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60)

-최선-

어두운 등불 아래, 범강림이 서툰 솜씨로 먹을 갈고 있었다. 그의 반대편에 앉은 서사근이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이러는 거, 정말 무능해 보이지 않소?”

처음 종군했을 땐, 큰 공을 세우기도 전에 탈영병이 되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 간신히 기회를 얻어 서북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지금까지도 제 앞가림 하나 못 하고 공로나 뺏기는 신세라니. 오랜 시간 동안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직도 그 어린 낭자에게 의지해야 한다니. 차라리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낫지.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가난했던 우리가 거리를 집으로 삼아 떠돌아다닐 때, 셋째가 그랬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다면 이루는 게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셋째가 우리한테 글을 가르치려고 했잖아.”

범강림이 멋쩍게 웃으면서 말하자 서사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던 두 사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머리로는 글공부가 불가능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셋째가 머리 대신 힘을 쓰자고 했지.”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쪽에서 아이를 재우고 있던 범강림의 아내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간 열심히 무예를 단련한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입대했는데, 공로를 세우기는커녕 모함에 휘말려 목숨이나마 부지하려고 탈영을 했어. 그때 셋째가 너희 몰래 내게만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는 남들과 같이 원대한 꿈을 가졌지만, 팔자가 종잇장보다 얇은 사람들인 것 같다고.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하더군.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하느님이 특별히 점지해 준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믿고 싶지만, 실은 허공에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먼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범강림의 말에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누이라는 큰 행운을 만났잖아요. 하느님이 특별히 점지해 주신 운명인 셈이죠.”

“그래. 그러니 이번 생은 값지다고 생각하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먹을 갈았다.

“넷째야.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얼마만큼의 그릇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경성에서 누이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외의 일은 누이에게 의지해야 해. 우리가 무모하게 일을 벌이고, 방씨 놈과 다른 관리 어른들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형제들의 공로도 챙기지 못하고 우리까지 놈들의 덫에 휘말릴 거야. 네가 보기에는 우리가 체면부터 챙겨야 하겠느냐, 아니면 목적을 달성해야 하겠느냐?”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형님.”

서사근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적자.”

범강림이 손짓을 하자, 서사근이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이고는 붓을 들었다. 두 형제가 서신을 적기 시작하자, 범강림의 아내는 잠든 아이를 안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범강림의 아내는 방 밖으로 나와 한결 시원해진 여름밤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두 형제의 행동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순검 대인께서도 손대지 못할 정도의 큰일을, 누이에게 말한다고 해서 방법이 생기나? 누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경성.

해가 들기 시작할 때쯤, 시녀가 조심스럽게 진십삼의 방문을 열었다. 시녀는 방 안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던 진십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자님, 못 주무셨어요?”

시녀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진십삼이 어깨를 주무르면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세숫물을 받아오고 시중을 들겠다는 시녀의 말을 거절했다.

“서신을 써야겠다.”

시녀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붓과 먹을 가지고 와서 진십삼 옆에 앉아 먹을 갈기 시작했다.

나도 자네 말처럼 그 방씨 놈을 흠씬 패 버리고 싶었지만, 때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토록 분한 것을 참는 게 어른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철들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강 총관을 직접 찾아갔는데, 당숙과 형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혼내고 외출을 금지했어. 마음 같아서는 나를 꽁꽁 묶어 경성에 보내 버리고 싶으셨겠지. 그분들은 모르셔.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 병졸들을 신경 쓰는지 모른다고.

나는 알고 있지.

진십삼이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나는 자네가 신경 쓰는 이유를, 그리고 그 여인이 신경 쓰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그 여인이 무엇을 신경 쓰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자네가 장성했기 때문에 분함을 참는 게 아니라, 충분히 강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해서 참아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

누구나 더욱 높은 곳을 갈망하고 더욱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남들에게 수모를 겪지 않기 위한 본능일 수도 있어. 이 세상에 정해진 도리란 없으니까. 오직 강한 자만이 도리가 되지.

그 말인즉슨, 만약 자네가 강해진다면, 자네 말이 곧 도리가 될 거라는 뜻이야. 그러니 서북에서 최선을 다해. 나는 내년이면 과거 시험을 치를 거니까, 자네도 허풍 떨며 큰소리쳤던 말 잊지 말고 꼭 지키라고.

이번 일은 거기까지 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마. 서북에서 이미 그 일을 끝내기로 한 이상, 자네가 계속 나서서 소란을 피우면 자네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아질 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지.

이 점은, 누구보다도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사실 네놈도 그리 아둔하진 않잖아…….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던 진십삼의 붓끝이 갑자기 멈추었다.

사실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묻는다는 건, 그냥 누구 하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겠지.

진십삼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쓰고 있던 종이를 구겨 한쪽으로 던지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잠시 뒤, 사환이 서신을 들고 떠나는 모습을 본 진십삼은 회랑 아래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공자님, 아침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시녀가 옆에서 말했다. 여름이 찾아온 정원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십삼은 한숨을 쉬었다.

“세숫물과 나갈 옷을 준비해라.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진십삼이 말했다.

여름은 신선거의 장사 철이 아니었다. 한산해진 신선거는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진 공자님 오셨습니까. 때마침 별실이 하나 비었는데, 그리로 드시지요.”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친절하게 권했다.

“아무 데나 있어도 되는데. 아, 반근은?”

진십삼이 물었다. 점원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반근 누이는 조금 아까 막 나갔습니다. 공자님께서 볼 일이 있으시다면 소인이 지금 당장 부르러…….”

진십삼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다. 온 김에 물어본 것일 뿐이야.”

진십삼의 걸음걸이와 함께 옷자락이 휘날렸다. 그는 층계를 오르고 동쪽으로 향했다.

서쪽의 한 별실에서 나온 춘령은 단번에 진십삼을 알아보았다. 춘령은 진십삼을 우연히 마주친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 그를 부르려다가, 동작을 멈추고 자신의 뒤를 따라 별실을 나오는 주 낭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열린 별실 문틈 사이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주 낭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별실을 빠져나왔다. 주 낭자는 이번 접대 자리가 썩 즐겁지 않았다.

춘령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진십삼의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비어 있던 별실 문을 열자, 춘령은 얼른 층계 가까이서 발을 헛디딘 척하며 요란스럽게 넘어졌다.

주 낭자와 그 뒤를 따르던 또 다른 시녀가 화들짝 놀라 춘령을 부축하러 다가왔다.

진십삼도 갑작스러운 우당탕 소리에 춘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 낭자 일행의 얼굴을 알아본 진십삼은 별실을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주위에 있던 다른 점원이 서둘러 춘령을 부축하러 다가오자, 춘령은 다른 시녀의 부축을 받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래요.”

춘령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주 낭자가 춘령에게 조심하라고 다독인 뒤 걸음을 옮겼다.

“괜찮은 것이냐? 의원을 불러올까?”

진십삼의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든 주 낭자는 진십삼을 보자마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발을 헛디뎌서 그래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춘령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허둥대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주 낭자도 다시 한번 진십삼을 향해 예를 표하고 걸음을 뗐다.

“주 낭자는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약속이라도?”

진십삼이 물었다.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돌아가는 길이에요.”

“낭자의 칠현금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혹시 내게 오늘 그 연주를 들어볼 행운이 있을지요?”

진십삼의 물음에 주 낭자는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공자님, 과찬이십니다. 행운이라니요.”

주 낭자가 진십삼을 향해 몸을 돌리고 목례했다. 진십삼은 싱긋 웃으면서 별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주 낭자가 걸음을 옮기자, 춘령을 부축하던 시녀는 춘령을 내팽개치고 칠현금을 챙겨서 서둘러 주 낭자의 뒤를 쫓아갔다. 다리를 문지르는 척하던 춘령은 살짝 고개를 든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술과 요리가 금세 별실 안 식탁 위로 올라왔고, 딩딩당당 하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넋을 놓고 있던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손뼉을 치면서 주 낭자의 연주 실력을 칭찬했다.

“주 낭자의 연주가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진십삼이 말했다.

“2년이 지났는데도 실력이 제자리라면, 소인의 밥줄이 끊기지 않을까 싶네요.”

주 낭자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진십삼처럼 권문세가 출신에 성품이 올곧은 공자들은 기루에 쉬이 발을 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관기를 불러 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주 낭자의 연주를 들었던 것이 우리 집 연회에서였지.

주 낭자의 말에 진십삼은 잠시 딴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 연회는 정교랑의 배웅을 위해 열었던 거고.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니. 정 낭자도 참 매정해. 떠난다고 작별한 뒤로는 서신 한 장 보내지 않다니.

잠시 진십삼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던 주 낭자는 칠현금의 음을 조율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곡보다 더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다시 시작된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술을 천천히 입에 머금으며 연주를 감상했다.

또 한 곡이 끝나자, 주 낭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옆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었다.

“잠깐.”

진십삼이 손짓으로 주 낭자를 제지했다.

하긴, 한낱 기녀인 내가 어떻게 공자님의 허락도 없이 차를 마실 수 있을까.

주 낭자가 허리를 숙이면서 찻잔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차가 식었을 텐데.”

진십삼이 다른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은 걸 보니, 주 낭자도 나처럼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러니 따뜻한 차를 마셔요.”

진십삼이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주 낭자 쪽으로 밀어주었다. 문가에 앉아 있던 주 낭자의 시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 낭자 앞으로 찻잔을 가져다 놓았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쳐다보면서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나처럼’이라는 말에 감사드릴게요.”

말을 끝낸 주 낭자는 진십삼이 건넨 따뜻한 차를 단숨에 비웠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음(知音)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요? 지음이 아니었다면, 낭자가 내 마음을 위로하려고 연주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

“그건 공자님의 몫이지요. 지음인지 아닌지는, 공자님께서 소인의 뜻을 알아주시는지 아닌지에 달렸습니다. 공자님을 위해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는 소인의 몫이죠.”

주 낭자가 미소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인의 본분이기도 하고요.”

진십삼이 크게 웃었다.

“좋소. 참으로 좋은 본분이오. 그러고 보니 꼭 그 여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여인?

기녀와 닮았다는 소리를 좋아할 여인은 없었다. 다른 기녀였다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교태를 부리고 수줍어하며 ‘제가 어찌 감히요’와 같은 말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주 낭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음을 지을 뿐, 황송하거나 과분한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별실 문이 열리고 여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 공자님, 절 찾으셨다면서요?”

시녀가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말을 건네다가 반대편에 앉아 있던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그래.”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낭자가 물러나려고 예를 올렸다. 그녀를 붙잡을 생각이 없었던 진십삼은 사환에게 주 낭자를 배웅하고 돈을 주라고 지시했다.

“진 공자님, 요즘 기분이 안 좋으세요? 술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기녀까지 부르시다니요? 부친께서 아시면, 공자님 다리가 남아나지 않을 텐데요.”

“걱정 마라. 아버지께서도 차마 그러진 못하실 거야. 또 너희 아씨를 모셔 오기에는 너무 비싸서 말이다.”

주 낭자는 별실을 나오면서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었다.

별실 문이 다 닫힌 것을 확인한 주 낭자는 그제야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요?”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 아씨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거라고.”

진십삼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대답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시녀는 잠시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 공자님,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같은 시각 강주. 남정 골목에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가긴 왜 도망가!”

조 집사가 정평의 목덜미를 꽉 잡고 외쳤다. 조 집사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던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말했다.

“우리 아씨를 보고 도망가는 이유가 뭔데!”

“아니, 그쪽 아씨를 보고 도망치려는 게 아닙니다. 날이 곧 저무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거리로 뛰어가던 중이었다고요.”

정평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평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 집사는 그의 뒤통수를 몰래 때리고는 정교랑 앞으로 밀쳤다.

가까이 다가온 정교랑을 보자, 정평이 헤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이쿠, 이런 우연이. 낭자는 또 걸으러 나온 겁니까?”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대인께서는 어딜 가세요?”

“나야 뭐, 거리로 나가려던 길이죠.”

정평이 넉살 좋은 미소를 보이면서 슬쩍 발을 뺐다.

“그럼 나는 이만.”

“제가 대인께 드린 돈은 왜 안 받으시죠? 다른 뜻은 없고, 대인께서 하루빨리 경서를 깨우치는 데 집중하고 저작을 남기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드린 건데.”

정교랑이 정평의 말을 끊고 물었다. 정평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낭자, 내 마음대로 살도록, 다들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정평이 말을 끝내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두어 걸음 뗐을 때, 제자리에 서 있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대인의 후대 자손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으세요? 대인께서 좀 더 강해지신다면…….”

정평이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낭자는 아직도 모르는군요.”

정교랑은 웃고 있는 정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평이 손을 들어 정교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강해진다 해도, 그건 내 일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내 후손들과는 더욱 관련이 없지요. 내 후손들이 나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일이고,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이에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당신과 관련이 없는데요, 어떻게! 수수방관하겠다는 뜻인가요? 후손들을 외면하겠다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멸족을 당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이대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거냐고요!

“우리는 이대로 단념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녀는 정평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럼 더 강해져야죠. 아직은 결론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되지 않은 거죠. 자꾸 남한테 강해지라고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내가 강해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정교랑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물었다.

“이젠 그들이 없는데.”

정교랑은 정평의 옷자락을 쥔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읊조렸다.

“낭자가 있잖아요.”

정평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내가 아직 있다고?

“하지만, 나, 나는, 나는 내가 아닌걸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어째서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영원히 자기 자신인 거예요. 영원히 존재하는 거죠. 낭자가 살아있고, 마지막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끝이 아닌 겁니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어서 가요. 어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어! 아직 기회가 있어! 모든 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교랑은 경악하며 깨달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귓가에서는 거대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난 아직 정방이야. 난 아직 정방이라고. 양씨 가문과의 일은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죽지 않았고,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우리 일족을 위해 복수할 기회가 남아 있어.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잃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평은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역시 어린애라 그런지 달래기가 쉽네. 듣고 싶은 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저놈이!”

조 집사가 정평의 뒤를 몇 걸음 쫓아갔지만, 날쌔게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조 집사는 고개를 돌리고 제자리에 서서,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는 정교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에 홀린 건가?

갑자기 골목 안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 일행을 발견한 사환이 더욱 빠르게 뛰어와 정교랑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아씨, 서북에서 온 서신입니다.”

반근이 서신을 받아와 봉투를 뜯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정교랑은 서신을 읽으며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된 일이었다니.”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아씨, 무슨 일이예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서신을 접은 뒤 잠시 앞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니! 역시 강해져야만 해.

“떠날 채비를 해. 경성으로 가야겠다.”

경성?

놀란 반근이 고개를 돌려 조 집사를 쳐다보자, 조 집사도 똑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지금요?”

반근이 물었다.

“지금.”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저택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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