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60)

-청음-

경왕부 안에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연회석이라고는 하지만 자리에는 오직 세 사람만 앉아 있었다.

진안 군왕이 허리를 세우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인사말이라도 해야 하나요? 하하, 내가 직접 연회를 열어 본 적이 없어서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해야죠.”

정교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경왕 전하와 군왕 전하의 입부를 경하드려요.”

진안 군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경왕은 벌써 입에 음식을 욱여넣으면서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연회에 가무가 빠지면 섭섭하죠. 아, 여기 왕부에 있는 기녀는 아니고, 황궁에서 예인들을 빌려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내며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그전에, 전하께 축하 선물부터 드리고 싶어요.”

진안 군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그럼 선물을 받아야죠.”

진안 군왕이 잔뜩 기대에 찬 모습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선물을 드리기 전에 전하의 왕부에 있는 칠현금을 잠시 빌려도 될까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서둘러 칠현금을 가지러 갔다. 왕부 안에는 칠현금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오늘 초대한 예인에게서 칠현금을 빌려 올 수 있었다.

“급하게 구한 것이라 그리 좋은 칠현금은 아닙니다. 낭자께 양해를 구합니다.”

내시가 칠현금을 건네며 공손하게 말했다.

“칠현금이기만 하면 돼요.”

정교랑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칠현금을 받아 잠시 조율하고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 왕부에는 부족한 게 없을 거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남도 드릴 수 있겠죠. 저라고 특별할 건 없으니까요. 대신 새로운 거처로 옮기셨으니, 칠현금 연주로 액막이를 해 드릴게요.”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겠다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칠현금 연주가 시작되고도, 대전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경왕이 음식을 먹는 소리가 유난히 크기도 했고, 경왕이 이따금 지르는 괴성이 칠현금 소리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온 예인들은 잠시 편전에서 대기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기다리던 예인들은 칠현금을 빌려 간 것으로 보아 당장 무대에 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황궁의 예인들은 각종 제례나 연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천자 앞에서 가무를 선보이곤 했다. 그렇다 보니 왕부에서는 긴장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연회석 손님이 단 한 명뿐인 왕부에서의 공연이 산전수전 다 겪은 황궁 예인들을 긴장시킬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내시가 칠현금을 빌려 간 후 들려오는 말소리에 예인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급하게 구한 것이라 그리 좋은 칠현금은 아닙니다.”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예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칠현금을 빌려준 악공의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칠현금을 갑자기 빌려 간 일로 기분이 상했던 악공은 내시의 말에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감히 최(崔) 악공의 칠현금이 좋지 않다고 하다니. 그럼 이 세상에 좋은 칠현금은 열 개도 안 되겠네.”

예인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 낭자의 연주가 어떨지 모르니까, 창피해하지 말라고 미리 한 말이겠지. 저 내시도 참 배려심이 깊네.”

다른 예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맞장구쳤다.

예인들이 조용히 떠드는 새에, 대전 안에서는 칠현금 연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경왕이 때때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칠현금 연주 소리는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다.

예인들이 계속해서 웃고 떠드는 와중에 갑자기 최 악공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악공이 왜 저러지?”

예인 중 한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왕 앞이니 조심하시오.”

최 악공이 경왕 때문에 놀라 그러는 것일까 봐, 그의 옆에 있던 다른 예인이 나지막이 충고했다. 최 악공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잘 들어 보시오.”

최 악공의 말에 예인들이 잠시 멈칫했다.

뭘 들으라는 거야?

예인들이 귀를 기울이자, 편전 내에서 수군대는 목소리와 경왕이 내는 괴이한 소리, 그리고 끊임없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칠현금 연주는 끊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음 한 음이 완연하여 수군대는 소리를 뚫고 귓가를 맴돌았다. 보통은 악기 연주 소리를 들을 때 음 하나하나가 귓속으로 파고든다는 표현을 쓰지만, 지금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는 귓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귓불을 간지럽히는 듯 귓가에서만 잔잔히 맴돌았다.

그 느낌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자, 듣는 이들은 누군가가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귀를 열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칠현금 소리가 갑자기 격앙되었다. 흐르는 구름과 물 같기도 하고 하늘 가득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마구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한 칠현금 소리는 빠른 연주에도 소리가 섞이지 않고 느려질 때도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슬프고 처연한 칠현금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어디선가 나지막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 악공이 주위를 둘러보자, 예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슬픈 칠현금 연주 소리에 떠오른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안 그래도 초겨울이라 스산한 기운이 극에 달하는데, 어찌 이런 구슬픈 연주를 한단 말인가? 액막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리 비통한 연주를 하는 거지?”

최 악공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칠현금 소리는 더욱 비통하고 스산해졌다. 칠현금의 현이 한 줄 한 줄 떨릴 때마다 듣는 사람의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굳어 버린 최 악공은 칠현금의 운지법을 떠올리는 것도 잊은 채 연주 소리를 귓가에서 떨쳐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들리는 칠현금 소리가 말소리를 뚫고 귀에 꽂히는 것을 보아하니, 연주자는 마음속에 아무런 잡념이 없어.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어느 정도 경지에 달한 자라면 어떤 외부의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칠현금을 연주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연주를 듣게 만들 수 있다니! 소란스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내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지금도 저 칠현금 소리는 끊임없이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와.

사람의 마음은 하나이니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이 연주 소리는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여러 곳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에 잠긴 최 악공은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칠현금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기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소름이 돋은 이유는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몸에 한기를 느껴서였다.

가을의 쓸쓸함과 겨울의 한기가 스며있는 연주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얼음으로 뒤덮인 땅 위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소리는 사람을 가만히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이리저리 서성이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어지도록 만들었다.

뛰쳐나간다고? 그래서 액막이라고 한 거였나?

이 집에 남아 있는 더럽고 속된 것들이, 저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게 하려고?

최 악공은 이를 악물고 몸이 떨려오는 것을 참으려고 애썼다.

마음속에 슬픔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연주에 마음이 동할 텐데, 저 바보 경왕은 여전히…….

최 악공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저쪽에서 경왕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 추워! 추워! 너무 추워!”

경왕이 울부짖으면서 소리쳤다. 경왕의 목소리를 들은 최 악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에게까지 추위를 느끼게 하다니!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는 저 여인은 도대체!

최 악공은 마구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연주 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뒤 따스한 햇볕이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연주는 땅 위에 곤충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뭇가지 위에서 어여쁜 새가 봄의 노래를 지저귀며 포근한 봄날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듯 따사로웠다.

최 악공은 속으로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잔뜩 긴장했던 그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최 악공은 언 땅에 새싹이 움트듯 온몸에서 활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지자, 최 악공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푸르른 봄날에 나들이를 나간 어린아이와 소녀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최 악공은 심호흡을 깊이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편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조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기라도 하다는 듯, 모든 것은 그가 처음 칠현금 연주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만졌다.

꿈이 아니었어.

“최 악공, 칠현금 잘 썼습니다.”

내시가 편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칠현금을 건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최 악공은 칠현금을 안고 있던 내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내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최 악공의 칠현금은 그의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가 연주자의 길로 접어든 후부터 지금까지 쭉 쓴 것이니, 족히 이십 년은 넘은 칠현금이었다.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며 자나 깨나 옆에 모시고 살아 수족처럼 친숙한 이 칠현금이, 지금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경외감이 들었다.

“최 악공?”

내시가 성가시다는 듯이 그를 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두 손으로 서둘러 칠현금을 받았다.

이제 우리 차례겠지? 어서 가서 그 낭자를 뵈어야겠다.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최 악공이 칠현금을 고쳐 안고 감격에 찬 얼굴로 내시의 뒤를 쫓아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는 내시의 뒤를 따르던 예인들을 헤치고 제일 앞에 서서 연회석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쯤, 내시들이 그를 불러 세웠다.

“뭐 하는 거요?”

문 앞을 지키던 내시들이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최 악공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연주해야지.”

“연주는 무슨. 연회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시가 최 악공을 바보 보듯 쳐다보며 대꾸했다.

끝났다고? 벌써?

최 악공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청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정말로 연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는 시녀들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자 최 악공과 함께 편전을 나온 예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최 악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끝난 지 한참 됐는데.”

내시의 말이 최 악공의 귓속에 파고들자, 그는 온몸이 저릿하게 떨려오면서 마비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요량삼일(繞梁三日: 음악 소리가 사흘이나 사라지지 않고 대들보를 두르고 있다는 뜻으로 매우 아름다운 음악을 비유하는 말)!

이게 바로 성자께서 말씀하신 요량삼일이로구나!

최 악공은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칠현금을 안은 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 악공, 왜 그러시오?”

대청 앞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대청 앞의 시끌벅적함을 알 길이 없는 진안 군왕은 왕부의 대문 앞에서 정교랑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알았으니까, 앞으로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와요.”

진안 군왕이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비록 궁에서 나오긴 했어도, 왕부 밖을 마음대로 나가진 못하거든요.”

진안 군왕의 뒤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채 걸어오던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선물 고마워요. 연주를 들은 덕분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것 때문은 아닐걸요. 그 곡은, 사람한테 들려주는 곡이 아니거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어이, 어이.”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지, 듣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왜요. 무서워요?”

진안 군왕이 기가 찬다는 듯이 하, 하면서 소매를 털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근데 기분이 좋아진 건 진짜예요. 어제는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뒷짐을 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으셨어요. 내가 출궁 전에 아우의 포상 문제를 청하지 않았다고 못마땅해하세요. 모처럼 찾아온 좋은 기회인데, 왜 아우들 생각은 안 하고 경왕과 함께 살게 해 달라는 청을 올렸느냐며 타박하시더라고요.”

“인지상정이니, 누굴 탓할 일이 아니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괜히 속상해한다는 뜻인가요?”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것도 인지상정이니, 괜히 속상해한다고 볼 순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다 각자의 입장이 있다, 이런 뜻인가요? 아우들이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어머니께서 자연스럽게 아우들을 먼저 챙기는 것도 인지상정인 거고, 내가 밖에서 홀로 지낸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머니의 아들인데 아우들 생각밖에 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고 질투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아니에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맞아요.”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경왕부를 떠났다.

“진안 군왕이 또 정 낭자를 초대했다고?”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느냐?”

귀비가 물었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군왕이 황궁의 예인들을 잠시 빌려 갔다가 돌려드리겠다며 지금 황궁에 들어와 폐하를 뵙고 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예인들을 돌려주는 걸 왜 자기가 꼭 직접 와야 해? 그건 궁에 들어오기 위한 핑계일 뿐이지! 녀석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다.”

황궁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폐하와 태후를 뵙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경왕의 병을 고치려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마마, 폐하께서 간식을 보내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비가 자세를 고쳐앉고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이건 진안 군왕께서 특별히 황궁에 가져오신 겁니다. 전하께서 귀비마마께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공손하게 찬합을 내밀었다. ‘진안 군왕’이라는 네 글자에, 웃고 있던 귀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이건 정 낭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냐?”

황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이 건넨 찬합에 든 과일 간식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정 낭자를 위해 만들었던 건 벌써 다 먹었고, 이건 폐하와 마마께 드리기 위해서 새로 만든 겁니다. 거기에 정 낭자가 알려 준 조미료를 더 넣었으니, 폐하께서 한번 맛을 보십시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내시가 시식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황제가 젓가락을 들고 간식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있구나.”

황제가 간식을 천천히 음미하고 감탄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출궁한 이후로 처음 입궁하는 것인데, 좀 더 있다 가지 않고.”

“경왕 혼자 왕부에 남아 있는지라, 걱정이 되어서요.”

황제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는 뭐라더냐?”

황제가 넌지시 물었다.

“폐하, 신이 정 낭자를 초대한 것은 경왕의 병을 봐 달라고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몸을 일으켰던 진안 군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무엇 때문이지?”

“신은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랐습니다. 궁에 있는 아우와 누이들은 모두 신보다 어렸기에, 신과 또래인 이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경왕을 데리고 강주로 가서 정 낭자에게 진료를 부탁했을 때의 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때 정 낭자의 태도는 몹시 단호했고 매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정 낭자가 워낙 말을 듣기 거북하게 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시의 내용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정교랑을 직접 대면했던 적이 있으니 황제 역시 그녀가 얼마나 고집 세고 무뚝뚝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신은 부아가 치밀어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정 낭자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 나오는 대로 마구 퍼붓고 나왔지요.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 낭자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쭉 품고 있었지요.”

“미안한 마음?”

황제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네. 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 낭자가 꽤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그때 무례하게 말하며 협박했을 때도, 뒤늦게 사과한 지금도, 정 낭자는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요. 아무래도 정 낭자는 좀, 좀…….”

진안 군왕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 같더냐?”

황제가 진안 군왕의 말을 받아치자, 진안 군왕이 손뼉을 쳤다.

“네, 네. 맞습니다. 바로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뜻입니다.”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보게. 그게 어떻게 내 뜻이 된 게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빙긋 웃으며 진안 군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꽤 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하고, 친해지기 쉽고.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여인이 아니더냐.”

황제가 한 마디 덧붙였다.

“여인이요? 신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모든 여인이 다 그렇습니까? 신이 알고 지내던 누이들은 그렇지 않던데요. 신이 느끼기에는, 정 낭자가 육가아와 비슷합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슷하긴 하구나. 하나는 예전에 바보였고, 하나는 지금 바보가 됐으니.”

황제는 남에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혼잣말을 한 뒤, 젓가락으로 간식을 하나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폐하, 조금씩만 드시지요. 워낙 달콤하다 보니, 많이 드시다가는 탈이 나실 수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걱정 어린 말투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가 웃으면서 젓가락을 내려놓자, 진안 군왕은 물러나겠다며 예를 올렸다.

“그럼, 신은 이제 정말로 물러나겠사옵니다.”

진안 군왕이 황제를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고 마지막으로 큰절을 올린 뒤 물러났다.

해 질 무렵이 된 터라, 대전 안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천천히 물러나는 진안 군왕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나간 문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황제는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앞에 놓인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고 간식 하나를 더 집으려 할 때였다.

“폐하,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더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내시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네놈은 군왕의 말을 참 잘 듣는구나.”

황제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깜짝 놀라 ‘죽여주시옵소서’를 연발했겠지만, 이 내시는 달랐다.

“소인이 어찌 군왕의 말을 듣겠사옵니까. 소인은 폐하의 말씀만 따르옵니다.”

내시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찬합 뚜껑을 닫았다.

“폐하, 군왕께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시지 마십시오. 경왕 때문에 일찍 간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이제는 진안 군왕께서 종친 신분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궁을 드나들었다가는 어사대의 탄핵을 받을 것이옵니다. 군왕께서 궁에 있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친이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탄핵 타령이야?”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폐하, 귀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황제가 가볍게 손짓하자, 내시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귀비가 눈웃음을 보이며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나, 군왕은 벌써 갔나 봐요?”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묻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빨리 갔대요? 아쉽네요. 군왕과 함께 태후마마를 뵈러 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예전과 달리 궁에 들어오기 쉽지 않을 텐데 좀 더 머무르다 가지 않고.”

귀비가 웃으면서 말하던 도중,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찌 예전과 다르단 말이오? 위낭이 궁에 들어오는 게, 왜 어렵다는 거요?”

황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자, 귀비는 순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폐하, 소첩은, 소첩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황제가 귀비의 말을 끊고 냉랭하게 말했다.

“위낭은 종친 신분이니 예전처럼 궁에 드나들었다가는 어사대의 탄핵을 면치 못할 거란 말이오? 어느 놈이 과연 그런 짓을 하는지, 짐이 두고 보겠소!”

황제는 무섭게 호통을 치더니 소매를 홱 털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황제의 면박에 귀비는 창피하고 화가 났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기는 무안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 버릴 수도 없어서 귀비는 한참을 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망치듯 대전을 나왔다.

“입궁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는데,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붉히신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나를 그런 식으로……. 무엇보다 억울한 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귀비의 궁 문밖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전각 안에서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마마의 잘못이 맞습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귀비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난 그저 좋은 뜻에서 진안 군왕을 보러 간 거예요. 겸사겸사 간식을 보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요. 그놈이 먼저 함정을 파 놨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마마, 다른 이가 졸렬한 게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난 애초부터 놈이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줄 알았어요! 궁에 있을 때는 사탕발림으로 태후의 마음을 사로잡고, 폐하 앞에서는 평왕의 걸림돌이 되더니, 궁을 나간 지금은 더욱 겁도 없이 날뛰고 있잖아요!”

귀비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이 고개를 저었다.

“마마,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셔야 합니다. 경왕과 진안 군왕, 그리고 정 낭자까지, 그들은 모두 사소한 사람일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들이 사소한 거라면 뭐가 큰일이게요? 만에 하나라도 경왕의 병이 나으면요?”

귀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병이 낫는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평왕은 경왕보다 나이도 많고, 어쨌거나 경왕은 바보로 살았던 아이입니다. 반면에 평왕은 근 몇 년간 국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교양을 쌓았고요. 생각해 보세요. 경왕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벌써 조회까지 나가는 평왕을 두고, 삼 년 내내 바보로 산 경왕을 택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려 삼 년입니다, 마마!”

고능준이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자질을 갖춘 평왕의 성품이 부도덕하다면?

귀비가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주먹 쥐었다.

고능준이 귀비의 손을 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마마, 걱정이 지나치신 듯합니다. 신이 전에 말했잖습니까. 바보였던 사람의 말을 믿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귀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능준이 말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왕의 안정입니다. 평왕이 학문에 얼마나 통달했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더욱 중요한 건 평왕의 품행이지요. 반대로, 군왕은 사람이 좋으면 좋을수록 상황이 나빠질 겁니다. 종친 주제에 그리 눈에 띄는 게 꼭 좋다고만 볼 순 없지요.”

귀비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늘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 이제 난 어떡하지요? 폐하께서는 나를 의심하고, 더 이상 체면도 지켜 주지 않으시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살아요.”

귀비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마마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평소처럼 지내십시오. 대신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십시오. 마마께서 개의치 않는다면, 남들도 개의치 않을 것이고, 마마께서 신경 쓰면 쓸수록, 남들 또한 신경 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을 끝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마께서는,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경솔하게 신을 부르지 마십시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상공 자리에 앉지도 못하면서, 야밤엔 입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진소 대접을 받고 싶은가 보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마마께서 황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도 조심해야지요.”

평왕이 제위에 오르더라도, 황후가 태후에 오르는 것이 이치에 합당했다. 태후는 천자를 훈계할 수도, 후궁을 처벌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귀비가 천자의 생모라고는 하나, 일이 생길 경우 조정 대신들은 귀비 편에 서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귀비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해 줄 수 있는, 남의 계략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대신들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훗날 고능준이 조정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고능준이 키운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귀비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리라.

고능준이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는지 귀비 자신도 잘 알았기에, 귀비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고능준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또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다.

“십삼, 십삼.”

방 안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회랑 아래서 새장을 구경하고 있던 진십삼은 서둘러 대답한 뒤 안쪽을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벌써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갑니다, 가요.”

진십삼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자 위에 오른 요리는 평소보다 가짓수가 많았다.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십삼이 예를 올렸다. 대청 분위기가 부쩍 밝아졌다.

“우리 진호가 또 한 살을 먹었구나. 축하한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제자매들이 진 시강을 따라 술잔을 높이 들자, 진십삼도 술잔을 들고 답례를 하며 모두와 함께 잔을 비웠다.

진십삼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따로 생일 연회를 열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서 식사하되 평소보다 가짓수를 늘려 다양한 요리로 생일을 축하했다.

진십삼은 형제자매들이 준 선물을 가득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십삼의 방 안에는 이미 선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옆에 있던 사환이 선물을 하나하나 짚으며 각 선물이 어디에서 온 건지 설명했다.

“주육낭은 뭘 선물했느냐?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진십삼이 곧바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야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웃으면서 선물 더미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진십삼이 미소를 보였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면, 일부러 시간을 계산해서 보낸 거로군.

진십삼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단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또 어느 재수 없는 놈한테서 뺏어 온 건지 모르겠네.”

진십삼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단도를 손에 들고 몇 번 돌려보았다.

“공자님께서 주 공자께 선물하신 것보다 못한 거네요.”

사환이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공자님께서 언제 물건이 귀한지 아닌지를 따지셨어? 중요한 건 마음이야.”

다른 사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단도를 사환에게 던져 주었다.

“서재에 걸어 두어라.”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서재로 향했다. 진십삼은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가 주육낭이 준 상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 낭자의 것은?”

“아, 정 낭자의 선물도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대답하고는 선물 더미를 뒤적거렸다. 진십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로 빼놓을 것이지.”

진십삼이 선물을 찾느라 분주한 사환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찾았습니다!”

사환 하나가 명첩이 붙은 선물 하나를 높이 들고 기쁘게 외쳤다. 사환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진십삼은 사환이 왜 그 선물을 한참 찾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십삼이 매해 받는 선물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붓, 먹, 종이와 벼루고, 다른 하나는 옥대나 향낭 따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주육낭이 선물한 잡동사니 같은 물건이었다.

사환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선물 더미에서 꺼낸 것이었다. 매년 제일 많이 받는 종류다 보니, 선물 더미 속에 파묻힐 수밖에.

진십삼이 손을 뻗어 선물을 받아왔다. 정교랑이 보낸 선물은 네모난 벼루였다. 꽤 값나가는 경성의 명품 벼루로 진십삼이 받은 다른 벼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바쁘신 반근 관리인이 손수 고른 것일 테지. 반근은 선물을 아주 신경 써서 고르니까.”

11월이 되자 경성 날씨는 부쩍 서늘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급기야 찬바람이 불어 행인들은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성문 가까이에 있는 저택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자, 쪽문에서 대화하던 두 여인이 마차를 바라보았다.

“반근.”

시녀가 마차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비단 치마를 입은 몸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손을 들어 너울을 쓰며 환하게 웃었다.

좀 전까지 시녀와 대화하고 있던 어린 몸종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를 피했다.

“어? 아직 얘기 다 안 끝났는데?”

놀란 모습으로 뛰어가는 어린 몸종의 뒷모습을 보며 시녀가 외쳤다.

“나중에 볼일 있으면 점포로 와. 집으로 찾아오지 말고.”

시녀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다급하게 뛰어간 어린 몸종은 모퉁이를 돌아 종적을 감췄다.

“새로 산 몸종이야? 나 때문에 놀랐나? 왜 도망가지?”

몸종이 시녀의 시선을 따라 길가를 내다보며 웃었다.

“그러게. 장씨 댁 찬모가 워낙 유명하니 놀랄 만도 하지. 새로 산 몸종은 아니고, 사공자를 찾아온 애야. 참, 너랑 고향이 같아. 강주 출신이라던데?”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 강주 사람이라고? 누군데?”

몸종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평범하진 않네. 경성 제일 화괴 주 낭자의 시녀거든.”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몸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언니, 함부로 말했다가는 큰일 나. 사공자께서 어떻게 기방 여인과 친분이 있어?”

“누가 강주 선생 댁 몸종 아니랄까 봐, 이젠 군자의 도까지 배웠네.”

시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니, 이 얘기가 퍼져나간다면 사공자께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언니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아, 알아. 사공자께서 주 낭자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몸종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야. 강주에서 납치되어 인신매매로 팔려 온 몸종인데, 2년 전에 우연히 사공자와 마주쳐 알게 된 사이래. 평소엔 딱히 왕래가 없었는데, 이번에 사공자께서 경성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날 찾아온 거야.”

시녀가 말했다. 몸종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그 어린 몸종이 뛰어갔던 길을 내다보았다.

“근데 왜 날 보는 게 겁나서 도망친 것 같지?”

몸종이 물었다.

“너 무서워서 도망간 거라니까.”

시녀가 가볍게 대꾸하고는 몸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화제를 바꿨다.

“오늘은 어쩐 일로 한가한가 봐?”

“갑자기 경성에 반근이 무더기로 생겨나는 바람에, 이 장반근은 쓸모가 없어졌지 뭐야. 돈도 못 벌게 됐으니, 언니네 와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까 하고.”

몸종이 장난스럽게 한탄하는 시늉을 했다. 시녀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굳게 닫힌 저택 문 너머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퉁이 벽에 숨어 있던 춘령이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춘령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춘령은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저 반근은 그때 날 봤을 거야. 몇 년이 흐르긴 했지만, 날 알아볼 수도 있어.

춘령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댔다. 춘령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열두 살인 지금은 어릴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때 모습이 남아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어.

반근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 표독한 여인은 분명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두 자매의 살길을 끊어 버렸던 것처럼, 똑같이 날 죽이려 들겠지.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아무 의미도 없이 죽는 게 두려울 뿐이지.

춘령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와 굳게 닫힌 대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춘령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눈이 내리네.

춘령은 옷깃을 여미고 저잣거리 속으로 빠르게 몸을 감췄다.

“눈 온다!”

정칠랑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신이 난 모습으로 외쳤다.

“어서 휘장 내려라. 추워 죽겠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확 잡아당기며 휘장을 내렸다. 정 이부인의 손에는 손난로가, 발치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지만, 여전히 온몸을 덜덜 떠는 정 이부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사서 고생이야!”

정 이부인이 다시 휘장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역참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부인, 아직 대여섯 리 남았습니다.”

시종이 대답했다.

아직도 대여섯 리나 남았다고?

정 이부인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끄는 야윈 말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내가 좋은 말로 바꾸자고 했잖아요.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어른도 이렇게 추운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두꺼운 겨울용 두봉을 두른 정 이노야는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두 부자는 머리만 바깥으로 내놓은 채 장난을 치며 웃었다.

“지금 누굴 탓하는 거요? 누가 당신더러 돈을 그리 조금 챙겨 오라고 했소? 그 푼돈으로 경성까지 어떻게 버티라고. 지금 와서 좋은 말로 바꿀 만한 돈도 없고.”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내가 돈을 적게 챙겼다고요? 형님이 돈을 안 주는데, 그럼 내가 소매 걷어붙이고 돈이라도 빼앗아 왔어야 한단 거예요, 지금?”

정 이부인은 말을 하다 보니 울화가 치밀어 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당신 딸도 그래요. 우리가 경성에 가는 걸 빤히 알면서 돈도 한 푼 안 보내 주고. 그 조 집사란 놈도 평소에는 우리 돈을 물 쓰듯이 하면서, 이번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잖아요!”

“그놈은 나중에 제대로 손봐 줘야지.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좌지우지하니까, 조 집사 놈도 그 뒷배를 믿고 설치는 거요. 우리가 경성에서 자리를 잡으면, 주씨 가문 따위가 대수겠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역참에 도착하면, 좋은 역마로 바꿔요. 돈 나가는 일도 아닌데.”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허튼소리. 우리가 어찌 역마를 쓸 수 있단 말이오?”

정 이노야는 더 이상 정 이부인을 상대하지 않고,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착하지 우리 희가아. 말 타고 경성에 가면 사탕도 먹고 큰 저택에 살 수도 있을 게야.”

어린아이가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정칠랑도 서둘러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 저도 큰 저택에 살래요. 새 옷도 사고, 장신구도 새로 사고요.”

“그래, 그래. 다 사자, 다 사. 이 아비가 다 사 주마. 너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사 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정 이노야가 기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 이부인이 세 사람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정 이노야의 발치로 화로를 슬며시 밀어 주었다.

날이 저물 무렵, 정 이노야 일행은 드디어 역참에 도착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낡고 허름한 다른 역참들과는 달리 새로 지은 역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큰불이 나는 바람에, 조정에서 돈을 하달하여 새로 지은 겁니다.”

문지기가 말했다. 문지기는 정 이노야 일행이 건넨 역권을 받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 정말 죄송하지만 방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개?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정 이노야의 뒤에는 딸아이 셋과 두 첩실, 그리고 일고여덟 명의 여종들과 몸종들, 열댓 명의 시종들이 서 있었다. 마당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자, 정 이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방이 없다뇨?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데, 우리더러 방 하나에 부대끼고 있으라고요?”

정 이부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최소한 방 세 개는 더 구해 오시오.”

미간을 찌푸린 정 이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행여나 역졸이 자신의 직첩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봐, 역졸의 눈앞에 대고 직첩을 흔들며 자신의 신분을 알렸다.

“대리시 관리라고? 대리시 관리라 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여기에 묵고 있는 이들을 내쫓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역졸의 말을 들은 역승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바깥을 가리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지난번에 뭐 때문에 이곳이 불탔는지 그새 까먹었느냐? 아니면, 또 한 번 불이 나야 관리들이 정신을 차릴까!”

역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요. 이자 역시 관리 신분을 앞세워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돈이라도 더 내겠단 말도 없이요.

역졸의 말에 역승은 더욱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방이 없을 수가 있어?”

“그러게. 여긴 역참인데 말이야.”

“역권에 직첩까지 있는데, 어째서 여기 못 묵는단 거지?”

마당의 소란 때문에 역참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유모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첩실의 옆에 꼭 붙어 있던 아이들도 추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역참의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정 이노야 일행을 쳐다보았다.

대청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들어 관리들이 점점 더 건방지네. 직첩은 본인한테나 있는 거지, 처자식한테도 있는 줄 알아?”

한 젊은 사내가 투덜댔다.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그를 향해 그만하라고 손짓하자, 사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노야는 정씨라고요. 이번에 대리시에 부임하려고 경성에 가는 건데.”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젊은 사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저런 관리도 대리시에 간다고?”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호위 몇 명이 하얀 피부의 뚱뚱한 중년 사내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오. 체통을 지킬 줄 알아야지.”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지키던 호위들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칙사께서 납시는군.”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칙사라고 불린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년 사내는 역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역참 안으로 들어올 때 관례에 따라 큰 소리로 신분을 알린 터라 다들 그가 어명을 전하는 칙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칙사는 자신의 신분만 알렸을 뿐, 그 후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다. 자신이 묵을 상등 방 한 칸 외에는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호위들을 마룻바닥에서 자게 두었다. 먼 길을 떠나온 터라, 칙사 일행은 잠시 대청에 머물며 조촐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칙사가 나선다는 것은, 청백리가 탐관오리에게 죄를 선고하는 일만큼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기대에 찬 모습으로 문가에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인, 어찌하시겠습니까?”

대청을 등지고 있던 역졸은 칙사가 나온다는 것을 모른 채 정 이노야 일행에게 느긋하게 물었다.

“아니면, 여기 묵고 있는 백성들을 내쫓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허튼소리!”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란 역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역졸은 호통을 친 사람이 칙사임을 알아보고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 대인, 그게 아닙니다. 소인이 그러겠다는 게 아니오라, 여기 이분이…….”

잠자코 듣고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들 말단 관리가 제일 얄밉다고들 하지. 내 지금껏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말단에 있는 놈들의 괴롭힘을 수도 없이 당했지만, 지나가다 마주친 역졸 나부랭이까지 날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줄은 미처 몰랐네.

“네 이놈!”

정 이노야가 역졸에게 삿대질하며 혼을 내려던 찰나,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감히 백성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욕보이려 하다니! 네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칙사가 호통을 치고는 역졸의 면상에 거침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역졸은 하마터면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를 뻔했지만, 칙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정 이노야에게 가서 읍을 했다.

“정 대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다니, 제가 실례했습니다.”

칙사가 정 이노야에게 겸손하게 말하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다는 기대를 잔뜩 안고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어. 청백리가 탐관오리를 혼쭐내는 장면은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저 칙사 양반이 저리 겸손하게 대할 정도면, 저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더 높은 사람인 거야?

사람들이 수군대며 추측하는 사이, 칙사는 뒤늦게 뛰어나온 역승을 몰아붙이며 매섭게 혼을 냈다.

“예, 예. 대인께서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이 지금 당장 마련해 보겠습니다.”

역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정 이부인에게 직접 길을 안내하면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체면을 구기지 않게 된 정 이노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대인께서는 누구신지…….”

정 이노야가 정중하게 답례하며 물었다.

“소경문(蘇景文)이라고 합니다. 중서문하성의 공사(公事)지요.”

칙사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소 공사셨군요.”

정 이노야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내심 기뻐했다.

역시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게 좋긴 좋아. 아무나 붙잡고 인사해도 죄다 중서문하성 관리니 말이야.

“소 공사께서는 타지에서 공무를 보고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정 이노야가 물었다.

“예. 명을 받아 무평 지역의 재해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한 손으로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정 대인,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소 공사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의 호위들이 즉시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다.

“비키시오. 대인들께서 공무를 논하시는 자리니, 냉큼 자리를 비키시오.”

정당한 이유다 보니, 대청 안이 분주해졌다. 곧바로 사람들 열댓 명이 대청 밖으로 내쫓기고, 탁자 다섯 개가 비워졌다. 정 이노야는 소 공사의 탁자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탁자에 앉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속으로 열불이 뻗쳤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좀 전의 젊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연로한 사내가 그의 어깨를 세게 눌렀다.

“아버지.”

젊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인정에는 어긋나나, 이치에는 맞는 일이다.”

연로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 부자가 소 공사의 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 이노야와 소 공사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제가 눈이 어두워 소 공사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정 대인께서 절 모르시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정 대인을 몰라뵙는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 대인께서 큰 공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소 대인께서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십수 년간 본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감히 큰 공을 세웠다기에는…….”

“정 대인의 따님께서는 의형제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폐하를 알현하기도 했잖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 여식이 철없이 군 탓이지요. 이번에 경성에 들어가면, 제가 꼭 폐하께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대화를 듣던 두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정 낭자는 폐하께 새로운 병기인 신비궁까지 바쳐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 낭자를 낳고 길러 준 정 대인 또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게 아닙니까.”

곧이어 두 대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청을 가득 메웠다. 대청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정 이노야가 웃으면서 술잔을 높이 들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자, 자, 정 대인. 소생이 대인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소 공사의 호위가 웃으며 직접 정 이노야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이고, 당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 이노야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 이노야는 온몸을 철갑옷으로 두른 호위들을 쳐다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잘들 봐 두라고. 무려 천자의 친위대인 신위군이 나한테 술을 따라 준다 이거야.

변방 지역의 관리와 조정 관리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 천양지차라는 말이 이런 뜻이로구나.

이제부터 나 정동(程棟)은, 넓은 바다에서 뛰노는 물고기가 될 테다!

한바탕 먹고 마시니 먼 길을 달려온 고단함에 정 이노야는 금세 취기가 올랐다.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고 예를 표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정 이노야가 자리를 뜨자 소 공사도 호위들을 데리고 휴식을 취하러 갔다.

한참을 추위에 떨며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대청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정 대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칙사조차 그를 깍듯이 대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오. 그 사람이 정씨라는 거 못 들었소? 게다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따님이 있다잖소.”

누군가가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그 여인을 말하는 거야? 그 여인이라면 아주 유명하지.”

“도교 이 진인께서 직접 사사한 제자라던데.”

“그럼 신선이 아니오?”

“그러니까 칙사가 저리 깍듯이 대하는 게로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더 산으로 가자, 젊은 사내가 부친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연로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두 부자가 탁자의 반대편에 홀로 앉아 있던 수척한 중년 사내에게 공수의 예를 표했다.

“관인(官人),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수재, 편히 쉬시구려.”

중년 사내가 답례했다.

“관인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방을 쓰는 건 어떠신지요?”

젊은 사내가 물었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 앞에 놓인 냉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천천히 씹었다. 그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거나 누운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도 여기서 자는데, 나도 그래야지 않겠소이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연로한 사내는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후 젊은 사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원조, 가서 저 대인의 술값을 계산하거라.”

이들은 바로 한원조 부자였다. 한 대인은 진급으로 인해 경성에 가는 길이었고, 한원조는 과거를 보기 위해 부친과 함께 경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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