
“말한 사람은 아무런 의도가 없지만, 듣는 사람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안 군왕이 말할 때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군왕이 저지른 경솔한 행동이 차후에 낭자에게 어떤 어려움으로 돌아올지, 낭자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걱정도 안 된답니까?”
진십삼이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말한 사람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했잖아요. 듣는 사람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군왕을 감싸 주는 겁니까?”
정교랑이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감싸 준다고 할 수 있죠?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뿐인데.”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신경 쓰지 않는 일을, 내가 신경 쓸 수 있겠어요?”
진십삼은 정교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신경을 쓰든 말든 그건 내 일이니까, 낭자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려는 거죠?”
반근은 정교랑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십삼마저 말장난하듯이 신경을 쓰네, 마네, 개의치 않네, 어쩌네 하는 것을 보니, 반근은 더욱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며 웃었다.
“내가 초청에 응하지 않고,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이 그렇게 신경 쓰였나 봐요?”
이젠 아씨까지 합세했네.
더 듣고 있다가는 어지럼증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반근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차를 우렸다.
“내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말 돌리지 마요. 정교랑,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면 안 돼요?”
“난, 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는단 거예요. 진호,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남이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남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걱정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최소한 내가 말할 때는, 내가 하는 말에 다른 뜻을 얹으려 하지 않는 것이고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잠시 정교랑을 쳐다보던 진십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진십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난 당신의 초대를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아무 선물이나 준 것도 아니에요. 나에게는 선약이 있었고, 선물도 주고 싶던 것으로 준 거지, 겉치레로 준 게 아니니까요.”
정교랑이 진십삼의 앞으로 간식 접시를 더 밀어 주면서 말했다. 진십삼은 눈을 크게 뜨고 간식 접시와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이요?”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냥 장난삼아 이야기한 건데, 낭자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줄 몰랐네요.”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간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난 개의치 않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런데 정말로…….”
잠시 뜸을 들이던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말할 때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재능 있는 사람은 도리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정교랑이 가볍게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차 한 잔과 간식 세 개를 얻어먹은 진십삼이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연말에는 낭자를 귀찮게 하러 오지 않겠습니다. 과거 시험이 코앞이라, 이제는 스승님 댁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해야 하거든요.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 날 찾아 줘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십삼을 배웅했다. 정교랑은 문밖까지 나와 진십삼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생 댁에서 공부하겠다고? 예전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마음이 영 불안해서요. 장원급제하겠다고 동네방네 큰소리를 쳤는데, 만에 하나 낙방이라도 한다면 어머니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스승님 댁에서 공부만 하려고요.”
진십삼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얼씨구, 우리 십삼이 이젠 긴장도 할 줄 아네?”
진 부인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머니, 긴장하는 게 아니라 늠름해진 거죠.”
진십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학문의 길에는 끝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서는 아니 되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을 존경하고, 도리를 중시해야 하느니라. 사람은 똑똑하되 경망스러워서는 안 된다. 네가 세상에 발을 내딛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십삼이 예를 올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소자는 내일 나갈 채비를 마치고, 스승님 댁에서 섣달 23일까지 공부하며 지내겠습니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문을 나서는 진십삼을 바라보던 진 부인이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는 방에 갇혀야 할 만큼, 네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 거니?”
진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진십삼은 몸을 흠칫할 뿐, 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젠 장난도 안 통하다니. 이번에는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연주가 경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태후는 기어이 정교랑을 태후궁으로 불러들였다.
“연주, 하고 싶어요?”
황궁 문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물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불렀다는 건, 분명 정 낭자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일 테지.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떻게 연주를 하나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우리 하지 말죠.”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마른기침했다. 사담을 나누지 말라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는 듯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입 모양으로 말한 뒤, 진안 군왕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큰 소리로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도착을 알리자, 이미 태후궁에 도착해 있던 비빈들은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들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귀비였다.
지난번에 태후궁 앞에서 정 낭자를 봤을 때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고, 내가 정 낭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도 했지. 뒤늦게 태후궁으로 가서 정 낭자를 보려고 했을 땐, 진안 군왕이 이미 정 낭자를 데려간 후였고.
문이 열리자, 미소를 머금은 진안 군왕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정교랑이 보였다.
다들 아직 정교랑의 용모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일자로 뻗은 어깨와 걸음을 옮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움직임이 없는 치맛자락, 별다른 장신구 없이 우아하게 올려묶은 머리카락만 보아도 종친인 진안 군왕과 잘 어울릴 만한 벗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기개와 분위기는 보잘것없는 벼슬아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규수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지어 저 여인은 십수 년을 바보로 살았다지? 그래서 사람들이 저 여인을 신선의 제자라 여기는구나.
“소손,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진안 군왕이 태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뒤에 있던 정교랑에게 향했다. 진안 군왕과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정교랑은 정중하게 소매를 들고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이리 오너라.”
태후가 미소를 머금고 진안 군왕에게 손짓했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켜 태후 옆에 앉았다.
“소녀,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일어나거라.”
태후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는 비빈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씨,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정리하고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황공함이나 부끄러움 따위를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事無不可對人言), 남에게 구경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나아갈 때는 정도를 지키고, 물러나야 할 때는 깔끔하게 물러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 정씨 가문의 자손이니라.
양쪽에 앉아 있던 비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교랑을 보고 놀란 이도 있고,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도 있었다.
“정 낭자는 칠현금도 탈 줄 안다지?”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단 한 곡을 알 뿐이에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딱 한 곡밖에 모른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최 악공을 매료시킨 그 추풍조 말인가요?”
비빈 중 한 명이 묻자, 정교랑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최 악공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최 악공을 불러오게 했다.
“최 악공이 영영 넋이 나간 채로 지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정신을 차렸더구나. 또 어떤 곡을 아느냐?”
태후가 웃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전 그 곡 하나밖에 할 줄 몰라요.”
다른 비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그 한 곡밖에 못 한다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을 하려던 찰나, 최 악공이 뛰다시피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최 악공은 태후에게 허둥지둥 예를 올린 뒤, 감격한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최 악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본 비빈들이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이는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불안해진다더니(近鄕情怯),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태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경외감이 드는 걸 수도 있죠.”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군왕은 사람의 마음을 잘 꿰뚫네요.”
귀비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 더 잘 알았을 텐데, 아쉽게도 제가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요. 제가 평왕의 총명함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진안 군왕이 귀비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귀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정 낭자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토록 사람을 매료시킨다는 연주를 안 들어 볼 수가 없지.”
태후가 말했다.
“최 악공, 어서 칠현금을 정 낭자에게 내주게.”
비빈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최 악공을 재촉했다.
“마마, 공주들은 잠시 자리를 비키게 할까요?”
어린 공주를 품에 안고 있던 비빈이 물었다. 다른 공주와 함께 앉아 있던 또 다른 비빈이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태후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연주를 귀담아들었던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어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신선의 깨우침 덕에 칠현금 실력이 신선의 경지에 이른 최 악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이 아닌데도 춥다고 소리친 경왕이었다.
황실 공주들의 칠현금 솜씨는 훌륭해도 그만 훌륭하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정교랑의 연주에 매혹되어 신선의 가르침을 얻는다면 그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비빈들은 자기 소생의 공주가 최 악공처럼 신선의 가르침을 깨우쳤으면 하는 마음에 정교랑의 연주를 기대하는 한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아닌 연주에 반응한 경왕의 꼴이 날까 봐 두려워했다.
“자리를 피할 게 뭐 있지? 칠현금 연주 하나 못 듣는 이가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비빈들의 생각을 알아챈 태후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태후에게 질문했던 비빈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최 악공은 공손한 태도로 정교랑에게 칠현금을 건넸지만, 정교랑은 칠현금을 받지 않았다.
“정 낭자?”
최 악공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불렀다. 순간 정교랑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이 최 악공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며칠 전에 정교랑이 생각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눈앞에서 정교랑의 나이를 가늠하게 되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린 낭자가 어떻게 그리 구슬픈 추풍조를 연주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 낭자?”
칠현금을 받지 않는 정교랑의 모습에 태후가 정교랑을 불렀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지? 혹시 놀랐나? 하긴, 여기는 황궁이니까.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정말 연주할 줄 모르는 거야, 아니면 연주하지 않겠다는 거야?
“뭐라고 하였느냐?”
태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정교랑이 다시 대답했다. 태후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숱하게 봤어도, 저렇게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귀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할 줄 모른다면 정말로 할 줄 모르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정 낭자에 대해서 참 많이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둔해서 그런지, 도무지 정 낭자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요. 그럼 그날 경왕부에서 칠현금을 연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인가요?”
귀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낭자,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애가는 낭자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구나.”
“마마께 아뢰옵니다. 좀 전에 마마께서 소녀에게 물으셨지요, 또 무슨 곡을 할 줄 아느냐고요. 소녀는 딱 한 곡밖에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딱 한 곡만 연주할 줄 알죠?”
최 악공이 들어오기 직전 질문했던 비빈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이 한 곡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왜 딱 한 곡만 가르쳤대? 참 이상하지. 이래서 바보였던 저 낭자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건가?
태후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자신의 귀밑머리를 만졌다.
“그럼 그 곡이라도 연주해 보아라.”
“마마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또 왜?”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여기는 새로운 거처가 아니기에 액막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지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비궁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희가 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태후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셨는데!”
귀비가 탁자를 손으로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꽂은 장신구가 격하게 흔들렸다. 궁녀와 내시들이 귀비의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그럼 도대체 정 낭자는 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하기 싫다는 거예요?”
궁녀가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게냐? 내가 보기에는 그냥 바보인 척하는 게야.”
귀비가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 크게 웃었다.
“신선의 제자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는 것을 등에 업고, 또…….”
신이 나서 말하던 귀비가 돌연 웃음기를 거두고 냉소를 지었다.
“이제는 진안 군왕까지 등에 업었지. 내가 보기에, 정 낭자의 연주에 홀린 사람은 비단 최 악공뿐만이 아니야.”
같은 시각, 태후궁.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황제까지 불러와 화를 냈다.
“그 계집이 만백성을 현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애가까지 바보로 아는 거요? 뭐라? 새로운 거처가 아니라 연주할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이오! 말을 지어내 거절할 거면 그럴싸한 말로 성의라도 보일 것이지!”
“마마.”
진안 군왕이 입을 열려고 하자, 태후가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쳤다.
“그 입 다물어라!”
태후의 삿대질에도 진안 군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정 낭자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닙니다. 정 낭자의 말대로 스승께 배운 곡이 딱 그 한 곡뿐인데, 그게 하필이면 액막이할 때만 연주하는 곡이라고 하잖습니까. 액막이용 곡조를 어찌 사람에게 감상하라고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상을 위한 글씨를 안 쓰느니 뭐니 하는 말처럼 말이더냐? 그게 다 무슨 헛소리야! 세상 어느 누가 곡만 배우고 악기를 배우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어!”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그럼 이젠 들어 본 적 있으시네요.”
진안 군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태후가 손을 들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너는 오늘 정 낭자의 입이 되려고 궁에 따라 들어온 것이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나무라자, 진안 군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손이 열었던 연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정 낭자가 오늘 궁에 불려온 것이니, 소손이 당연히 따라와야죠.”
너무나도 당당한 진안 군왕의 태도에 태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짐이 가서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어마마마께 제대로 된 해명을 하라고요.”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정교랑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아니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정교랑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배짱이 대단하더구나. 못하는 말이 없어.”
황제가 말했다.
“폐하,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지요?”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 거냐고?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교랑을 잠시 쳐다보았다.
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 낭자가 꽤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그때 무례하게 말하며 협박했을 때도, 뒤늦게 사과한 지금도, 정 낭자는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요.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그래, 참 밉기도 하구나. 태후를 저 정도로 화나게 만들다니.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떤 연유로 곡만 배우고, 악기는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정교랑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버지, 저는 뭘 배워야 해요?”
“다 배워야 한다.”
“아버지, 제가 아무리 똑똑해도 다 배울 수는 없잖아요.”
“배울 수 있지. 뭐든 일도(一道)만 파면, 다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일도가 뭔데요?”
정교랑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일도,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지요. 스승님께서 제게 칠현금을 가르치실 때,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액막이 목적으로요. 그래서 소녀는 추풍조 한 곡만 배웠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도라, 그건 무슨 이치인 게냐?”
“일도를 깨우친다면 무엇을 배우더라도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소녀가 칠현금을 배웠다면, 분명 배움에는 끝이 없었을 것이고 평생 그 칠현금 한 가지에만 몰두했을 겁니다. 하지만 칠현금이 아니라 한 곡만 배우게 된다면, 그 한 곡을 제대로 깨우쳤을 때 배움이 끝나지요. 그럼 그때부터는 또 다른 일도에 집중하여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요.”
그런가?
황제가 놀라서 물었다.
“죽을병이 아니면 못 고친다는 그 말도, 그런 연유에서 한 것이냐? 네 스승이 가르친 의술이 오직 그 한 가지여서?”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편자도 일도고, 신비궁도 일도고, 글씨도 일도라니.”
황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잠시 넋을 놓았다.
“일도,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도리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네 스승이 진정한 기인이로구나. 참으로 아까운 인재야.”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뜬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그런 귀인을 조정에서 일찍이 알아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일찍이 그자를 찾아내어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더라면, 벌써 오랑캐들의 씨를 말리고도 남았겠지.
그런 기인의 유일한 제자가 저 바보였다는 것도 아까워. 저 여인에게 그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전수했는데도, 저 여인의 심지가 온전치 않은 탓에 충분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정상적인 사람을 제자로 삼았더라면, 분명히 청출어람이 되어 그 기술들을 더욱 정교하게 갈고 닦을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안타까운지고.
황제의 이야기를 들은 태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괴상한 스승 밑에서 괴상한 제자가 난 셈이구려.”
태후가 말했다.
“원래 기인 중에는 괴상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진안 군왕이 기쁘게 말하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는 무슨 감사?”
태후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 마마의 화를 풀어 주셨으니까요. 마마께서 계속 진노해 계셨더라면, 이번 일이 더욱 커졌겠지요. 그럼 소손이 저지른 잘못도 더 커지는 것이고요.”
태후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유의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삼가거라. 위낭, 너는 궁에서 쭉 자랐으니 바깥사람들이 얼마나 험악하고 영악한지 모를 게다. 과거에 바보였던 여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돼. 그 여인의 눈에 누가 바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한 뒤, 큰절을 올리면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소손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궁에 남아서 애가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가거라.”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손이 출궁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번이나 궁에 드나들었습니다. 소손이 여기 남아 저녁까지 먹고 간다면, 마마께서는 분명히 대신들의 질책을 받고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애가가 그들의 입을 무서워할까.”
“마마께서는 괜찮으시겠지만, 소손은 마마께서 질책받으실 것이 마음 쓰입니다.”
진안 군왕이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있던 태후가 미소를 지었다.
“입만 살아서는. 저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모르겠네.”
“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위낭을 가까이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태후가 황제를 향해 눈을 흘겼다.
“황상, 그렇게 급하게 결백을 주장할 필요는 없잖소? 애가도 알고 있소. 애가가 위낭을 데려다 키웠다는 거. 다 애가를 보고 배운 거겠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보니, 과연 어마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태후가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는 황제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애가는 저 정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소.”
태후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황상이 나랏일을 위해 정 낭자를 어떻게 치켜세우든 상관하지 않겠다만, 애가까지 정 낭자의 일에 휘말리지는 않게 하시구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어마마마, 정 낭자는 여인의 몸입니다. 짐이 여기서 더 어떻게 치켜세울 수 있겠습니까. 정 낭자에게 관직을 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정 낭자는 공을 세웠으니, 짐이 이미 낭자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정 낭자를 더 치켜세우고 싶다 한들,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여인의 몸이라면 아무래도 혼인이 가장 중요하겠지.”
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정 낭자가 모친을 일찍 여의었다고는 하나, 친부가 아직 건재한데 짐이 어찌 낭자의 혼인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맞소. 그건 남의 집안일이지. 하지만 정 낭자는 과거에 몹쓸 병을 앓았으니, 오불취(五不娶: 아내로 삼아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경우)에 해당하오. 현명한 스승을 만나 병이 완치되었고는 하나, 세상에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정 낭자에게 접근하는 이도 있을 거요. 어찌 됐든, 정 낭자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니까. 집안 어른이 어련히 알아서 혼사를 진행하겠냐마는, 황상도 정 낭자의 혼사에 대해 신경을 써 주시구려. 정 낭자와의 혼담을 기회 삼아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
태후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제는 잠시 태후를 쳐다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서 사려가 깊으십니다.”
“그리고 출궁한 아이들의 혼사 날짜도 슬슬 잡아야겠소. 평왕과 경왕은 아직 어려 급하지 않지만, 내년이면 위낭이 벌써 스무 살이오.”
태후의 말에 황제가 태후를 바라보았다.
진안 군왕의 혼사 이야기를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태후였다. 그런데 지금 진안 군왕의 혼담을 먼저 꺼내는 것으로 보아, 태후는 황궁에서 자손을 늘리는 일에 대해 확실히 체념한 듯했다.
체념할 때가 되긴 했지. 젊었을 때도 짐은 자식을 가지기 힘들었는데, 곧 쉰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아이를 쉬이 가질 리가 있겠나. 죽다 살아난 동 내한처럼 말이지. 동 내한의 막내딸은 동 내한의 손녀보다도 어리다지?
황제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부러움 섞인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낳은 아들은 연이어 요절했지만, 다행히도 성인이 되어 가는 대황자 한 명은 남아 있었다.
그래,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긴 했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서 위낭에게 괜찮은 신붓감을 골라 주십시오.”
대전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진안 군왕은 걸음을 재촉하며 초조한 듯 앞을 내다보았다.
“전하, 급하실 것 없습니다.”
진안 군왕을 직접 배웅하던 늙은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를 뵙고 싶어 하는 이는 비단 전하뿐만이 아니옵니다.”
“그럼 또 누가 있단 말이더냐?”
진안 군왕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태후궁의 늙은 내시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시작과 끝맺음이 확실한 분이시지요. 전하께서 정 낭자를 궁으로 데려왔으니, 가실 때에도 데려다주시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늙은 내시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도지는 주도면밀해.”
늙은 내시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전하, 이 늙은이는 전하께서 소인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지는 늙은 내시의 품계였다. 조정 대신들이나 그보다 아래인 사람들은 그를 도지라고 부르지만, 종친인 진안 군왕 앞에서 그는 그저 가노일 뿐이다.
진안 군왕이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전하, 인제 그만 가시지요. 정 낭자는 최 악공한테 붙잡혀 있습니다. 소인은 태후마마의 곁을 지켜야 해서, 여기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늙은 내시가 웃으면서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뒤로 선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늙은 내시가 태후궁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내시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귓속말을 들은 늙은 내시는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더니, 곧 태후궁 밖을 내다보면서 탄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무슨 일이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는 법, 형님의 뜻을 따르면 형수의 미움을 사기 마련이라는 속담이 생각나는군. 남편의 사랑을 받는 색시가 시부모의 마음까지 사로잡긴 힘든 법이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앞에 도착하자, 최 악공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최 악공이 뭐라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나한테 고맙대요.”
정교랑이 말했다.
두 사람은 앞뒤로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하던 내시는 조용히 그들의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뒤따라 걸었다.
“나는 곡만 배웠을 뿐이고, 칠현금은 배우지 않았다는 말에 최 악공은 제호관정(醍醐灌頂: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도를 깨닫게 함)의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았대요. 덕분에 드디어 꽉 막힌 새장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다고 하더군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당연히 낭자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 악공이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하가 아닐까요?”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나한테도 고마워해야겠어요. 나중에 내가 가서 감사의 선물을 받아 낭자한테 절반쯤 나눠 줄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오늘은 낭자를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요. 육가아가 혼자 집에 있어서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예를 표하고, 진안 군왕이 먼저 마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마차에 오른 진안 군왕이 휘장을 들어 올리고 정교랑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리고,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씨, 이제 저희도 가요.”
반근이 정교랑에게 손난로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태후궁에서 황궁의 문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정교랑이 손난로를 손에 쥔 채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어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넓은 어가에는 지나다니는 마차도, 행인도 별로 없었다. 어가에 보이는 행인들은 모두 관청의 심부름꾼이거나 궁에 머무는 내시들이었다.
“어째 경성에 종친이 부쩍 많아진 것 같군.”
대전을 향해 걸어가던 관리 하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지나가는 마차를 쳐다보며 말했다. 초록색 관복을 입은 관리는 관모를 쓰고, 깨끗한 관화를 신고 있었다. 허리춤에 은어대(銀魚袋)까지 걸린 것으로 보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한 관리의 복장이 틀림없었다.
“풍 대인, 저분은 종친이 아니오라, 정 낭자이옵니다.”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
풍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제는 평민 백성도 차례를 무시하고 황제를 알현한다는 것인가? 폐하께서는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중서성 대신들은 보이지 않으시다더냐?”
“풍 대인께서는 이제 막 경성에 들어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 정 낭자라는 분은 평민 백성이라고는 하나 나라를 위해 매우 큰 공을 세우신 분입니다.”
내시는 신이 난 모습으로 정교랑이 어떤 공을 세웠는지 이야기하려고 했다.
정 낭자의 일이라면, 다들 한가할 때 한 번쯤은 이야기했을 테지. 하지만 항상 서로 이야기하겠다고 난리들을 치는 바람에 정작 내가 이야기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어. 드디어 오늘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무원산 술로 온 경성 사람을 취하게 했던 일? 아니면 비석에 새긴 글씨로 뭇 서생들의 혼을 빼앗은 일? 아니면 가장 근래에 일어난 일이자 황궁 내시들이 가장 잘 아는, 칠현금으로 경왕부의 액막이를 했던 일?
자신이 늘어놓을 이야기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들뜬 내시는 점점 더 잿빛이 되어 가는 관리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공로? 폐하께서 그 공로에 대한 상을 하사하지 않으셨는가?”
풍림이 말했다.
“하사하셨지요. 정 낭자의 의형제, 그리고 정 낭자의 부모까지. 아, 그나저나 대인께서는 정 낭자가 그 공로를 어떻게 얻었는지 아십니까? 그게 이야기하자면 긴데…….”
내시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미 상을 하사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폐하를 알현한다는 말이냐?”
풍림이 내시의 말을 끊고 천천히 말했다.
“심지어 여인의 몸인데, 누가 저 여인을 황궁 안까지 불러서 폐하를 알현하도록 두었어?”
내시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칠현금 연주를 듣고자…….”
내시는 풍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단히 화가 난 풍림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는 나머지 말을 도로 삼켜야만 했다.
“지금 칠현금 연주라고 하였느냐? 처리해야 할 정사가 산더미 같이 쌓였고, 폐하를 뵙고자 하는 조정 대신들이 줄을 섰는데, 폐하께서는 자신이 정사를 등한시한 채 한가로이 칠현금 소리나 듣는 황제라고 만백성에게 알리시려는 게냐!”
풍림이 호통쳤다. 내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표정으로 풍림을 쳐다보았다.
내시는 신책군을 이끄는 신책중위(神策中尉)가 아니라 품계 없는 풋내기 내시였기 때문에, 조정 관리가 갑작스럽게 질책을 쏟아내자 놀라 멍해졌다.
심지어 이 관리가 질책하는 이는 무려 황제 폐하였다. 물론 관리들이 황제를 질책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풋내기 내시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네 이놈, 천자를 가까이서 모시면서도 폐하께서 경계해야 할 것을 귀띔해주지는 못할망정 소문을 과장하여 전하다니, 아주 영악한 마음을 가진 놈이로구나!”
풍림의 호통이 끝나자, 두 다리에 힘이 쪽 빠진 내시는 급기야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초록 관복에 은어대를 한 문관이 아니라, 평범한 문관이 내시를 질책했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내시가 고환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같은 품계의 무관보다는 같은 품계의 문관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문관은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내는 조정의 문관들과는 달랐다. 무려 풍림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일가족을 멸할 수 있는 귀판관 풍림.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내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이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했다. 내시는 속으로 통곡했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하필 이렇게 재수 없는 귀판관의 길을 안내하다니. 나 참, 운도 지지리도 없지.
새파랗게 어린 내시가 무릎까지 꿇자, 풍림은 소매를 홱 털었다.
이게 다 폐하께서 너무 인자하신 탓이야. 그러니 내시들과 조정 관리들이 점점 더 기고만장해서 날뛰지!
풍림은 일개 내시와 얼굴을 붉혀 가며 자신의 신분을 깎아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내시에게 호통을 치고 난 풍림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두 내시가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무언가에 대해 떠들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내시는 이야기에 빠져든 나머지 자신들의 코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살피지 못했다.
“최 악공이 드디어 정 낭자를 직접 만나 뵙고, 자신의 두 귀로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았다며 어찌나 기뻐하던지.”
“정 낭자가 뭐라고 했는데? 정말로 신선 스승님께서 정 낭자에게 그리 놀라운 기술들을 전수해 주었대?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정 낭자가 어찌 그렇게 많은 재주를 익혔겠나.”
“듣기로는, 정 낭자는 날 때부터 다 할 줄 알았다고…….”
이제 막 마음을 가라앉혔던 풍림은 내시들의 대화를 듣더니, 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음. 성인을 뜻하기도 함–논어)라니! 간덩이가 제대로 부었구나. 감히 자신을 성인으로 치켜세워?”
갑작스러운 호통에 두 내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내시들이 자기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바람처럼 쌩하고 그들을 지나쳐 갔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초록색 관복을 입은 관리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대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누구래?”
두 내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내시가 자신들을 향해 허둥지둥 뛰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냐고요?”
한겨울이었음에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내시가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외쳤다.
“목숨을 앗아가는 판관입니다!”
판관? 목숨을 앗아간다고?
두 내시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린 내시는 풍림처럼 쏜살같이 그들의 곁을 지나쳐 사라졌다.
같은 시간, 귀비궁에서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후가 정말로 그리 말하더냐?”
귀비가 금잔을 손에 들고 물었다.
“예, 마마. 태후께서 정 낭자는 몹쓸 병을 앓았으니 오불취에 해당하는 여인이라면서 폐하께 정 낭자의 혼사에 신경 써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정 낭자와의 혼담을 기회 삼아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이 늘 있기 마련이라면서요.”
누구든 정 낭자와 혼사를 올리려면,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겠구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태후마마.
귀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여인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게다가 태후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아니더냐.”
귀비가 웃으면서 금잔 안에 든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음미했다.
“그래도 그 여인을 경성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았구나.”
귀비가 금잔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마, 고 전시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마마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정 낭자는 불과 며칠 사이에 벌써 태후마마의 미움을 샀습니다.”
내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일은 정 낭자가 전에 세운 공이 있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정 낭자에 대한 기대가 아직 남아 있으니, 굳이 정 낭자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는 정 낭자를 좌시하지는 않으실 테지요. 폐하께서 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분은 아니니까요.”
귀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금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갔다.
“마마.”
내시는 재빨리 귀비의 금잔을 가져와 옆에 있던 궁녀에게 차를 더 따르라고 손짓했다.
“지금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쫓는다면, 움직이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사소한 인물 때문에, 마마와 전시 대인께서 괜히 폐하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지금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쫓으면, 도리어 그 여인을 돕는 셈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귀비가 물었다.
“땅이 넓으니, 외진 곳까지 황제의 힘이 닿기는 힘든 법입니다. 경성을 떠나면 정 낭자는 더욱 멋대로 굴 수 있겠지요. 반면 정 낭자가 경성에 남아 폐하의 눈앞에 있다면, 정 낭자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도 크게 부풀릴 수 있습니다. 폐하와 멀리 있을수록, 미움을 사기는 더욱 힘들어지는 법이지요.”
내시가 웃으면서 가득 채워진 금잔을 귀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귀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압니다만, 부디 마음 편하게 가지십시오. 정 낭자는 이미 삼세번이나 경왕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말을 바꾸기 힘들겠지요. 그리고 마마, 평왕께서는 조정 대신들의 눈앞에서 하루하루 성장하고 계십니다.”
귀비가 웃으며 치맛자락을 정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그런 사소한 일은 그만 생각해야겠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진안 군왕의 혼사야. 황궁에서 나와 가장 가까웠던 아이의 혼사이니, 우리도 태후를 뵈러 가자꾸나.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몰라.”
내시가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귀비가 소식을 듣게 됐을 무렵, 진안 군왕 또한 마차가 아직 경왕부에 당도하기도 전에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전하,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도리어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를 어찌하다니? 이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다고.”
“좋은 일이라고요? 태후께서는 정 낭자의 앞길을 영영 끊으실 작정인 겁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내시를 본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앞길은 무슨. 고작해야 혼사 아니더냐. 그보다 더 사소한 일이 어디 있다고 앞길 타령이야? 괜한 호들갑은.”
여인의 앞길이라 하면, 당연히 혼사가 아니겠습니까.
내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 그렇다면 정말 잘된 일이잖아. 태후께서는 정 낭자에게 큰 도움을 주신 거나 마찬가지야.”
진안 군왕의 말에도 내시는 진안 군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낭자에게 전하거라.”
진안 군왕이 손바닥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좋은 소식을 전했으니, 심부름 값을 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매를 맞는 게 아니라, 돈을 달라고 하라고요?
내시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마차에서 엉거주춤 뛰어내렸다.
옥대교 저택 앞, 이제 막 정교랑과 함께 집에 도착한 반근은 내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시의 말을 다 듣고 난 반근은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태후께서 폐하에게 아씨의 혼사를 신경 써 달라고 했으니, 이제 이노야는 아씨의 혼사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게 되는 건가?
그런데 왜 소식을 전하러 온 내시에게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옆에서 듣고 있던 시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반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보자, 시녀가 태후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태후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제 누구든 아씨에게 혼담을 넣으려는 이는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게 되는 거야. 게다가 우리 아씨는 몹쓸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오불취에 해당한다고 하셨잖아. 그런데도 아씨에게 혼담을 넣으려 한다면, 그건 오직 아씨의 명망만 보고 접근하는 비천한 자라고 욕하신 거지. 생각해 봐. 권문세가에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아씨께 혼담을 넣겠어? 아씨께 혼담을 넣는 것만으로도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폐하의 미움을 살지도 모르는데?”
반근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반근은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참 잘된 일이네. 전하께 이 소식을 알려 주어 감사하다고 전해 주게.”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반근, 드려.”
시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곧 정교랑의 말대로 돈주머니 한 개를 꺼내 내시에게 건넸다.
정말로 돈을 주네?
내시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손에 들린 돈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떠난 뒤, 방 안으로 들어온 반근이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씨, 이번엔 또 황궁에서 무슨 일에 휘말리신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또라니 무슨 말이지?”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후께서 왜 그런 말씀을…….”
반근이 초조한 투로 말했다.
“그건 태후의 일이니, 나는 몰라.”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아씨, 정말로 이 일이 좋은 일인가요?”
이번에는 시녀가 물었다.
“태후께서 날 위해 직접 나서서 권력에 빌붙는 비천한 자들을 걸러 주신다는데, 좋은 일이고말고.”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시녀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소인이 또 속물처럼 굴었네요.”
“네가 속물인 게 아니고, 세상 사람이 속물인 것도 아니야. 단지, 모를 뿐이지.”
말을 마친 정교랑은 안쪽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고 은색 빗과 비녀를 뺐다. 비녀를 빼는 동시에, 정교랑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건 그녀가 원하고 바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몰랐고, 이곳의 희로애락이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 또한 몰랐다.
“언니, 진짜 별일 아닌 거 맞아?”
반근이 시녀의 소매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아씨께서 오매불망 좋은 집안과 혼례를 올리고 싶어 하던 분이라면 문제가 되겠지. 그런데, 네 생각에 아씨가 그런 분이야?”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반근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좋은 집안은커녕 왕십칠 공자 같은 이와의 혼사도 개의치 않으셨어.
“애초에 아씨께서는 혼사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으신데, 안 좋은 일이라고 할 건 없지. 정말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은 제 발 저려 혼담을 넣지 못할 테고, 그 오명을 쓰기 두려워하는 사람들 또한 아씨의 좋은 신랑감이 되기는 진작에 글렀어. 태후의 말씀 덕분에, 별 시답잖은 사람이 아씨께 혼담을 넣으러 오는 일을 깔끔히 막은 셈이야. 그럼 정정당당하게 아씨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만 혼담을 넣으러 올 수 있겠지. 그런데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입을 떡 벌린 채 시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반근이 활짝 웃었다.
“어휴, 괜히 깜짝 놀랐네.”
반근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난 그럼 밥하러 갈게.”
시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반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시녀가 웃음기를 거두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정말 그런 좋은 사람이 있을까?”
과거에 몹쓸 병을 앓은 것을 개의치 않고,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명망을 이용하려 들지 않고, 황제의 의심과 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관청 안,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요. 천하가 이리 시끌시끌한 것은, 제 이익만 챙기려는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말입니다.”
수하가 고능준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맞장구쳤다.
“그래서 남을 기만하면, 필시 남도 나를 기만하게 된다는 것이야. 그러게 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잘난 체를 해댔을까. 잘 두고 보게나. 지금은 겨우 시작일 뿐이니.”
고능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다급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들어오는가!”
수하가 황급히 호통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숨을 헐떡이며 조심스럽게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근정전에서 당직을 서는 하급 관리였다.
고능준은 웃음기를 거두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게냐?”
고능준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능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을 듣던 고능준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가 참 빨리도 왔구나.”
태후와 진안 군왕, 고능준 그리고 정교랑이 기뻐하는 사이, 근정전에 있던 황제만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원래는 황제도 기분이 좋았다. 몇 년간 타지에서 고생한 판관에게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려던 황제는 입을 떼기도 전에 그 판관으로부터 질타를 당해야 했다. 정사를 등한시하고 한가하게 유희를 즐겼다면서.
황제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몸이 좋지 않아, 어릴 때든 장성해서든 제대로 유희를 즐겨 본 일도 없는데, 그런 비판을 받자 기분이 나쁜 한편 쓴웃음이 나왔다.
풍림이 이번에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황제가 그를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여 어사대의 권력을 쥐여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림이 가장 먼저 질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천자 자신이었다.
“알겠소.”
황제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어사중승 직에 부임하는 것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오. 그간 타지에서 고생 많았소. 경조부에서 관저를 마련했으니 우선 식솔들부터 데려와 챙기시구려. 곧 새해 명절이 돌아오니 가족 간의 정도 돈독히 쌓고.”
황제가 인자한 성군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성은이 망극하오나, 신은 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풍림이 예를 올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뜻한 말을 몇 마디 더 해 주려던 찰나,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신은 대리시에 명해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하고, 감히 백성을 인질 삼아 천자를 협박하여 의형제의 공로를 인정받고, 조정에 당파를 만들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고, 저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강주 정씨 여인을 조사하고, 징벌로 다스릴 것을 청하옵니다.”
풍림이 엄숙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문밖에 서 있던 어린 내시는 혈색이 돌아오기도 전에 또다시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징벌로 다스리다니!
아이고, 세상에나. 누가 귀판관 나리 아니랄까 봐! 저 판관의 붓끝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저 판관이 지나가는 곳마다 귀신의 곡소리가 들린다더니, 이번엔 상경하자마자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까지 건드리네!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하고, 감히 백성을 인질 삼아 천자를 협박하여 의형제의 공로를 인정받고, 조정에 당파를 만들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고, 저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강주 정씨 여인을 징벌로 다스릴 것을 청하옵니다.
신임 어사중승 풍림이 황제를 알현하자마자 내뱉은 일성은 바람처럼 온 경성에 퍼져 큰 파란을 일으켰다.
“풍림이 드디어 미친 게야? 정 낭자는 어쩌다가 풍림의 성질을 긁었다더냐?”
진 노태야가 경악하며 물었다.
“자신이 틀리면 스스로 번개를 불러와 벼락을 맞아 죽겠다며 폐하와 내기하고, 칠현금 연주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연주가 아니라는 요사스러운 말을 내뱉은 죄. 무원산 술을 빚어 온 경성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며 백성을 현혹한 죄. 평민 백성의 몸으로 황제와 태후, 그리고 진안 군왕과 교분을 맺은 죄. 의형제의 억울함을 푼 후에야 신비궁을 바치고, 의형제들의 도움이 있어야 다른 병기들을 생각해 낼 수 있다고 말한 죄. 조정 대신들을 이용해 편을 가르고…….”
진소가 말끝을 흐리자, 진 노태야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널 두고 하는 말인 게냐?”
진소가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는 죄는 또 뭐고?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죄는 무슨 소리야?”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 낭자의 언행 자체가 법도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합니다. 또 정 낭자가 스승 없이도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깨우친 성인이라고 내시들이 떠드는 말을 들었답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죄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로구나!”
진 노태야가 찻잔을 탁자 위로 내동댕이치고는 버럭 화를 냈다.
“정 낭자가 언제부터 법도를 우습게 여기고, 언제 자기 자신을 성인이라고 칭했다더냐? 그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와전된 이야기야! 풍림 그자가 제대로 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순 엉터리였어!”
“폐하께서도 풍림이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하십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눈을 들어 진소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생각에는 도가 지나치지 않으냐?”
진소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 낭자의 행실을 좋아하진 않지만, 정 낭자가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손뼉을 치며 환호할 정도로 제가 배은망덕한 놈은 아닙니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니 어찌할 도리 없는 일이긴 하지. 게다가 정 낭자에게 벌어진 일들이 워낙 눈에 띄기도 했고.”
“일단 사태가 좀 진정되긴 했지만, 풍림 그자는 보통 완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관청에서 언제쯤 조사를 시작하나 벼르고 있을 테지요.”
진소가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전부 멋대로 추측한 것일 뿐, 사실과는 다르지 않더냐!”
화가 난 진 노태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조당.
“사실이 아니라고요?”
조복을 입은 풍림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폐하께서는 이 모든 게 사실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 하십니까? 사고가 터지기 전에 경계하여 방지해야 함을, 폐하께서는 정녕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그 여인의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나 다름없단 말씀입니다!”
진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풍 중승, 입만 열면 정 낭자가 법도를 우습게 여기고,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데, 그 여인이 무슨 화를 불러온다는 말이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고함쳤다.
“성군의 혜안을 가리고, 백성을 술로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추종케 하여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이지요. 심지어 그 여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심을 현혹하지 않았소이까!”
풍림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그 여인이 어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오!”
진소가 강경하게 풍림에 맞섰다.
“진 대인께서도 점괘로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 되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여인이 화를 초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십니까?”
풍림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대신들 뒤에 서 있던 고능준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처음 조당에 들어선 이후로 몇 년이 지났으나, 오늘만큼 즐거운 날은 얼마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풍림이라는 자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오늘 풍림이 보여 준 모습은 부친이 고씨 가문 가산의 절반을 잃게 한 것도 모자라 부친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할 뻔한 태창로 조사 사건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능준과 그의 가족들은 매일같이 풍림을 원망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집어삼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 다 눈에 거슬리기는 매한가지니, 둘이 개싸움을 벌이다가 조당에서 내쫓겼으면 좋겠군.
가만 보니, 정 낭자가 꽤 쓸모 있네. 그 여인 때문에 서북의 실권을 잃었다지만, 이참에 풍림과 진소를 내 눈앞에서 치워준다면…….
아니지, 아니지. 둘 중 하나만 없애도 충분해. 나 고능준은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야. 많은 것을 탐하려고 하지도, 무턱대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지.
“대인의 그 허무맹랑한 추측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정 낭자에 대한 모독이외다!”
진소의 목소리가 조당 안을 가득 메웠다.
“진정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다면, 진작에 신비궁을 내놓았겠지요. 의형제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나서가 아니고! 폐하께서 기강을 어지럽히는 그 여인의 행실을 계속 눈감아주신다면, 천하가 혼란에 빠지는 큰 화가 초래될 겁니다.”
진소가 고함을 치는데도 풍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요부가 아무리 간사하더라도, 조정에서 그 죄를 징벌로 엄히 다스린다면 분명 천하가 그 위엄에 놀라고 백성들도 지혜를 회복할 겁니다. 폐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후회하셔도 늦습니다!”
옥좌에 앉은 황제의 안색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 갔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황제의 모습을 본 고능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풍림이 어떤 자인가?”
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고능준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녀들의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고능준이 주위에 앉은 막료들에게 물었다.
“직접 관을 짜서 태창로로 갔던 자야. 한번 물었다 싶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지. 거북이(王八: 비하의 의미) 같은 부류라니까.”
고능준이 자문자답하자 막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경성에 돌아오자마자 문 사람이 바로 정 낭자라니. 역시 하늘이 무심하지 않군요.”
막료 중 한 명이 맞장구쳤다.
고능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기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박자에 맞춰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하늘? 하늘이 무심치 않을 때는 그리 많지 않아.”
고능준이 서신 한 통을 막료들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소경문이 보낸 서신일세.”
머리를 맞대고 서신을 읽은 막료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대인께서 일찍이 씨를 뿌려두었으니, 풍림이 경성에 오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정 낭자를 물고 늘어진 거였습니다.”
“역시 대인께서 고명하십니다.”
막료들이 웃으면서 고능준을 치켜세웠다. 다른 막료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이러니 하늘의 계산은 사람이 세운 계획에 못 미친다는 말이 있겠지요. 사람이 미리 계획을 세워야만 하늘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대인께 한 잔 올립시다!”
막료들이 일제히 술잔을 높이 들자, 고능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 대인, 풍림이 정 낭자가 화를 초래할 거라고 계속 떠들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정 낭자가 또 신비궁 같은 어마어마한 병기를 황제께 바치면 어쩌지요? 그럼 또 큰 공을 세우는 셈인데, 그래도 풍림이 정 낭자를 해치울 수 있을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던 실내가 잠시 조용해졌다.
고능준이 술잔을 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가 왜 또 병기를 바쳐? 설마 그사이에 또 의형제를 만들었나? 아니면, 이번에는 가족이 원하는 게 있어서? 주씨 가문의 주육낭에게는 관직을 하사했고, 정씨 가문의 부모도 상을 받아 경성으로 올라오게 됐네. 그 낭자에게 무슨 가족이 더 있고 무슨 청이 더 있겠나?
잊지 말게. 원칙은 그 여인 스스로 정했어. 본인 입으로 한 말이고.
태후 앞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나갔다지 않던가. 액막이를 할 게 아니라면 절대 칠현금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스스로 원칙을 깨고 병기를 내놓을 순 없는 노릇이지.
혹 그랬다가는, 아마 풍림이 정 낭자를 더 빠르게 사지로 내몰걸!”
뒤늦게 고능준의 말을 알아들은 막료들은 웃기 시작했다. 막료들의 웃음소리는 실내의 분위기를 다시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힘을 들일 필요가 전혀 없겠습니다. 멀리서 구경할 준비만 하면 되겠어요.”
막료들과 고능준이 호탕하게 웃었다. 기녀들이 아양 떠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문과 창문을 굳게 닫았는데도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밝은 기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은 시각, 주씨 저택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주 노야는 몸종과 여종들이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호통을 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노야, 어서 짐을 싸야 해요. 당장 섬주로 가자고요. 경성에 더 남아 있어서는 안 돼요.”
주 부인이 주 노야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말했다.
“허무맹랑한 소리 좀 그만하시오! 그 뻔뻔한 정씨 놈들이 곧 있으면 경성에 들어오는데, 교교가 우리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들을 상대하란 말이오?”
주 노야가 호통쳤다.
“지금 교교를 걱정할 때예요? 정씨 내외가 경성에 도착해서 교교를 괴롭히기 전에, 풍림이 먼저 교교의 목을 벨 거예요! 노야, 우리 이제 더는 그 아이와 엮이지 말아요. 그 아이와 엮인 후로 어째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주 부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 노야는 주 부인의 손을 내치며 콧방귀를 꼈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 교교가 지금껏 걸어온 길에 풍랑이 좀 많았소? 하지만 교교는 매번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폐하께 상까지 받았잖소. 교교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풍랑은 전부 교교의 디딤돌이 될 뿐이오.”
주 부인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노야, 이번에는 무려 풍림이라고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앗아간 풍림이요.”
“그자가 풍림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거요.”
주 노야는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주 부인이 서둘러 주 노야를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야, 무슨 내막을 알고 있는 거죠? 우리 교교가 이번에도 무사할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주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막은 무슨. 훤히 보이는 일인 것을. 풍림이 누군지 잊었소?”
“풍림은 어사중승이죠.”
주 부인이 영문을 몰라 하며 대답하자 주 노야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자의 별호가 뭐냐고.”
“귀판관이요.”
주 부인의 대답에 주 노야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렇지. 풍림은 귀신이고, 우리 교교는 신선인데, 신선이 어찌 귀신을 무서워할꼬.”
주 노야의 말에 주 부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당장 의원을 불러오너라! 노야께서 정신이 나가셨어!”
정신이 나간 사람은 비단 주 노야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은 이미 경성에 쫙 퍼져 있었다.
백성들은 조정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하면서 싸우는지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오직 이번 일의 주인공들이었다.
하나는 귀판관이라 불리는 사내고, 다른 하나는 도교의 신선인 이 진인께 직접 가르침을 얻었다는 제자였다. 하나는 귀신이요, 하나는 신선이라. 사람은 귀신이나 신선을 속일 수 없다더니, 과연 정 낭자는 가는 곳마다 적들을 맥없이 쓰러뜨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런데 귀신과 신선이 맞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누구를 속이려나? 누가 더 강할까? 이번에야말로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네!
“분명히 신선이 이길 걸세!”
“그건 모를 일이지. 신선도 잡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잖아. 게다가 이 신선은 어린 낭자기도 하고.”
“듣자니 대리시에서 벌써 사람을 잡아들여서 조사 중이래.”
“그 말이 참이야?”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던 사환이 더는 못 들어주겠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찻값을 탁자 위로 내던지고는 후다닥 찻집을 뛰어나왔다. 말에 올라탄 사환은 단숨에 성 밖까지 나가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시서(侍書), 또 어디 가서 놀다 온 거야?”
저택 안에 있던 사환이 물었다.
“놀기는 뭘 놀아. 정 낭자한테 또 일이 생겼어.”
시서라고 불린 사환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에서 나온 사환이 화들짝 놀랐다.
“또? 잠잠해진 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또?”
“그러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
시서가 말하면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서 공자님께 가서 말씀드려야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서가 안쪽으로 뛰어가려 하자, 사환이 그를 막아섰다.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해 봐. 어제도 급하게 달려와서는 태후께서 정 낭자의 혼삿길을 막았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공자님께서 한참 비웃으셨잖아. 태후의 행동은 도리어 정 낭자를 위한 일이라고, 큰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라고 하셨지. 앞으로 그런 사소한 일은 얘기하지 말라고도 하셨어.”
“이번에는 사소한 일이 아니야.”
시서가 조급해하며 말했다.
“그럼, 목숨이 달아날 만한 일이야? 공자님께서 그러셨잖아. 목숨이 달아날 일만 말하라고.”
콧방귀를 뀌며 말하던 사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서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진짜로 목숨이 달아날 만한 일이라고?”
“목이 달아나? 누가 정 낭자의 목을 노리는데?”
진십삼이 손에 쥔 책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풍림이요. 귀판관 풍림 말입니다.”
시서가 곧바로 대답했다.
“풍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지?”
진십삼이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물었다.
“태창로 전운사 횡령 사건을 조사했던 그 풍림이요. 이번에 폐하께서 풍림을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셨는데…….”
진십삼이 시서의 말을 끊고 물었다.
“풍림이 누군지는 당연히 알지, 이 녀석아. 풍림이 왜 정 낭자의 목숨을 노리냐고 묻는 거잖아!”
진십삼이 인상을 쓴 채 소리치자 시서가 아, 하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 말로는, 귀판관 나리가 우연히 길에서 정 낭자를 스쳐 지나갔답니다. 정 낭자에게서 무시무시한 요기(妖氣)를 느끼고는 황제께 정 낭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고…….”
대답하던 시서가 진십삼의 발길질에 바닥에 엎어졌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의 말이라고? 네놈은 머리가 없는 게냐, 다리가 없는 게냐! 집에 가서 물어보고 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진십삼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공자님께서 걱정하시는 걸 아니까 그런 거죠. 정 낭자에게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와서 알리라고 하셨잖아요. 초조해하고 걱정하실까 봐 한달음에 달려온 건데.
시서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이 당장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시서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진십삼이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됐다. 내가 직접 가마.”
직접 가신다고? 하긴, 보통 큰일이 아닌데 직접 가셔야지.
시서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한쪽에 그대로 걸려있는 진십삼의 겉옷을 집어 들고 얼른 쫓아갔다.
“공자님, 옷은 입고 가셔야죠!”
진십삼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의 속도를 늦추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제가 가서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사환이 옥대교를 향해 가려던 찰나, 진십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정 낭자를 보러 가기 전에,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진십삼이 말에 박차를 가하자, 사환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진 시강이 집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진십삼은 곧바로 진 시강을 찾아 관청으로 향했다. 진 시강은 진십삼이 올 줄 진작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참 빨리도 왔구나. 네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사흘은 지나야 알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은 진십삼이 진 시강의 우스갯소리를 무시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무엇 때문입니까? 또 뒤에서 뭔가 바라는 자가 있는 겁니까?”
진 시강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누가 뭔가를 바라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진십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풍림은 그저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요?”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이 힘들어지는데.”
진십삼이 말했다.
풍림이라는 자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엄격한 사람이라는 말을 간간이 들었어. 게다가 지금은 어사중승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워낙 강직한 사람이니, 사건을 사건으로만 대하지, 사람에 대한 악감정으로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이 아닐 거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책임을 다할 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거나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이번 일을 벌인 것도 아닐 테고.
쉽게 넘어갈 수 없겠는걸.
“그러게, 종친과 가까이 지내봤자 좋을 게 없다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말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들려주는 칠현금 연주가 아니라는…….”
진십삼이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세게 쥐었다.
스승님도 찾아내고, 병기를 만들기도 하고, 더 이상 치료도 안 하며, 신선의 제자니 뭐니 하는 헛소문은 잠재웠다고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 정 낭자는 글씨로 학자와 서생들의 인정을 받고, 문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글씨를 가르치는 성인의 도를 따르고 있었거늘. 낭자에 관한 모든 일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 갑자기 진안 군왕이 그런 말을 해서!
“군왕은 정 낭자가 신선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낭자에 대한 호기심에 편하게 우스갯소리도 한 거고요. 자신이 가볍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정 낭자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지, 생각이나 해 봤겠습니까?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 낭자를 그렇게 대한다고 해서, 낭자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낭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겠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은 이 무정한 일들을 전부 안고 갈 수밖에요.”
진십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십삼! 어디 가는 것이냐?”
진 시강이 외쳤다.
“풍림에게 가서 물어봐야겠습니다.”
진십삼이 대답했다.
“풍림에게 직접 묻겠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물어?
넌 아직 수재도 아니다. 이 아비의 후광으로 이제 겨우 과거를 치르게 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어사와 논쟁을 벌이겠다는 게야? 벼슬길에 나가기도 전에 조정의 기강을 흐린다는 죄를 뒤집어쓰려고 그래? 그리되면 평생 벼슬길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정 낭자를 돕는 일은 평생 생각도 못 하게 될 거야!”
진 시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십삼이 몸을 돌리고 물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정 낭자를 대신하여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정 낭자는 이런 일로 목숨을 잃을 사람이 아니야. 성가시고 골치 아픈 정도겠지. 기껏해야 경성을 떠나 강주로 돌아가는 선에서 끝날 게야.”
진 시강의 대답에 진십삼은 웃음을 지었다.
“정 낭자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쫓겨난단 말입니까? 떠난다면, 낭자가 떠나고 싶을 때만 떠날 수 있어요. 여태껏 낭자가 맞닥뜨린 골칫거리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지요. 그러면 안 될 일이에요.”
“이 세상에 그러면 안 될 일이 어디 있느냐? 그만 돌아가 공부에 매진하거라. 정 낭자에게 그런 일이 닥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고, 정 낭자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면, 일단 네가 먼저 정 낭자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서는 건 도리어 정 낭자에게 해가 될 수 있어.
이번 일은 예전과 달라. 누군가가 음지에 숨어 계략을 꾸미는 것이 아니니, 너희가 남몰래 뒤에서 행했던 그런 수법도 더는 통하지 않아. 이제 다들 환한 곳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내고, 징과 북을 울리며 정정당당하게 싸우려 하고 있다. 결코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해서 끝날 싸움이 아니야.”
진 시강의 말에 진십삼은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소자, 잘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십삼이 몸을 돌리고 관청을 나섰다.
이번에도 말이 옥대교 근처에서 멈췄다.
“공자님, 가 보시게요?”
사환이 물었다.
어차피 나를 먼저 찾아온 적은 없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더 낫겠지.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고 옥대교 앞으로 말을 몰았다. 문을 지키던 사환이 얼른 문을 열고 진십삼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진 공자님.”
“너희 아씨는?”
진십삼이 물었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습니다.”
사환이 대답했다.
이 와중에 출타했다고?
잠시 흠칫하던 진십삼은 곧 웃음을 보였다.
역시 정 낭자답군.
“아씨께서는 큰아씨를 모시고 성 밖에 있는 태평거에 가셨습니다. 아마 밤이 되어야 돌아오실 거예요. 공자님께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아씨께 가서 공자님이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사환이 물었다.
소란을 피해서 나간 건가?
하지만 이런 시기에는 아무리 태평거라고 한들, 태평할 리가 있나.
“풍 판관이 그러더군. 그 낭자는 검은 눈동자가 작고 흰자위가 큰 사백안이라 천하를 어지럽힐 관상이라고.”
“에이, 됐소. 정 낭자는 여인의 몸이라 관직을 얻지도 못하잖소. 장수나 재상이 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단 말이오? 그 귀판관이란 자가 귀신을 너무 많이 봐서 아무 일에나 깜짝깜짝 놀라는 거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금 정 낭자의 명성은 장수나 재상보다 더하잖소. 말편자와 신비궁을 만들 줄 아는 의형제도 있고, 비석에 새긴 글씨 하나로 학자와 서생들 사이에서 선생이라는 칭호도 얻었어. 게다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술도 알고 있잖소. 사람이 그리 대단할 수가 있나? 거의 요괴지, 요괴.”
“사람이든 요괴든, 아무렴 무슨 상관이오? 나는 정 낭자가 빚은 무원산 술을 딱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정 낭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라고!”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무원산 한 동이 주시구려.”
대청 안에 있던 점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여기엔 그 술이 없습니다.”
“아니, 태평거의 행수가 정 낭자 아니었소? 그런데 왜 무원산이 없단 말이오? 괜히 이리저리 숨기지 말고 까놓고 얘기해 보시오. 얼마면 되는지 말을 해 보라고.”
점원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역시 괴이하고 수상쩍어. 이러니까 귀판관 나리가 자네들 주인어른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하시는 게지.”
무원산 술을 달라고 외쳤던 손님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손님들의 대화에 잔뜩 화가 나 있었던 한 점원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행주를 팍 내팽개쳤다. 점원이 그 사람에게 가서 따지려고 하던 찰나, 다른 점원이 그를 막아섰다.
“관리인께서 당부하셨던 거 잊었어? 괜한 시비 걸지 마.”
“시비는 지금 저놈들이 걸고 있잖아.”
행주를 내팽개친 점원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관리인의 말씀을 잘 생각해 봐. 장사하겠다고 문을 열었으니, 손님더러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야. 손님들의 입을 막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고.”
점원이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다독였다. 그때 새로운 손님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점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점원을 앞으로 밀었다.
“얼른 손님 맞이해야지.”
점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들어온 손님을 맞이했다.
먼 길을 떠나온 듯한 행색의 키가 크고 젊은 사내 하나가 문밖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우선 사방을 살폈다.
“여기가 이렇게 많이 변하다니. 이젠 못 알아보겠네.”
사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내를 대강 훑어본 점원은 그의 신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요즘 들어 경성에 많이 보이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수재가 틀림없었다.
3년 전에도 경성에 왔었나 보네. 그러니까 저렇게 감탄하는 거겠지?
“예전의 취봉루를 말씀하십니까? 주인어른이 바뀐 지 꽤 됐습니다. 이제 여기는…….”
점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수재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들고 편액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태평.”
“예, 예. 맞습니다. 여기가 태평거로 바뀌었습니다. 저희 가게 편액에 쓰인 글씨가 꽤 훌륭하지요?”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글씨는 괜찮군.”
수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동안 편액을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글씨도 있습니다요.”
점원이 웃으면서 수재를 붙잡고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수재, 일단 저희 태평거의 태평 두부와 과일 간식으로 입맛을 돋운 뒤에, 낙득자재를 한 솥 드시고 속 뜨끈하게 경성으로 가십시오.
가는 길에 살짝 방향을 틀면 차정사라는 사찰이 나오는데, 먼저 거기 벽에 쓰인 글씨부터 보시고, 사찰에 들른 김에 향불도 하나 올리시지요. 그다음에는 경성을 쭉 가로질러서 성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화려한 경성이야 앞으로도 볼 날이 많잖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급하지 않지요. 아무튼, 동문으로 나가서 십 리를 더 가면 거기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이 있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무원산 비석 글씨까지 다 보셨다면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때쯤이면 아마 해가 졌을 테니,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경성 저잣거리로 가셔서 신선거를 찾아보세요.
마지막으로 신선거에서 과로신선을 한 상 드시고 나면, 앞으로 경성에서의 날들도 후끈 달아오를 겁니다. 보양식 덕에 피로가 싹 가셔 정신이 번쩍 날 테니, 과거 급제는 따놓은 당상이지요.”
점원의 청산유수 같은 소개를 들은 수재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훌륭하군. 어쩐지 여기 장사가 잘된다 했더니, 점원들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런 거였어.”
수재의 칭찬을 들은 점원은 어색해하거나 창피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지 않고, 공손하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좌석으로 모실까요, 별실로 모실까요? 좌석은 다 같이 모여 앉아 왁자지껄한 맛이 있고, 별실은 깔끔하고 조용한 대신에 돈이 몇 푼 더 듭니다요.”
점원이 옆으로 비켜서면서 손으로 수재를 모시며 물었다. 젊은 수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 행수를 만나러 왔소.”
점원이 흠칫 놀랐다.
“나는 숙주 한씨, 한균이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