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60)

-정평-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여종이 문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놀란 정 대부인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통에, 정 대부인은 현기증이 일고 갈비뼈 쪽에 통증을 느꼈다.

“또 무슨 일인데?”

정 대부인이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정 아씨께서 다른 사람과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창백해진 얼굴의 여종이 대청 안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어느 정 아씨 말이더냐?”

정 대부인이 호통쳤다.

감히 내가 쉬는 것을 방해하다니, 다시는 정 아씨로 불리지 못하게 해 주마!

“정교랑 아씨요.”

여종이 재빨리 대답했다.

집안의 서열대로 부르지 않으니, 부르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군.

“그 애가?”

정 대부인이 경악했다.

“네, 네. 어찌 된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주씨 가문의 시종들을 데려다 그 사람을 둘러쌌답니다. 지금 강가에 있어요.”

집 밖에서 싸움을 벌였다고? 우리 정씨 가문이 그런 망신을 당한 적은 일찍이 없는데!

갑자기 밀려드는 통증에 정 대부인은 갈비뼈 쪽을 꾹 눌렀다.

이런 재수 없는 것! 집에 들어온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집안 꼴이 말이 아니네. 이러다가는 해가 바뀌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겠어!

“당장 노야를 집으로 모셔 오거라. 이번 달에 혼사를 치를 거라고!”

정 대부인이 고함을 치고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종들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집을 나설 무렵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이 강가에 몰려 있었다.

골목 안에서는 주씨 가문 시종 열댓 명이 몇 사람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험상궂은 표정을 한 시종들은 당장이라도 싸울 태세였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은 전부 정씨 가문의 하인 거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또 조 집사의 지시하에, 시종들은 정씨 저택 네 개의 문에서 항시 대기해야 했다.

정교랑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주씨 가문의 시종 둘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정교랑이 갑자기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골목 안으로 뛰어가는 것을 본 두 시종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한 시종은 곧바로 정교랑이 뛰어가는 곳을 향해 달려갔고, 다른 시종은 재빨리 가까운 저택의 문을 찾아 근처에 있던 나머지 시종을 부르러 갔다. 그 덕에 눈 깜짝할 사이 정교랑에게는 든든한 호위 한 명과 곧 몰려올 지원군들이 생기게 됐다.

조 집사와 다른 시종들이 골목에 도착했을 무렵, 정교랑을 향해 언성을 높였던 사내는 정교랑을 따라갔던 시종에 의해 바닥에 제압된 상태였다. 나머지 사내들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에게 달려든 시종의 기세에 압도되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조 집사가 눈앞의 사내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그쳤다. 거구의 사내 여섯 명은 햇병아리처럼 몸을 덜덜 떨면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놀라 죽을 뻔했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갑자기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바닥으로 때려눕히다니. 아니, 먼저 우리한테 소리를 지른 건 저 여자라고! 억울해 죽겠군!

북정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남정 사람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네.

이럴 줄 알았으면 사기당했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기껏해야 돈 일 문에. 이 사람들 기세를 봐서는, 흠씬 얻어맞는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요. 정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사내들이 중구난방으로 외쳤다. 조 집사는 사내들의 애걸하는 모습이 흡족한 듯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씨, 저자들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걸 말하랬나?”

정교랑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쭈그려 앉은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 누구죠?”

정교랑이 물었다.

찾는 사람?

사내 중 하나가 사실대로 대답하려던 찰나에 영리해 보이는 다른 사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없어요. 저희는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길을 잘못 든 겁니다요!”

사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똑똑한 놈일세. 아씨께서 애매하게 물은 질문을 잘도 알아듣고 대답했어!

사내의 영리함에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쪽이, 날 오해한 거예요.”

오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좀 전에 저 낭자가 거기 서라고 한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사기꾼을 향한 거였나?

저 낭자가 그 사기꾼을 도와주려고 나서는 거라고 오해하지 않았더라면, 한 대 얻어맞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 사기꾼 놈이었겠지.

“그럼 똑바로 말했어야지!”

한 사내가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교랑의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

“네 놈이 감히 누구한테 소리치는 것이냐!”

사내는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저런 무식한 시종을 데리고 다니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안 되지. 오해를 사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 남자는 누구죠?”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이쪽 남정 사람입니다.”

사내는 정교랑이 원하는 대답을 명료하게 내뱉고는 남정 골목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정평이라는 자고요.”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대답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정평?”

정교랑은 사내가 말한 이름을 되물었다.

사내는 아름답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진 이 여인의 되묻는 말이 어쩐지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하다고 느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대답에 대답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정평입니다.”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평!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 안을 향해 들어갔다. 갑자기 휙 가버린 정교랑을 보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우왕좌왕했다.

“어서 따라가거라.”

조 집사가 서둘러 시종들을 향해 지시하고는 자신도 골목 안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소매를 팔뚝 위로 깔끔하게 걷어 올렸다.

잡아야 할 사람을 아직 못 잡은 거로군.

시종들은 조 집사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여섯 명의 사내들이 서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는 어떡하지?”

“도망쳐야지.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 줄 사람들처럼 보이디?”

사내들은 그제야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구경거리는 사라졌지만, 구경꾼들은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사람들 앞을 단단히 막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쪽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정 대부인이 여종들과 함께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정교랑과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구경꾼들이 서로 손짓을 해가며 웅성대는 모습에 정 대부인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종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히 고했다.

“부인, 듣기로는 한 사내 때문이라고.”

사내 때문이라니!

대부인이 갈비뼈 주위를 다시 꾹 짚었다. 귓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차라리 내가 저 강에 빠져 죽는 게 낫겠어!

나무토막과 낡은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초가집이 늘어선 이곳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이런 곳에 갑자기 화려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자, 골목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밖으로 나와 구경했다. 어떤 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힐끗거리기만 했다.

정교랑이 갑작스럽게 뛰어갈 때, 그녀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던 정씨 가문 여종들은 당황한 나머지 이리저리 흩어지며 몸을 숨겼다. 그래서 여종들은 정교랑 일행이 남정의 골목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그들 일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씨 가문 여종을 대동하지 않은 정교랑과 우람한 체구의 주씨 시종들은 남정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낯선 존재들이었다.

고급스러운 옷감, 커다란 두모 아래로 반만 보이는 얼굴만 보아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소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미모의 시녀와 우람한 시종들. 타향 말씨.

저런 사람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사람을 하나 찾습니다.”

조 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굴 찾으시오?”

연로한 노인 하나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더니 긴장한 기색으로 예의를 갖춰 물었다.

“정평이라는 자입니다.”

조 집사가 대답했다.

정평?

주위의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처럼.

“정평? 이쪽에는 그런 사람이 살지 않소.”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는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북정으로 가서 알아보는 게 어떠시오?”

대충 보아도 돈깨나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니, 찾는 사람도 그러하겠지. 다 같은 정씨라고는 하나 남정에는 돈 있는 사람이 없어.

“사기꾼.”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욕을 하는 건가?

“사기꾼을 찾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 사기꾼 놈을 찾는 거로구먼!”

“그놈 이름이 정평이었어?”

“사기꾼이 또 사고를 쳤나 보네. 글쎄, 내가 그때 걜 여기 남겨 두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정교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찾을 수 있겠네.

“그 사람은 어디에 살죠?”

정교랑이 물었다.

“아, 그놈이요? 아마 소 낭자 댁 헛간에 살았던 것 같은데.”

노인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며칠 전 큰바람이 부는 통에 소 낭자네 헛간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땔감으로 가져다 썼대요. 그놈은 아직 묵을 곳을 못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재워 줄 집을 찾는 것 같던데요.”

구경꾼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아가씨. 혹시 그놈이 돈 떼먹었어요? 그놈 성씨도 정씨이긴 하지만, 우리랑 다 같은 식구는 아니에요.”

누군가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교랑이 가볍게 손짓했다.

“찾아.”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한 조 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현상금을 걸겠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오면, 이 돈을 드리겠소.”

조 집사가 허리춤에 달려있던 돈주머니를 풀어 높게 들고 흔들었다. 금테가 수놓아진 돈주머니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 더없이 빛났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골목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등을 떠밀며 골목 안으로 뛰어갔고, 노인들도 뒤처질 수 없다는 듯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빗자루며, 옷이며, 손에 쥐고 있던 물건들을 냅다 던지고는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교랑 일행이 들어간 골목을 찾아낸 여종들은 갑작스럽게 몰려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여종들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남정 사람들이 정씨 부인들의 최측근인 여종들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멀리서라도 여종들이 보이면 근처로 쏜살같이 달려와 아부를 떨던 사람들인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명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여종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앞만 보고 내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수라장이던 골목 안은 조용해졌고, 그곳에는 오직 정교랑 일행만이 남아 있었다.

“아씨,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조 집사가 뉘 집에서 땔감으로 쓰려고 마련해 둔 건지 모를 나무 그루터기를 옮겨와 자리를 마련했다. 정교랑이 치마를 모아 자리에 앉았다.

뭘 기다리는 거야? 설마 진짜 그 남자를 기다리는 건가?

정씨 여종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종 중 한 명이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씨, 부인께서 찾으세요. 일단 돌아가시죠.”

“아직 할 일이 있어. 일이 끝나면 뵈러 가겠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디서 감히!

여종들은 경악했다.

정씨 가문의 여식일 경우,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라면 몇 마디 더 재촉하여 집으로 데려가고 말귀를 못 알아듣고 떼를 쓰는 아이라면 아예 양쪽 팔을 붙잡고 힘으로 끌고 가야 했다. 지금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지만, 그녀 주위에서 삼엄하게 호위를 하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여종들은 확신했다. 자신들이 저 아씨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이 시종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산 채로 잡아먹으리라.

여종들은 제자리에 서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정교랑 일행은 여종들의 걱정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정평이라는 자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골목 사이에서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석양이 질 무렵까지 정평이라는 자를 찾아낸 자는 없었다.

“낭자, 그놈은 분명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쫓기는 게 익숙한 놈이라 숨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을 테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지요. 저희가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맞아요, 아씨. 일단 돌아가시지요.”

이때다 싶은 여종들이 거들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그럼, 그 사람을 계속 찾아주세요.”

정교랑은 이 말을 남긴 채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조 집사가 손에 있던 돈주머니를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해가 떨어진 시간이라 사위가 어두웠지만, 노인은 양손으로 정확하고 잽싸게 돈주머니를 받아냈다.

“만약 찾게 된다면, 돈을 더 드리겠소. 이건 수고비요!”

조 집사가 말했다.

이 주머니만 해도 족히 일 관은 되겠지? 이렇게 많은 돈을 수고비로 쓰다니! 손이 엄청 크시네!

골목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컴컴해진 저녁이 되어서야, 커다란 두봉을 두른 소녀는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성큼 골목을 벗어났다.

“저 사람은 누구요?”

노인이 물었다.

“대부인과 이부인의 여종들이 깍듯이 모시는 걸 보니, 분명 중요한 귀빈 아닐까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정평이라는 자를 찾는 데에 혈안을 올리느라 뒤늦게 도착한 여종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령 여종들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새도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진정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소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여종들을 알아봤다.

“생각났어! 이틀 전에 돌아온 정씨 가문의 바보야! 분명히 저 옷을 입고 있었어!”

누군가가 외치자, 이틀 전의 광경을 떠올린 다른 사람들도 그 바보의 모습을 생각해 냈다.

“맞아, 맞아. 나도 기억하네. 저 시종들!”

“그렇네. 그 낭자가 확실해! 그때 내가 선녀 같다고 생각했던 그 여인!”

“어딜 봐서 바보라는 거야? 북정 사람들 눈이 삔 거 아니야?”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남정의 밤도 꽤 소란스럽겠지만, 북정의 밤 또한 남정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도대체 누구래?”

집으로 돌아온 정 대부인은 앉을 힘도 나지 않아서 줄곧 침상에 앓아눕고 밥도 삼키지 못했다.

뒤늦게 정교랑 일행을 따라 돌아온 여종들을 향해 정 대부인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더냐?”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찾고 있는 남자는 작년에 강주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종이 대답했다.

“작년?”

정 대부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정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게야? 그런데 어떻게 여기 살고 있어? 냉큼 내쫓아 버려라!”

“소인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듣기로는 촉주(蜀州)에서 온 사람이라는데, 노야께서 그 사람이 여기 사는 걸 허락하셨대요. 허구한 날 하는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기 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고, 이집 저집 헛간을 전전하며 지내는 사람인지라 남정 쪽에서도 성가신 존재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 코 묻은 돈까지 떼먹는다고.”

여종이 말했다.

그런 놈을?

정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교랑한테도 사기를 친 게야?”

“아니요, 부인. 아씨는 이곳으로 온 지 이제 사흘밖에 되지 않았고, 오늘이 첫 출타신걸요.”

여종이 단호하게 부인했다.

하긴, 그렇지.

정 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생김새는 어떻디?”

여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꼭, 꼭 정교랑이 무슨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물어보시잖아?

“부인, 그런 놈의 생김새가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여종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놈이면 뭐 어때? 바보인데. 지금 아무리 나아졌다고 한들, 바보는 바보야. 보통 사람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테니, 깊이 생각하지 못하겠지. 겉보기에만 좋으면 좋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잘 지켜보거라. 또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일 없도록.”

정 대부인이 말했다.

지켜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문제인데.

여종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손짓하자, 여종들은 서둘러 물러났다.

휘장을 내리고 등불을 끈 실내는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정 대부인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며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끊임없이 뇌리에 스치자, 정 대부인은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는 피곤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이제 막 대문을 넘어서던 정 이부인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정 대부인과는 다르게,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이야기를 들어도 시종일관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사람을 찾는대? 그럼 찾으라고 해. 우리 교랑이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찾아야지.”

여종들이 웃었다.

“부인, 부인께서는 오늘 진씨 가문에서 온 여인들을 찾으셨나 보네요.”

정 이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아니 뭐, 근처 점포에 새로 들어온 옷감이 있나 보러 간 건데, 그 사람들이 날 붙잡고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하지 뭐야.”

정 이부인은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말했지만, 얼굴에 핀 웃음꽃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정 이부인을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아 있었던 여종이 물었다. 정 이부인이 풉 하고 웃었다.

“나 같은 여인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들이 한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걸. 노야께서 돌아오시면 얘기해 봐야지. 어쨌든 노야의 맏딸 혼사잖아. 난 끼어들지 않는 게 더 나아.”

정 이부인은 ‘노야의 맏딸’이라는 다섯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여종들은 정 이부인의 말뜻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미리 축하드려요, 부인.”

여종들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어허, 헛소리하지들 말거라. 저리 가, 가거라.”

정 이부인은 일부러 언짢다는 듯한 손짓을 하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야. 주씨 가문이 이렇게 손이 클 줄이야! 어쩐지 혼수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않는다 싶었어. 그들은 인맥을 더 중요하게 여긴 거야!

내 평생 구경도 못 할, 그런 지체 높은 집안과 맺어져 봐. 그런 인맥만 생긴다면 우리 집안도 급이 달라지는 거야. 그깟 돈 몇 푼이 얼마나 한다고. 이 어마어마한 인맥만 잘 맺어 둘 수 있다면, 아무도 교랑의 혼수를 노리지 못하겠지!

내 손에 들어오는 건 혼수뿐만이 아니야. 내 자식의 혼삿길도 훨씬 나아지겠지! 공주부 진씨 가문이 나으려나? 아니면 그 무슨 봉례랑(奉禮郎: 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이를 관장하던 집사관) 가문이 더 나으려나? 아니지. 관찰 판관 댁은 어떨까?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비녀를 빼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정 이부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 잠이 올 수가 있나! 얼른 내일이 와서, 되도록 빨리 노야가 이 일을 결정하셨으면!

밤잠을 설치는 사람은 정씨 가문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한 왕 부인은 온몸이 쑤시도록 피곤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신을 반기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왕 부인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역시 어머니께서는 절 위해서 뭐든 해 주실 줄 알았어요.”

왕십칠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리 큰일도 아닌데.”

왕 부인이 미소를 쥐어짰다.

“그러니까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왕십칠이 왕 부인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며 물었다.

“아이고, 어머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왕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기는 처음인지라 분명 빈틈투성이일 텐데, 이대로 사실이 탄로 나기라도 한다면.

“요 며칠 제 일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다니시느라 힘드신 거죠? 어머니, 어서 좀 쉬세요.”

왕십칠이 속상함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꿇어앉아 왕 부인에게 예를 올렸다. 왕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더욱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도 어서 가서 쉬거라.”

왕 부인의 말에 왕십칠이 곧바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소자도 쉬러 가겠습니다.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지 한참 됐거든요.”

왕십칠은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펄쩍펄쩍 뛰면서 밖으로 나갔다.

“푹 자야겠다. 아주 단잠을 자겠어.”

왕십칠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안에 있던 왕 부인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

옆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 노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십칠한테 언제까지 숨길 셈이오?”

왕 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숨기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우리 십칠이 기뻐서 날뛰는 것 좀 봐요.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저 애는 진짜 미쳐 버릴 거예요.”

왕 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바로 다음 달이면 혼례를 올릴 텐데, 신랑이 이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 아니오. 싫다고 해도 밧줄에 꽁꽁 묶어다가 신방에 밀어 넣으면 그만일 새색시도 아니고.”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겨요.”

왕 부인이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저 놀란 것일 뿐이니, 며칠만 지나면 다 잊겠지. 때가 되면 어르고 달래서 혼사를 성사시키면 그만이야.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혼례를 올리고 아내를 맞이하라는 것뿐이잖소.”

왕 노야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발 그러길 바라요.

왕 부인은 아예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쓰게 웃었다.

“이게 다 당신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 거잖소. 생각 그만하고 쉬시오. 당신도 피곤할 텐데.”

왕 노야가 먼저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에 잠이 와?

왕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왕 부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만물이 고요해졌다. 연못 주위에는 석가산과 산석이 많은 탓에, 다른 곳과 다른 바람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바람 소리가 창가를 스치자, 반근의 눈이 떠졌다.

연못가에 있는 이곳은 겨울을 나기에 썩 좋지 않은 곳이야. 아씨께서 오래 계실 예정이라면, 다른 거처를 알아봐야겠어.

겉옷을 걸친 반근은 등불을 켜고 휘장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시선이 침상에 닿자, 반근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시간쯤이면 언제나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잠들었을 정교랑이 옆으로 돌아누운 채 반근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반근이 들고 있던 등불로 정교랑 쪽을 비추자, 정교랑의 두 눈은 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아씨,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반근이 서둘러 등불을 든 채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잠이 안 와서.”

정교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이 안 온다고?

반근은 깜짝 놀랐다. 정교랑이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유 교리가 협박해 올 때도, 도련님들이 죽기 직전의 위기를 맞았을 때도 아씨의 잠자리는 늘 평온했는데.

그 사람 때문인가?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반근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아씨. 혹시 그 사람, 아시는 분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창틀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온 밤바람에 등불과 휘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등불을 본 정교랑이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인지 보지도 못했는걸. 단지 난 그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야.”

이름을 안다고?

반근은 놀랐다. 정교랑이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맞아, 그 이름을 알아. 내 기억으로는, 두 번째로 생각해 낸 이름이야.

첫 번째 이름은 정방, 그건 내 이름.

“그럼 그 이름은 누구 건데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이 말없이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목이 마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설마 아씨께서 긴장하시는 건가?

더욱 놀란 반근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을 한 그릇 따라 왔다.

정교랑은 물그릇을 쥐고 천천히 물을 마셨다. 반근은 방석 위에 꿇어앉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씨, 책 읽으실래요?”

반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어서 아씨께 책을 읽어드리지도 못하네요.”

반근이 한숨을 쉬면서 말을 덧붙였다.

“반근 언니가 여기 있었다면, 읽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풀이 죽은 듯한 반근을 보며 정교랑이 웃었다.

“밤에는 못 읽게 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잠시 생각하더니, 기쁜 듯 손뼉을 한 번 쳤다.

“아, 맞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어요. 아씨, 제가 반근, 아니 청매의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러 다녀올까요?”

반근이 물었다.

“청매가 누구야?”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이 멈칫하더니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아씨, 정말로 저희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름은 이름일 뿐, 중요한 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 중요한 건 사람이야.

이름은 알겠는데,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어떤 사람일까?

돌연 정교랑이 말을 멈췄다.

그게 만약 진짜라면, 진짜라면!

꼿꼿하게 허리 세워 앉아 있던 정교랑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손이 덜덜 떨리는 탓에, 손에 쥔 물그릇도 함께 흔들려 물 몇 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다급하게 정교랑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한 반근은 속으로 자책하느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왜 또 이름 얘기를 꺼냈을까. 난 정말 바보 멍청이야. 다른 반근이었다면, 분명 나처럼 아둔하지 않았겠지.

반근이 힘을 주어 물그릇을 간신히 정교랑의 손에서 빼냈다.

반근은 끝내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반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교랑의 어깨와 등을 하염없이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해가 밝아오자, 강주부의 거리가 한껏 분주해졌다.

“없어. 여기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아닌데?”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닭이 울자, 골목 전체에 닭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야?”

집에서 뛰쳐나온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해진 옷을 입고 닭장 옆에 서 있던 어린아이 두 명은 여인을 보자마자 잽싸게 도망쳤다.

“아침 댓바람부터 닭을 훔치러 와?”

여인이 빗자루를 들고 몇 걸음 쫓아갔지만, 아이들은 벌써 모퉁이를 꺾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왔고, 난장판이 된 닭장 사이에서 닭의 수를 세어 보고는 도둑맞은 닭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여인은 집에 있던 남편을 시켜 닭들을 다시 잡아다 닭장 안에 넣도록 하고, 자신은 건초 더미에 손을 뻗어 건초를 한 줌 집으려 했다.

그런데 건초를 집기도 전에 웬 사내의 하품 소리가 건초 더미 속에서 들려왔다.

“에구머니나!”

화들짝 놀란 여인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내 하나가 건초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댁의 건초 더미에서 편안히 잘 쉬었습니다.”

젊은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을 향해 정중하게 읍을 하자, 그의 머리에서 건초가 우수수 떨어졌다.

“도둑이야!”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아주머니, 무슨 그런 심한 농담을 하세요. 제가 어딜 봐서 도둑입니까? 누가 봐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놈인걸요.”

젊은 사내가 놀란 얼굴로 앞으로 한발 나아가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이것도 인연인데,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아주머니 얼굴이 시커먼 것이, 꼭 피를 보는 불운이 닥칠 것 같습니다. 자, 제가 점괘를 한 번 봐서 이 화를 어떻게 피할지 알려드릴 테니, 돈 일 문만 주…….”

사내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인이 그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여인이 손을 뻗자마자, 사내는 잽싸게 몸을 수그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몽둥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거,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좋게 하면 되지. 사람을 때려서야 쓰나.”

사내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소년 셋을 보며 말했다. 소년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빗자루며, 의자며,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저 도둑놈 잡아라!”

여인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근처의 이웃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러 몰려왔다.

“아, 저는 도둑이 아니라니까요. 진짜로요. 왜 사람 말을 안 믿습니까.”

소년들이 휘두르는 의자와 빗자루를 이리저리 피하던 사내가 잽싸게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도망쳤다.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

집 안에 있던 여인의 남편이 몽둥이를 매섭게 휘두르고는 사내의 뒷모습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저런 도둑놈 자식, 잡아 죽였어야 하는데! 감히 우리 집 닭을 훔치려 들어? 그리고 뭐? 나한테 피를 보는 불운이 닥친다고? 도둑질에 거짓말까지 해? 저 천하에 몹쓸 놈.”

남편의 뒤를 따라온 여인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는 바람에 그의 손에 있던 몽둥이가 여인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여인은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졌다.

“저 천벌을 받을 놈!”

닭장 주위의 분위기가 더욱 떠들썩해졌다. 여인에게 다가가 부축해 주는 이들도 있었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로 피를 보는 불운이 닥쳤네.”

구경꾼 중 하나가 여인의 코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건초 더미에서 기어 나왔던 사내는 도망친 이후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능숙하게 모퉁이를 꺾어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도망치는 동안, 사내는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건초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려 묶고, 누구 집에서 꺾은 건지 모를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옆머리에 꽂았다.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한 뒤, 사내는 완전히 깔끔해진 모습으로 거리에 나왔다.

사내는 두 팔을 벌려 손목을 털고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자, 이제 일을 해볼까.”

그가 소매에서 깃발을 꺼내어 높이 들려다가, 다시 소매 속으로 깃발을 넣고 모퉁이 뒤로 재빨리 숨었다.

젊은 남자 둘이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놈이 이 거리에서 사기 치는 걸 자주 봤는데.”

“잘 찾아봐. 그놈 잡아서 현상금이나 두둑이 챙기자고.”

두 남자가 대화하며 사내가 숨어있던 모퉁이 앞을 지나갔다.

사내는 고개를 내밀지도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한 집의 지붕 아래에 몸을 숨겼다.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앞으로 지나가던 남자 둘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두리번거렸다.

“가자. 여긴 없는 것 같아.”

“자세히 좀 찾아봐. 그놈한테 걸린 돈이 얼만데.”

두 남자가 지나가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지붕 아래에 숨어 있던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는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첫째.”

사내가 거리를 향해 검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사기를 치지 않아. 점괘를 봐주고 화를 면하게 도와주는 거지.”

그는 검지에 이어 중지를 올리고 말했다.

“둘째, 고작 일 문밖에 안 한다고.”

사내가 손을 휘휘 젓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일 문 가지고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야 해?”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생각을 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이, 한동안은 가서 좀 숨어 있어야겠네.”

해가 중천에 뜨자, 정 대노야의 마차가 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정 대노야가 마차에서 내리던 때, 마차 뒤로 또 한 대의 마차가 멈춰 섰다. 얼굴 가득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정 이노야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뒤이어 도착한 마차에서 내렸다.

“너는 왜 돌아왔어?”

정 대노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정 이노야의 대답에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병이 있다면 의원을 불러 약을 지으면 되지,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뭐하러 돌아와? 네가 의원도 아니고, 돌아와서 뭘 어쩌게? 백성을 위해 일하는 관리가 어찌 한 여인의 일 때문에 제멋대로 자리를 비우느냐? 이건 네 직무를 애들 장난으로 여기는 꼴 아니냐!”

정 대노야의 꾸중에 정 이노야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네, 형님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거라. 너도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정 이노야는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리고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동서가 아프다는데, 당신은 왜 가 보지도 않았소?”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청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마중 나온 대부인을 향해 말했다.

“밖에 있던 둘째까지 밤길을 달려 돌아오게 만들지 않나. 남이 들으면 많이 안 좋은 줄 알겠소.”

영문도 모른 채 정 대노야에게 꾸중을 들은 정 대부인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자신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삼키지 못할 지경이라 탕약을 지어다 먹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자는 돌아오자마자 남의 부인 때문에 다짜고짜 자신을 꾸짖다니.

“동서가 병이 났다고요? 동서가 아니라 내가 죽을 지경이에요!”

정 대부인은 건네받은 정 대노야의 두봉을 도로 내팽개치면서 홱 돌아섰다.

부인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정 대노야는 일순간 화가 솟구쳤다. 대청 안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자, 여종과 몸종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노야, 소인이 부인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호소해도 되겠습니까.”

대부인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여종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부인께서 병이 나셨다고 하신 적은 없지만, 집안에 의원을 들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의원이 병을 본 사람은 이부인이 아니라 바로 대부인이세요. 이부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대부인께서 모르셨던 이유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부인께서 출타하여 새 옷감을 잔뜩 사 오셨기 때문이고요.”

정 대노야는 여종이 깔아준 멍석을 빌려 대부인의 편을 들어주듯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 훈계라도 좀 하지 그랬소. 젊은 새댁도 아닌데, 이부인은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성질을 부려.”

정 대노야를 등지고 앉아 있던 정 대부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정 대노야가 마른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의원은 뭐라고 했소?”

<교랑의경>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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