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
강주 정씨 가문의 사당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종복은 놀란 얼굴로 한쪽에 가만히 서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족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종복은 저 여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정씨 가문에서 낳은, 태생이 바보인, 어렸을 때부터 집 밖으로 쫓겨나 도관에서 자란 여인. 바보가 어떻게 생겼는지 일찍이 본 일이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처럼 생긴 바보는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며칠 전에 저택 밖에서 정씨 가문의 바보가 실은 바보가 아니었다는 말을 흘려들은 적이 있지만, 종복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정 대노야의 최측근 시종인 만큼, 종복은 그 바보의 생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 바보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저 여인이 바보라고 믿기 어려웠다.
좀 전에 대노야에게 저 여인에게 족보를 읽어 주라는 당부를 들은 게 무색할 정도로, 저 여인은 분명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보라면 글을 몰라야지. 글을 읽을 줄 아는데, 어떻게 바보라고 할 수 있겠나?
“이게 다인가?”
바닥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갑자기 물었다. 종복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여기 있는 게 다입니다.”
말을 끝낸 종복이 여인을 쳐다보자, 평온해 보이던 여인의 얼굴에 서서히 막막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런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종복은 저도 모르게 슬퍼지면서 왠지 모르게 좀 전에 했던 말을 후회하게 되었다.
정교랑이 마른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없네. 하나도 없어, 하나도.”
사실 정사낭을 시켜 족보를 쓰게 했을 때,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족보를 직접 보고자 한 이유는 정사낭이 기억해 낸 것이 가까운 직계 조상과 형제자매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은 방대한 정씨 가문의 족보 전체를 보다 보면,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녀에게 있었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혹시'라는 희망을 품는 건,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씨.”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온 반근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불렀다. 종복의 귀에는 이 부드럽고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처량하게 들렸다.
“아씨, 뭘 찾으시는 건지요?”
종복이 물었다.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족보를 천천히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 봤으니, 가져가게.”
종복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사당을 나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목이 가득한 사당은 저택 안의 다른 거처보다 훨씬 서늘하고 어두웠다. 그런 고목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여인의 여윈 뒷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씨, 어디로 가시려고요?”
사당을 나온 뒤로 쭉 말을 하지 않던 반근은 정교랑이 정 대노야의 거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자 정교랑을 불렀다.
“그 사람 찾으러.”
정교랑이 말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 오직 그 이름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사람이야.
반근은 알겠다 대답하고 정교랑을 따라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 대노야 부부는 여전히 대청 안에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족보를 찾아보는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 대노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속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정 대부인의 말을 듣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꿍꿍이를 꾸밀 수 있는 사람이 바보겠소?”
정 대노야의 물음에 정 대부인은 멈칫했다.
그렇네. 바보가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 멍하니 앉아 있거나 듣기만 할 텐데.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소. 아주 심한 바보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오.”
“당신은 저 아이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여섯 살 때도 걸음을 못 뗐던 아이인데,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정 대부인이 기가 찬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바보인 건 틀림없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언정,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아니면, 차차 나아진 거일지도 모르지.”
정 대노야가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정 대부인이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찰나, 정 이노야 부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 대부인이 턱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노야한테 한 번 물어봐요. 병주에 있을 때 그 바보가 어땠는지.”
“병주에서요?”
정 이노야가 자리에 앉아 정 대노야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회상했다.
“뭐, 다를 바가 있었겠습니까.”
“도관에 가본 적은 있고?”
정 대노야가 물었다.
당연히 안 갔지. 그걸 말이라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보러 갈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병이 나았으면, 진작 집으로 찾아왔겠죠.”
정 이노야는 쓸데없는 말이라는 듯 대꾸했다. 정 대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봐도 바보 같지 않던데, 정말로 나은 게 아닐까? 가만, 태생부터 바보인 사람도 나아질 수 있나?
“제 생각에는 다 나은 것 같아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자라기도 했고, 주씨 가문이 데려다가 아주 잘 가르친 것 같던데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이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든 정 이부인이 지지 않겠다는 듯 정 대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교랑은 다 나아서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 아이의 혼사는, 저희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디어 가식 떨던 모습을 버리고 본모습을 드러내는군.
정 대부인은 속으로 비아냥거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 안에는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문밖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와 여종들도 방 안의 긴장감에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압도되었다.
“신중히? 차라리 그냥 혼사를 다시 결정하고 싶다고 하지 그래?”
“역시 형님께서는 고명하시네요. 저희의 뜻이 바로 그거예요.”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쿵 하고 울렸다.
정 대부인의 거처에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찻잔이 떨어지는 소리에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여종들만 마당에 남아 입을 꾹 다문 채로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깔개 위로 떨어진 찻잔을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사는 이미 결정이 난 일이오. 뱉은 말에 신용이 없어서 쓰나.”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사실상, 가마가 대문을 넘기 전까지는 결정된 혼사라고 볼 수는 없죠.”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를 보며 싱긋 웃었다.
“대노야, 우리 교랑이 좋은 집에 시집가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말은 천금의 가치를 지닌다 했거늘. 이대로 무르자는 거요? 좋은 집안이 나타났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게 가당키나 하오?”
정 대노야가 언짢은 표정으로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아우야, 이건 네 결정이냐?”
정 이노야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니 아무래도 신중해야…….”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대노야가 옆에 있던 팔걸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 대노야는 자단목으로 만든 흑색 탁자를 단번에 엎어버렸다.
대청 안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말에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 법이고, 행동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찌 그런 옹졸한 소인배 같은 마음을 먹을 수가 있는 게냐!”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정동,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건지 알긴 하는 게야!”
정 이노야가 성인이 된 이후로, 정 대노야가 이토록 성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곧바로 몸을 숙여 대노야에게 사죄하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앞서 그를 제지했다.
“아주버님, 이이도 자신이 지금 뭘 하려는 건지는 잘 알고 있어요.”
단호한 표정의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 대신 대답했다.
“바깥일도 아니고 집안일이잖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 딸을 위해서 이런 결단을 내린 거예요. 자기 자식을 위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정 이노야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저는 교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 이노야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 대부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딸을 위해서라고?”
정 대부인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실실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 딸을 위해서였다면, 뭐하러 오늘까지 기다렸죠? 뭘 위해서인지는 이노야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훤히 보이네요.”
“형님,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대로 말씀하세요!”
그러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는 우는 목소리로 외쳤다.
“계모 주제에 제가 어찌 감히요!”
정 이부인은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 늘어뜨리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여보, 교랑의 혼사는 내가 결정할 게 못 되네요. 나 같은 제삼자가 어디 끼어들 자리나 있겠어요.”
정 이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훌쩍였다.
“어찌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오. 당신은 교랑의 계모잖소. 어머니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부인을 위로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우리 교랑이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 어떻게 잘못됐다는 겁니까?”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란다니? 그럼 우리 왕씨 가문은 좋은 집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정 대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공주부 진씨 가문과 비교하면, 당연히 좋은 집안이라 하기 힘들지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고는 손수건으로 천천히 눈물을 훔쳤다.
역시! 어제 나간 건 옷감을 사러 나간 게 아니라, 딸을 팔러 나간 거였어!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정 이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진씨 가문에 못 미치긴 하지만, 우리 왕씨 가문 또한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집안이 아닐세. 이미 혼약은 끝났으니, 그 잘난 진씨 가문이 어떻게 이 혼사를 망치는지 두고 봐야겠군!”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정 이부인을 노려보더니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진씨 가문이라는 말만 듣고 이성을 잃은 것이냐? 진씨 가문이 좋은 집안인 걸 잘 알고들 있나 본데, 그리 좋은 집안이 굳이 왜 우리와 연을 맺겠느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냐? 여인네들이 꼬드기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하는 것이야!”
정 대노야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 이노야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네.
“형님 생각도 그렇…….”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이부인이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이렇게는 못 살겠네. 맞아요, 제가 꼬드겼어요! 여보! 날 버려요! 날 내치라고요!”
정 이부인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연거푸 내리쳤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난리를 피우는 것을 난생처음 본 정씨 형제와 정 대부인은 당황하여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지금 뭐 하는 것이야!”
정 대부인이 소리쳤다.
“체통을 지켜야지, 체통을!”
정 대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매를 홱 털고 호통쳤다.
“이러고도 학자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소? 이게 당최 무슨 꼴이오!”
정 이부인은 추태를 멈추기는커녕, 아예 아이처럼 바닥에 누워 뒹굴기까지 했다.
“꼬드기는 말이나 전하는 말이나 천하의 요부 취급을 하고선, 학자 집안 출신이라니 당치도 않죠. 여보, 날 내쳐요. 날 버리라고! 수치스러워서 더는 여기서 못 살겠으니까!”
정 이부인이 목놓아 울었다.
“아니지. 이런 수모를 당하고선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어. 차라리, 차라리!”
바닥에서 뒹굴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땅을 짚고 일어나더니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차라리 죽고 말지! 정씨 가문에 흠이 되지 않게 차라리 죽어 버릴게요!”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문가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근처에 있던 정 대부인이 기둥을 향해 달리던 정 이부인을 재빠르게 안았다.
화가 난 정 대부인이 다급한 마음에 정 이부인에게 호통을 쳤다.
“자네, 지금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 대부인이 정 이부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후려치는 소리 때문에 대청 안은 일순간 다시 조용해졌다.
옷차림이 흐트러지고, 머리가 산발이 된 정 이부인은 손으로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따귀를 후려친 정 대부인도 자신의 손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동서의 따귀를 통쾌하게 후려치는 건 꿈에서 수십 번도 더 해 본 일이었지만, 실제로 동서의 뺨을 때리는 날이 오다니.
“이, 이 꼴을 좀 봐!”
정 대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애써 멀쩡한 척하며 외쳤다.
그 바보의 혼사를 망치는 것은 우리 내외의 미래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칠랑의 혼삿길을 막는 것이야! 우리 칠랑의 혼삿길을 망치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가 됐든 내 기필코 죽기 살기로 싸울 테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게 바로 이 여인이야. 온화하고 착한 맏며느리인 척은 다 하면서, 노야와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당연하다는 듯 우리에게 공경을 요구했어.
정작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건 자기 기분 좋을 때 적선하듯 나누어 준 것들뿐이지. 그마저도 잔뜩 생색을 내고, 우리는 과한 것을 받았다는 듯이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만 하잖아! 그렇지 않으면 세상 도리도 모르고 버르장머리만 없는 사람이 되니까!
이런 숨 막히는 생활을 평생 해야 해! 한평생을 남에게 빌붙어서!
왜? 내가 대체 왜 이런 설움을 당해야 하는데!
“왕십랑, 네가 뭐라고 날 때려!”
정 이부인이 악을 쓰며 대부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정 대부인이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정 이부인은 대부인의 머리카락만 세게 내리친 꼴이 됐다. 정 대부인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던 비녀와 장신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청 안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문밖에 서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안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가 머리채를 잡고 몸싸움을 벌이려는 부인들을 말렸다.
눈앞의 광경에 정씨 형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청 안의 모든 것들이 엉망이었다. 탁자는 발길질로 인해 뒤집혀 있었고, 찻잔은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대청 안은 온통 울고불고하는 여인들의 소리로 뒤덮였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정 노부인의 방에서 걸어 나오던 부 어멈이 마당에서 몰래 귓속말을 주고받는 여종들을 보았다. 부 어멈이 큰 소리로 마른기침을 하자, 여종 몇이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뭔데 그리들 속닥거리는 게야.”
부 어멈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종들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부 어멈.”
여종 하나가 먼저 운을 뗐지만,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말해라.”
부 어멈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그쳤다.
“대부인과 이부인 사이에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여종이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싸움이 났다고?
부 어멈은 귀를 의심했다.
농담인가?
“정말이에요. 지금 저쪽이 난리도 아니래요. 노부인께 귀띔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여종이 말했다. 부 어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말했다.
“무슨 귀띔?”
깜짝 놀란 여종들이 노부인의 방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를 노부인이 그릇 하나를 쥔 채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노부인의 나이는 벌써 예순이 넘었다. 백발로 뒤덮인 머리에 검붉은 옷을 입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매우 수척했다.
노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탕을 조금 마셨다.
부 어멈과 여종들이 잰걸음으로 노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별일 아닙…….”
부 어멈이 입을 열자마자 노부인이 말을 끊었다.
“말해라!”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호통쳤다.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싸움이 나셨다고.”
부 어멈이 곧바로 이실직고했다.
“그 무슨…….”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던 노부인이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노부인은 양손으로 뒷목을 잡고, 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벌린 채 신음을 내며 뒤로 쓰러졌다.
“노부인!"
“빨리! 빨리 의원을 불러오거라!”
“노부인, 노부인!”
정 대노야의 거처에 이어, 노부인의 마당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예의를 지키던 정씨 가문이 혼란에 빠졌을 때, 항상 시끌벅적했던 남정 동네에는 전무후무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허름한 초가집 앞 나무 그루터기를 자리 삼아 앉은 소녀를 향해 한 노인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씨,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그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정교랑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골목과 거리라고는 죄다 찾아보았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요. 며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죠.”
주위 사람 중 하나가 거들자 정교랑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맞아. 그 사기꾼, 아니 정평이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요. 사고를 쳐 놓고 한동안 숨어있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왔습죠.”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원래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씨 가문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자는 일 년 전쯤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인가가 강주 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서요. 또 자신은 한곳에 정착해 잘 살고 있었는데, 향수병이 너무 심해서 강주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자가 정 대노야께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대노야께서 별 의심 없이 믿어주시며 이곳에 살도록 남겨 두셨지요.”
노인이 말했다.
“그 사람은 어디서 온 사람이죠?”
정교랑이 물었다.
남정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같은 성씨를 가진 이 여인에 대해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정평이라는 자의 내력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어제 이 여인이 내건 거액의 현상금 탓에 노인은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해 두었다.
“촉주(蜀州)입니다.”
노인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대꾸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입을 열지 않자, 주위의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골목 안이 조용해졌다.
“알겠어요.”
한참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뒤 정교랑이 대답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럼…….”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럼 계속 찾아주세요. 천천히 기다릴게요.”
정교랑이 그의 말을 이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말을 마치자, 조 집사는 곧바로 앞으로 한 걸음 나가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빼냈다.
“이건 수고비요.”
또, 또 돈을 주다니.
노인의 손이 떨려왔지만, 차마 돈주머니를 받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을 찾아낸 뒤에 받겠습니다.”
조 집사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조 집사는 더는 강하게 권하지 않고 돈주머니를 도로 챙겼다.
“좋소이다. 소식이 있으면 그때 같이 드리겠소.”
노인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씨, 혹시 더 분부하실…….”
노인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좀 앉아 있다 가려는데, 방해가 되진 않겠죠?”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노인은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 외쳤다.
앉는 게 대수입니까, 아예 여기서 사셔도 됩니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서서히 흩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조 집사는 시종들에게 손짓하여 그들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게 했다. 누추하고 비좁은 골목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를 자리 삼아 앉아 있는 정교랑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아씨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궁금함을 참다 못한 누군가가 조 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조 집사는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서 앉아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좀 전에 몸종이 씌워 준 두모를 쓰고 있었다. 나무 그루터기가 낮아 어두운색의 두봉이 바닥까지 끌렸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시간이었지만, 소녀의 몸에 드리운 햇살에서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저렇게 앉아 있겠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저렇게.
괜찮냐고? 괜찮은 게 이상한 거지!
조 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바다만큼 깊은 속을 가진 저 소녀의 생각을 어떻게 헤아리겠나. 아씨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게 두어야 해.
조 집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 집사의 예상과는 달리, 정교랑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만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 아씨, 정평한테 크게 당했나 봐.”
“아니, 얼마나 사리 분별을 못 하길래 정평한테 사기를 당해. 바보 아냐?”
소녀가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골목을 떠나자, 긴장이 풀린 남정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씨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 정교랑은 바쁘게 뛰어가던 두어 명의 여종들과 부딪힐 뻔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서둘러 예를 표하고 다급하게 지나가는 여종을 본 반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든 반근의 눈에, 온 저택 안의 여종들이 한껏 긴장된 얼굴로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정교랑은 그 광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맞다. 이 집안사람들이 뭘 하든 우리 아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반근은 홀가분한 듯 싱긋 웃고,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씨, 오늘 저녁은 뭐로 하시겠어요? 아까 부엌에서 보내온 생선이 꽤 신선해 보이던데, 어탕을 끓일까요?”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쪽잠을 자고 일어난 왕 부인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씨 가문의 여종 때문에 깜짝 놀랐다.
“노부인께서 어떻다고?”
왕 부인이 소리쳤다. 이제야 좀 좋아지나 싶었던 왕 부인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부인께서 요 며칠간은 정신이 없을 테니 혼서를 쓰는 것을 좀 미루시자고…….”
여종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왕 부인은 사색이 되어 여종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여종이 눈을 크게 뜨고 서둘러 입을 다물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왕 부인이 좌우를 살폈다. 주위의 여종들이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왕 부인이 여종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노부인께서는 무슨 병이시더냐? 심각한 건 아니고?”
왕 부인이 노부인에 관해 상세히 묻자, 여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큰 병은 아니시고요. 대추를 드시다가 목에 걸리셨어요.”
사레가 들렸다고?
연세가 많긴 하지만 꽤나 정정해 보이시던데, 어떻게 대추를 먹다가 목에 걸린담? 설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나?
“어쩌다가?”
왕 부인이 놀라서 물었다. 여종은 더욱 표정이 일그러져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냥, 잘못 삼키셔서요.”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 사이에 싸움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쓰러지신 거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노야들 눈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다니. 이토록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은 정씨 가문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어제 대노야께서 몇 번씩이나 함구령을 내리셨으니, 만에 하나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사정을 아는 여종들은 모조리 쫓겨나거나 팔려갈 거야.
여종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난색을 표하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본 왕 부인은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정 노부인의 병세가 그 정도로 심각한가? 얼마 살지도 못할 정도로?
만약 노부인께서 고비를 넘기지 못하시고 상을 치르게 된다면, 정씨 가문은 적어도 일 년간은 혼사를 올리지 못할 터.
“정말 잘 됐구나!”
왕 부인은 머릿속에 스친 말을 그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잘 됐다고?
정씨 가문 여종이 고개를 들고 놀란 표정으로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아,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잘 계셨는데 말이야. 내가 한번 뵈러 가야겠구나.”
왕 부인이 어색하게 둘러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신답니다. 부인께서 하시기로 한 것들은 미리 준비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때가 되면 며칠 내로 다 진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요.”
왕 부인이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노부인께서는 정말 괜찮으신 거냐? 아니면 혼사를 좀 미루는 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부인께서 그런 생각을 하실까 봐 저를 보내신 거예요. 노부인께서는 정말 괜찮으시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모든 건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왕 부인이 실망한 기색으로 짧게 응, 하고 대꾸했다.
정말로 노부인께서 몸이 편찮으신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혼사는 정해졌어도, 혼례를 올리는 건 나중의 일이 될 테니. 한두 해 정도 미루다 보면, 십칠도 이번 일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신랑이 되겠다고 할지도…….
“어머니, 어머니!”
마당 안에서 왕십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눈앞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여종에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빨리! 냉큼 어디로든 숨어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여종은 눈을 크게 뜨고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숨으라고?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그만 물러나라는 걸 잘못 말씀하신 건가?
여종이 멈칫하는 사이, 비단옷을 입고 허리춤에 옥대를 맨 왕십칠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입도 뻥끗하지 말거라.”
왕 부인이 여종을 향해 짤막한 경고를 날리고는 미소를 쥐어짜며 왕십칠을 맞이했다.
“십칠,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왕십칠이 환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고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다 이 아들이 잘생긴 덕이죠.”
왕 부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아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왕 부인이 십칠에게 밥은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따위를 물었다.
대답하려던 왕십칠이 한쪽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여종을 발견했다.
“너는 고모님 댁 여종이 아니더냐?”
왕십칠은 갑자기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펄쩍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여기에는 왜 온 것이냐! 그 여자가 널 보내디?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왕십칠의 다그침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왕 부인이 서둘러 왕십칠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아니다. 네가 괜찮은지 보려고 네 고모가 일부러 사람을 보낸 거야.”
왕 부인이 여종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을 이어갔다.
“네가 많이 놀랐다는 말에, 고모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사람을 보낸 거란다. 그 여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야.”
여종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왕 부인의 말대로 허리를 숙여 맞장구를 쳤다.
“예, 맞습니다. 부인께서 십칠공자가 너무 걱정된다며 이렇게 저를 보내신 거예요.”
“됐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너희 부인께 괜찮다고 전하거라.”
왕 부인이 손짓하자, 여종은 서둘러 예를 올린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시는 정씨 가문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막아요! 아무도 못 오게!”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왕십칠의 목소리가 여종에게까지 들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여종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고개를 돌려 시끌벅적한 대청을 쳐다보았다.
십칠공자는 늘 대부인을 친근하게 대했고 대부인께서도 공자를 참 아끼셨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대부인께서 들으시면 섭섭하시겠네.
여종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하게 걸음을 옮겼다.
정씨 가문의 여종이 씁쓸함을 느끼든 말든, 왕 부인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간신히 왕십칠을 어르고 달래서 자리에 앉힌 왕 부인은 불안에 떠는 왕십칠을 보며 마음이 아파 왔다.
“십칠, 십칠.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는 건 어떠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왕 부인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왕 부인과 왕십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기분 전환할 겸 십칠을 밖으로 내보낸다면, 한 달 동안 십칠한테 들킬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혼사를 준비할 수 있겠어.
왕 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으로 나가야겠다. 그 여자가 찾아와 날 붙잡고 늘어지면 어떡해.
왕십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두 모자는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이어 왕십칠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가장 아끼는 시녀 몇 명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 왕씨 저택을 떠났다.
아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왕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 부인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여종들을 거느리면서 혼사 준비를 시작했다.
왕씨 가문에 다녀온 여종이 정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정 대부인의 마당은 고요했다.
“다들 노부인 쪽에 계셔.”
문을 지키고 있던 여종이 노부인의 거처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여종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많은 수의 여종과 몸종들이 노부인의 마당에 서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전부 무릎을 꿇고 있어.”
문가에 있던 여종이 왕씨 집안에 다녀온 여종의 팔을 잡아끌면서 지금은 들어가지 말라고 속삭였다.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노부인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싸워? 왜, 아예 칼을 들고 찌르지 그랬느냐?”
노부인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며느리들을 쳐다보았다.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주먹다짐으로 성이 차겠어?”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부인들은 훌쩍이면서 노부인에게 연신 사죄를 했다.
“죽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들 죽어! 난 며칠 더 살고 싶으니까, 내 근처에 얼씬도 말거라! 나는 너희 때문에 분통 터져서 죽기는 싫다!”
노부인이 냉소를 보이며 비꼬았다. 정 대노야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가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사죄했다.
“어머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건강 생각부터 하셔야죠. 어서 자리에 누우세요.”
정 대노야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도 그의 뒤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훌쩍였다.
“너희 형제 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씨 가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구나. 그쪽에서 혼사를 미끼로 던지니, 눈이 새빨개져서는 정신을 못 차리고 개처럼 서로를 물어뜯어? 몇 대를 거치며 쌓아 온 정씨 가문의 체면을, 너희들이 다 갉아먹었구나!”
노부인이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어머니께서 개에 빗대어 나무라시다니, 화가 정말 단단히 나셨구나.
노야 둘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부인 둘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혼례? 그 바보가 무슨 혼례를 올린다고! 그 애 어미의 혼수를 우리 정씨 가문에 남겨 두겠다는 게 뭐가 어때서!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한단 말이냐! 주씨 가문이 어떻게 뺏는지,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 바보를 지금까지 키워준 것만 해도 우린 도리를 다한 거다. 시집을 안 보낸다고 해서 누가 트집을 잡아? 그 바보를 시집보내는 게 오히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 너희도 바보가 됐느냐? 그 애를 시집보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대체 누가 먼저 한 게야! 우리 집안의 일을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래라저래라해!”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내내 머리를 조아리며 노부인이 한 말이 다 옳다고 외쳤다.
“하지만, 어머니. 교랑은 이제 바보가…….”
망설이던 정 이노야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지만, 정 대노야가 그를 노려보며 말을 끊었다.
“어머니, 어머니. 부디 고정하십시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서둘러 말했다.
“어서 그 애를 내쫓아 버리거라! 지금, 당장!”
노부인이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난 진작부터 그 애가 불운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우리 정씨 가문의 재앙이야. 너희 아버지도 그 애 때문에 돌아가시고, 그 애 어미도 딸 때문에 죽었어. 이젠 나까지 그 애 때문에 죽게 생겼구나. 너희도 머지않아 이 꼴이 날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서늘한 겨울 날씨에 수척한 노부인이 표독한 얼굴로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내뱉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름이 돋았다.
“예, 예. 소자가 즉시 내보내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 대노야는 노부인에게 직접 약을 올린 뒤, 노부인이 침상에 눕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우 내외, 부인과 함께 물러났다.
마당을 벗어나자,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은 곧바로 갈라져 선 채 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자.”
정 대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뜻? 예전처럼 형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는군.
정 대노야는 속으로 냉소를 짓고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정 이노야는 시선을 회피한 채 가볍게 목례하고 부인과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은 정 대노야의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지다가 모퉁이를 꺾으며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냉소를 보이던 정 대노야는 문득 마음 한편이 먹먹해졌다.
정 이노야보다 나이가 많은 정 대노야에게 동복형제라고는 이노야뿐이었다. 정 대노야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 머리가 없어, 가업을 이어받아 이노야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그래서 이노야는 대노야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믿고 따랐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형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며, 머리를 조아리고 순종하던 아우는 이제 변했다. 지금의 아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다 변하는 건가?
아니지, 절대 아니야. 그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형제는 결코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야.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형제와 부인들은 참 화목하게 지냈지.
이 모든 게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후로 생긴 일이야!
정 대노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봐라. 당장 그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 버려라!”
문밖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는 문을 잠그지 않는 탓에, 여종들은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랑 아래서 옷을 다리고 있던 반근이 고개를 들자, 네다섯 명의 여종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반근과 눈이 마주친 여종들은 걸음을 멈췄다.
“마침 잘 왔어요. 그러잖아도 여기서 지내기에는 좀 그래서, 아씨께서 지낼 만한 다른 곳을 마련해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반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마침 노야의 명을 받들어 아씨의 거처를 옮겨 드리러 온 참이다.”
여종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반근이 다리미를 내려놓았다.
“어디로 옮기는데요?”
반근이 물었다.
“어디긴 어디겠느냐, 현묘관이지.”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묘관?
“지금 아씨를 내쫓겠다는 거예요?”
반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쫓다니. 모시는 거지.”
여종의 말에 반근이 벌떡 일어났다.
“됐으니까 어서 짐을 챙겨라. 바로 출발할 터이니.”
여종이 웃으면서 손짓하자, 다른 여종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이 사람들이!”
반근이 문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이때 누군가가 뒤에서 반근을 살짝 밀쳤다.
“날, 내쫓겠다고?”
정교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반근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섰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정교랑은 소매를 올려 묶은 채 활을 쥐고 있었다.
정씨 저택에는 활쏘기 연습을 할 만한 장소가 없었지만, 정교랑의 습관은 여전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야외 대신에 실내에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교랑의 활에는 화살이 끼워져 있었다.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 정교랑을 보고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내쫓는 게 아니라 잠시 피해 계시라는 거지요. 알고 계시던 곳이기도 하고, 아씨께서도 전에 지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익숙하시잖아요.”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종은 미소를 머금고 걸음을 옮겼다. 막 발을 떼려던 찰나, 눈앞에 여인이 손을 들어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모습이 보였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여종은 무거운 물건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몸이 뒤로 휘청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었다.
무슨 일이지?
여종들은 멈칫했고, 곧이어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비명을 질렀다.
“살인이야!”
여종의 비명과 함께 마당이 어지러워졌다. 울고불고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밀치느라 문짝은 벌써 반쯤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나머지 반쪽의 문짝에는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이건 살인이 아니야.”
정교랑이 활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활쏘기지."
울고불고해대며 구르고 기면서 달려온 여종들은 정 대부인의 마당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살인?”
여종의 말을 들은 정 대노야가 놀란 눈으로 호통쳤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눈앞의 여종은 머리를 산발한 채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노야, 정말입니다. 화살이 제 머리 위로 지나갔다니까요. 빗나가지 않았더라면, 소인은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여종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울먹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정 대부인이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걸어 나왔다. 정 이부인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통에 얼굴에 손톱자국이 길게 난 정 대부인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바보가 아니라 미치광이가 된 게야? 게다가 흉기까지 다루는 미치광이? 활은 어디서 났고?”
여종의 몰골을 보고 놀란 정 대부인이 물었다.
“어디서 나긴, 주씨 가문이겠지. 딴 건 몰라도 칼, 창, 봉, 활은 주씨 가문에 넘쳐나잖소.”
정 대노야가 대꾸했다.
“도대체 주씨 가문은 무슨 생각이래요! 바보의 손을 빌려서 우리 일가족을 몰살하려는 거 아니에요? 당장 가서 꽁꽁 묶으라고 하세요!”
정 대노야는 대꾸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말을 끊었다.
“생각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에요. 빨리 그 흉기부터 빼앗아야죠. 그 바보가 정말로 사람이라도 죽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마음이 다급해진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하인들을 불러 저쪽으로 보냈다.
반근은 문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눈빛을 반짝이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아씨. 이번에는 열 명이 왔어요!”
반근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처마 아래에 선 정교랑이 어깨에 활을 걸치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집이 하도 좁아서 과녁 하나 놓을 자리도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몸 좀 풀겠네.”
정교랑이 말했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정교랑의 거처로 조금씩 접근했다. 반쯤 열린 대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던 하인들은 소녀 하나가 나와 선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씨, 아씨. 저희는 노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그 활을 내려놓으시지요. 그런 거 함부로 가지고 노시면 안 돼요.”
하인 중 우두머리가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조금 더 가까이.”
더 가까이?
하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정교랑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교랑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됐어.”
정교랑이 말했다.
뭐가 됐다는 거야?
하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텅 하는 소리가 울리자,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뒤로 모자 하나가 화살에 꽂힌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도 못 했을 때, 화살이 진동하는 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사내 바로 옆에 있던 사내의 모자도 날아가 버렸다.
사내들은 헉 소리를 내뱉으며 더럭 겁을 내기 시작했다.
정말 활을 쏘다니! 사람을 쏘고 있어! 화살이 빗나가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씨, 아씨. 장난치면 안 됩니다!”
좀 전에 말을 건네던 사내가 외치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는 다시 멈춰 섰다. 문가에 서 있던 여인의 화살이 그를 겨눴기 때문이었다.
푸른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네 차례야. 넌 조금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음, 어깨로 하지.”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진동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눈앞에 빛이 번쩍이나 싶더니, 곧이어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사내는 커다란 힘에 밀린 것처럼 푹 고꾸라졌다.
정말로 사람을 쏴 죽였어!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때 또 다른 사내 열댓 명이 몽둥이를 들고 사나운 기세로 이쪽을 향해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야!
도망치던 하인들이 기뻐하는 찰나,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내들이 갑자기 손에 든 몽둥이로 그들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멀리서 연못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정 대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 저자들은 누구냐?”
정 대노야가 외쳤다.
언제 저런 악인들이 집안까지 쳐들어온 게야!
정 대노야의 옆으로 도망 온 하인들은 그 곁에 꼭 붙어 섰다. 하인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굶주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온 듯 매질을 해대는 사내들과 그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자신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입니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대답했다.
주씨 가문의 사람이었군!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하인들이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노야, 화살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틀렸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이가 쏜 화살에는 전부 눈이 달렸어.”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눈이 달렸다고? 그럼 더 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인들이 서둘러 정 대노야의 뒤를 쫓아갔다.
“멈춰라!”
정 대노야가 가까이 다가오며 호통을 쳤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이미 바닥에 때려 눕혀져 있던 터라,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대노야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조 집사가 시종들을 이끌고 정교랑의 마당 앞에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몽둥이가 일제히 정 대노야 일행을 향했다.
정 대노야는 확신했다. 만일 자신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움직인다면, 저 인간들은 자신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올 거라고.
“감히 내 집에서 폭력을 쓰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조 집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대노야,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 대노야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맞아, 처음이 아니지. 저 바보의 어미가 죽었을 때가 처음이었지, 아마. 그때 주씨 가문에서 들이닥친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 손에 쥔 무기도 지금보다 훨씬 더 흉악했고, 사람을 해하는 방법도 지금보다 훨씬 더 악랄했지!
주씨 가문!
정 대노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주씨 집안 놈들 때문에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이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아우 내외는 어째서 그런 주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려고 드는 것이야! 내가 죽고 나서야 그러라지!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어깨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며 신음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정 대노야의 생각을 방해했다. 정 대노야는 곁으로 다가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화살에 어깨를 맞은 사내를 확인한 정 대노야는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죽기는 뭘 죽어! 피도 한 방울 안 났는데!”
정 대노야는 엄살을 부리는 사내가 괘씸하여 발로 걷어찼다.
“썩 꺼지거라.”
사내가 정 대노야의 발길질에 악 소리를 내지르더니,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펴 보고는 놀라서 넋을 놓았다.
정말 피 한 방울 안 흘렸잖아.
“빗나갔구나!”
사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정 대노야가 재차 사내를 걷어찬 탓에 사내는 또다시 바닥에 나자빠졌다.
“빗나간 것이 아니다.”
정 대노야가 바닥에서 화살 하나를 주웠다. 쇠로 된 화살촉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천으로 칭칭 감아 두었으니, 화살보다는 나뭇가지라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했다.
정 대노야는 젊었을 적 종종 활쏘기를 즐겼기에, 이런 화살은 투호 놀이를 하거나 초보자가 활쏘기를 처음 배울 때 쓰는 화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절대 흉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 아이가 정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내다보았다. 정교랑은 화살을 손에 쥐고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정 대노야가 외쳤다.
“활쏘기요.”
정교랑은 화살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화살을 꺼내어 활시위에 올려 두고 정 대노야를 조준했다.
주위에 있던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허겁지겁 ‘아씨,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며 대노야의 주위를 둘러쌌다.
어차피 촉이 없는 화살이니, 기껏해야 조금 아프고 말겠지.
정 대노야는 성가시다는 듯 하인들을 밀치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교랑, 이야기 좀 하자.”
불안한 기색으로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정 대부인이 명첩 하나를 받아 들었다.
“현묘관의 손 관주가 왔다고?”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대단하신 도사님께서 어떻게 우리 집까지 친히 행차하셨대?”
정씨 가문의 시주로 겨우 운영했던 조그마한 도관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유명해졌다. 도관이 유명해진 뒤로는 손 관주가 더 이상 정씨 가문에 인사하러 오는 일도 없었다.
“손 도사가 자신은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라,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속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여종이 말했다.
쳇, 속세를 벗어났네 어쩌네, 도인들이 허구한 날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
정 대부인은 손에 쥐고 있던 명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부인, 소인이 생각하기에는 손 도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집안이 화목하지 않았습니까. 요 며칠 벌어진 소란을 생각해 보세요. 부정이 탄 게 틀림없는데, 때마침 이때 도사님이 오셨습니다.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인 걸 알기에 오신 걸 수도 있어요.”
머뭇거리던 여종이 말했다. 정 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중이니, 점쟁이니 하는 사람들은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악운이나 나쁜 기운을 볼 수 있다던데, 설마 손 관주도 정말로 우리 집안에 뭐가 꼈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건가?
정 대부인은 넋이 나간 채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만 얼굴에 난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상처의 쓰라림에 정 대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확실히 이 집안에는 악운이 꼈어!
“안으로 들여라.”
정 대부인이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종이 손 관주를 방으로 데려왔다.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본 정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네.
깨끗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도복을 입고, 점잖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걸어 들어오는 여도사는 일 년 전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아첨 섞인 웃음을 보이던 여도사와는 전혀 딴사람인 듯 보였다.
이 여도사가 정말 그때의 손 관주와 동일한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환골탈태.
정 대부인은 허리를 펴고 손 관주에 대한 소문을 떠올려 봤다. 듣기로는 소현묘관에 번개가 내리치던 날, 도교 이 진인이 현현하여 손 도사에게 영험한 힘을 주었고 했다.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조그마한 도관이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겠어.
“부인을 뵙겠습니다.”
손 관주가 총채를 한 번 휘두른 뒤 예를 올렸다.
아주 짧은 시간임에도, 정 대부인은 손 관주가 보였던 행동에 대한 원한이 싹 가셨다. 정 대부인은 서둘러 손 관주에게 답례까지 했다.
자리에 앉은 손 관주는 고개를 들어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의 얼굴에 드리운 고충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손 관주는 그녀를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낭자가 그런 말을 했지. 물건은 희소성이 있어야 귀한 법이라고. 같은 맥락으로, 말은 적게 할수록 존중받는 법이야.
말이 거의 없던 그 낭자의 앞에서 손 관주는 늘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낭자의 모든 말들은 절묘했고, 손 관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낭자의 언행을 따라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낭자가 했던 모든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손 관주는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은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니까.
“부인, 이건 제가 직접 필사한 태평경입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쓰세요.”
손 관주가 대뜸 본론을 꺼내며 책 하나를 건넸다. 손 관주의 말 한마디에 정 대부인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역시, 역시! 악운에 휩싸인 게 맞았어. 도사님께서 단번에 알아채시는구나!
눈시울이 붉어진 정 대부인은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도사님,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정 대부인이 감정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시지요.”
손 관주는 담담하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재난들을 꿰뚫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여도사를 보고 있자니, 정 대부인의 마음은 점점 더 평온해졌다.
“그 아이가 또 돌아왔어요. 다시 도관으로 보내서, 도사님께 그 아이를 부탁드리려고요.”
정 대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일로 온 겁니다. 부인, 제가 먼저 그분을 뵈러 가도 되겠습니까.”
손 관주가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거봐, 이 일 때문에 왔어! 역시 그 바보가 악운덩어리였어!
정 대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세요, 어서요. 지금 거의 살인이 날 판이에요.”
정 대부인의 말을 듣고도 손 관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살인이 아니라 밥을 먹었다는 유의 말을 들은 것처럼.
집에 있는 여자가 정신이 나가 살인을 저지를 판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사내라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 이런 말을 듣고도 저리 담담하다니.
정 대부인은 마음이 놓였다.
역시 영험한 힘을 얻은 도사님이로구나.
“그럼, 저는 이만 그분을 뵈러 가보겠습니다.”
손 관주는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살인이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지. 아씨께서 사람을 죽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당초 벼락을 맞은 소현묘관의 잔해를 치우고 건물을 새롭게 수리할 때, 손 관주는 매의 눈으로 건물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때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딱 한 가지 물품이 소현묘관 관주의 방에서 나왔다.
바로 쇠막대기였다.
그때 손 관주는 번개를 모으는 방법이 도가의 경서에 쓰여 있던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그 방법이 통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지만.
방법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할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었다.
“전 따로 가 보지 않겠습니다.”
정 대부인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하자, 손 관주가 웃음을 머금고 예를 표했다.
“부인께서는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가면 돼요.”
말을 마친 손 관주는 길을 안내해주는 여종을 따라 문을 나섰다.
멀어져가는 손 관주의 뒷모습을 보며, 정 대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 관주가 준 태평경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태평경이 품 안에 있는 것이 느껴지자, 정 대부인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도사님이네.”
정 대부인은 태평경을 슬쩍 쳐다보고는, 조금 더 일찍 가서 향불을 올릴 걸 하며 후회했다.
“어서 가서 현묘관에 오백 관을 내고 향불을 올리거라.”
정 대부인이 여종에게 명했다.
아직 멀쩡한 한쪽 문은 활짝 열리고, 화살이 꽂힌 채 떨어진 반쪽 문은 마당 한쪽 구석으로 치워졌다.
문밖에 선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한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 그리고 마당 안으로 홀로 들어가는 정 대노야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인들에게는 그 광경이 무척이나 비장하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정 대노야는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지나갔다.
무기도 없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직접 전장에 나갔던 적은 없었지만, 정 대노야는 책에서 읽었던 장수들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속으로 침을 퉤 뱉었다.
적진은 무슨! 여긴 내 집이야! 이 집에서는, 내가 왕이라고!
마당에 멈추어 선 정 대노야가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활을 내려놓고 반근이 건넨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 대노야는 회랑 아래로 다가가 앉았다.
아름다운 미모에 뛰어난 말솜씨, 게다가 노련한 궁술까지. 이 중 한 가지 덕목만 갖췄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정말로 다 나은 게냐?”
정 대노야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나한테 묻는 건가요? 아니면, 자기 자신한테 묻는 건가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 대노야는 멈칫했다.
역시, 아직 제정신은 아닌 건가?
“나한테 묻는 거라면, 내가 나았다는 건 나야 당연히 알죠. 그런데 내가 나았다는 걸 그쪽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 저래? 알쏭달쏭하니 말장난 같기도 하고, 숨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낫긴 나았다만 제대로 낫진 않은 모양이군.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씨 가문에서 네 병을 치료해 준 것이냐?”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정교랑의 움직임에 문밖에 서 있던 하인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아무리 촉이 없는 화살이라고는 하나, 윗전이 손아랫사람에게 얻어맞는 일은 체면이 안 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날 내쫓으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내쫓다니.”
정 대노야는 마른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거처를 옮겨 지내라는 거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지만 아직은 옮기고 싶지 않아요.”
정 대노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옮기고 싶지 않다고? 네가 옮기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야?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 줄 알고!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겠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활시위를 천천히 닦자 활에서 낮은 마찰음이 울렸다.
“하지만, 아직은 옮길 생각이 없다고요.”
이 무슨!
“아니요. 거처를 옮겨야 해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한 반근이 끼어들었다.
저 계집이 감히.
정 대노야는 반근을 쳐다봤다가 다시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몸종 주제에 감히 윗전들이 대화하는 데 끼어드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모시는 윗전의 의견과 배치되는 말까지 내뱉다니. 저 바보는 왜 언짢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게야?
순간 정 대노야의 뇌리에 부인이 했던 말이 스쳤다.
주씨 가문에서 붙여 주었다던 그 몸종인가?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종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지금 묵고 있는 곳은 너무 어둡고 추워요. 따뜻한 곳으로 옮기긴 해야 해요.”
반근이 말했다.
“아, 출타하기 편하시도록 거리와 가까운 쪽이었으면 합니다. 독채면 더욱 좋겠군요. 저희가 시중들기도 편할 테니.”
조 집사도 입을 열었다.
시중들기 편하다고? 아무 때나 와서 싸움판을 벌이려는 수작이겠지!
정 대노야는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을 훑어보며 냉소를 지었다.
“병도 다 나았고, 족보도 확인했으니, 이제 네가 누구인지는 알겠구나?”
정 대노야가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지?”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나 자신의 뜻이죠.”
정 대노야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정교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야 할 때가 되면 내 발로 알아서 나갈 테니.”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이 집에 거저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었다. 정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정교랑이냐?”
정 대노야가 대뜸 물었다. 정교랑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은, 정말로 이 집 주인인가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노골적인 비아냥에 정 대노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내가 이 집 주인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마.”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서 지내든 다 똑같으니, 오늘 당장 도관으로 옮기거라. 이 집에서 네가 지낼 거처가 정리되면 그때 널 다시 데려오마.”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요?”
정 대노야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걸음을 옮겼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정교랑의 신호를 기다렸다. 정교랑의 눈짓 하나만 주어진다면, 금방이라도 정 대노야를 바닥에 때려눕힐 태세였다.
하지만 그가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도 정교랑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문밖까지 걸어오는 내내, 정 대노야는 등골이 서늘했다. 끝내 문턱을 넘어선 정 대노야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등 뒤에 대고 활을 쏘지 않은 것을 보니 정말 미친 건 아닌가 보군.
병이 나아 얼마나 다행이야. 적어도 장유유서를 알긴 하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나를 쐈을지도 모르지.
정 대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여전히 회랑 아래에서 손수건으로 활을 닦고 있었다.
“대노야.”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정 대노야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자, 웬 여도사 하나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 대노야는 잠시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부인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요.”
손 관주가 말했다.
너무 빨리 온 거 아닌가? 아니야, 아무렴 어떠랴.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시오.”
데려가라고?
손 관주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설마 이 집 사람들은 또 저 살아있는 신선을 내쫓으려는 건가? 거 잘됐네! 난 밤낮으로 모셔 오고 싶어 애가 닳았는데!
손 관주는 정 대노야를 향해 가볍게 예를 올리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노야, 저자들이 안 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면 어떡하지요?”
정 대노야 옆에 있던 하인이 조용히 물었다.
“난리?”
정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를 벌컥 냈다.
“여기가 누구 집인데? 저놈들이 그런다고 해서 내가 겁낼 줄 알고? 감히 어딜 덤벼!”
하인은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정 대노야의 말에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잠시 고민하던 정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모아 두거라.”
노야께서도 역시 겁이 나신 게로군.
하인은 속으로 중얼거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는구나!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정 대노야의 눈에, 회랑 아래에 앉은 여인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손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정 대노야는 깜짝 놀랐다.
큰절을 올려? 저런 큰절은 나한테도 올린 일이 없었는데?
“아씨, 돌아오셨군요.”
손 관주가 바닥에 엎드린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여인과 함께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달에 불과했지만, 손 관주의 마음속에서 이 여인은 한평생을 같이 지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현묘관의 명성은 이제 강주 바깥으로도 널리 퍼지고 있다. 현란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도사들과 달리, 손 관주는 도가의 경전을 설파하는 데 능했다.
그런데도 손 관주는 정교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다. 그건 집에 홀로 남겨져 있던 아이가 대문으로 들어서는 가족을 봤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정교랑의 거처로 향하는 내내, 손 관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다 정말 정교랑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쌓였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손 관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쏟았다.
현묘관의 신도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아마 다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반근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 관주를 쳐다보았다.
반근은 손 관주와 정교랑이 인연을 맺기 전에 정씨 가문을 떠났기에, 손 관주를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나마 청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덕에 손 관주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번개가 내리쳐서 소현묘관에 불이 났던 그 순간, 가장 먼저 올라와서 불을 진압했던 게 바로 손 관주였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손 관주는 마음이 정말 선량한 사람이었다.
아씨께 잘해 드리는 사람이라면, 나는 다 좋아.
반근은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가 따뜻한 수건 하나와 차를 내왔다.
“고마워요, 낭자.”
손 관주가 눈물을 훔치며 반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반근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씨, 정말 많이 나아지셨군요.”
눈물을 닦은 손 관주가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건 다 좋아지게 되어 있어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사님이 그렇듯이요.”
손 관주는 간신히 추스른 눈물이 또다시 왈칵 쏟아지려 했다.
정말 신기하지. 나이로 따지면 내가 아씨의 할머니뻘은 족히 될 텐데, 이 소녀 앞에 있을 때면 왜 이렇게 자꾸 주책을 부리는 걸까. 의지할 곳이 필요한 아이가 된 느낌이야. 할머니의 따뜻한 칭찬을 들은 손녀처럼.
“다 아씨 덕분이지요.”
손 관주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건 다 도사님 스스로 얻은 것이고, 나와는 무관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씨께서 도와주고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현묘관은 없었을 겁니다.”
손 관주가 서둘러 말했다.
“돕고 가르치는 것까지는 내 일이지만, 가르침을 깨우치고 그 기회를 잡는 것은 도사님의 몫이지요.”
정교랑이 앞에 놓인 찻잔을 손 관주에게 밀어 주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도사님이 자력으로 얻은 거예요. 누가 하사한 것이 아니니, 도사님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어요.”
정교랑의 말을 들은 손 관주가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었다.
“네, 아씨. 저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습니다. 아씨를 만나게 된 천운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손 관주에게 차를 권하자, 손 관주는 목례를 하고 차와 다과를 먹었다.
“아씨, 저들이 또 아씨를 내쫓으려는 겁니까? 지내실 곳은 염려치 마세요. 매일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도 지펴 놓아서 따뜻하고 습하지 않을 거예요.”
손 관주가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쪽으로 가진 않으려고요.”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한번 보러 오세요.”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씨 저택을 떠난 손 관주가 현묘관에 도착했다. 제자 여럿이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정 아씨를 뵈었나요?”
“사부님, 정 아씨께서 여기서 묵겠다고 하시던가요?”
손 관주에게 우르르 몰려든 제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정교랑에 관해 물었다. 손 관주가 담담한 미소를 보이며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 집에서 아씨를 이곳으로 내쫓으려 하긴 했지만, 아씨께서 오지 않겠다고 하셨다.”
“엥, 진짜요? 만약 그 사람들이 아씨를 강제로 내쫓으려고 하면 어쩌죠?”
제자 하나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자, 손 관주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손 관주가 총채를 가볍게 휙 휘두르고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소현묘관처럼, 이름을 바꿔버리면 되지.”
소현묘관처럼? 이름을 바꾼다고? 무슨 이름으로?
제자들은 손 관주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부님, 사람들에게 경전 설법을 하실 때도 어렵고 아리송한 말들만 하시더니, 이젠 저희한테도 그러시는 거예요?”
도동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투덜댔다. 손 관주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총채로 도동의 머리를 톡 쳤다.
“으이그, 인제 그만 공부하러 가거라.”
손 관주가 웃음기를 걷어내고 엄숙한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남이 가진 것보단 내가 가지는 게 낫지. 하늘에 의지하고 땅에 기댄다 해도,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 두 발로 땅을 딛고 굳건히 서 있고 싶다면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하늘이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 해도 그 기회를 잡을 능력조차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현묘관에서 수련을 시작할 무렵, 정씨 저택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조 집사가 문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아씨, 이곳은 이미 포위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일당십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싸울까요?”
“금가아, 금가아. 가지 마라, 가면 안 돼.”
금가아의 모친이 금가아를 꽉 붙잡은 채 소리쳤다.
“어머니, 가야 해요! 아씨께서 싸우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안 갈 수가 있냐고요!”
금가아가 모친의 팔을 홱 뿌리치며 외쳤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이러면 노야께서 화를 내실 텐데.”
금가아의 모친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이 재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씨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금가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만하시구려. 그냥 가게 두자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남편의 말에 금가아의 모친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네잖아요! 시집가면 결국 시댁에 매여 살 사람이에요. 하지만 금가아가 노야의 노여움을 사기라도 해 봐요. 앞으로 어찌 살라고요! 고작 일백 관에 아들을 내다 팔려는 거예요?”
금가아의 부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소. 금가아를 내다 팔았다 치면 될 일이야! 금가아, 어서 가 보거라.”
금가아가 활짝 웃었다.
“아버지, 수지맞는 결단을 내리신 거예요.”
금가아가 모친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내달렸다. 나가면서도 빗장을 챙기는 일은 잊지 않았다. 금가아를 따라가던 모친도 결국 걸음을 멈춰 섰다.
정교랑이 문밖을 내다보자, 정씨 가문의 하인들과 건장한 여종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네. 저깟 아랫것들과 싸워 봤자 무슨 재미가 있나. 뼈를 다치거나 근육을 상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품위만 떨어지지.”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가세.”
정말 이대로 간다고?
조 집사는 잠시 주춤했다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간대?”
대청 안에 있던 정 대노야가 되물었다. 정교랑을 내쫓는 일에 대해 애써 담담한 척을 하던 정 대노야는 여종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예, 벌써 마차에 짐을 싣고 있습니다.”
여종이 기쁜 기색으로 덧붙였다.
“저희 집안 물건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가져왔던 것만 그대로 가져간답니다.”
그러게 집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겠다고!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고 반나절 내내 들고 있었지만 한 줄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던 책을 내던진 다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누가 그깟 물건이 아깝다더냐? 그 애한테 줘야 할 게 있다면 기꺼이 줘야지. 우린 그 애한테 야박하게 굴지 않아.”
정 대노야의 말에 여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
정 대노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기대 탁자 위에 있던 금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단 저 바보부터 해치우면, 아우 내외도 손보기 쉬워질 거야. 다음 달에 혼사를 치르고 나면, 아우 내외가 꼬투리를 잡을 구실도 없어지겠지. 새해가 되기 전에 기필코 시집을 보내야겠어. 이 재수 없는 운을 다음 해까지 끌고 갈 수야 없지.
정 대노야는 금잔을 내려놓고 조금 전 정교랑이 화살 열 발을 연달아 쏘던 장면을 떠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아름답고 괜찮은 규수인데 말이야. 정말 다 나아 보이던데, 참 아쉽게 됐네.
정 대노야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주씨 가문이 병을 고쳐 줬다는 게 참으로 아쉬워. 주씨 가문에서 고쳐 주었으니, 당연히 주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겠지. 물론 주씨 가문은 저 아이에게 나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일러두었을 테고.
하긴, 주씨 가문에서 가르쳤으니, 저 아이가 저리 괴기한 거겠지.
됐다. 어차피 익사 당할 뻔했을 때부터 저 아이는 이미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게야. 저만큼 키워주고 시집까지 보내주는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도리를 다한 거지.
시녀가 금잔에 차를 더 채우자, 정 대노야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 대노야가 금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찰나, 사환 두 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노야, 노야. 저들이 또 안 가겠답니다.”
“뭐라고?”
정 대노야의 손에 있던 금잔이 흔들리면서, 차 몇 방울이 옷에 튀었다. 정 대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잘 모르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면 저희가 도관까지 호송하려고 했는데, 대문으로 나가질 않고 남쪽으로 갔어요.”
사환이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쪽?
“남정 말이더냐?”
정 대노야의 물음에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길 뭐하러?
정교랑 일행이 남정으로 갔다는 소식은 금세 온 동네로 퍼졌다. 정교랑과 대화를 했던 노인이 남정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가장 먼저 정교랑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씨, 저희가 아직 찾는 중입니다. 정평 그자가······.”
노인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송구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정평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에?
노인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눈으로 짐을 싸서 나온 듯한 정교랑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쪽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죠?”
정교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잠시 앉았다가 가겠다더니, 이번에는 구경을 하겠다네. 그럼 다음번에는 여기서 살려나?
노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유, 그럼요, 그럼요. 아씨께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바닥이 어질러져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노인이 앞장서서 정교랑에게 길을 안내했다. 정교랑 일행은 노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쪽은 땅이 넓네요.”
정교랑의 말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원래 남정과 북정은 한 집안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조상 대대로 살던 집도 이쪽이었지요.”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탄했다.
그들은 골목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저잣거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기에 더욱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로 곳곳에 폐허가 보였다. 그 외에는 사람이 사는 듯하나 단출하고 허름해 보이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 일행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물을 길어서 강을 만들 때, 이쪽 집들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풍수를 보는 선생을 불러왔었는데, 이미 이쪽은 원기가 다 상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예 저쪽으로 옮겨 간 거고요.”
노인의 설명에 정교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떼던 그녀는 잡초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웠다.
정교랑이 주운 것은 부서진 와당(瓦當: 기와의 마구리)이었다.
“아씨, 우리 정씨, 아니, 정씨 가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무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인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연꽃 절지 무늬(꽃까지를 꺾어 놓은 모습을 문양으로 표현한 것)요.”
정교랑이 손에 든 와당을 보며 대답했다. 노인은 정교랑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연꽃 절지 무늬는 정씨 선조의 고택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무늬고, 지금의 북정 사람들은 특별히 선호하는 무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같이 몇 안 남은 늙은이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저 낭자는 어찌 단번에 맞혔지?
저 낭자가 바보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정 대노야께 여쭤도 대답하지 못하실 질문을 저 낭자가 저렇게 단번에 맞히다니.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노인을 향해 손에 쥔 와당을 흔들어 보였다.
노인은 정교랑이 흔드는 와당을 쳐다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파손된 것이지만, 아름다운 연꽃 절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연꽃 절지 무늬.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던 거로군.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똑똑한 낭자일세.
정교랑은 와당을 한쪽으로 던진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노인도 웃음을 지으며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앞으로 걸어가던 그들은 그나마 좀 정돈되어 보이는 집 앞에 멈춰 섰다. 북정의 저택에 견줄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담벼락과 마당이 있는 저택이었다.
“이 늙은이가 사는 곳입니다. 아씨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 한잔 대접해도 될지요?”
노인이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 전부터 정교랑 일행을 구경하러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은 정교랑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한데 모여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정교랑을 위해 자리를 비켜섰다.
노인이 살고 있다던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당에는 늙고 구부정한 매화나무가 서 있었고, 담벼락의 구석에는 푸른 이끼가 얇게 서려 있었다.
노인의 집에서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노인의 뒤로 숨었다.
“집에는 두 사람밖에 없소?”
조 집사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저택은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깔끔해 보이긴 했지만, 살림하는 여인의 손길이 닿은 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예.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떴고, 아들 내외는 역병이 돌던 해에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이 웃고는 자신의 뒤에 숨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외동 손자 하나만 남았지요.”
부인에 자식까지 잃은 슬픔을 상상조차 할 수 있으랴.
하지만 노인의 얼굴에서는 비통함 대신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이 아이를 무탈하게 키워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지경인데도 감사하다고?
반근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
가진 게 많은 자일수록 만족을 모르고, 가진 게 없는 자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구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노인이 탁자 하나를 꺼내자, 어린아이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방으로 뛰어 들어가 주전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가 할게, 내가 할게.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해.”
깜짝 놀란 반근이 재빨리 주전자를 건네받았다. 어린아이는 반근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손을 놓고 다시 노인의 뒤로 숨었다.
“저, 좋은 차는 딱히 없지만.”
노인이 말을 하다 말고 투박한 그릇 하나를 꺼내어 물에 한참을 씻은 뒤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노인은 차를 끓이려고 주전자를 들었지만, 반근이 제지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희 아씨는 차를 드시지 않아요.”
반근은 주전자를 건네받아 그릇에 물을 따랐다.
하긴, 귀한 댁 출신의 낭자니 먹고 마시는 것도 귀하겠지. 이런 것을 드실 리가 있나.
노인은 제자리에 서서 멋쩍은 듯 웃기만 했다. 정교랑은 마당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를 며칠 빌려서 묵어도 될까요?”
정교랑은 노인에게 말하며 조 집사를 흘깃 쳐다보았다. 조 집사가 정교랑의 의중을 파악하고 서둘러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노인에게 건넸다.
“아이고, 아이고,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얼마든 여기서 지내셔도 됩니다. 돈은 넣어두세요. 이건 사람을 찾아드리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조 집사가 아무리 노인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려고 해도 노인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정교랑이 그만하라는 손짓을 하자, 조 집사는 다시 돈주머니를 넣어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집에서 그냥 지낼 순 없어요. 정 돈을 받지 않겠다면, 사람을 써서 집을 하나 새로 지어 줄게요.”
집을 하나 새로 지어 주겠다고?
구경하던 사람들과 노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반근.”
정교랑이 반근을 부르자, 반근이 얼른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수중에 돈이 얼마나 남았지?”
정교랑이 물었다.
“여기 올 땐 일만 관만 가지고 왔어요. 반근 언니가 연말에 돈을 더 부쳐 준다고 했고요.”
반근의 대답을 들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겠네.”
정교랑이 노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인부를 구하고, 자재를 사서 집을 지어요. 돈은 내가 낼 테니.”
일만 관! 저 낭자에게 일만 관이나 있다니!
노인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만 관! 지금 강주성 시세로는 중급 농토 세 묘를 사도 이십 관밖에 하지 않는데, 무려 일만 관이라니!
강주성 좋은 위치에 있는 저택 세 채는 사고도 남을 돈이잖아!
그만한 돈이 있는데도 왜 굳이 이런 누추한 집에서 지내겠다는 거지? 심지어 집을 지어 주면서까지?
지금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아씨, 아씨. 농담하지 마세······.”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교랑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농담이라뇨. 저 넓은 땅이 다 놀고 있는 땅이라면, 제대로 손을 보는 게 낫죠.”
정교랑이 주위에 있는 구경꾼들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힘을 보태겠다는 사람들이 있거든, 한 채씩 나눠 주고요.”
정교랑의 말에 화들짝 놀란 구경꾼들이 일순간 시끌벅적해졌다.
저 살아 있는 보살님이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노인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집을 지어 주겠다고?
남의 돈으로 내 집을 짓는 꼴이잖아! 하늘에서 복이 떨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할게요! 저 할게요!”
구경꾼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그 사람을 향해 다급하게 양팔을 휘휘 젓고는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은 다 당신들 건가요?”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네, 네. 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제대로 가꿀 능력이 없어서요.”
문밖에 있던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노려보며 손짓했다.
“괜히 끼어들어 소란 피우지 마시게!”
노인이 호통을 치자 와글와글 소란스럽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졌다.
그럼, 집을 짓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게다가 돈도 아주 많이 들 텐데, 애들 장난처럼 이리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저 낭자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그런데 옆에 있는 시종들은 왜 저 낭자를 말리지 않는 거지? 되레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잖아?
“어서 가 보자! 그 정씨 낭자가 또 왔대!”
정교랑 일행이 왔다는 소식이 남정 동네 여기저기에 퍼졌다. 집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무슨 일인지 살폈다.
“왜? 왜? 그 낭자가 또 돈을 준대?”
“이번엔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집을 준대!”
집을 줘?
깜짝 놀란 사람들이 노인의 집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안 그래도 비좁던 골목은 더욱 좁아져서 뒤늦게 정교랑을 뒤따라 왔던 정 대노야 일행은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와야 했다.
“비켜! 비켜!”
손에 몽둥이를 쥔 하인 일고여덟 명이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밀치면서 길을 텄다. 하인들을 거느린 정 대노야가 노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조 집사와 주씨 가문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편 집 안에 있던 노인의 짐과 가재도구들은 밖으로 옮겨져 문 앞에 쌓여 있었다. 남정의 어린아이들 몇 명이 그 사이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정교랑, 뭐 하는 짓이냐!”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외쳤다. 마당에 서 있던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리요. 앞으로 여기서 살려고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가 너더러 여기서 살라고 했느냐!”
화가 잔뜩 난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여기, 당신 집이에요?”
정교랑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정교랑, 말썽은 그만 피우거라!”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경고하자, 정교랑이 정 대노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당신 집이 아닌데, 내가 여기 있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 집이라면 내쫓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선, 어디 한번 내쫓아 보시든가요.”
내쫓아 보라고? 내가 못 할 줄 알아?
정 대노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정교랑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저것을 묶어라!”
하인들이 곧장 네 하고 대답하고는 정교랑을 향해 몰려갔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일찌감치 가재도구를 내려놓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의 말 한마디와 함께 그들은 주저 없이 정교랑 앞으로 나서며 방어진을 쳤다.
이때 갑자기 그들 뒤에서 여인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면서 집 안으로 활을 옮기고 있던 시종의 손에서 화살과 활을 뺏어 들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화살을 뽑아 활시위를 당겼다.
현이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빛을 띤 화살이 가장 앞에 서 있던 정씨 가문 하인의 어깨를 스쳤다. 하인은 비명을 악 내지르며 어깨를 잡은 채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땅에서 뒹굴고 있는 시종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북정 저택에서 화살을 쏠 때와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종의 손바닥 사이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정교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동시에 정교랑은 화살 하나를 또 꺼내 들어 활시위에 걸치고 정 대노야를 향해 조준했다.
시끄럽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어깨를 잡은 채 비명을 내지르는 시종의 목소리가 더욱 처절하게 들려왔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정교랑의 화살 끝에 달려있던 날카로운 촉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너, 너, 너 지금 뭐 하는 게냐!”
정 대노야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을 향하는 화살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당신을 쏘지 않았다고 해서, 이번에도 쏘지 않을 줄 알아요?”
“정교랑, 네, 네가 감히! 질녀가 백부에게 무기를 들이대다니, 이건 악역(惡逆: 도리를 어기는 열 가지 죄 중 하나. 부모나 기타 친족 어른을 때리거나 모살한 죄를 뜻함)이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 집사도 침을 꿀꺽 삼켰다.
천으로 두른 화살도 아니고, 날카로운 촉이 달린 진짜 화살로 대노야를 조준하다니, 정말 무시무시한데.
손아랫사람이 친족 어른을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열 가지 죄목 중 하나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형을 집행하는 계절인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대사면에서도 제외되는 무거운 죄였다.
설마 진짜로 쏘는 건 아니겠지?
“대노야, 잊지 마세요. 난 바보예요. 바보가 활로 장난을 치다가 실수를 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 아닌가요?”
자신의 화살에 맞은 사람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정교랑은 흥분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은 채 평온한 표정으로 말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바보 때문에 다치면,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잖아!
정 대노야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저 교활한 것이!
“당신의 바람대로 북정을 떠났으니, 내가 어디에서 묵든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정교랑은 정 대노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죠. 당신, 내 일에, 상관하지 마.”
아씨는 단정하고 예의 바른 분이시니, 이런 상황에서도 험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실 테지.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욕지거리 정도는 해 줘야 통쾌하지 않겠어!
나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예법에 어긋나거나 버릇이 없는 행동을 해도 저들이 관여할 수 없어.
“썩 꺼져!”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 집사가 정 대노야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저, 저 간덩이 부은 놈이!
정 대노야가 남에게 꺼지라는 욕을 들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심지어 손아랫사람의 하인에게!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정 대노야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굴이 익을 듯이 새빨개진 그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정 대노야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자, 활시위 떨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긴 화살 하나가 바로 그의 발치 앞에 내리꽂혔다.
신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화살이 땅에 박혔다. 화살 끝에서 흔들리는 깃털은 마치 한겨울에 만개한 꽃 같았다.
“노야, 노야.”
하인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 대노야를 부르면서 그를 에워쌌다.
하인들의 존재가 빛을 발할 때가 바로 이런 때다. 윗전은 망신을 당하고 잘못을 시인할 수 없지만, 하인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인들은 가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해대는 정 대노야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어깨를 다친 시종을 부축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비명을 지르던 시종이 사라지자, 주위에는 가축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적막감만 맴돌았다.
정교랑이 활을 내려놓고 조 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돈을 가지고 있게.”
반근이 손에 쥐고 있던 비전 증서를 얼른 조 집사에게 건넸다. 조 집사가 망설임 없이 비전 증서를 받았다.
정교랑이 노인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일단, 사람을 데리고 터를 골라서 집 지을 준비를 하세요. 돈은 저 사람한테 받고요.”
정교랑이 조 집사를 가리켰다.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던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
노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가라면 빨리 가요. 아직도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 이 여인이 저 말을 뱉었을 때, 화살 한 발과 함께 사람 하나가 쓰러졌어. 저 여인, 바보라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노인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곧장 문을 나섰다.
“어서 가세, 어서!”
노인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주위 사람들을 재촉하자, 사람들이 노인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흩어졌다.
그러나 노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넋을 놓고 서 있던 손자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노인은 정교랑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이는 것을 잊지 않고, 손자를 챙겨 재빨리 마당에서 벗어났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멍한 눈으로 정교랑과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걸어 모퉁이를 돌 때까지도 아이는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멋있다.”
중얼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도 활쏘기 배울래요. 나도 활쏘기 배우고 싶어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돈 없다.”
세상에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기예가 어디 있겠나. 기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활쏘기와 같은 정교한 기예라면 더욱 그랬다. 나뭇가지나 대나무로 투박한 활을 만들어 쓸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활쏘기를 배우려면 비싸고 좋은 활이 필요했다. 평범한 사냥 활만 해도 이십 문이 넘는데, 말갈기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활줄이 달린 강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육예(六藝)는 배곯을 걱정이 없을 때나 배울 수 있는 거야. 일단 배를 곯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일 무렵, 남정 골목 안에 있던 조그마한 저택은 정리가 끝났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노인의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집 두 채를 빌려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는데, 원래 여기서 지내던 사람들이 어디서 떨고 있진 않겠죠?”
반근이 조 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렇진 않아. 그들이 옮겨간 곳을 직접 확인했는데, 버려진 집이긴 해도 손을 좀 보니까 여기와 비슷하더구나. 집도 짓고 돈도 벌 수 있다니까, 동참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앞다퉈 찾아오더라고. 내가 정계(程計) 그자에게 잘 일러뒀다. 돈 아낄 생각 말고 숯을 많이 사 오라고. 잘 지내던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추위에 떨게 하면, 아씨의 심기가 불편하실 테니.”
정계는 노인의 이름이었고, 노인은 이번 집짓기의 총괄을 맡게 되었다.
“그 사람, 괜찮겠죠?”
반근이 물었다.
“지난번에 정평을 찾으라며 준 수고비를 한 푼도 안 남기고 사람들한테 공평하게 나눠 줬대. 물론, 그것만 보고 단언할 수는 없지. 푼돈 앞에서는 욕심이 없을 수 있겠지만, 큰돈 앞에서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일단 그자 곁에 사람을 붙여 두기도 했고, 금가아가 따라다니고 있으니, 두고 보면 알 거다.”
조 집사가 웃음을 지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 집사에게 새로 사야 할 가구와 수리해야 할 것들을 알려 주었다.
“우리 쪽에도 돈은 충분히 가져왔으니 걱정할 것 없어. 전부 제일 좋은 것으로 바꿀게.”
조 집사가 반근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아씨께서는 좋은 곳에서도,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내실 수 있거든요. 어디서든지 편하게 지내시는 편이세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노인이 문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추 이야기가 다 되어서 아씨의 의견을 여쭤보러 왔습니다.”
노인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반근은 노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낮잠을 자고 일어난 정교랑이 책을 읽고 있었다. 노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교랑은 노인을 안으로 들이게 했다.
안으로 들어선 정계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이 집은 내가 직접 지어서 십몇 년을 살았던 곳이라, 눈을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고작 반나절 떠났다고 이렇게 낯설어질 수가.
방은 기껏해야 이 장 정도 되는 넓이였다. 원래 방 안에 있었던 침상 하나와 서랍 몇 개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사용감이 있는 깔개 하나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낮은 침상 하나와 휘장이 있었고, 옆으로는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병풍 앞에는 팔걸이 의자와 탁자, 향로, 등불이 차례로 놓여 있었고, 벽에는 활이 걸려 있었다.
다소 비좁긴 해도, 아늑하고 따뜻해 보이는 방이었다.
병풍 앞,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은 정교랑이 손에 책 한 권을 든 채 팔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기에, 흰색 버선을 신은 한쪽 발이 치맛자락 밖으로 삐져나왔다.
정계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지만,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으며,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짐승 머리 모양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불 연기가 방 안을 단향으로 가득 메웠다.
내 방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날이 오다니. 이 장식들 때문일까, 아니면 이 여인 때문일까?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며 물었다. 정계가 서둘러 예를 올렸다.
“저, 그러니까, 집 지을 자리를 봐 두었습니다.”
정계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집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지. 장인을 부를까 합니다. 불러도 될까요?”
“불러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씨. 사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정계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정 대노야와 정교랑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이후로, 정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정교랑이 집을 지어 주겠다는 이유에 대해 논의했다.
아무래도 이 어린 소녀가 정 대노야와 사이가 좋지 않아,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밖에서 지내기로 한 것 같다는 게 사람들의 결론이었다. 아예 남정으로 넘어와서 자신의 집을 지어 정 대노야가 간여할 수 없게끔 하려고 말이다.
“당신은 내가 아니니, 당신 생각으로 내 행동을 추측하려 들지 말아요.”
정교랑이 정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계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빈말 따위 하지 않아요.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지, 가식을 떨거나 예의를 차리려는 말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하죠. 다시는 나한테 물어보러 오지 말아요.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요.”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시다니······.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이 흠칫 놀라며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희로애락이 일절 없었던 정교랑의 입에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에 놀랐고, 정교랑의 기분이 무엇 때문에 좋지 않은지 몰라 걱정이었다.
정씨 가문이 아씨를 함부로 대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정씨 가문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아씨를 대해 왔잖아. 아씨께서 갑자기 이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실 리는 없는데.
정교랑이 정계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첫째, 난 당신 집을 잠시 빌려 지내는 거예요. 둘째, 내 돈으로 당신들의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은 단순히 이 이유 때문이고요. 알아들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알아듣긴 알아들었는데, 그래도.
“그렇지만요. 아씨, 무려 집을 짓는 일입니다! 다 아씨의 돈을 쓰는 거잖습니까.”
정계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집을 지어 주는 게 싫어요?”
“당연히 좋죠, 싫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집이 거저 생기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정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거저 생기는 게 아니에요. 나와 내 사람들이 당신들의 집을 빌려 살고 있잖아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머리가 이상한 사람과 대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네.
정계가 손을 한 번 비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씨, 그 돈, 혹시, 혹시 정씨 가문의 돈입니까?”
“그 사람들이 내게 돈을 줄 것처럼 보여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당연히 아니지.
“이건 다 내 돈이에요. 마음 놓고 써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어디서 그런 큰돈이 났담?
정계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씨, 정말로 홧김에 이러시는 건 아니고요?”
정계가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정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책을 펼쳤다.
“난 절대로 홧김에 일을 저지르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 돈, 그 돈은 아씨께서 잘 보관해 두셨다가 다른 곳에 쓰시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시면 그 돈을 허투루 낭비하게 되는 꼴인데요.”
그 말을 들은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돈을 뒀다 뭐 하죠?”
정계는 정교랑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물어봐요. 난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이니까, 어서 가서 집이나 지어요. 어떻게 짓고, 누구에게 집을 나눠줄지는 당신들끼리 알아서 하고요.”
정교랑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정평을 불러서 풍수를 봐 달라고 하면 더 좋겠네요.”
정평? 설마 이 모든 게 그 정평이라는 자와 상관이 있는 건가? 정평 때문에 저 낭자가······.
정교랑을 쳐다본 정계의 머릿속에 이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휴, 됐다. 그만 생각하자.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대로 받지 뭐. 저 낭자가 나중에 딴소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살면 그만이니 손해 볼 것도 없어. 기껏해야 몸이나 좀 굴리는 것뿐이지. 놀고 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데려다가 몸에 열도 좀 내면 좋지 뭐.
어디 한번 해 보자!
“좋습니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정계가 심호흡을 깊게 한 뒤,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목례를 했다.
정계가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잔뜩 긴장해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혹여나 눈이라도 깜빡이면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워,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정계를 쳐다보았다.
설령 이 모든 게 꿈이라 해도, 이런 꿈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꾸는 게 낫지.
“진짜일세.”
정계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탄도 뱉지 못하며 서로의 귀를 의심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정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도 정교랑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민망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진짜라니까!”
정계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목청을 높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진짜야!”
정계가 연달아 진짜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뛸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몇몇은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다들 힘을 내서, 새해가 되기 전에 새집으로 들어갑시다!”
정계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며 외쳤다.
“거리에 나가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읍시다!”
“어르신,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시켜만 주십시오!”
“일단 장부 관리할 사람을 두 명 구해야 해. 자, 계획부터 짜야 하니, 앉아서 제대로 이야기하세. 분담해야 할 일들도 정리하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조 집사와 반근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가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봤어도, 이번처럼 거침없이 돈을 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낭자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야.
조 집사가 혀를 차며 생각했다.
하지만 저 낭자한테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 저 낭자가 손에 쥔 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진귀한 보물이야.
막대한 재물, 부귀와 영화, 뛰어난 재능, 원대한 이상. 이 모든 건 결국 하나뿐인 목숨에 기대어 있기 마련이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가 마당까지 울려 퍼졌다. 마당의 여종과 몸종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여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을 살펴보니, 대청에 있던 탁자와 병풍, 꽃병 등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보인 척을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들어?”
정 대노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밖으로 삐져나왔고, 입고 있던 일상복의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채였다.
“내가 저를 못 죽일 줄 알아? 바보니까 멋대로 굴어도 상관없을 줄 아는 게지? 애초에 요강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인 걸 잊으면 쓰나!”
정 대노야가 넓은 소매를 휘적거렸다.
“바보 시늉을 하며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나라고 그 앨 못 죽일 것 같아?”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새로 지은 경당(經堂)에서 거처로 곧장 돌아갔다. 눈앞의 어지러운 광경을 본 정 대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정 대부인은 여종과 몸종을 불러 안을 치우라 명하고는 정 대노야의 팔을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씩씩대던 정 대노야가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화가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걔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정 대노야가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인들을 데리고 남정으로 갔소. 다 쓰러져가는 남의 집을 주워다가 거기서 살겠다나! 게다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까지 지어 주겠다지 뭐요! 내가 두어 마디 뭐라고 했더니 어쨌는지 알아? 내 하인한테 화살을 쏴 다치게 하더니, 나한테도 화살로 겨눴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팔을 잡으면서 말을 끊었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쪽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고요?”
“맞소. 그렇게 말했다니까. 남정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더군. 걔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그 사람들도 참 생각이 없지. 어떻게 바보의 말을 믿느냐고!”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댔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집을 짓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 애한테 집을 지을 만한 돈이 어딨다고.”
“돈이 있다 해도 남한테 집을 지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어깨를 토닥이며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넸다.
“노야, 일단 화부터 삭이세요. 바보한테 무슨 화를 내요.”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려 정 대부인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화가 나지 않소?”
“진인께서 보우해 주시니, 심신이 안정되어 괜찮네요. 화낼 게 뭐 있어요.”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인이네 어쩌네 하는 게 다 뭐라고.”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정 대부인이 얼른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정 대부인은 합장을 한 채 사죄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 손 관주와의 일을 정 대노야에게 전하며 침상 옆에 놓인 낮은 탁자를 가리켰다.
“경서는 저 위에 올려 두었으니까, 당신도 마음의 평온을 찾아봐요.”
“쯧, 이러니 여인네들이 어리석다고 하지!”
정 대노야가 혀를 차면서 정 대부인의 손을 내쳤다. 정 대노야의 말에도 정 대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나는 안심이 돼요. 그 애도 내쫓았고.”
“이게 어딜 봐서 내쫓은 거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우리 집에 있는 것만 아니면 됐죠.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세요.”
“난 이 망신을 못 견디겠다고!”
정 대노야가 고함을 쳤다. 하지만 정 대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노야, 그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온갖 망신은 다 당하지 않았나요?”
하긴, 그렇지.
정 대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 오늘은 얼굴색도, 기운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여종이 정 대부인 옆에서 아첨을 떨었다.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이번에는 내가 탁자를 엎고 찻잔을 던지면서 화를 내지 않았다는 뜻이지?”
여종은 차마 그렇다고 대꾸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달라.”
정 대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진인이 보우하사,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내 심신은 평온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바보가 무얼 하든 더는 상관이 없어.”
새로운 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 안개가 걷히자, 정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문지기 두 명은 팔짱을 낀 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며 빗자루를 들고 대문 앞을 청소하는 사환들을 구경했다.
어제의 소란은 밤과 함께 사라지고, 정씨 저택은 예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평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때문이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든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수레를 끌며 웃고 떠들면서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씨 저택 앞 거리는 묘회(廟會: 절 앞에 모여 물건을 사고팔던 임시 시장)가 열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북적거렸다.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정씨 저택에는 은혜를 베풀라는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정씨 저택 앞 거리에서 함부로 떠들거나 큰 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났나?
“가서 한번 물어봐라. 막일하는 잡부들이 왜 다 이쪽으로 온 거지?”
문지기 사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곧바로 사환 두 명이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아서 물어보았다. 얼마 후, 사환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집 지으러 왔다는데요?”
집을 지으러 와?
사환의 말을 들은 문지기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교랑과 정 대노야가 남정에서 난리를 피웠던 일은 이미 정씨 저택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헛소리겠거니 했는데, 그 바보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준다는 게 헛소리가 아니었어?
“부인, 부인.”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 대부인은 태평경을 중얼중얼 읊고 있었다. 정 대부인은 밖에서 들려오는 여종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여종이 정 대부인을 부르며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여종을 막으면서 조용히 나무랐다.
정 대부인은 평온한 마음으로 태평경의 한 구절을 다 읽은 뒤, 조심스럽게 경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또 호들갑을 떨어?”
정 대부인이 의자에 앉아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부인, 부인. 저쪽에 정말로 집을 짓는다 합니다. 일만 관! 그 바보 아씨가 일만 관을 내서 집을 짓는대요!”
여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일만 관!
정 대부인이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헛소리냐!”
정 대부인이 외쳤다.
“아니, 아닙니다.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예요. 남정에서 분명히 일만 관이라고 했어요!”
여종의 표정에는 아직도 일만 관이라는 액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일만 관!
“걔가 돈이 어딨다고!”
정 대부인이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씨 가문에서 준 걸까요?”
여종이 추측했다.
누가 준 돈이든 간에, 그 바보가 쥐고 있는 돈이라면 우리 돈이나 마찬가지지! 무려 일만 관이라니!
“큰일 났네. 그 바보에게 남정 비렁뱅이들이 공갈을 친 게야. 노야는? 냉큼 뛰어가서 노야께 알리거라.”
너무 급하게 몸을 일으킨 나머지, 정 대부인이 탁자에 무릎을 세게 박았다. 뼈가 저릿하게 아픈 고통에 울화가 치민 정 대부인은 탁자를 걷어차 뒤엎어 버렸다.
“저건 부숴서 태워 버려라!”
정 대부인이 소리치고는, 여종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대청을 나섰다.
여종들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바닥에 엎어진 탁자를 밖으로 옮기려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 하나가 침상 옆에 놓인 경서를 흘깃 쳐다보면서 소곤거렸다.
“아무리 진인이라도 바보한테는 소용이 없나 보네.”
대청 안에 있던 여종 둘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종들은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고, 서로 장난스러운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탁자를 밖으로 옮겼다.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찾으러 대청에서 나올 무렵, 정 이부인은 이미 정씨 저택 밖으로 나온 후였다.
정 이부인이 남정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교랑이 묵고 있다던 집으로 향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와 울퉁불퉁한 골목길도 그녀의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교랑의 거처 앞에 서 있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 때문에, 정 이부인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교랑, 교랑. 나야.”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한 걸 알고 왔단다. 내, 내가 꼭 너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유롭게 문에 기대어 있던 조 집사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았다.
“부인, 저희 아씨께서는 그쪽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 아씨?
정 이부인이 조 집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해 대노야와 의견이 다르고, 교랑의 아버지인 이노야와 의견을 같이하네. 자네는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됐는지 알고 있는가? 이노야와 내가 교랑을 위해 더 좋은 혼담을 넣으려 하니까, 별안간 대노야 내외가 화를 내서 이렇게 된 것이야.”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 집사를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네 주씨 집안과 우리가 같은 의견이라는 말일세.”
정 이부인이 ‘주씨 집안’이라는 네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정 이부인의 말에 조 집사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사는 또 뭐고, 주씨 가문 이야기는 왜 나와? 어쨌든 아씨가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니 딱히 상대할 필요는 없지.
조 집사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부인, 됐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아씨께서 보지 않겠다고 하면, 못 보는 겁니다.”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손에 쥐고 있던 곤봉을 손바닥에 두어 번 쳤다. 정 이부인과 그녀를 모시던 여종들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듣기로는, 정 대노야가 억지로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바람에 시종 하나가 화살에 맞은 거라던데.
“교랑, 홧김에 이러지 말거라. 네 아버지와 내가 널 꼭 도와줄게.”
정 이부인은 하는 수 없이 문밖에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 돈은 다 네 것이니 잘 남겨 둬. 시집갈 때 혼수로 쓰면 되니까 홧김에 괜한 일 벌이지 말고. 거처는 걱정할 것 없어. 저들이 저택에서 지내지 못하게 하면, 우리가 밖에 집을 구해서 지낼 곳을 마련해 줄게.”
정 이부인이 목을 빼고 소리치고 있을 때, 장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문 앞에 도착했다.
“집사 어른, 저쪽 장인들과도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한번 가서 보시겠습니까?”
장인들이 조 집사에게 공손히 물었다. 조 집사가 아직 뭐라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정 이부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끝내긴 뭘 끝내? 허튼짓 좀 하지 말게! 어린아이야 철이 없어 장난을 친다지만, 어른들까지 이래서 되겠는가!”
순간 모두가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장인들도 불안함과 망설임이 섞인 눈빛으로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남정 사람들은 죄다 비렁뱅이 아닌가. 갑자기 그렇게 많은 집을 무슨 돈으로 짓는다고.
“꺼지시오!”
조 집사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이부인을 향해 호통쳤다. 정 이부인과 여종들은 또 한 차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곤봉을 허공에 휘두르면서 그녀들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정 이부인과 여종들은 비명을 지르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길이 평평하지 못한 탓에, 여종 몇 명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넘어진 여종들은 주씨 가문 시종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된통 얻어맞고는 울부짖으며 도망쳤다.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정교랑의 거처를 찾아오던 정 대노야 부부가 때마침 정 이부인의 여종들이 얻어맞는 장면을 목격했다.
“고약한 것,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놀란 정 대노야가 호통을 치면서 앞으로 사람을 보내려는 찰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치던 정 이부인은 갑자기 눈이 뒤집혔다.
일만 관! 저 바보한테 일만 관이 있었다니! 다 저 사람 때문이야, 지금 저 사람 때문에 일만 관을 잃게 생겼어!
“우리 교랑을 해친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 교랑이 집을 나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뻗고 정 대노야를 향해 덤벼들었다. 정 이부인의 여종들과 정 대노야의 하인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싸우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바깥에서 윗전들끼리 싸우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씨 가문의 체면과 직결된 문제인지라 정 이부인의 여종들은 온 힘을 다해 정 이부인을 끌어안고 막아섰다.
그러나 아무리 막는다 한들, 주위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몰려온 구경꾼들이 정씨 가문의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정 대노야 부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돌아갑시다.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
정 대부인이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 정 대노야를 토닥이며 말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너, 너도 꺼지거라!”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을 가리키며 소리치고는 옷소매를 힘껏 털고 왔던 길로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정 대부인은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울부짖고 있는 정 이부인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는 정 대노야를 뒤쫓아 갔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나더러 꺼지라고 하면, 내가 그래야 해? 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해? 합당한 이유도 없이 날 쫓아내면, 바로 관아로 가서 당신들을 고발할 거야! 우리 팽씨 가문에는 사람 없는 줄 알아?”
정 이부인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부인, 부인. 자중하세요. 여긴 밖입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제지했다.
“밖? 밖이니까 말하는 게야. 세상 사람들도 다 알아야 해! 저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우리 교랑을 내쫓는 것도 모자라서, 나까지 내쫓아?”
정 이부인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말이 통하지 않자 여종들은 아예 정 이부인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남정 골목을 벗어났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조 집사가 입을 벌리고 넋을 놓은 채 서 있던 장인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아직도 내가 가서 봐야겠소?”
조 집사가 물었다. 장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쭈뼛쭈뼛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정씨 가문 부인도 때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집을 짓는 일은 확실히 이 사람들이 주관하는 일이로군. 돈을 내는 사람이 누군지 확실해졌으니,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았어! 벌 수 있는 돈을 안 버는 사람이 바보지.
장인들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문밖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남정 사람들도 뛸 듯이 기뻐하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진짜야. 하늘에서 집이 떨어진다는 게 사실이었어!
조 집사는 시종들에게 문을 잘 지키라는 당부를 한 뒤,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과 방안은 조금 전 바깥에서 벌어졌던 소란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반근은 회랑 아래서 무릎을 꿇은 채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정교랑이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사람들은 다 내쫓았습니다.”
조 집사가 회랑 아래에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 앉게.”
조 집사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앉으라는 정교랑의 말에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답례를 올렸다. 그는 회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감격스러운 얼굴로 정교랑의 분부를 기다렸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정교랑이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말에 조 집사는 잠시 멈칫했다.
하긴, 주 노야께서 일개 하인의 이름을 아씨께 알려줬을 리 없지.
조 집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찰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내 충심을 보여드리기 위해 아씨께 이름을 하사해 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겠군. 출발하기 전, 주 노야께서도 앞으로 아씨를 내 유일한 윗전이라 여기고 모시라고 분부하신 바 있으니.
“소인의 이름이 여간 촌스러운 게 아닙니다. 아씨께서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시는 건 어떠실지요.”
조 집사가 웃으며 물었다. 정교랑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회랑 아래서 걸레질을 하던 반근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반근은 알았다. 아씨는 자신의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들의 이름 또한 궁금해하거나 기억하려고 하는 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얼마나 오고 가든 간에, 아씨에게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씨께서 이름을 궁금해하는 자들은 오직 본인이 생각하기에 물어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나, 보은해야 할 사람이거나, 인정해 줄 만한 사람이었다. 여태껏 아씨께서 먼저 이름을 물어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아씨께서 노비 신분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묻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노비 신분인 자의 이름을 묻는다는 건······.
“아씨, 아씨.”
반근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방문 앞까지 가까이 갔다. 반근이 웃으면서 안에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더 많아지면 구분하기도 어렵고, 남자가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좀······.”
무슨 말이지? 뭘 구분하기 어렵다는 거야?
의아한 얼굴로 반근을 쳐다보던 조 집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반근! 그 많던 반근은 다 이런 식으로 붙여진 거였구나!
조반근······.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아씨, 아씨. 소인은 조(曹)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귀(貴)입니다. 집안에서 넷째라 편하게들 ‘조사’라고도 하지요. 촌스러운 이름이라 부끄럽습니다.”
조 집사가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정교랑이 진땀을 빼는 조 집사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조귀.”
조 집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전혀 촌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자네가 일을 잘하네.”
조 집사가 쑥스러운 듯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심부름꾼 일을 했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주인의 칭찬 한마디에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그때로.
“아씨,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또 뭘 하면 되겠습니까?”
조 집사가 물었다.
“내 어머니께서 남긴 혼수가 쭉 정씨 가문의 손에 있다지?”
정교랑의 물음에 조 집사가 눈을 번뜩였다.
혼수!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조 집사는 정교랑이 정씨 저택을 나가고, 밖에서 소동을 벌이고, 남정에 집을 짓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씨 가문의 체면을 바닥으로 끌어내려 교훈을 주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저깟 아랫것들과 싸워 봤자 무슨 재미가 있나. 뼈를 다치거나 근육을 상하는 것도 아니고.
조 집사는 정교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렇게 끝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진짜는 지금부터야. 아예 손대지 않으면 몰라, 기왕 손을 댈 거면 급소에 일곱 치 깊이의 치명상 정도는 입혀 줘야지.
이거야! 이게 바로 저 낭자의 본모습이지!
“여보, 여보.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요.”
저택으로 돌아온 정 이부인이 눈물을 삼키며 분개했다.
“주씨 가문이 그토록 진심으로 교랑을 대할 줄이야.”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 이노야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일만 관! 내 몇 년 치 녹봉과 맞먹는 돈을! 주씨 가문은 아주 돈이 차고 넘치나 보지, 그런 큰돈을 바보한테 내다 버리다니.
“정말로 그 사람들한테 집을 지어 준다고 하오?”
정 이노야가 물었다.
“그 사람들한테 줄지 안 줄지는 잘 모르겠는데, 집은 정말 짓는 것 같아요.”
대답하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외쳤다.
“집을 짓긴 무슨 집을 지어! 남는 게 집인데, 그 돈으로 점포 하나 정도는 샀어야지!”
일만 관! 무려 일만 관이야!
“안 되겠어요. 아직 짓기 전이니까, 당신이 빨리 가서 그 애를 말려요. 어르고 달래서 여기로 다시 데려오라고요.”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되지도 않는 소리 그만하시오. 칠랑을 시켜 그 짓거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 나서라고? 난 그 애 아버지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단칼에 거절했다.
“잘 생각해 봐요. 그 애를 달래는 건 곧 주씨 가문을 달래는 것과 같아요. 잘 달래서 좋은 집안이랑 혼례를 올리면······.”
말을 늘어놓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외쳤다.
“세상에. 진씨 가문에서 왔다던 여인한테 답을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빨리, 빨리 가야겠네. 그쪽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가 버리면 어떡해!”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라, 몰라.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절대로 교랑을 왕씨 가문에 시집보낼 수 없어요! 난 지금 당장 진씨 가문 사람을 만나러 갈게요.”
정 이노야가 머뭇거리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지금 진씨 가문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말이오?”
“안 될 게 뭐 있어요! 당신 딸이잖아요, 당신이 결정할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들을 필요 없다고요.”
정 이부인은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서둘러 단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문을 나서면서도 그녀는 잊지 않고 정 이노야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도 빨리 교랑한테 가서 잘 얘기해 봐요!”
일만 관.
정 이노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만 관이 문제가 아니에요. 여보, 멀리 봐야 해요, 멀리!”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정 이노야의 표정이 차츰 바뀌어 갔다.
“고작 일만 관일 뿐이야!”
또 다른 탁자가 정 대노야의 거처 바닥에 엎어졌다. 정 대노야가 씩씩대며 탁자를 엎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부엌에 쓸 땔감이 부족할 일은 없겠네.”
마당에 있던 여종 두 명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들은 다른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경고하듯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여종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주씨 가문에서 그 돈을 어떻게 내다 버리든, 우리가 속 쓰릴 게 뭐 있어!”
정 대노야가 말했다.
무려 일만 관인데.
정 대부인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읊조렸다.
속이 쓰리긴 하네.
“됐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요. 우리 같은 어른이 그런 철없는 애랑 똑같이 굴어서 되겠어요? 어차피 다음 달에 시집갈 테니, 기껏해야 며칠 저러고 말겠죠. 돈을 써 봤자, 그 짧은 기간에 얼마나 쓰겠어요.”
다 쓴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 고작해야 일만 관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준 돈도 아니니까, 마음이 좀 쓰리긴 해도 아까울 건 없어. 돈과 관련된 일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도 우리 뜻대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 물론 돈이 없다면 이런 고민도 의미가 없는 거겠지만.
같은 시각, 돈 때문에 속이 쓰린 사람이 또 있었다. 귀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 통사를 보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요? 고작 태창로 전운사일 뿐이잖습니까.”
손난로를 손에 쥐고 커다란 두봉을 두른 귀비가 고 통사와 함께 태후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근래 몇 년간 우리 집안에서 곡물상에 공을 들인 게 다 얼만데요. 이번에는 정말 손실이 막대합니다.”
고 통사가 미간을 좁힌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풍림이 그렇게 대단한 자였나요? 그럼 그 사람한테 언질이라도 하지 그랬습니까.”
귀비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태창로 쪽에 알아서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더니, 생각해 냈다는 게 살인과 방화였지 뭡니까. 뭐,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불만 지르고 사람을 못 죽여 도리어 일만 키웠으니 문제가 되는 거고요. 지금 풍림은 누구 하나 크게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겁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앞으로 나설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풍림의 충의와 청렴을 본 백성들은 그를 청백리라며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태창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황궁에서 그에 상응한 포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난리를 치겠습니까? 이런 시국에 제가 가서 뭐라고 한들, 풍림에게 약점을 잡히는 꼴밖에 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정말 손해 막심이겠네요.”
귀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년에 크게 돈을 버실 생각으로, 조부께서 가산의 반을 내어 곡식을 사 두셨다면서요. 겨울쯤에 태창로에서 곡식 가격을 올리면, 백성들이 조정에 항의하게끔 해서 국고를 풀게 하려고 벼르셨을 텐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귀비의 말에 고 통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습니까. 몸을 사리고 기회를 기다려야죠. 지금 태창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뭐 하나라도 건지겠다는 심보겠지요. 게다가 우리 가문이 여러 사람의 눈엣가시이지 않습니까. 진소 같은 자들은 분명 잠도 안 자며 제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괜히 나서지 마세요. 이번 일에 휘말리면 분명 난리가 날 거예요. 돈을 잃는 건 괜찮아도, 대황자한테 불똥이 튀어선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요즘 폐하께서 이황자를 점점 더 총애하시는데, 우리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고 통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황자가 중요하다는 건 물론 알지만, 고 통사에게는 돈도 중요했다.
겨울에 태창로의 곡식이 다 떨어지면, 내년 봄이나 여름쯤에는 큰돈을 만질 수 있었는데. 족히 세 배는 불려 바꿔 올 수 있었는데! 다 헛수고가 되어 버렸군.
소식을 들은 조부께서는 이미 화병으로 앓아누우신 터였다.
“운도 지지리 없지. 도대체 누가 그런 쓸모없는 놈들한테 돌덩이를 쥐여 준 거야! 불의를 참지 못하는 행인은 무슨! 그런 우연이 세상에 어디 있나!”
고 통사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태후궁 앞에 도착했다. 태후궁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황자가 맨 앞에서 걷고, 그 뒤로 진안 군왕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대황자가 굳은 얼굴로 둘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형님, 나랑 같이 갈래요?”
이황자가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다 전하 때문입니다. 어제 갑자기 폐하께 제 공부를 확인하게 하셨잖습니까. 당장 폐하 앞에서 암송할 책부터 외워야 하니 지금은 못 가죠.”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이황자가 헤헤 웃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토닥였다.
“무서워할 거 없어요, 형님.”
“난 그 책은 벌써 외웠는데. 누가 그렇게 게으름 피우랬나.”
대황자가 끼어들었다.
“전하는 외우는 게 빠르잖습니까. 감히 전하에 비할 수는 없지요. 전하가 하루면 외우는 것을, 저는 사흘씩이나 걸리니까요.”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머쓱한 듯 코끝을 만졌다. 진안 군왕의 말에 대황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마, 고 대인.”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을 보고 예를 올렸다. 대황자와 이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멈춰 섰다.
“육가아, 어디 가니?”
귀비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마마마께 겨울 매화를 따다 드리려고요. 마마께도 따다 드릴까요?”
이황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비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는 이황자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육가아는 참 효심도 지극하지. 항시 황후마마를 생각하다니 말이야. 내게도 따다 준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이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걸음으로 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진안 군왕도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이황자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도 예를 올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귀비가 그를 불러세웠다.
“넌 어디 가느냐?”
귀비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대황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겁에 질린 대황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저는 공부를 하러······.”
귀비가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 넌 할 줄 아는 게 공부 말고는 없지?”
귀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치자, 대황자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고 통사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하, 오늘 날씨가 이리 좋은데, 이황자와 함께 꽃을 따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폐하께도 좀 가져다드리고요.”
고 통사가 웃음 띤 얼굴로 대황자에게 눈치를 주자, 대황자는 두려움이 서린 얼굴로 귀비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가지 않고 뭐해!”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손가락으로 대황자의 이마를 찌르면서 말했다.
“눈치가 어린아이만도 못해서는. 멍청한 것,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당황한 대황자는 울고 싶었지만 귀비가 무서워 울지도 못하고 서둘러 이황자의 뒤를 쫓아갔다.
귀비가 한숨을 푹 쉬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시지요. 아직 어리니 천천히 가르치면 됩니다. 다 우리 대황자가 착하고 올곧아 그런 거잖습니까.”
고 통사가 말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태후궁에서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을 보고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은 궁녀들과 함께 태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멈춰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전하, 오늘은 나가실 겁니까? 폐하 앞에서 그 부분을 외워 심기를 풀어 드린 다음, 저희도 나가서 바람을 좀 쐬는 건 어떨까요?”
내시가 웃으면서 물었다.
“나가면 뭐 해. 재미도 없는데.”
진안 군왕은 별 감흥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출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답답하기는 무슨. 딱 좋은데 뭘.”
내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 소리를 내었다.
“웃긴 뭘 웃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진안 군왕이 내시를 흘겨보고는 뒷짐을 지고 말했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궁에 있는 게 답답해서 항상 바깥으로 나돌았지. 그 사람을 알고 나서는 더욱 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난 뒤로는 어딜 가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궁 안에 있든 궁 밖에 있든 나한테는 매한가지인 게야.”
내시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한 번 더 흘겨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넌 모른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아 늘 변함이 없지. 그 사람을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내 마음은 항상 같아. 그러니 나가든 안 나가든 나에겐 똑같은 거야.”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며 내시를 따돌렸다. 뒤에 있던 내시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저 말씀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지?”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낭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모르겠군. 전하와 같은 마음이려나?”
“아씨, 이건 혼수 목록이고, 이건 점포와 농토 문서입니다.”
조 집사가 문서 몇 개를 정교랑 앞으로 내밀었다.
“노야께서 이것들이 쓰임새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여기 올 때 한꺼번에 가져왔습니다.”
정교랑은 고개만 끄덕이고 문서들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내가 시집을 가게 될 테니, 다 거둬들이게.”
정교랑이 말했다.
역시, 대놓고 깔끔하게 빼앗아 오시려는 거였어. 아씨께서 이렇게 빨리 혼수에 손을 뻗으실 줄은 몰랐네. 아씨의 지난 행보를 보면, 돈에 연연하시는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정씨 가문이 아씨의 화를 돋워서 그런 건가.
반근 말로는 아씨의 기분이 좋지 않다던데, 왜 안 좋으신 거지?
조 집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여인의 마음이란 본디 알기 힘든 것인데, 아씨의 마음은 오죽할까. 정씨 가문은 하필 아씨가 기분이 안 좋으실 때 그 난리를 피우다니, 아주 제대로 당하겠군.
찾아가서 대놓고 달라고 한들 곱게 내어 줄 리는 없겠지. 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아. 아씨가 무기를 쥐어 드셨으니, 절대 빈손으로 물러나진 않을 터.
“예, 알겠습니다.”
조 집사가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