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60)

-기회-

박양 군주의 시회가 끝나고, 진십팔랑이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온 경성에 퍼졌다. 풍문을 들은 덕에 진소도 진십팔랑의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진소는 진십팔랑이 시회에서 썼던 종이를 보며 감탄했다. 평소에는 엄격하고 근엄한 아버지인 진소였지만, 진십팔랑의 글씨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2년 내내 부지런히 갈고 닦은 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진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요. 저는 십팔랑이 방 안에서 매일 좌선하는 줄 알았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그 애들이 맨날 십팔랑은 시도 못 쓴다고 놀리고 비웃어서, 저희가 얼마나 분했는데요.”

“맞아, 맞아. 시를 좀 못 쓰는 게 뭐 어떻다고. 정작 자기들이 지은 시도 별 볼 일 없던데, 제깟 것들이 어디 우리 십팔랑처럼 한림에 들어갈 정도라는 호평을 받을 수 있나?”

“맞아요, 아버지. 그때 그 애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까딱하다간 눈알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어요!”

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진소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군자로서 옳지 않은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명예를 추구하다니. 아버지께서 말씀이 심하시네.

방 안에서 웃고 떠들던 소녀들은 진소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해졌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리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매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십팔랑을 감쌌다.

“아버지, 십팔랑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시회에 나가서 글씨를 써 봤자 큰 감흥도 없을 테니, 서예를 잘 아시는 박양 군주의 시회에 가자고 저희가 조른 거예요.”

“맞아요, 아버지. 저희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명예를 좇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진소가 음, 소리를 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감언이설을 삼가거라. 잘못된 행동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법이다.”

딸들이 더는 토 달지 않자, 진소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좀 전에 진십팔랑의 시녀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진십팔랑은 2년 동안 글씨 연습을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한다. 해질 정도로 쓴 붓과 버린 종이들이 넘쳐나고, 붓을 씻는 작은 연못까지 검게 물들일 정도로.

새해나 명절 때도, 나들이를 나가는 대신 방에 틀어박혀 밤낮없이 글씨를 연습했고, 집안 아들들이 글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던 진십팔랑을 떠올린 진소는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분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젊은이에게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말겠다는 목표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유혹이겠지. 그 목표가 없었더라면,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글씨 연습을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야.

늘 그렇듯,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는 법이니까.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글씨 연습을 한 것이냐?”

진소의 물음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서예를 배우는 것은, 그저 제가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잘하고 싶을 뿐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 제 본심을 위해 했을 뿐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팔랑의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은 한결 더 온화해졌다.

“앞으로도 게으름 피우지 않도록 해라.”

진소의 화가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박양 군주가 네 글씨를 폐하의 탄신일에 바칠 예정이니, 새로 글씨를 써 드리거라. 시를 쓸 필요는 없고, 경서를 베껴 쓰면 된다.”

진소의 말에 딸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설마 우리가 지은 시가 형편없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평가할 필요가 있느냐. 시를 쓴 너희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아버지,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아휴, 우리도 후회해야겠네. 본디 집안의 자랑은 우리였는데, 이젠 십팔랑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됐으니!”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던 진소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진소가 이렇듯 화기애애하게 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쉬이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진소 부인은 진십팔랑의 글씨를 또 한참 칭찬하고는 딸들을 물러가게 했다.

“정 낭자가 경성에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인사를 오지 않지? 사람을 한번 보내볼까요?”

진소 부인의 물음에 막 방을 나섰던 진십팔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 없소. 며칠 전에 알아봤는데, 집에 없다고 하더군.”

진소가 대답했다.

“안 왔구나. 일 년 넘게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정 낭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지경이에요.”

진소 부인이 한탄했다.

“십팔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십팔랑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웃으면서 자매들을 따라나섰다. 등 뒤로 들려오는 부모의 대화 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갔다.

“서신도 보내오지 않았단 말이오?”

진소의 물음에 진소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왜요? 낭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그때 태평거에서 잡아들인 탈영병들을 기억하시오?”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다마다. 눈에 띄지도 않는 탈영병들이었지만, 결국에는 서북 인사권까지 흔들었고 그들 때문에 노야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지. 그 일로 노야가 꽤 오래 답답해하기도 했고.

“그중 다섯 명이 전사했소.”

진소가 말했다. 진소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 그럼 정 낭자 마음이 말이 아니겠네요.”

그때 정 낭자가 탈영병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던 것으로 봐서는, 낭자가 꽤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던데.

예부터 전쟁에 나간 이후로 살아 돌아오는 사람은 몇 없었다. 무정(無定) 강변의 해골이 되어 잠든 아내의 꿈속에서만 살아 있는 이도 수없이 많았다. 참전한 병졸들과 그의 가족들은 전장에 나가는 순간부터 이런 결말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소 부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북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이다 보니,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병사들의 죽음은 전사자들의 가족에게는 비보지만, 조정에서는 언급도 안 될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기껏해야 죽은 자들의 숫자를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고위 관직이 아니라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땅속에 묻히는 병졸들이 수두룩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하고 당연한 일이 참정 대인인 진소의 귀에까지 들어왔으니 의문일 수밖에.

“그자들이 죽은 뒤에, 공로와 연관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소.”

진소가 말했다.

장수끼리 서로 공로를 다투고 책임을 미루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미 죽은 병졸들과 공로를 두고 다툰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이 일로 정 낭자가 당신을 찾아올 것 같아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잘 모르겠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본디 이런 일에 진소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야 정상이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은 진소에게까지 보고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소가 이 일을 알게 된 건 주봉상을 통해서였다. 전에 그에게 탈영병들에 대해 귀띔한 적이 있었기에, 주봉상이 이 일을 서신으로 진소에게 은밀히 고한 것이다.

하지만 죽은 병졸 몇 명의 공로를 챙겨 준답시고 참정 대인인 진소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이 일에 나서게 된다면, 이 일은 더 이상 병졸들의 사소한 공로 싸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황제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고,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할 만큼 대승을 거둔 전투. 이럴 때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와 이 기쁜 일을 기쁘지 않은 일로 만든다면, 이는 세상에 아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 낭자가 정말 나를 찾아온다 해도, 이번 역시 정 낭자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답변을 주지는 못하겠군.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낭자가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주고, 그 대가를 지불한 후로, 그 여인은 꼭 사사건건 나와 대립하는 입장이란 말이지.

“노야, 너무 걱정 마세요.”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자, 진소 부인이 다독였다.

“이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마음 같아서야 전사자들의 공을 모두 인정해 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잖아요. 속상하고 가슴 아프기야 하겠지만, 정 낭자가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모를 일이오. 정 낭자는 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구석이 있어.”

진소 부인이 미소지었다.

“공연한 생각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정 낭자는 여인의 몸인데,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어요.”

진소가 반박하려고 하자, 진소 부인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알아요. 또 탈영병 때 얘기를 하려는 거죠? 그 일은 공교롭게 됐던 것 아닐까요? 자신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물론 장강주 선생이 일을 그렇게 크게 만들 줄은 몰랐지만요.”

어디 그뿐이었나. 살인에 방화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여인인데.

진소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 불안함이 가시질 않네. 정말로, 그 여인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닐까?

같은 시간, 주씨 저택에서는 주 노야가 주육낭을 추궁하고 있었다.

“정말로 네게 뭘 하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느냐? 그리고 왜 오자마자 또 떠난 게야?”

주 노야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부탁한 것 없습니다.”

“왜 없어?”

주 노야가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다그쳤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네가 서북에서 그 애를 위해 한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아버지, 제가 했던 일들은 제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 누구를 위해서 한 일은 더더욱 아니고요.”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반박했다.

“널 위한 일이든, 그 애를 위한 일이든, 어쨌든 남의 눈 밖에 나게 되지 않았느냐. 남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면, 기필코 그자의 뿌리까지 없애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네 뿌리가 전부 뽑힐 것이야.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들이닥칠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뿌리를 뽑아서 아예 화근을 없애 버리라고?

주육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인은 물론 남의 뿌리를 뽑겠지.

“진짜로 그 애가 네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는 거냐?”

주 노야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교랑을 본 적도…… 아니, 그때 이후로 본 적도 없고요.”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누이가 진(秦)씨 가문의 그 녀석한테 묫자리를 알아보라고 했다는데, 왜 너한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냐는 말이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주육낭에게 물었다.

저도 알고 싶다고요!

주육낭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네 누이는 도대체 어딜 간 건데?”

주 노야가 추궁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주육낭이 소매를 홱 털고는 자리를 떠났다.

“뭘 물어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릅니다! 누가 보면 진씨 가문 절름발이가 그 애의 오라비고, 네가 남인 줄 알겠어!”

주육낭은 주 노야의 호통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고약한 여인 같으니라고!

난 네가 뭘 하든,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 내가 진십삼을 찾아가서 무슨 사정인지 물어볼 일은 더더욱 없을 테고!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정오가 되자 더욱 거세게 쏟아졌다. 바닥에 깔린 청석판 위로 부딪히는 빗방울은 쉼 없이 물결을 만들어 냈다.

경성에서 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한 마을. 거리에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한 사내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다소 누추해 보이는 점포 앞에 멈춰 서서 빗물을 대충 털고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장, 술 좀 내주시오.”

사내가 두봉을 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점포 안쪽에서 왜소한 모습의 남자가 걸어 나오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다 떨어졌으니, 다른 가게로 가 보시오.”

이제 막 두봉을 벗은 사내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이봐, 노(路)씨, 양조장이 잘 안 돼서 넘기려고 그러나? 인수할 사람도 못 찾았으면서 벌써 술을 안 빚는 거야?.”

노사(路四)가 침을 퉤 뱉으면서 대꾸했다.

“장사 잘만 되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술을 빚지 않은 게 아니고, 이미 다 팔린 거요.”

다 팔렸다고?

“이딴 양조장 술이 다 팔릴 수가 있다고?”

사내가 더욱 놀란 눈으로 말했다.

노사가 운영하는 양조장은 경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성에서는 워낙 질 좋은 술을 많이 팔다 보니, 노사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양조장에서 만든 술은 그런 경성의 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작은 규모의 양조장이라 관주와 비교해도 술값이 딱히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노사의 양조장은 늘 장사가 안 됐다. 근방의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반은 거저 주다시피 하며 장사를 해 왔기에 작년부터 곧 문을 닫을 거란 말이 돌았다.

“지금 빚어 놓은 술 외에도, 앞으로 열흘 동안 빚을 술도 다 팔렸소만.”

노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사내는 노사를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장사가 너무 안 되다 보니 결국 미친 건가?

“내가 만든 술은 물을 타지 않아서 순수하고 정통의 맛을 가지고 있다고 내 일찍이 말하지 않았소. 그 맛도 모르던 자들이 이제 와서 내 술을 먹겠다고? 이미 늦었어.”

노사가 어깨를 으스대면서 말했다. 사내는 노사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내가 나가자마자, 또 다른 두 남자가 점포 안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기름을 칠한 우의 차림에 두모를 쓰고 있었다.

“주인장, 술은 준비됐소?”

노사가 두 남자를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예, 예. 준비됐습니다.”

노사는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 외에,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문가로 뛰어가 두 손을 들어 안내했다.

“아씨, 안으로 드시지요.”

고개를 숙인 노사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여인과 시종들이 다 지나간 뒤에야, 노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기름칠 된 우산 아래에서 시종들과 함께 유유히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어느 집안 규수가 이리 술을 좋아하지? 양조장에 있는 술을 죄다 사들여 유희를 즐기다니.

“중서문하성의 노(盧) 검정(檢正)이 서북 일에 대해 물었다고?”

관청 안에 있던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청색 관포를 입은 관리가 고능준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묻는 것이었는가, 진소가 묻는 것이었는가?”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면서 물었다.

“주봉상이 진 대인과 꾸준히 사적인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청색 관포를 입은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지난번 서북 인사 책봉으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서북의 경략사 직책은 아직도 공석이었다. 고능준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조정에서의 발언권도 강해지다 보니, 강문원이 아무런 잡음 없이 경략사 자리에 오를 날도 머지않은 터였다.

경략사 자리만 확보하면, 근본도 없는 주봉상을 감찰사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어.

그래서 진소가 초조해진 건가? 하긴, 2년이나 지났는데도 제대로 된 칼자루 하나 쥐지 못했으니.

“그래서, 지난번 전투에 대해 무슨 수를 쓰겠다는 건가?”

고능준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진소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폐하의 얼굴에 따귀를 날리는 꼴이니.”

“진 대인과 주 감찰의 서신에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노 검정이 무엇에 대해 물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청색 관포를 입은 사람이 말했다.

“말해 보게.”

고능준이 말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남의 공을 가로챈 장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노 검정이 대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어상 위에 있던 황제는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위의 관리들은 비웃는 이도 있고, 무표정인 이도 있었다.

노 검정은 자신을 부른 것이 분명 좋은 일 때문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듣자니 서북에서 짐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다지?”

황제의 목소리가 노 검정의 머리 위로 스쳤다. 노 검정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진소를 쳐다보았다.

진소는 아무런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강문원 외 몇몇 이들이 짐이 내리는 포상을 거절했소. 이번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들은 모두 최전선에 있던 병사와 장수들이라더군. 자신들은 직접 전장에 나간 게 아니니 공로를 인정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했소. 불복하는 이가 있을까 봐 겁난다나.”

황제가 담담하게 말하면서 냉랭한 시선으로 노 검정을 내려다보았다.

“노사안(盧思安), 그대 생각에, 누가 불복할 것 같소?”

노 검정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 감히 불복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대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휘관과 장수들의 현명한 판단과 전술 덕분입니다. 그들은 포상을 받아 마땅하옵니다.”

“그럼 그대가 불복하는 것인가?”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묻자, 노 검정이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이 어찌 감히요. 당치 않습니다.”

“폐하.”

진소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강문원이 어명을 무시하고 경솔하게 행동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명예를 탐낸 것이니, 벌을 내리셔야 마땅하옵니다.”

진소가 아닌 다른 대신이 이런 말로 조정의 얼굴을 후려쳤다면, 황제는 그 대신이 제발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빌 때까지 호통을 치고 따끔하게 훈계했을 것이다.

게다가 진소가 말한 자는 강문원 등 서북의 고위 관리들이었다. 그들이 서쪽 오랑캐의 정예병들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것은 가히 큰 공로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대승을 기념하며 서북을 치하하고 포상을 하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진소는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 검정을 위해 나선 자가 진소였기에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노 검정은 진소가 천거한 인사였기 때문에, 노 검정이 암암리에 서북 전투의 일을 조사한다는 사실은 곧 진소가 그 일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정말로 진소가 노 검정에게 조사를 시켰는지는 증거가 없으니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시점에 진소가 노 검정을 위해 나선다는 것은 자신이 조사를 명했다고 자백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노 검정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진소는 매정하고 의리가 없으며, 제 몫만 챙기기 바쁜 비겁한 자라는 수식어를 얻게 될 것이었다.

어찌 됐든, 이번 일로 진소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몇 순위는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고능준의 입꼬리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강직하고 아첨을 떨지 않는 진소의 모습에 감탄했다.

진소가 뭐라 더 말을 덧붙이려고 하자, 노 검정이 한발 앞서 말했다.

“폐하,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상을 내리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노 검정이 이를 악물고 뒷말을 뱉어냈다.

“소신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소신이 직접 서북으로 가서, 강 대인과 장수들에게 포상을 전달하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제 발로 경성을 나가겠다는 뜻이군!

황제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보았느냐. 이것이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좇는 행동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내 기꺼이 윤허해 주지. 조정의 대신 하나 잃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짐은 이번 포상에 대해 불복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소. 그러니 짐을 대신하여 서북으로 가서 알아보시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억울한 건지, 짐이 내리는 포상에 대해 불복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보라고.”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들이 물러나자, 황제가 피곤한 기색으로 어상 한쪽에 기댔다. 어상 아래 서 있던 대황자가 서둘러 황제 곁으로 다가갔다.

“아바마마, 궁으로 돌아가셔서 쉬심이 좋겠습니다.”

대황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제가 물었다.

“원망입니다. 저들은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대신들의 말을 들으면 아니 되옵니다. 강 대인의 공로를 만천하가 아는데,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그 공로를 무시한 채 트집만 잡으려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들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훗날 군사 관련 일을 추진할 때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황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다른 한쪽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위낭, 네 생각은 어떠하냐?”

진안 군왕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한 뒤 말했다.

“소신은 이 일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노사안이 이 일을 조사하는 것도 수상하고, 강문원이 굳이 포상을 거절한 것도 수상하며, 진 상공이 한 말도 수상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일은 원망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황제가 이마를 누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보았느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쁜 일이든, 기분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이든 간에, 짐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는 대신들은 항상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다. 깨알만 한 일에도 암투를 벌이면서 서로를 공격하곤 해. 아마도 저들은 영원히 저렇게 서로 뒤엉켜서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을 것이야.”

“폐하께서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저들을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폐하가 계시기에 저들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 아닙니까. 나라를 위해 공로를 세우는 대신들이라면, 굳이 저들의 속내까지 살피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안 군왕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진안 군왕과 대황자에게 말했다.

“다들 피곤할 텐데, 그만 궁으로 돌아가 쉬거라.”

진안 군왕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렸다. 황제의 의장이 멀어지는 것을 본 대황자가 분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태후궁으로 가시는 거라면, 저와 같이…….”

진안 군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는 소매를 홱 털며 자리를 떴다. 진안 군왕은 대황자의 무례함이 익숙한 듯 입꼬리를 올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쥐를 진미라 여기는 것도 모자라, 봉황을 시기하는 마음 그칠 줄 모르는구나(不知腐鼠成滋味, 猜意鵷雛竟未休 - 이상은李商隱)!”

진안 군왕이 느긋하게 시를 읊었다.

어리석은 것은 대황자나 다른 사람이나 다 똑같았다.

한편 노 검정은 진소를 향해 예를 올리고 있었다.

“대인,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대인께서 소인을 천거해 주신 은혜를 갚지 못할망정, 대인을 함정에 빠트리다니요.”

노 검정이 울먹이면서 사죄했다.

“사안, 자네도 참. 왜 갑자기 그런 걸 알아본 게야?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왜 하필 이때 조사를 해? 지금 그런 짓을 한다는 건, 폐하의 용안에 따귀를 날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가 아닌가.”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참지 못하고 노 검정을 나무랐다.

“내 탓일세. 내가 사석에서 주 감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어.”

진소의 말에 노 검정은 더욱 속상해 울기 직전이었다.

“대인, 이게 다 소인이 멋대로 행동했기에 대인에게 폐를 끼친 것입니다.”

“아직 조심성이 부족해 그랬겠지. 관청에 고능준이 심어 놓은 귀가 몇 개인데.”

옆에 있던 사람이 안타까워하면서 말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게. 이참에 잠시 나가서 화를 피하는 것도 좋은 일이야.”

그렇지요. 이젠 그럴 수밖에요.

노 검정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진소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고능준이 먼저 횃불을 가로채 황제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분노를 일으키다니, 진소 쪽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다짜고짜 욕을 먹고 체면을 깎였으니.

이를 어쩌면 좋지? 정 낭자가 나를 찾아온다면, 핑계를 대서 거절하기는커녕 그 여인을 뜯어말려야 할 지경이 됐어. 또 지난번 탈영병 사건 때처럼 되어 버렸군.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이번 일로 나를 찾아올 생각이 없을지도.

부인의 말처럼,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이길 바라야겠군. 그 여인이 경성에 올 일도, 그 탈영병들 때문에 일을 벌일 가능성도 없다고 믿고 싶어.

고능준이 이 일에 손을 대든 안 대든, 이 일을 입에 올리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그 병졸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또 몰라도, 이미 죽은 자들의 공로를 논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쓸모없는 일이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 뻔한데, 굳이 그런 일을 만들어 뭐 하겠나. 의미 없는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누가 배후에서 우리의 등에 칼을 꽂은 건지는 알아내야겠다. 이제 겨우 한 수 두었을 뿐,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으니 아직 승패는 모를 일이야.”

“일단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최종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낭자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뒤, 진십삼도 진소와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찻잔을 손에 들고 누추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에서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진십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폐하께서 자신의 포상에 불복하는 이에 대해 들은 적이 없으니, 서북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했다는 거죠? 도대체 누가 불복하는 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복하는 건지 대해서 알아보라고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맞아요. 그런데 참 아쉽게 됐습니다. 나도 기회를 봐서 아버지께 이 일을 말씀드려 보려고 했는데, 그자들보다 한발 늦어 결국 이 지경이 됐네요. 한동안은 아버지께 말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 다른 방법이 더 있을 겁니다.”

진십삼이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난 원래도 성미가 급하지 않은 사람인걸요.”

진십삼이 찻잔을 내려놓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는 늘 그랬다. 아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손을 썼다 하면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진십삼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아빠진 방에, 썩은 내 가득한 양조장이라니. 정말 낭자가 즉흥적으로 거처를 옮긴 걸까?

시녀와 반근에게서 정교랑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십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 조회의 일은 우리와 상관없으니 여기까지 하고.”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낭자, 그래서 낭자의 계획은 뭡니까? 나도 좀 알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지한 진십삼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 한 번도 내가 하려는 일을 말하지 않은 적 없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오라버니의 영령을 안장하기 위해서 돌아온 거예요.”

“묫자리는 준비되었는데, 낭자는 준비됐습니까?”

진십삼이 이어서 물었다.

“곧 준비될 거예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십삼은 잠시 정교랑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낭자가 어떤 준비를 했을지 기대해 보죠.”

꼭 기대하겠습니다.

사나운 새가 먹이를 잡기 위해 낮게 날며 날개를 모으는 것처럼, 맹수가 먹이를 잡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때가 왔을 때 정확하게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는 기회를 살피며 몸을 숨겨야 했다.

그 준비가 무엇인지, 내가 꼭 지켜보겠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 여인이 자신의 흔적만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졌던 시간이 벌써 2년이었다.

진십삼은 너무도 궁금했다. 온 경성에 이름을 알린 사람이자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한 이 여인이 이번에는 또 어떤 풍랑을 일으킬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를 갈면서 강주 바보를 외쳐댈지.

“고능준 이 독한 놈!”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는데도, 노사안은 여전히 분을 못 참으며 이를 갈았다. 특히 경성을 떠나 부임지로 가게 될 7월 말, 8월 초가 가까워지자 더욱 그랬다.

노사안이 분통을 터뜨리며 길길이 날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북행을 자청하며 벌을 청한 것으로 일단락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고능준이 진언을 올린 끝에 남주(南州)로 가게 됐기 때문이다.

이유마저 지극히 합당했다. 강문원은 본디 남주에서 남쪽 오랑캐를 섬멸하며 세를 키우기 시작한 자였다. 따라서 강문원이 어떤 고생을 겪으며 공을 세웠는지 노사안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주에서부터 알아보기 시작하는 게 맞다는 이유였다.

이유야 그럴듯하다지만 누가 봐도 노사안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명확했다. 남주 땅이 어떤 곳이던가. 장려(瘴癘: 기후가 덥고 습한 지방에서 생기는 유행성 열병이나 학질)가 창궐하는 곳이라 그곳에 간 이들 중 열에 아홉은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목숨을 건져도 여생을 갖은 병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처벌이었다. 누구든 고능준에게 맞서는 자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처벌.

경성 관리는 외직으로 나가는 일을 원치 않았기에,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경성에 오래 붙어 있고 싶어 했다. 노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가 갈 곳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땅이었으니, 가족들은 벌써부터 초상 치를 일을 근심할 정도였다. 이부에서는 빨리 부임지로 출발하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재촉했다.

“이게 어딜 봐서 부임인가? 압송이지!”

노사안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덕승루의 상등 별실에서 열리는 노사안의 송별연에 참석한 이들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울분을 토하며 마시는 술인 만큼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벌써 얼큰하게 취한 이가 여럿이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장수의 명예를 더럽힌 죄라니. 일개 무관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잔뜩 취한 누군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불평을 쏟아냈다.

“공을 세우긴, 공을 세웠으면 뭐? 왕문성도 큰 공을 세웠지만 결국 죽여 버리지 않았소. 이렇다 할 이유도 대지 않고 죽여 버렸다고. 노 대인 같은 문관이 일개 무장에 대해 못 할 말이 뭐 있소? 나라가 미쳐 돌아가도 분수가 있지!”

“그럼 어쩌겠소? 이건 무장들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오. 고능준 때문이지!”

또 다른 자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 말에 별실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다들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전부 고능준 때문이지. 고능준이 벌인 일이고.

“사안 형의 송별연을 위해 모인 자리인데, 그런 쓸데없는 놈 말을 왜 꺼내시오!”

누군가가 분위기를 띄우며 말했다.

“참, 내가 노 형을 위해 좋은 걸 준비했소.”

또 다른 누군가가 자기로 된 작은 병을 꺼내며 거들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동 내한의 댁에서 간신이 얻은 환약이라오.”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3년 전 동 내한이 죽다 살아난 일은 기담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동 내한의 머리에 백발 대신 다시 검은 머리카락이 나고 혈색이 좋아진 것은 물론, 기력까지 더욱 왕성해진 터였다. 결단코 금석을 복용해서가 아니라 신의에게서 얻은 약 덕분이었다.

신의는 그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지만, 신의가 있었던 약포는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동씨 가문 외에 팽씨 가문도 거기서 천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귀한 약을 얻었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 약을 구해 오다니. 작은 병이라고는 하나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 내한이 당초 금석을 먹은 것도 젊을 때 남주에서 몸을 상했기 때문이거든. 근데 이젠 금석을 먹지 않아도 된다더군. 이 환약을 먹은 덕에 회춘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이번에 손녀보다도 몇 살 어린 딸을 얻었다던데.”

약을 구해 온 자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

“노 형, 이걸 가져가면, 남주에서 몸을 지킬 수 있을 거요.”

귀하디귀한 선물이었다. 신선이니 뭐니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지만, 어쨌거나 세상에 신비롭고 기이한 비술이 전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노사안의 얼굴이 겨우 환해졌다. 노사안은 손을 뻗어 약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려 예방에 좋을 것 같아 본디 신선거에 예약을 잡고 과로신선이나 먹을까 했는데, 글쎄 오늘 영업을 쉰다더군.”

누군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이제 경성을 떠나면 과로신선도 못 먹겠네그려.”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되지.”

누군가가 웃으며 대꾸했다.

“직접 만들어 먹으면 과로신선이 아니지. 그건 낙득자재라고.”

먼저 말했던 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신선거가 왜 갑자기 문을 닫았지? 새해 명절에도 영업을 하는 곳인데.”

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점원들한테 듣자니 주인어른을 맞이하러 가야 한다더군. 아무리 주인의 마중을 나가도 그렇지 장사까지 쉴 건 또 뭔가.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제가 신선거로 옮겨 가자,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남의 일에 뭔 걱정이 그리 많소. 오늘은 노 형을 위한 자리라고.”

“참, 그렇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좋은 쪽으로 생각합시다. 진(陳) 대인께서 어떻게든 지켜 주실 거요. 남주에 당도하기도 전에 새로운 전근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지.”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노사안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술잔을 들었다.

하긴, 뭘 어쩔 수 있으랴. 진소 대인께서 승승장구하여 다시 끌어올려 주시길 고대하는 수밖에. 옛말에 사람이 떠나면 차도 식는다고, 경성에 남은 이들이 날 기억해 주긴 할지 모르겠네.

노사안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고 안주를 집어 입에 넣었지만, 쓰고 떫은 맛만 느껴질 뿐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진탕 술을 마시고 있던 그때, 갑자기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떠들썩한 목소리까지 들리자, 송별연에 모인 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리에 사람이 많구먼.”

창문을 연 이가 말했다.

“거리엔 본디 사람이 많지 않소.”

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아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소. 누가 길을 가르며 무언가를 놓고 있는데.”

창문을 연 이가 말했다.

경성 사람의 호기심은 지위 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와 밖을 내다봤다. 과연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옆쪽 별실에 있던 이들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목을 빼며 구경했고, 복도에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술동이랑 그릇을 놓고 있군.”

누군가가 거리를 보며 말했다.

“길가에 왜 술동이를 놓지? 어느 주점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술수를 부리는 건가?”

꽤 식견이 있는 이가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다.

“저기 좀 보라고. 하나만 놓는 게 아니야. 일정 간격을 두고 거리에 쫙 깔아 놨어. 사람들도 있고.”

자리에 있던 이들이 전부 창가로 몰려가 구경하고 있는데도, 노사안은 여전히 홀로 자리를 지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경성이지. 번화하고 떠들썩한 곳. 새로운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곳. 난 이제 한동안 이런 구경을 못 하겠군. 어쩌면 평생 못 할지도 모르고.

떠들썩한 소란을 보며 노사안은 더욱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난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창가에 모여 아래쪽을 쳐다보며 떠들어대는 동료들을 보고는,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복도를 바삐 오갔다.

“대체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인지 물어봤어?”

윗전의 명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온 사환들이 떠들어댔다. 그런 소란 속에서 노사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로 나오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 이가 더 많아졌다.

“술입니다, 술.”

술동이를 놓던 사내가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올 뿐이었다.

“무슨 술이요?”

“파는 겁니까?”

“파는 거 아닙니다. 드리는 거죠.”

사내가 대답했다.

공짜 술을 맛보게 생겼군!

구경하던 이들은 더욱 화색이 도는 얼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여기저기에서 오가면서 순식간에 온 거리가 들끓었다.

“밀지 마시오, 밀지 말라고! 지금 드리는 게 아니라, 주인어른이 오셔야 드립니다.”

주인어른? 주인어른이 대체 누구기에?”

인파 속을 가로지르며 걷던 노사안도 걸음을 멈췄다. 동료들과 나누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신선거가 왜 갑자기 문을 닫았지? 새해 명절에도 영업을 하는 곳인데.

점원들한테 듣자니 주인어른을 맞이하러 가야 한다더군.

저 사내가 말하는 주인어른이 신선거의 주인인가? 역시 술을 팔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였군.

노사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어 걸음도 채 걷기 전에 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죽었다고?”

주인이 죽어?

노사안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습니다. 이 댁 주인어른이 돌아가셔서, 이제 안장하러 간답니다. 우린 술을 나눠 주기 위해 고용된 거고요.”

안장! 시신을 운구하려는 건가?

“장례를 치른답니다. 서문으로 들어와 동문으로 나간다고, 길에 쭉 깔아 놓으래요.”

경성 전체를 가로지르겠다는 거잖아!

노사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길만 해도 저런 사내가 족히 열 명은 되는 것 같은데. 서문에서 동문까지 가로지르려면 이런 거리가 최소 열댓 개는 될 터. 저런 사내를 대체 몇이나 고용하고 술은 얼마나 많이 갖다 놓은 거야!

“이 술은 무슨 술이오? 싸구려 술이겠지?”

주인어른인지 뭔지가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졌다.

공짜로 주는 거잖아. 좋은 술일 리가 없지.

“직접 빚은 술이라 세상에 둘도 없는 거랍니다. 팔지는 않는대요.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요.”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사내의 말이 틀렸다며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독한 술은 덕승루의 운상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추수대의 조홍양이 최고야.”

사내가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말했어요. 이따 먹어 보면 알 거 아닙니까.”

그 말에 현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고, 구경꾼도 점점 늘어났다.

그게 얼마나 귀한 술인지는 노사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내를 고용한 것만 봐도 보통 비싼 술이 아니리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사내들도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달변인 자로 고르고 고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품삯도 적잖이 줬을 터.

경성 사람들은 겉치레를 너무 신경 쓴다니까. 혼사만 성대하게 치르는 게 아니야. 이젠 장례까지 떠들썩하게 하는군. 이게 바로 경성이지. 번화한 거리에 신선한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

하지만 이제는 노사안과 무관한 곳이었다. 노사안은 고개를 돌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때도 이리 처량하게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어른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뒤에서는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냐고? 벼슬아치가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지. 아무것도 없고 가진 건 돈뿐인 자들이나 벌이는 일이야!

“서북 군영에 있던 병졸인데 전사했다더군.”

“다섯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니, 장렬하지 뭔가.”

병졸! 전사!

돈 있는 사람이 군에 들어갔다고? 돈 있는 사람이 제 발로 죽으러 갔단 말이야?

말도 안 되지!

서북, 다섯, 전사, 경성 출신……. 왠지 귀에 익은데.

노사안이 우뚝 멈춰서서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설마…….

성 밖에 위치한 태평거 앞에는 아침부터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미리 예약을 잡으러 왔다가 오늘 휴업 소식을 들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오랜만에 태평거나 가 볼까 하고 흥이 나서 온 터라 난데없는 휴업 소식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한가하게 놀고 있으면서, 왜 문을 안 열어!”

이런 말들이 수시로 들렸다.

“사정이 있습니다.”

문 앞에 선 점원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주인어른들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분들의 영구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라 저희가 마중을 나가야 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마당 쪽에서 여러 사람이 나왔다. 상복을 입고 삼끈까지 동여맨 건 아니었지만, 초상이 났음을 알리기 위해 막대기 끝에 다는 흰 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들이 나오는 모습을 본 점원은 서둘러 말을 끝내고 달려와 대열에 합류했다.

초상이 났던 거로군.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하나둘 흩어졌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관리인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 그러면서 길을 따라 술동이와 그릇을 놓도록 지시했다.

“이따 술을 나눠 드릴 테니, 별일 없으면 다들 한 사발씩 드시고 가십시오.”

여기까지 밥을 먹으러 오는 이들은 그런 공짜 술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나눠 주는 술이 맛좋을 리도 없고.

그들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를 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떠난 건 아니었다. 한가한 이들이나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자리에 남아 그들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여기 주인어른은 진 상공이 아니었소?”

“주인어른이 어쩌다 돌아가신 거요?”

“아까 들어 보니까 주인어른이 여럿인 것 같던데, 죄다 한꺼번에 돌아가셨소?”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저희 주인어른들께선 서북 군영의 감용이셨습니다. 5월에 있던 전투에서 성을 지키다가 돌아가셨지요. 주인어른 다섯 분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관리인이 말했다.

5월에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는 경성 백성들도 알고 있었다. 워낙 큰 전투였기에 병사들이 전하는 승전보가 온 경성을 뒤덮었고, 성안에 있는 종루와 고루, 사찰 등에서도 사흘간 떠들썩하게 소식을 알렸다.

그 전투에서 전사한 거였군. 태평거의 주인이 서북 군영으로 간 건 몰랐네. 게다가 전사를 했다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피 끓는 충정으로 갔다고밖에 설명할 말이 없어.

사정을 들은 이들은 모두 감탄을 늘어놓았고, 거리에는 점점 인파가 많아졌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다들 나지막이 수군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큰길을 살폈다.

“나리.”

사내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예를 표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범강림이 앞으로 갔다. 수레 다섯 대에 관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수레를 끄는 말도 흰 천을 두르고 있었다.

범강림이 고개를 돌리자 상복으로 갈아입은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의 품에 안긴 아기도 상복 차림이었다. 아직 슬픔을 모르는 갓난아이인지라 발그레한 볼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범강림이 손을 뻗어 아기를 받았다. 아기는 옹알이를 하며 범강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아기는 범강림 내외와 같이 먹고 같이 자며 생활한 터라 범강림에게 낯을 가리지 않았고, 범강림 내외를 부모로 여겼다. 진짜 부모에 대해서는 훗날 장성하더라도 누가 이야기해 주어야 알 수 있으리라. 얘기를 듣는다 해도 부모가 기억에 있을 리는 없고, 기억할 수 있는 건 존함 정도가 전부일 터였다.

눈시울이 붉어진 범강림은 아기의 볼에 뺨을 갖다 댔다. 수염이 볼을 간질이자 아기는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로 짠 관, 하얀 천, 삼베로 지은 상복, 아기의 웃음소리. 기이하고 묘한 이름다움이 깃든 정경이었다.

범강림은 심호흡을 하고 아기를 안아 올리며, 영구가 나갈 때 상제가 손에 쥐는 깃발을 받아 들었다.

“아우들아, 집으로 가자.”

범강림이 목청을 높이며 소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외침과 함께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지전(紙錢: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 저승 가는 길에 노자로 쓰라는 뜻)을 하늘로 흩뿌렸다. 지전이 눈송이처럼 휘날렸다.

“옵니다, 와요.”

태평거 앞에 있던 사람들은 오래 기다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말 한 필이 달려왔다.

“영령이 돌아왔습니다. 영령이 돌아왔어요.”

말에 탄 이가 목청을 높이며 소식을 전했다. 그 소리와 함께 뒤따르는 수레와 말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시야로 들어왔다.

“주인어른.”

관리인이 울부짖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뒤이어 점원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한쪽에서는 또 다른 무리가 지전을 뿌리며 외쳐댔다.

“주인어른, 살펴 가십시오.”

이들이 외치는 소리는 하늘 높이 번져 나갔다.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던 인파는 도리어 조용해졌다. 지전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날리는 엄숙함 속에 장례 행렬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행렬 맨 앞에 있는 사내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사정인지 그려졌다. 상복을 입은 걸 보니 죽은 다섯 사람 중 하나의 유자녀일 터였다.

범강림은 노제를 올리는 이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말 위에서 아기를 안은 채 앞쪽을 주시했다. 어깨에 꽂은 상제의 깃발이 표표히 휘날렸다. 품에 안은 아기는 옹알이를 하며 깃발을 잡으려는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이고, 딱하기도 하지.”

구경하던 행인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눈물을 보이는 아낙들도 있었다.

“돈도 많은 사람들이, 뭐하러 병사가 되어서는.”

“병사라고? 장수가 아니고?”

“장수는 무슨, 병사라 했소. 전사했어도 헛죽은 거지 뭐요. 뭐 하나 받은 것도 없다던데.”

“아이고, 세상에나. 그건 좀 너무하네.”

“어쩌다 전사한 건데? 얘기 좀 해 봐요.”

구경하던 사람들이 장례 행렬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행렬 속에 있던 병졸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원산 형제들이 경성에 점포를 가지고 있다는 건 병졸들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거나 명절 때가 되면 경성에서 보내오는 선물이 군영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게다가 반년에 한 번씩 배당금까지 왔는데, 얼핏 봐도 수만 관은 족히 될 것으로 보였다.

수만 관이라니. 서북에서는 장수나 관리 몇 사람의 재산을 합쳐도 어림없을 규모였다.

그래도 다들 반신반의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이들이 뭐하러 전장으로 와 목숨 바쳐 싸운단 말인가. 금은보화를 끼고 부잣집 영감으로 살지 않고, 언제 죽을지 모를 곳에 와서 지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어쩌다 운때가 맞아 경성에서 돈 좀 벌었나 보네.

하지만 영접을 나온 이들과 주인어른을 불러대며 흐느껴 우는 이들을 보자, 병졸들은 무원산 형제들의 부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저 식당이구나. 제법 그럴듯해 보이네. 역시 재산이 꽤 있는 자들이었어.

행렬은 금세 지나갔다. 길가에 엎드려 울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순서대로 행렬의 뒤를 따르면서 흰 깃발을 든 줄이 길어졌고, 흩날리는 지전도 더 많아졌다.

장례 행렬이 떠나자 길가에서 구경하던 이들도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자, 자, 여러분, 사례주 한 사발씩 들고 가십시오.”

태평거에 남아 있던 다섯 사람이 그릇을 나눠 주며 말했다. 그릇을 받는 이도 있고, 머뭇거리며 받지 않는 이도 있었다.

“저 사람들 행수 어른께서 직접 빚으신 술이랍니다. 따로 파는 건 아니고, 세상에 둘도 없는 거래요. 최고로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 주량 약한 분들은 그냥 입만 대세요.”

술동이를 안고 있는 이가 말했다. 그 말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허풍도, 원.”

“허풍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이 그리 말했는데, 우리도 모르는 일이에요. 우린 그냥 술 나눠 주려고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술동이를 안고 있는 이가 웃으며 뚜껑을 열었다.

“향 좋다!”

“냄새는 그럴싸하네. 어디 한번 맛이나 볼까!”

“딱 두 동이밖에 없습니다. 이거 마시면 끝이에요. 따로 팔지는 않는 거랍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주인어른들을 위해 행수 어른께서 특별히 빚은 술이래요.”

커다란 그릇에 술이 콸콸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술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술을 받은 이들은 고개를 젖혀 가며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우, 독하다.”

누군가가 그 말과 함께 푹 쓰러졌다.

“취해서 쓰러졌어!”

“에이, 설마. 술 한 그릇에 쓰러지다니. 원래 술을 못 마시던 사람 아니야?”

“옵니다, 와요.”

성문 앞에 몰려들어 있던 백성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벌써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성문을 지키던 병졸들도 순식간에 긴장이 됐다.

“대인, 이거 문제 되진 않을까요?”

병졸 하나가 성문 앞으로 몰려든 인파와 거기 차려진 탁자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탁자 뒤로 흰 깃발을 든 사람이 열댓 명쯤 있었다. 그중 한 깃발에 쓰인 ‘이춘당’이라는 글자가 바람에 휘날렸다.

경성 사람 치고 이춘당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일찍이 신의 낭자가 진료를 받던 약포였다. 신의 낭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지만, 이춘당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약도 좋고 의원도 실력이 있거니와 어쨌거나 신선이 다녀간 곳이니 신선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을 터였다.

죽은 사람이 대체 뭐 하던 자였나 모르겠네. 이춘당과도 관계가 있다니.

“문제 될 게 뭐 있느냐. 돈깨나 있는 자들이니 장례 행렬도 떠들썩하게 하려는 거지, 뭐.”

감문관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옷소매 속에 넣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하여간 돈 있는 놈들은 겉치레를 좋아한단 말이지. 체면 세우려고 장례 때 곡하는 사람까지 고용한다잖아. 거리에서 노제를 지내며 공짜 술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기세를 과시하는 것 좀 보라고. 곡하는 사람 불러오는 것과 다를 게 뭐 있나.

“영령이 돌아왔습니다. 영령이 돌아왔어요.”

맨 앞에서 누군가가 흰 깃발을 든 채 말을 타고 달려왔다. 말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가 지나감과 동시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춘당 사람들이 일제히 옷을 털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주인어른들, 살펴 가십시오!”

이춘당 관리인이 선창을 하고는 엎드려 흐느끼자, 이어 점원들도 엎드려 오열했다. 일찌감치 바구니를 들고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지전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지전이 점점 가까워지는 장례 행렬과 한데 얽혔다.

“저리 많이 죽었다니.”

“가엾어서 어쩌누.”

“애도 저렇게 어린데, 딱해라.”

“어쩌다 죽은 거래?”

구경하던 사람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장례 행렬과 수레가 지나가면서 흰 깃발을 들고 대열에 합류하는 이는 더욱 늘어났다. 성문 앞에 선 이들의 모습에선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군.”

감문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장례 행렬은 금방 지나갔다. 감문관이 고개를 까닥이며 성문 앞에 모여든 이들을 해산시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그때 몇 사람이 아직 치우지 않은 탁자에 올려놨던 술동이를 안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 사례주를 준비했습니다. 한 그릇씩 하세요.”

참, 행인들한테 공짜 술을 대접하겠다고 했지.

“딱 두 동이밖에 없습니다. 행수 어른께서 직접 빚으신 거라 따로 팔진 않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술이고,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이기도 하지요. 다들 맛 좀 보세요.”

감문관이 실소를 터트렸다.

“대단하군. 장례를 치르면서도 사업을 잊지 않네. 우리가 장사꾼들을 너무 얕봤어.”

감문관이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자, 자, 최고로 독한 술맛이나 보러 가자고.”

“주인어른, 주인어른…….”

거리에서 유독 큰 소리로 오열하며 이목을 끄는 사내가 있었다. 우느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를 점원 둘이 양쪽에서 부축했다. 그 뒤로 흰 깃발을 든 이들이 열댓 명 따르고 있었다. 한쪽 옆에서 ‘신선거’라는 글자가 쓰인 커다란 깃발이 나부꼈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어찌 이렇게 가십니까. 어찌 이렇게…….”

사내는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치며, 거의 까무러칠 정도로 목놓아 울었다. 부축하던 점원들도 더는 당해 내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도록 두었다.

“저게 누구요?”

“누군지 모르겠소? 신선거의 왼팔 숙수 이대작이잖아.”

“왼팔 숙수? 생선회를 잘 치는 그 신선거 숙수 말이오?”

“오른팔을 잘리고 나서도 왼팔로 훌륭한 칼솜씨를 연마한 숙수 말이오.”

“맞아, 맞아, 그 사람이군. 그 생선회 맛을 보려고 신선거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솜씨가 끝내주거든.”

“그 사람들이 신선거의 주인이었소?”

그러자 누군가가 즉시 반박했다.

“어디 신선거뿐인가. 태평거랑 이춘당의 주인이기도 하다오.”

경성에서 유명한 세 점포가 전부 그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재산이 다 얼만데! 그만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죽는다고? 아니, 죽을 수야 있다지만 그 자리가 결단코 전장일 수는 없는 법인데.

그리 돈 많은 사람이 목숨으로 장난을 친다고? 바보인가?

“댁들을 속여서 뭐하오? 난 구경하려고 따라온 거요. 점포마다 길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가 뒤따르고 있거든.”

“그 세 점포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었다니!”

소식은 순식간에 거리로 퍼져나갔고, 이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실로 엄청난 소식이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세 점포의 주인은 줄곧 장막에 가려져 있으며 수많은 추측을 낳았는데, 장례를 통해 갑자기 비밀이 풀린 것이다.

“어서 가 보자고. 그 행수란 사람이 대체 누군지.”

거리에 몰려든 사람들은 어느새 장례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여러분, 사례주입니다. 한 사발씩 드시고 가세요.”

“딱 두 동이밖에 없는데, 우리 행수 어른께서 직접 빚으신 거라 따로 팔진 않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술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독한 술이에요. 기회 놓치지 말고 한 사발씩 드십시오.”

“허풍도 정도껏 쳐야지. 뭐 얼마나 대단한 술이라고.”

의심 어린 목소리로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저쪽에서 말을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 줘요, 나!”

와글와글한 소리에 이목이 집중됐다. 고개를 돌려 보니 꽤 여러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들 취기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눈빛을 반짝였다. 벌써 걸음까지 비틀거리는 이도 있었지만 술을 향해 달려드는 발걸음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술그릇을 낚아챘다.

“끝내주는 술이오. 아주 끝내줘. 세상에서 제일가는 독한 술이지.”

“그리 맛있소?”

“그렇다니까. 어서 가서 맛들 보시오. 벌써 취해서 쓰러진 이가 몇인지도 몰라. 한 그릇만 마시면 바로 취해!”

“어서 쫓아가 보자고. 저쪽에도 있을 테니 어서 가세.”

이미 행렬 속으로 들어가 있는 이들은 그 행렬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모르는 채로 점점 붐비고 혼잡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만 받았다. 하지만 거리 양옆으로 늘어선 점포의 위층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니, 온 거리가 인파로 물샐 틈이 없었다. 정월 대보름에 꽃등을 보러 나온 인파와 맞먹을 정도로 떠들썩했다.

갑자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든 거지?

장례 행렬이 지나갔는데도, 사람들이 흩어지기는커녕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가잖아? 구경하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장례 행렬이 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제방이 터지자 그 안에 있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한 모습인지라,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서북에서 범강림을 따라 왔다가 지금은 장례 행렬 속에 함께 있는 병졸들은 마음속으로 이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성 밖에서 장례를 준비하던 이들을 봤을 때 이미 놀란 터였지만, 이제 보니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사람이 너무 많잖아!

세상에, 이게 대체 몇 명이야! 온 경성 사람이 죄다 영접하러 나온 것 같네!

세상에, 정말 자그마한 점포의 주인 맞아?

병졸들은 장례 행렬 속에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닿는 곳엔 온통 새까맣게 몰려드는 사람들뿐이었다. 앞에도, 뒤에도,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심지어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위층은 물론이고 지붕과 나무 위에도 사람이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 앞쪽으로 오지 못한 이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어떻게든 파고들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본디 장례 행렬에 있던 이들 중 여럿이 밖으로 나와 손에 손을 잡고 인파를 막으며 간신히 길을 텄다. 다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소리를 질러대며 사력을 다했다.

병졸들이 고개를 들자 하늘을 가득 수놓은 지전이 보였다.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온 천지가 함께 슬퍼하는 듯이.

온 성이 상복을 입고 영령을 맞이하였나니.

글공부를 하지 않은 병졸들의 머릿속에 돌연 그 구절이 떠올랐다. 그들이 한 말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들은 말이었다.

몇 년 전 서북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성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한 성보의 관군과 백성이 사흘 밤낮을 싸우며 저항한 끝에 거의 전멸한 전투였다.

서북 전선에서는 그 영령들을 위한 사당을 짓고, 모두가 상복을 입은 채 장례를 치렀다. 당시 병졸들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하늘이 울릴 정도로 쳐 대던 징 소리와 북소리, 온 천지를 뒤덮었던 지전, 거리로 뛰쳐나와 장례 행렬을 배웅하던 백성들의 모습은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당시 문인들과 서생들은 그 일을 글로 남겼다. 화려한 수사까지 외울 순 없었지만 쉽게 쓰인 그 구절만큼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온 성이 상복을 입고 영령을 맞이하였나니.

그 광경을 경성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자신들과 같은 병졸들의 장례 행렬에서.

대체 뭐 하던 사람들이지?

자네들이 경성까지 무사히 호송해 주면, 부귀영화와 함께할 앞날을 보장해 주겠네.

출발 전 서사근이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딱히 뭐라 대꾸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무원산 형제 본인들의 부귀영화도 끝났잖아. 목숨도 잃은 마당에 누구한테 뭘 줘?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온 경성을 뒤흔들 정도의 장례를 치를 능력이 있는데, 한낱 병졸들의 부귀영화 하나 보장하지 못할까.

병졸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그때 다급하면서도 질서 있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비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성병마사의 병사들은 거리의 인파를 보며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민란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급보를 듣고 달려온 터였다. 막상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 있노라니 갑옷 차림에 장창까지 들고 있는데도 병사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뭐 하는 거야? 뭣들 하는 거냐고!”

우두머리 순갑(巡甲)이 외쳤다.

“뭘 하는 게 아니라, 장례를 구경하는 겁니다.”

“겸사겸사 술도 얻어 마시고요.”

인파 속에 있던 백성들이 시끄럽게 외쳐댔다.

장례를 구경한다고? 술을 얻어 마시고? 퉤, 누굴 바보로 아나!

누가 죽었는진 모르겠다만, 백성들을 동원해 소란을 피우려는 것 같은데?

“장례를 치를 거면 성 밖으로 나가야지, 왜 성안으로 들어와?”

순갑이 소리치며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병졸들이 즉시 앞으로 나왔다. 병졸들은 손에 쥔 쇠뇌로 장례 행렬을 조준한 채 대기했다.

“즉시 해산해라. 거역하면 체포하여 죄를 묻겠다.”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있던 범강림은 길을 막아서는 병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 뒤로 있는 장례 행렬 속 사람들은 엄숙한 표정이었고, 흰 깃발만이 바람에 표표히 나부꼈다. 지전에 뒤덮이다시피 한 채로 거리에 일렬로 늘어선 관 다섯 개가 시끌벅적한 주변 상황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누구지?

“소생은 서북 군영의 감용 범강림입니다. 전사한 형제들을 안장하기 위해 경성으로 왔습니다.”

범강림이 품에서 문서를 꺼내 내밀며 천천히 말했다. 순갑이 문서를 받아 확인해 보니, 과연 죽은 자의 신분은 확실했다.

“서북 군영의 감용이었군.”

순갑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이런 광경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경성에서 헌부례(獻俘禮: 생포한 포로를 종묘에 바치고 승전을 고하는 의식)를 치를 때나 볼 수 있지 않나. 그 정도는 돼야 관이 뒤따르지. 그때도 이 정도 대우를 받으려면 전사한 이가 오품 이상의 무관은 되어야 하는데.

언제부터 병졸들한테도 이런 대우를 하게 된 거야?

“안장은 성 밖에서 할 텐데, 성안엔 왜 들어온 거요? 얼른 성 밖으로 나가시오.”

순갑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인.”

순갑은 앞에 있는 사내를 보며 멈칫했다. 사내가 왜 갑자기 여자 목소리를 내지?

“대인, 성안으로 들어온 건, 저 때문이에요.”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순갑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사람들 무리가 와 있었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백성과 달리, 흰 깃발을 든 것으로 보아 장례 행렬에 포함된 이들 같았다.

그중 멱리(冪罹: 여인이 외출할 때 사용한 쓰개의 일종)를 쓴 여인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여인은 검은 옷을 입은 채, 허리에 삼베 끈을 매고 있었다.

“누이.”

여인을 본 범강림이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말을 오래 타서인지 슬픔을 가누지 못해서인지, 범강림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품속에 있던 아기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까르르 웃었다.

“누이.”

범강림이 앞으로 다가가며 더욱 목멘 목소리로 불렀다.

“아우들을 데리고 돌아왔어.”

그 평범한 말을 갈라진 목소리로 전하자, 옆에 있던 순갑도 순간 가슴이 뭉클해져 저도 모르게 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의 옆에 있는 두 시녀는 이미 바닥에 꿇어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오는 내내 사내들만 행렬을 뒤따랐기에 맨 처음 노제를 지내며 오열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곡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던 터였다. 이내 여인의 울음소리까지 터져 나오자 장례 행렬의 분위기는 더욱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많아 놀란 건지 여인들의 울음소리에 놀란 건지, 아기까지 울음을 터트리며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이들은 되레 조용해지고,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새카맣게 몰려든 인파 속에서 두 여인과 아기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지자 분위기는 더욱 기묘하고 침울해졌다.

“대인, 묘지는 성 동쪽입니다.”

정교랑이 순갑을 보며 말했다. 순갑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정교랑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물론, 성 동쪽이라 해도 성 밖으로 돌아서 갈 수 있지요. 꼭 성을 가로질러야 하는 건 아니에요.”

잘 알고 있군.

순갑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오라버니들한테 약조한 게 있어요. 오라버니들이 경성을 떠나 서북으로 갈 때요.”

정교랑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물론 멱리에 가려져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정교랑의 시선은 관이 담긴 수레로 향했다.

“오라버니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개선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준마로 거리를 메우고, 독한 술을 마시며 불꽃놀이를 즐기게 해 주겠다고 했죠.”

천천히 순갑의 옆을 지나 관 쪽으로 걸어간 정교랑은 손을 뻗어 수레를 끄는 말을 어루만졌다. 다섯 필 모두 털 색깔이 똑같은 준마였다. 말을 볼 줄 아는 이라면 딱 봐도 보기 드문 명마임을 알아봤을 테고, 말을 볼 줄 모른다 해도 좋은 말이라고 칭찬할 정도의 말이었다.

떠들썩한 인파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수레를 끄는 말조차도 이런 준마였군.

“이제 오라버니들이 돌아왔어요.”

갈 때는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갔는데, 올 때는 차가운 시신으로 관 속에 누워서 돌아왔으니, 딱하기도 하지.

주위 사람들이 탄식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개선한 거예요. 그러니 저도 약조했던 걸 지켜야죠.”

정교랑이 말에서 손을 뗐다. 옆에서 수행하던 오 관리인이 직접 술동이 하나를 들고 오자,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오라버니들, 이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직접 빚은 독한 술이에요. 세상에 둘도 없는 술이죠.”

정교랑이 술동이의 술을 바닥에 쏟자 진한 향이 순식간에 퍼졌다. 맑은 술이 바닥에 콸콸 쏟아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자, 조용해졌던 이들 사이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저 좋은 술을…….”

“다 버리지 마요. 좀 남기라고, 남겨.”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또다시 밀고 밀치기 시작했다. 술을 다 쏟아붓고 난 정교랑이 몸을 돌려 순갑을 바라봤다.

“대인, 이제 오라버니들이 돌아왔으니,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해야죠. 그래서 다 함께 마시고자 합니다. 대인도 한번 드셔 보세요. 오라버니들의 강직한 성격과 그 충절에 어울리는 술이에요.”

순갑이 멈칫하는 사이, 오 관리인이 시종을 시켜 술을 올렸다. 순갑뿐 아니라 나머지 병졸들에게도 모두 나눠 줬다.

“독한 술이니 입에 대기만 하십시오.”

오 관리인이 당부했다.

독하다고? 이 몸이 독한 술을 무서워할쏘냐. 독하지 않을까 무섭지!

즉시 손을 뻗어 술그릇을 받은 순갑은 오 관리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벌컥벌컥 마시며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별안간 순갑이 눈을 부릅떴다. 그대로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인파 속에서 쿡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 더, 따, 라…….”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와 함께 저쪽에 있던 병졸 몇 명이 몸을 흐느적거리더니 풀썩 쓰러졌다.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거봐, 내가 뭐랬냐고.”

“하하하, 저렇게 쓰러진 이가 벌써 몇인지도 몰라!”

독, 독하구나!

순갑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불타는 듯했다. 귀가 웅웅 울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끝, 끝내주는군.

순갑은 돌연 큰 소리로 울부짖고 싶었다. 집에서 무시받고, 밖에서는 상관과 동료들에게 치욕을 겪으면서도 숨죽이고 살던 답답함이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한바탕 화르르 불타고 나자 몸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동시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기도 했다.

그래, 겁낼 게 뭐 있어. 한번 사는 세상, 통쾌하게 살다 가야지.

“대인, 전사한 오라버니들에게 잘 어울리는 술이죠?”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예로부터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이가 몇이나 되던가. 전장에서 죽을지언정 거침없이 싸웠으니, 결코 헛된 삶은 아니리라.

“어울리고말고!”

순갑이 큰 소리로 외치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영웅들을 배웅하겠소.”

순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을 막고 있던 병졸들이 좌르르 비켜섰다.

물론 비켜서지 않는 이도 있었다. 이미 만취해 쓰러진 병졸 네다섯 명은 땅바닥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갑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약해 빠진 놈들.”

순갑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옆으로 치워라.”

만취한 병졸 네다섯 명이 옆으로 치워졌다.

“봤지? 오성병마사 사람들도 비키잖아.”

누군가가 굳이 소리치지 않아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노사안은 더욱 눈 한 번 끔뻑이지 않고 쳐다봤다.

본디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노사안은 제대로 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몰리자 다시 주점의 이 층으로 올라와 높은 곳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뭐라고 한 거지? 서슬 퍼렇게 달려올 땐 언제고, 이젠 또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비켜서네?”

다들 영문을 모르는 채로 웅성거렸다.

위에서 보는 장점이자 단점이 거기 있었다. 또렷하게 볼 수 있지만, 말소리는 들을 수 없는 것.

그때 건물 아래에서 폭발음과도 같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끌어모았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한데 뒤엉켜 무언가를 놓고 싸우는 것 같았다.

“술!”

이번에는 똑똑히 보였다.

또 술을 나눠 주는 거였군.

“저 술이 그리 맛있나?”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체가 있는 만큼 술 한 사발 얻어 마시겠다고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아랫것을 시켜 몇 사발 얻어 오라고 했소. 같이 맛들 보십시다.”

누군가가 자신의 선견지명을 뽐내며 웃었다. 얼마 안 가 문이 열리더니 사환들이 들어왔다. 그중 한 사환의 손에만 술그릇이 들려 있었다.

“대인, 가져왔습니다.”

뽐내던 자가 멈칫하며 물었다.

“어째서 한 그릇뿐이냐.”

그가 사환이 내민 술을 쳐다봤다.

아니지, 한 그릇도 아니야. 겨우 반 그릇이잖아.

“대인,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필사적으로 구한 거예요.”

사환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마 운이 따라 줘서 반 그릇이나마 얻어 온 겁니다.”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의 거리를 바라봤다. 거센 풍랑이 일듯 맹렬한 기세로 움직이는 인파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저 사람들을 헤치고 한 그릇 받아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긴 하겠군.

그나마 술이 두 동이밖에 안 되어 금세 동나니 망정이지, 까딱 잘못하다간 밟혀 죽는 사람도 나올 뻔했네.

대체 술맛이 얼마나 좋길래 다들 저리 미쳐 날뛰는 거야?

“앞서 먹어 본 사람들이 또 와서 저렇습니다. 앞서 못 먹은 사람들은 맛있다는 말에 한번 맛이나 보려고 같이 달려들고요.”

“그 정도로 맛있나?”

노사안은 더 이상 술을 쳐다보지 않고, 길가의 인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거리에는 이미 사람이 없었다. 인파는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장례 행렬을 뒤따라 몰려가고 있었다.

눈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자, 저쪽 거리에는 방금 전보다 더 떠들썩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파는 흐르는 물처럼 모일수록 점점 더 많아져 갔다.

사람들은 늘 그랬다. 길에 물건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누군가가 가져가려고 욕심을 내면,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고 일단 달려들어 어떻게든 제 손에 넣으려 했다.

“대단한 수완이야.”

노사안이 중얼거렸다.

“술맛 좋다!”

안에서 외치는 소리에 노사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동료 중 하나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술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다.

“끝내주는 술이야. 세상에 이렇게 독한 술이 다 있네.”

그가 큰 소리로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술맛이 궁금해 몰려들었다. 다들 한입씩 맛을 보고자 했지만, 동료는 못내 아까운 눈치였다.

“이 술 파는 거 아니오? 직접 사 먹으면 되잖소.”

“대인, 파는 게 아니오. 직접 빚은 술이라 팔지 않는다더군. 전사한 오라비 다섯을 추모하려고 빚은 술이랬소.”

“정말? 이 맛좋은 술을 안 팔아? 추모를 끝내고 나면 안 판다고? 그게 말이 되나. 돈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노사안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노사안에게 쏠렸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그럼 뭘 위해서인데?”

동료들의 물음에 노사안은 말없이 다시 거리를 내다봤다. 거리에서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 다섯은 무원산 출신이라오. 전부 대장부인데, 전사했다지 뭐요.

전사했는데 공로도 인정 못 받았다더군.

인정을 못 받다니 어쩌다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게 뻔하지. 세상 참…….

“맛좋은 술.”

노사안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가 남은 술을 건넸다.

“사안 형, 맛이나 보시구려. 경성을 떠나면 이리 좋은 술을 맛보긴 힘들 텐데.”

노사안은 술을 받아 힐끔 쳐다보더니 단숨에 비웠다. 장을 타고 내려간 술은 불덩이를 삼킨 듯했다. 불타는 오장육부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였다.

노사안은 손에 들고 있던 술그릇을 바닥으로 세게 내던지고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에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며, 얼굴이 시뻘게진 채 손으로 허리를 짚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노사안을 쳐다봤다.

노사안은 웃다 말고 창가로 달려갔다. 그런 노사안을 본 동료들은 화들짝 놀라 노사안을 붙잡았다.

“사안 형, 안 됩니다.”

“사안 형, 진정하시오.”

다들 노사안이 울분을 참지 못해 술김에 자결하려는 줄 알고, 노사안을 꽉 부둥켜안으며 놔주지 않았다.

노사안은 자신을 끌어안는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큰 소리로 웃으며 창밖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들어 봐! 잘 들어 보라고! 잘 들으란 말이다! 온 경성 사람들이 무원산을 이야기하고 있어!”

목청 높여 외치는 노사안의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들렸다. 어마어마한 굉음이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를 뒤덮어 버렸다. 다들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자, 동녘 하늘에서 불꽃이 팡팡 터지는 모습이 보였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 환한 대낮인지라 불꽃은 오색의 찬란한 빛을 내는 대신 새하얗기만 했다.

불꽃이 팡팡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동시에 푸른 하늘에 새하얀 불꽃이 구름처럼 번지며 쏟아져 내렸다. 하얀 눈이 내리는 광경 같았다.

대낮에 불꽃놀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토록 찬란하게 빛날 줄은 미처 몰랐다. 모두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머릿속은 새하얘진 채로 머리카락만 곤두섰다. 저릿저릿한 기분이 일순간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C : 불꽃놀이

“저게 뭐지?”

경성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낮에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나?”

“폭죽이 저리 높이 올라갈 수도 있네.”

경성 남쪽에 위치한 구중탑(九重塔).

반나절을 들여 경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온 유람객들이 있었다. 높은 곳에 서서 경성을 굽어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막 붓을 들어 벽에 시문을 남기려는데 눈앞에서 새하얀 불꽃이 터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멍해진 유람객들이 넋을 놓고 바라봤다.

“저거 폭죽인가?”

“그게 말이 되나. 정월 대보름 때 온 경성을 수놓은 불꽃도 삼층탑 높이였는데. 폭죽을 저리 높은 곳까지 쏠 수 있어?”

이와 같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에도 불꽃은 연이어 터졌다. 시문을 지으려던 유람객들의 창작열은 불꽃과 함께 터져 버리고, 폭죽이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나 다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동문의 성곽 위에서 순라를 돌던 병사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불꽃을 보고 있었다.

“대낮에도 폭죽을 쏘는 사람이 있네.”

병사들은 떠들어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을 돌았다. 우두머리가 걸음을 멈출 때까지.

경성 동문의 감문관이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다들 저것 좀 봐라…….”

감문관이 말했다.

다 봤는데?

병사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폭죽이 저리 높이 올라갈 수 있다니.”

감문관이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불꽃은 높이 올라갈수록 보는 사람을 열광시키기 마련이다. 불꽃 바로 아래에서 구경하는 이들은 그 생생함에 더욱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성 동쪽에 위치한 넓은 터에 인파가 가득 들어섰다. 저쪽 공터에서 누가 또다시 죽통을 나무 틀에 꽂고 있었다. 경험이 쌓인 구경꾼들은 손을 뻗어 귀를 막으며 불꽃을 기다렸다.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죽통에 불을 붙이고 재빨리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죽통은 쉭 소리를 내며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사람들이 폭죽을 따라 고개를 들며 시선을 옮겼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공중에서 불꽃이 터졌다.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이번에도 열광했다.

“이씨네 점포의 추성(追星: 별을 따라잡는다는 뜻)보다 더 끝내주네.”

“이씨네 점포의 추성은 허울뿐이야. 유성(流星)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려.”

“맞아. 추성이라고 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얼마나 높이 나는지 좀 보라고. 밤이었으면 정말 별을 따라잡았을 거야.”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계속된 불꽃놀이가 마침내 끝나자,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덮여 묻혔던 울음소리도 이제는 그친 후였다. 관은 땅속에 묻히고 어느새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소식은 구경꾼들을 중심으로 금세 퍼져 나갔다.

“세간의 평가를 기다리겠다더군.”

“하긴, 공이 있는 걸 인정도 못 받았으니 좀 억울하겠어.”

“그 사람들한테 무슨 사연이 있는 건데?”

“아니, 그것도 몰라? 이 사람 이거 여태 헛따라다녔군. 그저 술이나 얻어먹으려고 따라온 거야?”

“나야 그렇지. 거리에서는 조금밖에 안 주잖아. 저기 좀 보라고, 술이 두 무더기나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실컷 마실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앞쪽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무언가 육중한 물건이 깨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려는 인파들이 몰려들면서 현장은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내 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범석두, 실컷 마셔라!”

범강림이 술 두 동이를 들어 묘비 앞에 던지며 외쳤다.

“서무수, 실컷 마셔라!”

와장창 소리와 함께 술 두 동이가 또 깨졌다.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범강림이 무덤 앞에 서서 고개를 들며 갈라진 목소리로 필생의 힘을 다 짜내기라도 하려는 듯 목청을 높였다.

한 번, 또 한 번. 한 번, 또 한 번.

아무리 목놓아 불러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아마도 영원히 없으리라.

앞으로는 목놓아 불러 볼 기회조차 없겠지. 없을 것이다.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찌르니…….”

“……일당천으로…… 필사의 각오로 적군에 맞서리라…….”

“……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를지니…… 적을 죽이고 봉작을 받으리…….”

갈라지고 거슬리는 목소리로 곡조도 맞추지 않고 토해 내는 노래였다. 동시에 술동이가 수없이 깨지고, 술이 무덤 앞을 적시며 흘렀다. 술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또다시 전율했다. 술을 위해 온 사람들도, 불꽃놀이를 보러 온 사람들도, 그냥 여럿이 한곳에 모인 걸 보고 구경 온 사람들도 모두 조용해졌다.

“…… 나라의 명을 받아 계문으로 달려오니…… 군사로 동원되어 머무를 수 없구나…….”

“…… 천금으로 말 채찍을 꾸미고…… 백금으로 칼자루를 장식하네…….”

멀지 않은 곳의 산비탈. 진십삼이 느릿느릿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바라봤다.

“내 노래 어때?”

주육낭은 술그릇을 손에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저쪽의 인파를 보고 있었다. 진십삼의 목소리가 범강림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던 주육낭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지 않고 술을 마시려 했다.

“잠깐, 그거 엄청 독한 술이야. 조금만 마셔.”

진십삼이 말했다.

“마셔 봤어?”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묻자, 진십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자네 누이는 원칙을 중시하잖아. 오라버니들을 추모하기 위해 빚은 거라며 딱 오늘만 마실 수 있다더니, 딱 오늘만 마시게 하지 뭔가. 오늘이 오기 전까진, 자네가 사람을 시켜 한 사발 받아오기 전까진, 냄새도 못 맡아 봤다고.”

주육낭이 피식 웃었다.

“그래야지.”

주육낭이 술그릇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역시 독한 술인지라 사레가 들려 기침이 절로 나오며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참. 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술 먹고 어떻게 됐는지 못 봤어? 취해 쓰러진 사람이 몇인지도 몰라. 그런데도 내 말을 안 믿나?”

“그게 뭐? 그게 무슨 소용인데!”

주육낭이 기침을 하며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 어차피 그 일엔 관심도 없어. 순전히 구경하러 온 거지. 서무수 형제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할 텐데, 저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어 줄 것 같아? 저 사람들의 입으로 서무수 형제의 공과 억울함을 알리겠다? 그 형제들에 관해선 사흘도 못 가 잊어버릴걸? 아니지, 사흘이 뭐야, 내일이면 잊을 거다.”

진십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래쪽의 인파를 쳐다봤다.

“단지 구경만 했다면 금방 잊겠지. 하지만 이젠, 그냥 구경만 한 게 아니잖아. 경성 사람들 모두가 궁금해하던 태평거와 신선거, 이춘당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밝혀졌어. 대낮에 화려한 불꽃놀이도 봤지. 물론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면 기껏해야 보름쯤 떠들고 말 거야. 길어 봤자 한두 달쯤 가려나. 하지만 오늘 구경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술?”

주육낭이 손에 들고 있는 술그릇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술그릇을 떨어뜨리더니, 자신도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진십삼이 재빨리 끌어안지 않았다면, 주육낭은 그대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한쪽 옆에 눕히고 팔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두 해 못 본 사이에 살이 많이 붙었네. 무거워 죽겠어.”

진십삼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것도 모자라 수시로 쩝쩝 입맛을 다시며 자는 주육낭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진십삼의 시선은 다시 산비탈 아래로 향했다. 장례를 마친 행렬은 어느새 자리를 뜬 후였지만, 구경하던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술이지. 그리 좋은 술을, 세상에 둘도 없는 독한 술을, 딱 한 번 맛봤어.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술이지. 맛본 사람은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냥 못 잊는 게 아니라, 그 맛이 점점 그리워지겠지. 맛보지 못한 사람도 잊을 수 없을 테고. 그때 먹어 보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서, 잊을 수 없을 거야.”

“얻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잊기 힘들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잊혀지지 않을 거야.”

“오늘의 술맛을 떠올리면 오늘 일도 동시에 떠오르겠지. 그럼 무원산의 다섯 형제 일도 떠오를 테고.”

“이 술은, 내 추측이 맞는다면, 오늘부로 무원산이라 불리게 될 걸세.”

진십삼은 산비탈 아래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7월 말의 뜨거운 열기에 그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정말 그 여인은 아무것도 안 했다. 누굴 찾아가지도 않고, 누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 울며 하소연하지도 않고, 위에 고하지도 않았다.

그 여인 말대로, 그저 오라버니들을 안장했을 뿐.

하나 이 정도로 떠들썩하게 안장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들어 봐! 잘 들어 보라고! 잘 들으란 말이다! 온 경성 사람들이 무원산을 이야기하고 있어!”

진십삼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의 시선이 성문 안으로 향했다.

황실 사람들도, 조정 대신들도, 관료들도.

모두 들으란 말이다! 들으라고! 온 경성이 무원산을 떠들어대고 있으니!

“지금껏 뒤에 숨어 있던 그 여인이, 단번에 경성 사람들 앞으로 나왔어.”

진십삼이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태평 두부, 과로신선, 신의 낭자, 탈영병들의 누이. 아니지, 이 신분이 공개되는 순간 더 많은 일이 절로 떠오를 거야. 똑똑한 사람들은 금세 연관을 짓겠지. 유 교리라든가, 탈영병 사건 같은 일을…….”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은 한숨을 내쉬며 산비탈 아래를 쳐다보았다.

“단번에 그 많은 재주를 공개하다니, 분노가 대단한가 보네.”

진십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두부도 만들고, 미식에 일가견이 있으며, 병도 치료할 줄 안다. 천문과 역법을 알고, 이번엔 술까지 빚었지.”

그는 말을 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았다.

“그 여인의 재주에 한 번 놀랄 때마다, 그 여인은 곧 더 놀라운 일을 보여 줬어. 진짜 모르겠네. 이번엔 또 얼마나 신기한 일들이 숨겨져 있을지.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정신없고, 봐도 모르겠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질지.”

만취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주육낭을 진십삼이 발로 찼다.

“그걸 어떻게 안 보고 어떻게 외면해? 아쉬워서 떠날 수가 없잖아. 대답해 봐, 안 그래?”

곤드레만드레 취한 주육낭은 진십삼의 발길질에 영문도 모르는 채 어어, 하고 대답했다.

하늘은 다시 고요를 되찾은 지 오래였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벌써 성곽을 두 번이나 더 돌았다. 하지만 동문의 감문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폭죽이 어떻게 그렇게 높이 올라가지?”

그가 중얼거렸다. 옆을 지나가던 병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에 팡팡 터지던 불꽃놀이를 본 후부터 감문관은 쭉 그 상태였다. 사색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있는 것 같기도 한 채로 서서 이따금 같은 말만 되뇌었다.

대인께서 갑자기 여인이 되셨나? 여인처럼 감상에 푹 빠져 계신 것 같잖아?

“그게 왜요?”

보다 못한 누군가가 옆에서 물었다.

“난 그렇게 높은 곳에서 터지는 불꽃을 본 적이 없네. 화약이 그렇게까지 못 올라가거든.”

감문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병사들끼리 조소가 담긴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 대인은 역시 전문가라 원리가 궁금하시군요.”

누군가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검문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쓰며 그 병사를 노려봤다.

검문관도 관리라지만, 경성은 벼슬아치가 길가의 개처럼 널리고 널린 곳이다. 나 같은 최말단의 무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지.

이 병졸만 해도 그래. 이 녀석은 병졸이고 난 관리면 뭐하나. 이 녀석의 친척 중엔 나보다 높은 관리가 있는걸.

감문관은 잠자코 시선을 거두었다.

“뭣들 하는가?”

멀리서 걸어오던 무리가 물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상관은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감문관이 얼른 다가가 영접했다.

“이 대인께서 불꽃놀이를 보고 계셔서요.”

누군가가 웃으며 대답하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이무, 돈을 써서 관직을 샀으면서, 맨날 가업 생각만 하면 쓰나.”

상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투로 말하자, 감문관은 무안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대인.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 다행이고. 열심히 해야 장차 다른 직책도 맡지. 그래야 다들 이씨 가문엔 대장부도 있다고 하지 않겠나. 이씨 가문이라고 하면 다들 폭죽조사(爆竹祖師)만 떠올리지 않고 말일세.”

얼핏 격려처럼 들리지만, 옆에서 웃음을 꾹 참거나 대놓고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의 모습으로 봤을 때 역시나 굴욕적인 말이었다.

감문관 이무(李茂)는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폭죽 점포를 하는 이씨 가문 대방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씨 가문에서 진상한 폭죽을 황제가 흡족히 여긴 덕에 무관 관직을 얻은 터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상관이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뜬 후에야 천천히 허리를 편 이무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들 생각은 해 봤을까. 하늘로 쏜 폭죽이 저리 높이 올라갈 정도인데, 그걸 직사로 쏜다면?”

이무가 천천히 중얼거리며 눈빛을 반짝였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화약이 저렇게 높이 날아간 거지?”

* * *

작가의 말:

<당사(唐史)>에 ‘이전(李畋)은 강남서도(江南西道) 원주부(袁州府) 상률 사람으로 무덕 4년(서기 621년) 4월 18일생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산귀(山鬼)에 놀라 병을 얻었는데, 아무리 치료하려 해도 효험이 없자 전국에 방을 붙여 명의를 수소문했습니다. 당시 스물넷이었던 사냥꾼 이전은 방을 보고 대나무 통에 초석을 넣고 터뜨려 산요(山魈: 깊은 산에 사는 요괴)의 사악한 기운을 쫓았지요. 그 덕에 건강을 되찾은 이세민은 이전을 ‘폭죽조사(爆竹祖師)’에 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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