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보-
경성에서 온 급보를 강문원 한 사람만 받은 건 아니었다. 감찰사 직위에 있는 주봉상도 받았다.
“성지를 받듭니다.”
주봉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주봉상은 황제의 조서를 받으며 흥분했다.
2년만이구나. 서북 감찰사 자리에서 곧 쫓겨날 것 같은 이때, 드디어 직무를 이행할 기회가 왔어.
물론 황제가 대놓고 강문원을 질책한 것은 아니었다. 노정의 탄핵 상소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황제가 내린 조서에는 서북 무원산 형제의 전공에 대해 조사하라는 내용만 언급되어 있었다.
게다가 황제는 강문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주봉상에게 조사를 명하긴 했지만, 그 문서는 강문원의 손을 거쳐야 했다. 강문원의 손을 거친다면 그가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물론 주봉상이 조사를 통해 정말 무언가를 밝혀낸다면, 강문원도 막을 도리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주봉상에게 이번 일은 엄청난 기회였다. 주봉상과 강문원 중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지 결정할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에 거취가 결정되면 서북 군영에 관련된 모든 이들의 인사 변동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이는 또다시 2년 전 왕보당 사건 때로 돌아간 것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무원산 형제들의 생사가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2년 전에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운명이라는 게 참으로 재미있구나.
주봉상은 넋이 나간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청에서 막료들이 떠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주봉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가 오늘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강문원이 조정에서 내리는 상을 거절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그는 뭔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감했다. 하지만 관료가 탄핵으로 공격을 당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닌지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연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상이 내려왔고, 훨씬 더 화려한 미사여구로 칭찬을 늘어놓기까지 한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탄핵을 당하고,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했다니. 철저히 파헤치라는 명이 내려온 건 아니지만, 이제 막 공로에 대한 표창을 받은 서북 군영으로서는 무거운 벌이 아닐 수 없었다.
“대인, 주 도감에게 확인했는데, 주 도감도 이 일을 몰랐답니다. 거짓을 말하는 표정 같진 않았습니다.”
막료 하나가 말했다. 주봉상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무원산 다섯 형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북에서 그 다섯 명을 위해 나선 이는 주씨 집안의 육낭뿐이었다. 주육낭은 서북에서 강문원의 눈 밖에 나게 된 바람에 울분을 삼키며 경성으로 돌아갔다.
경성에서는 강문원이 막지 않으니 만백성이 나와 영령을 맞이하게 하는 재주를 부릴 수 있었을 테고, 죽기 직전의 노정이 이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을 것이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진 덕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다.
처음엔 별 뜻 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리라. 아마 경성의 주씨 가문조차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겠지. 그러니 이곳의 주씨 일족은 더더욱 알 턱이 없을 테고.
물론 주씨 가문 전체가 공모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주씨 집안에서 대놓고 인정할 리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 일을 노정 같은 이가 계획했을 리는 없었다. 주육낭과 강문원 사이에 틈이 생긴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강문원이 서북에서 입지를 굳힌다면, 주씨 가문으로서는 좋은 날이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게 된 마당이니 작정하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인, 주씨 가문과 관계가 있긴 한데, 분명 주육낭이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막료가 손에 들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제의 성지와 함께 각자 경성에 심어 둔 밀정과 친구들이 보낸 서찰도 도착했다. 황제의 성지만으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주봉상 쪽뿐만 아니라 강문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청에 있던 이들이 주봉상을 바라봤다.
“주씨 가문의 생질녀가 무원산 형제들과 의남매를 맺었답니다.”
막료가 손에 든 서찰을 내밀며 말했다.
의남매? 일개 여인이 그런 일을?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원산 형제들이 부자라는 소문은 다들 들으셨지요?”
막료의 말에 저쪽에서 서찰을 들고 쳐다보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무슨 점포를 운영하는 주인이라던데, 워낙 터무니없는 소문이어서.”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주인이 맞았어요. 그것도 아주 유명한 점포였습니다.”
막료가 말을 이었다.
“바로 태평거입니다.”
‘태평거’라는 이름이 나오자 대청에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 웅성거렸다.
주봉상은 경성 사람이 아니지만, 임명을 기다리며 한동안 경성에서 지낸 터라 태평 두부나 태평거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긴 보통 인기 있는 곳이 아닌데. 참, 그러고 보니 그 다섯 사람을 태평거에서 체포했다고 했어. 그때만 해도 놈들한텐 관심이 없었기에 거기서 점원이나 잡역부로 일하는 줄 알았지. 그런 관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무원산 형제들은 통이 크다는 소문이 그래서 나왔군.
“그들과 의남매를 맺은 누이가 바로 태평거의 진짜 주인인 행수랍니다.”
막료가 말했다.
“주씨 가문이 아니고? 어린 여인이 홀로 이룬 사업이다?”
누군가가 놀라 물었다. 막료가 고개를 내저으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서찰을 보던 막료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주씨 가문이 아닙니다. 관부에 등록된 문서도 확인을 마쳤답니다. 하긴 주씨 가문에서 일개 생질녀를 주인으로 내세울 리는 없잖습니까. 이치상 안 맞지요. 아니, 그런데…… 태평거뿐만이 아닙니다.”
막료가 서찰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선거도 그렇다네요.”
다들 더욱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막료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춘당도 그렇고요. 이제 보니 진소의 부친을 고치고 죽어가던 동 내한을 살리며,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치고, 목숨을 구하려면 만 관을 내놓아야 한다던 신의 낭자가…….”
막료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러면 말이 되지요! 그 여인이 그런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 주씨 가문이 아니라!”
대청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 서찰을 보려고 한데 뒤엉켜 실랑이를 벌였다. 막료들이 그런 추태를 보이는데도 주봉상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주봉상 본인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주봉상의 귓가에 막료들이 늘어놓던 말들이 메아리쳤다. 주봉상은 서찰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수군거리는 이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이고, 세상에나.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의 행수.
진소의 부친을 고쳐 진소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 주고, 동 내한을 살려낸 신의 낭자.
그게 무원산 형제들의 누이였다니!
아이고, 세상에. 어쩐지…….
후회하지 마십시오! 후회하지 마십시오!
주봉상은 그 소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강문원한테 대고 그런 말을 하다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겐 철없고 치기 어린 말로 들릴 뿐이었다.
이제 보니 욱해서 홧김에 한 말이 아니었군. 믿는 구석이 있어 한 말이었어.
“왜 사서 고생을 하지?”
주봉상이 중얼거렸다.
“그런 누이가 있는데, 뭐하러 군에 들어오고 난리야.”
급보로 인해 여러 사람이 분노하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목이 빠지게 급보를 기다리던 서사근은 도리어 평온한 모습이었다.
목간 마구간에서 온종일 공무, 그러니까 말편자를 박는 일을 마치고 나자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사근은 물을 끼얹어 몸을 씻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문을 나섰다. 그는 거리에서 술을 두 병을 사고, 사탕 같은 주전부리도 사서 한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서사근은 구불거리는 길을 돌고 돌아 어느 골목에 들어섰다.
어느 집 앞에서 꼬마 셋이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서사근이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불렀다.
“유강 형님.”
마당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도리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 또 왔어. 서사근, 그만 돌아가. 그 일에 대해선 정말 모른다니까. 할 말도 없고.”
서사근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에 든 술을 대문 앞에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술을 좀 샀는데 같이 마실 사람도 없고 해서요. 어쨌든 형님은 내 형제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분 아닙니까. 그래서 얼굴이나 볼까 하고 왔어요.”
말을 마친 서사근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자리를 떴다.
마당에 서 있던 사내는 떠나는 서사근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집 안에서 아낙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여보, 또 서사근이 온 거예요?”
아낙의 물음에 사내는 응 하고 대꾸했다. 아낙이 한숨을 쉬었다.
“가엾긴 한데…….”
“가엾긴 뭐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었다.
“전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죄다 가엾단 거야? 군에 입대했으면 언젠가는 죽을 날도 있으려니 해야지, 가여울 게 뭐 있어!”
사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아낙이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날이 올 걸 아니까 가엾다는 거죠.”
이번에는 전처럼 고개를 숙인 채 고분고분 물러서지 않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들고 받아쳤다.
“군에 입대한 이상 그런 날이 올 걸 아니까 가엾다는 거라고요. 죽어도 헛죽은 거잖아요. 남한테 모함이나 당하고. 처자식은 편히 살지도 못해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이에요. 그래서 가엾단 거예요. 오늘 우리가 저 사람들을 가여워하지 않으면, 내일 누가 우릴 가엾이 여기겠어요!”
사내는 아낙이 악을 쓰며 따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화를 내려고 해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사내는 소리를 빽 지르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낙은 분하다는 얼굴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대문 옆에 놓인 술 두 병이 보이자, 아낙은 냉큼 가서 술을 집어 들었다.
“숨겨 줘 봤자 좋을 게 뭐 있다고. 말단 병졸에서 한 계급 오르면 뭐해. 신세 진 거 두고두고 기억하며 남들 눈치도 봐야 하는데. 차라리…….”
아낙이 중얼거리며 밖을 내다봤다. 서사근의 모습은 이미 골목에서 사라진 후였다.
“차라리 은혜를 베푸는 게 낫지. 돈도 시원시원하게 쓰는 사람인데.”
아낙은 중얼거리며 손에 든 술을 보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기뻐하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큰애야, 가서 양뼈 좀 사 와. 어미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아낙이 아이에게 뼈를 사 오라고 할 무렵, 서사근은 또 다른 집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골목에 서서, 대문 밖에 나와 놀고 있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서사근이 익숙한지 손길을 피하지 않고 헤헤 웃었다. 대문 앞에는 아낙 둘이 있었다. 젊은 아낙은 서사근을 보자마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쫓아내려 했지만, 나이 든 아낙이 손을 뻗으며 붙잡았다.
“어머니, 우릴 원망하는 마음에 저 사람이 욱해서 애한테 무슨 짓이라도…….”
젊은 아낙이 초조해하자 나이 든 아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엔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애한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야. 우릴 해칠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나이 든 아낙이 골목을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 아낙도 불안한 눈길로 골목을 쳐다봤다.
서사근이 쪼그리고 앉아 꼬마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사근이 웃자 아이도 따라 웃었다. 그러자 서사근이 바구니에서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사탕을 흔들며 친구들한테 나눠 주러 갔다.
서사근은 골목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따라서 껄껄 웃었다.
“듣자니 그 죽은 이한테도 애가 하나 있다던데…….”
나이 든 아낙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젊은 아낙은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젊은 아낙은 불안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듯했다. 나이 든 아낙은 그런 젊은 아낙을 힐끔 보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젊은 아낙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부르려 했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서사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젊은 아낙은 입을 열다 말고 다시 다물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서사근의 바구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서사근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목감의 마구간 앞에 서 있었다. 요즘 서사근은 이곳에서 기거했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사람들이 대여섯 명쯤 우르르 나왔다.
“서사근, 강 대인께서 물어볼 게 있으시다. 우리랑 같이 가야겠다.”
우두머리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서사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장 따라나섰다. 주변 여기저기에서 여러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물어보라지. 말해 줄 테니까. 도리어 물어보지 않는 게 겁나지. 말할 기회가 없을까 봐.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봐 겁날 뿐이라고.
서북에서 조사를 시작할 무렵, 경성의 어사대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불려 왔다.
“어떻게 됐소? 말했소이까?”
“아주 활기차더군. 어제는 시까지 한 수 지었다니까.”
“그 자식이 생각보다 고집이 있네. 길어야 사흘이면 울고불고하며 유서를 쓸 줄 알았더니만.”
어사대 사람들이 모여 농담을 나누던 그때, 밖에서 몇 사람이 굳은 얼굴로 급히 들어왔다. 다들 얼른 하던 얘기를 멈추고 자세를 고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관청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누굴 잡아 온 거지?”
막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안에서 또 몇 사람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라 해라.”
어사 하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단 관리에게 말했다. 말단 관리가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흥분하며 그들을 지켜봤다.
마차가 관청들이 늘어선 거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화려하다기보다는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이었지만 장엄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는 내내 보이는 건물은 대체로 비슷해 보였다. 다만 마차가 멈춰 선 건물은 문이 남쪽을 향해 열려 있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문이 북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범강림이 뒤에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반근이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을 부축했다.
“누이, 누이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내가 전하면 되니까.”
정교랑이 손으로 멱리 한쪽을 들어 올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장에서 피 흘려 싸운 건 오라버니가 한 일이니 오라버니가 말해요. 오라버니들을 영접하고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건 내가 한 일에요. 내가 한 일이면 내가 말해야죠. 우린 우리가 한 일을 말하면 돼요. 저들이 알까 봐 두려워할 일도 아니고, 걱정할 것도 없어요.”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같이 가.”
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서 몇 사람이 급히 나오며 이들과 부딪쳤다. 범강림이 재빨리 정교랑을 붙잡아 주고는 분노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정교랑이 범강림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냐? 여기가 어딘지 몰라? 문을 막고 뭐 하는 거야?”
되레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 황궁의 내시들이었다. 범강림과 정교랑은 한발 물러서며, 그들이 먼저 지나가도록 했다.
“괜찮아?”
범강림이 물었다. 정교랑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손으로 멱리를 들었다. 그러자 방금 지나간 내시 중 하나가 안으로 찔러 넣어 준 쪽지가 보였다. 정교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쪽지를 펼쳤다.
정방, 슬퍼하지 마요.
“누이?”
범강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걱정스럽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교랑은 쪽지를 고이 접어 소매 속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가죠.”
정교랑이 말했다.
“노야.”
주 노야의 서재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부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흥분한 표정으로 들어온 주 부인이 주 노야와 주육낭의 말을 끊었다.
주 부인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탁자에는 상소문을 쓸 종이가 놓여 있었고, 주 노야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
“뭘 쓰려고요? 대체 뭘 쓰게!”
주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아녀자가 이 무슨 짓이오?”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탄핵 상소를 쓰려는 거죠? 그걸 써서 뭐 하게요? 거리에 인심이 흉흉해요. 노정의 일로 불똥이 튀어 어사대에서 잡으러 올까 봐 벌벌 떤다고요. 내가 다 알아봤어요. 전부 다 그 애가 한 짓이라고 밝히고, 우리는 선을 확실히 그어야죠. 왜 죽을 길을 스스로 찾아가려는 거예요!”
주 부인이 악을 썼다.
“어머니, 그리 심각한 건…….”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부인은 주육낭의 따귀를 후려쳤다. 주 노야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재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을 세우라고 서북에 보낸 거야. 그 여인을 위해 집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라고 보낸 게 아니라!”
주 부인이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주 노야가 분통을 터트렸다. 따귀를 맞은 건 아들이지만, 이는 주 노야의 얼굴에 따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 노야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육낭이 왜 이러는지는 알아요. 너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렇게 나서서 입을 열었겠어?”
잠시 침묵하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거봐, 아니라면서 무슨…….”
주 부인은 기가 막혔다. 주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육낭이 말을 잘랐다.
“어머니, 그 여인이 아니라 정교랑입니다. 고모님의 딸이고, 우리 주씨 가문의 친족이라고요. 우리는 평생 그 애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요. 정교랑이 잘되면 우리도 함께 영광을 누리고, 정교랑이 잘못되면 우리도 좋을 게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선을 그으려 해도 그을 수 없어요. 지금은 그럭저럭 넘어가더라도, 훗날 숙청되고 말 겁니다.”
“그렇게까지 될 일도 아닌데, 기어이 그 애 옆에 붙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주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둘 다 아쉬우니 그런 거잖아. 그냥 포기하면 그만인데. 버리면 그뿐이야.”
“어머니, 염려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육낭이 앞으로 다가가 주 부인 옆에 꿇어앉았다.
“어떻게 아무 일이 없어?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괜히 칼잡이로 쓰이는 거야. 누가 이기든 백성을 부추기고 선동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텐데, 조정에서 그런 자를 가만두겠어?”
주 부인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주육낭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그걸 아시네요.”
“지금 웃음이 나와?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경성에서 지낸 게 몇 년인데.”
주육낭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정교랑은 칼이 아니라, 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칼로 자기편을 해칠 리 없어요.”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주씨 저택과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궁은 더욱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어젯밤에 늦게 잔 데다 아침을 먹은 후 마당을 뛰어다니며 한바탕 공놀이까지 한 경왕은 피곤한지 또 자러 갔다.
경왕이 자는 시간은 진안 군왕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서책을 들고 탁자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전각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기울이던 진안 군왕은 아예 서책을 내팽개치고 회랑 아래로 나왔다.
“전하, 나가려 하십니까?”
수행하는 내시가 물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젓고,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잠자코 바깥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과묵한 진안 군왕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8월 말에서 9월 초의 서늘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그때 전각 밖에 내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시는 손에 상소문을 들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종육품 내시관이었다. 그가 오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곧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전하, 폐하께서 전하께 상소문을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내시가 뒤따라 들어가자 문밖에 있던 내시가 문을 닫아 주었다.
“그 여인은 봤는가?”
진안 군왕이 돌아서며 물었다. 내시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었다.
“전하, 소인이 하는 일인데도 마음이 안 놓이십니까?”
내시가 상소문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마시고 우선 이것부터 보시지요.”
그러고는 수다스러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하, 이러시는 거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지난번에도 폐하 안전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가 다른 이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또 무슨 약점이라도 잡히면 큰일입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손을 뻗어 상소문을 받았다.
“큰일 나면 나라지.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다시 재촉했다.
“어떻게 됐는가? 그 낭자를 보긴 했어?”
“봤습니다.”
“전해 줬고?”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내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던가? 슬퍼했어? 아니지, 아니지. 슬퍼도 겉으로 드러낼 사람이 아니야. 그럼…… 그 낭자가, 어때 보였는가?”
소년이 밝은 얼굴로 두서없는 질문을 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전하, 어린 낭자가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목적지는 어사대였고요. 얼굴을 안 가렸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수고했네, 공공.”
진안 군왕이 입을 다물자 도리어 내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전하, 겁내지는 않더냐고 물으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은 웃으며 탁자 앞에 앉아 상소를 펼쳤다.
“겁낼 여인이 아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거든. 그저…… 가끔 좀 슬플 뿐이지.”
내시가 천천히 물러나 문을 닫았다.
한편 같은 시각 어사대.
단상에 앉은 어사가 아래에 선 이들을 보며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 같은 평민 신분으로 여기 선 이는 너희가 처음이다. 여긴 관료들만 올 수 있는 곳이거든. 그러니 영광인 줄 알아라.”
물론 이런 영광을 원하는 이는 없겠지만.
웃음기를 거둔 어사가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범강림, 네 죄를 알렷다!”
“소생은 모릅니다.”
“노정과 어떻게 아는 사이지?”
“소생은 모르는 이입니다.”
어사대 대청에서 묻고 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는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들으려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북향으로 지어진지라 어사대 관청의 실내는 대체로 어두웠다.
자리에 앉은 어사중승은 오늘 어사대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인, 동 내한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키 크고 풍채 좋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자문(子文) 아우, 오랜만일세.”
어두운 실내에 쾌활한 사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어사중승의 관직이 동 내한보다 높지만, 어사중승 역시 한림원 학사 출신인지라 동 내한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다만 어사중승의 자리가 자리다 보니 다른 신료들과 조금 소원해졌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자문은 동 내한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이 드릴 말씀입니다. 중정(中正) 형님은 요즘 얼굴 한번 뵙기 힘듭니다그려.”
“내가 몸이 좀 안 좋았잖나.”
동 내한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동 내한은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한참 만에 본론을 꺼내던 이전 두 사람과 달리 동 내한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사중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사대에서 조금 떨어진 관청 안에 있는 고능준 역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창피해할 일도 아니지. 진시황이나 한무제도 신선이 되는 방법을 구하려 하지 않았던가. 신의 낭자가 바로 눈앞에 있어. 허황된 소문이 아니라고. 그러니 다들 공손하게 대할 만도 하지.”
고능준의 말에 측근들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고능준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를 탁자로 집어 던지며 말을 이었다.
“와서 편들어 줄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 거리에 나가 소문을 내게. 무려 신의 낭자를 붙잡아 왔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나.”
측근들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어사대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각종 추측과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소문 들었어? 정 낭자가 잡혀갔대.”
“이렇게 원통한 일이 있나. 전사한 이들한테 공로를 챙겨 주지는 못할망정, 가족이며 지인들한테도 화를 입히다니.”
“신의 낭자는 도조 진인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데,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
“가세. 어서 구경하러 가자고. 도조 진인께서 현현하실지 몰라.”
누가 먼저 제안한 건지 찻집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분명 고능준의 사람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린 거야.”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큰일이군. 신선이 부처니 하는 말로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그러길래 병을 고치지 말았어야지!”
주육낭이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세 가지 원칙을 세운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세상만사는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순 없는 법이지. 그땐 병을 고치는 일로 그 여인이 득을 본 게 더 많아.”
“그럼 지금은?”
주육낭이 물었다.
전사한 다섯 형제에 대해 만백성이 울분을 터트리고 욕을 해대는 건 황제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백성이 신의 낭자를 떠받들고 추앙한다면 황제의 눈에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씨 가문과 팽씨 가문에 이어 수많은 이가 어사대로 달려가 음으로 양으로 사정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진소가 말했다.
“이번 일을 노정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게지. 정 낭자 일행은 노정한테 이용당했을 뿐이니,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건가?”
진 노태야의 물음에 진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버지도 어서 가서 정 낭자를 도와주세요.”
진십팔랑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소가 진십팔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능준도 그리 생각할 거다.”
진십팔랑은 멈칫하며,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은혜를 입으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기 마련이지.”
진 노태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천자께서 가장 겁내는 게 바로 은혜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건 천자 한 사람뿐이어야 했다. 누구든 그 일을 함께 나누려 들면…….
“그 낭자가 단칼에 베어 버린 영덕 대사처럼 조만간 누군가의 칼에 목이 잘리겠죠.”
진소가 말했다.
영덕 대사는 또 누구지? 사람은 또 언제 죽인 거야?
진십팔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부친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번 일이 정말 그렇게까지 커진 건가? 그냥 의남매들의 장례를 치르고 안장한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인지상정인데.
“이게 바로 앞으로 나선 결과다.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널 볼 수 없어.”
진소가 말했다.
“그 말은 틀렸다. 사람이 평생 뒤에 숨은 채로 살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나섰다면, 나설 만큼 자신감이 있어서겠지.”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일인데 천천히 말하면 뭐 어떻습니까. 꼭 이렇게 급히 움직여야 했느냔 말입니다.”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은 큰일의 가치가 있고, 작은 일 역시 작은 일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값지다 여겨지면 값진 것이지.”
진 노태야가 말했다. 진소는 웃으며 진 노태야에게 예를 올렸다.
“그럼 소자는 값진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부친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십팔랑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부님, 이렇게 큰 일을 정말 정 낭자가 일부러 벌였단 말씀이세요? 정말 담도 크네요.”
“때로는 더 이상 퇴로가 없을 때 담이 커지기도 하지.”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러워할 것 없다. 가능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길 바랄 이가 있겠느냐. 정 낭자는 속으로 널 부러워할지도 몰라.”
“절 부러워할 게 뭐 있다고요. 전 정 낭자와 비교도 안 되는걸요.”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있는 것이 정 낭자에겐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정 낭자에겐 있고 너에겐 없는 것을 네가 부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사람은 누구나 남이 부러워할 만한 걸 갖고 있어. 남들이 가진 걸 보지 말고 남들이 못 가진 걸 더 많이 보도록 해라. 그래야 늘 자비심을 품고 살 수 있느니라.”
나에겐 있고 정 낭자에겐 없는 것이라…….
문밖에서 자매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바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슬픈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본디 가진 것도 없는데 그나마도 빼앗겼어요. 저였다 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만있지 않았을 거예요.”
진십팔랑이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작은 일이라 해도 정의로운 일이고 정에 관한 일이라면 그건 작은 일이 아니죠. 더없이 큰 일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려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조부님, 폐하께 올릴 글에 뭘 써야 할지 떠올랐어요.”
진 노태야는 흠칫 놀랐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허튼짓할 생각은 접어라. 능히 할 수 있는 바를 하는 게 값진 것이다.”
“조부님, 괜한 생각이세요. 불경을 필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진십팔랑이 웃자 진 노태야도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아비만 걸핏하면 깜짝깜짝 놀라는 줄 알았더니, 나까지 너희 어린 낭자들 때문에 놀라는구나.”
“범강림, 네가 이런 일들을 했느냐?”
관리가 건넨 기록을 보며 어사가 물었다.
“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노정은 어떻게 끌어들인 것이냐?”
어사가 물었다.
“대인,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저는 제 형제들을 경성으로 데려와 안장했을 뿐입니다.”
범강림의 말에 어사가 냉소를 지었다.
“너희는 무원산 사람이 아니냐. 너희 본적지가 경성도 아닌데 한 달이나 걸려 이곳까지 데려와 안장한다고?”
어사가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말해라. 누구의 연줄이더냐. 누가 계획한 일이고, 누가 백성을 불러모았느냔 말이다!”
“저예요.”
범강림은 말없이 있는데, 대청에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사의 시선이 한쪽 옆에 서 있던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아니, 사실 시선은 줄곧 여인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 낭자가 그 신의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 도조의 제자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보수사에서 보물로 떠받드는 그 두부도, 경성에서 꽤나 유명한 과로신선도……. 전부 주씨 가문의 것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이 여인 뒤에 있는 건 대체 누구지?
여인의 부계(父系) 친족에 대해 알아보고, 가장(家狀: 집안 조상과 형제의 행정에 관한 기록)도 살펴봤지만 딱히 알아낸 건 없었다. 계속해서 더 알아보는 수밖에.
어린 낭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단상 위를 향해 살짝 몸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네가? 네가 뭘 어째?”
어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오라버니들을 경성으로 데려와 안장하고, 제가 사람을 시켜 노제를 지내고, 제가 술을 나눠 주며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아주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어사가 경당목을 들어 내리치려고 꽉 쥐었다.
“제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어요. 제가 그렇게 한 거죠.”
정교랑이 어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사는 미인의 미소에 넋이 나간 게 아니었다. 미인의 말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사가 얼른 경당목을 들어 내리쳤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제가 키웠다고요. 제가 하늘까지 닿도록 일을 키웠단 말입니다.”
경성 백성들이 분노하고 울분을 터트리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로군.
방금 전 사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묻기도 전에 줄줄이 인정하니, 도리어 어사가 멈칫했다.
“왜 그랬느냐?”
어사가 물었다.
“공을 다투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사대는 곧 조용해졌다. 시끄러워진 건 이튿날 조당이었다.
“……고능준은 권력을 전횡하며 조정 대신들이 사정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강문원 등의 무리는 기고만장하여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며 공이 있는 자에게도 상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폐하, 조천하(曹川河)에서 흘린 치욕스러운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대조회(大朝會)가 열리는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형식적으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어사 하나가 고능준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어사는 흥분한 표정으로 격앙된 언사를 내뱉었다. 하마터면 고능준의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욕설까지 해댈 뻔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대전에 어사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건 천자의 눈에도 보였다. 좋은 구경거리를 보게 된 흥분, 기회를 봐서 끼어들겠다는 흥분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천자의 시선이 자꾸만 진소와 고능준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진흙으로 만든 토기 인형처럼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누구 생각이지? 고능준이 스스로를 욕보이며 한발 물러서는 건가? 아니면 진소가 이판사판으로 물고 늘어지는 건가?
둘 중 누구든 황제의 눈에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이게 다 그 장례 행렬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신의 낭자라고 했던가…….
“조당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는데도 어사중승께선 보고만 계실 겁니까?”
조정 대신 중 하나가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나섰다. 옆에 앉아 있던 어사중승이 냉랭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풍문을 듣고 천자께 아뢰는 일은 어사의 직무이니, 다른 조정 대신들의 예를 똑같이 적용할 순 없을 것이외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 조정 대신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물러서시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앞으로 나섰던 조정 대신은 분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쪽에서는 어사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고능준은 배움이 짧고 무능한데도 요행히 조당에 자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데도 천자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다는 등의 내용으로 옮겨갔다.
“노정의 일을 조사한 건 어찌 되었소?”
계속 내버려 두었다간 조당이 더 엉망진창이 될 것임을 아는 황제가 입을 열며 어사의 말을 끊었다.
대조회에서 황제가 직접 노정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황제가 노정의 탄핵을 받아들였다는 뜻과 같았다. 진소를 힐끔 쳐다보는 고능준의 눈길에 분노의 빛이 스쳤다.
황제가 조정 대신들 앞에서 입을 연 덕에 대조회는 그럭저럭 절차대로 진행된 끝에 해산했다. 이어 조금 더 관직이 높은 대신들이 다른 전각으로 옮겨가 정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서북 무원산 형제들의 친척을 불러 조사를 마쳤습니다. 어사대에서 지금 글로 정리 중이고요.”
어사중승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이 대인, 어제 어사대를 찾아온 이가 모두 몇 명이었소?”
고능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일곱 명입니다.”
어사중승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조금도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중 정 낭자를 위해 찾아온 이는 모두 몇 명이었고?”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물론 고능준 본인도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답은 어사중승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 효과가 훨씬 컸다. 이자문은 가까이 지내는 이가 없이 외로운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러한 점이 더 유용하게 작용했다.
“전부 다였습니다.”
어사중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 낭자가 가진 신의의 비술이 대단하긴 하구려. 그리 인심을 얻었으니 말이오.”
고능준이 웃으며 황제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