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이렇게 되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귀로 직접 확인하는 건 또 달랐다. 넌지시 황제의 표정을 쳐다보던 진소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폐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인지상정이지요. 화를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하거나 어려움에 빠진 틈을 타 도리어 해를 가하려 한다면 그런 마음이야말로 두려울 것입니다.”
진소의 말에 고능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진 대인께서도 지금 인지상정 때문에 나서는 거요?”
“인지상정이지요.”
진소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진소에게로 쏠렸다.
“아까 어사가 조천하를 언급하지 않았소이까. 과거 조천하에서 왜 대패하였는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과거 천하를 평정한 태조는 내친김에 서쪽 오랑캐의 경내까지 진격했다. 본디 서쪽 오랑캐의 왕궁까지 점령할 수 있었는데, 이전 전투의 논공행상이 더뎌지면서 인심이 흉흉해진 탓에 서쪽 오랑캐의 성 코앞에 있는 조천하에서 대패하고 결국 그대로 퇴각해 돌아왔다.
“세상 사람들을 충과 효로 교화하여도 우매한 백성은 대부분 금전적 이익을 더 중시하오. 장수들은 벼슬과 직위로 구속할 수 있다지만, 하층 병사들도 그와 똑같이 대우할 순 없는 일이오. 도리로 설득하고 이익으로 회유하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외다. 지금 이 일에서는 강문원의 일 처리가 적절했는가, 공이 있는데도 조사하지 않은 점은 없었는가 논해야 하오. 이는 병사들이 직접 체감하는 이익은 물론이고 조정을 향한 울분이나 원한과도 관계된 일이오. 인지상정인 동시에 병사들의 마음에 관한 일이고 국가의 대사에 관한 일이라 할 수 있소.”
“그래서 불만이 있으면 조금 불공평한 게 있다고 해서 백성을 부추겨 조정을 협박해도 된다는 말이오?”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백성을 위해 나서지 않은 적 있소이까? 농가의 아낙조차 돼지를 잃어버려 억울할 땐 등문고(登聞鼓: 백성의 억울함을 살피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를 두드려야 함을 알고 있소. 그런데 불치병을 고치고 식당과 주점을 열며, 친아버지는 권세 있는 지주(知州)고 외숙은 귀덕낭장이라는 신의 낭자가 억울함을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른단 말이오?”
“고 대인께서도 저들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오?”
진소가 냉랭하게 말했다.
“저들한테 불공평한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소만, 진 대인이야말로 불공평한 게 있어 보이는구려.”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이자문.”
줄곧 침묵하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며 두 사람의 논쟁을 끊었다. 어사중승이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물어본 건 어찌 됐소?”
황제가 물었다. 어사중승이 대답하며 옷소매 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들을 테니 읊어 보시오. 다들 같이 들읍시다.”
황제가 문서를 받지 않으며 말했다.
받지도 않는다니,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 알겠군.
고능준의 눈에 웃음이 스쳤다. 맞은편의 진소는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범강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장수 방중화를 따라 임관보를 지날 때 돌연 서쪽 오랑캐들의 공격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수적으로 워낙 열세였지만 후방의 진지가 대비하도록 시간을 끌어 주기 위해 불과 이천의 병사로 성을 지키며 적에 맞섰지요. 한 시진만 시간을 끌기로 하고 싸우는데, 뜻밖에도 방중화가 도중에 도망쳤답니다. 결국 범강림의 형제들과 버림받은 나머지 병사들만 남아 성을 사수했습니다. 성이 불탈 무렵, 서쪽 오랑캐가 성문을 공격하여…….”
이자문의 다소 딱딱한 음성이 조당에 울려 퍼졌다. 벌써 두 달쯤 지난 후였지만, 이번 전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듣는 건 다들 처음이었다.
전투가 참혹했으리라는 건 모두가 상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쩌겠는가. 여기 서 있는 관료들이 어디 그런 일에 관심을 두었던가.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결과였다. 이겼는지 아니면 졌는지.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능준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이제부터는 전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묘사하겠군. 저들이 얼마나 용맹했는지 말이야.
“……그 후 범강림은 서쪽 오랑캐가 쏜 화살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가, 나중에 달려온 원군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답니다.”
어사중승이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다 읽었다는 뜻이었다.
조당에 있던 이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그게 다요?”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자문은 또 진지하게 상소를 들어 쓱 훑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게 다요.”
이자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다라니…….
“그자는 도중에 의식을 잃는 바람에, 요행히 목숨을 건졌군.”
“그래서 원하는 게 뭐라고 하오? 죽지 않았으니 위로하고 보살펴 달라는 건가?”
“도망친 장수가 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원흉이라는 거요?”
논쟁이 오가면서 조당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양옆에 있던 어사들이 앞으로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다소 고요해졌다.
“그 정 낭자는? 정 낭자는 뭐라고 했지?”
황제가 물었다.
대황자는 이런 일이 관료들끼리 다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어사중승을 쳐다보던 대황자는 무언가 떠오른 듯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봤다.
다른 때는 늘 생기 있어 보이던 진안 군왕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사중승이 상소를 쓱 훑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공을 다투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을 다투려 한다니!
의남매를 영접하고 안장하려 했을 뿐 억울하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호화스러운 장례를 치르고자 했을 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 게 아니라, 결코 이럴 의도는 아니었으며 그럴 마음도 없다고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작심하고 이렇게 했다는 말이었다.
그 여인이 공을 다투려 한다!
조당 안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무슨 공을 다툰단 말이오? 끝내 굴복하지 않고 싸운 자들 또한 한둘이 아니오만, 이런 경우는 없었소이다!”
“돈이 있고 세력이 있으면 멋대로 이런 일을 벌여도 된다는 거요?”
“백성을 선동해 겁박을 하다니!”
이번에도 어사 둘이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조당이 잠잠해졌다. 용상에 앉은 황제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주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황제의 표정을 보고 황제의 말을 들으며, 고능준과 진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황제는 늘 이랬다. 너희가 뭘 하든 난 다 아니까 날 기만할 생각은 넣어 두라고. 여인이 계속해서 억울하다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면, 황제는 더욱 질색하며 못마땅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깔끔하게 인정한다면, 백성을 부추겨 조정을 협박하려 했다는 죄는 성립되더라도, 황제가 느끼는 혐오감은 한결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혐오감이 다소 줄어들 뿐, 죄는 분명했다. 노정의 탄핵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인은 죄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진소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린 낭자가……. 죽어간 의남매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공을 다투어 공명을 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분이나 푸는 정도지. 지금껏 쌓은 명망을 잘 이용했다면 좋은 곳에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명망은 도리어 해가 될 뿐이었다.
결국 속 좁은 여인네다 보니 감정을 앞세우는군.
“그 여인을 부르시오. 무슨 공을 다투려는 건지, 무엇이 불공평한지 짐이 물어야겠소.”
황제의 말에 조정 대신들은 흠칫 놀랐다.
“폐하, 불가하옵니다. 그런 하찮은 여인을 어찌 용인하신단 말입니까.”
“그렇사옵니다. 그 여인이 등문고를 두드렸다면 몰라도, 신선이니 도사니 하는 말로 백성을 선동하고 관료와 결탁하여 중상모략을 저지른 자인데 어찌 이를 눈감아주려 하십니까!”
관료들이 떠들어대는 통에 조당이 또다시 어수선해졌다. 이번에는 어사들이 여러 번 호통을 친 후에야 간신히 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 여인이 그랬기에 짐이 만나 보려는 거요. 짐은 그 여인에게 답을 주어야겠소. 그 여인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그 여인과 결탁한 관료에게도 답을 줄 거요.”
관료들은 계속해서 반대하려 했지만,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명을 들은 내시들이 재빨리 나가 말을 전했다. 황제는 막간을 이용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황제가 조당 뒤쪽에 있는 후당으로 가 잠시 쉬는 동안, 관료들은 조당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사들이 한쪽 옆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관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표정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흥분하는 이도 있고, 무관심한 이도 있고, 근심하는 이도 있었다. 다들 황제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추측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노정은 끝났군.”
고능준이 다소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태조의 예를 본받으시려나 봅니다.”
관료 하나가 말했다.
조당 안에 의론이 분분한 만큼 조당 밖도 초조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당에서 일어난 일을 숨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진지라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 변방의 장수였던 송명(宋明)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라 아주 제멋대로였어. 남의 재물은 물론이고 아내와 딸까지 빼앗았다니까. 그러다 백성 하나가 상경하여 등문고를 두드리자, 태조께서 친히 그 백성을 만나 주셨지.”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십삼은 부친의 관청 바깥쪽에 마련된 공간에 앉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육낭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찻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반나절 내내 한 모금도 안 마시는 걸 보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낭자가 자신의 명망에 기대 백성의 뜻을 모아 협박할 수 있었다면, 폐하도 능히 그러실 수 있지. 어쨌거나 폐하께서 정 낭자를 만나 주시는 것만으로도 백성은 만족할 거야. 공로를 인정받느냐 마느냐, 상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백성의 관심사가 아니거든. 백성들은 그저 이번 일 자체에 관심을 둘 뿐이지.
정 낭자를 만나 주고 난 후 폐하께서 강문원이 군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며 서북 군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성대한 제를 올리라 명하신다면, 백성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럭저럭 넘어갈 거야. 강문원 역시 자신을 지켜 주신 폐하께 더욱 감격할 테고. 모두가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며 폐하를 인자한 성군이라 칭송하겠지. 참, 노정은 멋대로 역참의 말을 이용하고, 백성의 뜻을 부풀리며 공신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조정을 우롱하기까지 했어. 인자하신 폐하께서 문신을 죽이실 리야 없겠지만, 살아서 남주 땅까지 가긴 힘들 거야.”
잠자코 진십삼의 말을 듣고 있단 주육낭이 물었다.
“그럼 서무수 형제들은 결국 또 아무것도 못 얻는 거네?”
진십삼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미 얻은 것 같은데? 온 경성이 무원산에 대해 떠들고 있잖아. 폐하께서도 친히 물으실 정도니, 공로는 인정받지 못했다지만 대단한 공명을 떨친 셈이지.”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말은 잘했는데, 내 생각에 결과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그 애가 남 좋은 일 시키자고 그리 바삐 움직였을까?”
그 여인이 그럴 사람이던가.
“그런 일을 벌여 봤자 헛수고만 한 셈이지.”
고능준이 중얼거리고 웃으며 맞은편의 진소를 쳐다봤다. 진소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눈빛은 편안해 보였다.
“어찌 헛수고라 할 수 있겠소. 폐하께서 태조를 본받으신 걸 보면, 이는 곧 폐하께서도 강문원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는 뜻인데.”
진소 역시 고능준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능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숲에서 홀로 유달리 큰 나무가 있으면 바람이 쓰러뜨리기 마련이고, 남달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는 필시 여럿의 비방을 받기 마련이지(木秀於林, 風必摧之. 行高於人, 衆必非之). 강문원은 서북을 지키며 여러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소. 병사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소홀했다 해도, 사려 깊지 못한 정도지 이를 큰 과오라 할 순 없잖소.”
그런 과오는 황제에게 도리어 좋은 일이었다. 군을 위무하는 일은 강문원보다 황제가 하는 편이 훨씬 적합하기 마련이니까.
진소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요?”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어사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씨 여인이 왔습니다.”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드넓은 황궁의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내시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였기에 멱리를 벗고 겉에 입는 긴 옷도 벗은 상태였다. 짙은 색상의 치마만 입은 여인은 다소 왜소한 모습이었다. 으리으리한 전각들이 사방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지라 더욱 작고 허약해 보였다.
저게 바로 그 정 낭자인가?
진소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 낭자를 처음 보는지라, 관료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여인을 살폈다.
나막신이 청석판에 닿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전각 안을 맴돌았다.
“아방(阿昉: 정방의 별칭)!”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크고 건장한 사내가 쏟아지는 햇빛 속에 역광으로 선 모습이 보였다.
“아방, 대주의 옛 도성은 폐허가 되어 이 터와 무너진 전각밖에 안 남았어. 그래도 전엔 꽤 으리으리했을 것 같네.”
사내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청량한 소리가 황량한 황궁에 울려 퍼지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설마 그렇게 좋았을까. 그래도 네가 살 집엔 비할 수 없을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뒤에 있던 사내의 웃음소리가 더욱 밝아졌다. 사내가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가던 내시가 뒤돌아 정교랑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갑옷 차림으로 양옆에 있던 호위들도 창을 바투 잡으며 경고의 눈길로 노려봤다.
“겁낼 것 없소.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니까.”
내시가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린 소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천자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는 황제를 알현할 자격을 얻은 관료들조차도 허둥대며 추태를 보이기 마련이니, 하물며 이렇게 어린 낭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낭자가 이리도 어렸구나. 신의 낭자라기에 일흔이나 여든은 된 줄 알았지. 아무리 못 돼도 스물은 넘었을 줄 알았는데, 어사대에서 이렇게 어린 계집이 나올 줄이야.
열여섯은 됐으려나? 아니면 열일곱?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 족히 10장 정도의 높이는 되어 보이는 주변의 전각들을 둘러봤다.
“오나라 왕궁의 화초는 옛길 속에 묻히고, 진나라의 고관대작은 고분의 주인이 되었다네(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 이백). 아방, 내가 지은 시 어때?”
여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거짓말쟁이. 시와 사(詞)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와 사를 모르는 건 아니거든?”
거짓말쟁이……. 아니지,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이로부터 당시에는 천제도 취하여 진나라 땅에 산하가 있음을 상관하지 않았네(自是當時天帝醉, 不關秦地有山河 - 이상은).”
정교랑이 앞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내시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묻고는,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경고했다.
“궁에서는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면 아니 되오.”
정교랑은 다시 예를 표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리 어렸다니.”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시선을 거두었다.
“저 놀란 것 좀 보게나. 무슨 배포로 그런 일을 꾸민 거야.”
웅성거리던 관료들은 이번에도 어사들이 나서서 경고한 끝에 조용해졌다.
뒤에서 교사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하지.
낭자의 나이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어린 모습에 고능준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확실한 정보임을 거듭 확인하지 않았다면, 고능준은 저런 낭자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나서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 낭자가 그런 도움을 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을 테고.
어쩌면 그래서 유 교리가 방심했다가 일이 틀어졌는지도 모르겠군. 저런 상대라면 실로 만만히 보기 쉽지.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진소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을 때부터 연을 맺은 건가? 뭔가 캐낼 수만 있다면, 도조 이 진인의 제자로 알려진 신의 낭자만으로도 진소를 경성에서 내보낼 수 있을 텐데.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저 낭자는 그런 소문에 대해 시종일관 인정하지 않았고, 명성을 더 날릴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물러났다. 신의 낭자라는 이름만 남겼을 뿐 여기저기 연을 맺은 건 아니어서 꼬투리 잡힐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를 더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더더욱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고능준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일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승기를 잡은 건 확실했다.
조당 앞에 당도했을 무렵, 여인은 관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회랑 아래 한쪽에 서 있었다. 내시가 측문으로 들어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안 군왕은 조당에 서서 전각의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에는 문 위쪽의 꽃문양 투조 장식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 구멍이 뚫린 투조 장식 때문에 겨울엔 더 춥고 여름엔 더 더우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장식이 작은 게 못내 아쉬웠다. 더 많고 더 컸다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텐데.
두려울까? 두렵진 않을 거야.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처음 황궁에 왔던 때도 그랬으니까. 으리으리한 황궁에 호위는 또 어찌나 많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부모가 자신을 황궁 여관(女官)의 품에 맡기고 뒤도 안 돌아보며 떠난 후로,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가장 큰 두려움을 맛보고 나니, 더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저쪽에서 안으로 들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인이 측문을 통해 후당으로 들어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섰다. 조당에서는 여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소리는 잘 들렸다. 몇몇 관료들은 무심결에 장지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서다가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어사들의 눈빛을 보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도조 이 진인을 본 일이 참이냐, 거짓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료들은 그 말에 깜짝 놀랐고, 어사중승조차도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그런 농담을 가장 먼저 꺼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농담이었다.
대황자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흥분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긴장했다.
참이라고 한다면 황제의 안전에서 괴력난신의 헛소리를 늘어놓는 꼴이 되니, 황제가 입을 열지 않아도 관료들이 나서서 끌어내 참형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한 셈이니까.
뭐라고 하려나?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황제의 안전에서 말씀을 올릴 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이 올곧지 못하다는 증거니까.
잠깐 숨 한 번 쉬는 사이, 저쪽에서 벌써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자신에 대해 알 뿐 다른 이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후,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감췄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앞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황제 역시 조정 대신들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이리 어렸다니.
이어 황제는 정교랑의 자태를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는 하나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꿇어앉아 있었다.
조정 중신과 고관대작의 위엄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반인도 그 앞에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천자를 뵙는 자리는 어떻겠는가. 전시를 치르고 급제한 공생들조차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겁에 질리는 탓에 해마다 망신을 당하는 이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저 어린 낭자는 법도에 따라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다고는 하나 자리를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자태는 마음에서 나온다 했으니 과연 대단한 여인이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너 자신의 생각은 어떠하고?”
황제가 물었다.
“소녀가 만난 건 사람이지 신선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역시 스승이 있었군!
장지문 밖의 관료들이 수군거리자, 이번에도 어사가 나서서 호통을 쳤다.
황제는 그 대답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황성사(皇城司)를 통해 경성에 떠도는 풍문을 들은지라 과거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은 일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모르는 것은 진소가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해선 신경을 안 썼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을 제외하고는 그 어린 낭자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네 스승은 어떤 사람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당시 소녀는 의식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진 대인께서 찾아 주지 않으셨다면, 세상에 그런 분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겁니다. 소식을 알았을 무렵 스승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인지라 존함조차 모릅니다. 따끔한 충고 한마디로 소녀에게 경고를 남기셨을 뿐이죠.”
“무슨 말을 남겼는데?”
황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조당에 있는 대신들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또다시 장지문 쪽으로 다가서자 이번엔 어사들도 호통하지 않고 함께 귀를 기울였다.
“‘넌 누구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녀를 의식불명에 이르게 하고 다시는 못 깨어나게 만들 뻔한 그 서찰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그런 서찰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일 터였다.
회복을 기억한 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려 애썼다. 한 번에 딱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양씨 가문을 찾는 일. 양씨 가문을 찾는 일에 매달리는 동안 다른 일이나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것 같았다.
하긴 무슨 소용이랴.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정교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움찔거리다가 가슴에 갖다 대지는 않고 자제했다.
그래.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난 누구지?
대답을 들은 조정 대신들은 멈칫했다.
“무슨 충고가 저래?”
대황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충고가 분명합니다.”
진소가 엄숙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성현이 일생을 바쳐 수많은 경서를 탐독하는 목적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깨닫기 위해서죠.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는 것, 말은 쉬워 보여도 답하긴 어렵고, 행하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대황자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진소는 한때 대황자의 스승이었다. 스승께 불경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지라 대황자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수긍했다.
관료들이 다시 귀를 기울이는데, 장지문 너머 저쪽은 한동안 조용하기만 했다.
“물러가라.”
황제가 말했다. 그 말에 대황자가 멈칫했다.
“말씀도 안 하시고?”
대황자가 중얼거렸다.
소문에 대해 더 말씀하셔야지. 관료들이 싸워대는 소리보다 훨씬 재미있는걸. 이제 시작인데 왜 끝내시는 거야?
이번엔 진소도 대꾸하지 않았다.
“정씨 여인이 괘씸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것만 해도 충분하지요.”
고능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 만백성에게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가 어찌 백성을 선동해 자신을 협박하는 여인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전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악(五惡)의 무리는 도적보다 더 흉악하다 하였습니다. 정씨는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하고,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하니, 저런 자는 절대 쓸 수 없으며 용인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고능준이 간곡하게 말했다.
공자님 말씀!
대황자는 자신이 잘 아는 화제가 나오자 눈빛을 반짝거렸다.
“첫째로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한 것(心達而險), 둘째로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한 것(行僻而堅), 셋째로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言僞而辯), 넷째로 온갖 추악한 일만 기억하면서도 박학다식한 체하는 것(記醜而博), 다섯째로 잘못된 언행을 옹호하고 거기에 분칠까지 하는 것(順非而澤)을 이르지요.”
대황자의 말에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동양의 도서 분류법 중 하나. 경서經書ㆍ사서史書ㆍ제자諸子ㆍ문집文集)에 능통하시지요. 출처며 풀이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니 참으로 명석하십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황자는 뿌듯해하며 도도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불의로 이끄는 자가 바로 악인이지요.”
고능준이 이어 말했다.
조당에 있던 대신들은 둘의 대화를 아까 전처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대신들이 궁금해하던 건 그저 정 낭자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진소는 서북의 주봉상이 몰락하고 나면 또 누굴 보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왕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된 장수들과 관리들을 불러들일 때가 되기도 했고.
고능준의 생각은 벌써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애초에 여인이 황제 앞에서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나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황제 면전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일개 평민이 그런 짓을 한다면 곧장 위병들에게 끌려나가 목숨을 잃을 테니까.
죽으면 더 좋긴 하지. 그럼 그 여인을 노정과 진소에게 속은 자로 몰아가며 백성을 선동한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굳이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진소가 사직을 청할 텐데.
고능준은 진소를 힐끔 쳐다봤지만, 진소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능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장지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이!
고능준은 열불이 치솟았다.
“무엄하오!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가는 겁니까!”
고능준이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당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고능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씨, 너는 그 충고를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이냐? 국법이 지엄하거늘, 불공평한 일을 당해 억울하다면 법도를 지켜 발고해야 하지 않느냐. 너 자신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워 황자조차 고치지 않겠다 했으면서, 조정에서 세운 원칙을 무시하고, 천하의 원칙을 무시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정씨를 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초 의원을 찾아가겠다며 경왕을 데리고 출궁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이가 바로 저 신의 낭자였으니까. 결과 또한 모두가 알았다. 경왕은 여전히 바보였으므로.
듣자니 신의 낭자는 세 가지 원칙을 들어 경왕의 치료를 거절했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후 관료들은 신의 낭자가 원칙 때문에 고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고칠 수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각할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쳤다고 하자니, 상대는 무려 황자였다. 황자의 병을 고친다면 평생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고 근심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원칙이기에 그만한 유혹을 뿌리친단 말인가.
고칠 수 없었다고 하자니…… 과연 믿어도 될까?
아마도 답은 저 낭자의 마음속에만 있겠지.
지금 보니 진안 군왕은 못 믿는 눈치로군. 치료를 거절당한 울분이 떠올라 저리 나서서 호통을 치는 거겠지.
자연히 어사중승도 따라 들어갔다.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간단 말입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고능준이 진안 군왕의 앞을 막으며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렀다.
“폐하 안전에서 어찌 소란을 피우십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어사중승은 도리어 고능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은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라 이자문을 씹어먹을 듯 노려봤다.
“대인들은 뭘 하려는 거요?”
이자문은 고능준을 보지 않고 뒤에 있는 관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혼란을 틈타 구경하러 따라왔던 관료들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얌전히 장지문 밖으로 나갔다.
이자문은 그제야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께서는 어전에서 실례를 보였으니, 신이 불경죄를 물을 것이옵니다.”
이자문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표정에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다른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어나 내시를 따라 나가는 정교랑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넌 원칙을 중시하는 자 아니더냐? 넌 왜 원칙을 지키지 않지? 오늘은 왜 원칙을 어기느냔 말이다. 내 너의 죄를 묻겠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분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소녀는 원칙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교랑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더냐? 원칙을 지킨다면 백성을 선동할 게 아니라 등문고를 두드렸어야지.”
진안 군왕이 냉소를 보였다.
“입 다물고, 썩 물러가십시오!”
어사중승이 소리쳤다.
“난…….”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다!”
어사중승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정씨, 이게 어찌 원칙을 지키는 것이란 말이냐?”
“소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것은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불공평한 일이 하늘에 닿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예상한 대로 소녀의 바람을 눈여겨본 관료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관료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니, 원칙에 따른 게 아닙니까?”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게 뭔지 오늘 제대로 보는군.
고능준은 냉소를 지었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그 불공평한 일은 원칙에 맞는 것이더냐? 전투를 치르려면 사상자가 나오는 건 피할 수 없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어찌하여 너희만 불공평하다며 불복하는 거지?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뭐하러 군에 들어갔느냐?”
“맞아요. 저희는 돈이 있으니 경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굳이 군에 들어갔을까요?”
정교랑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냐? 돈은 충분히 있으니, 명예를 원한다?”
황제가 자발적으로 입을 열다니!
아까는 진안 군왕을 도와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지만, 이번엔 황제 본인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황제의 호기심까지 건드렸군.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보기 마련이지.
이는 고능준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못마땅해야 멀리하고, 멀리해야 더 못마땅해지는 법이니까.
간신히 황제가 괘씸히 여기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저 간사한 여인이 말을 많이 할수록, 듣는 이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가증스러운 진안 군왕 때문이었다. 저 여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다니!
그래. 애초에 진안 군왕한테 원망 따위는 없었어. 진소처럼 신세를 갚은 거지. 어사대에 찾아와 편을 들던 동 내한 같은 사람처럼 신세를 갚은 거야! 저 여인에게 잘 보이면 훗날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면 진소랑 미리 짠 건가? 둘이 언제부터 한통속이었지?
진안 군왕이 감히 대신과 결탁하다니!
순간 고능준의 머릿속이 어수선해졌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듯했다. 귓가에 또다시 그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오라버니들의 바람이었어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탈영병이라는 치욕을 씻으려 했죠. 죽더라도 가치 있게 죽고자 했어요.”
“나라에 충성을 바쳐?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거겠지.”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게 어때서요? 오라버니들은 전선에 나가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그런 공을 탐하는 걸 조정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니, 그럼 조정에서 원하는 건 아무 바람도, 의욕도 없는 병사들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 여인에게 말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고능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렇다면 뭐가 그리 원통하단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불공평하지? 다른 이들은 안 죽었는데 너희만 전사한 게 불공평하다고?”
“아닙니다.”
“살아남은 이는 공을 인정받았으니, 너희도 공을 다퉈야겠다?”
“아닙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이 받은 위로금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많다는 걸 아느냐?”
“압니다.”
“그럼 대체 뭐가 불공평하단 것이냐? 또 무슨 공을 다투겠다는 거지?”
“공이 없는 자도 공을 얻었으니, 공이 있는 자는 당연히 공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있는지 없는지 관부에서 정하는 건 인정할 수 없고, 너희가 정해야만 인정할 수 있단 말이냐?”
“저는 관부를 믿지 않습니다.”
“관부는 널 어찌 믿지?”
“관부와 조정에서 절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믿어야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
“그 일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누군데? 의식을 잃은 덕에 요행히 목숨을 건진 그 오라비 말이냐?”
“네.”
“그자는 너와 가까운 사이이니 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 가까운 사이끼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 주고 숨겨 주는 법인데, 다른 이들이 납득하겠느냐?”
“그렇다면 저와 가깝지 않은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서북에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라면 조정에서도 믿을 수 있겠지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 전각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장지문 저편의 관료들 역시 숨을 죽였다.
어린 낭자가 담력이 대단하네. 폐하의 안전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는 것 좀 봐. 도리어 폐하께서 격노하신 것 같네. 그러니 저리 묻고 답하고 했겠지.
“서북에도 맛좋은 술이 있는 것이냐?”
황제가 말했다.
비꼬는 말이잖아!
“없습니다.”
정교랑의 표정과 목소리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믿으실 수 있겠지요?”
협박을 하다니!
황제가 눈앞의 여인을 빤히 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장지문 너머의 진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짐은 믿을 수 있다. 한데, 너는 서북에서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소녀도 믿습니다. 서북의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 제 오라비들이 받아 충분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죽음에 전혀 억울한 게 없다고 밝혀지면, 만백성을 부추겨 하소연한 만큼 이번에도 소녀가 만백성에게 알리겠습니다.”
“뭘 어찌 알리겠단 것이냐?”
황제가 냉랭하게 물었다.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는 벌을 받겠습니다.”
정교랑의 대답에 모두가 멈칫했다. 고능준조차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번개를 불러 죽어? 벼락을 맞겠다고?
그것도 벌이긴 벌이지. 자고로 극악무도한 자만이 벼락에 맞아 죽는 법이니까. 벼락에 맞아 죽는다면 만백성이 납득할 것이다.
그런데,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게…….
“언제 번개가 칠지 누가 알고 네가 벼락에 맞게 한단 말이냐? 번개가 치지 않고, 네가 벼락에 맞아 죽지 않으면, 그건 하늘의 잘못이지 너와 무관하다는 뜻 아니냐?”
고능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말하니 정 낭자가 정말 도교 이 진인의 제자 같군. 자결하는 방법조차 저리 심오하다니.”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있었다.
“대인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소녀는 천문을 익혀 언제 번개가 치는지, 어떻게 해야 벼락에 맞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고능준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교묘한 술수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도 모자라 이제는 비바람까지 부를 수 있다니.
보통 미친 여인이 아니야!
서북 쪽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황제 앞에서 저리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니 이젠 죽은 목숨이리라.
고능준은 눈앞의 여인을 다시 봤다. 전각 밖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힐끔 본 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꽃다운 미모의 십 대 소녀가 단정하게 서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능준의 시선이 소녀의 두 눈으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땐 아름다워 보이더니 다시 보자 어두워 보이고 세 번째 봤을 땐 심오하여 속을 알 수 없어 보였다.
저건 결코 어린 낭자의 눈이 아닌데. 정말 신선이라도 만났나?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저렇게 건방진 배짱이 나오지? 진소를 믿고 저러나?
“윤허하노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천자의 말이 갖는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삼고구배(三叩九拜: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함)의 예를 올렸다. 그 행동이 어찌나 침착하고 올바른지 깐깐한 어사중승조차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구중궁궐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내시의 시선은 몇 번이나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네. 어린 낭자의 발걸음이 저리 안정적일 수가. 입궁할 때도 흐트러짐이 없더니, 출궁할 때도 마찬가지야.
내시들은 벌써 전각 안에서 일어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저 낭자가 감히 폐하 앞에서 도박을 걸었단 말이지? 그것도 목숨을 건 도박을.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군. 아니 할 말로 이 세상 만물의 목숨은 전부 천자의 손아귀에 있지 않던가. 애초에 도박이라고 할 것도 없지.
“낭자,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요?”
내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정교랑은 내시를 힐끔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얼씨구, 어린 낭자가 웃기까지 하네.
“정의를 믿거든요.”
“정의?”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정의라……. 천하에 자신만 정의고, 다른 정의는 없다는 건가?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탁자로 집어 던졌다.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 황제가 불쑥 물었다. 내시 하나가 앞으로 나와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말해라.”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군왕께서는…… 산에 앉아 계십니다.”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왕에게 일이 생긴 후, 황궁에서 매산은 금기어가 되어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경왕이 매화를 꺾으려다가 사고를 당했기에, 다들 매화의 매 자도 입에 올리지 못했고, 각 궁에서도 감히 매화를 놓아두는 이는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손을 내젓자,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겹겹의 휘장이 아래로 내려졌다.
“어린 낭자의 배포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폐하를 압박할 정도로 큰 줄은 몰랐습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일 정도입니다.”
진소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살길을 조금도 남겨 두지 않으니 말이죠.”
“그 낭자는 언제나 살길을 열고자 싸워 오지 않았느냐. 번개를 불러들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남의 살길을 빼앗고 자신의 살길을 쟁취하며 기사회생했지. 태평거에선 대낮에 사람 다섯을 죽이기까지 했어.”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뒤쪽의 병풍을 바라보았다.
“유 교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장강주를 설득했으며, 역참에서는 탐관오리를 활로 쏴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부친의 가문을 무너뜨렸다. 일거수일투족, 언행 하나하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어. 강경하고 인정사정없으며 늘 필사의 각오로 덤비는 성격이야. 근래 들어 두 해 동안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은둔하고 있었다 해서 벌써 잊은 것이냐?”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잊고 싶어 잊은 게 아니라, 그 낭자의 모습을 보자 다 잊고 말았다. 아니,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어리고 단정하며 말수까지 적은, 우아한 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규방 여인의 모습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그녀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그저 손을 쓸 뿐이었다.
2년간 은둔하며 지낸 후 문을 나서자마자 대사로 추앙받는 승려를 참살하더니, 경성에 당도하자마자 풍파를 일으켰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낭자였다. 원칙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누구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게 맹수든 힘없는 벌레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때려죽이고 박살을 내는 게 그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독한 사람이었다.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번엔 자신의 살길을 끊어 버렸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살길이 끊어질지 모르겠네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어 서북 방향을 쳐다봤다.
“서북 쪽엔 얼마나 자신 있느냐? 정 낭자는 서북에 있지 않으니 경성과는 또 다를 거야. 정 낭자의 손이 거기까지 닿진 않을 테고, 거기서 세력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거짓으로 누군가와 손을 잡기엔 변수가 너무 많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자신은 없는데, 제 생각엔 정 낭자가 승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진소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두 부자가 서북쪽을 쳐다보던 시각, 경성에선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봤다.
이번 일의 성패는 서북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