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한 대인이 관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관청 안에는 아직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 대인이 돌아온 것을 본 관리들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대인, 그 여인은 잡았습니까?”
관리들의 물음에 한 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네.”
한 대인은 잡았냐는 물음에 찾았다는 대답만 하고는, 승려들을 다 잡아들였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다 잡아들였는데, 영덕 대사와 친분이 있던 무뢰배들이 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현승(縣丞: 현의 부지사)이 대답했다.
문제가 심각하긴 하군.
한 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이제 막 시작되긴 했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옆에 있던 서리가 말했다.
“그러게요. 그 여인은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홱 가 버리다니, 우리더러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무뢰배들은 계속 영덕 대사의 공로를 그 여인이 빼앗아 간 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어떤 중놈이 영덕 대사를 추모하는 법회를 열려던 것을 저희가 제때 도착하여 간신히 막았습니다.”
관청 안에서는 이번 사건에 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관리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한 대인이 옷소매를 만지며 말했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시간이 늦었으니, 이 일은 내일 다시 논의하세. 오늘은 다들 그만 돌아가서 쉬게나.”
관리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한 대인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맨 마지막으로 관청을 나서던 현승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다른 관리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하고는, 한 대인에게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인, 그래서 그 여인은 잡으신 겁니까?”
한 대인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현의 일인데,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되지.”
“대인, 무려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입니다.”
현승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미 끝난 얘기 아니었습니까? 그 여인을 잡…… 아니, 모셔 오기로요. 어쨌든 사람을 죽였으니, 형식적으로라도 뭔가 보여 줘야 합니다.”
이번 일을 가장 쉽고 깔끔하게 마무리할 방법은 영덕 대사를 죽인 여인을 내세워 백성의 성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관청 관리들이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그 여인에게 떠넘기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또 한 번 자신의 옷소매를 주물렀다.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었지. 하지만 그 여인을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그렇게 어린 여인에게 이 일을 떠넘기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요승이 백성들을 현혹했던 사건으로 정리했으니, 그 여인이 저지른 살인은 악을 물리친 것이나 다름없네. 그건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야. 그 여인에게 확인할 건 다 확인했고, 나 또한 선을 그었네. 이번 일은 더 이상 그 여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일세.”
한 대인이 말했다.
“그럼 저희의 일이 되는 것 아닙니까!”
현승이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의 일이 맞아. 당초 내가 그자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후환을 낳은 것이야. 그 여인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해도, 내가 그 여인에게 칼자루를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네. 그러니 이번 일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말게. 본관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네. 그 여인이 영덕 대사를 죽여 준 것만으로도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니.”
한 대인은 다른 건 다 좋은데,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관처럼 행동하신단 말이야.
현승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현승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가에 다다랐을 무렵, 현승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관청 안에 있던 한 대인은 또 옷소매를 쥐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듯했다.
정말 이상하네. 도대체 옷소매 안에 뭘 넣어 두었길래?
현승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자리를 떠났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한 대인은 날이 밝을 때쯤이 되어서야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는 자리에 눕자마자 숙주에서 가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얘기 듣고 왔어요. 숙주까지 전해질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듣고 왔소?”
한 대인이 대답 대신 반문했다.
“이것저것이요. 어떤 사람은 관청에서 일부러 돈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말까지 하고 있어요.”
한 부인이 말했다.
“황당하군.”
한 대인이 옷소매를 내치면서 말했다.
“나도 황당해요. 하지만 노야, 사람이 셋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잖아요.”
한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덕 대사를 죽인 여인을 잡았냐고 물으러 온 거겠지?
한 대인은 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옷소매를 매만졌다.
“걱정 마시오. 다 생각해 둔 방도가 있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한 부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한 대인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집안일에 대해 물었다.
“원조는 사돈댁에 갔어요. 내년이면 경성에 가서 과거 시험을 봐야 하니, 원조에게 가 보라고 당부했거든요. 사돈댁에서는 우리 한조가 파혼할까 봐 초조한 것 같던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혼례를 올리고 말지 왜 자꾸 혼사를 미루는지 모르겠네요.”
“다 원조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한창 신혼일 때 책이 눈에 들어오겠소? 사돈댁은 우리 원조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러는 것이오. 원조가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쉬이 파혼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지.”
“우리 원조가 참 잘 컸어요. 참, 경성에서 또 반년 치 배당금을 보내왔더라고요. 그리고 같이 전해 온 말이 있는데, 반근 낭자가 거처를 마련해 두었으니 원조는 몸만 오면 된다고…….”
“반근!”
한 대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부인의 말을 끊었다. 한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반근이었어.”
흥분한 모습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던 한 대인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마 반근이 그 반근인가? 맞아, 맞아. 그럴 수 있지. 엄청난 집안 출신에, 경성으로 간다고 했으니까.”
한 대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던 한 부인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한 대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부인에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 부인도 한 대인만큼이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요? 노야, 동명이인인 건 아니고요?”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여인이 나를 보고 말한 첫마디가 뭔 줄 아시오? 나한테 한씨가 맞냐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소.”
아무 이유도 없이 성씨와 출신을 묻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건 필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한 부인이 흠칫 놀랐다.
“내가 숙주라고 대답하니, 그 반근이라는 몸종이 헉 소리를 내면서 놀라더군.”
한 대인이 부인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설마요, 설마.”
한 부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그 여인이 나에게 괜히 이걸 준 게 아닐 것이오. 그러니 한 번 시도해 봐야겠소.”
한 대인이 손으로 옷소매를 매만지며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무슨 시도를 해요?”
한 부인이 물었다. 한 대인은 대답 대신 네모나게 접은 종이를 옷소매에서 꺼내 들었다.
“나는 일식이 언제 일어날지 알고 있소.”
한 대인이 천천히 말했다.
“대인,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청에 자리한 관리들과 서리들이 놀란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고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나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고 했네. 이건 우리에게 온 큰 기회야. 그러니 이걸 잘 활용해서 백성들이 관청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해. 이렇게 해야만 요승이 남겨둔 후환을 뿌리째 없앨 수 있네.”
한 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역법을 보고 예측할 줄 아십니까?”
현승이 물었다.
“무인력(戊寅曆: 당나라 건국 원년에 부인균이 발간한 역법)을 볼 줄은 알지만, 예측하는 능력은 없지.”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옷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누가 나에게 일식 날짜를 알려 줬다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대인, 그 여인이 알려 준 겁니까?”
현승이 물어보며 무의식적으로 한 대인의 옷소매를 쳐다보았다.
어제 돌아온 이후로 계속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이유가 바로 저거였어? 그 여인이 저걸 이용해서 한 대인이 자신을 문책하지 못하도록 한 건가?
한 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여인이 알려 줬어. 그 여인은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라고 했지.”
만약 저 날짜가 진짜고,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아주 효과적이고 좋은 기회가 될 거야. 하지만 대인께서 너무 쉽게 현혹되신 건 아닐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지막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날짜가 틀리면요?”
현승이 진지하게 물었다.
날짜가 틀리면, 이번 일은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덕 대사의 잔당들이 그 기회를 이용해 다시 백성들을 현혹할 발판을 만들어 주는 꼴이 된다.
너무 위험한 일이야.
대인, 정말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오신 건가요?
역시 한씨가 맞네요.
그렇다면, 한 대인께 기회를 하나 드리지요.
그 여인은 분명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야!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야!
한 대인은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
“틀림없을 걸세. 모든 이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지금부터 반강현은 구호 의식 준비를 시작하겠네.”
관청 안 사람들은 한 대인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대인, 대인,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현승이 한 대인을 만류했다.
“맞습니다, 대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번 일은 별 탈 없이 지나갈 겁니다.”
다른 관리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몇 년 후 임기가 끝나 반강현을 떠나면, 한 대인에게 반강현은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는 곳이 될 테니 굳이 이번 일을 강행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한 대인의 관직 생활은 이걸로 끝날 것이다.
어제와 달리 한 대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관직 생활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몸을 사리면 쓰나?”
한 대인이 자신 앞에 놓인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이번 일은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내 이름을 걸고 공고문을 하달하게. 다들 구호 의식 준비를 단단히 하게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아침이 되자, 반강현 관청의 문이 활짝 열렸다. 관청 밖으로 걸어 나온 관졸들의 손에는 공고문 종이가 잔뜩 들려 있었다.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게. 우린 이쪽으로 가겠네.”
맨 앞에 있던 관졸이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지시했다. 뒤에 있던 관졸들은 각자 맡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공고문이래?”
“영덕 대사의 험담을 써 놓은 거 아니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지어낼지 모르겠네.”
주위에 서 있던 백성들이 관졸들의 뒤를 쫓아갔다. 관졸이 공고문을 벽에 붙이자, 백성들은 벽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빨리 좀 읽어 봐.”
백성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를 공고문 앞으로 밀어 세웠다. 글을 아는 이가 공고문을 한 글자씩 띄엄띄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인덕력(麟德曆: 당나라 고종 때 이순풍이 만든 태음력)에 따르면 6월 18일 오시(午時) 일각에 일식이 일어날 것이니, 반강현의 모든 백성은 구호 의식에 동참하라.”
공고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일식이 있다고? 이미 지나간 거 아니야?”
“설마 영덕 대사님의 예측이 틀렸나?”
“관청에서 뭘 이런 걸 다 해? 누구 주장이야?”
“관청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거야?”
한 대인이 붙인 공고문으로 인해 반강현 전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한문충(韓文忠)!”
반강현의 모든 관리가 관청에 모여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관리들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고, 한 대인께서 벌써 사천대 나리가 되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실례를 범했사옵니다.”
소리치던 대부(大府) 관리가 서슬 퍼런 얼굴로 이를 갈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한 대인이 재빨리 허리를 숙이면서 사죄했다.
“아닙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요. 대부 대인, 농이 지나치십니다.”
“내가 농을 해? 내가 농을 하는 것인가, 자네가 농을 하는 것인가!”
대부 관리가 호통을 치면서 공고문 종이를 쥐고 흔들었다.
“6월 18일 오시 일각에 일식이 일어난다고? 백성들은 이 공고문을 낸 게 우리 대부라고 생각할까, 자네라고 생각할까?”
대부 관리가 성난 목소리로 한 대인을 질책했다.
“대인, 농이 아니오라 역법에 따라 일식 날짜를 예측한 것입니다.”
한 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부 관리가 한 대인을 향해 공고문을 집어 던졌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을 잡아 백성들의 화를 풀어 주기도 바쁜데, 자네는 지금 뭘 하겠다는 건가? 한문충, 영덕 대사가 죽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꿰차고 차기 대사라도 하려고?”
대부 관리가 언성을 높이면서 물었다.
“대인, 소관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미신 따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역법을 계산해서 예측한 것입니다. 소관은 성인의 말을 섬길 뿐, 괴력난신을 믿지 않습니다. 소관은 단지 요승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리고 싶어 이 일을 감행하는 겁니다.”
한 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일식이나 날씨와 같이 하늘을 읽는 것은 대부분 역법으로 예측이 가능했다. 역법에 통달하면 일식 예측이 신기하다고 볼 일도 아니었지만, 대부 관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상황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럼 본관한테 대답해 보게. 영덕 대사는 일식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여 요승이라는 이름이 붙고 참수를 당했지. 자네가 말한 날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자네는 어찌하겠나? 요승처럼 목숨을 내놓아 백성들 앞에서 단죄를 받을 텐가?”
화가 난 대부 관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대부 대인의 질책을 듣고 있던 한 대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좋다니?”
대부 관리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일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한 대인이 말했다.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대인을 극구 만류했다.
“대인, 대인, 말씀을 삼가십시오.”
“대인,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대인, 뭘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좋게 말로 하시지요.”
한 대인을 만류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한 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대부 관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좋다. 한문충. 자네가 뱉은 말을 꼭 기억하게.”
대부 관리는 옷소매를 홱 털고 성큼성큼 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대인, 이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한 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서둘러 대부 관리를 뒤쫓아 갔다.
어느새 관청 안에는 한문충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한문충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허리를 곧게 펴고 관청 밖을 내다보았다.
근래 들어 반강현은 꽤 이름을 알리게 됐다. 처음에는 영덕 대사가 일식 법사를 치르던 날 죽임을 당한 데 이어, 반강현 관청에서 영덕 대사를 죽인 범인을 그냥 보내준 일까지 있었다. 영덕 대사가 정말로 요승이었는지,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백성들이 제대로 알기도 전에, 반강현 관청에서는 또 새로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현령 한문충이 일식이 있을 날짜와 시간을 역법에 따라 예측했고, 예측이 틀릴 경우, 그 즉시 목을 잘라 백성들 앞에서 단죄받겠다는 소식이었다.
한문충이 관청의 뒤쪽 저택에 발을 들이자, 한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맞이했다.
“노야,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당신이 예측한 시간도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 예측한 시간이 틀려도, 노야의 명성에 흠이 생길지언정 언젠가는 다시 메꿀 수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말로 맹세까지 해 버리다니요. 목숨까지 내놓으면 어떡해요!”
한 부인이 울며 소리쳤다.
“아버지.”
한 부인의 울음소리를 들은 한원조가 놀란 얼굴로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역법을 공부하셨습니까?”
한 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예측한 게 아니다. 누가 알려준 것이야.”
한 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한원조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참, 일식 시간을 알려준 이가 네가 경성에서 알고 지내는 반근 낭자네 사람일 수도 있어. 그래서 네 아비가 이렇게 철석같이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고.”
반근?
한원조가 흠칫 놀랐다. 한 대인은 그날 역참에서 본 정교랑의 외모를 세세하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반근의 가족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설명하셔도 저는 알 길이 없어요.”
한원조가 쓴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그럼 그날 본 반근 낭자는 어떻게 생겼는데요?”
한 부인이 한 대인에게 반근의 외모를 묘사해 보라고 재촉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원조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한원조가 한 부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이나 말씨는 제가 알고 있는 반근과 비슷한 것 같아요.”
한원조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한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합장했다. 한 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힘들었을 텐데, 어서 가서 좀 쉬시오. 원조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소.”
한 부인은 요즘 한꺼번에 닥친 일들 때문에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 남아 있던 두 부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조, 내가 말한 반근은 네가 알고 있는 반근과 다른 사람이지?”
한 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원조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버지, 소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몇 번 본 게 전부인지라…….”
한원조가 말끝을 흐리자 한 대인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한참 적막이 흐른 뒤, 한원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의 묘사대로라면, 그 반근은 제가 아는 반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는 거군. 나를 아는 사람이기에 일식 날짜를 예측해준 게 아니었어. 그럼 이번 일은…….
한 대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정말로 도박이나 다름없겠군.
“아버지, 후회하십니까.”
한원조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한 대인이 고개를 돌리고 한원조를 보며 웃었다.
“의(義)가 있는 곳이라면 수천, 수만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기꺼이 갈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이도 있고, 제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이도 있지만, 시간은 언제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갔다.
드디어 6월 18일이 되던 날, 반강현의 성문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번에는 성문 통행을 막는 승려들이 없었지만, 지나가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백성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모여든 백성들의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했다.
“날이 이렇게 맑은데, 일식이 있을 것 같아?”
“영덕 대사님의 공덕이 대단한 건지, 관청의 주장이 맞는 건지는 정오가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진짜 오늘 일식이 일어난다면, 앞으로는 관청이 무슨 말을 해도 난 다 믿을 거야.”
“관청의 말이 틀렸다면, 관청 사람들이 우리 영덕 대사님을 죽인 거야!”
웅성거리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한시도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관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한문충은 진지한 표정으로 성문 앞의 정중앙에 서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주위에 서 있던 관리들과 서리들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한문충 혼자 성문 앞에 서 있는 듯 초라해 보였다.
“일에 차질이 생기면, 부디 대부 대인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성벽 위에 설치된 차양 아래에 서 있던 관리들이 자리에 앉은 대부 관리에게 웃으며 부탁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시녀들에게 좀 더 빨리 부채질을 하라고 재촉했다.
대부 관리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냉소를 보이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관청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졌네. 최선을 다하기야 하겠다만, 백성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문충이 어떻게 될지는 본관도 장담하기 어려워. 윗분들은 본관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민심을 거스르는 건 힘든 일이니까.”
대부 관리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대인께서 저희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본관이 고생을 안 하면 어쩔 건데? 백성들이 반강현 관청을 불태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그러면 본관의 체면은 무사하겠나?”
대부 관리의 말에 관리들이 또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맞장구를 쳤다.
“저자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갑자기 대부 관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묻자, 성벽 위의 사람들이 서둘러 성문 앞을 내다보았다. 한문충이 두 관졸에게 대나무 막대기를 바닥에 꽂으라 명하고 있었다.
대나무 막대기는 태양 아래에서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걸로 시간을 볼 수 있소. 오시 일각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본관은 즉시 목숨으로 사죄하겠소이다.”
한문충이 큰소리로 외치며 대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떠들썩해진 백성들은 흥분한 얼굴로 바닥에 비치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정된 오시 일각이 다 되었다.
“저, 저, 저자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대부 관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한문충을 가리키면서 말까지 더듬었다.
“대인, 화를 가라앉히세요. 대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대부 관리에게 부채질을 해주면서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대부 관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관리들을 밀쳐내고는 성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화를 가라앉히기는 개뿔! 한문충 저놈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대부 관리가 아래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대부 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사람들은 잠시 당황했다.
이때, 한없이 맑던 하늘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어두워졌어! 태양이 검게 변했다고!”
성문 아래서 백성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천둥소리보다 더 큰 사람들의 외침이 대부 관리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대부 관리도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경악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부 관리의 속에서 들끓던 걱정거리들은 점점 검게 변하는 태양과 함께 사라졌다.
일식! 일식! 정말로 일식이 일어났어!
“어, 어서, 구호를 시작해라!”
대부 관리가 서둘러 옆에 있던 관졸의 칼을 뽑아 들고는 성벽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검게 변한 하늘 아래, 온 반강현의 사람들이 징과 북을 울렸다.
저택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한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보살님의 보우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부인의 뒤에 서 있던 몸종과 하인들은 환호하며 미리 준비해 둔 징을 울리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한원조는 징 소리와 환호 소리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여 비틀거렸다. 그러면서 흐릿한 시야로 성문 앞을 내다보았다.
성문 앞에 서 있던 한 대인의 허리가 점점 꼿꼿하게 펴지는 것을 본 한원조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같은 시각 경성에서는 하늘에서 갑자기 태양이 사라지면서 온 성이 발칵 뒤집혔다.
천자가 있는 황궁부터 비렁뱅이들이 있는 골목까지, 누구 하나 놀라 뛰어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북 치는 소리,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덕승루 2층에 있던 진십삼이 팍 소리를 내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뒤에서 엎드린 채 소리를 지르던 춘령은 더욱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만 있으면 사천대 관리들이 폐하를 찾아가 자신들이 부처님에게 치성을 올린 덕에 일식에 잡아먹히지 않았다고 하겠군.”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창가로 다가온 주 낭자는 진십삼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진십삼과 함께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일은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예측이 맞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요. 천자가 열심히 덕을 쌓아야 천벌을 면할 수 있다고 아뢸걸요?”
주 낭자가 진십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웃음을 터트리던 진십삼이 갑자기 창밖의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내빼면서 작게 읊조렸다.
“세상에나.”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오직 진십삼만이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십삼의 시선을 따라가던 주 낭자는 창밖의 무언가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수라장이 된 거리 위에 등불 네 개가 홀연히 나타났다. 앞뒤 좌우로 켜진 등불은 마차 한 대를 둘러싸고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등불이 그 안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비추었다. 검게 물든 경성의 거리 위에서 오직 마차 안에 있는 여인만이 눈부시게 빛났다.
어느 댁 규수지?
“대낮에 출타하는데 등불을 챙기다니. 일식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주 낭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말에 대꾸할 겨를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주 낭자는 언제나 느긋해 보이던 진십삼이 뛰다시피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층계를 뛰어 내려가는 소리를 들은 주 낭자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명과 공포가 가득한 거리에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불을 환히 켠 채 서행하는 마차를 보던 주 낭자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여인인가?”
일식으로 인해 어두워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진십삼이 혼란에 빠진 대청을 뚫고 문밖으로 뛰쳐나갔을 무렵, 경성을 뒤덮었던 어둠은 거세게 부는 강풍과 함께 차츰 걷히고 있었다. 그는 거리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다니는 인파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등불과 정교랑의 마차를 찾아냈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솜털까지 곤두서 있던 반근은 해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종들에게 말했다.
“이제 등불 꺼.”
등불을 들고 있던 시종들은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나잖아! 정말 놀라워! 사람에 관한 일은 항상 정확하게 예측하셨다지만, 이런 하늘의 일까지 예측하실 수 있다니.
구름이나 풀을 보고 바람이나 비를 예측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천구가 태양을 집어삼키는 일식까지 아실 줄이야!
오늘 아침, 채비를 마치고 길에 오를 때였다. 정교랑은 시종들에게 오늘 일식이 있을 것이니, 혹시 날이 어두워질 때 무서우면 등불을 밝혀도 된다고 했다.
당초 시종들은 정교랑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관청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지만, 경성 관청에서 발표한 일식 시간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경성 성문을 지날 때쯤, 반근이 갑자기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시종들은 정교랑이 더워서 휘장을 걷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등불을 켜.”
시종들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던 찰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일식이 일어나기 직전 정교랑이 했던 말 한마디와 급격하게 변한 하늘을 떠올리던 시종들은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종들이 등불을 끄자, 누군가가 갑자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부의 옆자리에 앉았다. 깜짝 놀란 반근이 비명을 지르자 시종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납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마차 안을 향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의 만남이 적잖이 반가웠는지, 그의 눈가에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작별한 이후로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진십삼은 정교랑이 어제 본 사람처럼 친숙했다.
가끔은 정교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교랑을 보니, 미간의 움직임과 눈빛, 표정과 손짓 전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여인을 볼 수 없던 때에는, 이 여인과 나 사이에 안개구름 가득한 첩첩산중이 있는 듯했는데, 막상 다시 보게 되니 하늘 끝까지 번진 노을빛을 보는 듯 벅차도록 눈부시구나.
“공자님, 놀라 기절할 뻔했잖아요!”
반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십삼을 탓했다.
오늘 진짜 여러 번 놀라네.
“이 사람들 이거 안 되겠군. 내가 나쁜 놈이었으면 어쩌려고? 잠깐 사이에 아씨께서 위험해졌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진십삼이 시종들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시종들은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수는 언제나 마지막에 움직인다는 말, 못 들었어요?”
진십삼의 어깨 뒤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부채를 손에 쥐고 천천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금세 밝아진 태양이 마차 안을 비추자, 정교랑이 쥐고 있던 부채 손잡이 한쪽에서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정교랑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보호를 마지막 방패로 삼은 적 없었다.
진십삼이 피식 웃었다.
“무슨 역법을 봤던 겁니까?”
“인덕력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런 취미가 있었어요? 나도 며칠 배우긴 했지만, 일식을 예측할 정도는 못 돼서 말입니다. 낭자는 꽤 정통한 것 같은데, 나한테도 좀 알려 줄 수 있어요?”
“산술은 잘해요? 천원술(天元術)이라든가.”
진십삼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어우, 그런 건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내가 배운 거라고는 구장산술(九章算術)뿐입니다.”
진십삼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역법으로 절기를 예측하는 것은 사천대의 일이니, 공자는 사람이 좇아야 할 도리를 담은 육경(六經)에 집중하는 게 좋겠네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나는 알려 줘도 못할 거라고 해요.”
“대자연에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규칙들이 있어요. 역법을 배우고 말고와는 상관없죠.”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내가 워낙 어리석다 보니, 그런 건 배울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이 주제는 넘어가죠.”
진십삼이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하며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낭자는 그간 잘 지냈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진 공자는요?”
정교랑이 답례를 하며 말했다.
안부 인사를 이제야 해?
반근이 속으로 말했다.
“몇 해 동안 못 보다가 이렇게 거리에서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진십삼이 말했다.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마부 옆에 앉은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누가 누구를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정교랑이 미소지으면서 그러라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뛰어든 진십삼 때문에 멈췄던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부와 나란히 앉아 마차 안에 있는 이와 담소를 나누며 떠나는 진십삼을 보던 주 낭자가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춘령이 말했다.
주 낭자는 깜짝 놀라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춘령을 쳐다보았다. 춘령은 얼른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숙였다.
“춘령, 왜 그런 생각을 하니? 그건 틀려도 한참 틀린 생각이야. 본분을 잊은 것이기도 하고. 사람이 본분을 잊으면, 삶이 고달파져.”
주 낭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 아씨. 소인이 잘못했어요.”
춘령이 다급하게 말했다. 주 낭자가 춘령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춘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춘령의 얼굴에서는 좀 전의 불안함이나 황공함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짓고 있었다.
“본분은 무슨. 자기 신분이 미천해서 봉황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거겠지.”
춘령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혼란스러웠던 일식이 지나가고, 거리 위는 다시 잠잠해졌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환히 빛나던 그 마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오다니, 또 돌아오다니! 다시 돌아와서 참 다행이야!
어떤 복수가 진정한 복수냐고? 원수가 두 눈으로, 두 귀로, 온몸으로 내 복수를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복수라 할 수 있지. 그게 아니라면, 눈멀고 귀먹은 이 앞에서 광대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식에 온 경성 거리가 들썩였다. 그 혼란 속에서 일행 하나가 소리 없이 켜졌다 꺼진 등불처럼 유유히 사라져 갔다.
황제의 성난 목소리가 황궁 대전 밖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천변(天變)은 짐의 책임이다. 하나 일월성신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경들의 책무야! 그런데 천변만 일어났다 하면, 짐에게 정사에 힘쓰고 백성을 잘 보살피라고 하지. 짐의 잘못이라면 미리 말해 줄 순 없었나? 짐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무엇이 틀렸는지! 그게 바로 경들이 이행해야 할 직무 아닌가!”
“전하, 고정하십시오. 천변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니, 침착하게 정사에 임하시고, 유희를 멀리하시옵소서.”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신 몇 명이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폐하께서 알려달라 하신다고 진짜 말하다니. 뭐, 어차피 저놈들은 뭘 해도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잡아떼겠지. 정말 뻔뻔스럽기 그지없군.”
대신 중 한 명이 비웃었다.
“뻔뻔스럽지 않으면 사천대에서 어찌 버티겠소이까? 폐하께서도 욕이나 한 바가지 하고 노여움을 푸시려는 걸 테지. 저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아주 잘 알고 계실 테니 말이오.”
다른 대신이 맞장구쳤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저 사천대 놈들에게 무슨 명분으로 벌을 내릴 수 있겠어? 일식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나서서 인간이 하늘의 일을 예측하려 들면 안 된다고 하겠지. 그럼 일식이 일어났으니까? 그건 더욱 안 돼. 천재지변은 인간이 감히 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때 대전 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노한 황제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썩 꺼지거라! 냉큼 꺼지라고!”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대전 밖에 서 있던 대신들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웃음기를 거뒀다.
사천대 관리 무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대전 밖으로 나왔다. 대전 안에서 황제에게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책망을 들은 이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문밖에 서 있던 대신들에게 담담하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그래도 저들이 뭐 하나는 건지긴 했구려. 이제 보수사에 올리는 향불 값은 아낄 수 있겠소.”
대신 하나가 사천대 관리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자, 주위에 있던 대신들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예를 갖춰야 하는 대전 앞이 아니었다면, 분명 다들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대신들은 밖에 서서 황제가 자신들에게 대전 안으로 들라는 말을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전 안에서 들려온 것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폐하, 너무 노여워하시지 마십시오. 저들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애초에 저들이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안 군왕이네?
누군가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째서 저들이 할 일이 아니란 말이냐? 조정에서 저자들을 둔 것이 다 쓸모없는 짓이라고?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저들은 역법에 따라 절기를 정하지 않습니까.”
안에서 새어 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던 대신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이야, 군왕이 말 한마디로 사천대의 존재를 없애버렸네. 절기를 정하는 건 태사국 관리 중 아무나 데려와서 시켜도 되잖아.”
대신들뿐만 아니라, 대전 안에 있던 황제도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팽팽하게 굳어 있던 대전의 분위기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폐하, 대자연에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규칙이 있고, 그것을 인간이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천대가 일식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풍(李淳風) 같은 인재가 항상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저들이 천변으로 인간의 길흉을 논한다면, 그것은 문제이며 곧 저들의 잘못입니다. 사천대 관리로서 역법을 통해 일식을 예측하지는 못할망정, 길흉을 논하고 천변이 폐하의 잘못이라며 백성을 현혹하다니요. 그러니 폐하께서는 저들에게 중징계를 내려, 근거 없는 요설로 백성을 현혹하는 자들이 경계토록 하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밖에 서 있던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좋은 칼을 하나 쥐여드렸네.
<교랑의경> 1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