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60)

-길에서-

6월, 서북의 새벽은 서늘했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용곡성 남쪽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치열했던 이번 전투가 끝나고, 많은 사람이 진급하고 포상을 받았다. 특히, 관리 신분이 아니었던 사람 중에서 이번 기회에 품계를 얻은 경우가 많았다. 품계를 처음 얻은 자들은 족보를 호부에 올려 조사를 받아야 하므로 서북을 떠나 경성에 다녀와야 했다.

진급한 자 중에서는 문관도 있고 무관도 있었으며, 나이가 어린 이도 있고 연로한 이도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품계를 얻는다는 건 과거 시험에 급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예의상 배웅하러 나온 관리들 외에도, 가족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남쪽 성문 앞으로 나와 이들의 경성행을 배웅했다.

경성으로 가는 대열에는 주육낭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전투 덕분에 주육낭도 두 단계 진급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품계가 없던 이가 아니므로 호부에 족보를 제출하러 경성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관청에서 문서 전달을 핑계로 주육낭을 잠시 경성으로 보낸 것이다.

“밖에 나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집이 그립지?”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주육낭을 둘러싸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래. 과연 우리 주씨 가문의 사내대장부야.”

웃어른들이 커다란 손으로 주육낭의 머리와 어깨를 탁탁 쳤다.

“어이. 그러다가 젊은이 어깨가 남아나질 않겠어. 아무리 젊고 튼튼한 몸이 부럽다고 해도, 그렇게 막 치면 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웃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대인,”

자색 장포를 입고 있던 주 감찰사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애지중지한다는 그 육낭이 바로 이 아이요?”

주 감찰이 신체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을 가진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올해 몇 살이지?”

“열여덟입니다.”

주육낭이 턱을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소처럼 힘이 불끈불끈하구먼.”

주 감찰이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세게 두어 번 쳤다.

“대인, 저희한테 뭐라고 하시기 전에, 대인께서도 살살 치셔야겠습니다.”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농담을 건넸다. 주 감찰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주 감찰 옆에 서 있던 조성이 주육낭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네.”

주육낭이 서둘러 조성을 향해 예를 표했다.

“대인, 당치 않으십니다. 대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소인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 대인께도 말씀은 드렸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조성이 말끝을 흐리면서 다른 한쪽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조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강문원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은 경성으로 돌아가게. 잠시 피해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

조성이 주육낭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아직 어리지 않나. 급할 거 없네.”

간결하게 인사치레를 끝낸 장수와 관리들은 성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강 부총관, 강 부총관.”

사람들 사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 관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강문원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강문원은 억지 미소를 쥐어 짜냈다.

서북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강문원을 강 총관이라고 불렀지만, 유독 몇 사람만은 끈질기게 그를 강 부총관이라고 불렀다. 주 감찰사가 그중 한 명이었다.

“주 대인.”

강문원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강 부총관, 같이 가시지요.”

주 감찰은 웃으면서 강문원의 팔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

어찌 저렇게 주둥이를 열 때마다 부총관, 부총관 거리는 건지 원. 내가 부총관이라는 걸 잊을까 봐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강문원은 주 감찰이 몹시 아니꼬웠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다른 관리들을 거느리면서 함께 성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관리와 장수들이 자리를 뜨자, 경성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대열에 합류하며 가족들과 고별했다. 가족들은 눈물을 훔치며 배웅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남쪽 성문 앞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직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던 주육낭은 성안을 두어 번 돌아보았다.

“육낭, 아직 기다려야 할 사람이라도 있느냐?”

누군가가 물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닙니다, 형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주육낭이 몸을 휙 날려 말에 올라타자, 사환과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말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람이 타지 않은 말에는 서북 특산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성안을 힐끗 돌아보고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움직였다.

정오가 다 되어갈 때쯤, 남쪽 성문 앞은 새벽녘부터 배웅하러 나왔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마차 두 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성문 밖으로 나왔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시종 네다섯 명이 조촐하게 이끄는 마차 두 대는 특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마차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탄 채 그들을 배웅했다.

“형님, 나도 같이 가게 해 주시오.”

서사근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이쪽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 집에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되고. 나중에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 잘 지키고 있어.”

범강림이 마차 안에서 말했다. 누구보다도 범강림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서사근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서사근은 시종들을 한 번 둘러보고, 짐이 실려 있는 마차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범강림의 아내가 마차 안에서 아이를 안은 채 말했다.

“관구 어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꼭 경성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시종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범강림을 호위하는 시종들은 서사근이 직접 엄선한 병졸들이었다. 충성심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자들만 골라 품삯을 넉넉히 주고 범강림의 호위를 맡겼다.

“그래. 수고들 하거라.”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넷째야, 그만 돌아가. 우린 이제 가 볼게.”

범강림이 말했다.

서사근은 돌아가라는 범강림의 말을 한사코 무시한 채 십 리 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끝내 멈춰선 서사근은 범강림이 탄 마차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그들 일행을 눈으로 배웅했다.

“범강림은 뭐 하러 가는 거래?”

방 지채는 이번이 첫 진급이 아니라서 경성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새로운 임지로 가서 지채직에 부임했다.

그는 용곡성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거기에 남아 있는 몇 사람들을 예의주시했다. 그중 한 명이 범강림이다. 그런데 자신이 새로운 임지로 떠나자마자 범강림이 온 가족을 데리고 용곡성을 떠났다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뭐라고?”

방 지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놈도 참 웃기는 놈이야. 사람이 죽은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고향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아무렴 상관없어. 그놈이 떠난다면 더 좋고, 이참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지. 그렇게 된다면 내 지채직이 위협받을 일도 없으니까.

6월의 날씨는 천덕꾸러기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티끌 하나 없이 맑던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비를 피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오 관리인이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는 거세게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아씨께서 비를 맞지는 않으시려나?”

한 손으로 쉴 틈 없이 산가지로 셈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장부를 넘기던 시녀가 고개도 들지 않고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씨께서는 앞날만 잘 내다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랑도 무척 가까우시잖아요. 하느님이 비를 내리기 전에 분명히 아씨께 귀띔하셨을 거예요.”

시녀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랜만에 보는 시녀의 생기발랄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씨께서 경성으로 온다는 진 공자의 말만 들었을 때는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주부에서 보내온 서신을 받았다. 거기에는 아씨께서 정말 경성으로 돌아오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 아이는 손발을 어찌해야 할 줄 모를 정도로 기뻐하면서 매일같이 제자리를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지. 저렇게 일이라도 해야 그나마 흥분이 가라앉는 모양이야.

“그리 대단한 분이니, 하느님께서 올해 일식 시기도 아씨께 알려 주셨겠지?”

오 관리인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시녀가 고개를 들고 오 관리인을 쳐다보자, 두 사람은 풉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시녀와 오 관리인은 얼마 전에 정교랑이 안전하게 경성에 도착하도록 기도를 드리러 보수사에 갔었다. 하지만 예약된 법사(法事)가 있었는지 보수사 대웅보전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중에 수소문을 해보니, 그날은 태사국 사천대(司天臺: 천문 관측을 담당하던 관청)의 관리들이 보수사에 와서 향불을 올리고 기도를 드리러 오는 날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황궁에서도 비밀이 새어 나오는 판국에 일개 사찰에서 비밀이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사국 관리들이 영묘하기로 소문난 보수사에 와서 기도를 올린 이유는 부처님께 일식이 일어나는 날짜를 점지받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온 경성에 퍼졌다. 경성 사람들은 한동안 이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태사국 사천대 관리들이 무능하고 게으르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향불을 올리면서 부처님께 일식 날짜를 점지해 달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사천대 관리들은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고 잡아뗐지만, 이미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었다.

어사대 관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을 축내는 능력 없는 자들을 쳐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다른 관리들 때문에 졸지에 파벌 싸움이 되어 버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관리들의 파벌 싸움은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아무도 얻은 것 없이 흐지부지 끝을 맺었다.

백성들은 조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흥미로운 소문에만 관심을 가졌다.

시녀와 오 관리인은 마주 보면서 한참을 웃은 뒤에 정교랑 일행이 어디까지 왔을지 계산했다. 매섭게 휘몰아치는 빗줄기와는 반대로, 대청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같은 시각, 경성에서 백 리쯤 떨어져 있는 곳은 날씨가 쾌청했다.

“아씨, 성문을 지나갈 수 없답니다.”

말을 타고 되돌아온 시종 두 명이 마차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왜 못 지나가? 성 밖으로 못 나간다는 말이야?”

반근이 부채질을 하면서 휘장을 들어 올리고 물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반근의 콧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성문 앞이 아예 막혀 있습니다. 지나가게 해주지도 않고요.”

시종이 대답했다.

“엥? 왜 성문을 못 지나가게 해? 가는 길은 전부 확인했는데?”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듣기로는 무슨 법사를 열어야 해서 통행을 금지한다고…….”

시종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반근이 실소를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법사이길래 성문을 막지? 관청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나?”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시종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성문 가까이 가기도 전에 우리를 막아섰습니다. 내일은 되어야 성문을 지날 수 있다면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늦어도 오늘 밤에는 평량(平凉) 역참에 도착해야 해. 내일 움직이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고.”

반근이 다급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 보자.”

6월의 뜨거운 태양 열기가 바닥에 내리쬈다. ‘반강현(盤江縣)’ 세 글자가 적힌 성벽 위에 서 있던 몇 사람은 차양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韓) 대인, 정말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한 사내가 물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관복을 입고 있던 중년 남자는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인, 저 중놈이 날이 갈수록 더 기고만장해집니다. 오늘은 저자들이 성문을 막지만, 내일은 관청 문까지 막으려 들 겁니다.”

성문을 바라보고 있던 하급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대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 한들, 자네 중 누가 저자들을 막을 수 있겠나?”

한 대인이 성벽 아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문 바로 앞에는 백성들이 빼곡히 서 있었고, 저 멀리서도 수많은 백성이 성문을 향해 절하며 몰려오고 있었다.

성문 앞의 정중앙에는 제단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제단 주위로 승려 열댓 명이 있고, 제단 위에는 허리를 펴고 고고한 자세로 앉아 있는 노승이 보였다. 선하고 자애로운 표정의 노승이 신도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신도들은 파란이 일듯 일제히 제단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저 노승에게 성문에서 비키라고 말한다면, 신도들은 밟아 죽이라는 노승의 말을 듣기도 전에 기꺼이 노승을 위해 그자를 밟아 죽일 것으로 보였다. 설령 상대가 관청 관리라 하더라도, 신도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감행할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당초 도랑 공사를 하면서 법사나 간단히 열고 돈 몇 푼 줘서 돌려보내려 했던 건데, 어떻게 1, 2년 사이에 이 지경이 됐는지.”

“불경 한 권 못 뗀 땡추를 대사님이라고 부르다니, 어리석은 백성들이란.”

다른 사람이 냉소를 보이며 비아냥대자, 한 대인이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백성을 어리석게 만든 건, 자네와 나의 책임일세. 내가 너무 방심했어. 승려 하나가 여기 남아서 불법을 설파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티끌을 모아, 오늘날의 태산이 될 줄이야.”

“어떻게 해야 저 중놈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신을 모셔 오는 건 쉽지만 돌려보내는 건 어렵다지 않소. 저 중놈이 거느리는 신도가 많아지면서 시줏돈도 어마어마하게 챙겼다던데, 여기서 순순히 떠날 리 있겠소?”

다른 사람이 고개를 저으면서 한탄했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상황을 봐 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한 대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조금 전까지 쨍하게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왔다.

“이번에는 제발 사천대 놈들 말이 정확했으면 좋겠네. 그놈들 말대로 정말 일식이 일어난다면, 저 중놈이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하군.”

한 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이 뒷짐을 진 채 혀를 차고 있던 때에, 갑자기 성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누가 성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법사 때문에 막혀서 못 나가고 있나 봅니다.”

관리들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성벽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정말로 승려들 때문에 길이 막힌 마차 한 대가 보였다.

“타향 사람들이라 사정을 잘 모르나 보군. 어서 사람을 보내서 저 사람들을 보호하게. 저 중놈들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한 대인이 옆에 서 있던 관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관리는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관졸을 성벽 아래로 내려보냈다.

성문 앞 분위기는 이미 심상치 않았다.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길을 좀 터 주시오.”

시종은 공손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비켜 주지 않으면 때릴 기세로 승려들을 노려보았다. 시종 앞에 서 있던 승려 둘이 거들먹거리면서 대꾸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나? 오늘 일식인 거 모르시오? 우리 사부님께서 법사로 복을 빌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날이니까, 돌아가서 좀 숨어 있든가, 아니면 여기 같이 꿇어앉아서 기도하든가 하시오. 사리 분별 못 하지 말고.”

시종이 이를 악물고 뭐라고 대꾸를 하려던 찰나,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일식? 오늘이 일식이라고?”

정교랑이 물었다.

“그렇소.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성가시다는 투로 말하며 마차로 눈을 돌리던 두 승려는 말을 하다 말고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와, 엄청난 미인이네.

“아, 시주님.”

승려 중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시종이 재빨리 승려를 막아서면서 경고의 의미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인연이 닿은 분과 대화 좀 하겠다는데, 안 된다는 거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시종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지, 승려의 말투는 담담했다. 승려의 말을 들은 주위의 신도들이 시종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젊은이, 어서 비켜서요. 대사님께 불경하면 안 되지!”

“저 낭자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거 잘됐네! 빨리, 빨리 대사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 보자고.”

신도들이 점점 몰려오자, 호위를 맡은 시종 열댓 명은 빠르게 마차 주위를 둘러싸며 정교랑을 보호했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기에는 개미 떼 같은 신도들 사이에 점처럼 있는 시종들이 한없이 작고 힘없어 보였다.

“비키시오, 비켜.”

관졸 몇 명이 신도들 사이를 비집고 오더니 마차 주위의 사람들을 비켜서게 했다. 승려 둘은 관졸들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나리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법사를 거행하는 날이라, 나리들께서 소지하고 계신 사악한 기운이 서린 칼들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리들 때문에 일식 법사의 효력이 달아나면, 누가 책임지실 겁니까?”

승려의 말을 들은 신도들이 다시 한번 마차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유, 어서 멀찌감치 떨어져요.”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어서 가요, 어서요!”

밀치면서 거리를 좁혀오는 인파 때문에 관졸들은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뒷걸음질 치던 관졸들은 급기야 정교랑이 타고 있던 마차에 몸이 부딪혔다.

“무슨 법사라고요?”

여인의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저 여인은 간덩이가 부었나? 빨리 휘장을 내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지!

관졸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왜 길을 막는 거죠? 나는 서둘러 성을 나가 길을 재촉해야 해요. 내 길을 막는 게, 당신들인가요?”

정교랑이 승려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두 승려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시종들이 다시 그들을 막아섰다.

“시주님, 급히 성을 나가야 한다고요?”

두 승려는 정교랑의 온몸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정교랑이 입은 옷은 품이 크고 소매가 넓었지만, 얇은 여름옷인지라 몸의 굴곡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아니면, 시주님이 마차에서 내려 우리 사부님께 여쭤보는 건 어떻습니까?”

“감히 어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반근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허, 아가씨. 대사님께서 좋은 뜻에서 말씀하신 건데, 뭘 그리 사납게 굴어?”

“누가 아니래. 저게 무슨 태도야? 대사님께 불경하게!”

“영덕(寧德) 대사님을 뵐 기회가 얼마나 귀한 건데, 굴러들어온 복을 아낄 줄 모르네.”

주위에 몰려 있던 신도들이 반근과 시종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불만의 말들을 뱉었다. 두 승려는 보란 듯이 반근과 시종들에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근은 두 승려의 면상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반근이 따지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좋아요.”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진짜 가신다고?

반근이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아씨.”

반근이 다급하게 정교랑을 불렀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반근, 넌 여기서 기다려.”

정교랑이 옆에 있던 시종 한 명에게 눈짓했다.

“날 따라와.”

시종이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정교랑 가까이서 그녀를 호위했다. 두 승려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히히 웃었다.

승려들이 길을 안내하자, 빽빽하게 서 있던 신도들이 양 갈래로 갈라지면서 길을 터 주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던 노승은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불경을 읊었다. 그는 정교랑 일행이 일으킨 소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두 승려가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과 시종만 제단 위로 보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던 노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한 대인이 성벽을 짚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인은 도대체 뭘 하려는 게야? 왜 저렇게 철이 없어?”

“대인, 저 중놈한테 해코지당한 여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 여인의 말씨를 보아서는 타향 사람인 것 같은데, 친척도 없는 타지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피해를 봐도 말할 곳이 없을 겁니다.”

하급 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단 쪽을 가리켰다.

“어서, 어서 당장 사람을 보내거라. 일단 저 여인한테 성을 나가지 말고, 어디든 잠깐 숨어 있으라고 해. 잠시만 기다리면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저러는 게야! 중놈들의 기세가 저리 드센데, 뭘 어쩌려고!”

한 대인은 제단 위로 올라가는 여인이 걱정되다 못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수하에게 지시를 마친 한 대인이 다시 제단 위로 시선을 돌렸을 무렵, 제단 위에 있던 노승은 고개를 들어 그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주님, 무슨 일이신지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노승이 친절하게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을 쳐다보는 순간 그의 눈빛에 비친 음탕함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저 눈빛.

정교랑 옆에 서 있던 시종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당신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시주님, 오늘은 일식이 있는 불길한 날입니다. 정오에 법사를 거행하지 않으면, 복을 빌어 백성을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시주님도 잠시 기다렸다가, 법사가 끝난 후에 길을 재촉하심은 어떻습니까?”

노승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님, 난 불교 신자가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의 학문을 익힌지라, 요괴나 귀신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불길하다는 말도 믿지 않아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고는 노승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가 대사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내가 성을 나가는 것을 허락할 건가요, 말 건가요?”

“나무아미타불. 시주님, 부처님께 불경을 저지른다면, 축생도(畜生道)에 드실 겁니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노승이 측은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사님,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시주님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여기 있는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노승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면서 손을 살짝 들었다. 그 손짓을 본 신도들은 환호하면서 그를 향해 경건하게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다시 정교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번 법사는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겁니다. 만백성의 복을 위한 일인데, 시주님의 편의를 위해 제단을 철거한다는 것은 이 많은 사람의 복을 무시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시종은 노승의 말이 입에서 입을 통해 뒤쪽으로 전해지면서 인파가 들썩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저놈이 감히 아씨를 위협하고 겁을 주다니.

시종은 마차가 있는 쪽을 내다보았지만, 좀 전에 자신이 걸어왔던 길은 이미 신도들로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시종은 조심스럽게 정교랑 근처로 가서 칼이 있는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았다.

“대사님, 복을 빌기 위해 기도한다는 말이 참 우습네요. 악재도 없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던 노승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이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는 확연히 달라. 다른 여인들이었다면 벌써 겁을 먹고 순순히 내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텐데.

좋아, 좋아. 색다른 재미가 있네.

“시주님, 그 말은 무슨 뜻인지요?”

노승의 질문에 정교랑이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대사님도 천문과 역법에 통달했을 테니, 오늘 일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뭐라고?

깜짝 놀란 노승이 흠칫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정교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시종에게 명했다.

“죽여.”

노승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시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서걱 소리와 함께 노승의 목을 베었다.

잘린 노승의 머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손을 들어 방어할 새도 없었다. 댕강 잘린 노승의 머리가 제단 위로 떨어지고,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정교랑이 걱정되어 미간을 찌푸린 채 성벽 위를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던 한 대인은 제단 위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떡 벌어진 한 대인은 숨을 쉬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세상에나,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펄펄 끓는 기름이 가득한 솥에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은 것처럼, 성문 앞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신도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반강현의 하늘을 갈랐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한 대인은 성벽을 짚으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여인이 아니라, 금강야차(金剛夜叉)잖아!

머리 없는 시신이 제단 위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울컥울컥 피를 내뿜었다. 노승의 머리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층계 아래로 떨어져 제단 앞에 있던 한 신도의 발치에 멈췄다. 정신도 못 차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아낙이 멍하니 노승의 머리를 쳐다보다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혼절했다.

성문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제단 쪽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성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만큼 반근과 시종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인파를 뚫고 서둘러 제단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양쪽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반근과 시종들은 제단 주위로 파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씨, 죽, 죽이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보기와는 다르게 이 중놈이 백성들한테 꽤 위신 있어 보이는데.”

시종이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말하자 정교랑이 시종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시종이 놀라서 흠칫했다.

평소 웬만한 일엔 웃지도 않으시던 아씨인데.

다른 일도 아니고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웃다니. 우리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마음먹은 저 사람들 앞에서.

“손이 빠르더구나. 마음에 들어.”

정교랑이 말했다.

응?

시종은 또 한 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인파를 쳐다보았다.

“마귀야! 마귀!”

제단 아래에 있던 승려들이 시뻘게진 눈으로 정교랑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들은 정교랑을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지만, 제단 위에 놓인 섬뜩한 시신과 제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머리 때문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제단 주위로 몰려왔던 신도들도 겁에 질려 차마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무려 살인이야, 살인! 칼을 휘둘러 목을 베다니! 게다가 아무리 용감한 사내라도 살인 앞에서는 낯빛이 변하기 마련인데, 저 여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 가벼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도, 도, 도대체 저게 뭐야?

“마귀! 마귀!”

“때려죽여!”

“불태워 버려!”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이 제단 앞에 울려 퍼졌다.

“틀렸어요. 마귀는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죠.”

정교랑은 핏대가 잔뜩 선 사람들을 보고도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제단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법사를 집도할 때 쓰는 방석을 발로 차서 제단 아래로 떨어트렸다.

“일식은, 이자가 불러올 거니까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묻힐까 봐, 시종이 정교랑의 말을 한마디씩 큰 소리로 복창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시종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뒷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정교랑의 말이 번져 나가자,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라고? 영덕 대사님이 마귀라고?

영덕 대사님이 일식을 불러올 거라고?

“헛소리하지 마시오!”

인파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승려들이 겨우 한곳에 모였다. 혼자 있을 때 쭈뼛거리며 나서지 못했던 모습과는 달리, 한곳에 모인 승려들은 기합을 외치며 제단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시종은 팔을 올리고 칼날을 바깥으로 향하게 들었다. 칼날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노승의 피가 묻어 있었다.

서너 명쯤은 혼자서 거뜬히 상대할 수 있어.

시종이 앞쪽을 내다보자, 자신의 동료들이 미친 사람처럼 눈이 뒤집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조금만 버티면, 아씨께서는 무사하실 거야.

“이 마귀는, 오직 자신만이 일식을 막을 수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자는 일식을 막을 수 없어요. 내가 이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정오가 지난 뒤에 분명히 일식이 나타났을 거예요.”

뭐라고?

제단 위로 달려들던 승려들이 흠칫하며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제단 위에 서 있는 정교랑을 올려다보았다.

헛소리.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돌려 곁눈질로 승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마귀를 죽였으니, 오늘은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못 믿겠으면, 다들 여기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기도하지 않고, 향을 피우지 않고, 불경을 읽지 않아도, 천구(天狗: 일식·월식을 일으키는 흉신凶神이 사는 별)는 알아서 몸을 숨길 겁니다.”

정교랑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천천히 말했다.

정말이야?

제단 위로 이어진 층계에 멈춰 서 있던 승려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눈을 크게 떴다. 시종은 재빨리 정교랑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큰 소리로 복창했다.

“나를 때려죽여야 한다고 목 아프게 외칠 필요 없어요. 난 정오가 지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요. 일식이 일어난다면,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잘라 단죄하겠습니다.”

정교랑은 자신의 손을 목에다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혼란스러워하던 백성들은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제단 위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백성들은 웅성대면서 정교랑의 말을 한 번, 또 한 번 뒤로 전했다.

끝이야. 모두 다 끝났어!

승려 두 명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쿵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승려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 마귀의 말을 믿으면 아니 되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른 승려가 황급하게 외쳤다.

“천구가 물러나는 것은 우리 사부님께서 밤낮없이 기도했기…….”

승려들의 목소리는 정교랑의 고함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렇게 밤낮없이 기도해서 효과가 있었다면, 오늘은 뭐하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도를 올리는 거죠?”

그, 그건 당연히 위신을 쌓기 위해서지. 물론, 말은 그렇게 못하지만.

승려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종은 더 많은 사람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정교랑의 반문을 계속해서 복창했다.

“사부라는 자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니까, 백성들을 모아서 도와달라고 하려던 거 아닌가요?”

정교랑이 이어서 물었다.

아니야! 그건 분명 아닌데, 사람들을 왜 모았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엔…….

승려들은 고개를 들어 높은 곳에 서서 위압감을 뿜어내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던 승려들은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단 쪽을 향해 달려가는 수하들을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한 대인은 흠칫 놀랐다.

“이건, 저 늙은 중놈이 제 무덤을 판 거라고 봐도 되겠지?”

한 대인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아이고 나리,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을 저질렀다고요! 나리, 저 마귀를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승려 하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가까이 있던 관졸 한 명을 붙잡고 소리쳤다. 관졸은 정교랑의 마차 앞에서 뒷걸음치던 것과 달리,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승려들을 비웃었다.

이제 와서 살인이 일어났다고 관청을 찾아? 전에 네놈들이 거리에서 생사람을 때려죽였을 때는 어떻게 했는데?

“에이, 급할 게 뭐 있소. 저 여인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큰소리를 쳤으니, 진짜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가 지금 다짜고짜 저 여인을 잡아간다면, 백성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저 여인이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우리도 꼭 살인의 죗값을 치르게 하겠소.”

관졸들이 승려들을 흘겨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끝장났네, 끝장났어.

위신이 드높던 사부님이 죽었으니, 백성들이 아무리 격분한다고 해도 사부님이 살아있을 때만큼 한뜻으로 모아 선동할 수는 없을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저 여인이 사부님을 창으로 삼아 사부님이 스스로 만드신 방패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이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도대체 어쩌다가?

잿빛이 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승려들을 본 관졸들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벽 위 차양 안에서는 한 대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양 앞에 서 있던 하급 관리들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 지었다.

“현존(縣尊: 현령을 높여 부르는 호칭) 대인께서 마지막으로 저리 웃으신 게, 아마 도랑 보수가 완공된 날이었지요?”

“이야,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일 줄 누가 알았겠나?”

관리 중 한 명이 손을 비비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어쩐지 일식 예측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어. 저 늙은 중놈도 분명히 오늘 일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이 어디 노승 한 명뿐이었으랴. 성벽 위에 서 있는 관리 대부분은 오늘 일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누가 제단 위로 올라가서 그놈의 목을 벨 수 있었겠소?”

할 수 있었을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숙연해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나? 감히 어떻게.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행에 옮기기에는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저 여인은 분명히 보통내기가 아닐 걸세. 좀 전에 제단으로 가기 전에, 저 여인이 뭐라고 했다던가?”

한 대인이 말했다.

“관졸의 말로는, 중놈이 일식이 있을 거라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 마차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의아하다는 말투로 오늘 일식이 있냐고 되물었고요.”

옆에 있던 관리가 대답했다.

“그럼 말이 되네. 저 여인은 오늘 일식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렇게 망설임 없이 일을 벌인 게야.”

한 대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천문 역법에 대해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천체력에 통달한 사람이기에 저렇게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거겠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대인,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수하가 작은 소리로 성벽 위에 있던 현감에게 알렸다.

관리들은 속으로 오늘 일식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쉬이 놓이지 않아서 모두 차양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몰려온 건지 모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자, 성문 앞 분위기는 점점 더 긴장이 고조되었다.

제단 주위에는 승려들 대신 관졸들이 허리를 펴고 지키고 있었고, 죽은 노승의 머리와 몸통은 한곳에 모아 잠시 하얀 천으로 덮어두었다. 노승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했던 승려들은 제단 앞 구석에 몰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승려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변화를 경험한 터였다.

우리가 저런 악운 덩어리의 길을 막은 것일 줄 누가 알았겠어! 저런 짓을 할 줄 알았으면, 제단을 철거해서라도 성 밖으로 내보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하늘빛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방울과 징 따위를 손에 쥔 채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정교랑 곁에는 반근이 도착해 있었고, 시종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이곳을 빠져나갈 탈출로를 탐색했다.

마차는 버리고, 말을 타고 빠져나가면 되겠어.

시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신호를 보냈다. 잔뜩 긴장한 시종들과는 달리, 제단 위에 있는 두 여인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아씨, 저 위에 올라가서 앉으시는 건 어때요? 그럼 더 위엄 있어 보이지 않겠어요?”

반근이 위쪽을 가리키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교랑은 제단 꼭대기를 향하는 층계 중턱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위엄은 무엇에 기대서 나오는 게 아니야.”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의 발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반근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너무 심심해요.”

정교랑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반나절이면 충분해.”

반나절씩이나?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숨을 쉬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아니면 제가 차를 우려 올까요? 이번에 새로 만든 찻잎이 어떨지 궁금해서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혈흔이 낭자한 제단 위에 향긋한 차향 퍼졌다. 하얀 천으로 덮은 시신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여인을 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늘을 까맣게 덮었던 먹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햇빛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자 해는 차츰 서쪽으로 기울다가 노을빛을 내뿜으며 성벽을 비추었다. 차와 간식을 다 먹은 정교랑은 옆에 있던 시종들에게도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거대한 재앙이 도래한 듯 잔뜩 긴장한 채 불안에 떨고 있던 백성들은 제단 위의 여유로운 광경을 보고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백성들은 경외감이 사라진 눈빛으로 한쪽 구석에 몰린 승려들을 쳐다보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던 이들은 책상다리로 고쳐 앉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백성들은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법사를 치를 예정이었던 오전과 비교했을 때, 반강현이라는 지명이 쓰인 성벽도, 모여 있던 백성들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신성하고 경외감이 넘쳤던 오전과는 달리, 성문 앞은 떠들썩한 저잣거리처럼 활기가 넘쳤다.

잠시 하늘을 살피던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일어나는 것을 본 백성들이 일제히 잡담을 멈추었다.

인산인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성벽 위에 서 있던 관리들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여인이 자신 덕분에 일식을 면했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또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저 여인을 신처럼 떠받들 것이다. 좀 전에 죽어 나간 노승을 그리 대했듯이.

어쩌면 백성에게는 그저 숭배할 대상이 필요할 뿐,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곧 해가 저무니까, 여러분도 그만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만 돌아가라고?

고요했던 성벽 앞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관리들은 불안했던 마음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어서 가서 백성들을 설득시켜 중놈들 말에 현혹되지 않게 해라.”

“근처에 있는 승려들도 모조리 잡아들이고. 괜히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말을 지어낼지 몰라.”

“그 중놈이 여태껏 저지른 만행을 백성들한테 공고문으로 알리거라.”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명령을 하달했다.

날이 밝아오자, 관로 옆에 위치한 평량의 역참이 떠들썩해졌다.

역졸 두 명이 문가에 서서 한 상인이 건네는 역권(驛券)을 받고 있었다. 이쪽 길을 자주 오가는 상인인데, 매일 누구에게서 역권을 얻는지 한 번도 제 돈을 내고 역참에 묵은 적이 없었다. 역참에 묵는 돈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상인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덜 쓰는 게 돈을 버는 셈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골임을 알아본 역졸은 하품을 하며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어 상인을 들여보냈다.

“대산 형제, 밤잠을 설쳤소?”

상인이 역졸에게 친근하게 안부를 물었다.

“말도 마시오. 새벽에 사람들 한 무리가 왔었는데,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하겠다고 해서 아주 잠깐 눈을 붙였소.”

역졸이 말했다.

“나 참,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사람을 그리 귀찮게 해?”

상인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역졸의 비위를 맞췄다.

으이구, 역졸이 왜 있겠냐? 밤낮 안 가리고 손님을 모시는 게 네놈의 본분인 것을, 그까짓 걸 힘들다고 투정 부리긴.

상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여인들은 원래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잖아.”

다른 역졸이 말하면서 대산이라고 불린 역졸을 흘겨보았다.

“공짜로 일을 시킨 것도 아닌데 뭘.”

대산은 그제야 헤헤 웃으면서 소매 안에 있는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돈 있는 사람들이니 역졸들을 마음대로 부렸겠지.

상인이 마차를 끌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 큰일!”

역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목이 굵고 몸이 장대한 남자가 당나귀를 끌면서 역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역졸이 그가 건넨 역권을 확인해 보니, 반강현에 있는 어느 서리의 친척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누군가가 말했다.

“영덕 대사님을 아시오?”

남자가 소리쳤다.

반강 일대에서 영덕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 지역에도 명성이 자자해서, 어떤 지부 대인은 그를 상전으로 모신다는 소문까지 돈 터였다.

“영덕 대사님께서 새로운 부적을 만드셨습니까?”

“아이고, 빨리 가서 하나 구해와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어찌나 그걸 갖고 싶어 하시는지, 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본 남자가 마른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영덕 대사님이 어제 살해당하셨소.”

남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청천벽력 이상으로 경악했다. 역졸들도 놀라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헛소리 아니오?”

“영덕 대사님이 살해당할 리가 없잖소!”

점점 더 커지는 논쟁에 역참 안에 있던 이들도 마당으로 나와 구경했다. 남자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사람들은 역참 문이 막힐 정도로 그를 에워쌌다.

소식을 들은 역승도 깜짝 놀라서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든 채 마당 안을 내다보았다. 누군가가 역승의 뒤로 와서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여인이 물었다.

역승이 고개를 돌리자, 나이 어린 몸종이 서 있었다. 역승은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띠고 친절하게 물었다.

“낭자, 일어났어요? 뭐 필요한 거라도?”

“여기 부엌을 좀 써야겠어요.”

반근이 말했다.

“아, 식사는 우리가 준비해 두었는데.”

“아니에요. 저희 아씨는 바깥 음식을 드시지 않으세요.”

반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귀하게 키운 부잣집 따님인가 보네.

역승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있던 역졸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저기는 왜 저렇게 시끄러운 거예요?”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물었다.

“영덕 대사님께서 돌아가셨대요.”

역승은 반근에게 영덕 대사가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듣기로는 어제 일식 법사를 치르기 직전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반근이 아, 하고 대꾸했다.

“살해당한 게 아니라, 보살님 슬하에 있던 금강이 죽인 겁니다. 영덕 대사는 대사님이 아니라 마귀였다고.”

앞쪽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역승의 말을 고쳤다. 역승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 손짓했다.

“저리 가시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어제 영덕 대사가 복을 빌어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고 일식 법사를 치르려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금강이 영덕 대사가 일식을 불러오는 마귀라면서 단칼에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역승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그는 사건의 전모를 한꺼번에 말해 주었다.

일식이 예정됐다는 관청의 통보를 받았던 역승은 영덕 대사가 일식 법사를 치를 거라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식이 일어나지 않자, 역승은 당연히 영덕 대사의 기도 덕분에 일식을 면했다고 생각했다.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서, 마귀로 몰리다니!

“갑, 갑자기 왜 죽임을 당한 거요?”

역승이 다급하게 물었다.

“왜긴 왜겠습니까? 당연히 보살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귀를 물리치신 거지.”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자 역승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런 말은 어린애 달래는 데나 쓰겠다.

역승이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뒤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역승과 앞에 있던 사람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몸을 돌려 역졸을 따라가려던 어린 몸종이 보였다.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게, 누가 길을 막고 있으라나?”

반근이 중얼거리고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자리를 떴다.

길을 막았다고? 누굴 말하는 거야?

반근의 말을 들은 이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곧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당에서는 영덕 대사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에 대한 기막힌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떠들썩한 논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다. 반강현에서 온 손님이 점점 더 많아지자, 분위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영덕 대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소상해질수록 점점 더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었다.

한 대인이 수하들과 함께 역참에 도착했을 무렵, 논쟁은 영덕 대사의 죽음이 관음보살님이 인간계에 내려와 마귀를 없앤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댁들, 혹시 그건 봤소? 그 여인이 마귀를 죽이고 나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그 여인 뒤로 관음보살님의 후광이 막…….”

“어? 잠깐만. 왜 갑자기 여인이라고 하는 거요? 금강이라고 하지 않았소?”

“관음보살님의 응신(應身: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만 해도 서른두 가지인데, 보살님이 거느리는 금강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잖소?”

“끼어들지 말고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어 봅시다. 그 여인이 차를 마시는데 뭐가 어쨌다고?”

“그 여인이 마시던 차가, 사실 차가 아니었다네. 찻잔에 담긴 건 관음보살님의 정병(淨甁: 목이 긴 형태의 물병)에 담긴 감로수였어. 그리고 그 감로수 덕분에 우리가 일식을 면했다고 하더라고.”

듣다 못한 한 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수하들이 한데 몰려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길을 트자, 그제야 사람들은 한 대인이 온 사실을 알아챘다.

역승이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와 한 대인을 맞이했다. 역승이 한 대인을 부르는 호칭에 사람들의 이목은 한 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현존 대인! 이번 사건의 진상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사람들이 한 대인을 향해 왁자지껄하게 질문을 던지자, 한 대인은 난처한 기색으로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역참 대청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간신히 대청 안으로 들어온 한 대인은 아직도 마당에서 관졸들을 붙잡고 사건을 물어보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반강현이 제대로 유명해지겠군.

“대인,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역승이 공손하게 묻자 한 대인이 역승을 향해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투숙한 강남 말씨를 가진 여인을 찾고 있네. 시종들은 경성 말씨를 쓰고 있었고, 그들의 행선지 또한 아마도 경성일 걸세. 어리고, 어, 어여쁜 여인이었네.”

역승은 한 대인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있습니다, 있어요. 어제 새벽에 도착한 분이지요. 상등 방에 묵고 있습니다.”

역승이 한 대인에게 길을 안내하고자 앞장섰지만, 한 대인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알아서 가겠네.”

한 대인이 말했다.

신분이 어마어마한 분인가 보네.

역승이 어색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한 대인이 걸음을 막 떼려던 찰나, 역승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인, 영덕 대사님은 정말로 살해당하신 겁니까?”

한 대인이 그를 잠시 쳐다보고는 음, 하고 대꾸했다.

“왜 살해당했습니까? 왜요?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졌고요?”

역승이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던 한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눈이 있으면서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거겠지.”

무슨 뜻이지?

한 대인의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역승은 의아한 얼굴로 한 대인의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대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곧장 상등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두 앞쪽 마당에 몰려 있어서인지, 상등 방이 있는 뒷마당은 매우 조용했다. 한 대인이 수하들을 이끌고 상등 방에 가까이 가자, 회랑 아래 서 있던 시종들이 한 대인을 막아섰다.

“이분은 반강현 현존 한 대인입니다.”

관졸이 서둘러 소개했다. 다른 때였다면, 감히 현존 대인의 앞을 막느냐고 호통을 쳤겠지만, 이 사람들 앞에서는 어쩐지 자연스레 공손한 태도가 나왔다.

대낮에 말 한마디로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들이야.

얼마나 큰 용기가 있어야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잖아. 심지어 그 사람들은 영덕 대사에게 미쳐 있는 신도들이었고, 영덕 대사가 일식을 면하게 한다는 기도를 보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돼도 쉽사리 칼을 휘두르기 힘들 텐데, 이 사람들은 그 세 가지가 모두 겹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였지.

관졸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믿었다.

관음보살님의 금강임이 분명해. 그러니 그렇게 깔끔하게 마귀를 해치울 수 있었겠지.

방문이 열리고, 찬합을 들고 밖으로 나오던 반근이 한 대인을 보더니 가볍게 예를 올렸다.

한 대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방에 앉아 있던 여인이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낭자.”

한 대인이 정교랑을 향해 답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한 대인은 그제야 정교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당시 성벽 위에 있었던 한 대인은 정교랑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멀리서 보이는 여인의 자태와 관졸들의 설명을 듣고 정교랑이 미인이리라 짐작은 했다. 그리고 지금 가까이에서 정교랑의 얼굴을 본 한 대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내심 감탄했다.

웃으면서 담소나 나누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이 여인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고. 게다가 피가 낭자한 시신 앞에서 평온하게 차를 마셨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게 아니었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었을 거야.

정말로 이 여인은, 보살님이 인간계에 내려보낸 금강인가?

“말을 꺼내기도 부끄럽소만.”

한 대인이 한숨을 쉬면서 운을 뗐다.

“거두절미하고, 오늘은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자 이렇게 왔소. 우리 대신 반강현의 근심을 없애 주어서 참으로 감사하오.”

한 대인이 공수의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답례를 하며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잠시 한 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대인은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주시에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직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언뜻 보아도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바른 여인인데, 어찌 이렇게 무례하게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는 말인가?

“대인께서는 한씨라고 하셨지요. 고향은 어디세요?”

한 대인은 멈칫했지만 정교랑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숙주(肅州)요.”

한 대인의 대답을 듣자,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놀라서 외쳤다.

“엇, 숙주! 한씨?”

날 아는 사람인가?

한 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숙주에 낭자가 아는 사람이 있소?”

한 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 굳이 제게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중이 저의 길을 막고, 길을 비켜 달라는 청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저를 위협했기에 그리한 것뿐입니다. 대인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니, 대인의 감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요승(妖僧)의 입을 먼저 막지 않았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겁니다. 제가 복잡한 일은 질색인지라.”

내가 물은 것은 대답하지 않고, 앞선 질문에 대답하네.

노승을 죽인 이유가, 복잡한 일을 싫어해서라.

하긴, 그 노승도 어제 일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이 여인이 했던 말을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할 기회가 없지.

이 여인이 갑작스럽게 노승을 죽이지 않고, 그가 몇 마디 더 하게 놔뒀더라면, 정말로 일이 복잡해졌겠군. 그리됐다면, 아마 이 여인도 지금쯤 반강현에 발이 묶여 있었을 터.

이 여인은 지략과 용기를 겸비했고, 일 처리까지 깔끔해. 분명히 보통 집안 출신이 아닐 것이야.

한 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낭자에게 고맙소. 밤새 조사를 해서, 그 요승들이 여태껏 해온 만행을 밝혀냈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현존 대인 소리를 들으면서도 백성을 지키지 못하다니. 이번엔 꼭 그 요승의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하오.”

정교랑은 한 대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정말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오신 건가요?”

정교랑의 질문에 흠칫 놀란 한 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똑똑한 여인이로구나. 본디 감사 인사만을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만, 지금은 감사 인사만을 위해 온 것이 되었지.

“그렇소. 사죄의 의미로 온 것이기도 하오. 반강현에서 그런 일을 겪게 하다니, 정말 송구할 따름이오.”

정교랑이 한 대인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한씨가 맞네요.”

역시 한씨라고? 무슨 뜻이지?

한 대인이 정교랑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 대인께 기회를 하나 드리지요.”

기회?

한 대인은 정교랑의 말을 더욱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근, 종이와 붓을 가져와.”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곧바로 종이와 붓을 가져와 먹을 갈았다. 한 대인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반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

한 대인이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정교랑은 글씨 한 줄을 쓰고 붓을 거둔 채 먹을 말리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잘 쓰시기 바랄게요. 대인, 이거면, 요승이 백성들을 현혹했던 일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정교랑이 종이를 건네면서 말했다. 종이를 건네받은 한 대인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에 쓰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종이 위에 쓰인 것을 본 한 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진짜야, 가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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