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6권
-증언-
무슨 일이지? 누가 작정하고 해치려 드는 거잖아!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다. 사람이 세우는 계획만이 있을 뿐.
칙사가 성지를 전하자마자 어쩜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서 기다렸다는 듯 전령병을 통해 사람들이 몰려온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었을 텐데.
주봉상 이놈이!
강문원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인파 속에 서 있던 주봉상은 강문원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놀란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눈빛이었다.
역시 저놈이었군.
강문원은 이를 갈며 지금 당장 주봉상을 씹어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강 대인!”
칙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다시 울려 퍼졌다. 훨씬 준엄해진 목소리였다.
“나더러 폐하를 속이란 거요?”
강문원은 관청 밖을 쳐다보고, 이어 굳게 닫힌 정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문을 열어라!”
강문원이 소리쳤다.
관청 정문이 열리자, 장수들과 관리들이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선 크고 작은 사람 수십 명을 쳐다봤다. 몰려든 사람 중에는 병사도 있고 감용도 있고 잡역부도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방중화는 다리가 후들거려 손으로 담벼락을 짚고 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한곳에 모인 거지?
임관보 전투 이후 방중화는 자신을 따라 도망쳤던 생존자들을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놓았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고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일을 입에 올리기 마련이었다.
방중화는 시간이 흐르면 그 일들도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도망친 일이었다. 그들 또한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음이 분명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아둔하게 자신의 목숨을 바칠 인간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는 서쪽 막사에 있던 감용 유규입니다. 무원산 형제 다섯은 죽음으로써 성을 사수한 공이 있으며, 무장 방중화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공을 가로챘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저는 임관보 전투의 생존자입니다. 무원산 형제 다섯은 죽음으로써 성을 사수한 공이 있으며, 무장 방중화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공을 가로챘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더 많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죽음으로 성을 사수한 용사입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더니 한목소리로 모아졌다. 그 목소리가 온 거리를 가득 채웠다. 온 성의 병사와 백성이 모두 나와 소리치는 것 같았다.
문 앞 층계에 서 있던 장수들과 관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파 밖에 서 있던 방중화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뒤돌아 달아났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관청 감방에 앉아 있던 서사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지?”
“뭐야?”
감방 밖에 있던 위병들도 하나둘 관심을 보이며 문 밖을 쳐다봤다. 얼마 안 가 누군가가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무원산 다섯 형제를 위해 증언하겠다는 사람이 몰려왔소!”
“수십 명은 되던데! 칙사 앞에서 소리치고 있다고!”
“그럼 무원산 다섯 형제한테 정말 공이 있단 건가?”
모두의 시선이 감방 안으로 향했다.
감방 안에 있던 서사근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추태를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자리에 단정히 앉은 채로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가 증언하겠습니다. 저희가 증언하겠습니다.
서사근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채찍에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 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제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형제들이 화장되어 유골로 변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울 필요가 없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것이 어째서 울 일이란 말인가. 기쁘게 웃어 마땅한 일이었다.
서사근은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야지. 웃어야 해!
“이 일이 내 소행이란 거요? 이런 일을 해서 나한테 좋을 게 뭐 있다고?”
문과 창이 굳게 닫힌 관청 안에서 주봉상이 냉소를 지었다. 주봉상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을 손에 들었다.
“이 상소문에 서명한 것도 나고, 조사한 내용 역시 나도 함께 들었소. 대군의 병력을 이동한 것 또한 내가 동의한 일이었소. 강문원, 그대는 부총관이고 나는 감찰사요. 그대의 지휘가 적절치 못했다 함은 내 감찰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단 뜻이니, 벌하려 한다면 내 죄부터 벌해야 하잖소!”
강문원은 냉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인, 확실히 물어봤습니다. 그 전령병이 유규의 돈을 받았답니다.”
강문원은 계속해서 냉소를 지으며 주봉상을 힐끔 쳐다봤다.
“그럼 그 많은 자들이 전부 돈을 받았단 말이냐? 유규한테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 만한 돈이 있다고?”
강문원이 냉랭하게 물었다.
“유규한테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무원산 형제들한테 돈이 있었습니다.”
장수 하나가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근래 들어 서사근이 가산을 다 털어 썼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거들었다. 그 말에 강문원은 더욱 분노했다.
“그자의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털어 써?”
“대인, 방금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더니 임관보 전투 이후 지금까지 넉 달 동안 서사근이 매일 쉬지 않고 그 생존자들의 집에 찾아갔답니다. 땔감이며 쌀, 곡식, 기름을 끊임없이 대줬답니다. 버리면 또 갖다 주고, 버리면 또 갖다 주면서요. 물론 돈도 주고요. 그자들이 이리저리 숨기며 둘러대는 통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계산해도 족히 20만 관은 될 겁니다.”
옆에 있던 장수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관청에 있던 이들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20만 관이라니!
“내 서북에서 꼬박 3년을 보내면서 모은 재산이 겨우 10만 관인데. 일개 병사들이 3년 만에 20만 관을 모으다니······.”
장수 하나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강문원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자리에 있던 이들도 속으로 외쳐댔다.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누가 여길 온단 말인가!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누가 그걸 마구 나눠 준단 말인가!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빌어먹을 불공평인지 뭔지를 왜 따진단 말인가!
“내가 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아시오? 난 알고 있었거든. 강 대인도 그들이 뭐 하던 사람인지 모르진 않을 터인데.”
주봉상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경성 태평거의 주인이오. 1년이면 한 사람당 최소 2만 관의 배당금을 받는데, 무려 일곱 명이 3년을 모았잖소. 20만 관을 모으는 게 불가능할 것도 없지! 20만 관이 뭐요, 더 많을 수도 있지. 목숨까지 여기 내던진 걸 보면 공명과 공로를 위함인데, 누가 그 공로를 지워 버렸으니 가만있을 수 있겠소?
무려 20만 관인데, 그 사람들의 증언을 못 살 것 같소? 죄를 추궁할까 두려워 증언하지 않는 건데, 20만 관씩이나 준다고 하면 죄는 관두고 목숨을 사겠다 해도 저들은 기꺼이 내놓을 것이오.
이 일을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소. 강문원, 본인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으면서 되레 나까지 조사를 못 하도록 협박하고, 다른 이들의 앞길을 생각하라며 윽박질렀지? 나까지 협박했으면서, 왜 저 백성들은 협박하지 못하는 거요?
생각해 보시오. 저들이 경성에서 그만한 소란을 피워 폐하까지 아시게 될 정도면, 이 작디작은 서북에선 오죽하겠소? 아직도 날 의심하다니, 날 의심하면 뭐? 나야말로 강 대인이 고의로 우릴 죽이려 드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소이다!”
주봉상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강문원에게 홱 내던졌다. 옆에 있던 장수들이 얼른 달려들어 주봉상을 말렸다.
관청이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강문원도 무원산 형제들의 신분과 내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20만 관이라니! 이번에 조정에서 서북의 승리를 치하하며 내린 상을 다 합쳐도 20만 관이 채 못 되는데. 서북 전체에 내린 상이 20만 관인데, 그들 일곱 형제의 재산이 20만 관이라······.
그렇게 돈이 많은 자들이, 군에는 뭐하러 들어와! 일부러 날 엿 먹이려고?
“강 대인, 주 대인.”
장수 하나가 머뭇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의심할 때가 아닙니다. 우린 이제 한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칙사가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 보고 들은 바를 전부 폐하께 고할 텐데, 그렇게 되면 정말······.”
관청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칙사지.
노발대발하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칙사를 눌러 앉히기 위해 이들은 방금 전 무려 1만 관이나 되는 돈을 찻값으로 준 터였다.
20만 관이라······.
강문원의 머릿속에 그 어마어마한 액수가 스쳐 지나가자, 또다시 욕이 터져 나왔다.
권력을 겨루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돈을 놓고 겨루는 거였군. 그 빌어먹을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데, 거기서 방심했어.
“대인, 이 일은 어쨌거나 방중화가 공을 노리고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치르고 난 터라 피해가 막심한 탓에 군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대인께서는 그자에게 속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진상을 알게 되신 겁니다.”
장수 하나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가자?”
강문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탁자를 부여잡았다.
“무슨 수가 더 있겠소? 그럼 그자가 공을 인정받고 승진하도록 우리가 협박했다고 할까?”
주봉상이 말했다. 강문원은 주봉상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인, 시간이 없습니다.”
“대인, 더는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장수들이 말했다.
“그럼 저들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텐데.”
강문원이 말했다.
“지금 더 밝혀질 게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다급한 투로 대꾸했다.
서북의 관인이 찍히기 전까진 완전히 밝혀졌다고 볼 수 없지.
강문원이 탁자를 잡은 채 고민에 빠졌다.
“대인, 저들 또한 당시 방중화의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장수가 수하를 버리고 도망친 일이 억울한 겁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 주면 될 일이지요.”
누군가가 재촉하자 관청에 있던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 더 시간을 끌다간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빨리 매듭을 짓는 게 나아. 기껏해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폐하께 꾸중이나 듣는 정도겠지.
“방중화를 데려와라. 칙사 대인께서 친히 하문하실 것이니 죄를 숨김없이 자백해야 할 것이다.”
강문원은 ‘친히’와 ‘숨김없이 자백’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실었다.
“잘 감시해야 합니다. 괜히 도망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낭패예요.”
장수 하나가 덧붙였다. 대청에 서 있던 측근들은 눈빛을 반짝이고 얼른 허리를 굽히며 알았다고 했다.
관청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자마자 달아났던 방중화는 성을 나가지 못했다. 성문 앞에서 위병들에게 막혔다. 별별 말을 다 늘어놓고 별별 사람 핑계를 다 대도 소용없었다. 결국 방중화는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뜻밖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획한 일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문에 있던 이들이 왜 방중화를 막았겠는가. 관청 쪽에서는 아직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이는 소란을 피우며 증언하겠다고 나선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관청 사람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성문 근처의 누추한 방에 갇힌 방중화는 자리에 앉아 이를 갈며 분을 삼켰다.
누구지? 대체 누구야?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문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누군가가 문 앞으로 와 섰다.
“방중화, 칙사께서 하문할 게 있다며 부르신다.”
문밖에 있던 이가 말했다. 그 말에 방중화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했다.
이 몸만 처벌하고, 네놈들은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 그들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천을 보자 방중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왜들 이러는 거야? 난 칙사를 뵈어야······.”
문이 닫히면서 시야가 가려졌다. 흐느끼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마지막 숨이 끊어지던 순간, 시야가 흐려진 방중화의 귀에 그 외침 소리가 들렸다.
아니, 사실대로 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요. 방 대인, 대인이 얻은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대인이 그 공로를 얻는 게 응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도 않을 거고요. 단지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공로가 조정에 보고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끝까지 성보에 남아 싸웠던 감용 병사들까지 전부 포함해서 보고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추서가 있어야 합니다.
염병할 방씨 놈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들 말대로만 했으면 간단했을 일인데······. 적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잖아.
방중화의 목이 옆으로 축 늘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선홍색 관인이 상소문 위에 무겁게 찍혔다. 주봉상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이들도 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서리가 조심스레 상소문을 올렸다.
“대인, 수고가 많으십니다. 증인들의 증언은 전부 여기 담았습니다만, 괘씸한 방중화 놈은 처벌이 두려워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강문원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칙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옷소매 속에 든 찻값을 봐서 그냥 넘어가는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어린 내시가 상소문과 증언이 담긴 문서를 받아 경성에서 가져온 황색 꾸러미에 담았다.
칙사와 어린 내시가 말에 올랐다. 먼지를 휘날리며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무리를 쳐다보며 강문원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이제 우린 조사에 소홀했던 죄를 청하는 청죄(請罪) 상소를 올리러 가야겠군.”
강문원의 말에 장수들과 관리들이 네 하고 대답했다.
조사에 소홀했던 죄 정도면 감당할 수 있지. 기껏해야 녹봉이 삭감되고 폐하께 꾸중 몇 마디 듣는 정도일 테니까.
이번 일은 이렇게 지나가는군.
강문원은 못마땅한 마음을 꾹 누르며 옷소매를 홱 뿌리치고 뒤돌아 관청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비가 내리면서 9월의 경성은 한층 서늘해졌다. 큰길을 달리던 일행 중 하나가 앞쪽 길가에 보이는 점포 깃발을 보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저기가 바로 태평거일세. 저기 두부가 아주 일품이라지. 우리도 가서 요기나 하고 가자고.”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길가에 있던 행인 하나가 이들을 불러세웠다.
“가지 마시오, 가지 마. 지금은 가면 안 돼요.”
행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리자, 일행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가면 안 된다는 거요?”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라 모르는구먼. 태평거가 송사에 휘말렸소.”
행인의 말에 일행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 송사 때문이었군. 그게 뭐 겁난다고.”
그러자 동료들이 놀라 물었다.
“송사에 휘말렸다는데 겁이 안 나?”
“소문도 못 들었나? 이 태평거는 금강역사께서 지켜 주는 곳이야. 전에도 송사에 휘말린 적 있는데 결국 아무 일 없었어.”
동료들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행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다르오. 이번에 금강역사께서 만난 분은 무려 천자시거든.”
천자?
일행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행인이 늘어놓는 말을 듣고 즉시 말 머리를 돌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을 달려 떠나갔다.
큰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조건 태평거로 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태평거 안이 썰렁한 건 아니었다.
대청에 있는 탁자에는 손님들이 몇 자리 앉아 있었다. 평범한 백성도 있고, 서생이나 상인도 있었는데, 다들 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신분은 각기 다르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화제는 같았다. 태평거의 행수와 무원산 형제가 조정과 대치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 낭자가 도조 이 진인의 제자라는 소문 덕분에 백성은 자연스레 정 낭자 편을 들었다.
“생각해 보라고. 이 진인께서 직접 거두신 제자인데, 거짓말을 하겠나?”
“맞아. 조정에서도 참 너무해. 신선의 제자까지 못살게 구는 걸 봐. 그러니 우리 같은 백성은 더 살길이 막막하지.”
백성들이 나지막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다른 탁자에 앉아 있던 상인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살게 굴 수밖에. 신선의 제자 손에 있는 비술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라고. 그게 다 돈인데.”
“그러니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무슨 소용이야. 기반이 없는걸.”
“기반이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지. 그래도 관리 집안 여식인걸.”
“관리 집안이 어디 한둘인가? 그 정도 출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일이 생겼을 땐 아무 도움도 안 돼.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일로 불똥이 튀어 피해나 볼 뿐이지.”
상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옆에 있던 서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아무 기반도 없는 사람이 명성만 높으면 그건 오히려 머리 위에 걸린 칼이나 마찬가지야. 떨어졌을 때 다치는 건 자기 자신뿐이거든.”
서생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이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긴, 입을 뻥긋거려 일어난 일이지.”
한 사람이 찻잔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서생이 대청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고 골목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조정을 욕하고 있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솜씨가 아주 쓸모 있는 모양이야.”
“어디 백성뿐인가. 정 낭자의 편을 드는 관료들도 한둘이 아니야. 그 낭자는 어사대 감옥에서도 아주 마음 편히 지내는 것 같더라고. 이유가 뭐겠나. 신선 낭자한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지. 세상 이치가 그렇잖아. 은혜를 입었으면 좋은 말을 해 주는 게 당연해. 거창한 도리를 운운하지 않아도 말일세.”
대청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는 창문을 통해 위층까지 전해졌다. 주육낭은 어쩐지 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문을 닫으라니까, 뭐하러 열어서는. 괜히 저런 쓸데없는 말이나 나오게 하고.”
주육낭은 못마땅한 듯 툴툴거리고, 손에 든 술잔을 탁자로 집어 던졌다.
“애초에 집안에 일이 있어서 사흘 쉰다고 했잖아. 말을 안 지켰다간 정말 관부에서 협박을 받은 모양새가 되는데.”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문을 열면 협박을 받지 않은 게 되나?”
“그야 당연하지.”
진십삼은 주육낭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본인만 아니면 되는 거야. 그럼 영원히 남들이 하는 말에 불과할 뿐이지.”
주육낭은 답답해하며 찻잔을 들었다. 다시 창밖의 큰길로 시선을 돌리던 주육낭이 순간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갑작스레 움직이는 바람에 찻물이 몸으로 튀었다.
“왔다!”
주육낭이 소리쳤다. 진십삼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말 두 마리가 큰길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긴 했지만 조정의 급각체(急脚遞: 급한 공문서를 말이나 사람이 빨리 전달하던 제도. 하루에 400리에서 500리를 주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네. 거드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야.”
진십삼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에 주육낭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거든다고? 뭘 거들어? 지금 같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급각체는 곧장 성문을 지나갔다. 거리의 행인들은 재빨리 비키며 길을 내주고, 더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는 시끄러운 저자 근처 골목에 있는 장씨 저택까지 들렸다.
“어서 가서 물어봐라. 무슨 일인지 물어봐.”
늙은 문지기가 사환을 재촉했다.
“저 아저씨가 요즘 무슨 바람이 불어 저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진 거야.”
사환은 투덜대면서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갔다. 얼마 안 가 사환이 돌아왔다.
“급각체 하나가 지나갔대요.”
사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지기가 벌떡 일어섰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왔군요!”
문지기는 사환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부랴부랴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에 있는 노태야의 거처 회랑 아래에서는 몸종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반근, 이건 아무나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당에 선 장 노태야가 동백나무에 가지를 치며 말했다.
“너희 낭자가 이번엔 실로 아둔하게 굴었어.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다니. 폐하의 눈엔 엄청난 잘못으로 보일 수밖에.”
몸종은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흐느꼈다.
“노야도 괴력난신을 싫어하고 명성에 기대 백성을 속이며 군주를 기만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이다. 노야가 편들어 줄 거란 생각은 접는 게 좋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폐하는 인자한 분이니 기껏해야 몇 마디 나무라고 마실 게야. 너희 아씨를 어떻게 하실 분은 아니다.”
“만에 하나 저희 아씨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면요? 아씨는 충분히······.”
몸종은 거기까지 말하고 얼른 말을 멈췄다. 가위를 들고 허리를 구부린 채 분재를 마주하고 있던 장 노태야의 손도 순간 멈칫했다.
충분히 번개를 불러 벼락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이지.
진작 예측은 했다만, 오늘 그 사실을 두 귀로 듣게 됐구나. 어린 낭자가 참······.
장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똑바로 섰다.
“반근, 너무 걱정 말거라.”
장 노태야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너희 아씨는 능히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다. 원칙을 지킨다고는 하나 결코 인자하지는 않지. 아끼는 몸종에게 순탄한 앞길을 열어 주면서도, 자기에게 더 필요한 이를 데려가는 걸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어. 매정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크게 비난할 일은 아니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부류는 절대 아니야.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결과를 그 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지. 헤어나올 수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리가.
분명 여지를 남겨 두었을 것이다. 몸종에게 딱 부러지게 설명해 주긴 힘들지만.
“반근, 급각체가 왔다. 급각체가 왔어.”
마당에서 늙은 문지기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두고 보면 되겠구나.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테니.
장 노태야는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가지치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급각체가 거리를 달릴 무렵, 황궁 안에서는 일상적인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군사에 관한 일과 정사를 어찌 만백성이 논한단 말입니까. 지금 모두가 무원산 일을 떠들어대는 통에 온 경성이 시끌시끌합니다. 황당한 얘기도 수없이 나오고 있고요.”
어사 하나가 말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냉랭한 표정이었다.
노정이 상소를 올리고 온 경성이 무원산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 데다, 서북 일을 재조사하라는 어명까지 떨어지면서 어사대의 어사들은 전부 분주해졌다.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세라 온갖 사건을 들춰내 조당에서 문제 삼으며 탄핵했다.
오늘은 그래도 많지 않은 편이었으나, 고개를 돌리자 탁자 위에 무더기로 쌓인 탄핵 상소가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성가신 눈치였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힘들다(防民之口甚于防川 - <사기>)고 했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백성들이 떠드는 걸 막을 수 있겠소?”
어사는 황제가 입을 열자 더 신이 났다. 계속 말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준 것 같았다.
“전부 소인배 노정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어명을 어기고 국사를 그르친 탓에······.”
그때 누군가가 반박하고 나섰다.
“서북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누가 백성을 속이고 조정을 기만하며 국사를 그르쳤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그 말에 더욱 분노한 어사는 한발 앞으로 나가 진소를 겨냥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북 군영과 관계된 대사(大事)를 일개 무당 따위가 우롱했소. 진소, 그대는 참정이란 사람이 사정을 알면서도 간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파를 탄압하는 일에 이용하며 천자의 은혜를 저버렸소이다. 국사가 중한 법인데 재조사라는 황당한 말로 폐하를 협박했지. 천하 만백성을 현혹한 꼴이니 이임보(李林甫: 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으로 유능한 관리를 배척하여 당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의 무리와 다를 바 없소.”
대전에 서 있는 진소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사는 천자의 명을 받아 풍문을 듣고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를 아뢰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 진소 같은 지위에 있는 자는 탄핵에 대해 곧장 반박하는 건 불가능했다. 탄핵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민간과 조당이 시끄러워지면서 정사가 지체되기 마련이었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고능준은 그런 황제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조정 대신 하나를 향해 눈짓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대신이 얼른 나섰다.
“폐하, 태상시에서 아뢰기를 경성 서쪽에 사는 백성들이 태일궁(太一宮)에 신의사(神醫祠: 신의의 사당)를 짓고 정 낭자 조각상을 도교 이 진인의 옆에 두어 섬기게 하고자······.”
그 말에 대전은 온통 아수라장이 됐고, 황제는 ‘하’ 하며 한탄하는 소리를 냈다. 딱히 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탄 소리만으로도 그 분노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아뢰옵니다.”
대전 문밖에서 보고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서성에서 서북의 급각체를 보내 왔습니다.”
서북!
소란스럽던 대전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벌써 당도했다고? 최소 여드레에서 열흘은 잡아먹을 줄 알았는데.
“들라 해라.”
황제가 말했다.
온 조당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황제는 서북 관청의 관인을 찍어 밀봉한 서찰을 내시에게서 받은 후, 서찰을 열어 눈으로 쓱 훑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됐구나!
진소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당에 있던 이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번개를 불러 벼락에 맞는 일을 구경하긴 글렀나 보네.
은근히 아쉬워하는 관료도 절반 이상이었다.
이 쓸모없는 놈들!
고능준은 분노로 이를 갈면서도 밖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그 낭자를 지독히도 못마땅해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북 일이 그 낭자의 바람대로 되더라도, 큰 풍파를 일으키기는 힘들 터였다.
황제는 빠르게 서찰을 훑은 후 옆에 놓인 문서 몇 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붉은 지장이 빼곡하게 찍혀 있는 문서였다. 황제는 문서를 손에 들고 확인하지 않은 채 바로 입을 열었다.
“이자문.”
어사중승이 얼른 대답하며 앞으로 나와 섰다.
“어사대에서 결론을 내리시오.”
황제가 앞에 놓인 서찰을 가리키며 내시에게 눈짓했다.
“돌려 보게 해라.”
대황자는 손에 든 서찰을 들여다보고, 옆에 있는 고능준 손에 들린 문서를 쳐다보았다. 뭔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방중화가 한 시진 동안 성보를 지키라는 명을 내렸으면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철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에 남은 무원산 형제들이 힘겹게 싸웠고요.”
고능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옆에 있던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고 대인, 시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철수했다니요? 싸움이 두려워 도망쳤다고 해야지 않겠소.”
“싸움이 두려워 도망치다니요? 정녕 싸움을 두려워하는 자였다면, 애초에 그런 명을 내리지도 않고 바로 철수했을 거요. 수적 열세가 분명한 상황에 굳이 결사전을 벌일 필요는 없잖소.”
고능준 역시 냉소를 보이며 받아쳤다.
“결사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수적 열세에 놓였으면 성을 버리고 도망쳐도 된다는 말이오? 고 대인, 그리 말하면 서북에 있는 장수들이 서운할 거외다.”
어사중승이 가운데 서서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다들 말을 멈추었다. 밖에서 내시가 정 낭자를 인도해 후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능준과 진소는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서로 눈길을 외면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린 소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예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언뜻 분한 눈빛이 스쳤지만, 황제는 재빨리 감정을 숨겼다.
“소녀, 폐하의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사대에서 이미 사정을 듣고 온 터였다.
“네 오라비들의 공로와 포상은 중서성에서 심사하여 정할 것이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감사의 절을 올렸다.
실내는 곧 침묵에 휩싸였고, 습관적인 위로의 말도 없었다. 빈말조차 건네기 싫을 정도로 황제가 이 일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능준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남을 해치지도 못하고, 저에게도 득 될 게 없는 일이 아닌가. 허울뿐인 명예를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화를 자초한 게지!
“물러가라.”
과연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정교랑을 돌려보낼 눈치였다. 정교랑은 감사의 예를 올리고 일어섰다.
“정씨.”
황제가 정교랑을 불러세웠다. 정교랑이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황제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공이 없는 자도 공을 다툴 수 있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단 말입니까. 소녀는 공을 다투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황제는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고 손을 내저었다. 내시가 얼른 정교랑에게 눈짓하자 정교랑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대신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중서성과 어사대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시오. 단, 방중화 하나가 죽은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생각은 접어야 할 거요. 강문원은? 주봉상은? 청죄 상소를 올리게 하고, 녹봉을 삭감하시오.”
황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들이 일제히 대답하려는데,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서북 감찰사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나이다.”
진소가 고개를 숙이고 상소를 올리며 말했다. 고능준은 멈칫했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보다 좀 빠르면 뭐? 그래 봤자 직무에 소홀했음이 입증되는 것뿐인데.
가뜩이나 폐하께서 임관보의 일로 심기가 불편하신 이때, 저런 잔꾀를 부려 봤자 화만 자초할 뿐이지.
예상대로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입을 열기도 귀찮은지 내시 쪽으로 손을 들었다. 내시가 얼른 손을 뻗어 상소를 받은 후 황제에게 올렸다.
상소를 열어 본 황제는 몇 줄 읽기도 전에 안색이 싹 바뀌었다.
방금 전 서북에서 온 상소를 읽을 때보다 표정 변화가 훨씬 컸다. 가까이에 서 있는 관료들 눈에는 상소를 든 황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청죄 상소를 보고 어찌 저리 진노하신단 말인가.
고능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진소를 힐끔 쳐다봤다. 숙연한 진소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대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황제는 서북에서 온 상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들여 청죄 상소를 읽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내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다. 내시와 관료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황제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건······ 분노야······.
분노?
임관보의 일을 알았을 때도 황제의 감정은 기껏해야 분하다는 정도였다. 주봉상이 잔꾀를 부리면서 청죄 상소를 올리고 빠져나가려 한 일로 부아가 치밀었다 한들 가소롭다고 냉소나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런데 분노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괘씸한 놈들! 짐을 이토록 기만하다니!”
조용했던 대전에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밖에서 층계를 내려가던 내시조차 그 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추고 놀라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황제가 저토록 진노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여인의 가벼운 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내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신의 시선이 여인의 몸으로 향했다. 여인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어서 길을 안내하라는 듯한 눈빛만 보일 뿐이었다.
천자를 알현할 때도 겁먹지 않더니, 천자께서 격노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군. 어린 낭자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시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문과 창문 안에서 말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내시는 감히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이 없는 자도 감히 공을 다투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느냐고 한 거지.
정교랑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정교랑은 내시를 따라 크고 작은 전각이 겹겹으로 늘어선 황궁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뒤로 내시들이 중서문하성 등 관청이 모인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며 흩어졌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다고 하오!”
“무슨 죄목으로? 무원산 사건을 덮기로 한 죄?”
“아니,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거짓으로 보고했다는군.”
“세상에, 어떻게 군공을 거짓 보고할 수 있어?”
황궁 대문이 아무리 굳게 닫혀 있다고 한들, 소문은 황제의 성난 호통 소리와 함께 중서문하성 등 수많은 관청으로 금세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니, 이 사건에 비하면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나 신의 낭자가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등의 일은 그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는 군주를 기만한 대죄였다. 대주의 조정은 문인을 우대하여 문관을 죽이지 않지만, 무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정당한 사유 없이도 대장군을 죽일 수 있는 조정이니, 감히 군공을 거짓 보고한 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 얘기가 나온 거야?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긴 했지만, 그건 임관보 전투에서 방중화가 한 짓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의 군공 얘기가 나오느냔 말이야!
대전 조당에 서 있던 고능준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당시 서쪽에 있던 척후병이 먼저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적군의 수가 오천이라고요. 하지만 용곡성에는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었기에 분명 용곡성 병사들이 이길 전투라고 판단하고, 다른 척후병들의 보고를 듣기도 전에 전투를 명했습니다.
하지만 임관보의 봉화와 전령병의 급보를 확인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병사가 오랑캐를 포위한 게 아니라, 반대로 오랑캐들이 뒤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것을요.
전방에 있는 오랑캐 병력은 이천 남짓이었으나, 후방에도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 팔천이 있어 협공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오랑캐들은 두 성보를 도륙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병사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도 용곡성을 사수한 덕에 서쪽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은 결국 퇴각했습니다. 사실상 오랑캐가 패배하여 퇴각했다기보다는, 쌍방의 대치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명확한 승패를 가를 수 없게 되어 퇴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신이 이번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철저하게 준비했더라면, 오랑캐들의 함정에 빠져 수많은 군사를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찰사임에도 공을 세우기 급급하여,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청죄 상소를 읽는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헛소리야! 모두 다 헛소리야! 이건 음모라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야!
어떻게 됐든 간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잖아. 용곡성 함락도 막아냈고, 결과적으로는 오랑캐가 물러났으니,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도 아니야!
“거짓 보고가 아니라면, 왜 임관보의 일을 위아래로 꼭꼭 숨겼지? 조사도 안 하고, 보고도 안 했어. 어째서 그 무원산 형제가 경성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도록 만들었느냐는 말이오.”
황제가 천천히 말하면서 고능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능준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정리가 됐다.
“짐은 이번 급각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급했던 모양이로군. 이 사건을 조사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리 급하게 움직였던 거였어.”
황제의 목소리가 고능준의 머리 위에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쾅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고능준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고능준이 진소를 노려보았다.
진소! 내가 속았구나!
황제가 진소와 정 낭자의 관계를 알아챌 수 있도록 귀띔해 왔는데, 진소가 자연스레 이를 이용하다니! 내가 속았어!
진소가 정 낭자를 보호하려고 나선다면, 그 오라비인 무원산 형제들의 임관보 일에 진소를 엮어 끌어내리려 했다. 진소라고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정 낭자를 위하긴 개뿔, 무원산 형제들을 위하긴 개뿔! 서북 관청에서 임관보의 일을 시인하게 만들려던 거였어!
그게 사실이 되면, 황제의 의심이 사실로 입증되니까.
임관보의 일이 참이라면, 또 무슨 일이 참이려나? 임관보의 일도 숨겼는데, 또 무슨 일을 못 숨기겠어?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딱히 대수로운 일도, 겁낼 일도 아니니까. 주봉상 혼자 죄를 시인하는 게 아니라, 서북 관청 사람 전체가 죄를 시인한다 해도, 무서울 건 없지.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폐하의 의심이 아니던가!
이번 서북 관청의 일로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이후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언사 또한 의심받을 터. 빌어먹을, 이건 서북 관청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라고!
고능준은 일순간 살인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진소를 한입에 집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저놈,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모든 게 내 계산 속에 있었어. 그래서 경계심을 푼 건데, 그 틈을 파고들 줄이야!
고능준의 시선이 진소에게로 향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간에, 황제는 진소와 정 낭자에 대해 염증을 느낀 건 분명했다. 그래서 고능준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매미를 잡느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참새를 보지 못하는 사마귀 꼴이 되어 버렸다.
진소!
고능준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황궁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해도, 조당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려 서북 관청의 군공 거짓 보고 사건을 밝힌 일은 온 경성에 바람처럼 퍼졌다. 이미 풍랑이 일기 시작한 조정에 더욱 무시무시한 파도가 덮쳤다.
“이야, 주봉상이 목숨까지 내놓고 그런 일을 벌이다니. 자신의 앞길을 내건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진 상공이 마지막에 둔 한 수가 정말 독하고 정확했어. 서북 관청에서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방에 골로 보내 버린 셈이니까.
“주봉상을 내어주고, 강문원을 쳐낸다? 아니지, 아니지. 강문원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야. 강문원에게 줄을 댄 사람들이 모조리 흔들리겠어. 꽤 해 볼 만한 도박인걸.”
“그리고 군공을 거짓 보고한 게 어디 이번 한 번뿐이겠어? 전부터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해 왔겠느냐고.”
“맞아. 폐하께서도 신의 낭자와 무원산 형제들 일로 망신을 당해 분을 삭이고 계셨을 텐데, 서북 관청에서 제 발로 찾아와 때려 달라고 얼굴을 내민 거잖아. 폐하께서 때리시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저들이 무안했을 정도야.”
“그럼 끝났네. 이번에 조정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겠지?”
“옥사가 벌어질지도 몰라.”
“자네 생각엔 몇 명이 들어갈 거 같아?”
“드디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니!”
관청 관리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말이 급기야는 경성 저잣거리의 술집과 찻집까지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