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60)

-그림-

본디 거리의 열기는 거리에서 그치고 으리으리한 저택의 안방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택에 사는 이들도 그 어느 때보다 빨리 그 열기를 알았다.

저택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하늘을 가득 수놓던 불꽃이 사그라들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못내 아쉬워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노야, 노야, 확실히 알아봤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봤어요.”

수많은 저택에서 사환들이 같은 말을 외쳐댔다. 사환의 말을 들은 진소는 놀라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다가 끝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인이었군.”

진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계절을 다 겪은 듯한 표정 변화를 보인 후, 그 말 한마디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면 진소 부인은 시종일관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정 낭자가 돌아온 거였구나. 노야, 정 낭자가 정말 돌아왔어요.”

흥분한 진소 부인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소. 돌아왔구려.”

사실 정 낭자가 안 돌아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다면 모를까,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정 낭자는 그 어느 때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발을 들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던 그녀였다.

“노야, 그것 봐요.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준비를 많이 한 걸 보면 진작 돌아왔던 거예요. 그런데도 이 일에 관해 누굴 찾아가 부탁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저 조용히 슬픔을 억누르며 안장했을 뿐이죠.”

진소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소는 고개를 돌려 부인을 바라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이게 조용히라고? 두 번 조용했다간 놀라 죽겠군. 까딱하다간 사람을 잡겠어!

정 낭자가 나섰다 하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아는 진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찾아오지 않았지. 그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고.

진소 부인은 장례에 뭐라도 보내야겠다며 옆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댔지만, 진소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진소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다. 떠들썩한 거리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 오늘뿐이랴. 내일도, 모레도 떠들썩하겠지. 입에서 입으로 얘기가 전해지며 과장에 과장이 얹어질 테고.

“여봐라.”

진소가 고개를 들어 외치며 진소 부인의 말을 끊었다. 사환이 들어오며 대답했다.

“노사안이 떠났는지 알아보거라.”

진소가 말했다.

진 노태야는 여전히 회랑 아래에 서서 목이 꺾이도록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진단랑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만 보거라, 단랑. 그러다 목 아플라.”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진단랑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을 간신히 거둬들였다.

“할아버지, 우리도 얼른 폭죽 사러 가요. 저런 폭죽 살래요.”

다급한 진단랑의 목소리에 진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든 다 파는 건 아니란다.”

진단랑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진 노태야를 바라봤다.

“가질 수는 있겠지만, 꼭 사서 가지란 법은 없지.”

진 노태야가 웃으며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할아비가 널 데려가 구해 주마.”

앞 구절은 못 알아들어도 뒷 구절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진단랑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들한테 가서 말할래요.”

진단랑이 쫄랑거리며 뛰어갔다.

진 노태야는 뛰어가는 손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쳐다봤다. 병풍에 흐릿하게 표시했던 동그라미가 날이 갈수록 또렷해진 탓에 봉래산 육첩 병풍은 본래의 우아한 멋을 잃었다.

“이번엔, 또 몇 개가 더해지려나 모르겠군.”

진 노태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경성엔 밤새 큰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고 난 경성은 훨씬 맑고 상쾌해 보였다.

거리에 뿌린 지전은 어제 깨끗이 치운 데다 간밤에 비까지 시원하게 내린 터라 거리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얼핏 보기에는 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래 보이는 것뿐이었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금세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요? 제사를 지내는 건가?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묘지야. 작은 크기는 아니다만 은근히 초라해 보인단 말이지. 새 무덤에 비석도 새로 세우고, 나무도 새로 심었어. 근데 묘지 주변에 웬 사람이 저리 많아? 아예 땅바닥에 누운 사람도 있고.

“아, 저건 제사 지내는 게 아니오. 술을 먹는 거지.”

누군가가 웃으며 대꾸했다.

술을 먹는다고? 술을 코로 먹나?

행인들은 더욱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술이 어디 있단 거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둥그런 표시를 했다.

“여기가 죄다 술이오.”

행인들은 더욱 머리가 어질어질한 눈치였다.

아니, 경성 사람들은 죄다 정신이 나간 건가?

“모르시나 보네?”

정신 나간 사람들이 더 여럿 몰려왔다.

“어제 경성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소.”

“무슨 일인데?”

몰려든 행인들도 궁금해하며 물었다.

“여기가 누구 무덤인지 아시오?”

“아니, 그게 술이랑 무슨 상관이오?”

“술 얘기를 하려면 이 무덤 얘기부터 해야 하거든.”

한편 같은 시각 경성 사람들은 태평거와 신선거는 물론이고 이춘당까지 찾아가 술을 사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술을 팔고 안 팔고는 차치하더라도, 아니, 어떻게 약포에 와서 술을 내놓으란 겁니까?”

이춘당 관리인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어디서 살 수 있소?”

“난 어제 딱 한 사발밖에 못 마셨단 말이오. 딱 한 사발 마셨다고. 난 이제 다른 술은 못 먹소. 죄다 밍밍하고 맛대가리 없어서.”

“댁은 한 사발이라도 마셨지. 난 한 방울 찍어만 봤소.”

똑같은 말이 신선거와 태평거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어찌나 아우성들을 치는지 영업이 힘들 정도였다.

양쪽 모두 관리인들이 나와 이들을 다독였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술은 저희 집에서 빚은 게 아닙니다. 저희한테 없어요.”

“당신네 행수가 빚은 거라지 않았소?”

“행수께서 빚은 건 맞는데, 우린 안 팔아요.”

“왜 안 판단 거요?”

“팔려고 빚은 술이 아니니까요. 저희 행수께서 저희 주인어른들을 위해 특별히 빚으신 겁니다.”

“그래도 팔면 좀 어때서?”

오 관리인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여러분, 여러분.”

오 관리인은 몰려든 사람들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세상에 둘도 없는 술을, 그분들을 위해 빚은 겁니다. 판매하는 거라면, 둘도 없는 하나뿐인 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래? 정말 안 판다고?”

주 부인의 물음에 몸종들과 여종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사람들이 문 앞을 에워쌌는데 계속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 집 술을 주문하고 싶다며 찾아온 식당도 많았는데, 죄다 거절했고요.”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있던 주 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그 술이 그리 맛있다더냐?”

“네, 엄청 맛있대요. 그 사람들이 1관에 사겠다고 했어요.”

몸종 하나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건 어제 가격이고, 오늘은 2관으로 올랐어요.”

또 다른 몸종이 말했다. 주 부인이 풉 하며 차를 내뿜었다.

2관이라니!

“걔가 그렇게 세게 불렀단 말이야? 그게 뭐 목숨 걸린 일이랑 같은 줄 아나?”

“부인, 아씨께서 부르신 가격이 아니라, 앞다투어 사겠다는 사람들이 부른 가격이에요.”

주 부인의 말에 몸종들이 대답했다.

하긴, 목숨이 걸렸을 때도 그랬지. 그 애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며 값을 불러댔어.

2만 관이요!

2만 관이요!

그때 마당에서 외치던 소리가 주 부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주 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쳤다.

정말 돌아 버리겠네. 또 아랫것들이 말하던 그날 광경이 떠오르잖아. 거리에서만 술을 뿌린 게 아니라, 무덤 앞에서 동이째 깨 버린 술만 해도 열댓 동이가 넘는댔는데.

가만있자, 한 주전자에 2관이면…….

주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애는 왜 이렇게 돈을 쉽게 버는 거야? 근데 정작 본인은 돈을 돈으로 여기질 않으니.

어디서 시골 촌뜨기들을 만나서는 의남매인지 뭔지를 맺었다질 않나. 의남매면 의남매지 점포 주인은 또 왜 맡겨. 죽었으면 그만이지 장례는 또 왜 그리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며…….

그게 바보가 아니면 뭐야?

“그래서 이번엔, 팔았다더냐?”

주 부인이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그래도 술을 팔면 괜히 허세 부린 꼴은 아니지. 덕분에 술이 유명해지게 됐으니.

몸종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같은 대답만 했어요. 돈은 얼마가 됐든 천금을 준다 해도 못 판대요. 못 판다면 못 파는 거래요.”

몸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못 고친다면 못 고치는 거예요.

옛일이 떠오른 주 부인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팔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못 먹는 건 아니래요.”

또 다른 몸종 하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얼른 덧붙이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 몸종을 쳐다봤다.

“그 관리인이 그랬어요. 주인어른들의 기일이 되면, 그때도 술을 나눠 줄 거래요.”

“그럼 그 사람들의 기제사가 돌아와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거 아니오?”

찻집 안.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그럼 내년 이맘때나 돼야겠군.”

“아니지, 아니지. 내년 이맘때가 아니야. 무원산 용사들은 5월에 죽었거든. 장례는 이제야 치르게 됐지만 말이오. 그러니 내년 5월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기억력 한번 좋네.”

“똑똑히 기억해 둬야 하고말고. 그날을 아주 가슴 깊이 새기고 살 거요.”

“그리 계산하면 한 석 달은 일찍 먹을 수 있겠군. 거 잘됐네!”

“……그건 어떻게 알았소?”

“내 숙부님 댁 조카의 처제의 진외종조부의 손자가 태평거에서 일하거든.”

“아니,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돈이 싫다는 거야?”

“거기가 돈이 없겠어? 상대가 누군지 좀 보라고! 무려 태평거에! 이춘당에! 신선거잖아!”

“게다가 신의라고. 목숨 하나에 만 관도 넘는.”

“잠깐, 술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신의는 또 뭐요?”

“아니, 그 엄청난 일도 모르시오? 소문을 전혀 못 들었구먼. 그 신의로 말할 것 같으면, 벌써 한참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잠깐, 신의 얘기를 하다 말고 왜 또 무원산으로 새지? 무원산은 또 뭐요?”

“무원산의 다섯 용사가, 서북 전선에서 죽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누가 좀 알아듣게 설명할 수 없소? 그럼 오늘 찻값은 내가 다 내리다!”

“내가 하겠소!”

“내가 하겠소!”

대청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진십삼은 탁자에 돈을 던지고 일어섰다.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일에 정신이 팔린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툭툭 쳤다.

“가자고.”

주육낭은 얘기가 끊기자 화를 냈다.

“자네나 가 봐.”

진십삼이 웃으며 대꾸했다.

“다 들었잖아. 걱정 말라니까.”

주육낭은 진십삼을 아랑곳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진십삼은 걸음을 옮기다가 몇 걸음도 못 가 다시 돌아왔다.

“뭔지 알겠다. 그 여인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모자란 거구나.”

주육낭이 코웃음을 쳤다.

“난 아예 그 여인을 보러 갈 건데, 같이 안 갈 거야?”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 차 더 가져와!”

주육낭이 찻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계산대 앞에 기대어 사람들의 열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점원은 두어 번 소리쳐 부른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전자를 들고 달려왔다.

진십삼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문밖 거리도 인파로 떠들썩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목청을 높이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노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흥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내용이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거리를 가리키는 손동작만 봐도 역시나 무원산 얘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십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환이 건네는 말고삐를 받았다.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라탄 진십삼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찻집을 힐끔 돌아봤다. 창문 너머로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저쪽에 서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손님을 진지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수시로 놀랐다가, 기뻐했다가, 감탄했다가, 비탄에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기엔 전부 처음 듣는 얘기라 몹시도 흥미진진한 듯했다.

진십삼은 피식 웃고 말을 몰아 출발했다. 그때 다른 사환이 먼 곳에서 달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가까이로 다가온 사환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진십삼은 잠시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빠르네.”

진십삼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낭자가 자기는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고 했구나. 다른 일은 앞다투어 해 주려는 사람이 나오니까.”

그날의 장례가 일으킨 거대한 바람에 대해 정교랑은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후 옥대교 저택으로 돌아온 정교랑은 예전과 다름없는 나날을 이어갔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질 무렵,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배가 고파서 그러나요?”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범강림의 아내 황씨가 아이를 어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잠을 못 자서 투정 부리는 것 같아.”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회랑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시녀가 고개를 돌리고는 밝게 웃었다. 황씨도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회랑 아래에서 짙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이 이쪽을 보는 모습이 보이자, 황씨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기, 시, 시끄러우셨죠.”

황씨가 불안해하며 서둘러 아기를 어르려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자 놀란 아이가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황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황씨 본인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들은 원래 잘 울잖아요. 시끄러울 게 뭐 있어요.”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큰아씨,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고개를 돌린 시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황씨를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는 괜히 트집 잡고 그러는 분 아니에요.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황씨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서북 둔보성(屯堡城)에서 자란 여자였다. 장부를 관리하던 아버지 옆에서 글 몇 자를 익힌 덕에 어느 정도 식견은 갖게 됐으나, 하루아침에 경성에 집이 생기고 대단한 시누이가 생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온 경성 사람이 다 나와 장례식에 참가하게 만드는 시누이라니.

황씨가 손으로 가슴을 쓸며 품속에 안긴 아기를 토닥였다. 이번 일로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는 지금껏 시누이의 얼굴조차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그이랑 막 혼례를 올렸을 때였어. 일곱째 동서가 나한테 시누이는 어떤 사람일 것 같은지 묻더라고.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오르는 거야. 일곱째 도련님은 누이가 신선 같다고 했는데…….”

황씨가 품속의 아기를 어르며 말을 이었다.

“그땐 매일 언제쯤 얼굴을 보려나 궁금했어. 동서지간 일곱이 다 같이 올 줄 알았는데, 결국 나 혼자 왔지 뭐야.”

시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무언가 생각난 듯 일어섰다.

“큰아씨, 집에 왔는데도 좀 어색하시죠? 제가 도련님들이 쓰시던 방 보여 드릴게요. 떠날 때 모습 그대로 하나도 안 건드렸어요. 옷도 그대로 있고요.”

시녀의 말에 황씨도 아기를 안고 따라 일어섰다.

“아가, 네 아버지 방이 어떻게 생겼나 가 보자.”

후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정교랑도 활을 들고 과녁을 조준했다.

“누이도 여전히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한 거야?”

범강림이 손에 든 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텅 하는 소리로 화살을 쐈다.

“좋았어.”

범강림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정교랑이 범강림을 보며 손에 든 활을 흔들었다. 범강림이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궁이에요.”

정교랑이 뿌듯한 표정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범강림은 흠칫 놀라며 정교랑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훌륭해.”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교랑은 다시 활시위를 당기고, 한 발 또 한 발 연달아 화살을 쏘았다. 범강림은 한쪽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봤다.

좋아, 훌륭해.

범강림의 시야가 이따금 흐릿해졌다. 형제들이 옆에 서서 함께 웃으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좋아. 근데 안정감이 좀 부족하네.”

범강림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고개를 돌린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활시위를 당겼다.

진십삼이 왔을 무렵, 정교랑은 글씨 연습 중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끝나실 거예요.”

시녀가 문을 열고 생긋 웃으며 진십삼이 들어오도록 비켜서며 말했다.

“넌 웬일로 집에서 한가하게 있어? 대관리인이 안 바쁘다더냐?”

“아씨께서 며칠 쉬라고 하셨어요.”

진십삼이 건넨 농담에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진십삼이 옷매무시를 정돈하며 말했다.

“큰형님께서 오셨다니,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진십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범강림과 진십삼의 모습이 열린 문 사이로 보였다. 딱히 낯선 사이로 보이지 않아 황씨는 놀라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저 공자는 뭐 하는 분이셔?”

황씨가 물었다.

“공주부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세요.”

어린 몸종이 대답했다.

공주부라니!

황씨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리 그이는 저 공자랑 아까 분명 평절로 인사했는데? 아이고, 세상에.

황씨가 놀라는 사이 저쪽 서재의 방문이 열리더니 정교랑이 걸어 나왔다.

“누이, 서북에서 있었던 일을 진 공자께 소상히 말씀드렸어.”

범강림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우린 남한테 말 못 할 일 한 거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제 형제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겁니다.”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과 범강림이 진십삼을 쳐다봤다. 한 사람은 딱히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지만, 한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에 누가 강문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거든요.”

진십삼이 말했다.

첩실의 방에서 안락함을 즐기던 고능준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짜증이 났다.

오늘은 조회에 안 가도 되는 날이었다. 사실 고능준은 조회를 주재하는 진소 등의 얼굴을 보기 싫어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요즘에는 진소의 어두워진 낯빛을 보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산해진미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지라 오늘은 아예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기로 한 터였다.

“탄핵을 당하면 당하는 거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탄핵 한 번 안 당해 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떠들어대나? 그깟 탄핵이 무슨 대수라고 일을 삼아. 이 사람들이 아주 발전은커녕 점점 퇴보하는군.”

고능준은 심기가 불편한 듯 탁자를 여러 번 내리쳤다. 앞에 꿇어앉아 있던 두 관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숨소리를 죽였다.

“대인, 이번에는 다릅니다.”

“뭐가 달라? 누군데? 이번에는 진소 일파 중 누구던가? 누구길래 그리들 놀라? 무슨 일로 탄핵한다는데? 매국? 아니면 적과 내통한 죄?”

고능준이 호통을 쳤다.

“노사안입니다.”

두 관리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노사안?

“그 망할 놈이 아직도 경성을 안 나갔어?”

고능준이 멈칫하며 물었다.

“본디 떠날 때가 지났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부에 명해 빨리 부임지로 가라고 재촉도 했고…….”

“됐네, 됐어. 곧 죽을 인사인데, 뭘 그리 벌벌 떨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끊던 고능준이 곧 멈칫하며 물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탄핵 상소를 올리지? 이젠 지방 관리 신분이잖아. 진소의 짓인가?”

고능준은 두 관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냉소를 지으며 옷소매를 뿌리쳤다.

“잘들 노는군. 규정을 어기고 은밀히 상소를 전달해? 이참에 그놈도 남주로 같이 보내 줘야겠어.”

고능준이 웃으며 말했다.

“대인, 진소가 전달한 게 아닙니다. 노사안이 간 역참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관리 하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변방에서 온 급보로 포장해 바로 폐하께 올라갔답니다.”

고능준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망할 놈이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빨리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건가. 그래, 얼마나 참신한 걸 고했다던가?”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강문원이 외적을 가벼이 보고 조정을 기만했답니다.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논공행상을 부적절하게 행하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간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잠깐, 잠깐.”

고능준이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관리를 쳐다봤다.

“노사안이 정신이 나갔나?”

두 관리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능준이 탁자를 탁 내리치자, 두 관리는 놀라 벌벌 떨었다.

“그자가 미친 게 아니면, 자네들이 바보가 된 게야?”

울화가 치민 고능준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서북의 논공행상에 대해 알아본 일로 쫓겨나 경성을 떠나게 된 놈이야. 그런 놈이 서북의 논공행상을 빌미로 탄핵 상소를 올렸다고. 제 발로 죽을 길을 찾아가겠다는데, 좀 좋은 일인가. 자네들은 뭐가 무서워 벌벌 떠는 게야!”

두 관리가 한숨을 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인, 그자가 탄핵 상소만 올린 게 아닙니다. 장례를 그린 그림 한 폭을 같이 올렸습니다. 온 경성이 영웅호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만백성이 울분을 터트리며 함께 우는 그림 말입니다.”

오늘 조회에는 한 사람도 빠진 이가 없었다. 요즘은 통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황제까지 나와 있었다.

내시 두 명이 대전에 서서 그림을 양쪽으로 천천히 펼쳤다.

“노사안의 조부 노첩(盧捷)은 그림을 참 잘 그렸지. 선황께서 노첩의 작품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며 침전에 걸어 두셨던 기억이 나는군.”

황제가 옥좌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다만 그 자손들은 재능이 부족하여 화필을 잡지 않았어. 글공부에 전념한 통에 악기나 바둑, 서화는 뒷순위로 밀려난지라 노첩의 작품은 점점 귀해지고 있고.”

조당에서 시와 사, 그림을 논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유희에 빠져 있다며 어사에게 탄핵당할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앞으로 나와 따지고 드는 어사가 없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형형한 눈빛으로 대전에 펼쳐진 화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죽음을 기다리는 새끼 양을 보며 어디서부터 물어뜯는 게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노사안이 조부처럼 정교한 솜씨를 익힌 건 아니지만, 핏줄은 못 속이는 법 같소. 경들도 나와서 한번 보시구려. 노사안의 그림이 어떤 것 같소?”

조회에 참석하는 관료는 많지 않기에 두 줄로 서 있는 열댓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황제의 말을 듣고도 다들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할 뿐,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는 이는 없었다.

“폐하, 노사안의 언사는 직분에 맞지 않는…….”

고능준의 눈빛을 본 관료 하나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눈 딱 감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말을 끊었다.

“노사안의 언사가 직분에 맞지 않는 건 짐도 알고 있으니, 굳이 언급할 것 없소. 짐은 지금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거요.”

황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그림이 어떠냐고 묻고 있잖소!”

황제의 기세에 감히 나서서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신이 명을 받들겠나이다.”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경직된 대전 분위기를 깼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을 본 대황자가 얼른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황자가 한발 앞서가려고 하자, 진안 군왕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고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앞장을 서자 진소도 걸음을 옮겼고, 나머지 관료들도 관직의 고하에 따라 순서대로 그 뒤를 따랐다.

아주 긴 족자에 경성의 서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묘사하는 정경이 썩 훌륭한 건 아니었고 붓놀림도 평범했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만은 가히 일품이었다.

처음엔 침묵을 지키며 그림만 쳐다보던 관료들이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관료들도 소문을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자,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노사안은 과연 노첩의 후손이었다. 묘사가 어찌나 세세한지 말 머리에 달린 흰 꽃 하나까지도 대충 그리는 법이 없었다.

관을 들고 있는 사람, 하얀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의 표정까지도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었다.

아기는 흰 깃발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도 하고, 눈을 비비기도 하고, 손가락을 빨기도 하며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거리로 나온 남녀노소의 표정도 하나하나 달랐다. 놀라는 사람,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은 물론이고 만취했으면서도 술을 보며 달려드는 사람까지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본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대황자는 느긋하게 그림을 보는 진안 군왕을 힐끔 보고는 따라서 걸음을 늦추었다. 진안 군왕은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구석 꼼꼼히 살폈다.

대황자는 그림 보는 게 따분했다. 꼭 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선으로 이은 그림을 보는 건 늘 따분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대황자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도도한 시선으로 진지하게 그림을 쳐다봤다.

찾았다!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그림의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지러이 모여 있는 인파 속에서 낭자 하나가 손을 뻗어 말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멱리를 쓰고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노사안의 그림은 확실히 그 조부만큼 정교하지는 못했다. 그 여인의 기품은 멱리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인데, 노사안의 붓 아래에서는 평범하기만 했다.

여기는 좀 더 높이 그리고, 옷소매는 좀 더 품이 넓어야 하는데. 아무리 멱리를 썼어도 그렇지 그냥 검게 칠하기만 하면 쓰나. 어렴풋이 얼굴이 보이게 해야지.

“전하.”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지막이 군왕을 부르며 주의를 주었다. 진안 군왕이 몸을 똑바로 펴고, 진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전한 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뭘 저리 넋을 놓고 본 거지?

진소도 고개를 빼고 들여다봤지만,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그림은 동문까지 계속됐고, 이어서 묘지 앞의 떠들썩한 광경과 하늘이 터지는 불꽃이 보였다.

“그림이 어떻소?”

옥좌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림은 그냥 그런데, 그림이 너무 가증스럽군.

고능준은 이를 갈았다. 그림이나 가무는 언제나 글로 묘사한 것보다 더 직관적이고 훨씬 충격적이었다.

이 일을 그저 상소문 한 장으로 묘사했다면 읽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황제가 훨씬 차갑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면 훨씬 직관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례 행렬과 빼곡하게 둘러서서 구경하는 인파까지, 경성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사건이 종이 위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 해에 한두 번 정도 출궁하고, 그나마도 몇 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는 어화원에 가는 게 전부인 황제에게 이 그림이 가져다줄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하리라.

황제는 그림 속에 펼쳐진 그날의 광경을 따라 걸으며, 그 기분을 함께 만끽한 듯했다.

“백성이 울분을 토하며, 구경하는 열 중 아홉은 슬퍼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지전은 눈처럼 휘날리고 흰 깃발은 숲을 이루었으며, 온 경성이 무원산을 떠들어댔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일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던 중, 강문원 일파에게 폐하를 기만한다는 공격을 받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성을 떠나다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하늘에 영령의 안녕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죄인의 몸이라고는 하나 폐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원성만 들으시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분에 맞지 않는 언사임을 알면서도 강문원이 폐하를 기만한 죄를 낱낱이 고하고자 합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신의 목을 베어 선덕문 밖에 거신다 하여도 기꺼이…….”

대전에 있던 내시가 노사안이 올린 상소를 목청 높여 낭독했다. 그림을 다 보고 난 관료들은 또다시 침묵에 빠졌다.

“대답해 보시오. 노사안의 그림이 어떻소?”

황제가 다시 물었다.

대황자는 자신이 앞으로 나가 한두 마디 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림의 좋고 나쁜 점을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황제가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거기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건 더욱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저께 수업에서 스승님은 말을 삼가라고 하셨지. 확신이 없는 일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저하는 사이, 진안 군왕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폐하, 노사안의 그림은 그저 그렇습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로 모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놀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듯했다.

황족은 조회에 참석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장식에 불과했다. 장차 태자로 책봉될 몸으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논쟁에 참여하는 대황자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고, 이 점은 진안 군왕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황제와 무언가를 논하더라도, 조당의 관료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한 일은 전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바라봤다. 기쁨이나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폐하, 신이 폐하께 그려 올린 ‘삼산오악 유람도’를 기억하십니까?”

진안 군왕이 편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무, 무슨 그림이라고?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다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황제의 낯빛은 미묘하게 변했다.

“신이 그림은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노사안의 그림이 평범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신의 그림과 비교해도 썩 나은 건 아니죠.”

진안 군왕의 시선은 내시들이 펼쳐 들고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하지만 신에게는 노사안이 마음을 썼다는 게 보입니다. 신이 폐하께 바친 그림을 볼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눈으로 보고 붓으로 옮긴 그 마음이 똑같습니다.”

마음을 썼다!

그건 평가였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이자 이 일에 대한 평가였고, 이는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평가이기도 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림 뒤에 숨어 있던 일들이 그림을 찢고 나와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방위(方瑋)!

말을 참 거침없이도 하는구나! 어딜 감히 쓸데없이 나서는 게야!

고능준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속으로 포효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사람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올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진소 일파의 사람이어야 했다.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군왕이 아니라.

진소가 했다면 어땠을까. 도리상 진소 일파의 사람이 말했어야 했다. 노사안은 진소가 천거한 인사이므로 황제의 눈에 그는 진소의 사람이었다.

진소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노사안이 옳았다고 한다면, 이는 가까운 이의 허물을 덮어 주는 꼴이 될 터였다.

아무튼 진소가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똑같았다. 황제의 의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의심은 이 일을 진소가 뒤에서 조종했을 거라는 의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데없이 진안 군왕이 입을 열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예전의 무슨 그림 얘기까지 꺼내며 황제의 생각을 끌어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폐하,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거 보라고. 신’도’ 그리 생각한다는 게 됐잖아. 신’은’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겨우 한 글자 차이지만, 이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사라지게 하기 충분했다.

“폐하, 노사안이 마음을 쓴 건 사실이나 그 의도가 심히 불순합니다!”

고능준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급선무는 논쟁이 아니라 사건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고 대인의 감상은 참으로 이상하외다. 어디서 그 의도가 불순하게 보인단 말씀입니까?”

“노사안은 강문원의 무리가 공을 가로채고자 폐하를 기만했다 주장하는데, 신이 보기에는 도리어 노사안이 백성을 선동해 폐하를 협박하는…….”

“백성을 선동해요? 온 백성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 대인께서는 노사안을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조용했던 대전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세찬 비가 내리는 듯 반박과 힐난이 끊이지 않았다.

대황자는 다소 멍한 채로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한 상황에 침묵을 지키며 바짝 엎드려 귀먹고 눈먼 듯 고분고분 움직이던 조정 관료들이 한마디도 지지 않을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이게 뭐야. 대체 뭐 때문에 저리 떠들고 싸우는지 모르겠네. 따분하기만 하고.

대황자는 대전에 잠자코 서 있었다. 어릴 적 부황을 대신해 조회에 참석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그때는 그나마 앉아 있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니까.

이 인간들이 대체 언제까지 떠들 작정인지 모르겠네.

불꽃이 펑펑 터지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인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꾹 참고, 예의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관료들의 소리는 어느새 배경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네요.”

진안 군왕이 대황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대황자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런 대황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얼마나 잘 그렸습니까. 진짜처럼 생생하기도 하고요. 전엔 황궁 밖에 나가면 동문과 서문을 자주 갔습니다. 여기 이 다리도 알아보겠네요. 다리 어귀에 사자 석상이 세 개 있었는데…….”

대황자는 아예 걸음을 옮겨 진안 군왕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그림 끝자락의 불꽃에 머물렀다.

성 밖에서 본 그날의 불꽃놀이는 이렇게 찬란했구나.

그 불꽃은 진안 군왕도 봤지만, 별처럼 작은 불꽃 몇 개에 불과했다. 그날 불꽃이 터질 때, 진안 군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황궁의 버려진 뜰에 육가아와 함께 앉아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불꽃놀이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 경성 거리는 저토록 시끌벅적했다니.

진안 군왕의 눈길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정말 화나고 또 화나고, 슬프고 또 슬프겠구나. 본디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이젠 그것마저 잃고 말았으니.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가던 노사안이 경성을 떠나면서 천자께 탄핵 상소를 올려 천자의 분노를 자아낸 일은 한나절도 안 되어 온 황성과 관청에 소문이 퍼졌다. 여기저기서 의론이 분분하고 인심도 흉흉했다. 이번 일로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할지, 또 누가 이번 일 덕에 이득을 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사안은 이번 일이 일으킬 풍파를 예상했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볼 순 없었다. 황제가 노사안의 상소를 확인하던 무렵, 어사대는 그를 체포하여 하옥했다.

심문을 받으러 공당으로 나온 노사안을 보고 있노라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어사들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같은 조정 관료로서 수없이 마주친 사이였지만, 어사들은 조금도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노사안이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며 당당하게 나오는 게 몹시 아니꼬울 따름이었다.

이곳이 관료들이라면 듣기만 해도 벌벌 떠는 어사대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노사안 저놈은 평소에도 고개 한번 제대로 든 적이 없는데.

늘 진소의 뒤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며 약삭빠르게 움직이던 노사안이었다. 담력도 작고 줏대도 없던 노사안이 어찌 저리 강직하고 정의로운 태도로 나온단 말인가.

“노정(盧正), 네 죄를 알렷다!”

어사 한 명이 경당목을 탁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이 사람은 분에 넘치는 언사를 행한 죄를 지었소이다.”

노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핵심을 빼놓고 부수적인 걸 이야기하는군.”

어사가 냉소를 보였다.

“조정 관료를 중상모략한 죄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어사의 냉소에 노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중상모략을 했다고요? 대인, 절 너무 띄워주십니다그려. 제게는 그만한 수완이 없습니다. 민정을 살펴 보고했을 뿐이지요.”

노사안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민정을 살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 노정이 죄를 인정하겠소이다.”

어사는 속으로 침을 뱉으면서도, 다시 표정을 바꾸어 물었다.

“노정, 이럴 것까지 있소?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울분이 쌓인 건 알지만…….”

어사가 무언가를 유도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노사안이 말을 잘랐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 마음속엔 울분이 없습니다. 백성을 대신해 울분을 토했을 뿐이지요.”

노사안이 하도 당당하게 나오자 도리어 어사가 할 말을 잃었다.

“노정, 죽을 길을 찾아가려고 작정한 거요?”

어사의 물음에 노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어찌 죽을 길이란 말입니까. 천자를 대신해 민정을 살피고, 권신들이 성총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막은 것인데요. 이는 신하의 사명이자 신하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노사안이 목청을 높였다.

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 끌어내라는 손짓을 했다. 어쨌든 첫 심문에 무언가를 받아내기란 힘든 것이었다. 어사대에서 사대부에게 고문을 가하긴 힘들지만, 다른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며칠 고초를 겪고 나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노사안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뒤돌아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걸어나가던 노사안은 문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는 어사중승을 봤다.

“노정.”

어사중승과 스쳐 지나가는데, 어사중승이 노사안을 불러 세웠다. 노사안이 담담한 표정으로 어사중승을 쳐다봤다.

“이번에 진소가 그대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어사중승이 나지막이 물었다. 노사안이 어사중승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 자신감은 어느 한 사람에게서 오는 게 아닙니다. 만백성에게서 오지요.”

저놈이 정신줄을 놓았나? 좌천되어 남주로 가게 되었으니 남은 인생에 가망이 없다 여겨 광증에 사로잡혔군.

어사중승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리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닐 터였다. 노사안은 확실히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진소가 구해 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고,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핵심이었다.

만백성이라…….

이게 정말 그리 커질 일이란 말인가?

“여봐라, 거리에 나가 조사해 봐라. 노정의 그 그림이 대체 얼마나 과장됐고, 얼마나 사실적인 것인지.”

어사중승이 말단 관리를 불러 분부했다.

한편 같은 시각 경조부 관아의 관간우상공사(管幹右廂公事: 관직명) 유금천(劉錦泉)도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간악한 백성이 그런 일을 벌였는데, 네놈들은 전혀 몰랐단 말이냐? 네놈들은 전부 죽었어?”

유금천은 소식을 듣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왔다.

그날의 일은 유금천도 나중에 소문을 들어 알게 됐지만, 그저 돈 많은 이가 장례를 치렀다는 정도였다. 돈을 펑펑 썼다는 둥, 돈 많은 태평거와 신선거가 어쨌다는 둥 하는 얘기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을 노사안이 이용했을 줄이야!

유금천 앞에 선 수하들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죽음으로 내몰린 노사안이 이런 수를 쓸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고위층 관료 누가 누굴 탄핵하는 등의 일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그림이었다. 그림 속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도 경성에서,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면서. 그런데 그곳이 바로 이들의 관할이었다.

이 일이 천자의 앞으로 올라갔으니, 가볍게는 부윤(府尹)이 유금천을 용서하지 않을 테고, 무겁게는 황제가 유금천을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노사안 때문에 죽게 생긴 건 분명했다.

“대인, 이번 일은 진 상공 쪽의 계획이 아닌 듯싶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쪽의 계획이 아니면, 그자들이 왜 튀어나온 건데? 왜 갑자기 그 수많은 사람이 장례를 보러 몰려나와?”

유 공사가 호통을 쳤다.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술을 나눠 줬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엄청 맛있는 술이었답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독한 술이라던데요.”

“저희 집 사환은 한 사발 받아먹고 취해서, 이틀 만에 깨어났습니다!”

“정말 그리 독하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화제가 바뀌었다. 유 공사는 무언가 깨달은 듯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탁자를 무겁게 내리쳤다.

“술이라!”

유 공사가 냉소를 지었다.

“술이었군. 술을 받아먹으려고 죄다 뛰쳐나온 거였어. 온 경성이 영령을 배웅하기는! 노사안이 개소리를 지껄였군!”

다들 그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랬다.

“전부 그 술 때문에 일어난 사달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겠군.”

유 공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신선거와 태평거는 양조 허가를 받은 곳이 아니다. 전부 잡아들여라. 멋대로 술을 판 죄를 묻겠다!”

양심 없는 장사치가 술을 팔아먹으려고 술수를 부린 게지. 민정이니 원성이니 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어!

그래, 복잡할 것도 없는 일이야. 다른 일로 번지기 전에 눌러 버려야겠어. 노사안이 뭘 어쩔 수 있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유 공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윤 대인과 고능준 대인께서 애쓰지 않으시도록 내가 앞장서서 일을 해결하면, 분명 큰 칭찬을 받을 게야.

“속히 가거라. 관졸을 여럿 데려가 점포를 폐쇄해 버려!”

서무수 등을 안장한 후, 벌써 닷새가 지났다. 범강림이 태평거로 오자 오 관리인이 직접 수행하며 새로 온 관리인을 소개해 주었다.

점원들의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와 범강림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범강림의 아내 황씨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주인어른들의 방은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오 관리인의 말에 황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범강림을 쳐다봤다.

집으로 돌아오자 형제들에 관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얘기할 때마다 괴로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범강림의 표정은 조금도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기운이 나는 듯 보여 이상할 정도였다.

“너무 걱정 마시오.”

범강림이 방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했다.

“모두 내 형제들이 아니오. 형제들을 잃었지만, 난 두렵지 않소. 굳이 그들을 잊으려 애쓸 필요도 없고.”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주인어른, 관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오 관리인이 달려와 소리쳤다.

관부?

황씨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범강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도리어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예상대로군. 누이의 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어.”

범강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가 보리다.”

“주인어른, 저들을 안으로 들이시지요.”

오 관리인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범강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사람들 앞에서 말 못 할 일을 한 적 없소.”

범강림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태평거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들은 먹고 마시던 일을 멈추고, 대청에 선 관졸들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나리.”

뒤쪽에서 나온 범강림이 예를 표했다.

“댁이 여기 주인이오? 점포를 닫고 우리랑 함께 갑시다.”

관졸의 말에 왁자지껄했던 주변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점포를 폐쇄하겠다고요?”

같은 시각 경성의 신선거. 시녀가 관졸의 말에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이유는요?”

“허가도 없이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관졸이 말했다.

대청에서 수군거리며 구경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이들이 오늘 신선거에 모인 건 사실 며칠 전 그 술 때문이었다.

자리에 있는 손님 중 대부분은 그 술을 맛보지 못했지만, 그 술이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경성에서 술을 빚을 자격은 정식 허가를 받은 점포와 관가의 양조장, 세금을 내고 운영하는 개인 양조장에게만 주어졌다. 그 외의 곳에서 술을 빚으면 중죄에 해당한다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민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고관대작이나 권세가의 집에서는 사사로이 술을 빚는 일이 흔했다. 관부도 뻔히 알면서 못 본 척 눈감아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허가도 없이 술을 빚었다는 죄는 트집을 잡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느 벼슬아치에게 뒷돈을 챙겨 주지 않았거나, 어느 벼슬아치의 먹잇감이 되었거나.

그리 맛좋은 술이라면 분명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독을 들이는 벼슬아치가 생겼겠지. 흔히 있는 일이긴 한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시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리, 오해예요. 우리는 허가 없이 술을 빚은 적도 없고, 판매한 적은 더더욱 없어요. 성 밖에 있는 노씨의 양조장에서 술을 사다가 살짝 개량했을 뿐이죠. 장례 때만 썼고 돈도 안 받았어요. 이젠 다 나눠 주고 없는데, 허가도 없이 술을 빚어 팔았다니요?”

그래? 노씨의 양조장에서 사 온 거였군!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려가려는데, 옆에 있던 이들이 붙잡았다.

“자네 바보인가? 개량했다는 말 못 들었어? 노씨가 빚은 술이 그리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쨌거나 어디서 나온 술인지 알았잖아. 일단 가서 실컷 마시며 속을 좀 달래야겠어.”

손님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관졸들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증인이 있다.”

관졸 중 우두머리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맹세코 판 적 없거든요. 우리 쪽에도 증인이 있어요.”

시녀가 대청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여러분 중에 우리 집에서 술 사신 분 있으세요?”

“없소.”

“누구든 산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파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리리다.”

대청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청이 소란스러워질수록 관졸들은 불안하고 짜증이 나는 기색이 역력했다.

“됐다. 시끄럽고, 어서 문 닫고 같이 좀 가자.”

관졸들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도, 시녀는 냉랭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리,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유야 확실하지. 술을 빌미로 백성을 선동해 소란을 피웠잖아.”

관졸 하나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백성을 선동하지 않았느냐!”

시녀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시녀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대청은 차츰 조용해졌다. 그 웃음소리에 관졸들은 소름이 돋았다.

“뭘 웃어?”

부아가 치민 관졸들이 소리를 질렀다.

“고마워서요.”

시녀가 관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관졸들이 멈칫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시녀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우리가 술을 나눠 주자 백성들이 제 발로 달려왔어요. 근데 그게 어떻게 우리가 백성을 부추겨 소란을 피운 게 되죠?”

시녀가 바깥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지금 밖에 몰려든 저 사람들은 뭐예요? 댁들이 여기 와서 소란을 피우니까 구경하러 온 건데, 그럼 이번엔 댁들이 백성을 부추겨 소란을 피운 거겠네요?”

관졸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은 어느 틈에 구경하러 온 백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이들로 거리도 인파로 북적였다.

관졸들은 순간 안색이 싹 변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이 길어진 거지?

“아무튼 할 말이 있으면 관아에 가서 하고, 일단 가자.”

관졸 중 우두머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쇠사슬을 내밀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시녀가 다시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날 잡아가겠다고요? 우리 점포를 폐쇄하겠다고요? 우리가 주인어른을 안장하고 길에서 술을 나눠 주며 노제를 지낸 게 백성을 선동한 거예요? 우리 주인어른께선 분명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요? 우리 주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안장한 게, 백성을 선동한 거예요? 나리, 뭐가 유언비어인데요? 우리 주인어른께서 안 돌아가셨어요? 아니면 우리 주인어른께서 전사한 게 거짓이에요?”

나이도 어린 여자애가 똑 부러지는 말로 다다다다 쏘아붙이니 관졸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허튼소리…….”

관졸 중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시녀의 목소리를 덮으려 했지만, 시녀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허튼소리라고요? 무슨 허튼소릴 했는데요? 우리가 무슨 공을 바라길 했어요? 상을 달라고 했어요? 주인어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얘기하면 안 돼요? 말하면 그게 유언비어가 되고요?”

시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지며 자신의 옷섶을 쥐어뜯었다. 어느새 촉촉해진 눈시울이 반짝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예요? 왜 우릴 잡아가고 점포를 폐쇄하겠단 건데요? 우린 다 필요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데, 대체 왜요? 떳떳하게 안장하는 것조차 안 돼요? 우리 주인어른께선 전사하셨어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는 일이라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안장하지 않았더니, 그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좋아요. 그게 죄라면, 잡아가요! 잡아가라고요!”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던 관졸들은 문턱에 부딪히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얘기가 왜 나와? 우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관졸들은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인파를 쳐다봤다. 몰려든 인파는 어느새 침묵을 지키며 울분에 찬 표정으로 관졸들을 보고 있었다. 다시 안쪽을 쳐다보자, 대청에 있는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한편 범강림은 관졸들 앞으로 나서며 활을 집어 들었다. 관졸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허리에 찬 칼을 빼 들었다.

비록 한참 전 일이고, 지금 눈앞에 선 사내는 일곱 명이 아니라 단 한 명뿐이었지만, 당초 태평거에 난입했던 무뢰배들이 문 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일은 모두의 기억에 생생했다. 태평거는 금강이 지켜 주는 곳이라는 소문이 여전히 관아에 퍼져 있었다.

“범강림, 무슨 짓이냐? 체포에 불응해 살인을 하겠단 거냐?”

관졸들이 소리쳤다. 범강림은 관졸들을 보며 씩 웃더니 손에 든 활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난 이제 사람을 죽일 수 없소. 활시위도 못 당기고, 화살을 쏠 수도 없지. 사람을 죽이려면, 쇠뇌를 쓸 수밖에 없소.”

범강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자신의 옷을 잡아 뜯어 확 풀었다. 범강림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미처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아낙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이제 사람을 죽일 수도 없거니와, 댁들을 죽이지도 않을 거요. 내 형제들은 서쪽 오랑캐 손에 죽었소. 나는 요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남은 힘은 서북 오랑캐를 죽이는 데 써야지 어찌 화살을 댁들한테 겨눌 수 있겠소. 내 형제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댁들한테.”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리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와서 잡아가시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댁들이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는 것이니, 잡아가시구려.”

관졸들은 멍한 표정이었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상반신을 드러낸 사내의 몸 여기저기에 남은 무시무시한 흉터를 보노라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 끔찍한 흉터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처참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흉터 하나하나가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했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된 흔적이었다.

“잡…….”

“잡기는 개뿔!”

대청에 있던 누군가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접시 하나가 날아와 깨졌다.

“빌어먹을 네놈들 죄부터 물어라!”

일갈과 함께 기름 솥에 물을 부은 듯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 공사가 얼굴을 부여잡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안에 있던 관료들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지만, 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 공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옆에 있는 부윤도 안색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윤은 잡아먹을 듯한 눈길로 유 공사를 노려봤다.

부윤 본인은 사정을 몰랐다고 하나, 어쨌거나 수하가 벌인 일이었다. 그 일로 고능준 대인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윤 자리에 오른 건 이제 겨우 두 달이었다. 물론 이 자리는 그저 거쳐 가는 자리고, 최종 목표는 중서문하성 정사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일에 연루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고능준이 먼저 후려치지 않았다면, 부윤이 나서서 따귀를 쳤을 것이다.

“네놈이 나한테 원한이 있느냐?”

고능준이 유 공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면 진소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더냐?”

유 공사는 치욕도 잊은 채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대인, 대인, 전혀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저는 대인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근심을 덜어? 근심을 더하는 건 아니고?”

고능준이 유 공사의 말을 끊으며 일갈했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 아니냐! 일을 눌러 가라앉혀도 모자랄 판에,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겠다며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워?”

“대인, 그 일은 백성이 분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의 술을 마시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벌어진 일이죠. 그래서 그 술을…….”

유 공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자 고능준은 냉소를 지었다.

“유금천, 바보가 되었느냐? 사사로이 술을 빚어 파는 게 대죄라는 걸 너 혼자 알았느냔 말이다.”

그건 아니지. 모두가 아는 일인걸. 그러니 술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 주며 백성을 끌어들인 거겠지. 국법을 어기면 성가신 일이 벌어지고 죄를 뒤집어쓴다는 것도 고려했을 테고.

“대인, 저는 그저 사람을 관아로 데려다 놓고 일이 잠잠해지게 하려던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놈들이 글쎄…….”

유금천이 말을 더듬으며 해명하자, 고능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뜻밖에도 그놈들이 관리를 겁내지 않고 관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백성이었겠지. 어린 계집애한테 걸려들 줄은 몰랐을 거야. 술을 핑계로 체포할 생각만 떠오르고, 다른 생각은 안 떠올랐더냐?”

고능준이 유금천을 보며 말했다.

“유금천, 중서문하성 비각에 있던 유장(劉璋)을 기억하느냐?”

생소한 이름이었다. 유금천은 관두고 옆에 있던 부윤조차도 멈칫했다가 한참 만에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승진의 기쁨으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중풍을 얻고, 후에는 아들이 지은 죄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된 채 나귀가 끄는 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유 교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자 얘기는 왜?

“지금 자네의 지위가 병을 얻기 전 그자에 비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나?”

고능준이 물었다.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온 후로, 지방 지현(知縣)과 통판으로 임직한 게 벌써 십 년이었다. 뛰어난 치적 덕에 천거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고는 하나, 아직 중서문하성 비각 교리에 비할 위치는 아니었다.

한 오륙 년, 아니, 십 년쯤 지나면 조정 관리가 될 수도 있겠지. 물론,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는 전제하에.

유금천이 수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소관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장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무슨 근거로 태평거와 신선거 사람들이 자네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뭐라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으로 고능준을 쳐다봤다.

들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당초 유 교리의 일이…….

“태평거와 신선거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고능준이 물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라고…….”

유금천이 얼른 대답했다.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고능준이 웃음을 멈추고 유금천을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쓸모없는 놈, 냉큼 꺼져라!”

고능준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밖에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공개적으로 그런 욕을 듣고 따귀까지 맞았으니, 이제 유금천은 경성에 발을 붙이지 못할 터였다. 유금천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저런 쓸모없는 놈을 봤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뭣도 모르면서 손을 써? 그 산이 어떤 산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호랑이를 때려잡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여긴 어쩌자고 죄다 저런 쓸모없는 놈들뿐인 거야?”

대청에 고능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관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고능준은 한참 동안 호통을 치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이제 어쩔 셈인가?”

고능준이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부윤이 눈치를 주자 관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대인, 태평거와 신선거는 문을 닫고 휴업에 들어갔습니다만, 그건 저희 뜻이 아니옵고…….”

고능준은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들 뜻이 아니어도, 자네들 뜻이 되지 않았는가.”

관졸들이 태평거와 신선거에 와서 소란을 피우고 돌아간 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장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지금, 신의 낭자와 전사한 다섯 용사, 홀로 남겨진 아들의 슬픈 사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전기수들에게 더없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됐다.

경성에서는 불과 하루도 안 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크고 작은 술집과 찻집에서, 거리와 골목에서, 대갓집 안채와 마당에서 무원산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관부는 백성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태평거와 신선거는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집안에 일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관부의 행패 때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는 그저 술과 사람에 관한 잡담이 오가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조정과 관부까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백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분노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인, 이 일을 무마하긴 힘든 겁니까?”

부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사실 저희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잖습니까. 저들이 멋대로 술을 뿌렸으니, 관부에서 어찌 된 일인지 조사하는 건 당연합니다. 말이 오가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이니, 사정을 설명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이 그러하니까?”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정사에 사실이 중요했지?”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필요야. 폐하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조정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백성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고, 저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어야 해.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사실엔 아무도 관심 없어!”

그래서 노사안이 감히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이다. 폐하께 보여 드릴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그런데 뜻밖에도 유금천 그 쓸모없는 놈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민심을 부추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운이 고능준 편에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럼 대인, 정말 강문원을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사, 사실 이건 사소한 일이잖습니까.”

부윤이 물었다.

“사소한 일? 엄청난 일 치고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 않는 게 있던가? 서둘러 각자가 필요로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일이 연루될 게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받아내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겠지.”

그랬다. 조정의 분쟁은 언제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가 탄핵에 탄핵을 거듭하며 끝없이 이어졌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연루된 사람도 점점 늘어나,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끝났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실패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승부는 나기 마련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지만, 나쁜 결과도 고려해야 했다.

또 그 탈영병들이 문제로군! 지난번엔 내 계획을 망치더니, 이번에도 또!

또 그들이야! 아니지, 또 그 여인이야! 그 여인!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도, 이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니!

태평거와 신선거의 내력과 그 뒤에 있는 이의 신분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난번에 그 여인이 이황자를 고칠 수 있는지 여부 외에 다른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때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면, 이리 성가신 일도 없었을 터인데.

“강주 바보!”

고능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강주 바보.”

한편 진 노태야도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다만 진 노태야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앞으로 경성엔 두 개의 강주가 있겠구나. 하나는 강주 선생, 하나는 강주 바보.”

진소가 차를 우려 건넸다. 진 노태야가 찻잔을 받으며 손을 내저었다. 회랑 아래에 앉아 무원산 이야기를 전한 사환이 얼른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넌 잠시 기다렸다가 하소연을 받아 줄 생각이었지만, 놓친 게 있다. 그 여인이 어디 기다리는 사람이더냐.”

진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리기는커녕 아예 만백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온 경성이 술을 탐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온 경성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지요.”

진소는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여인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이 계속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어쨌거나 넌 그 낭자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노사안은 더더욱 고마워해야 하고.”

진소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당 문 밖에서 사환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대인, 속히 입궐하시라며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진소가 사환과 부친을 차례로 쳐다봤다.

“왔군요.”

궁에서 온 부름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서문에 위치한 송(宋)씨네 점포는 경성에 있는 술집 중 손에 꼽힐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아이고, 반근 낭자랑 대관리인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송씨네 점포의 관리인이 웃으며 인사했다.

신선거와 태평거를 관리하는 시녀와 대관리인은 경성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우리 점포가 문을 닫았으니, 밥 먹을 곳을 찾아봐야 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송씨네 관리인에게 말했다.

“거리에 인접한 상등 방으로 주세요.”

무언가 더 말하려던 송씨네 관리인의 시선이 시녀를 뒤따라 들어오는 남녀 한 쌍에게서 멈췄다.

소년 공자는 귀티가 나는 차림새였다. 화려한 옷자락이며 허리춤에 걸린 옥패, 움직임에 따라 언뜻언뜻 보이는, 은실로 수놓은 신발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관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멱리로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송씨네 관리인은 세상에 다시 없는 진기한 보물이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대관리인만 온 게 아니구나. 행수까지 왔어! 그 무원산이라는 독한 술을 먹을 기회가 나한테도 온 것인가?

“아씨, 이곳으로 드시지요.”

송씨네 관리인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친히 길을 안내했다.

이들이 막 점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성 밖에서 들어온 마차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 안에서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나와 휘장을 들어 올리자, 청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

“언니, 정말 진 공자님이네요.”

옆에 있던 춘령이 바깥을 쳐다보며 말하고는, 점점 멀어져 가는 주점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진 공자님을 뵙네요. 글공부로 바쁘신 줄 알았더니, 미인과 함께 놀러 다니시나 봐요. 요즘엔 왜 언니를 통 안 찾아오시죠? 언니를 잊으셨나.”

“허튼소리 마. 저분이 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큰일 날 일이야.”

주 낭자가 대꾸했다.

“명문가의 자제가 향락에 빠지면 체통은 어찌하고? 더구나 저분이 언제 날 찾아오셨니? 다른 이의 초청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동석한 거지.”

춘령이 헤헤 웃었다.

“맞아요. 진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죠.”

그렇기에 존경하고, 그렇기에 못 잊는 것일 테고.

마차는 성안으로 달려갔다.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란이 일더니 행인들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급보를 전하는 역참의 병사가 말을 탄 채 내달렸다.

“서북으로 갈 급보로군요.”

진십삼이 멀어져 가는 병사를 보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멱리를 벗고 청초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 급보가 전해지면,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온 천하가 낭자를 알아볼 테고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느릿느릿 먹기 시작했다.

“난 언제나 여기 있었어요. 알아보든 말든, 보든 못 보든 그건 남의 일이죠.”

정교랑도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려 한 적도, 알려지지 않기 위해 숨은 적도 없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진십삼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던가.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진십삼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가족에게 버림받았으면 어떻고, 경성이 살기 힘들면 어떠하랴.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는 이들이 있으면 또 어떠하랴. 고관대작에게서 먹을 걸 챙기고, 횡포를 부리는 무뢰한은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험한 가시밭길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센 풍랑과 위험천만한 일들도 그녀의 눈에는 맑게 갠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똑같았다.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진십삼과 허공에서 부딪치고, 소매를 들며 단숨에 비웠다.

용곡성은 8월 하순이 되자 벌써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출한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 관구, 이 편자를 박으면 정말 얼음 위에서도 빨리 달릴 수 있습니까?”

대장간처럼 생긴 초막 밖. 병졸들이 쭈그려 앉거나 일어선 채 초막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초막 안에서 웃통을 벗은 사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번 겨울에 양마하(亮馬河)를 건너 오랑캐 땅으로 쳐들어가 영지를 회복할 수 있는 겁니까?”

병사들이 웃으며 물었다.

“물론이지.”

사내가 대답했다. 대장장이들이 건네는 편자를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던 그는 이번에도 던져 버렸다.

“두께가 일정치 않잖아.”

대장장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얼른 다시 만들러 갔다.

사내는 매어 놓은 말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능숙한 동작으로 말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옆에 있는 나무판 위에 말굽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들어 올렸다.

이제 군마는 거의 다 편자를 박은 상태라 말편자를 보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달궈진 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병졸들이 차마 못 견디고 신음 소리를 냈다.

“얼마나 아플까.”

누군가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열댓 살쯤 된 어린 병졸이었다. 여위고 허약해 보이는 체구에 안색도 창백하고, 군복은 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게 꽤 흥분한 눈치였다. 서사근이 형제들과 함께 연줄을 통해 처음 군영에 들어와 군복을 받아 입었을 때도 아마 저런 모습이었으리라.

“아프지도 않고 어떻게 빨라지겠느냐.”

서사근이 껄껄 웃으며 말편자를 박고 인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긁개를 들어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둔 말굽을 쓱쓱 다듬었다. 넋을 놓고 그 능숙한 동작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덧 말편자 네 개가 깔끔하게 박혔다.

“서 대인, 손재주가 대단하십니다.”

다들 칭찬을 늘어놓자 서사근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래. 서 대인의 손재주는 정말 대단하지.”

문밖에서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사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걷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무관 셋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관청 사람들이었다. 병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서 대인.”

그중 한 무관이 입을 열었다. ‘대인’이라는 두 글자에 특히 힘이 실려 있었다.

“여기 일하는 게 아주 즐거워 보이는군.”

“관복을 갖춰 입지 않아 예를 못 올리겠군요. 이건 소생이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서사근은 관구로 군마에 관한 일을 맡고 있지만, 말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었다. 벌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서사근, 시답잖은 소리나 하자고 온 거 아니다. 요즘 다친 군마가 몇이나 되는지 대답해 봐라.”

무관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부 스물다섯 필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대답 한번 뻔뻔하구나.”

다른 무관이 눈을 부라리고 나서며 호통을 쳤다.

“군마를 관리하랬지, 누가 군마를 못쓰게 만들랬느냐?”

“최고의 편자를 만들어 냈으니, 못쓰게 됐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올겨울엔 우리 군마가 더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겁니다. 말 스물다섯 필을 바쳐 무수한 오랑캐의 목숨을 취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값지지요.”

서사근의 말에 무관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저 자식이 만든 말편자가 쓸만한 건 사실이니까. 편자가 없을 때도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다지만, 저게 생겨서 해가 될 건 없잖아. 말의 손상이 줄어드니 군에 배정되는 말도 점점 늘고 있고.

더 이상 전처럼 말편자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공을 다투는 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말편자에 있어서 저놈은 자신감이 넘치고, 우린 아니니까.

“여기서 열심히 잘해 보라고.”

무관들은 비꼬는 듯한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떴다. 막 문을 나서는데, 무관 하나가 깜빡한 게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무수.”

무관이 갑자기 소리쳤다. 서사근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이름을 불렀던 무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미안.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자꾸 실수하네. 서무수가 워낙 깊은 인상을 남겨서 말이지. 제가 무능해서 죽어 놓고 공을 바라는 놈은 처음 보거든. 용곡성 밖에 누워 있던 병사들도 죄다 벌떡벌떡 일어날 일이야.”

긁개를 쥔 서사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귓가에 계속해서 무관의 말이 들려왔다.

“난 그런 쓸모없는 놈들 못 봐.”

서사근이 무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마당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누군가가 무관을 기습했다. 다들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사이, 비꼬던 무관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벌써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기습한 이는 무관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달려들어 거침없는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재빨리 떼어 놓긴 했지만, 그 무관의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눈, 코, 입 가릴 것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손을 들어 피를 닦은 무관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이들이 죽자고 매달려 간신히 뜯어말렸다.

한편 옆으로 끌려간 유규의 얼굴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덤벼라, 이 개잡놈아. 아주 등신을 만들어 줄 테니까.”

유규가 소리를 지르자, 무관도 저쪽에서 괴성을 질러댔다.

“군에서 싸워 봤자 좋을 거 없어.”

“저런 자식을 뭐하러 상대해.”

“앞길을 생각해야지. 자포자기하면 쓰나. 우리까지 저놈이랑 똑같아질 순 없잖아.”

다들 무관을 말리며 유규를 쳐다봤다.

유규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도 지저분한 상태였다. 몸에선 술 냄새가 풍겼고, 눈도 게슴츠레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유규는 또다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요즘 유규는 아예 군인을 때려치운 듯 허구한 날 군영에서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웠다. 상부에서 유씨 가문에 알렸으니 몇 달 내로 쫓겨날 터였다.

이번에 돌아가면 저번처럼 미관말직이나마 경성에서 순찰을 맡기도 힘들 테니, 집으로 돌아가 쉴 게 뻔했다. 군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으며 살 테고.

“저런 쓸모없는 놈을 패는 데 쓰기엔 내 주먹이 아깝지.”

무관은 이를 갈며 그 한마디를 내뱉고,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쓰레기 같은 자식. 자기편 때릴 때나 쓰는 주먹이면서. 이 몸이 기다리고 있으마. 어디 한번 와서 때려 보라고!”

유규가 악을 썼다. 무관들이 떠나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유규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유규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쓱 닦았다.

“보긴 뭘 봐, 싸우는 거 처음 봐? 계속 그렇게 보면 가만 안 둔다!”

유규가 소리를 지르자, 구경하던 이들은 같잖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를 떴다.

“미친놈.”

“정신 나갔어.”

“겁쟁이 자식.”

비웃으며 수군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유규는 그런 말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달려들었다. 호리병에 든 술이었다.

유규는 술병을 들어 쓱쓱 닦고,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술이 입가에 묻은 피와 섞여 흘러내렸다.

서사근이 들고 있던 긁개를 내려놓고 걸어왔다.

“정말 폐인이 됐군요.”

“폐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아.”

유규가 서사근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긴, 난 여기 서 대인과 비교가 안 되지. 종일 공무에 매달려 있으니, 승진하고 부자 되는 일만 남았잖아.”

서사근이 유규의 손에서 술병을 홱 낚아채 바닥에 매섭게 내던졌다. 술병이 깨지면서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사근 이 개자식, 너 미쳤어?”

유규가 벌떡 일어나 서사근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급보요, 경성에서 온 급보!”

전령이 소리를 외치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경성에서 온 급보?

서사근이 움찔하며 유규를 잡았던 손을 홱 뿌리치고 급보를 든 전령이 간 방향으로 뒤따라 뛰어갔다. 급보가 곧장 관청으로 들어간 모습을 본 서사근은 길가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관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념하라니까.”

유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쫓아왔잖아. 그런데 결과는 어땠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놈은 여전히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잘살고 있다고.”

“모르는 일이오. 모르는 일입니다.”

서사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일이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유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망이 없는 일이라니까. 아무 쓸모도 없어!”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라고.”

서사근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르는 일이지! 모르는 일이야!

“넷째 도련님, 넷째 도련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서사근이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고개를 돌리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꿈에서 수도 없이 본 광경인데…….

이번엔 진짜인가? 진짜 사람이 온 건가? 진짜 이루어진 거야?

“넷째 도련님, 큰 도련님의 서찰입니다.”

달려온 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서찰을 건넸다. 서사근은 침을 꿀꺽 삼키고 쭈뼛쭈뼛 서찰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범강림은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았고, 서사근 역시 아는 글자가 몇 안 됐다. 형제들끼리 상황을 아는 처지라 서찰도 간단명료하게 쓰곤 했다. 편지에는 ‘말[說]’이라는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말이라…….

말해도 된다? 말할 수 있다? 말할 것이다?

서사근은 서찰을 손으로 꽉 쥐며 늘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등을 구부렸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엄습하자 서사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니까. 누이라면 충분히 해낼 거야.

“대답해라. 이게 무슨 뜻이지?”

관청에 있는 강문원이 손에 든 문서를 보며 놀라 물었다.

“대인, 이건 대인께서 대답하실 문제입니다.”

병사가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문원이 들고 있던 문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내가 뭘 대답해! 내가 대답할 게 뭐 있단 말이냐! 상벌이 불분명했다고? 공을 탐해 조정을 속여 상을 가로챘다고? 내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해야 한단 말이냐?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병사가 호통에 놀라 쭈뼛거렸다.

“폐하께서 노정이 대인을 탄핵한 상소를 받아들이시고, 무원산 형제들의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 명하셨단 뜻입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전할 말을 다 전했다.

무원산 형제들!

강문원이 눈을 부릅뜨며 병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무원산 형제들이 뭔데?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대인, 이 문서에서 말하는 이는 범석두, 서무수 등인데…….”

막료가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인, 저들이 결국, 일을 키웠습니다.”

저들?

멈칫하던 강문원은 한참 기억을 더듬은 끝에 그들이 누군지 생각해 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다시 문서를 들고 살펴봤다.

“……무원산 다섯 용사들이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여 그 충절이 천지를 뒤흔들었으니…… 사대부들이 이를 논하고 백성들까지 소동을 일으켜…… 애석하게도 전사한 다섯 용사는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고집 센 강문원은 주변의 말을 듣지 않아…… 천자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바…… 성총을 흐리며 거짓말로 군주를 기만하는 강문원 같은 무리를 결코 그대로 두셔선 안 될 것이옵니다.”

거기까지 읽은 강문원은 더는 못 읽겠다는 듯 다시 문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노정! 네놈을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겠다!”

“대인, 이젠 노정의 일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 다섯 명입니다.”

막료가 얼른 말했다.

그 다섯 명이라…….

강문원이 대청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놈들이 제법이구나. 결국 경성으로 가 일을 벌이다니.”

강문원이 씩씩거렸다.

대인, 후회하지 마십시오.

귓가에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났구나, 이 주가 놈! 네놈들이 탄핵하면 이 몸은 반격을 못 할 성싶으냐?”

질책과 탄핵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지.

강문원은 규방에서 자란 고고한 낭자처럼 지내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그였다.

마지막에 누가 후회하나 어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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