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60)

-무슨 일-

영화 2년 4월.

용곡성 거리 위로 말 서너 마리가 달려오더니 어느 민가 앞에 멈춰 섰다.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민가에는 빨간색과 초록색의 화려한 장식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언뜻 보아도 혼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집처럼 보였다.

“넷째 형님,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오? 벌주 마셔요, 벌주!”

술 주전자를 높이 치켜든 서봉추가 술 냄새를 풍기며 외쳤다.

“큰형님, 제가 출타했던 터라 이 좋은 경사를 놓쳤습니다.”

서사근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중 나온 범강림은 금방이라도 큰절을 올릴 기세인 서사근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 관리의 몸이니 어쩔 수 없지.”

“맞아, 맞아. 넷째 형님은 관리시고, 우리는 일개 병사지.”

서봉추가 눈치 없이 외치자, 서무수가 그의 등짝을 한 대 후려쳤다.

“네 색시는 애를 업고 널 찾고 있는데, 넌 여기서 주정이나 부리고 있어? 관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불만 있으면 너도 말을 돌보러 가든가.”

“아유, 그럴 바에는 그냥 병졸이 훨씬 낫죠.”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벌쭉 웃었다. 그러고는 서무수의 말을 듣고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던 형제들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일곱 형제가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서봉추의 품에 안겨 있는 몇 달 된 아이까지 합하면 모두 여덟이었다. 아낙들이 부엌과 방을 오가면서 술과 음식을 내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

서사근이 눈앞의 형제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봉추 아우의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고, 큰형님도 장가를 드셨고.”

“그러게. 이제 너희 몇 명만 남았다. 어서 가정을 이뤄야지.”

범강림이 서사근의 말을 받아치면서 손가락으로 몇 사람을 지목했다.

“우리는 아직 세워야 할 공이 많습니다. 자, 넷째야, 이 술 한 번 맛보거라.”

서무수가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맞소, 맞아. 형님, 관주랑 이 술 중에 어느 게 더 맛있는지 말해 봐요.”

서봉추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이게 누이가 강주부에서 보내온 술이야?”

서사근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좋은 술이라고 감탄했다.

“감탄부터 해대지 말고, 누이가 뭐라고 했는지는 안 궁금해?”

형제 중 하나가 웃으면서 물었다.

“보나마나 뻔하지. 누이는 분명히 이 술이 별로라고 했을 거야. 마땅한 술이 없으니, 이걸로라도 흥을 돋우라고 보냈겠지.”

서사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방 안이 웃음바다가 되자, 문밖에 있던 아낙들이 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역시 형제들이 다 모이니까 즐거워 보이네.”

아낙 하나가 말했다.

“누이 얘기만 나오면 더 즐거워 보인다니까요.”

새댁으로 보이는 아낙이 대꾸했다.

앞서 말을 건넨 아낙이 새댁 같은 아낙의 손을 잡으며 반짝이는 금팔찌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소매를 살짝 걷어 자신의 손목에 걸린 금팔찌를 내보였다.

“언제쯤 일곱 개가 다 채워질까.”

“시누이가 어떤 사람인지 참 궁금해요. 답례로 뭘 보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남편 말로는 누이한테 부족한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신을 직접 만들어서 보냈는데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이에요.”

새댁이 창피해하며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바느질 솜씨 한번 구경해도 돼?”

아낙들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바느질 공예를 하나씩 꺼내 보면서 손재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옆방에서는 간간이 사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갑자기 거리에 울려 퍼진 다급한 딱따기 소리가 형제들의 즐거움을 깨트렸다.

“무슨 일 났나?”

형제들이 밖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이겠소. 서쪽 오랑캐 놈들이 또 이 몸한테 공 세울 기회를 바치러 온 거겠지.”

서봉추가 아들을 아내에게 건네고는 외쳤다.

“이번 공만 세우면, 우리도 다 명실상부한 장군이 될 수 있어!”

* * *

무슨 일이 난 거야?

하루 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따뜻한 집을 떠난 서무수 형제들은 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성보(城堡: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만든 소규모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무수는 성보 아래에 빽빽하게 서 있는 적군들을 쳐다보았다.

알록달록하고 이상한 글씨가 쓰인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변방의 병사들은 그 깃발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 깃발들은 서쪽 오랑캐 왕의 친숙부가 총괄하는 정예병 부대의 것이었다.

“저게 바로 그 늙다리의 부대구나.”

서봉추가 한쪽에서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피와 흙이 한데 섞여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도 드디어 견문을 좀 넓히겠네.”

서봉추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 드디어 견문을 좀 넓혀볼 기회가 생겼구나.

성보 군영에 있는 병사들은 오랑캐 정예병들과 맞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서무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빽빽하게 서 있는 적군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물밀 틈 없이 메워진 적군 진영은 그야말로 온천지를 뒤덮을 정도였다. 말과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제자리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 외에도 오랑캐 기마병들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면서 말을 타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오랑캐들이 내는 말굽 소리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폭우 소리와 같았다.

셀 수 없어도 세야 해!

서무수는 눈을 부릅뜨고 적군의 수를 헤아렸다.

“몇이야?”

범강림이 물었다.

“육천입니다.”

서무수의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썩을 놈의 새끼! 그 조가 놈, 우리한테 후방에서 포위 공격하라며, 오랑캐 놈들의 혼을 쏙 빼놓겠다더니. 에라이, 대체 누구의 혼을 빼놓겠단 거야? 대체 어디에서 들어온 정보야? 오랑캐의 주력군이 왜 여기 나타났느냔 말이야!”

장수 하나가 욕을 해대며 불안한 듯 이리저리 서성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야? 오랑캐의 주력이 왜 여기에 와 있냐고! 대체 왜!”

장수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인,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대인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서무수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말했다.

장수는 걸음을 멈추고 뒤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데려온 병사 수백을 제외하면, 성보 안에는 채 천 명도 안 되는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성보 안에 있는 잡역부들 이백 명까지 다 합쳐 봤자, 고작 이천이었다. 좀 전에 서무수가 말한 육천 명의 적군이 떠오르자 장수의 안색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 갔다.

“봉화에 불을 붙였느냐?”

장수의 물음에 수하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럼, 그럼 철수하자.”

장수가 말했다.

“하지만 대인, 지금 철수한다면 후방에 있는 부대가 준비할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겁니다.”

서무수 형제들이 지키고 있는 성보는 용곡성의 요충지였다. 만약 적군이 이곳을 뚫는다면, 용곡성 전체를 뚫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지금 철수할 경우, 잘못된 정보를 듣고 다른 방향을 향해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부대들로서는 발가벗은 등을 적에게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터였다.

물론 장수도 그런 끔찍한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지만, 여기에 남는다고 해도 끔찍한 결과를 마주할 게 뻔했다.

“그건 다 조성(趙成) 그자의 판단 착오로 빚어진 결과다.”

장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간다고 해도, 모든 잘못은 명령을 내린 조성에게 있었다.

서무수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그래도 저희가 여기 남아 좀 더 버텨야 합니다. 전령병도 돌아왔고 봉화도 올렸으니, 조 장군의 부대도 한 시진 정도라면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서무수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성보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을 두고 방어하며 싸우는 것이니, 절반의 승산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오랑캐들이라 공성전에는 매우 취약해.

이건 무모한 도전이자 엄청난 공을 세울 기회이기도 했다. 용곡성을 지켜낸 주 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장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주 대인께서도 이천 명 남짓한 병력으로 용곡성을 지켜내셨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우리가 수적 열세라고는 하나 딱 한 시진만 막아내면 돼. 오랑캐 놈들한테 똑똑히 알려주자고! 우리 진영은 절대로 뚫리지 않고, 우리가 지키는 성도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는 걸!”

“대인, 대인!”

용곡성 북쪽에 있던 유규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지나가던 장수를 보고는 덥석 붙잡았다.

“이제 지원군을 보내도 되죠?”

장수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유규를 흘겨보았다.

“지원군을 보내긴 개뿔!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라!”

“대인, 하지만 방(方) 시금(侍禁: 관직명)의 부대가…….”

유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장수는 호통을 쳤다.

“방 시금의 부대가 뭐! 봉화도 올라왔는데, 벌써 도망치고도 남았겠지!”

장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유규는 초조한 표정으로 장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야.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라고! 그놈들, 아무 데도 도망치지 못해!”

유규가 중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막 안.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막 안의 모든 시선이 주육낭에게 집중됐다. 주육낭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장수가 그에게 앉으라는 눈치를 줬다.

“육낭, 앉거라.”

총괄로 보이는 관료는 주육낭의 행동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저 아이가 자네 주씨 가문의 후예인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방 시금의 부대는 바로 성보를 버리고 철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모래로 만든 눈앞의 지형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가 너무 짧습니다. 그쪽에서 봉화를 올리고 전령병을 보냈다지만, 전령병이 오가는 시간은 우리가 준비를 마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이 점은 오랑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방 시금의 부대도 알고 있겠죠. 그러니 그들은 절대 성보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을 겁니다.”

“전령병의 말로는 오랑캐가 최소 사천이라는데, 성보에 남은 병력은 이천도 안 될 걸세.”

한 장수의 말에 주육낭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 군은 절대 적군이 많다고 해서 겁먹을 사내들이 아닙니다.”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된 그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이건 엄청난 기회야. 너희가 큰 공을 세울 엄청난 기회!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너희들, 꼭 버텨야 한다!

주육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전방에 서 있는 여섯 병사의 손은 끊임없이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기며 바삐 움직였다. 성벽 위에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이 성 아래에 있는 방패와 철갑옷들을 뚫자, 아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원산 형제들의 궁술이 엄청나군.”

방 시금이 성문 위에서 말했다.

어쩌면 정말 한 시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방 시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앞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수하 한 명이 재빨리 화살을 쳐내자, 방 시금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화살은 바닥에 떨어지며 방 시금의 정강이를 세게 쳤다.

방 시금은 화살에 맞은 정강이가 몹시 아팠다.

역시 오랑캐 왕족의 정예병다워. 궁술이 남달라!

말을 타고 괴성을 지르면서 성벽 아래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오랑캐들을 보자, 방 시금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끝도 없이 펼쳐진 적진을 내다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어쩌면, 한 시진은 너무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아래서 공격을 하던 적군이 잠시 물러났다.

서봉추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놈들!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이따 저것들을 못다 챙겨 가는 게 한이네. 저것만 해도 벌써 공이 몇 개야?”

서봉추가 성벽 아래에 널브러진 오랑캐들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봉추,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딸 수 있는 오랑캐의 목은 차고 넘치니까.”

형제 중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형제들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공성전이 또 한 차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리 작은 성도 뚫지 못한다면 정예병이라고 할 수도 없지.

형제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예병들도 형제들과 같은 생각인지, 조금 전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오랑캐들이 쏘아 올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기조차 힘들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

범강림이 큰 소리로 물었다.

“금방입니다! 이제 반 시진 남았습니다!”

반 시진이나?

“오늘따라 한 시진이 무척 길게 느껴지네.”

어떤 병사가 말했다. 병사들은 화살 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성벽 아래로 반격했다.

“화살 더 없어? 화살 좀 줘!”

서봉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서봉추는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령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방 시금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봉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 대인이 도망쳤다!”

고개를 돌린 다른 병사들도 텅 빈 사령관 자리를 보고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이 도망갔다는 소리에 성벽 위는 일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두 병졸은 소식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냅다 도망치려 했지만, 적에게 등을 보인 순간 성벽 아래에서 날아온 돌덩이에 맞아 머리통이 산산조각 났다.

“이 비겁한 놈들아!”

서봉추가 바닥에 쓰러진 병졸들을 향해 포효했다.

“모두 집중해! 지금 도망친다 한들, 저 오랑캐 놈들보다 빨리 도망가지는 못한다고! 우리가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해!”

서무수가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을 붙잡고 말했다.

“서 감용, 어떻게 시간을 더 끌라는 말입니까! 지금 남은 병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다른 병졸이 외쳤다. 서무수는 성벽 아래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적군들을 내려다보고, 머리 위로 쉼 없이 날아오는 돌덩이와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성에 불을 질러!”

서무수가 말했다.

무자비한 발길질에 창고 문이 부서지다시피 열렸다. 케케묵은 먼지와 낡은 바구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범강림이 손으로 잡동사니를 치워내면서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여기에 기름이 있나?”

범강림이 외쳤다. 서무수와 다른 세 형제도 창고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헤집으면서 방 시금의 사돈 팔촌까지 싸잡아 욕했다.

방 시금이 도망간 탓에, 성보 안에 남아 있던 병졸들과 잡역부들까지 한꺼번에 달아났다. 잡역부들이 없으니 병사들이 물건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서둘러! 불이 붙을 만한 건 모조리 꺼내 와, 시간이 없어!”

범강림이 형제들을 재촉했다. 형제들은 성문 앞에 기름통을 꺼내 놓은 뒤, 주위의 민가와 거리에 기름을 뿌렸다.

“어서 가자!”

기름을 얼추 다 뿌린 듯하여, 범강림은 형제들을 재촉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무수 일행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났다. 성벽 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도망치다 돌덩이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뿐이었다.

오랑캐들이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쿵쿵 울려 퍼지는 충차의 충돌음이 병사들의 심장을 쥐어짰다.

“불을 붙여, 불을!”

범강림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손에 쥔 횃불을 아래로 던지자, 기름이 뿌려진 곳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서무수가 갑자기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셋째야, 어디 가는 거야!”

범강림이 소리쳤다.

“아직 한 시진이 안 됐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올라가서 좀 더 버텨 볼게요!”

서무수가 대답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쇠뇌를 모아 일렬로 세웠다.

범강림은 어이, 외치면서 서무수의 뒤를 쫓아갔다. 이미 다른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앞서가던 서봉추와 형제들도 성벽 위로 오르는 범강림을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으로 되돌아왔다.

성벽 위에는 쇠뇌 열 개가 놓였다.

“죽어라, 이놈들아!”

서봉추가 외치면서 쇠뇌를 쏘았다.

서무수와 다른 형제들이 나머지 쇠뇌를 쏘자,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 아래로 화살이 우수수 쏟아졌다. 오랑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성벽을 부수던 충차도 잠시 멈췄다.

“가자, 어서!”

범강림이 외치자마자, 서무수가 갑자기 그를 옆으로 힘껏 밀쳤다.

“왜 그래?”

바닥에 엎어진 범강림이 고개를 들며 서무수를 올려다보자, 서무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형님!”

서봉추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서무수를 향해 외쳤다. 주위의 형제들도 재빨리 서무수 옆으로 뛰어갔다.

순간, 서무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오랑캐의 매서운 화살은 서무수의 살을 찢고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난번에도 이 화살이었지. 이 화살 때문에 형제들과 함께 탈영하고 도망칠 때 병이 났었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서무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단지 병일 뿐, 명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내 명이 여기까지겠지.

내 명줄에는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게 없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전장에서 눈을 감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해.

“누이한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전해 줘.”

서무수는 점점 흐릿해지는 형제들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규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성보 안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시체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전장에서 이보다 더 참혹한 시체도 많이 봤으니까. 유규는 시체들을 뒤적이면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댔다.

그놈들은? 그놈들은 어디 있어? 도망친 거야? 정말로?

“내가 네놈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내가 네놈들을!”

같은 말을 연신 외쳐 대던 유규는 성벽 아래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커다란 머리에 부릅뜬 눈, 거칠게 난 수염.

유규는 떨리는 손으로 서봉추의 몸을 뒤집으려 했지만, 서봉추가 두 팔로 꽉 안은 오랑캐 때문에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긴 창 하나가 서봉추와 오랑캐의 몸을 나란히 관통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서봉추가 이 오랑캐를 끌어안고 긴 창을 향해 돌진한 모양이었다.

유규는 두 사람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은? 다른 놈들은 어디 갔지?

유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네놈들을 지켜볼 거다! 내가 지켜볼 거라고!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 다 돌아와! 당장 돌아오라고!

유규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주위에는 거센 밤바람이 불고, 여름 밤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꿈인가? 꿈이구나! 다행이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 말이 우는 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가 유규의 귀에 한꺼번에 들려왔다.

“사상자 수는?”

“오랑캐 머릿수는 얼마나 되고?”

“시신은 구덩이를 파서 화장해.”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열여덟이고, 치료한다면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부상병부터 옮겨.”

사상! 시신!

유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이 아니었어!

유규는 비틀거리면서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오랑캐들의 시신은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서 각각 한쪽에 쌓아 두었다. 오랑캐들의 수급을 군영으로 가져가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고, 주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다른 한쪽에는 아군의 시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랑캐들의 시신과는 달리, 아군의 시신들은 바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내일쯤이면 아군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다 파낼 수 있을 것이다.

유규는 아군의 시신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시체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유규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기어 다니면서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저앉다가 몸을 일으키기를 반복하면서 시신들을 확인했다.

“유규!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다 못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인네도 아니고 사람 죽은 거 처음 봐? 왜 미친 사람처럼 그래?”

그래. 미칠 게 뭐 있다고.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죽음과 함께여야 해. 죽음이 무서웠다면 벌써 도망쳤겠지.

난 무서운 게 아니야. 내가 왜 죽음을 무서워하겠어. 난 단지, 난 단지…….

“내가 네놈들을 지켜본다고 했잖아! 도망칠 생각하지 마!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고! 어서.”

해가 뜨자, 환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오랑캐의 정예병 부대는 한 번에 십 리 밖까지 퇴각해야만 했다.

간밤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용곡성 병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오랑캐들이 퇴각한 틈을 타, 군영의 막사를 재정비하고 어젯밤 참전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주육낭은 코 고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같이 울리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격렬한 전투를 벌인 직후인지라, 신경이 곤두서 있고 긴장이 늦춰지지 않았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주육낭은 결국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 한 무리가 말과 함께 군영 안으로 들어오자, 군영 안이 잠시 떠들썩해졌다. 군영 안으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병졸도 있었고 잡역부도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추레했다.

돌아왔구나!

주육낭은 크게 기뻐하며 사람들 근처로 다가갔다.

한쪽으로 밀려난 병졸과 잡역부들은 적군의 눈을 피해 산을 넘어 길을 크게 돌아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들은 아예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거나 드러누워 버렸다.

주육낭이 사람들을 훑어보았지만, 무원산 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육낭은 그들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을 거두었다.

주육낭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서는 장수 하나가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지원군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지친 기색이 역력한 조 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자네가 아주 잘 해줬어. 성을 수비하면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준 덕에 진영을 재정비할 수 있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아주 끔찍했을 거야. 방 시금, 이번에 자네가 아주 큰 공을 세웠어.”

조 대인이 말했다.

역시 큰 공이었어!

방 시금은 더욱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고 외쳤다.

“다 대인의 고명하신 가르침 덕분입니다! 소장,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싸우겠나이다!”

막사 안의 다른 장수와 관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공로와 포상을 내려야 할 자들을 제대로 챙겨 줌세.”

조 대인이 말했다. 천막 문 앞에 서 있던 주육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지원군이 제시간에 도착했나 보군.

주육낭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조 대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아 참, 방 시금.”

조 대인이 주육낭을 부르면서 방 시금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주 전치(殿値)에게도 고마워해야 하네. 주 전치가 선두로 기마병을 이끌고 갔었네.”

방 시금이 서둘러 주육낭에게 예를 올렸다.

“같은 아군의 일이니, 스스로를 구한 셈입니다. 인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주육낭이 겸손하게 답례했다. 조 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주육낭의 어깨를 탁탁 쳤다.

이번에는 정말 이자의 말이 맞았어. 주 감찰의 말대로 이자를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군. 특히나 이자의 제안에 대해서는 더욱.

조 대인은 주 감찰의 당부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대대로 무장을 해 온 주씨 가문이니, 주씨 가문 출신 장군들의 위신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씨 가문의 다른 장군들의 말을 새겨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제 갓 서북으로 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의 말을 귀담아들으라니 조 대인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조 대인에게 말을 전하는 주 감찰도 의구심을 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경성을 떠나기 전 진소 상공이 당부한 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을 전해야 했다.

진 상공이 당부했다고? 그 어린놈이 진 상공의 신임을 얻은 건가?

조 대인은 그러한 연유로 주육낭이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주육낭의 예상이 옳았고, 방 시금은 기대에 부응해 성보를 수비하며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리고 때맞춰 보낸 지원군 덕분에 방 시금을 무사히 데려왔고,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덕분에 조 대인이 내렸던 잘못된 지시는 자연스럽게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다.

아슬아슬했어. 이제 해야 할 일은, 오랑캐들을 완전히 물리치는 것뿐이야.

“어서 가서 쉬게나. 아직 큰 전투가 남아 있어!”

조 대인이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막사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큰 소리로 조 대인의 외침에 호응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나절이 채 되기도 전에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잠을 자고 있던 장병들과 정찰을 하고 있던 병사들은 재빨리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북소리, 호각 소리와 함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장사진을 펼쳤다. 전열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적군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천둥 같은 북소리가 한바탕 지나가자, 뱀의 꼬리처럼 휘어지는 진영 사이로 도끼와 장창을 든 기마병들이 홀연히 나타나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만연했다.

주육낭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의 목을 베었다. 유년 시절 들었던 수많은 전쟁 이야기,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무예를 갈고 닦았던 시간, 형제들과 어른들의 조언,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해 존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육낭이 힘껏 휘두르는 칼과 도끼에 혈흔이 낭자했다.

해가 서쪽으로 질 때쯤, 도처에 깔려 있던 오랑캐들이 종적을 감췄다. 지금 남은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는 시체와 한쪽에서 목청 높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오랑캐의 머리를 잘라내는 아군 병사들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바닥은 전부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승리와 공로의 색깔이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붉은 색.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자, 큰 전투로 인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용곡성 밖으로 구불구불하고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큰 전투를 치르고 성을 지켜낸 병사들을 영접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성안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은 전리품을 실은 수레와 장병을 감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수레 한가득 실린 오랑캐의 수급과 깃발들을 보며 잔뜩 흥분하여 환호를 질렀다.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주육낭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전에 먼저 성안으로 들어왔다.

“전치 대인, 조금만 참으십시오.”

군의의 말과 함께, 주육낭의 몸에서 빼낸 화살촉이 철판 위로 떨어지는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주육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나무막대기 하나를 꽉 쥔 채, 군의가 상처 부위에 약을 뿌리고 잡역부가 붕대를 싸매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인, 며칠 쉬시면 나을 겁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군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물러났다. 전투를 벌일 때마다 부상병이 속출하여 군의는 쉴 틈이 없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옆쪽 천막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군의가 물었다.

“부상병 하나가 죽네 사네 하고 있습니다.”

잡역부가 대답했다.

“저도 시체 더미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텐데, 죽고 싶다고 난리를 쳐? 제 복을 모르는 자로군.”

주육낭의 수하들이 말했다.

“자신의 형제들이 다 죽었으니, 자기도 죽어야 한답니다. 임관보(臨關堡)를 지키며 싸웠던 병사라던데요.”

임관보에서 빠르게 전령병을 보내고, 소수의 병력으로 오랑캐 육천을 상대하며 한 시진 반이나 시간을 끌어 준 덕에 후방에서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이천 병력 중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삼백이니, 거의 전멸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임관보의 부상병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내가 가 보겠다.”

주육낭이 돌연 입을 열었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주육낭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대인, 아직 붕대를 다 싸매지 못했는데요.”

주육낭이 팔을 홱 빼고 간 탓에 잡역부는 붕대를 허공에 든 채로 외쳤다.

부상병들이 있는 막사 안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피비린내와 살이 곪아 가는 냄새가 풍겨 왔다.

소란스러운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잡역부와 군의는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안을 쳐다봤다.

“이럴 필요까지야 있나.”

“전장에서 생사는 아무도 모르는 법인데.”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아니면, 확 기절시켜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문밖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던 주육낭은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비키시오. 주 전치께서 오셨소.”

수하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육낭에게 길을 터 주었다.

큰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장수와 관리들은 기쁨에 취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인데, 품계 있는 무관이 갑자기 부상병을 살피려 여기까지 온다고? 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문 앞을 비워 줬지만, 주육낭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인, 이쪽으로 드시지요.”

군의가 서둘러 안내했다.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들은 정서가 불안정했다. 장애가 생긴 부상병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했다. 이런 때에 지체 높은 무관이 나서서 부상병들을 위로한다면, 그들의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군의는 생각했다.

주육낭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상병을 안치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탓에, 주육낭이 들어선 이곳은 땔감을 모아두는 고방을 비워 마련한 곳이었다. 비좁은 고방 안에는 부상병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나무판 위에 누워있는 부상병은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팔에 난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팔뿐만 아니라 머리와 다리에도 큰 상처가 있었다.

“아이고, 이러면 안 되오.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처치도 하지 않고 뒀다가 어쩌려고!”

군의가 소리를 지르며 부상병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누워있는 줄 알았던 부상병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홱 내쳐 군의를 밀어냈다.

“꺼져! 내가 죽겠다는데,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야! 내 형제들이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서 뭐해!”

부상병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군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부상병의 얼굴을 확인한 주육낭은 머리가 띵해졌다.

“범강림, 지금, 누가 죽었다고 했소?”

주육낭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환영 대열은 아직도 성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병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사근이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급하게 형제들의 행방을 물었지만, 병사들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서사근은 하는 수 없이 병사들을 제치면서 계속 뒤쪽으로 파고들었다.

성문 앞의 환영 대열이 흩어지고 군대도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서사근만 성문 앞에 남아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넷째 아주버님, 봉추랑 아주버님들이 왜 안 보이죠?”

“그러게요. 우리 그이는요?”

두 아낙이 서사근의 뒤에 바짝 붙어 물었다.

“임관보에 있었으니까, 지금쯤이면 벌써 성안에 들어갔을 겁니다.”

서사근이 어색한 미소를 짜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리도 어서 들어가요. 벌써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서봉추의 부인이 등에 업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형님, 우리도 빨리 돌아가요.”

두 아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안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서사근은 제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등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를 끄는 바퀴 소리에 서사근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사내가 큰길 위로 수레를 끌면서 성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다른 사내 두 명이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서사근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수레를 끄는 사내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사근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봐, 유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제발 좀 그만하라고! 전사자는 모두 구덩이에 묻는 게 원칙인데, 이렇게 시신을 끌고 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

두 병사가 몹시 답답한 듯 유규에게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내고 있었다. 둘은 꼬박 이틀 밤을 새워 그를 따라다니며 만류했다. 하지만 유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수레를 끌고 용곡성까지 걸어왔다.

유규는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수레에 실린 시신들 위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낡고 해진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덮개 밖으로 나온 다섯 쌍의 발이 흔들렸다.

위주 개석보 수비군 소속 갑대 감용 서무수, 서봉추, 범강림, 범석두, 기병 서사근, 서납월, 교용 범삼축.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우리는 탈영병이 아니오! 우리는 모함을 당한 거요!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도망칠 생각하지 마!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유규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밧줄에 짓무른 어깨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레는 범강림의 집 앞에 도착해서 멈춰 섰다. 아낙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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