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새 피 토하고-
“……정교랑, 이 뻔뻔한 것.”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가문 사람이 또 왔네.”
“대노야께서 편찮으시니 저들까지 덩달아 병이 걸린 건지, 원. 허구한 날 아씨를 찾아와 저리 소란을 피우다니.”
“아씨도 참 성격이 좋으셔. 저걸 그냥 두시다니.”
“그러게 말이야. 활을 쏴서 쫓아 버리시지 않고.”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마당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처마 아래에 선 정육랑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를 질러댔다. 정육랑은 씩씩거리며 방 안에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은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찻잔을 들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따금 물이라도 마시지 않았다면 석상을 조각해 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제 정씨 가문은 온 성의 웃음거리가 됐어! 정교랑, 네가 이러고도 정씨야?”
정육랑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에는 저 바보가 몹시도 무서웠다. 입이 삐뚤어지고 눈이 사시일까 봐, 침을 흘리고 콧물을 흘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저 바보한테 두 번 놀랐을 때는 밤에 악몽까지 꾸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그리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탄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악몽을 꾸게 하는 공포는 아니었다. 오밤중에 자다가 잠깐 깼을 때, 뼛속 깊이 한기가 느껴지는 공포였다.
정씨 가문은 망할 거야. 강주부의 웃음거리가 되겠지. 혼담이 오가던 가문들한테서도 이젠 소식이 끊겼어.
전에는 집안에 바보가 있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은 정육랑과 무관한 것이었고, 그건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을 때도 있었다. 그 조소를 빌려 자신에게 닥친 마음에 안 드는 일들을 마음껏 원망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달랐다. 집안에 바보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씨 가문의 일이었다. 정씨 가문은 저 바보한테 고소를 당했고, 관부에서는 사건을 수리했다. 정씨 가문의 명성이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집안의 어느 한 개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기껏해야 정씨 가문도 덩달아 창피를 당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집안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면 구성원 모두에게 화가 미치기 마련이다.
집이 있어야 사람이 있는 법인데, 집이 없다면 그 집 사람들은 뭐가 되겠는가.
“정교랑, 넌 곱게 못 죽을 거야!”
정육랑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반근이 막았고, 마당 곳곳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시종들도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거 놔, 이 천것들이 어딜 감히!”
정육랑이 반근을 밀쳤다. 정육랑은 여전히 방 안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정교랑을 죽일 듯이 쏘아보며 홱 뒤돌아 눈물을 닦고 달려나갔다.
“정교랑, 넌 가문과 조상을 욕되게 했어. 천륜을 거스른 거지. 이런 몹쓸 짓을 했으니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쾅 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마당 안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사실 곱게 죽고 안 죽고는, 무슨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어.”
정교랑이 자세를 바로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그 얘길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반근은 어쩐지 책망하는 투로 물었다.
“들었지. 엄청 시끄럽게 떠들었잖아. 목소리는 듣기 좋던걸. 정 대부인보다 나아.”
정교랑이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또 누가 왔니?”
반근은 정교랑의 말에 또다시 웃음을 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정 대노야는 대문 앞에서 쓰러져 실려 돌아갔다. 목숨은 건졌지만 의원은 침상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번만 더 내려왔다가는 신선이 와도 못 고친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일로 정씨 가문은 엉망진창이 됐고, 정 대부인은 사람들을 이끌고 쳐들어오기까지 했다. 물론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그 이후로 정씨 가문 사람들이 종종 찾아왔다. 욕을 퍼붓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간곡하게 사정하기도 했다.
사실 반근은 정교랑이 그런 이들을 대문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 집사나 자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그런데 늘 조용한 생활을 즐기던 정교랑이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거처를 옮기지 않고, 정씨 가문 사람들이 대문을 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대꾸한 적은 없지만, 꽤 진지하게 듣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 말이 정교랑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반근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아씨, 뭐하러 그런 일에 시간을 쓰세요.”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는 분도, 남들의 잡담을 듣는 분도 아니셔.
소매를 끈으로 동여매던 정교랑은 반근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난 그냥, 너무 한가한 게 싫어서.”
한가하게 있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지금은 생각을 많이 할 수 없었다.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곱씹다 보면,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나가서 걷고, 낮에는 사람들이 욕하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활도 쏘고 글씨 연습도 하고 책도 보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지금은 그러는 게 좋았다.
반근은 정교랑의 눈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앞으로 다가가 소매를 단단하게 동여매 준 다음, 벽에서 활과 화살을 내렸다.
하루 또 하루, 해가 뜨고 지면서 섣달의 연말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밝은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전각에서 내시 둘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손에는 커다란 나무통이 하나 들려 있었고, 통에는 용변 냄새를 풍기는 옷이 담겨 있었다. 옆을 지나가던 내시들과 궁녀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는 손으로 코를 틀어막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손으로 등을 세게 내리쳤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손으로 등을 내리친 이는 전각 방향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경고하듯 말하고는 혀를 날름거리고 손을 내렸다.
“육가아, 옷 갈아입었으니 우리 뭐 좀 먹자.”
진안 군왕이 옷자락을 들고 침상 옆으로 앉더니, 옆에 놓인 탁자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침상 위의 이황자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발그레한 얼굴에 웃음을 띤 채였다. 머리의 상처에 감겨 있던 흰 천은 이미 풀어 버렸고, 대신 모자를 써서 상처를 가렸다. 얼핏 예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웃음과 함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과 흐리멍덩한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달라졌다고.
모든 게 달라졌다.
이황자는 팔을 활짝 벌리고 위아래로 흔들며 입으로 아무 의미 없이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진안 군왕은 밥그릇이 쏟아지지 않도록 얼른 팔을 붙잡고, 웃으며 달래 주었다.
“밥 먹어야지, 밥. 밥 먹고 나서 형이랑 놀러 가자.”
금으로 된 밥그릇에 담긴 밥을 은수저로 떠서 이황자의 입에 가져다 댔다. 삼킨 게 반, 흘린 게 반이었다. 턱받이에 묻은 음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비위가 상했다.
가뜩이나 흘린 게 반이었는데, 팔을 세차게 흔드는 바람에 밥그릇이 저 멀리 날아갔다.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의 몸에도 자연히 이것저것 흘린 게 많았다. 내시가 얼른 무릎을 꿇고 닦아 주었다.
“전하,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내시가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진안 군왕은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침상에서 팔을 흔들고 있는 이황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황자는 침을 흘리며 이이야야 하는 소리를 냈다. 진안 군왕은 내시의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육가아, 넌 병에 걸린 거야, 병.”
진안 군왕이 별안간 이황자의 어깨를 확 붙잡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병이라면 내가 데려가 고쳐 줄게. 네 병을 고쳐 줄 거야.”
“허튼소리!”
탁 하고 내리치는 소리가 궁 안에서 울려 퍼졌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과 궁녀들은 또다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쪽으로 걸어오던 귀비는 의아한 눈치였다.
“또 왜 저러셔?”
귀비가 물었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안 군왕께서 안에 계시옵니다.”
내시 하나가 예를 표하며 나지막이 고했다.
진안 군왕이 함께 있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여전히 태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비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시간도 이른데. 군왕은 왜 경왕(慶王) 옆에 있지 않고?”
이황자는 다친 지 닷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황자는 태의의 진단대로 바보로 변해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처지가 됐고, 말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황자의 상태를 확인한 황제와 태후는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태의를 시켜 계속 치료하게 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사흘 전, 황제는 이황자를 경왕에 봉한다는 성지를 내렸다.
자손이 귀했던 탓에 황제는 일부러 봉작을 미뤄 왔다. 대황자는 열 살이 되던 해에야 영국공(寧國公)에 봉해졌고, 지금껏 군왕에 책봉되지도 않았으니 친왕 책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올해 일곱 살인 이황자는 국공에도 봉하기 전에 곧장 친왕으로 봉했으니 이는 법도에 한참 어긋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폐인이 된 이황자를 왕으로 봉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하나는 병자의 액막이를 위한 경사를 만들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아들을 향한 부친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런 때에 굳이 폐인 친왕을 걸고넘어지며 부친을 자극해 망신을 당하려는 이는 없었다.
내시가 좌우를 살핀 다음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서 나지막이 고했다.
“경왕의 일로 떼를 쓰고 계십니다.”
귀비의 가슴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두봉 속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또 왜?”
귀비의 물음에 내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왕 전하를 모시고 나가 병을 고칠 의원을 찾아가겠다고 하십니다.”
내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가서 의원을 찾아가겠다?
귀비는 멈칫했다.
“병이 급하면 아무 의원에게나 매달린다더니.”
태후가 탁자를 내리치며, 앞에 꿇어앉은 소년을 딱히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매일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도, 어쩐지 갑자기 부쩍 수척해진 듯 보였다. 눈가에 거무스름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머리는 단정히 묶었지만, 옷으로 튄 오물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너희는 군왕을 어찌 모시는 게야!”
태후가 갑자기 호통을 치자, 문밖에 있던 내시들이 우르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마마, 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육가아를 돌보겠다고 했어요.”
태후가 진안 군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위낭, 꼴이 이게 무어냐…….”
“마마, 마마,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우선 육가아를 고칠 방도부터…….”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위낭!”
태후가 언성을 높이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커다란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고집스러운 비통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정신 차리자. 못 고친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막다른 길은 아니에요.”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같이 놀러도 가고 싶고요. 시도라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진안 군왕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한 번만 해 보겠습니다. 시도도 안 해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육가아를 붙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습니다. 붙잡아 보고 싶어요. 형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마마, 육가아를,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어요. 마마…….”
태후는 눈물이 흐르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우리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구나, 우리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어.
두견새 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우는(杜鵑啼血猿哀鳴 - 백거이 <비파행>) 심정이 이러했으리라.
“그 의원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었느냐?”
태후가 목멘 목소리로 물었다.
귀비는 초조한 얼굴로 창가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기다리다 짜증이 날 무렵,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궁녀가 보였다.
“뭐라더냐?”
귀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태후께서 동의하셨어요. 폐하도 모셔 오셨고요.”
궁녀의 말에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희색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합장했다.
“그래서 폐하는 뭐라고 하시던?”
“폐하께서도 동의하시며, 군왕의 지극정성을 들어주겠다고 하셨어요.”
지극정성이라…….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폐하께서 군왕께 고맙다고도 하셨고요.”
궁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이자 귀비는 인상을 썼다.
“폐하께서 고맙다고 하셨다고? 고맙긴 뭐가?”
“폐하를 대신해 마음을 다한다나…… 대충 그런 의미였는데, 소인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귀비가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진안 군왕이 경왕을 데리고 출궁하여 의원을 찾으러 가는 건 틀림없었다.
“군왕이 찾는다던 의원은 어디 있다더냐? 모시러 갔느냐?”
귀비의 물음에 궁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의원을 모셔 오는 게 아니고, 나가서 의원을 찾아갈 거라고 하셨어요.”
뭐야?
귀비는 흠칫 놀랐다.
“그래서 군왕께서 경왕을 모시고 그 의원을 만나러 출궁하셨습니다.”
“어째서?”
궁녀의 말에 귀비가 물었다.
“군왕의 말씀으로는 의원을 모시러 갔다 모셔 왔다 하면 시간만 아까우니까, 그러느니 직접 가겠다고 하셨어요. 경왕의 병은 하루라도 빨리 고치는 게 낫다면서요.”
그러더니 궁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쭈뼛쭈뼛 덧붙였다.
“그 뒤는 소인도 잘 못 들었는데…… 아무튼 폐하와 태후께서 동의하셨어요.”
귀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의원을 만나러 출궁했다는 말만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눈에 거슬리던 것들이 드디어 궁을 나갔구나!
경왕은 그래도 괜찮았다. 바보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진안 군왕은 정말이지 잠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낳게 해 준다는 소위 송자동자(送子童子)라서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보기 싫었다.
태후궁에 갈 때마다 한쪽 옆에 꿇어앉아 있는 소년을 볼 때면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찔리는 게 있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걸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보기 싫었다.
지극정성이라니, 거 잘됐네. 그 지극정성 끝까지 쏟으라고. 경왕을 고치지 못하면 평생 돌아오지도 말란 말이다.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면…….
귀비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지난번엔 뜻대로 안 됐다만, 이번엔…….
“노노(奴奴).”
귀비의 부름에 궁녀 하나가 옆에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귀비가 손을 들자 귀비 가까이로 다가왔다. 귀비의 귓속말을 들은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추운 겨울 섣달인지라 경성 근처의 강에도 얼음이 적잖이 얼었다. 겨울 낚시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때였다.
강가에 있는 오두막에 일고여덟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나이대는 다양했고, 시종들은 옆에 시립해 있었다.
강가에서 갈채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가 잡혔나 보군.”
오두막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가에서 걸어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혈색이 좋아 보이는 고능준 통사였다.
“전에는 나도 낚시를 별로 안 좋아했어. 괜히 힘만 든다고. 근데 겨울 낚시는 의외로 잘되네.”
“통사 대인,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웃으며 손으로 강가를 가리켰다.
“겨울 낚시라고 해서 다 잘되는 건 아니지요.”
모두가 강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수확이 있는 이도 있고, 양손에 빈 이도 있었다.
고 통사는 이런 공손한 아부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았다. 상대가 잘 보이고 싶다는데, 굳이 고고한 시늉을 하며 무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의 고 통사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찬모가 왔나 보군.”
한 사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서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몸종이 내렸다. 평범한 외모에 옷차림은 단정하고 깔끔했다. 모자가 달린 두봉을 걸치고 있었는데, 짙은 색상이었지만 테두리에 여우 털이 달려 있어 딱 봐도 값나가 보였다.
찬모는 여기저기서 모셔 가는 존재다 보니 수입이 쏠쏠했다. 금은을 둘렀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찬모 치고는 너무 어리지 않나?
“여기 반근 낭자는 회를 치는 솜씨가 끝내줍니다.”
누군가가 의혹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반근?
근처에 있는 나무판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사람 하나가 그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털모자 속에서 소년의 준수한 외모가 드러났다.
반근이 또 있어?
주씨 가문에 하나, 장씨 가문에 하나 아닌가. 아, 그렇지. 정씨 가문에 있던 그 애구나. 장씨 가문 노태야의 시녀와 바꾼 아이.
진십삼은 그 몸종이 고관대작 앞에서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예를 표하는 모습을 미소로 바라보았다. 몸종은 길게 말하지 않고 두봉부터 벗은 다음 소매를 동여맸다. 이어 고 통사가 잡은 고기를 받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 통사 등은 다시 오두막 안 화로 주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생선회가 차려졌다. 청자 접시 위에 놓인 생선회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으면서도 살이 탱탱했다. 고 통사가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건 저희 집 특제 양념장이에요.”
반근이 작은 접시 하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 통사는 생선회를 한 점 집어 양념장을 찍은 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회가 혀끝에서 사라지면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훌륭하군, 훌륭해. 훌륭하구나.”
고 통사는 훌륭하다는 말을 연거푸 세 번이나 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이내 마음이 놓이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근데 양이 좀 부족할 것 같네.”
누군가가 농담을 던졌다.
“이 녀석이, 그럼 나가서 한 마리 잡아 오든가.”
고 통사가 웃으며 대꾸했다. 농담을 던진 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쪽에서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게 마침 고기가 있으니 대인들께 올리겠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진 공자?”
누군가가 말했다. 진십삼이 이들을 향해 다시금 예를 표했다.
“십삼이 대인들을 뵈옵니다.”
고 통사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예를 거두라고 하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물론 고 통사는 이 소년이 누군지 알았다. 사실 고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황친으로 친척 관계였으나, 두 가문 사이에 교류는 딱히 없었다.
“실은 제가 식탐이 많아서요. 고기를 올리고 한 첨 얻어먹을까 하고 왔습니다. 숙부님들과 백부님들께서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진십삼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
사람들은 대꾸하는 대신 고 통사를 쳐다봤다.
“식탐이 많으면 먹어야지. 남도 아니고. 뭘 고기까지 챙겨와.”
고 통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이들도 뒤늦게 따라 웃었다. 진십삼이 웃으며 시종에게 어롱을 건네자, 저쪽에 있던 반근이 받았다. 반근은 눈을 들어 진십삼을 힐끔 쳐다본 다음 고개를 숙이고 일하러 갔다.
진십삼은 웃어른들과 함께 자리하지 않고, 한쪽 옆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고 통사가 웃으며 학업에 대해 물었다.
“이제 다리도 좋아졌으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거라.”
고 통사가 웃어른으로서 따스한 관심을 표했다.
“네, 스승님을 모셔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3년 후엔 과거를 봐야죠. 오늘은 잠깐 짬을 내서 나온 겁니다.”
진십삼이 대답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생선회 한 접시가 또 올라왔다. 생선회를 조금 먹고 난 진십삼은 일어나 거듭 감사를 표한 후 물러갔다. 고 통사 등도 붙잡지 않고, 사환과 함께 돌아가는 진십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근도 작별 인사를 올렸다.
“에이,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다들 놀란 눈치였다.
사례금이 부족했나?
반근이 예를 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벌써 네 마리예요. 생선회가 맛있다고는 하나 많이 드시면 안 돼요. 비장과 위장을 상하기 쉽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다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반근은 긴말하지 않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저 찬모의 말이면 거짓은 아닐 거야. 저 찬모가 장 노태야를 모시면서 양생에 좋은 보양식 준비에 얼마나 공을 쏟는지 몰라. 누군가는 저 찬모한테 차를 우리는 방법을 배워 마셨더니 지병으로 앓던 무릎 관절통이 싹 나았다지 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다들 금세 알아들었다. 하지만 고 통사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누구? 저게 누구네 집 찬모라고?”
고 통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강주 댁입니다. 장 노태야의 전용 찬모라네요.”
설명하던 이가 대답했다.
장강주!
고 통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대인, 사실 지난번 일은 장강주가 우릴 도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옆에 있던 이가 웃으며 말했다.
“왕보당이 죄를 받도록 도왔단 말인가?”
고 통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거나 진소 일당의 뜻대로 되진 않았잖습니까. 대인,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장강주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직도 싸우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싸움이 길어지면 연루되는 일과 사건도 늘어나기 마련이고요.”
또 다른 이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어쨌든 기반을 잃지 않게 됐으니.
고 통사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냉소를 지었다.
“그래도 날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네.”
그야 당연하지.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위하기 마련인걸.
“대인, 우리는 그자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남을 돕거나, 우리 일에 훼방만 놓지 않으면 족하지요. 그리고 이번에 장씨 가문으로 가서 찬모를 빌려 달라고 하면서 대인과 함께 놀러 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씨 가문에서 두말없이 수락하더군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건 체면을 의미했다.
고 통사의 표정이 마침내 환해졌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 통사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걷히지 않았다. 고 통사는 서재에서 식객들과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축하드립니다, 대인. 경하드립니다, 대인.”
식객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자 고 통사는 혀를 찼다.
“어린애 하나가 음식 좀 얻어먹고, 찬모를 빌려 생선 좀 먹은 걸 가지고 축하하고 말 게 뭐 있다고. 왜들 이리 호들갑인가.”
“대인,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진 공자가 어디 음식이나 한입 얻어먹자고 왔겠습니까? 장씨 가문은 별 뜻 없이 찬모를 빌려줬고요? 대인,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게 아니면 뭔데?”
고 통사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야 당연히 황태자…….”
식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고 통사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고 통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자코 있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과 희열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 황태자. 이제 폐하의 황태자가 될 사람은 하나밖에 안 남았어. 조정 사람들이 상황 파악을 할 때가 됐지.
“대인,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밖에서 고하는 소리에 고 통사는 움찔하며 안으로 들어오라 명했다. 귀비의 말을 전해 들은 고 통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허튼소리!”
고 통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왜 아둔하게 쓸데없는 짓을 벌여! 지금은 행여 구정물이라도 튈까 멀찌감치 서 있어야 할 때다. 예전이라면 손을 쓸 필요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냐. 개돼지만도 못하게 됐는데, 뭐하러 그런 데 신경을 써!”
창공을 나는 매는 자신과 동등한 상대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만 바라본다. 개미 같은 존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법이다. 이제 그들은 하늘을 나는 매가 됐고, 경왕은 개미 같은 존재가 됐다.
운명이로다.
고 통사는 탁자를 손으로 쓸며 미소 지었다.
“어이구, 춥다!”
찬바람이 불자 군관은 손을 벅벅 비벼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서북은 얼음이 꽝꽝 어는 날씨가 됐다. 두꺼운 모피 장포도 뼛속으로 스미는 냉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 든 군관이 이러할지니, 새파랗게 젊은 군관이 추위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주 공자는 좀 어때? 춥지는 않고?”
나이 든 군관이 옆에 있는 말에 탄 주육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경성에서 부유하고 안온한 생활을 하고 지내던 소년 공자는 서북의 찬바람에 시달리다 불과 달포 만에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툼한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털모자까지 쓰고 있는데도, 얼굴은 새빨갛게 터 있었다. 귀에는 동상 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다.
“춥습니다.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주육낭이 웃으며 대답하자, 나이 든 군관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곧 새해를 맞이하겠군. 그땐 우리 서북 지역도 아주 떠들썩할 거야.”
나이 든 군관이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고.”
이들은 길에서 폭죽을 던지는 아이들을 지나쳐 곧장 관청으로 향했다.
주육낭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갔다. 위병들이 미리 화로에 불을 지펴 놓았는데도 방 안 공기는 여전히 썰렁했다. 모자를 벗은 주육낭은 손을 비볐다가 얼굴과 귀에 갖다 대며 몸을 녹였다.
“관구(管勾: 관직명), 댁에서 온 물건입니다.”
밖에 있던 위병이 들어와 커다란 꾸러미를 건넸다.
주육낭이 물건을 내려놓고 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몸이 좀 녹자 주육낭은 그제야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집에서 보낸 옷이며 신발, 버선 등일 것이다. 서찰도 한 통 들었을 테고.
주육낭은 부친과 모친, 아우들과 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꾸러미를 펼쳐 보았다.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법이었다.
물건을 다 확인하기도 전에 위병이 또 들어왔다.
“관구, 여기 서찰이 한 통 더 있습니다.”
또 있다고? 가족이랑 같이 보낸 게 아니라면, 혹시…….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쿵쾅대는 가슴으로 서찰을 받았다. 진십삼의 필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녀석이 있었지.
주육낭은 빙긋 미소를 짓고 앉아서 서찰을 뜯어 보았다. 몇 줄 읽기도 전에 밖에서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어 위병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관구, 산음채의 서무수가 알현을 청합니다.”
위병이 발을 걷고 들어와 말했다.
서무수?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북으로 온 후부터는 군관과 병사라는 신분의 차도 있고, 묵는 군영도 다르다 보니 왕래가 전혀 없었다.
“들여보내라.”
주육낭이 서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서무수는 주육낭을 향해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이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걸 대인께…….”
서무수가 먼저 입을 열며 자기로 된 연고통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데?”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동상 치료와 예방에 좋은 약입니다. 살에 바르면 좋을 겁니다. 누이…… 아, 아니, 정 낭자가 보내 주었습니다.”
정 낭자…….
주육낭은 등에 벌레가 기어가기라도 한 듯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 난 이런 거 안 써.”
서무수는 자기로 된 연고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두말없이 뒤돌아 나갔다.
“어이.”
주육낭이 불렀다.
“이거 가져가. 누가 이런 거 달라나.”
입으로는 소리를 지르면서도 주육낭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내며 연고통을 집어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주육낭은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연고통에 시선을 두었다.
동상 치료와 예방에 좋은 연고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주육낭은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무슨 짓이야, 뭘 웃어? 이게 뭐 좋다고!
주육낭은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겁난다는 듯 잠시 옆으로 비켜서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연고통 쪽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고 싶지만 손이 나가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연고통을 들여다봤다. 그게 무슨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동상을 치료하고 예방한다? 흥, 그런 건 여인들이나 챙기지.
주육낭의 입이 벌어지며 다시 웃음이 나왔다. 꾹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어 고통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같은 시각 서무수도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형님, 그 녀석한테 뭐하러 나눠 줍니까. 누이가 그 녀석 주라고 한 것도 아닌데.”
굳은 얼굴의 서봉추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만난 것만 해도 인연이야. 그리고 꽤 괜찮은 녀석이잖아. 곧 새해인데 같이 즐거우면 좋지. 험난한 세상, 즐겁게 살자고.”
무슨 괴상한 논리야.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네.
서봉추가 인상을 썼다.
“즐겁고 안 즐거운 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형님이 형님 약 덜어 준 거니까, 내 거 쓸 생각은 접으시오.”
서무수는 웃음을 터트리며 서봉추를 걷어찼다.
“어서 가자. 얼른 가서 새해를 맞이해야지.”
한편 황궁에서는 새해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쉭쉭 부는 바람 소리에 음침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
급히 귀비전으로 향하는 고 통사의 얼굴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무슨 일입니까? 이런 때에 왜 이리 철없게 구십니까?”
고 통사는 예도 갖추지 않은 채 목소리를 낮춰 불평을 토로했다. 귀비는 고 통사의 언짢은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좌우를 살피더니 바짝 다가왔다.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때예요.”
“또 뭔데요?”
“진안 군왕이 글쎄 어느 의원을 찾으러 갔는지 알아요?”
고 통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고 그놈의 큰일이라는 게 뭔지 기대도 안 했지.
“어느 의원을 찾아갔는지 뭔 상관입니까. 신선이라도 찾아갔으면 몰라도.”
“진짜 신선을 찾아갔어요.”
귀비는 다급한 투였지만, 고 통사는 이마를 짚었다.
“마마, 하시고 싶은 말씀이 대체 뭡니까?”
“경왕을 진짜로 고치면 어쩌죠?”
귀비가 걱정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데도, 고 통사는 실소를 터트렸다.
“웃지 마요.”
귀비는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신의는 진짜 고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진소 부친을 봐요. 금석을 먹었던 동 내한도…….”
저잣거리에 도는 풍문은 고 통사도 물론 알고 있었다.
“만 관에 목숨을 고쳐 준다는 그 신의요?”
고 통사가 멈칫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만에 하나…….”
진안 군왕이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의원을 찾아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의원을 찾아가겠다더니, 돌연 떠나 버렸다. 대체 어느 의원을 찾으러 간 건지 귀비가 알아냈을 무렵, 진안 군왕은 벌써 떠난 지 오래였다.
그 녀석이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대비한 거지. 아니라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어!
“그냥 무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얘길 들어보니 의원은 아니라던데. 병을 고치는 비술이 있다 한들,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 몇 사람을 고친 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죠.”
고 통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죠. 만에 하나 이번에도 고치면요?”
“만에 하나요? 만에 하나 고치더라도, 한 번 다쳤던 몸입니다. 대황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치면 안 된다고요!”
귀비가 소리를 빽 지르며 말을 끊었다. 고 통사가 눈을 부릅뜨고 굳은 얼굴로 귀비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소문이, 모함이 아니라 근거 있는 얘기였습니까?”
귀비가 눈을 껌뻑이며 고 통사를 쳐다봤다.
“아니에요. 아, 그, 그래요. 그 애도 참, 어쩌다 그런 일을 벌인 건지…….”
귀비가 말을 이었다.
“행여 깨어나서 허튼소리라도 지껄일까 걱정이에요. 명심해요. 이건 절호의 기회라고요. 대인도 지금 의심하고 있잖아요. 황후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고 통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그 의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 통사가 탁자를 짚고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물었다.
“뭘 하겠다고?”
놀란 표정의 진 시강이 앞에 앉아 있는 진십삼을 보며 물었다. 진 시강은 자기 집인데도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군왕이 경왕을 모시고 병을 치료하러 가는 걸 막아? 네가 제정신이냐?”
경왕의 일에 대해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진안 군왕이 경왕과 함께 밖으로 의원을 찾으러 나간다는 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행동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고, 황제도 동의했다.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피와 우애를 나눈 육친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때에 나서서 막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인륜을 저버리고 도의를 모르는 작자라 할 것이다. 세간에서 욕을 먹는 건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잃는다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 낭자는 신의로 얻은 명성을 간신히 잠재운 상황입니다. 이번에 병을 고치게 되면 낭자의 뜻대로 안 되잖아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지만 진 시강은 전혀 웃긴 얘기가 아니라는 듯 무거운 표정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야 당연히 알죠.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지지 않습니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누군가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법…….”
탁 하는 소리가 진십삼의 말을 끊었다. 어두운 표정의 진 시강이 손으로 탁자를 내리친 터였다.
“십삼, 너무 공연한 생각을 하는구나.”
진십삼이 빙긋 웃었다.
“압니다, 알아요. 이게 제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종종 비현실적이고 충동적이죠.”
진 시강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십삼, 너도 네가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거다. 명심해라.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야. 특히 그런 대역무도한 일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여 넘겨짚는 건 금물임을 명심해라.”
진 시강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군자는 마음이 평온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은 마음이 항상 근심으로 조마조마하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 <논어>)고 했느니라. 저만 잘났다고 잔머리를 굴리는 일을 대도(大道)라 할 수는 없지!”
진십삼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 시강은 진십삼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네 두 번째 반응은 무엇이더냐?”
“정 낭자한테 서찰을 쓸까 합니다. 요즘 경성에서 일어난 새로운 일을 전해 주려고요.”
그 말에 진 시강은 잠자코 아들을 쳐다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정 낭자라는 이를 직접 본 적은 없다만, 그동안의 일들을 보면 그 낭자는 너와 완전히 다르더구나.”
진십삼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부친을 쳐다보았다. 당시에는 부친 몰래 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진십삼이었기에 부친이 정교랑에 대해 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는 않았다. 놀라운 건 부친의 평가였다.
정 낭자는 나와 완전히 다르다고? 어째서 다르단 말이지? 우린 분명 같아. 둘 다 몸이 안 좋았고, 둘 다 똑똑한데.
무릎 위에 올려둔 진십삼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말도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은 본디 다르니까. 그런데도 진십삼은 속이 편치 않았다.
다르다는 그 말이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처럼 느껴졌다.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다는 듯이.
“아버지.”
진십삼은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을 열고 싶을 뿐이었다. 뭐라도 말하려고. 그래야만 부친의 말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낭자는 어떻게 장강주를 설득했을까?”
진 시강은 진십삼의 말을 듣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그 낭자가 정도(正道)였기 때문이다. 고 통사와 진 상공이 음으로 양으로 무슨 수작을 벌이든, 장강주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무슨 계산을 따져봤든 상관없었어. 정 낭자는 자신의 사심을 정당하고 떳떳하게 꺼내 보여 주었지.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어떤 음모도 없이 말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사악함은 올바름을 이길 수 없다(邪不勝正) 생각하고, 정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대도(大道)니라.”
진십삼은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 맞아. 낭자는 그런 사람이었지.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며 올곧게 걸어가는 사람이었어.
“그 낭자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존경할 만해.”
진 시강이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옷소매를 털었다. 진십삼은 그런 아버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 있던 진 노태야를 금침으로 사흘 만에 일어나 앉게 하고, 숨이 끊어졌던 동 내한을 술과 안주를 약 삼아 하룻밤 사이에 회생시켰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진 시강의 물음에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괴력난신을 떠올렸습니다.”
“너도 그러할진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신기와 같은 비술을 가졌으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떼돈을 벌 만도 한데, 정 낭자는 거기서 과감하게 멈추고, 그 명성이 잊혀지도록 조용히 지냈다.”
“아버지, 그게 옳은 일입니다. 괜히 귀신이니 뭐니 하는 말이 돌아 태평도(太平道: 후한 말기에 생겨난 도교 교단)나 미륵교처럼 신도들이 생겨나면, 결국 조정에서 칼을 빼지 않겠습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그런 세상사의 이치를 꿰뚫어보긴 쉽지만, 막상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 그만두고 물러나기란 그리 쉽지 않아. 흐드러지게 핀 꽃은 사람을 홀리기 마련이지.”
거기까지 말한 진 시강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십삼, 그리 이치에 통달하고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인데, 네가 굳이 귀띔할 필요 있겠느냐?”
진십삼이 멈칫했다.
“아들아, 관심이 지나치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진 시강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관심이 지나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니…….
부친이 이런 농담을 건넨 건 처음이었기에, 진십삼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됐다.
“정말 잊었나 보군. 병을 고치지 않는 세 원칙 말이다.”
진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
방문 진료를 하지 않고,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으며, 병을 고쳐 준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다.
속으로 원칙들을 되뇌던 진십삼은 순간 멈칫했다.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는다!
“그래서, 원칙이라는 게 좋은 거다.”
진 시강이 다시 서책을 들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경왕의 병이 낫는 걸 원치 않으시는…….”
잠시 침묵하던 진십삼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서책을 쥐고 있던 진 시강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
진십삼은 네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십삼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만약, 원칙은 원칙일 뿐이고,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다면요?”
어쨌거나 바보의 병을 고친 예가 생생하게 있지 않은가. 그런 낭자가 못 고친다고 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과 부친조차도 못 믿지 않는가. 그들은 그 원칙이 좋은 원칙이라는 걸 믿을 뿐이었다.
“그건 그 낭자의 선택에 달렸지.”
진 시강이 아들을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귀띔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알았다고 하며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훅 불어오자, 회랑을 걷던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건 낭자 본인의 선택이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거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웃으며 혼잣말을 하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준마 여러 마리가 경성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각기 다른 성문에서 나왔지만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깊은 밤, 곁채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반근은 옷을 걸치고 앉아 손에 든 서찰 한 통을 쳐다봤다. 탁자 위에도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어두컴컴한 등이 반근의 얼굴을 비췄다. 다소 창백한 얼굴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개 짖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반근은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옷깃을 꽉 잡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발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누구냐?”
대문 밖에서 야간 당직을 서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역시 누가 왔어!
반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 밖에서는 더 이상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가 곁채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 집사.”
반근이 문을 열자, 등롱 아래에 서 있는 조귀의 모습이 보였다. 조귀가 무거운 표정으로 반근을 향해 손짓했다. 반근은 얼른 문을 닫고 나와 마당 한쪽 옆으로 갔다.
“또 한 통이…….”
반근은 조 집사가 건네는 서찰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느 집이에요?”
반근이 물었다.
“이번에도 주씨 가문이래.”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룻밤 사이에 네 통이라니, 주씨 가문이 방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당초 경성을 떠날 때 주 노야가 했던 말처럼, 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주씨 가문은 평생 정교랑과 같은 배에 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은 가족과 떨어질 수 없었다.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그 가족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 낭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주씨 가문도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주씨 가문은 가장 좋은 표적이자, 맨 앞에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방패였다.
“경성에 일이 났나 보다.”
“아씨를 깨울까요?”
조 집사의 말에 반근이 물었다. 조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든 서찰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깨우자.”
서찰 네 통을 금세 읽은 정교랑은 알았다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근과 조 집사는 정교랑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지만, 정교랑은 다시 자러 가려는 듯했다.
“아씨,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이에요?”
하는 수 없이 반근이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 서찰들엔 요즘 경성에서 일어난 새로운 소식들이 담겼어. 내 안부도 물었고. 그다지 중요한 건 없어.”
경성의 새로운 소식이라…….
조 집사는 짚이는 게 있었다. 예상대로 뭔가 일이 났음을 알리는 서찰이었다. 아마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하룻밤 새에 서찰이 네 통이나 왔다. 그것도 각기 다른 곳에서 전부 주씨 가문의 이름을 빌려 보낸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쨌거나 아씨한테 경계하라는 귀띔을 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반근은 조 집사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안도했다.
아씨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시니 별일 아니겠지.
“그럼 아씨, 내일 그대로 출발할까요?”
반근이 물었다.
“물론이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정교랑은 전에 얘기한 대로 양주로 가는 채비를 시작했다.
경성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과 점포 배당금으로, 먼 길을 떠나기에 충분한 돈과 식량이 마련됐다. 반근 역시 정씨 가문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다들 이곳 사람이 아니니 새해 명절이라 해도 조상 앞에 제를 올리거나 하는 일은 챙기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다들 새해 명절 준비로 바쁜 이때, 이들은 먼 길을 떠날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요 며칠 마차와 말까지 준비를 마쳤고, 내일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씨, 그럼 쉬세요.”
반근과 조 집사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촛불의 불을 끄고 문을 닫자 어둠과 함께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반근은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동녘이 밝아오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러 나갔다. 날이 조금씩 밝을 무렵, 대문 밖에서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나 싶더니 대문 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멈춰라. 누굴 찾아왔느냐?”
소란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경성에서 왔다. 정 낭자를 뵙고자 한다.”
또 경성에서 사람이 와? 이번에도 서찰을 보낸 건가?
반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이 누군지 물으며 두모를 벗기자 소년의 용모가 드러났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년 역시 새벽빛을 받고 선 반근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 고, 공자셨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날 알아보는 이가 있네. 정말 다행이야.”
소년은 기쁨이 감춰지지 않는 눈으로 씩 웃었다.
알아보다마다. 이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아씨께서 아직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을지도 모르는걸.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공자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반근이 물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소년을 볼 수 없었다. 이따금 생각이 날 때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 같기도 하고,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나타날 줄이야.
소년은 반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차에 짐을 싣느라 분주한 주씨 가문 시종들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디, 가려고?”
질문을 던지는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햇빛을 받으며 선 소년의 웃음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 같아 반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네, 막 출발하려던 참이에요.”
소년은 아, 하며 대꾸했다. 얼굴의 웃음기는 더욱 진해졌지만, 눈빛은 침울해 보였다.
“그렇구나. 정말 딱 맞춰 왔네.”
소년이 천천히 말했다.
딱 맞춰 왔다고? 이게 딱 맞춰 온 건가?
공자가 막 도착했을 때, 이들은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못 만났을 것이다. 근데 이게 딱 맞춰 온 거라고?
아, 하긴. 딱 맞춰 온 것도 맞네. 한발만 늦었으면 못 만났을 테니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는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 아씨께서 마차 두 대를 줄이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걸어오며 말하던 조 집사는 대문 앞에 선 소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상대를 알아보고 더욱 놀랐다.
“아니, 너, 너, 너는 그……···.”
그날 밤 산골짜기, 늑대의 울음소리,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있던 그 불량한 소년이 아닌가.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 아니냐?”
조 집사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맞소. 납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입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또 그러고 있네요.”
뭐라고?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 또 그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또 뭐가? 또 늑대 떼를 몰고 왔다고?
조 집사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안에서 반근이 나왔다.
“공자님, 안으로 드세요.”
반근이 웃으며 길을 비켜섰다. 진안 군왕은 곧장 걸음을 옮기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대문 안을 쳐다보았다. 마당은 아주 작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곧장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았다. 따라서 대문을 열자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고, 커다란 검은색 두봉을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오목조목한 얼굴, 새까만 두 눈과 담담한 표정이 보였다.
언제 보든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두봉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진안 군왕은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휘잉 부는 밤바람에 화르르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작고 여윈 체구에도 정해신침(定海神針: 중국 황룡 동굴 내 가장 긴 종유석)처럼 우뚝 서 있으면서, 주변의 비명 소리와 늑대 울음소리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
여인이 횃불을 들고 말했다. 침착하고, 태연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저놈들의 코를 태워라! 저놈들의 코를 태워! 저놈들의 약점을 태워 버리란 말이다!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반근이 따라 들어가려는데, 조 집사가 뒤에서 붙잡았다.
“저 녀석은 뭐 하러 온 거야?”
조 집사의 물음에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일정이 지체되면 안 되는데.”
조 집사는 의혹의 눈길로 안쪽을 쳐다보았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었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 앉자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올린 후,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일정이 지체되는 건 아니겠죠?”
진안 군왕이 가장 먼저 꺼낸 말에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봤다. 정교랑은 살짝 답례를 전할 뿐 잠자코 있었다.
진안 군왕은 빙긋 웃더니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반근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잔만 더 다오. 간식이 있으면 그것도 좀 주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뭐지, 밥을 안 먹은 건가?
소년을 보던 반근은 그제야 시뻘건 실핏줄이 보이는 눈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봤다.
밤새 길을 재촉했나?
반근은 얼른 대답하고 일어나 나갔다. 마당에 서 있던 조 집사는 반근이 부엌으로 들어가 차와 떡 등을 분주하게 준비해 나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뭘 먹겠대?”
조 집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시간이 꽤 됐는데.”
반근은 도리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뭘 그리 초조해하세요?”
조 집사는 그 질문에 멈칫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방 안을 쳐다보았다.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서.”
조 집사가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간식을 집어 곧바로 입에 넣었다.
“뜨거워요.”
반근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진안 군왕은 입을 가리고 스스, 하며 찬바람을 넣어 식히고는 옆에 있던 차를 들어 마셨다.
“결례를 보였습니다.”
진안 군왕이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교랑은 잠자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간식과 차를 먹고 나자 소년의 얼굴에 한층 생기가 돌았다. 소년은 정신이 좀 드는지 방 안을 살폈다. 이미 짐 정리를 마친 후라 텅 비어 보이는 방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낭자가 불편할까 걱정이네요.”
소년은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날 불편하게 할 순 없어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날 불편하게 할 순 없어요.
무심한 표정,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 왜소하고 허약한 신체.
작디작은 이 여인은 늘 그랬다. 진안 군왕은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사실 이들이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만나서 대화까지 나눈 일은 더욱 적었다. 그래서 진안 군왕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도, 낭자가 날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구해 줄 필요가 없는데, 어떻게 구할 수 있겠어요.”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은 어리둥절했다. 귓가에 또 다른 반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아휴, 저 두 사람은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반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방백종이라 합니다.”
빙긋 웃던 진안 군왕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부왕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고…….”
뭐라고? 부왕?
반근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당에 있던 조 집사는 기다리다 못하고 이쪽 회랑으로 걸어와 반근에게 손짓했다. 그러다 보니 조 집사도 안에서 들리는 소년의 말을 듣게 됐다.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폐하께서 지어 주신 겁니다. 지금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고요. 내 이름은 방위(方瑋)고, 봉호는 진안입니다.”
조 집사는 숨이 넘어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반근에게 손짓을 하려고 내밀었던 손으로 그저 방 안을 가리킬 뿐이었다.
성은 방씨! 봉호는 진안!
천하에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고 많았지만, 봉작을 받을 수 있는 가문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방씨 황족이었다.
진안 군왕…… 진안 군왕!
그럼 저 사람이!
경성! 경성!
조 집사의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럼 경성에서 온 서찰들에 담긴 소식이 저자에 관한 것이었겠군.
진안 군왕은 놀란 조 집사와 반근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앞의 여인을 봤다. 예상대로 여인은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누가 말해 줬나 보군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신분 말인가요? 당신이 말해 줬잖아요.”
“내가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차요.”
차라면…….
진안 군왕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황궁의 차를 선물한 적은 있지만, 그게 황궁의 차라고 말하진 않았다. 어디선가 마셔 봤거나, 누가 말한 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황궁으로 진상하는 차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게 아닌데.
“천가의 꽃등 놀이!”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이고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으며 정답을 맞힌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여기 온 이유를 생각해 보면,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치료를 받으러 왔어요.”
문가에 있던 반근은 이제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에도 둘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종잡을 수 없어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군왕! 황실 사람! 치료!
이 셋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거야?
정교랑은 뜻밖이라는 눈치였다.
“나는 아니고요. 난 먼저 왔고, 병자는 뒤에 오고 있어요. 낭자의 원칙을 알기에, 병자를 데리고 직접 찾아온 겁니다.”
반근은 이미 생각하기를 포기한 상태인지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하지만 조 집사는 여전히 생각 중이었다. 원칙. 황실 사람도 아씨의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 집사는 우쭐한 기분이 들거나 흥분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누군가가 내 원칙을 존중해 준다는 건 물론 기쁜 일이지만,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남에게 예를 지키는 건 바라는 바가 있어서라고. 그러니 오기(吳起) 장군이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아 주었을 때, 병사의 노모가 대성통곡을 한 것이리라.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씩 웃고,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저들은 걸음이 느려 뒤처졌고, 나만 먼저 온 겁니다. 낭자를 만나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가서 저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정교랑도 배웅을 위해 일어났다. 진안 군왕은 기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문가에 있던 반근과 조 집사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함께 배웅했다.
대문을 나서려던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아, 참.”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떠나려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대문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지체되는 건 아니죠?”
저 말은 물어본 거 아니었나?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소년을 쳐다보았다.
왜 또 묻는 거지?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나지 않겠단 건가?
정교랑이 소년을 보며 웃었다.
“지체된다고 볼 순 없죠. 그동안 준비하느라 떠나지 않고 있었어요. 먼 곳으로 갈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준비 기간이 좀 길었고, 이제 준비를 끝냈어요. 하루 일찍 떠나나 늦게 떠나나 똑같아요.”
“일이 정말 딱 맞춘 것 같네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교랑을 보며 웃는 진안 군왕의 모습은 새벽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걸 왜 묻는 거죠? 벌써 몇 번을 물었잖아요.”
반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저걸 왜 묻는지 알고 싶지 않구나. 난 그저 우리가 늦지 않게 떠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야.”
조 집사가 중얼거렸다.
정씨 저택에서는 정교랑 쪽에 생긴 일을 전혀 몰랐다. 수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어찌 됐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정 이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두어 번 했다. 토시에서 손을 빼자 더욱 한기가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냐? 다들 죽은 게야?”
정 이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문밖에 있던 두 여종이 얼른 들어왔다.
“왜 이리 추워? 화로에 불이 꺼져도 안 들여다보지?”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두 여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쭈뼛 대답했다.
“부인, 안 꺼졌는데요.”
“안 꺼졌는데 이리 추워?”
“부인, 요즘에 산 석탄은 질이 안 좋아서요.”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멈칫했던 정 이부인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살기 싫으면 아예 살지를 말든가.”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고 입는 거로 분풀이를 하다니, 그러고도 무슨 음덕을 쌓아!”
정 이부인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자기가 저지른 업보에 온 가족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그러고도 염불을 외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이런 욕을 퍼부어 대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했다.
“어머니!”
정칠랑이 안에서 나오며 소리치자, 정 이부인이 말을 멈췄다.
“칠랑, 새해가 되면 외조모님 댁에 가서 며칠 지내다 오거라.”
“싫어요.”
정칠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내 집을 두고, 왜 남의 집에 가요?”
“요즘 집이 어수선하잖니. 거기 가서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아.”
정 이부인이 인상을 쓰며 다독였다.
“내 집은 여기예요. 다른 곳은 내 집이 아니라고요. 아무리 좋아도 내 집은 아니잖아요!”
정칠랑은 굳은 얼굴로 빽 소리를 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 이부인이 소리쳤지만, 정칠랑의 걸음을 붙잡을 순 없었다.
우다다 뛰어나간 정칠랑은 곧장 정 대부인의 마당으로 갔다. 하지만 정칠랑은 마당 문 밖에서 걸음을 멈췄다.
예전엔 이맘때면 집 안이 늘 떠들썩했다. 여종들은 새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새해 선물이 오갔다. 형제자매들도 한곳에 모여 떠들썩한 명절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세밑 분위기는커녕 사람이라고는 없어 썰렁하기만 할 뿐이었다.
정칠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서는 약 냄새가 났다. 여종 둘은 무언가를 씻고 있었고, 대청의 문이 열려 있어 그 안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정 대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 돈은 건드리면 안 되는데…….”
정 대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부인, 점포에 빚이 너무 많습니다. 물건을 대는 업주들도 독촉이 심하고요.”
집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뭘 하려고?”
정 대부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방 안에서 정 대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부인은 집사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과 육랑을 고모님네서 모셔 오려고요. 그러려면 방을 좀 손봐야 해서요.”
방 안에 있던 정 대노야에게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 대부인이 집사를 향해 손을 내젓자, 집사는 난감해하면서도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장부를 챙겨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개를 들던 정 대부인은 마당에 있던 정칠랑을 그제야 발견했다. 정 대부인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금세 무표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정칠랑은 벌써 쪼르르 안으로 들어가 정 대부인 옆에 앉아 백모님을 불러대며 과일 절임을 먹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정 대부인도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테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네. 백모님 얼굴에서 그런 자애로운 미소가 사라진 게 언제부터였지?
“칠랑, 육랑을 보러 왔니? 아직 안 왔으니 다른 데 가서 놀거라.”
정 대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정칠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백모님, 하고 불렀지만 정 대부인은 못 들은 척했다.
“노야께서 약 드실 시간이다. 약은 아직이더냐?”
정 대부인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여종이 얼른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마저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정칠랑만 덩그러니 남았다. 정칠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입을 삐죽거리고는 뒤돌아 다시 뛰어갔다.
“아씨, 어디 가시려고요?”
정칠랑을 따라왔던 여종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정칠랑을 향해 외쳤다. 정칠랑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대문 밖으로 달려갔다.
“어딜 나가세요!”
여종들이 소리를 지르며 얼른 뒤따라갔다.
집 밖으로 나오니 바깥 분위기는 떠들썩했다. 오래된 골목에는 폭죽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다. 소란스러웠지만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고 정신 사납게 만드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활기차고 생생한 느낌이었다.
정칠랑은 뭍으로 나와 있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런 기분을 집에서 느끼지 않고 밖에서 느끼다니, 그것도 이런 남정 골목에서! 진짜 웃기지도 않아!
웃고 장난치던 아이들은 정칠랑의 등장에 동작을 멈추었다. 정칠랑 역시 그들을 쳐다보았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손이며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들인데 다들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내가 웃겨?
“꺼져!”
정칠랑이 소리치며 소매를 걷고 앞으로 달려갔다. 정칠랑은 정교랑의 대문 앞에서 걸음이 막혔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정칠랑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은 정중앙에 앉아 있고, 모두가 공손한 태도로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부님과 백모님이 말씀하실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대문 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쳐다봤다.
“아씨,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계가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이 물러났다. 조 집사가 손을 내젓자 정칠랑을 막고 있던 시종이 비켜섰다.
“정교랑!”
정칠랑은 이를 악물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정칠랑을 쫓아왔던 여종들은 뒤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정칠랑의 말에 기겁을 했다.
“아씨,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언니라고 부르셔야죠.”
여종들은 정칠랑에게 나지막이 주의를 주고는 정교랑을 향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니는 무슨!”
정칠랑이 여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널 언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어. 너한테 언니라고 부르려면 널 언니로 여겨야 하잖아. 널 언니로 여긴단 말을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바보지!”
여종들은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방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은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야. 역시 어린애는 솔직하다니까.”
“아씨, 아씨까지 똑같이 굴지 마세요.”
여종들은 정교랑에게 사죄하며 얼른 정칠랑을 데려가려고 했다.
“정교랑, 넌 바보야. 우린 널 좋아하지 않아. 우린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너 우릴 해치러 왔지?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 건 네 잘못이야. 그러게 누가 바보로 태어나래? 그러게 누가 사랑을 못 받으래? 그건 네 잘못이야. 근데 왜 우리한테 화풀이냐고!”
정칠랑이 발버둥을 치며 악을 쓰자, 여종들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정칠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정교랑이 일어서며 말했다.
활을 쏘려는 거야! 사람을 죽이려고!
여종들은 놀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씨…….”
여종들이 소리치며 무릎을 꿇었다.
“이리 와.”
정교랑이 정칠랑을 향해 손짓했다. 여종들이 사죄를 올리는 틈에 몸을 빼낸 정칠랑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난 너 안 무서워!”
정칠랑이 소리쳤다.
“네가 날 무서워하고 안 무서워하고는, 너의 일이야. 나와는 상관없어. 신경도 안 쓰고. 너희가 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 역시 너희의 일이야. 나와는 상관없고 신경 쓰지도 않아.”
정칠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너희가 날 싫어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너희의 잘못도 아니고.”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정칠랑은 굳은 얼굴로 고집스레 정교랑을 쳐다봤다.
“싫어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남을 괴롭히는 것도 잘못이라 할 순 없지. 세상이 원래 그렇거든.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이에겐 잘해 주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겐 못되게 구니까. 그건 인간의 본성이니 비난할 것도 없어.”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못이 있다면,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게 잘못이겠지.”
정교랑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괴롭힐 거면 상대를 제대로 봐야 해.”
정칠랑은 분노조차 잊은 듯 눈앞의 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슨 소릴 하는지 왜 못 알아듣겠지? 지금 대체 누가 바보야?
“또 뭐라고 하더냐?”
손으로 침상을 짚으며 일어나 앉으려던 정 대노야는 기력이 달려 도로 누웠다. 격렬한 기침이 나왔다.
“입 다물거라. 넌 왜 이렇게 철이 없어?”
정 대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정칠랑을 밀쳤다. 바닥에 꿇어앉은 정칠랑은 정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백모님이 날 밀치셨어. 저 냉담한 표정에 슬퍼하는 게 당연한데, 난 왜 슬픈 마음이 별로 안 들까?
싫어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이에겐 잘해 주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겐 못되게 굴거든.
“말하게 두시오.”
정 대노야가 정칠랑에게 물었다.
“또 뭐라고 하던?”
“앞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지 확실히 알아보래요. 자신보다 약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만, 자신보다 강하면 싫어한다는 걸 숨기고 절대 들키지 말래요. 괴롭히는 건 더더욱 안 되고요. 안 그럼 대가를 치러야 한대요.”
정칠랑의 말에 정 대노야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런 대가를 치르는 건 자업자득이란 말이구나.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나 탓해라?”
물론 정칠랑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정칠랑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정교랑의 말을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 전달한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정 대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정 대노야에게 그만 얘기하라고 했다.
“우리 집에 그런 애 없었던 거로 쳐요. 노야, 노여워할 것 없어요.”
“노야, 노야.”
그때 문밖에서 집사의 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들어오라는 말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관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관부에서 또 사람이 와?
“새해맞이도 제대로 못 하게 하려고? 기어이 내가 관아 앞에 가서 머리를 박고 죽어야 관두겠다더냐?”
정 대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요, 아닙니다, 부인. 판결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판결이 났다고?
정 대노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 대부인 역시 정 대노야를 돌볼 새도 없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정말이냐?”
관부에서 벌써 재판 결과가 나왔다고? 우리 정씨 가문을 들볶아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
“네, 혼수를 정 낭자한테 주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집사가 신이 나서 말했다.
혼수를 정 낭자한테 주라고…….
정 대노야가 집사를 쳐다봤다. 이런 소식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기뻐하는 집사의 웃음과 안도하는 정 대부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서글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래, 그래, 그렇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서 집안의 재물을 잃고 형제가 갈라서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구나.
그래, 그래, 그렇지.
이게 그 대가로구나. 인정하마!
정 대노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침상에 도로 누웠다. 눈을 뜰 기력조차 남지 않은 듯 가만히 손을 들어 정 대부인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피곤하구려. 쉬어야겠소.”
정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한편 그 소식에 기뻐하는 이는 또 있었다. 정 이부인이었다.
“판결이 나왔다고?”
사실 진작 예상했던 일이었다. 혼수를 누구에게 주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판결이 나오는 시기가 문제였을 뿐. 판결이 일찍 나온 걸 보면 어쨌든 정교랑이 정씨 가문을 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종이 어색하게 웃었다.
“잘됐구나. 연말에 이런 판결이 나왔으니, 두 발 쭉 뻗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어.”
신이 난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어서 가자. 교랑을 보러 가야겠다. 그 많은 점포의 장부를 받아 관리해야 할 텐데, 교랑 혼자서는 힘들지.”
그러니 계모인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거야. 혼수를 넘겨받아야지. 이건 엄연히 우리 거야. 다시는 대방에서 눈독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해.
정 이부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남정으로 왔다. 하지만 정교랑의 거처는 텅 비어 있었다.
“떠났다고? 어디로?”
정 이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씨께서 일이 있다며 다른 곳에서 지내겠다고 하셨어요.”
문을 지키던 아낙이 쌀쌀맞은 투로 대꾸하고는 손에 든 빗자루로 땅바닥을 힘껏 쓸었다. 뽀얀 먼지가 일자 정 이부인 등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얼른 비켜섰다.
“어디로?”
정 이부인은 그러면서도 다급하게 물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아낙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정 이부인은 그런 아낙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기에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곧 새해인데 또 어디로 간 건지…….”
돌아서던 정 이부인은 언제 왔는지 모를 낯선 사내 셋이 뒤에 서 있는 걸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여간 여긴 지저분하고 법도도 없다니까. 남녀가 유별한 것도 모르고.
정 이부인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자리를 떴다.
갔다고…….
진안 군왕의 귓가에 아낙의 말이 울렸다. 진안 군왕은 두모를 들어 올리고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힘이 쭉 빠지며 몸이 떨려왔다.
“전하, 아니, 공자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감시할 사람을 남겨야 한다고…….”
감시? 감시했어도 떠났을 텐데, 다를 게 뭐 있어?
진안 군왕이 주먹을 꽉 쥐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정 낭자가, 떠났습니까?”
“떠났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아낙은 성가신 듯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다가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더니 놀라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웃음을 지었다.
“혹시 경성에서 온 공자님이세요? 아씨와 약조를 했다던?”
그 말에 진안 군왕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아낙을 빤히 쳐다봤다.
“그렇습니다만.”
흥분한 듯 진안 군왕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날 아시오?”
“아씨께서 준수하게 생긴 공자에 대해 말씀을 남기고 가셨거든요.”
아낙은 웃으며 소매에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아씨께서 여긴 불편하다며 다른 곳에서 공자님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
준수하게 생긴 공자!
손을 뻗어 서찰을 받는 진안 군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웃고 있는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럴 줄 알았어. 낭자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지. 절대 날 속일 리 없어. 절대!
C : 고칠 수……
세밑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현묘관의 참배객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불이 약한 것 같구나. 너희 둘도 같이 가서 불을 때라.”
손 관주가 두 도동에게 명하자 도동들이 얼른 대답하고 불을 때러 갔다.
“또 뭘 해야 하지? 더 준비할 게 뭐가 있으려나.”
손 관주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며 혼잣말을 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밖에 있던 반근이 들어와 손 관주를 보며 웃었다.
“관주님, 그리 바삐 움직이지 않으셔도 돼요. 잠시 묵는 거예요.”
“잠시 묵는 것도 묵는 건데 대충 할 수야 없지.”
손 관주는 후회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름에 내가 방에 있는 자리를 갈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태 안 갈았지 뭐야. 지금 다시 불을 지피면 곰팡내가 날 텐데.”
“괜찮아요. 처음 불을 지피는 것도 아니고, 관주님께서 쭉 불을 때셨는데 무슨 곰팡내가 나요. 향만 좋던걸요.”
반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손 관주는 여전히 불안한 듯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아씨의 손님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잖아. 그건 아씨의 체면을 깎는 일인데.”
“아씨의 체면이 다른 사람 때문에 깎이겠어요?”
반근이 웃으며 대꾸하자 손 관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씨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
손 관주는 앞에 있는 몸종을 쳐다봤다.
반근이라…….
“너도 이름이 바뀐 거니?”
손 관주는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는 듯 웃으며 물었다.
“또 누가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반근도 웃으며 되물었다. 손 관주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손 관주의 귀에는 묵인으로 들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갔다.
“글쎄 금가아를…….”
“금가아요?”
반근은 금가아라는 말만 듣고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 반근이 하나 더 있을 뻔했구나.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누나, 나 불렀어?”
금가아가 이쪽으로 달려오자, 반근과 손 관주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금가아만 이들이 왜 웃는 건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분들 쉴 곳은 마련해 드렸어?”
반근이 웃음을 거두고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온 사람이 많진 않아. 방금 곁채에 자리를 마련해 드렸어. 그 공자님도 거기에 계셔.”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필요한 거 있나 가 봐야겠어요.”
반근이 손 관주에게 말했다.
“그래. 어째 죄다 사내들만 왔는지. 여인은 하나도 안 데려왔네. 가서 살펴봐. 난 아씨께서 잘 주무시나 가 볼게.”
반근과 손 관주는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반근은 금가아가 알려 준 길로 걸어갔다. 겨울인데도 주변이 적막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평소에 정성 들여 가꾼 듯했다.
그때 아씨께서 이곳에 지내셨겠구나. 그 구역질 나는 연놈들도 여기서 마주치셨을 테고.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아씨 곁을 지켜 드리지 못한 게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으아!”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반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반근은 어느새 마당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안쪽으로 아이 하나가 보였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입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를 내며 손에 든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육가아, 어서 내려놔. 손 다칠라.”
소년이 급히 달려와 아이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나뭇가지를 빼앗으면서 나뭇가지에 다치지 않으려다 보니 소년은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손이며 얼굴이 여기저기 긁혔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아씨, 아씨, 그거 내려놓으세요. 이거 가지고 노세요.
반근의 눈앞에 환각과도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거기도 도관이었고, 거기에도 이렇게 작은 마당이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저으며 히죽히죽 웃고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니는 어린 아씨와 그 뒤를 조심스레 쫓아다니는 어린 몸종…….
“육가아, 밥 먹자.”
아, 하세요. 착하죠, 한 입만 드세요.
밥알이 튀고 밥그릇이 엎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 먹으면 안 돼”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씨, 얼른 버리세요. 바닥에 떨어진 건 먹으면 안 돼요. 어서 이리 주세요.
어린 몸종은 어린 아씨의 손에서 얼른 전병을 빼앗았다. 귓가에 딱딱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가아, 거기 서.”
주먹밥을 빼앗긴 아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도 제대로 안 보며 무작정 달리자, 진안 군왕이 얼른 뒤쫓아갔다. 반근이 손을 뻗어 아이를 붙잡았다.
“자, 착하죠. 말 들으세요. 저기 가서 놀아요.”
반근이 몸을 낮춰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아이가 반근을 향해 헤헤 웃었다. 생기 잃은 얼굴에 눈빛은 흐리멍덩했으며 입에서는 침이 죽 흘러 옷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보는 열에 아홉은 못생기기 마련이었다. 표정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 보니 기괴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 눈에는 못생기고 무서워 보였다.
헤헤 웃던 아이가 갑자기 홱 달아났다. 아이는 비틀비틀 달려가며 이이야야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떨어진 밥그릇을 본 진안 군왕이 얼른 달려가 주우려 했다.
“공자님, 제가 할게요.”
반근이 나서자 진안 군왕은 고집을 피우는 대신 반근이 하게 두고, 한쪽 옆에 앉았다. 진안 군왕은 마당을 어지러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돌렸다.
“예전엔 저렇지 않았다. 병이 난 거야. 병만 고치면 아무 일 없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을 정리하던 반근은 진안 군왕을 힐끔 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잠시 숨을 고른 진안 군왕이 다시 일어나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육가아, 형이 옷 갈아입혀 줄게.”
진안 군왕이 아이를 붙잡았다.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몰라 으아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내들은 남을 돌보는 일에 서툰데, 하물며 저런 바보를 돌보는 일이라니. 이 공자님은 왜 시중들 사람도 안 데려왔지?
“공자님, 제가 도울게요.”
반근이 일어나 다가왔다.
“도움은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반근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안 도와도 돼. 도와주는 건 한순간이지, 어차피 평생 도울 순 없지 않느냐.”
진안 군왕이 한결 누그러진 투로 말을 덧붙였다. 진안 군왕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육가아, 육가아. 말 듣자, 형이 옷 갈아입혀 줄게.”
끊임없이 사고를 치며 소란을 피우는 아이와 성가신 기색은 조금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는 소년을 보며 반근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그릇을 정리해 부엌으로 가져다 놓고, 빗자루를 들고 나와 바닥의 흔적을 지웠다.
마당의 문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일어나셨네요.”
고개를 들던 반근이 정교랑을 보고 반색을 하며 외쳤다. 두봉을 걸치고 두모를 쓴 정교랑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도 반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몸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어서 좀 봐요. 이 아이가 병자예요.”
진안 군왕이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아이를 붙잡아 앞으로 밀며 말했다. 흥분한 표정의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며 아예 바닥에 철퍼덕 자리를 깔고 앉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어디서 보나 똑같아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과 불안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됐어요. 일 층 정도 높이였나 봐요. 더 높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앉아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떼를 쓰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흙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이는 흙을 집어 입으로 가져다 댔다. 진안 군왕이 얼른 다가가 손을 쳐내자 아이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육가아, 육가아, 이건 먹으면 안 돼. 간식 가져다줄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정교랑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얼른 간식을 가져다주는 소년을 반근과 함께 바라보았다. 물론 아이는 간식을 먹지 않았다. 손으로 뭉개서 반만 먹고 반은 내던져 버렸다. 바닥이며 몸에 간식이 묻었다.
“한 달 전에 다쳤어요.”
진안 군왕은 아이를 달래며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설명했다.
“그때 닷새 정도 의식이 없었죠. 그러다 깨어난 후로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어요. 사람을 못 알아볼 뿐이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사람만, 못 알아보는 거예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의 시선은 바닥에 누워 손가락을 빨고 놀며 으으어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는 아이를 향해 있었다.
사람을 못 알아보는 정도로 단순하지 않아.
“그, 그러니까 머리도 좀 온전치 않고요.”
진안 군왕이 얼른 덧붙이며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바라봤다.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데려온 겁니다. 아직 고칠 수 있겠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반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다시 한번 봐요. 잘 보라고요. 오늘 안 되면 내일 다시 봐도 되잖아요.”
소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애걸에 가까웠다. 반근은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병은 내가 못 고쳐요.”
마당에 울려 퍼진 여인의 목소리가 그대로 진안 군왕의 귀에 꽂혔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봐요, 다시 한번. 잘 보란 말입니다.”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지체하면 안 될까 봐 데려온 게 아니잖아요. 지난번에 제 원칙을 안다고 하셨죠.”
진안 군왕은 멈칫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경왕 전하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제 원칙을 아신다면, 제가 고칠 수 없다는 것도 아셨을 텐데요.”
마당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됐다. 바닥에 누운 아이의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정교랑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원칙이 있었다. 방문 진료를 하지 않는 것, 죽을병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는 것, 치료했던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 것.
진안 군왕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그녀에 관한 모든 일을 알았으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 마당으로 벼락이 떨어져 사람이 죽은 일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웃음을 지었다.
“저 꼴이 됐습니다.”
진안 군왕은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지쳤는지 아이는 더 이상 흙이나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지 않고, 침을 흘리며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했다.
“저 꼴이 됐습니다. 죽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못이라도 박겠다는 듯이. 하지만 소용없었다. 여인은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맞아요!”
진안 군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정교랑 앞에 섰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여 정교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맞다고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에는 이미 분노가 담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정교랑의 멱살을 잡을 태세였다. 다른 때였다면, 정씨 가문 사람들처럼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이었다면, 반근은 진작 달려들어 그런 자들이 아씨 옆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근은 고개를 들어 소년을 쳐다보았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지만, 표정에서는 절망이 숨겨지지 않았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정교랑은 돌연 손을 들어 어깨를 쓸어 주었다. 진안 군왕의 몸이 움찔했다. 그 손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백종.”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 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이미 기억하는 이가 없을 이름이었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가벼운 토닥임 속에는 분명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이미 저 꼴이 됐습니다. 죽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진안 군왕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건 다 좋고 건강해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안 죽어요.”
“하지만 죽었다고요.”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죽었습니다. 나의 육가아는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반근은 다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울었다.
“당신의 육가아가 죽었다면, 난 더더욱 고칠 수 없겠네요.”
그 말에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재회했을 때도 놀랍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며, 저렇게 된 아이를 보고도 혐오스러워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하긴,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거.”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했다.
“그럼 진씨 가문의 십삼공자는요? 거기도 죽진 않았는데 고쳤잖습니까.”
“그 사람은 달라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네. 그렇겠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따지고 보면 죽을 사람이었죠. 낭자 때문에 분통이 터져 초주검이 됐었으니.”
진안 군왕이 웃으며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육가아도 그렇게 고쳐 주십시오. 놀라서 까무러치게 하든, 아니면 다른 수를 쓰든 해서 죽게 만들어 놓고…….”
진안 군왕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정교랑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 좀 그만 흔들어요!”
진안 군왕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안 군왕의 고함에 마당 분위기는 다시 경직됐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정교랑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은 그런 정교랑의 모습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진 공자는 경왕 전하와 달라요.”
정교랑은 땅바닥에 누운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곧 잠이 들려는 것 같았다.
“경왕 전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없다? 예전의 아씨처럼…….
반근은 놀라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 공자에겐 마음이 있었어요. 자신에게 병이 있는 걸 알았죠. 간절히 바라는 게 있고, 두려움도 있고, 원한도 있었어요. 크게 슬퍼하기도 하고 크게 기뻐하기도 하며, 감정의 기복이 컸죠. 진 공자의 병은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었어요. 마음의 병은 죽을병이니, 내가 고쳐 줄 수 있죠.”
정교랑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우님은 지금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우님은 자신한테 병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당신 말처럼, 이제는 당신의 육가아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아우님은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자신이 누구든 상관없죠. 그저 자신일 뿐이니까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우님한텐 병이 없는 거예요. 죽을병이란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병에 걸린 겁니다, 병에. 어서 병이라고 말해요, 병이라고.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표했다.
“그러니까 전하, 아우님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전 못 고쳐요.”
마당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전의 침묵과는 다른 침묵이었다. 이번에는 분노도, 숨 막히는 압박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침묵이었다.
“그렇군요. 오(吾), 잘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오(吾)는 존귀한 황실 자제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었다.
반근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바닥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육가아, 땅바닥에서 자면 안 돼. 차갑잖아.”
진안 군왕은 아이를 품에 안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형이 데려다줄게. 마차에서 자.”
진안 군왕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여기 머물지 않고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정교랑을 힐끔 쳐다봤다.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대문 근처로 간 진안 군왕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정방.”
이 이름 역시 누군가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반근은 미처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이 돌아섰다. 겨울날 밝고 환한 정오의 햇살 아래에 선 소년의 날카로운 얼굴에선 심연처럼 깊고 그윽한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머리를 굴릴 줄 모르고 말뜻도 잘 못 알아듣는 반근조차 그 말의 의미는 대번에 이해했다. 반근은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소년은 아씨에게 늑대 떼를 유인한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는 그 말이 어디가 이상한지 의식하지 못했다. 똑똑한 반근 언니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며 놀라고, 똑똑한 반근 언니가 그 별 뜻 없어 보이는 질문에 숨은 위험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이해했다.
이번에도, 저 소년은 아씨를 의심하는 걸까? 아씨께서 일부러 병을 고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화를 내려는 걸까?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칙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거예요.”
정교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칙은 다른 이를 위해 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자신을 위한 거죠. 자신에게 말하고 일깨워 주기 위한 거예요. 얼마나 큰 그릇에 얼마만큼의 밥을 먹어야 할지.”
반근은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믿을까? 지난번에 아씨의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 전에 바보였다면서요? 당신도 전에 이러지 않았어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나았잖아요.”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바보였다면서요? 이렇게 더럽고 추하고 아둔해서, 남들한테 미움을 받았지만 다 나았잖아요? 당신은 나았으면서, 왜 이 아이는 못 고친다는 거죠? 당신은 고쳤잖아요.”
반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놀랍고 두려운 눈빛이었다.
나았으면 나은 거지, 안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씨 본인조차도 잊은 과거인데, 그 얘기를 꺼내며 따져 묻다니.
정교랑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정교랑은 낫지 않았다. 병이 나은 건 정교랑이 아니라 정방이었다. 바보 정교랑은 이미 죽었으니까.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힐끔 보고, 말없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결국 안 믿는 거구나.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차츰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문을 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소년의 모습을 바라봤다.
“관주님, 관주님.”
도동들이 달려오며 손 관주를 불렀다.
손 관주는 제자들에게 사야 할 가구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 낭자의 거처를 손님에게 내주었으니, 정 낭자는 당분간 산 아래의 현묘관에서 지낼 것이다. 양쪽 다 조금도 소홀히 대할 수 없기에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말이 끊긴 손 관주가 언짢아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참 바쁜데.”
“관주님, 정 아씨의 손님이 가셨어요.”
도동들이 말했다.
갔다고? 묵지도 않고 가 버리다니?
손 관주가 놀라 일어섰다.
“관주님, 저기 보세요.”
얼른 밖으로 나가 산문 아래에 서서 도동들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벌써 산길을 내려가는 무리가 있었다. 이어 마차가 보이고, 말에 탄 호위들이 주변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두봉을 걸친 소년 공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마차에 탔다. 이어 호령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세밑이 다가오긴 했지만, 산기슭에는 여전히 광주리를 들고 나와 노점 장사를 하는 촌민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공자의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어디서 향불을 피우러 온 이들이더냐?”
촌민 하나가 현묘관 문 앞에 있는 도동을 붙잡고 물었다.
“향불 피우러 온 거 아니에요.”
도동이 대답했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촌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저도 몰라요.”
도동이 고개를 돌려 다른 도동에게 물었다.
“여기서 묵는다지 않았어? 왜 그냥 가지?”
다른 도동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알겠어.”
도동은 고개를 돌려 아직 옆에 서 있던 촌민을 보며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어느 댁 분이세요? 왜 처음 보는 거 같죠?”
촌민은 하하 웃더니 뒤쪽을 가리키고는 걸음을 옮겼다.
“곽(郭)씨 가문이요? 곽씨 집성촌은 여기서 엄청 먼데, 여기까지 장사하러 나오셨어요?”
도동이 고개를 내저었다.
“곧 새해인데…….”
촌민은 어느새 광주리를 메고 자리를 떴다. 산길을 돌자 멀지 않은 곳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촌민이 휘장을 들고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인근 마을에서 이따금 폭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산길 옆에 있는 숲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길을 지나는 이가 있었다면 분명 소스라치게 놀랐을 터였다.
숲에서 튀어나온 이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옷을 털고 말없이 고개를 돌려 마차가 떠나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근처 산비탈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그는 뒤돌아 현묘관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럿은 아니고 일고여덟 명 정도였어.”
조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반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우릴 감시하는 사람이 있단 거예요? 무슨 생각일까요? 대체 누군데요?”
반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됐든, 내 생각에 우리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조금 늦게 출발하시지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하는 걸 보면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야. 원칙만 지킨다면, 아무 일 없어.”
아씨는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야. 아씨께서 아무 일 없다고 하셨으니 아무 일 없겠지.
조 집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점포 두 곳은 이미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농토 두 곳도 곧 인수를 마칠 거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을 예정이었던 손님이 가 버렸으니, 정교랑은 자연히 태평관에 묵게 됐다. 손 관주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교랑 옆에서 웃고 떠들었다. 물론 떠드는 쪽은 대부분 손 관주였지만.
어둠이 내리자 도동 둘이 태평관의 등롱에 불을 밝혔다. 안에서 손 관주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라니까요. 글쎄 그 시주님이 정말 믿으시더라고요.”
“도사님, 정말요?”
밖에 있던 도동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관주님께서 저리 말이 많으셨다니.”
도동 하나가 웃으며 소곤거렸다.
“다들 우리 관주님은 선인이라 말을 아끼신다지 않았어? 관주님께 한마디 듣고 싶어 돈도 척척 내던데.”
다른 도동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밤의 어둠도 마차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세밑이 다가오면서 큰길에서도 희미하게 폭죽 소리가 들렸다. 폭죽 소리는 쓸쓸한 겨울밤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양팔을 휘젓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치우려 했다.
진안 군왕은 이불을 끌어당기고 한쪽 옆에 놓아둔 수건을 들어 아이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준 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고는 다시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에서부터 태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의 공포와 절망, 어쩌다가 일어난 일인지 떠올렸을 때의 분노와 애타는 심정까지.
이황자를 데리고 의원을 찾아가기로 했을 때의 흥분에서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때의 기대, 이황자가 나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을 때의 기쁨과 환희, 그 여인을 봤을 때의 안도감까지.
그리고 오늘 못 고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까지.
불과 달포 만에 진안 군왕은 한평생 겪을 심정을 다 겪고 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다 산 느낌이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한숨을 토하고, 눈을 감으며 마차에 기댔다.
이건 꿈일 거야. 눈을 뜨고 날이 밝을 때면, 난 아직 그 작은 도관에 있겠지. 몸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고 문을 열어 주면, 그 여인이 들어와서 육가아에게 약을 먹일 거야. 아, 아니면 육가아에게 침을 놓거나 뜸을 떠 줄 수도 있고. 육가아는 치료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고 떼를 쓸 거야. 듣자니 그 여인은 병을 치료할 때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던데, 그럼 어쩌지?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좀 곤란한데. 그 여인은 단정하고 현숙해 보이지만, 일 처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아예 육가아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켜 버릴지도 모르지.
진안 군왕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마차가 흔들리자 품속에 있던 아이가 옹알이하듯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현실로 돌아왔다.
고급 마차라고는 하나 밤바람이 새어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화로에 숯을 피워 놨지만, 겨울밤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차 밖에서는 말과 마차 소리, 시종들의 숨소리, 이따금 나지막이 떠드는 소리, 허공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차갑고 절망적인 현실.
육가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의 육가아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못 돌아오는구나. 이젠 없어, 없다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마.
진안 군왕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며, 가만히 스스로를 위로했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손 관주가 태평관의 문을 두드렸다.
“관주님, 이렇게 일찍 또 오셨어요?”
도동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또는 뭐가 또야.”
“내려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으면서.”
도동이 중얼거렸다. 손 관주는 도동을 내버려 둔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은 준비했고? 아씨는 음식에 까다로운 분이니 정성 들여 준비해라. 조심조심 움직이고. 시끄럽게 굴다가 아씨 깨실라.”
손 관주는 웃으며 안쪽을 쳐다봤다.
“아씨는 벌써 일어나서 방금 나가셨어요.”
도동의 말에 손 관주는 멈칫했다.
“벌써?”
겨울인지라 산의 분위기는 더욱 어둡고 쓸쓸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손에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산길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수시로 치우며 걸었다. 반근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추워서인지 걷는 게 힘들어서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아씨, 그때도 반근 언니랑 이렇게 산을 오르셨어요?”
“응.”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장 노태야를 만난 게 어디쯤이에요?”
반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이었어.”
정교랑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든 반근은 까치발을 들고 올려다보며 당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좋았겠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각자 좋은 게 있는 거고, 가는 길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다른 법이야. 아쉬워할 것 없어.”
정교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뒤따라갔다. 그러자 정교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반근을 돌아봤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정교랑의 물음에 도리어 반근이 멈칫했다.
“아씨, 무엇을요?”
정교랑이 웃었다.
“예전의 저 작은 도관에서 말이야.”
정교랑이 방금 전에 나온 태평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 쫓겨난 아이가 둘 있었어. 반근은 가엾어하는 눈치였는데…….”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자르며 억울한 듯 말했다.
“가엾은 건 아씨인데, 뭐하러 남을 가엾어해요? 왜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요? 남들이 슬프고 괴로워한다고, 아씨도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해요? 그렇게 안 하면 아씨는 매정하고 모진 사람이고요? 남들한테 병이 있다고 아씨가 무조건 고쳐 줘야 해요? 고쳐 주지 않거나 못 고치면 아씨의 죄가 되고요?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는데, 왜 아씨만 남들을 가엾어해야 해요? 아씨가 말씀을 하지 않아서요? 아씨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요? 그럼 그래야 하는 거예요?”
반근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정교랑은 멈칫하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그냥 해 본 말인데…….”
정교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반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근은 숨을 헐떡이며 흐느껴 울었다.
“아씨, 전 괜찮아요. 그냥 눈물이 좀 나와서요. 우리 얼른 걸어요. 이러다 늦겠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피식 웃고는, 더 말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마 걷기도 전에 앞쪽에서 갑자기 호령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반근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 긴장하며 바라봤다.
정교랑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조 집사 등은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산책을 나올 때면, 한발 앞서가며 사방으로 흩어져 정교랑을 지켰다.
갑자기 경고 신호가 들리다니, 무슨 위험이라도 있나?
하지만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돌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자님이었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쳤다. 자욱한 새벽 안개 속에 앉아 있던 이가 두모를 벗자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다, 이런 우연이.”
우연이라고? 왜 또 돌아온 거야? 여전히 포기를 못 한 건가?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보러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올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소년 쪽으로 다가가자 시종들이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봐요.”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시종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말도 필요 없네요. 다들 낭자를 믿고 따르는 게 보여요.”
정교랑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낭자가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도, 난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이거랑 그걸 어떻게 비교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낭자한테 화를 내면 안 됐습니다. 그 애한테 일이 생긴 건 낭자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 애를 못 고치는 것도 낭자 때문이 아니고요. 전부 낭자와 무관한 일인데, 낭자를 원망했습니다. 원망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낭자를 원망했어요. 힘 앞에 굴복하고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했죠.”
세상에.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화 안 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알아요.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에요. 낭자한테 사과한다기보다는 내 맘 편하자고 하는 말이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팔을 가볍게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괴로워하지 마요.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안 군왕이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낭자를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에요.”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인편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생겨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다 마침 직접 나오게 됐죠. 어제 깜빡해서…… 오늘 가져왔어요. 이걸 줬으니 헛걸음한 건 아닌 셈이네요.”
선물이라고?
반근은 저도 모르게 정교랑의 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묶어 올린 머리에는 은빗 하나만이 꽂혀 있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반근이 한 발 앞으로 나갔지만, 정교랑은 반근에게 건네지 않고 직접 열어 보았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빼며 무슨 선물인지 들여다봤다. 목함 안에는 비녀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금이나 은으로 된 건 아니었고, 보석 장식도 없었다. 놀랍게도 꽃과 나무를 조각한 나무 비녀만이 하나 들어 있었다. 게다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주신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어머니께서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어머니 머리에서 멋대로 빼낸 거예요.”
어머니, 어머니.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백종, 착하지.
여인은 몸을 낮춰 어린아이를 토닥여 준 다음 안아 올리더니 옆에 있던 아낙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조금 아쉬운 기색이긴 했지만, 여인은 결국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떼어냈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는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가 여인의 머리에서 비녀를 빼냈다. 여인의 머리가 풀어졌지만, 여인의 발걸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비녀를 손에 꼭 쥔 채, 점점 멀어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을 쳐다보았다.
“선물을 줄 땐, 가장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걸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반근의 시선이 다시 정교랑의 머리로 향했다. 정교랑은 손을 들어 비녀를 머리에 꽂은 다음, 목함을 반근에게 건넸다.
“별로 예쁘진 않네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여인의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머리칼은 칠흑처럼 새까매 장신구를 꽂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쓰기에 편하면 그만이죠.”
정교랑이 다시금 몸을 낮춰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이 답례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 군왕이 작별을 고하려는데,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좀 걸으려고요. 같이 걸을래요?”
좀 걷자고?
멈칫했던 진안 군왕은 뭐가 할 이야기가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진안 군왕이 따라갔다.
조용한 산길에 발걸음 소리가 더해졌다. 진안 군왕은 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두봉을 휘날리며 빠르고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수시로 길을 치워 가면서.
진안 군왕의 예상과 달리 한참을 걸었는데도 말이 없었다. 정말 걷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걷기만.
“자주 걸어요?”
진안 군왕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예전엔 몸이 안 좋았거든요. 많이 걷는 게 회복에 좋아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전에는 바보였으니 말도, 행동도 불편했겠지. 스스로 부단히 노력한 끝에 이렇게 호전된 거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서 이렇게 걸어요. 마음이 좀 편해지거든요.”
기분이 안 좋을 때 걸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래서 나한테 같이 걷자고 한 건가? 이 여인이 남을 위로할 때도 있네?
진안 군왕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걸음 소리만이 산길에 울려 퍼졌다. 이따금 숲속에서 새나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육가아를 고칠 수 없다는 건, 사실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그 지푸라기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진안 군왕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반근은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반근이 일부러 뒤처진 건 아니었다. 둘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점점 빨리 걸었다. 원래는 정교랑이 앞서 걷고 있었지만, 진안 군왕은 양보도 잊은 채 정교랑을 앞질러 갔다. 정교랑도 이에 뒤질세라 속도를 높이다 보니 좁은 산길에서 나란히 걷는 경우가 수시로 생겼다.
반근은 위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종들이 앞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씨께서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 혼자만 낙오될 수 없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 올라갔다.
현묘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산꼭대기에 올랐을 무렵, 새벽빛은 어느새 환히 밝아져 있었다. 밝은 햇살이 산으로 쏟아지자 안개가 물러갔다. 산기슭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 강주성도 보이고, 큰길에는 말을 타거나 나귀를 끌고, 수레를 밀거나 걸어가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였다. 줄지어 움직이는 까만 점은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면서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진안 군왕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숨을 깊게 토해냈다. 오래 걸어서인지 산속 공기가 맑아서인지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진 것 같았다.
“아마 공자(孔子)님은 산에 올랐을 때도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逝者如斯夫: 쉬지도 않고 흐르는 시간을 강물에 비유)’ 하고 감탄하셨을 것 같네요.”
진안 군왕이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산을 올라서인지 하얗기만 하던 여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커다란 눈망울도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정방.”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미안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아주 미세하여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동작이었지만, 그 동작 덕에 여인의 얼굴에선 한결 생동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추하고 아둔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당신이 전에 어땠는지는 상관없어요. 어쨌든 지금은…… 예쁘니까요.”
정교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자, 얼굴 전체가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괴로워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진안 군왕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나도 괴로워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끝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은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괴로워요. 정말 괴로워요. 진짜 괴로운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죠.
“하지만, 괴로워도 살아야죠. 안 그럼 뭘 어쩌겠어요. 울어요? 소란을 피울까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실컷 울거나 소란을 피우고 나서는 어쨌든 살아야 하잖아요.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천지의 조화는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이어져 잠시도 쉬지 않으니, 그것이 도(道) 본연의 모습이라(天地之化 往者過 來者續 無一息之停 乃道體之本然也)고 했죠. 우리는 순응할 뿐, 그 이치를 바꿀 순 없어요. 순응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죠. 죽는 거예요. 죽고 나면 모든 게 끝이니까요. 그런데, 억울하지 않아요?”
잊어라. 그게 좋아.
그래, 잊는 거 좋지. 근데 어떻게 잊겠어. 억울해서 어떻게!
억울해! 억울하다고!
진안 군왕 역시 시선을 돌려 산 아래를 쳐다보며 조용히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고달프죠?”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운명이겠죠.”
운명이라.
두 사람은 말없이 잠자코 산 아래를 쳐다봤다. 햇빛이 점점 밝아오면서 길가에 행인도 늘어났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괴롭든 즐겁든, 고달프든 순조롭든, 밤과 낮은 하루 또 하루 쉬지 않고 흘러갔다.
날이 환하게 밝자 시야는 도리어 흐릿해졌다. 산바람이 거세지면서 두 사람의 두봉이 휘날렸다.
“모자 써요.”
정교랑이 손을 들어 두모를 썼다. 산바람을 타고 폭죽 소리가 이따금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이 스무아흐레인가요? 그믐인가?”
진안 군왕이 불쑥 물었다.
“그믐이에요. 내일이 초하루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육가아랑 여기 남아서 새해를 같이 보내야겠네요. 사람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좋잖아요. 낭자가 불편할지 모르겠지만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압니다.”
진안 군왕이 선수를 쳐서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낭자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거. 그냥 말해 본 거예요.”
그러자 반근이 얼른 뒤돌아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조 집사한테 가서 떠날 준비는 잠시 멈추고, 새해 준비부터 하라고 해.”
경성. 어둠이 내리자 큰길에 인적이 드물어졌다. 집집마다 대문 안에서만 왁자지껄 떠들었다.
옥대교 저택에는 벌써 새로운 도부(桃符: 새해에 귀신을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던 조그마한 나뭇조각)가 붙어 있었다. 사환 둘은 등롱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는 중이었고, 마당에서는 몸종 둘이 바쁘게 움직였다.
“반근 언니, 정말 집에 안 가?”
“안 가. 내가 가면 이 집이 썰렁해지잖아. 여기는 아씨의 집인걸. 반근, 너나 어서 가 봐. 정월에 노태야께 세배드리러 갈게.”
말하는 사람도 반근이라 부르고, 대답하는 사람도 반근이라 부르는 기이한 광경에 사환들과 몸종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들을 쳐다봤다.
두 여인은 웃으며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막 몸종을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대문 앞이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사공자께서 오셨네.”
시녀가 웃으며 얼른 나가 맞이했다. 대문 앞에 있던 사환들도 얼른 예를 표하며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젊은 서생을 쳐다보았다.
정사낭은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다.
“난 서원에 있으면 되는데, 뭘 여기까지 오래.”
“여기가 댁이잖아요. 서원도 방학을 했는데 혼자 거기서 뭐 하시려고요.”
웃으며 이야기하던 시녀는 정사낭의 행색을 보고 놀라 물었다.
“공자님, 이 엄동설한에 옷을 왜 이리 얇게 입으셨어요. 겨울 두봉은요?”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는 걸 깜빡했네. 마차를 타니까 별로 춥지도 않고.”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몸종을 시켜 정사낭을 안으로 모시도록 했다. 그러고는 정사낭의 사환을 한쪽 옆으로 잡아끌었다.
“집에서 안 보내 주셔서요.”
시녀를 무서워하는 사환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집에서 안 보냈다고 가서 사지도 못해? 그럼 널 뒀다 뭐하니?”
시녀가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반근 누나, 그, 그게 돈이 별로 없어요.”
사환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서 돈 안 보내 줬어? 너희 공자님은 우리 아씨와 다르잖아. 죽거나 말거나 집에서 신경도 안 쓰진 않을 텐데.”
반근 누나의 신랄한 말솜씨에 사환은 머쓱해하며 웃었다.
“그, 그건 아니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직 오고 있는 길인가 보죠.”
시녀는 사환의 이마를 쿡 찌르고 비켜서라는 듯 노려보았다. 사환이 비켜서자 시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밥만 먹고 갈게.”
정사낭이 말했다.
“돌아가서 뭐 하시게요? 내일 아침에 저랑 같이 장 노태야 댁에 세배드리러 가세요.”
장 노태야?
“스승님 댁 말이냐?”
정사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을 찾아뵙는 건 아니고요, 노태야를 찾아뵙자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거잖아! 아니지, 스승님께 세배드리는 일보다 더 떨리는 일이야.
“여기 새 옷이에요.”
“나 주려고 옷까지 지었어?”
“그건 아니고요. 원래 도련님들 드리려고 지은 건데, 입진 않으셨거든요. 공자님이 좀 더 호리호리하시니 줄여야겠네요.”
등불이 켜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추운 겨울밤을 녹였다.
어둠이 내리자, 경성 여기저기서 폭죽 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집집마다 걸린 등롱도 따스하게 빛났다.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도성의 모습은 선경과도 같았다.
산허리에 위치한 도관은 밤이 되자 더욱 쓸쓸해 보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숲속에서 문 앞에 내건 등롱만이 외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반면 후원의 곁채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했다. 어려운 자리기도 했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마음껏 마시며 즐기는 이는 없었지만.
“박주(薄酒)지만 목들 축여라.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들 하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조 집사의 말에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고 한입씩 마셨다.
“산간이라 음식이 변변치 않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 현묘관 간식은 아주 유명한 거니까, 다들 먹어 봐.”
자리에 앉은 이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며 먹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갑자기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조 집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금가아가 활짝 웃으며 폭죽을 던지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고 잘 봐. 그러다 다친다.”
문이 활짝 열린 대청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 정교랑과 진안 군왕, 이황자가 앉아 있었다. 폭죽 소리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황자가 비명을 지르며 앞에 있던 탁자를 걷어찼다.
반근이 얼른 뛰어나가 금가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진안 군왕이 난동을 피우는 이황자를 얼른 붙잡으며 말했다.
“그걸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폭죽을 무서워하진 않아. 오는 길에 계속 들었거든. 앉아 있기 싫어서 짜증을 내는 거야.”
“반근, 아까 우린 차를 올려.”
정교랑의 말에 반근이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의 손을 뿌리치고 맞은편에 있는 정교랑의 탁자 앞으로 갔다.
이황자를 미처 붙잡지 못한 진안 군왕이 따라 일어섰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이황자가 정교랑 앞에 있는 탁자에 놓인 쟁반을 들어 움켜쥐었다. 간식을 먹으려 했는지 갑자기 쟁반을 엎어 버린 이황자는 일이 뜻대로 안 되자 울음을 터트렸다.
대청 안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괜히 더 있다 간다고 했네. 떠들썩하면 뭐해. 이런 떠들썩함을 누가 좋아한다고.
진안 군왕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황자를 붙잡는데, 손 하나가 간식을 쑥 내밀었다.
“여기.”
정교랑이었다. 이황자가 손을 뻗어 간식을 받으며 헤 웃자, 옷으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안 군왕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정교랑이 또 손을 내밀었다.
“당신 거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힐끔 보고 씩 웃었다. 한 손은 이황자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침을 닦아 주고 있었다. 간식을 받을 손은 없지만 안 받자니 또 아쉬운 마음이 든 진안 군왕은 몸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어 정교랑의 손에 든 간식을 입으로 받아 넣었다.
“고마워요.”
진안 군왕이 간식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별꼴이야, 진짜!
반근이 놀라 얼른 몸을 돌렸다.
“자, 자. 폭죽 터트리자, 폭죽. 우리도 몇 개 던지자고.”
조 집사가 소리치자 다들 웃으며 폭죽을 들어 불 속으로 던졌다. 마당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산 아래 마을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정월 초하루. 하늘빛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황궁 앞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마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모습이 황궁의 위엄을 더해 주었다.
문무백관이 관직에 따라 차례로 입궐하는 동안, 진십삼은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대전 밖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대전 장식은 호화로웠고, 등불은 찬란하게 빛났다.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연회였지만 진십삼은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땐 떠들썩한 곳을 피하는 게 진짜 떠들썩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로 숨는 게 진짜 은거(大隱隱朝市. 비범한 은자隱者는 산중에 있지 않고, 저자에 살면서도 초연하게 지낸다는 의미. 백거이의 시 중에서)라는 이치를 이제 알겠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자신을 정상인이라고 여겨 행했던 수많은 일을 진짜 정상인이 되어 바라보니 역시 비정상으로 보였다.
“공자님, 부인께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진십삼은 어느새 편전으로 와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일었다.
“공자님, 이곳은 교방사 가희와 무희들이 대기하는 곳입니다.”
문 앞에 있던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교방사 여관(女官)이 무리를 이끌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대부분 답가(踏歌: 발로 박자를 맞추며 부르는 노래. 중국 고대 가무 형식의 일종)를 부르는 여자들이었다.
돌아선 진십삼이 자리를 뜨려는데, 맨 뒤에 있던 기녀가 진십삼을 향해 예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 진십삼은 걸음을 멈추었다. 기녀는 별다른 말 없이 예만 표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주(朱) 낭자였군.”
진십삼이 그제야 생각을 떠올리고 말했다. 머리 가득 장신구를 달고 화려한 무복(舞服)을 입은 기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예를 올렸다.
황궁 연회나 제사 때에는 황궁 전속 가희 외에도 교방사 기녀를 데려다 쓰곤 했다. 물론 황궁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성년이 된 여인이라면 그 선발 기준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순결은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기준이었지만 관기 중에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고운 외모를 가졌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외모가 조금 떨어져야 그나마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예가 뛰어나면 나이가 많고 나이가 어리면 가무의 기교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둘 다 갖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단지 소인은 무엇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주 낭자는 최선을 다했지요.”
주 낭자도 진십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자신이 한 말을 진십삼이 여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얼른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다시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돌아 고개를 숙인 채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할 거면 최선을 다해야 해. 그래야 사는 게 재미있지.
진십삼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밑에 이황자에게 일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픔은 잊고 삶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법도는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올해 새해맞이 연회 역시 중단되지 않았다.
궁중 음악과 함께 축하 연회의 막이 올랐다. 초백주(椒柏酒: 산초나무 열매와 잣을 넣어 빚은 술. 정초에 마시면 괴질을 물리친다고 함)가 계속해서 나왔고, 노랫소리와 음악 소리, 시 읊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날이 환히 밝았다. 폭죽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산 아래 도관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와 경 읊는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어젯밤에 그냥 잤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도 그믐 풍습을 안 지키고 잤군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쩐지 저녁을 먹자마자 시녀와 시종들만 남겨 두고 먼저 일어나더라니. 자리를 피해 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자러 간 거였구나.
“왜 더 자지 않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어제 오후에 한숨 잤더니 밤에 안 잤는데도 별로 안 피곤하네요. 낭자의 차 덕분에 육가아도 푹 잤어요. 아직도 안 깼더군요.”
정교랑은 살짝 예를 표하고, 잠자코 두모를 단단히 여민 다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진안 군왕이 얼른 물었다.
“좀 걸으려고요.”
또 걷는다고? 기분이 안 좋을 때 걷는다더니, 늘 기분이 안 좋은가?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겨 뒤따라갔다.
어제는 근심이 있어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여인의 표정이 전과 달라 보였다. 무표정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눈 아래에 드리워진 쓸쓸함이 가려지지 않았다. 단지 가족에게 버림받은 연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정방.”
진안 군왕이 소리쳐 부르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내 일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 일이라. 일이 있긴 한데 나 자신의 일이니, 다른 이에게는 말해 주지 않겠다?
진안 군왕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위로하고 싶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날 봐요. 얼마나 비참한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세상살이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더 비참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난 어릴 때 부모님 곁을 떠났어요.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란 걸 알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게 더 비참해요. 마음껏 원망할 대상도 없으니까요.”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땐 아직 어린아이였다지만, 어린애가 눈치는 더 빠르잖아요. 낭자도 가족한테 버림받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머니와 외조모가 있었잖아요. 그리고 비꼬자는 게 아니라 까놓고 말해서 낭자가 그때 그런 상태였던 건, 운이 좋았던 거예요. 아픈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몰랐잖아요. 난 달랐어요. 얼마나 비참했는데요. 곧 내리쳐질 작두를 눈 뜨고 지켜보는 것과 같아요. 죽음을 기다리며 숫자를 세고 있는 공포와 막막함 같은 거요.”
정교랑은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아직 가족이 있잖아요. 내가 더 비참해요.”
“있긴 있지만, 마음도 안 주는 가족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마음을 주는 가족은 딱 하나였는데, 이젠 죽었죠.”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한 명만…….”
정교랑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당신은 마음을 주는 가족을 딱 한 명 잃은 거잖아요. 난…….
“내가 더 비참해요.”
정교랑은 끝내 한마디만 툭 내뱉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풉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우리 지금 누가 더 비참한가 겨루는 거예요? 이런 일까지 겨루다니, 세상살이라는 게 정말 힘들긴 힘드네요.”
부귀영화를 비교하든 재주를 겨루든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조금 더 낫길 바라기 마련이다. 이렇게 누가 더 불운하고 누가 더 비참한가를 놓고 겨루는 일은 실로 드물고 기괴한 것이었다.
정교랑도 웃음을 지었다.
“방백종, 그러니까 비참한 사람이 당신 하나만 있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아 둬요. 세상살이가 힘겨운 사람도 당신 하나만은 아니에요. 다들 그렇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정방, 당신도 괴로워하지 마요.”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괴롭지 않아요. 괴로운 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괴로워할 수 있다는 건 당신이 아직 존재한다는 걸 뜻하니까요. 힘든 건 두렵지 않아요. 견뎌내지 못하는 게 두렵죠.”
진안 군왕은 씩 웃으며 손을 뻗고, 잠시 망설이다가 정교랑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얼른 손을 거둔 후, 뒷짐을 지고 한발 먼저 걸어갔다. 정교랑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반근이 두봉을 걸치며 쫓아 나왔을 무렵,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 집사, 조 집사.”
반근이 소리쳐 부르자, 근처에 있던 조 집사가 대답했다.
“따라간 사람 있어요? 그 사람들, 아직도 근처에 있는 거 아니에요?”
반근이 불안한 눈길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람도 붙였으니 걱정 마라. 아씨께서 걱정 말라고 하셨잖아. 그 사람들이 손을 쓸 생각이었으면 진작 썼지.”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뒤따라 올라갔다.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산길에는 마차가 늘어서 있었다. 손 관주도 도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길가로 나와 섰다. 손 관주는 상심한 표정이었다.
반근이 처방 하나를 내밀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예요. 병은 고쳐 줄 수 없지만, 이 차를 마시게 하면 짜증은 가라앉힐 수 있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시종이 손을 내밀어 받았다.
“양주에선 얼마나 오래 있을 겁니까?”
“아직 모르겠어요.”
진안 군왕의 질문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서찰을 보내도 될까? 하긴, 어디서 묵을지는 본인도 모르는 것 같은데, 나한테 서찰을 보낼 수 있겠어? 보낸다 한들, 구중궁궐에서 어찌 받을 것이며…….
진안 군왕은 결국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요.”
정교랑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표했다.
“조심히 가세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던 진안 군왕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정방, 사실 난 아마 당신을 보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해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마 당신을 보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슬프고 괴로울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달려와서 볼 수도 있는 분이시네.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쭉이며 빙긋 웃었다.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웃음을 지을 순 있었다.
저쪽에서 진안 군왕이 막 마차에 오르려는데, 마차에 있던 이황자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비틀거리며 길을 따라 내달렸다. 시종들이 붙잡으려고 달려갔다.
“뛰어다니게 내버려 둬라. 내가 따라가겠다.”
진안 군왕이 마차에 오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이황자의 뒤를 따랐다.
“육가아, 천천히 가. 넘어질라.”
진안 군왕과 이황자가 앞뒤로 길을 따라 하나는 걷고 하나는 뛰며 내려갔다. 마차와 시종들도 소리를 치며 뒤따라갔다. 정교랑 역시 몸을 돌렸다.
“아씨.”
손 관주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다가섰다.
“언제 돌아오시든, 태평관은 늘 아씨를 위해 정돈해 놓겠습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후, 반근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행렬이 서쪽을 향해 천천히 출발했다. 손 관주는 길가에 서서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쭉 지켜보았다.
성을 나와 십 리쯤 갔을 무렵, 반근이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조 집사가 얼른 말을 몰아 다가왔다.
“조귀, 그만 돌아가 보게. 천 리를 배웅해도 헤어져야 할 때가 오는 법이야.”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주저하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아씨, 그자들이 아직 따라오고 있는데요.”
“괜찮아. 손을 쓸 생각이었으면 진작 썼겠지. 섣불리 성가신 일을 꾸밀 자들로 보이진 않아.”
조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정월 초하루라 길은 텅 비어 있고, 정교랑 일행만 쓸쓸히 나와 있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아씨, 아무래도 제가 따라가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아씨께서 이렇게 가시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
정교랑은 혼수를 돌려받은 후, 곧 먼 길을 떠나게 됐다. 되찾은 혼수를 그냥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 집사가 맡아 관리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조 집사는 놀랍고 기쁘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우선은 아씨가 이런 큰일을 맡길 정도로 자신을 신임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뻤다. 점포 두 개와 농토 두 곳을 직접 맡아 관리하면, 거기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수익이 날지 금방 계산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두 점포와 두 농토를 한꺼번에 맡아 대관리인이 된다는 게 불안했다. 예전 주씨 가문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경성에서 세 점포를 맡아 관리하는 반근을 떠올리자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나보다 훨씬 어린 그 애도 잘하잖아. 내가 그 어린애만 못할까 봐?
다만 이곳에 남으면 아씨를 호송할 수 없었다. 직접 이것저것 챙겨 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역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씨의 치밀한 계획 아래 되찾은 혼수였다. 고생은 아씨께서 하셨는데 뒤에서 안락한 생활이나 누리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했다.
“부당하다고?”
정교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말했다시피, 그건 내가 계획한 일이야. 자네들이 한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자네들이 없었어도 난 계획대로 일을 성사시켰을 텐데, 뭐가 걱정이란 거지?”
조 집사가 멋쩍어하며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내 곁에서 한 일은 다 내가 시킨 일이야. 자네가 하나 여기 있는 다른 사람이 하나 별다를 게 없지.”
정교랑이 옆에 있는 다른 시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의 손짓에 시종들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가슴을 쫙 펴고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조 집사가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라도 할 수 있어.”
정교랑은 다시 조 집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이곳엔 사람이 필요해. 내 재산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지. 결정권을 갖고 일을 처리할 능력과 담력이 있으면서, 대충 아무렇게나 하지 않을 사람 말일세.”
조 집사 역시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들었다.
나, 나에 대해 말하는 거지, 지금? 날 칭찬하는 거잖아!
“그러니 자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난 도리어 마음이 안 놓여. 자네가 여기 남아야 자네도 마음을 놓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는 흥분되는 얼굴을 했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염려 마십시오. 소인이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어쨌든 경성의 그 어린애보단 잘 해내야지.
반근은 미소를 지으며 휘장을 내렸다. 조 집사가 돌아서며 다시 시종들을 불렀다. 시종들이 웃으며 조 집사를 에워쌌다.
“형님, 욕심이 과하십니다. 큰길을 차지했으면서 작은길까지 점령하려고요? 형제들도 일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염려 말고 관리인 노릇이나 잘하세요. 우리 몫까지 노릴 생각 말고요.”
“열심히 하세요. 경성의 그 누이만 못하면, 사내 체면이 뭐가 됩니까.”
조 집사가 웃으며 나무랐다.
“잘들 해. 아씨 말씀 잘 듣고, 뭐든 깔끔하게 처리해야 해. 돈은 내가 맡을 테니, 아씨를 모시는 일은 너희가 맡아.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씨를 따른 후로,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윗전의 말씀이 진짜인지 아닌지 이것저것 따지고 추측할 필요도 없고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요. 이런 건 돈을 줘도 못 바꾸죠.
다들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하고 작별했다.
길은 멀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마당에 선 고 통사가 허공으로 팔을 뻗자, 매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내려와 앉았다.
“못 고쳤다고?”
고 통사가 고개를 돌리며 뒤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네, 그 낭자의 말이 경왕 전하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고, 아주 건강하시다고 했답니다. 그런 바보의 병은 자신이 병을 고치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고칠 수 없다면서요.”
“얼씨구, 진짜로 원칙을 고수했단 말이지?”
고 통사가 웃으며 팔에 앉은 매를 시종에게 건넨 다음, 손을 닦고 걸음을 옮겼다.
“원칙상 고칠 수 없으니까요. 당시 군왕께서는 거의 이성을 잃고 펄펄 뛰다가 그 낭자를 때릴 뻔했답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치는 건지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건지 물으셨는데도, 그 낭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랍니다. 원칙상 고칠 수 없고, 고칠 수 없어 그런 원칙을 만들었다고 하면서요.”
시종이 말을 보태며 보고하자, 고 통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신의니 뭐니 하는 소리도 저 스스로 벗어던진 거겠지. 따지고 보면 일리 있는 일이었어. 원칙을 고수하는 거 좋지, 좋고말고. 그래서 어디로 간다더냐?”
“양주로 간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고 통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한 듯 말을 이었다.
“하여간 말을 안 듣는군.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 알지. 정초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집에 있기 싫으니까 말썽을 피우는 거 아니냐. 그런 애가 있으면 집안 식구들도 골치깨나 아플 거야.”
시종은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고 덧붙여 물었다.
“그럼 우리 사람들은…….”
“불러들여라. 우리가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그 집 아이를 보살피며 호송할 필요야 없지 않느냐.”
고 통사가 웃으며 말하자 시종이 얼른 알았다고 했다.
“다들 군왕 쪽으로 보내라. 잘 지키라고 해.”
고 통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구나. 폐하와 마마께서 지금도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몰라. 잘들 지켜야 한다.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약하고 힘없는 동물을 살뜰히 보살피듯,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그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 시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고 통사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월 대보름엔 경성만 떠들썩한 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이 떠들썩했다. 작은 마을에서도 등롱을 산 모양으로 커다랗게 만들어 대보름 명절을 즐겼다. 경성에서 본 것만큼 정교하진 않았지만, 저녁이 되어 불을 밝히자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났다.
등롱으로 만든 산을 둘러싼 아이들이 웃고 떠들었다. 진안 군왕의 옆에서 손을 잡고 선 이황자 역시 소리를 지르며 등롱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잡아끌었다. 헤헤 웃으며 등롱으로 만든 산 주변을 돌던 이황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등롱을 잡아떼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점포의 주인장이 그 모습을 보고 행여 모양이 무너지기라도 할세라 발을 동동 굴렀다. 호위하는 시종들이 많은 걸 보면 두 사람 다 비범한 신분이 틀림없을 터였지만, 주인장은 그래도 다가가 말렸다.
“손님, 저녁에도 써야 하는 거라서요. 여러 사람이 보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겁니다.”
주인장의 간곡한 말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황자를 붙잡으며 나지막이 타일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돌아봤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걸이와 입가에 흐르는 침, 눈은 웃고 있지만 표정은 멍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서 바보라는 티가 났다. 그런 아이를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따뜻하고 극진하게 보살피고 있으니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이 아이는…….”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바보입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에 주인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바보고, 내 동생이기도 하죠.”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웃으며 이황자의 손을 잡았다.
“육가아, 우리 저 앞에 가 보자. 저 앞에 더 좋은 거 있어.”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아아야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바보를 저리 살뜰히 챙기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보네.”
저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주인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금세 한 바퀴를 쭉 돌았다. 이황자는 고단했는지 더 이상 걷지 않고 땅바닥에 털퍼덕 앉았다.
“공자님, 배를 바꿔 탈까요? 아니면 마차로 갈까요?”
시종이 다가와 물었다. 진안 군왕은 앞쪽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바닥에 앉은 아이를 보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쪼그리고 앉았다.
“육가아.”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갖고 놀았다.
“육가아, 너 지도 보는 거 좋아하지?”
진안 군왕이 아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 형이 진짜 산하를 보여 줄게, 어때?”
* * *
경성에서는 정월 말에 큰 눈이 내렸다.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였다. 이른 아침 거리에 쌓인 눈은 관아에서 나온 인력들이 깔끔하게 치운 후였고, 황성 앞은 더욱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대전에는 어사가 앞쪽에 서 있고, 조정 대신들이 각자 자리에 서서 대기 중이었다. 황제만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주고받자, 즉시 어사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음악 소리와 함께 시종들과 총관, 환관이 먼저 나타나고 곧이어 황제가 걸어 나왔다. 신하들이 엎드려 절을 올리면서 이번 달 조회가 시작되었다.
진소는 신하들의 대열 속에서 황제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전에는 그래도 조회에 참석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었지만, 요즘은 기력이 남아 있는 시늉조차 힘들어 보였다.
조회는 금방 끝났고, 곧이어 상공 대인과 삼사사(三司使), 한림원 관리 등이 정사를 논하기 위해 불려왔다. 이들을 불러올 동안, 대태감이 안쪽에서 황제에게 무어라 말씀을 올렸다. 황제가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황실 자제들이 밖을 유랑한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전하께서 의원을 더 찾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단 두 마디였지만, 전하와 의원, 밖이라는 단어에서 진소 등 상공들은 경왕을 데리고 의원을 찾아 밖으로 나간 진안 군왕의 이야기인 걸 대번에 눈치챘다.
세밑에도 안 돌아왔다던데, 보아하니 당분간 안 돌아올 모양이군.
문이 열리자 다들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내시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평정심을 회복하여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려온 대인들이 정사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서북의 군사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대전 분위기는 곧 경직됐다.
“종승포(鍾承布)는 방탕한 자요. 가세만 믿고 군에서 상관의 말을 거역했으니 자리를 옮겨야 마땅하오.”
“곽 대인, 강문원 한 사람의 주장만 듣고 예단하지 마시오. 주 감사는 종승포가 유능하고 출중한 자라 하였소. 서북으로 간 불과 몇 달 만에 벌써 전공을 세웠다더군.”
서북의 장수들을 놓고 논쟁이 지속되자, 황제는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지.”
둘의 말을 끊은 황제가 다른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다음.”
회계를 맡은 관리가 앞으로 나섰다.
“풍림이 태창로 전운사의 감찰 결과…….”
탐관오리에 관한 보고가 계속되자, 황제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조사하시오, 조사해. 전부 다 조사하시오. 어사대도 가고 대리시도 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전부 잡아들이라고.”
황제가 호통을 쳤다. 일이 커질 모양이었다.
진소 등도 이 일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있다 한들 이런 때에 황제에게 맞서며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대전에는 대답하는 소리와 침묵만이 감돌았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자 황제는 한숨을 쉬며 안에 있는 중신들을 쓱 훑어봤다.
“다른 일은 없소?”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내시 하나가 들어와 고 통사가 알현을 청한다고 아뢰었다. 관직도 낮고 아직 지제고(知制誥) 직함도 받지 못한 고 통사는 진소 등처럼 부름이 없어도 안으로 들어와 정사를 논의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고 통사를 기다리게 했겠지만, 마침 속이 답답하던 터라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였다. 어쩌면 답답하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으로 들라는 내시의 통보 소리가 전해지자, 내시 하나가 고 통사에게 속삭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어라 나지막이 속삭인 내시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숙고하십시오, 대인.”
고 통사는 손에 든 상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소를 챙겼다. 지금 이런 때에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폐하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나? 무엇보다도 요즘엔 기뻐할 만한 큰일이 없는데. 큰일이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리던 고 통사는 무언가 떠오른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작은 일이긴 하지만 경사가 있긴 하지. 폐하께선 지금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신경 안 쓰실 거야. 좋은 일이기만 하면 돼.
고 통사는 심호흡을 하고 짐짓 기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좋은 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진소 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용상에 앉은 황제는 표정이 밝아졌다.
“군목사(群牧司)에서 온 희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말에 대신들이 실소를 터트렸다.
“군목사에서 올해도 말똥을 팔아 거금을 벌어들였나 봅니다?”
누군가가 비웃는 투로 진소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소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 통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진소는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인 일에 더 관심이 갔다. 예전이었다면 안으로 들이지 않고, 최소한 정사에 관한 논의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했을 터였다.
고 통사가 곧 원대로 지제고에 봉해지겠군.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이런 외척은 내쫓아야 마땅하거늘. 이런 자들을 경성에 두는 것만으로도 화근의 싹이 될 터인데, 조정 일에 참여할 명분까지 주려 하다니, 폐하께서 아둔해지신 건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진소의 귀에 고 통사의 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서북 군마의 손실이 다소 줄었습니다.”
군마? 다소?
진소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희소식이라고.”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폐하, 아직은 얼마 안 됩니다만, 새로 채택한 방안이 검증을 거쳤단 뜻이 아니옵니까. 본디 목감에서 매년 군마 삼백 필밖에 공급하지 못하는 데다, 군마의 손실이 크다 보니 늘 모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손실을 줄일 수 있다면, 군마 공급량에 변함이 없어도 전체적인 수는 늘어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서북의 기마병 역시 늘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
고 통사가 말했다.
기마병!
군에 있는 장수들은 기마병을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 능한 기마병이 워낙 적었고, 말이 귀하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서쪽 오랑캐의 기마병이 대단한 건 말 때문이었다. 오랑캐는 기마병 한 사람당 말을 서너 필 갖고 있는데, 이들은 한 필씩만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만 충분히 공급된다면, 더 이상 서북 오랑캐가 우쭐댈 일이 없을 터였다.
군마 손실을 피할 방법을 찾았다니, 경사 중의 경사로다!
황제는 자세를 바로 했고, 진소 등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물건이 무엇이오?”
황제의 하문에 고 통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연히 생각해 낸 거라 아직 정식 이름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군목사에 이름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대전에 있던 이들은 그 말에 속으로 욕을 해댔다.
정식 이름이 없긴,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동시에 대신들은 고 통사가 본디 이 일을 아뢰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현을 청하고 난 후에야 황제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임시방편으로 다른 일을 고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발굽에 편자를 댔으니 말편자라고 하면 되겠군.”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말편자 덕분에 정사를 논하는 회의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득의양양한 얼굴의 관원들이 고 통사를 에워쌌다. 진소가 삼사사를 불러 세웠다.
“군목사의 일을 삼사에서 왜 몰랐소? 저런 소인배가 아뢸 기회를 가로채게 하다니.”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군목사에서 말똥 파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삼사사가 속으로 대꾸했다.
“가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지금 안다 해도 늦은 건 아니었다. 아뢸 기회는 고 통사에게 빼앗겼지만, 다른 공까지 선점하게 둘 순 없었다.
<교랑의경> 1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