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60)

-불효-

중얼거리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제 보니 그 애 때문이었어!”

정 이노야가 고함을 질렀다.

“윗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윗선에서 날 잡아다가 어사대에 처넣지 않았구나. 해주로 보낸 것만으로도 성은이 망극한 일이야!”

정 이노야는 생각할수록 몸서리가 쳐졌다.

다 그 계집 때문이야! 다 그 불운 덩어리 때문이라고! 눈앞에 없어도, 여전히 우리를 못살게 구는구나!

팍 소리와 함께, 정 이노야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 이노야가 이마를 부여잡고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이노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치우자, 정 이노야의 이마에 커다란 혹이 난 것이 보였다. 정 이부인은 하늘이 떠나갈 듯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쳤다.

문밖에 서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그제야 이 사람들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좀 하거라, 생각을! 벌써 몇 번을 당했는데, 아직도 복과 화를 구분할 줄 몰라? 그 아이 때문에 네가 진급을 못 해? 정녕 그러하다면, 네가 어찌 이리 멀쩡하게 이 자리에 서 있겠느냐? 정말 그 아이 때문에 진급이 막혔다면, 그 사람들은 왜 또 불쑥 찾아와 아부를 떨고?”

정 대노야의 말을 듣던 정 이노야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왜 그런 거지?

“마지막에는 결국 그 아이가 이겨서,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신 게지?”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를 향해 혀를 차고는 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집사가 이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형제들은 장군으로 추서됐고, 지방으로 좌천될 뻔한 노씨 성을 가진 관리도 복직했습니다. 서북에서 제일 높은 직책이었던 강문원은 다른 곳으로 전임 가게 되었고요. 살아남은 두 형제 중 하나가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린다며 쇠뇌를 바치자, 폐하께서 그 쇠뇌에 신비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답니다. 그 쇠뇌를 단기간 내에 대량 생산하여 서북으로 보냈더니, 서북에서 그 쇠뇌 덕에 연달아 몇 번이나 대승을 거뒀다 합니다.”

정 이노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역시, 역시!”

정 대노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감동적이구나.

서북의 수장, 경성의 고위 관리, 게다가 황실의 천자까지!

강주에서 내가 그 아이와 혼수 쟁탈을 벌였을 때, 그 아이는 끝내 얼굴도 비추지 않은 채로 집사와 몸종에게 모든 걸 맡겼어. 난 또 어린 낭자가 체면이 상할까 봐 창피하여 나서지 않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아니었군.

그게 어딜 봐서 창피하여 나서지 않은 거야? 나설 필요도, 그럴 만한 가치도 없어서 나서지 않았던 게지. 그 아이의 눈에 우린 그저 저잣거리의 행인보다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대청 안의 사람들은 차츰 정신을 차리고 혼잣말을 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 형제들에게 관직을 추서한 데다, 쇠뇌로 큰 공을 세웠으니······.”

정 이노야가 중얼거리면서 좀 전에 자신을 축하하러 왔던 동료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경성으로 가서 관직을······.

“하! 폐하께서 내리시는 내 상도 곧 당도하겠구나!”

정 이노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정 이부인도 뒤늦게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야, 드디어 고생길이 끝났어요! 빨리 경성으로 가야겠네. 아이고, 어서, 어서 짐을 정리해야······.”

너무 기쁜 나머지 정 이부인은 허둥대면서 몸을 돌렸다.

“정리는 무슨 정리를 해. 내 딸이 거기 있잖소. 설마 우리가 살 곳도 마련해 놓지 않았겠소? 이제야 그 아이를 허투루 키운 게 아니라는 보람이 느껴지는군.”

정 이노야의 대꾸에 정 이부인은 머릿속으로 얼른 셈을 했다.

그 아이는 경성에 돈을 긁어모으는 점포를 세 개나 가지고 있어. 그 아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혼수인 농토와 포목점은 전부 조 집사라는 놈이 통째로 꿀꺽 삼켰지만, 우리가 경성으로 간다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리 많은 점포를 혼자서 감당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테니, 식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정씨 가문의 아랫것은 쓸 게 못 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대노야 사람들이니까.

얼마 전부터 친정에서 좀 도와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참에 친정 조카나 몇 명 데리고 경성으로 가서 점포 일을 돕게 하면 딱 좋겠네. 누굴 데려갈까나?

그러고 보니 또 새해네. 경성에 가는 거니까 새 옷을 지어서 입고 가야겠지? 아니다, 경성에서 만드는 게 여러모로 더 좋겠어.

세상에, 이제부터 바빠지겠네.

정 이부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 이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고 자리를 떴다.

대청 안이 조용해지고, 정 대노야 부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 이노야의 이마를 맞히고 깔개 위로 떨어진 찻잔을 보자, 정 대부인은 좀 전의 일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노야, 오늘 들은 얘기가 다 사실이에요? 그 바보가 폐하의 용안까지 뵈었다고요?”

정 대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려.”

정 대부인은 순간 긴장했다.

“가짜겠죠?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생각에 잠겨 있던 정 대노야가 정신을 차리고 정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뭐가 가짜라는 거요? 한 번, 두 번까지는 헛소문이라 여길 수도 있소.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진짜지. 그리고 관부 사람들도 죄다 진짜라고 하는 일이 어찌 가짜일 수 있겠소?”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내 말은 아우가 경성 관리로 진급한 게 영 이상하단 거요.”

“뭐가 이상해요? 그 애가 그런 일을 벌이는 바람에 폐하께서도 그 아이의 공로를 인정하셨다잖아요. 공을 세우긴 했지만,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은 여인의 몸으로 상을 받을 순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부모나 형제에게 대신 상을 하사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한숨을 푹 내쉬던 정 대부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아이의 친어미인 과랑도 추서될지 몰라요.”

정 대노야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치야 그렇다지만, 듣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이번엔 그 아이가 이겼다고는 하나, 이 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이도 한둘이 아니겠지.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구려.”

“노야, 너무 걱정 마세요. 경성에는 주씨 가문도 있잖아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정 대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사낭을 불러오거라.”

정사낭을 불러오라는 말에 정 대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낭은 불러서 뭐 하게요? 그때 이미 물어봤잖아요. 사낭은 그 아이를 몇 번 본 거 말고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뭘 물으려는 게 아니라, 즉시 채비를 하여 경성으로 보내야 하오.”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저더러 경성에 가란 말씀입니까? 게다가, 지금 당장이요?”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어차피 곧 있을 과거 시험 때문에 경성으로 가야 하긴 했지만, 11월에 출발해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이 교랑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정사낭이 더욱 놀란 얼굴로 정 대노야의 말을 끊었다.

“네? 왜요? 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정교랑에게 달려갈 듯한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정 대노야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설마, 고작 이것 때문이었어?

고작 저 마음 때문에 교랑이 저놈을 보살펴 주고, 예를 갖춰 대했다고?

정교랑이 정사낭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정 대노야가 직접 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조 집사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조 집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한결같이 거만하고 안하무인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조 집사도 정사낭을 대할 때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얼른 말에서 내려 자세를 바르게 한 후 공손하고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 집사는 정사낭과 대화할 때마다 공손히 허리를 살짝 숙였으며, 함께 걸을 때도 앞서 걸으라는 손짓을 하고 자신은 몇 걸음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곤 했다.

조 집사가 이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은, 정사낭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사낭은 강주로 돌아온 뒤로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자신은 정교랑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음을 강조했지만, 정 대노야는 끝내 사람을 시켜 정사낭이 뭘 했는지 알아냈다.

정교랑이 도관에서 지낼 때 돈을 보냈고, 강주를 떠나 경성으로 갈 때도 배웅을 나가 돈을 줬다. 경성에서는 주씨 저택까지 직접 찾아간 데다, 거기서도 돈을 줬다고 했다.

정 대노야는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으이구, 이 어리석은 아들아. 네가 준 그 푼돈은 그 집 사환이 쓰는 용돈보다도 적을 텐데.

그런데도 그 애는 사낭의 돈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매번 감사히 챙겼다지. 진심은 하찮게 여길 수 없는 거니까.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낭, 경성에 가서 교랑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만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도울 일이 있냐고도 꼭 물어보고, 이노야가 경성으로 전임하게 된 일도 알리거라.”

정사낭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조, 좋은, 일인 거죠?”

정 대노야가 정사낭을 쳐다보면서 반문했다.

“좋은 일이냐고 물으면서, 왜 말을 더듬는 게냐?”

내가 말을 더듬었나?

정사낭이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숙부님께서 경성으로 가시게 된다면, 누이도 경성에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겠지. 전에 숙부님께서 누이를 별로 안 좋아하시긴 했지만, 그건 누이한테 병이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은 병도 다 나았고 능력까지 대단해졌으니, 숙부님께서도 분명 누이를 좋아하실 거야.

조, 좋은 일인 게 맞겠지?

어두운 안색의 진소가 고능준이 당직을 서는 관청 안으로 들어갔다.

“진 상공, 정말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웃음을 머금은 고능준이 몸을 일으키면서 아랫사람이 갖춰야 할 공경함을 담아 예를 표했다.

“이 명부를 승인하셨소?”

진소가 명부 하나를 고능준의 탁자 위로 던지자, 고능준은 웃는 얼굴로 탁자 위에 올려진 명부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관이 승인한 것이 맞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고능준이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진소에게 물었다.

“올해의 관료 고과는 이미 끝났는데, 어찌 이리 독단적으로 전임을 허락한 거요? 그것도 전임지가 이미 확정되었던 시기에.”

진소가 대답을 피하고 반문했다.

“특별한 일이라 특별하게 처리했을 뿐이오만.”

고능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자가 어딜 봐서 특별하지? 관리 평가에서도 낮은 등급을 받고, 십 년 넘게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공적도 못 세웠는데! 어째서 그자를 대리시(大理寺)로 전임 보냈느냔 말이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고능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그 유명한 정씨 낭자의 부친이잖습니까. 정 낭자는 의형제를 도와 말편자를 만들고, 신비궁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정 낭자의 오라비들이 서북에서 억울하게 공로를 빼앗긴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폐하와 조정에서도 서북의 쓸모없는 장수들을 처리했고요. 그 덕에 서북에는 새로운 용맹한 젊은 장수가 부임하여, 오랑캐를 백 리 밖까지 쫓아내고, 원래 우리의 것인 성보도 모두 수복하지 않았습니까. 진 대인, 이런데도 정 낭자에게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마지막 말을 할 무렵, 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는 말끔히 걷혀 있었다. 진소가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말했다.

“그건 정 낭자의 공로이지, 낭자의 부친과는 무관하오.”

고능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가 곧바로 웃음을 멈추었다. 고능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를 지르며 진소에게 삿대질을 했다.

“진소, 어찌 감히 그런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말을 하는 것이오! 폐하께서 공을 세운 자식을 둔 부모에게 상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거요? 아니면 부모가 공을 세운 자식 덕에 호강하는 게 틀렸단 거요?”

관리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이며, 무장이 위험한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공로를 세운 공신이 되어 아내는 봉작을 받고 자손은 대대손손 관직을 세습하게 하기 위함이며,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효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모든 관리가 그 바람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일생을 바쳐 애써도 음관(蔭官)으로 장자에게 관직 하나 마련해 주는 게 전부였다.

물론 진소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그 부모가 해마다 봉작을 하사받을 뿐 아니라 조부나 증조부에게도 품계와 벼슬이 추증되곤 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진소의 젖먹이 손자조차도 벌써 관직에 올라 조정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고위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하고, 큰 공을 세우고 싶어 할 수밖에.

“지금 내 얘기가 아니라 정 낭자 얘기를 하고 있잖소. 고 대인, 괜히 이때다 싶어 엮지 마시구려.”

진소가 천천히 대답했다. 고능준이 옷소매를 탁 털고, 금세 예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눈에는 웃음기까지 서려 있었다.

“공을 세운 건 정 낭자라지만, 여인의 몸이다 보니 사정상 낭자의 부친을 진급시킨 것뿐입니다. 이게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설마 진 상공은 정 낭자가 그 공로를 얻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낭자의 부친이 상을 받기에 자질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고능준은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아비의 자질이 형편없다 해도, 그리 귀한 딸아이를 두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상을 받아 마땅하지요. 인륜이 그러하고 충효의 도리가 그러하잖습니까. 진 상공은 이 충효와 인륜의 도리가 틀렸단 말씀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고능준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입꼬리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아니면 진 상공은 정 낭자라는 사람이 본디 불충하고 불의하며, 불효막심하여 인륜을 거스르는 사람인지라 그 부모와 영예를 함께 나눌 필요도 없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고능준,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독한 수를 둔단 말이냐!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진소가 표정의 변화 없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건 당연하지요. 소관은 군주와 아버지를 깍듯이 모시며 절대 거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소관이 어찌 감히 불충하고 불의한 길을 가겠습니까.”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소가 고능준을 잠시 쳐다보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고 대인, 참으로 정성이 지극하시오.”

고능준이 공수의 예를 표하면서 진소처럼 또박또박 대답했다.

“당치 않으십니다. 폐하께 녹봉을 받아 먹고사는 사람이니,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 곧 소관의 본분이지요.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잊어서는 아니 되니까요.”

진소가 나가자, 관청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고능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수하 하나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들어왔다.

“대인, 보셨습니까. 진 상공의 얼굴이 새파래졌습니다.”

“허튼소리.”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면서 옷을 정리하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정정당당한 상공 대인께서 고작 논쟁 몇 마디에 얼굴이 파랗게 질릴 분이던가. 다 나랏일이야. 이게 다 나랏일인데, 사람을 봐 가며 다르게 처리할 순 없지 않겠나.”

고능준은 수하와 반대 의견을 말하는 듯했지만, 조롱 가득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대인, 정말 묘수를 두셨습니다.”

수하가 아첨하면서 고능준에게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서 건네주었다.

“묘수는 무슨. 나도 다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인데.”

고능준이 찻잔을 받아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 낭자가 본디 받아 마땅한 것이야. 진 상공이 가장 무서워하고 꺼리는 게 있다면, 아마 능력도 없는 이를 가깝다는 이유로 관직에 올렸다는 비판이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권력을 남용한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진소는 이 일을 행할 수도 없고 언급조차 하기 싫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쓰나. 너무 섭섭하잖아. 진소가 창피해서 못 하겠다면, 내가 대신 나서 줘야지.”

수하가 헤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대인. 감히 정 낭자가 부친과 불화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다니, 그건 명백한 모함 아닙니까. 대인께선 정 낭자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신 거죠.”

“부녀지간에 무슨 불화가 있다고. 다 헛소리고, 모함이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민심을 사로잡은 정 낭자를 폐하께서 얼마나 중시하시는데, 그런 정 낭자에게 어찌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씌우는지, 원.”

물론 정 낭자가 정말로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고능준의 말에 수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을 선동하며 인륜의 도를 운운하더니, 이 천하가 다 네 뜻대로 될 줄 알았느냐?

네가 천륜을 저버리고 가족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벌인 사실을 폐하와 만백성이 알게 되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너도 한번 된통 당할 날이 올 것이다.

자애로운 아비에 효성스러운 자식이라.

자식을 요강에 빠트려 익사시키려 했던 친부에게 어떻게 효도할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난 아주 옹졸한 사람이야. 내가 당했던 것은 하나하나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상대가 존귀한 군왕이든 미천한 강주 바보든 뭐든 간에, 내 눈엔 그저 똑같은 놈들일 뿐이야.

고능준이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이 일을 알게 된 진 노태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군.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예상했다만, 피해갈 길이 없어.”

부친은 자식에게 관직을 물려줄 수 있고, 자식은 부모에게 명예를 안겨줄 수 있으니, 자식과 부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정교랑이 유명하지 않던 예전이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정 낭자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정교랑 한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정씨라는 성씨를 보고, 그 가족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놓치지 않고 호들갑을 떨며 말을 옮길 터였다.

그건 유명 인사가 되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이기도 했다.

자녀가 공을 세웠다면 그 부모에게도 잘 가르쳐 키운 공이 있었다. 그러니 그 부모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 또한 지극히 이치에 합당했다.

하지만 그게 정 낭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다른 이들은 정 낭자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진(陳)씨 가문은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당초 우리 쪽에서 진료를 청했을 때도, 정 낭자는 그 기회에 가족들을 피하고자 우리를 따라나섰어. 경성으로 온 후에는 주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그 뒤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정씨 가문을 고소해 재판까지 감행하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정씨 가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구차하게 사는 것 또한 전부 그 낭자의 작품이고.

그런 정 낭자가, 부친에게 상을 내리길 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부친이 경성으로 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군.

“고능준, 그놈도 참.”

진 노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하더니 진소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만, 고능준도 알고 우리도 아는 것이니, 필시 정 낭자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다만 정 낭자가 워낙 고집이 세다 보니, 예에 어긋나는 짓을 할까 걱정입니다. 여기는 강주와 다르잖습니까. 행여나 이곳 경성에서 집안 어른을 관아에 고소했다가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정 낭자의 목숨을 붙여 두신다고 해도, 백성들이 정 낭자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신선의 제자라 하더라도,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은 용납할 수 없겠지.

“언제 정 낭자가 예의를 지키지 않은 적 있더냐. 정 낭자는 무슨 일을 하든,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다.”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소자는 정 낭자가 정도를 모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 낭자가 한결같이 지키는 한 가지는 잘 알고 있지요.”

진소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찻잔을 손끝으로 가볍게 툭 쳤다. 찻잔이 엎어지자, 진소가 천천히 말했다.

“그 여인의 앞길을 막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것을요.”

진 노태야는 잠자코 고개를 돌려 병풍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매사 제 뜻대로만 될 수 있겠습니까. 정 낭자가 점점 욕심을 부렸다가는 언젠가 분명히 큰 탈이 날 겁니다.”

진소의 예상대로, 황제는 고능준이 올린 정 이노야의 포상 안건을 윤허했다.

열흘 후, 관청을 통해 직첩이 강주로 보내졌고, 황제의 뜻을 알리는 성지도 옥대교에 도착했다.

“소녀, 폐하의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성지를 두 손으로 받들었다. 시녀가 성지를 전하러 온 내시에게 붉은 천으로 감싼 돈 봉투를 건넸다.

내시들의 눈가에 기쁨이 서렸다. 돈 봉투를 받아 기쁜 게 아니라, 이 돈 봉투가 여타 돈 봉투와는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려 도교 이 진인의 제자가 준 돈이야. 이걸 몸에 지니고 다니면, 분명 화를 면하고 액운을 쫓아낼 수 있겠지!

내시들을 배웅한 뒤, 내시를 맞이하며 피웠던 향로부터 서둘러 치웠다. 옥대교 저택의 마당에는 기쁜 분위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불안한 기색으로 정교랑의 눈치를 살폈다.

정교랑이 성지를 두어 번 훑어보고는 반근에게 건넸다.

“아씨, 이를 어쩌면 좋죠?”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가 답답한 마음에 반근을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정교랑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아씨, 정 이노야 내외가 경성으로 오면, 우린 그 사람들 등쌀에 마음 편히 못 살 거예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황씨는 정교랑의 가정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범강림 역시 그 부분은 잘 몰랐기에 아내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기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반근과 시녀의 모습을 보자, 범강림과 황씨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럴 리가.”

정교랑이 가볍게 웃었다.

그들이 우리 아씨를 못살게 구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인가? 아니면, 양쪽 모두 서로 물어뜯으며 못살게 굴거나.

“그럼, 이곳으로 오게 하시려고요?”

반근이 물었다.

“안 그럼 어쩌겠어. 무려 어명인데. 하, 이를 어쩐담?”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야 할 것을 해야지.”

정교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이, 우리가 아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어때? 궁노원 근처라면 새 저택을 찾기도 쉬울 텐데.”

범강림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반근을 불렀다. 정교랑 옆에 서 있던 반근과 시녀가 동시에 대답했다.

“가서 적당한 저택을 하나 사들여. 그 사람들이 경성에 도착하면 바로 지낼 수 있도록.”

이번에는 두 반근 중 시녀만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녀가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저택의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교교, 어떻게 할 건지 말만 해 다오.”

주 노야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뭘 어떻게 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주 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차를 내오려는 반근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차를 마실 새가 어디 있어? 교교, 그 속 시커멓고 양심도 없는 정씨 내외가 경성으로 온다고 들었다.”

주 노야가 분개하며 말했다.

경성은 역시 소식이 빠르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시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교교, 듣자니 이 일을 꾸민 자가 바로 고 전시라더구나.”

주 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교랑은 그게 뭐 어쨌냐는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지난번 서북의 일 때문에, 고 전시가 너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닌 것 같다. 그 속이 시커먼 부부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빤히 알면서, 일부러 네 속을 뒤집으려고 그들을 경성으로 부른 거야.”

주 노야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로는 제 속이 뒤집히지 않아요.”

주 노야가 생각을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차치하고, 난 정 이노야 그놈을 아주 잘 알아.”

주 노야는 속이 시커먼 부부란 말 대신, 이노야를 콕 집어서 말했다. 주 노야의 그런 잔꾀를 정교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허풍만 가득한 놈이야. 학문도 썩 뛰어난 건 아니고, 관직에서도 일 처리에 뛰어난 건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면 4년 전에 진급했지 지금껏 있었겠느냐.”

주 노야의 말을 듣던 정교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다가 금세 사라졌다.

왜 웃는 거지? 그래도 친부랍시고 그때의 분함은 다 잊고, 다시 부녀의 정을 이어 나가고 싶은 거야?

멈칫했던 주 노야가 말을 이었다.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심지어 대리시 같은 곳이라면 더욱 힘들지. 그놈이 일을 못 한다는 이유로, 교교 너까지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을까 근심이구나.”

“무려 조정에서 임명한 건데, 안 올 수는 없잖아요.”

정교랑의 말에 주 노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교교도 그놈이 경성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않는 거야!

“조정의 명이긴 하다만, 본인이 사양할 수도 있잖아.”

주 노야는 그 말을 내뱉고는 곧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니다. 그놈이 퍽이나 사양하겠군.”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외숙부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낫겠죠(既來之, 則安之 - <논어>).”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자꾸나.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떠니? 그러면 그놈들이 널 괴롭히려 들 때, 내가 나서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난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거 겁 안 난다. 외숙이 나서겠다는데, 누가 감히 나더러 뭐라 하겠느냐.”

주 노야의 말에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금 감사의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바른 자세로 앉은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주 노야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사낭이었다.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듯 고생이 묻어나는 정사낭의 모습에 반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넷째 공자님께서 갑자기 이곳엔 어쩐 일로?”

방에 있던 정교랑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숙부님이 경성으로 올 수도 있대.”

정사낭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올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명이 떨어졌어요. 공자님, 설마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반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 그건 너무 터무니없잖아.

정사낭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버지께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라고 하셔서. 참, 그리고 누이에게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

아버지라면 정 대노야?

대청에 있던 주 노야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버지께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정사낭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정가 놈이! 또 나랑 한판 해보자는 게야?

우리 집 교교를 빼앗기 위해, 이젠 친동생까지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

가만 보니,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드디어 우리 교교가 제 동생보다 값지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말이야.

정사낭이 경성에 이르러 정교랑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조정에서 내린 직첩은 아직 강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정 이노야가 경성의 대리시로 영전해 간다는 소식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육랑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커다란 상자를 정육랑의 눈앞에 턱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정육랑이 득의양양한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열 살이 다 되어가는 정칠랑은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따라서 바닥에 앉아 있던 정육랑은 고개를 들어 정칠랑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런 각도로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정육랑은 정칠랑의 얼굴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단 기분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여인의 모습이 살짝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복동생이어도 서로 닮은 구석은 있는 건가.

“이건 내가 쓰던 책이랑 자수야. 난 곧 부모님이랑 경성으로 갈 건데, 짐이 너무 많아서 못다 가져간대. 그래서 너 주려고.”

정칠랑이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다 엄청 좋은 것들이야. 내가 싫어해서 버리는 게 아니라고.”

“난 이딴 거 필요 없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갖고 있어 봤자 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우린 이번에 경성으로 가면 다시는 강주로 안 돌아올 거래. 그리고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거라면 경성에 있는 우리 언니가 뭐든 다 사 줄 거라고 하셨어.”

정칠랑이 우쭐한 모습으로 손짓을 해가면서 말했다.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육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그럼 넌 이제 정팔랑이겠네?

나한테 언니가 생긴다고? 내가 적장녀인데?

싫어, 싫어! 그런 바보 언니라니, 창피해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

내가 왜 정팔랑이야! 나 정팔랑 하기 싫어!

정육랑의 귓가에 과거 정칠랑이 울부짖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육랑이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앳된 모습의 어린아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과 기쁨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네가 바보 언니를 둔 걸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을까?”

“우리 언니는 황제 폐하도 알현했던 사람이야!”

바보라는 호칭이 싫었는지, 정칠랑은 잽싸게 반박했다. 정칠랑이 정육랑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 내 친언니이자 네 사촌 언니기도 하니까, 너한테도 언니긴 언니지.”

정육랑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미안한데, 나는 충효도 모르는 바보 언니를 둘 엄두가 안 나.”

정육랑이 정칠랑이 가져온 상자를 팍 하고 엎었다.

상자가 엎어지자, 그 안에 들어있던 자수와 금은으로 된 비녀 등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정육랑이 흠칫 놀랐다.

정칠랑이 가져올 물건이라고는 기껏해야 꽃을 수놓은 손수건이나 장난감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저런 장신구까지 들어 있을 줄이야. 그토록 인색했던 정칠랑이 장신구까지 주다니.

이제 돈 많은 언니가 하나 생기니, 전에 쓰던 건 하나도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네.

“네 언니는 친해지기 쉬운 사람이 아니던데, 이것들 잘 챙겨 두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그 집에서 쫓겨나면 전당포에 맡겨 강주로 돌아올 경비나 마련하렴.”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고는 무심코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바닥에 널브러진 비단 손수건을 밟고 지나갔다.

정칠랑은 정육랑의 발에 밟힌 손수건을 보고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정칠랑은 정육랑을 밀쳐내고 울면서 잡동사니를 다시 아무렇게나 상자에 담아 품에 안고 뛰쳐나갔다.

두 자매가 매일같이 싸우는 게 익숙했던 몸종과 여종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정육랑이 뒤늦게 몸을 돌려 밖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지만, 정칠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정육랑은 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무슨 일이야?”

정육랑이 두 귀를 막은 채로 물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이노야의 상이 당도했대요.”

여종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몸종들은 재빨리 폭죽 소리가 나는 곳으로 구경하러 달려갔다.

왔구나.

정육랑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회랑 아래에 섰다.

“곧 성지를 받아야 하잖아요. 아씨께서도 어서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여종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죽어도 가기 싫지만,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육랑이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앞마당에 도착했을 무렵, 대문 근처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병환으로 일절 바깥출입이 없던 정 노부인마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맨 앞에 서 있었다. 정 노부인은 골골 앓던 병자의 얼굴 대신, 생기 넘치는 얼굴로 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정씨 가문에서 성지를 받들고 상을 받았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죽기 전에 이런 광경을 또 보다니, 지금껏 산 보람이 있어.”

이가 빠져 발음이 새는 노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정씨 가문은 과연 복을 타고났네. 더는 안 되겠다, 안 되겠다 싶다가도, 또 이렇게 재기하다니.”

누군가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감탄했다.

“무슨 관직을 얻은 거래?”

정 이노야가 하사받은 관직에 흥미를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백성 대부분은 구경거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폭죽을 구경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나온 관졸들을 구경하고, 북적대는 인파를 구경하고, 어명을 받들고 경성에서 내려온 칙사 일행을 구경했다.

어쩌다 관직을 받았든 무슨 상관이랴. 구경꾼들에게는 훗날 자신의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고, 얼마나 떠들썩했는지만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정씨 저택의 마당 안에서 칙사가 성지 낭독을 마치자, 정씨 가문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했다.

“대인께서는 편한 날짜를 택해 상경하십시오. 급할 것 없습니다.”

칙사가 겉치레로 말했다. 아들을 경성으로 느긋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정 노부인이 목청을 높였다.

“아유, 무슨 소리를. 빨리 가야죠, 빨리. 채비는 다 끝냈으니까, 지금이라도 출발할 수 있어요.”

정 노부인의 모습에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노부인을 부축하여 자리를 피했다.

“왜들 그러냐. 내 말이 틀려? 더 기다릴 게 뭐 있어? 어서 경성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 나도 상 하나 받게 해 줘야지. 이번에는 어떻게 된 게 내 건 없고, 죽은 주씨한테만 상이 내려졌느냔 말이야.”

정 노부인은 목청을 높여 투덜대면서 두 며느리의 부축 속에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칙사를 잘 모시고 나자, 정 이노야를 한쪽으로 불렀다.

“이번 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정 대노야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을요?”

싱글벙글한 표정의 정 이노야는 대청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들어가 동료들과 축하주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을 사양하거라.”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 이노야는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정 대노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관리들은 조정에서 내린 상을 받을 때, 그 상을 사양함으로써 더 높은 관직을 달라는 일종의 시위를 하곤 했다. 보통은 두세 번 거절한 뒤 관직을 받아들이거나, 황제가 다른 관직으로 바꿔 주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일이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절이었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일 뿐이니까.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형님. 제가 이제 막 관직을 얻은 신출내기도 아니잖습니까. 아니, 이제 막 관직을 얻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알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가 자신을 너무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경성으로 가지 말라고. 다른 곳으로 바꾸거라.”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정 이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형님, 미쳤습니까?”

저게 어딜 봐서 미친 거야? 고의로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는 게지!

이야기를 들은 정 이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짐 정리를 하다 말고 정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교랑의경 1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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