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5월 초, 강주부에 무더위가 찾아왔다.
준마 한 마리가 먼지를 휘날리며 거리 위를 내달렸다.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에 먼지까지 휘날리니, 행인들은 재빨리 한쪽으로 피했다. 말을 탄 병졸은 무척 급한 소식을 전하러 오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으로 보였다. 성문을 지키던 관졸들은 말을 멈춰 세우기는커녕, 서둘러 주위에 있던 백성들을 밀치며 길을 터주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급하게 오지? 우리 성은 군영 쪽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텐데.”
“그냥 지나가는 거 아닐까?”
관졸들이 나지막이 속닥이던 중에, 말을 탄 병졸이 말고삐를 휙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성문 앞에 급히 멈춰 선 말이 앞발을 쳐들며 울부짖었다.
“강주부 정씨, 정씨 가문의 저택은 어디 있소?”
병졸이 큰 소리로 물었다.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관청을 찾는 것도 아니고, 정씨 저택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고? 그럼 관청과 관계된 일이 아닌가 보네?
관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길을 안내했다. 병졸은 관졸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채찍을 휘둘러 말을 급히 출발시켰다. 거리에 있던 행인들은 돌진해오는 말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길을 비켜 주었다.
“아씨, 큰일 났습니다!”
조 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택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찰 한 통이 쥐여 있었다.
마침 회랑 아래에서 대청 문을 열고 있던 반근과 그 안에 있던 정교랑이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큰일이 났다고?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큰일인데?”
“무슨 일이 나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다시 눕히려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말이야 쉽지.”
정 대노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일은 당연히 우리와 관련 없겠지만, 나쁜 일이라면 또 모를 일이야.”
정 대노야가 집사에게 어서 말하라고 눈짓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병졸이 대문 앞에서 정가 교랑을 찾으러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교랑을 찾는다길래 남정에 있는 저택을 알려 줬죠. 혼자 보내기가 영 불안해서 저도 따라가 봤더니, 조 집사가 병졸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병졸이 건넨 서신을 읽더니, 손까지 덜덜 떨었고요.”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정 대노야에게 말했다.
기고만장하던 조 집사 그놈이 그렇게 놀랄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군.
“그 후로 조 집사가 집에 들어갔고, 집안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울음소리?
“그 바보가 울었단 말인가?”
정 대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집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문이 닫혀서 누구의 울음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여인의 울음소리였어요.”
바보가 울었든 아랫것이 울었든,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쨌든 큰일이 터졌다는 건 확실하군.
정 대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주육낭은 천막 안에 앉아 같은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전장에서 들려오던 북소리와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의 외침,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주육낭의 귓가에 맴돌았다.
주육낭은 반나절 내내 같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붓끝에서 언제 묻혔는지도 모를 먹물이 말라 갔다.
주육낭은 서찰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주육낭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분명 빠른 시일 내에 강주부에 부고가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범강림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지만, 말편자로 관직을 얻은 서사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을 테니 부고를 보냈을 것이다. 다른 병사들의 부고라면 깜깜무소식이거나 한참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도착하겠지만, 그들과는 달리 돈도 있고 관직도 있는 무원산 형제들의 부고는 분명 곧바로 강주부에 도착할 것이다.
부고에 적힌 말들 외에 내가 또 무슨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 비통한 일을 다시 적는 것? 그 여인을 위로하는 말?
위로? 지금 상황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어.
주육낭은 옆에 놓인 붓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나 싶더니, 결국 팍 소리와 함께 붓이 부러졌다.
정교랑 저택의 대청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반근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조 집사는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녀의 시선은 아직 서신을 향해 있었다.
서신에 쓰인 내용은 몹시 간략했다. 무장 집안인 주씨 가문에서 일한 조 집사는 서신에 쓰인 내용을 눈을 감고도 외워낼 수 있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와 같은 말들.
정교랑은 손을 들어 서신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정교랑은 서신 위에 쓰인 이름을 천천히 내뱉었다. 반근의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변했다.
“아씨, 아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슬픔을 거두세요.”
반근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슬프지 않아.”
정교랑은 손으로 서신 위의 이름들을 매만졌다.
“가서 알아봐. 어떻게 죽은 건지.”
반근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 집사는 정교랑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고 밖에 있던 병졸을 불렀다.
부고를 전하러 왔던 병졸은 바깥마당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시종 하나가 병졸에게 물었다.
“4월 19일이오.”
병졸이 대답했다.
4월 19일? 오늘이 5월 3일이니까, 고작 열흘 남짓한 시간에 용곡성에서 강주까지 왔다는 말이잖아? 정말 빨리 왔네.
병졸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의 시종들을 쓱 둘러보고는, 따뜻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갈증을 해소했다.
“서 관구께서 경비를 두둑하게 챙겨 주신 덕분에 오는 내내 말을 바꾸어 가면서 달려왔소이다.”
병졸은 평생 서신을 날라도 벌지 못할 돈을 한 번에 받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연이어 사흘을 달리고 하루 쉬기를 반복하며 짧은 시간 안에 강주부에 도착했다.
시종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원산 형제들과 직접 가까이 지낸 건 아니었기 때문에 깊은 비통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었기에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죽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병졸은 잔에 남은 따뜻한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오는 길이 너무 고돼서 그런가.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차는 처음 먹어 보는 것 같네.
병졸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 문간방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네. 장식들이 소박해 보이지만, 초라해 보이지가 않아. 마시라고 내준 차도 꽤 맛있고, 탁자에 놓인 과일도 무척 싱싱해 보여. 예전에 들렀던 가난한 집안처럼 인색한 분위기도 아니지만, 부잣집처럼 호화롭지도 않아.
이 저택은 크고 깔끔해 보이는군. 골목에 들어오면서 보니 새로 지은 것 같은 집은 몇 채 없고, 대부분 부서지고 낡아빠진 것들뿐이었는데.
병졸이 의아해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 사람들은 무원산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어떻게 이런 부유해 보이는 곳에 의남매를 맺은 누이가 있는 거지?
병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와중에 조 집사가 보낸 시종이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병졸은 늘 그랬듯 서신의 주인이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방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졸은 예의를 지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사환을 따라 뒷마당을 지나쳤다. 뜻밖에도 부고를 받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이 집은 매우 조용했다. 병졸의 귓가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곡 소리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적막감만 맴돌았다.
핏줄이 아니라 의로 맺어진 관계라서 그런가?
병졸은 회랑 아래에 서서 예를 올렸다.
“앉아요.”
방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졸은 고개를 들지 않고 회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죠?”
부고를 받은 집에서 항상 나오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병졸은 무원산 형제들이 죽었던 날의 전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보통은 사망자의 사인이 된 전술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알려주는 편이지만, 서사근이 두둑하게 챙겨 준 돈을 생각해서인지 병졸은 조금 더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병졸이 이야기를 하던 중 여인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울어야지, 우는 게 맞아. 사람이 죽었는데, 우는 게 정상이지. 비록 피붙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의남매잖아.
“이번 전투로 부상자와 사상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범석두 등 다섯 병사는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병졸이 허리를 숙이며 상투적인 말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성보를 수비하며 싸운 것이 이번 전투의 승패를 뒤바꿨다는 말인가요?”
여인이 물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닌데? 저 여인이 우는 게 아니었나?
병졸이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원래는 후방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부대였는데, 오랑캐 정예병 부대가 그쪽을 치는 바람에……. 그런데도 그들은 바로 도망치지 않고 봉화를 올리고 전령병을 보내 본영에 있던 부대가 재정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수적으로 몇 배나 차이나는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니, 가히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역경에 맞서 싸웠으니, 가치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지요.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네요.”
여인이 말했다.
“네, 조정의 포상도 곧 내려질 겁니다. 소인이 급하게 오느라 어떤 포상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위로금도 같이 내려올 거고요. 조정의 위로금이 올랐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인당 돈 다섯 관에 비단 여섯 필…….”
집안의 분위기에서 부고로 인한 비통함이 묻어나지 않아서인지, 병졸은 저도 모르게 괜한 말을 덧붙였다. 병졸이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병졸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입을 닫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대청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여인은 짙은 색 옷에 꽃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꽃처럼 아름다운 묘령의 소녀였다.
병졸은 병풍 앞에 있던 소녀를 감히 더 보지 못하고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소녀의 옆에 엎드려 통곡하는 시녀가 보였다.
울던 여인이 저 시녀였구나.
“그깟 돈이나 비단이 무슨 대수라고요! 도련님들의 한 달 치 임금만 해도 돈이 얼마고, 비단이 몇 필인데!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아이고, 하느님!”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정말 이럴 수는 없습니다!
남정의 골목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정교랑의 저택을 몰래 쳐다보던 이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아이 때문에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소리쳤다.
사환이 어린아이를 흘겨보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썩 꺼져! 꺼지라고!”
사환이 일부러 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다그쳤다.
예전에는 사환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 내던 어린아이가 이번에는 느닷없이 돌멩이를 주워 사환을 향해 던졌다. 사환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어린아이에게 욕을 해대며 도망쳤다.
“상을 치르고 있다고?”
정 대노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예. 집에 있던 도부(桃符: 악귀를 쫓는 용도의 부적)도 전부 가려 놓았고, 사환들도 모두 허리를 매듭지어 묶었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화를 내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감히 누굴 저주하는 게야! 그 지경으로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우리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정 대부인이 소리치자, 정 대노야가 부인을 흘겨보았다.
“그만 좀 하시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난리부터 피울 셈이오? 얼마나 더 피해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지금 피해 보게 된 것이 다 내 탓이라는 말이에요?”
정 대부인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
여인네들은 역시 눈치가 빨라.
정 대노야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사낭을 시켜서 알아보게 해라.”
정 대노야는 대부인의 말을 무시한 채 집사에게 지시했다.
집사는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집사가 마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안에서 말다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똑바로 말해요.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에요? 당신과 이방 내외의 잘못이잖아요.”
“부인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괜히 혼자서 난리를 치고 그러시오.”
“지금 끝까지 내 잘못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더는 이 집에 못 있겠으니, 내가 집을 나갈게요!”
“나가? 어디로 나갈 건데? 당신 친정 말이오? 그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고?”
정 대부인이 울음을 터트리자, 집사는 서둘러 도망치다시피 마당을 벗어났다.
정사낭은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정교랑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놓여 있던 알록달록한 장식들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반근은 하얀 상복을 조금 뜯어내어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생겼느냐?”
정사낭이 반근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씨와 의남매를 맺었던 오라버니들께서…….”
반근이 울먹였다.
“전에 말했던 그 도련님들 말이냐?”
정사낭이 물었다.
작년 새해 정사낭이 입었던 새 옷들은 전부 그들을 위해 준비했지만 끝내 쓰이지 못한 것들이었다. 경성에 있는 시녀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들도 있다 보니, 정사낭은 반근이 말하는 도련님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아씨께서 가장 의지하시는 오라버니들이에요. 혈육보다도 더 가까운 분들이죠. 같이 늑대도 죽였고…….”
같이 사람도 죽였죠.
반근이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모두 없어졌어. 정말로 다 없어졌어. 어떻게 그리 한순간에 모두 없어질 수 있지?
반근은 지금이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조금만 지나면 이 슬픈 악몽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정사낭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변방의 전란 속에서 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때는 잘 지냈다고 들었는데, 왜 다시 입대한 거야? 경성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정사낭이 물었다. 반근이 애끓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넷째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그분들을 내모신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그러신 게 아니라…….”
반근이 다급하게 말하다가 돌연 말을 멈췄다. 자신이 뱉은 말에 반근 스스로 화들짝 놀랐고, 정사낭도 덩달아 흠칫했다.
그래서 아씨께서는 더욱 자책하고, 더욱 슬퍼하시는 걸까? 만약 도련님들이 경성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반근이 후드득 눈물을 떨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가린 채 통곡했다. 정사낭이 서둘러 반근을 다독였다.
“알아, 알아. 누이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누이는 아마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알았기에 그랬을 테지. 그분들은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을 거야. 자고로, 세상만사는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 힘든 법이잖아.”
반근은 힘겹게 울음을 삼키며 정사낭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누이는?”
정사낭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반근과 한참이나 대화를 주고받았는데도, 정교랑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씨께서는 정평을 찾아가셨어요. 저는 서북으로 보낼 장례 물품을 준비하느라 집에 있었고, 아마 조 집사가 아씨와 함께 있을 거예요.”
정평은 또 누구지? 누이는 어쩐지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단 말이야.
정사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밖에 선 조 집사가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정평과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씨께서는 저놈을 볼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시잖습니까. 하필 오늘 같은 날 저놈을 보게 되면 더 안 좋지 않을까요.”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이독치독(以毒治毒)이 될지도 몰라.”
조 집사가 다시 한번 안쪽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게 뭐 그리 슬픈 일이라고.”
정평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이 여인도 참 웃긴 사람이야. 정씨 일족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막강한 사람인데, 어쩔 땐 꼭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나한테 달려와서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한단 말이지.
“슬픈 게 아니에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으로 눈가를 만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생사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애초에 그녀에게 이곳 사람들은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교랑은 마음 한쪽이 몹시 답답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답답함 때문에 정교랑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렇잖습니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니, 그들은 원하던 바를 이룬 거예요. 슬퍼할 게 뭐 있습니까. 병사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니, 이런 결말도 충분히 예상했겠죠.”
정평이 말했다.
“하지만 죽기 위해 병사가 되려는 사람은 없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정씨 가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했던 건, 멸족이나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세상에 마땅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아! 이렇게 말 한마디로 가볍게 정리되는 죽음은 없다고.
“에이, 그건 좀 틀린 말 같네요.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야죠.”
정평의 말에 정교랑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집안에서 가장 영민한 사람이었다. 한 번 보면 즉시 깨우치고,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남들은 일 년을 걸려 배울 것을 한 달 만에 익혔다. 하지만 선조 앞에선 언제나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정교랑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혈육을 만나서인가? 삼백 년을 거스르긴 했지만, 그래도 혈육이니까.
“그자들은 자신이 왜 병사가 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러니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값지고 의미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값진 죽음. 저도 알아요, 값진 죽음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오라버니들은 용감하게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이름과 공로를 남기고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받았으니, 허투루 산 건 아니지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요? 제 혈육과 친구들은요? 다 죽었어요. 모조리 다 죽어 버렸다고요. 그들도 오라버니들처럼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요.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채로 죽고, 그간 해 왔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했습니다. 값진 죽음이 아니었죠.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허투루 산 것이 아닌가요?
“응? 뭐라고요?”
정평은 귀를 기울였지만, 정교랑이 웅얼거리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고, 그간 해 온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면 허투루 산 거 아니냐고요?”
정평이 들은 것을 되묻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아닌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정평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원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렇죠. 좀 전에 말했잖아요.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알면 된다고. 낭자가 말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던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잘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황제를 잘 보필해서, 대업을 이루려 했죠.
우리라고?
정평의 눈썹이 꿈틀이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좋을 대로 말하라지.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요?”
정평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천문과 지리를 살피고, 전략을 짜고, 장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해 온몸에 적군의 피를 묻혔다. 단 한 사람도 뒷걸음질 친 이는 없었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정평이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값지지 않다고 할 수 있죠? 충분하지 않아요?”
“그게 어떻게 충분해요?”
정교랑이 목청을 높였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서둘러 안쪽을 들여다보고 정평을 향해 위협적인 손짓을 보냈다. 정평은 조 집사의 손짓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요? 낭자가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낭자가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질 거라는 입에 발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하는 대로 다 이뤄지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지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낭자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낭자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낭자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낭자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정평이 말했다.
뭐라고?
정교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평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위해 그 일을 시작했는지 잘 알고, 그것을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면, 그게 바로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그 자체로 값진 겁니다. 한고조 유방이 황제가 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거예요. 거지가 밥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개미들이 강가에 빠져 죽지 않고 둑을 오른 것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룬 거죠.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 - <노자>)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낭자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는지 아닌지를 한 사람의 성패로 따지는 거죠? 무슨 근거로 하늘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판단하는데요? 그건 다 낭자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일 뿐이지, 절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정평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고양되었다. 한껏 집중한 그가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정평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잰걸음으로 정평의 거처를 벗어나자, 조 집사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정평의 멱살을 잡았다.
“아파요, 아파. 아프다고.”
정평이 외쳤다.
“안 그래도 요새 들어 우리 아씨의 기분이 부쩍 좋지 않으신데, 네놈이 뭐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조 집사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정평에게 위협적으로 호통쳤다. 정평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생각의 창을 넓히게 일깨워 주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끝을 맞이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에 의미를 두라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 안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조 집사가 정평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세차게 흔들었다.
“알아듣게 말해!”
조 집사가 호통쳤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말이죠.”
“고작 말 한마디를 그렇게 길게 했다고? 이런 네놈이 사기꾼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저녁 무렵, 조 집사는 불안해하며 정교랑이 있는 안채로 들어갔다. 그를 본 반근이 조 집사에게 손짓했다.
“별일 없었어요. 이제 막 목욕을 마치셨으니, 곧 주무실 거예요.”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별일 없었어?”
조 집사가 속삭이다시피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려운 여인이네. 어쨌든 친남매가 아니니, 그렇게 슬퍼할 정도는 아닌가 보군.
조 집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 오늘은 내가 당직이니까.”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 집사가 마당을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반근은 회랑 아래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 덕에 정교랑의 그림자가 창가에 비쳤다.
정교랑은 씻고 난 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늘 정평에게서 들은 말이 너무 많아 정교랑은 조금 멍해졌다.
그만 생각하자, 그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풀었다.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맑은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보니, 치맛자락 옆에 조그마한 은빗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희미한 등불에 비친 은빗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아씨, 저희 형제 일곱은 모두 동향입니다. 무원산에서 왔죠. 저희의 천한 이름은 기억하실 것 없으니 은인인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아씨께선 제 형제를 구하고 은자까지 주셨잖아요.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죠.
아씨께 장생위패(長生位牌: 은인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드는 위패)라도 세워 드려야 하는데.”
무원산 형제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교랑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실상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 사소한 수고였을 뿐이야.
정교랑은 자신과 친했던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빨리 또 겪을 줄 몰랐다. 무원산 형제들을 잃은 슬픔과 혈육을 잃었던 슬픔이 한데 섞여 얽히고설킨 감정이 피부에 와 닿는 듯싶다가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마치 환상처럼.
정교랑은 바닥에 떨어진 은빗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더는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 셋째 아우가 노래를 부른다고!
형제의 정이여.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곁방에 누운 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반근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환청이 아니야.
나지막한 격부(擊缶: 물이 든 동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일) 소리와 낮은 노랫소리가 밤바람을 따라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반근이 곁방 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노랫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아씨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건가? 노래가 너무 구슬프네.
반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씨께서 속상해하시지도, 슬퍼하시지도 않을 리가 없어. 단지 말로 표현하지 않으실 뿐이지.
그런데 저건 무슨 노래지?
반근은 정교랑이 부르는 노래를 몰랐지만, 조 집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들었다.
“기억하느냐.”
바깥마당에 있던 조 집사가 안쪽을 멍하니 쳐다보며 물었다. 조 집사의 옆에 있던 두 시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아, 너희는 모르겠구나. 그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
멋쩍게 웃으면서도 조 집사는 여전히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 조 집사는 노랫소리와 격부 소리가 더욱 잘 들리도록 안쪽 마당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의 눈앞에 화르륵 타오르는 모닥불이 아른거렸다. 그는 늑대 떼를 물리치던 그날의 산골짜기로 돌아간 듯했다.
“인생은 연기처럼 부질없으니 스쳐지나 없어지는구나!”
조 집사의 귓가에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한쪽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반대편에서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칼로 술 단지를 두드리며 호응했다. 주위에 앉은 사내들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고, 모닥불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는 바닥에 일렁였다.
모두 사라졌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
조 집사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집사 어른, 지금 우시는 겁니까?”
시종 하나가 놀라서 눈을 끔뻑이면서 물었다.
“그래, 운다.”
조 집사는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이면서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랬느냐. 정평 그 자식, 이독치독을 한 거야. 아씨를 낫게 했어. 봐, 나도 울고 있잖아. 울면 된 거야, 우는 게 정상이지.”
어떻게 울음이 나지 않을 수 있나, 어떻게 속상하지 않을 수가 있나. 제아무리 똑똑하고 세상 이치를 잘 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정이란 것을 어찌할 수 있나.
시종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이독치독을 했다는 거야? 아씨께서도 울지 않으시는데, 집사 어른이 왜 우는 거지?
조용한 격부 소리와 노랫소리는 몇 번이고 반복되며 저택 안을 맴돌았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서사근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아낙이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를 마중 나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아낙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큰형님은 아직도 그 상태입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아낙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서사근은 아낙의 품에 안긴 갓난아이를 쳐다보았다.
“일곱째 동서가 몸져누워서 아이를 대신 봐 주고 있어요.”
젊은 아낙이 말했다.
“그쪽 친정에서 사람이 왔습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아낙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동서를 간호하고 있어요.”
아낙이 조용히 대답했다.
병간호를 하는 건지, 개가하라고 닦달하는 건지는 모를 일이지. 하긴, 친정에서 그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야.
서사근이 밖을 내다보았다.
“도련님이 결정하세요. 원래대로라면 일곱째 동서가 삼년상을 치러야 하는데.”
아낙의 말을 듣던 서사근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들 형제 사이에서는 서사근이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 늘 서무수가 의견을 내고, 범강림 형님이 그에 동조하며 형제들을 이끌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저 형님들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고, 좋은 일이 생기면 다 같이 기뻐하고. 그런데 지금은…….
“삼년상은 무슨. 아직 어린 처자인데 굳이 고생시킬 필요 있습니까.”
서사근이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혼수도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예물도 모두 챙겨 가서 나중 살림에 보태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고생을 덜 하죠. 분명 봉추도 그러기를 바랄 겁니다.”
서사근이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서사근의 말을 듣고 있던 젊은 아낙은 입을 꾹 다문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면서 아낙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해맑은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낙은 더욱 감정이 북받쳤다.
“그럼 이 아이는, 형수님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봉추는 씨를 남겼네요.”
다른 형제들은…….
서사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탕약 냄새와 살이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깨어 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건지 모를 범강림이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었다.
“큰형님, 이젠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합니다! 이게 어딜 봐서 형님의 모양새입니까.”
의자에 앉은 서사근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범강림은 서사근의 말을 들으면서도 미동 없이 누워만 있었다.
“언제까지 누워있기만 할 거요? 인제 그만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서사근이 울먹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거야. 난 아우들과 함께 죽었어야만 해.”
범강림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서사근이 침상 옆에 놓인 탕약 그릇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그릇이 깨지는 쨍그랑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형님, 그 말인즉슨 나도 나가 죽으라는 소리요? 우리 일곱 명이 한날한시에 태어난 건 아니지만,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랐으니,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도 죽어야 한단 말이오?”
“넷째야,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범강림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럼 형님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러고 계시오? 지금 형님이 이러고 계시는 모습, 다른 형제들은 볼 수도 없잖습니까. 그래서 형제들 대신 나랑 형수, 세상 사람들, 그리고 누이한테 보여 주려고 이러는 겁니까?"
서사근이 소리쳤다. 범강림은 ‘누이’라는 말에 몸을 움찔거렸지만, 벽 쪽으로 몸을 더욱 파고들었다.
“넷째 도련님, 강주부에 있는 시누이가 사람을 보내 왔어요.”
마당에 있던 아낙이 서사근을 향해 외쳤다. 그 외침을 듣자마자, 서사근은 범강림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범강림도 몸을 일으켜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련님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아씨를 대신하여 장례 물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범강림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 사람들이 마당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 물품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 한쪽이 욱신거렸다. 그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웠다.
내가 무슨 낯짝으로, 무슨 낯짝으로 누이를.
바깥의 대화 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서사근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서사근은 의자에 앉아 정교랑이 보내온 장례 물품 목록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범강림은 침상에 돌아누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사근이 목록을 전부 읊고는 범강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누이가 서신 한 통을 더 보내왔어요. 거기에 딱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난 내가 할 대답을 알고 있지만, 형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범강림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후회합니까?”
서사근이 불쑥 물었다. 범강림의 몸이 움찔했다.
“누이가 쓴 서신에는 그 다섯 글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후회하나요?’”
서사근이 다시 반복해서 물었다.
후회하냐고?
우린 탈영병이오.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는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행운이지. 억울함을 풀고 누명을 벗어 이젠 그냥 병사가 됐소. 병사라면 돌아가야겠지.
아니요. 원랜 안 돌아갈 수도 있었어요. 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큰 선물을 세 개 준비했어요. 이게 첫 번째 선물이에요.
오라버니들한테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어요. 오라버니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오라버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하는 데 습관이 됐어요. 무기를 손에 들고 언제든 싸울 태세를 취하는 게 습관이 됐죠. 춤과 노래가 있는 곳에 누워 있어도, 공격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는 데 습관이 됐어요.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고, 용은 깊은 못에 있어야 영물인 법이죠. 오라버니들의 활은, 전장에 있어야 해요. 전장에서 적의 가슴을 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활이 되죠. 그래서 오라버니들은 값비싼 활을 사러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 활을 여기 걸어 두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오라버니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내 아우들아. 공을 세우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는데, 너희는 후회하느냐? 난, 후회해야 할까?
결과가 이리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우들은 재물을 끌어안고 평생 부자로 살기만을 원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전장에서 보낼 게 아니라, 경성에서 좋은 걸 먹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길 원했을까? 이 모든 게 다 꿈이길 바랐을까?
그때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할까?
“범강림! 후회하냐고!”
서사근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후회하지 않아!”
범강림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난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형제들 중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굶어 죽을지언정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야. 우리의 활이 천금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곳은 오직 전장뿐이고. 그 화살이 적군의 가슴을 뚫든, 우리의 가슴을 뚫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곳은 오직 전장뿐이거든.
서사근과 범강림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어서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공을 세우고 이 치욕을 깨끗이 씻어 내서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란 말입니다.”
서사근이 이를 악물고 한 마디씩 힘을 주어 말했다.
“부인, 부인!”
범강림이 바깥을 향해 외쳤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아낙이 아이를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보.”
아낙이 울먹이면서 범강림을 불렀다.
“가서 왕 의원을 불러오시오.”
젊은 아낙은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지었다. 아낙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눈물을 훔치면서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넷째야, 일단 돌아가거라. 여기에는 내가 있으니,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관청에 못 나간 지 꽤 됐을 텐데, 어서 가 봐.”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공로와 포상은 이미 위에 보고했으니, 조만간 명이 내려올 겁니다. 이번에는 분명 아주 큰 공을 인정받을 거요.”
“그래. 그때 다시 하늘에 있는 형제들을 기리자.”
범강림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일곱째 제수씨는 수절하게 두지 맙시다.”
서사근이 좀 전에 형수에게 말했던 내용을 범강림에게 알렸다.
“그래, 네 의견에 따르마.”
범강림이 말했다.
“형님.”
서사근이 범강림을 쳐다보면서 그를 불렀다. 범강림은 서사근을 쳐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서사근은 형님이라고 부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뭔데 그래?”
범강림이 물었다. 서사근은 눈물을 머금은 채로 미소를 지었다.
“형님이 돌아와서, 참 좋습니다.”
“됐고, 누이에게 답신이나 보내. 난 글을 쓸 줄 모르니까.”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쓸 필요 없고, 셋째가 죽기 직전에 누이한테 남긴 말이 있어.”
범강림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누이에게 말을 남겼다고?
서사근은 놀라는 한편 마음이 쓰렸다.
셋째 형님…….
아니 글쎄, 유 매파, 연지분 칠한 여인들 좀 그만 보내시오. 우리 셋째 형님은 그런 여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셋째 도련님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데요? 내가 꼭 찾아올 테니까, 말만 해요.
어디에서도 못 찾을 거요. 우리 누이 같은 여인은.
봉추, 그 입 다물어.
서사근은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을 질끈 감았다.
“형님, 말씀하십시오. 지금 바로 답신을 쓰겠습니다.”
서사근이 말했다.
5월 말, 강주부 성문 앞은 서신을 전달하는 서북의 병졸 때문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또 왔네, 또 왔어. 이번에도 서북에서 온 병졸 같은데?”
“정씨 저택은 여기서 쭉 가다가 강가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으면 되오.”
성문의 위병은 말을 탄 병졸이 길을 묻기도 전에 큰 소리로 알려 주었다. 병졸이 위병의 말을 듣고는 말을 멈추지도 않은 채 곧장 위병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렸다.
“큰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다.”
서신을 쥔 조 집사가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은 몹시 기뻐하면서 서신을 들고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뒷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소매를 동여맨 정교랑이 짚으로 만든 과녁을 삼십 보 밖에 두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는 진동 소리와 함께,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박혔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두 몸종이 환호했다.
“아씨, 정말 대단하세요.”
반근의 목소리를 들은 정교랑이 활을 몸종에게 건네고 반근에게서 서신을 받아 서신을 펼쳤다. 종이 뒷면에 비치는 글씨가 한 줄밖에 되지 않아 반근은 몹시 의아했다.
그렇게 멀리서 급하게 보낸 말이 고작 한 마디라고?
무슨 말일까? 딱 한 마디일 뿐인데, 아씨께서는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 계시네.
한여름의 뒷마당은 바람도 멈춘 듯 고요했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그림자가 정교랑의 얼굴에 얼룩을 그려냈다.
정교랑이 촤락 소리를 내며 서신을 접어 반근에게 건네고는 다시 뒤돌아 손을 내밀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반근은 정교랑이 어린 몸종에게서 활을 다시 가져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좀 전에 쥐었던 활을 다시 쥐나 싶더니 이내 손을 놓았다.
“가서 조 집사에게 일석궁을 가져오라고 해.”
정교랑이 말했다.
일석궁을 달라는 어린 몸종의 말에 조 집사는 깜짝 놀랐다.
“일석궁? 아씨께서 그걸 당길 수 있다고 하시더냐?”
조 집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재빨리 고방에서 일석궁 하나를 들고 직접 뒷마당으로 향했다. 정교랑은 조 집사에게서 활을 받아 자세를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아씨가 저걸 당길 수 있으려나?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교랑의 가녀린 팔뚝과 손목을 쳐다보았다.
이쪽에 힘을 주고 잘 잡아야 해. 자, 이제 활시위를 당겨 봐.
정교랑은 자신이 쥐고 있는 활을 누군가가 같이 잡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교랑이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현이 부들부들 떨리며 곡선을 이루었다. 깃털 달린 화살은 당겨진 활시위 사이에 흔들림 없이 올려져 있었다. 진동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화살이 과녁을 맞혔다. 비록 빨갛게 칠해진 정중앙을 맞히지는 못했지만, 과녁 밖으로 빗나가지도 않았다.
활에 대해 잘 모르는 몸종들은 좀 전의 명중보다 못한 것이라 여겨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 집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천히 하면 돼. 누이가 벌써 오두, 육두짜리 활을 들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해.
봐요, 오라버니. 이제 난 오두, 육두짜리 활이 아니라, 일석궁도 당길 수 있어요.
활을 내린 정교랑은 과녁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같은 시각 서북.
활시위를 당기려던 범강림이 활을 내리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관졸과 병졸들을 쳐다보았다.
“포상입니까.”
범강림이 물었다.
4월의 큰 전투가 일으킨 먼지가 가라앉고,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을 뒤로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상병들의 몸은 차차 나아지고 있었고, 전사자의 가족에게는 위로금이 전달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떨어질 공로와 포상을 기대하고 있었고, 무관들은 진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여름의 서북은 몹시 활기찼다. 범강림은 이제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있거나 누워서 보내야 했다. 의원은 그에게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전처럼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서사근은 무척 마음이 아팠지만, 정작 범강림 본인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꼭 전장에 나가야 적군을 죽일 수 있나.”
범강림이 서사근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형제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나는 우리 넷째랑 말을 돌보면 되지. 아우가 만든 말편자 덕분에 우리 용사들이 말을 타고 오랑캐들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게 아니겠냐. 그것도 적군을 죽이는 것과 매한가지지.”
가히 대전(大戰)이라고 칭할 만한 전투였다. 게다가 그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서북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공로와 포상이 조정에서 빠르게 하달됐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범강림의 아내는 병졸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병졸들은 손에 쥔 명단을 보며 서무수 등 다섯 형제의 이름을 읊었다.
오랜만에 형제들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범강림은 형제들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져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아우들이 금방이라도 대문을 벌컥 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네, 맞아요.”
젊은 아낙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물건은 다 여기에 두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병졸들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이런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들었던 동정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은 이미 마모되어 없어진 터였다.
젊은 아낙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병졸들이 돈과 비단을 마당 안으로 옮기는 것을 아이를 안은 채 지켜보았다.
“인당 돈 여섯 관, 비단 여덟 필이오.”
병졸은 위로금을 읊으면서 누구 덕분에 위로금을 이렇게 빨리 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덧붙였다.
“조정을 비롯하여 강 총관 어른께서 위로금을 한 푼도 빠짐없이 빠르게 전달하라고 하셨소.”
하긴, 예전에는 전사자가 발생하더라도, 위로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
전투가 끝났다고 해도, 병졸은 대부분 시신을 찾기가 어려워 평생 가족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가족들도 전사자 위로금을 구경조차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그 위로금은 관청 서리부터 말단 관졸까지 한 다리씩 걸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과거에는 장수가 부하의 사망을 꾸며내 위로금을 빼돌리는 사건들도 잦았다.
젊은 아낙이 아이를 안은 채 위로금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갓난아이에게 말했다.
“아가, 이건 네 아버지께서 너한테 남기신 거야. 잘 봐 두렴.”
아직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말갛게 웃는 얼굴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옹알이를 했다. 아이의 옹알이를 듣자 범강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 확인했어요.”
젊은 아낙이 말했다.
병졸은 겉치레로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덧붙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잠깐.”
범강림이 외쳤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용건이 남았소?”
맨 앞에 서 있던 병졸이 물었다. 그는 회랑 아래 앉아 있던 젊은 부상병을 보고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참. 더 있지, 더 있어.”
병졸의 반응을 본 범강림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부상병에게 하달되는 돈도 있소.”
병졸이 다른 주머니에서 돈 꾸러미를 꺼내며 말했다.
“그게 다요?”
범강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다냐니?”
병졸이 의아해하면서 반문했다. 범강림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아낙이 서둘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축했다.
“내 아우들은 모두 임관보를 지키고 싸운 용사들이란 말이오!”
범강림이 눈을 부릅뜨고 위로금과 비단들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그런데 고작 이것뿐이란 말이오?”
병졸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고작 치고는 꽤 많지 않나?”
병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위로금은 돈 다섯 관에, 비단 다섯 필에 불과하오. 방 시금 대인께서 조정 관리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곡히 청을 올린 덕에, 임관보를 지켰던 병사들에게는 위로금이 더 내려온 거요. 심지어 시금 대인께서는 자신의 진급을 미뤄도 좋으니…….”
“그놈이 무릎을 꿇어? 진급까지 한다고?”
범강림이 병졸의 말을 끊고 외쳤다. 갑자기 험상궂은 태도로 돌변한 범강림을 본 병졸은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짓이오? 방 시금 대인께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참전하여, 용맹하게 적군을 물리치셨소. 그러니 당연히 진급해야 마땅하거늘.”
“용맹해? 죽음을 각오해?”
범강림이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병졸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졸은 재빨리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범강림이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아낙만으로는 병졸을 향해 달려드는 범강림을 부축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마당에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곧이어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놈이 용맹하다고? 죽음을 각오했다고? 그놈이!”
끊임없이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내의 쉰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관청의 뒤쪽 저택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큰 전투가 끝난 뒤, 진급과 포상이 결정된 때였다. 장수들이 가장 득의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쫙 펴고 다닐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연회석에 앉은 사람 중 웃음소리가 제일 큰 이는 단연 방중화(方仲和)였다.
정구품 시금이었던 방 시금은 이번 전투 덕분에 단번에 네 단계를 뛰어넘어 진급했다. 그는 용곡성의 요충지 중 하나인 함고채(函古寨)의 지채(知寨)직을 맡게 되었다.
방중화의 진급은 벼락출세나 다름없었다. 이번 진급은 관직 품계뿐만 아니라, 그의 실적에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진급이었다. 방중화의 나이에 지채 자리를 경험했다면 훗날 도감직을 얻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도감, 도감이라니.
방중화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자. 술 마십시다, 술.”
방중화는 격양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술잔을 세게 부딪히며 건배했다.
“시금 어른, 시금 어른.”
누군가가 방중화의 뒤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방중화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옆 사람과 술잔을 기울였다.
“시금 어른.”
뒤에 있던 사람이 다시 한번 방중화를 시금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눈치도 더럽게 없는 놈이!
방중화가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말단 관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가 좀 뵙고 싶다고 합니다.”
“꺼지라고 해라.”
방중화가 성가시다는 듯 대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말단 관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강 총관의 뜻은 대인이 경성으로 가서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중화와 술잔을 부딪치던 사람이 말했다.
강 총관은 강문원(姜文元) 병마부총관을 뜻했다. 경략사 직책이 아직 공석 상태이기도 하고, 관직 앞에 ‘부(副)’ 자를 붙여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자연스럽게 ‘부’ 자를 뺀 강 총관이라 칭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빼고.
“아이고, 그건 강 총관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방중화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 방중화의 뒤에서 또다시 그를 부르는 말단 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겠느냐!”
방중화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단 관리가 멈칫하더니, 이내 호칭을 바꿔서 불렀다.
“대인.”
방중화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보따리 싸서 내보내야겠네.
“말해. 또 뭔데?”
“만약 대인께서 그 두 사람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접 대인을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관졸이 조용히 말했다.
방중화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데 그래?”
“범강림과 서사근입니다.”
방중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를 찾아올 배짱도 없었을 텐데, 역시 범강림은 다르군.
술잔을 쥔 방중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혼란을 틈타 방중화와 함께 도망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함구했다.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임관보에 남아 오랑캐들과 끝까지 싸우던 병사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전장에서 전멸한 터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체 더미 속에서 겨우 숨이 붙어 있던 범강림을 찾아내어 그의 목숨을 건져냈다. 방중화는 범강림이 사실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에 얼굴을 보기는 좀 거북했다.
직첩(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이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만에 하나 무슨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방중화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방중화가 주위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말하고는 연회 자리를 벗어났다.
방중화가 뒤쪽 저택의 편청을 향해 걸어오자, 서사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범강림도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채 대인.”
서사근이 먼저 예를 올렸다. 몹시 만족스러운 호칭을 들은 덕에 방중화는 오는 내내 쌓였던 분노가 사르르 녹았다. 방중화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렇게 부르지 말게. 아직 직첩도 못 받았네.”
“대인의 공로는 확실하잖습니까. 그렇게 불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범강림이 냉소를 지으면서 ‘공로’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방중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방중화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대인, 제 형제들이 전사했는데, 위로금 따위로 끝나다니요. 제 형제들이 용맹하게 싸웠고, 죽음을 각오하여 참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살아 계신 대인께서도 공로를 인정받아 진급하시는데, 그렇다면 제 형제들도 추서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위로금이 적어서 온 거였어?
“위로금에 관해서는 이미 보고를 올렸네. 사상자들에게 주는 위로금은 늘 부족했어. 나는 최선을 다했네. 자네 형제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할 수 있도록.”
방중화가 말했다.
“저희는 위로금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제 아우들을 추서하여 이름을 남기게 해 주십시오. 제 아우들은 위로금이 필요한 병사가 아니라, 용맹하고 의로운 용사였습니다.”
범강림이 큰 소리로 말하면서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중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한 적 없네.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의로운 용사들이니, 위로금을 더 챙겨 준 거 아닌가.”
“어이, 방씨! 시치미 떼지 마시오!”
범강림이 갑자기 호통을 치면서 방중화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당신이 세웠다는 그 공로, 어떻게 세운 건지 똑바로 말해 보시오! 공로를 세운 자가 당신이 아니라 내 아우들이었다는 것을 조정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그깟 위로금 몇 푼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고!”
방중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문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범강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방중화가 조용히 호통쳤다.
“무슨 말인지는 네놈이 제일 잘 알겠지! 적군과 맞서 싸워 시간을 끌자고 했던 건 내 셋째 아우였고, 마지막까지 성보를 지키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게 우리야. 그런데 너는? 네놈은 중간에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갔잖아! 내 아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어찌 네놈이 공을 가로챌 수 있느냔 말이다!”
흥분한 범강림은 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급기야 그는 격렬한 기침을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방중화, 보고할 건지 말 건지, 똑바로 말하시오.”
서사근이 끼어들었다.
“하긴 뭘 해. 그때 일은 한 달 반 전에 보고를 올렸으니, 이미 끝난 일이야. 보고는 무슨 보고!”
방중화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됐네. 내가 포상으로 받은 돈과 비단을 전부 줄 테니, 그만 가게나.”
방중화가 선심을 쓰듯 회유했지만, 범강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누가 네놈한테 돈을 달래? 돈 필요 없어. 내 아우들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그놈들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 난 뭐가 되라고?
방중화가 냉소를 지었다.
죽은 사람한테 공로는 무슨. 돈이나 더 달라는 소리겠지.
“그래서, 얼마를 더 주면 되는데?”
방중화가 물었다.
“방 대인,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사실대로 보고를 올리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 사실대로 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요. 방 대인, 대인이 얻은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대인이 그 공로를 얻는 게 응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도 않을 거고요. 단지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공로가 조정에 보고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끝까지 성보에 남아 싸웠던 감용 병사들까지 전부 포함해서 보고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추서가 있어야 합니다.”
서사근이 침착하게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 병사들의 이야기를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고, 그들에게 추서하라고? 조정 관리들이 바보인 줄 알아? 그렇게 하면 내 앞길은 영영 끊기게 돼!
방중화는 속으로 분노했다.
내 앞길을 끊는 것은 내 부모를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미쳤다고 보고를 해?
고작 네놈 하나가 뭘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어.
네가 무슨 수를 써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기회를 줬는데도 제 발로 차 버렸으니, 날 탓하지 말라고.
방중화가 허리를 펴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용건이 남았나? 없다면 그만 돌아가게. 형제를 잃은 슬픔에 충격이 크긴 하겠지. 자네들이 본관에게 실례한 건 눈감아줄 테니, 돌아가서 몸조리나 잘하시게. 괜한 짓거리는 관두고.”
범강림과 서무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방중화를 쳐다보았다.
“이봐, 방씨. 진짜 보고하지 않으려는 거야?”
범강림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호통쳤다.
“보고는 이미 다 했다니까. 더 보고하고 말 것도 없어.”
방중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범강림이 방중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리 양심을 저버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던 범강림은 격렬한 기침 때문에 욕을 다 끝내지 못했다. 서사근은 재빨리 범강림을 부축하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서사근이 방중화를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 대인,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대인을 따르던 병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다니요.”
“서 관구, 난 할 만큼 했네. 형제들이 서운함을 느낀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방중화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사근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방중화가 소매를 홱 털면서 바깥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손님 배웅하거라.”
멀리 서 있던 수하들과 하급 관리가 우르르 편청 안으로 들어와 서사근과 범강림을 밀치며 밖으로 내쫓았다. 수하들이 거칠게 밀어대는 바람에 범강림은 그만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수하들과 관졸들은 아예 서사근과 범강림을 밖으로 질질 끌면서 데리고 나갔다.
“염병할 방씨 놈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범강림이 방중화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나 참, 후회할 게 뭐 있다고. 그때 일찍 도망치지 않았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죽는 것이야말로 후회할 일이지.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그대로 보고된다면, 벼락출세는커녕 진작 하옥됐을 거라고. 그런 걸 두고 후회할 일이라고 하는 거야!
방중화는 소매를 홱 털고서 아예 몸을 돌려 문을 등지고 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범강림의 외침이 차츰 멀어져 갔다.
성큼성큼 관청 안으로 들어서는 주육낭의 귀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조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검(巡檢) 대인, 그건 다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중화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육낭은 걸음을 멈췄다.
“죄다 범강림 그자가 지어낸 말들입니다. 위로금이 적다고 불만을 품었다지요. 처음에 저를 찾아와서는 더 많은 돈과 비단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돈이나 비단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에게 제가 가진 것을 다 내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위로금은 조정에서 정한 원칙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자에게 돈을 내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그자가 자네가 공로를 가로챘다는 유언비어를 주위에 퍼뜨리고 다닌다?”
관청 안의 대화 소리가 창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문 앞에 있던 하급 관리가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하급 관리를 향해 손짓하자, 하급 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급 관리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전해져 왔다.
“들라 하라.”
주육낭이 들어오자, 방중화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이 일은 내가 엄중히 다스리겠네. 대전을 치른 후라 병사들의 마음이 어수선할 테니, 부하들을 잘 보살피게나.”
조 순검이 말했다. 방중화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주육낭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고는 관청을 나갔다.
“무슨 일로 왔는가?”
조성이 주육낭을 보며 물었다. 이번 대전에서 주육낭이 의견을 낸 뒤로, 조성은 자신보다 어려도 한참 어린 후임인 그를 좀 더 친절하게 대했다.
“임관보에 관한 일입니다.”
주육낭이 말했다.
이틀 전, 범강림이라는 자가 관청 앞에서 통곡하며 방중화가 자기 형제들의 공로를 가로채 진급하는 거라고 욕을 해대다가 관졸들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도리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더욱 자주 오르내렸다.
방중화라는 자는 당초 임관보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몇 사람이 간신히 그를 설득해서 딱 한 시진만 시간을 끌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반 시진이 채 되기도 전에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쳤다고 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병사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앞다투어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성에 남은 스물 몇 명의 병사들만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 방중화가 자신이 성을 버리고 재빨리 도망친 죄를 숨기고, 끝까지 성보를 지키던 병사들의 공로를 가로채 진급하게 됐다. 그런데 조정이 그런 악질을 감싸고 진급까지 시켜주다니, 장차 큰 우환으로 남을 터였다.
용곡성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이었다. 게다가 워낙 자극적인 이야기이다 보니, 금세 용곡성 전역에 소문이 퍼져 어딜 가나 이야깃거리로 오르내렸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석연치 않았던 조 순검은 결국 방중화를 불러 직접 물어봤다.
“방중화의 말로는, 그 부상병이 위로금이 적다고 생각해서 악의적인 소문을 지어낸 것이라고 하던데.”
조성이 말했다.
방중화의 주장 또한 종종 있는 일이었다. 군에는 항상 그런 얄미운 병졸들이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 전장에 나가기는 꺼리고, 전장에 나갔다 오면 공로나 포상이 적다며 불평하는 자들. 그들은 장군이나 관리들이 일부러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모양새를 만들어 사람들을 선동했다.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소란을 피웠다.
“대인께서는 왜 범강림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않는 겁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그 부상병을 데려와서 물어보라고? 순검인 내가 직접 그 부상병을 만나 일의 경위를 묻는 것은, 단순히 그냥 묻는 정도가 아니라 관청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관청이 유언비어를 믿고 부상병을 심문하는 꼴이 되고, 방중화를 의심하는 거라고 볼 게 분명해.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아.
이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어찌 됐든 관리 집안의 자제니 그리 간단한 이치도 모를 리는 없을 터인데.
조성은 주육낭을 잠시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아는 자인가?”
조성이 물었다.
주육낭은 숨기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래서 세상만사는 자신과 관련이 없을 때만 온갖 도리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는 거지.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앞으로 나서게 될 수밖에 없어.
조성이 관청 안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왔다 갔다 했다.
“그럼, 자네 생각에는 그 부상병의 말이 사실이다?”
조성이 멈춰 서며 물었다.
“거짓말을 할 자가 아닙니다.”
그 뜻은, 방중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명확히 단정 지을 수가 있나?
보통은 머뭇거리면서 ‘저도 잘 모르겠으니, 부디 대인께서 옳은 결정을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나? 그다음 내가 잠시 고민하다 주육낭에게 이 일은 파고들지 않는 게 좋다고 다독이고, 후에 다시 내게 간청하면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주육낭의 체면을 봐줄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게 순서인데.
일반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주육낭의 부탁 방식에 조성은 당황하여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그 형제들은 절대 성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성을 지켰을 테지요.”
주육낭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양옆으로 떨어뜨렸던 그의 두 손은 언제부턴가 주먹이 꽉 쥐여 있었다.
“육낭.”
다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조성이 별안간 멈추어 서서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장에서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고, 칼과 화살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는 법이야.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지.”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러니 부디 대인께서 범강림을 심문하시기 바랍니다. 방 대인의 말이 맞는다면, 조사를 통해 방 대인의 누명을 씻을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조성은 말없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도 허리를 숙인 채 공수한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관청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사실 이번 일을 조사하게 된다면 내게 좋을 것이 없어. 나는 전투 직전에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지금처럼 숨길 걸 숨기고, 다들 기뻐하고 있을 때 얼버무리고 넘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말일 텐데.
조성은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주육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꽤 깊은 관계였나 보군. 지난번에 꼭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했던 것도, 아마 그자들을 위해서였겠지.
그럼 주 감찰이 내게 했던 그 말들은 사실 별게 아니었나? 하지만 그러기엔 진 상공까지 나서서 당부했다는데.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도박을 해 볼까?
“좋다. 그럼 그 부상병을 불러 한번 심문해 보지. 이렇게 계속 소문만 파다한 건 방 대인에게도 딱히 좋은 일이 아닐 테니.”
조성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더욱 숙여 예를 올렸다.
감사드립니다! 대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문을 열자마자 관청 병졸들이 서 있는 것을 본 범강림의 아내는 덜컥 겁부터 났다.
결국 관청 관리들의 성질을 긁은 건가? 남편은 이제 잡혀가는 건가?
“날 찾는 거요?”
마당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킨 범강림이 담담한 표정으로 묻고는 부인을 쳐다보았다.
“일단 당신은 짐을 챙겨서 넷째네로 가 있으시오.”
범강림이 일을 키우기로 결정했을 때, 두 형제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고난이 있으면 같이 겪기로 했잖소. 그런데 왜 이 일은 내가 나서면 안 되는 겁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형님들은 한 번도 관리를 무서워하며 피한 적이 없었소. 그때도 다들 날 위해 기꺼이 발 벗고 나섰는데, 왜 난 안 된다는 겁니까? 형제들이 그렇게 됐는데도 내 관직 때문에 나서지 못한다면, 이 관직을 얻어서 뭐에 쓰라고!”
서사근이 말했다.
“넷째야, 네 관직은 분명히 나중에 크게 쓰일 날이 올 거다. 나는 말단 병졸일 뿐이니, 내가 소란을 피워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가 쉬워. 큰 후환 같은 것 없이, 기껏해야 감옥에 갇히는 게 다일 거다. 하지만 네가 소란을 피운다면, 관직이 있는 자가 일부러 소란을 피우는 꼴이 돼. 관부의 윗분들께서 절대로 용납할 리 없지. 그러니 내가 먼저 길을 터 보마. 너는 뒤에서 나를 잘 챙겨 줘. 우리의 목표는 이 일을 크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남은 사람이라고는 너와 나 단 둘뿐이야. 집사람은 괜찮아. 서방이 죽으면 개가하겠지. 하지만 우리한테는 봉추가 남기고 간 아이가 있지 않냐. 너와 나 모두에게 무슨 일이 생겨 버리면, 그건 원수에게만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어.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하자. 각자의 위치에서 천천히.”
범강림이 서사근을 다독이자, 서사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전에는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던 서무수 형님이 있었지.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굳이 어렵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힘만 쓰면 됐어. 서무수 형님이 없는 지금은 큰 형님이 그 역할을 해 주시네.
“네. 알겠습니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어요. 우리 천천히 합시다.”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범강림의 회상을 끊었다. 엄숙한 표정의 병졸들은 범강림에게 자신들을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여보.”
부인이 범강림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오?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소.”
범강림이 말했다.
어차피 관청 관리들은 나를 무뢰한으로 볼 거야. 그렇다면 끝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 수밖에.
“순검 조 대인께서 심문을 위해 데려오라 하셨소.”
병졸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순검 대인!
정신이 퍼뜩 든 범강림이 환하게 웃었다.
소식을 들은 서사근은 한달음에 달려와 범강림과 함께 순검청으로 향했다.
“순검 대인께서 이 일을 조사하신다니, 드디어…….”
범강림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순검 대인께서 조사하신다니.”
서사근도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비록 관직에 오른 지 얼마 안 됐고, 겨우 목감 관리이긴 하지만, 관청에 존재하는 원리원칙들을 어렴풋이나마 깨우친 터였다.
순검 대인이 사람을 불러서 심문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서사근은 얼추 알고 있었다.
예상 밖의 일이야!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심문을 받다니!
형제들이 하늘에서 우릴 위해 기도한 것이 틀림없어.
서사근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범강림을 부축하며 층계를 올라 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관청 안으로 들어설 때, 주육낭은 측문으로 관청을 나왔다. 주육낭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관청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건 누이가 주라던 동상 치료용 연고입니다.
이건 누이가 주라던 단오절 향낭입니다. 이건 벌레 퇴치용 향이고…….
주육낭은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이가 나한테 주는 것은 무슨. 그 여인은 날 한 번도 오라비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걸? 동생으로 본다면 모를까.
서무수, 서무수. 한 번도 그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도 잘 안 나네.
주육낭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엎드린 채 이야기를 끝낸 범강림을 보며, 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부디 저희 형제를 위해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소인이 이러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형제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하늘에 있는 제 형제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범강림이 울먹이며 말했다. 서사근이 범강림과 함께 예를 올렸다.
“알겠네.”
조성이 말하면서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범강림과 서사근은 조성을 향해 수차례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 관청에서 물러났다.
“대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하가 조성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보면 모르겠나?”
조성은 서사근의 부축에 의지하여 관청을 떠나는 범강림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런 비통함은 고작 돈 따위를 위해서 쥐어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저렇게 뼛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비통함은, 돈으로 살 수 없지.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찌하실 겁니까? 대인, 이 일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사실 조정에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보고서를 하나 더 올리면 그만인 일이다. 문서를 다루는 벼슬아치에게 시키면 금방 끝날 테니 사소하기도 하고 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안이 정말 조정으로 올라갈 경우, 방중화가 남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죄목으로 벌을 받는 건 둘째 치고, 조정에서는 왜 공로에 착오가 생겼는지 문책할 게 뻔했다. 이 죄목 하나에 연루되는 서북 일대의 관리들이 한둘이 아닐 테고, 전투 직전 조성이 내린 잘못된 판단까지 다시금 문제가 될 터였다.
그리된다면, 전투에서 이기고 공로를 세워 한껏 들뜬 서북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혀 침체되겠지.
조 순검은 어두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청자 찻잔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산산조각이 난 찻잔 사이로 튄 찻물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내 결백을 위해서라고? 내가 아둔패기인 줄 알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방중화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정말 내 결백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면, 그놈을 당장 때려잡아 감옥에 처넣었어야지! 그놈을 군법으로 다스렸어야 한다고!”
화를 참지 못한 방중화는 탁자를 아예 엎어 버리고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수하 몇 명이 서둘러 방중화에게 다가가 그를 진정시켰다.
“조성 그놈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게야. 놈은 애초부터 내가 자기 자리를 꿰찰까 봐 날 경계하고 싫어했지. 이번 기회를 빌미로 나를 밟아 버릴 작정이 분명해.”
방중화가 수하들을 밀쳐내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대인, 대인, 듣기로는 섬주 주씨 가문의 주육낭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합니다.”
수하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방중화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 아, 그 자식? 맞아, 맞아, 틀림없어. 그날 그 자식이 조 순검을 만나러 갔었지.”
방중화가 방 안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자식, 나한테 무슨 원수라도 졌나?”
“대인께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병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이유 없이 생긴 원한이나 친분은 없는 법.
방중화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조 순검 말로는, 그때 지원군을 보냈던 것도 그 주씨 놈의 생각이라고 했어. 난 또 웬일로 날 위해 지원군을 보냈나 했더니, 내가 아니라 그 뒈진 놈들을 위해 그랬던 거였군.”
“대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순검 어른께서 이 일을 들춰낸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수하의 말에 다른 수하도 눈치껏 귀띔했다.
“순검 대인을 한번 뵈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수하들의 말에 방중화는 냉소를 보이면서 다시 이리저리 서성였다.
“지금 내가 순검을 만나서 뭐 해? 제 발 저리는 걸 티 낼 필요가 있어?”
방중화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누구는 줄 댈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대인, 대인, 강 총관께서 부르십니다.”
누군가가 관청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강 총관?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조성이 흠칫 놀랐다.
서북 경략사 자리는 아직 공석이었다. 칙명으로 부임한 감찰사 주봉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병마부총관인 강문원이 서북의 최고 권력자였다.
강 총관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에, 조성은 머뭇거릴 새도 없이 곧장 달려갔다.
강 총관이 있는 관청에 도착하니, 이미 그의 곁에는 방중화가 서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조성은 방중화가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를 단번에 눈치챘다. 조성은 곧 방중화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의 수하가 단계를 뛰어넘어 더 윗사람에게 상고하는 일은 어떤 상관이라도 기분이 상할 일이었다.
방중화, 저놈이 퍽이나 떳떳하겠다!
강 총관은 조성에게 형식적으로 군무를 물은 뒤, 곧바로 방중화와 관련된 유언비어로 화제를 돌렸다.
“큰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서북에 아직 처리되지 않은 일도 많이 있으니, 조 순검은 그런 사소하고 별 쓸데도 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소.”
강 총관이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조성은 강 총관에 말에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성은 곁눈질로 방중화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았다.
“하지만 대인, 범강림의 이야기를 조사하지 않고 덮어 버리면, 세간의 의심이 커질까 염려됩니다.”
조성이 고개를 들어 한 마디 덧붙였다.
저놈,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강 총관께서 이렇게 알아듣게 말씀하셨는데, 감히 거기다 토를 달아?
얼굴색이 파랗게 질린 방중화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따졌다.
“순검 대인,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불손한 말투였다.
어차피 나는 지채가 될 몸이니, 저깟 순검 밑에서 눈치나 보고 살지 않을 테다. 강 총관이라는 뒷배가 있는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이건 다 방 대인 자네의 결백을 위함이네.”
조 순검이 말했다.
“제 결백을 위해서라고요? 제 결백은 벌써…….”
눈을 부릅뜬 방중화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됐소. 방 대인의 결백함은 따로 검증할 필요가 없소. 본래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자들이야.”
강문원이 방중원의 말을 끊고 몸을 일으켰다. 조성과 방중화가 놀란 얼굴로 동시에 강문원을 쳐다보았다.
설마 강 총관께서도 그 사람들을 아시는 건가? 그깟 병졸 몇 명이 그리 유명하단 말이야?
“전에 상관을 죽이고 탈영했던 자들이오. 이번에 서북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공을 세워 그 죄를 씻기 위해서였지.”
강문원이 말하고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경성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기어이 서북까지 와서 풍랑을 일으키는구나. 공로와 포상을 원해? 정말 황당하군. 제정신인가?
이번에 그들 형제가 한꺼번에 몇 명씩 죽어 나갔다던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하루빨리 죽는 게 나아.
겨우 둘밖에 안 남았는데도, 이리 소란을 피우려 들다니. 지난번에 내 진급을 망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한 직책까지 흔들 셈인가!
“그런 병졸 따위의 말에 휘둘리지 마시오. 좋은 말로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니, 원칙대로 하시오. 사람들의 의심을 살 만한 유언비어를 통제하지 못한 건 그대들의 탓이니.”
강문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조성과 방중화는 재빨리 송구하다고 예를 표하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자코 소식을 기다리던 범강림과 서사근이 다시 조 순검을 찾아오자, 조 순검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대인, 대인,”
범강림이 지팡이를 짚은 채 안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서사근이 그를 붙잡았다.
“형님, 그만합시다.”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높이 있는 관청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연한 웃음을 보이면서 자포자기하듯 읊조렸다.
“다 소용없습니다.”
범강림이 이를 악물고 관청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쓸모없어졌어.”
쓸모없어. 우리는 작디작은 개미보다 못한 존재일 뿐이야. 대단하신 관청 대인들 눈에는 더욱 그렇겠지.
“우리가 쓸모없는 게 아니라, 저들이 쓸모없는 겁니다!”
서사근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범강림을 부축했다.
“형님, 갑시다.”
서사근과 범강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청을 떠났다.
“육낭, 뭐 하는 게야!”
사내가 주육낭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주육낭은 소처럼 관청을 향해 돌진했다.
“저 자식이!”
사내가 다시 한번 팔을 뻗어 주육낭을 잡아 세웠다.
어느새 관청 앞에 다다른 주육낭과 주씨 가문 사람들 귀에 관청 안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주육낭은 관청 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자들이 살아있었다면, 확실히 조사할 만도 했겠지. 하지만 그자들은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조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더냐!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지 말거라!”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주육낭은 관청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사람, 있습니다. 저도 그럴 거고, 그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그 사람? 누구를 말하는 거지?
사내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주육낭은 그의 손을 내치고 성큼성큼 관청 안으로 걸어갔다.
관청 안의 웃음소리가 잠시 멈췄다.
관청 안에서는 열댓 명의 장수와 관리들이 둘러앉아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 전투 이후 공로를 인정받고 진급이 결정된 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관청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본 방중화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 일 때문에 온 왔느냐? 내가 결정한 일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강문원이 주육낭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대인, 정확히 조사하셨습니까?”
주육낭의 물음에 강문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혈기왕성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조사할 필요 없네.”
강문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나는 내 수하들이 용맹하게 적군에 맞서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믿네. 자네와 같이 아직 철없고 어린 친구들이나 그런 유언비어에 마음이 흔들리겠지.”
“총관 대인,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육낭이 실례했습니다.”
주씨 가문의 웃어른이 앞으로 나서면서 허리 숙여 사죄했다. 그가 주육낭을 노려보면서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주씨인 것을 잊지 말거라. 더 소란을 피웠다가는, 네놈을 경성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인,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받아야 할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것일 뿐이지, 누군가를 음해하려 게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포상금이 아니라 오직 공명(功名)뿐입니다.”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문원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읊조렸다.
“대인께 있어서는, 아주 쉬운 일이잖습니까.”
맞아. 쉬운 일이지.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사람은 누구나 편히 살고 싶어 하잖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뭐 있어?
강문원이 웃음을 지었다.
“군사 일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전투를 벌일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직 어려서 적응하는 게 힘든 모양인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다시 한번 주육낭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강문원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지만, 강문원은 그들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자, 일단 나갑시다. 진급해서 다른 부지로 발령 난 이들부터 배웅하고, 나머지 얘기는 돌아와서 다시 하지.”
강문원은 연회 자리에 앉아 있던 장수와 관리들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보이고는 먼저 앞장섰다.
주육낭의 등장으로 인해 무거워졌던 관청 안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강문원을 에워싸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리의 끝에서 강문원을 쫄래쫄래 따라가던 방중화는 일부러 주육낭 바로 옆에서 우쭐한 얼굴로 건들거리며 그를 지나쳐 갔다.
“강 대인,”
주육낭이 강문원을 불러세웠다. 주육낭은 주씨 가문 웃어른들의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관청 문 앞까지 다다랐던 강문원이 걸음을 멈추자, 그를 뒤따르던 사람들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강 대인, 후회하지 마십시오.”
주육낭이 비장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네. 어린애가 홧김에 내뱉는 가소로운 말이군.
실소를 터트린 강문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재빨리 강문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관청 밖으로 나갔다.
이때 방중화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그놈이랑 같은 말을 하고 있네?
방중화는 고개를 돌려 관청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한쪽은 빛이 많이 들어오고 한쪽은 들어오지 않아 소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건장하고 우람한 모습의 소년이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네놈이나 후회하지 말아라. 강 대인의 눈 밖에 난 이상, 네놈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어!
방중화가 입술을 삐쭉이면서 서둘러 사람들의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