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온 경성이 오늘 성문 앞에서 있었던 쇠뇌 시연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엄청 큰 활이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자네 제대로 본 거 맞아? 흔히 볼 수 있는 활이랑 비슷한 크기였어.”
“어쨌든 간에, 화살이 슉 하면서 날아가더니, 저 멀리 있던 방패를 관통했다니까!”
“폐하께서 그 활에 신비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어.”
“난 되도록 빨리 오랑캐들이 그 신비궁을 구경했으면 좋겠네. 그런 엄청난 무기라면 보기만 해도 무서워 오줌을 지릴걸?”
“병사들을 이끌고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훌륭한 무장들이 좀 많아? 그 재수 없는 강문원 놈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 말고 빨리 딴 데로 꺼지든지 하지 원.”
주육낭은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를 헤치며 성문을 나섰다. 역시나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 눈에 익은 마차와 시종들이 서 있었다. 주육낭이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자, 진십삼이 웃으면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가 자네의 시력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멀리 있던 방패는 단번에 턱턱 명중시키더니, 이렇게 준수하고 멋스러운 사내가 코앞에 있는 건 알아보질 못하니 말이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향해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는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자네를 기다리러 온 건 아니겠지.”
진십삼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말에서 내린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진십삼이 그를 제지했다.
“지금은 가지 마.”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진십삼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주육낭은 진십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맨땅을 자리 삼아 앉은 정교랑은 묘비에 이름을 새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정교랑의 손에 들린 끌과 망치가 묘비 위에 부딪힐 때마다 땅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손에 들린 망치가 자신들의 가슴을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육낭은 진십삼 옆에 나란히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축하해.”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진십삼의 말을 듣고도 주육낭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육낭, 다른 사람이 베푼 호의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해. 남이 베푼 호의가 자네를 해치는 일은 없어.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타인의 호의라지. 그러니 부디 그것을 귀하게 여기도록 해.”
진십삼이 감상에 젖은 투로 말했다.
“시끄러워.”
주육낭이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흘겨보았다.
“과거시험이 바로 내년인데, 급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보지? 이렇게 허구한 날 싸돌아다니기만 해도 괜찮은가?”
진십삼은 주육낭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정교랑이 있는 쪽을 내다보았다. 그런 행동이 괘씸했던 주육낭은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했으나, 진십삼은 재빠르게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육낭의 발을 피했다.
“그런 멍청한 질문은 못 들은 거로 하겠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범강림이었다. 주육낭이 그랬던 것처럼 범강림 또한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교랑이 있는 곳을 향해 직진했다.
“큰 도련님, 축하드려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범강림에게 예를 올렸다.
축하한다는 반근의 말에 범강림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교랑이 손을 멈춘 채 자신을 쳐다보자, 범강림은 정교랑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누이.”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려 있던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모든 말은 결국 이 한마디로 응축되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고생이 많겠어요. 오라버니.”
“살아 있으면서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쓰나.”
범강림이 비석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서무’까지만 새겨져 있고, 아직 ‘수’는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서무수.
범강림은 서둘러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남들 몰래 눈물 두 방울을 흙 위로 떨군 뒤, 웃음을 쥐어 짜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 있는 것 좀 집어 줄래요?”
범강림은 응, 하고 대꾸한 뒤 정교랑이 천천히 글씨를 새기는 모습을 응시했다.
정교랑은 점 하나, 획 하나에 마음을 담아 비석에 글자를 새겼다. 종이 위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그만큼 글씨 한 자에 들이는 정성의 정도와 무게 또한 달랐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누이가 알려 준 대로 폐하께 말씀을 올렸어. 폐하께서 몹시 기뻐하시더라고.”
비석에 글씨를 새기는 정교랑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범강림이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을 말한 것이니, 기뻐하실 수밖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주 공자가 먼저 상을 하사받았고, 그다음에 폐하께서 나한테도 물어보셨어. 아, 그리고 진(陳)씨 가문 낭자도 무슨 상을 하사받았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무슨 직책이었는지는 자세히 못 들었어. 옆에 있던 대인들이 자꾸 말을 걸지 뭐야.”
끌과 망치가 비석에 부딪히는 소리와 범강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렸다. 범강림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눈빛을 보면 그녀가 범강림의 말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범강림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그녀 자신과 관련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남의 일을 듣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범강림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누이, 이것들은 사실 다 누이가 가져야 할 것들인데, 왜 누이가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범강림이 말끝을 흐리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죠.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인데, 내가 가져서 뭐 하겠어요. 신경만 쓰이죠. 물진기용(物儘其用: 사물은 무릇 그 용도를 다하도록 써야 한다는 뜻)이란 말은 물건에 쓰이기도 하고, 사람에 쓰이기도 해요.”
필요가 없으니, 가지지 않는다라······.
범강림은 정교랑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가 필요 없다고 하는 거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거겠지.
정교랑은 범강림이 건넨 망치를 받아 계속해서 비석에 글씨를 새겼다.
고작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도 많이 가져 본걸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해가 질 무렵, 진씨 저택에도 연회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연회석의 주인공인 진십팔랑은 통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갔다고?”
진소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묻자,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간 게야?”
진소 부인이 물었다.
평소 같은 때면 몰라도, 오늘처럼 자신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온 날에 홀연히 집을 비울 만큼 예의 없는 아이가 아닌데.
“정 낭자 댁에 가셨어요.”
몸종이 대답했다. 진소 부부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정 낭자한테 갔다고?
“하긴, 전에 단랑과 십팔랑이 정 낭자와 가깝게 지내긴 했죠. 기쁜 일을 빨리 알려 주고 싶어서 간 걸지도 몰라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갈 필요는 없지 않소. 내일 가도 충분하거늘.”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진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때, 십팔랑이 정 낭자 댁에 자주 가서 뭘 한다고 했지? 책을 읽는다고 했나?”
진소 부인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
진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진십팔랑은 정교랑 앞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조서를 내밀었다. 고개를 든 진십팔랑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교랑은 손으로 조서를 가까이 들고 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글씨 좀 보여 줄래요?”
진십팔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글씨가 쓰인 종이를 정교랑에게 건네고는 떨리고 기대되는 눈빛으로 정교랑의 표정을 살폈다.
은은하게 밝힌 등불 덕분에 정교랑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평소 정교랑의 모습이 더 익숙했던 진십팔랑은 그녀를 더욱 빤히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한 정교랑의 눈빛이 은은한 불빛을 덮었다.
진십팔랑이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다고?
진십팔랑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낭자께 감사드려요.”
진십팔랑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묘한 분위기 때문에 실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그리고 축하드려요, 낭자. 원하던 바를 이루었잖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던 진십팔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고맙다면서, 고개를 젓는다?
기쁘다는 뜻인가? 아니라는 뜻인가?
진십팔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문득 자신이 오늘 무턱대고 달려온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교랑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릴 생각으로 잔뜩 흥분했던 진십팔랑의 마음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그래, 사실 정 낭자에게 나는 가까운 축에도 못 끼겠지. 낭자는 나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그것도 아니라면, 폐하께서 내리시는 상이 정 낭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네요?
진정으로 타고난 글씨를 가진 사람만이 폐하의 상을 하사받았어야 한다는 뜻인가?
“낭자, 아니면 낭자도 글씨를 써서 폐하께 바치는 건 어떨까요? 폐하께선 분명 낭자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실 테고, 그럼 낭자한테도 상을······.”
진십팔랑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교랑의 시선에 말을 멈추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정교랑의 눈빛에, 진십팔랑은 자신이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진소(陳素), 글씨 연습을 왜 하죠?”
정교랑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진십팔랑이 흠칫 놀랐다.
“글씨 연습을 좋아하니까······.”
“아니에요. 남들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죠.”
정교랑이 진십팔랑의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저었다.
“진소, 자신의 글씨가 자신의 마음에도 들고 남도 우러러보는 글씨였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인데.
진십팔랑은 정교랑의 말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잠시 멍해졌다.
“진소,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죠?”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냐고? 내가, 무엇이 두려우냐고?
진십팔랑은 다시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안색이 창백해진 진십팔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두려운 건, 내가 충분히 잘나지 못하다는 거예요. 충분히, 낭자만큼 뛰어나지 못하고, 낭자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게······.”
진십팔랑이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낭자보다 못하고, 낭자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게 두려워요.”
문가에 앉아 있던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추하죠? 이런 내 모습, 아주 신물이 나죠?”
진십팔랑이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세게 쥐었다.
“나도 나를 좋아하고 싶어요. 나도,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다고요. 그런데 난 해내지 못했어요. 여태껏,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이 여인을 보자마자, 아니 이 여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결코,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되지 못했다는 걸.
진십팔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그랬구나.”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 들면, 힘들어져요. 그럼 평생 자신을 좋아할 수 없게 될 거예요.”
마당에 서 있던 어린 몸종이 방 안을 들여다보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회랑 아래를 지나가는 반근을 보고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진 아씨, 차 드세요.”
반근이 따뜻한 차 한 잔을 진십팔랑에게 밀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진십팔랑은 옆으로 몸을 살짝 틀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소가 실례했습니다.”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말 대신 목례로 가볍게 답례했다.
실내에 또 한 번 정적이 찾아왔다.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점을 견디지 못하여, 조급하고 편협한 마음으로 낭자에게 결례를 범했어요.”
진십팔랑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응어리를 직면하고, 한바탕 울고 나니, 진십팔랑은 도리어 차분해진 듯했다.
“실은 오늘, 감사 인사를······.”
진십팔랑은 말을 하다 말고 정교랑을 보며 입을 닫았다. 정교랑은 한결같이 평온한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감사라······. 내가 누굴 속여.
“오늘 온 건, 두 가지 이유였어요. 하나는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고, 다른 하나는 낭자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예요. 그런데······.”
그런데 칭찬은커녕, 감사 인사조차도 질투가 되어 버렸네. 내가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해.
“오늘 온 이유는, 사실 낭자에게 묻고 싶었어요. 정말로 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까요? 그리고 제 글씨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십팔랑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정교랑이 아, 하고는 다시 글씨가 쓰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좋아졌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십팔랑이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정말이에요?”
진십팔랑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재차 물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좋아졌어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진십팔랑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소매로 입을 가리면서 감사하다고 연신 예를 올렸다.
“낭자께 감사드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휴. 저거 때문이었으면,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반근이 고개를 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낭자는 경성에서 지내려는 건가요?”
진십팔랑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한동안은 있을 거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도 낭자께 가르침을 받으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원한다면요.”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진십팔랑은 웃으면서 다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문을 나섰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켜서 진십팔랑에게 답례했다.
회랑 아래, 마당을 밝게 비추는 등롱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등롱 아래 달린 풍령이 내는 맑은소리와 조경으로 만든 대나무 통에서 물이 떨어져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귓가를 간지럽혔다.
모든 것이 2년 전과 같았다.
진십팔랑은 고개를 돌려 회랑 아래 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흐릿해진, 희미한 여인의 형체가 보였다.
맞아, 모든 게 다 지난날과 다름없어.
진십팔랑은 몸을 돌려 자세를 살짝 낮추고 예를 표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멈춰 서서 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진십팔랑은 끝내 멈추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진십팔랑이 탄 마차가 밤길을 따라 진씨 저택에 도착했다. 그녀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가족들이 진십팔랑을 마중 나왔다.
“십팔랑,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자매들이 입을 모아 진십팔랑을 나무랐다.
“정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다녀왔어.”
진십팔랑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감사 인사?
진십팔랑의 대답을 들은 진소 부인은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십팔랑에게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진십팔랑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서 연회석에 앉아요, 우리 어인 낭자.”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밤에는 꼭 십팔랑이 쓴 글씨를 선물로 받을 거야.”
다들 호들갑을 떨게 진십팔랑을 축하했다. 진십팔랑은 웃으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진십팔랑을 보고, 진소 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옥대교 저택 안에서는 반근이 등불을 하나씩 끄고 있었다. 마지막 등불 하나만 남은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정교랑이 침상 옆에서 머리를 풀었다.
“아씨.”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침상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좀 전에 진 낭자의 질문에 딱 하나만 대답하신 거죠? 어느 질문에 대답해 주신 거예요?”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반근도 많이 발전했네. 질문이 몇 개인지를 알아듣다니.”
반근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저는 좀 둔할 뿐이지, 바보는 아니에요.”
반근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나무라듯 대답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씨. 혹시, 제가 바보라는 말을 써서 화나신 건 아니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난 한 번도 화난 적 없어.”
그제야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아씨, 일찍 쉬셔요. 내일도 비석에 글씨 새기러 가셔야 하잖아요.”
반근이 문을 닫자 방 안은 더욱 어둑해졌다.
휘장 너머의 침상 위에 누워있던 정교랑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너무 잘났으니까. 넌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넌 죽어 마땅해.
나는 화난 적 없어.
단지, 가끔 속상할 뿐이야.
9월 중순, 이날은 황제의 탄신일, 즉 신비궁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열흘이 지난 때였다. 금군이 호송하는 수레가 신비궁 삼백 개를 가득 싣고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병기 제작소는 본디 경비가 삼엄한 곳이지만, 최근의 궁노원은 경계 수위를 한 단계 더 격상시켰다.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함부로 들어가기 힘들어 보이는 궁노원에서는 밤낮없이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신비궁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전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랑캐 놈들이 짐을 위해 신비궁의 제물이 되어 주겠구나.”
옥좌 위에 앉은 황제가 눈빛을 반짝이며 웃음 지었다.
경성 밖. 건장한 병사들과 장군들이 금군 앞에 멈추어 섰다.
“계주 병마부 총관 종승포(鍾承布)는 어명을 받들어, 서북 관청으로 부임하시오.”
금군의 외침과 함께, 스물 일고여덟 되어 보이는 건장한 젊은 장수가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2년 남짓 늦어지긴 했지만 진소가 강력하게 천거했던 종승포가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만 아직 너무 젊은 탓에 바로 서북 경략사 직책을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종승포는 불만스러운 기색 없이 오기 섞인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젊은 게 뭐 어때서? 몇 번 이겨서 공적을 쌓으면 그만이지.
종승포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종승포는 마차 휘장을 들어 올려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신비궁들을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도 철갑옷을 관통한다는 어마어마한 병기라고?”
종승포가 못 미더운 눈빛으로 신비궁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활의 몸체에서 삐져나온 까칠한 거스러미가 그의 손을 찔렀다.
이렇게 조잡하고 거칠게 만든 것이?
“말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종승포의 뒤에서 들려왔다. 종승포가 고개를 돌리자, 앳된 얼굴의 장수 하나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자네가 바로 폐하께 쇠뇌 시연을 했다는 주복 시금인가?”
종승포가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주육낭이 종승포에게 공손하게 읍을 했다.
“소장, 장군을 뵙겠습니다.”
종승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신비궁을 다시 마차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럼, 그 호칭에 걸맞은 것인지 아닌지 지켜보지.”
종승포는 신비궁을 뜻하는 건지, 주육낭을 뜻하는 건지 모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주육낭은 미동 없는 표정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출발!”
호령 소리와 함께 신비궁을 실은 마차와 종승포가 이끄는 대군은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큰길 위에 있던 행인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서서 대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봤어? 저 마차 안에 담긴 게 바로 신비궁이라는 거래.”
누군가가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행인들은 그 사람이 가리키는 쪽을 내다보았다. 행인 중 몇 명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으로 가는 추레한 차림의 서생이었다.
누가 황제의 탄신일에 신비궁을 선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을 소재로 지은 시도 곧 세간으로 퍼져 나갔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온갖 미사여구로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었지만, 신비궁 또한 그렇게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과거시험을 보러 경성으로 향하던 서생들도 신비궁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비궁의 위력에 의구심이 있었다.
“황제께 진상되는 진귀한 물건은 매년 있기 마련이지만, 막상 써 보면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서생 중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리 뛰어난 병기인지 아닌지는 전장에서 써 봐야 알겠지.”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허풍 섞인 얘기는 그만하자고. 아무튼 이 경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좋은 물건이 없진 않아. 이를테면 무명의 고수가 남긴 차정사의 글씨처럼 말이야.”
누군가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서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바로 시와 도를 논하는 것이었다. 차정사의 글씨 얘기가 나오자, 이에 대해 흥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내심 오기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맞아, 맞아. 나도 차정사 글씨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
“얼마나 대단한 글씨일지, 빨리 가서 보고 싶다니까.”
“모사품을 보긴 했지만 영 느낌이 안 오더라고. 드디어 그 글씨들을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네!”
제일 먼저 신비궁 얘기를 꺼냈던 서생은 관심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뒤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이때 서생들의 시야 안에 경성 성문이 들어왔다. 뒤떨어져서 걷던 서생이 길가를 보더니 돌연 눈빛을 반짝였다.
“세상에, 저기가 바로 무원산 형제의 무덤인가 본데?”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글씨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던 서생들이 외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 현인의 무덤이라고?”
서생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처음 들어보는 거 같지?
“무원산 형제들! 이게 말하자면 긴데, 신비궁도 무원산 형제들과 관련이 있지.”
소리쳤던 서생이 우쭐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차정사 글씨는 벌써 3년 전의 일이니, 하나도 신선하지가 않아. 이 무원산 형제들 이야기야말로 근래 경성 사람들의 입방아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지. 어휴, 그때 온 경성에······.”
서생이 눈을 반짝이면서 생동감 넘치게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서생들은 놀란 표정을 짓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비탄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노정은 다행히도 풀려났고 진급까지 했어.”
“그래야지. 그런 정의로운 사람은 간신배로부터 잘 보호해야 한다고.”
“이왕 지나가는 김에, 무덤 앞에 잠깐 들렀다 갈까?”
“좋지. 술을 가져오지 않은 게 참 아쉽네. 무원산 형제들에게 술이라도 한잔 올려야 하는데.”
서생들이 말에서 내려 무덤 앞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술 이야기가 나오자, 앞서 무원산 형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서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씨 낭자가 독한 술이 담긴 술동이를 무덤 앞에서 스무 단지도 넘게 깨트렸어. 다들 이 근처만 와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더라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여기 와서 술 냄새를 맡으면서 취하기도 했대.”
무덤 앞에 다다른 서생들이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서생 한 명은 무덤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정말로 술 냄새가 나는지, 내가 한번 맡아 보겠네.”
“듣기로는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 그날 그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다더군.”
서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술 냄새를 맡겠다며 허리를 숙였던 서생이 갑자기 무릎을 꿇은 것이다.
무릎을 꿇어?
“이 사람이, 정말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거야?”
누군가가 배를 잡고 하하 웃었다. 무릎을 꿇었던 서생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비석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취했어.”
서생은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매만지면서 그 위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취한 게 아니라, 뭐에 홀린 것 같은데?
주위에 있던 서생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무릎을 꿇은 서생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 서생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비석 위를 매만지면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그렸다.
“서무수.”
무릎을 꿇은 서생은 끊임없이 같은 이름을 되뇌었다.
도대체 서무수가 누군데 그래?
의아해하며 비석으로 시선을 옮기던 서생들은 전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여, 여, 여긴 분명 무명 비석이었는데, 언제 글씨가 새겨진 거지?”
무덤을 발견했던 서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비석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서무수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다른 서생들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머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쳤다.
“범석두!”
“서납월!”
“서봉추!”
“범삼축!”
황공한 기색이 역력한 서생들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치면서 좌불안석한 모습으로 무덤 주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서생 무리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 있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왜들 저러는 거요?”
행인들은 서생들이 서 있는 곳이 무덤 앞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더욱 놀랐다. 한동안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이 시끌벅적하긴 했지만, 술고래들이 독한 술 냄새라도 맡겠다며 무덤을 찾아왔던 것이 다였다. 하지만 술 냄새는 금세 사라졌고, 어찌 됐든 그들과는 연고가 없는 무덤이다 보니 더 이상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을 찾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많은 사람이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술고래가 아니라 서생인 듯한데, 저러고 있는 모양새가 영 반쯤 미친 술고래 같단 말이지.
“설마, 귀신이 들렸나?”
서북 용곡성 관청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죄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칙사가 진지하게 조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불안해 어쩔 줄 모르던 그들의 표정은 차츰 흥분과 희열로 바뀌었다.
“······이에 선절교위(宣節校尉: 관직명)에 봉하니, 군마를 관장토록 하라.”
조서를 다 읽은 칙사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사근을 쳐다보았다.
“서사근, 명 받들겠나이다.”
서사근이 큰절을 올리고는 울먹거리며 조서를 받았다. 마당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서사근을 에워쌌다.
“참 잘됐소. 참 잘됐구려!”
“또 진급한 거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서사근의 벗이오? 진급하는 사람은 서사근인데, 어째 당사자보다 더 감격스러워 보이네.”
주위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이 물었다.
“아니오. 저 사람들은 임관보에서 도망친 병사들과 잡역부들이야. 강문원이 저들을 감옥에 처넣어 이제 곧 죽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풀려났지. 서사근이 진급까지 하는 걸 보니까,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저리들 기뻐하는 거 아니겠소.”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관청 안에서 장수들 무리가 걸어 나왔다.
“이놈들, 죽는 것이 그리 두렵더냐!”
맨 앞에 있던 장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마당 안의 소란을 덮어 버렸다.
마당 안이 조용해졌는데도, 장수는 행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못 들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죽는 것이 그리 두려우냐고 물었다!”
목숨을 건진 기쁨을 채 다 누리지도 못한 사람들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종승포는 마당 안의 사람들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당장 관청 밖으로 꺼지거라! 군복을 벗고, 네놈들의 가족을 챙겨 모조리 용곡성을 떠나거라. 냉큼 서북에서 꺼지라는 말이다!”
종승포의 말이 끝나자, 마당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냉큼 꺼지래도!”
종승포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들은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재빨리 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사근과 유규, 그리고 어떤 사내 하나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꺼지지 않는 것이냐?”
종승포가 눈썹을 치켜뜨고 고함쳤다.
“대인께서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니, 꺼지지 않았습니다.”
종승포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왜 네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관청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작은 소리로 그 사내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간신히 건져낸 목숨인데, 저리 맹수같이 사나운 장수를 자극해서 뭐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사내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서서 대답했다.
“소인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종승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종승포의 웃음소리가 마당 안을 뒤덮었다.
“좋다. 얼마 전, 오랑캐들에게 우리의 성보 두 채를 빼앗겼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이전의 치욕을 깨끗이 설욕하러 가겠는가!”
종승포가 한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수위 병사들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설욕하자!”
“설욕하자!”
병사들의 외침은 마당 안에서부터 관청 밖까지,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벌써 관청 문 앞까지 다다랐던 임관보의 병사와 잡역부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청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라이, 누가 죽는 게 두렵대?”
“죽는 게 뭐가 두렵다고! 침상에 누워 뒈지는 것보다, 전장에서 전사하는 게 더 나아!”
“서무수 형제들은 죽음으로 공로를 맞바꿨는데, 살아 있는 우리가 공로 하나 못 세울까!”
종승포의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했던 그 사내의 주위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그들은 더더욱 목청을 높여 함께 설욕하자고 다짐했다.
마당 안의 광경을 보던 종승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관청 안에 앉아 있던 장수들도 사내들의 우렁찬 외침을 들었다. 연배가 있는 장수 몇 명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 사기를 북돋는 재주가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
“종 장군이 아직 어리긴 어리군.”
옆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감히 설욕하자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다니. 이전의 치욕? 전임자의 치욕을 말하는 것인가?
강문원은 아직 서북을 뜨지도 않았어. 그 일에 대해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저렇게 서슴없이 강문원을 무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거야? 저렇게 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생긴 것도 괜찮고, 말하는 것도 들어줄 만한데, 얼마나 일을 잘할지가 관건이군.”
연로한 장수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장수와 병사들이 거리 위를 뛰어다니며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대열로 집합했다.
이제 막 감옥에서 풀려난 유규는 세수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옷만 갈아입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유규를 불러 세웠다. 유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장수가 말 위에 올라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의 안장과 장비로 보아 족히 중급 장수는 되어 보였다.
이야, 저 칼이며 창 좀 보게. 게다가 활은 세 개씩이나.
유규가 감탄하고 있던 사이, 젊은 장수가 활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유규는 눈을 끔뻑이며 활을 받지도 않고 젊은 장수만 빤히 바라보았다.
“범강림이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하나는 서봉추의 삼석궁이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서 새로 제작한 신비궁이요. 궁수 부대에 가면, 신비궁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 줄 것이오.”
유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활을 건네받았다. 그가 막 입을 열기도 전에, 주육낭은 채찍을 휘둘러 말을 타고 자리를 떠났다.
“어이, 그 활은 놓고 가야지.”
누군가가 유규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뭐라고?”
“군에서 지급해주는 활이 있을 텐데, 누가 네놈에게 이런 활을 쓰라고 했나? 개인 장비를 쓰는 것은 군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당장 그 활을 두고 가.”
“퉤! 좋은 장비를 두고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 군의 돈으로 장만한 것도 아닌데,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좋은 장비? 네놈들 손에 좋은 장비가 있는 것 자체가 낭비다. 어서 이리 내놔. 그리고 내가 그런 법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감히 상관 명령에 불복종하려는 것이냐! 네놈같이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놈을 어느 장수가 데려다 쓰려 할까. 네놈은 잡역부로 쓸 수도 없겠어!”
활을 쥔 유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서봉추의 삼석궁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신비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비궁? 신비궁이 도대체 뭐길래?
“신비궁을 준비하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과 함께, 성문 위에 일렬로 서 있던 궁수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쇠뇌를 든 병사들이 그 자리에 배치됐다. 햇빛 속에서 바라보니 쇠뇌는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성문 아래 참호에 몸을 숙이고 있던 유규가 고개를 돌려 성문 위를 올려다보고는 자신의 옆에 놓인 신비궁을 쳐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중노잖아?”
유규가 낮게 읊조리고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정 관리들이 또 어느 돈에 눈먼 놈한테 당했구먼. 몇 번 당했으면 이제는 정신 좀 차려야 하는 거 아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규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적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적군의 말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진 같은 진동이 만들어졌다.
유규는 손에 쥔 칼을 내려놓고 활을 집어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유규는 자연스레 서봉추가 자신에게 남겨준 삼석궁을 택했다. 유규는 화살을 올리고, 전방을 조준한 채 마음속으로 수를 셌다.
봉추, 잘 봐 둬. 내가 네놈의 활로 어떻게 오랑캐를 죽이는지.
더 가까이 와.
더 가까이.
더.
둥둥둥 북소리가 유규의 고막을 때렸다. 공격을 뜻하는 북소리에 유규는 반사적으로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유규가 잔뜩 화난 얼굴로 외쳤다.
“새로 온 놈이냐? 이렇게 먼 거리에서 어떻게 화살을 쏘라고······.”
유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시커먼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박자에 맞춰 들려오던 적군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참담한 비명이 천둥소리가 되어 유규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유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보았다. 말을 타고 있던 적군들이 베어지는 보리처럼 우수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먼 거리인데, 저렇게 강하다고?
가슴을 치는 북소리와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진동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유규가 고개를 들자,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이 머리 위로 한시도 쉬지 않고 날아갔다.
저렇게 빨리, 저렇게 많이.
유규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는 삼석궁을 내팽개치고 신비궁을 잡고 허둥지둥 고리를 몇 번 밟았다. 궁수 부대의 설명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유규의 뒤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우라질!”
유규는 조급한 마음에 욕을 내뱉으며 힘겹게 화살을 올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던 적군이 썰물 빠져나가듯 퇴각하는 것이 유규의 눈에 보였다.
“안 돼! 이 몸이 죽일 놈은 좀 남겨줘!”
유규는 포효하다시피 소리치면서 장전한 신비궁을 쏘아댔다.
용곡성.
강문원은 저택 안 대청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강 대인.”
누군가가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면서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제 가셔야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게.”
강문원이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이 한숨을 쉬고는 강문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강문원은 대답하지 않고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주먹 쥐었다.
난 못 믿겠다. 난 절대로 못 믿는다! 하느님도 나를 서북에서 못 떠나게 붙잡았는데, 저놈들 따위가 감히 나를 내쫓을 수 있으랴!
“급보요!”
바깥에서 전령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첩입니다, 대첩! 종 장군께서 성보 두 개를 되찾으셨습니다!”
강문원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강문원은 전령병의 급보를 더 정확히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전령병의 목소리는 금세 멀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방금 환청을 들은 걸 거야.
좀 전에 대청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이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승전보입니다. 강 대인, 종 장군이 대승을 거두었으니 서북은 안정을 되찾은 셈이네요. 대인께서는 마음 놓고 떠나셔도 되겠습니다.”
마음 놓고 떠나라고?
강문원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천천히 등받이에 기댔다.
“그 신비궁이라는 것 때문이냐.”
강문원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청 안에 서 있던 사람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인도 참, 그야 당연히 종 장군의 뛰어난 지휘 덕분이지요.”
강문원이 헛웃음을 보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가겠네.”
걸음을 옮기던 강문원이 문가에 다다를 때쯤 멈춰 섰다.
“그 신비궁이라는 걸 범강림이 바쳤다고?”
강문원의 뒤를 따라가던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 군감이지요.”
남자가 ‘군감’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범 군감.
강문원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그는 고개를 돌려 저택을 둘러보았다.
3년이구나. 여기서 좀 더 오래 지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앳된 젊은 장수의 외침이 강문원의 귓가에 울렸다.
이 모든 게, 내가 죽은 병사 몇 명의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그깟 일 때문에?
강문원, 후회하지 마시오!
지그시 눈을 감던 강문원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문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문원이 한창 경성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서북 대첩의 소식은 이미 급보로 경성에 도착했다. 쏜살같이 뛰어다니는 전령병 덕분에 경성의 여기저기에서부터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와 경성 전체가 들썩였다.
저잣거리에 위치한 술집 안. 고능준이 창밖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말을 탄 전령병이 술집 앞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인, 꼭 저희 노야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고능준 앞에 앉은 사내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통사정을 했다.
“분명히 어떤 괘씸한 자가 저희 노야께 죄를 뒤집어씌워 노야를 모함한 겁니다. 이 일은 맹세코 저희 노야와 무관한 일이에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능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위치에 앉은 사람이라면, 필시 누군가의 눈엣가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문원과 무관한 일이라고? 최소한 남이 자신을 깔아뭉갤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지. 그 기회라는 게 본디 우습긴 했다만.
강씨 가문의 사람들을 간신히 돌려보낸 뒤, 고능준은 천천히 별실 밖으로 나와 층계를 내려왔다.
그의 뇌리에 문득 진소의 생각이 스쳤다. 진소가 변한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섰다.
진소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수단을 쓸 사람이 아니야. 서북 병사들을 선동한다거나, 폐하께 사직을 청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말로 폐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거나.
옛날의 진소라면 절대로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것이야.
언제부터 변한 거지? 아니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변한 건가?
설마, 그 강주 바보?
정말로 그 강주 바보 때문이려나?
고작 식당 하나 때문에, 유 교리를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만든 그 강주 바보?
고작 죽은 병졸 몇 명의 포상 때문에 장수 하나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서, 장차 경략사가 될 사람의 앞길을 영영 끊어버린 그 강주 바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듣고 또 들어도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인데, 강주 바보는 그런 일을 해냈어. 그것도, 아주 손쉽게, 가볍게 해냈지.
그놈의 강주 바보!
“서무수!”
“아니지, 아니지. 범석두가 최고야!”
“자네가 알긴 뭘 알아? 무원산 형제 중엔 서봉추가 제일이야!”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능준이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
무원산? 누가 아직도 그자들을 입에 올리는 거야? 끝도 없구나, 끝도 없어. 서무수라는 자는 또 뭐 하는 놈인데?
“대인, 모르셨습니까? 비석에 무원산 다섯 용사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고능준의 표정을 본 점원 중 하나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서무수, 범석두,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가 바로 그 다섯 용사의 존함입니다.”
점원이 무원산 다섯 형제의 이름을 익숙하게 말하는 것을 본 고능준은 깜짝 놀랐다.
어째서, 온 경성 사람들이 그 형제들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는 거야? 무원산 하나로는 부족한가?
“비석 위에 새겨진 글씨가 정말 엄청나거든요. 온 경성 사람이 그 글씨를 감상하러 죄다 무덤 앞으로 간답니다. 듣기로는, 비석 위에 쓰인 글씨가 차정사 글씨보다 더 뛰어나고, 천하에서 제일가는 서예라고 불린답니다.”
점원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
고능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그래! 무원산 하나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그들의 이야기를 민간에 퍼트리고, 저잣거리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구전되는 것도 모자라서, 서생부터 사대부까지 모조리 그 이름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야. 누구나 그 다섯의 이름을 기억하고 찬양하도록!
참으로 대단한 강주 바보로구나!
고능준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 글씨를 보는 사람마다 꼭 뭐에 홀려서 미친 사람이 된 것 같더라니까.”
“관부에서 어쩔 수 없이 그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보냈는데, 정씨 낭자네서도 무덤을 지키는 시종을 따로 붙였대. 혹여나 누가 비석을 통째로 뽑아 갈까 봐.”
“에이, 웃기지 마. 누가 남의 무덤 비석을 훔쳐?”
“누가 훔치냐고? 으이구, 뭣도 모르는 내가 봐도 훔치고 싶은 글씨인데, 배운 양반들은 오죽하겠어?”
“박양 군주까지 직접 와서 보고 갔다니까? 글쎄, 글씨를 보고 집에 가서 엉엉 울었대.”
“화가 나서?”
“뭐라는 거야. 기뻐서 우는 거지. 그 글씨들을 봤으니, 이번 생은 여한이 없다면서 울었다던데?”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자, 누군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바짝 긴장한 모습의 진십팔랑이 조용히 물었다.
“진 낭자의 글씨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거참, 물을 걸 물으시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안 되지.”
“그럼 누구의 글씨와 견줄 만한데요?”
진십팔랑의 물음에 더 이상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와 어이가 없다는 실소만이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대답보다 더 듣기 거북하네.
진십팔랑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경성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황자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편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무덤에서부터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던 진십팔랑은 조용한 자리를 찾아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손을 꺼내어 줄곧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범석두.
무자비한 세 글자가 시야로 들어와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진십팔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온 이유는, 사실 낭자에게 묻고 싶었어요. 정말로 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까요? 그리고 제 글씨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좋아졌어요.
정 낭자가 좋아졌다고 한 건, 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날 정교랑의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 진십팔랑은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에게 다시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고 묻고 싶지 않기도 해서 결국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옥대교 저택을 나섰다.
지금은, 정 낭자가 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지 알겠어. 내가 왜, 끝내 묻지 못했는지도.
사실 정 낭자의 대답은 그대로일 테니까.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진십팔랑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는 점점 더 구겨지다가 아무렇게나 뭉쳐졌다. 눈물이 진십팔랑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 낭자.”
진십팔랑은 화들짝 놀라 종이를 소매 안에 집어넣고 눈물을 훔친 뒤 몸을 돌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궁녀 하나가 층계 위에서 진십팔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귀비마마께서 잠시 부르세요.”
진십팔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궁녀를 따라 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멀리서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진십팔랑의 눈에 들어왔다.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익숙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 낭자도 왔네.
“저건 누구지?”
층계 위에 서 있던 귀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내다보면서 궁녀에게 물었다.
“마마, 저분이 바로 정 낭자예요. 폐하께서 잠시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궁녀의 대답에 귀비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다는 신선의 제자, 그 정 낭자 말이더냐?”
귀비가 말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경왕의 병이 나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는구나.”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표정이었지만, 귀비의 눈가에는 서늘함이 비쳤다.
지금껏 시간을 끌며 그리 어마어마한 소란까지 피웠으니, 2년 전과는 비교도 안 돼. 이런 때에 경왕의 병을 치료해야 공로를 더욱 값지게 인정받을 수 있겠지.
참으로 대단한 강주 바보로구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 달가닥거리는 나막신 소리가 텅 빈 전각 안에 울려 퍼졌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왕을 붙잡았다.
“땀 좀 닦고, 잠시 쉬자.”
진안 군왕이 단단히 경왕을 붙잡은 모습을 본 내시 둘은 숨을 헐떡이며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군왕께서 힘이 좋으십니다.”
경왕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내시 두 명이 붙어도 경왕을 붙잡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더 열심히 몸을 단련해야 우리 육가아를 잘 돌볼 수 있어.”
진안 군왕은 내시가 건넨 손수건으로 경왕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고는 경왕에게 탕을 몇 모금 먹였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내시 한 명이 다급하게 경왕궁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경왕이 빠르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녀석 참.”
진안 군왕이 뛰어다니는 경왕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전하, 그리로 가실는지요?”
내시가 조용히 묻자,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빨리 가면, 폐하보다 먼저 소식을 알게 됐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겠느냐.”
“송구합니다, 전하. 소인이 아둔했습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아니지. 마음이 급했을 뿐이야. 급할 게 뭐 있어? 매년을 이렇게 지냈는걸.”
진안 군왕이 말했다. 그는 전각 밖을 내다보면서 손수건을 옆으로 던져두고 일어나 뒷짐을 졌다.
이번에 정교랑이 황제를 알현하게 된 곳은 외궁인 근정전이 아니라 내궁이었다. 어린 나이라 하더라도, 외간 여인을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던 황제는 정교랑과 대면하는 곳을 태후궁으로 골랐다. 태후가 서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게 대외적인 이유였다.
사실 태후는 신의 낭자에 관한 소문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고쳐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이상 이를 대외적 이유로 대기는 적절치 않았다. 불길하기도 하거니와 그리 대담한 여인이라면 어명을 거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큰절을 올리고 있던 정교랑을 보고 태후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저렇게 어린 낭자였어?
아마 정교랑을 본 모든 사람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일 것이다.
저렇게 어린 낭자가, 저토록 어린 낭자가,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고, 천자까지 쥐락펴락했다니.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황제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겨우 열일곱이라고? 위낭보다 아직 두 살 어리구려.”
태후가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황제가 그렇다고 했다.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졌던 조당 분위기와는 달리 태후궁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굴을 좀 보여 다오.”
태후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미인이라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던 태후였지만, 정교랑의 얼굴을 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 곱게도 생겼구나. 단정하고 우아한 게, 참 고와. 강주 사람이라고 했느냐?”
“강주 정씨입니다.”
황제가 대신 대답했다.
“아, 땅을 파서 강을 길어 우공이산의 힘을 보여 주었던 그 정씨 말이오?”
태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복이 타고났다고 했소. 그러니 도가의 선인께서 저 아이를 돌봐주시는 게지.”
태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일국의 황제로서, 그는 차마 도가를 운운하는 태후의 말에 맞장구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네 선인 사부는 세상을 떠났다지?”
드디어 정교랑에게 직접 물을 수 있게 된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녀는 태생부터 바보였던 탓에 정신이 깨어난 뒤의 일을 기억할 뿐, 유년 시절의 기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았던 일은 황제도 알았다. 황제 역시 사람을 보내 소상히 알아보았지만, 진소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황제가 알아낸 정보는 진소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했다.
“곡원산 사람으로, 서생 출신이지만 이룬 것 없이 죽었다더구나.”
황제가 말했다.
태후와 정교랑은 황제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심지어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황제의 용안을 빤히 쳐다보는 결례까지 범했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황제는 초조함과 호기심, 은근한 흥분이 담긴 정교랑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고의로 짐을 속인 것이 아니야.
“그자의 성은 송(宋)이고, 이름은 금(今)이니라.”
황제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지만, 정교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냐?”
황제가 서둘러 물었다.
“기억에 없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과거시험에서 몇 번 낙방한 뒤로, 어느 날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더군. 도복을 입은 채 도가의 고사를 읊고 다니다가 행방불명된 자라고 들었다.”
황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역시 도가와 관련이 있었던 게로군.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아무런 구속 없이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모양이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태생이 바보인 저 여인의 병을 말끔히 고치고, 그렇게나 진귀한 비술들을 알려주었는데, 스승인 본인은 얼마나 더 대단할까. 어떻게 그런 인재가 죽었단 말인가.
그자가 죽지 않았다면, 일단 제자부터 속세에 내보내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그럼 누군가가 삼고초려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자를 세간으로 나오게 했을 것이야.
병주에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는 황제 또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봐도 송금이라는 자는 정말로 죽은 것이지, 숨어 있는 게 아니었다. 성현을 모셔 온 옛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정교랑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송금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빠르게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인 정방과는 달리, 송금이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 없었다.
방금 들은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송금이라는 자는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고 했어. 그건 바보였던 내 병이 갑자기 나아진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도대체 누구일까? 누가 나를 깨운 거지? 그리고 왜 또 죽은 거야? 왜 내가 병주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정교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 알아보신 송금 선생의 일생과 외모에 대한 정보를 소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황제의 눈에 비친 정교랑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어딘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저런 반응은 진실된 것이다. 작위적으로 꾸며 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이었던 사람이니, 당연히 그리해야지.”
황제가 흔쾌히 대답하고는 황성사로 내시를 보내 송금의 정보가 담긴 책자를 가져오게 했다.
“네 글씨도 스승이 가르쳐 준 것이냐?”
태후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리고 감탄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태후도 정교랑의 글씨에 들은 바는 있었지만, 그저 지나가는 풍문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정교랑의 글씨를 모사한 작품을 받고 나니, 왜 정교랑이 글씨로 이리 유명한지, 박양 군주가 집에 가서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이 있는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이름 석 자에 날짜를 남긴 것뿐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기도, 비통하기도 하게 만들더구나.”
태후가 말했다.
“호방한 붓끝이 천 리 밖까지 달하여, 강직한 힘이 보이다가도, 유려함이 돋보인다. 전주(篆籒: 주나라 선왕 때 태사 주籒가 만든 서체) 같아 보이기도, 깊이 새긴 글씨 같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온 글씨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해. 하늘을 울리는 지극한 충절이 비석을 새기는 사람의 손끝에 그대로 드러나 더없이 비통하더구나.”
황제가 정교랑의 글씨에 대해 진지하게 칭찬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 말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니, 부디 슬픔을 거두거라.”
정교랑이 큰절을 올리며 답례했다.
“서북에서 급보를 보내왔다. 우리가 빼앗겼던 성보 두 채를 되찾았다지. 전부 신비궁의 공로니라.”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이마가 땅에 닿게끔 큰절을 올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건 서북의 병사와 장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공로이고, 폐하의 혜안과 은덕 덕분입니다. 하찮은 물건 따위가 어찌 사람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정교랑의 말에 황제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모두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짐은 말편자와 신비궁이 모두 네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 그러니 어떤 상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폐하, 첫째로 그것들은 본래 소녀의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 배운 기술입니다. 둘째로 소녀는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안 덕분에 그것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폐하의 인자함과 넓은 아량이 없었다면, 신비궁이 서북에서 쓰이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소녀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소녀의 것이 아니며, 소녀 덕분에 쓰임새를 찾은 것도 아닌데, 어찌 소녀의 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넋이 나간 황제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이, 태후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말도 저리 잘할까. 공로를 탐하지 않는 겸손함에다 사람을 설득하는 이치까지 깨달았어.”
태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인이 공로를 짐에게 넘김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짐의 입을 막은 셈이거늘.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어 하던 게 있었으니, 누이로서 그들을 위해 기억해 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오라버니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지.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짐에게 원한을 품은 걸까?
원한을 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적어도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렴, 아무 생각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게다가 어린 처자가 성질을 부려 봤자 얼마나 부릴 수 있다고. 짐이 황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마지막에는 칭찬까지 몇 마디 덧붙였지 않나.
지금 저 여인이 보여 주는 모든 언행은, 짐이 듣던 바와 똑같구나. 솔직하고, 아부를 떨거나 굽히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이거나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태도. 저건 절대로 진소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번 일은 확실히 저 여인 혼자서 꾸미고 해낸 것이로군. 진소와 다른 이들은 그저 저 여인의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린 것이고.
대화가 한창이던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태후궁에서 저리 결례를 범하는 것이야?
하지만 황제는 곧 무언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내시가 난색을 표하며 아뢰었다.
“폐하, 진안 군왕께서 안으로 들기를 청하옵니다.”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다니까. 역시나 그 일 때문에 정 낭자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구려.”
태후가 황제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신의 낭자이기 때문에 보러 온 거겠지. 황제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이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군왕도 저 낭자에게 미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을 텐데. 밉긴 해도, 그때는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군왕이 저 여인을 도왔던 이유가 뭐겠는가. 저 여인처럼,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였겠지.
“들라 하라.”
황제가 말했다.
내시가 황제의 명을 전하자, 좀 전에 들렸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교랑이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걸어와 정교랑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정교랑의 시야에 아직 흔들리는 장포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관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태후궁 전각 안에서 나는 묵직한 진향(陳香)과는 다른, 산뜻한 향이 정교랑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정 낭자, 왔군요.”
청량한 목소리가 정교랑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정교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예를 올렸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귀비가 기다란 손톱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궁녀가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금잔을 보지 못한 듯했다.
“예상대로, 진안 군왕께서는 그리로 가셨습니다.”
내시가 급하게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궁녀가 올린 금잔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경왕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황제와 태후께서는 그 낭자에게 뭘 해 주기로 했지?”
귀비가 묻자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왕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귀비가 멈칫하면서 내시를 쳐다보았다.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귀비가 피식 웃으면서 금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잘도 기다려 왔는데, 성급하게 굴 것 없겠지. 괜히 모양새만 추해져.”
귀비가 금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우리도 정 낭자를 한 번 만나 봐야지. 듣기로는 정 낭자의 글씨가 천하제일이라던데, 이참에 우리 대황자에게 글씨를 가르치라고 데려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