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 85화 (85/160)

교랑의경 15권

-기쁨-

중서문하성 관청에 앉아 있던 진소가 붓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근래 폐하께서 군왕을 가까이에 둔다고 했어.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신 거겠지. 군왕이 대황자보다 낫다는 것을.”

진소의 말에 관리 한 명이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고 전시가 들으면 기함할 말씀입니다.”

고 전시 이야기가 나오자, 진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군왕이 맞는 말을 했네. 이참에 사천대를 정리해야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놈들 때문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이 빛을 발할 자리가 없어.”

요설로 민심을 현혹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이긴 하지만.

“하지만 역법으로 일식을 예측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정 대인, 있습니다.”

관리 하나가 대답했다.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대답한 관리를 쳐다보았다.

있다니 뭐가?

“이번에 일어난 일식 시간을 역법으로 정확하게 맞춘 자가 있습니다. 이순풍 천사(天師)가 만든 인덕력을 통해 예측했다고 했답니다.”

관리가 이어서 대답하자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왜 일찍 보고하지 않았는가?”

진소가 물었다.

“그런 일을 어찌 감히 보고하겠습니까.”

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문 역법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감히 하늘의 일을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경외감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사천대 관리들은 예측에 무수히 많은 착오가 있었음에도 지금껏 중징계를 받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숙주부에서 반강현의 잘못을 책망하는 급보가 올라온 터였습니다.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면서요.”

관리가 덧붙여 말했다. 진소를 포함한 관청 안의 모든 사람이 대답하던 관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반강현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했다.

“반강현 근방에서 몹시 유명하고 위신이 높은 노승 하나가 일식 법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신도 수천 명을 반강현 성문 앞으로 모았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 많은 신도 앞에서 노승의 목을 베고…….”

반강현 이야기 때문에 관청 안의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심지어는 문을 지키던 관졸들까지 관청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경청했다.

일식 한 번에 이렇게 재미난 일화가 생기다니.

“어서 가자고. 검정(檢正) 대인께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계신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관청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여인은 분명히 역법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일 거야.”

“에이, 그 여인뿐만 아니라 그 노승도 그랬을걸?”

“역법을 잘 아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 다만 그리 똑똑하고 순발력이 빠른 여인이 배짱까지 두둑하긴 드물잖아. 자네였다면 거기서 어떻게 했겠어?”

중구난방으로 말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그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나라면 아마 그 노승과 논쟁을 벌였겠지. 그러고는 백성들에게 오늘 일식이 없을 거라고 했을 거야. 노승이 댁들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

“백성들이 그 말을 수긍했을 것 같나?”

누군가가 비웃으면서 반박했다.

“그런 말을 알아들을 만한 이들이었다면, 그 노승의 신도가 그 정도로 많진 않았겠지.”

“그러게. 거기 모인 백성 대다수가 노승의 신도기도 하거니와, 신도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알고 지내는 이웃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어디서 느닷없이 낯선 이가 나타나 이 이웃은 무엇무엇이 잘못됐고 나쁘고 어쩌고 하면, 그 낯선 이의 말을 믿겠나, 이웃의 말을 믿겠나?”

당연히 내가 잘 아는 사람 말을 믿지. 그건 사람의 본능이야.

“논쟁을 벌여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겠지. 맞고 틀리고는 차치하더라도, 진흙탕에 발을 빠트리는 것과 다름없었을 테니. 적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지. 그 여인이 애초에 그 노승을 단칼에 죽여 자신과 싸울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일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야.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적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라.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진소는 붓을 쥐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그럴 배짱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할까?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여인뿐일 테지.

그 여인?

진소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설마…….

“노승의 목을 자른 것으로 그 여인이 과단성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이르지요.”

관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여인이 이어서 한 행동이야말로 주목할 만합니다. 그 여인은 노승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노승을 요승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신도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도 가볍게 손을 털고 관청에 그 공을 넘겼다지요. 그러고는 역법에 의거하여 예측한 일식 시간을 관청에 알려 줬습니다. 그 일련의 일 덕분에, 신묘하기만 했던 일식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아깝구먼. 왜 이름을 날릴 기회를 잡지 않고?”

누군가가 웃으면서 말하자, 관리가 냉소를 보였다.

“이름을 날려요? 그 여인이 어리석은 백성 앞에서 오만하게 구는 자였다면, 잠시 이름을 날리고는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그 노승처럼 죽었겠지요. 모르긴 몰라도, 반강현 관청에서 가장 먼저 그 여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을 테고.”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요승 때문에 피해가 막심한 반강현에서는 절대 두 번째 영덕 대사를 허용하지 않을 테지.

“그 여인의 행동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관부를 향한 백성의 경계심을 풀게 하면서, 잃었던 민심과 위신을 되찾았으니까요.”

이야기하던 관리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하게 웃었다.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여인이 역법에 얼마나 능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여인이 신묘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관청 관리들이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르지요. 박학다식하다고 칭찬할 수는 있겠으나 그뿐입니다. 역법은 그 여인뿐 아니라 다른 이도 압니다. 역법에 얼마나 정통한지가 다를 뿐이지요. 아래로는 명성을 얻고, 위로는 질투나 미움을 받지 않는 처신이 세상에서 가장 해내기 어려우며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범재(凡才)여야 남의 시기를 받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곤 하지만, 세상에는 남의 시기를 사지 않는 기재(奇才)도 있었다. 그런 이는 무엇을 하든 명성을 얻으며 모두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는 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 여인이 아무리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 해도, 나와 부친의 눈에는 그저 병이 있어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가엾은 낭자일 뿐이다. 그 여인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 역시 남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었고.

그래. 살인과 방화를 저질러 이득을 취했다 해도, 사람들은 다 그 여인을 아끼고 좋아하잖아.

진소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여인은 어디 사람인가?”

진소가 불쑥 묻자, 시끌벅적했던 관청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관리 하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공고문에 그렇게 상세한 것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강남 말씨를 쓰던 것으로 보아 강주부 일대의 사람일 것 같습니다만, 그 여인을 호위하던 시종들은 모두 경성 말씨를 썼다고 합니다.”

진소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얘기들 나누라는 손짓을 하고는 관청 밖으로 나와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 여인이 움직였다 하면, 무조건 파란이 이는구나.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경성에도 조만간 파란이 일겠군. 그러고 보니, 일식이 정말로 길흉을 알려 주긴 했네.”

그 정도로 대단한 여인이었나?

아니지,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숙주부와 반강현에 소상히 알아보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폐하께 올리게. 신하 된 자로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려야지. 하는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을 받는 사천대를 정리할 때가 됐네.”

진소가 안쪽을 향해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관청 안에 있던 관리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멀어져 가는 진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근 언니!”

시녀와 반근이 서로를 반근이라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주위에 서 있던 어린 몸종들은 놀라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두 반근이 손을 맞잡고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이내 정교랑이 무엇 때문에 경성에 오게 됐는지 떠올리고는 눈물을 보였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씨부터 챙기자.”

시녀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맞다, 손님도 있었지.”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참. 저 손님, 너무 빨리 온 거 아니야?”

시녀가 투덜대면서 얼굴에 웃음이 만개한 진십삼이 앉아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려는 겁니까?”

진십삼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또 저 소리!

시녀가 회랑 아래서 흘겨봤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진 공자님은 꽤 서생다워지셨고, 아씨는 더욱 단아해지셨네.

그나저나 진 공자님은 오랜만에 만났으면 좋은 얘기부터 좀 할 것이지, 어쩜 저래? 우리 아씨를 무슨 산적이나 도둑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뭐만 하면 누구 목숨을 앗아가는 줄 아나!

물론 정교랑은 산적이나 도적처럼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어느 산적이 저렇게 빨리 차를 우려낼까.

진십삼은 눈앞에 놓인 찻잔을 쳐다보았다. 유약이 검게 칠해진 도자기 찻잔 안에 적당히 우려진 녹찻잎이 파르스름한 빛을 띠며 둥둥 떠 있었다.

“내가 실례를 했군요.”

진십삼이 사과를 하면서 예를 표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무턱대고 따라와서는 힘들게 차까지 우리게 했으니 말입니다.”

“차 한 잔 우리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에요.”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차를 비워냈다.

“이번에 경성에 온 건, 오라버니들을 안장하기 위해서예요.”

정교랑이 말을 덧붙였다.

못 본 지 2년이나 됐는데, 낭자는 모든 게 여전하네.

진십삼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교랑은 여전했지만, 진십삼은 예전과 달리 정교랑이 무슨 말을 하면 되묻지 않고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낭자.”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예를 올리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그럼,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진십삼이 말을 하다가, 입술 끝에 매달린 말 대신 다른 말을 급하게 생각해 냈다.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나를 찾아올 리는 더욱 없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낭자를 찾아올게요.”

정교랑이 가볍게 답례했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이 닫히는 것을 본 진십삼은 한숨을 내쉬고 활짝 웃었다.

이렇게 우연히 낭자와 마주치다니. 오늘 낭자가 경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아직 아무도 모르나 보군.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됐어. 내가 제일 먼저 정 낭자를 집에 바래다줬다고!

내가, 제일 먼저.

“공자님, 어딜 가려면 말씀 좀 하고 가세요.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습니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끔찍한 날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시면 어떡합니까.”

사환이 투덜대면서 말고삐를 건넸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 위에 올라탔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좋기만 한 날을 두고.”

진십삼이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떠나갔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날이 좋은 날이라고?

사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님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진십삼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사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진 시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던 진 부인이 물었다.

“십삼의 기분이 왜 저렇게 좋은 거요?”

진 시강이 물었다.

“우리 십삼이 언제 기분이 안 좋았던 때가 있나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로 기뻐 보여서 그렇소. 아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숨길 생각도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진 시강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상하지.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일식 때문인가?”

진 시강이 중얼거렸다. 진 부인은 부정 탄다는 눈빛으로 진 시강을 쏘아보았다.

“십삼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라.”

진 부인이 시녀에게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시녀가 진 부인에게 말했다.

“십삼공자께서는 책을 읽고 계십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진 부인이 진 시강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예전이랑 똑같기만 하네요, 뭘. 진짜 기쁘면, 책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진십삼은 손에 쥔 책을 보면서 행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늘 보았던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진십삼은 오늘 이른 아침에 책을 한 권 읽고, 스승님께 경문 몇 편을 여쭤보았다. 그러고는 벗들과 함께 덕승루로 가서 시를 읊으며 여유를 즐겼다.

이제 진십삼의 옆에는 동문수학하는 학우들과 권문세가의 자제인 수많은 벗이 있었다. 그들은 진십삼을 덕승루로 초대해 화괴의 가무를 즐겼고, 진십삼은 한껏 흥을 즐기고 나서 잠시 물러나 쉬었다. 편안하면서도 여유로운 하루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여인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졌다.

여태 만났던 사람들이나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전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 여인이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그의 모든 것은 화지에 색을 더한 것처럼 생명력을 되찾고 각자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한숨을 토하며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속상하네. 나는 2년이라는 시간을 허투루 보냈던 건가? 2년 동안 느낀 즐거움은 모두 가짜였단 말이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겠지. 그 낭자에게는……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일 거야.

진십삼은 다시 책을 들고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낭자는 내게 직접 차도 우려 주었는걸.

구운 차병을 낭자의 주전자에 직접 우리고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유약이 칠해진 도자기로 만든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렇게 각별한 태도로 찻잔을 건넸다.

낭자는 내게 마음이 없는 게 아닐 거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거나,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간식이 든 찬합을 무뚝뚝하게 건넸을 때도 그랬잖아.

가져가서 먹어요.

주육낭은 낭자의 그런 행동을 퍽 수치스러워했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간식을 쥐여준 것처럼 보였으니까.

진십삼도 당시에는 조금 민망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그 낭자가 달래고 싶은 아이는 세상에 몇 없다는 것을. 낭자가 달래 준 아이는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까.

진십삼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책을 탁자 위로 던졌다.

해가 저물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수문장과 관졸들은 성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원래는 이렇게 일찍 성문을 닫지 않지만, 오늘은 일식이 있었던 터라 평소보다 일찍 성문을 닫으라는 관청의 명이 있었다.

이때, 말을 탄 두 사람과 물건을 잔뜩 실은 말 한 필이 성문 앞으로 다가왔다. 수문장은 그들에게 멈추라는 손짓도 하지 않고 곧장 그들을 성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말에 물건을 한가득 실었던데, 왜 검사도 하지 않고 들여보내십니까?”

관졸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수문장에게 물었다.

“이러니 아직 네놈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지.”

수문장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턱으로 성 안쪽을 가리켰다.

“좀 전에 지나간 그 사내, 살기가 느껴지지 않디? 차림새를 딱 보면 군에서 먼 길을 달려온 게 보이잖아.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썼던 사람을 검사하라고? 얻어맞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야?”

말을 탄 채 성문을 지난 주육낭은 익숙하고도 낯선 거리를 둘러보았다. 돌아온 고향에서 느껴지는 친숙함이 온몸을 덮치자, 주육낭은 채찍질을 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에는 화려한 등불들이 이제 막 켜지기 시작했지만, 낮에 있었던 일식 때문에 오가는 행인들은 많지 않았다. 한창 시끌벅적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경성의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공자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사환은 주육낭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추차 얼른 따라서 말고삐를 당겼다.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주육낭의 시선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등불이 환하게 켜진 옥대교 앞 저택이었다. 문 앞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옥대교 저택 앞은 조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 여인은 도착했으려나? 서북과 비교하면 강주부에서 오는 길이 더 멀 테니, 나보다 일찍 출발했겠지?

“공자님, 우선 정 아씨를 뵙고 갈까요?”

사환이 웃으며 물었다.

보러 가겠느냐고? 내가 저 여인을 왜 봐?

내가 보러 간다고 한들, 그 여인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빠르게 앞서 나가는 주육낭 때문에 사환도 서둘러 채찍을 휘둘러야 했다. 사환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자, 옥대교 저택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 무리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눈에 익은 사람들 같은데, 집에서 봤던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짙어지는 밤하늘 아래, 말굽 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사환의 시야는 모퉁이에 가려져 더 이상 옥대교 저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남겠습니다. 그때 주 노야께서 저희를 아씨께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재차 말했다.

“아씨께서 너희가 필요 없어졌다고 하신 게 아니야. 겁먹기는.”

시녀가 웃으면서 말하자, 시종들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휴, 엄청 겁먹게 되네요.”

시종 중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 집을 나온 지 한참 됐으니까,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회포도 풀고 하루 푹 쉬다 와.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시녀가 말했다.

시종들은 정교랑을 따라다닌 지 오래였던 터라, 더는 토 달지 않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자리를 떠났다. 시녀와 반근은 시종들을 눈으로 배웅한 뒤 대문을 걸어 잠갔다.

옥대교 저택 앞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때 옥대교 저택 바로 옆의 저택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등불에 비쳤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거리의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밤이 되자, 수문장들이 황궁의 궁문을 걸어 잠갔다. 온종일 정사를 돌보았던 황제도 비빈들과 함께 태후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새로 수리한 태후궁 전각 곳곳에는 화려한 문양이 보였고, 등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재 황제의 슬하에는 두 명의 황자와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 많다고 할 순 없으나 그렇다고 적은 자손도 아니었다. 아들 하나와 딸 셋이 한자리에 모여 조잘조잘 떠들어 대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무척 정겹게 들렸다.

“아바마마께 한 잔 올릴게요.”

비빈과 유모의 지도하에, 제일 어린 공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럴싸한 동작을 취하며 황제에게 술잔을 올렸다.

어린 공주의 귀여움 덕분에 황제는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황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주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앞에 두고 술잔을 받았다.

황제가 웃으면서 태후궁 안을 둘러보았다.

그 두 아이는 오지 않았구나.

“오늘 일식이 있었으니, 군왕과 경왕을 불러오거라. 같이 술도 한잔하면서 놀란 마음을 추슬러야지.”

황제가 말했다.

“좀 전에 불렀소. 하나 경왕의 상태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 괜히 군왕을 난처하게 하지 맙시다.”

태후가 대답했다.

“계속 이렇게 사람을 피하면 좋지 않을 텐데.”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은 착하고 가엾은 모습을 꾸며내는 것일 뿐이에요. 우리만 피하는 거지, 폐하를 피한 적은 없잖아요. 정말로 사람을 피하는 거였다면, 매일 폐하 근처를 서성이며 조회까지 따라갈 리는 만무하겠지요. 대황자가 조회를 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응당한 일이지만, 아직 친왕 봉호도 받지 못한 군왕이 어찌 감히 조회를 나간단 말입니까.

군왕이 몹시 괘씸했던 귀비는 속으로 생각하고는 대황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군왕이 폐하 앞에서 네게 창피를 준 적 있느냐?”

대황자는 지금과 같이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사람들을 피해서 처소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아랫것들이 아부를 떠는 것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렇게 여기서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등바등할 게 아니라.

그러니 바보가 되는 게 그리 나쁘지도 않지. 그 바보와 군왕은 내게 감사해야 마땅해.

“어딜 감히요! 군왕은 아둔해서 경문도 못 외우고, 옛 고사도 잘 모르는데, 어찌 제게 창피를 줄 수 있겠습니까?”

대황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으스댔다.

비록 태후와 황제가 진안 군왕에게 글공부를 거듭 권하긴 했지만, 군왕은 경왕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차츰 학당에 발길을 끊었다. 거의 학업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왕은 어차피 종친이고 과거를 볼 필요도 없으니, 사리 분별을 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긴 했다. 군왕의 고집을 꺾지 못한 태후와 황제는 결국 학업 권유를 포기했다.

“한데 군왕이 폐하께 의견을 자주 낸다고 하더구나. 폐하께서도 군왕의 의견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시고…….”

귀비가 말끝을 흐렸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대황자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주먹을 쥐고 고개를 돌려 귀비를 쳐다보았다.

“마마, 얼마 전 관산의 수로 안건도 제가 결정했고, 대하의 수해에 관한 신법 제정 논쟁에도 제가 참여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으신지요?”

대황자가 귀비에게 반문했다.

올해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조정의 일에 대해 들은 게 많다 보니, 대황자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어쩜 저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세등등할까. 정말 위엄있어 보이네.

귀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없을 리가 있나. 이 어미가 다 귀담아듣고 있단다.”

“그럼 부디 안심하세요, 마마.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건 소자이고, 폐하께 자주 의견을 내는 사람 또한 소자입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알겠다, 알겠어. 이 어미는 네가 받아야 할 주목을 빼앗길까 봐 그런 거야.”

귀비가 대황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무도 소자를 향한 관심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감히 내 자리를 꿰차려는 사람이 있다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리라. 그 바보 경왕처럼.

“무슨 재미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느냐?”

태후의 목소리가 귀비와 대황자의 대화를 끊었다. 두 사람이 서둘러 태후 쪽을 쳐다보자, 태후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애가에게도 말해 다오.”

귀비가 웃으면서 대황자의 등을 떠밀자, 대황자는 웃음을 짜내며 몸을 일으켜 태후에게 다가갔다.

대황자는 어린 공주와 황제 곁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두 부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던 태후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기 이 보양탕이라도 황후에게 좀 가져다주거라.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일식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몸이라도 따뜻하게 데워야지.”

“짐이 조금 이따 가 보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에게 보양탕을 가져다주었던 내시가 돌아와서 웃으며 태후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후는 잠들었더냐?”

“아닙니다. 군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소인이 보양탕을 가져다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군왕과 함께 나누어 드셨습니다. 황후께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고요.”

내시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저 봐, 저 봐. 사람을 피하긴? 사람을 골라 가면서 피하는 게지. 내 앞에서만 안 보일 뿐이지, 어디서든 나타나는 놈이야.

귀비가 손에 힘을 주어 부채질을 했다.

저 내시 놈도 아니꼬워. 왜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는. 황후가 자는지 안 자는지만 대답하면 될 것을, 뭐하러 주절주절 입을 놀려?

태후와 황제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군왕이 황후를 챙기고 있을 줄 알았소.”

태후가 말했다.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지만, 군왕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그게 뭐? 그놈의 군왕 나부랭이가 지금은 효도한답시고 궁에 남아 있지만, 앞으로도 평생 여기서 효도나 하면서 살 줄 알아?

태후나 부황, 황후께서는 그놈의 효도, 효도. 참 좋아하신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그놈 효도 같은 거 필요 없어.

대황자가 금잔을 쥐고 느긋하게 보양탕을 들이켰다.

금잔에 담겨 있던 보양탕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금잔을 내려놓으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마마, 일찍 쉬십시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황후는 침상에 기대어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래. 너도 인제 그만 쉬거라.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의미심장한 황후의 말에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럴 필요까지 뭐 있어. 그 아이한테 평생을 묶여 살 작정인 게야? 그만 가거라. 너도 밖에 나가 너의 삶을 살아야지. 그만하면 꽤 오래 곁을 지킨 것 아니더냐.”

진안 군왕은 여전히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간다면,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한가하게 왕야의 삶을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 하지만 네가 황궁에 남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적이 늘어날 거야. 그때 폐하와 태후마마마저 궁에 안 계신다면, 너는 아주 힘들어질 게다. 그 와중에 경왕을 어찌 챙기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경왕을 위한다면, 눈앞의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네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서둘러 생각해 봐야 한다.”

황후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한 것은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황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러니 부디 마마께서 강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를 더 오래 돌봐 주시지요.”

진안 군왕이 말을 끝내자, 황후는 그저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궁녀들이 휘장을 내려놓자 진안 군왕의 시야에서 황후가 가려졌다.

경왕의 궁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욱 걸음을 재촉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환한 전각 안에서는 내시 몇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린아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처럼 둥글둥글한 아이가 딸랑딸랑 흔들며 노는 흔들이북을 손에 쥐고 뛰어다녔다. 아이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눈이 살에 파묻혀서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아이의 입가에서부터 흘러내린 침이 목에 둘린 턱받이를 흥건하게 적셨다.

뚱뚱한 몸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경왕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 싶으면 바닥에 넘어져 소리를 질러댔다.

다행히도 바닥에는 아주 두껍게 깔린 깔개가 있었고, 주위에 있던 탁자와 의자 역시 모두 구석으로 치워 둔 후였다. 전각 안에 있는 모든 기둥에도 솜이불을 둘러 두어, 경왕이 넘어진다고 해도 뼈마디를 다치거나 상처를 입을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내시들은 넘어진 경왕을 보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육가아, 왜 그래?”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경왕은 괴성을 지르면서 손에 있던 흔들이북을 힘껏 휘둘렀다. 경왕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진안 군왕은 경왕이 휘두른 흔들이북에 손과 어깨를 수차례 맞았다.

내시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경왕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진안 군왕은 경왕이 때리는 대로 맞으며 웃는 얼굴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전각 밖에 서 있던 군왕의 내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경왕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군왕께서 저러시는 것도 어차피 다 헛수고일 텐데. 저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실는지.

한참 난리를 피우던 경왕은 지친 건지 흔들이북을 한쪽에 내던지고 그대로 드러누워 잠을 자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런 경왕을 서둘러 일으켜 씻으러 가자고 팔을 끌었다.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경왕이 침상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진안 군왕은 그제야 말을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깃발과 장난감들을 내려놓았다.

“전하,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만 쉬시지요.”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단잠에 빠진 경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살이 너무 쪄도 건강에 좋지 않다던데. 어떻게 해야 살을 뺄 수 있지? 나중에 이 태의한테 물어보거라.”

진안 군왕이 경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전하, 어쩌면 이 태의께 물어보지 않으셔도…….”

내시가 말끝을 흐리자 진안 군왕이 의아한 얼굴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온 사람의 말로는, 정 낭자께서 경성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나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 낭자가 돌아왔다고? 언제?”

갑작스럽게 커진 진안 군왕의 목소리 때문에 경왕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차 싶었던 진안 군왕은 재빨리 경왕을 조심스럽게 다독이고는 다시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휘장을 내렸다.

“오늘 당도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시가 이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두 손을 모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진안 군왕은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마음이 미친 듯이 벅차올랐다. 심장이 들끓는 것 같은 그 감정을, 진안 군왕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전하께서도 그만 씻고 쉬시지요.”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응, 하고 대꾸한 뒤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이 뜨거운 물을 진안 군왕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끼얹었다. 뜨거운 물이 진안 군왕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지나 목욕통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안 군왕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궁녀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어. 다시 돌아왔다고!

갑자기 진안 군왕이 물결이 출렁이는 소리를 내며 목욕통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가벗은 채로 서 있는 소년의 건장한 신체가 드러나자, 물을 끼얹던 궁녀들은 깜짝 놀랐다. 궁녀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황궁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많다. 특히나 진안 군왕의 처소에서는 더욱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았기에 궁녀들은 진안 군왕을 가까이서 시중들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늘한 바람에 정신을 차린 진안 군왕은 다시 천천히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진안 군왕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목욕통 밖으로 나와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른 뒤 맨발로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진십삼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십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으셨습니다.”

시녀들이 서둘러 대답했다.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진십삼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럼 진짜 이상한데. 노야께서 잘못 보신 게 아닌가 봐.”

진십삼이 밤새 책을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봐라, 어제 십삼과 함께 나간 사환이 누구냐?”

진십삼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진 부인과 시녀들의 대화를 듣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문 앞에서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진십삼은 침상에서 몸을 바르게 눕고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채 발끝을 까딱거리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베개 대신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일어나기가 싫네. 오늘은 뭘 해야 좋을까?

학당에 빠지면 안 될 텐데. 아니지, 안 될 건 또 뭐야? 어차피 배우면 다 알게 될 것들인데.

벗들을 보러 가야 하나? 아니야. 가 봤자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고, 정사에 대한 논쟁이나 하다 말겠지.

칠현금을 켜고, 활을 쏘기에는 날이 더워 몸을 움직이기가 싫고.

진십삼은 손에 쥔 부채를 두어 번 흔들다가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부채로 얼굴을 덮었다.

됐다. 그냥 잠이나 자자.

조용했던 문 앞에서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못 자겠구나. 어머니께서 사환한테 물어보면 다 알게 되실 테니, 오늘 편히 쉬긴 글렀어.

진십삼의 예상대로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진십삼은 아예 못 들은 척을 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겠군.

진십삼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누군가가 발길질로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니, 어머니께서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일인가?

화들짝 놀란 진십삼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 쪽을 쳐다보던 진십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빛을 등지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밝은 햇빛을 뒤로한 탓에, 상대의 얼굴보다 탄탄하고 다부진 몸의 윤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이, 태양이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잠을 자? 이게 바로 자네가 말한, 장원이 될 사람의 행실인가?”

주육낭이 팔짱을 낀 채 턱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에 청색 비단 내의를 입고 있던 진십삼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능청을 떨면서 반박을 해야 할 진십삼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주육낭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진십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쳐다보았다.

“어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멍청이가 된 거야?”

주육낭이 손으로 진십삼의 이마를 짚으면서 뒤로 밀쳤다.

“바보가 된 거냐고? 이 바보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십삼이 주육낭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꺼져.”

진십삼이 언짢은 티를 내면서 말했다.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면 보지 말라 했거늘, 남의 침실에 그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어디 도리인가? 전장에 다녀오더니, 더욱 야만인이 돼서 왔군.”

주육낭이 진십삼의 머리를 다시 뒤로 밀었다.

“예의에 안 맞기는. 네놈 헐벗은 몸뚱이도 다 봤던 사이인데. 고작 이런 거로 예민하게 굴기는.”

주육낭이 혀를 차면서 진십삼을 쳐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얇은 마로 짠 남색 옷에 청색 신발, 구겨지지 않게 단정히 묶인 하얀색 허리띠까지, 주육낭은 자신의 멀끔한 모습에 몹시 뿌듯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날 좀 보라고. 그리고 다시 자네 꼴을 한번 봐봐. 내 살다 살다 자네의 이런 누추한 꼴을 보는 날이 있을 줄이야. 남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지만, 자네는 변하면 변할수록 더 못난 놈이 되는 것 같네.”

주육낭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진십삼이 갑자기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진십삼의 주먹에 맞은 주육낭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이야, 샌님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 힘이 있네?”

주육낭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진십삼은 또다시 손을 올리고 주먹을 날렸다.

“계속 때리면 나도 반격한다?”

“어어? 지금 내가 주먹을 휘두르면 분명 피를 본다니까?”

“자네, 어디 다쳐도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

“그래도 때리네? 진짜로? 나 진짜로 반격한다?”

방 안에서 다급한 주육낭의 목소리가 들려오다가, 이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이 진십삼의 방 안을 힐끔 쳐다보고는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두 소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을 한 번 더 날렸다.

“잘하는 짓이다. 좀 비웃었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아주 정신이 나갔군!”

주육낭이 소리쳤다. 진십삼은 말없이 주육낭을 발로 차서 반격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 또 한바탕 서로를 향해 발길질했다.

끝내 주육낭이 먼저 소리쳤다.

“아, 좀! 그만 좀 해! 전장에서 다쳤던 몸이라고!”

진십삼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길질을 날렸다.

“아주 대단하십니다. 나한테 서신으로 다쳤다고 우는 소리 늘어놓을 시간은 있고, 경성으로 돌아온다고 미리 알려 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간사한 농간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진십삼이 화를 내자 주육낭이 호탕하게 웃었다.

“왜? 놀랐냐?”

주육낭이 너무 얄미웠던 나머지, 진십삼은 주육낭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방 안에 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얼굴! 이 빌어먹을 절름발이 놈이!”

“좀 더 줘.”

주육낭이 손에 쥔 찻잔을 시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지 마.”

이미 젓가락을 내려놓은 진십삼이 반대편에서 말했다. 시녀가 웃으면서 주육낭의 찻잔을 가져와 차를 따랐다.

“공자님, 저희 집 차를 많이 그리워하셨나 봐요.”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진십삼이 장난으로 시녀를 나무랐다.

“어라? 이 차가 누구네 차인데 그렇게 마음대로?”

시녀는 진십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웃으면서 주육낭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야 당연하지. 서북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 줄 알아?”

주육낭도 진십삼의 말을 무시한 채 시녀에게 말했다. 그는 커다란 경단을 통째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모조리 정염(井鹽: 염분을 지닌 우물물에서 만든 소금)으로 간을 해서, 무슨 요리든 간에 죄다 떫고 쓰기만 해.”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불쌍해하지 마. 그런 건 말단 병졸들이나 먹는 거니까, 이 녀석은 그런 거 구경도 못 했을 거다.”

진십삼이 성가시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시녀들에게 상을 치우라고 했다. 시녀들은 주육낭이 차를 다 들이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을 치웠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경단 하나를 집어 입에 욱여넣고 방석 위에 널브러졌다. 그러고는 배를 두드리면서 꺼억 소리를 내며 용트림을 했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부채를 던졌다.

“정오가 훌쩍 지났는데, 왜 여태 밥을 안 먹다가 남의 집에 와서 먹는 거야? 무슨 거지도 아니고!”

주육낭은 진십삼이 던진 부채를 주워서 여유롭게 부채질을 했다.

“자, 자. 배불리 먹고 마셨으니, 말 타고 활이나 쏘러 가 볼까? 약해 빠진 미래의 장원급제자께서는 활시위나 제대로 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주육낭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 많이 달라졌군. 햇빛에 피부도 타고 얼굴도 좀 꺼칠해진 것 같고. 무엇보다 그새 병졸들 허풍까지 이리 통달했을 줄이야. 그래. 그까짓 거, 같이 가 주지.”

사환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한 뒤, 두 사람은 활을 고르면서 또 한참을 아웅다웅했다.

“공자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게 얼마 만인지.”

“그러게. 저렇게 신나 보이시는 것도 참 오랜만이야.”

시녀들이 회랑 아래서 웃으면서 속닥거렸다.

거리에 말굽 소리가 들려오자, 행인들이 옆으로 비켜서 길을 터주었다.

“어이, 절름발이. 2년 동안 마차만 타고 말은 안 탔던 거야? 왜 그렇게 굼떠?”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진십삼이 말을 앞으로 몰며 대꾸했다.

“적당히 해라, 외팔아.”

주육낭은 자신의 탄탄한 어깨를 보란 듯이 내밀어 보였다.

“어깨가 커진 건 모르겠고, 간덩이가 커진 건 보이네. 아주 제대로 부었어. 입만 열면 절름발이, 절름발이. 사실 그 말, 꽤 오래 참은 거 아니야?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반어법이잖아. 자네는 나한테 절름발이가 아니니까 절름발이라고 부르는 거지. 자네를 정말로 절름발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렇게 부르지 못했을걸.”

주육낭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십삼이 눈썹을 으쓱하면서 아, 하고 대꾸했다.

“알긴 아는구나. 난 또 자네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았지.”

진십삼이 주육낭 가까이 말을 몰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럼 자네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향기로운 여인’이 돌아왔는데, 한번 가서 보지 않겠나?”

“누가 그 애 보러 가고 싶대?”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얼굴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향기로운 여인은 개뿔! 이 자식, 잘도 받아치는군. 내가 항상 그 여인을 고약한 여인이라고 부르던 것을 뒤집어 저렇게 놀리다니.

“진짜 안 가려고? 오랜만에 온 건데, 서로 얼굴도 보고 안부도 묻고. 얼마나 좋아?”

진십삼은 얼굴이 새빨개진 주육낭을 쳐다보며 놀렸다. 하지만 주육낭은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앞쪽을 내다보았다.

“좋은 일이라고 할 순 없지. 이런 일 때문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안 보는 게 나아.”

주육낭이 진지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이번에 경성으로 돌아온 건, 서무수 형제 중 다섯이 죽었기 때문이니까.

진십삼도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아꼈다. 서무수 형제들의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아도, 정교랑이 그들을 부를 때의 모습은 기억에 또렷했다.

오라버니.

정교랑이 진지하게 서무수 형제들을 부를 때의 그 모습.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 그 사내들의 마음을 이용하려던 게 아닌, 그저 온 진심을 담아 가족의 마음으로 부르던 그 호칭.

오라버니.

하지만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미안하네. 내가 경솔했어. 자네 말이 맞아. 난 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눈앞에서 생사의 경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네. 내가 경솔한 말을 했어.”

진십삼이 사과했다. 주육낭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향해 외쳤다.

“어이구, 이 경솔한 놈 좀 보게!”

주육낭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진십삼의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진십삼이 타고 있던 말이 울부짖으면서 앞발을 치켜들었다가 앞쪽으로 돌진했다. 말에 타고 있던 진십삼은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야, 이놈아!”

진십삼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육낭은 해맑게 웃으며 그를 지나쳐 성 밖으로 내달렸다. 신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본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 이들이 없던 날은 전부 색을 잃은 헛된 시간일 뿐이었어.

그래. 이들이 돌아와서, 난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

이거 하나 인정하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진십삼은 기합을 넣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정교랑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주육낭은 바로 다음 날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이미 왔다 가셨다며, 뭘 또 나한테 먹을 걸 가져다주라는 거야?”

옥대교 저택 앞에 멈춰 선 주육낭은 말에서 내리면서 투덜댔다.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하겠어?”

주육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사환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양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눈빛을 반짝이면서 저택 대문을 쳐다보았다.

사환은 자신의 공자님이 여길 오기 바라든, 바라지 않든 상관없었다. 다른 사환들이 눈독 들였던 자리를 자신이 꿰차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할 뿐이었다.

어젯밤에 돌아왔던 시종들은 정교랑을 따라 2년 가까이 집을 떠나 있었다. 집안에선 그들을 잊고 산 지 오래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뜻밖에도 그들이 떼돈을 벌어 돌아왔지 뭔가.

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도 하지. 정 아씨는 경성에서 운영하는 세 점포를 모두 시녀에게 맡길 정도로 돈이 넘쳐나니까. 시종 몇 명에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품삯을 준다고 해도, 아씨께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걸. 아씨 주변에 남는 사환 자리 같은 건 없으려나.

사환이 문을 두드리자마자 대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대뜸 짜증부터 냈다.

“왔어요? 왜 이렇게 느려요? 다음에는 댁에서 술을 못 시키겠……. 어? 주 공자님? 주 공자님이 왜 여기 계세요?”

시녀가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 왔다.”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사환을 부르려던 찰나, 사환이 번개처럼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누님.”

사환이 공손하게 시녀를 향해 예를 올리고는 선물 보따리를 내밀었다.

과장된 사환의 몸짓에 시녀가 쿡 하고 웃었다. 시녀는 사람을 시켜서 선물을 안으로 들이게 하고, 주육낭이 데려온 사환에게 돈꿰미 하나를 던져주었다.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고 허리 숙여 예를 올린 뒤, 주육낭의 뒤로 물러났다.

주육낭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사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별건 아니고, 잡다한 것과 먹는 것들이다. 고향 섬주에서 보낸 것들도 있고…….”

그리고 내가 서북에서 가져온 것까지.

“주 노야와 공자님께 감사드려요.”

시녀가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주육낭이 문턱을 넘으려고 하자 시녀가 한발 앞서서 그를 제지했다.

“주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는 일이 있어서 손님을 만나지 않으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회랑 아래 있던 반근이 어린 두 몸종에게서 그릇을 받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 쾅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공자님!”

시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반근이 놀라서 고개를 들자 마당 안으로 발을 들인 주육낭이 보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주육낭은 곧바로 마당을 가로지르지 못했다. 마당에 서 있던 시종들이 주육낭을 재빨리 막아섰기 때문이다.

주육낭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시종들을 알아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들의 성씨가 무엇인지도 잊은 것이냐. 감히 나를 막아?”

“공자님, 저희는 주씨입니다만, 지금은 정 아씨를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앞에 있던 시종이 대답하면서 한 손을 들어 다른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금방이라도 주육낭을 붙잡아 문밖으로 내던질 태세를 취했다.

주육낭은 시종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허탈하게 웃었다.

“정교랑!”

주육낭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대청을 향해 소리쳤다.

대청 안에 있던 어린 몸종이 한쪽 문을 열었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이 비켜서자 대청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가슴께까지 오는 치마 위에 청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인의 얼굴은 도자기처럼 티끌 없이 맑았다. 홍조도 없이 하얗기만 한 얼굴이라 정교랑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꼭 어제 본 사람처럼 익숙하구나.

주육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시녀가 시종들에게 비켜서라고 손짓했다. 회랑 아래 있던 반근과 어린 몸종들이 주육낭을 향해 예를 올렸다. 주육낭은 주저 없이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주육낭은 정교랑 앞에 주르륵 놓인 술그릇과 커다란 술동이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육낭이 호통쳤다. 정교랑은 자신 앞에 놓여있던 술그릇 하나를 들고 대답했다.

“술 마셔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술그릇을 들이켰다.

술을 마셔?

주육낭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반근과 두 몸종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술동이를 들어 정교랑이 비운 그릇을 다시 채웠다. 반근은 술이 채워진 그릇을 정교랑 앞에 놓고 텅 빈 술동이를 한쪽에 일렬로 정리했다.

“아씨, 운선거(雲仙居)에서 술을 보내왔습니다.”

시녀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술동이를 품에 안고 대청 안으로 들어와 술동이를 내려놓았다. 어린 몸종들은 시녀가 가져온 술동이를 들어서 새 그릇에 술을 따랐다.

정교랑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다른 그릇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교랑이 그릇에 있던 술을 마시지 못했다.

갑자기 주육낭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술그릇을 확 낚아챘다. 주육낭의 손힘이 너무 센 탓에, 그릇 안에 있던 술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정교랑의 옷을 적셨다.

얇은 여름 옷감의 젖은 옷은 정교랑의 몸에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위에서 아래로 정교랑을 내려다보던 주육낭은 피치 못하게 정교랑의 산봉우리와 골짜기 같은 상체를 보게 됐다.

반근이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주육낭은 멀찍이 비켜서서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았다. 얼핏 보아도 주육낭 역시 반근과 몸종들 못지않게 놀란 모습이었다.

“나, 나는…… 아니, 너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며!”

주육낭이 말을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을 뿐, 못 마신다고 한 적은 없어요.”

정교랑은 반근이 건넨 손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주육낭에게도 손수건을 한 장 건네주라고 몸종에게 눈짓했다.

주육낭이 입고 있던 장포에도 술이 조금 튀긴 했지만, 정교랑만큼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주육낭은 머뭇거리다가 몸종이 건넨 하얀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두어 군데를 슥슥 닦았다.

“전에는 두려워서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기도 했고요. 안 그래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술까지 마셨다가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서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는 두렵지 않다는 건가? 아니면, 속상한 마음이 두려운 마음보다 더 크다는 건가?

“아무리 속상하다고 한들, 건강까지 해쳐선 안 돼.”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로 근심을 달래는 게 뭐 잘하는 짓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짓이지.”

손수건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또다시 술그릇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고개를 홱 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야!”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한잔할래요?”

정교랑이 물어보면서 반근에게 손짓했다.

반근이 술그릇 하나를 주육낭에게 건네자, 주육낭은 곧바로 그릇을 받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정교랑 옆에 꿇어앉아 앞에 놓인 술그릇들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주육낭이 어찌나 빨리 술을 들이켰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있던 술그릇 일곱 개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주육낭은 마지막 그릇을 비운 뒤,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았다. 그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그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주육낭은 떨리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곧바로 술기운이 치솟아 오른 주육낭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눈가에도 취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그자들을 잘 돌보지 못한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네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 세상엔 누군가를 돌봐야만 하는 사람도, 누군가가 돌봐 줘야만 하는 사람도 없어요. 다 각자의 일일 뿐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정교랑이 말을 끝낸 뒤 술을 들이켜려고 손을 올리자, 주육낭이 팔을 뻗어 정교랑의 술그릇을 뺏어와 단숨에 비웠다.

“그래. 난 내 일을 말한 것일 뿐이야. 너와도, 그자들과도 상관없는 일을!”

주육낭이 말을 마친 뒤 술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아씨, 만취했어요.”

주육낭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살피던 반근이 말했다.

“여덟 그릇이나 마셔야 만취라니. 이 술은 정말 형편없구나.”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녀는 대청 안에 놓인 술동이들을 둘러보고는 반근에게 지시했다.

“치워. 남은 술은 다들 나눠 마시게 하고.”

반근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반근은 정교랑이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대자로 뻗어서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는 주육낭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 술동이 좀 치워 줘.”

반근은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면서 마당에 있던 시종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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