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60)

-동행-

경성의 11월은 건조하고 쌀쌀했다. 북풍이 불어오자, 경성에는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왔어? 왔어?”

난로 옆에 앉아 있던 진(秦) 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여종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여종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여종에게 손을 뻗으며 서신을 달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에서 걸어 나오던 진 시강이 여종의 손에 쥐어진 서신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 시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자꾸 그런 쓸데없는 일로 관청의 속달을 사용하지 마시오.”

진 부인이 여종에게서 서신을 받아오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종은 대답을 한 진 부인이나 말을 건넨 진 시강 모두 이 일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 무슨 소식이라도 알아야지 않겠니.”

진 부인이 여종에게 말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진 시강은 두모나 두봉도 걸치지 않은 채 일상복 차림으로 들어오던 진십삼과 마주쳤다. 진십삼은 밖에서 우수수 내리는 우박을 그대로 맞은 듯했다. 진십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에서 우박이 떨어졌다.

“아버지, 관청에 가시는 겁니까.”

진십삼이 예를 올리고 물었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급하더냐.”

진십삼은 자신이 겉옷도 없이 돌아다닌 것을 나무라는 진 시강의 말뜻을 알아채고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예를 표했다. 진 시강은 사환이 씌워 주는 우산을 쓰면서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진십삼은 문가에 서서 진 시강을 눈으로 배웅한 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진 부인은 서신 하나를 손에 들고 이제 막 열어 보려 하고 있었다. 진십삼이 들어오는 것을 본 진 부인은 재빨리 서신을 한쪽에 숨기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여종을 향해 물었다.

“우리가 오늘 누구네 간다고 했었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어서 준비하고 나가자. 자꾸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여종은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십삼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 앉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삼, 이 어미랑 같이 나갈까? 종일 집에 박혀서 공부만 하니, 재미없고 답답하잖아.”

진 부인이 진십삼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머니, 빨리 재미있는 얘기 좀 들려주세요.”

진십삼이 말했다.

“나는 웃긴 이야기 같은 거 잘 못 하는데, 어떻게? 그리고 재미있는 일도 없어.”

진십삼은 진 부인이 말하는 틈을 타, 재빨리 손을 뻗어 진 부인이 숨겨둔 서신을 낚아챘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서신을 도로 뺏어오려 했지만, 진십삼의 손이 진 부인보다 훨씬 빨랐다.

“볼 수 있겠어? 서신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 줄 알고?”

진 부인이 묻자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의 아들인 제가, 겁낼 게 있겠습니까.”

진십삼이 서신을 펼치면서 여유롭게 대답했다. 더구나 서신에 쓰여 있을 내용은 이미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정씨 가문의 이부인은 동의했지만, 정 낭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직 정 낭자에게 물어볼 기회를 못 찾은 것 같은데······.

으응? 내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닌데?

진십삼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진 부인은 팔걸이 의자에 기댄 채로 여종이 건넨 찻잔을 손에 쥐고 눈웃음을 지으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나아진 이후로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디 남들보다 준수했던 진십삼의 용모는 더욱 수려해졌다. 올해 열일곱이 된 그는 전보다 키도 훌쩍 큰 터였다.

진 부인은 천천히 찻잔을 돌리면서 진십삼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켜보았다.

서신을 접한 진십삼은 놀라서 눈썹이 올라간 듯하면서도,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화가 난 듯 표정이 굳어지기도 했다가, 곧 의연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서신을 다 읽어갈 때쯤에는 웃음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신을 한 장씩 넘기던 진십삼은 작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벌써 십칠 년이나 본 아들인데, 이토록 다채로운 표정을 본 것은 또 처음이네.

항상 웃고 있다고 해서 즐겁다는 뜻은 아니지. 울고 웃고, 기쁨과 슬픔이 있는 게 진정한 즐거움이야.

“어머니.”

진십삼의 목소리에 진 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 부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진십삼이 서신을 흔들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왜? 정 낭자가 무슨 해선 안 될 짓이라도 한 게야?”

진 부인이 서신을 달라고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진십삼이 한숨을 쉬면서 서신을 돌려주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은 아닙니다. 낭자가 한 일은 도리와 이치에 부합한 일이니까요. 이 일을 남이 알게 된다고 해도 정 낭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둔한 자가 많지요. 정 낭자가 한 일은 틀린 일이 아니지만, 남의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가 언제 남에게 미움받는 걸 신경이나 썼나?”

“미움받는 게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십삼이 진 부인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치면서 말했다.

“어머니, 전 압니다.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지요.”

진 부인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쟤는 말을 어쩜 저렇게······.

진 부인은 한 손으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서신을 화로에 던졌다.

화로에 던져진 서신은 불길에 휩싸였고, 곧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어머니, 아직 서신을 읽지도 않으셨잖아요.”

진십삼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내가 보고 싶은 내용은 없잖니. 내 관심사는 오로지 혼사뿐이란다. 다른 일은 나와 관련도 없고, 읽어 봤자 신경만 쓰이겠지.”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십삼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물러났다.

진십삼이 방을 떠나자, 진 부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부인, 십삼공자께서 정말로 정 낭자를 마음에 두셨나 봐요.”

여종이 말했다.

“우물에 있던 십삼을 꺼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준 사람인데, 누군들 그런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겠느냐. 게다가 정 낭자는 재미있잖아. 정 낭자 같은 사람은 나도 본 적 없어. 요즘 여인들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지. 정 낭자를 곁에 두고 싶은 건 십삼뿐만이 아니야. 나도 그래.”

재미있다고?

여종으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무뚝뚝하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일부러 사람에게 거리를 두어 천 리 밖까지 밀어내는 여인이 뭐가 재밌다는 거지?

“한데 그 낭자에게는 원칙이 있잖습니까.”

여종이 말했다.

“원칙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해. 그러니까 시도는 해 봐야지.”

진 부인이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쭉 들이켰다.

진십삼이 옥대교에 도착했을 무렵, 우박은 어느새 눈꽃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꽃이 나뭇가지와 옥대교, 그리고 땅을 천천히 덮었다.

진십삼이 말고삐를 당기는 것을 보자, 사환도 서둘러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두어 번 말굽을 굴렀다. 그러나 진십삼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멈춰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 반근 낭자는 지금쯤 점포에 있을 텐데요.”

사환이 진십삼에게 귀띔했다. 사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마차 소리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절 찾으셨어요?”

진십삼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벌써 돌아온 것이냐? 네 아씨가 없으니, 농땡이를 피우기 시작하는구나.”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삼에게 뭐라 대꾸하려던 그때, 마차에서 또 한 사람이 허둥지둥 내렸다.

허둥대서인지 다리가 짧아서인지, 마차에서 내리던 사람은 발을 땅에 제대로 딛지도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십삼이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새로 온 몸종인가?

“넌 왜 내렸어? 마차로 데려다준다니까?”

시녀가 여자아이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말했다.

“아, 아니에요, 반근 언니. 언니 집에 도착했으니까, 저도 혼자 갈 수 있어요.”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눈이 오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여자아이는 한사코 사양하며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시녀는 진십삼이 궁금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향해 웃으며 두 손바닥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사공자를 뵈러 성 밖에 있는 서원에 갔었는데, 때마침 이 아이도 사공자를 뵈러 왔다지 뭐예요. 강주 출신이기도 하고, 눈도 오고 해서 같이 데려왔어요.”

시녀의 말에 진십삼은 아, 하고 짧게 대꾸했다.

정사낭.

진십삼이 여자아이를 한 번 더 쳐다보았을 때, 여자아이도 고개를 들어 몰래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토끼처럼 재빠르게 달아났다. 진십삼이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진십삼이 저잣거리를 따라서 빠르게 사라진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누구네 몸종인데?”

여자아이가 떠난 방향을 내다보던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지 않았어요. 사공자께 들으니 강주에서 경성으로 팔려온 아이래요. 누구네 집 몸종인지까지는 저도 모르죠.”

시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녀가 진십삼을 쳐다보며 물었다.

“공자님, 저희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별일은 아니고, 너희 아씨가 워낙에 돈을 시원스럽게 쓰잖느냐. 돈 부치는 걸 조금 서둘러도 좋을 것 같던데?”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연말에 정산하기로 약조했으니, 지금은 보낼 수 없어요. 그래도 너무 염려 마세요. 저희 아씨께서는 뭐가 부족하다고 해도 문제없이 잘 지내실 거예요. 게다가 그게 돈이라면 더더욱이요.”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 머리를 틀었다.

진십삼과 사환이 말을 타고 떠나가자, 시녀도 옥대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퉁이에 몰래 숨어 있던 춘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춘령의 얼굴에서 좀 전의 놀라고 겁먹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춘령은 손으로 코끝을 비비고 방향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강주부 외곽 서북 방향에서는 열댓 명의 호위가 마차 두 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있었다.

거센 북풍이 마차의 휘장을 나부끼게 하자, 아낙 하나가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기, 날씨가 너무 안 좋은데, 어디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어때요?”

말을 타고 있던 호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두 아낙은 앞서가고 있는 마차를 내다보았다.

저 아씨한테 퍽이나 계획이 있겠다.

어느 날, 정교랑은 갑자기 마당에 있던 어린아이에게 강주부 근처에 재미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어린아이는 별생각 없이 녹각산(鹿角山)이라 대답했는데, 정교랑이 바로 다음 날 채비를 해서 지금 이렇게 녹각산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반근과 조 집사는 재판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급하게 정계에게 남정 여인 두 명을 구해 달라고 했다. 남정 여인들은 대략적인 이야기만 듣고 곧장 마차에 올라타서 정교랑과 함께 녹각산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매서운 바람에 눈이 섞여 눈보라가 되었다. 휘장을 올리고 앞을 내다보던 아낙들은 서둘러 휘장을 내리고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마차 안에는 석탄 화로가 피워져 있고, 자리에는 두껍고 부드러운 방석이 깔려 있었다. 마차에 타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방석을 만지작거렸는데도, 두 아낙네는 저도 모르게 또 방석에 손이 갔다.

“이렇게 좋은 원단을 방석 만드는 데에 쓰다니, 아까워 죽겠네. 이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얼마나 따뜻하고 예쁠까.”

아낙 하나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으이구, 뭘 안다고. 부자들은 원래 다 그래. 정 대부인은 요강도 금은으로 만든다잖아.”

다른 아낙이 조그마한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아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맛을 음미하듯 차를 조금씩 입에 머금으며 마셨다.

“그만 좀 마셔. 그렇게 계속 마시니까 자꾸 측간을 찾지. 창피하지도 않아?”

아낙이 다른 아낙의 어깨를 때리면서 웃었다. 두 아낙은 마주 보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저 아씨 밑에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사람은 마차 안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감탄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정교랑을 따라 집 밖을 나선 지금이 제일 호강하는 때라고 두 아낙은 생각했다.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섰다.

두 아낙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그마한 성에 들어온 듯했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밖은 눈보라가 일고 있어서 간혹 가다 보이는 행인 몇 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거리는 몹시 조용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어느 객잔 앞이었다. 호객하는 점원들이 살갑게 웃으면서 정교랑 일행을 마중했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시려는 건가? 아씨는 굳이 가까이서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모양새는 갖추는 게 좋겠지?

두 아낙은 마차에서 빠르게 내린 뒤, 정교랑의 마차 앞에 서서 말했다.

“아씨, 내리시지요.”

정교랑이 마차 안에서 한 손으로 휘장을 들어 올렸다. 두 아낙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북정 여종들이 윗전에게 하던 모습을 따라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낙들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혼자 알아서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낙들은 가장자리에 금테를 두른 커다란 두봉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차와 말은 뒷마당에 세워졌고, 말들에게는 질 좋은 건초가 먹이로 제공됐다. 돈주머니를 건네받은 점원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정교랑 일행을 맞이했다.

“저 사람들은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해서 먹으라고 해요. 나는 흰죽에 곁들일 냉채 두 접시면 되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점원이 정중하게 정교랑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치맛자락만 쳐다보았다.

치마는 밝지 않은 담청색이었고, 화려하게 수놓아진 장식도 없었다. 하지만 점원은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바닥에 끌리는 치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 아씨.”

점원의 대답과 함께 시야에 보이던 치맛자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새하얀 버선이 눈에 들어왔고, 새하얀 버선마저 곧 점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점원의 시야는 건장한 아낙의 몸집에 의해 가려졌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아낙이 외쳤다. 퍼뜩 정신이 든 점원은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허둥대면서 뛰어가려다가 하마터면 옆에 있던 기둥에 부딪힐 뻔했다.

아낙은 큰 소리로 웃다가,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 무식해 보일까 봐 서둘러 웃음을 멈추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방에 앉은 정교랑이 책 한 권을 펼쳤다. 다른 아낙이 웃음을 그친 아낙을 향해 눈짓했다. 두 아낙은 벌써 한참을 방 안에 말없이 서 있었지만, 무슨 시중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씨, 저희가 방을 좀 닦아 드릴게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아낙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야! 부잣집 사람들은 워낙 따지는 게 많으니까, 먹고 마시고 덮고 자는 것도 다 자기들 것을 쓴다잖아. 남의 손 탄 건 지저분하다고.

두 아낙이 기뻐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리려고 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으면서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같이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식사하고 쉬어요.”

어떻게 그래!

“아이고, 그럼 우리가 뭐가 됩니까. 아씨의 시중을 들기로 하고 따라온 건데.”

아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수 없어요. 동족의 사람을 어떻게 노비 취급할 수 있겠어요.”

정교랑이 진지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을 데려온 건, 내가 여인의 몸이라 혼자 출타하기 불편해서예요. 그러니 두 사람은 내 시중을 들러 온 게 아니라, 나와 동행하는 거예요.”

정교랑의 반응에 두 아낙은 조금 당황했다.

“아씨, 말씀이 과하십니다. 저희는 노비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고, 손 닿는 대로 일을 좀 하려는 것뿐이에요.”

아낙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한쪽에 놓인 세숫대야를 가지러 갔다.

“절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정교랑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여종이 우뚝 멈춰 섰다.

난처하게 만들다니, 누가 저 여인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집을 짓겠다면 짓고, 정 대노야를 고소하겠다면 고소하는 사람인데.

“농담이 아니에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 말 한마디에 두 아낙은 정교랑이 마당에서 화살을 들고 있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움찔했다.

아낙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아낙 하나가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저희를 불러 주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낙은 그제야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도 평범한 부인들처럼 놀라고 데려오신 건가?”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써도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두 아낙은 방석 위에 앉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점원이 웃으면서 밥상을 들여왔다.

“두 분,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각양각색의 정갈한 그릇이 밥상 가득히 놓여 있었다. 그릇만 보아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던 두 아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드십시오.”

점원이 친절하게 말하며 방에서 물러났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마당에 흩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아궁이로 따뜻하게 데워진 바닥 위에 앉아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던 두 아낙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서로의 어깨를 때리면서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나. 내가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우리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반근 낭자가 그랬잖아. 무조건 아씨의 말을 들으라고. 아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랬어. 절대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아씨가 우리더러 동행해 달라고 하셨으니까, 배객 노릇만 하면 되겠지?”

두 아낙은 입이 귀에 걸리게 웃으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배객!”

두 아낙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같은 시각,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왕 부인은 눈을 잔뜩 맞은 여종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노부인께서 위중하시더냐?”

왕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정씨 가문의 여종은 왕 부인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아니요, 아니요. 노부인은 괜찮으세요. 그런데 저희 노야께서······.”

“노야가 왜?”

왕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노부인보다 노야가 아픈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별일은, 별일은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의원을 불렀는데, 별일 아니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왕 부인의 시선을 회피하면서 대답했다. 여종의 대답을 듣자마자, 왕 부인은 밖으로 나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 부인께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대부인께서 당부하시기를, 부인께서 오실 필요는 없고, 혼례 일정만 조금 더 미루자고 하셨어요. 때가 되면 대부인께서 직접 오신다고······.”

미루면 미룰수록 나야 좋지.

왕 부인이 속으로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별일 아닌 게지?”

왕 부인이 묻자 여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노부인께서 편찮으신 게 아니라, 대노야의 몸이 안 좋다고? 사람이라도 불러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악귀라도 붙은 건 아니겠지?”

악귀가 맞긴 한데, 저희 집 악귀라서요.

여종은 속으로만 대꾸하고, 겉으로는 왕 부인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치며 얼버무렸다.

왕 부인은 안부를 두어 마디 더 물어보고는 정씨 가문의 여종을 돌려보냈다. 왕 부인은 자신의 앞에 가득 놓인 음식들을 쳐다봤지만, 이미 입맛이 다 떨어져서 젓가락을 쥐고 싶지 않았다.

왕 부인은 고개를 들어 마당에 내리는 눈을 쳐다보았다.

“저쪽에서 허구한 날 돌아가면서 아플 줄 알았으면, 우리 십칠을 밖에 내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왕 부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이 이렇게나 오는데, 우리 십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으려나? 춥진 않겠지? 따뜻한 옷은 챙겼겠지? 집이 그리우려나? 내가 보고 싶겠지? 먹는 건 잘 먹고 있고?”

왕 부인은 어르고 달래서 집 밖으로 내보낸 아들이 몹시 걱정되었다. 왕 부인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내린 눈 덕에 아침 햇살은 더욱 눈부셨다.

“이야, 저게 바로 녹각산인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행인이 많지 않았다. 일찍 문을 연 점포들 앞에서는 사람들이 빗자루로 사락사락 소리를 내면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정교랑 일행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살집이 있는 아낙의 말을 들은 한 점포의 점원이 대꾸했다.

“맞아요. 저기가 바로 녹각산입니다. 눈 내린 경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죠.”

점원은 여운을 느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낙이 몹시 기뻐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씨, 우리도 한 번 가 봐요. 녹각산의 설경이 일품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는데, 직접 가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어서······.”

점원이 아낙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명의 시종들 사이로 한 여인이 두봉을 두른 채 서 있었다. 커다란 두모에 얼굴은 가려졌지만, 두모 아래로 백옥같이 고운 턱이 조그맣게 보였다.

부잣집 아씨가 나들이 나왔나 보네.

“보기에는 가까워도, 여기서 이십 리는 더 가야 해요.”

점원이 말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한 손으로 두봉을 살짝 들어 올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을 내다보았다.

“좋아요. 가요, 우리.”

정교랑이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은색 비단 장식을 두른 녹각산은 인간계의 선경처럼 아름다웠다. 녹각산은 워낙에 설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곳곳에 식당과 주점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 있는 한 고급스러운 주점의 이 층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씨, 여긴 사람이 꽉 찼나 봅니다.”

시종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호객하러 나온 점원은 시종의 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씨, 사람 없습니다, 없어요. 이 층에는 한 무리밖에 없으니 자리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병풍으로 공간을 나눌 수 있어서 서로 방해될 것도 없고요. 설경을 감상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넓은 대청에서 보셔도 좋고, 따뜻한 방 안에서 감상하셔도 좋지요.”

“그럼 여기로 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점원은 크게 기뻐하면서 목청을 높여 인사를 올렸다. 시종 중 다섯은 아래층에 남아서 문을 지키기로 했고, 나머지 시종 다섯과 두 아낙은 정교랑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이 층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여인들의 교태 섞인 콧소리에서는 몹시 음란한 분위기가 풍겼다.

누가 여인들을 끼고 놀러 나왔나 보군.

앞서 걸어가던 시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올라가도 괜찮은 건가? 안 괜찮으면, 내쫓아야지 뭐.

시종이 걸음을 재촉하면서 층계를 올라갔다.

시종이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에, 이 층에 있던 손님들이 놀랐는지 웃고 떠드는 것을 잠시 멈추고 층계 쪽을 쳐다보았다. 이와 동시에 층계를 올라온 두 시종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시종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정교랑을 막아서고 싶었다.

커다란 대청 안, 설경을 마주한 곳에는 두꺼운 깔개가 깔려 있었다. 깔개 위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남자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여자들은 하얀 가슴이 훤히 보이는 옷을 두르고 있었고, 비녀며 장신구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색기를 풍기는 관기들은 양쪽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했다.

지금 이게 식당이야, 기루야?

갑자기 이 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보자, 앉아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급히 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남자의 품에 숨으려고 했다. 여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통에, 남자는 하마터면 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뻔했다.

“뭐야! 썩 꺼지거라, 썩 꺼져! 누가 너희더러 올라오랬어? 이 몸이 여기를 통째로 다 빌린다고 했잖아.”

여자들 사이에서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시종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시종들은 여인들 사이에 있는 남자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느라, 뒤에 오고 있던 정교랑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공자님, 여길 통째로 빌릴 돈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웃으면서 뒤에 있던 정교랑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손님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층계를 올라온 두 아낙이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려다가, 대청 중앙의 눈꼴 시린 광경을 보고는 악 소리를 내질렀다.

“정말 남사스러워 죽겠네!”

깔개 위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목청 큰 남정 아낙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흘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정교랑이 층계를 다 올라올 때쯤, 두 아낙이 서둘러 정교랑의 앞을 막아섰다.

“보시면 안 됩니다, 보면 안 돼요. 아씨께서 보시면 눈병 나십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여인들에게 파묻혀 있던 남자는 자신의 여인들이 창피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꺼져, 꺼지라고! 당장 꺼져!”

남자가 삿대질하면서 호통쳤다. 꽃밭에서 펄쩍 튀어 오른 사내를, 정확히 말하면 소년 공자를 본 시종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공자도 여기 있었네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여인의 입술 자국을 얼굴에 묻힌 채 화를 내던 소년 공자는 정교랑의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아는 사람인가?

소년 공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층계 쪽을 쳐다보았다. 두 시종이 자리를 비키자, 두봉을 두른 채로 천천히 두모를 들어 올리는 여인이 보였다.

여인이 두모를 벗자,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봤음에도, 소년 공자는 야차라도 본 양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엄마야! 여길 어떻게!”

소년 공자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외쳤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자신의 발에 걸려서 뒤로 자빠졌다. 소년 공자가 뒤로 넘어지면서 뒤에 있던 탁자를 엎어버린 통에, 탁자 위에 있던 술과 다과 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쏟아졌다.

이 층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안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는 천장을 뚫을 듯한 기세였다.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두모를 벗은 젊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어린······ 어머니가······.”

점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대청에 젊은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점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한 채 여인들 사이로 숨은 소년 공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 가족이에요?”

점원이 요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시종에게 물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되겠지.

머뭇거리던 시종은 으흥 하는 콧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원의 눈에는 묵인으로 보이는 대답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했다.

‘요람에 누운 할아버지와 지팡이 짚고 다니는 손자’라는 말이 있듯 항렬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소년 공자는 딱 봐도 있는 집 자식 같아 보였다.

돈 많은 노야가 어린 후처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지.

“그러니까 계모다?”

뒤따라 내려오며 마지막 층계를 딛던 시종은 점원의 물음에 발을 헛디뎌 엎어질 뻔했다.

“어디서 개소릴 지껄여!”

시종은 점원의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로 손을 들었다가 모자를 빗겨 친 후 소리를 빽 질렀다.

“또다시 그런 개소릴 지껄였다간 네놈 입에 개똥을 넣어 주겠다!”

점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감싸 쥔 채 입을 다물었다.

정교랑은 왕십칠 쪽으로 가지 않고 한쪽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얼른 뒤따라 자리에 앉던 아낙들은 여인들 품속으로 파고든 왕십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낙들 역시 왕십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모는 준수한데 몸이 좀 허약해 보이네.

근데 뭘 저렇게 놀라? 아씨가 정 대노야를 고소한 일을 아나?

놀란 왕십칠의 모습을 본 정교랑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바깥의 설경을 감상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왕십칠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공자님, 저 낭자는 누구예요?”

옆에 있던 예쁘장한 시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이들은 낭자가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때 이미 깜짝 놀란 터였다.

저리 아름다운 낭자가 왔다면 공자가 기뻐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이토록 놀라 혼비백산할 줄이야.

분명 놀라 혼비백산한 것이었다. 좋아서 넋이 나간 게 아니라.

“입 다물어라, 입 다물어.”

왕십칠이 소리쳤다. 밖에 나와 여러 일이 지나도록 공자가 이들을 이토록 무섭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시녀들은 곧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왕십칠은 시녀들을 아끼고 달래 주기는커녕 저쪽에 있는 낭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왕십칠이 느끼는 긴장감과 공포심은 이쪽의 분위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점원들이 줄줄이 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요리들을 차려 놓았다.

“아씨께선 술을 안 드시지만, 날이 추워 술을 주문했습니다.”

시종이 공손히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마시는 게 좋겠네.”

정교랑이 권하는 손짓을 하자, 점원들은 얼른 술 주전자 두 개를 두 아낙 앞으로 내려놓았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저희도 술 안 마셔요.”

두 아낙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건 당연했다. 감히 술을 마시다니. 기껏해야 새해 명절에 술지게미를 물에 타 실컷 마셔 본 게 전부였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들어요. 설경을 감상할 땐 술을 곁들여야 해. 건강 때문이 아니면, 나도 마셨을 거예요.”

두 아낙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들은 본디 규율이나 법도 같은 건 잘 몰랐고, 남을 보며 따라 하는 정도였다. 정교랑은 이들에게 딱히 규율이나 법도를 바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깔보거나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건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두 아낙은 그 경멸과 무시의 눈빛을 정씨 가문 집사 부인들의 눈에서 자주 봤다. 정씨 가문의 대부인과 이부인이야 만나 볼 기회조차 없었고.

그런데 이 아씨는 그런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씨의 시선은 그저 평온하고 담담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우러러보거나 내려다보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정말 좋은 술이네요.”

술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아 본 아낙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반나절이나 걸은 데다 추운 겨울에 출출하기까지 하던 차라 두 아낙은 곧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교랑은 아낙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두 아낙 역시 딱히 어려워하지 않아 분위기는 편하고 스스럼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왕십칠은 고통스러운 눈치였다.

“왜 이래?”

시녀 몇 명이 툭툭 치자 왕십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시녀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왕십칠을 보며 손을 뻗어 다리를 주물렀다.

“다리에 쥐가 나겠어요.”

“공자님, 여기서 드시는 게 마음에 안 드시면 우리 이만 가요.”

다른 시녀도 속삭였다.

가자고?

왕십칠은 문득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도망쳐 왔는데, 저 여인은 여기까지 쫓아왔어!

“정교랑!”

왕십칠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멈칫하며 왕십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뜻밖에도 왕십칠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어엇······.”

왕십칠이 허리를 숙이며 다리를 붙잡았다. 두 아낙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놀란 표정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공자님, 다리에 쥐가 나셨나 봐요!”

시녀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부랴부랴 왕십칠의 다리를 주물렀다. 시녀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왕십칠의 비명이 섞이면서 이 층에서는 또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정교랑은 금잔을 든 채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물을 마시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정교랑, 뭐, 뭘 하려고?”

왕십칠이 시녀들을 밀치고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쳐다봤다.

“설산을 보잖아요.”

정교랑은 손에 든 금잔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바보 시늉에 도가 튼 여인이야. 무섭고 독한 살인자일수록 위장에 능한 법이지.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실컷 보든가. 난 간다.”

왕십칠이 이를 갈며 말하자 정교랑은 금잔을 내려놓았다.

“뭘 하려고?”

놀란 왕십칠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정교랑이 왕십칠을 향해 예를 표했다.

“안녕히 가세요, 공자님.”

왕십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분명 네 입으로 말한 거다. 체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고 내가 알아줄 거란 기대는 버려.

왕십칠은 곧장 뒤돌아 나갔다.

영문을 몰라 넋이 나가 있던 시녀들은 쿵쿵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자를 불러대며 허둥지둥 뒤따라갔다. 한바탕 떠들썩하던 대청이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

저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녀는 칠현금을 안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뭐야, 돈도 안 주고 내뺐잖아!”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쫓아 내려가려고 했지만, 정교랑이 불러 세웠다.

“다른 곳에 연주하러 갈 거니?”

정교랑이 물었다. 두 기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눈앞에 있는 여인을 재빠르게 훑었다.

화려한 장신구는 없었지만 최고급 옷감을 쓴 데다 바느질 솜씨도 정교해 보였다. 게다가 방금 전 부잣집 공자가 이 낭자한테 놀라 줄행랑을 놓은 것만 봐도, 이 낭자가 더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아니요.”

두 기녀가 웃음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그럼 연주로 흥을 돋워 봐.”

정교랑이 말했다.

“방금 전 그 공자님의 돈은······.”

기녀 하나가 떠보듯 물었다.

“내가 내지.”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두 기녀는 순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다가와 한쪽 옆에 꿇어앉았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세요, 아씨?”

“밝고 경쾌한 거면 돼.”

두 기녀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현을 조율하며 음을 맞췄다. 곧이어 딩딩당당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낙들은 기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설경은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술이며 안주에 흥을 돋우는 곡조까지 있으니 이게 웬 호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쪽의 대청 분위기가 한창 흥겨워졌을 즈음, 저쪽의 왕십칠은 마차를 내달리고 있었다.

왕십칠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시녀 둘은 마차의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도 찻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옷소매도 얼룩덜룩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수심에 잠겨 있는 공자의 모습을 보자 다가가 위로의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공자님, 성에 있는 객잔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다른 곳으로 모실까요?”

마차 밖에서 사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으로 돌아가서 뭐해!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냉큼 도망쳐야지!”

왕십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차 밖에서 바로 네 하는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심하게 흔들렸다.

왕십칠은 마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엎어진 탁자를 한쪽으로 밀쳐 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이라······.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왔는데, 결국 쫓아오지 않았던가!

정말 무시무시한 여인이네. 왜 이렇게 끈질긴 거야?

왕십칠은 손을 뻗어 얼굴을 쓸어 보았다.

얼굴······.

너무 잘생긴 게 화근이었어! 잘생긴 외모가 이리 큰 죄업일 줄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왕십칠은 돌연 눈빛을 반짝였다.

“멈춰라!”

왕십칠의 명에 마차가 급히 멈춰 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세우는 바람에 말은 히이잉 울부짖었고, 마차 안에서도 비명이 흘러나왔다. 왕십칠은 하마터면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갈 뻔하게 만든 마부를 욕하는 대신, 휘장을 들고 소리쳤다.

“돌아가자, 돌아가.”

마부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말 머리를 돌린 다음, 머뭇거리며 물었다.

“공자님, 어디로 돌아갈까요?”

“남승루(覽勝樓)로 돌아가라고!”

왕십칠의 고함에 마부는 말을 재촉했다.

다시 돌아온 소년 공자의 모습에 남승루 점원들은 흠칫 놀랐다. 이미 자리를 말끔히 정돈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나갔다 와서 계속 먹으려던 거였나?

왕십칠은 마차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칼 있냐?”

왕십칠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던 사환에게 물었다. 사환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했다.

“공자님, 뭘 하시려고요?”

사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요!

“시끄럽고, 빨리 내놔!”

왕십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사환은 하는 수 없이 울상을 지으며 옆에 있던 호위의 칼을 가져다 건넸다.

“이거밖에 없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비수를 본 왕십칠이 눈을 부라렸다.

“공자님, 이거 외엔 곤봉뿐인데요.”

사환의 말에 왕십칠은 한숨을 내쉬고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거로 하지.”

왕십칠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 층을 쳐다보았다. 이 층에서는 칠현금 가락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부른 기녀한테 노래를 시켜? 진짜 뻔뻔한 여인일세!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아무도 따라오지 마!”

왕십칠은 시종들에게 소리친 후, 작은 비수를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왕씨 가문 시종과 시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공자님, 공자님······.”

시녀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쳐 부르면서도, 감히 쫓아가지 못했다.

“공자님이 뭘 하려고 저러시지?”

“공자님은 정 낭자를 싫어하시잖아. 설마 정 낭자를 때리시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왕십칠의 사환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노래를 들으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다들 먹고 마시며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종들은 주위 여기저기로 흩어져 편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호위에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왕십칠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저쪽에 있는 여인은 시종일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여인은 팔걸이에 기대 한 손으로 금잔을 쥐고 한 손은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칠현금 가락에 맞춰 박자를 쳤다.

흥, 아주 미인도가 따로 없네.

왕십칠이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저쪽에 있던 미인이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미인의 얼굴이 백골로 변했다.

왕십칠이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왕십칠을 쳐다봤다. 칠현금을 타던 기녀마저 연주를 멈췄고, 정교랑 역시 고개를 돌렸다.

아, 환각이었구나.

왕십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 이리 와.”

왕십칠이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뜻밖이라고 여기면서도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두 아낙도 얼른 따라 일어나려고 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어요.”

정교랑은 두 기녀에게도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딩딩당당 악기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왕 공자, 무슨 분부라도?”

왕십칠 앞에 선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이 걸어오자 왕십칠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너, 너 따라와. 할 말이 있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왕십칠은 저쪽 병풍 뒤, 시선이 가려지는 별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은 딱히 뭐라 묻지 않고 뒤따라 갔다.

별실로 들어가 창밖을 보고 선 왕십칠의 몸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왕십칠이 별안간 몸을 홱 돌리자 정교랑은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 공자, 무슨 뜻이죠?”

정교랑이 웃으며 물었다.

비수를 손에 꼭 쥐고 있던 왕십칠은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반짝였다.

“정교랑, 나한테 달라붙지 마! 난 절대 너랑 혼인 안 해.”

왕십칠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왕십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날 안 놔주고 기어이 달라붙겠다면, 내, 내가 확······.”

비수를 든 왕십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소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날 죽이려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왕십칠은 코웃음을 쳤다.

“널 죽여? 나도 알아, 너 대단한 거. 난 널 죽일 수 없어. 하지만, 나 자신을 죽일 순 있지! 너, 너, 넌 내 얼굴을 좋아하는 거잖아. 계속 혼인을 강요하면, 내, 내 얼굴을 망쳐 버리겠어!”

왕십칠이 비수를 든 손의 방향을 틀어 자신의 얼굴을 겨눴다.

얼굴을 망쳐?

반짝이는 예리한 칼날이 왕십칠의 얼굴을 향했다. 정교랑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듯 놀라 쳐다보기만 했다.

“나 농담하는 거 아냐!”

왕십칠이 소리쳤다. 왕십칠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보여 주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이를 악물었다. 보드라운 피부를 뚫고 빨간 점이 생겨났다.

정교랑은 그런 왕십칠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고개를 젖혀가며 와하하 웃어대는 통에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밖에서 들리는 딩딩당당 칠현금 소리를 덮어 버렸다.

반근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척이나 놀랐을 테고, 주육낭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을 것이다. 정교랑이 소리 내어 웃은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비수를 든 왕십칠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예쁘고 웃음소리도 듣기 좋아······.

“좋아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정교랑은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동의하죠. 이 혼사를 원치 않는다면, 관두죠.”

이게 다야?

왕십칠이 의아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도 숨어다닐 것 없어요. 돌아가서 가족들한테 말해요. 가족들이 안 믿으면 나한테 오라고 해도 되고요.”

말을 마친 정교랑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아, 어이!”

왕십칠이 소리치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왕십칠을 쳐다봤다.

“공자, 또 뭐죠?”

왕십칠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말 동의하는 거야? 욱해서 날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니지?”

왕십칠의 물음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었다.

“공자 말을 잘 들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왕십칠은 그 말에 멈칫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거슬려?

뭐, 상관없지. 그림 같은 미인은 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낭자는 앞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주 좋아. 말만 잘 들으면 됐지. 앞으로 낭자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편안하게 살게 해 줄게.

눈앞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왕십칠은 오싹 소름이 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잘 들은 건데요.”

정교랑이 왕십칠을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다음 뒤돌아 걸어갔다.

“아, 저기······.”

왕십칠은 또다시 소리쳐 부르려 하며 걸음을 내디뎠지만, 이번에는 여인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별실을 나갔다.

정말로······.

왕십칠은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몰려왔다.

사실, 그래도 꽤 귀여웠는데. 이대로 끝내는 건가? 저 미인을······.

걸음을 옮겨 별실 밖으로 나온 왕십칠의 눈에 옷자락을 털고 자리에 앉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시종들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하얀 눈이 펼쳐진 설경의 햇살 아래로 보이는 짙은 옷자락은 눈이 부셨다. 그날 밤 섬뜩한 빛을 내뿜던 화살처럼.

살인······.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친 왕십칠은 층계를 우다다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아래층에 있던 시종들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울상을 짓고 있던 시녀들은 뛰어 내려온 왕십칠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살뜰한 말을 건넸다.

이래야 좀 여인다운 느낌이 들지.

왕십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예쁜 두 시녀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가자, 이만 돌아가자.”

왕십칠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들은 순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왕십칠에게 달려들어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괴로웠으며 얼마나 애가 탔는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공자님, 그 낭자가 정말 이젠 안 달라붙겠대요?”

왕십칠은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나 왕십칠이야······.”

왕십칠은 말을 하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노랫소리와 칠현금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자, 마차에 타서 얘기하자.”

목을 잔뜩 움츠린 왕십칠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는 시녀들을 끌어안고 마차에 올랐다.

“공자님, 성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요?”

사환이 밖에서 물었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멍청한 놈아!”

마차 안에서 왕십칠이 욕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사환의 대답과 동시에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았다.

“공자님, 어서 말씀해 보셔요.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뭐, 간단해. 알다시피 이 몸이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잖느냐. 그러니 안 놔주려고 하지. 글쎄, 울기까지 하더라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했어. 인정에 호소하고 도리로 설득하니, 결국 알아듣더구나.”

시녀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왕십칠을 우러러보았다.

“정말 가엾네요. 공자님은 왜 그 낭자가 눈에 안 차세요?”

왕십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확실히 그렇구나. 난 그 낭자가 눈에 안 차.

“인연이 아닌 거겠지.”

왕십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잘 설득했어. 이 세상에 좋은 사내는 많으니, 나 때문에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공자님은 정말 너무 좋은 분이세요. 그러니 누가 공자님을 놓치려고 하겠어요.”

시녀들이 조잘조잘 떠들던 그때, 왕십칠에게 기대 있던 시녀 하나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고운 손가락으로 왕십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공자님, 이게 뭐예요? 연지예요?”

손가락이 닿자 통증을 느낀 왕십칠이 아얏, 하는 소리를 내자 시녀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피잖아요, 피!”

순간 마차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쏟아대는 통에 왕십칠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왕십칠은 여리디여린 시녀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괜찮다, 괜찮아. 조금 베인 것뿐이야.”

시녀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공자님, 아니, 어쩌다가 베인 거예요?”

왕십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낭자가 때렸어요?”

시녀의 말에 왕십칠은 순간 안도했다.

“그래, 맞아.”

왕십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울고불고 떼를 쓰며 난리를 피우지 뭐냐. 글쎄, 칼까지 들고 자결을 하겠다며······.”

시녀들은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칼까지 들고 있었어요?”

한 시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묻자 왕십칠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내, 내 거였어. 내가 비수를 가져갔거든. 옷자락을 베어 절교하려고. 근데 그걸 잽싸게 낚아챘어. 그걸 도로 빼앗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베인 거야.”

시녀들은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공자님은 정말 용감하세요.”

“공자님, 너무 위험하셨어요. 다음엔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마차 안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며, 길 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왕십칠 일행은 큰길을 따라 차츰 멀어져 갔다.

아낙은 자신이 푹신한 양모 위에 누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드랍고 따스했다.

너무 편안하네. 지금 이거 꿈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아낙은 눈을 번쩍 떴다. 푸른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누군가가 휘장을 들어 올리자, 순간 눈부신 햇살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낙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세랑, 진짜 잘 자네. 밖에 나오니까 아주 부잣집 마님이 다 됐어.”

안으로 들어온 아낙이 웃으며 침상 앞에 앉았다.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세랑은 눈을 떴다. 일어나 앉으려는데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삼랑,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세랑의 물음에 삼랑은 웃음을 지었다.

“어제 술을 좀 퍼마셨어? 안 아픈 게 더 이상하지.”

세랑은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치며 일어나 앉았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진짜 취하도록 마셨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시중들 사람이 만취하도록 퍼마셨으니, 원. 이 시간이 되도록 퍼질러 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세랑이 손으로 바깥쪽을 가리켰다.

“저 봐, 저 봐. 먹고 마시는 것도 모자라 시중까지!”

삼랑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서두르기나 해. 얼른 먹고 시중들러 가게. 좀 아까 보니까 아씨께서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더라고.”

정씨 저택 안.

잰걸음으로 총총 걸어오던 여종은 문을 넘으면서 눈을 밟아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이게 뭐야? 다들 눈이 멀었느냐?”

여종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치자, 옆에 있던 두 몸종이 얼른 빗자루를 들고 달려왔다.

“한 번만 더 게으름을 피웠다간 살가죽을 벗겨 버릴 줄 알아!”

여종은 몸종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몸종은 말대꾸도 못 하고 조용히 비질에 열중하며, 여종이 대청으로 허둥지둥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청에서는 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 대부인은 손수건을 들고 이제 막 약을 들이켠 정 대노야의 입가를 닦아 준 다음, 베개를 정돈하고 정 대노야를 눕혔다.

정 대노야는 초췌한 안색이었고, 눕는 동작조차도 힘에 부치는 듯 긴 한숨을 토했다. 안으로 들어온 여종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냐?”

정 대노야가 눈을 감은 채 묻자 여종은 고개를 숙였다.

“별일은 아니옵고······.”

여종이 우물쭈물하자 정 대노야가 말을 끊고 나섰다.

“말해라! 그날도 분통 터져 죽지 않았는데, 더 이상 놀랄 일이 뭐 있겠느냐! 내가 무섭지 않다는데, 너희가 뭘 겁내는 게야!”

정 대부인이 얼른 손을 뻗어 가슴을 쓸어 주었다.

“무서우실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신경 쓰실까 봐 그러죠. 의원이 이 병은 조용히 요양에 힘써야 한다고 했잖아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지금 신경 쓰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파질 거요. 뭐가 됐든 당장 해결해야지. 말해라.”

“네, 조사할 게 있으니 관부로 좀 나오시랍니다. 그리고 장부도 보겠대요.”

안색이 싹 변한 정 대부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딜 감히!”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점포 두 개도 강제도 문을 닫게 해 놓더니, 이젠 우리 집까지 손을 뻗쳐?”

정 대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하루만 문을 닫아도 점포 손실이 얼마나 되는 줄 저들이 알기나 해?”

“알다마다.”

정 대노야가 간신히 일어나 침상에 앉으며 말했다.

“노야, 우리도 위쪽에 연줄이 없는 게 아닌데, 저들이 어떻게 이런 횡포를 부리죠?”

정 대부인은 돌아앉아 정 대노야를 부축하며 눈물을 보였다.

“못 할 것도 없겠지.”

정 대노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굶주린 개가 고기를 입에 물었는데 조금 놀랐다고 입에 문 걸 내려놓을 것 같소? 더구나 저들은 논리도 분명하고 근거도 타당한데······.”

정 대노야가 손을 뻗어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고소를 취하하지도 않을 테고.”

정 대노야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교랑의경> 1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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