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3권
-누구의 잘못-
저쪽? 왜 저쪽이라고 했지? 그 여인은 분명 이쪽 사람인데.
한숨을 푹 내쉰 정 대노야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서 그 애를 데려올 방법이나 찾아보시오! 내란을 잠재워야 외환을 막지. 안 그랬다간 저들이 정말 우리 정씨 가문의 살갗을 벗기고 뼈를 바르려 들 거요.”
“어딜 감히요!”
정 대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정 대노야는 이미 기력을 소진한 듯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지부 관청 안. 일상에서 입는 도포를 입은 송 지부가 친히 차를 우리며 말했다.
“고소장을 접수했으면 응당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를 안 하는 것이야말로 직무 유기지요.”
맞은편에 앉은 식객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관졸 두 명이 급히 들어왔다.
“대인, 정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는데 대노야가 병으로 앓아누워 당분간 올 수 없답니다.”
지부 대인은 예상했던 반응인 듯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봤는가?”
지부 대인은 식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의 반응을 보게. 우리 사람을 욕하며 내쫓질 않나, 병을 핑계 대질 않나. 이게 무슨 뜻이겠나?”
식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한다는 뜻이지요.”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지.”
송 지부는 찻잔을 들며 미소를 짓고,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백자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올곧고 깨끗한 이는 없네. 조사하려 들면, 뭔가는 나오기 마련이지. 겁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더구나…….”
송 지부는 손에 들고 있던 차를 단숨에 비우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 진씨 가문 사람은, 아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가?”
식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바깥출입을 안 하고 있습니다. 가끔 밥이나 먹으러 나오는 정도지, 누군가와 왕래하는 일도 없고요.”
송 지부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거 이상하네. 그 사람들은 여기 왜 온 거지?”
남정으로 온 두 여종은 정교랑의 마당 문이 활짝 열려 있자 기대에 찬 눈길로 안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시야로 들어오자, 두 여종은 기뻐하며 아씨를 불렀다.
“우리 집 교랑은 지금 없는데.”
정 이부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우리 집……. 언제부터 그쪽 집이 된 거야?
두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감히 말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럼 교랑 아씨께선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올 때가 되면 오겠지.”
여종들이 웃으며 묻자 정 이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던 여종들의 눈에 정 이노야 집안의 두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급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대방과 이방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지경인지라, 이들은 정면에서 마주쳤는데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더러 돌아오라고? 돌아오긴 어디로? 내쫓을 땐 언제고 돌아오래? 어림도 없는 소리!”
뒤에서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여종은 돌아보지 않은 채 골목 모퉁이를 돌아 들어갔다.
“어머니!”
안에서 나오던 정칠랑은 아버지가 보낸 여종을 내쫓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보고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벌레가 물어서 못 자겠어요.”
불과 며칠 만에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잃고 얼굴이 누렇게 뜬 시골 아이가 된 딸의 모습을 보자 정 이부인도 마음이 쓰렸다.
사실 잠을 못 잔 건 딸뿐 아니라 정 이부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정면을 바라보자 반쯤 열린 방문이 보였다. 몸종은 이제 막 정돈을 마치고, 이불을 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네 언니도 집에 없으니, 그 방에 가서 눕는 게 어떠니?”
정 이부인의 말에 정칠랑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바보 방 쓰기 싫어요!”
“바보란 말 하지 말랬지!”
정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이제 우리 모녀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전부 그 애한테 달렸어.”
정 이부인은 정칠랑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더니, 나머지 반쪽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따뜻한 기운과 함께 맑고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정 이부인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청태향(淸泰香)이네!”
듣기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향이라고 했다. 전에 한 번 사 본 적이 있는데, 정 대부인이 사치와 낭비를 이유로 비용을 전부 삭감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바꾼 향도 좋은 것이었지만, 정 이부인은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다.
최고급을 써 봤는데 차등의 것이 눈에 찰 리가 있나. 얘가 이 향을 쓰다니 뜻밖이네.
정칠랑은 향에 대해 잘 몰랐지만 요 며칠 꿉꿉한 냄새에 죽을 것 같다가 모처럼 향긋한 냄새를 맡자 구원이라도 받은 듯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 나 여기서 잘래요!”
정칠랑이 선포하듯 외쳤다. 정 이부인은 정칠랑을 찰싹 때리면서도 잠자코 따라 들어가 방 안을 살폈다.
정 이부인과 정칠랑이 지내던 거처보다 별로 크진 않았지만, 벽에는 대나무로 엮은 자리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푹신한 깔개가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정 이부인은 점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오산(吳山) 선생의 그림이잖아.”
정 이부인은 병풍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이 솜씨는…….”
“어머니, 이 등이 엄청 예뻐 보여요. 위에 그림도 있어요.”
바닥에 꿇어앉은 정칠랑이 등을 보며 외쳤다. 새하얀 종이 등롱이 장식용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간단한 실선이 이어져 반쯤 핀 연꽃 모양을 나타냈다.
정칠랑이 손을 뻗어 그 위에 찍힌 낙관을 만져 보며 읽었다.
“막간(莫干)…….”
또다시 헙 하고 숨을 들이켜며 꿇어앉은 정 이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등을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건 연주(燕州) 막씨 가문의 등이야! 폐하께 올릴 진상품을 만드는 집안인데…….”
“외조부님도 갖고 계셨던 거네요.”
정칠랑도 어디서 봤는지 알아보고 입을 삐죽였다.
“네 외조부님은 보물처럼 애지중지 떠받드셨지. 쓰는 건 고사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아까워하셨어.”
정 이부인이 등을 돌려보며 말했다.
얘는 이걸 이렇게 아무렇게나 쓰고 있네. 아까워라.
정칠랑이 이번에는 저쪽에 있는 다리가 죽간처럼 세워진 서안(書案)을 보며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 이 서안은 쌍육 말판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두 모녀가 함께 들여다보려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예요?”
반근이 놀라 소리치자 정 이부인은 머쓱해하며 등을 내려놓았다. 저쪽의 정칠랑도 입을 삐죽거리며 탁 소리가 나도록 서랍을 밀어 넣었다.
“뭐 도울 건 없나 보고 있었어.”
정 이부인이 말했다.
“얼른 나가세요, 얼른요.”
반근이 말했다.
혐오스러워 죽겠다는 저 표정은 정 이부인도 일찍이 본 적이 있었다. 집안에서 하급 여종들이 실수로 안에 들어오면, 이부인의 측근 여종들이 기겁을 하고 내쫓으며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래 봤자 아랫것 주제에.”
정칠랑이 소리쳤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어린아이일수록 더 눈치가 빠른 법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 일들을 겪으면서 저 아랫것이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걸 확인한 터였다.
정칠랑은 그대로 폭발했다.
“난 안 나가. 난 여기서 잘 거야!”
정 이부인은 그래도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나가지는 않고, 웃으며 비위를 맞추려 했다.
“반근, 교랑도 지금 집에 없잖니. 칠랑이 당분간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
정 이부인이 침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침상은 안 쓸게. 이 깔개 위에서 자면 돼.”
“부인, 그게 말이 돼요? 아씨는 자기 방에 아무나 들어오는 걸 싫어하세요. 저도 밤에는 여기서 자는 일이 드물다고요.”
“네까짓 게 뭔데? 넌 그래 봤자 하인이잖아!”
정칠랑이 콧방귀를 뀌며 소리치자 반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언변으로 따질 것 같으면 장 노태야를 따르는 청매만 못했고, 장 노태야 댁의 소심과는 더더욱 비교가 안 되는 반근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한 반근의 모습에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했다.
“반근, 칠랑은 교랑의 동생이고 나이도 어리잖아. 여기서 자게 해 줘. 아마 교랑이 있었어도 별말 안 했을 거야.”
정 이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모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없이 홱 뒤돌아 나갔다.
정칠랑이 반근의 뒤에 대고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같잖은 계집애, 어디 내 앞에서 행세를 부려! 따귀 한 번 더 맞아 볼래!”
정칠랑은 푹신한 침상에 누워 팔다리를 쭉 펴고는 편안한 듯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이 살 만하지.”
정 이부인은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계속해서 사방을 둘러봤다.
이제 보니 얼핏 소박해 보이는 장식들이 전혀 소박하지 않네. 전부 최고급을 썼어. 주씨 가문에 이리도 돈이 많았을 줄이야. 게다가 그 아이를 이토록 끔찍이 아끼다니.
“좀 이따 뜨거운 물에 좀 씻고, 한숨 푹…….”
정 이부인이 고개를 숙여 정칠랑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반근이 되돌아왔다. 뒤에는 조 집사와 시종들까지 대동한 채였다.
“마침 잘들 왔네. 나 대신 집에 가서…….”
정 이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을 끊었다.
“저 사람들 끌어내요!”
뭐라고?
정 이부인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종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이놈들, 무슨 짓이냐! 아, 이 손 놔! 이건 하극상이야!”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밖에서 장난치듯 보초를 서고 있던 아이들은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 이부인은 시종들에게 떠밀려 비틀비틀 대문 밖으로 나왔고, 곧이어 정칠랑도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정칠랑은 놀라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정 이부인 역시 눈물을 쏟으며 정칠랑을 끌어안았다.
“어디 안 다쳤니? 안 다쳤어?”
그러던 정 이부인이 뒤를 돌아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너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두 모녀를 쳐다보던 반근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쾅 하고 대문을 닫아 버렸다.
반근에게는 말재주가 없었다. 그렇다면 입은 다물고, 자신이 할 일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얘, 얘!”
놀란 정 이부인이 일어나 달려들었다.
“어떻게 우릴 내쫓을 수가 있어! 우린 너희 아씨한테 당해서 집에도 못 들어가게 됐는데, 어쩌라고 우릴 내쫓아? 우린 어디로 가라고?”
“뭘 우리 아씨한테 당했단 거요?”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냉랭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 집에서 쫓아낸 게 우리 아씨도 아니고.”
“그 아씨가 우리한테 증인을 서라고 안 했으면, 내가 지금 이 꼴이 됐겠나?”
정 이부인이 씩씩거렸다.
“우리 아씨께서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요? 애초에 댁한테 마음이 없었으면 아무도 강요할 수 없었던 일 아니오.”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신네가 강요한 거잖아!”
정 이부인이 씩씩거리며 소리치는데도 조 집사는 웃으며 받아쳤다.
“무슨 강요를 했는데요?”
증인을 안 서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조 집사의 웃음이 짙어졌다.
“부인, 우리 아씨께서 시집을 가든 말든 부인과 무슨 상관입니까? 부인의 이익에 해가 되는 거라도 있나 보죠? 그게 아니면 뭐가 그리 초조하셨을까요?”
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자신이 자신을 강요했을 뿐이지요.”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말이 안 통해. 이러니 대노야께서 분을 못 참고 혼절을 하시지!
정 이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달려들려 했지만, 조 집사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부인, 대부인만 이부인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이부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정칠랑과 구경하러 몰려든 남정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어, 어딜 감히!”
정 이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 집사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정 이부인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고 정칠랑을 잡아끌며 도망쳤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녀를 보며 조 집사가 손뼉을 탁탁 쳤다.
“자자, 가서 일들 봐라.”
정 이부인은 울고 있는 정칠랑의 손을 잡고 몇 번을 주저하다가 결국 쪽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이부인…….”
문을 연 여종이 놀라 소리쳤다. 정 이부인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여종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들은 정 이부인을 막는 대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당으로 들어선 정 이부인의 눈에 대청에서 아들 희가아를 달래는 여종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정 이부인은 기쁘면서도 이렇게 기뻐하는 게 맞는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어딜 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청에 있던 여종이 기지를 발휘해 희가아의 엉덩이를 세게 꼬집었다.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달려가더니, ‘우리 아가’, ‘밥도 제대로 못 먹었구나’, ‘어미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희가아만 잠깐 보고 갈 거예요. 희가아를, 잘 돌봐 줘요…….”
정 이부인은 흐느껴 울며 희가아를 끌어안고 남몰래 꼬집었다. 희가아가 더욱 자지러지게 우는데도 정 이부인이 짐짓 내려놓으려는 시늉을 하자, 여종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며 막았다.
정 이노야는 울음소리에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관둡시다. 이렇게 된 마당에 끝장을 볼 것도 아니고.”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하면서 희가아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마당은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해졌다.
정 이부인은 족히 한 시진을 씻고 나서야 그나마 사람 꼴을 갖추게 됐다고 생각했다. 깨끗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청에 앉은 정 이부인은 손난로와 찻잔을 받으며 편안한 듯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형님과 형수님께 가서 잘못을 사죄드리시오.”
정 이노야가 옆에서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요? 우리 잘못도 아닌데.”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는 발끈하여 벌떡 일어섰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나와?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천륜을 거스르고 형님께 맞섰겠소?”
정 이노야가 노발대발하는데도 정 이부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정 이노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사람들이 교랑의 혼수를 빼앗고 교랑을 내쫓지 않았다면, 교랑이 고소를 했겠어요? 그 사람들 잘못이 먼저인데, 우리 탓으로 돌리는 건 무슨 경우래요?”
그런가?
정 이노야가 멈칫했다.
“옛말에 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댔어요. 두 부부가 교랑의 혼수를 가로채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모자라 교랑까지 핍박하니 일이 이 지경이 된 거 아니에요? 복은 복대로 누리면서 우리한테 고마워하지도 않더니, 이제 죄를 받게 되니까 우리 탓을 해요? 생각해 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잖아요.”
정 이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당신은 그 바보의 아버지고, 나는 계모라는 게 잘못이겠죠.”
정 이노야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정 이부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정 이부인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전에는 자신의 거처도 꽤 근사하게 꾸며 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정교랑의 그 소박한 공간이 눈앞에 떠올랐다.
“글쎄, 교랑이 자기 집을 어떤 것들로 꾸며 놨는지 알아요?”
정 이부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정 이노야 쪽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쪽에서 이노야 부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저쪽의 정교랑 일행은 녹각산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길가에 쌓인 눈도 대부분 치워져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이 늘어났다.
“아씨,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잘 만들었네요.”
두 아낙이 등롱 점포 앞에서 고개를 돌리더니 주마 등롱 하나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마차를 타는 대신 도보로 걷고 있던 정교랑은 두모를 푹 눌러쓴 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요.”
그러자 시종 하나가 얼른 앞으로 나와 돈을 지불했다. 아낙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웃고는 얼른 등롱을 챙겨 뒤따라오던 마차에 실어 두었다. 마차에는 벌써 물건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먹을 것이며 마실 것, 놀 것, 쓸 것 등 없는 게 없었다.
“다음부턴 아예 칭찬을 하지 말아야겠어. 뭐가 좋다고만 하면 사라고 하시네. 먹고 입는 것에 이렇게 돈을 낭비하다니!”
세랑이 말했다.
“근데 칭찬을 안 하면 그냥 멍하니 보기만 해야 하잖아. 그럼 장터 구경하는 재미도 안 나실 테고…….”
삼랑이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주머니들, 서두릅시다.”
저쪽에서 시종이 불렀다. 얼른 대답한 두 아낙은 서로 자제하자고 당부하며 뒤따라갔다.
정교랑이 서화 노점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이 든 서생인 노점 주인은 낡고 해진 도포 차림이었다. 연신 손을 비비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몸을 녹이던 서생은 정교랑의 일행이 걸음을 멈추자 상냥하게 맞이했다.
정교랑은 서화를 쭉 둘러봤다. 두 아낙은 서화에 대해 몰랐지만 문자에 대해 본능적인 경외감과 동경을 품고 있었다.
“아씨, 그림이 어때요?”
아낙들의 물음에 정교랑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별로네요.”
늙은 서생이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는 참 말을 직설적으로 하시는구려.”
“돌려서 말하면, 어르신한테 좋을 게 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늙은 서생은 멈칫했다.
“적어도 기분은 좋지요.”
“그럼 기분 좋자고 여기서 노점을 하나 보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이 엄동설한에 여기 나와 있겠나!
늙은 서생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따지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낭자 말이 맞소.”
늙은 서생이 쓴웃음을 지으며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래도 이 글씨들은 괜찮네요. 삼랑, 가져가서 아이들한테 보여 줘요.”
늙은 서생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늙은 서생은 손사래를 치는 두 아낙을 향해 얼른 앞에 있던 서화를 내밀었다.
“한번 보시구려. 애들 가르치는 용도로는 쓸 만하다오.”
두 아낙이 머뭇거리는 사이, 정교랑은 옆에 걸려 있는 서화를 흥미롭게 살폈다.
“흥 깨지 말고.”
아낙이 나지막이 눈치를 주자, 삼랑도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떠들며 서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낭자, 기분 좋으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기도 합니다.”
늙은 서생은 손을 비비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교랑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어떤 일에 정진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립이 먼저겠지요. 나는 서화를 팔고 있지만, 서화를 파는 게 아니라오.”
맞지만 또 아니라니. 말을 빙빙 돌리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옳은 말씀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호객 소리가 들려왔다.
“점괘 보세요, 점괘요. 화를 피하고 복을 받게 해 드립니다. 단돈 일 문에 모시겠습니다.”
사내는 갈라진 목소리로 이따금 기침을 해댔다.
정교랑이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늙은 서생은 아휴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서화를 들어 올리며 뒤쪽을 가리켰다.
“저 점쟁이도 마찬가지라오. 사실 저치가 점괘를 보는 것도 점괘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니…….”
서화를 걷자 대나무 장대로 만든 틀 너머로 젊은이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의 앞으로는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옆에 꽂은 깃발은 바람을 따라 표표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평.”
몸이 절로 떨리는 추위에 발을 구르며 몸을 녹이고 호객행위를 하던 젊은이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엇, 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나무 장대로 세운 틀에 걸린 서화가 들어 올려지면서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가 어린 낭자의 미모에 감탄하기도 전에, 여인은 앞에 놓인 대나무 장대를 홱 걷어치웠다.
늙은 서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여인은 바닥으로 떨어진 서화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말…… 무서운…… 여장사다!
정평은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장사는 금세 정평 앞에 섰다. 어깨에 걸쳐 있던 그림은 바람이 불자 그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망이 된 노점에 발을 동동 구르던 늙은 서생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눈앞으로 돈을 불쑥 내밀자 우뚝 멈췄다. 울고불고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길 가던 행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힐끔거리기만 뿐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지는 않았다.
“여장…… 아니지, 낭자, 절 아십니까?”
정평은 자신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쭈뼛쭈뼛 물었다. 그러면서 잽싸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곳에 온 지 시일은 좀 흘렀다만, 돈벌이는 얼마 못 했어. 그중에 여인이 있었나? 점을 친 사람의 가족인가?
아니지, 아니지. 여긴 내 구역이 아니라 누구한테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번에 내 이름을 부르지?
“어머나, 사기꾼이네!”
따라온 아낙들도 놀라 소리쳤다. 정평은 아낙들을 바로 알아보며 흠칫 놀랐다.
“엇, 삼랑 아주머니와 세랑 아주머니가 어쩐 일이십니까?”
정평이 히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삼랑은 대뜸 정평의 한쪽 팔을 붙잡았고 세랑 역시 다른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둘은 좌우 양쪽에서 정평을 잡았다.
“여기로 도망쳤던 게로군!”
삼랑과 세랑이 흥분하여 소리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드디어 잡았네요.”
정평은 즉시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씨, 겨우 일 문 아닙니까. 뭘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인 정평은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뭔데요. 환불은 안 됩니다. 어쨌든 점괘를 풀어 줬는데, 공으로 할 순 없죠. 정 그러시면 절 패서 분풀이라도 하세요.”
정평이 주절주절 떠들어대는데도 앞에 있는 여인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여인은 아직도 정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히 뜯어보았다. 옆에 있는 두 아낙은 영문을 몰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눈치였다.
정평은 한숨을 토하고 한결 편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여인이 구석구석 살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다.
“닮았어요?”
정평이 물었다.
닮았냐고?
두 아낙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정교랑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씨!”
아낙들이 놀라 소리쳤다.
같이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여인은 언제나 덤덤한 표정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살짝 미소나 짓는 정도였다. 딱히 친절하다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정색하는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건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정평은 도리어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닮았나.”
정평이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그럼 마음껏 봐요. 실컷 보라고.”
바람이 훅 불어오면서 길가의 나무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이리저리 떨어졌다. 아낙은 얼른 자신의 두봉을 탁탁 털어 정교랑을 막아 주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때였다. 단정히 앉은 여인에게 눈이 떨어지면서 짙은 색상의 옷 위로 영롱한 반점을 만들며 내려앉았다.
여인이 조금 특이하고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던 시종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정씨 가문의 아낙들과 늙은 서생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저, 정말로 실컷 보려는 건가?”
늙은 서생이 중얼거렸다. 실컷 보라고 하자, 여인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일일세.
늙은 서생은 아예 서화 장사를 접고, 옆에서 대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망가진 대나무 틀과 서화 값을 배상받았으니 오늘 벌이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린 낭자가 정말 힘이 장사네. 저 민첩한 동작 좀 봐. 석궁도 당길 수 있겠어.
아낙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그럼 어쩌지?
저 사기꾼도 얼굴은 별 볼 일 없는걸. 왕십칠만도 못하잖아.
“허튼 생각 마시오. 그런 거 아니오.”
늙은 서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두 아낙은 늙은 서생을 노려봤다.
“뭘 안다고!”
아낙들이 투덜거렸다.
“댁들보다는 잘 알지. 저 낭자의 눈빛을 보면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오.”
늙은 서생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받아쳤다.
이쪽에서 입씨름을 하는 동안 저쪽의 정평은 한참 동안 호객행위를 했음에도 오는 이가 없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돌린 정평은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이제 막 눈치챘다는 듯 씩 웃으며 다가왔다.
“낭자, 점괘 한번 봐 드릴까요? 일 문에 봐 드리고 풀이까지 해 드립니다.”
정교랑이 갑자기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정교랑의 모습에 오히려 다른 이들이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 아씨께서 무서워하시는 것도 있나?
살인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시종들이 생각했다.
자기 집안 웃어른도 고소하면서…….
아낙들이 생각했다.
내가 튼튼하게 묶은 대나무 장대도 단번에 풀어 버리면서…….
늙은 서생이 생각했다.
“사기꾼, 저리 가. 누가 여기서 사기 치래?”
두 아낙이 소리를 지르며 정평을 쫓아내려 했다.
“저리 가. 쳐다볼 수 있게 저쪽에 가만히 서 있기나 해.”
“사실 저자가 점괘는 꽤 정확하다오.”
늙은 서생이 말했다.
정평은 얼마 전 이곳으로 와 자리를 깔았다. 워낙 작은 고을인 데다 날씨까지 추웠는데 모처럼 동료가 생겨 늙은 서생은 내심 기뻐하던 차였다. 무엇보다도 자기보다 벌이가 더 시원치 않을 정도로 재수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늙은 서생은 며칠 전 정평에게 점을 보고 일 문을 냈다. 정평은 며칠 내로 재물운이 들어올 거라고 했지만, 늙은 서생은 물론 믿지 않았다.
점괘를 두고 며칠 동안 놀리기까지 했는데, 실제로 돈이 들어오자 늙은 서생은 퍼뜩 깨달았다.
이게 바로 그 재물운이로구나!
그림을 거는 장대와 서화 몇 장의 손실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보다 훨씬 막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우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늙은 서생은 젊은이의 거래가 성사되길 바랐다.
비록 일 문짜리 거래지만, 저 돈 많은 낭자의 비위를 잘 맞춰 기분이 좋아지면 대박이 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낭자, 겁낼 것 없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낭자가 피하고 겁낸다고 해서 안 오진 않습니다. 똑바로 보면 사실 별것도 아니죠.”
피하고 겁낸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지…….
정평을 쳐다보던 정교랑이 눈을 살짝 내리깔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어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는 것과 다름없는 웃음이었지만.
정평은 정교랑의 표정을 못 본 척 따라 웃고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걸음을 옮겨 낡은 탁자 앞에 섰다.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대전(大錢: 동전의 일종)을 흔들었다가 던지시면 됩니다.”
정평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전 세 개를 꺼냈다. 정교랑이 막 손을 뻗어 받으려는데, 정평이 대전을 도로 가져갔다.
“저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 있는데 점괘는 공짜로 못 보거든요. 선불을 주셔야…….”
정평이 히히 웃으며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시종이 즉시 돈을 건넸다. 하지만 정평은 돈을 받지 않고 손을 도로 뺐다. 시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 문만 주시면 됩니다.”
정평은 손가락 두 개를 뻗더니 시종의 손에서 딱 일 문만 집었다.
“왜 일 문을 받죠?”
정교랑이 벌떡 일어나며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깜짝 놀랐다.
정평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마, 많은가요?”
정평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낭자, 공짜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 가문의 규율이라…….”
“이 돈 다 줄게요. 돈 벌고 싶은 거 아니에요? 왜 안 받겠단 거죠?”
손을 뻗어 시종의 손에 있던 돈을 움켜쥔 정교랑이 정평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 가져가요!”
정평은 난처한 듯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그래도, 규율이 규율인지라…….”
정평은 천천히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정교랑을 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일 문만 받겠습니다. 더도 안 되고, 덜도 안 돼요.”
정교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평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입을 다문 채, 정평이 조심조심 일 문을 집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은 나머지 돈을 시종에게 도로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상상처럼 분노하여 탁자를 뒤엎거나 정평에게 욕설을 내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정교랑의 표정은 담담했다. 애초에 흥분했던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평은 일 문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챙겨 넣고, 또다시 조심스레 대전 세 개를 건넸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대전을 손에 쥐었다.
“단단히 쥐고 원하는 걸 생각하며 흔드세요. 그다음 던지시면 됩니다.”
정평이 시범을 보이자, 정교랑은 대전을 손에 쥐고 천천히 흔들었다.
“네, 네, 그렇게요.”
정평이 어린애를 달래는 듯 말하자, 정교랑은 입을 삐죽이며 미소를 지었다. 차오르는 눈물로 또다시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교랑이 손을 뒤집으며 대전 세 개를 탁자 위로 던졌다. 정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주변 사람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점괘 하나 보는 일이 이리도 고단할 줄이야…….
“어디 봅시다.”
정평이 옷자락을 떨며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었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 보니 지나가던 행인들도 관심을 보이며 구경하러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고 점괘를 확인하던 정평의 얼굴에 순간 웃음이 싹 걷혔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정평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어떻게 목숨이 없을 수가 있지요?”
정평이 놀라 소리쳤다. 그 표정에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놀랐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라니요?”
두 아낙이 얼른 물었다.
“죽은 사람이라고요!”
정교랑을 쳐다보는 정평의 눈빛에선 놀라움이 감춰지지 않았다.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겁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라니! 곧 죽을 거라니! 이 무슨 해괴한 언사란 말인가!
늙은 서생은 분을 참지 못하며 달려들어 정평의 따귀를 후려쳤다.
점쟁이들이 과장된 말로 겁을 주면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재난을 피할 방법이니 뭐니 운운하는 건 익히 안다만, 겁을 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이건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 거잖아!
“망할 점쟁이 같으니라고. 어쩐지 장사가 오지게 안 된다 했네. 애초에 장사할 줄을 모르는 놈이었어.”
“끝났네, 끝났어. 초주검이 되도록 맞게 생겼구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군거렸다.
다행히 주먹이 오가는 소란은 없었다. 두 사람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평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고, 정교랑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길흉은요?”
정교랑이 물었다.
“목숨이 없는데, 운명을 어떻게 봅니까?”
정평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평은 눈앞의 여인을 처음으로 꼼꼼히 뜯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전에 본 적 있어요!”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단정히 앉아 있던 낭자가 벌떡 일어난 모습이 보였다. 그 충격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소리가 난 듯했다.
사람이 죽었다고 했을 때도 저리 놀라진 않았는데, 전에 본 적 있다는 말 한마디에 저리 놀란다고?
정평은 놀랍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듯 혀를 찼다.
“아, 아니, 낭자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요. 예, 예전에 정씨 저택 문 앞에서 봤단 말입니다. 아주 으리으리한 행렬을 이끌고 그 집 대문을 넘어선 아씨가 아니십니까?”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았죠?”
정교랑이 불쑥 묻자, 정평은 억지로 허허 웃었다.
“그, 그게 딱 보면 알죠. 낭자가 보는 건 내가 아닐 테니까요. 나를 통해 보는 다른 사람이죠.”
으응?
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멈칫했다.
우린 왜 눈치를 못 챘지? 좀 이상하다는 것 외에는…….
정교랑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눈이 더욱 반짝여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찡한 웃음이었다.
“그래요. 정말 똑똑하시네요.”
똑똑하다고? 어떻게 알아본 거지?
모두가 정평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바람에 쓰러질 정도로 왜소한 몸에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는 남루한 행색이었다. 비쩍 말라서 그런지 잘생긴 눈매도 어쩐지 교활해 보였다.
정평이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그럼요, 그럼요.”
정교랑이 정평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무슨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정교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슬프면서도 절망적인 듯한 표정이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평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도 망설이는 법 없이 점괘 풀이를 줄줄 읊어대는 그였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았다.
“일백 문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예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 질문이었구나.
정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쭐한 얼굴로 웃었다.
“그거요? 그야 먹고사는 생계도 해결되고, 경서 해석 연구도 할 수 있잖아요.”
눈썹을 꿈틀이며 말하던 정평이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를 보며 말했다.
“내가 연구하려는 경서는…….”
거기까지 말한 정평이 돌연 말을 멈췄다. 눈앞에 있는 낭자가 결국 눈물을 떨궜기 때문이었다. 한 방울 툭 떨어지던 것이 두 줄로 흐르더니, 급기야는 펑펑 쏟는 게 아닌가.
“노자죠.”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정평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던 정평은 곧 무언가 떠오른 듯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내가 일백 문을 모으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남들이 말하는 거, 매일 들었거든요.”
정교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어릴 때 남들이 말하는 걸 들어? 뭐라고 했기에? 내가 일백 문을 모으는 게 경서 해석을 위해서라고?
멍하니 있던 정평이 다시 물어보려는데 정교랑이 홱 돌아서더니 곧장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요!”
정평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정교랑이 발치에 나뒹굴고 있던 등받이 낮은 의자에 걸려 비틀거렸다. 두 아낙이 얼른 다가가 부축한 덕에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신세를 간신히 면했다.
“아씨, 다리 부딪친 곳은 괜찮으세요?”
“어서 앉으세요.”
하지만 정교랑은 손을 뻗어 아낙들을 밀어냈다.
“앉아 있어요. 난 혼자서 좀 걸을게요.”
정교랑은 아낙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더러 앉으라고? 우리가 여길 왜 앉아?
두 아낙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교랑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급히 걸어가다가 행인들과 부딪치면서 길가에 작은 소란이 일기도 했다.
“아씨!”
다들 정신을 차리고 급히 뒤쫓아 갔다.
“어서 도망쳐!”
늙은 서생이 정평을 향해 손짓했다. 정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다. 저쪽에 있던 시종 몇 명이 잽싸게 정평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아아, 얼굴은 때리지 마요, 얼굴은!”
정평은 비명 소리와 함께 꽁꽁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몇 명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쌤통이네. 그러게 사기를 작작 쳤어야지.”
“저거 봐, 사기당한 낭자가 엉엉 울고 있잖아.”
늙은 서생도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늙은 서생은 얼른 서화를 챙기고 노점을 걷어 달아났다. 이러다 일이 커지면 괜한 불똥이 튈 터였다.
“아씨, 아씨.”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보세요.”
두 아낙이 급히 달려가 정교랑을 좌우에서 따라가며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그냥 혼자 걷고 싶어요. 좀 걸으려는 거예요.”
정교랑이 멍한 채로 말했다. 얼굴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각이 있는 상태라고 보긴 힘들었다. 인파를 헤치며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앞장서 걸으며 길을 열었다.
화려하고 귀티 나는 옷차림의 어린 낭자가 앞뒤와 좌우로 시종들을 거느리고 눈물을 쏟으며 걸어가고 있으니, 자연스레 행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도 있고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험상궂은 시종들이 없었다면 진작 낭자를 에워싸고 구경을 했을 터였다.
“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시지?”
두 아낙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정교랑의 눈물에 전염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종들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씨가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에, 시종들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손짓 하나로 사람도 죽이는 아씨지만, 결국은 어린 낭자였구나. 힘없는 여인처럼 저리 우시다니.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울분이 쌓였으니 좀 풀어내야 해요.”
정평이 소리쳤다. 정평은 이미 시종들에게 옷을 밧줄 삼아 팔을 꽁꽁 묶인 채 끌려가던 중이었다.
“걸어간다고 하면 가게 두세요. 울려고 하면 울게 두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야 해요.”
시종들이 고개를 돌려 정평을 노려봤다.
정평은 속세에 초연한 도사의 모습으로 허리를 곧추세웠지만,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전에 시종이 머리를 후려쳤다. 그 바람에 정평의 머리는 산발이 되다시피 했다.
“이 망할 자식! 네놈이 아씨께서 목숨이 없네, 곧 죽네 하며 입을 나불거렸잖아!”
“아씨께서 혼란스러워하다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정평을 때려도 보고 욕도 해 봤지만, 정교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웃고 떠들며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정교랑이 옆을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런데도 정교랑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 어서 가라고!”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눈앞에 나타난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흔이 낭자한 탓에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이었다.
장창 하나가 용처럼 춤을 추었다.
“동산(東山) 오라버니!”
정교랑이 소리쳤다.
“가…….”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밧줄이 날아와 젊은 남자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가!”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남자는 눈앞에서 산 채로 사지가 찢어졌고,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을 흥건히 적셨다.
정교랑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가, 가라고, 어서 가…….
난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도 있고, 끊어진 사지를 다시 이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 소용 없어. 죽었잖아, 죽었다고.
아버지,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죠? 어떻게 이래요?
“아방(阿昉: 정방의 별칭), 못 간다. 문이 봉쇄됐어! 못 들어가!”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갈 수 있어. 어서 가야 해, 어서.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 거센 불길이 보였다. 온 하늘을 물들일 만큼 붉은 기운과 함께 통곡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가! 어서!
어서 불을 꺼야 해. 정씨 가문의 대저택은 아주 정교하게 지어져서 도처에 함정이 있어. 공격과 수비에 모두 능하지. 불은 아무것도 아니야. 정씨 가문의 대저택이 불 따위를 겁낼 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은 불을 무서워하지 않아!
어머니, 숙모님들, 동생들. 집에 여인들만 남는다 해도, 기관을 열고 불을 끄는 건 충분히 가능해!
아무리 천재지변이 무자비하다지만, 무엇보다 흉악한 건 인재(人災)였다. 붉게 물든 깃발과 칼, 화살, 쇠뇌(쇠로 된 화살장치가 달린 활)는 화염 속에서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늙은이도 어린애도, 윗전도 아랫것도, 개도 고양이도 전부…….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어서 가, 어서.
나는 함정을 잘 다루고 집을 지을 줄 알지만, 소용없어. 아무 소용없다고. 전부 죽었잖아, 전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성 밖 대로변에 쌓인 눈은 치우는 이가 없었다.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에 반은 녹았지만, 반은 밟히고 또 밟힌 끝에 단단한 얼음이 되어 있었다.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정평이 나자빠지자 시종들이 발길질을 해댔다.
“냉큼 일어나.”
정평은 땅바닥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아니, 정말로 못 걷겠단 말입니다.”
정평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시종들은 몇 번 더 발길질을 해 보았지만, 정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래 걸은 건 사실이었다. 처음엔 보조를 맞춰 급히 걷던 아낙들도 이제는 뒤에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지?
시종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태양은 어느덧 서편에 걸려 있었다.
아이고, 세상에…….
“아씨, 아씨.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삼랑이 결국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제발요. 괴로우면 그냥 우세요. 이렇게 걷지 마시고요.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정교랑의 얼굴에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난 괜찮아요, 괜찮아.”
정교랑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난 좀 걷고 싶을 뿐이에요. 좀 걸을게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세랑과 삼랑은 더 이상 못 걷겠는 듯 비틀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진흙과 눈이 덕지덕지 붙은 옷자락을 힘겹게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르고 여린 체구라 더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날이. 제사를 지낼 시간이 됐어. 봐, 아버지께서 제단에 서 계시잖아.
정교랑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제단에 오르셨네. 아버지뿐 아니라 백부님들과 숙부님들도 오시고 형제들도 왔어. 다들 제단 위에 일렬로 서 있네.
사람 키 높이의 거센 불길이 용의 혀처럼 이들을 핥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 어서!
저들의 손과 발, 몸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어. 인신공희의 제물이 된 거야. 저 옆에서 끓고 있는 구리 솥은 성대한 연회를 기다리고 있고.
어서 도망쳐!
정교랑은 허리를 숙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 너무!
빨리 가! 빨리!
나는 천문을 알고 관상을 볼 줄 알아. 난 미래와 과거를 알지. 하지만 아무 소용 없어. 아무 소용 없다고. 다 죽었잖아, 전부 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시종 몇 명이 인상을 쓴 채 중얼거렸다.
“기절시켜요.”
땅바닥에 있던 정평이 힘없이 말했다.
기절을 시키라고?
시종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인이 푹 쓰러졌다.
“아씨!”
모두들 놀라 소리치며 달려갔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정교랑은 차디찬 땅바닥에서 고개를 돌려 하늘과 땅을 쳐다보았다. 금빛으로 물든 석양 너머로 귓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걸음 소리가 느려지나 싶더니 또다시 멀어졌다.
어서 가, 어서.
끝없는 밤, 하늘의 반을 덮은 맹렬한 불길.
그녀는 나갈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나갈 수 없었다.
주변의 숲에는 쇠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화살비가 쏟아질 터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궁전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쇠뇌인가.
정교랑은 손을 뻗어 땅을 만져 보았다. 활은? 화살은?
밤의 어둠을 뚫고 남자가 한 발 한 발 걸어왔다.
와, 어서 오라고. 이리 와서 똑똑히 보여 줘.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하늘을 뒤덮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며 거대한 그물인 양 그녀를 덮쳤다.
정교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활을 쏠 줄 알고, 칼을 다룰 줄 알지만 아무 소용 없어. 소용없다고. 죽었잖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손에 죽었지.
잊어라, 그게 좋아.
기억할 필요 있느냐. 뭐 좋은 일이라고.
아방, 잊어라.
양산(揚汕)!
내가 어떻게 잊겠어! 어떻게!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칠지라도, 매일 밤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을지라도, 절대 못 잊지!
내 일족의, 정씨 가문의 원수!
정교랑은 땅을 움켜쥐며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달려오던 시종들과 아낙들마저 그 소리에 경악했다.
“소리를 질렀으면 됐어요, 질렀으면 됐어. 소리 지르게 내버려 둬요.”
바닥에 드러누운 정평이 소리쳤다.
정평의 목소리는 정교랑에게까지 들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발걸음 너머로 저쪽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내가 보였다.
사실 그녀는 진작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의 정방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전에 그랬지. 요행을 바라는 건 인정하기 싫어서일 뿐이라고.
그런데, 죽었잖아. 이미 죽었다고. 죽으면 죽은 거 아냐? 아름답게 죽었든 비참하게 죽었든 죽었으면 그뿐이지. 아무것도 없고, 다 지나간 거잖아. 왜 여기로 온 거야.
“이건 나와 무관한 일입니다. 보면 모르겠어요? 저 낭자 본인의 문제라고! 괜히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십시오!”
정평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정교랑은 간신히 몸을 지탱해 일어서려다가 도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결국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기어오자 흐릿한 시야로 남자가 보였다.
알려 주세요. 알려 주실 수 있잖아요. 그렇죠? 조상님…….
조상님!
이 후손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발요!
전 왜 이곳으로 온 거죠? 조상님!
“강주 정씨는 촉주(蜀州) 출신이다. 위로는 검문(劍門), 아래로는 횡강(橫江)에 이르렀으며, 선조는 사람들이 저속하다 여기는 점괘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점을 칠 때 사악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물어오면, 가새풀과 거북점에 기대 그 이해관계를 말해 주었다. 하루에 겨우 몇 명의 점을 봐 주고, 백 냥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면 곧 문을 닫고 발을 친 다음 <노자>를 익혔다.”
학문이 깊은 사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사내가 두 손으로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방, 기억하고 있지? 우리 정씨 가문의 조상님 중에 아주 대단하신 분이 계셨어.”
“아버지, 그 조상님의 존함이 뭐예요?”
“이름은 평(平), 자는 준(遵)이셨다.”
정평, 조상님.
정교랑은 사내를 보며 기어갔지만, 아무리 기어도 그 앞에 닿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목덜미를 육중하게 가격했다. 정교랑은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신을 잃었다.
* * *
작가의 말:
정씨 조상 정평에 관한 설정은 서한 시대의 도교 학자이자 사상가인 엄군평(嚴君平)의 행적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