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2권
-작은 의혹-
눈치 빠른 여종이 뒤로 손짓하자, 대청 안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닫힌 문 사이로 정 대부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여종들은 문에서 몇 걸음 더 떨어져 자리를 비켰다.
“한동안 둘이 잘 지내고 있던 거 아니었소? 왜 또 그러는 거요?”
정 대노야가 부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
“잘 지내긴요. 둘째 내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잘 지냈던 적이 있긴 해요? 그 두 내외가 우릴 감시하고 있는데요? 꼭 우리가 그들 혈육을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굴잖아요. 지금은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빌미로 무슨 소동을 벌일지 상상조차 안 된다고요!”
정 대부인이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또 그 바보 때문이군.
정 대노야도 정교랑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고 여겼다.
“바보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 둘이 무슨 소란을 피울 수 있다고 그러시오. 괜한 생각으로 속 썩이지 마시구려. 혼사도 이미 정했다고 하지 않았소? 빨리 치르고 집 밖으로 내보냅시다.”
바보 얘기가 나오자, 정 대부인은 서둘러 울음을 그쳤다.
“노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어제 경성에서 사람이 와서는 그 애한테 혼담을 넣으러 왔다지 뭐예요. 그것도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한꺼번에 다 들고 왔어요.”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씨 가문이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그 집 사람들이 고르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을 골랐겠소.”
정 대노야가 헛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공주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왔던걸요.”
대부인이 말했다.
공주부 진씨 가문!
정 대노야는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뿜어냈다.
보통 대단한 가문이 아니잖아!
비록 강주가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긴 하지만, 정 대노야는 경성의 권문세가와 명망 있는 가문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韓)씨 가문의 자제들이라 하면, 양주(襄州)에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 명문 한씨를 가리켰고, 소(蘇)씨 가문의 자제들이라 하면 글재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분주(汾州) 소씨를 말했다.
진(秦)씨 가문, 특히나 공주부 진씨 가문을 떠올렸을 때 바로 생각나는 것은 단연 천중(川中) 진씨였다.
공주와 혼례를 올렸기 때문에 진씨 가문이 명망 있는 가문으로 거듭났던 것이 아니다. 천중 진씨 가문이었기 때문에 공주가 그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이었다.
정 대노야는 평생 단 한 번도, 감히 천중 진씨와 연이 닿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 대부인이 입에 있던 차를 내뿜고 찻잔을 쥔 채 넋이 나간 정 대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의 옷에 묻은 차를 닦아 낼 정신도 없어 보였다.
“진씨 가문이긴 해도, 다 같은 진씨가 아니잖아요.”
정씨 가문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남정 사람들도 강주 정씨이고, 북정 사람들도 강주 정씨이다. 하지만 두 정씨가 같다고는 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생각으로는 진씨 가문이 주씨 가문과 연이 있는 것 같소? 아니면 그 바보와 연이 있는 것 같소?”
정신을 차린 정 대노야가 찻잔을 내려놓고 옷을 닦았다.
“다 주씨 가문이 짜 놓은 계략이겠죠. 진씨 가문을 어떻게 꼬드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경성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끼리 서로 짜고 치는 거겠죠.”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나 원, 그렇게까지 해서 혼수 말고 좋을 게 뭐 있다고.”
정 대노야가 대꾸했다.
실상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가문이어도 혼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경성의 관리 두 명이 한 과부의 혼수 십만 관을 가지고 싸우는 통에 황제까지 나서서 중재했던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정교랑의 모친이 남긴 혼수는 십만 관의 값어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점포들을 잘 운영해 온 덕에 줄잡아 오만 관 정도의 가치는 됐다.
오만 관. 듣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드는 액수가 아닌가.
정 대부인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에서는 바로 다음 달에 혼례를 올리고 싶어 해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너무 조촐하게 올리진 말고, 적어도 집안 체면은 챙길 수 있을 정도로 합시다. 주씨 가문이 괜히 트집 잡지 못하도록 말이오.”
정 대노야 부부가 혼사를 논하는 동안, 정 이노야 내외도 정교랑의 혼사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오? 진씨 가문이라니!”
정 이노야가 놀란 얼굴로 외치자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확실히 알아본 거예요.”
흥분한 정 이부인은 숨이 차는 듯 손을 가슴에 얹고 말을 이었다.
“누가 혼담을 넣었게요?”
“누군데?”
정 이노야가 물었다.
그런 대단한 집안인데, 설마 정실의 적자까지는 아니겠지? 진씨의 먼 친척 정도만 되어도 횡재지, 횡재.
“정실부인이 낳은 일곱째 적자, 가문 내 열셋째 아들이에요.”
정 이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 이노야가 부인을 흘겨보면서 물었다.
“바보래?”
정 이부인이 그를 밀치면서 성을 냈다.
“바보든 미치광이든 알 게 뭐예요. 진씨 가문이라고요! 무려 진씨 가문!”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외에 다른 가문들도 몇 개 있는데, 다 꽤 괜찮은 가문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칠랑의 혼사까지 결정해 버리는 건 어때요?”
“겉만 봐서는 안 돼. 주씨 가문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잖소. 우리 칠랑을 아무한테나 시집 보낼 수는 없지.”
정 이노야가 말했다. 정 이부인은 이노야의 어깨에 기대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문 중에 적당한 곳 하나 골라서 교랑을 시집보내려고요.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나눠 달라고 하면 조금 나눠 주죠, 뭐.”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관대해졌소?”
정 이노야가 껄껄 웃으며 물었다.
“때로는, 돈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에요. 주씨 가문도 썩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 우리도 지금보다는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부인의 거처 쪽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저쪽은 매일같이 고기를 실컷 먹는데, 우리는 국물도 없잖아요. 왜 우리만 이런 설움을 당해야 해요? 교랑이 이번에 시집을 가면, 어쨌거나 우린 그 사람들과 사돈을 맺게 돼요. 그럼 왕래할 기회도 생기니, 장차 우리 칠랑한테 더 좋은 혼처를 마련해 줄 수 있지 않겠어요? 당신도 앞날이 더 창창해질 기회가 생기고요.”
정 이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런 바보를 시집보내는 건데, 그쪽 집안과 왕래하기엔 우리가 너무 수치스럽지 않겠소?”
“바보는 무슨. 당신이 아직 그 앨 못 봐서 그래요. 지금은 바보처럼 보이지도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꽤 호감이 간다니까요? 주씨 가문도 참 능력이 좋아. 어쩜 저런 애를 싹 바꿔 놨담.”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여종을 불렀다.
“이노야께서 돌아오셨으니, 교랑을 불러오거라.”
“보기 싫소.”
정 이노야가 언짢다는 듯 말했지만, 여종은 이미 문밖을 나간 뒤였다.
정 이부인은 다른 여종에게 아들을 안아 오라고 시켰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정 이노야는 직접 아들을 품에 안아 들고 장난을 쳤다. 세 식구가 화기애애하게 있던 와중에, 정교랑을 부르러 갔던 여종이 홀로 돌아왔다.
“대노야를 뵈러 갔다고 합니다.”
여종이 고했다. 정 이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정 이노야를 밀쳤다.
“봐요, 이것 봐요. 당신이 보기 싫다고 할 때, 저쪽은 벌써 만났잖아요. 어서 가요! 당신 딸인데, 그 사람들이 뭐라고 우리 것을 빼앗아!”
정 이부인의 예상과는 달리, 정 대노야가 먼저 정교랑을 보겠다고 했던 게 아니라 정교랑이 먼저 그를 보러 온 것이었다. 정교랑이 그를 보러 왔다고 하자, 정 대노야는 흠칫 놀랐다.
“날 보겠다고? 날 봐서 뭐해?”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 이 집에 온 첫날부터 당신을 찾던데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보지 않겠다고 전하거라!”
정 대노야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그래도 한 번 봐요. 지금으로서는 그 아이를 보는 건 주씨 가문을 만나는 것과 같아요. 대체 주씨 가문이 그 애한테 뭘 시켰는지는 들어봐야죠.”
“그럼 한번 들어나 보지. 뭘 원하든, 주씨 그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정 대부인이 여종을 향해 손짓하자, 문밖으로 나간 여종이 금세 정교랑을 안으로 들여왔다.
“저 애 좀 보세요.”
정 대부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정 대노야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을 힐끗 보고 말려던 정 대노야는 그녀를 보는 순간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백옥 같은 용모와 짙은 색의 옷, 단정한 자세의 여인이 여유롭고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미인이군!
“저 애는 옛날에 주 노부인이 붙여준 아랫것이에요. 지난번에 주 공자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갔다 싶었는데, 이번에 또 저 아이를 따라왔어요.”
정 대부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정 대노야는 여전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저 애? 어느 애를 말하는 거야?
저렇게 우아한 여인을 두고 다른 곳을 볼 수 있겠나! 저 정도로 아리따운 미인이라면, 천중 진씨 가문에서 혼담을 넣을 만도 하지.
정 대노야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백부님을 뵙겠습니다.”
눈앞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단정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정 대노야는 정교랑에게 답례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어서…….”
정 대노야는 말을 하려다가, 넋이 나간 자신의 모습을 눈치채고 자세를 고쳐 앉은 뒤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앉거라.”
정교랑은 가볍게 예를 한 번 더 표하고 난 뒤에야 허리를 펴고 앉았다. 정 대노야는 마음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집안의 딸들에게 일부러 스승을 모셔와서 예의범절을 가르쳤지만, 아무도 저 여인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내는 사람은 없었어.
기껏 스승을 모셔와서 가르친 게, 저 바보만도 못하다는 건가?
겨우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주씨 가문이 저런 경지에 이르도록 가르쳤다는 거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길래?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썩은 나무가 아니라는 속담도 있는데, 설마 저 바보가, 정말 바보가 아니었나?
어떻게 그런 일이?
“교랑, 네 백부께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정 대부인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정 대노야가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입을 열기 전, 먼저 정 대부인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족보를 보고 싶습니다.”
정 대노야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이 주씨 가문을 대신하여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온갖 상상을 해 봤지만, 정작 여인의 입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그걸 봐서 뭐에 쓰게?”
정 대부인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정교랑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정 대노야가 먼저 물었다.
“경성에서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너도 알고 있었던 것이냐?”
정 대부인은 남편의 질문에 또 한 번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그걸 지금 묻는담?
정 대노야는 자신이 묻고도 놀란 눈치였다.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정말 혼담을 넣으러 왔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정 대부인은 정교랑의 대답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저 애는 당연히 주씨 가문과 사전에 이야기를 다 끝냈겠지.
하지만 정 대노야는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정 대노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교랑, 그럼 네 외숙은 무슨 뜻인 게지? 네 외숙의 뜻을 따를 것이냐, 우리 가문의 뜻을 따를 것이냐?”
정 대부인이 물었다. 그러더니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몸종은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주 단단히 가르쳐 놨나 보군. 걱정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네.
정 대부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저는 제 뜻을 따릅니다. 그러니 백부님, 가문의 족보를 보고 싶어요.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 대부인은 정교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정 대노야의 눈은 번쩍 뜨였다.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하다니. 저 아이는 자신이 정씨 가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 정씨 가문의 자식이 왜 주씨 가문의 말을 따르겠나!
“그 뜻이 있으면 됐다.”
정 대노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향해 외쳤다.
“육문(六門).”
잠시 뒤, 나이 든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부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노야.”
남자가 예를 올리며 물었다.
“데려가서 족보를 보여 주거라.”
정 대노야는 여인이 글자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마디 덧붙였다.
“저 아이에게 읽어 주어라.”
남자는 알겠다고 한 뒤, 정교랑을 힐끗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 대기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노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족보를 보고 어쩔 줄 알고? 그걸 왜 보여 준다고 해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향해 짜증을 냈다.
“주씨 가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씨 가문의 사람이 되겠다잖소.”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걔가 그랬다고요? 언제 그랬는데요? 나만 못 들었나?”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칫했다.
“그, 그러니까 족보를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고 하잖소.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정 대노야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화가 확 솟구친 정 대부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걔가 한 말이라고요? 아니, 당신이 한 말이겠지! 지금 정신이 어디 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맞아,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고작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나는 왜 거기까지 생각을 했지?
하지만 저 여인의 말을 들었을 때는, 꼭 그런 뜻인 것처럼 들렸는데. 그게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이었나? 그럼 난 왜 그리 넘겨짚었지?
저 여인은 첫 마디부터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았어.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단 말이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손아랫사람이 단번에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게다가 저 바보가 어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정 대노야는 이마를 짚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곧 흠칫했다.
족보라. 근래에 족보를 보겠다는 말을 들은 게 벌써 두 번째야. 그 두 번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떨쳐냈다.
있긴 뭐가 있어!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지난번은 경성의 관리였잖아! 그 바보랑 무슨 연관이 있겠어?
아, 참. 지난번 경성 관리는 도대체 무슨 일로 족보를 보러 왔던 거지? 진짜 가장(家狀: 집안 조상과 형제의 행정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왔던 걸까? 변변치 않은 지방 관리의 가장을 확인하려고 경성에서 사람까지 보냈다고?
같은 시각. 이 일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정 대노야만이 아니었다.
경성, 태후궁.
여러 사람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 참, 전하.”
관복을 입은 고능준이 한쪽에서 이황자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진안 군왕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호부 소속의 곽전(郭全)이라는 자를 아시는지요?”
고능준이 웃으며 묻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판관이라지요? 누구한테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쪽 옆에 단정히 앉아 있던 대황자를 보며 물었다.
“아, 전하께 그 얘기를 들었던 것 같네요. 조회에서 무슨 일을 언급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황자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귀비가 먼저 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가 무슨 나랏일을 안다고 그래요. 뒤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조회를 참관하는 대황자가 다른 사람과 조정의 일을 멋대로 논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눈치 빠른 고능준은 별말 하지 않고 곧바로 웃으면서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대황자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 주제라면, 당연히 말을 돌릴 수밖에.
진안 군왕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이황자와 바둑을 두었다.
“그 사람이 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태후가 물었다.
“아, 별것은 아니옵니다. 전해 듣기로는,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사람을 시켜 한 지방 관리의 가장을 조사하게 했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태후에게 대답했다.
“그게 뭐 이상하다고. 아무나 가장 조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호부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 아니더냐. 폐하를 대신하여 사람을 잘 관리하는 것 말이야.”
태후가 웃으며 말하자, 주위 사람들도 태후를 따라 웃었다.
“마마, 호부에서 그 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능준이 가볍게 말했다.
“음, 그거 하나라도 잘 해내면 다행이지.”
태후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후궁에서 조정의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태후는 곧 화제를 돌려 주위 사람들과 환담을 즐겼다.
잠시 뒤, 태후의 휴식을 위해 사람들이 예를 올리고 밖으로 물러났다.
“전하, 뛰지 마시고 천천히 가세요.”
태후궁의 문을 나온 뒤, 이황자는 곧바로 진안 군왕을 잡아끌고 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라 보폭이 좁다 보니, 내시들은 이황자를 금방 따라잡았다.
“빨리요, 빨리. 부황을 뵈러 가야 한다고요.”
이황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황께서는 아직 조정의 일로 바쁘시니, 괜히 성가시게 굴지 말아라.”
대황자가 말했다. 이황자가 고개를 돌려 대황자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부황께서 오라고 하셨어요.”
“폐하를 너무 보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오라고 하신 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이황자가 잡은 팔을 살짝 당겨 이황자의 걸음을 늦췄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말을 거들자, 대황자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이만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대황자가 고개를 돌려 귀비와 고능준을 쳐다보자, 귀비가 대황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가 보거라.”
“역시 전하께서는 성실하시군요.”
고능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황자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몸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황자들이 자리를 뜨자, 귀비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귀비가 멀어져가는 이황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육가아가 영리하니, 폐하의 사랑이 날로 커지네요.”
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태후궁을 나온 귀비는 황궁 밖으로 나가려는 고능준과 잠시 걸었다. 내시들은 두 사람이 대화하기 편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귀비의 말을 들은 고 통사(通使)가 웃음을 지었다.
“막내아들이다 보니, 더 귀여움을 받는 것이겠지요.”
고 통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지금 궁에 있는 건 대황자와 이황자뿐이었다.
현비가 황자를 한 명 낳을 것으로 알았지만, 낳고 보니 딸아이였다. 하지만 손이 귀한 황제에게는 딸아이도 몹시 귀했다.
귀비가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걸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이황자가 황후마마의 간병을 지극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어린 이황자가 조그마한 의자를 밟고 황후마마께 약을 먹여 드리기도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 드린다지요.”
고 통사의 말에 귀비의 입꼬리가 점점 더 내려갔다.
“소식이 빠르긴 하네요. 내가 보기에는 황후의 몸이 쉬이 나을 것 같진 않던데. 어떻게든 미리 이황자의 기를 세워 주려는 거겠죠.”
“귀비께서도 대황자에게 가르침을 주심이 어떠신지요? 너무 공부만 하지 말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자신에게 엄격한 건 좋지만, 실상 황실의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황자들은 많이 아는 게 관건이 아닙니다.”
고 통사가 말했다.
“애초에 공부하라고 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귀비가 불쾌한 티를 내자 고 통사가 쯧쯧 혀를 찼다.
“급할 게 뭐 있습니까.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고 통사가 이황자와 진안 군왕이 간 방향을 내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만, 저놈이 어린아이가 아니니.”
“어차피 내년이면 출궁해서 봉지로 가잖습니까. 한량처럼 왕야로 살다가 죽을 운명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귀비가 고 통사의 말을 끊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태후와 폐하께서 저놈이 아쉬워 출궁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보기와는 다르게 만만한 놈이 아닌 것 같아요. 알고 지내는 사람도 워낙 많고요.”
고 통사가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말했다.
“경성에서 지낸 게 얼만데, 아는 이가 많은 게 당연하죠.”
귀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느덧 두 사람은 갈림길에 다다랐다.
“다른 사람은 됐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우리 대황자예요.”
귀비가 말하자, 고 통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소신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귀비의 귀에 책을 읽는 대황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는 이 소리가 너무도 즐거웠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마마, 마마.”
귀비가 돌아온 소리를 들은 대황자가 책을 품에 안고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귀비에게 달려갔다.
“소자가 이틀 만에 이 책을 다 외웠습니다. 제가 마마께 암송해 드릴게요.”
대황자가 손에 쥔 책을 귀비에게 내밀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귀비는 손으로 탁 하고 책을 내쳤다.
“그놈의 책을 외웠다, 책을 외웠다! 허구한 날 한다는 게 책 외우는 것밖에 없느냐? 네가 또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안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대황자는 어쩔 줄을 몰라 맹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귀비는 맹한 대황자의 얼굴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 멍청한 꼴을 좀 보거라! 육가아보다도 못한 놈! 너는 그 애처럼 부황의 환심을 사는 게 그리도 어렵더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 대황자는 금방이라도 소리 내어 울 태세로 입을 쭈욱 벌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귀비가 소리쳤다. 대황자는 귀비가 무서워 차마 울음을 터트리지는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음을 꾹꾹 참았다.
“너는 왜 네 부황께 가지 않느냐?”
귀비가 물었다.
“부, 부황께서 오라고 하지 않으셔서요.”
대황자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그럼 육가아는 왜 오라고 했을까?”
화가 잔뜩 난 귀비가 이를 깨물고 대황자에게 표독하게 말했다.
“이 아둔한 것아! 조금만 더 있으면, 네 부황이 육가아만 싸고돌 게야. 그럼 너는 진안과 함께 봉지로 쫓겨나 평생 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겠지!”
대황자는 결국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듣기 싫다. 울지 말고 저기 가서 서 있거라!”
울음을 터트리는 대황자를 본 귀비는 더더욱 화가 나서 구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황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 구석에 가서 흐느꼈다.
귀비궁 밖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