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60)

-좋은 소식-

“다른 건 모르겠고, 지지리도 운 없던 노정은 확실히 무사하겠어. 충심이 지극하여 조사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들을걸.”

장씨 저택 안. 장 노태야가 한 식객에게 말하자, 식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정은 이번 기회로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복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마 다음번 어사중승 직책을 노려볼 수도 있겠지.”

장 노태야가 식객과 얼굴을 마주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쪽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몸종이 참다못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태야, 노태야. 저희 아씨는요?”

몸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노정이 누구든, 서북 관청이든 뭐든, 몸종은 오로지 폐하께서 아씨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쳐다보고는 식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봤나? 서너 해가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이 아이의 윗전이 아닐세.”

장 노태야를 따른 지 어느덧 서너 해가 된 몸종은 장 노태야의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앞으로 몸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노태야, 소인은 아둔해요. 부디 그만 놀리세요.”

몸종이 눈시울을 붉혔다.

“반근, 걱정하지 말아라. 노정과 네 아씨는 같은 편이다. 노정이 무사하니, 네 아씨도 당연히 무사할 게야.”

식객이 웃으면서 몸종에게 말했다.

몸종이 식객의 말을 듣고 재빨리 장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몸종은 그제야 기쁨의 눈물과 함께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두 손을 합장했다.

“정 낭자가 무사하다고는 하지만······.”

싱글벙글 뛰어나가는 몸종을 보면서 식객이 조용히 읊조렸다.

“낭자가 득을 봤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식객의 말에 장 노태야는 말없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서북 사건이 어떻게 됐든, 누가 이득을 취하고 누가 재수가 없게 되든 간에, 정 낭자에게는 좋은 점이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폐하와 대신들은 이 일이 어쩌다 커진 것인지 똑똑히 기억할 테니까요. 정 낭자가 자신의 명망을 이용해 이번 사건을 키운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 정해졌겠죠.”

식객이 천천히 말했다.

자신의 명망을 이용해 조정을 협박이라도 하듯 사건을 키우는 것은 조정에서 몹시 싫어하고 기피하며 가능한 한 윤허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자네의 말은 정 낭자가 칼로 쓰였다는 것인가? 그렇다기에는 무원산 형제들이 명분을 얻지 않았나.”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작 명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의미가 있지.”

장 노태야가 탁자 위에 놓인 서책 위에 손을 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정 낭자가 원했던 게 바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지 않나.”

식객이 장 노태야의 손 아래 있는 서책을 슬쩍 보니, ‘태평경’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거물이든 사소한 인물이든 죽었든 살았든, 그 모두에게 보여 준 바가 있잖나. 그 칼은 보통 예리한 칼이 아니야.”

장 노태야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자들이 한 일을 다 알고 있었어?”

같은 시간, 옥대교 저택의 마당 안에서 주육낭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누가 네 명망을 이용해서 일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트렸는지, 누가 서사근을 잡아들였는지, 누가 병사들과 장군들을 선동했는지, 누가 백성들에게 태일궁 앞에 네 생사당(生祠堂: 존경하는 인물을 위해 살아 있을 때부터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지으라고 부추겼는지.”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무릎 위에 놓아둔 손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다, 모두가 그랬어. 네게 적대감이 있는 사람이든, 은혜를 입은 사람이든, 원수진 사람이든.

정교랑이 웃었다.

“난 알 필요 없어요.”

“그놈들이 널 발판 삼아 이득을 취하고 있잖아! 이 일로 너는 더 이상 경성에 남지 못할 수도 있다고.”

문가에 다다른 범강림이 주육낭의 목소리를 듣고는 우뚝 멈춰 섰다.

“누이.”

그가 정교랑을 부르면서 문가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일 때문에 누이가 경성에서 쫓겨난다고?

“내가 있고 싶은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순 없죠.”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 남들이 내 덕을 보는 건 관심 없어요. 내 관심사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가죠.”

다른 사람이 뭘 얻었는지는 상관없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는지, 목적을 달성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넌 그릇이 커서 참 좋겠다. 이렇게 관대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거렸다.

“소심한 건 자네지. 별일 아닌 것도 내내 잊지 못하고 구시렁대니.”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주육낭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난 아무리 사소한 일이어도 기억해. 이 여인 앞에서 스스로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이 여인은 언제나 개의치 않아 했지.

주육낭이 소매를 홱 털고는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낭자가 원하는 건, 시일이 좀 더 지나야겠습니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주봉상의 일로 중서문하성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즉시 처리될 예정이었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와 포상도 자연스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급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답례했다.

그건 급하지 않다고? 그럼, 뭐가 급한 거지?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낭자가 원하는 건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구나. 진소 등이 바라는 바를, 이 낭자라고 바라지 않을 리가.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정 낭자는 칼이 아니라, 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서북 관청 사람들이 가엾군. 이 여인이 얼마나 속 좁은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니.

서북 관청 안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연회석으로 마련된 자리에는 향긋한 술과 맛있는 요리들이 잔뜩 놓여 있었지만, 대청 안은 텅 비고 오직 강문원만이 상석을 지키고 있었다. 환하게 밝혀진 등불 아래 비친 강문원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오늘은 강문원의 생일이었다. 최근 밀려 들어오는 일들 때문에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는 있지만, 그럭저럭 마음 편한 나날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강문원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다니던 ‘부(副)’자를 머지않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떳떳하게 경략사라는 직책으로 불릴 수 있으며, 경략사 자리를 얻는 동시에 지주(知州) 자리도 얻게 될 터였다.

물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별일은 아니지만, 눈엣가시처럼 짜증을 불러일으키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인정해 준 사건이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 또한 강문원의 뜻대로 잘 해결되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 강문원의 첩실이 아들을 낳았다. 이번에 낳은 아들은 강문원의 열세 번째 아들이었다. 자식을 낳아도 키우기 힘든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몰랐다.

술술 잘 풀리는 일들 덕분에 강문원은 자신의 마흔여섯 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축하하고자 했다. 그런데 경성에서 당도한 밀서(密書) 때문에 생일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손님석이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주! 봉! 상!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강문원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탁자를 뒤엎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접시와 술 주전자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꼭 죽이고 말리라!”

강문원이 소리치면서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회랑 아래 서 있던 수하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고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대인, 대인. 고정하십시오!”

수하와 식객, 그리고 막료들이 재빨리 강문원 앞을 막아서면서 그가 쥐고 있던 칼을 간신히 빼앗았다.

“지금 당장 죽여야겠다. 지금 당장!”

강문원이 음험하고 표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외쳤다.

“대인, 대인 말고도 주 감찰을 죽이고 싶어서 혈안이 된 자들은 차고 널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자를 죽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전투 중에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해도 의심할 자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도 아닌데, 용곡성 안에서 그자를 어떻게 죽이시겠다는 말입니까?”

막료가 강문원을 다독이며 말했다.

더군다나 강문원은 경성의 밀서를 받자마자 사람을 보내 주봉상을 불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봉상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연회에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미 관복을 벗어 던진 채 자진 투옥한 상황이었다. 벌을 기다리는 죄인의 신분이니, 감옥에 앉아 조정에서 내려오는 흠차(欽差: 황제의 명으로 보내는 파견인)를 기다리겠다나.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 옥에서 사람 하나 죽는 게 뭐 대수라고!”

강문원이 눈을 부라리고 이를 갈면서 말했다.

무관이었으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텐데, 주봉상은 하필이면 문관인 데다가 스스로 청죄 상소까지 올렸으니.

“대인, 지금 같은 때 주 감찰이 죽으면 더 큰일입니다. 지금 죽게 되면 모두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막료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그걸 모르겠나!

강문원이 소리쳤다.

“그놈이 계속 살아 있다 해도 어차피 똑같아!”

강문원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날뛰며 안절부절못했다.

밀서를 받던 그 순간, 강문원은 단번에 깨달았다. 며칠 내내 자신을 괴롭혀왔던 이유 모를 불안함이 밝혀진 것이다.

어쩐지 계속 뭔가 이상하다고 했어!

그렇게 된 일이었군. 그렇게 된 일이었어!

서사근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정보는 누가 흘려보냈고, 일부러 사방에 찢어 놓았던 병사들이며 잡역부들은 어떻게 그리 우연히 모여든 것이며, 성을 빠져나가려던 방중화는 대체 누가 못 나가게 막았던 거야?

이 모든 건 내가 임관보 전투에 대해 인정하고, 상소문에 내 이름이 박힌 도장을 찍게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어!

“이건 속임수다. 이건 거짓 증거라고! 모두 함정이었어!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게 무슨 대수라고. 거짓 보고는 무슨! 전투에서 이겼으면 허풍을 좀 치고 다닐 수도 있지. 공로를 부풀려 말하고, 양민을 죽여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

분을 이기지 못한 강문원이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떠들어대자, 막료들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강문원의 말대로,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는 않았다. 역대 전투에서도 공로를 부풀려 보고한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참 우스운 것이, 별일이 아니라고 할 땐 별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별일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번 군공 거짓 보고 사건이 조정에 올라간 시기도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임관보 전투의 공을 가로챈 일을 시인하던 바로 그때, 하필 경성에서는 한 여인의 압박에 못 이겨 황제가 재조사를 천명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은 폐하의 용안에 먹칠을 하고, 폐하의 체면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과 마찬가지지요.”

막료들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대로하지 않으시는 게 더 이상하지. 주봉상이 정말 독하고 날카로운 수를 두었어.

강문원이 홧김에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발로 차서 부쉈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의장 등의 물건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대인께서도 당연히 상소문을 올리고 변론을 하셔야겠지만, 절대로 경성에 불려 가시면 아니 됩니다.”

내가 경성으로 불려가게 되면, 분명히 끝도 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서북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겠지.

그래. 내가 경성으로 가서는 안 돼. 경성으로 가게 되면,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가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강문원이 이를 악물었다.

주봉상이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으니, 조정 대신들은 필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폐하께서 대로하셨는데, 내가 버티고 가지 않을 방법이 있겠느냔 말이다.

“아직 칙사가 당도하기 전이니, 좀 더 방도를 생각해 보지요.”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던 막료들은 칙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강문원에게 말했다.

아직 엄동설한의 찬바람이 부는 겨울도 아니건만, 마당에 서 있던 강문원은 밤바람에 뼈마디가 시린 기분이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관청에 있던 사람들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졸음에 무뎌진 건지 아무도 졸린 기색이 없어 보였다.

무수히 많은 관보와 문서, 그리고 병서들이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 줄 방도는 찾을 수 없었다.

“내 일단 주봉상부터 죽이고 봐야겠다!”

강문원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막료들이 다급하게 강문원을 붙잡았다.

“대인, 그자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으시려는 겁니까!”

“맞습니다. 아직 어떤 결정이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대인께서 서북을 떠난다고 해도, 다른 부임지로 가시겠지요. 고 대인께서 대인을 보호해 주실 테니, 머지않은 시일에 분명히 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젯밤에 경성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냉소를 보이던 강문원의 눈빛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이미 절반은 진 싸움이야.

“급보입니다. 급보요.”

병졸 하나가 급보를 외치면서 관청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청산보에서 온 급보입니다. 동남쪽으로 오랑캐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귀순하게 된 흑산 번족(蕃族)을 공략한답니다. 흑산 번족이 원군을 청했습니다!”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랑캐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노장 강문원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만 명이옵니다!”

병졸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금패와 함께 관인을 찍어 밀봉한 서찰을 내밀었다.

이만 명!

관청 관리들은 더욱 놀라서 얼굴에 핏기가 없어질 정도였지만, 곧바로 무언가 떠오른 듯 혈색을 되찾았다.

“잘 왔다, 잘 왔어. 마침 잘 왔어! 하하하하!”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관청 내에 울려 퍼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병졸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적군이 이만 명이나 된다는 게, 그렇게 좋은 소식인가?

물론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감옥에 있던 주봉상은 소식을 듣자마자 시종일관 유지하던 담담한 표정을 잃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굴색은 차츰 잿빛으로 변했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두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결국, 모든 일은 때와 운명이로구나.”

주봉상이 중얼거렸다.

지체 높은 관료나 장수들은 이러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받는 데 반해, 말단 병졸이나 감옥에 갇힌 병졸이 소식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들이 소식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전장에 나가게 하려나 모르겠네.”

“공이라도 세워서 속죄하려고?”

감옥에 갇힌 몇몇 병졸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감옥 구석 자리에 쭈그려 앉아있던 서사근과 유규는 병졸들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서로의 눈에 비친 절망감을 응시했다.

다 끝났군. 강문원을 경성으로 보내지 못하게 됐어.

정말 하늘이 강문원을 도와주는 건가?

흑산 번족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이 경성에 닿았을 무렵, 서북과 마찬가지로 경성에서도 듣는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어떤 이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식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얼굴색이 창백해지는 사람들은 전쟁이 우습거나 무서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때와 운명에 대한 감탄을 뱉은 것이다.

“또 한 번 큰 싸움이 벌어지겠군. 이번엔 강문원이 무사하겠네.”

“그러게. 전시에 장수를 바꾸는 건 모두가 금기시하는 일이니, 아무리 폐하라도 강문원을 못 건드리시겠어.”

“강문원이 운이 좋았어.”

아직 조당에서 논의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황궁 밖에 있는 이들은 이미 조정 대신 결론을 내렸다.

장 노태야는 천천히 손에 쥔 가위를 내려놓으며 가지치기를 하던 분재를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어도 얻은 건 있지. 명분을 바로 했으니 말이야.”

장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명분을 바로 했으면 뭐 어쩔 텐가. 무명이었던 무원산 형제가 이름을 알리고 명예를 얻었듯, 서북에 있는 이들도 능히 그럴 수 있을 텐데.

“모든 게 다, 때와 운명이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한참을 생각하던 장 노태야는 결국 가위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성을 내고 옥대교를 떠나며 다시는 오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주육낭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옥대교로 달려왔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주육낭은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

“아씨께서는 진 상공 댁에 가셨어요.”

문 앞에 있던 사환이 말했다.

진소의 집에 갔다고? 진소를 찾아가서 뭐 해? 진소를 찾아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야?

고의든 아니든, 이번에 진소에게 당한 사람은 고능준 한 사람만이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진소 본인도 제 코가 석 자일 텐데.

정교랑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진(陳)씨 저택의 사람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진십팔랑은 저 멀리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진십팔랑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십팔랑, 안 가?”

진단랑이 갑자기 멈춰선 진십팔랑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일이 있어서 아버지를 뵈러 왔을 테니,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자.”

정교랑이 진소의 서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진십팔랑이 말했다.

2년 전에 비하면, 키가 많이 커졌네.

“십팔랑, 저 사람이 정 낭자야?”

진단랑이 물었다.

“으이구, 정 낭자랑 제일 친했던 사람이 바로 넌데, 벌써 다 잊은 거야?”

진십팔랑이 진단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잖아. 까먹을 수도 있지.”

진단랑은 볼에 바람을 넣고 입을 삐죽이며, 서재 안으로 들어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린 여기서 잠시 기다리자.”

서재 문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조당에서 돌아온 진소는 피곤에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정교랑을 맞이했다.

“정 낭자, 서두를 것 없습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진소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대인께서는 정도(正道)를 따르시는 분이니, 걱정하지 않아요.”

진소는 정교랑의 미소를 보고 흠칫했다.

정도라······.

진 대인,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黨同伐異).’ 이것이 바로 진 대인께서 아셔야 할 정도입니다.

진소의 귓가에 2년 전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확실히 이번에는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불과 2년 전만 해도 내가 그토록 멸시하던 수단까지 썼지.

내가 고능준 그자를 조정에서 꼭 내쫓으려는 이유는 딱 하나야. 그자는 국사와 민생보다 사리사욕을 우선시하기 때문이지. 조정에서 그런 간악한 소인배를 중용해선 절대 안 돼.

고능준 일당은 틈만 나면 진소에게 그런 간사한 수법을 써 왔지만, 진소는 그들과 똑같은 수법으로 반격하는 걸 원치 않았고, 그런 고능준 일당을 같잖게 여기기도 했다. 그는 늘 자신이 당쟁을 하는 게 아니라, 관료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정도를 걷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소는 시간이 지나며 알게 모르게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특히 이번 일을 겪으면서 더더욱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막료와 수하들이 이번 사건을 대처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그들을 말리기는커녕 아예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그러한 방법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진소는 자신의 앞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도를 따르라고 충고했던 사람이, 결국 그 정도 때문에 피해를 본 심정이 어떨지. 정말로 모든 것은 때와 운명에 달린 셈이로구나.

“다만, 이번에도 대인의 운은 별로 안 좋았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소는 정교랑의 말이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비웃음. 하지만 이 여인에게 비웃음은 결례라 할 수도 없지.

“정 낭자,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내가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도 말고, 조급해하지도 마십시오.”

진소가 한숨을 토하고는 뜻하는 바가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급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대인께서는 급하지 않으신가요?”

정교랑이 진소를 쳐다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급하지 않냐고? 급하지 않았으면 하룻밤 사이에 입안에 포진이 이렇게 많이 생겼을 리가!

“정 낭자, 낭자를 돕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급해할 때가 아닙니다. 천천히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진소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교랑이 진소를 보며 그러냐는 투로 물었다.

“그럼 말을 바꿔서 해 보죠. 제가 대인을 돕는 건 어떨까요?”

나를 도와?

진소가 멈칫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낭자가 계속 나를 돕고 있던 건데.”

진소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요. 공연한 생각이에요. 전 누구를 돕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단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누가 이 일로 이득을 얻든 상관이 없었던 거로군. 도울 마음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도움이 되는데, 작정하고 돕는다면 어떻게 될까?

진소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앉은 여인은 자신의 딸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하지만 이 여인이 해낸 일들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손아랫사람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럼 감사 인사부터 하지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말해 주십시오.”

진소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기필코 이 싸움의 승부를 가려야 했다. 또다시 지난번처럼 진흙탕 싸움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직접 나서서 중재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번에는 기필코 황제가 서북 군정에 대한 결단을 내리도록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주봉상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일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리라.

“오라버니들의 공로 치하는 더 미루지 않았으면 해요. 당장 진행해 주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놀란 진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공로? 우리가 얘기하던 화제가 언제 다시 공로로 돌아갔지?

“지금 공로라고 했습니까?”

진소의 물음에 정교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로죠.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 아닌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아 주세요.”

일단 자신부터 돕고 나서 다른 얘기를 하라는 뜻인가?

진소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그건 정 낭자가 얻어 마땅한 것이야.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폐하를 성가시게 하는 일밖에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건 없지.

“알겠습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기다리다 지친 진단랑이 말했다.

“십팔랑, 난 어머니한테 갈래.”

진십팔랑이 재빨리 진단랑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곧 나올 거야. 무려 정 낭자잖아.”

진단랑이 십팔랑의 손을 홱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뭘. 십팔랑, 보고 싶으면 혼자서 봐. 뭐가 무서워서 그래!”

진단랑은 고개를 돌리고 냅다 뛰어가려고 했지만, 결국 한발 빠른 진십팔랑에게 붙잡혔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섭긴 왜 무서워. 그때 정 낭자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보지도 않고 가게?”

두 자매가 아웅다웅하던 와중에, 서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여종이 진십팔랑을 불렀다.

두 자매가 옥신각신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정교랑과 시녀가 보였다.

짙은 색 치마에 짙은 색 덧옷을 입고, 나무 비녀로 머리를 한데 올려 묶은 뒤, 옆머리에 작은 은색 빗을 꽂은 정교랑의 모습은 일순간 낯설게 느껴졌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진십팔랑의 기억 속 그 모습과 똑같았다.

“정 낭자.”

진십팔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가 정교랑을 부르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목례를 했다. 시녀도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저기······.”

진십팔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내가, 우리, 아니, 내 서재에 잠시 앉았다 가는 건 어때요?”

정교랑이 아직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진단랑이 다가왔다.

“그쪽이 정 낭자예요?”

진단랑이 물었다. 진단랑에게 시선을 옮긴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진단랑이구나?”

“맞아요. 아직 날 기억하네요? 그런데 나는 그쪽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진단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단랑.”

진십팔랑이 다급하게 진단랑의 어깨를 툭 치면서 나무랐다. 정교랑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괜찮아요. 다시 알아가면 되죠. 나는 정교랑이라고 해요.”

정교랑이 진단랑을 향해 반절을 올리며 말했다. 진단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진단랑이라고 합니다.”

진단랑이 치마가 땅에 닿지 않게 살짝 올리고 무릎을 조금 굽히면서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진십팔랑은 헛웃음이 나왔고, 옆에 서 있던 여종들은 조용히 웃음 지었다.

“역시 정 낭자는 어린아이랑 말이 제일 잘 통해.”

여종 중 하나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통성명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진단랑이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미소 띤 얼굴로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여기서 낭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쪽으로 가서 조금 앉았다 가겠어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앉았다 가기를 재차 권했다.

“아니요.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완곡한 거절인가? 회피인가? 아니면······.

진십팔랑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스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있는 정교랑은 어린 진단랑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며 속으로 반성했다.

정 낭자가 일이 있다고 했다면, 정말로 일이 있어서 거절한 걸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정교랑은 진단랑에게 가벼운 작별의 예를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 낭자, 앞까지 바래다줄게요.”

진십팔랑이 얼른 따라가며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정 낭자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정 낭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지만, 그 옆에는 항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붙어 있어.

“우리는 친하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단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나무라는 말 대신, 자신과 똑같다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눈을 반짝거렸다. 진씨 가문의 여종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솜씨가 제법이네.

“그래도, 말하다 보면 우리가 할 얘기가 생길걸요?”

진단랑이 활짝 웃고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되니까.”

정교랑이 진단랑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팔랑은 한 발자국 뒤에서 다 큰 소녀와 어린아이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친하지 않다는 거야. 예전이랑 똑같은데 뭘.”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정교랑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진십팔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정 낭자, 반드시, 다 잘 해결될 거예요.”

“네, 다 잘 해결될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하염없이 보던 진십팔랑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옆에서 재잘대는 진단랑을 따돌리고 혼자 진 노태야의 거처로 왔다. 진소도 진 노태야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요?”

진십팔랑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고는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애원하는 말투로 부탁했다.

“아버지, 정 낭자 좀 도와주세요.”

진소는 진십팔랑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정 낭자가, 나를 도우러 온 것이다.”

진십팔랑은 뭔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멈칫했다.

“아버지를 돕는다고요? 정 낭자가 아버지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데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할 수 있게 하는 것.

진소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이 일을 진십팔랑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이지?

“그래. 정 낭자가 너를 도와주는 것이지.”

진 노태야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진소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도와줄 기회를 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기도 한 법이야.”

도와줄 기회가 제일 큰 도움이 된다고?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의아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지만, 진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소원한 관계가 될 테지.

“이게 무엇이오?”

근정전 안. 상소문을 올리는 진소를 보며 황제가 물었다.

“무원산 다섯 형제의 포상에 대한 안건입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한쪽에 꿇어앉아 있던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진소를 쳐다보았다. 대황자의 표정에서는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 이 시국에 그 얘기를 꺼내?

황제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소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알겠소.”

황제의 대답을 듣고도 진소는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이미 심의된 안건이니,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정녕 그리 급하단 말인가!”

진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은혜를 갚는 일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급한 일이냐고 물었소.”

대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황제가 격노하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과 대황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섰다.

“폐하, 당초 정 낭자가 부친의 병을 치료한 뒤, 신이 집 한 채를 치료비로 지불했습니다.”

진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황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낭자에게 신세 진 게 없단 말이오?”

황제가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정 낭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의원이니 병을 치료했을 뿐이고, 신은 병자를 위해 상응하는 치료비를 지불했으니, 각자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 낭자가 그런 말까지 했다고? 그대의 눈에도 그 낭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겠구려.”

비꼬는 듯한 황제의 말에 진소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가엾기도 합니다.”

가엾다고?

황제는 냉소를 지을 뿐, 진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절망이 극한에 달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다른 사람을 믿지도, 남에게 의지하지도 않겠습니까?”

진소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치를 뻔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정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더 이상 퇴로가 없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진소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도 정 낭자에 대해 들으신 얘기가 있을 겁니다. 선천적으로 바보로 태어난 탓에, 집안사람들은 정 낭자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려고 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림을 받았지요.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정 낭자를 기피했습니다. 정 낭자는 집과 가족이 있음에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천하에 가엾은 사람이 어디 그 낭자뿐이란 말이오? 아무리 가엾다고 한들, 그게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대가 자비심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국법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잖소.”

“맞습니다.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은 정 낭자에게 빚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갚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은혜를 갚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진소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황제는 여전히 언짢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도, 진소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2년 전 탈영병 사건 때,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진소가 한숨을 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폐하, 신은 그 일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2년 전의 일을 잊고 있었던 황제는 진소의 말을 듣고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는 진소가 정 낭자를 돕지 않았지.

“심지어 신은 국법과 군율은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것이라고 하며 정 낭자를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그 일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지만, 신은 지금까지도 탈영병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들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황제는 진소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두었다.

“당시 신이 정 낭자의 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정 낭자가 경성을 떠나게 되어, 신은 보은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2년이 흐른 지금 정 낭자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도 정 낭자는 가장 먼저 신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 역시 신이 정 낭자 편에 서서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정 낭자의 청을 받고, 몹시 놀랐습니다.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신중, 또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수하에게 서북에 관련된 일을 몇 마디 묻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노정이 신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조사를 시작했지요. 그다음의 일들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들이고요.

폐하, 신은 이번에 정 낭자의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폐하께서 그 낭자가 등문고를 쳐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백성들을 선동해 일을 키운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 낭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시끄럽게 키운 장본인은 바로 신입니다. 모든 것이, 신이 낭자의 청을 거절했던 탓이지요.”

진소가 소매 안에서 상소문 하나를 더 꺼내어 허리를 숙이고 황제에게 바쳤다.

“신, 사직을 청하옵니다.”

사직?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정 대신이 사직을 청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지만 거절당하여 오기를 부릴 때라든가, 어사에게 탄핵을 받아 자존심을 세울 때라든가, 관직의 품계를 올려 달라고 시위를 할 때라든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할 때라든가.

물론, 이런 경우는 모두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진소는 조정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사직을 청한 일이 없었다. 보여주기식으로도 그러지 않았다. 사직을 청하기는커녕, 어사에게 탄핵을 받을 때조차도 진소는 자리를 피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당당하게 조회에 참석했다.

성은을 입었으니,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고,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는 당초 전시(殿試)에서 황제의 낙점을 받은 후, 황제를 알현하던 자리에서 진소가 올렸던 말이었다. 진소는 조당에 발을 들인 이후로, 지금껏 꾸준히 그 말을 지키며 강직하고 태산같이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결코 옳은 결정을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황제는 서서히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진소를 잠자코 쳐다보았다. 기세가 드높고 의기양양하던 과거의 진소가 아닌,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진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직을 하기 전에, 폐하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해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서북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증거와 증인이 엄연한 안건이기에 폐하께서도 윤허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신은 국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그 낭자를 위해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는 국법과 규율을 어기지 않고, 폐하의 명을 거스르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진소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진소가 앞서 올렸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에 관한 상소문을 펼쳤다.

잠시 후, 진소가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이 온 황궁에 퍼졌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지만, 이렇게까지 떼를 쓰면서 행패를 부려? 대전이 코앞이거늘, 장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인지 몰라서 저러는 게야? 국사를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그딴 수작으로 폐하를 위협하다니. 쥐꼬리만 한 재간마저 바닥이 난 모양이구나.”

고능준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대인, 서북에 관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듣기로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수하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고능준이 흠칫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그 일 때문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이 시국에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다고?”

“정말 그 일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즉시 치하하라고 명령하셨고요.”

수하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진소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고능준이 인상을 쓰면서 생각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최근 들어 진소 그놈의 행적이 영 괴상하단 말이야. 관직이 높아질수록 진소와 대면할 일이 잦아지는데, 생각할수록 낯선 사람처럼 이상해. 차라리 예전엔 더 파악하기 쉬웠던 것 같아.

알면 알수록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 건가?

“이번 싸움은 자신이 필패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정 낭자와 작당한 일을 폐하 앞에 툭 까놓고 인정하려는 건 아닐까요? 폐하께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엔 너그러이 넘어가 달라고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말했다.

정말 그뿐일까?

고능준은 수염만 쓰다듬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미 진소에게 예상치도 못하게 한 방 먹었어.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내 편이었으니 망정이지······.

“대인, 누가 이번 전투를 일부러 일으킨 것도 아니니, 어차피 부인할 순 없잖습니까. 어찌 됐든 폐하께서도 이런 때에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으실 테고요. 주봉상이나 진소나 일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일 겁니다.”

막료가 말했다.

이치대로라면 그렇지.

고능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심히 지켜보게.”

고능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그 강주 바보도.”

강주 바보 따위가 고 시제(侍制)의 걱정거리가 되고, 진 상공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다니. 강주 바보는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막료가 속으로 생각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임관보에서 백 명 남짓한 병력으로 성보를 지키며 죽을힘을 다해 싸운 용사들의 충의를 높이 사는 바이니 그 가족들에게······.”

옥대교 저택 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조서를 높이 들고 문장의 고저 기복을 맞추며 공로 치하하는 조서의 내용을 읽었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를 정명 장군에 추서하고, 범강림을 전시 직에 봉하며, 서봉추의 아들을 삼반차직(三班借職: 하급 무관 관직)에 위임한다.”

옥대교 저택 앞에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쪽에서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저런 어린애가 무장이 되다니. 가장 하급의 무관이라고는 하나, 목숨을 바치고 정명 장군에 오른 제 아버지에 비하면, 관직을 참 쉽게도 얻는군.

폐하께서 너그럽고 통 큰 결정을 내리셨네.

“인자한 황제 폐하께서는 공을 세우면 포상을 내리는 것을, 억울한 게 있으면 조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이셔. 이번에는 대신들 때문에 폐하의 성총이 가려진 거래.”

조서를 읽던 관리는 백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놓으면서도 딱히 감격하지는 않았다.

지금 폐하께서는 서북 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니 이런 일에 크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어. 이번 일에 한 치의 실수라도 있었다간, 황제가 무당의 협박에 굴복한 일로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뿐더러 조정 대신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열성조(列聖朝) 앞으로 달려가 통곡하며 사죄드려야 할지도 몰라.

관리가 손에 쥔 조서를 범강림에게 건넸다.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던 범강림이 일어나 조서를 받들자, 관리는 두어 마디 말을 건넨 후 수하들을 이끌고 옥대교 저택을 떠났다.

관리들이 떠나자,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시녀가 서둘러 사환을 시켜 동전이 가득 담긴 광주리 두 개를 들고 오게 했다.

“다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한 시녀가 사환에게 돈을 뿌리라고 명했다. 옥대교 문 앞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도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저잣거리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옥대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바깥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대청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범강림은 붉어진 눈시울로 자신의 앞에 놓인 조서와 임명장을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범강림의 아내도 그 옆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쳤다.

“누이, 무덤 앞에 가져가서 아우들을 기쁘게 해주는 건 어때?”

범강림이 임명장과 조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급할 거 없어요. 아직, 부족해요.”

아직 부족하다고?

범강림이 멈칫하면서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거동에 불편함은 없지만, 전투에서 다친 이후로 범강림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삼석궁을 당기거나 화살을 연달아 열 발 이상 쏘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군의 갑옷을 뚫을 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가까운 거리에서 쇠뇌로 적을 쏘아 죽이는 정도였다.

범강림은 여태껏 형제들의 명예를 위한 투쟁만을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룬 지 얼마 안 된 않은 지금, 갑작스럽게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보는 정교랑 때문에 범강림은 풀이 죽었다.

이제는 폐인이 된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눈물을 훔치던 범강림의 아내가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나? 나야 뭐, 경성에 남아서 점포나 보면서 살아야지.”

범강림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었다.

“오라버니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 없어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가 어떻게 적군을 죽일 수 있겠어?

범강림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는 절대로 남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법이 없지. 누이는 언제나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누이 앞에서는 내 본심을 숨길 필요 없고, 누이의 의중을 추측할 필요도 없어. 누이가 뭘 물으면, 난 큰 소리로 솔직히 대답하기만 하면 돼.

“있지.”

깊은 한숨을 내뱉던 범강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라버니가 만인적(萬人敵)이 되도록 도와줄게요.”

만인적? 장수를 말하는 건가?

화들짝 놀란 범강림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은 만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서무수가 형제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필부지용(匹夫之勇)일 뿐이고, 아무리 기마와 궁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인적(一人敵)에 불과하다고 했다. 혼자서 적군을 죽이고 공로를 세운다고 한들, 그 수를 셀 수 있는 정도였다. 만인적이란, 오직 전술이 뛰어난 장수들에게만 쓰이는 호칭이었다.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를 말하는 건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장수가 될 수 있겠어! 글씨도 못 읽는 사람인데!

정교랑이 진지하게 입을 뗐다.

“이 세상에서 만인적이라고 불리는 건, 비단 장수들뿐만이 아니에요. 날 따라와요, 오라버니.”

“끝장이야. 이제 다 끝장이라고.”

주 노야가 대청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들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주 노야가 사나흘째 저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시녀들도 두려움이 점차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괜히 당신까지 덩달아 상소를 올릴 거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꼭 써야겠다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이젠 하느님이 저쪽 편에 섰네요.”

주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어째서 하느님이 그자를 돕느냔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교교야말로 하느님의 친자식인데.”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교교니 뭐니, 그만 좀 해요. 폐하의 뜻에 반하는 일을 저질렀는데도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자식 같으니까.”

주 부인은 주육낭 걱정에 감정이 북받쳐 울먹거렸다.

“아이고, 가여운 우리 아들. 이를 어쩌면 좋아. 이번 일로 남주로 쫓겨나 난이라도 평정하러 가게 되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텐데.”

주 부인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문 앞에 있던 시녀에게 주육낭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문 앞에 있던 몸종 중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저, 그게, 육공자께서는 출타하셨어요.”

“어디로!”

눈치를 보는 몸종의 모습에 주 부인이 호통을 쳤다.

“정 아씨 댁에 가셨어요.”

몸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그 애 때문에 죽게 생겼네. 전생에 우리 주씨 가문과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주 노야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덮고 문밖으로 울려 퍼졌다.

“어딜 갔던 거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의 마당에서는 주육낭이 문턱을 넘어서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볼 일 있어요?”

정교랑이 멱리를 벗으며 주육낭의 물음에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짐 챙겨. 나랑 섬주로 돌아가자.”

주육낭이 말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반근과 어린 몸종들, 사환들이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생겼다고 도망가요? 군인이 맞긴 해요?”

“예봉(銳鋒)을 피하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야. 나약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사람이 예봉을 피할 뿐, 예봉이 사람을 피한 적은 없죠.”

주육낭이 다시 반박하려 하자, 정교랑이 가볍게 손을 올려 제지했다.

“활은 잘 쏴요?”

주육낭은 정교랑의 물음에 멈칫하며, 언짢은 듯 흥 소리만 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궁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면······.”

나한테 내 궁술이 믿을 만하냐고 묻는 건 또 무슨 경우야? 이 고약한 여인이 이젠 입만 열면 망신을 주네!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려던 찰나,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냐니!

순간 주육낭은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더러, 자기를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은 거야?

드디어 내가 자기 옆에 있는 게 보였구나. 드디어 나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

형제들이 없어졌으니, 따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칠 듯이 기쁘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쓰라려 오는 기분이 참······.

“무슨 도움?”

주육낭이 물었다.

“날 따라와요. 날 도울 담력이 있는지부터 봐야겠어요.”

뭐라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들고, 벌써 뒷마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삐죽이던 주육낭이 목에 힘을 주고 정교랑을 따라갔다.

말에서 내린 진십삼은 예전처럼 곧장 신선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신선거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어 주위에 있는 다른 식당들을 둘러보았다.

신선거의 주위에는 온통 식당 건물들로 가득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터라 신선거 좌우에 있던 식당들은 모두 만석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다 보니, 낙득자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져서 뽀얀 김이 서린 식당의 창가는 신선경을 방불케 했다.

진십삼은 다시 신선거로 시선을 돌렸다. 신선거 앞은 늘 그렇듯이 조용했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조용함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손님이 많이 줄었어.”

오 관리인이 장부를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인어른의 일은 이미 좋은 쪽으로 결정 난 거 아니었나?”

“태평거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시녀가 말했다.

진십삼이 신선거 안으로 들어서자, 오 관리인과 시녀가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태평거가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찾아오는 손님이 다르기 때문이지. 태평거는 서민들이 많이 찾는 가게다 보니, 무원산 형제들을 포상한 것으로 이번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거야. 하지만 신선거는 태평거와는 다르게 고위 관직자나 권문세가 사람들이 찾는 곳이잖아. 그러니······.”

진십삼이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조정 일을 꿰뚫고 있는 고위 관직자와 권문세가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해결된 모양새인 무원산 형제들의 사건이 실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 승패가 갈리지는 않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운이 너희 아씨를 따를지는 잘 모르겠구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십삼도 이번 일에 대해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필 이런 때에 서북에 또다시 전투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한 달만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은 역시 하늘의 뜻을 예측할 수 없구나. 모두 때와 운명이니라.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에 쥔 장부를 탁 덮었다.

“저희 아씨는 한 번도 운에 모든 걸 맡기신 적 없어요.”

진십삼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너희 아씨는 요즘에 뭐가 그리 바쁜 거야? 왜 자꾸 집에 없어?”

진십삼의 물음에 시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를 위한 커다란 선물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커다란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진십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또 선물이라고? 무원산 형제들이 경성을 떠나서 서북으로 갈 때 했던 선물 같은 건가?

그렇다면 정 낭자가 준비하는 선물이 뭔지, 정말로 기대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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