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다-
임구(林九)가 강주성 사계춘(四季春) 포목점의 주인장이 된 것은 올해로 오 년째였다. 사계춘은 강주성에서 제일가는 포목점이었기에, 주인장인 임구의 신분도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임구는 작년에 새로 사들인 저택에서 첩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은 뒤 사환이 끌고 온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임구는 점포 상황을 제 손금을 보듯이 꿰뚫고 있는지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점포에 나갔다. 실상 그가 점포에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장부를 훑어보거나, 원단을 대충 만져 보고, 점포에 상주하는 집사와 차를 한 잔 마시는 정도였다. 사계춘의 주인장이기에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이었다.
오늘은 임구가 일주일에 한 번 점포를 나가는 바로 그날이었다. 집에서 점포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본인의 신분에 자부심이 대단한 임구는 걷는 대신 늘 말을 타고 점포로 갔다.
워낙 짧은 거리인지라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사계춘 포목점이 임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사계춘 건물 밖으로 화려한 색의 휘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언제나 오색찬란한 사계춘 점포의 모습은 한겨울에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점포를 드나드는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고급 원단을 많이 들여왔다고 하지 않았나?”
임구가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리자 말을 끌던 사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왕씨 가문에서 바닷길로 수입한 원단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앞다퉈 원단을 고르고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이게 어딜 봐서 앞다퉈 원단을 고르는 모습이야?
말을 탄 임구는 인상을 찌푸리고 점포 앞에 멈춰 섰다. 임구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점포 문을 열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두운색으로 칠해진 여섯 개의 문 중 네 개만 열려 있었고, 호객하는 점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문은 왜 안 연 거야? 장사를 그르치는 건 둘째 치고, 남들이 망한 줄 알면 어쩌려고 이래!
임구가 화가 난 얼굴로 말에서 내려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임구는 멈칫했다.
예상과는 달리, 대청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한 남자가 낮은 손님용 침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해 보이는 사내 넷이 그 주위로 서 있고, 사계춘의 점원과 집사는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구석에 서 있었다.
소란을 피우러 온 건가? 누가 감히 사계춘에 소란을 피우러 와? 여기가 누구네 점포인지 몰라서 저러는 건가?
“댁이 주인장이오?”
앉아 있던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타향 말씨로군! 내 그럴 줄 알았지.
임구가 입꼬리를 올렸다.
“소인이 이곳의 주인장입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손님?”
“난 손님이 아니라, 자네의 상관일세.”
조 집사가 침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앉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더니 임구를 보며 피식 웃고 말했다.
“자네는 이제 나올 필요 없네. 사계춘은 오늘부로 주인장이 바뀔 테니.”
상관? 사계춘 주인장이 바뀌어?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 집사가 구석에 서 있던 사람들을 쓱 둘러보고는, 그중 한 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이, 자네. 자네가 여기 집사라고 했지?”
조 집사가 가리킨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예. 소인이 여기 집사입니다만.”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는 집사가 아니라 주인장일세.”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다.
어디서 저런 미치광이가 들어와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거야?
“손님, 여기서 나가서 앞으로 쭉 가시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운주루(雲酒樓)가 나옵니다.”
임구가 웃으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그래서?”
조 집사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다가 물었다.
“전기수(傳奇叟: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던 사람)가 아니십니까. 손님이 가셔야 할 곳은 거기라고요.”
임구가 능청맞게 말했다. 임구의 말이 웃겼는지,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소리 내어 껄껄 웃던 조 집사가 문서 몇 개를 탁자 위에 쾅 내려놓았다.
“나는 정 이노야의 사돈인 주씨 가문의 사람일세. 그리고 정 이노야의 장녀의 명을 받들어 혼수 점포들을 거두러 왔지. 아직도 내가 잘못 온 것이라 생각하나?”
주씨 가문의 사람! 정 이노야의 장녀!
사람들이 경악했다.
저 사람은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임구의 등골이 저릿해지면서 땀 한 줄기가 등으로 흘러내렸다. 임구는 사계춘 점포가 어떤 점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작년부터 이 점포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점포를 사이에 두고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시에, 정씨 집안 내부에서도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이 점포가 세상을 뜬 여인의 혼수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혼수는 오롯이 여인 본인의 소유이며, 본인을 제외한다면 오직 그녀의 자식들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임구가 등골이 서늘해진 이유는 바로 ‘정 이노야의 장녀’라는 말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이 점포는 혼수이기에, 그 여인의 자녀라면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구는 말 한마디에 점포를 순순히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특히 정 이노야의 장녀라면 바보가 아니던가.
“대, 대노야의 허락도 없이 네놈들이 감히!”
임구가 소리쳤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한 손으로 침상을 짚고 일어서더니 임구를 향해 매서운 발차기를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걷어차인 임구는 반대편 계산대에 부딪혀서 악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는 무슨!”
조 집사가 허리를 펴고 옷매무새를 매만진 뒤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단 하루 만에,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점포 두 개와 농토 두 개의 주인장을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사람 중 아무나 하나를 골라 새로운 주인장으로 만들었다.
조 집사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농토의 주인장이 울면서 정씨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정 대노야가 화가 날 대로 나서 노발대발하고 있던 때였다.
“그 입 닥쳐라! 울지도 말고!”
이제 막 대청 안으로 울며 뛰어 들어온 농토의 주인장을 향해 정 대노야가 삿대질을 했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려 입을 막 벌렸던 주인장은 서둘러 울음을 삼켰다. 대청 안을 쳐다보니, 퉁퉁 붓고 붉어진 눈을 한 주인장 세 명이 보였다. 이들의 울음 때문에 정 대노야의 심기가 이미 불편했던 것 같았다.
농토의 주인장은 두어 번 훌쩍이고는 정 대노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머지 주인장들과 재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사람이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농토 주인장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정 대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대청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고작 타지인 몇 명한테 얻어맞고 쫓겨나? 네놈들이 그놈들보다 팔이 모자라더냐, 다리가 모자라더냐? 이 지역 토박이는 네놈들 아니냐!”
딴은 맞는 말이지만.
“노야, 그들은 주씨 가문의 사람들 아닙니까. 게다가 시집갈 때 가져갈 혼수라고 하면서, 문서까지 들고 왔습니다.”
사계춘의 주인장이었던 임구가 말했다.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 바보가 감히!
이번 일을 계기로, 정 대노야는 일련의 사건들 모두가 주씨 가문의 계략이라고 확신했다.
일부러 바보를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등장시키고, 경성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들고 와서 우리 집안을 이간질한 다음 혼수를 빼앗으려고 했던 게야!
“그게 뭐! 그 애는 우리 정씨 가문의 딸이다. 정씨 가문의 뜻을 따라 혼사를 치를 것이고, 혼수 또한 정씨 가문에서 관리할 것이야. 어디 감히 손아랫사람이 제멋대로 난리를 피우려 들어? 혼수를 돌려받고 싶다면, 내게 직접 와서 말을 할 것이지. 그리고 아무리 제 모친 것이라 해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경영한 것은 바로 우리이거늘! 대뜸 이렇게 튀어나와서 빼앗으려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흠씬 얻어맞아야 할 건 도리어 저들이라고!”
정 대노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주인장들은 고개를 숙이고 정 대노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대노야께서 하시는 말도 맞네. 도리에 어긋난 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야! 괜히 우리만 바보가 됐잖아.
“여기 남아서 뭣들 하느냐! 얼른 사람을 불러 내쫓아라! 주씨 집안의 하인 주제에, 감히 우리 가문의 딸을 앞세워 난리를 피워? 마냥 당하고만 있던 네놈들도 바보가 아니냐!”
정 대노야가 문득 주인장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에서 잘한 게 하나 있긴 하네. 네놈들을 치워 버렸으니 말이다. 애초에 네놈들을 믿고 주인장 자리를 주는 게 아니었어. 주인장 자리를 감당하지도 못할 놈들한테!”
꿇어앉아 있던 네 사람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맞아. 이번에는 너무 당황하기도 했고, 그들의 기세에 겁을 먹었던 거야.
이전에도 혼수 때문에 다툼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전부 정씨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대낮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이 점포까지 찾아와 난리를 피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하는 게야? 내가 직접 나서서 그 하인 놈들과 싸워야겠느냐!”
네 사람은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노야, 지켜봐 주십시오!”
네 명 중 한 사람은 잊지 않고 고개를 돌려 큰소리를 치며 떠났다.
정 대노야는 침을 퉤 뱉고 소매를 털며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흉통을 느낄 정도로 화가 치민 그는 옆에 있던 탁자를 들어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남정 골목.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오늘 일을 소상히 전했다.
“소문은 제대로 났을 거고, 그들에게도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무나 지목하여 주인장을 시켜주겠다고 이야기했으니, 분명 그들도 주인장 자리에 욕심이 일었을 겁니다. 기회만 있다면, 높은 곳을 오르려 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조 집사가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이제는 뭘 하면 됩니까?”
조 집사가 물었다.
오늘 조 집사가 한 일은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에 불과했다. 이런 식으로 손쉽게 혼수를 빼앗아 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쟁탈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조 집사는 정씨 가문이 급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때렸다고 했으니, 관청에 가서 그 죄에 대해 자수하게.”
정교랑이 말했다.
뭐라고? 관청으로 가서 자수하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조 집사가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반근도 놀란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난리를 쳤어도, 지금까지는 가문 간의 일에 불과했다. 가문 간의 일은 가법에 따라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이 일을 관청까지 끌고 간다면 그건 더 이상 집안일에 그치지 않는다.
정교랑이 바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조 집사는 확신했다.
사람을 때린 죗값으로 감옥살이를 하라는 게 아닐 거야. 정녕 이런 일로 감옥살이를 하라고 시킬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인 아씨는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겠지.
“아씨, 일을 키우시려는 겁니까?”
망설이던 조 집사가 물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일을 키우는 걸 두려워한 적이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이 대화를 꼭 어디선가 들었던 것만 같았다.
지난번, 언제였더라?
그럼, 누이의 말은 아예 일을 키우자는 거야?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조 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감옥살이가 무슨 대수라고. 태평거의 그 사내들을 생각해 봐. 잡혀 들어갔는데도 사지 멀쩡하게 다시 나왔잖아. 아씨께서 자수하라고 시키실 때는 더더욱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아씨는 단순히 옥살이나 하라고 나를 감옥에 보내실 분이 아니야.
“예, 아씨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정교랑의 방에서 나온 조 집사는 곧장 관청으로 가지 않고,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시종들에게 정교랑의 안위를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점포에 데리고 갔던 시종 넷을 데리고 남정 사람들이 집을 짓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을 짓고 있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자들은 힘쓰는 일을 하고 있었고, 여인들은 한쪽에서 새참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조 집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본 정계가 서둘러 다가가 맞이했다.
“집사 어른, 따로 분부하실 일이라도?”
정계가 물었다.
“분부는 아니고.”
조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정계는 이런 모습의 조 집사가 무척이나 낯설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부탁을 하나 드리러 왔소.”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조 집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탁?
사람들은 부탁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부탁을? 우리 같은 사람이 저리 귀한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나?
“집사 어른,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요.”
정계가 말했다. 조 집사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조 집사의 한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더욱 그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 아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대충 알고 있을 거요.”
정씨 가문에서 태어난 바보의 일이라면, 물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상세한 것은 굳이 내 입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겠소. 흔한 이야기지. 여러분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소. 우리 아씨는 집에서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번에 아예 쫓겨나셨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집을 짓는 것도 그 낭자가 홧김에 벌인 일인가? 그럼,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래서 아씨께서는 자신의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셨지. 또 이리저리 내쫓기지 않도록.”
조 집사가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아씨의 성은 정씨인데, 또 어딜 가시겠소? 정씨 가문에서 버림을 받은 아씨께서 여기 말고 가실 곳이 어디 있겠나? 적어도 이곳에는, 아씨와 같은 선조를 섬기는 여러분이 있지 않소.”
정계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 없는 아이가 이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아씨는 바보도 아니잖아, 지금은 다 나았다던데.”
“다 나으면 뭐해. 어렸을 때부터 도관에 보내져서 자랐는데, 정씨 가문이 아씨를 제 자식 대하듯 대하겠어?”
주위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들 안심하시구려. 집을 짓는 돈은 아씨의 외조모 댁에서 나온 돈이오. 아씨는 그 돈으로 여기에 집을 지어 여러분과 이웃으로 지내는 게, 정처 없이 떠도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고 계시오.”
주씨 가문에서 준 돈이었구나.
불안했던 마음이 풀어지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주 노야가 정씨 가문을 찾아와 난리를 피웠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미 강주에는 주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강주 사람들은 주씨 가문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뿐더러,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인상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교랑의 모친이 시집을 왔던 해에는, 그 혼수로 벌어들인 돈이 강주를 세 바퀴나 돌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주씨 가문이 난폭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 모친의 상을 치를 때,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정씨 가문 사람들의 쫓아다니면서 매질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게 그 난폭하고 돈 많은 주씨 가문의 소행이었구나.
“간략하게 말하자면, 지금 내가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여러분께 신세를 좀 져야겠소.”
조 집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사 어른, 신세라니요, 아닙니다.”
정계가 서둘러 말했다.
“맞아요, 맞아.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집사 어른이 우리를 좋게 보신 덕에 우리도 도울 수 있는 거죠.”
주위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 집사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끼어들 수 있을 정도의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정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고, 곧 있으면 아씨는 시집을 가실 거요. 그래서 모친께서 남겨두신 혼수를 다시 거둬 오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도리에 어긋나기는 무슨! 그보다 더 합당한 요구가 어디 있다고 그래!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집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이 일 때문에 정씨 가문과 또 한 번 충돌이 있었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내 그만 그자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람을 때리는 건 죄로 다스리는 게 맞아. 아씨께서도 관청으로 가서 자수하라 하셨고. 하지만 이대로 가자니 아씨가 너무 걱정되어 이곳에 잠시 들른 것이오. 아씨는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시려는 마음이 없지만, 만에 하나 그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힘없는 아씨를 밧줄로 묶어다 데려가기라도 하면 도리가 없잖소. 그러니 이렇게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이오. 여러분만 괜찮다면, 우리 아씨를 돕고 지켜 주시오. 이 조귀가 아씨의 모친과 주 노부인을 대신하여 여러분께 미리 감사 인사를 올리겠소.”
조 집사는 이 많은 말을 한꺼번에 뱉은 뒤, 사람들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예를 마친 조 집사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좀 전까지만 해도 천천히 말하며 뜸까지 들이던 조 집사가 갑자기 이렇게 많은 말을 쉬지도 않고 뱉고 가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멍해졌다. 사람들은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 집사가 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조 집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뒤였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조 집사의 뒤를 쫓아갔고,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을 붙잡고 뜻을 묻느라 바빴다.
말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다 보니, 양념이 가미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과장이 됐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집사 어른, 어찌 그리 고지식하십니까. 정말로 자수하러 가시려고요?”
몇 사람과 함께 뛰어온 정계가 조 집사를 붙잡았다. 조 집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씨를 잘 부탁드리겠소.”
조 집사가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말을 아끼며 시종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다급하게 조 집사를 쫓아갔던 정계와 몇몇 사람은 아무런 수확 없이 집을 짓고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한껏 들떠서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를 좀 해 보세.”
정계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분주하게 일하던 장인들도 손을 멈췄다.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장인들은 사실 정씨 가문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듣다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관심사는 오직 집을 지을 건지 말 건지, 돈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있었다.
“집사 어른이 우리를 좋게 봐서 부탁한 것이니, 우리가 그 부탁을 들어줍시다.”
누군가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자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그 말에 동의했다.
“좋소. 우리가 무서울 게 뭐 있나? 도리에 어긋난 일도 아닌데.”
“맞아, 불쌍하잖아.”
“아씨는 돈 많은 집안에 태어났긴 했어도, 우리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계셨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한쪽에서 장인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금가아가 갑자기 나무막대기 하나를 쥐고는 뛰어가기 시작했다.
“금가아, 어디 가려고?”
정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씨를 지키러 가야죠! 아무도 우리 아씨를 괴롭힐 수 없어요!”
금가아가 큰 소리로 외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교랑의 거처로 뛰어갔다.
금가아의 말 한마디는 마치 펄펄 끓는 뜨거운 기름에 물을 부은 것과 다름없었다. 금가아의 말을 들은 남정 사람들은 일순간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맞아. 우리가 지켜 드려야 해!”
“어린 몸종 하나가 시중을 다 들고 있던데, 설거지나 청소를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려나? 아씨만 괜찮다면, 우리도 가서 도와드립시다.”
한 명, 두 명, 세 명······.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합세하여 정교랑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둘러 금가아의 뒤를 쫓아갔다.
정교랑의 거처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사내들 한 무리가 험악한 기세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씨 가문 놈들아! 당장 나오지 못할까! 어디 감히 강주 바닥에서 난동을 부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소란을 피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어!
남자의 목소리는 남정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꼴이나 다름없었다. 남정 사람들은 줄을 지어 정교랑의 마당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짓들이오?”
우르르 몰려온 남정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외쳤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길을 막으니, 도리어 험상궂은 사내들 무리가 깜짝 놀랐다.
“당신들이야말로 뭐 하는 짓들인데?”
임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북정 가문의 큰 점포를 책임지는 사람이니, 당연히 남정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임구는 남정 사람들을 무시했다.
“비켜, 비켜. 남의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말고.”
임구가 말했다.
“뭐 하는 짓들이냐고!”
정교랑의 마당을 막아선 남정 사람들이 더욱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내가 찾으려는 사람은 주씨 가문의 사람들이지, 댁들과는 상관없어. 썩 꺼지라고!”
임구가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가뜩이나 주씨 가문의 사람한테 맞은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정 사람들까지 상대해야 해?
“당신이나 꺼지시오!”
“여긴 우리 땅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정 사람들이 소리쳤다. 임구와 그가 이끌고 온 사람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것들이 미쳤나.
“뭐 하는 거야! 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래!”
임구가 고함을 빽 질렀다.
“아씨의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 왜 우리와 상관이 없어! 꺼져, 꺼지라고!”
남정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임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이미 자수하러 관청으로 갔는데, 뭘 또 따지려고 그러는 거요! 시시비비는 당신들이 아니라 관청에서 판단할 일이오!”
관청? 관청이라니!
임구 일행은 놀라서 흠칫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설마 진짜로 자수하러 관청에 간 거야?
미쳤나? 진짜야, 가짜야?
임구가 급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없어? 그럼 다른 일을 하면 되겠군.
“여러분들, 주씨 가문 사람은 둘째 치고, 우리는 정 아씨를 모셔 가려고 온 겁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지요.”
임구 뒤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집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남정 사람들은 비켜주기는커녕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디며 말했다.
“아씨가 직접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셔 가시오. 지금은 아씨가 가기 싫다고 하시니, 그만 돌아들 가시라고.”
남정 사람 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침착했던 정씨 가문의 집사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정 사람들이 단체로 미친 건가? 지금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이러는 게야?
사실 남정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정계만이 사람들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 집사가 보통내기가 아니네. 선제공격을 해놓고, 곧바로 자세를 낮춰서 자수하다니. 재밌군, 재밌어. 게다가 고작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너무나도 분하지만 죄를 지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수하러 가는 모습을 보이고, 바짝 엎드려 사람들의 동정심을 샀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을 했지. 맞아, 도움을 받을 때보단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사람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들지.
게다가 돈과 집 같은 물질적인 유혹뿐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고 인정에 호소하며 이 일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상황임을 강조했어. 누가 봐도 주씨 가문은 만만치 않은 강자로군.
강자는 끝까지 강자인 법. 잠시 자세를 낮춘다고 해서 그 지위가 바뀌지는 않는다. 도리어 사람들은 이 틈을 타서 강자를 도울 기회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강자를 돕는 일은 비단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이 보장된,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유혹이기 때문이었다.
정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 하늘에서 복이 거저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하는 거지. 누구든 얻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만한 공을 들여야만 해. 다만, 공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자신이 알아서 잘 판단해야겠지.
정계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정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해 보지 뭐!
“여러분, 여러분.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정계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어제의 충격으로 인해 정 대부인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로 지은 경당에서 밤새도록 태평경을 읽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정 대부인은 직접 현묘관에 가서 향불을 올렸지만, 아쉽게도 손 관주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정 대부인은 속이 한결 편해진 것을 느꼈다.
정 대부인이 저택으로 돌아온 시간은 이미 점심때가 지나고 나서였다.
“밥은 차리지 말고, 탕약이나 좀 데워 오거라. 탕약을 마시고 낮잠이나 좀 자야겠다. 밥은 이따 저녁에 먹으마.”
정 대부인이 거처로 걸어가면서 여종에게 말했다.
정 대부인과 여종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두 여종이 대청에서 탁자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어젯밤에 새로 가져다 놓은 탁자인데?
정 대부인이 놀라서 물었다.
“왜 또?”
“노야께서 이게 별로라며, 창고에서 다른 탁자로 바꿔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정 대부인은 여종이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며 가 보라고 손짓했다.
정 대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 대노야의 모습이 보였다. 깔개 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찻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제 일은 열이 받아. 도관으로 가라는 말도 안 듣고 집을 나가더니, 남정으로 가서는 돈을 들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질 않나, 대노야를 향해 화살을 겨누질 않나. 거기다가 이부인까지 합세해서.
정말 가문의 불행이야, 가문의 불행!
정 대부인이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진인께서 보우해 주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
“노야, 그만하세요. 그 애 때문에 괜히 열 올리지 마시고요. 난리 치고 싶은 만큼 치라고 해요. 돈도 쓰고 싶은 대로 쓰라 그러고, 집도 짓고 싶은 대로 지으라고 하죠.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걔가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어요. 다음 달에 서둘러 시집보내고 그만 치워 버리자고요. 그럼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걔한테 야박하게 굴지 않는다는 걸 알 테고, 유언비어도 잦아들 거예요.”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냐고?
정 대부인의 말이 정 대노야의 정곡을 찔렀다. 이제야 좀 진정된다 싶었던 정 대노야의 속이 다시 뒤집혔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냐고? 당신은 걔를 너무 얕보고 있는 게야!”
정 대노야는 소리를 지르며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입을 닫았다.
“노야, 노야.”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정 대부인은 깜짝 놀랐다.
점포의 주인장들이 갑자기 이 시간에 웬일로?
“부인.”
몇 사람이 멈춰 서서 예를 올렸다. 정 대부인이 그중 두 사람을 흘겨보며 냉소를 지었다.
“자네 둘은 무슨 일로 여길 왔는가? 이부인에게 장부를 보여주느라 바쁠 텐데?”
농토 주인장 두 명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 크, 큰일 났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큰일이 나?”
정 대부인이 그들의 말을 듣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큰일이 나면 우리를 찾아오고, 별일 없을 때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아부를 떠나?”
“그만하시오!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은 식구잖소. 지금 모든 게 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소.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오!”
갑작스러운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 대부인은 화들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됐어? 묶어서 데려왔느냐? 그럼 그 계집을 반 죽을 지경까지 때려서 경성으로 돌려보내거라!”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인장들에게 물었다. 임구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 아니요.”
일순간 정 대노야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네놈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타지인 몇 놈 앞에서 설설 기는 거냐! 내가 이 쓸모없는 놈들한테 기대를 걸었다니. 썩 비켜라, 내가 직접 가겠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정 대노야를 막아섰다.
“노야, 그자들이 관청으로 갔다고 합니다.”
임구가 말했다.
관청?
“잘못을 저질러 놓고, 먼저 관청으로 가서 고자질하는 놈이 어디 있느냐?”
정 대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자들이 먼저 죄를 인정하고 자수하러 갔다고 합니다.”
임구는 정 대노야에게 이 일을 알리면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죄를 인정하고 자수하러 갔다고?
놀란 정 대노야의 눈이 커졌다.
무슨 죄? 무슨 자수?
같은 시각. 강주부의 절도추관(節度推官)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수하러 왔다고?”
추관이 탁자 위에 놓인 명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 하급 관리 하나가 명첩을 들고 와 고소장을 올리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알렸다. 작년에 새로 부임한 절도추관은 명첩에 쓰인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라는 글씨를 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려고 했다.
무관이라고는 하나 경성 관리가 아닌가. 경성에 있는 관리가 강주까지 와서 고소장을 올리려 하다니, 설마 강주부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추관 옆에 앉아 있던 늙은 관리가 그를 제지했다.
“대인,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강주에서는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 그리 낯선 이들도 아닙니다. 사고를 당한 건 아니고, 일이 있다 해도 기껏해야 집안 간의 싸움일 겁니다.”
늙은 관리가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 사이의 일들을 절도추관에게 말해 주었다.
“주씨 가문에서 시집온 부인의 상을 치를 때,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느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두 가문 모두 관청으로 찾아와서 나서 달라고 청하긴 했었지만, 관청에서 사사로운 집안일에 개입할 수야 없잖습니까. 그저 눈 감고 못 본 척할 수밖에요.”
추관이 늙은 관리의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에도 집안 간의 다툼 때문에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인께서도 그자들을 보면 웃으며 몇 마디 대꾸해 주고 돌려보내십시오.”
하지만 추관과 늙은 관리의 예상과는 달리,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관청에서 나서 달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삿대질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죄를 지어 자수하러 왔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인정에 호소하러 온 건가?
추관과 늙은 관리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릇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설령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자식은 부모와 말싸움을 해서는 안 되고, 폭력을 써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번에 아씨의 혼수 문제로 정씨 가문과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잘 타이르거나, 관청의 대인들을 찾아와 중재를 요청해야 했는데, 그만 충동적으로 사람을 때려 다치게 하고 말았습니다.”
조 집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경성 관리 집안의 건방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 집사가 겸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인인 제 행실이 곧 아씨의 뜻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제 불찰로 아씨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 모든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인께 벌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추관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늙은 관리는 조 집사의 말에서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자네들이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고, 따지고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집안일이니, 본관은 자네를 벌하지 않겠네. 두 가문끼리 알아서 잘 해결하시게나.”
추관이 말했다. 그러자 조 집사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으니 벌을 청할 뿐입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도리에 맞는 일이 있다면 그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겠지요. 이 일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두 가문 사이의 집안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받을 벌이 있다면 마땅히 받고, 청을 드릴 것에 대해서는 청을 드리려 합니다.”
“무슨 청을 올리겠다는 말인가?”
추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대인, 저희 아씨께서는 관청에서 모친의 혼수에 대한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조 집사가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놀란 추관이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늙은 관리는 좀 전에 자신이 느꼈던 의혹이 단번에 해결됨을 느꼈다.
그 낭자의 혼수 때문이구먼! 단순한 말싸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혼수 문제를 관청으로 들고 왔어.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씨께서는 집안의 어른을 관청에 고발하시려 합니다. 이것 자체가 도리를 어기는 중죄로 여겨짐을 잘 알고 있지만, 저희 아씨께서는 더는 방법을 찾지 못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조 집사가 다시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대인, 부디 아씨의 무례를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올린 조 집사가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추관과 늙은 관리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들은 조 집사가 건넨 종이가 비전 증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녀가 집안의 어른을 고발하면, 보통은 관청에서 절대로 수리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고발한 자녀를 그 자리에서 즉시 매질하여 쫓아내도, 관청에서 가볍게 대응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가산이나 재물이 연관된 내용이라면, 협상의 여지가 조금은 있었다.
다만, 그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는 관청 관리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추관은 꿇어앉아 예를 올리는 사내와 그가 내민 비전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추관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쳤다.
자수는 개뿔. 돈을 써서 고발하러 온 거겠지!
하지만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정씨 가문은 강주에서 명망이 높잖아. 정씨 가문의 정 대노야는 돈이 많기로 유명하고, 정 이노야는 관직에 있는 사람인데.
주씨 가문은 경성 관리고 그 지위 또한 정씨 가문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거리다 보니 주씨 가문의 힘이 강주까지 뻗칠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가산에 관한 일이었다.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조정에서는 부모 자식도 못 알아보게 되는 가산 다툼을 제일 꺼리는데.
“곧 있으면 저희 아씨께서 시집을 가십니다. 모친을 일찍 여의신 탓에 아씨께서는 어머니 없이 홀로 혼사를 치르게 될 테니, 모친께서 남기신 혼수를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모친께 어미 노릇도 못 했다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으신 거지요. 하지만 가문의 웃어른께서 아씨의 혼수를 빼앗고 돌려주려 하지 않으시니, 아씨의 속상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결국 다 돈 얘기.
추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늙은 관리도 조 집사를 쳐다볼 뿐 말을 아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아씨의 모친을 위해 정당한 도리를 따지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조 집사의 말을 듣자, 머뭇거리던 추관과 늙은 관리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조 집사는 시종일관 고개를 들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꿇어앉아 있었다. 마지막 말을 마친 조 집사가 종이 몇 장을 꺼내어 추관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이 주씨 가문의 혼수 목록과 문서들입니다. 부디 대인께서 명확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노야, 노야.”
정씨 가문의 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황급히 뛰어오느라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쓸 새도 없는 듯 보였다.
“어떤가? 전부 알아봤는가?”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고 다급하게 물었다. 낮은 탁자 앞에 꿇어앉아 태평경을 읊고 있던 정 대부인도 소리를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예, 진짜로 자수하러 관청으로 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집사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정 대노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미친 건가?”
정 대노야의 진지한 물음에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야, 미친 게 아닙니다. 저들이 우리를 고소했습니다! 감옥 관리가 은밀히 알려 줬는데, 주씨 가문 사람들이 아씨의 명을 받들어 고소장을 올렸다 합니다. 우리가 그 모친의 혼수를 빼앗았으니, 관청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요!”
뭐가 어째? 고소장을 올려? 관청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다고?
정 대노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 대부인도 몸을 일으키고 손에 쥐고 있던 경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서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자, 마음이 몹시 심란해졌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제는 혼수에까지 손을 뻗어? 이 일에 비하면, 가출이나 일만 관을 허공에 뿌리는 일 따위는 난리 축에도 못 끼지!
정말 진인 신선도 그 바보를 감당하지 못 하는 건가?
밤이 가까워질 무렵, 정씨 가문의 집사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강주부 관청 소속의 관리 한 명을 데리고 와 정 대노야에게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전했다. 이로써 정교랑이 고소장을 올렸다는 사실이 정 대노야에게 확실하게 전해졌다.
“고소장은 수리되었고, 저도 제 눈으로 그 고소장을 확인했습니다. 정교랑 이름 세 글자가 분명히 쓰여 있었는데, 정씨 가문의 딸이 맞지요?”
관리가 물었다.
교랑, 당연하지.
“주씨 가문에서 지어준 이름이에요.”
정 대부인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 교교. 그때는 바보한테 무슨 이름을 지어주냐고 비웃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애는 주씨 가문의 사람이 맞았네. 그 어미가 죽던 해, 주씨 가문이 난리를 치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하잖아. 지금쯤 주씨 가문 사람들은 꼴좋다며 우리를 비웃고 있겠지.
관청에다 고소장을 올려? 혼수에 대한 명확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다고?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관청에서 명확한 판결을 내려 달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이는 근 몇 년간 주씨 가문과 다툴 때마다 몇 번씩이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 대노야와 주 노야, 모두 각각 한 번 이상은 꺼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양쪽 모두 그냥 하는 말이었을 뿐, 아무도 이 일을 관청까지 가져가려 하지는 않았다. 가산 문제로 관청을 들락거리는 건 체면이 상할 뿐 아니라 도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괴팍한 주씨 가문도 큰소리만 치고 말았는데, 그 바보는 말 한마디 없이 곧장 관청으로 달려갔네. 감히 우리를 관청에 고소해? 이 빌어먹을 것이!
정 대노야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강주부는 그 바보가 올린 고소장을 가만히 앉아 수리했다는 거요?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손아랫사람이 친족 어른을 고발하는 건 곤장으로 때려서 내쫓아야 할 일 아니오!”
집사가 데려온 하급 관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절도추관(節度推官)이 수리를 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생각으로? 딱 보면 모르겠소? 단지 고소장만 받은 게 아니니 그렇겠지.”
정 대노야는 관청 관리들이 암암리에 행하는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뒷돈을 받고 곤란한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을 썩 나쁜 일이라고 볼 순 없지. 하지만 그 돈을 받아도 되는지, 처리해도 될 일인지는 살펴 가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지부(知府)는 가만히 있는 거요? 내 직접 가서 따져봐야겠소.”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지부 대인께서는 요즘 몸이 허하여 관청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자잘한 일들은 수하에게 처리를 맡기고, 집에서 요양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급 관리가 말하면서 정 대노야 가까이로 다가가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노야, 지부 대인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날도 저물었는데, 내일 아침에 가시지요. 대인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모르고 계셔야,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부 대인이 화가 나면 날수록, 자기 멋대로 혼수 건을 수리한 절추(節推: 절도추관의 약칭)가 더욱 곤란해지겠지.
다시 자리에 앉은 정 대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노야가 집사에게 눈짓을 하자, 집사가 소매에서 예단 하나를 꺼내어 하급 관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십시오.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관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가식적인 말 몇 마디를 하고는 봉투를 건네받았다. 정 대노야가 준 돈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닐 터였다. 곁눈질로 예단을 훑어보던 관리는 위에 적힌 액수를 확인하고 내심 뛸 듯이 기뻐했다.
정씨 가문에 돈이 많긴 많나 보네.
“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아랫사람이 버릇없이 소란을 피우니, 괜한 자들까지 덩달아 헛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헛짓거리가 괜히 헛짓거리겠습니까. 크게 번질 일이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관리가 웃으면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정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를 시켜 관리를 배웅하게 했다.
“노야, 부인, 시장하시지 않으세요?”
여종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올린 지 한참이 지난 음식들이 밥상 위에서 차게 식어 가고 있었다.
정 대노야는 손을 휘휘 저었고, 정 대부인도 입맛이 없어 보였다. 불경이든 도경이든, 지금의 대부인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은 내일 당장 왕씨 가문에 가서 혼서를 받아오고, 날짜도 정해 오시오. 그 애를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내보내야겠어. 누굴 해치려거든 이 집에서 나간 후에 하라고 해!”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쳤다.
“해치고 싶은 대로 해치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왜 우리 친정이 그 꼴을 봐야 하는데요?”
“그럼 남의 집으로 보내든가. 안 그래도 이방 내외가 기다리고 있잖소.”
정 대노야의 대꾸에 정 대부인은 화가 나서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뭘 위해서 이러는 건데요. 내 편은 하나도 없지!”
정 대부인이 울음을 터트리자, 정 대노야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본디 부인에게 화풀이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툭 건드리기만 해도 화르르 타오르는 마음속의 분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병까지 났는데, 하루도 쉬지 못하고 안팎으로 뛰어다니고 있어요. 밥도 제대로 못 삼키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어머님의 눈 밖에 나고, 동서가 날 싫어하는 건 다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 어떻게 당신까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정 대부인은 말을 하면 할수록 속에 있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녀는 탁자에 엎어져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정 대노야도 부인에게 화풀이한 것이 잘못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로서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 잘못이라고 한 건 아니잖소. 울긴 왜 울어.”
“말만 안 했다 뿐이죠. 차라리 까놓고 말해요. 이러는 게 훨씬 더 상처예요.”
정 대부인이 울면서 말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말이 안 통할 때는 상종하지를 말아야지.
“일단 그 바보부터 집에 데려오고 다시 얘기합시다.”
정 대노야는 대충 얼버무리고 재빨리 문을 나서면서 집사를 불렀다. 이제 막 관리를 대문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던 집사가 정 대노야의 부름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
“관청에 오가느라 그 아일 데려오는 것은 잊었나? 날 어두워졌으니 지금 어서 데려오게.”
정 대노야의 말에 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노야, 실은 잊은 게 아니라 데려오려고 했는데, 못 데려왔습니다.”
“뭐? 그 많은 사람이 갔는데 못 데려왔다고? 주씨 가문 시종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 아니었어? 아무리 그 바보가 활을 잘 쏜다지만, 그 애랑 시녀 하나만 잡아 오면 끝나는 일인데. 이 정도로 쓸모없는 놈들일 줄은!”
정 대노야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수하가 이리도 아둔하게 여겨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장사하고, 살림을 꾸리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강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쓸모없는 놈들이 되었는지.
“그게 아니라요. 주씨 가문의 시종들 대신 이제는 남정 사람들이 그 집 앞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어서, 아예 들어가질 못합니다.”
남정 사람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우리 집 애한테 공갈친 것도 아직 따지지 못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감금 납치를 해?”
정 대노야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다들 정신이 나갔나?
“이리들 모이거라!”
정 대노야가 목청을 높여서 외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감히 내 앞을 막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집사가 서둘러 정 대노야의 앞을 막아섰다.
“노야, 노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시면 안 됩니다. 남정 사람들은 정 아씨가 가지 않겠다고 했고, 아씨의 명으로 이러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때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아씨를 데려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정 아씨가 관청에 우리를 고소했지 않습니까. 지금 난리를 피우면 훗날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사람들 입단속도 어렵고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는 왜 없어! 내가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앨 무서워할까 봐?”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고 집사를 다그쳤지만,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노야, 노야의 덕행이야 당연히 흠잡을 곳 하나 없지요. 하지만 근자에 집안이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둔하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길 즐깁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집사가 주절주절 늘어놓자 정 대노야는 집사를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지금은 어째 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그 주둥이는 날 설득할 때만 쓰이는 게야? 주씨 가문 앞에서는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집사가 머쓱한 듯 웃었다.
같을 수가 없지요. 그쪽은 활이며 곤봉을 손에 들고 있는데요.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이렇게 입을 놀리겠습니까.
“노야께서는 이치에 밝으신 분이고, 주씨 가문 사람들과 그 낭자는 도리와 이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집사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부를 떨면서 정 대노야 가까이로 다가갔다.
“노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낭자가 소동을 벌이려 한들, 우리 쪽에서 맞장구를 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아직 어려 철이 없는 것뿐인데, 우리까지 철없이 굴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디 한번 세상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해 보라고 하지요. 시집가는 것도 밖에서 갈 수 있을지 어디 지켜보자고요.”
시집!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큰일이구나. 이 일이 관청에까지 갔으니, 이방 내외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움직일 텐데!
“내가 가면 안 좋은 거 아니오?”
어두운 밤, 정씨 가문의 쪽문이 열리고 등롱을 든 여종 두 명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여종들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좋을 게 뭐 있어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정 이노야의 등을 떠밀면서 걸어 나왔다.
“당신은 그 애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딸을 보러 가는 건데, 얼마나 좋아요.”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의 앞뒤로 여종이 두 사람씩 붙어 불을 밝히며 남정으로 향했다. 불빛이 환하게 켜진 남정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저쪽이 집 짓는 곳이에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정 이노야에게 말했다.
“어쩜 저렇게 밤낮으로 일을 해대는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빼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죠.”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마지못해 가지만, 그 아이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소. 내가 그 애랑 할 얘기가 뭐 있다고.”
정 이노야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기쁘게 말하고는 정 이노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꼈다.
“역시 당신만큼 나를 아끼는 사람은 없어요.”
밤이었지만, 부인의 남사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란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품에 있던 자신의 팔을 빼냈다. 정 이부인은 해맑게 웃고는 조용히 정 이노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좁은 골목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리를 들은 주위의 가축들이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부인, 곧 도착합니다.”
앞서 길을 안내하던 여종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런데 여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정 이부인 일행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는 이들이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 이노야의 몸 뒤에 숨어 있던 정 이부인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다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나?
“나다. 너희는 누구냐.”
정 이노야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종들이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등불을 비췄다. 그들의 눈앞에는 야윈 소년 두 명이 서 있었다. 소년들은 한겨울인데도 손목이 훤히 드러나는 얇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어두운 밤과 한데 섞여 더욱 새까매 보였다.
저건 남정의 거지새끼들이잖아!
여종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꺼지거라, 썩 꺼져!”
여종들이 아이들을 쫓아내자, 아이들은 별말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왔는데, 여종도 네 명 있었어요. 무기는 없어 보였고요.”
“남자는 한 명이에요.”
두 소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남정 골목에 울려 퍼졌다. 정 이노야 일행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저게 뭐야? 정찰하는 거야?
소년들의 목소리와 함께 낮고 까만 집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골목 끝에 있던 정교랑의 거처에도 사람들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 하는 사람들이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지금 우리를 도둑놈 취급하는 거야, 뭐야!
정 이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붙잡아 세웠다.
“우리예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정 이부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제야 정 이노야 내외를 알아보았다.
“썩 꺼지지 못할까!”
정 이노야가 수군대는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쳤지만,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고 길을 막아섰다.
“이노야, 아씨를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아씨께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와도 안 가신다고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정 이부인이 다시 고함을 치려던 정 이노야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 아니. 데려가려는 거 아니에요. 교랑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게 뭐 어때서요. 우린 교랑과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왔어요.”
정 이부인은 자신이 이들 앞에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아부 섞인 웃음까지 지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날이 어두워서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이는 없었다.
정교랑의 집 앞을 막아선 사람들은 조용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정 이노야가 화를 내려던 찰나, 남정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씨께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정 이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버지가 먼저 딸을 만나러 오는 것도 여간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닌데, 딸의 의사까지 물어봐야 한다니!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혼수, 앞길.”
정 이부인이 작은 소리로 정 이노야에게 속삭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기회만 제대로 잡는다면 집안의 모든 혼수를 장악할 수 있으며, 평생 닿을 수도 없을 법한 이들과 사돈을 맺을 것이다. 비단 정 이노야 내외에게만 좋은 관계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도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될 게 틀림없었다.
“당신은 우리 희가아(熙哥兒)까지 남 눈치나 보고, 비위 맞추면서 살게 하고 싶어요?”
정 이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희가아는 정 이노야가 제일 아끼는 아들이기에, 정 이노야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저 바보, 아니, 저 아이 눈치를 보고 살 건 아니잖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정교랑의 집 앞을 지키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노야, 부인, 아씨께서 안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이거 봐요. 친딸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은 안 보더라도 당신은 보네요.”
정 이부인이 낮게 속삭이고는 앞장서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친딸이 아니었더라면, 이 많은 일도 없었겠지.
정 이노야는 걸음을 옮기기 전, 새까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언뜻 여인의 얼굴 하나가 스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정말 재수 없어. 애초에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정 이노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마당에는 등롱 두 개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등롱이 흔들거릴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던 정 이부인이 등롱을 자세히 쳐다보니, 등롱 아래에 달린 풍경이 보였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비좁고 허름한 집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이 예를 올리고 문을 열자, 정 이부인이 얼른 시선을 거두고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울먹였다.
“우리 아가,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다니.”
정 이부인이 걸음을 옮기자, 정 이노야도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비좁은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서 있을 만한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여기서 지내지 말고, 돌아가서 지내거라. 이게 다 무슨 꼴이더냐.”
정 이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정 이노야는 흠칫 놀랐다.
은은한 등불 아래 깃털 실로 짠 병풍 앞으로 품이 넓은 비단옷을 걸친 소녀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이 방 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저, 저게 그 바보라고?
정교랑의 자태에 정 이노야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경성의 그 수많은 집안에서 혼담을 넣으러 온 거였군!
“이 얘기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교랑의 목소리에 정 이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귀찮음이 한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인지라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친딸? 세상 어느 친딸이 아버지한테 이따위로 얘기해?
정 이노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재빨리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널 아껴서 그래. 교랑, 이런 곳에서 지내기에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공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초장에 분위기를 띄우려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예의거늘, 이게 지금 무슨 태도야!
정 이노야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집안을 고발해? 어찌 감히!”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손님 배웅하거라. 난 좀 쉬어야겠어.”
정 이노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정 이부인이 꽉 붙잡아 눌렀다.
“교랑, 교랑. 우리는 너한테 따지러 온 게 아니란다. 이번 일은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게 지금 잘하는 짓이라고?
정 이노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건 없잖아! 저 아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뻔히 알면서!
저 애가 고발한 사람은 정씨 가문의 손윗사람이야. 무려 나의 친형님인데, 이걸 잘했다고 하는 건 내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름없잖아!
“당신······.”
정 이노야가 부인을 향해 벌컥 화를 내려던 그때, 정 이부인이 먼저 그의 팔을 탁 치며 말했다.
“가족끼리 못 할 말이 뭐 있어요. 교랑, 힘들면 먼저 쉬렴.”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에게 눈짓했다.
이미 정교랑의 하인들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을 뻔한 적이 있는 정 이부인이었다. 정 이부인은 한시라도 빨리 태도를 밝히지 않으면, 저 바보가 사람들을 시켜 자신들을 내쫓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 이부인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바라는 건 올바른 판결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정 이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정 이노야의 소매를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올바른 판결을 얻어내야지.”
“제가 시집갈 때, 혼수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거에 동의하셨었죠?”
정교랑이 물었다.
“그, 그건 다 그 사람들 마음대로 정한 거야. 집안에서는 네 아버지의 말이 먹히지 않아.”
정 이부인이 서둘러 변명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청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어요?”
뭐라고? 증언?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대한 판결을 내고자 해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비좁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내가 혼수도 없이 시집가는 데다가, 그 혼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남긴 혼수라는 것에 대해서요. 그러니 공당(公堂)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증언이라고?
정 이부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순간 자신이 이 야밤에 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점포와 농토들을 빼앗아 가려 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뺏고 싶다고 해서, 정말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 이부인은 그 후에 들은 소식에 훨씬 놀랐다. 주씨 가문에서 혼수 건으로 정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이었다.
주씨 가문이 혼수를 요구하는 것은 정 이부인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 이유가 뭐겠어, 다 돈 때문이지. 솔직히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달라고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정 이부인은 일찌감치 결정을 내렸다. 대방에서 주는 국물이나 얻어먹을 바에는, 주씨 가문과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게 낫다고.
따지고 보면, 정교랑의 혼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교랑의 부모인 이노야와 자신뿐이라고 정 이부인은 생각했다. 정 대노야 내외와 대판 싸울 배짱만 있다면, 그들 내외 쪽에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노야 내외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던 찰나, 정교랑이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이방 내외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을 본 어부가 될 수 있었다. 혼수와 정 대노야에 관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위해 그들 내외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바로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 이노야 내외가 오늘 정교랑을 찾아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교랑이 내쫓긴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분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정교랑을 위해 좋은 혼처를 알아보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방 쪽에서 오가는 혼담은 신경 쓸 것 없으니 마음껏 일을 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직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못 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목적 중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저 아이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말문이 막혀 버리다니! 우리에게 칼자루를 건네며 대노야 내외를 찌르라고 하다니!
일을 벌이는 사람이 어쩌다가 우리가 됐지? 이, 이게 아닌데.
정 이부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 교랑, 이 일은 다시 진중히 논의해 보고······.”
정 이부인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 일을 공당까지 가져갈 셈이냐!”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들은 정 이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인네가 혼수 때문에 공당까지 가겠다고? 집안 망신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우리한테 증언까지 해 달라고? 내 너를······.”
“두 분 뜻 잘 알겠으니,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단호하게 정 이노야의 말을 끊고 예를 표했다.
저것이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정 이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정 이부인이 서둘러 옷자락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교랑, 네 아버지는 너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런 거란다. 오늘 우리가 온 건 다른 일 때문인데······.”
다급해진 정 이부인이 오늘 온 목적에 대해 말하려 했다.
“혼수 판결이 끝난 뒤에 다시 얘기하죠.”
정교랑이 다시 한번 느긋하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외통장군이로군!
정 이노야 내외는 정교랑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저, 저기 좋은 혼사가 있는데······.”
정 이부인이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정교랑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혼수가 없으면, 혼사도 없어요. 이만 쉬러 갈게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자, 회랑 아래 있던 반근이 곧바로 밖을 향해 이노야 내외가 나가신다고 소리쳤다. 조 집사를 따라가지 않았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어느 틈에 우르르 몰려와 정 이노야 내외를 끌어내려 했다.
“뭐 하는 게야! 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정 이노야의 분노 가득한 호통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밀지 말거라! 누군들 여기 있고 싶은 줄 아느냐! 비켜라!”
“교랑, 정말 좋은 혼사인데,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
정교랑은 이노야 내외를 쳐다보지도 않고 병풍 앞에서 몸을 돌렸다.
여종들이 에워싼 덕에, 정 이부인이 주씨 가문 시종들과 몸씨름을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정 이부인은 여종과 시종들의 어깨 사이로, 병풍 앞에 서 있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았다. 은은한 등불 아래, 정교랑이 입은 비단옷이 잔잔한 물결처럼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탁자 위에 놓인, 날이 시퍼런 화살촉보다도 차가워 보였다.
지금이라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게 다 주씨 가문의 것이 되어 버릴 거야!
“증언할게, 우리가 증언할게!”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정 이부인의 말을 들은 정 이노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의 말과 함께 방 안이 조용해졌다. 호랑이처럼 매섭게 밀쳐대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갑자기 순한 양이 된 듯 말없이 물러났다.
병풍 앞에 서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앉으시지요.”
정교랑이 정 이노야 내외에게 손을 내밀며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반근에게 말했다.
“차를 준비해.”
날이 밝을 무렵, 정 대노야가 마차를 타고 관청으로 왔다. 강주부의 지부 대인 송현(宋賢)은 관청 바로 뒤에 있는 저택에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었다.
강주 지부로 부임한 지 3년을 넘긴 송현은 강주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강주의 명문가인 정씨 가문과도 자연스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가 도착했다는 명첩을 받은 송 지부는 사환을 대문 앞으로 보내 맞이하게 했다.
은잠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장포를 입은 송현이 서재 앞에서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정 대노야를 맞이했다.
“중문, 때마침 잘 오셨소. 오늘 좋은 차를 우려 마셔 볼 참이었는데.”
송현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 대노야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탕약 냄새가 아니라 좋은 향이 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 안의 낮은 탁자에는 송현의 말대로 다구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한참 동안 안부를 물었다.
“중문, 어쩐 일로 오셨소?”
송 지부가 차를 따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오랫동안 관직을 지키고 있는 송 지부는 정 대노야가 단순히 차나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 대노야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한숨을 쉰 뒤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담기에도 민망합니다. 우리 가문의 불행이지요.”
정 대노야는 정교랑이 자신을 고발하게 된 자초지종을 송 지부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다고?”
정 대노야의 말에 깜짝 놀란 송 지부는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차 주전자를 놓칠 뻔했다.
어제 정씨 가문을 다녀간 하급 관리의 노력 덕에, 송 지부는 관청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어서인지 보고하는 것을 깜빡해서인지, 고소장을 수리했던 절추가 송 지부에게 말 한마디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느 관리와 마찬가지로 송현 또한 자신의 수하가 자신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수하는 오직 자신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일해야 했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니, 대인께서는 아직 모르셨습니까?”
정 대노야는 짐짓 놀란 시늉을 하며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제가 괜히 대인을 오해했군요. 전 또 대인께서 제게 뭔가 섭섭한 게 있으신가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주씨 가문의 압력에 못 이겨······.”
송 지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정 대노야가 말끝을 흐렸다.
경성 귀덕낭장 주씨 가문. 관리라고는 하나 그게 대수야? 일개 경성 무장이 감히 내 구역에서, 내 수하를 꾀어내 일을 벌여?
내 임기가 곧 끝난다고 사람을 무시하나? 아무리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나 아직 안 떠났다고!
송 지부는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송 지부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오? 몸이 좀 안 좋긴 했다만, 내 아직 멀쩡히 살아 있거늘!”
송 지부가 몸을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중문,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당장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소.”
정 대노야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는 송 지부가 잿빛이 된 안색으로 성큼성큼 서재를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소매를 가볍게 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주전자를 가져와 차를 따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주가 놈아! 바보를 바보가 아닌 것처럼 꾸미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 아이를 칼자루로 쓰다니. 이러니 젊은이가 철이 없고, 사리 분별을 못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야. 그 애가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누굴 겁줄 수나 있을 것 같아?
아예 통하지 않는 방법은 아니다만, 최소한 강주의 지부 대인에게는 귀띔했어야지. 고작 절도추관 하나 매수해서 해결될 줄 알고? 호랑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원숭이가 산림의 왕이 되겠어?
뭐, 그 아이가 처음부터 지부 대인을 찾아갔어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겠지만. 지부 대인은 나와 친분이 있으니, 손아랫사람이 가산 문제로 집안의 어른을 고발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당장 밧줄로 묶어다가 우리 집으로 보내 버렸을 것이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절추 같은 놈들이나 자네 주씨 가문의 꼬드김에 넘어가는 거라고.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면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지부 대인의 차도 나쁘지는 않은데, 내가 마시던 차보다는 질이 떨어지는군.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아끼는 찻잎을 조금 나눠 줘야겠어. 진정으로 좋은 차 맛이 어떤 건지 맛보라고 말이야.
반근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활을 거두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금가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과녁에 꽂힌 화살을 세고 있었다.
“아씨.”
반근이 한쪽에 놓여 있던 두봉을 정교랑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
“거리에 있는 아이들 말로는 대노야가 지부 대인을 뵈러 갔대요.”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노야와 지부 대인의 관계가 꽤 좋다고 들었어요.”
반근이 덧붙였다.
“관계? 관계보다는 원칙이 더 미덥지.”
방 안으로 들어선 정교랑이 두봉을 벗으며 말했다. 그래도 반근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씨, 우리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좀 전에 진씨 가문의 여인들이 절 찾아와서 아씨를 뵐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요. 어젯밤 이부인의 말이 진짜인가 봐요. 진(秦) 부인께서 아씨를 위해 여러 곳에 혼담을 넣으신 것 같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돼. 어제 조귀 일행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다른 방도를 찾았어야 했지만, 감옥에 갇혔으니 별일 없을 거야.”
별일이 없을 거라고?
정교랑은 머리를 풀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관계나 인정(人情)은 원칙보다 미덥지 못해. 인정이 없는 게 제일 믿을 만하지.”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향해 싱긋 웃었다.
“어제 한 일로 봤을 때, 그 절추는 믿을 만한 자야.”
그 절추가 믿을 만하다고?
반근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세상만사에 대해서 굳이 세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따라야 할 사람만 잘 알면 그만이라는 게 반근의 생각이었다.
길을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그 길을 가는 자가 있어야 하는 법.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아씨, 소인이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뭐라고? 왜 내쫓지 못한다는 게야?”
수하에게서 보고를 들은 송 지부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李) 절추, 많이 컸군. 대놓고 내 명령을 무시해?
“대인, 절추 대인께서는 그자들을 내쫓을 수 없을뿐더러 공당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수하가 말했다.
“윤리에 어긋나는 이런 사건을 공당으로 가져가겠다고? 목수 놈이 경성 무장이라는 말에 겁이라도 먹은 게야? 여기는 강주지, 경성이 아니라고!”
절추는 목수 집안 출신으로, 그 부친도 목수였다. 그래서 관청 내에서는 암암리에 이 절추를 ‘목수 놈’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무시하고 비웃었다. 절추와 대립하는 사람이거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입에 올리곤 했다.
이 절추를 ‘목수 놈’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송 지부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군.
“대인, 이 절추의 말로는 정 낭자의 혼수 사건 고소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심판할 사안은 그 사건이 아니라 정 낭자의 아랫사람들이 싸움을 벌여 사람을 다치게 한 건이랍니다. 주범이 먼저 관청으로 와서 자수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피해자를 소환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이건 괜찮은 건가?
송 지부가 미간을 찌푸리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참으로 교활하구나. 그런 식으로 고소장을 받아 판결을 내릴 생각을 하다니. 괜히 목수 놈이라는 게 아니야. 보통 손재주가 아니잖아. 그럼 어디 한번 두고 봐야겠다. 무식한 주씨 가문 놈들. 목수 놈이야 매수할 수 있다지만, 나도 그 목수 놈과 같을 줄 알아?”
비록 부부싸움을 하고 난 후였지만,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 나와 맞이했다.
“어떻게 됐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정 대노야는 홀가분한 듯 보였다.
사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는 확연히 다른 정 대노야의 표정에서 대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정 대부인은 그래도 꼭 그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정 대노야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일 재판이 열릴 거요.”
정 대노야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정 대부인은 숨이 턱 막혀 혼절할 뻔했다.
“재판이라뇨!”
정 대부인이 소리쳤다.
그 바보가 올린 고소장이 정말로 수리되었다는 말이야? 세상에!
정 대부인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가슴을 쳤다.
“괜찮소, 정말이오. 그 애가 이 절추 외에 모든 강주부 관리의 심기를 건드렸어. 재판을 연다고 해서 우리가 겁먹은 얼굴로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다면 엄청난 오산이지. 그 애가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니!”
정 대노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대부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머뭇거리면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 바보는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여겼던 상황들을 몇 번이고 뒤엎었는데.
“도조 진인과 손 도사도 감당하지 못한 아이인데, 관청의 관리들로 가능할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고 정 대부인을 향해 호통쳤다.
“협박받는 걸 좋아하는 관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소? 이번에는 우리가 아니라 관리들을 화나게 했으니, 어디 한번 두고 보시오. 곤봉에 얻어맞으며 공당에서 내쫓겨질 거요. 올바른 판결을 원한댔지? 흠씬 얻어맞고 내쫓기는 게 올바른 판결이야! 세상 사람들 다 와서 보라고 하지! 이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정 대부인은 짧게 아, 대꾸하고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 대부인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지,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진인이니 도사니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마시오. 그 여인네가 바보를 어찌 감당하겠소? 도사라는 그 여인이 바보한테 큰절까지 올리던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오.”
정 대부인이 놀란 눈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손 도사가 걔한테 큰절을 올렸다고요?”
정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못가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렇소. 지난번 우리 집에 왔을 때의 일이오.”
그때?
“왜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손 도사가 왜 그 바보한테 큰절을 올린 거지?
정 대노야도 멈칫했다.
그러게, 손 도사가 왜 그랬을까? 도를 닦았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 깨끗한 척을 하던 사람이 말이야. 절대로 속세에 휘둘리지 않을 것처럼 굴던 손 도사가, 왜 그 바보한테 큰절을 올린 거지?
일 년이 넘도록 정씨 저택에 발도 안 들이던 손 도사가, 왜 그 바보가 돌아오자마자 들렀을까?
정 대노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당신, 일전에 현묘관에 갔었을 때, 손 도사를 만났소?”
정 대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백 관어치 향불을 올리긴 했는데요. 손 관주를 보겠다고 하니까 여도사들 말로는 도사님이 문객을 일절 받지 않는다고······.”
내가 일백 관을 쓰고, 손 도사를 보고 싶다고 무릎을 꿇었을 때도 못 봤어. 그런데 그 바보가 손 도사의 무릎을 꿇렸다니.
도대체 왜?
정 대부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 바보한테 붙은 악귀의 힘이 그렇게 센가? 혹시 손 관주가 바보의 기를 누르지 못하고 악귀의 힘에 굴복한 게 아닐까요?”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정 대부인의 말에 정 대노야가 호통을 쳤다.
“그럼 정신이 말짱한 당신이 이 상황을 설명해 보든가요!”
정 대부인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외쳤다.
방 안은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고, 정 대노야 부부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 참, 둘째 내외는 어젯밤에 정말 거길 갔다고 하오?”
잠시 후, 정 대노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정 대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드디어 정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뭐라고 했다고 하오?”
정 대노야가 물었다.
“남들 모르게 방 안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무슨 괴상한 얘기를 했을지 누가 알아요. 분명 우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했든 상관없어. 이참에 둘째 내외도 혼쭐을 내줘야겠군.”
정 대노야가 말했다.
보통 이런 단순한 구타 사건은 재판이 바로 열리기 어려웠다. 열흘, 보름을 늦춘다고 해도 아무도 재촉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 대노야의 제안 하에, 조 집사의 사건은 그가 자수한 이튿날 바로 재판이 열렸다.
탕탕탕.
수화곤(水火棍: 옛날 관청에서 사용하는 긴 몽둥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당 내에 울려 퍼졌다. 공당 안에 두 줄로 나란히 선 관졸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원고와 피고는 안으로 들라!”
관졸들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도, 속으로 이번 재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건을 고발한 사람이 바로 사람을 때렸던 주범이고, 소환당한 사람이 주범에게 맞아서 다친 피해자이기 때문이었다.
공당에 선 조 집사와 시종 넷은 악의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임구 등 네 명의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조 집사가 그들을 쳐다보면서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바보거나 정신이 나간 놈들이겠지.
주인장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자잘한 구타 사건은 굳이 지부 대인까지 나와 재판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재판장 자리에는 통판(通判)과 절추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지부 대인은 공당 측문에 설치된 후당(後堂) 별실에 자리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고려하여 공당 안에 앉지 않았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지부 대인과 함께 자리하지 않고, 공당 문가에 있는 곁방에 자리했다. 공당과 조금 거리가 있긴 해도, 판결 내용을 듣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곳이었다.
공당에 나온 이들은 각자 예를 올리고, 신분을 확인했다. 절추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통판이 굳은 표정으로 경당목(驚堂木)을 세게 내리쳤다.
“조귀, 경성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하인이 어찌 강주에서 평민 백성을 때려 다치게 한 것이냐! 네 죄를 알렷다!”
통판이 ‘귀덕낭장’ 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는 주씨 가문이 겁도 없이 권력만 믿고 남의 땅에서 횡포를 부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자리에 있던 관원들과 하급 관리들 모두가 언짢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 절추는 통판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당에 앉아 있던 송 지부는 찻잔을 들고 후후 입김을 불며 차를 식혔다.
“이런 작은 사건을 듣는 것도 오랜만인데,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식객이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대인, 증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쪽 방에는 일고여덟 명의 증인이 기다리고 있다던데요? 남정, 북정 사람들이 다 왔다고 합니다.”
증인들까지 온 걸 보면, 당연히 단순한 구타 사건으로 끝날 건이 아니로군. 구타 사건 뒤에 숨은 혼수 사건을 끌어내야 볼 재미가 있어.
“차라리 일찍 끝났으면 좋겠군. 점심때를 놓치지 않게.”
송 지부가 식객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송 지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혼수 사건을 끌어들여? 꿈도 꾸지 말라지. 통판의 말 몇 마디면 끝날 판결이야. 곧 있으면 저들은 모조리 곤봉으로 내쫓겨질 사람들이라고!
감옥에 갇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이라지? 그럼 직성이 풀릴 때까지 가둬 놓으면 되겠네!
잡역부 하나가 다급하게 후당으로 들어와서 조용히 말했다.
“대인, 방청을 원하는 이가 있습니다.”
정씨 가문의 위신을 고려하여 백성의 참관을 막았지만,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집도 안 간 딸이 자신의 혼수를 내놓으라고 집안 어른을 고소하는 일은 강주부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방청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쫓아내거라!”
송 지부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잡역부는 송 지부의 명령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인, 그게 말입니다, 천장각(天章閣) 시강이자 기거주(起居注)를 겸하고 있는 승의랑 진(秦)씨 가문의······.”
잡역부가 손에 쥔 명첩을 다 읽기도 전에, 송 지부가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누구라고?”
송 지부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송 지부의 놀란 목소리가 공당 안까지 전해졌다. 공당에서 재판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놀라, 하던 말을 멈추고 소리가 전해져 오는 측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잡역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통판과 절추를 향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임구, 조금 전에 조귀 등이 자네의 점포에 쳐들어가 막무가내로 사람을 때렸다고 했나?”
통판이 공당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대인. 저놈들이 저한테 점포를 닫으라고 협박한 것도 모자라서 저를 때려서 다치게 했습니다. 여기 제 상처 좀 보십시오.”
임구가 울분에 찬 얼굴로 옷을 들어 올렸다.
통판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절추가 임구에게 물었다.
“임구, 무엇 때문에 자네와 조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인가?”
통판은 냉소를 지으며 절추를 흘겨보았다.
저놈 급한 것 좀 보게. 뒷돈을 얼마나 받았길래 아직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혼수 얘기로 넘어가려고 해?
통판이 헛기침을 하고는 명했다.
“여봐라, 상처를 확인해 보거라.”
통판이 절추를 쳐다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비아냥댔다.
“이 대인, 일단 상처부터 확인합시다. 급할 거 없잖소.”
“지당하신 말씀이오.”
이 절추도 웃으면서 통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조롱이 가득한 통판의 얼굴을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지부 대인은 공당에서 오가는 얘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명첩을 앞뒤로 세 번을 읽었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 시강이 어떻게 강, 강주까지 왔지? 게다가 이 사건을 방청하러?”
송 지부가 물었다.
“진 시강이 직접 온 건 아니고, 여인 몇 명이 왔습니다.”
명첩을 처음 받았을 때, 가짜 명첩이 아닌가 의심했던 잡역부는 송 지부의 반응을 본 뒤에야 이 명첩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명첩을 들고 올 수 있는 아랫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겠지.
송 지부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자, 자네가 보기에는 진씨 가문이 뭣 때문에 온 것 같나?”
송 지부가 식객에게 물었다. 식객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알기론 진 시강은 강주 땅과 아무런 연고도 없습니다. 혹 주씨 가문 때문은 아닐까요?”
송 지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내가 이 안건을 너무 얕본 건가?
“대인, 방청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잡역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송 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 목적을 모른다면 일단 움직임을 지켜봐야지. 방청이 끝나고 누굴 찾아가는지 보면 여기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게야.”
“그럼 이 사건은 예정대로 진행합니까?”
식객이 조용히 물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사건은 단순 구타 사건으로 판결을 끝낼 것이다. 혼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전에 끝나버릴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갑작스럽게 변수가 생겼으니······.
송 지부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대로 진행해야지. 나머지는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결정하면 될 일일세.”
식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역부에게 명첩을 돌려주었다.
이런 귀한 집의 명첩은 아무나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명첩을 확인한 뒤에는 이를 가져온 사람에게 꼭 다시 돌려줘야 했다.
곁방에서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던 정 대노야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공당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 서너 명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심지어 잡역부 한 명이 그 여인들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기까지 했다.
여인들이 관청을 드나드는 건, 지부 대인의 딸을 만나기 위함일 터. 지부 대인의 딸들은 다 뒤쪽 저택에 있을 텐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여인들은 잡역부의 안내를 받으며 다른 쪽 곁방으로 들어갔다.
방청하는 자들이라고?
정 대노야는 몸을 일으켜 문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았다.
왜 우리 집안의 사건을 방청하려는 거지? 그리고 지부 대인은 왜 저 사람들을 안으로 들인 거야?
정 대노야는 갑자기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 대노야는 손 관주가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리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바보에게 붙은 악귀의 힘이 그렇게 센가? 혹시 손 관주가 바보의 기를 누르지 못하고 악귀의 힘에 굴복한 게 아닐까요?
정 대부인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정 대노야는 몸을 살짝 떨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환각과 환청을 떨쳐냈다.
이와 동시에 공당 내에서 경당목이 탁자에 부딪히는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조귀, 변명하지 말거라! 주 낭자가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이상, 그 혼수 역시 정씨 가문의 것이다. 그러니 네 놈은 벌건 대낮에 남의 점포에 쳐들어가 강도질을 한 것이야! 여봐라! 저자를······.”
“잠시만요, 대인. 조귀가 임구 외 몇 사람을 구타한 건 사실이나, 윗전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거잖소. 이는 가히 충효라고 할 만한 행동이지. 게다가 관청으로 와서 먼저 자수를 한 것은 하인의 충의와 도리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딜 봐서 강도질이라는 거요?”
공당 안에서는 드디어 통판 대인과 절추 대인이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공당의 재판에 귀를 기울였다.
두 대인의 의견 대립으로 공당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 대인, 그럼 대인은 저들이 남의 가산을 빼앗는 게 의로운 일이라는 거요?”
통판이 공당 아래에 있는 원고와 피고 대신 이 절추를 보며 말했다. 누가 들어도 그 말에 날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목수 놈이 원체 재물을 탐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어. 그래도 뼛속까지 목수의 천성이 남아 있어 매사 원리원칙을 중시해 다행이었지. 근데 오늘은 아주 얼굴에 철판을 까고 편들고 나서네?
주씨 가문이 도대체 뭘 줬길래 저러는 거지? 자칫하면 자신의 벼슬길이 끊길 수도 있는 사건인데, 왜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돕느냔 말이야!
“통판께서 오해하셨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강탈하는 게 빼앗는 것이지, 원래 자신의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은 빼앗는 것이 아니오.”
이 절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뛰어난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대인! 소인은 본래 아씨의 것인 혼수를 빼앗겨, 정말 어쩔 수 없이 다투게 된 겁니다.”
조귀가 곧바로 외쳤다.
“증인이 있는가?”
이 절추가 물었다. 통판이 경당목을 들어 탁자에 세게 부딪혔다. 그 소리가 조귀의 대답을 덮어 버렸다.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따지는 것도 모자라서, 재산 문제로 부모를 고소하다니. 참으로 악역무도한 일이다! 여봐라!”
통판 대인이 경당목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장 스무 대를 쳐서 내쫓거라!”
두 줄로 서 있던 관졸들이 수화곤을 들고 험상궂은 얼굴로 일제히 조귀에게 다가갔다. 임구 외 몇 사람은 맞아도 싸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귀와 시종들을 비웃었다.
곁방에서 판결을 듣고 있던 정 대노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당 내부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양심도 없는 절추가 주씨 가문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을 상상을 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절추 놈은 평생 돈을 만져본 적도 없었나?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멈춰라.”
공당 내에 절추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인, 부모의 잘못을 따지는 것도 모자라서, 재산 문제로 부모를 고소하는 것이 악역무도하다 하셨소? 그게 사실이 아니면요?”
절추의 말을 들은 통판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통판은 속으로 어리석은 목수 놈을 끊임없이 외쳐댔다.
“어찌하여 아니라는 거요!”
통판이 호통쳤다. 통판이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송 지부와 통판은 동시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인, 아씨께서는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재산 문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씨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위해서입니다.”
관졸들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조귀가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증인을 데려왔습니다! 증인!”
“증인을 들라 하라!”
이 절추가 재빨리 손을 뻗어 경당목을 세게 내리치며 명령했다. 통판 대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빼앗긴 경당목을 쳐다보았다.
저 목수 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네놈이 뭐라고 하든 간에, 어차피 한집 식구들끼리 벌이는 싸움이니,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덮어씌우면 그만이야! 두고 보라고!
통판이 이 절추를 흘겨보고는 소매를 홱 털었다.
증인? 재산 싸움이 아니라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또 뭐야.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정 대노야가 인상을 쓴 채 곁방 밖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관졸이 방에서 여인 한 명을 부르더니 공당 안으로 데려갔다. 여인의 얼굴을 본 정 대노야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곧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대인을 뵈옵니다.”
여인이 공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큰절을 올리고 말했다.
“소인은 정 이부인의 노비로, 이노야와 이부인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관직에 있는 정 이노야는 당연히 공당에 오지 않을 것이고, 이노야 없이 이부인 혼자서 오진 못하니 자연스레 이부인의 여종이 증인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무엇에 대해 증언하겠느냐?”
이 절추는 속으로 한숨을 돌리며 물었다.
천만다행이군. 정말로 증인이 있었어!
“아씨는 자신의 부친인 이노야를 고소하려는 게 아닙니다. 실은 그 누구도 고소할 생각이 없으시죠.”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집에서 수차례 연습했지만, 공당에 증인으로 서는 것은 처음인지라 온몸이 경직되고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긴장한 여종이 말을 더듬긴 했지만, 다행히도 증언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혼, 혼수 때문인데요.”
“혼수가 왜?”
이 절추가 물었다.
“대노야께서 아씨를 혼수도 없이 시집 보내시겠다고 해서······.”
여종이 대답했다. 공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혼수도 없이 자식을 시집보내겠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노야의 여종이 대노야를 지목해서 증언한 사실이었다.
곁방에서 증언을 듣고 있던 정 대노야는 화를 못 이겨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는 게 느껴졌다.
평소 이방 내외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장으로서 남의 시기를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가장 노릇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가족 간의 균형을 맞추고 가문의 영광을 이어 나가는 게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아우가 더 이상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 대노야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리사욕이 고개를 드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에, 정 대노야는 변해 버린 아우의 모습을 나무라는 대신 이해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이해해 주었는데, 너는 왜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정녕 네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실성을 한 게야?
얼굴에 핏기가 가신 정 대노야는 문틀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고 싶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고 싶기도 했다.
정 이노야가 정교랑을 찾아간 사실도 알고 있었고, 거기서 좋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뒷담화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뼈를 부러뜨린다 해도 근육은 이어져 있을 테니, 험담을 나눈다고 한들 자신과 아우의 사이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뒷담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칼을 휘두를 줄이야.
아우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 대노야는 공당에서 오가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울릴 뿐이었다. 정 대노야는 제 힘으로 서 있기도 힘에 부쳐 문틀에 기대어야만 했다.
주씨 가문이 도대체 뭘 했길래, 얼마나 잘 해줬길래, 이방 내외가 나한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미쳤구나, 다 미쳤어!
정 대노야는 주먹을 꽉 쥐고 문틀을 세게 쳤다. 핏기 없이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좀 전의 환각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번에는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리는 손 관주의 옆에 두 사람이 더 늘어났다. 바로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이었다.
악귀가 사람을 홀리나? 그 바보가.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사람처럼 무지한 여인네들이나 하는 생각이거늘!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공당 안에서 진행되는 문답 소리가 차차 정 대노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혼수를 안 준다고? 그 혼수는 정 낭자의 모친이 남겨둔 거고?”
“예, 그렇습니다. 그건 정 아씨의 모친께서 남겨 주신 혼수입니다.”
“대인,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 아씨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모친의 명예 때문에 나서신 겁니다. 이대로 혼수도 없이 시집을 가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모친 없는 저희 아씨를 얼마나 비웃고 조롱하겠습니까.”
공당 안은 좀 전과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통판 대인은 아예 입을 다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구타 사건의 피해자로 왔던 임구 등도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그저 가만히 서서 이 절추와 조귀, 그리고 여종의 문답을 듣고만 있었다.
결국 혼수 얘기가 나왔군.
공당의 상황을 듣고 있던 송 지부도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 절추의 결심을 얕잡아봤어.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통판도 저리 비아냥댔는데, 고군분투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해 내다니.
저 목수 놈, 제대로 미쳤군!
“모친을 위해 혼수를 달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혼수를 주지 않는 것도 그 아이의 모친을 위해서라면 어떻소?”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당 안에 울려 퍼졌다.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정 대노야가 결국 공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 지부도 자세를 고쳐앉고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공당 안으로 들어서는 정 대노야를 본 이 절추가 굳은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누구시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공당에······.”
“이 대인! 적당히 좀 하시오!”
이 절추의 모습을 보다 못한 통판이 소리쳤다.
“원리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 절추가 정중하게 말했다. 통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시 뭐라고 하려던 찰나, 정 대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인께 아뢰옵니다.”
정 대노야가 공수의 예를 표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생 정남(程楠), 선조의 은덕으로 희평(熙平) 8년에 봉작을 받았습니다.”
통판이 이 절추를 흘겨보고는 정 대노야를 향해 손을 내밀며 예를 표했다.
“정 노야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거라.”
통판의 행동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절추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통판과 정 대노야의 언짢은 눈빛을 못 본 척 했다.
정 대노야는 관졸이 가지고 온 낮은 의자에 앉았다. 공당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부인의 여종은 고개를 떨구고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오늘처럼 형제지간의 싸움을 공당까지 끌고 온 건, 정씨 가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 대노야는 바닥에 얼어 있는 여종을 쳐다보지 않았고, 공당에 서 있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리 교랑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바보였고, 사리 분별도 하지 못했소. 그런 아이가 시집을 갈 수 있겠소?”
당연히 못 가지. 바보를 원하는 신랑이 어디 있겠나.
“정 노야, 아씨께서는 다 나으셨습니다.”
조귀가 말했다.
“다 나았다고?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바보라는 병이 나을 수 있는 병인지는 일단 차치합시다. 여기, 예전에 바보였던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소이까? 여러분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생각해 보시오.”
정 대노야가 공당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물었다.
당연히 없겠지.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중에 아이까지 바보를 낳으면 어쩌려고.
“대노야, 그런 식으로 물어보시면 너무······.”
통판 대인이 경당목을 두드리면서 조귀의 말을 끊었다.
“공당에서는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하느니라!”
통판 대인이 이 절추를 흘겨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원리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 절추는 말없이 통판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통판의 눈에는 그의 표정이 몹시 어색해 보였다.
꼴 좋다!
통판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정 대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 노야,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혼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판이 물었다. 정 대노야는 말을 잇는 대신, 옷소매 속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대인, 이걸 한 번 보시지요.”
저게 뭐야?
관졸 하나가 정 대노야의 손에 있던 문서를 받아와 통판에게 전달했다. 문서를 펼치자마자 통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흥분한 것 같기도,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바로 교랑의 모친이 남긴 혼수 목록입니다. 대인 두 분께서 살펴 주십시오.”
이어서 정 대노야는 사람들에게도 손짓했다.
“모두 한 번 돌려보시구려.”
모두 돌려보라고?
공당에 있던 이들은 문서의 내용을 궁금해하면서도, 서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정씨 가문이 부자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주씨 가문 낭자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도 만만치 않았다고 소문이 난 터였다. 하지만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 이상, 주씨 가문 낭자가 가지고 왔던 혼수 목록에 대해서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며 문서를 구경하고자 했다.
통판 대인은 문서를 눈에 넣을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이 절추가 문서를 빼앗다시피 하여 가져왔다. 하지만 통판 대인의 반응과는 달리, 이 절추는 문서를 대충 훑어보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옆에 있던 관리에게 문서를 건넸다.
저 목수 놈, 놀란 척도 안 하네? 연기 한번 끝내주는군!
통판 대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문서를 돌려 보던 사람들은 이 절추만큼 연기가 매끄럽지 못했다. 문서가 다음 사람의 손으로 전해질수록, 엄숙했던 공당은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놀라서 감탄하는 이도 있었고 조용히 웅성대는 이들도 있었다. 문서를 보고 감탄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표정에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번쩍이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엔 금은보화로 만든 거대한 산을 봤을 때처럼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이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탐욕이었다.
사람들의 모든 반응을 눈에 담은 정 대노야는 무표정한 채로 묵묵히 서 있었다.
후당에서 몸을 일으켜 문가에 서 있던 송 지부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공당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청나다. 돈이 진짜 많아.”
“게다가 저건 몇 년 전이니까, 지금 시세로 농토와 점포를 환산해 봐.”
“일 년에 최소 오만 관은 족히 벌겠지?”
일 년! 오만 관!
송 지부의 눈도 번쩍 뜨였다.
역시 엄청난 부자였어!
정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정도 혼수라면, 바보와 혼례를 올릴 의향이 있소이까?”
정 대노야는 손을 들면서 좀 전과 같은 질문을 했다.
문서를 들고 있던 관졸이 아쉬워하면서 혼수 목록 문서를 정 대노야에게 다시 돌려줬다.
공당 안 분위기는 정 대노야가 좀 전에 같은 질문을 할 때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저 혼수들만 있다면, 바보는 무슨, 죽은 사람이랑도 혼례를 올릴 수 있지!
물론 저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정 대노야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보이지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정 대노야가 문서를 다시 소매 안으로 넣으면서 말했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지. 이 정도 혼수가 있는데도 우리 교랑이 시집갈 곳 하나 없겠소? 전혀 그렇지 않소.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소? 바로 이 돈 아니겠소이까!”
정 대노야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정 대노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돈을 위해서 우리 가문의 여식과 혼례를 올릴 수도 있단 말이오. 요즘은 혼수가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우리 가문의 여식은 다른 여인들과 다르잖소.”
정 대노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우리 가문의 여식은 바보요. 병이 있어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혼자서는 생활도 할 수 없소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혼수만 보고 혼례를 올리려는 집안에 마음 편히 보낼 수 있겠소이까? 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겠느냔 말이외다!”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정 대노야의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된 건 우리 정씨 가문의 몫이오. 도망칠 수도 없고, 떨쳐낼 수도 없는 운명이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정 대노야가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다른 이라면 어떻겠소이까? 혼수만 보고 교랑을 데려가면?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란 말도 있소이다. 얼마간은 우리가 시집간 저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보호해 줄 순 없는 노릇이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시구려. 이런데도 내가 혼수를 공개할 수 있겠소? 이런데도 그 아이가 시집갈 때 이 혼수들을 줄 수 있겠소이까? 그건 그 아이에게 해가 될 뿐이오. 죽으라는 게지! 내가 뭐 때문에 이러겠소? 이게 다 혼수를 노리지 않고, 우리 가문의 여식을 오직 진심으로 대해 줄 집안을 찾기 위함이오!”
정 대노야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이것도 잘못이라 할 수 있소이까?”
정 대노야는 목소리를 더 크게 해서 외쳤다.
“이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이게, 무슨 잘못이야!”
공당에 있던 사람들은 귀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맞아,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 잘못한 게 없는데.
어린아이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이 없다지만, 돈을 한 아름 품고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도록 둔다면 그건 부모의 잘못이지!
정 대노야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조귀와 시종들의 당황한 표정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고는 드디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내가 괜히 네놈들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아는 것이냐? 먹은 소금도, 밥도 네놈들보다 훨씬 많아! 이 애송이들아, 정신 차려라!
하지만 정 대노야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는 이긴 것도 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공당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었다.
그 대단한 정씨 가문의 가장이 손아랫사람인 조카 때문에 공당에 선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데, 혼수 목록까지 공개하게 됐으니, 이는 가히 가문의 망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재물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천고의 진리거늘. 내가 내 입으로 가산을 만천하에 떠벌린 셈이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재물을 탐낼는지!
정 대노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 녀석! 집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다!
정 대노야는 악에 받친 눈빛으로 공당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인! 소생에게 죄가 있습니까?”
통판과 절추가 정신을 차리고 정 대노야를 내려다보았다.
“없습니다.”
통판이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통판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다시 한번 자신의 말을 되뇌었다. 통판이 퇴정을 알리기 위해 경당목을 내리치고자 손을 높이 들었다.
“잠시만요!”
조귀가 외쳤다.
조귀의 목소리에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숨이 턱 막혔고, 이 절추는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쫓거라!”
통판은 조귀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아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통판이 눈썹을 치켜뜨고 손에 쥔 경당목을 내리쳤다.
“퇴······.”
이때, 이 절추가 필사적으로 경당목 아래로 손을 뻗어 경당목이 울리지 않도록 막았다. 통판이 내리친 경당목에 손등이 찍힌 이 절추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다급하게 조귀를 향해 물었다.
“불복하는 게 있는가?”
찍힌 손등이 너무 아팠던 나머지, 이 절추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퇴정을 알리려는 통판의 목소리를 덮었다.
이 절추의 일그러진 표정과 목소리만 봐서는, 조귀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절추가 무슨 의도로 조귀에게 질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대인, 지금은 구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닙니까?”
조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우리가 구타 사건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있나? 한데 당신들이 진정으로 원한 건 혼수 사건에 대한 판결이잖아?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통판과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판결을 질질 끌겠다는 게지?
“지금은 혼수에 대해 말하고 있네. 그러니 조귀, 자네가 한 말은 의미가 없어. 더 할 말이 남았는가?”
이 절추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조귀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대인, 그렇다면 판결을 내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통판이 경당목을 세게 내리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조귀, 네놈이 그래도 불복한다는 게냐!”
“대인, 혼수 사건에 대해서는 소인이 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구타 사건은 소인이 주범이니, 대인께서 무슨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혼수 사건은 소인이 고소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저희 아씨께서 고소장을 올린 것이지요. 사건의 원고가 아직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피고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시겠다는 겁니까?”
조귀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엉? 이게 무슨 말이야?
“대인, 만약 혼수 사건에 대해 판결하시려는 거라면, 저희 아씨를 모셔오겠습니다.”
조귀가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대노야를 비롯한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조귀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이 정말로 여길 왔다고?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해서는 안 돼!
무언가 결심한 통판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혼수는 가산이니, 가문 내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일세! 이 사건은 이대로 마무리 짓고, 다시는 혼수에 대해 언급하지 말게!”
통판이 경당목을 향해 손을 뻗던 찰나에, 통판보다 한발 빨랐던 이 절추가 경당목을 쥐고 세게 내리쳤다.
탁!
“여봐라! 원고 정씨를 들이거라!”
이 절추가 통판에게 뒤지지 않는 기세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쳤다.
드디어 때가 왔어!
공당 옆쪽에 앉아 있던 반근이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근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공당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는 정교랑의 당부를 떠올리며 간신히 참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근 낭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되니까, 겁먹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하면 돼요.”
반근과 함께 관청으로 온 남정 여인들이 자신들도 겪어 본 일이라는 투로 반근을 다독였다. 하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건네는 그녀들의 말은 반근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남정 사람들에게 관리를 대면하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악역무도한 사건이었다.
반근이 여인들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했는데, 반근 낭자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네.”
“주씨 가문의 사람이라잖아. 주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여인들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반근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아씨, 소인은 아씨가 죽으라고 명하셔도 기꺼이 따를 거예요.
하지만 아씨는 절대로 자신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아. 아씨의 사람이라면 뭐든 뜻대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아씨는, 오직 아씨를 죽이려는 사람들만 죽음으로 내몰 뿐이야.
“노비 반근, 대인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어린 몸종을 보자 안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긴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작 열댓 살짜리 어린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저런 아이라면 늙은 여우 같은 정 대노야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지. 나더러 저 주둥이를 막으래도 막을 수 있겠는걸.
통판은 자세를 바로 했고, 이 절추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정 낭자의 측근이 나이 지긋한 여종이 아니라 저렇게 어린 몸종이었어? 저 영리한 조귀처럼, 정 낭자의 시중을 드는 어멈들도 꽤 쓸 만했을 텐데. 어쩌다가 저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를 보낸 거야?
정 대노야는 반근을 보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저런 몸종을 보내다니. 주씨 가문이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한들, 그저 어린 계집일 뿐이야.
정 대노야는 더 이상 입을 열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통판 선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너희 아씨가 집안의 어른을 고소하여 혼수를 찾으려는 것이 사실이더냐?”
이 절추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힘이 빠진 이 절추의 목소리에서 좀 전과는 다르게 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반근이 대답했다.
“그럼 돌아가서 네 아씨에게 알리거라. 가문도 있고 친족도 있으니, 집안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게다가 재산 문제로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일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이니, 터무니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아씨를 불경죄로 다스리겠노라!”
통판이 호통을 치면서 경당목을 쥐었다.
“퇴······.”
“대인, 저희 아씨께서는 재물 때문에 이 재판을 하고자 하시는 게 아니에요.”
반근이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씨께서 정 대노야를 고소한 것은 아씨의 모친인 주씨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반근이 정 대노야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대노야께서는 저희 아씨가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혼수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면 저희 아씨께서는 무사할지 모르겠지만, 저희 부인의 억울함은 어찌합니까?”
부인?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해했다.
이게 그 죽은 주씨 부인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통판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순간 경당목을 쥐고 있던 통판의 손이 주춤했고, 퇴정을 알리려던 통판의 호통도 잠시 멈췄다.
공당 아래 서 있던 반근의 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부인께서는 아씨와 함께인 단란한 가족생활을 얼마 즐기지도 못하시고 일찍 별세하셨습니다. 그런 부인께서 저희 아씨께 유일하게 남겨주신 것이, 바로 그 혼수고요.”
말을 하던 반근의 마음이 점점 아려왔다.
정교랑이 담담하고 감정 없는 말투로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만 해도, 반근은 별생각이 없었다. 당시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아씨의 말을 외우기도 벅찼기에 감정의 동요 또한 없었다.
반근은 자신의 양쪽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관졸들을 훑어보았다. 또 공당 정중앙에 걸린, ‘명경고현(明鏡高顯: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판결이 공정함을 일컫는 말)’이라 쓰인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관포를 입고 있는 관리들과 자신의 주위에 꿇어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순간 반근은 자신과 정교랑이 병주 도관에서 숨죽이고 살던 시절이 떠올랐고, 이노야 식구들이 말도 없이 병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다. 병주 도관에 번개가 내리쳤던 그 밤과 병주에서 강주까지 힘들게 왔던 천 리 길의 여정도 떠올랐다. 정교랑이 집에서 쫓겨나 소현묘관에서 지낼 때 마주쳤다던 음란한 남녀의 소름 끼치는 눈빛까지도.
정교랑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에는 고난과 역경이 가득했다. 그 고난과 역경은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겪어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아씨는 그 많은 고난과 역경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셨어. 끝도 없는 고난과 역경들을 견뎌내셨다고.
왜? 왜 우리 아씨만 그런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하는 건데?
만약 부인께서 살아계셨다면, 아씨께서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셨을까?
“비록 아씨를 직접 키우지는 못했지만, 부인께서는 유산으로나마 딸과 함께하고자 하셨을 거예요.”
만약 부인께서 살아 계셔서, 아씨가 다 나은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런데 대노야는 아씨를 위한 혼례를 올리겠다는 미명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이셨죠. 모녀의 정을 끊고, 자식을 사랑하는 주씨 부인의 마음을 욕보인 것. 이것이야말로 천륜을 어기는 대죄이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근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아가며,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했다.
절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호소하는 데는 나이든 어멈들보다 저런 어린아이가 더 효과적이긴 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소녀의 눈물만으로 동요할 사람들이 아니야. 온갖 참혹한 사건과 억울한 사건들을 다뤄왔기 때문에, 서럽게 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지는 않아. 더군다나 오늘 같은 사건은 더더욱 판결을 뒤집기 힘들지. 이런 사건은 사정보다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법이거든.
절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곁눈질만으로도 통판이 냉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저희 아씨는 모친께서 남겨주신 혼수의 값어치가 얼마가 됐든,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아씨께서 쟁취하시려는 것은 재물이나 점포, 농토와 금은보화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의 명예입니다. 남들처럼 아씨를 아껴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부인께서 아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지켜내기 위함이죠! 그 혼수는 주씨 부인께서 정정당당하게 아씨께 물려주는 유산이니, 그 누구도, 어떤 명목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공당 안에 반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반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통판 대인과 절추 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갔다.
“저희 아씨는 기필코 이 재판을 진행해야만 하고,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정씨 가문에서는 결코 아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아씨께서는 오직 관부의 올바른 판결만을 바라고 계세요. 이 재판을 십 년, 이십 년, 아니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한다고 해도! 아씨가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해도! 이 재판만은 꼭 진행해야겠다고 말씀하세요. 대인, 부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결코 부인께 억울한 오명을 씌워서는 아니 됩니다!”
반근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절추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이와 동시에, 통판도 자세를 고쳐 앉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근을 쳐다보았다.
정 대노야도 반근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절추나 통판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대신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참으로 맹랑하구나!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게야. 이게 어딜 봐서 제 어미를 욕보이는 일이라는 게냐?”
정 대노야는 투덜거리며 통판에게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판결을 끝내라는 눈짓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던 그는 공당에 있던 관리들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통판 대인의 표정이 왜 저러지?
정 대노야는 공당 안의 모든 관리를 훑어본 뒤, 다시 통판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정 대노야는 좀 전에 반근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방금 저 말에, 뭐 잘못된 게 있었나? 아니, 저 몸종이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어. 지극히 옳은 말이었지!
공당에 있던 모든 관리와 관졸들이 속으로 외쳤다.
정 대노야가 했던 말들은 번개가 잠시 번쩍이는 느낌이었다면, 저 여린 몸종이 한 말은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사실 관리들은 처음에 반근이 울먹이면서 했던 많은 말들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하지만 반근이 마지막에 했던 말은 똑똑히 들었다.
재물도, 혼수도 필요 없고, 바라는 것은 오직 명예뿐이다.
꼭 이 재판을 해야만 한다. 한평생을 바쳐서라도! 한평생을!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에 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돈 때문이다.
형제끼리 가산 문제로 관청에서 재판을 하게 되면, 가산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게 된다. 재판이란 말다툼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기에, 관청에 발을 들이는 건 쉽지만 나가는 것은 지독히도 어려웠다.
특히나 사람 목숨이 달린 게 아닌, 단순히 재산에 대한 재판이라면 관리부터 관졸들까지 꼭 한 다리씩 걸쳐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에게 이득을 내어주는 재판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진행할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까지 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바보가 나타나다니! 더군다나 가산은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명예만을 바라는 바보가!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명예를 우선시하고, 재물을 등한시하는 이런 재판이었다.
이게 뭘 뜻하는 거냐고?
사람들은 반근이 한 말의 속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관리들은 더 이상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절추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쩐지 저 목수 놈이 체면도 내팽개치고 이 재판을 강행한다 싶었어!
생각을 해 봐, 생각을! 좀 전에 다들 돌려봤던 그 혼수 목록을 떠올려 보라고!
금은으로 만든 거대한 산을 눈앞에 던져다 주면, 누군들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겠어? 여기서 한 몫을 따내면 반평생은 족히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상대가 누군지를 고민할 겨를이 어디 있어!
강주의 명문가든, 정씨 가문의 대노야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우리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저들이 제 발로 관청까지 찾아와 고소장을 올린 사건이라고. 우리는 원리원칙대로 일하는 것뿐이니, 정정당당하고 떳떳해! 우리가 겁낼 게 뭐 있어!
조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눈빛들을 보자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조귀는 자수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과 걱정을 마침내 씻어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아씨가 꼭 이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던 거군. 주 노야도 돈이 아까워서 끝내 재판을 진행하지 않았는데. 아씨는 애초부터 이 재판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거야.
욕심이 없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처럼, 이길 생각이 없어야 지는 것이 두렵지 않지.
조귀는 정교랑이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정 사람들에게 집 짓는 돈으로 일만 관을 내어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인색하지 않은 게 뭐냐고?
한 개, 두 개, 세 개 정도가 아니라 일만 관 어치의 재산을 생판 남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인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동에 옮기기는커녕, 고려해 볼 사람조차 없을 것이야!
생판 남에게는 주기 아까우니까!
내가 그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만, 상대방도 그 재물을 얻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제 것을 다 내어준다는데, 욕심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정말 지독하군!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조 집사의 귓가에 정교랑의 담담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후당에서 밖으로 나가려던 송 지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휘장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거두었다.
어쩐지, 어쩐지. 이게 어딜 봐서 재판하려고 온 거야? 돈지랄을 하러 온 것이지!
이렇게 된 일이었군, 이렇게 된 일이었어!
정 대노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후당에 언뜻 보이던 옷자락이 다시 안으로 거둬지는 것과 통판이 경당목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주위 관리들의 굶주린 늑대 같은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부 대인을 찾아간 것도 나고, 공당까지 온 사람도 나야. 게다가 심혈을 기울여 열변을 토한 것도 난데!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저들은 말 한마디로, 고작 말 한마디로 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냐는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모든 노력은 남들 좋은 일을 위한 밑밥이었어.
단순 구타 사건을 이렇게 빨리 재판할 필요도 없었어. 열흘, 보름이 넘게 끌어도 됐는데, 내가 뭐에 홀려서 이렇게 빨리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지?
아니, 아니야. 난 뭐에 홀린 게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 바보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 바보가 날 공당까지 올 수밖에 없게 만들고, 혼수 목록을 꺼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우리 가문의 재산을 남들 앞에 공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야!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돈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지.
만약 저들이 가산의 규모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 계집의 궤변을 들었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달라!
우리 집안의 가산은 더 이상 모호한 수치가 아니야. 좀 전에 혼수 목록을 봤던 사람들은, 속으로 구체적인 계산을 했겠지.
내가 내 손으로 먹잇감을 자처했어. 발가벗은 채로 저 굶주린 늑대들 앞에서 뜯어 먹히길 자처한 꼴이 됐다고! 그런데 그 바보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심지어 공당에도 나오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다니!
그 애가 할 일은 딱 한 가지야.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 두면, 손을 내밀어 저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여러분, 근사한 연회를 마련했는데, 한번 즐겨 보시겠어요?
저 고약하고 악독한 것이!
정 대노야는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반근을 가리키다가 옆에 있던 조 집사를 가리켰다.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던 이부인의 여종을,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사건을 진행하려는 통판을, 후당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부 대인을, 그리고 공당에 나오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 바보와 주씨 가문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고약하고 악독하도다!
입을 열고 소리치려던 찰나, 정 대노야의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는 말 대신 울컥 피를 토했다.
공당 안에 여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 대노야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뭐라고 묻는 것 같았지만, 순간 시야가 흐려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팍의 옷섶을 꽉 움켜쥐면서 뒤로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정 대노야를 본 조귀는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또 한 놈이······.
조귀가 속으로 말했다.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정씨 저택의 적막을 깼다.
정 이부인은 정 대부인이 날린 따귀를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정 대부인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은 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패가망신시키는 네년을 내 손으로 죽여주마!”
정 대부인이 정 이부인 위로 올라타 울부짖으면서 정 이부인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정 이부인은 정 대부인의 손을 막으면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성을 잃은 정 대부인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꼼짝없이 바닥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마당에 있던 여종들도 합세했다. 물론 처음에는 여종들도 두 부인의 싸움을 말리기 바빴다. 하지만 정 이부인의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의 여종들은 그만 눈이 뒤집혀 윗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정 대부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본 정 대부인의 여종들도 화들짝 놀라 정 이부인의 여종들에게 달려드는 통에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정칠랑은 정 이노야가 집으로 오면서 특별히 사다 준 토기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있던 정칠랑은 아수라장이 된 마당을 보고는 잔뜩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공포에 질린 정칠랑은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 순간, 정칠랑이 안고 있던 토기 인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정 대노야의 마당에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대청 안으로 하나둘 모여든 의원들은 조용히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청의 다른 쪽에는 집안의 모든 자녀가 모여 앉아 있었다. 정 대부인은 축 늘어진 채 여종의 품에 기대 누워 있었다. 방금 전 정 이부인과 머리채를 잡고 싸운 통에, 머리카락이며 옷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 대부인은 정리해 주려는 여종들의 손길도 거부했다.
“조금 이따가 내가 노야와 같이 죽거든, 입관할 때 정리해 다오. 괜히 지금 헛수고하지 말고.”
정 대부인의 말에 여종과 자녀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는 대청 문밖에서도 울려 퍼졌다.
“어머니, 소자는 그런 적 없습니다. 소자는 형님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정 이노야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정 이노야는 노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이마를 수차례 땅에 찧으며 외쳤다.
“소자는 몰랐습니다. 정말로 부인이 그런 짓을 했을 줄 몰랐습니다!”
창백한 안색의 노부인이 정 이노야의 손을 홱 뿌리쳤다.
“천 번, 만 번을 막아도 집 안에 있는 도둑은 못 막는다더니! 우리 정씨 가문은 바로 네놈의 손에 망한 것이야!”
노부인이 손으로 가슴팍을 치면서 소리쳤다. 그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정 이노야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제 속이 시원하더냐? 이제 만족하냐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정 이노야는 노부인이 휘두른 지팡이에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억울합니다. 무슨 만족을 한단 말입니까!
분가한 것도 아닌데, 이런 사건에 휘말려서 제가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재판에 쓰이는 가산은 곧 제 가산이나 다름없는걸요. 저도 그 돈이 아까워 죽겠단 말입니다!
아, 아니지.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파 죽겠다고요! 더구나 저는 관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에 휘말리면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증언으로 친형을 분통 터지게 한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힌다고요!
아이고, 억울해 죽겠네!
정 이노야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대성통곡했다.
“대노야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방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부인은 정 이노야를 때리다 말고 지팡이를 던져 버린 후, 여종들의 부축도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들아!”
정 대노야의 방 안에는 의원들의 당부에 따라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정 대부인은 침상에 엎어진 채 우느라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노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정 대부인을 다독였다.
“어서 뚝 그치거라. 네가 울면 큰애도 마음이 안 좋을 것이야.”
노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하고는 눈물을 참으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얘야, 몸은 좀 괜찮니?”
정 대노야의 안색은 잿빛에 가까웠고 눈빛은 혼탁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듯, 천천히 눈동자만 움직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정 대부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형님, 형님.”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정 이노야가 외쳤다. 그의 눈빛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해 있었다.
형님, 절대로 죽으면 안 됩니다. 형님이 죽으면, 내 관직 생활도 여기서 끝이라고요!
정 이노야의 목소리를 듣자, 정 대노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정 대노야는 입을 벌린 채 아아아 소리만 낼 뿐,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갑작스럽게 힘을 쓰는 통에 숨이 막히면서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형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났지? 안달이?”
정 대부인이 울면서 정 이노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형님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형님이 죽어서 내게 득이 될 게 뭐 있다고!
정 이노야는 울음을 터트린 채 바닥에 엎드려서 정 대부인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다.
잠시 뒤, 숨을 고른 정 대노야의 혈색이 돌아왔다. 정 대부인은 문가에서 정 이노야를 때리고 욕하면서 가라고 외쳤다.
“일단 내보내지 마시오.”
정 대노야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쥐고 울먹였다.
“여보, 지금 보면 밉기도 하고 화도 나니까, 몸이 좀 좋아진 뒤에 다시 얘기해요. 오늘은 일단 동생한테 화내지 말아요. 저런 사람 때문에, 화낼 가치도 없어요!”
노부인도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비록 모두 같은 피붙이라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둘째의 잘못이야.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당장 족보에서 둘째의 이름을 뺀다고 해도 큰애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큰애가 관청에 가서 입만 뻥끗해도, 둘째는 벼슬길이 끊기겠지.
그런데 둘째의 벼슬길을 끊는다고 해서 우리 정씨 가문에 좋을 게 있나? 하지만 둘째를 혼내지 않으면, 큰애는 정씨 가문 가장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받을 거야.
노부인은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충효를 강조하고 형제 자매간의 우애가 끈끈하다고 소문난 정씨 가문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집안 문제로 관청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청렴결백한 정씨 가문이 남도 아니고 자식한테 고소를 당하다니!
관졸들이 정 대노야를 집으로 모셔오고 있으며 이 일이 온 동네에 구경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노부인은 너무 창피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정씨 가문이었다. 가난할 때도 있고 부유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 망신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우선 저놈부터 때려 죽어라! 그리고 나도 저놈을 따라 죽어 버려야겠다! 창피해서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없어!”
노부인이 침상 위로 엎어지면서 울부짖었다. 방 안은 또다시 난리가 났다.
“아직도 여기 있어요? 형님이 숨을 거두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이러시나?”
정 대부인은 울면서 정 이노야를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했다.
“아우한테 잠시만······.”
정 대노야가 쉰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 대부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노야, 지금은 저 사람과 상종할 때가 아니에요. 몸이 좀 좋아진 뒤에 벌해도 늦지 않아요.”
정 대부인의 말에 정 대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정 대노야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정 대부인과 여종들이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가 공당에서 혼절해 들것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정 대노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혈색 좋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던 부잣집 노야는 반나절 만에 고된 농사일로 야윈 농부가 된 것 같았다.
형님이 자신에게 잘 대해 주던 시절을 떠올리던 정 이노야는 몹시 마음이 아파 왔다.
“형님, 형님.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 이노야가 울면서 무릎을 꿇은 채로 침상 근처까지 기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와서 잘못을 뉘우쳐 봤자, 이미 늦었어!”
정 대부인이 서럽게 울면서 외쳤다. 정 대노야가 손을 들어 부인을 제지하고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증언하고자 한 게 너희의 생각이었느냐? 아니면 그들의 생각이었느냐?”
정 대노야가 쉰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야, 노야.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의원이 흥분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정 대부인이 울면서 말했다. 정 대노야는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정 이노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그 바보가 우리더러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형님, 형님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 애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도 속은 거예요!”
정 이노야가 엎드린 채 울먹였다.
“그 애한테 속았다고?”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들고 정 이노야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꼬았다.
“그 바보한테 속았다고요? 지금 누굴 바보로 알아?”
“그만하시오.”
정 대노야가 손을 들고는 정 대부인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애가 어딜 봐서 바보요? 바보는 그 애가 아니라 우리야. 인제 그만 인정합시다. 그 아이가 정말로 바보였다면, 주씨 가문에서 그리 심혈을 기울였을 리가 없소. 질척이는 진흙은 벽을 바를 수 없어. 좋은 찰흙만이 담벼락을 지탱할 수 있지.”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소상히 얘기해 보거라. 도대체 그 애가 뭐라고 하더냐?”
정 이노야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부인이 그 바보에게 현혹되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정 이노야는 대노야에게 정교랑을 찾아갔던 날의 일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정 대부인은 정 이노야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그게 다예요? 걔가 혼례를 올리기 싫다고 해서, 증언을 해 주기로 했다고? 이노야, 두 사람은 우리가 아주 봉으로 보이나 봐요?”
“형수님, 진짜입니다! 우리, 우리는 정말로 그 애한테 속은 거라니까요. 우리는 그, 그저 그 애가 또 소란을 피울까 봐 그런 겁니다. 소란을 피우면, 우리 집에도, 형, 형님에게도 안 좋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증언하기로 한 거라고요.”
정 이노야가 다급하게 변명했지만, 정 대부인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정 대부인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정 대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부인이 진씨 가문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지? 만나서 무슨 얘길 했다더냐?”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저도 잘······. 듣기로는 아주 좋은 혼담이 있다고······.”
정 이노야는 확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네 안사람을 데려오거라. 내가 직접 묻겠다.”
정 대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이 남편을 말리면서 울먹였다.
“노야, 일단 지금은 속 썩이지 말고, 좀 쉬세요. 그런 여편네는 우리 정씨 가문에서 쫓아내야 해요!”
정 대부인이 여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그년을 내쫓거라! 당장!”
여종들은 정 대부인의 명령을 듣고도 제자리에 서서 정 대노야의 눈치를 살폈다.
“내쫓고 싶어도, 일단은 정확한 사정을 듣고 내쫓으시오. 이리로 데려오너라.”
정 대노야가 여종들에게 손짓하자, 여종들은 그제야 알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야기를 하느라 기력을 다 썼는지, 정 대노야가 침상 위로 픽 쓰러졌다. 정 대노야가 쓰러지는 바람에 방 안에는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정 이노야는 차마 정 대노야 옆으로 가지는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정 대노야를 애타게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여종들이 돌아왔지만 정 이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오겠다고 하디?”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그년이 죽어도 오기 싫다고 해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거라!”
“그게 아니고요. 이부인께서 도망가셨습니다.”
여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넋이 나갔다.
“도망을 쳐? 어디로? 친정으로 도망친 게야? 그럼 잘됐네. 다신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해라!”
정 대부인이 괘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남정에 있는 정 아씨 집으로 가셨다고······.”
여종이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정 대부인이 옆에 있던 탁자를 손으로 엎으며 외쳤다.
“좋아. 이참에 둘 다 밧줄에 묶어서 여기로 데려와!”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말도 하기 전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정 대노야는 새빨개진 얼굴로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정 대부인이 대노야의 등을 토닥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노야, 노야.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죽게 되더라도, 꼭 그것들을 먼저 때려죽이고 가겠어요! 이렇게나 도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것들을, 가만두는 게 더 큰 잘못이에요!”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의 소매를 꽉 쥐며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아니오, 아니 되오.”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면서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때려죽이면 아니 되오. 때려죽여선 아니 돼. 이제는 그 애를 밧줄에 묶어서는 아니 되오. 우리 가문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 애한테 있단 말이오!”
그 애?
정 대부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한 얼굴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 이노야가 울음을 멈추고 정 대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애한테? 그럼, 부인이 그쪽으로 간 게 잘한 일인가?
“가서, 모셔 오너라.”
정 대노야는 이 짧은 한마디를 온 힘을 다해 말했다.
가서, 모셔 오너라!
모셔 오라니!
정 대노야는 울분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당연히 나 자신의 뜻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가야 할 때가 되면 내 발로 알아서 나갈 테니. 그리고, 내가 이 집에 거저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 대노야의 귓가에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아이를 이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해서, 그 대가를 치르는 건가?
남정은 모든 게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남정 골목에 들어온 여종들의 표정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예전의 도도한 표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의 거처 대문 앞에서 걸음이 막힌 여종들은 이제 자세를 낮추며 아첨의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번거롭겠지만, 아씨를 뵐 수 있는지 물어봐 줄래?”
“아씨께서는 집에 안 계세요.”
눈앞에 서 있던 아이들이 콧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집에 없다고?
여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멀리서 들리기도, 가까이서 들리기도 했다.
정칠랑은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저 시끄러운 말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거기에 남정 동네 특유의 시궁창 냄새까지. 정칠랑은 모든 것이 끔찍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정칠랑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구석으로 바짝 웅크렸다. 그러자 좀 전부터 들리던 사각사각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칠랑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벽 위에 벌레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기어가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은 정칠랑이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별안간 낮에 큰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 모습까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정칠랑이 비명을 지르고는 문 앞으로 기어갔다.
“칠랑, 칠랑. 왜 그러니?”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정칠랑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어머니, 어머니. 저 여기 있기 싫어요. 여기는 너무 끔찍해요. 벌레도 있단 말이에요.”
정칠랑이 울면서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괜찮아, 괜찮아. 이 어미가 죽여 줄게!”
정 이부인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아무렇게나 벽을 몇 번 때리며 정칠랑을 위로했다. 정칠랑은 정 이부인이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두 모녀가 방석 위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 우리 여기서 안 살면 안 돼요? 여긴 너무 낡았어요.”
정 이부인의 품에 안긴 정칠랑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 이부인이 방을 둘러보았다.
거칠고 조잡한 재료로 지은 집인 데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낡고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반근이라는 몸종이 지내던 방이라고 했는데, 몸종이 지내기 전에는 무슨 용도로 쓰였을지 모를 곳이었다. 나뭇간이었으려나?
이렇게 낡은 집을 본 건 정 이부인 역시 생전 처음이었다.
“사금이 지내는 집보다도 못해요.”
정칠랑이 투덜댔다. 사금은 정씨 가문에서 집을 지키라고 키우는 개의 이름이었다. 깜짝 놀란 정 이부인이 황급히 정칠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부로 말하면 못써. 저들이 들을라.”
정 이부인이 속삭였다.
“들으면 뭐 어때서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칠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내쫓길 수도 있어.”
“내쫓을 테면 내쫓으라죠. 이렇게 낡아빠진 곳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칠랑의 말에 정 이부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런 낡아빠진 집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모친의 표정을 본 정칠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정칠랑이 고개를 들고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백모님이 우리더러 집에 들어오지 말래요?”
정 이부인이 자세를 고쳐앉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사람이야. 칠랑, 걱정하지 마. 네 언니랑 같이 있으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을 마친 정 이부인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이 바보한테 의지할 줄은 몰랐는데. 벼랑 끝에 내몰려 숨으러 온 곳이 여기일 줄이야.
정칠랑은 정 이부인이 왜 자신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왜요?”
정칠랑이 물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정 이부인은 미소를 쥐어짜며 정칠랑을 안심시켰다.
“집안에 일이 좀 있었는데, 넌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가 나중에 크면, 이 어미가 다 설명해 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칠랑. 조금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칠랑은 지금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자신과 제일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인 백모와 모친이 싸우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들었니? 네 큰어머니가 사람을 보냈었어.”
정 이부인이 바깥을 가리키면서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말에 반가워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항상 온화했던 백모님이 표독한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때리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서워할 거 없어, 겁내지 않아도 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품에 안아 주었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왕십랑 그 천한 것이 감히 내 딸 앞에서 나를 때리고 욕해? 우리 딸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라, 네 언니를 모셔 가려고 온 거였단다.”
정 이부인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네 언니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네 언니를 모셔 가려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겁낼 거 하나도 없어. 머지않아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종일 놀라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던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품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정 이부인은 한숨을 쉬고 아픈 허리를 꾹꾹 눌렀다. 무심코 얼굴을 만지다가, 정 대부인이 낸 상처에 손이 닿았다. 정 이부인은 상처가 쓰라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왕십랑 네 이년! 두고 보자!
정 이부인은 속으로 정 대부인을 욕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상처의 통증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온 정 이부인의 눈에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반근이 보였다.
“반근, 반근.”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반근을 부르면서 가까이로 다가갔다. 반근이 걸음을 멈추고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이부인, 날도 다 저물었는데 언제 가시려고요?”
저 계집이 감히 나를 내쫓으려고 해? 오늘 일만 아니었으면, 나한테 제발 여기서 지내라고 싹싹 빌어도 여기엔 안 살았어!
정 이부인이 미소를 쥐어짜며 말했다.
“반근, 교랑이 대노야의 분통을 터트려서 거의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놨잖니. 게다가 우리가 공당에서 증언한 것 때문에, 정 대부인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정 이부인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 말에 반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좀 그렇긴 한데, 이를 어쩌면 좋지?
“반근, 좀 전에 정 대부인이 보낸 사람이 네 아씨를 모셔 가겠다고 하는 걸 봤어.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려는 건가 봐. 저들이 졌다는 걸 인정한 거지. 그러니까 숨어 있는 네 아씨를 어서 데려오렴. 이제 다 네 아씨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조건을 협상하면 돼.”
정 이부인이 눈썹을 꿈틀대면서 말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이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희 아씨는 밖에 놀러 나가신 거예요. 아씨가 숨긴 왜 숨어요?”
참나. 저 계집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네.
이렇게 큰일을 저지르고, 하마터면 자신의 백부를 공당에서 분통 터트려 죽일 뻔했어. 게다가 돈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관부 놈들한테 가산까지 넘기게 됐고.
도리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일을 저질렀으니 집에서 매질을 당해 죽어도 할 말이 없지. 그래서 숨은 거잖아. 숨은 게 아니면 뭔데?
정 이부인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없이 웃었다.
“아, 숨은 게 아니라, 피하신 거라고 해도 되겠네요.”
반근이 웃으며 바깥을 가리키고, 다시 정 이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요.”
반근의 말에 정 이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 이부인은 자신의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반근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조 집사, 잠깐 들어오세요. 아씨께서 분부하신 일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요.”
반근이 말했다. 문밖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리더니 곧 조 집사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조 집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정 이부인은 서둘러 몸을 돌리고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조 집사는 정 이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소란을 피해서 놀러 간 거라고?
설마 이 지경으로 일을 벌여 놓고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거야?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강주부 관청.
서재 안에 은은한 차향이 퍼졌다.
한바탕 고생한 뒤에 마시는 향긋한 차 한 잔이 인생의 낙이지.
“향곤(向昆), 마셔 보게.”
송 지부가 천천히 차를 따르고는 반대편에 앉은 이 절추에게 찻잔을 건넸다. 송 지부는 언제 불만이 있었냐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이 절추를 쳐다보았다.
이 절추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송 지부가 건넨 찻잔을 받고 예를 올렸다. 찻잔을 받은 이 절추는 고개를 젖혀가며 단숨에 차를 비웠다.
“차가 좋군요. 향이 좋아요. 대인의 다예 솜씨가 점점 더 훌륭해지십니다.”
이 절추가 감탄했다.
“향곤, 자네는 차 맛을 아니까 어떤 차가 좋은 차인지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차에 대해서 잘 모르네. 그래서 이 좋은 차를 갈증을 해소하는 데에 쓰고 있지.”
통판이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공당에서 큰소리치며 화를 내던 통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방 안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대화로 가득 채워졌다.
차를 한 잔씩 마신 세 사람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대인께서 보시기에는, 이 사건을 계속 진행해야······.”
이 절추가 말끝을 흐리면서 송 지부에게 물었다. 옆에 앉은 통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
통판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송 지부의 눈치를 보고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절추와 통판의 시선이 송 지부에게 고정되었다.
송 지부는 두 사람이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당연히 해야지, 당연히! 이 사건은 무조건 진행해야 해! 돈이 얼만데, 돈이!
송 지부는 실소를 터트렸다. 송 지부가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부르자, 식객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일은 어떻게 됐는가?”
식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퇴정할 때 그 사람들도 나갔습니다. 그 후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지금껏 관청으로 찾아온 일도 없었습니다.”
송 지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공당에서는 이 재판을 계속 진행할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원고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재판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 대노야가 공당에서 분통 터져 죽을 뻔한 일은, 정씨 가문에게는 손해였고 주씨 가문에게는 이득이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그 후로 따로 관청을 찾아오거나 별다른 귀띔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씨 가문도 이 결과에 대해 만족하는 건가?
이 절추와 통판은 송 지부와 식객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인,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통판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진씨 가문도 결과에 만족한다는 뜻이겠지.
송 지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아니야.”
통판이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원칙대로 해야지요. 원칙대로.”
동의한다는 뜻이야. 동의한다는 뜻! 하긴, 이런 사건을 거절할 리가 있나.
절추와 통판은 한시름 놓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차 좀 드시지요.”
서재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차를 권했다.
정씨 저택.
무거운 분위기가 온 저택에 스며들었다. 저택 안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하고 황급해 보였고, 걸음걸이도 평소보다 다급했다.
탕약을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던 몸종은 하마터면 방에서 나오던 여종과 부딪힐 뻔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씩 쳐다봤을 뿐 불평하거나 따질 겨를도 없이 각자 가던 길을 재촉했다.
정 대노야가 한쪽 손으로 침상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정 대부인이 서둘러 부축했다.
“뭐라고? 출타했다고? 언제 나갔다더냐? 어디로?”
정 대노야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지만 여종은 고개를 저었다.
“날이 밝자마자 나갔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종이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었고?”
정 대노야가 침상의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여종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반근이라는 몸종과 조 집사는 다 집에 있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자기들한테 하라고······.”
정 대노야가 여종을 보고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들한테 얘기하라고?”
정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귀한 집 따님이니 공당에 직접 나설 리는 없고, 자신을 대신할 노비만 남겨두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노비가 윗전을 대신해 공당에서 말하는 건 가능해도, 노비는 윗전을 대신해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만, 저희 아씨께서 분부하시기를······.
그걸 저희가 어찌 결정하겠습니까. 일단 저희 아씨께······.
정 대노야는 눈을 감고도 반근과 조 집사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정녕, 정녕!”
정 대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실소를 터트리면서 침상을 손으로 내리쳤다.
“정녕!”
정 대부인과 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정 대노야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정 대노야가 정녕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우리 정씨 가문을 패가망신시키려고 작정을 한 게야!”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진 정 대노야가 목청을 높여서 소리쳤다. 정 대노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악독하고 고약하구나!”
정 대노야는 말을 마치자마자 침상 위로 쓰러졌다. 정 대부인의 비명과 함께,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