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7권
-천륜-
정 이부인이 대성통곡하면서 말했다.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저희도 알아요. 어머님께서도 몸이 편찮으시고, 아주버님도 크게 병이 나신 터라, 이노야가 여길 떠나 먼 경성까지 가 버리면, 집에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요.”
정 노부인은 정 이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찻잔을 바닥으로 내던져 깨트려 버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지금 기력이 펄펄 솟는 게 보이지 않느냐! 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 아들이 내게 상을 안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첫째의 몸이 안 좋다고 해도, 우리 집에 사람이 없다더냐? 집안에서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손자가 수두룩해.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증손자까지 보았는데, 우리끼리 이 정씨 집안 하나 못 지켜낼까! 그리고 둘째가 경성으로 가는 게 어찌 자기 자신을 위해서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서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정 노부인이 호통을 쳤다.
“첫째가 병을 앓더니 머리까지 어떻게 된 게야? 당장 첫째를 불러오너라!”
정 노부인의 말에 황급히 정 대노야를 부르러 달려나간 여종을 보며, 정 이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 노부인의 방 안에서는 반나절 내내 호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 대부인은 문가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정 대노야는 아직 병중이니, 제발 남편 대신 자신이 벌을 받게 해 달라고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우리 둘째의 앞길을 막는 것은 곧 우리 정씨 가문의 앞길을 막는 것이니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어! 둘째가 네 친형제인데, 어째서 너는 둘째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냐!”
“어머니, 저는 진심으로 아우를 위해서…….”
정 대노야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고 설명하려 했지만,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노야, 제발, 제발요. 제발 그만하세요.”
정 대부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울었다. 정 대노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 대노야도 결국 포기했는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사죄했다.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어머니.”
정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둘째에게 여비나 두둑이 챙겨 주거라. 경성은 물가가 비싸 살기 힘들다던데, 이리저리 접대하려면 둘째한테 돈 나갈 곳이 많을 것이야.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반나절 내내 참고 있던 정 대부인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 집에 돈이 없어요. 게다가 이방 내외는 경성에 가면 더욱 돈 걱정이 없을 거고요. 교랑이…….”
이번에는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끊었다.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집에서는 허리띠를 졸라맬지라도, 먼 길을 떠날 때는 돈을 충분히 챙겨야지요. 아우가 망신당할 일 없도록 소자가 잘 준비하겠습니다.”
정 노부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네 아우가 집을 떠나 그렇게 먼 곳까지 가는 이유가 뭐겠느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한 일이야. 그건 다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한데, 어찌 그렇게 철없이 아우에게 불만을 품는 게야.”
정 노부인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상경했다간 자신의 앞길만 망치는 게 아니라 정씨 가문까지 무너뜨릴 테니 걱정할 수밖에요.
정 대노야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정 노부인에게 그간의 일들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정 대노야는 공손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부인과 함께 군말 없이 물러났다.
“제수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직접 말하십시오. 어머니께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더 이상 어머니를 앞세우지 말란 말이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기도 하고, 더는 우리 형제지간의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역시 대노야께서 어머님 생각을 많이 하시네요.”
정 대노야는 정 이부인의 대답을 무시한 채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한 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는 게 좋을 거다. 최소한 새해라도 맞이하고 올라가는 게…….”
편찮으신 어머니와 형님을 집에 두고 떠나게 되어서 송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에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형님,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새해가 되고 나서 상경하라고요? 대리시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입니까?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자리를 메꾸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고요!”
“네 말대로, 대리시는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곳이야.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라. 경성 바닥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꺼림칙해.”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분통을 터뜨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형님!”
참다못한 정 이노야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왜 그러는 겁니까, 도대체! 저는 조정의 명을 따라 경성으로 부임하러 가는 겁니다. 칼산과 불바다를 넘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정씨 가문을 패망의 길로 이끌러 가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가게 막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순간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말은 여인네들이나 하는 소리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였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의 생각 또한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제가 형님보다 잘난 게 그렇게 싫습니까?”
“퉤!”
정 대노야가 곧바로 침을 뱉었다.
“이놈아, 네가 나보다 못났다 한들 그게 무슨 기뻐할 일이라고!”
“그런데 왜 경성으로 못 가게 막는 거냐고요!”
“경성은 칼산처럼 위험한 곳이야. 이대로 가 봤자 넌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처지밖에 안 돼!”
정 대노야가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치자, 정 이노야는 흠칫 놀라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실소를 터트리며 대꾸했다.
“형님, 그게 사실이라 해도 만천하의 사람들은 다 칼산으로 뛰어드는 길을 택할 겁니다.”
“하긴 그렇지. 온 세상이 죄다 관직을 얻어 출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이야. 어찌 보면 꼭 맨발로 칼산 위를 거니는 것 같아.”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형님의 병세가 많이 심각해졌구나.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같네.
중얼거리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짜증과 울화가 사그라들고 도리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형님, 어서 가서 쉬십시오. 제가 벼슬살이를 한 지도 어느덧 십수 년입니다. 아직도 관직 생활에 대해 잘 모를까 봐서요?”
“관직에 오른 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넌 이 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 보아라. 교랑이 우리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그 아이가 너를 경성으로 불렀을 것 같아? 교랑은 절대로 널 위해 상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겠다고 하셨어도, 교랑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야.”
정 대노야의 말을 듣다 못한 정 이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그 계집이 어딜 감히요! 충효도 모르는 그런 자식은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용납하지 않아요!”
“하늘이 용납하고 자시고 간에, 일단 냉정하게 생각해 봐라. 교랑의 그 대단한 수완으로 황제 폐하께 못할 말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 머리 위로 상이 떨어졌어. 누군가가 이번 일을 강행했다는 뜻이겠지. 이건 절대로 그 애가 원하는 일이 아니야. 그 애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 애와 원수지간인 사람이 저지른 일일 거다. 네가 이대로 상경하면, 교랑의 원수의 편에서 칼잡이를 자처하는 꼴이 돼!”
정 이노야는 세상에 이런 바보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목청을 높였다.
“교랑은 제 딸입니다! 제가 낳은 친딸이라고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절 밀어낸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 대노야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정 이노야는 그만하라며 손짓했다.
“형님, 지난번 일은 제가 형제지간의 의리를 저버린 게 아닙니다. 형님께서 너무 지나치셨어요. 그 혼수는 본디 그 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천륜을 거슬렀다고 볼 수는 없죠. 교랑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형님이지 저와는 무관하단 말입니다.”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발걸음을 돌렸다.
“형님, 전 내일 떠날 겁니다. 오늘은 짐을 챙겨야 하니, 송별 연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형님은 몸조리나 잘하세요. 전 관청 사람들과 인사 나누러 가겠습니다.”
정 이노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외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뭐? 혼수 때는 내가 지나쳤다고? 네놈과 무관하다고?”
정 대노야는 열이 받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그래, 내가 지나치긴 했지. 너와도 무관한 일이라고 치자.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경성에 가거든 절대 그 아이에게 지나친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럼 그 아이가 천륜을 거스른다 해도 도리가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 대노야가 흠칫 놀랐다.
천륜을 거스른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때문이라고요?”
정 대부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건 협박이오.”
정 대노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의심쩍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낸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정 이노야는 밤늦게 술에 떡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술도 깨지 않은 채 기어이 마차에 몸을 싣고 식구들과 함께 도망치듯 강주를 떠났다. 집안사람들이 배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것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괘씸하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어 아예 배웅할 생각조차 안 했지만, 정 대노야는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자녀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성 밖으로 쫓아가 그들을 배웅했다.
“정말 복이 많은 집안이야.”
“칠랑 아씨는 나중에 경성에서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시겠지?”
“듣자니 교랑 아씨는 황제 폐하와도 아는 사이래. 이부인의 말을 들어보니까, 칠랑 아씨는 잘하면 황실과 연을 맺을지도 모른다던데?”
“이야, 그럼 우리 가문도 황실의 종친이 되는 거야?”
마당에서 몸종들과 여종들이 수군거리며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육랑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가에 있던 꽃병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다 꺼져!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날카로운 정육랑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종들과 몸종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정육랑이 창가에 서자, 국화꽃 향을 품은 바람이 연꽃 연못을 지나 정육랑의 온몸을 휘감았다.
황금빛 가을인 10월이 됐으니, 며칠만 더 지나면 이 집에서 국화꽃 시회를 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모두 떠났어. 다 그 경성의 바보를 언니라고 부르며 쫓아갔다고.
정육랑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걘 나쁜 사람이야! 그 바보는 나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조만간 그 바보한테 당하고 말거야!”
정씨 저택의 문 앞에는 더는 구경꾼이 모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잣거리는 정 이노야의 진급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북정의 떠들썩함에 비해, 남정의 저택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이야, 댁의 아씨가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정평이 오색깃발을 돌돌 말며 강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감탄했다.
“그야 당연하지.”
조 집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죠.”
정평이 얄밉게 웃으면서 비꼬았다.
“그 댁 아씨가 경성에서도 감히 패도(覇道: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난폭하게 행동함)를 일삼을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조 집사가 정평을 흘겨보면서 대답했다.
“패(覇)는 우리 아씨와 무관한 말이야. 아씨는 오직 도(道)만을 행하시는 분이지.”
정평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조 집사를 보면서 손뼉을 쳤다.
“조 집사, 날 허투루 따라다닌 건 아니군요. 드디어 도를 깨우쳤으니.”
정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정평의 모자를 탁 하고 쳤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부잣집에 가서 풍수나 봐 줘. 여태 백 문도 못 모았으니, 원. 고생해서 벌었으면 아껴 쓰기라도 하든가. 고작 사흘 만에 먹고 마시는 데 다 쓰면 어쩌자는 거야?”
조 집사가 정평을 나무라며 타박하자, 정평은 헤헤 웃으면서 모자를 바로 썼다.
“급할 거 없습니다. 급할 거 없어요. 모든 일에는 정해진 수가 있는 법이니.”
조 집사가 또 그를 때리려고 손을 치켜들자, 정평은 실없이 웃으며 잽싸게 달아났다.
정 이노야가 강주를 떠나 경성으로 오고 있을 무렵, 경성에 있던 정교랑은 평소와 변함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활을 쏘고, 그 후에는 옥대교 앞에서 글씨를 썼으며, 오후에는 몸종 몇 명을 데리고 요리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었다.
“종일 하는 게 많긴 해도,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니 원.”
황씨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인들은 잦은 출타를 삼가야 한다지만, 저 나이 때엔 나들이도 자주 가 줘야 하는데.”
“밖으로 놀러 나가고 싶으세요? 어디로 갈까요? 내일 같이 가세요.”
지나가던 시녀가 중얼거리는 황씨의 말을 듣고 웃으며 다가왔다.
“이젠 경성에서 안 가 본 곳이 없는데 어딜 또 가겠니.”
황씨가 우스갯소리로 시녀에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씨는 옥대교 저택이 부쩍 편해졌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것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시녀나 반근과도 편히 지냈다.
“에이, 벌써 경성을 다 돌다니요. 가 볼 곳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사이, 누가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누가 왔나 보네, 나가 봐야겠다.”
황씨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신비궁이 세운 혁혁한 전공 덕에 신비궁의 수요는 폭증했다. 황제는 궁노원에서 장인 한 명이 신비궁을 매일 한 개씩 만들어 내기를 바랐다. 그 덕에 궁노원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고, 범강림은 밤낮으로 당직을 서며 아예 궁노원에서 살게 되었다.
다행히도 황씨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황실의 종친인 진안 군왕까지 보고 나니, 다른 사람을 맞이할 때의 마음도 한결 편해진 덕분이었다. 게다가 정교랑을 보기 위해 옥대교 저택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문을 열어 보니, 사내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사내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저, 저는 정 낭자께 가르침을 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사내가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씨께서는 매일 여기 앞에서 글씨를 쓰세요. 글씨 때문이라면,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오면 돼요.”
시녀가 말하자, 사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게 아니고, 저는…….”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것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다른 것?
시녀가 뒤늦게 사내를 훑어보았다. 그의 옷차림은 확실히 서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체 건장해 보이는 사내에게서는 서생의 단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요리를 배우러 온 거예요?”
시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진십삼이 몸종 셋을 골라 정교랑에게 요리를 배우게 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저잣거리로 퍼졌다. 제2의 장반근이 되고 싶던 여러 집안의 몸종들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정교랑이 그들의 청을 거절했기 때문이 었다. 집이 너무 협소하기도 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요리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지금의 세 명을 다 가르친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낸 것이다.
소식을 들은 권문세가들은 더욱 흥분했다. 찬모 몇 명이 요리를 배워 온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정교랑과 친분을 맺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권문세가에서도 불시에 사람을 보내 언제쯤 자리가 빌 것 같냐고 묻는 일도 흔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사내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시녀의 말뜻을 이해한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낭자와 거래를 하나 하고 싶어서요.”
거래?
시녀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누구신지?”
사내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두 손으로 몸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한참 찾던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을 멈췄다.
“제, 제가 이번에 관직을 잃어 명, 명첩이 없습니다. 저, 저는 이씨 가문 사람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사내가 창피해하며 말했다.
“이무?”
정교랑이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네. 이씨 가문의 사람이에요. 보름 전에 경성에 불을 냈던 그 사람이요.”
시녀가 조용히 귀띔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댁에서 이미 날 찾아왔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장례를 치르던 날, 이씨 가문 사람들이 선물을 한가득 가지고 옥대교 저택을 찾아왔다. 그때 그들은 장사나 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난 이것으로 장사할 생각이 없어요.”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무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주위에 앉아 있던 몸종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입을 열려 하다가도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녀는 정교랑이 자신에게 남아 있으라는 눈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어린 몸종들을 데리고 밖으로 물러났다.
“낭자, 저는 낭자와 우리 가문 간의 폭죽 장사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무가 소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꺼내 정교랑의 앞으로 밀었다.
“저는 이것을 거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무가 내민 것은 쇠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상자였다.
반근이 상자를 받아 정교랑 앞에 가져다 놓자, 정교랑이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언제나 변함없던 정교랑의 담담한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나 싶더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게 뭐지?
반근이 목을 빼고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기다랗게 돌돌 말린 종이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종이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했고, 상자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성씨가 뭐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잠시 멈칫하던 이무는 용기를 내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의 눈가에 찰나지만 놀라움이 스친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교랑은 상자에 담긴 물건에 관해 묻지 않고 자신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묻는 것도 아니고, 성씨가 무엇인지만 물으니 퍽 우스운 질문이었다.
“성은 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이무가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었는데, 이 여인이 내 말을 흘려들었나 보네.
“이씨 성이라…….”
정교랑이 혼잣말을 하고는 이무를 잠시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이씨였나요? 아니면, 나중에 성씨를 바꿀 계획이 있다든가.”
이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저런 질문은 또 처음 들어보네.
내가 우리 이씨 가문을 멸족할 놈이라고 욕하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내가 이 여인과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초면부터 이렇게 심한 욕을 할 리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그냥 바보라서 저렇게 묻는 건가?
이 여인이 어렸을 때 바보였다는 소리를 듣긴 했어. 아무리 명사께 가르침을 얻고 신묘한 비술을 많이 터득했다 한들,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가 보네.
이무는 바보를 상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바보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섯 살배기 딸아이가 있는 그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법에는 능숙했다.
어린아이와 대화할 때는, 아이가 묻는 대로 대답하거나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원래부터 이씨였습니다. 저는 폭죽 장사를 하는 이씨 가문 대방의 일곱째 서자입니다. 앞으로도 성씨를 바꿀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천륜을 어기는 대죄를 지어 족보에서 제명당하지 않는 한요.”
이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족보에서 제명당한다면 무슨 성씨를 가지고 싶어요?”
정교랑이 곧바로 물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이무가 걱정되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부아가 치밀어서 까무러치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어떡하지? 우리 아씨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아씨의 언행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을 텐데.
“족보에서 제명된다고 해도 저는 이씨일 겁니다.”
이무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아, 하고는 다시 이무가 건넨 상자로 눈을 돌렸다.
“이 거래는 하지 않겠어요.”
정교랑이 상자를 이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해서도 안 되고요.”
해서도 안 될 거래라.
맞아. 이 여인과 내 생각이 일치한 거라면, 이게 해서는 안 될 거래이긴 하지.
반근이 자신을 배웅할 자세를 취하자 다급해진 이무가 물었다.
“낭자, 낭자께서는 이 물건을 아시는 거죠?”
아씨는 저 물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고, 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는데, 어째서 저 사람은 아씨가 저걸 아신다고 확신하지?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역시 솔직한 사람이었어!
이무가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무리 만들어도 저는 이걸 맞게 만든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낭자, 저, 저는 도저히 왜 그런지 이유를…….”
“저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요?”
정교랑이 이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무는 흠칫 놀라며,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말이람. 뭘 만들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저걸 저렇게 만들어 왔다고?
반근이 이무를 쳐다보았다. 이무의 표정은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길을 잃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무의 표정을 보고, 반근은 그가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걸로 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맞게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될지 안 될지는 어떻게 알겠어요?”
정교랑의 말에 이무는 또 한 번 멈칫했다.
“사실, 뭘 만들려는지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은…….”
이무는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로 표현해 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여전히 헤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눈을 반짝거렸다.
“맞아. 저걸 어떻게 써야 할 줄을 몰랐던 거야. 그래서 계속 잘못 만들었구나.”
이무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방 안에 있던 반근과 마당에 서 있던 시종들은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문밖으로 사라진 이무 때문에 깜짝 놀랐다. 놀란 기색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무가 다시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회랑 아래로 뛰어 들어왔다.
“낭자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무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당치 않아요. 솔직하게 물어본 것뿐이에요.”
정교랑이 자신 앞에 있던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놓고 갔어요.”
이무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면,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무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낭자께서 만드신 폭죽을 보고 생각해 낸 겁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한 글자의 가르침으로도 스승이 된다고요. 제가 감히 낭자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제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무를 쳐다보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허무맹랑했는지, 이무는 얼른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다다른 이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낭자, 그 사람의 성은 무엇입니까?”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묻는 이무의 질문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의아한 얼굴로 서 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정교랑은 이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陳)씨예요.”
이무가 허리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정교랑에게 예를 올렸다.
“이 이무가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무가 큰 소리로 외친 뒤 쏜살같이 문 앞에서 사라졌다. 옥대교 저택이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반근이 이무가 남겨둔 상자를 들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 이건 보관해 둘까요?”
정교랑이 반근에게서 상자를 받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반근이 물었다.
이건 뭐라고 불러요?
아이고, 소방(小昉: 정방의 별칭). 그걸 함부로 만졌다가는 큰일 납니다. 여기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전부 다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이에요.
왜 이번엔 왕비라고 부르지 않죠?
왕비님, 부친께서 또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또 저를 골탕 먹이려고요?
흥, 안 알려줄 거거든요?
그럼 저도 안 알려드릴 겁니다.
정교랑이 상자를 닫고 시선을 떨궜다.
“모르겠어.”
예전처럼, 알고는 계시지만 기억나지 않는 물건인가?
반근은 행여나 정교랑의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 식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사공자께서 새 저택에서 혼자 지내시느라 무척 심심하실 것 같은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건 어떠세요?”
반근이 웃으면서 물었다.
정 이노야 식구가 살 집은 시녀가 사흘 만에 마련했는데, 지금은 정사낭이 지내고 있었다. 새로 들인 몸종들, 사환들도 전부 그리로 보냈다.
“강주에서 밤낮없이 급하게 오느라 공부를 못 했을 거야. 무리하게 와서 몸져눕지 않은 것으로도 천만다행이지. 쉬면서 공부할 시간을 좀 줘야 해. 내년에 있을 과거 시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정교랑이 말했다.
“공자님께서 급제하실지 모르겠네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반근은 잠시 합장을 하며 기도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씨, 공자님을 위해 보수사에 가서 향을 올리는 건 어떠세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가요, 가요.”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가 맞장구를 치면서 황씨에게 거들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 다 같이 가요.”
마당에서 몸종과 함께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던 황씨가 빙긋 웃으며 맞장구쳤다.
“11월이라 날씨가 쌀쌀해졌으니, 부처님께 동상 안 걸리게 해 달라고 빌어야겠다.”
정교랑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자 핑계를 대야 겨우 아씨를 밖으로 데려갈 수 있네.”
시녀가 조용히 웃으면서 회랑으로 걸어오던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이 입꼬리를 올리고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대문을 쳐다보았다. 사환이 문을 열자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내시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낭자, 소인은 경왕부의 사람입니다.”
내시가 명첩을 내밀면서 말했다.
“경왕과 진안 군왕께서 낭자를 내일 있을 연회에 초대하셨습니다.”
진안 군왕?
마당 안의 하인들이 서둘러 내시를 안쪽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내시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새로운 거처로 옮겼으니, 세간의 풍습에 따라 낭자를 초대하여 같이 집을 둘러보며 담소나 나누고 싶으시다고요. 다른 사람은 일절 초대하지 않으셨고, 오직 낭자만 초대하셨습니다.”
초대에 응하시려나?
모두의 시선이 정교랑에게 집중되었다.
아씨께서는 거의 출타하시지도 않는데, 과연 남과 만나는 초대에 응하실까? 아무리 군왕이 평민 백성과는 다르다 해도, 아씨께서는 결코 평범한 분이 아니시니.
천자인 황제와 내기를 하고, 매일 대문 앞에서 서생들을 거느리며 글씨 연습을 하고 계셔. 그뿐 아니라 아씨가 해낸 일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지.
그러니, 아씨께서 군왕의 초대를 거절하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좋아요.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내시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고 서둘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건넨 금박이 붙은 초청장을 받은 시녀가 돈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수고가 많으세요, 공공.”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시는 별다른 겉치레 없이 웃으면서 돈주머니를 받고는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럼 보수사는 모레쯤 가야겠네.”
반근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모레쯤 갈 거라고 보수사에 얘기하고 올게.”
초청장을 받은 정교랑은 안으로 들어가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황씨는 마당에 서서 대청과 마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려 왕부의 초청장을 받은 건데.”
보수사 방문을 모레로 미뤄야겠다는 말밖에 하지 않다니.
“내일 입을 옷과 장신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황씨가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반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씨의 옷은 늘 입는 몇 벌이 전부라 갈아입어도 별로 티도 안 나실걸요?”
시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맞장구쳤다.
“장신구도 그렇고요. 작은 은색 빗과 비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세요. 그런 고민보다는, 차라리 내일 아침 식사를 뭐로 할지 정하는 게 더 중요하죠.”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한마디 더 얹었다. 황씨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럼,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황씨가 범강림이 매일 하던 말을 따라 하면서 마당에서 걸음마 연습을 하던 아이를 향해 손뼉을 쳤다.
“자, 이리 오렴, 이리 와. 백모에게 와 보거라.”
이튿날, 정교랑은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활쏘기를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대문 밖에서 글씨를 썼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정을 마친 정교랑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올리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보수사에 갈 때랑 똑같네.”
황씨가 고개를 저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마차에 무언가를 싣는 것도 보이지 않고, 두 반근의 손도 텅 비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황씨가 반근을 붙잡고 물었다.
“축하 선물은?”
“아씨께서 가지고 계세요.”
반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씨가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정교랑 또한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어디에 가지고 있다는 거지?
정교랑은 의아한 표정의 황씨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흔들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황씨가 더욱 의아한 얼굴로 입을 떼려던 찰나, 말을 탄 진십삼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출타하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낭자를 연회에 초대하려고 왔는데.”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약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속으로 흠칫 놀라면서도 곧바로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밤에는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이번에 경성에 돌아온 뒤로 더욱 조용해졌다. 전에는 그나마 간간이 밖에 나가 식사도 하고 나들이도 했지만, 지금은 아예 대문을 닫아걸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럼 내일 점심은요?”
진십삼이 끈질기게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내일은 보수사에 향을 올리러 가야 해서 미리 공양을 예약해 뒀어요.”
예약은 무르면 되잖아. 기껏해야 사찰 공양일 뿐인데.
황씨가 나서서 말리려 하자 시녀가 재빨리 황씨의 팔을 잡았다. 시녀가 조용히 황씨에게 고개를 젓자 황씨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르면 안 될까요? 내일이 내 생일인데.”
진십삼이 연이은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공교롭게 됐네요. 이미 예약한 거라 무르기가 좀 그래서요.”
정교랑이 다시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 알겠습니다. 원칙을 중시하는 낭자인데, 일찍 초대하지 않은 내 잘못이죠.”
진십삼이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하고는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그래도, 선물은 줄 거죠?”
정교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진십삼은 말 위에서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한 뒤, 고삐를 잡아당기고 대문 앞을 떠났다. 저잣거리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고개를 돌리자, 저택의 대문이 굳게 닫히고 정교랑이 탄 마차가 시종들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진십삼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차츰 사라졌다.
“원칙이라.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을 조금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진십삼이 혼잣말을 하며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한숨을 내뱉던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경왕부의 하인들은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정원 쪽은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정말로 이 꽃이 최선이냐?”
“수라간 사람들은 도착했느냐?”
왕부 총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총관의 쉴 새 없는 지시 때문에, 커다란 왕부 내에는 하인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경왕부에 처음 짐을 들이던 날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누가 보면 한 명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을 다 초대한 줄 알겠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그 여인은 격식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진안 군왕이 총관에게 못 말리겠다는 듯이 말하고는, 웃으면서 경왕의 허리띠를 정리해주었다.
진안 군왕이 경왕의 어깨를 탁탁 치고 말했다.
“자, 이제 됐다.”
옷을 입느라 진안 군왕의 손에 붙들려 한참을 기다렸던 경왕이 쏜살같이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경왕을 돌보는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쫓아갔다.
“집에서 편하게 같이 식사하는 정도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총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총관의 시선을 느낀 진안 군왕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닙니다, 아닙니다.”
총관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자신이 입은 옷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흰 바탕에 깃을 둥글게 하여 만든 남보라색 옷을 입고, 물총새의 깃을 넣어 만든 주홍색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초겨울 날씨에 대비되는 진안 군왕의 옷은 몹시 화사해 보였다.
좀 경망스러워 보이려나?
“경왕을 지켜보고 있게. 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올 테니.”
진안 군왕의 말에 총관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분주하게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진안 군왕은 뒤쪽에 서 있고, 어린 내시 두 명이 양쪽에서 옷을 허공에 들고 앞에 대 주었다.
“이건 어떠냐?”
진안 군왕이 앞에 선 내시 네 명에게 물었다.
“좋아 보입니다.”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좀 전 그 옷에 비하면?”
진안 군왕이 진지하게 물었다. 내시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것도, 비, 비슷하게 좋습니다.”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색이 무슨 상관이랴. 그냥 입으면 옷인 것을.
“됐다, 됐어. 가서 궁녀들을 불러오거라.”
내시들은 형벌을 면제받은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일제히 알겠다고 대답한 뒤, 궁녀들을 부르러 갔다.
옷에 대해서는 역시 여인들이 훨씬 낫겠지.
“군왕, 이게 좋겠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요.”
방 안에서 궁녀들의 목소리가 참새들의 지저귐처럼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의견이 전혀 없어도 문제고, 의견이 너무 다양해도 문제군.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궁녀들 때문에 진안 군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들 그만하거라. 그래서 어떤 옷을 입는 게 제일 좋겠느냐?”
진안 군왕이 호통치듯 물어보자, 방 안에 서 있던 열댓 명의 궁녀들이 동시에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환한 햇살이 실내를 밝게 비췄다.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된 진안 군왕에게서는 더 이상 소년의 풋풋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그는 경왕을 데리고 궁 밖을 한참 유랑했고, 경왕과 놀아 주거나 그를 안전하게 보살피기 위해 건강한 신체를 단련했다.
부유한 생활을 누린 덕에 귀티가 흐르는 데다 생기도 넘치고 용모까지 준수하니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군왕께서는 뭘 입으셔도 멋있는걸요.”
궁녀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진안 군왕은 기가 찬 듯 실소를 터트렸다.
“전하, 전하, 정 낭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밖에서 총관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다급해진 진안 군왕이 궁녀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떤 게 좋다고? 아니다, 아무거나 다오. 어서, 빨리!”
방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반근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이 내리도록 부축하고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왕부를 훑어보았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황궁과 가까이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서요.”
영접하러 나온 상궁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내디뎠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지, 사실 이 정도면 꽤 규모가 되는데. 이 낭자는 어째 진담으로 받아들이나 보네?
예상치 못한 정교랑의 반응에 상궁은 깜짝 놀라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정교랑을 평범한 사람 대하듯이 하면 안 된다는 총관의 당부가 떠올라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왔어요?”
정교랑이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청자색 바탕에 은은한 하얀색 꽃무늬가 새겨진 장포를 입은 진안 군왕이 환한 웃음으로 정교랑을 맞이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요.”
진안 군왕은 총관의 놀란 표정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문턱을 넘어 그를 따라갔다.
“왜 그러세요?”
상궁이 총관의 놀란 표정을 보고 물었다. 총관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치장한다더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 낭자가 얼마나 원칙을 중시하는데요. 허튼 생각 마세요.”
상궁이 나지막이 말하자 총관이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닐세.”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니?
상궁이 의아한 얼굴로 총관에게 더 물어보려 했지만, 총관은 벌써 정교랑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육가아, 육가아. 어서 이리 와서 정 낭자에게 인사해야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저 낭자를 볼 때만 경왕을 먼저 불러오시네.”
“그렇지, 뭐. 평소에는 경왕이 다른 사람과 마주칠까 봐 겁나서 항상 꼭꼭 숨겨두시잖아.”
대청 안에서 물러난 두 시녀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 낭자께서 경왕을 뵙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의술을 아는 분이 아니더냐. 그게 아니라면 낭자를 왜 초청하셨겠어?”
상궁이 정색을 하며 나무라자 두 시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상궁이 대청 안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의 손에 이끌려 와 정교랑 앞에 선 경왕이 보였다. 남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질색하는 경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정교랑의 얼굴에서는 겁을 먹거나 꺼리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의 표정은 진안 군왕이 경왕을 대할 때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역시 신의라 다르긴 다르네. 하긴, 저 여인의 눈에는 병이 있든 없든,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겠지.
정교랑이 경왕에게 예를 표한 뒤 몸을 일으켰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경왕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에 경왕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한번 둘러볼래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웃었다.
“좋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경왕을 불렀다.
“육가아,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진짜로 둘러보겠다는 거야?
상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서둘러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갔다.
“정방, 저기 좀 봐요. 원래는 저기가 연못이었는데, 내가 흙으로 메워서 꽃을 잔뜩 심었어요. 아마 내년 봄이나 여름쯤이면 꽃밭이 되어 있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으로 모양을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인데요? 어떤 모양이 좋을까요?”
진안 군왕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물었다.
“음양도(陰陽圖)가 좋겠네요.”
정교랑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옆에 있던 총관에게 지시했다.
“전하, 이곳의 구도와 풍수는 모두 사천대에서 정한 것이라 함부로 바꿔서는 아니 되옵니다.”
총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들이 본 거라 바꾸려는 게다.”
진안 군왕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총관에게 대꾸했다. 총관이 멈칫하자 진안 군왕은 총관을 보며 자신의 말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낸 후,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정방, 우리 이쪽으로 가 봐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경왕은 앞쪽에서 바람개비 한 개를 손에 들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경왕의 뒤로 시녀와 내시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고, 그 행렬은 청석판이 깔린 길 위로 쭉 이어졌다.
“진짜로 바꾸신대요?”
다른 사람이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군왕의 성격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어서 사람을 보내 황궁에 알리거라.”
“사천대 사람들이 이 일을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내시 하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참, 대인. 사천대 사람들한테 묻기 좀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물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구한테? 설마 보수사의 승려들은 아니겠지?”
총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요. 그때 반강현에서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혔던 한 대인께서 곧 경성에 오신다고 합니다. 한 대인을 이곳으로 모셔 구도를 보게 하시지요. 한 대인이 괜찮다고 하면, 사천대 관리들도 아무 말 못 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천대에서 예측한 일식 시간은 열에 아홉은 틀리곤 했다. 어쩌다 한 번 일식 시간을 맞혀도, 늘 운이 좋아서 때려 맞힌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천대가 일식 시간을 맞히지 못한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누군가가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히고 온 성의 백성들을 대동해서 천구를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 상서로운 일은 해당 성의 백성들뿐 아니라, 다른 성의 백성들에게도 선망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백성들을 모아 함께 일식을 막아낸 관리도 그 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때마침 관리에 대한 고과가 있었던지라, 반강현의 모든 관리가 한 대인의 평가를 후하게 준 덕에 한 대인은 단번에 지현(知縣)에서 지주(知州)로 진급했다. 이런 연유로 한 대인은 곧 경성으로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한 대인께서 경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주의 깊게 살피거라. 그분이 경성에 당도하시는 즉시 내게 알리도록 하고.”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총관은 금세 멀어진 진안 군왕을 보고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이제 자네 차례야.”
누군가가 말했다. 넋을 놓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던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외쳤다.
“좋은 시네, 좋은 시야.”
“좋긴 개뿔. 빈말은 넣어 둬. 뒤의 두 구절이 남았잖아.”
소년이 손에 쥔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주 낭자가 들어왔다. 그 뒤로 칠현금을 품에 안은 몸종이 따라 들어왔다. 별실에 있던 일고여덟 명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진짜로 주 낭자를 모셔온 거야?”
“주 낭자를 모시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시끌벅적한 와중에 주 낭자는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고 진십삼의 근처로 걸어갔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 낭자에게 목례했다.
복도에서 취객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원산을 마시고 싶다니까? 왜 안 팔아? 여기가 경성에서 제일 좋은 술집이라며?”
“손님, 무원산은 정 낭자한테만 있습니다. 그분이 팔지 않겠다는데, 우린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정 낭자한테만 있고, 남한테는 없는 술. 팔지도 않을 거면서 맛만 보이는 바람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졌지. 하지만 정 낭자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협박을 겁내는 사람도 아닌 데다, 부귀영화도 관심 없는 사람이니, 그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렸다. 별실의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차단되었다.
“진호!”
누군가가 술잔을 흔들면서 진십삼이 듣기 싫어하는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진십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불러?”
“그래야 내 말을 들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자네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일부러 다들 모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니, 원.”
고개를 숙인 채 칠현금을 조율하던 주 낭자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십삼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자, 그래서 나머지 두 구절은?”
진십삼의 말에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만들다 만 시를 생각했다.
“마당의 오래된 오동나무, 줄기가 하늘을 뚫고 솟았네(庭除一古桐,聳干入雲中).”
사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같은 말만 되뇌었다.
“가지는 남북을 오가는 새들을 반기고, 나뭇잎은 바람을 맞이하는구나(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
주 낭자가 화답했다. 사람들이 주 낭자가 읊은 시를 다시 한번 따라 해 보고는, 손뼉을 치며 좋은 시라고 감탄했다.
“주 낭자, 역시 경성의 제일 화괴답습니다.”
사내들이 웃으면서 칭찬했다. 사내 중 하나는 주 낭자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기까지 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에요.”
주 낭자는 웃으며 술잔을 받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화려한 춤 솜씨에 글재주까지 겸비하셨군요!”
대청 안의 사람들이 주 낭자에게 환호했다. 진십삼은 빙긋 웃으며 주 낭자를 바라보고 술잔을 비웠다.
“생일 당일인 내일은 우리가 같이 있기 힘드니까, 오늘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진십삼에게 말하던 사내들이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낭자, 생일 주인공 옆에 동석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은 얼른 손사래를 치면서 어찌 감히 그런 부탁을 하느냐고 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고말고. 걱정하지 마. 자네 부친께서 아셔도 자네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릴 리는 없을 테니까.”
사내들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말했다. 주 낭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십삼의 옆에 앉지 않고 웃으며 예를 표했다.
“동석하는 것은 별일 아닙니다만, 차라리 소인이 여러분께 가무를 보여 드리고 공자님들의 흥을 돋우는 건 어떨까요?”
주 낭자의 가무는 가히 경성 최고였지만, 남들 앞에서 선보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평소에는 기껏해야 손님들에게 칠현금을 연주하는 게 전부고, 꽃등 놀이나 새해 명절 때처럼 권문세가에서 거금을 들여 초청할 때나 겨우 가무를 보이곤 했다.
사내들은 횡재한 듯한 기분이었다. 주 낭자를 모셔 온 것도 모자라, 주 낭자의 가무까지 볼 수 있다니!
“이게 다 생일 주인공 덕분이네, 다 자네의 복 덕분이야!”
사내들이 웃으면서 외쳤다. 진십삼이 사내들을 따라 웃으면서 술잔에 술을 부어 주고, 주 낭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주 낭자는 진십삼을 향해 웃으며 가볍게 목례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주 낭자가 팔을 들며 소매를 허공에 던지자, 풍악이 울리면서 주 낭자의 춤이 시작되었다.
별실 안의 사내들은 주 낭자의 가무를 보며 계속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춤을 보면서 웃음 짓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있다던 선약은 어느 연회에 가는 거였을까? 나는 왜 낭자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지?
아니지, 묻는다 한들, 뭘 어쩔 수 있겠어? 따라가기라도 할까.
진십삼은 홀로 실소를 터트린 후 술잔을 들고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화려한 춤솜씨로 사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 낭자는 휘날리는 소매 사이로 진십삼을 보았다. 주 낭자의 눈가에 잠시 씁쓸함이 비쳤지만, 주 낭자는 곧바로 눈빛을 숨기고 춤에 집중했다.
주 낭자의 섬세한 손끝과 구름 위를 나는 듯한 춤솜씨는 사내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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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당나라 때의 명기이자 여성 시인이었던 설도(薛濤)는 어릴 때부터 음률을 익혔습니다. 본문 내의 시 구절은 설도의 아버지가 시의 앞 구절을 읊자, 어린 설도가 뒤 구절을 지어 화답한 일화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