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60)

-과한 걱정-

진십팔랑은 귀비가 자리를 뜬 줄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십팔랑은 기다리는 게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장에 가득 꽂힌 서적 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편전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그 뜻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마마께서 수업이 끝나는 대로 태후궁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 정 낭자가 왔답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의 글씨를 보기 위해 궁으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아마 정 낭자에게 전하의 글씨 공부를 맡기고자 하실 테지요.”

“음? 그럼 진 낭자는?”

“전하, 천하제일이 있는데, 천하제이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진십팔랑이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진 낭자.”

누군가가 진십팔랑을 부르자, 그녀는 다소 황급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대황자와 대화하던 어린 내시는 진십팔랑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진 낭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어린 내시가 한쪽으로 몸을 돌리고 진십팔랑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진십팔랑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대황자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조당에서 꼿꼿한 모습만 보이는 진소는 황제께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그의 자식인 진십팔랑은 황궁이 무섭나 보군. 진소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자식은 그저 평범하구나.

어린 내시가 속으로 비웃으며 진십팔랑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던 국자감 관리가 물러나자, 그 안에는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대황자만 남아 있었다.

올해로 열세 살이 된 대황자는 어느덧 애티를 많이 벗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각 분야의 전문 스승들이 대황자 곁에서 예의범절부터 경서, 산술을 도맡아 가르친 터였다. 그 덕분에 대황자는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 낭자.”

대황자는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반절을 올렸다.

진십팔랑은 답례를 했으나, 곧바로 글씨 연습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황자의 탁자 위와 주위에 잔뜩 쌓인 서적을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전부 전하께서 읽으셔야 하는 책인가요?”

진십팔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씨 가문의 자제들도 당연히 책을 많이 읽어야 했지만, 대황자와 비슷한 나이대인 동생들이 읽는 책은 대황자에 한참 못 미쳤다.

대황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진 낭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책 한 장을 더 읽고 있겠습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진십팔랑의 시선이 대황자의 손에 들린 책을 향했다.

“전하께서는 벌써 그 책까지 읽으시는 건가요?”

대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책은 부지런히 읽어야지요.”

“아유, 우리 전하께서는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주무십니다. 근면성실하신 분이지요. 전하의 글공부를 칭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정도예요.”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아부를 떨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진십팔랑 역시 대황자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에 대해 진소에게 들은 적 있었다.

“전하께서도 열심히 노력하시는군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공부와 정사를 다스리는 일은,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진 낭자의 글씨 또한 부단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글씨 아닙니까?”

대황자가 단정한 자세로 물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만들어 낸 글씨인걸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난, 두렵지 않아.

“전하, 그럼 잠시 책을 읽고 계세요. 우선 글씨를 몇 자 써 오겠습니다.”

대황자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손에 쥔 책에 집중했다.

진십팔랑은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좀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고 위태로워 보이던 진십팔랑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무게 있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탁자 앞에 앉은 진십팔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붓을 들었다. 진십팔랑이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태후궁에 도착한 귀비는 정교랑을 만나지 못했다.

“갔다고요?”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 경왕을 보러 갔어.”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 기뻐 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태후의 눈가에 비친 기쁨을 보며, 귀비는 소매 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가 우리 집에 올 때는 담벼락을 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시들이 천천히 열고 있는 궁문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과일 차고, 이건 새로 만든 밤떡이에요.”

“이것도 한 번 먹어 봐요.”

늘 조용하던 경왕의 궁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내시와 궁녀들은 각종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전각 안을 드나들었다.

정교랑 앞에 놓인 탁자에는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그래도 부족하다 싶은지, 계속해서 아랫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앉아 탁자에 오른 음식을 먹었다. 어떤 음식이 올라와도 진지하게 맛을 봤다.

“배부르면 억지로 먹지는 마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건 있어요? 있다면 찬합에 담아 가져가요.”

진안 군왕이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인 음식 중 몇 가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요.”

옆에 서 있던 궁녀와 내시들은 정교랑의 행동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저 낭자는 어쩜 사양도 안 하네.

진안 군왕은 싱글벙글하며 사람을 시켜 정교랑이 가리킨 음식을 찬합에 담으라 명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경왕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두 내시가 경왕이 깼는지 확인하러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전하가 일 년 내내 하신 말보다, 오늘 하신 말이 더 많네.”

두 내시가 서로 눈짓을 하며 속닥거렸다.

“언제 강주로 돌아간 겁니까?”

진안 군왕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말을 걸었다.

“일 년 전에요.”

진안 군왕이 아, 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오라비들의 일은 몹시 유감입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애도를 표한 것에 감사하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때 도와준 게 고맙다는 건가?

어쩌면 둘 다겠지.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경왕께서 안으로 드십니다.”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진안 군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졸린 눈을 비비며 내시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

“육가아, 어서 이리 와 봐. 정 낭자가 왔어.”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았다.

진안 군왕도 못 알아보는 경왕인데, 한 번 봤던 정교랑을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경왕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고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음식을 마구 입안에 욱여넣었다.

진안 군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경왕을 쳐다보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때요? 일 년 사이에 키가 많이 컸죠?”

진안 군왕은 자랑하는 듯한 말투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이 진지하게 경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컸네요.”

“여전히 너무 뚱뚱하긴 하죠.”

진안 군왕이 우걱우걱 음식을 먹는 경왕을 보면서 말했다. 실내에는 경왕이 음식을 먹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몇 번씩이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경왕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볼 뿐, 정교랑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지.

“전하, 소인들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정 낭자와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내시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늘리며 조용히 말했다. 흠칫 놀란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시의 말을 못 들은 건지, 정교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놓인 간식과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살면서 정교랑만큼 진지하게 음식을 음미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정교랑은 평생 음식이란 걸 먹어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맛을 음미하고, 맛을 느끼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쩌면 정 낭자가 음미하고 있는 건 음식이 아니라, 나의 성의일지도.

어릴 적 명절 때면 부왕과 모친께서 나와 형제자매들에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셨던 것처럼.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비록 기억에 몇 번 없는 명절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정 낭자보다는 많이 받았겠지. 어쩌면 정 낭자는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진안 군왕은 내시와 궁녀들의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게 섰거라.”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문가에서 이제 막 걸음을 내딛으려던 내시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정 낭자, 일 년이나 지났는데, 낭자는 여전히 경왕의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까?”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경왕은 병을 앓는 게 아니니, 치료할 것도 없죠.”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작별을 고했다.

“소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교랑이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질수록, 다시는 정교랑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진안 군왕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교랑이 갑자기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이 퍼뜩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일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조용히 몸을 돌려 경왕의 궁을 떠났다.

한참 음식을 먹다가 배가 부른 경왕은 소매로 입가를 쓱쓱 닦은 뒤 밖으로 나가 놀았다.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경왕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전각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린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좀 전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소인이 경거망동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네 마음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그런 게지.”

“전하.”

내시가 고개를 들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나를 위한 게 무엇이더냐?”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만이, 나를 위한 것이다.”

내시는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떨면서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무슨 일이든, 천만 가지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굳이 아끼는 사람을······.”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떠나간 문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해칠 필요는 없지.”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했다. 아슬아슬했어. 천만다행이로구나.

태후궁 안. 귀비가 이따금 밖을 내다보았다.

“마마, 경왕도 이리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 낭자가 어떤 진단을 내리는지, 우리도 한번 들어는 봐야죠. 거기 숨어서 무슨 말을 할지 누가 알아요?”

“경왕은 잠들었다고 했다. 위낭이 어찌 자는 경왕을 깨워서 데려오겠느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또 어느 눈 안 달린 것이 경왕을 놀라게 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숨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그게 숨길 일이라도 된다는 게야?”

귀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경왕을 놀라게 해?

진안 군왕이 있는 한, 황궁에서 경왕을 놀라게 할 바보가 어디 있어? 까딱 잘못했다간 경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초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을 텐데.

내시 한 명이 잰걸음으로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안 군왕께서 경왕의 병세에 대해 물었지만, 정 낭자는 여전히 경왕을 치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그 말이 사실이냐?”

귀비가 같은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예. 그때 소인이 문가에 서서 군왕과 정 낭자의 대화를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경왕은 병이 없으니, 치료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어찌하여 병이 없다는 것이냐?”

귀비가 물었다. 내시가 대답하기 전에, 태후가 귀비의 말에 대답했다.

“당초 위낭이 육가아를 데리고 정 낭자를 찾아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 육가아는 바보가 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말이야. 그리고 죽을병은 더욱 아니니, 자신이 치료할 수 없고, 치료할 것도 없다고.”

태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슬픈 표정으로 진안 군왕의 상태를 물었다.

“위낭은?”

“전하께서 경왕을 돌봐야 하는 탓에, 마마께 직접 아뢰지 못하여 송구하다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또 한 번 무너진 게야.”

태후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는 태후 옆에서 마음 아프다는 듯한 몇 번 탄식을 내뱉은 뒤, 태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후궁을 벗어난 뒤에야 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 말이 참이더냐?”

좀 전에 태후궁으로 들어왔던 내시가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귀비에게 말했다.

“소인이 감히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옵니다. 정 낭자의 대답을 들은 뒤, 군왕은 넋이 나간 채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습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사옵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던 귀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귀비가 경왕궁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만에 하나, 경왕에게 병이 생긴다면?”

“그럼 그 병만 고치겠지요. 정 낭자가 바보는 병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귀비마마께서는 걱정이 너무 과하십니다.”

급하게 불려온 고능준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진안 군왕과 정 낭자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면요? 분명히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일부러 숨긴 거라면요?”

귀비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마마,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단언했는데, 그 둘이서 뭘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속이는 게 무슨 재미라고요. 천자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일이, 한 번으로 부족하단 말입니까? 아무리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그런 짓을 또 할 리는 없지요.”

고능준이 대답했다. 귀비는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가 두 번씩이나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치는 일은 한동안 벌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정 낭자는 잠시 내려두시지요. 대황자를 위협할 만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아직 정 낭자를 내치기는 아까우실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우리가 그 낭자를 궁지에 내몰 필요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고능준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든지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일이 꼬여버릴 것이야.

“이 일이 아직도 심각하지 않다고요? 안 그래도 진안 군왕이 온종일 황궁 안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무슨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사람까지 나타나서는.”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조급해했지만, 고능준은 담담하게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해결해야 할 일은 해결해야겠지만, 가능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끌어들여야 합니다. 별로 급할 것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안 급해요? 군왕이 벌써 열아홉인데도, 아직 황궁에 남아 있어요. 이번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망언도 서슴없이 늘어놓는 신의까지 궁에 들어왔는데, 무슨 괴상한 비방을 쓸지 누가 알아요? 도가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게 몸을 수양하고 기를 통하게 하는 거잖아요. 죽었다 살아난 동 내한이 그 나이에 아들을 또 낳았다는데, 동 내한의 나이는 폐하의 춘추와 비슷하다고요. 그 신의가 무슨 도술이라도 부려 폐하께 아들을 하나 더 안겨 주면 어쩌냔 말이에요!”

귀비가 눈을 부릅뜨고 숨 쉴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군왕을 출궁시킵시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요!”

귀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놈이 주둥아리를 어떻게 놀렸길래, 태후와 폐하께서는 그놈을 세 살배기 어린애 대하듯이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군왕을, 누가 감히 내쫓아요? 군왕을 해치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태후가 그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들 텐데.”

귀비의 말에 고능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태후께서 진안 군왕이 황궁에 살지 않으면 남이 해친다고 생각하여 황궁에 두시는 거라면, 오히려 일이 쉬워지지요. 대황자도 황궁 밖으로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대황자를?

깜짝 놀란 귀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순 없어요! 나는 군왕을 내쫓으려는 거지, 우리 사가아를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고요! 사가아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그렇게 어린 애를······.”

“그러니까요. 그렇게 어린 대황자도 출궁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왕부로 가 지내는데, 대황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진안 군왕이 어찌 출궁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말했다.

“그, 그래도······.”

귀비가 고개를 저었다. 고능준이 귀비의 말을 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도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폐하께서 정사를 돌보며 진안 군왕의 의견을 더욱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귀비는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고능준이 한 말은 이미 귀비가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였다. 황제가 늘 진안 군왕의 의견을 칭찬하는 탓에, 대황자가 허수아비처럼 멍청해 보인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놈을 내보내겠다는 거예요!”

귀비가 소리쳤다.

“군왕은 황궁 안에서나 지금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출궁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황자는 친왕인 데다 폐하의 혈통이고, 군왕은 그저 군왕일 뿐입니다. 마마, 친왕이 황궁에 들르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지만, 이미 출궁한 군왕이 무슨 핑계로 황궁에 들를 수 있겠습니까? 폐하와 태후께서는 군왕을 자유롭게 황궁 안으로 들이고 싶겠지만,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친근이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친하고 가까워야 친근이란 말을 쓸 수 있지요. 친하긴 하나 가까이 있지 않다면, 사람 마음은 물처럼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그런가? 군왕이 궁을 나가게 된다면, 확실히 지금처럼 제멋대로 황궁 곳곳을 누비면서 폐하와 태후의 눈에 띌 수는 없을 것이야. 하지만 대황자는 다르지. 진정한 황실 혈통인 데다, 황궁 안에는 이 어미가 있어. 하지만 군왕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잖아!

귀비가 손에 깍지를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왕은요? 그놈은 분명히 경왕을 방패 삼아 떼를 쓸 거예요.”

“경왕이라.”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에 있는 공주가 어디 한 둘입니까. 다 큰 아이든, 어린아이든, 실수로 경왕과 부딪혀 놀라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비는 고능준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고 눈빛을 반짝였지만,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도 경왕 때문에 놀랐던 공주가 있었어요. 그런데 태후께서는 도리어 공주만 꾸중하셨잖아요.”

고능준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마마,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니까요. 경왕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들 마음이 아프겠지만, 평생 마음 아파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든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지면 안 돼.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거든.

그래도 지금은 사람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무슨 일을 할 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진안 군왕도 갑자기 끼어들어서 내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지.

나 고능준은, 원수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야. 군왕, 네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큰 손해를 봤으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내가 조금씩 조금씩, 그 빚을 돌려받을 것이야.

한차례 가을비가 지나간 뒤, 경성 날씨는 한층 더 쌀쌀해졌다.

동쪽 성문의 감문관 이무는 성문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말을 타고 성 밖을 향해 달려갔다.

성 밖의 길 위에는 행인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문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람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많아졌다. 좀 더 앞으로 가 보니, 길가는 초시(草市: 도성 밖에 열리던 시장)라도 열린 것처럼 떠들썩했다.

“여기에 웬 초시가 열렸지? 경성이 바로 근처인 데다, 서쪽으로 삼 리만 더 가면 초시가 따로 있을 텐데.”

지나가던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나서서 설명했다.

“서쪽으로 삼 리를 더 가면, 초시는 있어도 무원산 형제의 무덤은 없잖소.”

설명을 들은 행인은 화들짝 놀랐다.

남의 무덤 앞에 초시가 열렸다고?

행인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근처에서 통곡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이 고개를 돌리자, 울타리를 두른 무덤 앞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내 하나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자는 성묘하러 온 사람이오?”

행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오. 글씨를 보고 바보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게지.”

옆에 있던 노점 상인이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글씨를 보고?

행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대성통곡을 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옷차림만 보아도, 연로한 학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님, 제게 좋은 붓, 먹, 종이와 벼루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저 비석을 직접 탁본한 글씨도 팔고 있는데.”

행인이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에 노점 상인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모사품을 탁본한 다른 이들의 것과는 급이 다르다 이거예요.”

행인은 아직 상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듣던 주위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손사래를 쳤다.

“허풍 좀 작작 떠시오. 울타리에다가 위병까지 붙은 마당에, 어떻게 비석에 종이를 대고 직접 탁본했다는 것이오?”

“아, 거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 셋째 외숙의 손자의 이모의 아들의 조카가 태평거에서 일하는 덕에, 주인어른께 부탁하여 허락을······.”

“지랄도 유분수지.”

“뭐라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행인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덤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늙은 서생을 쳐다보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쉼 없이 서예 대가들의 글씨를 연구해 겨우 나만의 서체를 만들었단 말이오. 온 경성에 소문이 났던, 천하제이 행서라 불리던 차정사의 글씨를 보고도 인정할 수 없었거늘.”

늙은 서생이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듣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들 또한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비석의 글씨를 모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늙은 서생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런 늙은 서생이 체통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몇 번이나 보아도 재미있는지, 구경꾼들이 나서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남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오?”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우는 것은 이 글씨들이 너무도 비통하기 때문이오.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울리고, 인생무상에 대한 분개와 비통함이 글씨에 새겨져 있잖소. 마음이 글씨에 깃든 것이고, 글씨가 곧 사람의 영혼인 것이지. 그러니 이것은 서예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니고,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니라는 뜻이오.”

늙은 서생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구경꾼들은 워낙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말들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습다는 듯 웃는 사람도 있었고, 늙은 서생의 말을 대강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늙은 서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멍석을 깔고 글씨를 모사하던 서생 한 명이 손뼉을 치면서 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어!”

서생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듯 날뛰었다.

“서예이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닌,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닌 경지. 손과 마음 모두, 서예를 한다는 생각 없이 글씨를 썼기 때문에 저 글씨가 훌륭한 것이야!”

서생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군댔다.

“도가 튼 사람이 한 명 늘었네.”

“미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걸 수도 있지.”

이무는 이리저리 휘청이는 서생을 피하고자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오지 말고 물러서시오.”

무덤을 지키는 위병 두 명이 호통쳤다.

이무가 걸음을 멈추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무를 알아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엇? 이 대장도 저 글씨에 홀리셨습니까?”

한 노점 상인이 이무를 향해 외쳤다.

이 대장이라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이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직책이 감문관이다 보니, 성문을 자주 드나드는 잡상인들과 친하지는 않아도 서로 얼굴은 익히고 있었다. 이무를 알아본 노점 상인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 대장도 저런 걸 좋아하시네.”

“대장 말고, 서생으로 전향하려는 건가?”

“하긴, 백날 대장을 해 봤자 뭐해? 문관 정도는 돼야 앞길이 트이지.”

“글씨를 보러 온 게 아니지 않을까? 술 냄새를 맡으러 온 것 같은데.”

“에이, 글씨를 보러 온 서생들이 무덤 앞에서 진을 치고 있잖아. 술 냄새를 맡으러 온 술꾼은 차치하고, 우리가 여기서 큰 소리를 내는 것조차 질색하는걸.”

“저 서생들도 참. 글씨를 보는 건 저들 마음이라지만, 술 냄새도 못 맡게 하는 건 좀 심했어.”

“하하하, 자네는 여기서 술장사를 하고 싶었던 거지?”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적해지자 당황한 이무는 서둘러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이무는 곧장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이무는 이씨 집안의 서자였다. 게다가 그는 형제들처럼 언변이 뛰어나지 않고, 천성이 둔했다. 말재주가 없는 터라 장사는 그른 데다, 설령 손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씨 가문의 폭약 공방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이씨 가문의 폭죽 제조 비방은 오직 적장자에게만 물려주기 때문이었다.

뭐든 어중간하게 했던 이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이무에게 막일을 시키는 대신 돈으로 하급 무관 신분을 얻어 주었다. 물론 가문을 위해 관청에 의지할 만한 사람을 심어 두고자 하급 무관 신분을 얻어 준 것이었지만,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하는 이무를 본 이씨 가문은 사실상 이무에게 기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요새 공방에 자주 드나든다고 들었다.”

이무의 부친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게다가 은밀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게냐!”

“저, 저, 저는 단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무가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시험? 무엇을 시험하려고?”

이무의 부친이 탁자를 팍 내리치며 다그쳤다.

“기껏 대장씩이나 시켜줬으면, 대장 일에나 심혈을 기울일 것이지. 감히 네놈이 공방 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야?”

“아버지, 무원산 형제의 장례를 치르던 날, 하늘 높이 솟아오른 폭죽을 보셨습니까? 그때 쓴 폭죽이 저희가 만든 폭죽보다 훨씬 좋아 보이길래, 소자가 한번······.”

다급하게 해명하던 이무는 부친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 나머지 말을 꿀꺽 삼켰다.

“너는 쓸데없는 생각을 참 많이 하는구나.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우리 가문의 일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네가 뭘 해야 진급할 수 있는지나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보다 더 일찍 관직을 얻은 사람도, 너보다 더 늦게 관직을 얻은 사람도 벌써 저만치 높이 올라갔는데, 왜 너만 제자리인 것이냐? 평생 그렇게 감문관이나 할 작정이야?”

이무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부친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

“암, 그날 폭죽을 너만 봤을까? 우린들 그 폭죽을 못 봤을 것 같으냐?”

이무의 부친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사람은 제 본분을 지켜야 하는 법이야.”

이무가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땅의 진동과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바깥으로 뛰쳐나와 서쪽을 바라보았다. 이씨 저택의 한구석에서 짙은 매연이 피어올랐다.

폭발이 발생한 곳은 다름 아닌 이씨 저택의 고방이자 폭죽 공방이 있는 곳이었다.

“큰일이다.”

이무 부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네놈은 이제 진급할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겠구나! 어떻게 죄를 청해야 할지나 생각하거라!”

거리에 징과 북이 울리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막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고능준도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불이 난 건가?”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서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당에 멈춰 섰다.

“노야, 안심하십시오. 이쪽까지는 불길이 닿지 못할 것입니다.”

수하가 서둘러 고능준에게 말했다. 고능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뒷짐을 졌다.

“정말 갑작스러운 화재구나.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무척 놀라시겠어.”

고능준의 예상대로, 경성 한복판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금세 황궁까지 전해졌다. 온갖 조서에 파묻혀 있던 황제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침상에 누웠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이 나는 것은 경성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매번 인명 피해를 동반했다. 어느 집안의 첩실이 비상금을 숨기다가 거리 반쪽을 태워 먹은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해서, 황제는 이번 화재 소식에 더욱 놀란 터였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불길이 잦아들어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시들이 서둘러 황제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황제는 내시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불이 완전히 꺼진 것도 아닌데, 어찌 사상자 수를 파악했단 말이냐. 이놈의 내시들은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아둔해지는 것이야? 짐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고작······.

황제는 경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황궁에서 가장 높은 전각으로 가기 위해 대전을 나섰다. 황제가 전각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태후와 비빈들이 보였다.

“이씨 가문의 폭죽 공방이 터진 것이라고?”

태후가 물었다. 이미 황성사의 사람이 태후에게 사실을 전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그런 것들을 집에 두면 안 된다고 했거늘. 어떻게 그런 위험한 것을 집에 뒀단 말이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지.”

태후가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외며 말했다.

“예전부터 그런 것을 집에 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오성 병마군이 조사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꼭 죄를 물어야 하오, 황상.”

태후의 말에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각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말없이 매연이 피어오르는 곳을 내다보았다. 다행히도 불길이 금방 잡혀, 시커멓던 매연은 점차 옅어졌다.

잠시 뒤, 황성사의 관리가 자신의 뒤에 있던 오성 병마사의 관리를 가리키며 양해를 구했다.

“긴급한 사안이다 보니, 신이 직접 오성 병마사 관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폐하와 마마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해 소상히 대답해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황궁의 후궁은 윤허 없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 가문 사람들의 말로는, 평소 폭죽을 다루는 일이 몹시 조심스러워 점포도 모두 성 밖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오늘 폭발은 이씨 가문의 자제 중 한 명이 아둔하게도 남몰래 제조 규칙을 어기고 폭죽을 제조하여 생긴 일이라고 하옵니다. 집안의 어른이 그자를 찾아내 문책하던 와중에 폭발이 발생했으며, 하필이면 평소 땔감을 쌓아 두는 고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땔감에 불이 붙어 불길이 거세졌다고 합니다. 이씨 가문의 자제는 이미 자수하여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성 병마사의 관리가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말하던 도중, 진안 군왕이 내시와 함께 다급하게 전각 위로 올라왔다.

“마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위낭.”

태후가 진안 군왕을 보자마자 그에게 손을 뻗어 가까이 오게 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에게 조용히 말했다.

“안 그래도 마침 너를 부르려고 사람을 보내려던 참인데······.”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던 찰나, 진안 군왕의 뒤에서 날카로운 어린아이의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궁녀들의 비명까지 합세하여 후궁의 평온함을 깨트렸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넋을 놓던 순간, 진안 군왕은 후다닥 뒤쪽으로 달려갔다.

“우리 공주잖아!”

한 비빈이 자신의 딸아이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 예를 표할 겨를도 없이 진안 군왕의 뒤를 쫓아갔다.

경성에서 일어난 폭발에 대해 보고하던 관리는 영문도 모른 채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를 데리고 후궁으로 들어온 황성사 관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궁에서는 후궁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곧 살길이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데려온 오성 병마사 관리의 팔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후궁 일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지면 안 된다. 두 관리가 허둥대며 발걸음을 돌렸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고 말았다. 궁녀들이 두 공주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의 정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공주 하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겁에 질린 채 울부짖으면서 달리는 궁녀들 뒤로, 괴상한 웃음소리와 위로 번쩍 들어 올린 두 손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2년 전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과거의 이황자, 지금의 경왕이로구나.

관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멀리서 보이는 두 손과 점점 더 가까워지는 동그랗고 거대한 경왕을 쳐다보았다. 햇빛에 비친 경왕은 입을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공주가 놀라서 혼절하였습니다.”

“마마, 마마. 어마마마께 데려다주세요.”

“숙녕, 왜 그러니? 숙녕, 정신 차려.”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어서!”

진안 군왕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인 곳을 지나, 단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신이 나서 손을 휘휘 저으며 해맑게 웃는 경왕의 옆에 멈춰 섰다.

“당장 저것을 잡아라!”

태후의 목소리가 진안 군왕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밧줄로 묶어라! 밧줄로 묶어!”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경악과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의 태후와 비빈들의 품에 안긴 공주들에게 시선을 돌린 황제를 본 진안 군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후다닥 뛰어나가려는 경왕을 이를 악물고 붙잡았다.

진안 군왕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경왕을 세게 눌러 잡은 적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손에 눌린 채 꼼짝도 못 하게 된 경왕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속박감과 자신을 억누르는 통증에 괴성을 질렀다.

“괜찮아, 겁먹지 마. 육가아, 이 형이 절대로 남들이 창피 주지 못하게 할게.”

태후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태후궁에 수차례 울려 퍼졌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내시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볼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입가에는 핏빛이 비쳤다.

“소인은 그저 마마께서 경왕 전하를 걱정하실까 봐, 미리 가서 경왕을 모셔 오려던 것이었습니다. 소인이 경왕 전하를 잘 모시지 못하여 공주님들을 마주치게 됐습니다.”

눈을 감고 있던 태후는 경멸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탁자를 내리쳤다.

“치워라.”

양옆에 서 있던 내시들이 재빨리 바닥에서 사죄하던 내시의 입을 틀어막고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태후궁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태후가 바깥을 내다보며 물었다.

“공주들은 어떠하냐?”

“태의가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처방했고, 크게 놀랐을 뿐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 하였습니다. 다만 어린 공주님께서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여, 폐하께서 공주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궁녀가 예를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태후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태후의 한숨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손, 마마께 죄를 청하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태후가 진안 군왕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마를 땅에 대며 큰절을 올렸다.

“소손, 경왕과 함께 황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위낭, 지금 애가를 탓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소손은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겁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보았다.

“마마, 소손은 마마와 폐하의 은총을 받기만 했을 뿐, 보답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이미 2년, 아니 곧 3년이 지나가는데도 소손은 여전히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소손은 올해로 만 열아홉이 되었는데도 출궁하지 않고, 마마와 폐하의 비호에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마와 폐하께서 만천하의 비웃음을 짊어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말입니다.”

“애가가 말하지 않았느냐. 감히 누가 너를 비웃는다고!”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감히 어떤 놈이 애가의 집안일을 왈가왈부한다는 말이냐!”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마마, 소손은 남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려 합니다. 소손은 구석진 곳에 숨어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소손이 피하고 숨는다고 해도, 생각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며 보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은 이미 변해 버렸습니다.”

“괜찮다, 괜찮아. 애가가 거처를 새로 찾아주마. 다른 사람이 절대 너희를 방해할 수 없도록.”

태후가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을 일으키려 했다. 진안 군왕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마마, 소손은 더 이상 숨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왕이 다쳤다고는 하나,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소손은 경왕을 데리고 당당하게, 광명정대하게 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한번 태후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소손, 출궁을 청하옵니다. 하오나 소손, 마지막으로 마마의 총애에 기대어 마마께 어려운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태후가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의 등을 다독이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후가 끝내 눈을 감자, 눈물 두 줄기가 태후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하거라.”

말하거라.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개를 들었다.

“소손, 경성에 남아 경왕과 같은 왕부에서 살기를 청하옵니다.”

“먼저 출궁을 청했다고?”

고능준이 놀란 눈으로 묻자,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리고는 손을 저어 수하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러게, 그놈은 겉보기처럼 허술하고 생각 없는 놈이 아니라니까.”

고능준이 막료들에게 말했다.

“단번에 이 일의 관건을 알아차리고, 빠르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다니. 군왕의 심지가 만만치 않습니다.”

막료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능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태후와 폐하의 반응을 보자마자 경왕에 대한 애정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다니. 빠른 상황판단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결단력은 쉬이 가질 수 없지요. 진안 군왕과 경왕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아예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막료가 맞장구를 쳤다.

황제의 총애가 아무리 옅어졌다고 한들, 진안 군왕과 경왕이 황궁 안에서 지내는 데에 불편함을 느낄 만한 것은 없었어. 하지만 이대로 출궁하면, 다시는 황궁 안으로 되돌아올 수 없겠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빠른 결단력으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판단해 내다니.

“이대로 폐하의 총애가 다할 때까지 버티는 것보다는 지금 한발 물러서는 게 낫지. 그럼 도리어 폐하와 태후께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는 모양새가 될 게야.”

고능준이 말했다.

“대인, 폐하께서 그들의 출궁에 동의하실까요? 진안 군왕이 황궁에서 지낸 세월이 십수 년인데. 아무리 폐하가 군왕의 친부가 아니라 해도, 부자지간의 정은 어느 정도 있지 않겠습니까?”

막료 한 명이 물었다.

“부자지간이 아닌데 부자지간의 정이 있을 리가.”

고능준이 냉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폐하께서 그 정도로 군왕을 아낀다고 생각하는가? 폐하는 단지 체면을 위해 군왕에게 잘 대해 주시는 것뿐일세. 때마침 오성 병마사와 황성사 관리들이 이번 일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안 군왕을 내보내기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시기지. 폐하께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나? 잊지 말게, 군왕은 올해 열아홉이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가정을 이루고 아비 노릇을 할 나이지.”

고능준이 ‘아비 노릇’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와의 정을 논하자면, 우리 대황자야말로 진정 폐하와 정이 깊은 부자지간이지. 대황자도 출궁하여 왕부에 살기를 청했는데,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고능준이 말했다.

진소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황제가 결정을 내린 뒤였다.

“대황자는 평왕(平王)에 봉하여 왕부로 나가 살게 하고, 창의군 절도사로 임명한다. 경왕은 위위소경(衛慰少卿)직에 임명하여 출궁하도록 한다. 진안 군왕은 우위낭장(右偉郎將)직에 임명하고, 경왕부를 거처로 지정한다. 즉시 왕부 건물 보수를 시작하고, 보수가 끝나는 대로 각자 거처를 옮기도록 한다.”

수하가 읽어 주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놀란 기색 없이 다른 상소문을 펼쳐 보던 진소가 잠시 붓을 멈추고 말했다.

“일찍이 그랬어야 하는 일이야. 여인들의 유언비어를 믿고 군왕을 오랫동안 황궁 안에서 키우다니, 그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황자들이 한꺼번에 출궁하게 되었으니, 어사대 관리들이 몹시 당황했겠습니다. 월례 보고의 내용도, 이제는 주제를 바꿔야겠네요.”

막료가 옆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사대는 늘 황자와 군왕이 오랜 시간 동안 황궁 안에 머무르는 일을 지탄해 왔다. 비록 황제는 그런 류의 탄핵에 신경조차 안 썼지만, 그래도 어사대 관리들은 끊임없이 그 일을 잡고 늘어졌다.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황자들만 도리를 어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출궁해야 할 사람들은, 황자 말고도 많지.”

예를 들면, 고능준.

아무리 종친이라고 해도, 고능준 그자도 일찍이 지방의 부임지로 보냈어야 했어. 그런데······.

“서북의 일이 우리 뜻대로 되었으니, 한동안은 폐하께서 다른 인사이동을 윤허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더더욱 고능준을 경성에서 내보낼 수 없겠지. 견제와 균형을 좋아하는 폐하께서 절대로 그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야.

진소 또한 막료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어찌 그리 소문에 귀가 밝은가? 그나저나 올해는 무평(茂平) 지역의 가뭄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군.”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쥔 상소문을 읽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까?”

막료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올해는 아무런 수확도 못 거둘 모양이야.”

진소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칫하면 내년에 기근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전운사를 시켜 하루빨리 그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눠 주라고 하게. 무평 백성들이 적어도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파종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도록 해야 해.”

하급 관리는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소가 던진 상소문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9월 말, 10월 초의 경성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우선은 경성의 폭죽 대가인 이씨 가문의 저택 반절이 불에 탄 일이었다. 순식간에 커진 불길 때문에 온 경성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씨 가문은 경성의 이름난 재력가답게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집을 수리하라고 목돈을 쥐여줬다. 그러고는 자기 집안의 자식을 직접 잡아들여 관청에 넘긴 덕분에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황궁에 있던 이황자와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가진 진안 군왕이 출궁한 일이었다. 이는 곧 황자들이 혼례를 올릴 시기가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혼담을 넣으러 가는 사람들 때문에 황궁 문턱이 닳을 정도라던데.”

“황실 문턱을 어디 자네 집 문턱처럼 그리 쉬이 넘을 수 있다던가.”

“어떤 여인이 평왕비가 될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폐하께서는 완평 강(康)씨 가문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던데.”

“에이,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강씨 가문이 퍽이나 황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겠다. 강씨 가문은 하루빨리 조당에 들어가 과거 강 상공의 명망을 되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황자와 혼례를 올리겠어? 그건 자신들의 앞길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지.”

경성의 찻집과 주점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한 달 사이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룬 듯했다.

황제는 민심을 앞세운 협박으로 다소 체면이 깎였지만, 강력한 병기를 얻은 덕에 서북에서 연달아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두었다. 진소는 주봉상을 잃은 대신 서북 전체의 군사력을 장악하게 됐다. 고능준은 이번 일에서 낭패를 보았지만, 그래도 진안 군왕을 출궁시켰으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세간 사람들의 눈에 불쌍한 처지가 된 것은 진안 군왕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 황궁에서 버림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이나 된 송자동자라니, 어떻게 그를 계속 송자동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열아홉에도 송자동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면, 송자의 의미가 사뭇 달라지리라.

황자들을 모두 출궁시키긴 해야겠지만, 황후나 비빈들은 그들이 황궁을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황후나 비빈들은 황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저를 황자들의 왕부로 삼았다.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대황자와는 달리, 공부할 필요가 없는 진안 군왕은 황궁 안팎을 분주히 드나들었다. 그는 수리 중인 왕부를 사흘에 한 번씩 방문해 진행 상황을 살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마음대로 출타할 수 있게 됐으니.”

진안 군왕이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시종만 곁에 두고, 왕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수리를 담당하는 관리가 진안 군왕에게 공손하게 길을 안내하면서 왕부 안을 소개했다. 관리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속으로 입을 삐쭉였다.

군왕이 영 맹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저 준수한 외모만 아깝지 뭐야.

역시 아이는 남의 손에서 길러지면 안 돼. 남의 손에 길러지니까 저런 폐인이 되는 거지.

“연못은 없어야 하니, 저곳은 전부 흙으로 메워두게. 물의 깊이를 잘 모르는 아이야.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도 경왕이 위험해질 수 있어.”

관리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왕부를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를 까다롭게 지적하고 요구사항을 말했다.

“듣자 하니, 자네들이 수리한 관저는 바람만 불어도 무너진다던데. 난 황자가 묵을 친왕부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으면 하네.”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되지. 폐하께서도 우리 체면을 지켜 주시는데, 저 생각 없고 철도 안 든 군왕 나부랭이가 감히 저런 말로 나를 모욕해?

관리는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도 연신 아니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한참이나 왕부 곳곳을 누비던 진안 군왕이 대문을 나섰다. 그가 문 앞에 잠시 서 있더니 좌우를 살폈다.

“전하, 환궁하시려는 겁니까?”

가까이 있던 시종이 물었다.

“거길 돌아가서 뭐 해? 앞으로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의 집을 방문할 것이야.”

시종이 진안 군왕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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