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60)

-응분의 대가-

황궁, 경왕의 궁.

이 태의가 맥을 짚던 손을 떼자, 경왕을 양쪽에서 잡고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놓아주었다. 내시들의 손에 눌려 답답해하던 경왕은 소리를 지르며 내시들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놀아 줘라.”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이 태의가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 말은 귀가 닳도록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전하가 듣고 싶으신 말씀은 이 말이 아니겠지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희망은 일찌감치 버렸어요. 짧고 고된 인생인데, 현실에 맞지 않는 억측으로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는 늠름하게 웃는 진안 군왕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도 부디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짧으니까요.”

나는 내가 하게 될 일을 생각하면, 아주 즐겁습니다. 그 일을 해낸 뒤에는 아마 더욱 즐겁겠지요.

이 태의가 천천히 물러났다.

“전하, 정 낭자께 경왕을 한 번 더 데려가 보는 건 어떠신지요?”

내시가 조용히 물었지만, 진안 군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은 의원이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정 낭자가 돌아온 게 영 이상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살려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꼭…….”

“내가 묻지 않은 일에 대해 굳이 알려 줄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었다. 뒤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진안 군왕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냉랭한 진안 군왕의 반응에 내시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은 회랑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 전각 앞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았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경왕을 향해 걸어가면서 손뼉을 쳤다.

“이리 와. 이 형이랑 축국(蹴鞠) 하러 갈까?”

휘장 사이로 비친 햇살이 주육낭의 눈을 찔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노야,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무슨 의원을 불러. 술을 진탕 마셔서 저러는 거잖소.”

“술을 마신 건지 독을 쓴 건지 누가 알아요? 노야, 그 여인을 어떻게 믿으라고요.”

“또 헛소리를 하면 당신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겠소.”

“이것 봐요. 당신도 걱정은 되지만 그 애가 무서운 거잖아요. 우리 육낭이 잘못되더라도, 당신은 그 애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할 거죠?”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주 노야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주육낭은 몸을 일으켜서 큰소리로 외쳤다.

“전 괜찮으니까 그만 싸우십시오. 조용히 혼자 누워 있고 싶어서 그래요.”

문밖에서 들려오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뚝 끊기고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낭, 정말 괜찮은 거니?”

주 부인이 문밖에서 물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일어났습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그럼 됐어.”

주 부인은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더 한 뒤에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인은 참 불쌍해. 그 여인에 대해 잘 모르는 가족들은 그녀를 멸시하고, 그 여인에 대해 잘 아는 가족들은 그녀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잖아. 누구 하나 그 여인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가엾이 여기는 가족이 없어.”

진십삼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 말 못 들었어? 혼자 조용히 좀 누워 있고 싶다니까?”

주육낭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들었지.”

진십삼이 대꾸하고는 팔찌 하나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오랑캐들한테 얻어온 전리품인가? 늑대 이빨? 꽤 예쁘네.”

“그렇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던가.”

주육낭이 말하면서 침상에 도로 누웠다.

“사내자식이 이런 걸 해서 뭐해.”

진십삼이 웃으면서 늑대 이빨로 엮어진 팔찌를 주육낭의 얼굴에 던졌다.

“뭐, 이런 걸 차고 다닐 여인도 몇 없겠지만.”

주육낭은 진십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팔찌를 손목에 차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이,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자네는 왜 그렇게 취한 거고? 정 낭자가 어쩌다 자네에게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지?”

진십삼이 주육낭을 툭툭 밀치면서 웃었다. 참다 못한 주육낭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윽박질렀다.

“과거 시험이 반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만 돌아가서 공부나 좀 하시지? 나중에 자네가 낙방하면, 나는 자네를 위로해야 하는 거야, 조롱해야 하는 거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얘기하기 싫다면 관둬. 어차피 자네는 정 낭자 앞에서 항상 창피한 꼴만 보였으니까. 얘기하기 싫다 해도 이해하겠네.”

쿵 소리와 함께 짐승 머리 조각이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소리를 들은 진십삼이 문밖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헤헤 웃었다.

“한 번도 나를 진짜로 때리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세게 던지는 척하기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들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주육낭은 피곤한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는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휘장 뒤로 시녀가 방을 나가는 그림자가 비치자, 주육낭은 베개 밑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펼쳐 들었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태평’ 두 글자가 암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분명 그 여인이 만든 게 아닐 거야. 그 여인은 아마 바느질을 하는 법도 모를걸.

주육낭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생각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한쪽으로 휙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뒤, 다시 손수건을 주워 얼굴에 덮은 주육낭은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십삼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곧 있으면 과거 시험 아니에요? 타지에 있던 서생들도 벌써 경성으로 들어오던데, 공자님은 엄청 한가해 보이네요.”

시녀가 말했다.

“다 믿는 구석이 있느니라.”

진십삼이 너스레를 떨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대청 밖으로 나오고 있던 정교랑이 보였다. 반근은 손에 너울을 들고 있었다.

“어디 출타하려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도울 게 있을까요? 이번 일은 지난번과 많이 다르던데요. 지난번은 경성에서 일어난 일이고, 조정의 일과도 엮여 있었지만, 이번 일은 이미 끝난 전투와 서북 군사가 관련된 일이에요. 게다가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에, 서북의 모든 관리와 장수들은 이번 전투에 이견이 없을 겁니다. 겨우 병졸 몇 명 죽어 나간 일에는 아무도 꿈쩍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조정도 마찬가지겠죠. 생각해 봐요, 낭자. 서북 용곡성에서도 키우지 못하고 눌러 버린 일인데, 경성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낭자가 정정당당하게 나오더라도 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경성 인근에 묫자리를 알아봐 줘요.”

묘, 묫자리?

진십삼이 깜짝 놀랐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거센 바람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차 한 대가 급하게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마중 나온 점원이 서둘러 우산을 펼쳤지만,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옷은 이미 젖어 있었다.

“상등 방에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오. 다들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가야겠으니.”

사내의 말을 듣자, 점원은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병졸로 보이는 젊은 사내들은 연꽃이 새겨진 조각문양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고, 평범한 행색의 아낙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들의 말씨와 옷차림새, 그리고 표정에서는 시골 촌뜨기의 어벙함이 한가득 묻어났다.

저런 사람들이 상등 방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다고?

점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방에 술도 한 주전자 가져다주시오. 좋은 술로다가.”

사내가 점원 앞에 서서 말했다.

점원의 눈에는 자신 앞에 선 사내 또한 연꽃 조각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병졸들과 다를 바 없이 비쩍 마르고, 억세고,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처럼 볼품없어 보였다.

“왜 그러시오?”

범강림이 자신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점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저희 객잔은 선불이라서요.”

점원이 팔짱을 끼고 느긋한 모습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돈주머니 한 뭉텅이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민첩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돈주머니를 받아 든 점원은 굳이 주머니를 열어보지 않고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고, 손님. 상등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이! 빨리 뜨거운 목욕물 좀 받아 와. 말에게는 질 좋은 건초를 먹이겠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뒤로하고, 객잔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범강림 일행이 상등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청 구석에 앉아 있던 세 손님이 몸을 일으켜서 뒷마당 입구로 걸어갔다. 그들은 상등 방을 향해 올라가는 범강림 일행을 흐릿한 비안개 사이로 지켜보았다.

“형님.”

세 사람 중 한 명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뒷마당에서 몇 사람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큰 상자는 방수포로 덮여 있었고, 상자를 드는 두 사람과 옆에서 우산을 씌우고 있는 두 사람 모두 조심조심 움직였다.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뒷마당의 휘장 뒤에 숨어서 상자가 좀 전에 돈주머니를 던진 사내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가 세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하얗게 뜬 반달이 새벽 안개를 비추며 주위를 밝혔다.

갑자기 내린 폭우 때문에 객잔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나 상등 방은 더더욱 한산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지붕에 남아 있는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빛 아래로 그림자 세 개가 마당을 가로질러 층계를 올라가더니 상등 방 앞에서 멈춰 섰다.

한 남자가 먼저 문에 귀를 대고 안쪽 소리를 살폈다. 남자는 얇은 철사를 문틈 사이로 끼워 넣으며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남자가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이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구석에 있는 큰 상자를 바로 찾아냈다. 뒤늦게 들어온 남자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문을 열었던 사람이 재빨리 그를 잡아 세우고 바닥을 가리켰다.

걸음을 옮기려던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가느다란 실 하나가 달빛에 비쳐 보일 듯 말 듯 빛났다.

경계선으로 기관까지 설치해 놨네?

두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닌, 몹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저 상자에는 분명 값나가는 게 들어 있을 거야.

경계선을 발견했던 남자가 손짓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안쪽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남자는 두어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이와 동시에, 푸슉 소리와 함께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에라이, 선이 하나 더 있었어.”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낮게 읊조리면서 상처 난 다리를 꾹 누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뒤에 있던 사람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남자는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뒤에 있던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넷째야.”

남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쓰러진 사람을 부르며 서둘러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져 있었고, 목에는 아직 진동이 남아 있는 긴 화살이 꽂혀 있었다. 쓰러진 사람의 목 뒤로 흘러나오는 피가 달빛에 비쳐 괴이한 빛을 내뿜었다.

“도둑놈 주제에 큰소리를 내다니, 정말 버릇이 없는 놈들이로구나.”

남자의 뒤에서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이 나간 채로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병풍에 가려진 침상 옆에서 활을 든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혀, 형님,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남자가 쉰 목소리로 빌면서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한쪽으로 던지고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범강림은 그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다 먹고 살자고 이러는 건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던 남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때, 갑자기 다른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나 범강림을 향해 단도를 날리고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범강림은 날아오는 단도를 피하느라 얼떨결에 조준을 제대로 못 한 채 활시위를 놓았다. 바닥에 있던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범강림에게 달려들어 허리춤에 있던 또 다른 칼을 꺼내 범강림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칼은 범강림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남자가 범강림에게 달려드는 순간, 누군가가 문가에서 쇠뇌로 쏜 화살이 남자의 목을 관통했고, 남자는 손에 칼을 쥔 채로 쓰러졌다.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두어 번 꿈틀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혀, 형님들.”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에 겨눠진 두 자루 칼날에서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범강림은 뒷걸음질 치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외쳐라.”

범강림이 말했다.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에, 온 객잔이 시끌벅적해졌다. 방마다 등불이 켜졌고, 점원들은 몽둥이를 손에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사람들의 외침이 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그냥 도둑일 뿐이니까, 잡히면 잡히는 거지, 죽지는 않겠네.

목에 칼이 닿아 있던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으로 살며 하루하루가 어두컴컴한 밤이길 바랐지만, 지금만큼 등불과 사람들이 반가울 때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기도 전에, 활시위가 울리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매서운 화살촉이 달빛을 가르며 날아와 남자의 목에 정확하게 꽂혔다. 남자는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화살과 함께 뒤로 고꾸라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몇 초간 경련을 일으키다가 숨을 거두었다.

“도둑 잡아라!”

범강림은 활을 내려놓으면서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쯤, 객잔 마당에 잔뜩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관리 한 명이 시체 옆에서 몸을 일으키고 관졸에게 손짓했다.

두 관졸이 시체 위로 하얀 천을 덮은 뒤 시체를 들고 층계 아래로 내려갔다.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들려 내려오는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웅성거렸다.

“물건을 훔치려고 해서, 다 죽였다는 말인가?”

관리가 방 안에 있던 사내 몇 명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기를 안고 있던 아낙은 간밤에 도둑도 모자라 살인까지 겪어서 그런지, 사색이 된 낯빛으로 품에 안긴 아기를 토닥였다.

“예. 물건을 훔치려는 것도 모자라서, 저를 발견하자마자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너희는 어디 사람이고, 뭐 하는 자들이냐?”

범강림이 노인(路引: 여행 허가증)을 관리에게 건네면서 대답했다.

“무원산의 범강림이라고 합니다. 서북 군영의 감용으로, 가족을 만나러 아내를 데리고 경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병졸들은 저희를 호송하는 자들이고요.”

범강림이 건넨 노인을 확인한 관리는 모든 의문이 풀렸다. 오랑캐 열댓 명 이상을 죽이지 못한 자는 감용이 될 수 없었다.

죽임을 당한 도둑들은 관청에서 전부터 쫓고 있던 자들이었다. 필요에 따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지만, 워낙 뒤처리가 깔끔하다 보니 아직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서북 병사를 마주치다니.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놈들일세.

어쩌다 이런 비렁뱅이 같은 병사들의 물건을 훔치려고 한 거야? 훔칠 게 뭐 있다고.

관리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큰 상자로 향했다.

보아하니 고급 자재로 정교하게 만든 나무 상자로군. 상자를 만드는 데만 해도 큰돈을 들였을 텐데, 저 안에 든 것은 그럼…….

“저건 뭐지?”

관리가 물었다.

범강림이 상자를 열어 관리에게 보여주었다. 상자 안에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유골함을 본 관리는 흠칫했다.

“전장에서 형제 다섯을 잃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서요.”

범강림이 말했다.

관리가 층계를 내려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또다시 와글와글 떠들었다.

“나리, 나리. 무슨 좋은 물건을 훔치려 한 겁니까?”

구경꾼 중 한 명이 나서서 관리에게 물었다. 관리가 그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

관리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몰려들었지만, 관졸들이 재빨리 사람들을 비켜서게 하며 길을 텄다.

관리는 객잔 밖에 서 있는 수레에 실린 시체 세 구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잃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관리가 고개를 돌려 객잔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병졸들도 너무 사나운 거 아니야? 유골함 몇 개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잖아?

방 안에 있던 범강림은 상자 앞에 서서 유골함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술 한 잔을 상자 앞에 붓고는 천천히 뚜껑을 닫았다.

“강림 형님, 이 상자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강림 형님, 씀씀이가 너무 크셔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요. 좀 조용히, 겸손하게 가는 게 좋겠습니다.”

범강림을 호위하던 병졸 세 명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범강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무리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나쁜 마음으로 남을 해치려는 자를 막을 수는 없네. 눈에 띄게 다닌다고 해도 겪어야 할 일은 똑같으니, 차라리 통쾌하게 처리하는 게 낫지. 아니면, 아예 더 화려하게 하고 다닐까? 그럼 우리를 해치려는 자들이 우리가 건드려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한 번쯤 더 고민해 볼 테니까.”

범강림이 다시 한번 상자를 쳐다보면서 손에 들린 활을 꽉 쥐었다.

범강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경성에서 새로 전해온 소식이 있는지 확인하러 앞쪽 역참에 갔던 병졸이 급보 한 장과 함께 돌아왔다.

“강림 형님, 경성에서 보낸 급보입니다.”

범강림이 서둘러 봉투를 뜯어 옆에 있던 부인에게 서신을 건넸다. 아기를 안고 있던 아낙이 범강림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누이가 우리더러 천천히 오라고 하네요. 7월 말쯤 경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요.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해요.”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범강림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서신을 접었다.

그럼 기다려야지. 얼마가 됐든 기다려야지. 누이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 없으니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지.

혼란스러웠던 일식이 지나가고, 7월의 경성은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이른 아침, 조회를 마친 진소는 옥대교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를 호위하던 시종들은 서둘러 마차 옆으로 다가가 진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가서 정 낭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진소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시종 하나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옥대교 저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금세 옥대교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어린 몸종 하나가 문밖으로 나와 시종과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시종이 진소에게 돌아와 말했다.

“정 낭자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없다고? 그럼 아직 경성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가? 일식을 예측했던 사람이 정 낭자가 아니었나?

진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시종들은 진소를 재촉할 수 없어서 거리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뒤,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진소의 마차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뒤늦게 시선을 의식한 진소는 그제야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명을 내렸다.

진소가 탄 마차가 진씨 저택 앞에 도착하자, 마차 한 대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진십팔랑을 포함한 진씨 가문의 여식들이 마차에서 내려 진소를 향해 예를 올렸다.

“어딜 가는 것이냐?”

진소가 물었다.

“박양(博陽) 군주(郡主: 황족 여성의 봉호)께서 저희를 시회에 초대하셨어요.”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시회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경성 여인들은 시회에 나가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시 짓기에 재능이 없는 진십팔랑이 시회에 나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진소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에 말없이 눈으로 딸들을 배웅했다. 진소에게 있어서는 진십팔랑이 시회에 나가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남들에게는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박양 군주의 거처에 도착해 있던 다른 집안의 낭자들은 진십팔랑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십팔랑, 박양 군주 댁의 찬모가 만드는 차탕(茶燙: 기장, 수수 등의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설탕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음식)이 맛있어서 온 건 아니지?”

한 여인이 웃으면서 비꼬는 말을 던졌다. 여인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알았나 몰라. 군주님 댁의 차가 너무 맛있어서, 한번 마시면 잊을 수 없는 맛이기에 왔지.”

진십팔랑이 웃으며 여인의 말을 받아치고는 상석에 앉아 있던 박양 군주에게 말했다.

“제가 식탐이 좀 있는데, 절 비웃진 않으실 거죠?”

박양 군주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먹기 좋아하고, 먹을 줄 알고,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얻기 힘든 능력이지.”

원래는 진십팔랑을 비웃으려고 던진 말인데, 도리어 그녀를 칭찬하는 말이 되어 버리자 주위 사람들은 비아냥대는 태도를 숨겨야만 했다.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군주를 따라 진십팔랑을 칭찬하는 말 한두 마디를 얹었다.

진십팔랑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싱긋 웃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회 때 제대로 혼쭐을 내 주겠어.”

간단한 인사치레를 거친 뒤, 본격적인 시회가 시작되었다.

“십팔랑.”

다들 고개를 숙이고 시를 쓰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던 여인들이 진씨 가문 딸들의 탁자 앞에 서서 진십팔랑을 불렀다.

여인이 진십팔랑의 텅 빈 탁자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차탕을 다 먹었으니, 할 일이 없어진 거야?”

“시에는 재능이 없는지라, 좀 이따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만 도우려고.”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도와? 돕긴 뭘 도와? 십팔랑,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을 경하드리고자 군주께서 특별히 주최하신 시회야. 마음을 담아 시 한 편 쓰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다른 여인이 진십팔랑에게 시비조로 말했다.

“마음을 담는 게, 꼭 시일 필요는 없잖아.”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십팔랑이 어떤 마음을 쓸지 궁금해 죽겠네.”

여인들이 깔깔 웃으면서 진십팔랑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까닥이며 생긋 웃었다.

“진십팔랑이 진짜 이상해졌다니까.”

제자리로 돌아온 여인들이 분해서 투덜댔다. 주먹을 날려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어디 한번 무슨 마음을 쓰는지 두고 보자고.”

여인들은 한쪽에 서서 자신들의 시를 써 내려가면서 끊임없이 진씨 가문의 딸들이 무엇을 하는지 확인했다.

진십팔랑은 자매 중 한 명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른 자매의 자리로 가서 붓에 먹물을 묻히고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진십팔랑의 행동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정말로 시를 쓰는 건가?

하지만 진십팔랑은 곧이어 다른 자매의 자리로 옮겨가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 자매들이 지은 시를 대신 쓰는 것 같은데?”

여인들 중 하나가 말하자 다른 여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쓴다는 게, 고작 저런 거야?”

“자매들은 시를 짓고, 자기는 옮겨 써 주기만 하고?”

“저래 놓고 자매가 함께 쓴 시라고 우기진 않겠지?”

여인들이 진십팔랑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십팔랑 쪽으로 점점 시선이 모아지자, 박양 군주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군주의 시녀가 군주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지막이 고하자, 박양 군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좀 옹졸하지 않나? 시를 못 짓는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자매들을 따라 나들이 나왔다고 해도 괜찮을 것을.

박양 군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사람들이 작성한 시를 모두 거둬들였다. 박양 군주는 연로한 한림들을 특별히 모셔와 시회의 시를 평가하도록 한 터였다.

한림들은 안쪽 대청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시녀가 시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술을 마시며 한껏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늙은 한림들은 시녀가 종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학문이나 시에 대해 깊이 공부한 여인이 드물다 보니, 늙은 한림들은 시회에서 나오는 시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시회의 초대에 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박양 군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맛있는 술을 실컷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양 군주가 이들에게 대접하는 술은 군주의 저택에서 직접 빚은, 경성에서도 매우 맛좋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자, 자, 내기나 한번 하세. 오늘은 과연 몇 명이 운율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나? 진 사람은 벌주 석 잔을 마셔야 하네.”

한림 중 한 명이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그게 어딜 봐서 진 거야? 석 잔씩이나 마시는데 이긴 거라고 해야지. 무슨 심보인지 훤히 보이네, 보여.”

다른 한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우스갯소리가 오갔지만, 어찌 됐든 남의 집 귀한 술을 마셨으니 할 일은 해야 했다. 한림들은 시녀가 들고 온 종이를 몇 장씩 나눠 가지고 시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흠, 이건 나쁘지 않네. 먹을 아주 잘 갈았어.”

“이것 좀 보시오, 문장 부호를 틀리지 않게 쓴 시도 있소.”

“운율이 맞는 시를 한 편 찾았네. 그러니 술 석 잔은 내 것이야.”

대청에서 시를 비웃고 풍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좋아, 좋아!”

그 사람이 탁자를 마구 치면서 소리쳤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떤 말로 비꼴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정말 너무 훌륭해!”

그는 다른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흥분된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쳤다. 그가 옆에 있던 다른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또 좋다고 소리를 쳤다.

진짜 좋은 시인가?

“어디 한 번 읽어 보시게.”

사람들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손에 쥔 종이를 보면서 연신 감탄만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탁자 위에서 손가락으로 시를 따라 쓰기까지 했다.

정말 그 정도로 좋다고?

사람들이 홀린 듯이 그 사람 주위로 몰려갔다.

“세상에! 이, 이건!”

대청 안에서는 더 많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한림들이 있는 대청 못지않게 앞쪽 대청도 몹시 떠들썩했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여인들은 수시로 깔깔거리고 웃으며 진씨 가문의 딸들을 흘겨보았다.

박양 군주는 진씨 가문의 딸들을 저대로 두었다가는 그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십팔랑을 제외한 진씨 가문의 딸들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진 상공 댁의 딸들인데, 너무 무안을 주면 주최자인 내 체면만 깎이잖아.

박양 군주가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직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느냐.”

오늘은 유독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론 박양 군주도 한림들이 시회에 나온 시들을 진지하게 평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회를 주최한 군주 역시 오늘 모인 여인 중에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몇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대부분의 시가 간신히 말이나 되는 정도일 거라고 군주는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 시회에서 정말로 훌륭한 시를 뽑으려는 게 아니라, 이런 시회를 통해 자신의 효심을 표현하려던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림들에게 결과를 물으러 갔던 시녀가 연로한 한림 한 명과 함께 군주 앞으로 돌아왔다. 박양 군주는 시녀의 뒤를 따라온 한림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고고한 척을 하는 한림들은 직접 밖으로 나와 결과를 발표한 일이 결코 없었다. 군주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마 죽어도 이런 시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다.

“양 대인께서 어쩐 일로…….”

군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연로한 한림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 시들은 어느 낭자가 쓴 겁니까?”

한림이 손에 쥔 네 장의 종이를 군주에게 펼쳐 보였다. 본디 종이가 구겨지든 말든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다녔던 그지만, 지금은 아주 소중한 보물단지를 모시듯이 종이 네 장을 두 손으로 받쳐서 들고 있었다.

박양 군주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경성의 유명한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래서 박양 군주는 시를 제출할 때, 가문의 후광을 배제하고 귀한 집 따님들의 이름을 보호할 목적으로 시를 쓴 사람의 이름 대신 각자의 탁자 위에 적힌 숫자를 종이 위에 대신 적게 했다.

감격스러워하는 양 대인을 본 사람들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시가 바로 오늘의 1등 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름 시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던 몇몇 여인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신에게 쏟아질 찬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12, 13, 14, 15.”

다행히도 양 대인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깔끔하게 번호를 불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대청 안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히 자세까지 고쳐 앉고 자신의 번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여인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만 하고 누가 먼저 자신의 것이라고 나서지 않자, 양 대인은 다시 한번 번호를 소리 내어 불렀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쪽에 모여 앉은 진씨 가문의 딸들에게로 향했다.

“진 상공 댁 낭자들의 시라고?”

박양 군주가 다소 놀란 얼굴로 시녀에게 되물었다.

진씨 가문의 딸들은 항상 규칙에 맞는 무난한 시를 써냈어. 특출나게 좋은 시를 써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못 본 사이에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건가?

“한 번 읽어 주시지요.”

누군가가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양 대인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손에 쥔 시 중 아무 시나 골라 읊었다.

양 대인이 읊은 시를 들은 사람들이 더욱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준이 아무리 미미하다 한들, 시에 사용된 단어가 좋은 단어인지 평이한 단어인지는 구분할 줄 알았다. 한림이 읽은 시는 기껏해야 규율을 잘 맞춘 정도지, 결코 가장 잘 쓴 시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시로 결과를 낸 게 아닌 것 같네요?”

시회에 참여한 자제들은 대다수가 유명한 권문세가 출신이었다. 배경을 믿고 남을 업신여겨선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꾸준히 받아온 여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이들은 아니었다.

시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양 대인에게 의도가 명백한 반어법을 던졌다.

하지만 양 대인은 사람들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몹시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맞아. 다들 이미 알고 있었던 거로군.”

맞아? 알아? 뭘 알고 있었다는 거야?

양 대인의 태도에 사람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저 늙은이가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술주정을 할 사람은 아닌데?

박양 군주가 헛기침을 하고는 양 대인에게 물었다.

“양 대인, 이 시들이 좋다는 뜻입니까?”

양 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박양 군주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역시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거였어.

“시는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이 글씨가!”

노인이 두 손으로 종이를 소중히 받쳐 들고는 외쳤다.

“이 글씨들이!”

글씨?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반듯하게 세운 붓끝으로 매 획에 힘의 강약을 조절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글씨는 모두 정사방 균형에 맞되 팔결(八決)에 따른 팔변이 모두 알맞은 길이와 굵기로 뻗어 있어요.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속에서 글씨의 뜻을 곱씹고, 그 후에 붓을 움직이니 행간이 부드럽고 자연스럽지요. 점과 획으로서 형태와 본질을 나타내고, 운필로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엄하면서도 아름답고, 금강이 보이는 듯 대범함이 있습니다.”

양 대인의 격양된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양 대인이 한꺼번에 뱉은 말들을 들어도 그저 귓가가 윙윙거릴 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역시 한림은 한림이야. 어쩜 저렇게 혀끝에서 연꽃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을 수려하게 한담.”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 늙은 한림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글씨는, 어느 낭자가 쓴 겁니까?”

양 대인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앞으로 한발 내디디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의 변변치 않은 재능을 과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진십팔랑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 양 대인에게 예를 올린 뒤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고, 낭자. 과찬이라니요. 낭자가 가진 재능은 변변치 않은 재능이 아닙니다. 이 글씨만으로도, 낭자는 당장 한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림에 들어갈 수 있다?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여인이긴 했지만, 서예만으로 한림에 들어간 사람에 대해서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경성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이기 때문이었다.

태조(太祖) 집권 시에, 양주의 종공권(鐘公權)이라는 자가 어느 사찰에 글씨를 남겼는데, 우연히 그 글씨를 본 태조는 그 글씨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는 오직 종공권의 글씨만 보고 그를 한림시서(翰林侍書)로 발탁했다. 그 후로도 종공권은 우습유(右拾遺)와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에 봉해져, 뭇 진사와 수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물론 태조의 이런 파격적인 인사 때문에 조정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이후의 황제들은 당연히 이와 같은 황당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예만으로 한림에 들어간 자가 또 나오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 일화를 서예 실력에 대한 극찬으로 쓰고 있었다.

박양 군주가 개최한 여인들의 시회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림이 이 정도의 칭찬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좋다고요?”

박양 군주가 모두를 대신해 양 대인에게 물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보여 주세요.”

양 대인은 종이를 군주에게 건네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종이를 펼쳐 군주에게 보여줬다. 자신이 쥔 종이에서 손을 떼는 것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양 군주는 그런 양 대인을 어이없어하면서도 굳이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자신에게 펼쳐 보인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숨까지 참아가면서 박양 군주의 표정을 살폈다. 진씨 가문의 딸들을 포함한 모두가 긴장된 모습으로 박양 군주를 주시했다.

박양 군주는 글씨를 잘 써 훌륭한 작품까지 남긴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늙은 한림이 술을 진탕 마셔 헛소리를 한다고 여기며,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박양 군주는 제대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좋단 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조용한 대청 안, 진십팔랑의 표정은 한없이 여유롭고 담담해 보였다.

진십팔랑은 놀고 즐길 기회를 수없이 포기하며 2년 내내 밤이고 낮이고 글씨 연습에 매진했다. 그녀는 붓이 닳을 때까지, 버리는 종이가 산이 될 때까지, 붓을 씻는 작은 연못을 까맣게 물들일 때까지 글씨에 매달렸다.

그 모든 게 전부 오늘을 위한 노력이었다.

황제 폐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박양 군주가 개최한 시회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박양 군주는 오랜 시간 종이를 들여다본 것 같기도, 슬쩍 보고 만 것 같기도 한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 낭자.”

박양 군주가 진십팔랑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난 오늘 낭자를 초대한 것을 정말로 후회하네.”

후회한다고?

“낭자가 필시 내 명성을 가릴 것이기 때문이지. 낭자의 글씨를 폐하께 올린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내 글씨가 낭자의 글씨만 못하다고 생각하실 거야.”

박양 군주가 말을 이어가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필시 내 명성을 가릴 것이다.

이 말은 한림에 들어간다는 말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시회에 참가한 사람 중 절반은 이 말의 유래를 알고 있었다.

박양 군주는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양 대인처럼 진십팔랑을 칭찬하고 있었다. 어쩌면 양 대인보다 더욱 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말은 위(衛) 부인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본 뒤, 태상관 왕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했던 말이었다.

이젠 왕희지까지 나왔네.

“소녀, 군주님의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다시 펼 때쯤, 대청 안의 여인들은 아니꼬운 시선 대신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박양 군주의 이 말 한마디로, 이제 진십팔랑은 경성에서 유명한 인사가 될 것이다. 진십팔랑은 황제 폐하에게 글씨를 올릴 수 있는 크나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진십팔랑이 언제부터 저렇게 글씨를 잘 쓰게 됐는지 모르겠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진 낭자.”

양 대인은 아직도 군주에게 종이를 건네지 않은 채, 종이를 두 손으로 귀하게 떠받들며 물었다.

“낭자의 스승이 누구십니까? 차정사 벽에 쓰인 다섯 글자와 태평거에 걸려 있는 ‘태평’ 편액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양 대인의 말을 들은 박양 군주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적 있는 글씨라고 생각했어.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예전만큼 차정사의 글씨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차정사가 그 글씨 덕에 경성의 명소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타지에서 경성으로 온 서생들이나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꼭 차정사에 가서 글씨를 감상하곤 했다.

박양 군주는 이제 차정사에 직접 방문하여 글씨를 감상하지는 않았지만, 차정사 글씨의 모사품을 서재에 보관하고 있었다. 서예를 좋아하는 군주도 차정사 글씨체를 따라 해 보려고 연습했지만,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붓을 들면 그 느낌이 살지 않아 결국 차정사 글씨들을 따라 쓰지는 못했다.

박양 군주가 양 대인이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니, 진십팔랑의 글씨는 정말로 차정사의 글씨들과 비슷해 보였다.

“그럼 대인께서는 제 글씨가 차정사의 다섯 글자만큼 훌륭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진십팔랑은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양 대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종이를 들여다보려던 찰나, 박양 군주가 손을 뻗으며 양 대인에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재촉했다.

“양 대인, 한 장 줘 보세요.”

양 대인이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군주가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대인, 오늘은 제가 주최한 시회입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이 글씨들을 얻어가려면 주인의 비위를 잘 맞춰야지.

양 대인이 서둘러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군주에게 건넸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또 한 장을 골라 군주에게 건넸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두 사람의 행동에도 웃음을 터트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더욱 부러운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여인들이 천천히 진십팔랑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십팔랑, 어쩜 그렇게 글씨를 잘 써?”

“십팔랑, 우리한테도 미리 보여 주지 그랬어.”

사람들이 농담을 던지면서 웃었지만, 진십팔랑은 입을 열지 않고 긴장한 얼굴로 양 대인과 박양 군주를 쳐다보았다. 둘은 고개를 숙이고 각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 다섯 글자보다 훌륭합니다.”

양 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양 군주도 양 대인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씨들보다 더 정교하고, 노련해.”

그 글씨들보다 좋아! 그 여인의 글씨보다 좋다고! 그 여인의 글씨보다 더!

진십팔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주먹을 쥐었던 그녀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드디어 해냈어. 노력하면 되는 거였어. 노력만 하면,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해낼 수 있었어.

“그럼, 진 낭자는 그 다섯 글자와 연관이 있다는 뜻인가요?”

양 대인이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진십팔랑이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고 대답했다.

“네.”

“낭자의 스승이 누구요?”

양 대인과 박양 군주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차정사의 그 다섯 글자의 주인을 드디어 찾아낸 건가?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다섯 글자가 바로 제 스승이에요. 제 글씨는 그 글자들을 끊임없이 모사하여 만들어 낸 글씨거든요.”

* * *

작가의 말:

서예만으로 한림에 들어간다는 일화는 당나라 유공권(柳公權)의 일화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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