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60)

-신비궁-

대황자가 상소문을 내려놓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내일은 아바마마의 탄신일이니, 일찍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황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요 며칠 계속 쉬지도 못하셨으니, 잠시 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안 군왕도 거들었다. 황제가 웃으며 눈을 떴다.

“그래. 하필이면 짐의 생일에 오랑캐가 짐에게 이리 큰 선물을 줬구나.”

황제는 웃고 있으면서도 냉랭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올리지? 경서나 사서에는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았을까?

대황자는 전에 읽었던 서적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훑었다.

“생각해 보니, 폐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큰 선물인 줄도 몰랐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갑옷을 입으셨는데, 오랑캐 왕족 따위가 어찌 폐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은 턱을 들면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 일은 짐이 어려서 잘못했던 일이니라. 지금 언급할 일도 아니고, 영예롭게 여길 것도 못 돼.”

하지만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존경과 흠모가 담긴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그 얘기를 꺼내지 말아라. 대신들이 죄다 입을 모아 훈계했어. 무릇 병기는 곧 흉기(兵子, 凶器也)고 어쩌고 하면서.”

황제는 진안 군왕을 나무라기는커녕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대황자가 눈을 반짝이면서 재빨리 황제의 말을 이었다.

“하여 진정한 군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만 병기를 드는 법이지요(聖人不得已而爲之).”

그때 대신들은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황제에게 삿대질해가며 침이 마르도록 훈계를 했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황제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황자가 그때 들었던 말을 외쳐내니, 황제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 안에 괴이한 적막함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대황자는 어쩔 줄을 몰랐다. 뭐라 말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대황자는 막막한 마음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폐하, 여기 흥미로운 얘기가 있네요. 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나지막한 탄사를 뱉으면서 실내의 적막감을 깨트렸다.

“무엇을 말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말편자라는 거,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만들었던 거군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무원산.

다소 좋아지던 황제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진안 군왕과 대황자를 훑어보았다.

두 녀석도 참.

대황자는 자신의 말이 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몰랐지만, 황제가 싫어하는 무원산 얘기를 꺼낸 진안 군왕을 보고는 남몰래 고소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짐이 피곤하니, 인제 그만 물러가거라. 쌓여 있는 상소문들을 당장 다 볼 순 없으니, 잠시 쉬어야겠다. 혹시 모르지, 짐의 생일이 지나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황제가 말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내시 한 명이 상소문 하나를 들고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올린 보고입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내시의 상소문을 받아 펼쳐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거 참.”

황제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말했다.

“죄다 오기를 부리겠다고 난리구나.”

허리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나던 진안 군왕은 내시가 자신에게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정 낭자······.

“폐하, 무슨 일입니까? 또 강문원에 관한 논쟁입니까?”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대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 하루 이틀 안에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차 논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대황자가 재빨리 한마디 거들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무원산 형제 중 하나인 범강림이 짐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는구나.”

황제가 비웃으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선물이라.”

황제의 입가에 걸린 냉소를 본 대황자는 영리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편자처럼 희귀한 물건일까요?”

진안 군왕은 황제의 비꼬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호기심 담긴 말투로 물었다.

말편자라······.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말편자가 뭐 희귀하다고.”

대황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진안 군왕이 대황자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전하,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말편자 덕분에 말굽이 상해서 버려지는 말이 매년 천 필 이상 줄었습니다. 군에서 버려지는 말이 준다는 것은 곧 매년 천 필 이상의 군마를 거저 얻는다는 뜻이지요.”

“천 필이라 한들, 말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대황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됐다.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대전 안이 조용해지자 황제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말편자를 만들어 낸 거라고? 그때 말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말편자라······.

황제가 상소문을 펼쳤다.

경왕의 궁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당 안에서 여럿이 축국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끌리지 않는 짧은 옷을 입은 진안 군왕이 소매를 동여매고 외쳤다.

“육가아, 육가아! 이쪽으로, 이쪽으로, 나한테 줘!”

공을 차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경왕은 당연히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혼자서 공을 굴렸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으며 경왕의 뒤를 따라 뛰어다녔다.

한참을 뛰던 경왕이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육가아, 이리 와서 좀 더 놀자.”

진안 군왕이 이리저리 뛰면서 외쳤다. 하지만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무시한 채 바닥에 드러누워 아무렇게나 발을 휘둘렀다.

결국 진안 군왕은 경왕을 어르고 달랜 끝에 어렵사리 욕탕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느냐?”

진안 군왕이 경왕의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 주며 내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내일 범강림이 선덕문 앞에서 폐하를 알현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육가아, 그 여인이 폐하께 어떤 선물을 할지 궁금하지 않아?”

목욕통 안에 앉아 있던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장난감을 쥐며 물장구를 쳤다.

“아마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일 거야.”

진안 군왕이 경왕의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게 참 아쉽긴 한데, 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텐데.”

진안 군왕이 수건을 가져와 경왕을 돌돌 감싸자, 궁인들이 힘을 합쳐 경왕을 안고 나갔다.

“내일이,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동이 틀 무렵, 이른 시간임에도 진십팔랑은 자매들과 진소 부인에게 둘러싸여 대청 안에 앉아 있었다. 대청 안은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잡담 소리로 떠들썩했다.

“옷이 너무 칙칙한 거 아니야? 좀 화사한 옷으로 바꿔 입는 건 어때?”

“비녀도 그렇고. 머리 장식이 너무 적어.”

“머리 장식 하나만 더 달자.”

자매들이 진십팔랑의 옷과 장신구를 보면서 재잘댔다.

“박양 군주를 따라가는 것뿐이니, 이 정도면 충분해. 어쩌면 폐하의 용안을 못 뵐 수도 있는걸.”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십팔랑이 입은 옷은 2년 전에 입었던 양식 그대로 지은 옷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치맛자락과 허리춤에 금색 꽃을 수놓아 생동감 있으면서도 단아한 미가 돋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옷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힘이 있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진십팔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 나한테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일지도.

“이제 가야겠다. 군주께서 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키고 자매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문을 나섰다.

이제 난 준비됐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궁금해지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황제가 대신들을 데리고 선덕문 앞에 멈춰 섰다. 미리 나와 질서정연하게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문무백관과 멀리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환호 소리를 듣는 일이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드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는 환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이나 기뻤다.

밤낮없이 국사를 돌보고 조정에서 대신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것도 모자라 변방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 쉼 없이 밀려 들어오는 천자의 자리지만,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다스리는 느낌은 늘 사람을 도취시켰다.

“진 상공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도 안 나오다니.”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황제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황제는 이미 두 번이나 진소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소는 계속 집에서 칩거하며 황제의 탄신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여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협박의 이점을 만백성이 맛봤으니, 죄다 따라 하려 드는군.

짐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선물을 준비했다?

이 몸이 만백성 앞에서 너희에게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단 말이더냐?

황제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하자, 대신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선물을 준비한 사람을 보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말씀을 번복하려 하시옵니까.”

중서문하성의 대신이 황제에게 직언을 올렸다.

그리고 이놈의 중신들도 그래. 어째 점점 더 엇나가는 것 같군. 중서문하성만 해도, 짐의 조서를 반려하는 일이 수없이 늘었어.

“진 대인이 오지 않았는데도 중서문하성의 관리들이 본분을 다하네.”

누군가 무심코 수군거리던 소리가 황제의 귓가로 들어왔다.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 좋다. 네놈들 연극에 짐이 끝까지 장단을 맞춰 주마.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몸을 돌리고 천천히 말했다.

“범강림을 부르거라.”

성문 위에서 한 사내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과 관리들은 그를 보지 못했지만, 성문 위에 있던 황족 종친들과 대신들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박양 군주의 뒤에 서 있던 진십팔랑은 ‘무원산’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놀라 고개를 들고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사내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보잘것없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겨우 저런 사람을 위해서 정 낭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키운 거라고?

범강림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황제가 자신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는 큰절을 올린 직후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소인,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옵니다. 소인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죽음을 불사하겠습니다.”

범강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쿠, 그러지는 말아라. 네놈들 목숨이 얼마나 값진 것인데, 죽기에는 아깝지.

황제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물론 명색이 천자인데 만백성 앞에서 일개 평민에게 인상을 쓸 정도로 소인배는 아니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내시들이 서둘러 범강림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하지만 범강림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며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소인은 몸이 불편하여, 폐하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적군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여 소인이 폐하께 올릴 선물을 하나 준비했사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소인의 선물을 받아주시어, 폐하의 위세를 떨치게 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곁눈질로 범강림의 두 손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뭘 선물하려는 거야? 만수무강하라는 시라도 한 수 지어 왔나? 아니면 그 신의 낭자한테 복이 들어오는 점괘라도 알아 왔나? 그것도 아니면, 짐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묘약이라도?

황제가 속으로 한껏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리하거라.”

“소인이 폐하께 올리는 선물은 무기이기에, 폐하의 윤허 없이는 감히 올릴 수 없습니다.”

무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갑자기 머릿속에 말편자가 떠올랐다.

“어떤 무기더냐?”

황제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쇠뇌입니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같잖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한 성인께서 쓰셨던 쇠뇌인가?”

“에이, 신선이 썼던 거겠지.”

성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범강림을 비웃으며 나지막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범강림을 내려다보았다.

“소인이 폐하께 바치는 쇠뇌는 평범한 중노(重弩)보다 백배는 더 강합니다.”

중노보다 백배나 더 강하다니!

현장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범강림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소인이 만든 쇠뇌는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 철갑옷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추세운 범강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황제가 두려워서 벌벌 떨지도, 주변의 웅성거림에 겁먹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범강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황제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범강림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중노는 현재 군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무기로, 공격과 수비를 막론하고 꼭 필요한 무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중노보다 백배는 강하다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쇠뇌길래 그 정도의 위력이 있단 말이야?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폐하께 검증해 드릴 수 있습니다.”

범강림의 말에 황제가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 뜻대로 하게 해 주마. 너희가 만백성 앞에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그건 짐의 책임이 아니니라.

“윤허하노라.”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 철갑옷을 관통할 수 있다면······.

지금은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체통을 지키고 있지만, 사실 황제는 아주 호전적인 성향이었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의 황제는 중신들에게 질타를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범강림의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이미 그 쇠뇌가 얼마나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살인 병기라는 뜻인데.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고개를 든 황제는 명을 전하러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내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이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흉기다 보니, 그것을 황궁으로 가져올 순 없었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들과 관리는 뒤늦게 성문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며 무슨 일인지 수군대던 찰나, 내시가 큰 소리로 황제의 명을 전했다. 그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곧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폐하께서 유원 나들이를 가시는 3월도 아닌데, 금군(禁軍: 황궁과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 병사가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것도 구경할 수 있겠네.”

백성들은 시험 삼아 쏠 쇠뇌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지는 몰랐지만,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몹시 기뻐했다.

“왔어, 왔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내시 하나와 소년 하나를 둘러싼 채 엄숙한 표정으로 바짝 경계하며 앞으로 걸어오는 금군 부대가 보였다.

금군에게 둘러싸인 소년은 전포(戰袍: 무사들이 입던 옷)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쇠뇌를 쥐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의 소년은 위풍당당하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세간의 분위기가 개방적이다 보니 주육낭의 모습을 본 소녀들과 여인들은 환호를 보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여인은 주육낭을 향해 향낭과 손수건을 던지기도 했다. 황제가 3월 유원 연회를 열 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공연을 보이는 금군을 대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주육낭에게 환호를 보냈다.

권문세가의 가족들이 있는 구역에 진입하자, 환호 소리가 잠잠해졌다. 관가의 여인들은 평민들처럼 환호를 보내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뉘 집 여식이 이리도 결례를 보이는 게야?

다들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육낭! 저건 육낭이잖아!”

주씨 가문의 낭자가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주육낭을 가리키며 외쳤다. 주 부인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집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밖에 나온 것도 모자라, 황제 폐하를 뵈러 가는 거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주씨 가문의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떠드는 와중에 주 부인은 눈을 뒤집으며 까무러쳤다.

주육낭은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일절 무시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고관대작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여인들의 환호 대신 어떤 사내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주육낭은 이번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의연히 걸어갔다.

진십삼이 헤헤 웃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왜요?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진십삼을 흘겨보고는 계속해서 주육낭의 손에 들린 쇠뇌에 대해 수군거렸다.

“평범해 보이는데.”

“뭐로 만든 거야? 소의 힘줄이나 쇠뿔도 안 보여. 애들 놀잇감 같은 거 아니야?”

놀잇감? 나 참, 댁들이 감히? 저걸 갖고 놀긴 쉽지 않을 텐데.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성문 아래에 도착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의 손에 쇠뇌가 들려 있는 데다 황제와 몹시 가까운 거리인지라 금군은 주육낭의 주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칼자루를 찬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주육낭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금군은 주육낭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모조리 달려들어서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였다.

“소신 주복(周箙)이 폐하께 쇠뇌를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주육낭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성문 위를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향한 큰절은 생략했다.

황제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린 거 아닌가? 쇠뇌를 당기는 힘이 부족하지는 않으려나? 좀 더 건실해 보이는 궁수에게 맡기는 게 좋을 텐데.

황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배치하라!”

일찍이 내시의 분부를 들은 금군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명령을 들은 금군 부대의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주육낭과 칠십 보 떨어진 곳에 일렬로 섰다.

이와 동시에, 성문 위에도 방패를 든 금군이 일렬로 서서 황제와 조정 중신들을 보호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쇠뇌를 든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소년이 쇠뇌를 내리고 발로 무언가를 밟는 행동을 했다. 멀리 있던 사람들에게는 소년이 정확히 어떤 동작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다시 쇠뇌를 들어 올리고 조준하는 자세를 취하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소년은 쇠뇌를 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옆에 있는 금군을 쳐다보았다.

“방패만 남기고, 사람은 비켜 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험 삼아 쏘는 것이니, 인명 피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주육낭의 옆에 서 있던 금군이 놀란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이렇게 먼 거리라면 갑옷을 뚫는 정도만 해도 대단할 텐데, 저 쇠뇌가 갑옷을 관통해서 사람을 죽일 정도라고?

주육낭이 화살을 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황제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의중을 알아차린 내시가 큰 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래에 있던 금군이 재빨리 주육낭의 말을 위로 전했다.

주육낭의 말을 전해 들은 성문 위의 사람들은 또다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하고, 실소를 터트리거나 허튼소리를 한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폐하, 저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옵니다. 소인도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황제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명을 들은 금군은 방패를 나무틀에 고정해 놓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주육낭이 다시 쇠뇌를 들고 멀리 있는 방패를 조준했다.

현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고, 모두가 조용히 소년을 지켜보았다.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작렬하는 햇빛처럼 맹렬한 기세로 한곳에 모아졌다. 숨이 막힐 정도의 적막감에 근처에 서 있던 금군까지도 손에 땀을 쥐고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저 소년은 일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을까? 떨려서 활을 제대로 쏘기나 하겠어?

금군의 시선이 주육낭의 팔로 향했다. 그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육낭의 팔에 떨림이 있는지 주시했다.

“에구머니나! 아씨, 아씨!”

주육낭의 귓가에 반근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주육낭은 잠시 그날의 옥대교 저택을 떠올렸다.

주육낭은 검은 폭포처럼 긴 머리카락을 풀고 과녁 옆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머리 위에는 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싱싱한 배, 검은 머리카락, 반짝이는 두 눈과 백옥같이 하얀 피부. 먹색 치마 위에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덧옷까지. 정교랑의 모습은 한 폭의 기묘한 그림과도 같았다.

“자, 쏴요.”

정교랑이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반근과 몸종들이 헉 소리를 내면서 비명을 질렀다. 주육낭 또한 반근 못지않게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용기가 없는 거예요? 아니면 못하는 거예요?”

정교랑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정교랑의 그 말과 웃음이 주육낭의 자존심을 쿡 찔렀다. 그는 콧방귀를 뀌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아이고, 공자님. 안 돼요!”

정말로 활을 쏘려는 주육낭을 보자, 반근은 재빨리 두 팔을 벌리고 정교랑의 앞을 막아섰다.

“반근, 날 못 믿어? 아니면 주 공자를 못 믿는 거니?”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아씨,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네?”

“너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정교랑이 손을 들어 반근에게 비키라고 손짓했다.

다급해진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활시위를 당긴 주육낭도 비켜설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둘 다 정말 황소고집이야.

반근은 하는 수 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육낭은 활시위를 놓았다. 몸종들의 비명과 함께, 정교랑의 머리 위에 있던 배가 화살에 꽂혀 날아갔다.

반근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서둘러 정교랑의 얼굴에 튄 과즙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됐어요. 이런 놀이는 이제 그만 하세요.”

반근이 혼신의 힘을 다해 두 사람을 말렸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반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개 더.”

반근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노는 거 아니야. 놀 시간도 없어. 그리고 나는 놀 줄도 몰라.”

놀 시간도 없고, 놀 줄도 모르다니.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반근이 정교랑에게 배 하나를 더 건네자, 정교랑이 이번에는 배를 한쪽 어깨 위에 올려 두었다. 심지어 그녀는 배를 지그시 누른 채 주육낭을 쳐다보며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반근과 몸종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면서 정교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씨.”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주육낭은 정교랑을 쳐다보며 속으로 그녀가 옮기는 걸음을 셌다. 정교랑은 벽에 다다른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집이 너무 작네.”

정교랑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서 넘기고는 어깨 위에 올린 배를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쏴요.”

주육낭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가늘게 뜨며 배를 조준했다. 햇빛에 비친 싱싱한 배가 미소 짓는 소녀의 얼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한쪽으로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정교랑의 작고 하얀 귀가 드러났다. 정교랑의 귀에는 다른 여인들이 흔히 하는 귀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귀를 뚫지 않은 거겠지. 바보로 태어난 아이에게 귀를 뚫어줄 리가 있나.

하긴, 누가 감히 저런 뽀얀 피부의 살갗에 구멍을 낼 수 있겠어.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안타까워 뚫을 수 없겠지.

주육낭이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가 떨리는 진동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철판이 뚫리는 뭉툭한 소리가 들려왔다.

칠십 보 밖에 세워져 있던 방패가 흔들거렸다.

방패가 흔들거림을 멈추기도 전에, 주육낭은 곧바로 쇠뇌의 고리를 밟고 화살을 하나 더 올린 뒤 조준했다.

웅웅웅, 탕탕탕.

주육낭이 빠르게 쇠뇌를 당기고 화살을 쏘아내는 소리가 쉼 없이 고막을 때렸다.

“화살을 올리는 속도가 엄청나.”

금군 한 명이 중얼거렸다.

“심지어 화살을 당기는 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아.”

다른 금군이 맞장구쳤다.

이 말인즉슨, 주육낭이 쓰는 쇠뇌는 화살을 올리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시간은 곧 목숨이 아니던가. 생사는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승부 또한 한순간에 판가름 날 때가 많았다.

주육낭은 연달아 화살 열 발을 쏜 후에야 쇠뇌를 내려놓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육낭을 주시하던 금군은 드디어 주육낭이 숨을 고르며 손목을 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주육낭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은 일제히 칠십 보 밖에 일렬로 세워진 방패로 향했다.

금군 병사가 서둘러 방패 쪽으로 뛰어갔다.

“관통했습니다!”

금군 병사가 성문 위의 황제를 향해 구멍 난 방패를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그러고는 백성들이 있는 쪽을 향해 방패를 돌려 들었다.

백성들이 환호를 지르려던 찰나, 또 한 명의 금군이 방패를 높이 들었다.

“관통했습니다!”

“관통했습니다!”

“관통했습니다!”

금군들이 방패를 하나씩 치켜들며 외쳤다. 첫 번째 방패를 보고 환호를 지르려던 백성들은 주춤했다. 가장 가까이서 방패를 볼 수 있었던 고관대작들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고관대작들이 놀라 소리조차 내지 못하자, 백성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덩달아 조용히 서 있었다.

성문 앞에 모인 거대한 인파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전 황제가 성문 위에 오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황제가 성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만백성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일렬로 들어 올려진 방패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저런 쇠뇌를 손에 든 이들이 너희 앞에 있다. 한 줄일 수도 있고, 두 줄일 수도 있고, 혹은 부대 전체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지겠느냐?”

그건 어떤 광경일까?

쇠뇌를 장전한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조준하여 쏘아내면, 저 강력한 화살들이 오랑캐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 화살들은 방패나 갑옷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랑캐의 방패와 갑옷을 관통하리라.

관통!

관통!

살점들이 허공에 날아다니고, 고통에 울부짖는 오랑캐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덮겠지. 오랑캐의 정예군 따위가 대수더냐! 오랑캐의 철갑 기마병 따위가 대수더냐!

하하하하!

황제 옆에 서 있던 금군 대장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금군 대장의 결례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을 깨는 그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두피가 저릿해지면서 온몸에 뜨거운 전율이 일어남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살인 병기로구나!

열 개의 방패가 성문 위로 올려졌다. 황제는 방패를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구멍이 난 모양을 유심히 보니, 화살로 방패를 관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패 뒤에 선 사람까지 쏘아 죽일 수 있겠어.

황제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폐하, 화살을 올리는 속도도 엄청납니다! 저 소년 장수는 연달아 열 발을 쏘고도, 그저 숨을 내쉬며 손을 털기만 했습니다. 중노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속도입니다. 이는 발의 힘으로 활시위를 당기기 때문입니다.”

소년 장수라는 말에 황제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쇠뇌를 금군에게 맡긴 뒤 황제를 알현하러 성문 위로 올라와 어느덧 범강림 옆에 서 있었다.

“너는 어느 집안 출신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주육낭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은 귀덕낭장 주월의 여섯째 아들로, 서북 군영의 조성 휘하에 있는 삼반 주복이라 하옵니다.”

주육낭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맹하고 의기양양한 소년이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녀석이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궁술이 뛰어나더구나. 짐이 상을 내리마.”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시금(右侍禁)에 봉하노라.”

계급 네 개를 뛰어넘다니!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2년이 넘도록 서북 전장에서 적군과 맞서 싸워도 겨우 한 계급 오를 뿐이었는데. 황제 앞에서 쇠뇌를 시험 삼아 쏜 것만으로도 무려 네 계급을 뛰어넘었어!

주육낭은 조심스레 주위의 관리들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근처에 있을 수 있는 무관들은 높은 계급의 장수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우시금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낮은 직책이었다. 따라서 무장들은 황제가 소년 장수를 우시금에 봉하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반면 문관들은 황제가 지금처럼 즉흥적으로 관직을 내리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 같은 분위기에 굳이 나서서 트집 잡으려 드는 문관은 없었다.

황제가 주육낭에게 내린 관직이 무관이니 망정이지 행여 문관에 봉하기라도 했다면 아마 여기 있는 모든 문관이 나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을 것이다.

“성은에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요.”

주육낭의 옆에 있던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주육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은이 망극하다고 외쳤다.

주육낭의 결례에도 황제는 언짢은 기색 없이 그를 칭찬했다. 황제의 칭찬과 진급이라는 포상을 받은 주육낭은 어쩐지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도와 달라? 그 여인을 도와줬더니, 도리어 내가 진급했잖아? 도대체 누가 누굴 돕는 거야?

주육낭이 넋이 나간 사이, 범강림이 입을 열었다.

“폐하, 다른 사람을 시켜 이 쇠뇌를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짐은 널 믿는다.”

체면? 지금 짐의 체면이 중요한가? 이것으로 이뤄낼 서북의 공적에 비하면, 짐이 한 여인의 오기에 체면이 상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아직 어린 낭자니 철이 덜 들어서 그럴 게야.

황제의 말을 듣고 범강림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큰절을 올렸다. 황제의 진심 어린 미소를 보자, 고능준도 황제를 따라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고능준은 범강림을 쳐다보다가 구멍이 뚫린 방패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대단한 병기구나. 중노와 크기는 비슷해 보이는데,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양이야. 궁노원(弓弩院)에서 중노 하나를 만드는 데 족히 열흘은 걸린다. 너의 저 쇠뇌를 만들려면 며칠이나 걸리더냐?”

고능준이 냉소 섞인 얼굴로 범강림에게 물었다. 고능준의 의중을 알아챈 주육낭은 몸을 살짝 떨었다.

젠장! 고능준 저 독한 놈이!

여염집 백성이 저런 병기를 사사로이 소지하는 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병기가 다섯 개를 넘을 경우,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 쇠뇌를 범강림이 경성에 들어오기 전에 만들었든 경성에 들어온 뒤에 만들었든, 열흘이 걸렸든 보름이 걸렸든, 옳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기분이 좋으니 괜찮겠지만, 추후 누군가가 이 일을 다시 언급하며 이간질하는 말을 보탠다면 황제는 분명 범강림을 의심할 것이다.

주육낭이 대답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범강림이 그보다 한발 빨랐다.

“이 쇠뇌는 그리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소인이 혼자 밤낮을 재촉하며 만들었을 때, 족히 엿새가 걸렸습니다.”

범강림은 뭔가 창피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이는 고작 사흘 만에 완성했는데.

고능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주위에 있던 대신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그럴 리가 있나!

황제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엿새라고 했느냐? 정녕 엿새 만에 만들었다는 말이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어찌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너 혼자서 말이냐?”

황제가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없는 대답에 황제는 숨까지 가빠졌다. 범강림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폐하! 어서, 어서 궁노원에 저 쇠뇌를 만들라고 명하십시오. 모든 장인을 동원한다면, 열흘 내로 족히 백 개가 넘는 쇠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서둘러 만들어 서북으로 보내야 합니다! 소장이 직접 폐하를 대신하여 큰 선물을 서북에 전하겠습니다!”

황제 옆에 있던 무장 하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무장의 결례를 지적하는 어사는 아무도 없었다. 어사들조차도 범강림의 말에 놀라 입이 떡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하옵고 폐하, 소인의 쇠뇌는 나무 깃을 단 화살입니다. 그래서······.”

범강림이 말을 이어 갔다. 무장이 흠칫하며 외치던 말을 멈췄다.

그래서······.

황제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의 깃털이 필요하지 않다?”

“맞습니다. 나뭇조각을 깃으로 삼아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활의 몸체와 활시위를 소의 힘줄이나 쇠뿔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산에 있는 나무와 삼노끈이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범강림이 계속해서 설명했지만, 황제는 범강림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일인데, 그보다 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 있다니.

강력한 군대와 뛰어난 무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군비로 들어가는 돈에는 끝도 없었다. 누군들 병사들에게 좋은 무기를 쥐여주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나라에서 군에 쓸 수 있는 비용은 제한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천 관이고 만 관이고 쏟아부으며 병사들과 장비들을 지원하고 싶지만,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황궁 내에는 수리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겨 두는 전각이 차고 넘쳤다. 황제는 이미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지내고 있었지만, 텅 빈 국고는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들은 황제의 호전적인 결정을 질책해 왔다. 전쟁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엄청난 나랏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강림이 만든 이 쇠뇌는 그런 문제까지 단번에 해결해 버렸다. 중노보다 백배는 더 강력한 살상력을 가졌지만, 제작 비용은 중노의 절반도 못 미치다니!

황제는 곁눈질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 준비를 하던 대신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용이 문제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트집 잡긴 힘들었다.

범강림, 이자가 말을 참 잘하는구나! 짐이 조당에서 대신들과 한참을 논쟁해야 할 문제를, 말 한마디로 다 해결했어!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전군 병사들에게 이 강력한 쇠뇌를 보급하는 것 또한 불가능은 아니라는 뜻이다!

전군 병사들에게! 전군 병사들에게!

“물에 닿아도 물을 흡수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노에 비해 손상이 빠른 편입니다.”

범강림이 이어서 말했다. 황제는 손끝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여봐라, 여봐라! 어서 짐에게 이것을 전군에게 보급하려면 얼마가 드는지······.”

황제는 큰 소리로 소리치다가, 갑자기 쇠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이것의 이름이 무엇이냐?”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인이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이름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군들이 쇠뇌를 거둬 보이지 않는 곳에다 보관한 탓에 쇠뇌가 시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신궁, 신······ 신비궁(神臂弓). 신비궁이라고 부르거라.”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신기(神器)를 얻으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고능준이 제일 먼저 외쳤다. 고능준은 속으로 분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어떤 때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능준의 말을 들은 주변 관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성문 위에서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들도 일제히 두 팔을 높이 들고 따라 외쳤다. 순식간에 성문 위아래로 거센 파도가 일듯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아! 이번 생일은 참으로 즐겁구나!

하늘을 울리는 백성들의 환호를 들은 황제는 기분 좋게 몸을 돌려 황궁 대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신들은 황제의 뒤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탄신 연회 자리로 이동했다. 범강림과 주육낭도 황제의 탄신 연회에 초대되었다.

“범강림, 짐이 상을 내리고 싶구나. 원하는 게 무엇이냐?”

황제가 옥좌에 앉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늘 창백하던 황제의 얼굴에 모처럼 혈색이 돌았다.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소인은 단지 적을 죽여 나라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오나 이제는 부상으로 인해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직접 전장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병사와 장수들이 적군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화살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또한 소인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황제는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너를 어전(御前) 번방도군두(藩方都軍頭) 겸 궁노원 군감에 봉하겠노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 안에서 대신들이 헙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 성문 위에서 주육낭이 하사받은 품계도 꽤 빠른 진급에 속했지만, 황제의 이 결정은 그보다 훨씬 파격적이었다. 이번에는 몇몇 무장들까지 움찔거렸다.

“폐하, 아무래도 중서성의 관리들과 상의를 해 보심이······.”

관리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황제는 관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정색하며 반문했다.

“서북의 일에 대해서는 상의가 끝났소?”

말문이 턱 막힌 관리는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높은 관직에 봉한다 한들, 궁노원에서 활이나 만들 뿐이다. 일개 장인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게 인재인 법인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이 나라를 위해 기술과 신기를 바친다면 나라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옛날부터 흔히 있던 일이니,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지.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말편자를 만들었던 자도 네 형제라고?”

황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시에 저희 일곱 형제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누이가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때 누이가 저희에게 각자가 가진 재능과 기호에 따라 기술을 선물해 주었지요. 넷째가 말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다 보니, 누이가 그에게 말편자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제 제가 몸이 불편하여 전장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누이는 적을 죽일 수 있는 다른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요.”

범강림의 말을 듣던 황제의 표정이 차츰 변해 갔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도 황제처럼 표정이 달라졌다.

강문원은 끝났구나.

고능준은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쇠뇌의 엄청난 살상력부터 쉬운 제조법, 그리고 저렴한 제작 비용까지. 범강림은 연달아 휘둘러대더니 급기야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일격을 황제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일곱 형제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기술을 한 가지씩 전수했다고. 이미 두 명의 형제는 각자의 장기를 살려 적군을 죽이고, 아군에 큰 보탬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명은 어떠한 재능을 가졌으며, 어떤 놀라운 기술로, 어떠한 신기를 만들어 냈을까?

하지만 이제 그 답은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 됐다. 그 다섯 명은 죽고 없으니까. 그들의 재능이 뭔지, 어떠한 기호를 가졌는지, 이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의 손해로다. 이게 바로 나라의 손해라는 것이야.

무원산 형제가 만든 신기를 떠올릴 때마다, 황제는 죽은 다섯 형제를 떠올릴 터였다. 죽은 다섯 형제를 떠올릴 때마다, 황제는 이번 일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황제의 머릿속에 하루하루 쌓여 가면, 강문원이 서북에 남기는 힘들 테지. 어디 남기 힘들 뿐인가. 황제의 마음에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건 아마도 한평생 힘들 것이리라.

정녕, 정녕!

정녕 이토록 독하단 말이냐, 강주 바보!

인간은 하늘의 뜻을 예측할 수 없다지만, 기어코 하늘의 뜻을 누르고 지나가는 이도 있는 법이구나.

“노야, 노야.”

같은 시각, 진(陳)씨 저택.

마당에서 부친과 함께 바둑을 두며 차를 마시던 진소는 사환의 목소리에 바둑을 두던 손을 멈췄다.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몰랐지만, 사환은 성문 앞에 모였던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진소에게 빠짐없이 전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진소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소가 손을 휘휘 내저어 사환을 물리자, 진 노태야는 손에 쥐고 있던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강문원은 끝났구나.”

진 노태야가 진소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역시, 정 낭자가 널 돕고 있었던 거였어.”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는 놀라운 한편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하도록 폐하를 재촉하라고 했던 게, 폐하께 이 선물을 바치기 위해서였다니. 그리고 이 선물이 모든 국면을 뒤집다니.”

신비궁! 정말 엄청난 살인 병기로구나!

“정 낭자가 걱정할 게 뭐 있겠습니까. 폐하를 자극했다고 한들, 자신의 명망 때문에 폐하께서 자신을 싫어한다고 한들, 문제 될 건 없지요. 어차피 명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을. 이제 보니 정 낭자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던 겁니다. 신선이니 뭐니 하는 도술을 내세운 것도 아니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실력 말입니다.”

신분도 평범하고 의지할 가족조차 없었던 여인이니, 그 명망 또한 신기루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명망 아래에 탄탄하게 닦아 둔 기반이 나라를 이롭게 할 엄청난 공적이라면?

“도통 꿰뚫어 볼 수가 없군요.”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사환이 또 노야를 외치며 뛰어 들어왔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두 사환이 큰절을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경하?

폐하께서는 응당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지만, 사직을 청하고 집에 있는 나에게 축하할 일이 뭐 있다고?

“노야, 폐하께서 십팔랑 아씨가 바친 서예를 극찬하며 아씨를 사서어인(寫書御人)에 봉하고, 대황자께 글씨를 가르치라 하셨습니다.”

사환이 연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진소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진 노태야도 무척 기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황궁의 연회석에서는 진십팔랑이 황제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뒤로한 채 황제가 하사한 조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꿈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장면이지만, 그 꿈이 사실이 되는 순간의 기분이란 꿈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십팔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진십팔랑은 끝까지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든 채, 최대한 담담해 보이는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짐이 참으로 기쁜 날이로구나. 이번 생일만큼 귀하고 많은 선물을 받아본 건 처음이로다!”

옥좌에 앉은 황제가 웃으면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

대전 안에는 대신들의 만세 소리와 함께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녀들이 형형색색으로 나풀거리는 소매를 움직이며 가무를 선보이자, 대전 안은 인간계의 선경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진 곳에 있는 경왕의 궁은 황궁 대전 안의 흥겨움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진안 군왕과 경왕 앞에도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경왕은 바보가 된 후로 되도록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황제에게 난처한 상황만 생길 것이 분명했다.

“자, 이것도 먹어 봐.”

진안 군왕이 경왕에게 숟가락으로 차를 떠먹여 주었다. 양고기를 손에 쥐고 신이 나서 먹고 있던 경왕은 인상을 쓰며 진안 군왕의 숟가락을 피했다.

“그러다 체할라.”

진안 군왕은 이리저리 피하는 경왕을 다독이면서 간신히 차를 반 잔 정도 먹였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내시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세 사람이나 상을 받은 것이야? 폐하께서 이번 탄신일을 몹시 즐겁게 보내고 계시는구나.”

내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즐거우면 된 거지.”

진안 군왕이 별다른 말이 없자, 내시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내시는 문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홀로 금잔을 쥐고 천천히 술을 들이켜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경성 밖. 대로변의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무덤 쪽을 내다보았다. 무덤 앞에는 시녀 하나가 광주리를 손에 든 채 서 있었고, 두봉을 두른 여인이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한 가을날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정교랑의 얼굴에 얼룩을 만들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비석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묘비에 글자를 새기는 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정교랑이 끌과 망치를 손에 쥐고 묘비 위를 두드리며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묘비를 세우고 이름을 새기러 왔어요.

새로 만들어진 무덤, 오래된 나무, 서 있는 시녀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아리따운 낭자. 대로변에서 무덤 쪽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한 폭의 기이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아쉽구나, 아쉬워. 저리도 어여쁜 여인이 손에 망치와 끌을 쥐고 있으니 원. 저것들을 칠현금으로 바꾸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궁 연회가 끝났다. 상을 받은 이들에게 아직 정식으로 임명장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들의 집 앞은 방문객들과 넘쳐나는 선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천자의 말이 갖는 무게는 지엄한 것이었다.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상을 내렸으니 차질이 생길 리 만무했다.

“육낭은? 육낭은 어디 있어? 노야께서 부르신다고 전해라.”

주 부인의 목소리가 마당 안에 울려 퍼졌다.

“부인, 부인, 의원을 모셔왔습니다.”

시녀들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누가 의원을 부르라 했느냐? 육낭이 어디 있냐니까!”

주 부인이 말했다.

주 부인은 하루 새에 두 번씩이나 혼절한 터였다. 성문 앞에서 주육낭이 쇠뇌를 들고 눈앞을 지나갈 때 처음 혼절했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육낭이 황제에게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혼절했다.

두 번씩이나 연달아 혼절한 주 부인이 걱정스러웠던 주 노야는 시녀들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명했다.

주 부인은 성가시다는 듯 시녀와 여종들에게 손을 휘휘 젓고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주 부인의 얼굴을 비췄다.

“공자님은 황궁 연회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여종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주 부인이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 누이를 보러 갔나 보네.”

주 부인이 활짝 웃으며 여종들을 재촉했다.

“어서 서두르거라. 교교에게도 집에 온 선물을 좀 보내 주고. 아 참, 우리 집에서 며칠 묵었다 가는 건 어떠냐고도 물어보거라. 상냥하고 공손한 말투로 물어야 한다. 괜히 우리 교교 귀찮게 잔말 많이 하지 말고.”

여종과 시녀들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주육낭은 일찍이 옥대교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범강림은 황궁 연회를 마친 후에도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무장들에게 둘러싸인 채 궁노원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범강림에게 관직이 내려졌다는 소식은 벌써 집으로 전해져 온 집안의 사람들이 옥대교 저택을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시종들과 사환, 그리고 어린 몸종들은 기쁜 표정으로 범강림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기를 안고 있던 황씨는 주육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지만,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형수 노릇을 하러 주육낭을 마중 나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가 손님인지도 모르겠네. 저 소년은 정 낭자의 진짜 오라버니잖아.

“정 낭자는 그때 나간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황씨가 말했다.

“어디로 갔습니까?”

주육낭의 물음에 황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 여인이 자신이 어딜 가는지 친절하게 말해 줬을 리가 없지.

미간을 찌푸리던 주육낭은 무언가 생각난 듯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던 주육낭이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서서 몸을 돌리고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형수님.”

주육낭은 그 말만 던지고 황씨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후다닥 말에 올라탄 후 질풍처럼 내달려 사라졌다. 황씨는 그런 주육낭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유, 제가 감히요. 어찌 감히요.”

* * *

작가의 말:

신비궁은 송나라 때 이굉(李宏, 이광(李廣)이라는 설도 있음)이 황제에게 신비궁을 바쳤던 일화를 본떴습니다. <송사병지(宋史兵志)>에는 당시 이굉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을 받았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고대의 황제와 조정이 늘 훌륭한 인재를 갈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굉은 큰 상과 높은 관직을 하사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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