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은 집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구주(衢州) 수왕부에서 보낸 새해 선물은 결코 약소하다고 할 수 없는 규모였다. 비단이며 옷, 서화, 붓, 먹, 종이, 벼루 등등 소년에게 필요한 물건은 빠짐없이 고루 들어 있었다.
진안 군왕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직접 살피며 정리했다. 옆에 있는 내시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내시는 조용히 기록만 했다.
전각 안에는 진열대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진열대 선반 위에 빼곡하게 쌓아 둔 선물 상자에는 몇 년 몇 월에 보낸 선물인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두 내시가 진안 군왕이 건넨 비단과 선물 상자를 들어 옮겼다.
“이거로 새 옷을 만들면 되겠다.”
진안 군왕이 내시에게 비단을 건네며 말했다. 내시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내시는 정말 훌륭한 옷감이라며 감탄을 늘어놓고는 비단을 들고 진열대 선반 쪽으로 갔다. 이쪽에 놓인 옷감들도 전부 고급 비단이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내시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내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떨리는 목소리였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내시 하나가 보였다. 창백한 안색에 경황이 없는 표정이었다. 내시는 ‘전하’만을 외친 후 말을 잇지 못했고, 입술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무슨 일이더냐?”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다른 선물 상자를 열어 보며 물었다. 그 안에는 토기 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물론 평범한 인형은 아니었다. 인형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니 대가의 작품이었다.
이건 육가아한테 줘야겠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전하, 이황자 전하께 일이 생겼습니다!”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진안 군왕의 몸이 움찔하며 굳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토기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 대인, 이게 얼마 만이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왜요? 또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제가 못 고친다고 하면 신의를 부르시려고요?”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속 좁기는. 웃자고 한 소리에 그리 꽁해서야 쓰겠소? 체통을 생각해야지.”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고, 진맥을 위해 탁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진 노태야도 웃으며, 진맥하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태의는 좌우 양쪽의 맥을 살핀 후 손을 거두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진소는 이 태의의 말에 순간 바짝 긴장했다.
“죽지는 않겠어요.”
이 태의가 말했다. 진소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놀랍게도 내시였다.
진소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내시는 진소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 태의부터 잡아끌었다.
“어서요 대인. 폐하께서 입궐을 명하셨습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시의 말에 진소의 안색이 급변했다. 진소가 얼른 사방을 둘러보자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물길 열리듯 쫙 갈라지며 비켜섰다.
이 태의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약상자를 챙겨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에 있던 이들이 흩어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상태로 돌아갔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던데…….”
“폐하일까요? 아니면 태후마마나 황후마마께서?”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두운 얼굴로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보자. 금방 소식이 올 게야. 황궁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 없지.”
이 태의가 내시에게 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의로 묻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태의는 태의로서 물어야 할 말과 묻지 말아야 할 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내시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엄중한 일이 아니구나.
곧장 황궁의 내궁으로 들어간 이 태의는 내시가 황제의 궁으로 향하지 않는 걸 보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급사만 아니라면 조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터였다. 궁에서 몇 번 더 방향을 틀어 어느 전각 앞에 도착했을 무렵, 이 태의는 더욱 안도했다. 황자의 처소였기 때문이다.
궁에서 자라는 황자와 공주에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른 황족 구성원에 비해 더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 태의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어쨌거나 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특히 이황자라면 더더욱.
이 태의가 문 쪽으로 가 보니, 호리호리한 소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겨울 황궁의 쓸쓸한 그림자 아래에 있는지라 더욱 힘없고 애잔해 보였다.
이 태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진안 군왕을 지나쳐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 군왕 역시 이 태의를 보지 못한 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넓디넓은 황궁 전각 앞에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치자 버선만 신은 발이 드러났다.
그리 급하게 달려온 터였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내시가 커다란 두봉을 끌어안고 신발을 든 채 옆에 있다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전하, 옷을 걸치시지요.”
내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진안 군왕이 냉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시는 울상인 채로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바람이 창살을 때리며 우우 하는 소리를 내는 통에 굳게 닫힌 전각의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더욱 희미하게 들렸다. 안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창백한 안색에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지라 두 눈은 더욱 새까매 보였다.
뒷걸음질을 치던 진안 군왕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벌컥 열자 안에 있던 이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에 있던 이들은 진안 군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진안 군왕 역시 평소처럼 깍듯이 예를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침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진안 군왕에게 낯선 전각이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익숙한 곳이었다. 종종 이곳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으니.
“형님, 우리 바둑 둬요.”
침상에 누운 그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안 군왕이 얼른 따라가려는데, 눈앞에 있던 아이가 사라지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이황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황자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스레했다. 얼굴에 묻어 있던 진흙 자국은 이미 깨끗하게 지운 후였다. 콧김을 내쉬면서 희미하게 코 고는 소리가 났다. 흰 천으로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면 쌔근쌔근 자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
뛸 듯이 기뻐하며 침상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간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콧김을 확인해 보았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진안 군왕이 소리치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의, 태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태의가 안타까운 눈길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을 회복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이 태의가 하던 말을 끝마쳤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황제의 물음에 이 태의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부위를 다치셔서 지력에 큰 손상을 입으셨습니다.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정신이 온전치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어찌 된단 말이냐?”
황제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바보가 되실 겁니다. 반응이 더디고 동작이 굼뜨시겠죠.”
이 태의가 대답했다.
바보라니!
전각 분위기가 일순간 굳어 버렸다.
“허튼소리!”
진안 군왕이 침상 옆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허튼소리 마십시오! 분명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맞섰다. 진안 군왕 역시 물러서지 않고 이 태의를 쳐다봤다. 그래야만 이 태의가 말을 바꿀 거라는 듯이.
전각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떨며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 다시 눈을 떠서 다른 태의들을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황제가 물었다. 한쪽 구석에 꿇어앉아 있던 다른 태의들은 그 말에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신들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태의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인 듯 눈을 감고 등을 기대앉았다. 태후와 귀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쏟았다.
“이황자가, 어쩌다 다친 겁니까?”
비통에 잠겨 있던 전각에 갑자기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 태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아는 건가? 제정신이야?
하지만 진안 군왕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못 듣기라도 했을까 겁난다는 듯 다시 입을 열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황자가, 어쩌다가 매산에서 떨어진 거죠?”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귀비에게로 향했다.
“대황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 말에 귀비와 태후가 울음을 그치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황제조차도 눈을 번쩍 떴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을 뿐인데 전각 안에는 수천, 수만의 화살이 날아가는 듯 보였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태의들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고, 왜 하필 오늘 입궐했단 말인가. 병석에 누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어야 했다. 입궐하는 길에 마차에 치이고 말에 부딪혀 다리라도 분질러졌어야 했단 말이다.
이황자가 어쩌다가 매산에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옆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내시들과 궁녀들 역시 더는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황궁에서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알지 말아야 할 일을 아는 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었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대황자를 지목해 묻다니. 지금 이때에 대황자 얘기를 굳이 꺼내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바보라 해도 능히 짐작할 만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장살을 당한 내시들이 흘린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우리까지 그 황천길에 벗이 되어 주어야 하나?
전각 안은 몹시도 적막하여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화로도 네 개나 가져다 두었지만 오싹할 만한 한기를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낭,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전각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폐하!”
귀비가 통곡을 하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신첩을 죽여 주시옵소서.”
귀비의 울음소리가 전각의 적막을 깼지만, 그 울음에 사람들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결국 시작하는구나, 이제 막을 수 없어…….
진안 군왕이 황제를 보며 앞으로 한 발 내디디고 막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내시의 비명에 가까운 보고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 납시오.”
내시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열고, 오랜 기간 와병 생활을 하느라 바깥출입을 못 하던 황후가 궁녀 둘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들어왔다.
황후는 예복 차림이었다. 봉관(鳳冠: 황태후나 황후가 쓰던 관)을 쓰고 예장을 갖춘 탓에 황후는 더욱 쇠약해 보였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귀비가 슬피 울며 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신첩에게 죄가 있습니다.”
전각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비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경영(景榮), 이 무슨 짓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태후가 말했다.
“신첩에게 죄가 있습니다.”
황후가 다시 말했다.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였구나.
하지만 곧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황후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다니. 결코 물러서지 않겠단 뜻인가?
태후 역시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모두 물러가라.”
황제가 명했다.
전각에 있던 이들은 대사면이라도 받은 듯, 천자 앞에서 결례를 보이는 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르르 빠져나갔다. 전각을 나오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다들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저승문에서 살아 돌아온 표정이었다.
안에는 황실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안은 텅 빈 듯 황량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듯 어두컴컴할 뿐이었다.
“경영, 어서 일어나거라. 몸도 안 좋은데. 육가아의 일은…….”
태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황후를 보는 태후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결연했다.
전각의 분위기는 또다시 급격히 경직됐다. 다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사고였어.”
태후는 짧은 네 음절의 말로 이번 일의 결론을 내렸다. 태도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 말에 귀비는 계속해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었고,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용상에 앉아 있었다.
전각 안에 또다시 적막감이 맴돌았다.
“사고가 아닙니다.”
입을 열었지만 아직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기 전이었던 진안 군왕이 멈칫하며, 말을 가로챈 황후를 쳐다보았다.
바닥에 꿇어앉은 황후가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봉관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가 좌르르 풀어졌다. 풀어진 머리칼 사이로 하얗게 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귀비가 잽싸게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갔을 터였다.
황후는 황제보다 나이가 어렸다. 오랫동안 병을 앓았다고는 하나 보양에 힘쓰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칼을 갖고 있었는데, 흰머리가 이렇게 많아졌을 줄이야.
요새 흰머리가 부쩍 는 건가? 아니면 소식을 듣고 갑자기 백발이 된 건가?
황후가 봉관을 앞으로 내밀자 옆에 있던 궁녀도 품고 있던 황후 인장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곽가 경영,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황후가 부복하며 말했다. 태후의 표정은 어두워졌지만, 황제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지지 않았다.
“경영, 이게 무슨 뜻이냐?”
태후가 천천히 물었다. 황후가 고개를 들며, 병약한 얼굴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마마, 이 일은 제 잘못입니다.”
황후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고가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제가 육가아의 효심이 지극하다며 칭찬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절 기쁘게 해 주려고 이 추운 날 매화를 꺾으려 산에 올라가지도 않았을 테고, 떨어져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육가아는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아직 어린애죠. 생모를 일찍 여의고 제 손에 자란 아이예요. 마마, 육가아는 아직 어리지만 모르는 게 없는 아이입니다. 절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제 환심을 사려고 그런 거예요. 마마, 폐하, 육가아는 아이고 저는 어른입니다. 제가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탓이에요. 사실, 사실 전 매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전혀 안 좋아하는데…….”
황후는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고 세게 치기도 했다.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면서, 차츰 흥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태후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결연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슬픔과 연민의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경영, 경영, 그만하거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건 사고였어.”
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사고가 아니에요!”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황후는 자신의 옷섶을 쥐어뜯으며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접니다, 제가 육가아를 해친 거예요! 제가 육가아를 해쳤다고요! 전 매화도 싫고, 그 애가 약시중을 드는 것도 싫습니다. 다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시늉을 하고, 좋아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했어요. 제가 해친 겁니다! 제가 진작 솔직하게 말하고 따끔하게 이야기했다면, 육가아가 매화를 꺾으러 가지도 않았겠죠. 그 어린 애가 절 기쁘게 해 주려고 매화를 꺾은 겁니다. 그래야만 효심을 보일 수 있으니까요. 아직 어린애인데, 제가 그 애를 해쳤습니다. 제가 그 애를…….”
절규에 가까운 황후의 목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황후는 옷섶을 쥐어뜯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도 했다.
“어서 붙잡아라, 어서 붙잡아!”
태후가 일어나 소리쳤다. 귀비 역시 달려가 황후의 손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황제도 더 이상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황후의 말에 결국 무너진 듯 비통한 표정이었다.
“아니오, 짐의 잘못이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인다지. 달콤한 벌꿀 또한 독약이 될 수 있소. 아직 어리고 순수한 아이인데, 효심이 지극하다 칭찬했으니 날 기쁘게 하고 싶었겠지. 내가 그 아이를 해친 거요.”
태후가 발을 굴렀다.
“황상, 황상까지 장단을 맞추려는 거요? 이건 사고였소! 사람이 한평생 무탈하고 안온하게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물을 마시다가도 사레들려 죽을 수 있는 법이오! 그렇다고 물을 마시라고 한 사람한테 잘못이라 할 수 있소? 아니면 그게 물의 잘못이겠소?”
황후가 비통함을 못 이겨 거의 광증을 보이다시피 한 탓에 귀비 혼자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각 안은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태의! 태의!”
태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각 문이 열리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궁녀와 내시, 태의가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시금 전각을 가득 채웠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덕분에 방금 전 싸늘한 기운과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사라지면서 전각 안에는 한층 생기가 돌았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방금 전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확 바뀐 분위기를 딱딱한 표정으로 그저 보고만 있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던 진안 군왕은 침상에 부딪치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뒤에 있는 아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낮 동안에는 맑은 날씨였지만, 밤이 되자 바람이 불었다. 밤바람이 무겁게 황궁 전각을 때리면서 귀신의 흐느낌과 같은 소리를 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대한 체구의 누군가가 침상 깊숙이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죽이러 온 건가? 사람이야? 아니면 귀신?
“사가아…….”
휘장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곧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귀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궁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양쪽에 있는 궁등에 불을 밝혔다. 순간 실내가 환해졌다. 귀비는 피곤하고 지친 안색이었다.
침상의 휘장을 걷자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귀비의 눈 속에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귀비가 주변을 쓱 둘러보자 궁녀들이 즉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귀비는 침상 앞에 앉아 손을 뻗어 이불을 걷었다. 대황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했지만, 귀비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뭘 겁내는 게야!”
귀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 호통이 대황자의 마음속에 있던 공포를 눌러 버리자 대황자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귀비가 심호흡을 하고 대황자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귀비가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육가아는 안 죽었어.”
다소 긴장이 풀렸던 대황자는 그 말에 움찔하고 긴장하며 바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귀비가 꽉 붙잡은 탓에 뺄 수 없었다. 두 모자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놀랍고 무서운 표정이었다.
안 죽었다니, 안 죽었다니. 내가 손을 놓은 걸 누가 알기라도 하는 날엔…….
대황자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토록 두려워하다니. 안 죽었다는 말에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다면…….
귀비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격랑이 몰아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두 분 황자님께서는 폐하를 뵙고 나와 어화원을 지나다가 매화를 꺾으러 가셨는데…….”
황후궁에서는 내시 하나가 엎드려 덜덜 떠는 목소리로 보고 중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내시가 고개를 들고 말을 보충했다.
“이황자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대황자님께서는 처음에 별로 안 내켜 하시다가, 옆에 있던 내시가 몇 마디 거들자 따라가셨고요.”
이황자궁에서 실려 돌아온 황후는 잠든 듯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내시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대황자님께서는 내시들을 시켜 매화를 꺾게 하고, 이황자님께서는 직접 꺾으셨지요. 그러다가 이황자님이 대황자님께 매화를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쪽 돌과 흙이 단단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황자님께서 그만 발을 헛디디시는 바람에…….”
“아니, 대황자가 밀친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시의 말을 끊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침상 근처 어두운 곳에서 진안 군왕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당시 시중을 들었던 내시들은 이미 장살로 목숨을 잃은 탓에 이제 구체적인 경과를 아는 이는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진안 군왕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게 뭘까?
황궁엔 사방에 귀가 있어 비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장식물에 불과한 군왕의 수족이 이미 황궁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계속 말하거라.”
황후의 목소리가 경직된 분위기를 깼다.
“이황자님께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자 대황자님께서 손을 뻗어 잡았지만, 힘이 부족해 다른 이들이 도우러 올 때까지 못 버티셨습니다.”
내시가 단숨에 말을 끝까지 전했다.
실내는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밖에서 밤바람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물러가라.”
황후의 말에 내시는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흠뻑 젖은 등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 뼈를 스미는 한기가 느껴졌지만, 도리어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내시는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실내에는 희미한 불빛이 남았다. 침상에 누워 있던 황후는 어느새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여전히 병약한 얼굴에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였지만, 광기에 휩싸였던 낮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슬픔과 비통함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궁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더냐. 지금껏 무탈하게 잘 지내기에, 무슨 일이 생기든 누가 돕지 않아도 잘 헤쳐나갈 줄 알았다.”
황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은 침상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을 숨겼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넌 오늘 죽을 길을 스스로 찾은 거야.”
황후가 말을 이었다. 꿇어앉은 진안 군왕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러는 게 네 목숨을 재촉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으냐?”
황후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를 스쳤다. 오랫동안 병을 앓은 터라 황후의 목소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더구나 낮에 울고불고하며 악을 쓴 터라 더욱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이황자가 다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황자가 어쩌다 다쳤는지에 대해 아무도 따지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태후가 사고였다고 선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안 군왕이 추궁한 것이다. 그것도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대황자는, 뭐라고 합니까?
이 질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아우를 죽였다…….
최종 결과가 어찌 되든,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천하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대황자가 손가락질을 받도록 벼랑으로 내몰았으니, 귀비와 태후는 물론이고 황제 역시 진안 군왕을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진안 군왕 역시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무사히 출궁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준비해 왔던 나날들도, 자유의 몸이 되겠다는 염원도 이제 물거품이 될 것이다.
누구나 아는 자명한 일이고 그 이치를 이해한다면 단념할 수도, 내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어떤 일은 정말이지…….
“억울했습니다.”
진안 군왕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목멘 목소리로 내뱉었다.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요!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
황후가 웃으며 진안 군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억울한 게 무에 그리 대수라고. 이 세상에 억울한 일 한 번 안 겪은 이가 있다더냐. 너는 그런 적 없고?”
당연히 있죠.
“너도 억울한 일이 있었으면서, 뭐하러 소중한 목숨까지 내팽개쳐. 소중히 여겨 주는 이도 없거늘.”
황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엎드린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후가 적시에 당도하지 않았더라면, 황후가 자책하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일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터였다.
아, 물론 진안 군왕에게만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했을 테고.
황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다. 나 역시 널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니.”
황후는 어둡고 쓸쓸한 실내를 바라보았다.
마마, 마마, 제가 약 먹여 드릴게요. 쓰다고 겁내지 마시고요.
마마, 오늘 스승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제가 들려드릴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씁쓸한 일이 얻었다가 다시 잃는 것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얻지 않았다면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것을.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육가아를 잘 돌봤지. 적어도 그 시간 동안 육가아는 아주 즐겁게 지냈어.”
황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육가아는 날 마마라고 부르며 따랐는데, 내가 그 애한테 해 준 건 너보다도 훨씬 적구나. 그러니 이번엔 내가 육가아한테 선물을 줬다고 치자. 네가 그 애 때문에 화를 입은 걸 알면 육가아도 기뻐하지 않을 게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진안 군왕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꺽꺽 흐느껴 울었다. 진안 군왕 자신인들 마음 편히, 즐겁게 지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황후는 진안 군왕이 소리 내어 울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
“너도 여기서 실컷 울거라. 여길 나가는 순간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해. 계속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않도록 내가 막긴 했지만, 어쨌거나 오늘 네가 한 말은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다.”
황후는 천천히 말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앞으로 뭘 원하는지는 너의 일이고, 오로지 너 자신에게 달렸어.”
결국 이 세상에서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명심해라.”
황후가 진안 군왕을 보며 말했다.
“폐하는 성군이시다.”
같은 시간 궁 밖에서도 같은 말을 하는 자가 있었다.
“예전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분명 그래.”
진 노태야가 말했다.
소위 성군은 황제가 얼마나 영명하고 용맹한지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쳐죽일 소리로 들리겠지만 신하들은 진시황이나 한무제 같은 황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웬만큼 자질을 갖춘 정도가 좋았고, 솔직히 자질 같은 건 평범해도 상관없었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가히 성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조건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잘 아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뭘 하면 안 되는지를 알 테니까.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자 실천에 옮기기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병약하고 손이 귀한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성군이 되려면, 다친 황자에 대해 비통한 마음이 들더라도 이 때문에 비이성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됐다. 어쨌거나 그는 부친인 동시에 강산과 사직을 책임지고 있는 군주였다.
“이황자의 일이 사고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정녕…….”
진 노태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집 안에서 나누는 대화라고는 하나 대역무도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궁에서 들려 온 소식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들어야 할 말만 듣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은 듣지 말아야 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그 말을 삼키고 지나갔다.
“황실의 후계를 고려한다면, 폐하께서 대황자를 어찌하실 수 있겠느냐?”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황제에게는 대황자 하나만이 남았다. 대황자가 사실을 전부 실토한다 해도, 결코 비바람을 맞게 할 순 없었다.
“폐하의 춘추가 벌써 쉰이시다.”
진 노태야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지금 황제의 몸 상태로 황자를 또 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할뿐더러, 설령 황자를 얻는다 해도 황제의 병약한 몸으로 황자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그 황자가 무사히 장성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구나 아는 이치였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가 왜 그리 울고불고하며 죄를 청했겠는가.
어차피 친아들도 아니고, 다치면 다친 것으로 그뿐이었다. 그녀로서는 황후의 자리만 온전히 지키고 있으면, 어느 황자가 등극하든 태후가 될 터였다.
이런 때에 형이 아우를 다치게 한 것인지 추궁하는 건 쓸모없는 일일뿐더러 황제와 태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나중에 대황자가 등극하고 나면 자신을 그리 대했던 여인이 태후가 되는 걸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황자가 등극할 때까지 무탈히 지낸다는 전제하에.
황실의 일이란…….
황자 하나가 다친 것뿐이었다. 다치는 일이 처음도 아니고, 황궁에 하나뿐인 황자도 아니었다. 오늘 황궁에서 일어난 변고는 신하들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고 황실 자손의 고달픔에 대해 한마디 얹으며 넘기면 그뿐이었다.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딱히 큰일도 아니죠.”
어둠이 깊어지자 밤바람 소리 역시 더욱 크게 들렸다. 대황자 궁에는 등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고, 회랑 아래에는 수많은 궁녀와 내시가 서 있었다.
하지만 전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비만이 침상 앞에 앉아 넋이 나간 얼굴의 대황자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귀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
“넌 모르겠지만, 아이는 원래 어릴 때 키우기 힘들단다. 귀신이나 요괴 같은 게 달라붙거든. 그래서 어린애들이 걸핏하면 여기저기 부딪치는 거야. 잘 걷다가도 갑자기 넘어지고 그러지 않던?”
대황자는 마음이 다소 진정된 듯 고개를 들어 귀비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왜 그러는 건데요?”
“그게 다 요괴나 귀신이 달라붙어서 그러는 거야.”
귀비가 대황자를 보고 빙긋 웃으며 손으로 귓불을 쓸어 주었다.
“그래서 아이가 무사히 장성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대황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저, 정말요?”
대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황자의 귓불을 쓸어 주던 귀비의 손에 별안간 힘이 들어갔다. 대황자가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진짜지. 내가 널 속여서 뭐해! 내 말 명심해라.”
귀비가 대황자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육가아는 본디 명이 짧아서 하늘이 데려가신 거야. 이건 그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대황자는 통증 때문에 입을 벌린 채로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거둔 귀비는 다시 따뜻한 표정으로 대황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사가아, 명심하렴. 이제 넌 부황의 유일한 아들이야. 이제 넌 강산과 사직을 이어받을 거야. 네가 방씨 황족의 혈통을 잇겠지. 감히 널 어떻게 할 사람은 없어.”
귀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어떻게 할 만한 사람도 없고.”
대황자가 귀비를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가 대황자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착하지.”
귀비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무겁고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네가 아직 어려 몸이 건장하지 못한 탓이지 뭐니.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이제 막 진정되었던 대황자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귀비는 대황자의 어깨를 확 잡아당겨 몸을 꽉 붙잡고, 대황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귀비가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
“넌 아직 어려서 힘이 달렸던 거라고 그랬잖아.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잡아 줄 수 있었을 거라고!”
대황자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까지 덜덜 떨었다.
모, 못 끌어당겼다고…….
“넌 아직 어려서 힘이 부족했던 거야. 육가아를 끌어당길 수 없었어! 말해, 다시 말해 봐.”
귀비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쉭쉭 소리를 내던 밤바람이 어느샌가 잠잠해지고, 하늘빛이 밝아졌다.
대황자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대신 하품을 했다.
“제가 아직 어려서 그랬어요.”
대황자가 중얼거렸다.
“힘이 없었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끌어당길 수 있었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자 대황자의 코가 저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그래, 힘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땐 정말 끌어당길 수 없었어.
“마마, 제가 힘이 없었던 탓에 육가아를 끌어당기지 못했어요. 형님, 형님 하며 절 불렀는데, 구하지 못했습니다…….”
대황자는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황자를 보며 귀비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표정을 감춘 다음 다시 아들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이황자의 병이 불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죽은 건 아니었기에 황궁이 소란스러워는 일은 없었다. 새벽이 되자 아침 식사가 각 궁으로 보내졌다.
배달된 식사를 본 내시가 내려놓으라는 손짓을 했다. 사람들이 물러가자 내시는 진안 군왕의 침전 문을 여는 대신 뒤쪽으로 갔다.
구주 수왕부에서 보낸 새해 선물을 쌓아 두는 고방의 문을 열자, 그 가운데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그 비단옷 차림에 여전히 그 버선을 신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후다닥 달려가느라 하얗던 버선이 까맣게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시가 얼른 걸음을 멈췄지만, 발걸음 소리를 들은 건지 진안 군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우리 지도 보러 아바마마께 가요.
이황자가 자신을 보고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같이 가자, 같이.”
진안 군왕이 행여 조금이라도 늦을세라 부리나케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입을 열자 눈앞에 있던 아이는 사라지고, 내시만이 슬픈 얼굴로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돌아서며 고방 안에 있는 진열대를 쭉 훑었다. 전부 휘황찬란한 물건들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물건들을 하나하나 쓸어 보았다.
사실 보내온 물건은 매년 똑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건 진안 군왕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사실 조금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사실 그 반응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기쁜 시늉을 했다. 여전히 아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자 연극을 했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아껴 주는 이는 없었다. 작게나마 마음을 담아 선물을 준비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없었던 거야! 애초에 없었던 거라고!
근데 왜 자신을 속였지? 왜 남을 속인 거야?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새해 선물 받고 싶대? 좋아하는 시늉을 한 거잖아! 아끼고 사랑해 주는 혈육이 있는 척 환상을 만들어 낸 거라고! 그런 짓을 벌이느라 진정으로 날 좋아하고 살피며 걱정해 주는 사람을 잃었어!
제발 정신 차려!
진안 군왕은 진열대 선반에 있던 보검을 꺼내 들더니 비단이 담긴 선물 상자를 매섭게 내리쳐 베어 버렸다. 선물 상자가 떨어지고 비단이 찢어지면서 진열대도 쓰러졌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 차려, 정신. 너한텐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마마…….”
황궁의 열린 문 사이로 여인의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찬합을 든 내시가 얼른 걸음을 멈추고, 밖으로 나오는 내시를 쳐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안에서 나온 내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문이 닫히자 안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비가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맞은편의 태후는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눈가가 붉고 피로한 안색이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니 괜한 생각 말거라.”
“마마, 숨길 수 있는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나중은 모르는 일이죠. 세상 사람들의 입을 무슨 수로 막아요.”
귀비가 울며 흐느꼈다.
“하물며 그런 식으로 물었어요. 그게 그 뜻이잖아요…….”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위낭도, 그런 뜻은 아니었을 게야. 아직 어리니 말을 가려서 할 줄 몰랐던 거지. 너무 슬프고 경황이 없어 그저 당시 상황을 물으려다가 무심결에…….”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비가 말을 끊었다.
“마마, 그 말을 믿으세요?”
귀비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귀비가 태후 앞에서 이토록 결례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태후는 화를 내거나 호통을 치는 대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방금 사가아가 어땠는지 마마와 폐하께서도 다 보셨잖아요.”
귀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사가아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에요. 눈앞에서 아우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 애 마음이 어떻겠어요.”
대황자는 방금 전 황제와 태후 앞에서 자신이 아우를 붙잡지 못했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공포에 질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놀라도 보통 놀란 게 아니고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 황제는 대황자 궁에서 한참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재워 주었다.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육가아가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바보가 될 거라더니, 사가아가 먼저 바보가 되겠어요.”
귀비의 말에 태후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릴 하는 게야!”
태후의 호통에 귀비는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제가 헛소리를 한다고요? 사가아가 그런 누명을 쓰게 됐는데, 바보가 안 되고 배기겠어요?”
귀비가 흐느껴 울었다. 태후가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내시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분명 방해하지 말라 명했거늘, 누가 감히 들어오는 게야?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측근 노태감이 보였다.
“마마.”
노태감이 예를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태후는 불쾌하지만 내쫓지 않고 화를 꾹 누르며 물었다. 눈치가 빠른 인사인데 이렇게 들어올 정도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진안 군왕 쪽 사람이 와서 일이 생겼다고…….”
노태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귀비가 즉시 울음을 멈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이쪽을 노려봤다.
“그 애가…….”
귀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태후가 얼른 말을 잘랐다.
“무슨 일이더냐?”
태후가 경고의 눈빛으로 귀비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정신줄을, 놓으셨다고…….”
노태감이 말했다.
정신줄을 놓아?
속으로 냉소를 짓던 귀비가 막 입을 열려는데,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 봐야겠다.”
“마마!”
귀비가 다급하게 일어나며 소리쳤다.
“더 이상 궁에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태후는 엄숙한 눈빛으로 쏘아붙인 다음,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떠나는 태후의 모습을 분노로 노려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내시를 불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대황자 궁에 계시더냐?”
귀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는 태후가 간 방향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소란을 피우거라, 소란을 피워. 큰 소란일수록 좋을지니.
진작 궁에서 꺼져 버렸어야 할 녀석이 안 가고 버티더니, 이번엔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갔구나.
태후가 진안 군왕의 처소 쪽으로 왔다. 앞뜰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안으로 들어선 태후는 소리 나는 쪽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내시들이 서 있었다. 다들 당황스럽고 불안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때로 말리기도 했다.
“무슨 일이냐?”
태후가 물었다. 후원에 있던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시선을 피했다. 고방에 있는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던 태후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진안 군왕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위낭, 무슨 짓이냐!”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마, 이것들을 태워 버릴 겁니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불안한 표정의 진안 군왕은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말투 또한 어딘지 모르게 뻣뻣했다. 딱 봐도 온전한 정신은 아닌 듯했다.
황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게 불이었다. 몇 년 전 낙뢰에 불탄 전각도 아직 수리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지금은 겨울이라 한번 불이 났다 하면 불길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진안 군왕의 궁이 후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진짜 불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질 터였다.
“위낭, 위낭, 허튼짓 말거라. 어서 횃불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태후가 따뜻한 말투로 달랬지만,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쓸쓸하게 웃었다.
“마마, 제가 육가아를 해쳤습니다. 이 물건들이 육가아를 해쳤어요. 이것들을 태워 버리고, 저 자신도 태워 버릴 겁니다.”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육가아를 해쳤다는 사람이 또 있네.
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안 군왕을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이…… 정말 그리 생각하는 건가?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일단 횃불부터 내려놓는 게 우선이야.
“위낭.”
태후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일부러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 얘길 하러 온 거란다. 어서 이리 오렴. 육가아가 방금 깨어났어.”
“정말요? 육가아가…….”
진안 군왕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려 할 때였다.
“어서 붙잡아라.”
태후가 손짓과 함께 소리치자 사방에서 대기 중이던 내시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마마, 절 속이셨군요. 절 속이셨어요.”
진안 군왕이 괴성을 지르며 고방 안을 뛰어다녔다.
“육가아는 안 깨어났잖아요. 육가아는 안 깨어났어요.”
날카로운 목소리는 갈라진 목소리로, 흐느끼는 목소리로 차츰 변해갔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내시들에게 제압된 진안 군왕에게 태후가 호통을 쳤다.
“육가아가 깨어나게 만들 겁니다. 육가아가 무사하게 지킬 거예요.”
밧줄로 묶인 채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있게 된 진안 군왕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너만 그 애를 생각하는 줄 알아?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우리도 전부 처소를 태우기라도 할까?”
태후가 고개를 들어 고방 안을 살펴보았다. 이것저것 내던지고 부숴 버려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여긴 구주 수왕부에서 보낸 선물을 놓아 두는 곳이었지. 그런데 이젠 전부 산산조각이 났구나. 이 아이가 보물처럼 애지중지 떠받들던 것을 전부 깨뜨리고 짓이겨 버렸어.
“마마, 마마. 이건 사고가 아닙니다.”
귓가에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은 태후를 보지 않고 발버둥 치는 것도 포기한 채 땅바닥을 보며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다 저 때문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제가 안 갔어요.”
그랬단…… 말이지?
태후는 진안 군왕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제가 안 갔습니다. 이 물건들을 보겠다고요. 이 물건들이 뭐 볼 게 있다고……. 제가 마마를 속이고 육가아를 속였습니다. 사실 전 이 물건들을 봐도,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그냥 제 가엾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들은 절 잊었습니다. 절 잊었죠. 그들이 보낸 이 물건은 늘 똑같은 것들입니다. 육가아가 한 번 웃어 주는 것만 한 기쁨도 못 준다고요. 그런데도 전 아닌 척 연극을 하며,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왜 이따위 물건들을 보겠다고 그 애랑 같이 가지 않은 걸까요. 제가 같이 갔다면, 온 힘을 바쳐서라도 육가아를 붙잡아 주었을 텐데……. 어떻게든 붙잡았을 겁니다.”
바닥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횡설수설하며 혼잣말을 늘어놓는 소년의 모습에 태후의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후가 꿇어앉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어리석은 것. 왜 너까지 아둔하게 굴어.”
태후 역시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사고였다.”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사실 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육가아뿐이죠. 그날 왜 같이 안 갔을까요. 왜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우들이 그리운 척 연극을 한 걸까요. 실은 신경조차 안 쓰는데요. 아우들도 저한테 관심 없고요. 그런데 왜 그런 헛짓을…….”
진안 군왕은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튼소리 마라, 허튼소리 마.”
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것. 그건 헛짓이 아니야. 나도 알고 육가아도 알아. 넌 우리가 걱정할까 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던 거야. 어리석은 것, 우리도 다 안다. 그게 무슨 헛짓이야? 철이 든 거지.”
그러면서 태후는 옆에 있는 내시에게 얼른 밧줄을 풀어 주라고 명했다. 사방에 꿇어앉아 있던 내시들이 얼른 달려와 밧줄을 풀며 일어나도록 부축해 주었다.
황제가 이미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시 하나가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황자님께서는 군왕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군왕께서는 그때 막 구주에서 온 새해 선물을 받으셔서…….”
눈치 빠른 귀비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귀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제의 옆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인 듯 보였지만, 오랜 세월 황제를 모신 귀비는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이미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귀비는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태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진안 군왕을 표독스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폐하를 모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저 녀석 좋은 일만 시켰네, 망할 녀석!
어둠이 내릴 무렵, 귀비가 종종걸음으로 태후궁에 들어섰다. 태후와 황제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사가아는 잠들었고?”
태후가 물었다.
“아직이요. 막 달래서 뭐 좀 먹였어요.”
귀비가 꿇어앉으며 말했다.
“마마, 군왕을 마마의 궁에서 지내게 하시려고요?”
“그래, 거기서 지내게 하려니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다.”
마음이 안 놓일 게 뭐 있어!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 또다시 그 물건들을 본다면, 백 번 천 번을 대비해도 불을 지르고 말 거야.”
태후가 황제를 보며 말했다.
“구주에서 보낸 그 물건들을 어쨌으면 좋겠소? 전부 부숴 엉망진창이 됐던데. 저쪽에서 알면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이오.”
오해 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그 집안 아들이 저지른 짓인데!
귀비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거길 봉쇄하고, 사람을 시켜 천천히 정리하도록 하죠.”
황제가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피곤에 지친 태후가 그만 물러가라고 했다. 궁문을 나온 귀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폐하, 군왕이 태후궁에서 지내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이제 장성했는데 후궁에서 함께 지내는 건 좀…….”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 귀비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눈길에 귀비는 괜히 마음이 찔려 나머지 말을 도로 삼켰다.
“좀 기다려 봅시다. 짐이 알아서 할 테니.”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소. 오직 육가아 하나뿐이었지. 이런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내쫓으란 말이오.”
귀비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얼른 뒤따라갔다.
“태후마마 옆에 있으면, 마마께서 다독여 주시기도 편하고.”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사가아도 데려오시구려.”
지금 대황자 상태로서는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는 게 가장 안심이었다. 어딜 보내든 마음이 안 놓일 터였다.
귀비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돌보기에도 마마께서 고단하실 거예요.”
귀비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황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군왕이 사가아한테 조금…….”
황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가아를 탓한 게 아니오. 자기 자신한테 그런 거지.”
“폐하.”
귀비가 황제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군왕의 말을 믿으세요?”
황제가 고개를 돌려 귀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는, 짐의 말을 안 믿소?”
귀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칫했다가 얼른 몸을 낮추며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황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육가아한테 일이 생긴 게, 짐의 잘못이라는 얘기였소.”
황제는 어둠으로 물든 밤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짐이 그리 칭찬하지 않았다면, 그 애가 어찌…….”
“폐하.”
귀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쳤다.
“짐이 정말 자책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소?”
황제가 귀비를 보며 묻자 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 믿습니다. 폐하께서 괴로우시다는 거 잘 알아요.”
귀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짐은 위낭도 믿소.”
귀비는 멈칫하며 황제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진안 군왕은 황제와 귀비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궁문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편전의 창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황제와 귀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안 군왕은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뒤덮은 궁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날이 어두워졌구나.”
진안 군왕이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어두워졌어.
진안 군왕은 발을 들어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옆에 있던 내시가 그 말에 눈짓을 주고받았다.
“등을 대령해라, 등을.”
내시 하나가 말했다.
등을 대령해라, 등을.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궁등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켜진 궁등은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날이 아직 밝기 전, 마당은 어두컴컴했다.
벌써 깨끗하게 씻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반근은 부엌으로 가서 흰죽을 쑤고 정교랑의 방 문 앞으로 왔다. 아직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역시 단정히 차려입은 정교랑이 걸어 나왔다.
“아씨, 우리 출발해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라 골목은 조용했다. 닭이나 오리도 아직 잠들어 있었고, 개들은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가 금세 다시 내리고 다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길목을 세 바퀴째 돌고 있던 정평은 여인이 표표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암청색 두봉에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라 고운 얼굴을 두모로 가리지 않은 채였다. 어두운 두봉에 새하얀 얼굴은 분명한 대비를 이루며 더없이 잘 어울렸다. 겨울 새벽의 안개 속에서 보니 신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정 낭자, 정 낭자.”
정평이 웃으며 다가갔다.
“이런 우연이 있나. 어디 가요?”
정교랑은 정평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네. 그냥 좀 걸으려고요”
정교랑은 정평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정평은 정교랑이 대답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을 옆으로 살짝 트는 걸 눈여겨봤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건 물론이고, 고개를 숙일 때에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대하는 예절이 분명해.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 낭자의 손윗사람은 저기 저 대저택에 있는걸. 요 며칠 그 저택에서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도 배웅 한 번 하는 일이 없던데.
정평은 입을 삐죽거리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짜 내 말에 놀라서 그러나?
“정 낭자, 점괘가 두 개일 순 없지만, 내가 점을 한 번 더 봐 드릴 순 있는데…….”
정평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아니에요. 괜한 생각 마셔요. 그 점괘가 옳았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의 개인적인 일이죠.”
정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이리 똑똑한 낭자잖아. 똑똑한 사람이 그리 쉽게 놀랄 리 없지.
“그럼 일 보십시오, 낭자.”
정평이 예를 표하며 웃었다. 정교랑은 몸을 틀어 정평의 예를 피하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감히 말을 올리기도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정평은 감히 자신을 범접하기도 송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낭자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평이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후에야 정교랑은 계속해서 가던 길을 걸었다. 정교랑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나 크게 될 인물인가 보네. 다른 사람은 못 알아보는데, 저 낭자는 똑똑하고 명이 기이해서 알아본 거야. 그래서 내게 저토록 공경한 거고…….”
정평의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채소로 어깨를 탁 쳤다.
“평 총각, 대단하네.”
근처에 있던 집에서 아낙 하나가 나와 씩 웃었다. 아낙의 손에는 식칼도 들려 있었다.
“사흘이나 이 주변을 돌더니, 진짜 우연히 정 낭자를 만나고 말이야.”
정평의 일은 정교랑과 함께 나들이를 나갔던 아낙들이 돌아오면서 남정에 쫙 퍼졌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정평이 정 낭자의 미움을 샀다고 여겼지만, 두 아낙이 단호하게 부인했다. 미움을 사기는커녕 정 낭자가 정평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움을 샀다면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때리기는커녕 정 낭자가 직접 사과까지 했다는 게 이유였다.
정 낭자는 이제 남정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됐다. 그런 정 낭자가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그들도 존경을 표하는 게 당연했다.
정계의 주도로 남정 사람들은 힘을 합쳐 정평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정평이 돌아온 후의 상황은 이들의 상상과 다소 달랐다.
정 낭자는 정평이라는 사람을 아예 모르는 듯 행동했다. 다른 특별 대우를 하는 건 더더욱 없었다. 이에 따라 남정 사람들의 열정과 존경심도 금세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예전처럼 깔보고 무시하거나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일은 없었다. 과거 정평을 그리 대했던 건 사실 정평의 신분이나 내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정평은 정 대노야에게 자신의 조부가 정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했다. 젊었을 적 밥벌이를 위해 타향으로 갔다가 촉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가난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정평의 주장이었다. 조부는 부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으나 부친 역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다시 아들 정평에게 당부했다. 정평은 고생 끝에 이제야 겨우 돌아왔다고 했다.
“조부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삼 대입니다. 저는 촉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곳 강주 말씨를 정통으로 구사하지요.”
정평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이제 정평의 신분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다들 그를 정씨 일족으로 받아들이면서 태도 또한 달라졌다.
“하여간 간도 크지. 감히 아씨를 속이다니 매질이 겁나지도 않아?”
아낙이 웃으며 말하자 정평도 헤헤 웃으며 아낙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주머니. 속인 게 아니라고요. 핑계를 대서 둘러대 봤자 어차피 저도 알고 그 아씨도 알고 다른 이들도 알잖습니까. 어차피 모두 안다면 정당하게 나가는 게 낫죠. 세상에 뻔히 알면서 말하지 않는 일이 좀 많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미움을 받으니까요.”
아낙이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식칼을 들고 휘휘 저었다.
“말하는 거 보면 아주 야무져. 입만 잘 털면 뭐하나,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채소탕이라도 좀 먹으려오?”
정평이 헤헤 웃으며 읍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정평이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집 짓는 곳에 가 봐야 하거든요. 풍수라도 좀 짚어 줄까 하고요.”
아낙은 또다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풍수를 짚어 주긴 개뿔.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그러지.”
정평은 히죽 웃으며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집 짓는 곳 쪽 밥이 푸짐하게 나오긴 하지.”
아낙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계속해서 채소를 다듬었다.
칼질하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깼다. 칼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면서 개와 닭 소리,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 어른들이 혼내는 소리도 늘어났다.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