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오늘은 누가 온 거예요?”
두 여인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대부인의 친정 쪽 부인일세.”
집사 부인이 대답했다.
“왕 부인께서 오셨구나. 한동안 안 보이시더니.”
두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 공자가 경성에서 돌아와서 마중 나왔다네. 아마 오늘이면 도착할걸.”
집사 부인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북정의 저택에는 발도 못 들여본 두 여인이었지만, 북정 가문의 친척 관계에 대해서는 제 손금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왕십칠 공자께서 출타했었어요?”
두 여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왕 공자가 왜 곧장 왕씨 가문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왔지?
“왕 공자가 고모와 사이가 각별해서 인사드리려고 일부러 들르시나 보네.”
두 여인이 추측하듯이 말했지만, 집사 부인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니라는 뜻이네.
정말로 왕 공자가 고모에게 인사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라면, 분명 집사 부인이 공자의 지극한 효심에 대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했을 터. 그렇다고 추측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한데.
두 여인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눈빛에서 생기가 돌며 조금 흥분한 듯 보였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또 생겼네.
“부인께서 작은 부엌은 예전에 하던 대로 준비해 달라고…….”
한 여인이 부엌으로 뛰어 들어오며 말하다가, 집사 부인의 눈짓에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두 여인은 각자의 옹기를 안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집사 부인은 그제야 뛰어 들어온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어느 쪽 부엌?”
“어느 쪽이겠어요. 그 바보 쪽 부엌이죠.”
집사 부인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여인을 끌어당겨 한쪽 구석으로 갔다.
“집에 남겨 둔대? 바로 도관으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집사 부인이 물었다.
“암만 그래도 도관에서 시집보낼 순 없잖아요.”
집사 부인의 눈이 커졌다.
“진짜로 한대?”
정 대부인의 대청 안.
“당연하죠.”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왕 부인이 정 이부인을 쳐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 대부인도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따라 웃었다.
“정말 인연인가 보네요. 십칠이 직접 경성에서 정혼자를 데려오고 있다는 건,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겠죠.”
바보한테 반했다고?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정 대부인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대꾸했다.
“우리 십칠은 철도 들었고, 남을 위할 줄도 아는 착한 아이야. 누구처럼 골칫거리만 만들지는 않지.”
“에이, 형님.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정씨 가문 동서지간의 불화는 이미 표면적으로도 드러난 일이었다.
왕 부인이 마른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왕씨 가문은 대부인의 친정이니, 당연히 대부인의 편을 들었다.
“그럼 이부인이 보기엔 어떤데요? 아직도 이 혼사가 가짜인 것 같아요?”
왕 부인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하긴, 우리가 혼수를 탐내지 않는다니 영 가짜 같긴 하죠.”
혼수로 허영을 부리는 풍속은 강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듣기로 어느 지역에서는 혼담을 넣기도 전에 혼수의 규모부터 알아본다는 소문도 있었다.
혼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 이부인의 약점을 찌르는 꼴인지라, 정 이부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걱정할 게 뭐 있나요. 집에는 형님이 계시고, 밖에는 그 아이의 외숙이 있는 걸요. 나 같은 계모가 굳이 입을 열 필요는 없지요.”
정 이부인이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정 대부인이 말했다.
“입을 열 필요는 없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곧 있으면 그 아이가 도착하는데, 그 아이가 지내며 쓸 것들은 다 준비해 뒀어? 그 아이가 지내던 방이 빈 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 불도 좀 지펴야 하지 않겠나. 말도 말이지만 할 일을 안 했을 때 남들한테 책잡히는 거야.”
정 대부인의 말을 듣자 정 이부인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형님.”
정 이부인은 건성으로 예를 표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회랑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여종들이 종종걸음으로 정 이부인을 따라갔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자, 정 대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둘은 이제 얼굴만 봐도 싸우는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러면 안 좋을 텐데.”
왕 부인이 물었다. 정 대부인이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저 사람이 철이 없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굴면 안 되지. 이번엔 그 아이 얘기가 나와서 그래. 그 외엔, 서로 얼굴 마주할 일도 별로 없어.”
왕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그 아이를 이 집에 둬서는 안 되겠네요.”
암, 둬서는 안 되지. 처음부터 둘 생각도 없었는데.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왕 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근데, 정말 이 혼사를 올리려는 거야? 우리 십칠한테 너무 못할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정 대부인이 한숨을 쉬자, 왕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십칠이 좋아하면 됐죠. 그리고 십칠이 원한다면 또 다른 아내를 들이면 될 일이고요. 별일 아니에요.”
바보는 고치기 힘든 병이었다. 싫증이 나면 이혼해 버리고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될 일이다. 남자가 재혼하는 건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정 대부인은 생각할수록 속이 불편한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말했다.
“우리 십칠은 이렇게 큰 손해를 보면서 혼례를 올리는데, 저쪽만 좋겠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들고 여종 하나를 불렀다.
“두 농토를 관리하는 관리인에게 가서 장부를 가져오너라.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와.”
그 농토라면 이미 이부인의 손에 거의 넘어갔는데, 대부인께서 농토들을 다시 뺏어 오시려는 건가? 이부인이 그걸 가만히 뺏기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집안에 또 한 번 난리가 나겠네.
여종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알겠다 대답한 뒤 물러났다.
하여간 이 집은 그 바보 얘기만 나오면 난리가 난다니까. 또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나겠어.
여종이 아직 마당을 채 나가지도 않았는데, 누군가가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부인, 부인. 왔어요.”
왔다고?
왕 부인과 정 대부인이 일시에 기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칠이 돌아왔다고?”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아마도요.”
여종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두 부인은 여종에 대답에 살짝 놀랐다.
아마도라니?
“그 사람 말로는, 우리 집 아씨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던데요.”
그게 그거지!
“내가 마중 보낸 사람은 어디 갔담.”
왕 부인은 서둘러 마당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 일러두지 않았느냐. 정문으로 들이는 게 불편하면 뒷문으로 들이라고.”
정 대부인이 여종을 흘겨보며 호통을 치고는 왕 부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여종은 해명하듯 말을 이었다.
“좀 이상해 보여서요.”
“도착했대?”
정 이부인에게도 소식이 도착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서 손으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던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칠랑, 네 언니 마중하러 가자.”
“어느 언니요? 언니들은 다 집에 있는데요?”
“네 그 바보 언니 말이야.”
정 이부인의 말에 정칠랑은 손에 쥐고 있던 고무줄을 바닥에 홱 내팽개쳤다.
“어머니! 걔 집에 들이지 마세요!”
정 이부인은 정칠랑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 애를 이 집에 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너도 이 집에서 못 나갈 줄 알아! 어서 따라오거라. 다 같은 식구인데, 그 사람들만 체면 살릴 일을 하게 둬서는 안 되지.”
정 이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칠랑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정 이부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주변의 여종들은 이부인을 보자 길을 터주었다. 정 이부인은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는 정칠랑의 손을 잡아끌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 대부인과 왕 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이부인의 눈에 들어왔다.
“왕씨 가문 귀한 아드님이 오신 거 아니야? 왜 앞에 나가서 반갑게 맞이하지 않고?”
정 이부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정 이부인도 곧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 앞에 새까맣고 커다란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초겨울의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달려온 마차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고 갓 기름칠을 한 듯 매끈하게 광이 났다. 마차 옆에 서 있는 호위의 말들은 건장하며 갈퀴에서 윤기가 흘렀고, 호위들 또한 말들 못지않게 키가 크고 다부진 근육질이었다. 제대로 엄선된 말과 호위들이었다.
말끔한 옷을 입고 가장자리에 금실로 수를 놓은 두봉을 걸친 호위들은 두 열로 깔끔하게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이 걸친 두봉이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위풍당당하네.”
“지부 대인께서 출타하시는 행렬보다 더 위엄있어.”
“관패와 휘장만 더하면 딱이겠네.”
“저게 누구래?”
“정씨 가문에 또 으리으리한 친척이 왔나 본데?”
거리와 강가에서부터 마차 행렬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다.
“십칠?”
왕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외쳤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좌우를 살폈다.
어제 마중 나간 아랫것들은 어디에 있지? 노복과 시종들도 안 보이고.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돈 주고 산 호위들인가?
“부인, 부인.”
시종 하나가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먼 길을 떠나온 고됨이 그대로 묻어나는 행색에,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마차 행렬과 대비되는 그의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했다.
왕 부인은 그 시종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오늘따라 이 시종이 자신의 시종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공자님은 먼저 댁으로 가셨습니다.”
시종이 말했다. 왕 부인과 정 대부인은 귀를 의심했다.
“먼저 돌아갔다고?”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예. 공자님은 오늘 이른 아침에 도착하셨는데, 죽어도 여기 있기 싫고 꼭 집으로 가겠다고 하셔서요.”
시종이 대답했다.
꼭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두 부인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마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건 누구야?
“부인.”
조 집사가 옷소매를 한 번 탁 털고는 앞으로 나가 읍을 올렸다. 정 대부인이 놀란 눈으로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누구…….”
“저는 주씨 가문 사람입니다.”
조 집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주씨 가문! 그, 그럼 이 마차에 있는 사람은!
휘장이 들어 올려지고 반근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반근은 고개를 들어 마차 행렬을 슥 보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 집사가 몸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아씨를 호송해 돌아왔습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조 집사의 손짓에 따라 일제히 뒤로 돌았다. 반근이 휘장을 들어 올리더니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했다.
시끌벅적했던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두봉을 두른 채 마차에서 내리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마차의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소녀가 걸친 커다란 두봉이 땅에 끌리는 것이 보였고,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매끈하고 볼록한 이마와 오뚝한 콧대가 보였으며, 정면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긴 눈썹과 깊고 반짝이는 두 눈이 보였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 그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정말 대단한 미인이네.
정 이부인의 손에 이끌려 온 정칠랑은 계속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바보를 보고 놀랄까 봐 겁이 나서였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해야 그 바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보내는 창피한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의 소란은 곧 잠잠해졌고, 모두 숨을 참는 듯 고요해졌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 일이야?”
고요함 속에서 사내의 외침이 구경꾼들 뒤쪽으로 전해져왔다. 한 손에 깃발을 쥔 그가 구경꾼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 앞쪽에 있던 사람은 하마터면 그에게 떠밀려 강가로 떨어질 뻔했다.
“뭐 하는 거요!”
젊은 사내가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난 뒤에야 강가도 다시 조용해졌다.
“다들 뭘 보는 거요?”
젊은 사내는 맞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물었다. 그는 강가의 건너편을 내다보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우와! 엄청난 미인이잖아!”
정칠랑은 남몰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 틈을 조금 벌려보았다.
정칠랑의 눈앞에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짙은 치맛자락이 살랑거렸고, 그 아래로 하얀 버선과 나막신을 신은 발이 드러났다.
사람이 걷는 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구나.
정칠랑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 틈을 더욱 크게 벌리자, 정육랑보다 키가 큰 여인이 보였다.
정육랑보다 머릿결이 까맣고, 정육랑보다 눈이 더 크고, 정육랑보다 피부가 더 흰. 정육랑보다 훨씬 예쁘고, 아니,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훨씬 예쁜.
저 미인은 누구지?
정칠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누구…….”
정 대부인이 자신의 앞에 걸음을 멈춘 여인을 보며 홀린 듯 물었다.
“정교랑이 백모님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몸을 낮춰 예를 올렸다.
정교랑…….
정교랑!
정 대부인의 눈앞에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밤하늘 아래, 등불에 비친 한 여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너울을 들어 올린 채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를 올렸었다.
“네가 정교랑이라고?”
왕 부인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넋을 놓고 있는 정 대부인을 옆으로 살짝 밀쳤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서슴없이 정교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쩐지, 어쩐지.
“그림보다 더 예쁘구나.”
왕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우리 아들의 안목은 남다르다니까. 저 눈빛을 봐, 저게 어딜 봐서 바보라는 거야! 역시 다 나은 거겠지? 조금이 아니라 아예 다 나은 것 같아!
“잘 돌아왔으니 됐다. 밖이 추우니 어서 들어가자꾸나.”
왕 부인이 길을 안내하며 정교랑을 반겼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손님과 손아랫사람이 나란히 자신을 제쳐두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정 대부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정칠랑은 모친이 잡아끌기도 전에 먼저 앞으로 뛰어가 왕 부인과 나란히 걷고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한편, 소식을 듣고 마당으로 달려 나오던 정씨 자매들이 걸음을 멈췄다.
“이리 와, 여기 와서 봐.”
정사랑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막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한 겨울 매화 사이 한쪽 귀퉁이에서 마당을 내다보았다.
왕 부인과 정 대부인이 여인의 좌우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의 짙은 남색 두봉이 바람에 따라 나풀거렸다.
정씨 자매들은 사람의 걸음걸이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여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매들은 저 여인이 분명 미인일 거라 단정했다.
여인이 더 가까워지자, 자매들은 여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미인이네.
“저 사람은 누구야?”
정육랑이 매화 가지를 잡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 언니야.”
치맛자락을 든 채 쪼르르 달려오던 정칠랑이 우쭐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정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서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도 정신을 차렸다. 문 앞은 다시 사람들의 잡담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저 미인 좀 봐.”
“누구래?”
“모르겠어.”
조 집사는 문 앞의 광경을 보면서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웃음을 지었다.
“집사 어른, 어젯밤에 분명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기어이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야 한다고 하신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깨끗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확실히 기분이 좋네요.”
두 시종이 웃으면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우리 아씨께서 집으로 돌아오시는 건데, 위풍당당하게 돌아와야 하지 않겠나.”
여유롭게 마른기침까지 한 조 집사가 그들을 공손히 맞이하러 나온 정씨 가문의 문지기를 슥 쳐다보았다. 그는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안쪽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정씨 저택의 대문 앞이 다시 조용해졌다. 양쪽 강가에 있던 구경꾼들은 아직 흩어지지 않고 웅성대며 서 있었다.
좀 전의 젊은 사내가 코끝을 문지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주위에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면서 손에 쥐고 있던 깃발을 펼쳤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점괘 볼 사람 있어요? 일 전이면 됩니다. 공짜로 화를 면하세요.”
정 대부인이 있는 마당에는 여종과 몸종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더 많은 여종과 몸종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랫사람들도 다들 무슨 일이냐고 수군거렸다.
“뭔 일이래?”
“그 바보 아씨가 돌아왔다잖아, 우리도 구경하러 가자.”
“바보 아씨를 봐서 뭐에다 쓰게? 재수 없게.”
“바보가 아니라 미인이래!”
“아니, 도대체 바보 아씨가 온 거야, 미인이 온 거야?”
정씨 저택 안은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정 대부인의 마당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정 대부인의 마당 안에 있는 여종과 몸종들은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서 있었고, 대청 안에 자리한 사람들 또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두의 이목은 정 대부인의 왼쪽 아래에 앉아 있는 한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여인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 마시려 했다.
아, 차는 안 되는데.
몸종들이 차를 올리자, 여인의 뒤에 있던 시녀가 미소를 지으며 몸종들에게 일렀다.
“우리 아씨는 차를 안 마시니, 물로 바꿔 와.”
시녀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무척이나 편안한 듯 행동했다. 낯선 곳에 온 듯한 어색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참. 저 시녀한테는 이곳이 낯설지 않겠군. 예전에도 여길 온 적 있으니까.
정 이부인의 옆에 서 있던 두 여종은 반근을 한참 쳐다보더니, 옛날에 뺨을 맞고 억울해하며 눈물을 보이던 몸종을 떠올렸다.
저 계집이 기어코 여길 또 왔네.
여인이 두봉을 풀었다. 그녀는 다른 무늬 없이 소매에 선을 두른, 두봉만큼이나 어두운색의 옷과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에 꽂은 조그마한 은색 비녀 외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물을 마시느라 높이 들린 소매가 여인의 얼굴 반쪽을 가렸다. 아래로 떨어지는 폭 넓은 소매도 그 여인의 행동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여인의 소매는 다시 무릎 위로 내려오고, 찻잔도 한쪽으로 치워졌다. 여인이 물을 마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죽여 지켜보던 대청 안의 사람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 다 나은 거니?”
왕 부인이 가장 처음으로 한 질문이었다. 정교랑이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왕 부인은 한시도 놓치지 않고 정교랑을 주시했다.
“몸은 괜찮은 것 같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왕 부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정교랑 앞에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이게, 몇 개로 보여?”
왕 부인의 질문에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다섯 개요.”
정교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숫자를 알아보네! 이만하면 됐다.
왕 부인이 기뻐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정말 다행이로구나.”
왕 부인은 정 대부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대청 안의 다른 사람들이 아직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정교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낮춰 예를 표하며 왕 부인을 배웅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왕 부인을 배웅하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일어날 필요 없어요.”
왕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곧바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정 대부인은 왕 부인이 줄곧 마음속으로 왕십칠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교랑을 꼼꼼히 살펴야 하지 않았다면 왕 부인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정 대부인은 왕 부인을 굳이 붙잡지 않고 대문 앞까지 직접 배웅했다.
“좋네요. 아주 좋아요. 형님도 참. 저리 참한 아가씨인데, 억울할 게 뭐 있어요.”
왕 부인이 웃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정 대부인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좋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정 대부인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지금도 썩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 사람이 나아졌는지 아닌지를 외모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 부인이 고개를 돌려서 싱긋 웃었다.
“우리 십칠은 딱 외모만 보는 아이잖아요.”
왕 부인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저 정도 외모인데, 더 고를 게 있나요.”
대문 앞에 선 정 대부인은 왕 부인이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정 대부인의 뒤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조용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미인 구경하러 가자.”
“정말 그때 그 바보 맞아?”
정 대부인이 몸을 돌리자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 서넛이 무리 지어 뛰어가고 있었다. 정 대부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녀 옆에 있던 눈치 빠른 여종이 기침 소리를 냈다.
해맑게 떠들며 걸어가고 있던 몸종들은 기침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 대부인을 발견했다. 재빨리 정 대부인의 앞으로 달려온 몸종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연신 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지금 정 대부인에게는 아랫것들을 벌줄 정신이 없었다. 이 불편한 심정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었다.
지난번에 저 아이가 돌아왔을 때는, 오밤중에 대문을 두드리는 통에 이노야 내외가 한바탕 싸웠었지. 동서지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부터였고.
이번에는 당당하게 대낮에 돌아와 이 집이 아주 동네 구경거리가 됐네. 이젠 또 무슨 골칫거리를 만들지 감도 안 잡혀.
정 대부인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정 대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정말로 다 나은 건가? 이제 바보가 아니야? 날 때부터 앓던 병도 고쳐질 수 있나? 아니면 병주에서 천 리 길을 왔던 저번처럼, 다 저 아랫것이 계획한 건가?
맞아, 그 계집. 주씨 가문으로 갔던 애가 여긴 또 뭐하러 돌아왔대?
정 대부인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 대부인은 자신의 마당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어지고, 당직을 서는 여종과 몸종만 그 자리에 남아 수군대는 것을 보았다.
“그 애는?”
정 대부인이 놀란 모습으로 물었다. 모여 있던 여종과 몸종들이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부인, 이부인께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한 여종이 대답했다.
이부인이 데려갔다고?
정 대부인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정 대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거 봐, 이거 봐. 그 아이가 바보일 때는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한테 떠넘기더니, 다 나은 것 같으니 바로 데려가는 꼴 좀 보라고.
그 아이를 챙겨 주는 척하기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교랑, 여기가 바로 네 집이란다.”
정 이부인이 웃음을 머금고 정교랑을 마당으로 안내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얼른 한쪽으로 비켜서서 천천히 걸어오는 정교랑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과 정교랑 뒤로는 정씨 자매들이 쪼르르 따라오고 있었고, 그 뒤로 각자의 시종들, 그보다 더 뒤로는 또 다른 몸종들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 정 대부인의 마당에서부터 이곳까지 줄줄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거기에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숨어서 이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몸종들까지 가세했다.
“네 아버지는 지금 댁에 안 계시단다. 전갈을 보냈으니 휴무일에 댁으로 돌아오시면 그때 볼 수 있을 거야.”
정 이부인이 말하면서 정교랑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자, 앉아서 좀 쉬려무나.”
“부인, 아씨의 방은 어디에 있는지요? 아씨께서 우선 좀 쉬고 싶다고 하셔서요.”
반근이 말했다. 정 이부인은 잠시 반근을 쳐다보더니 반근이 누군지 기억해냈다.
예전에 칠랑의 찬모로 붙여주려고 했는데 싫다고 해서 따귀를 후려쳤더니 벌벌 떨면서 울음을 터트렸던 그 계집이네. 그 이후로 주씨 가문에서 온 공자의 눈짓 하나에 홀려 좋다고 따라갔지, 아마?
보아하니 허투루 따라간 건 아니네. 저 기세 좀 봐. 누가 보면 이 집 주인인 줄로 알겠어.
정 이부인은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 참, 저 계집이 보통 계집이 아니네.
“아, 내 정신 좀 봐. 너무 좋아서 깜빡했지 뭐니.”
이부인이 옆에 있던 여종에게 물었다.
“교랑이 지낼 거처는 대부인께서 준비해 주신 거기지?”
여종이 곧바로 정 이부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부인, 거긴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좀 그렇지 않을까요? 여름을 나면서 꿉꿉하고 습해졌을지도 모를 일인데요. 지금은 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 아씨께서 당장 거기서 지내시기에는…….”
팍 소리와 함께 찻잔이 엎어졌다.
정 대부인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홱 밀어서 쓰러트린 것이다. 찻잔에 담겨 있던 차가 잔 받침대 위로 엎질러졌다. 몸종이 꿇어앉은 자세로 가까이 다가와 엎질러진 찻잔과 받침대를 모두 치웠다.
“정말 그리 말했다고?”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 그리고 이부인께서 교랑 아씨한테 일단 칠랑 아씨의 거처에서 쉬고 있으라 하고는, 직접 아랫것들을 데리고 연못 옆에 있는 거처를 치우러 가셨습니다.”
“내 친히 미리 치워 두라 일렀거늘. 나를 이리 나쁜 사람으로 몰아서 좋을 게 뭐 있다고?”
화가 난 정 대부인이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좋은 점이야 당연히 있죠. 지금으로 봐서는 병이 정말로 나은 것 같던데요.”
“어디가 나았더냐? 생긴 게? 그 앤 원래부터 그렇게 생겼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가서 보라고 해도 안 보더니만. 걸을 수 있다고? 저 아이는 저번에도 제 발로 걸어서 이 집에 들어왔어. 말하는 게 나아졌어? 저번에도 아버지 세 글자를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내뱉었단 말이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무슨 병이 다 나았다는 게야? 기껏해야 주씨 가문에서 기를 살려 준 것밖에 더 있어?”
주씨 가문에서 기를 살려 줬다?
정 대부인이 말을 하다 말고 두 손바닥을 맞댔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주씨 가문이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체면을 살려 줬잖아?
그자들이 왜 그랬을까? 조카를 애지중지해서? 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왜들 그렇게 조용해졌나 싶었네. 난 또, 정말 우리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주 노야의 뒤를 잇는 후발주자가 여기 있었어.”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그러니까요. 주씨 가문에서 이리 난리 법석을 떨면서 호송했으니, 이제 더 이상 옛날의 그 어린 바보가 아니라는 걸 온 성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셈이에요. 이부인의 속내는 눈을 감고도 맞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기회를 붙잡아 또 무슨 일을 꾸며댈지요.”
여종이 정 대부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덧붙였다.
“만에 하나 교랑 아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교랑 아씨께서 분명 아무렇게나 헛소리를 떠들고 다닐 텐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온 성의 사람들이 정교랑이 바보인 것을 아는 마당에 그런 바보가 시집을 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정 대부인이 고른 신랑감은 흠잡을 곳이 없었으니, 전에는 정 이부인이 무슨 말을 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내일이면 저 바보가 얼마나 화려하게 재등장했는지 온 성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정 이부인이 정교랑을 앞세워 무슨 말이라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며 정 이부인의 편을 들지도 몰라.
“이부인은 저 아이가 더 이상 침을 질질 흘리던 바보가 아니라 어딘가 쓸모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자기 손아귀 안에서 구슬리려는 거겠죠. 때가 되면 저 아이를 시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게 할지 모를 일입니다. 부인,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여종이 고개를 저으면서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애초부터 말했잖아, 저 바보는 골칫거리라고!
정 대부인이 이를 악물었다.
“부인, 다행히 왕 부인께서도 저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마침 왕 공자도 돌아왔으니, 어서 저 아이를 내쫓으세요. 시간을 끌면 괜한 문제가 생겨요.”
여종의 말에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놀고만 있지 말고, 어서 가서 옷이나 집기들을 챙겨다 주거라.”
여종이 곧바로 알겠다고 답하고는 물러났다.
“어서 움직여. 고방으로 가자.”
여종은 마당에서 다른 여종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수선한 정 대부인의 마당과는 달리, 정씨 저택 밖 뒷골목의 작고 허름한 집 앞에 모인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어서 이리 좀 와 봐라. 나도 한번 보자. 야위진 않았고? 어디 맞진 않았어?”
춘란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금가아를 가까이 끌어와 구석구석 살폈다. 한쪽에 선 금가아의 부모도 금가아를 쳐다보면서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에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튼튼하거든? 키도 훌쩍 컸다고.”
금가아가 춘란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는 어깨를 으스대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두 사내에게 말했다.
“형님들, 짐은 여기에 두시면 돼요. 어서 가서 좀 쉬세요.”
금가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춘란과 가족들은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던 두 사내를 발견했다. 그들은 각자 커다란 봇짐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두 사내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라 금가아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금가아보다 훨씬 기세가 있어 보였다.
춘란은 두 사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정사낭이 집에 없는 동안에도 춘란은 놀지 않고 정씨 저택의 다른 곳에서 쉼 없이 일했다. 바보 낭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춘란도 한껏 마음이 들떠 사람들을 따라 문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춘란이 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 정교랑은 이미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긴 후였다.
춘란이 보고 싶었던 건 바보 낭자가 아니라 자신의 동생이었기에, 춘란은 굳이 인파를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춘란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가아가 어디에 있는지를 수소문하다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쉬고 있던 마당으로 쫓아갔다.
마당에 들어선 춘란은 일렬로 반듯하게 서 있는 시종들을 보고는 그들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수소문 끝에 금가아는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춘란은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 마당에서 주씨 가문의 시종들을 마주친 적이 있기에, 춘란은 금가아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주씨 가문의 시종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알겠다, 금가아. 그럼 우리는 먼저 가 볼게.”
두 사람이 웃으면서 금가아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들은 무척 친근한 태도로 금가아를 대했고,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먼저들 돌아가요. 내일은 내가 형님들을 데리고 재미있는 곳을 구경시켜 줄게요.”
금가아가 헤헤 웃으면서 대답했다.
두 사내가 금가아의 부모와 춘란을 향해 예를 표하자, 금가아의 부모는 황급히 답례하고는 두 사내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쳐다보았다.
두 사내가 떠나자 주위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이웃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금가아, 이건 주씨 가문 거야?”
“금가아, 경성은 어때? 재미있어?”
이웃들이 금가아를 향해 중구난방으로 질문을 퍼부었다. 금가아는 웃으면서 이웃들의 질문에 하나씩 답해주고는 이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해 왔어요.”
금가아가 말했다.
이렇게 통이 크다고?
사람들이 금가아가 가져온 커다란 봇짐 두 개를 훑어보더니 금가아를 에워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의 부모와 춘란은 불안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돈도 없는 애가 뭘 저렇게 많이 샀대.”
춘란이 걱정되는 말투로 읊조렸다.
경성 한 번 갔다 오더니 씀씀이만 커져서는. 혹시 누구한테 빌린 돈으로 선물을 사 온 건 아니겠지?
춘란은 좀 더 빨리 금가아를 제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사람들을 따라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이미 축제가 열린 듯한 분위기였다. 금가아는 봇짐에서 선물을 하나씩 꺼내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건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비단이에요. 가져가서 옷 지을 때 쓰세요.”
“이건 경성에서 제일 좋은 관주(官酒)인데, 한번 맛 좀 봐요.”
금가아가 선물을 건넬 때마다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금가아의 부모와 춘란은 선물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듯했다.
우리 아가, 이게 다 얼마니?
“금가아, 이, 이게 다 얼마짜리야?”
이웃 중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금가아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전부 반근 누나가 준비해 준 거라서요.”
금가아가 손뼉을 치더니 사람들을 향해 예를 올리면서 외쳤다.
“제가 집에 없는 동안, 여러분들이 우리 부모님이랑 누나 좀 잘 챙겨 주세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구, 별말을 다 해.”
“이야, 금가아가 경성에 한 번 다녀오더니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됐네.”
“이 집 금가아 좀 보고 배워라. 넌 뒤처져도 한참 뒤처졌어.”
“금가아가 철이 다 들었네.”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 그리고 이웃들이 보내오는 부러움 반 질투 반인 눈빛에 금가아의 부모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참나, 쟤는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왔대.”
춘란도 웃으면서 말하고는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역시 밖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철이 들어 돌아온 모양이로구나.
이웃들이 떠난 뒤, 금가아 식구 넷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얻어맞지도, 굶지도 않은 듯한 금가아의 모습에 일가족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옆에 놓인 텅 빈 봇짐 보자기를 보자 마음이 쓰라렸다.
“도대체 얼마를 쓴 거야?”
춘란이 물었다.
“난 진짜 몰라. 아마 엄청 비쌀걸? 반근 누나는 뭐든 최상품으로 사려고 해서 돈을 아주 시원시원하게 써.”
금가아가 모친이 끓여준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반근이라는 이름이 두 번이나 나오자, 춘란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반근은 또 바보 아씨를 따르기로 한 거야?”
“아, 그 반근이 아니라 큰 반근 누나 얘기였어. 근데 누나가 말한 반근 누나도 아씨를 따르고 있긴 해. 이번에 같이 돌아온 반근이 바로 그 반근 누나야.”
춘란은 금가아의 대답을 듣고는 혼란스러워졌다.
“응? 어느 반근이 무슨 반근이라고?”
“그러니까, 반근 누나가 총 세 명인데, 셋 중에 제일 똑똑하고 큰 반근 누나는 경성에 남아 있고, 두 번째 반근 누나는 다른 분을 모시고 있고, 제일 첫 번째 반근이었던 반근 누나가 지금의 반근 누나인데…….”
손가락을 하나씩 세우면서 설명하던 금가아는 춘란의 표정이 더욱 멍해지는 것을 보고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튼, 누나한테 설명해 줘도 잘 모를 거야. 누가 누군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춘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응, 하고 대꾸했다.
하긴 다 시녀니까. 모시는 아씨만 헷갈리지 않으면 되지.
“그럼 돈은 주씨 가문에서 준 거야?”
춘란이 묻자 금가아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아씨께서 돈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주씨 가문의 돈은 필요 없어.”
아씨한테 돈이 있다고?
금가아의 부모와 춘란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다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 바보한테 돈이 어디서 났는데?”
“우리 아씨는 바보가 아니야.”
금가아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우리가 경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아씨가 정말 바보였다면, 난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올 수도 없었을 거라고요.”
방 안의 세 사람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을 겪었는데?”
천장이 낮고 누추한 방 안, 낡아빠진 방석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던 소년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으로 문밖을 내다보았다.
방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춘란과 부모는 묘하게 압도되었다. 앞에 앉아 있는 이 소년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혈육인 친아들이자 친동생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소년에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추궁할 수 없었다. 겨우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건만 소년은 더 이상 그들이 알고 있던 소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마세요. 반근 누나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거든요.”
금가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아씨를 따를 땐 일을 많이 하고, 말을 적게 하면 돼요.”
금가아는 말하면서 소매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어 부모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 선물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어요. 이건 반근 누나가 제 품삯을 매달 모아 준 건데, 받아주세요.”
금가아의 부모는 소년이 건넨 종이를 처음 본지라, 그게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정사낭의 시중을 들던 춘란은 금가아가 건넨 종이가 비전 증서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품삯이 몇 푼이나 된다고 증서로 만들었대. 괜히 수수료만 잔뜩 떼 갈 텐데.”
춘란이 투덜대면서 종이를 가까이 가져왔다. 비전 증서 위에 적힌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춘란은 헙 하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일천 관!”
금가아의 부모도 금액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한 식구가 한 달을 지내는 데에 필요한 금액은 고작해야 오십 문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금 강주의 시세로 환산한다면, 일 관은 무려 칠백이십 문이었다.
일천 관이면 도대체 몇 문이야?
두 부부는 계산을 위해 잠시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귓가가 웅웅 울리고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리 많을 수가 있어?”
춘란이 비전 증서를 쥔 손을 덜덜 떨면서 금가아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금가아가 헤벌쭉 웃더니 대답했다.
“반근 누나가 그러는데, 내 품삯은 용도 학사(龍圖學士)의 녹봉과 똑같대.”
용도 학사?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엄청난 관리라는 뜻이겠지?
일개 사환이 조정 관리의 녹봉과 똑같은 돈을 번다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반근 누나가 그랬는데, 우리는 사람이 적으니까 품삯을 많이 받는 거래. 나는 집이 멀기도 하고. 나 혼자서 마차도 끌어야 하지, 문지기도 해야 하지, 장작도 패야 하니까 좀 더 많이 준 거랬어. 여러 사람 몫을 나 혼자 해내니까.”
금가아가 어깨를 으스대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얘가 할 줄 아는 게 이렇게 많았구나.
그런데, 또 반근 누나네.
“그럼 도대체 네 주인은 반근이라는 사람이야, 아니면 아씨인 거야?”
춘란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연히 아씨가 주인이지! 근데 이런 사소한 일들에는 아씨가 관여하지 않으셔. 다 반근 누나가 알아서 하지.”
금가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사소한 일?”
돈과 관련된 일이 사소한 일이라고? 그럼 뭐가 큰일인데?
“응. 이런 건 다 사소한 일이야.”
금가아가 대답하고는 그릇을 들어 뜨거운 차를 마셨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거, 그게 바로 우리 아씨가 하시는 큰일이지.
정씨 저택 안의 분주함이나, 금가아 집안의 기쁨은 정교랑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정교랑은 그런 상황들을 모르기도 했고, 안다고 한들 굳이 신경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정교랑은 정 이부인의 안내에 따라 정칠랑의 방에서 목욕을 하고는 오수에 들었다. 그녀가 잠에서 깰 무렵, 반근은 방석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이 입고 왔던 옷을 개고 있었다. 노을빛이 드는 방 안은 더없이 평온하고 조용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조용히 속닥거리는 대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곧이어 누군가가 나타나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반근은 소리를 듣고 서둘러 문가로 다가가 그 사람에게 손짓했다.
“우리 아씨께서 아직 주무셔요.”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정칠랑은 반근의 말을 듣고도 방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침상 위에 옆으로 누워 있던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크고, 칠흙같이 어둡고, 동굴처럼 깊은 정교랑의 두 눈이 깜빡임도 없이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아직 안 깼다고? 그럼 설마 지금 눈 뜨고 자는 건가?
눈을 뜨고 자다니! 무서워 죽겠어!
정칠랑이 비명을 내지르고는 여종들 뒤로 몸을 숨겼다. 정칠랑의 비명 때문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정육랑과 다른 자매들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서로의 치맛자락을 밟는 통에 문 앞에서 이리저리 넘어졌다.
뒤에 있어서 영문을 모르던 몸종과 여종들도 덩달아 소리를 지르면서 자매들을 부축하러 다가갔다.
마당은 일순간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육랑이 정칠랑을 유모의 품에서 끌어내 호통치다시피 물었다.
“도대체 뭘 봤길래 그래? 걔가 뭘 했는데?”
정씨 자매들은 여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지만, 일단은 모두 마당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다. 좀 전에 백모님이랑 같이 있었을 때는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던데?”
정사랑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예쁘기만 하던데.
“설마 사람들 앞에서만 멀쩡한 척 연기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없을 때는 예전에 육랑이 봤던 것처럼 눈도 이상하고, 입도 막 이렇고.”
겁먹은 얼굴의 정오랑이 이리저리 손짓을 해 가며 설명했다.
그 말에 정씨 자매와 여종들은 바보 낭자가 지난번 병주에서 돌아왔을 때, 정육랑이 몰래 방에 들어가 엿보았다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정칠랑에게 집중되었다.
“어서 말해 봐.”
정육랑이 정칠랑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재촉했다. 정칠랑은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걔, 걔, 걔가 눈을 뜬 채로 자고 있었어.”
사람들이 흠칫했다.
눈을 뜬 채로 잔다고? 너무 무섭잖아.
갑자기 정육랑이 발을 굴리더니 성난 얼굴로 정칠랑을 밀쳤다.
“너도 바보가 됐니? 눈을 뜨고 있는 건 안 잔다는 뜻이잖아!”
아? 그렇지!
그제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데에 놀랐던 자기 자신이 창피하기도 했다.
“너도 참, 간덩이가 아주 콩알만 하네!”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에 정사랑과 정오랑이 함께 투덜댔다.
“간덩이가 작다고?”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며 되묻더니 정칠랑을 향해 외쳤다.
“간덩이가 작은 게 아니라 그냥 바보인 거야! 그러니까 저 바보가 네 언니겠지.”
정칠랑이 입술을 삐죽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나는, 그 시녀가 자고 있다길래.”
정칠랑이 반박했지만, 정육랑은 정칠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자는 건데 당연히 깰 수도 있지. 깼는데 눈 감고 있는 사람이 더 무섭거든?”
정칠랑이 이마를 부여잡고 외쳤다.
“아, 찌르지 좀 마.”
정육랑이 마당을 쳐다보며 정칠랑을 한쪽으로 밀쳤다.
“좀 비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정육랑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의 정칠랑은 입술을 삐쭉이고는 정육랑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정사랑과 정오랑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활짝 열린 대청의 문 사이로 시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갔다.
정육랑이 가장 먼저 대청으로 발을 들였다. 정육랑이 좌우를 살펴보자, 창가의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이 여인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잔꽃이 수놓아진 속치마가 그녀의 다리를 덮고 있었고, 어깨를 감싼 긴 머리카락과 청색 비단 덧옷이 한데 섞여 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여인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시녀가 건네는 물잔을 받았다. 문가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여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올곧고 여유로워 보였다.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 외 몇 사람이 정육랑의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왔다. 허공에 여러 시선만 오갈 뿐, 대청 안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이곳은 정칠랑의 거처였다. 장식과 가구도 바뀐 게 없었고, 오늘 아침에 바느질하다 만 손수건도 실과 함께 그대로 창가 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정칠랑은 이곳이 마치 다른 사람의 공간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정칠랑은 자신이 이 방의 주인임을 알리려는 듯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면서 정교랑이 앉아 있는 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이, 거기. 잠, 잠시 여기서 쉬게 해준 거니까, 내 물건 건드릴 생각 하지 마.”
정칠랑의 외침에 정교랑은 정칠랑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응.”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온 네 명의 소녀를 쳐다보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앉아.”
정육랑과 나머지 자매들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후에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웃기지도 않아. 우리야말로 이 집 딸들이고 여기서 가장 오래 지냈는데, 밖에서 들어온 여자가 하루도 안 되어 어디 우리 앞에서 주인행세를 해?
“정말 다 나은 거야?”
정육랑이 옷소매를 홱 털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물었다.
“이게 몇이야?”
정칠랑이 옆에서 손가락을 내밀며 물었다. 정교랑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정육랑이 정칠랑의 손을 탁 쳤다.
“이미 외숙모님이 물어봤어.”
정육랑이 조용히 말했다. 정씨 자매들이 무례하게 구는 걸 보면서도 정교랑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병은 이미 지난번에 왔을 때부터 나아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바보가 병주에서 강주까지 혼자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하긴, 바보가 그걸 해냈다고 믿는 사람이 바보지.
정육랑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건 저 시녀가 돈으로 호송할 사람을 샀으니 그렇지.”
정육랑이 옆에 있던 반근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아씨, 한낱 노비를 너무 치켜세우시네요.”
반근이 예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은 이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없이 빗을 쥐고 천천히 머리를 빗기 시작하자, 반근이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정교랑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안에 앉아 있던 정씨 자매들이 도리어 당황했다.
“쟤가 바보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증명하지?”
정육랑이 조용히 속삭였다. 정사랑과 정오랑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증명할 필요가 있어?”
정씨 자매들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빗질하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올려 묶은 정교랑의 볼록한 이마와 반짝이는 두 눈이 눈에 띄었다.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저런 사람이 바보라면, 세상 모든 여인은 다 바보가 되려 하겠지.
“쟤가 저렇게 생긴 거랑 바보인 거랑은 상관없잖아. 부모가 저리 예쁘게 낳은 거지.”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 턱으로 정칠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정칠랑이 못생겼다고 해도, 그게 얘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왜 못생겼는데!”
정칠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만약이라고 했잖아.”
“그럼 만약 네가 못생겼다면으로 해!”
“넌 원래 못생겼잖아. 하여간 어린애랑은 말이 안 통해.”
방 안에 정칠랑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밖에 있던 여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정칠랑을 달랬다.
정교랑은 이쪽의 소란이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반근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머리를 올려 묶은 뒤 덧옷을 벗고 외출용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정육랑이 정칠랑을 밀치면서 말했다.
“쟤 가잖아!”
정육랑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들 옆을 유유히 지나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얘!”
정육랑이 외쳤다. 걸음을 멈춘 정교랑이 정육랑을 내려다보았다.
“왜?”
“어, 어디 가?”
정육랑이 물었다.
“이 집 남자 주인을 뵈려고.”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 집 남자 주인?
“정 대노야예요.”
반근이 옆에서 정교랑에게 알려 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정씨 자매들은 밖으로 나가는 정교랑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나는, 쟤, 쟤가 바보 같아. 이상하잖아.”
정육랑이 말했다. 정사랑과 정오랑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면서도 멀어져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이상하긴 해.”
“근데 예쁘잖아. 저런 언니랑 같이 밖에 나가면, 얼마나 기세등등할까.”
정칠랑이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정칠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니? 교랑, 왜 밖으로 나왔어? 칠랑, 네가 네 언니 쉬는 거 방해했지? 네 언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따 혼날 줄 알아!”
정칠랑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나 언니 필요 없어!”
정칠랑이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발을 굴렀다. 정 이부인은 그런 정칠랑을 무시하고 놀란 얼굴로 정교랑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정 대노야를 뵈러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뵐 필요 없어. 일단 하룻밤 푹 쉬고, 내일 노부인이랑 대노야를 같이 뵈면 돼.”
정 이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달라고 할 게 좀 있어서요.”
달라고 할 게 있다고?
정 이부인이 눈빛을 반짝이더니 정교랑의 손을 꼭 잡았다.
역시, 주씨 가문이 얘를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어쩐지 아무런 소식도 없다고 했어. 바보를 데리고 가서 좀 가르치고, 꾸며 준 뒤에 사람들 앞에 멀쩡한 척 깜짝 등장을 시키다니.
바보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임을 보여줬으니, 이 아이가 나서서 말하면 그 인간들도 이 아이 말을 듣는 수밖에. 이젠 당신들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야.
“교랑, 일단 날 따라오렴. 할 말이 좀 있어.”
정 이부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은 정 이부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교랑, 나는 비록 네 계모지만, 널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한단다.”
정교랑과 반근이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위한다고요?”
정교랑의 시선에 정 이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지만, 웃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네가 믿지 않는다는 건 알아. 어찌 됐든 나는 네 계모니까 안 믿…….”
정 이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 이부인의 말을 끊었다.
“믿어요.”
“정말로?”
정 이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당신이 믿는다면, 나도 믿어요.”
이 소식은 금세 정 대부인의 귀로 전해졌다.
“노야를 보겠다 했다고?”
정 대부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빛을 살폈다.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아이가 이 집 문턱을 넘은 지는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씨가 아니라 주씨 가문에서 노야를 뵙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여종이 조용히 말했다.
“주씨 가문에서 그 바보를 데려다가 뭘 가르쳤을지 누가 알아.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얘기를 꺼내겠느냐.”
정 대부인이 소매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주씨 가문 쪽만 급히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 문제죠. 좀 전에 이부인께서 아씨를 붙잡고 한참 동안 뭐라 말하고 있던데요.”
여종이 말했다.
“도대체 뭣들을 하고 싶은 건지, 내가 직접 한번 봐야겠다. 가서 이르거라. 대노야께서는 출타하셔서 오늘 집에 계시지 않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정 대부인이 여종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곧바로 대부인의 말을 전하러 나갔던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정 대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여종에게 물었다.
“아씨 말로는…….”
여종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정 대부인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노야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다음에 오겠답니다.”
감히 나를 안 보겠다고?
정 대부인의 놀란 얼굴은 금세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바뀌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주 안하무인이 따로 없구나!
“부인, 부인. 노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정 대부인이 부아가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히려던 때에 다른 여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 뒤로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노파는 노부인의 측근 여종이라, 정 대부인을 보고도 가볍게 목례만 하였다.
“대부인, 노부인께서 밖으로 나가 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노파는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정 대부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 어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부인, 어떻게 저 아이를 이 집에 들일 생각을 하셨습니까.”
노파가 고개를 저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참, 노부인께선 저 바보를 끔찍이도 싫어하셨지. 내가 그걸 깜빡했구나.
“아니, 부 어멈. 그게 아니라, 저 아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와서.”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노파는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갑작스럽다니요. 아무리 갑작스럽다 해도, 반나절씩이나 되는 시간은 노부인께 말씀드리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노부인께서는 이미 반나절 동안 화가 단단히 나셔서 아무 사찰이나 들어가 기도나 올리면서 살겠다고 하십니다. 어디서 기도를 드리든 똑같으니, 차라리 부처님 가까이에 있는 게 더 낫다고 하시면서요.”
“그래, 내 불찰이 맞네. 그런데 사정상 저 아이를 그냥 내쫓을 수는 없었어. 어머님께 말씀드리러 가는 걸 깜빡 잊었구먼.”
정 대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부 어멈도 알다시피 우리 친정에서 저 아이와 혼담을 주고받을 텐데, 시집을 가더라도 밖에서 가게 둘 수는 없지 않나.”
정 대부인의 해명을 들은 부 어멈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부 어멈은 정 대부인을 재촉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어서 노부인께 말씀을 올리러 가시지요.”
“알겠네, 알겠어.”
정 대부인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어멈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허리를 꾹 짚으면서 걸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어멈이 정 대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별거 아닐세. 급하게 일어나느라 삐끗했네.”
정 대부인이 짚은 손을 내려놓았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부인. 집안에 챙기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부 어멈이 말했다.
한평생을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지냈는데, 집안에 일이 많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난 그저 쓸데없이 화낼 일만 없어도 감지덕지야.
이번엔 제대로 일이 틀어졌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사람을 마중 보내서 왕십칠을 집으로 데려오고, 그 바보는 곧장 도관으로 보내버렸어야 했어. 혼담을 끝낸 뒤에 다시 도관에서 바보를 데려와 시집보내면 됐을 일인데, 이 꼴이 다 뭐야.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바보를 집으로 들였으니, 마음대로 내보낼 수도 없고.
단지 한 걸음을 잘못 내디뎠을 뿐인데,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이다니.
정 대부인은 후회가 막심했지만, 노부인 앞에서 그런 속내를 들킬 수는 없었다.
노부인께는 혼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바보를 집에 들였다고 잡아뗄 수밖에 없겠군.
정 대부인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등지고 서둘러 노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같은 시각. 정교랑과 반근은 정 이부인을 따라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대노야께서 돌아오시고 머지않아 네 아버지도 집으로 오실 테니, 오늘은 일단 쉬는 게 좋겠구나.”
겉으로는 침착한 양 말했지만, 정 이부인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대노야께서 집에 계시지 않다면, 대부인을 뵈러 가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거늘, 이 아이는 고민도 안 하고 돌아서네. 주씨 가문에선 도대체 얘한테 뭘 가르친 거야?
정 이부인은 저도 모르게 반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근은 정교랑 옆에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저 계집도 주씨 가문이 붙여 둔 거겠지? 저 아이가 뭘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수시로 가르쳐 주려고 말이야.
“교랑, 내가 좀 전에 네게 한 말은 다 진심이란다.”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시집을 가는데 혼수를 전혀 안 해 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우선 네 아버지가 돌아오면 같이 이야기해 보자꾸나.”
“급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싫어! 싫어! 나는 내 방에서 지낼래!”
정칠랑이 얼굴을 가린 채 방 안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정 이부인은 화도 나고 초조하기도 한 마음에 정칠랑을 손으로 두어 번 때렸다.
하지만 그런 정 이부인의 행동은 도리어 벌집을 쑤신 꼴이 되고 말았다. 정칠랑은 더욱 악을 쓰면서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울어댔다.
“제가 지낼 거처도 정돈이 다 됐다고 하니,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야, 여기서 지내도 돼.”
정 이부인이 울며 떼쓰는 정칠랑을 밀치면서 말했다.
“넌 네 동생 방에서 지내거라. 내가 네 동생을 데리고 자마.”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괜찮아요. 제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요.”
정교랑이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 이부인은 난감한 얼굴로 정칠랑을 두어 번 더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낯설어서 저러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렴.”
정 이부인이 정교랑에게 사과하자 정교랑은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요.”
정교랑은 정 이부인이 밖으로 배웅 나오려는 걸 손짓으로 공손하게 거절했다. 정 이부인은 몇 번 인사치레를 한 뒤, 여종을 시켜 정교랑을 배웅하게 했다.
정 이부인의 마당을 벗어나자 반근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품에 안은 채 달래고 있었다. 환하게 켜진 등불이 안을 더욱 따스하게 비췄다.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앞쪽을 내다보자, 두봉을 걸친 정교랑이 밤공기를 맞으며 은은한 불빛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연못 옆에 있던 방의 정리가 끝났다. 경성에서부터 마차에 싣고 왔던 정교랑의 집기와 가구들도 모두 방 안에 놓여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땐 덕에 방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당직을 서는 몇 명의 여종과 몸종들 외에도, 누군가가 문 앞에 서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란이 아씨를 뵈옵니다.”
춘란이 회랑 아래에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춘란.”
반근이 활짝 웃으면서 춘란을 반겼다.
“반근 언니, 금가아를 보살펴 줘서 정말 고마워.”
춘란은 곧바로 반근을 향해서도 큰절을 올렸다.
“아니야, 아니야. 오히려 그 애가 우리를 도와주는걸? 금가아가 나보다 더 오래 아씨 곁을 지켰어.”
반근이 서둘러 말했다. 춘란은 다시 한번 정교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저, 저는 다른 게 아니고 아씨께 인사를 올리러 왔어요.”
춘란은 고개를 살짝 들어 방 안에 앉은 정교랑을 힐끗 쳐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씨께서 이젠 다 나으셨네요. 소인도 정말 기뻐요.”
정교랑은 춘란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 앞으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간식 가져가서 먹어.”
간식?
춘란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양쪽으로 세워진 등롱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여인의 미소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반근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간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춘란을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연신 고개를 돌리며 감사 인사를 올리는 춘란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이 큰 저택 안에서, 아씨의 나아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오직 저 몸종 하나뿐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거나, 나아진 아씨의 모습을 보고도 쉬쉬하는 분위기야.
아씨께서는 타인이 악의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정상이니, 타인의 악의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아씨께서는 선의의 미소나 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넘치는 샘물로 갚아 주시는 거겠지.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가라.”
반근이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주(汀洲),
왕씨 가문의 저택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왕 부인은 저녁 식사도 뒤로 한 채, 대문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왕십칠의 거처로 직행했다.
“왜 그래? 왜 그러니? 설마 병이라도 난 게야?”
왕 부인이 치맛자락을 든 채 왕십칠의 방문 앞에 걸음을 멈추고 다급하게 물었다.
왕십칠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회랑 아래에 일렬로 서 있던 몸종과 미비(美婢: 어여쁜 시녀)들이 울먹거리거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긴 왜 울어!”
왕 부인이 호통을 치자 이들은 서둘러 훌쩍거림을 멈추었다.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간 왕 부인의 눈에 침상 위에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왕십칠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힘들어서 그래?”
침상 앞으로 다가가 앉은 왕 부인은 이불을 아래로 내리려 손을 뻗었다.
“이 어미에게 얼굴 좀 보여다오.”
왕십칠이 이불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자, 왕 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이불을 때렸다.
“어서 말해 보거라. 네 조모님은 널 기다리다가 혼절하셨어. 이젠 이 어미까지 혼절하게 둘 셈이야?”
왕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 소자는 불효자예요. 조모님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소자가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이불 안에서 왕십칠의 암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십칠의 말을 들은 몸종과 미비들 때문에 밖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련님, 도련님. 저 효란을 두고 가시면 아니 되어요.”
“도련님, 소낭이 도련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냉큼 꺼지지 못할까!”
시녀들의 우는 소리에, 왕 부인이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쳤다.
문밖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십칠,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로 너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생기면, 이 어미가 먼저 가마.”
왕 부인이 침상 옆에 앉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를 살려 주셔야 해요.”
왕십칠이 이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부인은 다급히 왕십칠의 손을 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살려야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너를 살려내마. 어서 무슨 일인지 이 어미에게 말해 다오. 무슨 일이든 어미가 해결해 줄게.”
“퇴혼할래요.”
왕십칠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왕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퇴혼?
“네가 퇴혼할 게 뭐 있어? 아직 혼례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왕 부인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그 정 낭자 말이더냐?”
왕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퇴혼?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혼례를 올린다는 걸 잘못 말한 거겠지?
긴장이 풀렸는지 왕 부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 때문에 이래? 걱정하지 말거라. 어미가 이미 동의하지 않았느냐. 혼사는 네가 원하는 대로 올릴 거야. 나도 그 낭자 얼굴을 보고 왔는데, 역시 우리 아들의 안목이 뛰어나더구나. 해가 바뀌기 전에 식을 올리자. 아니, 이번 달, 이번 달은 어떠니?”
왕십칠은 비통한 듯 소리를 내지르면서 침상 위에 고꾸라졌다.
“어머니, 그 여자랑 혼례를 올리면, 저는 죽은 목숨이라고요!”
왕 부인이 흠칫 놀랐다.
“갑자기 싫어진 게야?”
“싫어요, 싫어요.”
왕십칠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울먹거렸다.
“그 여자랑 혼사를 치르게 되면, 저는 죽게 될 거예요.”
왕 부인은 같이 지내보지 않는 한,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 속담을 속으로 떠올렸다.
그 낭자, 겉으로 보기에 괜찮던데, 정말 아직 머리가 멀쩡하지 않은 건가?
하긴, 바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병을 앓았으니, 아무리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 해도 실상은…….
“싫다면 관두자.”
왕 부인이 웃으면서 왕십칠을 토닥였다.
“정말로요?”
왕십칠이 기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왕십칠의 모습을 보며 왕 부인은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괜히 화가 나기도 했지만,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이런 일 가지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거야?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왕 부인이 웃으며 아들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
같은 시각. 노복은 왕 노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노복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단순하지 않다는 거야? 혼사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왕 노야가 언짢은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대꾸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죽겠다고 난리를 피워 집안이 발칵 뒤집힌 탓에 왕 노야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식을 들은 어머니까지 혼절하셨는데, 이 모든 게 고작 혼사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왕 노야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니, 없던 일로 치면 더 좋지.
“노야, 일단 제가 정 낭자에 관해 올리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이 혼사를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성가시다는 듯한 왕 노야의 모습에도, 노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엄숙하게 말했다.
서늘한 밤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시녀는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부인, 이부자리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칠랑 아씨의 이불도 다 가져왔고요.”
여종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딱 이번 한 번만이다.”
목욕 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흩트린 정칠랑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어머니도 앞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저를 때리지 마세요.”
정 이부인은 말없이 탓하는 눈빛으로 정칠랑을 흘겨보았다.
문이 열리자, 두 여종이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칠랑 아씨, 밤참 가져왔어요.”
여종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맛있는 향이 실내에 풍겼다.
“어머니, 여전히 저를 제일 아끼시는 거죠?”
수저를 들고 밤참을 먹으려던 정칠랑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등불 아래,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 이부인이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정칠랑의 코끝을 콕 찍었다.
“여전히가 아니야. 언제나, 항상 너를 제일 아낀단다.”
정칠랑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정칠랑이 코를 몇 번 훌쩍이고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냠냠 먹기 시작했다.
“칠랑, 지금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어미가 이러는 건 다 널 위해서야.”
정 이부인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저를 위해서 다른 사람한테 잘 해주는 거라고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칠랑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으이구, 이 바보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의 이마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내가 그 아이한테 잘해 주는 것처럼 보였어? 집을 지키는 개도 잘 먹이고, 잘 재워주잖아. 개를 잘 대해 주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 집을 더 잘 지켜 주기 때문이야. 내가 개를 위해서 너를 혼낸다고 한들, 이 어미가 너를 버리고 개를 딸로 삼겠다는 뜻이 아니잖니.”
정칠랑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을 잘 지키게 하려고 어머니가 그 바보한테 잘해 주시는 거예요? 집 지키는 개는 이미 우리 집에 많이 있는데.”
정칠랑이 뾰로통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정칠랑의 말에 정 이부인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정 이부인은 다시 정칠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바보야.”
정칠랑은 정 이부인을 향해 입술을 삐쭉이고는 손으로 그릇을 들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넌 이제 겨우 아홉 살이라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있을 거야.”
등불에 비친 정칠랑의 오목조목한 얼굴을 바라보며, 정 이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어미는 나중에 네가 좋은 집에 시집가게 할 거란다. 요즘은 좋은 집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어머니랑 안 떨어지고 평생 같이 살 건데요!”
정칠랑이 음식으로 가득 찬 입을 웅얼거렸다.
“어미는 그런 창피한 꼴은 당하기 싫구나.”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어미의 말을 잘 들어라. 너는 네 바보 언니에게 잘해 줘야 해. 잘 구슬려서 즐겁게 해 줘야 하고,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생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 애한테 제일 잘해 주는 사람이어야 해.”
“왜요?”
정칠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정육랑보다 더 예쁜 옷을 입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좋은 것을 쓰고 싶지?”
정 이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죠!”
정칠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꼭 이 어미 말대로 해야 한다. 네 바보 언니를 잘 구슬려야 해.”
정칠랑이 또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우리 똑똑하고 예쁜 칠랑, 설마 그 바보가 너를 좋아하도록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사람들은 다 칠랑을 좋아해야 하는걸요!
입안의 음식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던 정칠랑은 갑자기 그릇을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어서 먹으렴. 우리 칠랑이 최고야.”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정칠랑의 코끝을 톡, 하고 눌렀다.
“자, 일어나서 뭐 좀 먹으렴.”
한편, 또 다른 어머니인 왕 부인도 여종이 가져온 쟁반을 쳐다보며 말했다.
집에서 입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왕십칠이 책상다리로 앉은 채 허겁지겁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천천히 먹어.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진 왕 부인이 물었다. 왕십칠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뭐라 대답했지만, 왕 부인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끼라고?”
왕 부인이 다시 물었다.
왕십칠이 입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목을 길게 뺐다. 옆에 있던 예쁘장한 미비 하나가 속상한 얼굴로 왕십칠의 팔을 쓰다듬자, 다른 쪽에 앉아 있던 미비는 직접 수저와 그릇을 들고 왕십칠에게 탕을 떠먹여 주었다.
“모르겠어요. 한참 동안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왕 부인은 왕십칠의 대답을 듣고는 눈물을 훔쳤다.
“어리석은 것.”
왕 부인이 눈물을 닦은 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 낭자가 보기에는 꽤 괜찮던데, 오는 길에 네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니?”
오는 길에 네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니?
왕십칠이 돌연 음식을 씹던 일을 멈췄다.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창문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왕십칠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떨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커먼 밤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등롱 때문에 불빛이 어지러웠다.
이리 와!
갑자기 왕십칠의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폭음처럼 들려왔다. 여인이 성큼성큼 문턱을 넘고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신에게 활시위를 겨누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말을 안 듣네?
긴 화살이 서늘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왕십칠이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손에 쥐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머리를 싸매며 뒤로 고꾸라졌다.
방 안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게 모두 사실이더냐?”
노복의 이야기를 다 들은 왕 노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정씨 가문의 바보가 신의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의?”
노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십중팔구 그 낭자일 겁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신의의 성씨가 정확히 정씨라고 하진 않았지만, 경성에서 수십 년간 조용히 지내던 주씨 가문에 갑자기 신의가 나올 리 없다고 했습니다. 신의가 나타난 시점도 주씨 가문에서 정 낭자를 데려간 이후였고요.”
왕 노야가 실소를 터트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씨 가문의 바보가, 신의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 아이는 분명 바보였는데?”
노복이 고개를 저었다.
“노야, 정 낭자가 신의인지 아닌지는 소인도 직접 본 적이 없기에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추측할 뿐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 바에 따르면, 정 낭자는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노복은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바보였다면, 주씨 가문에서 이토록 위풍당당하게 호송했을 리 없습니다. 또 정말로 그 여인이 바보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비와 먹구름을 불러올 리도 없고, 밤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리라 예측할 수도 없으며, 한밤중에 불바다가 된 아수라장 속에서 화살로 단번에 사람을 쏘아 죽일 리도 없습니다.”
왕 노야의 표정도 점차 진지해졌다.
노복의 말이 맞아. 그런 일이 딱 한 번 일어났다면 우연일 테고, 두 번 일어났다면 운이 좋아서겠지.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우연이나 운이 아니야. 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주씨 가문 시종들의 지극히 공손한 태도, 울음을 터트렸다는 주 노야, 천가의 꽃등 놀이, 공주부 진씨 가문의 배웅, 오는 내내 정확히 맞아떨어지던 예측들,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주저 없이 화살을 쏘는 결단력까지.
“듣고 보니, 과연 정 낭자라는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다시 경성에 사람을 보내 정 낭자에 대해 제대로 알아 오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명하던 왕 노야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알아보지 말게. 알아볼 필요도 없겠어.”
왕 노야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혼사를 치르고 난 뒤에 알아봐야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지 않겠나.”
가문에 바보를 들이는 일도 고민 없이 결정했는데, 능력 있는 사람을 들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고민할 필요가 없지.
노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 노야에게서 원했던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노복은 곧 무언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노야, 십칠공자께서 이 혼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원치 않아? 갑자기 왜 싫다는 게야?”
왕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왜 싫다고 하냐고요? 당신이 가서 우리 십칠 겁먹은 모습 좀 봐요!”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왕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열리자, 잔뜩 지친 모습의 왕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복이 바닥에 엎드려 왕 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당장 내일 형님한테 가서 이 혼사를 무르겠다고 할 거예요. 형님이 난감해지지 않게 다른 집안을 알아봐 둘게요.”
“안 돼.”
왕 노야가 부인의 말을 단박에 거절하자 왕 부인은 깜짝 놀랐다.
십칠이 정씨 가문의 바보를 데려오겠다고 할 때도 왕 노야는 이렇게 거절했었다. 그건 가장으로서 왕 노야가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보를 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건데, 이리도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왕 부인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혀를 차면서 애초부터 이 혼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며 큰소리를 내야 하지 않나? 정 대부인이 난처할까 봐 그런 건가? 그래도 정씨 가문의 안주인이니까.
“형님을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알아서 잘 마무리할게요.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혼수 때문에 다투는 거니까, 혼수가 필요 없다는 집안을 찾아오면 돼요.”
왕 부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혼수가 무슨 대수라고. 중요한 건 사람이지.”
왕 노야의 말을 들은 왕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을 잘 들어 보시오. 그 정 낭자라는 사람은 보통이 아니야.”
왕 노야가 부인을 쳐다보며 조금 전에 노복이 했던 이야기를 대강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에 왕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당신 지금 농담하는 거죠?”
“농담으로 십칠이 저 지경까지 됐겠소?”
왕 노야가 대꾸했다. 왕 부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사람을 죽인 거잖아요.”
정신을 차린 왕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낫지.”
왕 노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왕씨 가문은 해상 무역을 가업으로 하여 부를 이루었기에, 피로 물들지 않은 배가 없었다.
“십칠이 저렇게 겁에 질려 있는데, 이를 어쩜 좋아요?”
왕 부인이 힘없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물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2년 정도만 밖에서 단련하고 오면, 이런 것들은 다 별거 아닌 일이 될 거요. 도리어 기뻐서 길길이 날뛸지도 몰라.”
왕 노야의 말에도 왕 부인은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십칠이 가업을 이어받을 거라는 기대도 안 하고 있잖아요.”
“지금 십칠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낭자가 관건이오. 그런 능력이 있는 이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공주부의 진씨 가문도 그 낭자한테 잘 보이려고 배웅을 나왔다잖아.”
“그렇다고 공주부 진씨 가문에서 혼담을 넣은 것도 아니잖아요.”
왕 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됐소. 이 얘기는 그만합시다. 이 일은 이렇게 정해졌으니 그리 아시오.”
왕 노야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자네도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생했네. 우선 돌아가서 쉬고, 할 말이 있으면 내일 다시 하게.”
윗전이 쉬겠다는 말에 노복은 서둘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왕 부인이 이마를 짚으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목욕을 하러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노야. 부인, 노야! 큰일 났어요! 십칠공자께서 목을 매달려고 하십니다!”
여종과 몸종들이 울부짖으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왕 부인은 일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쓰러졌다.
“아이고, 내 아들.”
조용하던 왕씨 가문의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밤하늘의 색이 짙어지고, 바람이 간간이 창문을 두드렸다.
정칠랑의 목 아래로 팔베개를 해 주던 정 이부인이 저린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여종이 인기척을 느끼고 방 안을 보며 정 이부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부인, 물을 가져다드릴까요?”
여종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침상 위의 정칠랑이 잠꼬대를 하며 이불을 휙 치우고는 돌아누웠다. 정 이부인은 여종을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짓했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몇 번 토닥이자, 정칠랑은 다시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었다.
“얘도 참, 나랑 같이 자는데도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네.”
정 이부인이 새근새근 자는 정칠랑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중얼거렸다.
“부인, 고생이 많으세요.”
여종이 웃으면서 정 이부인에게 속삭였다.
“고생은 무슨. 세상 어느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일을 고생스럽다고 하나.”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다시 옆으로 몸을 뉘었다.
여종은 등불 하나를 조심스럽게 끄고 물러났다. 여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칠랑에게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주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정 이부인이 휘장을 내리자, 여종의 시야가 가려졌다.
여종은 바깥 대청에서 바로 잠을 청하지 않고, 잠시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왜 아직 안 자?”
당직을 서고 있던 다른 여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넋을 놓고 서 있던 여종은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어머니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서.”
다른 여종이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
여종은 미소로 대답하고는, 잠시 창밖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비로소 자리에 누웠다.
반근이 눈을 떴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잠이 덜 깬 반근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잠시 생각하고 나서야 정씨 저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을 대충 걸친 반근은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 안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여인은 침상 위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고른 숨을 내쉬며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여인이 덮고 있는 이불은 반듯하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었던 듯이.
반근은 조심스럽게 휘장을 내리고 물러났다.
아침 해가 밝아올 때 즈음, 성 밖 현묘산 아래의 현묘관에는 향불이 피어오르며 독경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멀리서 보아도 도관은 수리를 마친 티가 났다. 이른 시간인데도, 도관의 문 앞에는 벌써 말과 마차가 즐비했다.
아침 수련이 끝나자 관주가 대전을 걸어 나왔다. 관주를 따라 나온 열댓 명의 남녀 신도들이 관주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시주님들, 이쪽으로 오세요. 간식을 준비해 두었어요.”
대전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도동 두 명이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신도들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며 도동을 따라 편전으로 갔다.
신도들이 도동을 따라 자리를 뜨자, 한쪽 옆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와 관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늘 간식이 준비됐어요. 미리 정한 순서대로 저를 따라오세요.”
대전 뒤에 서 있던 아이 두 명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둘러 아이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손 관주는 회랑 아래에 서서 도관을 둘러보았다.
도관의 바닥 길은 모두 새로 깔았고, 나무 밑동은 모두 벽돌을 둘러 단장했다. 도동 세 명이 빗자루를 들고 밤새 떨어진 낙엽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치우고 있었다.
이제 현묘관은 향불을 올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도관을 관리하는 인부 또한 많이 늘어났다. 지금의 현묘관은 더 이상 썰렁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손 관주는 총채를 두어 번 흔들고는 도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문을 지나자 여러 사람이 산길을 오르는 게 보였다. 현묘관이 유명해진 탓에, 나들이를 즐기러 현묘산에 놀러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현묘관 밖 산길에는 광주리를 내놓고 음식을 파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인근 백성들로 찐빵과 따뜻한 차, 말린 과일 등을 집에서 만들어 와 사람들에게 팔았다.
현묘관의 간식과 차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마을 백성이 파는 음식들로 허기를 채우곤 했다. 마을 백성들은 현묘관 아래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생계수단을 마련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사님.”
“도사님, 안녕하세요.”
관주가 밖으로 나온 것을 본 사람들이 예를 올리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광경이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소현묘관의 추문 탓에 덩달아 돌팔매질과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외출을 꺼리던 게 대현묘관 도사들과 관주였다. 이제 그런 일은 관주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관주는 백성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웃으며 답례를 했다. 도동 두 명이 관주를 따라 도관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 산 바위와 나무들 사이로 조그마한 도관이 보였다.
“관주님.”
두 여도사가 문을 열고 관주를 맞이했다. 관주가 고개를 들어 편액을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 며칠 날씨가 습한데, 아씨의 방 아궁이에 불을 좀 지폈느냐?”
관주가 물었다.
“예. 이불과 베개도 매일 햇볕에 말리고 있습니다.”
여도사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주가 막 정원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사부님!”
정원 안에 서 있던 사람 다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한 도동이 광주리를 짊어진 채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왔다.
“오늘 성에 간다고 들었는데, 벌써 돌아왔어?”
여도사 중 한 명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도동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사부님, 도, 돌아왔어요.”
여도사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도동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러니까요, 사부님. 정 아씨께서 돌아오셨다고요!”
숨을 다 고른 도동이 허리를 펴고는 기쁜 얼굴로 외쳤다. 관주와 두 명의 여도사, 그리고 새로 들어온 도동 두 명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정원에 있던 사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쌀을 사러 갔다가 들었어요. 그래서 정씨 저택 앞으로 찾아가 알아보기도 했고요. 어제 돌아오셨다면서 다들 그 얘기 중이었어요.”
도동이 신나서 말했다.
“쌀을 살 겨를도 없이 바로 뛰어온 거예요.”
다들 그 얘기를 하고 있다고?
관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무슨 얘기를 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씨는 바보가 아니래요.”
도동의 말에 관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소리.”
관주가 총채를 휘두르고는 몸을 돌렸다.
애초부터 바보가 아니었거늘.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정 대부인 마당의 적막함이 깨졌다.
“어머니, 어머니.”
정육랑의 목소리가 문밖에서부터 전해져 들어왔다.
침실 안. 침상 위에 누워있던 정 대부인은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어머니, 어제 그 바보가 찾아와서……. 엇? 어머니, 안색이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왜 아직도 안 일어나신 거예요?”
정육랑이 정 대부인의 침상 가까이로 다가가 정 대부인의 이마를 만져보려고 손등을 내밀었다.
“아니다. 피곤해서 그래.”
정 대부인이 정육랑의 손을 치우며 대답했다.
어제 그 애가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야.
이부인이 나 몰래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도 모르겠고, 노부인까지 집을 나가겠다고 난리를 치시니, 밤잠을 설칠 수밖에.
“어머니, 어제 그 바보가 찾아와서 뭐라고 했어요?”
정육랑이 물었다.
“날 찾아온 게 아니라, 네 아버지를 찾은 거야.”
정 대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종이 정 이부인과 정교랑의 도착을 알렸다.
“대노야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셨다고 전해라.”
정 대부인이 여종에게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 이부인이 미소지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정육랑은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 이부인의 뒤에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무슨 좋은 걸 먹었길래, 나보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숙모님보다도 키가 크지?
“형님, 노야를 뵙는 일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교랑을 데리고 노부인을 뵐까 싶어서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정 대부인은 정 이부인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노부인은 내 시어머니인 동시에 자네의 시어머니인데, 가서 뵈면 뵙는 거지, 뭐하러 나한테까지 와서 물어?
정 대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속내를 지금 여기서 말해 버리면, 정 이부인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정교랑을 데리고 정 노부인을 만나러 갈 것이다.
노부인께서 저 아이에 관한 일은 듣기도 싫어한다는 걸 동서는 전혀 모르는 게야? 노부인께서 벌컥 성이라도 내시면, 동서는 억울하다며 모든 잘못을 나에게 떠넘기려 하겠지.
형님이 저더러 가라고 했어요, 하면서.
분명 엄청 억울한 양 굴 거야. 그 뒤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분노로 가득 찬 노부인의 욕지거리겠지.
하지만 내가 못 가게 한다면, 동서는 내가 못 가게 막아서 갈 수 없는 거라고 저 바보에게 말할 거야.
백모님이 너더러 가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백모님이 널 싫어하거든, 하고.
여기서 뭐라 대답하든 동서는 좋은 사람이 될 테고, 나는 나쁜 사람이 되겠지.
정 대부인은 정 이부인을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도 하지. 예전에는 왜 저 여인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라 생각했을까?
“갈 필요 없네.”
정 대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정 대부인의 예상대로, 정 이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위로했다.
“그럼 다음에 편할 때 가자꾸나.”
정교랑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정 대부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너 같은 손아랫사람의 기분까지 맞춰줄 줄 알아? 네가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 편에 서서 비위를 맞춰야 할지 알아서 판단해야 할 것이야.
네가 시집갈 집안이 누구네 집안인 줄은 알아? 그 집으로 시집을 가면, 네가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누구인지는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모두 같은 어머니이지만, 계모와 백모의 친근함은 다를 수밖에 없어!
“교랑,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노부인께서 워낙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래. 백모님한테 먼저 알아봐 달라고 말씀드린 후에 다시 생각하자.”
정 대부인의 방에서 나온 정 이부인이 다시 정교랑을 위로하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바쁘실 텐데, 그만 가보세요. 혼자 좀 걷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크진 않지만 둘러볼 건 있지. 내가 같이 가 줄게.”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저는, 혼자, 걷고 싶어서요.”
정교랑은 단어를 정확하게 끊어가며 말했다.
손아랫사람이 웃어른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 이부인은 이런 정교랑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정교랑의 병 때문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래, 그래. 그럼 네 동생을 불러올 테니, 둘이 같이 걷거라.”
정 이부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 저희 아씨께서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동생더러 안내를 좀 해 달라고 하렴. 자매 둘이 정도 좀 쌓아 보고.”
정 이부인은 반근의 말을 끊고 꿋꿋하게 당부의 말을 했다. 그러더니 정교랑과 반근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서둘러 여종을 시켜 정칠랑을 불러오게 했다.
반근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정교랑은 반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은 말없이 한걸음 앞서 걸음을 옮겼다.
반근은 정 이부인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재빨리 정교랑의 뒤를 따라갔다.
“어머니, 쟤는 보면 볼수록 음침하다니까요. 쟤를 집에 두지 말고 그냥 도관으로 보내 버리면 안 돼요?”
정육랑이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펴고 정 대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했다.
정 대부인은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응, 대꾸하고는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어머니.”
모친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듯하자, 정육랑은 정 대부인의 옷자락을 흔들면서 외쳤다.
“쟤 빨리 내쫓아요, 네? 안 그럼 제가 창피해서 집 밖을 못 나갈 지경이라고요.”
“됐다, 그만해라. 곧 있으면 시집갈 사람이야. 이번에 나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게다.”
정 대부인이 시끄럽고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요?”
정육랑이 물었다.
“정말이야. 그러니 어서 나가서 놀거라. 난 좀 더 쉬어야겠다. 네 어미는 지금 힘들어 죽겠어.”
정 대부인이 손을 휘휘 내젓자 원하는 대답을 들은 정육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섰다.
정 대부인이 겨우 막 침상에 몸을 뉘자, 다시 문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왕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정 대부인은 깜짝 놀랐다. 특히 어제와 달리 딴사람이 된 듯한 몰골의 왕 부인을 보자 정 대부인은 더욱 놀랐다.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어제도 돌아가느라 종일 힘들었으면서, 할 말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면 되지, 뭐 하러 또 왔어?”
정 대부인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꺼번에 여러 질문을 했다.
정주에서 강주까지는 반나절 거리니까, 어제 왕 부인이 정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을 터. 그런데 지금 또 다시 강주까지 온 것을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새벽녘부터 달려왔겠구나. 어쩐지 안색이 너무 안 좋더라니.
“오지 않으면, 나도 살지 못할 것 같아서 왔어요.”
왕 부인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서둘러 여종을 시켜 까만 팔걸이 탁자를 가져오게 했다. 왕 부인이 팔걸이 탁자에 기대더니 깊은 한숨을 토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형님, 어제 우리 집이 난리가 났었어요. 십칠 그 애가, 글쎄…….”
왕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정 대부인은 화들짝 놀라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십칠이 왜?”
정 대부인이 소리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왕 부인이 대답했다.
“왜? 병이 났어? 힘들어서 병이 난 거지? 그러게 내가 경성까지 보내지 말라니까, 내 당부를 아주 귓등으로 듣더니만. 아이고, 우리 십칠.”
정 대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하자, 왕 부인은 울다 말고 정 대부인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다행인 건, 십칠을 제때 구해냈어요.”
“여봐라. 마차를 준비하거라. 내 당장 정주로 가서 우리 십칠의 얼굴을 봐야겠다.”
정 대부인이 눈물을 닦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 부인은 황급히 팔을 뻗어 정 대부인을 막아섰다.
“형님,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형님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신다면, 십칠은 깨끗이 나을 거예요.”
정 대부인이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어서 말해 봐. 하나가 뭐야, 백 개라도 다 들어줄 수 있지.”
정 대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여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부인들의 대화를 끊었다.
“부인, 부인. 누가 찾아왔는데요."
여종의 손에는 명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누군데? 안 본다고 전하거라.”
정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강주 바닥에서는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만 볼 정도의 힘은 있는 정 대부인이었다.
“그 사람 말로는 경성의 무슨 진(秦)씨 가문이라던데요.”
여종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여종은 명첩 위의 글씨를 읽을 줄 몰랐고, 찾아온 사람이 한참 동안 얘기한 길고 긴 명호를 외우지도 못했다. 그저 경성에서 왔다는 말에,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라고만 추측할 뿐이었다.
진씨? 모르는 집안이야.
정 대부인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공주부 진씨 말이더냐?”
왕 부인이 손을 젓는 정 대부인의 팔을 붙잡은 채 여종을 향해 물었다.
공주부?
공주의 뜻은 정 대부인도 잘 알고 있던지라,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어서 이리 가져와 보거라.”
왕 부인이 여종에게 명첩을 가져오라고 손짓하자, 여종은 서둘러 왕 부인에게 명첩을 건넸다. 왕 부인이 명첩을 펼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게 누구네 집안인데? 노야를 찾아온 거겠지?”
여종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아니요. 그 사람들 말로는 정교랑의 집안 가장을 찾아왔다는데요.”
정 대부인은 잠시 정교랑이 누구였는지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애 가장을 찾는다고?”
정 대부인의 놀란 얼굴이 금세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정교랑이라는 이름을 대고 가장을 찾는다면, 다른 게 있겠어? 혼담을 넣으러 온 거겠지. 내 이럴 줄 알았다.
“주씨가 보낸 사람들이겠지? 잠시 기다리라고 하거라.”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돌려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왕 부인은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정 대부인은 왕 부인이 당황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새우 한 마리가 큰 풍랑을 일으키겠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왕 부인은 어색한 웃음을 짜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우리 십칠의 일이 우선이야. 그래서 그 부탁이라는 게 뭐라고?”
왕 부인이 정 대부인을 쳐다보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좀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입을 뗐다.
“아, 그게 말이죠. 바로 이번 달에, 십칠과 정교랑의 혼사를, 올리게 해 달라는 부탁인데요.”
왕 부인은 힘겹게 말을 띄엄띄엄 이어 갔다.
에취!
정주, 왕씨 저택.
우렁찬 재채기 소리가 즐거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를 끊었다. 왕십칠이 손으로 코를 비볐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왕십칠이 혼잣말했다.
“공자님, 술 드세요.”
왕십칠의 옆에 있던 미비가 앞부분에 금테를 두른 술잔을 건네며 교태를 부렸다. 왕십칠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정말로 가셨다고?”
왕십칠이 물었다.
“공자님, 안심하세요. 부인께서는 날이 밝기도 전에 떠나셨어요. 공자님께서 목까지 매신 일을 헛되이 할 수야 없죠.”
미비가 말했다. 다른 미비 두 명이 왕십칠의 목에 난 자국을 매만지며 속상해했다.
“밧줄 자국 좀 봐요.”
미비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왕십칠이 신경질적으로 그들의 손을 쳐냈다.
“이게 다 너희 때문 아니냐. 내가 빨리빨리 좀 움직이라고 했는데, 너희가 꾸물대는 통에!”
왕십칠이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잖아.”
시녀들이 왕십칠을 에워싸고 다정하게 다독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죽는 척만으로는 아버지를 움직일 수 없어. 내가 정말로 목을 매달았으니 그나마 퇴혼을 승낙해 주신 거지.”
왕십칠이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공자님, 이번엔 정말 원하는 대로 되실 거예요.”
미비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다 내 뜻대로 될 거야.
왕십칠은 득의만면했다. 피곤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 술이나 마시자!”
왕십칠이 외쳤다. 미비들이 왕십칠 옆으로 달려들어 교태를 부리며 즐겁게 웃었다.
“공자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왕십칠의 품에 기댄 미비 하나가 수저로 두부를 떠서 왕십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여기 두부가 그렇게 맛있대요. 이건 아무나 못 사는 두부예요.”
왕십칠이 입을 크게 벌려서 두부를 먹었지만, 곧바로 퉤 하며 뱉어냈다.
“맛있긴 뭐가 맛있어! 이게 무슨 두부냐! 너희가 진정한 두부 맛을 못 봐서 그렇지.”
왕십칠은 멸시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미비들을 비웃었다. 왕십칠의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미비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가식적인 감탄을 남발했다.
“공자님, 그럼 진정한 두부는 어떤 두부인데요?”
초겨울이지만 불을 땐 방 안은 봄처럼 포근했다. 미비들은 가슴께까지 오는 짧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새하얀 가슴이 넘실거렸다.
눈앞의 광경에 왕십칠의 눈이 시뻘게졌다. 왕십칠이 가까이에 있는 미비 하나를 품에 확 당겨와 안으면서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하얗고, 부드럽고 한입에 다 넣을 수 있지.”
왕십칠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미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끝을 흐렸다. 왕십칠에게 안긴 미비가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면서 콧소리를 냈다.
“공자님, 이러지 마세요.”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과 어우러진 실내는 완연한 봄과도 같았다.
“공자님, 공자님, 그 두부는 어디서 드셨는데요?”
희희낙락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왕십칠은 여전히 미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오랜만에 여인을 품게 된 왕십칠이 허겁지겁 옷을 벗으며 미비에게 달려들던 찰나, 그 질문을 듣더니 온몸이 굳은 듯 손을 멈추었다.
경성에서…….
경성!
맛있는 두부를 먹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화괴도 보고, 정교랑도…….
정교랑이라…….
“공자님, 공자님.”
왕십칠이 가슴에 입을 맞춰 대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미비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왕십칠을 불렀다. 미비가 참기 힘들다는 듯 왕십칠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재촉했다.
왕십칠이 갑자기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손에 힘을 뺐다. 돌연 손에 힘을 뺀 왕십칠 때문에 품에 안겨 있던 미비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아얏,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앞으로는 절대로 경성 얘기를 꺼내지 말거라!”
방 안에 왕십칠의 짜증 섞인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경성.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로?”
그의 앞에 있던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제대로 물어봤는데, 부인께서 오(吳) 낭자를 시켜 혼담을 넣으라고 강주로 보내셨다 합니다. 그것도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들고 갔다던데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우리 집 사주단자도 있을지 모르겠네.
밖으로 나가던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사환이 알아 온 반쪽짜리 소식은 실상 어머니가 일부러 자신에게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진십삼은 생각했다. 나머지는 자신에게 직접 와서 물어보라는 듯, 어머니는 딱 반만 알려주신 셈이었다.
진십삼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쉬우시겠지만 저는 물어보러 가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
진십삼은 발걸음을 돌리더니 사환에게 말했다.
“이렇게 쉬는 것도 오랜만인데, 태평거로 술이나 마시러 가자.”
사환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끌러 갔다.
해가 중천에 뜨자, 따스한 햇볕이 초겨울의 서늘함을 가시게 했다.
태평거에는 과로신선이 없었지만, 대신 낙득자재가 있었다. 식당 안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찼고, 날이 추워서 조금 늦게 집을 나온 사람들은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며 내일 자리를 예약했다.
문 앞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여덟 가지 모둠 간식이 나왔습니다. 어느 손님께서 시키신 거죠?”
점원 하나가 찬합 하나를 올려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문 앞의 차양 아래, 난로 가까이서 손을 녹이고 있던 춘령이 벌떡 일어섰다.
“저요!”
춘령이 종종걸음으로 점원에게 다가갔다.
“또 오셨네요, 아가씨. 거의 이틀에 한 번씩 오셔서 사 가시네요.”
춘령이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 언니가 좋아해서요. 여기서 간식을 너무 맛있게 만드니 그런 거 아니겠어요?”
칭찬을 들은 점원은 기분이 좋아져서 헤벌쭉 웃으며 춘령에게 찬합을 건넸다.
“장사가 엄청 잘 되네요.”
춘령이 식당 안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예, 그렇죠. 아가씨, 매일 간식만 드시지 말고 다음에는 식사하러 한 번 오셔요.”
점원이 말하자 춘령은 싱긋 웃었다.
“언니가 출타하는 게 불편해서요.”
점원과 춘령이 대화하는 사이,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점원 하나가 반색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진 공자님, 오셨습니까.”
진 공자? 역시 이곳에 올 줄 알았어.
춘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두봉을 두른 채 말에서 내린 소년이 말고삐를 놓고 두모를 벗으며 환한 미소로 걸어왔다. 소년 공자의 미소가 소슬한 겨울에 밝은 색채를 더해 주었다.
“진 공자께서 어떻게 이 시간에 오셨어요?”
문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춘령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비켜서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곁눈질했다. 나이가 열여섯, 일곱 즈음 되어 보이는 낭자가 안쪽에 서 있었다.
“아쉽지만 자리가 없네요. 다음에는 더 일찍 오세요.”
시녀가 말했다. 진십삼은 시녀의 말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씩 웃었다. 진십삼이 손으로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아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게다.”
시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몸을 낮춰 예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에 있지? 신선거가 바쁘지 않아서?”
진십삼이 물었다.
“두부방 확장 공사를 해야 해서요.”
진십삼이 문을 지나고 나서야 시녀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자님께서 대사님께 말씀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두부값 좀 올려 달라고요.”
“내가 나설 필요까지 있어? 반근 낭자의 언변이 그리 뛰어난데, 대사님이 낭자를 어찌 이기겠나.”
“대사님께서 말로 저를 못 당하겠다고 여기셨는지, 아예 대화 자체를 안 하신단 말이에요.”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담소를 나누며 층계를 올라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춘령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아가씨?”
문 앞의 점원이 의아한 모습으로 묻자 춘령은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두부를 사 갈 수도 있나요?”
춘령의 물음에 점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또 물량이 부족해서 도저히 두부를 팔 수가 없습니다.”
춘령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려 점원과 몇 마디 더 나누고 찬합을 안은 채 자리를 떠났다.
마차에 몸을 실은 춘령은 다시 고개를 돌려 태평거를 쳐다보았다.
그 여인이 경성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곳이, 바로 저 태평거인가? 저 두 사람은 그 여인이 점포를 지키라고 남겨 둔 사람들이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휘장 밖으로 보이는 태평거가 점점 멀어져갔다.
춘령은 휘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점이 된 태평거를 허공에서 검지와 엄지로 집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검지와 엄지를 꾹 눌러 사이에 있던 태평거를 시야에서 없앴다.
찬란한 햇빛 아래 있던 태평거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춘령은 고개를 들어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돌멩이 하나가 연못에 퐁당 떨어지자 잔잔하던 수면에 물결이 일었다. 정칠랑이 손을 툭툭 털고는 답답한 듯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어이, 도대체 뭘 하면서 놀고 싶은 건데?”
정칠랑의 뒤에 서 있던 정교랑은 조금 낙담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을 싹 다 둘러보았지만, 정교랑의 기억 속 어떤 조각과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저기는 뭐야?”
정교랑이 먼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정칠랑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긴 바깥이야.”
“네 집은, 이게 다야?”
정교랑이 물었다.
말투가 왜 저렇게 아니꼬워?
정칠랑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큰 저택에 살고 싶어도 못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서둘러 정칠랑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정칠랑은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서 좀 걷자.”
“날이 이렇게 추운데, 나가서 뭐해.”
정칠랑은 기분 나쁘다는 듯 대꾸했다가, 모친의 당부가 떠올라 인내심을 갖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는 재미있는 것도 없어. 더럽고 지저분하고, 거지들도 엄청 많아. 그래도 바깥에 나가서 놀고 싶다면,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랑 다 같이 나가자.”
“같이 안 가도 돼. 혼자 나갔다 올게.”
정교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칠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교랑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와 성을 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랑 같이 들어가자고 했잖아. 내가 바둑 두는 거 알려 줄게.”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바둑은 이미 둘 줄 알아. 가르쳐 줄 필요 없어.”
바둑을 둘 줄 안다고? 바보가 바둑을?
정칠랑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하는 수 없이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연못은 후문과 가까이에 있어서, 금세 후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문을 지키고 있던 여종은 정칠랑을 보더니 공손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저택 안으로 전해져 왔다. 어린아이들 한 무리가 웃으며 뛰어다녔고, 봇짐을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든 사람들도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녔다.
“저쪽은 꽤 크네.”
정교랑이 거리 반대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거리 반대편에는 높낮이가 다른 지붕들이 새까맣고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진짜 바본가 봐. 큰길 너머에 있는 들판도 넓으니까 거기 가서 살든지.
“저기는 남정이야.”
정칠랑은 역겨운 듯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옆에 있던 여종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냄새 나 죽겠네. 어머니한테 이 사람들 우리 집 근처에 못 살게 하라고 해야겠다. 돼지, 개, 닭이며 오리까지 너무 지저분하잖아. 이쪽은 싹 다 깨끗하게 치워 버리고, 담을 쌓아서 우리 집이랑 아예 격리되게끔 하라고 해야지.”
정교랑은 걸음을 옮기면서 저택 내부와 완전히 다른 세상의 모습을 구경했다.
남정이라.
북정의 저택 안에서는 정 대부인이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경성의 진씨 가문이라고 했죠?”
정 대부인이 두 여인을 쳐다보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입은 옷이며 장식은 꽤 괜찮아 보이네. 강주의 여인네와는 행동거지부터가 달라.
“네. 정 낭자의 백모님 되세요?”
여인 중 하나가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정 대부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씨 집안의 안주인이에요. 무슨 일로 왔죠?”
정 대부인은 무릎 위에 놓았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 저희 부인께서 정 낭자를 위해 몇 군데 혼담을 더 넣었거든요. 정씨 가문에서는 이 혼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해서요.”
여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는 정 대부인 앞으로 상자 하나를 밀었다.
역시!
정 대부인의 심장이 두근댔다.
상자 안에는 사주단자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떤 집안들일지 모르겠네. 주씨 가문이 준비한 것이기도 하고, 공주부 진씨 가문이 직접 나섰다니 분명 명문가들로 골라 왔겠지?
경성의 집안과 연을 맺는다니.
정 대부인은 손을 뻗어 사주단자들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때 병풍 뒤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부인은 화들짝 놀라 앉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아무리 좋은 집안들이라고 해도, 우리 정씨 가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야. 다 주씨 가문을 위해서 넣는 혼담들이겠지.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으니, 내 사람부터 챙겨야 해.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정 대부인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상자를 다시 여인 앞으로 돌려주었다.
“우리 교랑의 혼사는 이미 정해져서요.”
진씨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상자를 닫고 예를 표한 뒤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 대부인은 어쩐지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형님.”
왕 부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병풍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왕 부인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정 대부인을 보며 물었다.
“진짜 솔깃했던 건 아니죠?”
정 대부인이 웃었다.
"그럴 리가 있니. 다른 낭자라면 모르겠는데, 이건 그 아이의 일이잖아. 이렇게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걔가 분간해야 할 텐데. 그리고 그 가문 사람들이 정말 그 아이를 원해서 혼담을 넣는 거겠어?”
그 가문의 사람들은 정말 그 아이를 원해서예요.
왕 부인은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으로 두기 마련이니까.
왕 부인이 어색한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정 낭자가 직접 우리 십칠이 좋다고 했잖아요.”
“당연한 말을. 우리 십칠이 얼마나 좋은 아이인데.”
정 대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해요. 사주단자도 교환했으니까 나머지는 제가 돌아가서 며칠 내로 준비해 둘게요. 십일월에 혼례를 올리고, 십이월에 다 같이 새해를 보내는 거예요.”
왕 부인이 미소지으며 말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들 텐데, 좀 쉬다가 가.”
정 대부인이 다정하게 왕 부인을 붙잡았다.
“아니, 아니에요. 시간이 이를 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럼 가 봐. 십칠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네.”
왕 부인이 문턱을 넘다가 발을 헛디뎌서 몸을 휘청였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그녀는 재빨리 문틀을 붙들었다.
십칠. 우리 십칠이 집에서 좋은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를 어쩜 좋아.
“오 낭자, 이를 어쩌죠? 정씨 가문에서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건 부인께서 추측하신 바와 다른걸요?”
정씨 가문의 저택 밖, 여종 두 명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주단자가 든 상자를 들고 있던 여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고민도 하지 않다니.”
여인은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정씨 저택의 대문을 쳐다보았다.
이래서 집 밖을 나가면 예기치 못한 일투성이라는 말이 있나 보네.
“저희는 그럼, 이대로 돌아가나요?”
다른 여종이 물었다.
“안 되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이냐.”
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우린 이제 누굴 찾아가야 하죠? 바로 정 낭자를 만나러 가는 건 어때요?”
여종들이 머리를 맞대고 물었다.
때마침 정씨 가문의 쪽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한 무리가 웃고 떠들면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강주는 채구극(彩毬劇)이 유명해요. 집사 어른, 경성에서도 이만큼 재미있는 채구극을 본 적은 없으실걸요?”
금가아가 으스대면서 말하고는 눈썹을 올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돈은 제가 냅니다.”
조 집사와 다른 이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좋다. 그럼 금가아한테 신세 좀 져야겠구나.”
“금가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정 아씨를 모시는 금가아니?”
조 집사와 금가아 일행은 멈칫하고 자신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걸어오는 여인들을 쳐다보았다. 여인들의 뒤로 마차와 네 명의 기마 호위가 서 있었다.
“진씨 가문의 어멈들이오?”
조 집사가 단번에 마차에 붙어있던 표식을 알아보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마주치니, 진씨 가문의 여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들과 직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여인들은 속으로 무한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제 막 도착하신 겝니까? 아니면 이미 뵙고 나오시는 길입니까?”
조 집사가 정씨 가문의 대문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뵙고 나오는 길이에요.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참이죠.”
“이렇게 하시죠.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찻집에 잠시 앉아 이야기나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조 집사가 여인들의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 말했다. 조 집사의 초대에 여인들은 몸을 낮춰 예를 표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금가아, 여기서 가장 좋은 찻집이 어디더냐?”
조 집사가 몸을 돌려 입꼬리를 올리고 금가아에게 물었다. 금가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절 따라오세요.”
범가원은 강주성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었다. 시끌벅적한 거리 한가운데에 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인 곳이었다. 이 층으로 이루어진 범가원은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별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뒤쪽 정원도 운치 있게 잘 꾸며 놓았다.
일개 사환 따위는 감히 들어올 생각도 못 하는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귀한 집 공자의 사환이라면 윗전을 따라 들어올 수 있겠지만, 금가아는 공자님의 사환을 할 적에도 이런 곳에 발을 들여 본 일이 없었다.
금가아는 자신이 손님을 데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날이 오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이들이 범가원을 향해 다가가자, 말을 돌보는 점원이 뛰어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든 점원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너 정씨 저택 뒷골목에 사는 금가아 아니야?”
점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금가아가 점원의 얼굴을 보고는 그를 알아보았다.
“보가아, 정말 오랜만이네!”
금가아가 손을 뻗어 점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듣기로는 어디 팔려갔다던데?”
점원이 금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범가원의 점원은 금가아가 입은 옷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값비싼 소재라는 것을 매의 눈으로 알아보았다. 금가아가 입은 옷의 옷감은 범가원 뒤편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돈 많은 노야들이 입는 옷의 옷감과 같았다.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얼른 제일 크고 좋은 별실로 안내해 줘.”
금가아가 말했다.
제일 크고 좋은 별실!
“금가아, 너 미쳤어? 그게 다 얼마인 줄 알아?”
놀란 점원은 입을 너무 크게 벌려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다. 점원이 금가아의 팔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금가아가 품에서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점원에게 던져주려는 찰나, 대기 중인 손님을 맞이하는 점원 하나가 허리를 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문가에서 금가아 일행을 맞이하려다가, 말을 돌보는 점원이 한발 앞서 금가아에게 말을 거는 통에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손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다가온 점원이 목청을 높였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금가아를 안내하며 말을 관리하는 점원을 한쪽으로 밀쳤다.
금가아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을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점원은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미친 건가?
아무것도 안 먹는다 해도, 제일 크고 좋은 별실에 들어가는 자릿값은 내 일 년 치 품삯인데. 차나 다과라도 먹으면 그 돈이 다 얼마야? 내가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못 만져 볼 돈이겠지? 그것도 내가 범가원에서 평생 일을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금가아가 반쯤 죽도록 얻어맞고 쫓겨나는 건 아닐까?
바깥에 있던 점원의 걱정을 전혀 모른 채, 금가아는 별실 안에 자리했다. 범가원은 돈이 많은 손님들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손님이 한꺼번에 한자리에 앉는 경우는 드물었다. 범가원의 점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리인이 직접 별실로 찾아와 손님들을 접대하고 냉채와 말린 과일, 차를 먼저 내오라고 부엌에 지시했다. 음식이 담긴 그릇과 접시들이 부엌에서부터 차례로 옮겨졌다. 손님들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던 기녀들도 각자 칠현금을 품에 안고 별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분주히 움직였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했다.
관리인은 자신이 지시한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음을 확인한 후, 점원과 함께 예를 올리고 별실에서 물러났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다과와 차를 즐기고 기녀들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소개했다.
진씨 가문의 오 낭자가 조 집사를 향해 목례를 했다.
“부인의 명을 받고 온 것인데, 정 대부인이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집사 어른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오 낭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희 아씨와 연관된 일입니까?”
조 집사가 묻자 오 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는 굳이 정 낭자를 귀찮게 할 것 없이 직접 정씨 가문의 가장을 찾아가면 될 것이라고 단언하셨는데, 이를 어쩌면 좋지요?”
조 집사가 입꼬리를 올리고 금가아를 쳐다보았다.
“이건 금가아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어찌 됐든, 조 집사와 시종들은 모두 주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 정교랑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사람은 금가아가 유일했다.
모든 시선이 금가아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저희 아씨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금가아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낭자의 혼사와 관련된 일이에요.”
오 낭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갑자기 금가아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사소한 일은 아씨를 찾아뵙지 않아도 돼요.”
사소한 일? 역시 제대로 찾아왔군. 부인께서 말씀하시던 것과 비슷해.
“그럼, 저희가 또 뭘 할 수 있을까요?”
오 낭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공손하게 물었다.
“대부인을 찾아뵈었다고 했죠?”
금가아가 간식을 씹으면서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직 이부인은 안 찾아갔잖아요.”
이부인?
오 낭자는 강주 사람이 아니었기에, 정씨 가문의 안주인에게 거절을 당한 상황에서 또 다른 부인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 낭자가 웃으면서 금가아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금가아, 그러면 우릴 위해 말 좀 전해 줄 수 있을까요?”
금가아를 알아봤던 점원은 범가원의 문 앞에 계속 쭈그려 앉아 있었다. 손님이 와도 못 본 체하는 통에 몇몇 손님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는 손님들의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여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끈질기게 문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금가아는 한참이 지난 뒤 사지 멀쩡하게 범가원을 걸어 나왔다. 금가아가 흠씬 두들겨 맞고 돈도 없이 밥을 먹으러 왔다고 삿대질 당하는 꼴을 기대했던 점원은 의아한 얼굴로 일어섰다. 심지어 관리인은 환하게 웃으며 금가아 일행을 친절하게 문 앞까지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공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찾아주시고요.”
관리인이 웃으면서 금가아의 구겨진 옷깃을 조심스럽게 펴 주었다.
금가아 일행은 즐겁게 웃으면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말을 돌보는 점원은 문가에 그대로 서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건 누구네 공자님이래? 손이 참 크시네.”
“맞아, 맞아. 나한테 주신 돈이 내 한 달 치 품삯이랑 맞먹어.”
식당 안에 있던 두 기녀가 기쁜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기생한테 웃돈을 그만큼이나 얹어 줬다고?
점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게. 뉘 집 공자님이실까? 왜 이전에는 본 적이 없지? 돈 참 시원스럽게 쓰시네.”
관리인도 옆에서 감탄했다.
뉘 집 공자님?
“공자님이 아니에요! 쟤, 쟤는 북정 가문의 사환이라고요.”
듣다 못한 점원이 외쳤다.
사환이라고?
범가원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정씨 가문의 사환이라고? 세상에! 북정 가문에 돈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사환 하나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백 관을 쓰고 갔어!”
바깥의 한기를 몰고 온 정칠랑이 정 이부인의 대청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정칠랑은 곧바로 난로 앞에 앉아 손을 녹였다.
“네 언니는?”
정 이부인이 바깥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손난로를 정칠랑에게 쥐여 주었다. 문가에는 여종과 몸종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걘 진짜 바보예요. 바보랑 바깥 구경하기 싫다고요.”
정칠랑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얘! 전에 어미가 뭐라고 당부했어? 걔는 바보니까 네가 잘 구슬려야 한다고 했잖아. 넌 바보 하나도 제대로 구슬리지 못하니?”
정 이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정칠랑을 혼냈다.
“제 말을 아예 듣지도 않는다니까요? 내가 동쪽으로 가자고 하면, 걘 서쪽으로 가겠다고 하고.”
정칠랑이 대들며 말했다.
“누가 걔더러 네 말을 듣게 하래? 네가 걔 말을 따르면 되잖아!”
정 이부인이 정칠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말했다.
“걔랑 냄새나고 더러운 남쪽 동네에서 걷기 싫단 말이에요! 걘 정말 바보라고요! 이상해 죽겠어요!”
정칠랑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정 이부인은 더 이상 정칠랑을 상대하지 않고, 여종들에게 정교랑이 어디 갔는지 물었다.
“남쪽 거리에서 좀 걷다가 강가로 갔어요.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칠랑 아씨께서 춥다고 하셔서 먼저 돌아왔고, 그쪽에는 다른 사람을 붙여 두었습니다.”
정 이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난로를 내밀었다.
“손난로를 가져다주거라.”
이때, 갑자기 여종 하나가 마당 안으로 황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부인, 부인.”
“또 뭔데?”
정 이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인이 좀 전에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에게서 들은 건데, 누가 교랑 아씨의 혼담을 넣으러 찾아왔다던데요.”
여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혼사는 이미 다 정해지지 않았더냐.”
정 이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대부인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 경성에서 온 사람이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들고 왔대요.”
정 이부인은 응,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가 곧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라고?”
여종이 정 이부인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방금 전 일입니다. 대문 밖에 있던 사람들이 다 봤는데,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이 바로 공주부 진씨 가문의 사람이래요.”
“공주부!”
정 이부인이 목청을 높여서 외치고는 여종의 팔을 꽉 쥐었다.
여종 두 명이 다급하게 문을 넘어서자, 좌불안석하며 대청 안을 서성이고 있던 이부인은 서둘러 그들을 맞았다.
“어떻게 됐어?”
정 이부인이 물었다.
“소문대로입니다. 경성에서 온 여인 둘이 대부인을 뵈었답니다. 그리고 이건 문밖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이 직접 들은 얘기라는데, 그 두 여인이 혼담을 넣으러 온 것이 확실하대요.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다 가지고 왔답니다.”
정 이부인이 멍해진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그 바, 아니, 교랑한테 혼담을 넣으러 온 게야?”
정 이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예, 부인. 틀림없습니다. 그 여종의 말로는, 경성에서 온 여인들이 입을 열자마자 정교랑의 이름 석 자를 댔고, 정교랑의 가장을 찾아왔다고 했답니다.”
여종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왕 부인께서도 자리에 계셨대요.”
다른 여종이 덧붙여 말했다.
이 모든 게 주씨 가문의 계략인 건 아닐까? 그런데 주씨 가문이 공주부 진씨 가문을 움직일 수 있다고?
정 이부인은 꽉 쥔 주먹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가장? 교랑의 집안 가장은 바로 여기 있거늘, 큰어머니 주제에 어딜 가장 행세를 하며 우기려 들어! 우리 교랑의 일생일대의 중요한 혼사를 제멋대로 망치려 들다니!”
분노, 분노해야만 해. 만약 누군가가 칠랑의 혼사를 망쳤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그 사람의 입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겠지! 내가 그 사람과 죽기 살기로 싸우겠지!
“왕십랑, 그 여자를 내 그냥!”
정 이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가려 했다. 다행히 문가에 있던 여종들이 재빨리 정 이부인의 팔을 붙잡고 뜯어말렸다.
“부인, 부인. 정확히 알아본 뒤에 움직이셔도 늦지 않습니다.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아직 강주성에 있어요.”
“맞아요, 맞아요. 그 사람들이 가져온 가문이 어떤 가문들인지 보신 다음에 생각하세요. 공주부의 명성만 앞세운 별 볼 일 없는 집안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괜히 우리만 손해예요.”
여종들이 한마디씩 거들면서 이부인을 잡았다.
그건 맞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무모하게 일을 벌일 수는 없지.
“노야께 어서 집으로 돌아오시라고 전해라!”
정 이부인이 문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일 따위로 노야를 부를 필요는 없지. 하지만 그 바보를 더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야 우리 칠랑의 앞길이 더 나아질 수 있다면, 그건 노야를 당장 불러야 할 만큼 중요해!
“내가 곧 죽을 지경이니, 당장 오늘 밤에 출발하시라고 해라. 내일까지 꼭 집에 당도하셔야 한다고!”
정 이부인이 여종을 밖으로 떠밀면서 재촉했다. 여종이 떠나자 정 이부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진씨 가문에서 온 여인들은 어디에서 묵고 있느냐?”
“성안에 있는 열래거(悅來居)에 있다고 합니다.”
이부인은 잠시 실눈을 뜨며 고민하다가 다른 여종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너희는 그쪽에 우리의 뜻을 넌지시 알릴 방법을 생각해내거라.”
정 이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종은 정 이부인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정 이부인은 넋을 놓은 채 방 안에 잠시 서 있었다.
“교랑은?”
정 이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강가에 계세요. 좀 전에 부인께서 제게 이걸 전해 주러 가라고 하셨잖아요.”
손난로를 손에 쥐고 있던 여종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서 대답했다.
“그럼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게야! 우리 교랑이 추워서 감기라도 걸리면 네가 책임질 테냐?”
여종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잎이 다 진 버드나무 가지가 강바람에 흔들거렸다. 한겨울임에도 강가에 있는 버드나무의 자태는 요염했다.
“아씨, 추우세요?”
반근이 물었다. 말없이 강 위를 바라보던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왔을 땐 저 다리 위를 지나갔는데, 그때는 저녁이라 깜깜해서 여길 자세히 보지도 못했네요.”
반근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강 위를 내다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혼탁해 보이는 강물이 잔잔하게 흘렀다. 반대편 강가에서 빨래하며 웃고 떠드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강물이 있어선 안 될 자리인데.”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정교랑의 말을 제대로 못 듣고 되물었다.
“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자리가 좋긴 한데, 강물이 흘러선 안 될 자리야.”
마침 골목 하나를 지나고 있던 정교랑과 반근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골목길에 동그랗게 모인 아이들 무리가 바닥에 앉아 있거나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청량한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아이들 사이로 곧게 세워진 대나무 막대기에 달린 화려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집 사이에 강을 둘 필요는 없어. 당초 이 강을 만들 때는 고명하신 분이 이렇게 하라고 시켰겠지만, 이런 위치에 강물이 있는 건 곤란해. 처음에는 자손이 번성해서 좋겠지만 나중에는 집안의 복(福)도 강물을 따라 새어 나가게 되거든.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크게 성공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강을 메우는 거다. 끝. 자, 내가 점괘를 봐 줬으니 돈 일 문 다오.”
“나 돈 없거든요!”
아이가 깔깔 웃으며 외쳤다.
“그런 게 어딨어? 점쟁이는 빈손으로 가지 않아.”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반근이 쿡 하고 웃었다.
“아씨, 점쟁이가 아니라 ‘도둑은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에요?”
정교랑이 말없이 미소짓고는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돈 없어? 돈이 없으면 너희 집에 있는 찐빵을 하나 줘도 되고.”
젊은 사내의 멋쩍은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게을러 빠진 놈이길래 어린애들 코 묻은 돈이나 공갈칠까?
반근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서둘러 정교랑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반대편에서 사내 여섯 명이 두리번거리면서 뛰어오더니 정교랑과 반근을 지나쳐갔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
사내의 외침 소리가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반근이 고개를 돌려보자, 좀 전의 사내들이 골목길 앞에 멈춰 서서 골목 안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저 사기꾼 놈이 여기 있었구나!”
사기꾼? 찐빵 좀 가져다 달라고 조르던 한심한 사내 말인가?
“정평(程平)! 어딜 도망가려고!”
골목은 금세 난리 통이 되었다. 반근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한 발 내딛다가 바로 앞에 있던 정교랑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씨?”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정평.”
정교랑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두 글자를 뱉고는 몸을 홱 돌렸다. 반근은 정교랑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씨, 왜 그러세요?”
정교랑은 반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갔던 골목 쪽으로 뛰어갔다.
정평!
“아씨!”
정교랑이 뛰는 것을 처음 본 반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동이 불편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정교랑이었지만, 차차 몸이 나아지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몸이 다 나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늘 단정하고 걸음을 천천히 옮기던 정교랑이었다.
평소에는 종종걸음조차도 보이지 않던 정교랑이 갑자기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뛴다는 것은 반근으로서는 상상도 해볼 수 없던 일이었다.
무슨 큰일이 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