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의-
강주.
추적추적 가을비가 며칠째 그치지 않고 내렸다. 정사낭은 골목 어귀를 서성이며 머뭇거렸다. 바람이나 쐴까 하고 산책을 나와 걷다 보면 늘 누이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제 누이는 이곳에 없지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에 젖은 청석판에 말발굽이 닿자 다그닥다그닥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만 듣고도 누가 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요즘 경성에서는 말편자가 유행한다고 했다. 말발굽에 못질을 하거나 굽쇠를 박아 말발굽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해 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주에서는 돈을 물 쓰듯 쓰는 조 대집사가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하여, 지금은 자기 말의 발굽에 그런 편자를 박으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만 대장장이가 편자를 제대로 박지 못한 탓에 조 집사가 타는 말과는 달리 편자가 거칠고 조악하게 박혀서, 결국엔 경성에서 말편자 박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을 두엇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공자님!”
조 집사가 외치는 소리에 정사낭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 집사, 예는 됐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방수포로 된 우의를 입고 삿갓을 쓴 조 집사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한치의 소홀함도 찾아볼 수 없는 깍듯한 예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좋은 차를 새로 구했는데, 비도 오고 하니 같이 드시지요.”
예를 마친 조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했다.
“누이는 경성에서 잘 지내지?”
“염려 마십시오. 아씨께서는 어디서든 잘 지내실 분이지요.”
“누이가 서찰을 보내오던가?”
“공자님, 저희 아씨는 말수가 적으시잖습니까. 서찰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긴 그렇지.”
두 사람은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두 여종이 우산을 쓰고 웃으며 나와 맞이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돈은 안 된다니까. 우리 아씨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고.”
조 집사의 말에 두 여종은 쭈뼛거리며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무슨…….”
정사낭이 물었다.
“이부인께서 돈을 달라십니다. 이노야께서 쓰신다고 하더군요.”
조 집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느덧 3년이 흘러 이노야의 임기가 다 되었기에 돈을 융통하려는 것이었다.
“공자님, 들어가시지요.”
조 집사는 정사낭의 생각을 끊으려는 듯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못 주겠다고?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
정 이부인이 여종들을 보며 묻자, 여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퉤, 이번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기분 좋게 돈 펑펑 쓸 때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자기네 아씨는 무슨! 우리 집 아씨지!”
정 이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며 탁자에 있는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다가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차 맛이 이래! 이런 걸 사람 먹으라고 준단 말이냐?”
여종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세가 예전만 못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을…….
“분가할 수도 없는데 이리 설움만 당하고 있으니, 원.”
정 이부인은 대청을 왔다 갔다 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가서 대부인께 전하거라. 이노야께 보낼 돈을 융통해 달라고. 이노야의 앞길이 막히면 저들이 감당할 수 있다더냐?”
여종들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세가 기울었으니 믿을 건 우리 이노야뿐인데, 눈치껏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우리 이노야의 앞길까지 막아 놔야 속이 시원하다더냐.”
여종들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알았다.”
정 대부인이 응낙하는데도 여종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대부인, 서두르시랍니다.”
여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에는 여종들의 그런 태도가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이제는 정 대부인도 습관이 된 터였다.
정 대부인은 고방 열쇠를 꺼내 옆에 있던 집사 부인에게 건넸다.
“가 보게. 이노야께 보낼 돈을 꺼내 줘.”
집사 부인이 머뭇거렸다.
“하오나…….”
집사 부인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정 대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말은 맞는 말이지. 앞길이 중요하지 않느냐. 앞길이 막히면 다 잃는 거야. 그럼 정말 끝이야.”
집사 부인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에 있던 여종과 몸종도 많이 팔아치운지라 집사 부인이 여종과 함께 나가자 안팎이 조용해졌다.
정 대부인은 탁자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게 뭐가 더 있나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터였다.
정 대부인의 시선이 장부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에 기록한 목록에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주과랑(周戈娘).
정 대부인은 손을 뻗어 그 이름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전 형님 말씀만 따를게요.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제가 할게요.
귓가에 여인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방 교육을 받고 자란 규수라고는 하나 무장 집안 출신인지라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정 대부인은 말재주가 변변치 않고 시키는 일이나 할 줄 아는 주과랑을 깔보며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다가 이노야가 상처하고 재취를 맞이했다. 새로 들어온 후처는 학자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현숙하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다. 말솜씨도 유창하여 볼수록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보니 말만 번드르르해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네! 자기 식구한테 횡포나 부릴 줄 알지. 과랑은 남에겐 으르렁거려도 자기 식구는 끔찍이 위할 줄 알았는데.
정 대부인은 주과랑의 이름을 쓸어 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형님, 저 죽기 싫어요. 죽을 수 없어요. 제가 죽으면 우리 교교는 어떡해요.
형님, 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정 대부인이 탁자 위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과랑이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꼬.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정 대부인은 얼른 울음을 그치고 후다닥 눈물을 닦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일어나셨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침상에 누운 정 대노야는 진작 일어났는지, 손에 서책까지 한 권 들려 있었다.
“안 잤소.”
잔 게 아니라면, 방금 전 일을 다 들었겠구나.
정 대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눈물을 한 번 더 닦았다. 정 대노야는 별다른 말 없이 계속해서 서책만 들여다봤다. 정 대부인은 몇 번 더 훌쩍이더니 눈물을 거두고 정 대노야에게 뭘 보느냐고 물었다.
“족보요.”
“그걸 뭐하러 봐요?”
정 대노야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버지께서 그 애한테 왜 이 이름을 지어 주셨는지 기억하시오?”
정 대부인이 멈칫하며 족보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정방. 정방이 누구야?
정 대부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위에 쓰인 정 이노야의 이름을 보자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노야, 그만 보세요. 생각도 하지 말고요.”
정 대부인이 또다시 눈물을 흘리자, 정 대노야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왜 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요? 명백히 존재했던 일이고 존재하는 사람이잖소.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롭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 한다 한들 그게 없었던 일이 되고 그냥 넘어갈 일이 된단 말이오? 그럴수록 진지하게 마주해야지.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말고.”
정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닦았다.
“의원이 그랬잖아요. 노야는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병에 걸렸다고.”
정 대부인이 간곡하게 말했다.
볼수록 화만 날 텐데, 화병으로 죽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정 대노야는 정 대부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족보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방, 본디 남자아이에게 지어 주려던 이름이오. 밝게 빛나란 뜻이지. 아버지께서는 내 재주가 평범하단 걸 알아보셨소. 둘째 아우도 조금 영리한 정도였지. 그래서 우리 정씨 가문의 앞날은 그다음 세대에 달렸다고 보신 거요.”
정 대노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대부인은 들을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앞길을 그 애가 망쳐 버렸죠.”
“아니오.”
정 대노야가 말했다.
아니라고?
정 대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병색이 짙어진 정 대노야는 근래 들어 한동안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정 대부인은 의원을 불러 다시 진찰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신까지…… 이상해졌나?
“생각해 보시오.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다면, 자연히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능력도 있지 않겠소.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지.”
거기까지 말한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같은 이치란 거야.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셨나?
정 대부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낙주부 관청.
정 이노야는 공손한 태도로 중년 사내를 배웅했다.
“염려 마시오. 이 일은 저희 대인께서 생각해 두신 게 있소이다.”
사내가 말했다.
“여기 수고비입니다. 차나 한잔 사 드십시오.”
정 이노야가 봉투 하나를 건네자, 사내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그러자 정 이노야는 더욱 기뻐했다.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사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참, 위쪽에 인사 전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무언가 생각난 듯 사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자, 정 이노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보냈습니다.”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정 이노야는 사내가 대문 밖으로 사라진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섰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경하드립니다, 노야. 이번 내양 자사 자리는 틀림없겠습니다.”
두 문객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 이노야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네. 아직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확신에 차 보였다.
“틀림없습니다. 유옥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숙부님 쪽에 얘기가 잘 됐다고요.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틀림없습니다.”
문객이 웃으며 말하자 정 이노야는 미소를 지었다.
당초 장순의 도움을 얻진 못했지만, 장씨 저택 앞에서 만났던 유옥곤과는 최근 3년간 연락을 지속해 왔다. 유옥곤의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무엇보다도 유옥곤의 숙부인 유평(劉平)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이번엔 유씨 가문에 연줄을 댔으니 문제없으리라.
“내양 자사 자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입니다.”
문객이 탄식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3년 늦긴 했지만요.”
그 말에 정 이노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3년!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본디 3년 전에 얻었어야 할 자리인데, 누구 때문에 앞길이 막힌 건지 3년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3년이라니!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된다고!
“네, 대인. 어쨌거나 이제 바라던 바대로 되었잖습니까.”
문객들이 얼른 위로의 말을 전했다. 정 이노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라던 바대로 됐으니 잘된 일이야.
정 이노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경성. 황궁 내에 위치한 유내전(流內銓: 이부 소속 관청)은 조용했다. 관료들이 정사당으로 향하는 작은 길 위에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뒤에서 무거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엄숙한 표정의 관료가 보였다.
“유 정언(正言: 관직명).”
관료들이 얼른 예를 표했다.
한림원 학사이자 지제고(知制誥: 황제의 조서 초안을 작성하는 관직) 겸 우정언(右正言)을 맡고 있는 유평이었다.
“체통들을 지키시오.”
유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자, 관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흩어졌다.
관료 하나가 유평을 관청 안으로 안내한 후 책자 하나를 올렸다.
“대인, 이번 관직 이동 계획이니 살펴보시지요.”
유평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책자를 받아 넘겨 봤다. 책장을 쓱쓱 넘기던 유평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자는 안 되네.”
관료가 놀라 고개를 숙이고 살펴봤다. 책자에 기록된 필체와 표식을 확인한 관료는 더욱 놀란 눈치였다.
“이건, 분명 대인께서 직접…….”
“내가 뭐?”
유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관료는 멈칫했다. 경성에서 일하는 관료치고 눈치 없는 자는 없었다.
“대인 말씀이 맞습니다. 3년 만에 시행되는 대규모 인사이동인 만큼 신중해야지요. 대조 확인도 철저히 하고요.”
관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유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유평이 나가고 나자 관료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자를 살폈다.
“대체 뭐가 문제야?”
관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책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아둔한 사람을 봤나. 이자가 누군지 좀 보시오.”
누구냐고?
관료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름을 살폈다.
정동.
지방 관리가 한둘도 아닌데, 그 이름을 어찌 다 기억하나.
“정(程)!”
옆에 있던 관료가 귀띔을 해주며 손으로 황궁 안쪽을 가리켰다.
“서북 일에 대해 벌써 잊으셨소?”
관료는 순간 퍼뜩 깨달은 듯 안색이 싹 변하여 얼른 붓을 들고 정동의 이름에 갈고리 표시를 했다. 그러고도 불안한지 붓으로 이름 위를 두어 번 칠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승진 좋아하네. 그런 딸을 낳아 놓고선. 멸문의 화를 입을 날이 얼마 안 남았거늘.”
관료가 중얼거렸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서북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잖소”
옆에 있던 관료가 말했다.
하긴 그렇군.
“그런데 번개를 어떻게 불러들일지 궁금하긴 하군.”
“나도 벼락에 맞는 사람을 본 일은 아직 없소.”
관청 내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서북쪽을 쳐다봤다.
서북 일은 어떻게 되려나?
경성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길로 서북쪽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워낙 먼 거리인지라 서북에 있던 이들은 이번 일의 성패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지 못했다.
급보로 보낸 조정의 공문은 아직 당도하기 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용곡성의 분위기가 마냥 편하고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유규가 관청에서 끌려나가며 소리소리 질러대자 지나가던 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보긴 뭘 봐!”
병사 중 우두머리가 호통을 쳤다. 구경하려고 몰려들던 백성들은 얼른 몸을 움츠리며 흩어졌다.
“서사근을 풀어 줘! 그 전엔 못 돌아간다!”
유규는 소리를 지르며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았다. 병사들이 냉랭한 눈길로 유규를 쏘아봤다.
“꺼져.”
병사들의 말과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범강림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이젠 서사근까지 잡아가다니,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나? 서무수 형제의 죽음이 수상하잖아. 강문원 그 새끼는 뭘 무서워하는 거야?”
유규가 소리를 질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은 유규의 말을 듣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일은 구경하면 안 돼.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간 경을 치거든. 서쪽 오랑캐의 세작이라는 죄명을 붙여 관청에서 잡아가면 감옥에서 살아서 못 나와.
동시에 누군가가 유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체포해라. 군령을 거역한 죄로 하옥한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병사 일고여덟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유규를 포위했다.
그때 긴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을 탄 무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말에 탄 이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이 얼른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섰다.
“주 대인, 이자가 술에 취해 관청에서 난동을 부리기에, 명을 받들어 체포했습니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주봉상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옆에 있던 조성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데려가 술이나 깨게 해라.”
병사들이 얼른 대답하며 유규를 부축해 일으켰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주봉상이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비켜라.”
주봉상의 측근들이 소리치자, 병사 중 우두머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부총관, 그자를 체포하다니 무슨 뜻이오?”
관청 안. 주봉상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탁자 앞에 앉은 강문원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전에는 부총관이라는 호칭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지만, 지금은 평온하기만 했다.
늦가을 메뚜기는 뛰어 봤자 며칠이라고, 네놈이 끝장날 날도 머지않았구나.
“서사근은 소란을 피워 군의 사기를 어지럽혔으니, 군법에 따라 처벌함이 마땅하오.”
강문원이 앞에 있던 서책을 내던지며 대꾸했다. 주봉상이 서책을 받았다.
“그자가 무슨 소란을 피웠단 말이오? 괜히 일 만들지 마시구려. 성가신 일이 아직도 부족한 거요?”
서책을 넘겨 보던 주봉상은 돌연 안색이 싹 변해 성을 냈다.
“이게 뭐요?”
“조정에서 급하다고 해서, 내가 서둘러 조사를 마쳤소.”
강문원이 웃으며 주봉상을 향해 아래턱을 쳐들었다.
“어쨌든 날 탄핵한 것이니, 내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최선을 다하려면 일을 피하는 게 옳지 않겠소?”
주봉상이 손에 든 서책을 도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요? 대체 뭘 조사했고, 뭐가 모함이란 거요?”
“서사근을 조사했지. 그자가 당사자니 그자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소?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소. 직접 본 게 아니라 남한테 들은 말만 하고 있는데, 그게 유언비어로 모함하는 게 아니면 뭐요?”
주봉상은 어이가 없는지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지만, 전장에 나간 이들도 있잖소.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유언비어라니, 그럼 직접 본 사람의 진술은?”
강문원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탁자를 쓸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다 물어봤소.”
강문원이 또 다른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명명백백히 말했소이다. 어떤 정보를 받았고, 어떤 전술을 구사했는지.”
강문원의 얼굴엔 어느덧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강문원이 ‘전술’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자 주봉상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참, 감찰 대인을 깜빡했군. 내가 물어보는 게 피차 불편하다는 건 대인도 잘 알 거요. 대인은 직접 써 주시구려.”
강문원이 손에 든 서책을 건네며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든가. 누구에게든 가서 똑똑히 물어보시오.”
강문원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자, 주봉상이 굳은 표정으로 서책을 받았다.
“조언 고맙소이다.”
주봉상도 힘을 실어 천천히 말했다.
주봉상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편청에서 기다리던 방중화가 들어와 불안한 기색으로 예를 표했다.
“대인,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방중화가 물었다.
“가 보게.”
강문원이 대답했다.
“그, 그런데 주 대인이, 소관에게 뭘 하문하진 않으실까요?”
방중화가 불안한 듯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주봉상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묻지 않을 걸세.”
강문원 역시 바깥쪽을 쳐다보며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감히 못 묻겠지.”
“네, 대인. 묻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무슨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방중화도 얼른 강문원을 따라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문원이 서슬 퍼런 눈길로 노려보았다. 방중화가 흠칫 놀라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네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친 일 말이더냐?”
강문원의 냉랭한 말투에 방중화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썩 꺼져라. 또다시 나라에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가는 군법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강문원이 혐오와 경멸이 담긴 눈길로 말했다. 방중화는 머리를 세 번이나 땅에 찧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 후 부랴부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전부 방중화 때문에 일어난 화인데…….”
옆에 있던 막료가 말했다.
“이게 어찌하여 화란 말인가?”
강문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끊었다.
“저자가 명을 거역하기라도 했어? 임관보에 안 가길 했나? 후방에 제때 소식을 안 전하길 했나? 수하들을 데리고 성을 안 지키길 했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막료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 때문에 일어난 화란 말인가? 저자가 전사하지 않은 게 죄란 말이야?”
강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성을 지켰네.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그 몇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산 자를 두고 겁박해도 된다는 말인가?”
막료들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모아 그럴 순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치지요. 우리처럼 변방을 지키며 직접 전장에 나가는 사람은 다 압니다. 하지만 경성에서 잠화를 머리에 꽂고 말이나 타고 다니며 거리를 노니는 문관 나리들은 모르죠. 그자들 보기엔 우리가 죄다 전사하는 게 당연하거든요.”
누군가가 말했다. 강문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같은 무장은 이겨도 공을 바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면 바로 문책을 받네. 걸핏하면 탄핵하고 질책하지. 이번에 내가 인정해 봐. 앞으로 무슨 일만 있으면 죄다 경성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울 텐데, 그럼 군영 꼴이 뭐가 되겠나!”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감찰이 무원산 형제들을 두둔하는 것 같던데요.”
막료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뭐? 무원산 형제들 때문에 제 앞날까지 내팽개칠 수 있겠나? 당시 우리 쪽 정찰 실수로 계획이 어긋나 큰 화로 번졌고, 허둥지둥 적에 맞서다가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끝에 승리했다고 해? 그런 일이 밝혀져 봤자 그자한테 좋을 게 뭐 있지?”
강문원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나와 이렇게 오래 싸우고 있는 이유가 뭔가? 둘 다 서북에서 쫓겨나고 싶어서 그러겠어? 본인도 본인이지만, 다른 이들도 생각해야지!”
문관이든 무관이든 관직 사회에 발을 들이는 일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차는 것과 같았다. 평생에 걸쳐 높이,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아들과 손자에게도, 대대손손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바랐다.
“가족을 위해 동산의 맹세까지 저버리다니, 주봉상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사안(謝安: 동진東晉의 정치가.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다가 관직에 나가 크게 성공함)에 비할 순 없지 않겠나.”
강문원이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 대인!”
주봉상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유규가 얼른 달려갔지만, 주봉상의 측근들이 손을 뻗어 막았다.
“대인, 서사근을 위해 나서 주십시오.”
주봉상이 유규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인!”
유규가 격분하며 주봉상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달려들었다.
“대인!”
주봉상이 걸음을 멈췄다.
“서사근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며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벌해야 마땅하다.”
“대인, 유언비어를 퍼뜨린 적 없습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고요.”
유규가 소리쳤다.
“증거는?”
주봉상이 고개를 돌리고 유규를 보며 물었다. 유규는 얼른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증명할 수는 있고?”
주봉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서사근은 임관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범강림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임관보 전투에 참여한 이천여 명 중 생존자는 불과 백여 명이다. 범강림 혼자 떠들 뿐 나머지 백 명은 말이 없어. 유규, 이래서야 조정을 어찌 설득하겠느냐? 백성들이 믿겠느냔 말이다.”
유규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그리 쉽게 가릴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나.”
주봉상은 다시 한번 유규를 힐끔 쳐다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유규도 쫓아가지 않았다. 토기 인형처럼 거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세상사가 그리 쉽진 않지…….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길가에 멍하니 넋을 놓고 선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는 알아서 피해 갔다.
“비켜라, 비켜!”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길가에 서 있던 사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말에 탄 이가 뛰어난 승마술로 사내의 몸을 훌쩍 뛰어넘은 덕에 아슬아슬하게 화를 피했다.
“죽고 싶어?”
말에 탄 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돌아 빽 소리치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매서운 채찍이 몸을 휘갈기자 유규가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걸까.
유규의 시선이 옆에 있는 관청으로 향했다. 관청의 문은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범강림 한 사람의 말로는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 없어.
내가 너희를 두고 볼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켜볼 것이야!
유규는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임관보에 참여한 이천여 명 병사 중 생존자는 불과 백여 명. 증인이 필요해, 증인이.
유규는 순간 걸음을 우뚝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다. 자그마한 골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나가요! 나가라고!”
아낙이 소리를 질렀다.
“제발 부탁드리오. 부탁드립니다.”
유규 역시 소리를 지르며, 대문을 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낙이 힘으로 유규를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하지만 곧이어 사내 하나가 안에서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오더니 유규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뚝 부러졌다. 유규는 한쪽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으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대문 앞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낙은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고, 부러진 채 반만 남은 몽둥이를 들고 선 사내 역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유규가 피하지 않을 줄은 미처 몰랐던 듯했다.
유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나머지 한쪽 무릎도 마저 꿇었다.
“이 유규는 한평생 천지신명과 황제 폐하, 아버지와 사부님 외엔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일 없는 사람이외다. 오늘 이렇게 무릎을 꿇겠소. 제발 앞으로 나와 정의를 위해 증언해 주시오.”
사내가 반만 남은 몽둥이를 휙 집어 던졌다.
“난 할 말 없소이다.”
사내가 돌아서며 외쳤다.
“문 닫아.”
“그때 사람 수가 워낙 적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건 알고 있소. 원군도 오지 않았을 때니 거기 남았다 해도 서무수 형제를 구할 순 없었겠지. 그들의 죽음은 댁들과 아무 상관도 없소이다. 누굴 원망하려는 게 아니오. 그래도 인정은 받아야지 않겠소이까. 그들이 죽음으로 성을 지킨 공로는 인정을 받아야지. 방중화는 도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는데도 공로를 인정받고 상을 받았는데, 그들은 왜 안 된다는 거요? 이건 불공평하지. 불공평해.”
유규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하며, 고개를 들어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위험한 상황이고 원군도 없이 고립무원의 처지였으니, 댁들은 구하고 싶어도 그들을 못 구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소. 지금 그 일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잖소.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들의 일을 묻고, 그들을 위해 나설 거요. 조정에서 나선다면 댁들이 그들을 구할 수 있소. 그들을 구할 능력이 댁들한테 있단 말이오. 댁들만 입을 열고 정의로운 말을 해 준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소. 제발 부탁드리오. 그들을 구해 주시오. 댁은 충분히 할 수 있소. 댁들은 이제 그들을 구할 수 있소. 오직 댁들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제발 부탁드리오!”
유규가 땅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절을 올렸다. 아낙은 한쪽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몸이 절로 떨렸다.
사내의 뒷모습 역시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었지만, 끝내 걸음을 옮겼다.
“문 닫아.”
사내가 또다시 소리쳤다.
“여보…….”
아낙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문 닫으라니까!”
사내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낙은 한숨을 내쉬고 밖에서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리는 유규를 힐끔 보고는 대문을 닫았다.
어둠이 깊어지자 마당에 있던 등이 하나둘 꺼졌다. 변방의 요충지인지라 야간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천지는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다.
아낙이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가 대문 틈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캄캄한 골목 안은 더욱 어두웠지만, 눈을 비비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낙은 다시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도 등불은 꺼져 있었다.
“아직도 꿇어앉아 있어요.”
아낙은 칠흑처럼 어두운 방 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눈이 이미 어둠에 적응한지라 희미한 빛만으로도 침상에 앉아 있는 사내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아낙은 다가가 앉으면서도 눕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여보.”
“입 다무시오.”
방 안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
“글쎄 입 다물라니까!”
“여보, 입 다물면 마음이 편해져요?”
사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내가 목소리를 죽이며 호통을 쳤다. 두 부부가 어둠 속에서 마주 앉았다.
“저 사람 말이 맞아요. 당신은 지금 그들을 구할 수 있어요.”
아낙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신이 나갔군!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인데 뭘 구한단 거요?”
사내가 씩씩거리며 도로 누우려 하자, 아낙이 사내를 홱 붙잡았다.
“죽음을 헛되게 하려고요?”
아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뭘 어쩔 건데!”
사내가 씩씩거렸다. 아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계속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보, 나도 거리에서 들었어요. 조정에서 정말 이 일을 재조사하기 시작했대요. 방중화는 초조해하고 총관 대인조차 겁을 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서사근을 체포했겠죠. 여보, 우리가 나서서 증언하면 정말로…….”
“입 다물어! 죽고 싶어 환장했군!”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호통을 쳤다.
“난 당신이 겁에 질려 사는 게 싫어서 그래요. 평생 겁에 질려 살겠죠.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채로 살 거라고요.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럼 최소한 속은 편하겠죠.”
사내는 벌러덩 눕더니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까지 덮어 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낙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죽여 흐느꼈다.
“범강림이 쫓겨나고 서사근도 잡혀갔어요.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저리 나서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사람이 있잖아요.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세상인심은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거예요.”
“세상인심은 본디 기대할 것도 없소.”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가 차츰 잠잠해졌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자 아낙은 눈을 떴다. 사내는 이미 옆에 없었다. 아낙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막 대문을 열려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9월 초인지라 서북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짙은 안개 속에 꼿꼿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대문을 잡은 사내의 손이 움찔거렸다.
밤새 꿇어앉아 있었다니!
“뭘 바라고 이러는 거요?”
사내가 답답한 듯 물었다. 고개를 든 유규가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의.”
“정의가 뭐? 그래 봤자 명목일 뿐입니다. 저들한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사내의 말에 유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소용없지. 죽으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 그래도 산 사람이 있잖소. 그 많은 사람이 저들처럼 살아야겠소?”
유규가 뒤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죽은 사람의 정의를 위한 일이자 산 사람이 무시 받지 않기 위한 길이오.”
사내는 유규를 물끄러미 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좋습니다. 내가 정의를 행하지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던 유규는 사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또다시 손을 내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붙잡았다. 사내가 손을 힘껏 끌어당기며 유규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선 채 손을 꽉 잡았다.
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낙은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유규가 비틀비틀 돌아섰다.
“또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또 다른 정의를 찾아가야지.”
유규가 고개를 돌려 사내를 향해 씩 웃었다.
“한 사람을 찾았으니, 더 많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사내는 유규를 쳐다보다가 얼른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찾으면 더 빨리, 더 쉽게 찾을 수 있겠지요.”
손에 금패를 쥔 사내의 말이 쏜살같이 질주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전부 누런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무리는 곧장 용곡성 관청으로 들어갔다.
“성지를 받으라.”
성지를 받으라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용곡성 관청에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지난번과 같은 내용이었지만 이번에는 말투가 좀 더 호되고 매서웠다. 당장 결과물을 받아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경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투였다.
왜 이렇게 서두르지?
“서둘러야 합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요.”
내시가 말했다.
강문원이 주봉상을 힐끔 쳐다보자, 주봉상은 시선을 피하며 잠자코 있었다.
“대인, 그 일은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강문원이 미소를 지으며 상소문을 바쳤다.
“전부 허황된 말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조사해 보니 그들 다섯 형제의 일을 증언할 만한 사람이나 증거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범강림 등이 원한 때문에 거짓을 고한 듯합니다.”
내시는 강문원과 강문원의 손에 들린 상소문을 차례로 쳐다봤다.
“확실합니까?”
내시가 위엄이 서린 말투로 물었다.
“확실합니다.”
강문원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보고 소리가 들렸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병사 하나가 달려 들어오며 문밖에서 소리쳤다.
무엄한 놈이로군.
자리에 있던 이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황제의 칙사가 있는 자리에서 저럴 수는 없는 법인데!
장수 하나가 문가로 다가가 호통을 치려 했지만, 한발 늦은 듯했다.
“밖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임관보 전투에서 생환한 이들인데, 서사근과 범강림을 위해 증언하겠답니다!”
뭐라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순간 멈칫했다. 강문원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칙사의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강 대인, 이게 무슨 일입니까?”
<교랑의경 1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