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60)

-말할 수 있는 것-

담벼락을 두드리는 소리가 오랜만에 옥대교 저택에 울려 퍼졌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화들짝 놀랐다.

“옆집에서 벽을 수리하는 건가요?”

황씨가 아기를 품에 꼭 안으며 물었다. 황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담벼락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황씨는 기겁하면서 사환들에게 소리쳤다.

“저놈을 매우 쳐라!”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시녀가 담벼락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분을 매우 쳤다가는, 아주 경을 칠걸요.”

시녀가 담벼락 위에 있던 사람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올렸다.

“군왕 전하를 뵈옵니다.”

군왕?

황씨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담벼락 위에서 환하게 웃는 소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성의 황실 종친들은 전부 저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나 보네.

다행히도 이번에는 진안 군왕이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예전처럼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면, 황씨는 더더욱 기함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황씨는 정교랑과 갓난아기, 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환과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와 진안 군왕에게 큰절을 올리며 그를 맞이했다.

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예를 받는 진안 군왕도 어딘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진안 군왕이 어색해하는 이유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 때문이 아니라, 과거 옥대교 저택의 풍경이 생각나서였다. 그때에 비하면, 담벼락을 오르던 소년도 변했고, 쓸쓸하기만 했던 옥대교 저택의 마당도 변했다. 진안 군왕은 어쩐지 조금 씁쓸해졌다.

그때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만큼 즐겁고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구나.

또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를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겠지.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훗날에는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는다는 것을, 당시에는 미처 모를 거야.

“육가아, 형이 오늘은 즐거운 일을 하나 하러 가려고.”

왕부를 나서기 전, 진안 군왕이 장난감을 손에 쥐고 대청 바닥에서 놀고 있던 경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형이 뭘 하러 갈지 궁금하지 않아?”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은 경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물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만무한 경왕은 여전히 손에 쥔 장난감만 만지작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래. 네가 알고 싶다니 형이 알려 줄게. 전에 형이 말했지? 그놈이 널 해쳤으니, 나도 그놈을 해칠 거라고.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고 그랬잖아. 그놈이 너를 바보로 만들었으니, 나도 그놈을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 했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게 어떤 거냐고? 육가아, 그때 기억나? 우리가 바깥세상을 돌아다닐 때,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이 괴물 하나를 불태워 죽이는 걸 봤잖아. 사실 그건 괴물이 아니라,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었어.

맞아. 사실 난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어. 일단 황궁으로 돌아오되,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문둥병이 심하게 걸린 사람을 찾아내게 했어.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들려왔지. 심한 문둥병을 앓는 자를 찾아냈고, 그를 경성으로 데려오고 있다는 소식. 육가아, 그때 말했던 것처럼, 문둥병에 심하게 걸린 사람이 썼던 물건을 그놈의 거처에 가져다 두기만 하면······.

뭐라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까 봐 겁난다고? 육가아, 넌 참 착한 아이야. 어쨌든, 아랫것들이 밖에서 확실히 시험해 봤는데, 일상생활이나 대화 같은 건 전혀 문제가 없대. 워낙 책에 파묻혀 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는 녀석이니······.

그런데 하필 이때 정방이 돌아올 줄이야. 뭐랄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난감했어.

대황자가 문둥병에 걸린다면, 분명히 정방에게 치료를 부탁하겠지. 하지만 정방이 고쳐 주지 않거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거야. 폐하와 귀비, 그리고 태후마마께서는 정방을 미워하게 될 테지.

음,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나는 정방이 녀석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게 더 두려워. 그렇게 되면, 내가 한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니까.

그래서 나는 정방이 무조건 경성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방을 내쫓을 순 없지. 가장 좋은 방법은, 고능준과 귀비가 정방이 떠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고능준과 귀비가 정방을 내쫓을까?

내가 대황자의 병이 고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도 정방이 너를 고쳐 주는 걸 두려워해. 남이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게 되면, 일이 쉬워지기 마련이야.

그래서 난 만반의 계획을 세웠지. 정방이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입궐한 날, 정방을 네 궁으로 데려온 다음, 아랫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닫은 뒤에 육가아 너를 고칠 수 있겠냐고 정방에게 다시 묻는 거야.

아니, 사실 묻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어. 태후마마께서 정방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문하실 때, 내가 입으로는 못 고친다고 대답하며 조금만 뜸을 들여도 귀비는 충분히 불안에 떨 테니까.

아마 귀비는 미친 듯이 궁금할 거야. 우리가 문까지 닫아놓은 채, 아랫것들을 전부 물리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을 거고, 우리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비는 정말 미쳐 버릴걸.

그럼 귀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방을 경성 밖으로 내보내려 했겠지. 네가 다시 좋아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애 버리려는 심보로 무슨 일이든 벌이려고 했을 거야.

육가아, 한번 상상해 봐. 그렇게 귀비가 정방을 내쫓는다면, 나중에 대황자가 병에 걸려 죽어갈 때 귀비는 돌아 버리지 않을까? 대황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정방을 자신이 내쫓았으니, 자기 손으로 친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셈이잖아.”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지자, 경왕은 깜짝 놀란 듯 진안 군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육가아, 어때?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을 거 같지 않아?”

진안 군왕이 두 손으로 경왕의 어깨를 잡자, 경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흥밋거리를 찾으러 기어갔다.

왕부의 대청은 황궁에 있던 경왕의 궁처럼 모든 곳을 안전하게 꾸며 놓았다. 경왕이 실내에서 뛰어다닌다 해도, 다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끝내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어.

그 여인이 내가 준비한 간식과 과일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을 봤거든.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도 봤어. 그래서 육가아, 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인인데,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여인인데, 세상이 이미 그 여인을 몇 번이고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데, 나까지 그 여인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이용하면······.

맞아. 그 여인은 대단한 사람이지. 어쩌면 귀비와 고능준 역시 그 여인을 해치긴 힘들 거야. 그들이 정방의 심기를 건드리면, 도리어 정방이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반격을 가할 테니까.

물론, 정방이 귀비와 고능준을 해치워 준다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난, 난 도저히 그러질 못하겠더라고. 마음이 쓰여서. 난 정방을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내몰고 싶지 않아. 왜 항상 정방만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 해?

내가 계획대로 움직이려고 첫발을 내디디던 그 순간부터 난 후회했어. 결국, 내 계획을 스스로 멈췄고.

그 결과 우리가 당해 버렸지. 그들의 계획대로 우리는 궁에서 내쫓기고 버려졌어. 우리가 다시 대황자에게 접근하기란 요원한 일이 된 거야.

그런데 있잖아. 너무 신기하게도, 나는 내 결정이 후회스럽지가 않아. 도리어, 도리어 더 기쁘고, 마음이 가벼워.

육가아, 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나 있다고 생각해. 한 길이 막혔으면, 다른 길로 가면 돼.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 보면, 우린 반드시 길을 찾아낼 거야.

육가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나는 오늘 정방한테 가서 사과하려고. 바로 멈춰 서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걸음을 떼기는 했으니까.”

“전하?”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진안 군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안 군왕이 생각에 잠겨 예를 받지 않는 동안, 옥대교 저택 안의 사람들은 허리를 숙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차 싶었던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일전에 정 낭자에게 진료를 청했던 연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이오. 어려워할 필요 없소.”

범강림이 집을 비운 탓에 그 아내인 황씨가 시녀의 도움을 받아 손님을 맞이했다. 다행히 황씨는 동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아랫것들과 함께 차와 간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때마침 장반근이 여기 와 있었네. 어서 가서 맛있는 것 좀 만들어 줘.”

시녀가 한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웃으며 서 있던 몸종은 그 말에 해바라기씨를 까 먹으며 농담을 건넸다.

“나는 장씨 성을 가진 손님인데, 어떻게 언니 일을 빼앗을 수 있겠어.”

시녀가 웃으며 몸종을 한 손으로 잡아끌었다.

“온 경성 사람들이 장씨 댁 찬모를 모시는 걸 영광으로 여기잖아. 그러니까 빨리 뭐라도 좀 만들어 주라, 응? 모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먼저 행차해 주셨으니, 우리 정씨도 그 영광 좀 한번 누려 보게.”

황실 사람이 집에 왔는데도, 두 반근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씨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황씨의 표정을 본 시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서워하실 것 없어요. 큰 도련님과 아씨는 황제 폐하도 알현했던 분들인걸요.”

그냥 알현한 정도가 아니라, 감히 황제와 내기까지 했지.

시녀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황씨는 미소를 보이며 대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술 때문에 알게 된 인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벗을 만나는 느낌인데.

“2년 만입니다.”

진안 군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감탄 섞인 말을 뱉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집이 북적북적해졌네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도 이젠 대문으로 들어오실 수 있게 됐죠.”

역시, 고난 중에도 기쁜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기쁜 일은 함께 나눠야죠.”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낭자도 들었죠?”

진안 군왕이 대뜸 물었다.

“몸종과 사환이 매일 저잣거리에 가서 장을 보거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알 만한 일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우리가 쫓겨난 것으로 생각하더군요. 실은 정확히 내가 원하던 바였는데.”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올 때가 되긴 했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니까요.”

진안 군왕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낭자한텐 숨기지 않고 말할게요. 원래는, 내가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하려던 일이 있었어요. 그 일에는 낭자도 휘말리게 됐을 거였고, 낭자의 상황이 몹시 불편해졌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사실 낭자는 이미 그걸 눈치챘을 것 같아서, 오늘 사죄하려고 온 겁니다.”

정교랑이 잠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순 없어요.”

차와 간식을 들고 오던 시녀와 몸종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씨께서 입궁하셨던 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왜 꼭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들리지?

시녀가 몸종의 눈짓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반근과 시녀는 황궁 대문 앞까지만 따라갔을 뿐, 황궁 안까지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대청 안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고 말았다. 방금 전 이야기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낭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자들이 작정하고 우리를 궁에서 내보낸 것도 맞지만, 나도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뿐이니까. 내가 바라던 대로, 경왕을 보살피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요. 그리고 결심했어요. 지금처럼 광명정대하고 떳떳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요. 적어도 하늘만큼은, 광명정대하고 떳떳한 사람을 속이지 않잖아요.”

시녀가 차와 간식이 든 쟁반을 들고 발걸음 소리를 내며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몸종은 회랑 아래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군왕 전하, 아마 모르실 테지요. 우리 아씨는 하늘도 능히 속일 수 있는 분이에요.

몸종의 귓가에 거대한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아씨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비열한 수단을 쓰든 대놓고 떳떳한 수를 쓰든 똑같아요. 하늘이 벌하지 않으면, 아씨께서 하늘을 대신해 벌하실 거거든요.

진안 군왕은 차 한 잔을 비운 뒤, 간식 몇 개를 집어 먹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자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진안 군왕이 방에서 나가기 직전,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전 아량이 넓지 않아요. 속이 아주 좁은 편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멈칫했지만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은 속이 좁은 편이지. 과로신선 하나 때문에 수십 년간 공을 들이며 경성에 자리 잡은 조정 대신의 가문을 풍비박산하게 만들고, 논공행상 하나 때문에 서북 장수 하나의 목숨을 빼앗고 서북 관리와 장수들의 앞길을 끊었으니.

“굳이 감사해야겠다면, 차라리 본인의 넓은 아량에 감사하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건 결국 나를 해치는 것과 같으며, 남의 도움을 바랄 바에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훨씬 낫죠. 정말 나 자신의 넓은 아량에 고마워 죽겠습니다. 난 어쩜 이렇게 잘났는지.”

시녀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서로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면 결국 잘 해결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정교랑의 뒤에서 진안 군왕을 배웅하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문밖에 있던 진안 군왕의 시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전하, 바깥에 사람이 많이 왔습니다.”

“전하, 걱정하실 거 없어요. 요 며칠 내내 그랬거든요.”

시녀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라며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들어왔다.

“난 다른 거 모르겠으니, 내게 글씨나 한 열 폭 정도만 써 주면 안 되겠습니까? 가져가서 좀 팔려고요.”

우스갯소리를 하며 대문을 넘어서던 진십삼이 마당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정교랑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은!

진안 군왕은 단번에 진십삼을 알아보았다.

2년 전, 정교랑과 함께 놀잇배를 타고 강 위를 지나가던 사내. 진씨 가문 열셋째, 진호.

진안 군왕과는 달리, 진십삼이 진안 군왕을 알아보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진십삼 역시 황실의 종친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는 다리가 불편하여 입궐할 일이 없었고, 최근 2년 동안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느라 입궐할 일이 없었다. 황궁 깊숙한 곳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진안 군왕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진십삼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군왕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잠시 후, 진십삼은 상대가 누군지 퍼뜩 깨닫고 얼른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진안 군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받은 뒤 대문을 나섰다.

저택의 대문 앞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사내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며 바짝 다가가지는 않았다. 정교랑 등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도 잠시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달려들거나 무례하게 떠들지 않았다.

“낭자 글씨의 명성이 대단하여 찾아온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유를 알아본 시종이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어쩐지, 글공부를 한 사람들이라 저렇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 거였군.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명성이 곧 자신의 명성인 듯 기쁘고 뿌듯한 얼굴로 정교랑을 돌아보았다.

정교랑과 옥대교 저택의 사람들이 문 앞에서 진안 군왕을 향해 작별의 예를 올렸다.

마차가 움직이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휘장을 들어 올려 뒤를 돌아보았다. 정교랑 일행은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진십삼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마차는 빠르게 옥대교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낭자는 글씨를 그렇게 잘 쓰면서 어찌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의 뒤를 따라 대문을 넘어서면서 말했다. 황씨는 이제 불쑥불쑥 찾아오는 진십삼에게 익숙해졌는지, 놀란 기색도 없이 아기를 안은 채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춰 황씨에게 답례했다.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그리고 썩 좋은 글씨도 아니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더니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가는 또 몇 명이나 미쳐 버릴지 모르겠군요.”

장난스러운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대청 안에 앉자 반근과 몸종이 차를 올렸다.

“아씨, 저는 이만 점포에 가 볼게요.”

시녀가 말했다.

“아주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십삼이 농담을 건네자 시녀는 말없이 빙긋 웃고는 물러났다.

“아씨, 소인도 이만 가 볼게요.”

몸종이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종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장씨 댁 참모가 참 부럽습니다. 낭자, 또 맞바꾸고 싶은 몸종은 없습니까? 그럼 나도 좋은 찬모를 집에 둘 수 있을 텐데요.”

시녀와 함께 몸종이 나가는 것을 쳐다보던 진십삼이 시선을 거두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 뒤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흠칫 놀라며 정교랑 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겼다.

“바꿀 필요가 있나요. 반근도 할 줄 아는 것들이니, 배우고 싶다면 이 아이에게 배워요.”

정교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진십삼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할 게 뭐 있어요. 그저 요리일 뿐인데.”

“그럼, 진짜로 우리 집 몸종을 여기로 보냅니다?”

진십삼이 재차 물어보자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육낭이 서신을 보냈는데, 신비궁에 관한 칭찬만 입이 마르도록 늘어놨더군요.”

진십삼이 차를 마시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장수와 병사들이 더 잘 다루네요.”

“낭자는 정말 그게 낭자의 공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것이든 아니든, 똑같아요.”

“그게 어딜 봐서 똑같아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딜 봐서 다른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공로가 있으면 명성을 얻을 수 있고, 명성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각종 이득과 부귀영화가 뒤따라오니, 많은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진십삼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에 옷차림은 늘 변함없는 무채색이야. 먹고 마시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차와 간식이고, 집 안의 가구와 장식은 단출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남들의 눈에 아무리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이어도, 이 여인의 눈에는 그저 한 줌 흙과도 같으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노자의 말씀이 이런 거겠지.

“아무튼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일단 글씨부터 몇 자 좀 써 줘요.”

진십삼이 생각을 멈추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글씨를 왜요? 그리고 갑자기 쓰라고 하면 못 써요.”

정교랑이 대답하면서 손으로 서재를 가리켰다.

“저기에 이미 써 둔 글씨가 있으니, 필요하다면 몇 장 가져가든가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은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종이를 두둑이 집어 들고는 고이 접어 대청으로 돌아왔다.

“공자님, 그 종이는 불을 지필 때 쓰는 건데요.”

진십삼이 몹시 귀한 물건을 대하듯 종이를 접는 것을 본 반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리 귀한 것을 어찌 감히 그렇게 막 다룬단 말이냐.”

진십삼이 눈을 부릅뜨며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집안 형제들이 모사하기에 충분하겠어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그를 배웅했다.

“아 참, 좀 전에 진안 군왕께서는 또 경왕의 일로 왔던 겁니까?”

진십삼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예의를 중시하는 진십삼은 여기서 더 캐물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온 겁니까?”

“사과하러요.”

정교랑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과?

경왕 때문인가? 정 낭자가 경왕을 치료하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로 그녀를 또다시 궁으로 불러서?

하긴, 황궁의 태의도 황제 폐하 앞에서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 정 낭자는 오죽할까. 불안하고 난감한 일이었겠군. 그리고 최근에 낭자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폐하께서는 낭자를 더욱 난감하게 만드셨겠지.

“그렇네요. 사과할 만해요.”

진십삼이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웃었다.

“왜 웃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왜 낭자는 내가 물을 때마다, 대답하지 않거나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죠?”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남에게 말 못 할 일도 아닌데, 왜 안 알려 줘요?”

진지하게 대답하는 정교랑의 모습에 진십삼은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 알려 주겠다고 하는 낭자의 모습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뭐가 재밌다는 거야?

진십삼을 배웅하러 나온 반근과 황씨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잠시 그 모습을 상상했다.

저렇게 단정하게 서 있는 낭자가 뾰로통 입술을 내민 채 눈웃음을 지으며 ‘안 알려 줄 거예요.’라고 한다면······.

반근과 황씨는 동시에 몸을 움찔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정교랑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네요.”

집에 도착한 후에도 진십삼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막 귀가한 그는 마당에 서 있던 진 부인 그리고 다른 두 부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우연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우연이야.”

진 부인이 진십삼의 의심 어린 눈빛을 보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좀 전에 했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돌리고 웃음을 멈추려 애썼다.

“십삼이 오늘 왜 저렇게 기쁜 거래요?”

두 부인이 물었다.

“쟤? 그러니까······.”

진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하려던 찰나, 진십삼이 몸을 다시 돌리고는 글씨가 쓰인 종이를 뭉텅이로 쥐어 내밀며 진 부인의 말을 끊었다.

“형제들이 그리도 원하던 정 낭자의 친필 글씨입니다. 제가 얻어 왔어요.”

진십삼의 말에 두 부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원산 다섯 형제의 무덤은 경성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왕희지가 쓴 <난정집서>의 뒤를 잇는 천하제이 행서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그 글씨의 탁본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쨌거나 남의 무덤이니 비석 위에 재료를 덕지덕지 묻혀 가면서 탁본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무덤의 주인이 꽤 명망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비석 가까이 가서 글씨를 모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풍문에 의하면 귀비가 비석에 글씨를 새겼던 정교랑에게 평왕의 글씨 선생 노릇을 부탁했지만, 정교랑은 단칼에 귀비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했다. 당시 정교랑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글씨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감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에요. 소녀는 감상을 위한 서예를 할 줄 모르고, 더욱이 남을 가르치는 법도 모릅니다.

정교랑의 건방진 태도에 귀비는 기가 찼지만, 황제는 껄껄 웃으며 고지식한 듯하나 겸손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천하의 귀비마마까지 거절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직접 찾아가서 글씨를 달라고 했담?

그 정 낭자한테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종이를 가져왔단 말이야? 저것 중 딱 한 장만이라도 집에 가져갈 수 있다면, 보물 감상 연회를 족히 몇 번은 열 수 있을 텐데.

“십삼, 어서 내게 보여다오.”

두 부인이 진 부인을 뒤로하고 진십삼을 에워쌌다. 진 부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기, 그래도 쟤가 내 아들인데, 십삼이 그걸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 어미의 동의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

진십삼은 세 부인 사이에 껴서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형제들에게 줄 몇 장만 간신히 남겨 놓고 두 부인에게 종이를 나눠줬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나머지 몇 장마저도 전부 빼앗길까 싶었던 진십삼은 서둘러 종이를 소매 안에 넣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참, 그리고 어머니.”

진십삼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렸다.

“부엌에서 영리하고 똑똑한 몸종 하나만 골라서 정 낭자 댁으로 보내 주세요.”

“왜? 일손이 부족하대?”

진 부인이 물었다.

“아니요. 장씨 가문의 찬모인 장반근을 낭자가 가르쳤다니, 진씨 가문의 진반근도 한 명 만들고 싶어서요. 낭자한테 제자를 하나 보내겠다고 했어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세 부인은 동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도 된다고?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강주 선생 댁의 찬모를 정 낭자가 가르쳐 냈다고?”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네. 원래는 정 낭자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었죠.”

강주? 장강주, 강주 바보. 그러고 보니 모두 강주 출신이네.

“어쩐지!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구나!”

두 부인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정 낭자는 못하는 게 뭘까?”

진 부인이 웃으면서 옆에 있던 여종에게 부엌에서 몸종 두 명을 골라 오라고 명했다.

진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부인 중 하나가 진 부인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진 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댁에 몇 명이나 있다고 찬모를 두 명씩이나 보낸답니까. 너무 사치스러운 거 아니에요?”

진 부인의 팔을 붙잡은 부인이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진 부인이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도 한 명 보낼게요.”

그제야 눈치를 챈 다른 부인이 재빨리 진 부인의 다른 팔을 붙잡고 말했다.

“어어? 내가 먼저 말했거든요?”

진 부인의 팔을 먼저 붙잡았던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리예요. 말은 내가 먼저 했잖아요.”

다른 부인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두 사람 다 못 말려, 진짜.”

진 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진십삼은 부인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며 빙긋 웃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진 부인이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십삼, 정 낭자가 몇 명까지 보내도 된다고 했니? 세 명도 괜찮을까?”

두 부인에게 시달리던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물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첫 번째 반근은 가르쳐서 곁에 뒀고, 두 번째 반근은 남에게 줬고, 지금은 세 번째 반근까지 있잖아요. 반근이 서너 명 더 는다고 해서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낭자는 별로 개의치 않을걸요.”

옥대교 앞에 서서 반나절 내내 고민만 하고 있던 서생 하나가 굳게 닫힌 옥대교 대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를 갖추고 찾아온 건데, 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까?”

서생이 물었다.

“저 낭자의 집엔 웃어른이 없소. 혼례를 올리지 않은 여인이기도 하고, 범 군감이 바빠서 매일 집을 비우는데 어찌 외간 사내가 저 집에 방문할 수 있겠소? 이는 큰 결례요, 결례.”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서생이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말했다.

“집에서부터 닷새나 걸어 경성까지 왔습니다. 무덤 앞에서 그 글씨들을 보느라 또 닷새를 보냈고요. 그런데도 저는 그 글씨들의 정수(精髓)를 아직 못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밤이고 낮이고 정 낭자의 글씨만 생각하다가 이번 생에 다시는 붓을 들지 못하겠지요. 너무 아쉬워서 도저히 이렇게는 못 돌아가겠습니다. 정 낭자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침을 들어도 전 충분합니다.”

“귀비마마의 체면도 무시하는 분인데, 우린들 오죽하겠나? 황자조차도 가르치지 않겠다는 분인데, 우린들 오죽하겠냐고.”

더 많은 사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눈빛을 반짝이던 서생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낙담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걸음을 돌린 그 서생은 곧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래도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설령 얻어맞고 쫓겨난다 해도, 헛걸음하기는 싫습니다.”

서생은 많은 이들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옥대교 저택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후회할까 봐 두려웠는지, 문 앞에 멈춰 서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렸다.

쾅 소리가 나자, 자신의 행동에 놀란 서생은 손을 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문 앞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서생이 뒤늦게 침을 꿀꺽 삼키고 도망치려던 찰나, 대문이 열렸다. 거구의 시종 두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생 앞으로 다가왔다.

“누굴 찾아왔습니까?”

“정, 정 낭자를 찾아왔습니다.”

서생이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누구시죠?”

“저, 저는 개양의 장문창(張文昌)이라고 하, 합니다.”

“용건은요?”

“저는 나, 낭자께 행서 필체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시종 두 명이 서생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문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마치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 나가기라도 할 듯 바짝 긴장하여 숨소리를 죽였다.

내쫓을 거면, 말로 했으면 좋겠네. 그래도 예의를 갖추고 방문한 서생인데, 설마 때려서 내쫓진 않겠지?

“잠시 기다리십시오.”

시종들이 이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서생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는 서생과 시종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문이 도로 닫힌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서생이 문 앞에 무탈히 서 있자, 사람들은 서생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어떻던가?”

“무슨 말을 했소?”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묻기 시작하던 때, 다시 대문이 열렸다.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감히 가르침은 줄 수 없으나 지금 글씨를 쓰고 있으니 원한다면 들어와서 보라고 하세요.”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몸종 하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멍해졌다.

들어와서 보라고?

문을 두드렸던 서생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감격에 북받쳐 몸을 떨면서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뒤에 대문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가 마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저, 저도 보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정교랑의 글씨를 보고 싶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은 대문 앞의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때 서재 밖으로 걸어 나오는 정교랑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고개를 돌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씨!”

아씨?

다들 외치는 소리를 멈추고 회랑 아래로 시선을 옮기자, 묘령의 여인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나 어린 여인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세상의 온갖 고초와 비통함이 담긴 그런 글씨를 써낼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사람들은 곧 정교랑에 관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바꿨다.

그런 여인이기에, 그런 글씨를 써낼 수 있었던 게야. 참으로 기이한 일이군.

정교랑은 문 앞에 빽빽하게 서 있던 사람들을 쳐다보고 걸음을 멈췄다. 옥대교 저택 앞에 다시 한번 적막이 흘렀다.

“내가 글씨 쓰는 것을 보고 싶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예, 낭자께서 쓴 글씨에 대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서생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글씨는 누굴 가르칠 만한 게 못 돼요. 난 가르칠 줄도 모르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역시,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던 찰나,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난 매일 이 시간에 글씨 연습을 해요. 그러니 내가 글씨 쓰는 걸 보고 싶다면 와서 봐도 되고, 글씨를 따라 써도 돼요.”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르침을 줄 수는 없지만, 글씨 쓰는 것을 봐도 된다? 저 낭자가 글씨 쓰는 것을 볼 수 있고, 옆에서 따라 쓸 수 있다는 것은, 가르침이나 다름없잖아!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입니까?”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저 글씨 쓰는 것일 뿐이잖아요. 안 될 게 있나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이 와서 물어볼 걸, 뭐 하러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했을까! 정 낭자의 귀한 가르침을 하루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뒤를 다투면서 마당 안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아씨, 집엔 저 많은 사람이 다 들어올 곳도 없는걸요?”

반근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다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정교랑이 아, 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럼, 내가 밖으로 나가면 되지.”

정교랑이 말했다.

성문 밖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은 하룻밤 사이에 한산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제일 먼저 눈치챈 이는 아침 일찍부터 광주리를 들고 나온 노점 상인들이었다. 평소라면 글씨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해가 뜨기도 전부터 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글씨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초시의 모든 노점상이 장사를 시작했는데도, 무덤을 지키는 위병 둘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설마 관청에서 접근 금지령이라도 내렸나? 무원산 형제들을 방해하지 말라는?”

누군가가 추측을 내놓았다.

“황릉도 아닌데, 세상에 그런 법도가 어디 있어? 무덤 지키는 저 위병들도 아무 소리 안 하는데, 관청이 뭐라고 남의 무덤에 이래라저래라야?”

“혹시 또 무슨 일 터진 거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거, 되지도 않는 추측 좀 그만하시오. 정 낭자가 자기 집 앞에 자리를 깔고 글씨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더군. 죽은 사람 비석에 있는 글씨를 보고 모사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 직접 글씨를 쓰는 게 더 보고 싶지 않겠소?”

자리를 깔고 글씨를 가르친다고?

“단랑!”

두루마리 족자 한 개를 품에 안고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던 진단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다. 누군가가 단랑의 이름을 두어 번 더 부르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멈춰 세웠다.

“뛰긴 왜 뛰어?”

진십팔랑이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나 방해하지 마, 언니.”

진단랑은 진십팔랑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진십팔랑이 실소를 터트렸다.

“네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래? 자수도 이제 배우기 시작했고, 공부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 노는 것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어? 됐고, 자, 이리 와. 와서 나랑 글씨 연습하자.”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진단랑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글씨 연습하러 가는 길이란 말이야. 나, 정 낭자한테 가서 글씨 배우려고.”

진십팔랑이 깜짝 놀랐다.

“저, 정 낭자는 글씨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너 어리다는 핑계로 괜히 가서 정 낭자 귀찮게 하지 마.”

“그런 거 아니거든?”

진단랑이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글씨를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글씨 쓰는 걸 보는 것은 된댔어.”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진씨 가문의 마차가 옥대교 앞에 멈춰 섰다. 사실 마차가 멈춘 것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인파로 인해 길이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어차피 못 가. 나는 내려서 걸어갈게.”

진단랑이 쪼르르 마차에서 내렸다. 진십팔랑은 얼른 진단랑을 챙기라며 몸종들을 재촉했다.

“언니, 필요 없어. 사람은 많고 자리는 좁으니까 나 혼자 가면 돼. 종이 펴 주는 몸종 하나, 먹 가는 몸종 하나에 시중드는 몸종 하나까지 곁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진단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혼자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갔다.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차에서 내린 진십팔랑은 몸종과 사환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진십팔랑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십팔랑의 눈앞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가 모여 앉아 있었다.

진십팔랑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꽃등 놀이를 할 때마다 인산인해의 장관을 봤으니,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많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항상 텅 비어 있던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 앞이 오늘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한쪽씩 나눠 앉아 있었는데, 여자들은 너울을 쓴 차림이었다. 작은 서안을 들고 온 사람도 있고, 무릎 앞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좀 더 뒤쪽으로는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도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주워 와 바닥에 대고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이하고 경외감이 드는 풍경이 옥대교 앞에 펼쳐졌다.

정중앙에 앉아 있던 여인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붓을 들고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진단랑은 간신히 정교랑 근처까지 비집고 들어갔다. 어린아이다 보니, 진단랑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단랑은 진지하게 종이를 펼쳐 놓은 후,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낭자, 낭자, 그 글씨는 어떻게 썼는지 자세히 못 봤어요. 다시 써 주세요.”

진단랑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붓을 들고 조금 전의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정교랑이 방금 썼던 종이를 옆에 놓자, 몸종 하나가 종이를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진십팔랑은 순간 사람들의 눈에서 빛이 쏘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요.”

한 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가져갈 차례인 듯합니다.”

반근이 걸어가 손에 든 종이를 그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보물 떠받들다시피 두 손으로 받았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얼른 다시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행여나 정교랑이 쓰는 한 획이라도 놓칠까 봐.

“십팔랑.”

누군가가 등 뒤에서 진십팔랑의 이름을 불렀다. 진십팔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그 소녀들이었다.

“십팔랑, 너도 정 낭자가 글씨 쓰는 걸 보러 온 거야?”

소녀 중 하나가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와 벼루를 진십팔랑에게 흔들어 보였다. 진십팔랑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소녀가 대꾸했다.

“에이, 진 낭자께서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평왕께 서예를 가르치러 가기에도 바쁜 몸인데.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랑 다르겠지.”

진십팔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옷소매 안의 손을 꽉 쥐었다.

“서둘러야겠네. 정 낭자는 매일 반 시진만 글씨 연습을 하신대. 이러다 또 놓칠라.”

두 소녀는 진십팔랑의 양옆으로 지나가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몸종이 분한 얼굴로 서둘러 진십팔랑을 부축했다.

“아씨, 저희도 저리로 갈까요?”

몸종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리로 가겠느냐고? 저리로 가서 뭐해?

글씨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감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에요. 소녀는 감상을 위한 서예를 할 줄 모르고, 더욱이 남을 가르치는 법도 모릅니다.

남을 가르칠 줄 모른다고 했던 사람인데, 내가 저길 가서 뭘 해? 정 낭자에게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진십팔랑은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전 두 사람의 말처럼, 반 시진이 지나자 정교랑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남아 있던 몸종들은 정교랑이 글씨를 썼던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 준 후, 붓과 먹 그리고 탁자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단랑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대문이 닫히자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고,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계속 자리에 앉아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붓으로 자신의 지인과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고, 연못에서 붓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

조용했던 옥대교 저택 앞은 다시 마차와 사람들이 오가면서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다.

“저런 게 바로, 진정한 은둔자는 저잣거리에 살고, 가장 통속적인 것이 곧 가장 우아한 거라는 말이로군.”

“출신도 배경도 따지지 않고, 배우고 싶으면 누구든 와서 배우라는 저 마음가짐이, 진정한 의미의 대유(大儒)일세.”

“당초 강주 선생이 망주(望州) 광양의 나무 아래에서 경서를 가르친 것이 생각나는군. 그때도 족히 백 명은 넘는 사람이 강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지. 강주 선생의 가르침이 소리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강주 낭자의 가르침은 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무성의 가르침이구려.”

“그럼, 이제 강주 선생이 두 명 있다는 거요?”

강주 선생.

본적지를 자신의 칭호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유명한 진소조차도 진 상공으로 불릴 뿐, 구주 출신이라고 해서 진구주라 불리진 않았다.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정교랑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나 지금 안 가.”

진십팔랑이 들어오는 것을 본 진단랑이 외쳤다. 진단랑이 뭘 하려는 건지 소매를 동여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그런 진단랑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 낭자랑 같이 간식 만들 거야.”

진단랑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간식을 만들어?

그때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고, 소매를 동여맨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 회랑 아래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세 몸종이 공손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무료하니, 재미로 요리나 좀 해 볼까 싶어서요.”

정교랑이 말했다.

재미? 저 낭자가 재미를 안다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목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십팔랑이 어색한 웃음을 쥐어짜냈다.

“낭자와 조용한 곳에서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 안. 진십팔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해가 안 가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나와 관련 있는 거라면 편하게 말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글씨를 잘 쓴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이게 다 뭐죠?”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난 지금, 이렇게 지내요.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있고, 그게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일은 아니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 와서 보라고 한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솔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남들과 똑같은 거짓말쟁이였네요. 당신이 쓴 글씨가 좋지 않다고요? 그렇게 좋지 않은 글씨가, 어떻게 천하제이 행서로 불릴 수 있죠? 어떻게 귀비, 태후, 그리고 폐하까지 좋지 않은 글씨를 칭찬하시냐고요!”

“그건 그들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에요. 난 내 글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걸요. 난 나 자신에게 솔직할 뿐이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진십팔랑은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고 어찌할 수도 없다고요?”

눈시울이 붉어진 진십팔랑이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 진소(陳素)가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된 건 알아요?”

“몰라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십팔랑이 다시금 실소를 터트렸다.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참았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른다고요? 네, 당연히 당신은 모르겠죠.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긴 해요. 진소,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난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어요. 오롯이 신경 쓸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죠. 우린 누구나 자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남을 신경 쓰지 말아요. 진소, 날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챙겨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당연히 남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무슨 일을 하든 자신만의 원칙이 있잖아. 당신의 그 원칙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야. 정나미도 없고 오직 원칙뿐이야. 당신 눈엔 사람 사이의 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은 말을 끝내자마자 문을 홱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당에 서 있던 시녀와 몸종들, 그리고 진단랑은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놀라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향해 외쳤지만, 진십팔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그런 진십팔랑의 모습에 진단랑은 민망하고 마음이 급해져 일단 그녀를 쫓아 나갔다.

진단랑이 나간 뒤,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서둘러 안쪽을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씨, 괜찮으세요?”

반근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떨지는······.

정교랑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반근은 울면서 뛰쳐나간 진십팔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십팔랑, 어서 문 좀 열어 봐.”

방문 너머로 진소 부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정 낭자랑 말다툼했어요! 막 정 낭자한테 소리 지르고! 정말 무례했어요!”

진단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아예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문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문 앞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진십팔랑은 천천히 두 손을 내려놓고 무릎을 껴안은 채 그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십팔랑, 네가 괜찮은지 물어보러 왔단다.”

문밖에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흠칫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 노태야였다. 진십팔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문밖에서 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스스로 괜찮다는 것을 알면 됐다.”

진 노태야의 발걸음 소리가 문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가 알면 됐다, 나 자신이 알면 됐다! 왜 다들 자기 자신만 신경 쓰라는 거야!

진십팔랑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전 모르겠어요. 정 낭자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전 정말 모르겠다고요. 정 낭자는 왜 항상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짓밟고 지나가는 거죠? 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드냐고요!”

진십팔랑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진 노태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정 낭자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너는 알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소리쳤다.

“아무도 너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다. 널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진 노태야가 호통쳤다.

“정 낭자는 왜 그러는 건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요!”

진십팔랑이 울부짖었다.

“정 낭자는 의지가 있고 그것을 해낼 능력도 있는 반면, 너는 의지도 없고 해낼 능력도 없으니까! 십팔랑, 무의미한 시기와 질투를 거두고 너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똑바로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려면, 우선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할 능력이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해낼 능력도 없이 원하기만 한다면 헛되이 미혹된 것이다. 진소, 너는 어리석음에 도달하기도 전에 미혹부터 됐어! 헛되이!”

“아니에요. 전, 전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지, 인정할 수 없는 것뿐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인정할 수 없다고?”

진 노태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호통쳤다.

“십팔랑, 고작 2년의 글씨 연습이 고생이라고 생각하느냐?”

고생······.

진십팔랑은 아랫입술만 꾹 깨물 뿐, 진 노태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넌 네가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겠지.”

진 노태야가 말을 이어 갔다.

열심히······.

진십팔랑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십팔랑, 너는 왕희지가 글씨 연습을 몇 년 동안이나 한 줄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자,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순간을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진십팔랑은 알고 있었다.

“십팔랑,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것은, 네가 열심히 연습하고 고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이유 중 절반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절반의 이유를 왜 모르느냐? 그건 바로 네 성이 진씨인 덕분이다. 네 아비가 진소고, 네 아비가 진 상공인 덕분이야!”

진 노태야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받은 그 총애는 황제의 성은이고, 그건 황제가 진 상공의 체면을 봐준 것뿐이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이 문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할아버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하세요?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냐고요!”

창백한 얼굴의 진십팔랑이 눈물을 쏟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진십팔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 노태야는 진십팔랑을 다정하게 타이르고 훈계했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진십팔랑의 뼈를 때리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촉촉한 보슬비가 내리나 싶더니 별안간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와 오장육부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거의 혼절 직전인 진십팔랑의 모습을 보고, 진 노태야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누구지?

그건 정수리에 세찬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게야. 무시무시한 무기이기도 하고. 그러니 정 낭자도 하마터면 혼수상태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지.

하지만 별수 있나? 침을 맞으려면 피를 봐야 하고, 낫지 못할 병이라면 독한 약을 써야 하는데.

“십팔랑.”

진십팔랑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진 노태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리도 두려우냐.”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두렵냐고? 난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진십팔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진십팔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가 아둔하여, 조부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진십팔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십팔랑의 방 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몸종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진십팔랑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향긋한 차를 우려 두 사람 앞에 가져다 놓았다.

진단랑이 잠시 문 앞을 기웃거렸지만, 여종이 서둘러 진단랑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정 낭자가 귀비의 청을 거절한 것은, 바로 정 낭자가 비석에 새긴 행서 때문이다. 비석의 글씨로 인해 정 낭자가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 낭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 행서를 썼는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십팔랑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 노태야의 말을 경청했다.

“의형제 다섯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본래 그 형제들의 것이어야 할 공로까지 빼앗겼다. 어리고 힘없는 여인의 몸으로, 감히 천자와 내기까지 감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로를 되찾을 수 있었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간의 일에서 정 낭자가 감당해야 했던 ‘만에 하나’가 얼마나 많았겠느냐? 만에 하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면, 정 낭자가 했던 모든 일은 전부 물거품이 됐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더냐? 폐하를 비롯하여 조정 관리들이 전부 정 낭자를 사정없이 물어뜯었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비가 내린 뒤 맑게 갠 날씨처럼 보인다만, 정 낭자의 사방에는 아직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십팔랑, 우리 진씨 가문은 그래도 명문가 반열에 속하니, 너와 네 형제자매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 너희에게는 바늘에 손이 찔려 피가 찔끔 나는 정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일 게야.

그런데 어찌 그런 마음가짐을 정 낭자와 비교할 수 있느냔 말이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였다.

“정 낭자가 웃는 걸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정 낭자가 왜 말하기를 싫어하는지 아느냐?

정 낭자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무정하여 웃을 일도, 이야기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팔랑,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비석의 글씨가 대단하다고, 천하제이 행서라고 칭송한다. 한데 그 글씨가 왜 그토록 좋은지 아느냐?

말로 이루 표현해낼 수 없는 비통함이, 글씨의 매 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힘겹게 써 내려간 글씨를, 어떻게 감상을 위한 글씨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함으로 쓴 글씨 덕에 얻은 명성을, 정 낭자가 자랑스러워하겠느냐?

아마 정 낭자는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글씨들을 영원히 쓰지 않기를 택했을 것이다.

십팔랑, 그래도 그런 글씨를 써낸 정 낭자가 부러우냐?

십팔랑, 내 말하지 않았느냐. 늘 자비심을 품고, 세상 사람들 눈에 정 낭자의 무엇이 좋아 보이는지, 그 명성을 어찌 얻은 것인지 보란 말이다.

정 낭자는 자신이 쓴 글씨를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다고 하지. 그 이유인즉슨, 자신의 글씨가 좋지 않다는 정 낭자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정 낭자의 글씨를 좋은 글씨라고 생각하고 낭자가 쓴 글씨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하겠느냐? 정 낭자가 감당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 말고도 더 있어야 해?

네 말대로라면, 정 낭자는 자신의 비통함을 표하고자 비석에 글씨를 쓰는 것도 안 되고, 한바탕 우는 것도 안 된다는 게야? 정 낭자는 아무리 슬퍼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냐? 정 낭자가 한 일은, 남들 앞에서 글씨로 눈물을 흘린 것밖에 없다. 세상이 정 낭자의 글씨를 높이 추켜세웠을 뿐이야. 너는 그걸 보고도, 정 낭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낚아챘다고 여기느냐?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것은, 정 낭자의 마음에 거리낄 게 없어서다. 그 글씨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마침 자신은 항시 같은 시간에 글씨를 쓰니, 못 보여 줄 것도 없겠지. 정 낭자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기에 마음 가는 대로 편히 행동했을 뿐이야. 그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정 낭자가 살피고 고민해야 한단 말이냐? 자신의 행동으로 누가 기뻐하고, 또 누가 기뻐하지 않는지까지 살피라고? 다른 이가 싫어할까 봐 자신이 하던 일까지 멈추란 말이더냐?

십팔랑, 사람을 업신여겨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십팔랑, 천도(天道)는 무정하다지만,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자비를 베풀어야 해.”

진십팔랑이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엎드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조부님, 제가 틀렸어요. 당장 가서 사죄할게요.”

진십팔랑이 감정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갈 필요 없다.”

진 노태야가 진십팔랑을 불러 세웠다.

“죄는 죄야. 사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진 노태야의 말을 듣자, 진십팔랑은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진단랑과 함께 다녀오마.”

진 노태야가 문을 나서면서 진단랑을 불렀다.

진십팔랑은 문가에 가만히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기다리다 지칠 지경이었던 진단랑이 진 노태야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 낭자 댁에 가는 거예요? 잘됐네요. 이게 다 언니 때문이에요. 정 낭자한테 요리도 마저 배워야 하는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린아이라서 정말 좋겠다. 아무런 잡생각 없이, 순수하게 정 낭자를 존경하고 감동할 수 있으니까.

조부님, 제가 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두렵지 않아요.

제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저보다 못한 사람이 절 앞선다는 사실이죠.

태사국이 길일로 택한 10월 18일, 평왕은 궁을 나와 왕부로 거처를 옮겼다. 이튿날, 진십팔랑은 출타할 채비를 했다.

“십팔랑, 평왕부에 가는 거니?”

진소 부인이 확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 평왕께 글씨를 가르칠 시간이 됐어요.”

진십팔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진소 부인과 함께 서 있던 자매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십팔랑, 귀비마마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셨는데, 어찌······.”

진십팔랑의 언니 중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귀비가 정교랑에게 평왕의 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때, 누군가가 귀비의 옆에서 완곡하게 진십팔랑의 글씨도 꽤 괜찮다며 폐하께서 직접 고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자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글씨 좀 쓰는 게 뭐 대수라고. 천하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더냐? 내가 원하는 것은 천하제일이야.

귀비의 그 말은 내시와 궁녀들의 입을 타고 저잣거리까지 흘러나왔다. 그래서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두 소녀가 진십팔랑에게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조롱한 것이었다.

“폐하께선 저한테 전하께 글씨를 가르치라고 하셨어요. 이제 안 가도 된다는 말씀은 없으셨고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제가 할 일과 무슨 상관이죠?”

진십팔랑이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자매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 부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따스한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평왕은 어제 막 왕부로 들어갔어.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건 어때?”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무척 열심이신 분이에요. 오늘은 관두고, 당장 어제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으셨을걸요.”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도,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인 사람들을, 하늘이 속일 리가 없겠지. 아니, 속여서는 안 되지.

마차가 거리를 지나갔다. 옥대교를 지날 무렵, 십팔랑은 조용히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저쪽 정교랑의 저택 대문 앞은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인은 정중앙에 단정히 앉아 붓을 들고 나무틀에 걸어 둔 종이에 글씨를 썼다. 거리가 멀다 보니 진십팔랑에게는 무엇을 쓰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비교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진십팔랑은 마차 휘장을 내렸다. 그녀의 마차가 옥대교 앞을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랑도 몸을 일으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글씨를 쓰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바람에, 옥대교 앞을 지나가던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를 호위하는 시종은 사람들을 내쫓으며 길을 트려고 했지만, 마차에 타 있던 사람이 그를 제지했다.

“잠시 기다리면 된다.”

마차 휘장이 들어 올려지더니, 일상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고능준이었다.

“급할 게 뭐 있다고.”

시종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차 옆으로 물러났다.

고능준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옥대교로 향했다. 옥대교 아래의 강가에서는 여러 사람이 붓을 씻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지금 빨래하는 거 안 보여요?”

강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옷은 나중에 빨아도 되지만, 붓은 나중에 씻으면 큰일 나서요.”

서생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붓을 씻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강가의 모습에서 저잣거리의 흥취가 물씬 풍겼다.

“여기서 글씨 쓰는 것을 보는 자들이더냐?”

고능준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예, 대인. 사람들이 글씨 쓰는 것을 본 뒤에, 항상 이 강가에서 붓을 씻다 보니 강물이 새까맣게 물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이가 이 풍경을 화폭에 담아 ‘세필도(洗筆圖)’라는 이름을 붙여 큰 호평을 받기도 했고요. 과거에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옥대교의 세필도가 있다나요.”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고능준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여간 서생들은 자기를 치켜세우기 바쁘다니까.”

고능준의 시선이 옥대교 저택의 대문으로 옮겨 갔다.

“그런데 저 정 낭자는 서생들이 한껏 치켜세워준 덕에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이제 아무도 저 여인이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을 아예 바보 취급해 버린답니다. 심지어, 정 낭자에게 강주 낭자라는 호칭까지 붙여 줬다지요.”

“강주 사람들은 그걸 영광으로 여겨야겠구나.”

고능준이 웃으면서 눈을 게슴츠레 떴다.

“유명해지고 명망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야. 저 여인의 부모와 가족도 몹시 기뻐할 테지.”

“대인, 듣기로는 정 낭자가 친부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강주에 갔을 때는 가산을 둘러싼 싸움 때문에 백부를 관아에 발고했다는 말도 있고요.”

시종이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자, 고능준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말조심하거라. 필시 뭔가 오해가 있겠지. 정 낭자가 어디 그런 파렴치하고,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겠느냐?”

시종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 오해가 아니라면? 그럼 정 낭자는 파렴치하고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

지금의 폐하께서는 인자하시고 충효를 중요시하는 분이다. 이렇게 명망이 있고 모두가 떠받드는 낭자가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역시 고 대인이로구나! 달콤한 말 속에 사람을 죽이는 칼이 숨어 있어.

“참, 그러고 보니 정 낭자의 부친이 올해 전임한다지 않았나?”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부친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같은 시각, 머나먼 강주의 정 이노야는 심한 재채기를 했다.

“또 어떤 놈이 내 욕을 하는 거야?”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나 있던 정 이노야는 재채기 때문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읊었다.

정 이노야가 읊는 이름들은 정 이부인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예전에는 생소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정 이노야의 상관이거나 동료들이었다. 전에는 자주 왕래하며 뒷돈까지 쥐여 주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정 이노야가 날이면 날마다 이를 악물고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양 자사 자리가 분명하다고 했어. 돈 받고 선물 챙길 땐 틀림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모두가 한통속으로 나를 놀려먹은 거잖아.”

정 이노야가 씩씩대면서 중얼거렸다.

“해주(海州)? 해주라니! 나더러 해주로 가라고? 그리고 뭐? 거기서 거기라고? 어딜 봐서 거기서 거기야?”

정 이노야만큼 이 일에 분노한 정 이부인의 입가에는 물집이 잔뜩 생겨 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정 이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분명 확정된 일이었잖아요.”

“자꾸 윗선, 윗선, 운운하는데, 내가 윗선에 죄를 지은 게 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위고 아래고 다 끝낸 얘기를, 왜 갑자기 윗선에서 번복하냐는 말이오!”

“혹시 윗선까지 못 간 건 아닐까요? 난 그 유옥곤이라는 사람이 왠지 못 미덥다고 했잖아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안 되겠소. 내가 직접 다녀오리다.”

직접 간다고? 유옥곤을 만나러?

“대부인에게 가서 2천 관을 받아 오거라.”

정 이부인이 옆에 서 있던 여종에게 지시했다. 여종은 재빨리 알겠다고 하고 대청을 나섰지만, 곧 빈손으로 돌아왔다.

“대부인께서 돈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화가 난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돈이 없어? 돈을 다 어디에다가 썼길래!”

“장부는 여기 있으니, 어디에다 썼는지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무뚝뚝한 표정의 정 대부인이 탁자 위로 장부를 밀었다. 정 이부인은 냉소만 보일 뿐 장부를 받아 확인하지는 않았다.

“이 집의 안주인은 형님인데, 저희가 어떻게 감히 장부를 확인하겠어요.”

“돈을 어디다 썼는지 확인할 배짱은 없고, 돈 달라고 할 배짱은 있다? 난들 이 집 안주인 노릇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아이고, 형님.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부잣집 안주인은 하고 싶고, 가난한 집 안주인은 하기 싫으신 거잖아요.”

정 이부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저, 저 말하는 본새 좀 보게.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정 대부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가 가득 서린 서러움을 숨겼다.

싸울 만큼 싸웠고, 다툴 만큼 다퉜어. 이젠 나도 지쳤다고.

“줄 돈 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정 대부인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줄 돈이 없다고요? 그럼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면 되잖아요! 이노야의 앞길은 신경도 안 쓰시네요. 돈도 없이 누구한테 부탁해요!”

정 이부인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그때 안쪽에서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들으라고 허구한 날 기침이야? 병이 있으면 약을 먹든가.”

정 이부인이 막말을 내뱉었다.

“이게 어딜!”

정 대부인이 이부인을 노려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정 대노야를 부축했다. 정 대노야가 힘겹게 지팡이를 짚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정 이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남에게 부탁하느니 자기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가서 아우에게 전하시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 없으니, 경성에 있는 자기 딸을 찾아가라고.”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의 무례를 못 본 척하고 천천히 말했다.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노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도 우리 교교가 돈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아비란 사람이 어떻게 딸아이한테 손을 벌리겠어요?”

정 이부인이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트리자, 정 대부인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전에는 잘만 갖다 쓰더니만.”

“그거야 당신들이 혼수를 독점했으니 그런 거고!”

정 이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런 죄명을 내가 허투루 뒤집어쓸 것 같아?

“그만하시오. 내 말을 못 알아듣겠소?”

정 대노야가 지팡이를 땅에 콱 찍으면서 호통쳤다.

“돈이 있으면,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 아이가 인맥도 없이 무슨 재주로 그런 일들을 벌였겠소!”

정 이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찰나, 여종 하나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부인, 갑자기 사람들이 엄청 몰려왔습니다. 이노야께 축하드린다면서요.”

축하?

정 이부인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결정이 또다시 번복된 건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결정이 잘못 내려졌다고 하더군.”

정 이노야의 서재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사내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럼, 해주가 아니라는 거요?”

정 이노야가 의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아니지요, 아니고 말고요. 해주가 아니라 경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발 먼저 대답했다.

“거 참, 농이 지나치시오. 내가 어찌 경성 관리가 된단 말이오.”

정 이노야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이, 우리끼리 숨길 거 없잖소. 양아들이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던데. 이번에 큰 공도 세웠으니, 폐하께서 분명 노야한테도 상을 내리실 거요. 아직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임명장)이 내리진 않았지만,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한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가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내 양아들이라니?”

정 이노야는 찻물을 닦을 새도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 일곱 명 말이오.”

다른 사내가 일곱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일곱씩이나? 무슨 헛소리야! 나한테 무슨 양아들이 있단 거야!

무슨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갑자기 그런 게 무더기로 튀어나와?

몸종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차와 다과를 대청 안으로 들고 왔다.

대청 안에는 대방 내외와 이방 내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네 사람이 싸우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으며 앉아 있는 모습은 정씨 저택에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네 사람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만 있자, 몸종과 여종들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때 온 경성 사람들이 다 거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성문을 지키는 오성 병마사의 수령까지 정 아씨의 술을 한 잔 얻어 마시고 길을 터준 것도 모자라, 호송까지 해 줬다고 합니다······.”

“성안에서부터 성 밖까지, 족히 천 명도 넘는 사람이······.”

“그날 폭죽도 엄청 많이 쏘아 올렸는데, 꽃등 놀이 때 쏜 폭죽보다 더 많았다고······.”

대청 안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그,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짓을!”

정 이노야가 외쳤다.

“그렇게 하면, 돈이 다 얼마야.”

정 대부인과 이부인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동서지간에 의견일치가 된 게 하도 오랜만인지라, 두 사람은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일개 일손들한테 의형제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갖다 붙이다니. 시체를 안장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정 이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그 아이라서 해낼 수 있는 일이야. 후에는 일이 더 커졌겠지?”

정 대노야가 관청에서 소식을 알아 온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이 더 커졌습죠.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노씨 성을 가진 관리가 폐하께 탄핵 상소를 올렸고, 대로하신 폐하께서 그자를 하옥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경성부 관아에서도 사람을 보내 정 아씨의 점포 세 곳을 조사하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몰려든 백성이 관청과 조정이 도둑이 제 발 저려 괜히 무고한 사람을 잡는다고 한목소리로 정 아씨의 편을 들고 나섰고요. 정 아씨의 의형제들이 억울하게 공로를 빼앗긴 게 확실하다면서요.”

들은 얘기를 다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사는 다시금 두피가 저릿해져 왔다.

“나중에는 어사대에서 정 아씨를 잡아갔습니다.”

어사대!

“관직 생활을 이십 년도 넘게 한 나도 어사대에 끌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딸아이가 나보다 먼저 어사대에 잡혀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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