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60)

-쉬워-

날이 밝아질 무렵, 금가아는 대문 앞을 빗자루로 깨끗이 청소한 뒤, 물을 뿌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이,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근처의 다른 문지기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금가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노인을 향해 가볍게 예를 올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은 아직 조용했고, 부엌에서 밥 짓는 냄새가 향긋하게 퍼졌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금가아의 눈에는 오늘따라 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였고, 나무는 더욱 싱그러웠으며, 저택의 곳곳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금가아.”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금가아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던 금가아는 깜짝 놀랐다.

커다랗고 둥그런 얼굴을 한 사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내가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리자, 눈이 살에 파묻혀 없어져 버렸다.

“누구세요?”

금가아가 외쳤다.

“나는 주, 주 노야다.”

주 노야? 금가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 앞의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뚱뚱해질 수가 있죠?”

금가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 자식이, 이게 어딜 봐서 살이 찐 거야? 부은 거지!

주 노야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가아는 그게 무슨 표정인지 도통 알아볼 수 없었다.

“교교는 일어났느냐?”

“저희 아씨를 찾아서 뭐하시게요? 저희 아씨 것을 빼앗으려고…….”

주 노야는 달려들어 금가아가 말을 잇지 못하도록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헛소리하지 말아!”

주 노야는 놀란 얼굴로 연신 소리를 질렀다. 주 노야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난 금가아는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저게 누구야? 왜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에 와서 사람을 죽이려 들지?”

시녀가 회랑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는 쉼 없이 기침을 해대는 금가아를 보고, 이어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사실 시녀도 주 노야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하늘이 보고 있는데! 여기서 살인을? 내 목숨이 열 개라도 그런 짓은 감히 못 하지!

주 노야가 속으로 외치면서 대청을 훔쳐보았다.

시녀의 어깨 저 너머로, 수수한 꽃무늬에 금테 두른 비단 가을옷을 입은 여인이 대문 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딱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도 주 노야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교, 이건 다 오해다.”

주 노야는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반근은 정갈하게 놓인 밥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하얀 죽 위에 참깨를 조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밥상을 안으로 옮겼다.

주 노야는 여전히 마당에 앉아 눈물 콧물을 쏟으며 하소연 중이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네가 쓰러지니까 걱정이 돼서, 네 점포를 잘 지키려던 거라고.”

“난 정말 오직 너를 위해서 그런 거다. 이 사람들이 못 미더워서 그랬지.”

“네 외숙모도 너를 집으로 데려와서 보살펴 주려고 했던 거야. 다른 사람들 말만 믿고 우리를 미워하면 안 된다.”

반근은 가만히 꿇어앉으며 정교랑 앞으로 식사를 가져다 놓았다. 시녀가 정교랑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마당에서 울부짖던 주 노야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럼 좋은 거죠. 날 위해 그런 거라는데, 어떻게 외숙부님을 미워하겠어요.”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말했다.

좋다고? 이건 반어법이야. 반대로 말하는 게 틀림없어!

“교교, 우린 정말 널 위해서 그랬어.”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잘 된 거잖아요.”

“교교, 부디 우리를 용서해다오. 이 외숙과 외숙모의 목숨만은 살려 줘.”

주 노야가 정교랑의 안색을 살피면서 애원했다.

“왜 제가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교교, 제발 우리를 용서해다오. 우리 병 좀 낫게 해줘. 네 외숙모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주 노야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날 주 부인은 층계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의식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간 주 부인은 그때부터 고열이 가시지 않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헛소리를 했다.

신선거에서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던 주 노야는 집으로 돌아간 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나마 거동을 할 수 있지만, 머지않은 시일 내에 자신의 처지도 부인과 똑같아질 것이라고 주 노야는 예상했다.

주 노야의 말을 들은 반근과 시녀는 잠시 놀라나 싶더니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노야, 그건 다 놀라서 그러신 거잖아요. 주 부인은 아씨께서 막 깨어나셨을 때 오셨어요. 그러더니 아씨를 보자마자 뛰쳐나가셨죠. 더군다나 주 노야께서는 아씨를 뵙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 아씨 탓을 하세요.”

“탓하려는 게 아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교교, 우리는 너를 탓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다오.”

시녀의 말에 주 노야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휴, 어서 의원을 찾아가 병을 봐 달라고 하세요.”

시녀가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병이야? 몸종 따위가 뭘 안다고!

주 노야는 고개를 들어 대청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오장육부가 파랗게 질려오는 고통 속에서 주 노야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내가 왜 잊었을까? 저 여인한테 맞서면 어떤 꼴이 나는지 내가 왜 잊었을까?

여러 사람의 모습이 주 노야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 강요에 못 이겨 죽은 사람, 분통 터져 죽은 사람, 벼락에 맞아 불에 타죽은 사람, 앞길을 망친 사람 등등.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정작 이 많은 사람을 망가뜨린 장본인은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 여인의 성질을 긁거나, 앞길을 막은 자 중 좋은 결말을 맞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주 노야는 자신의 얼굴이 다시 붓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교교, 이건 온 세상 사람이 다 증명해 줄 수 있어. 난 정말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이 지경이 됐는데, 누가 점포를 관리하겠느냐? 그걸 어떻게 아랫것 몇 명한테 다 맡기느냔 말이다. 교교, 우리 주씨 가문에 돈이 모자라서 그랬겠어? 당초 정씨 집안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모친의 혼수 덕분이었잖으냐. 난 정말 진심으로 너를 위한 거였다. 난 네 외숙이니, 네가 없으면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지. 나 말고 누가 널 도와주겠어?”

주 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네 이년,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거라.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이 어디 가당키나 하더냐!”

시녀가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씨, 이제 막 깨어나셔서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아씨께서 쓰러지신 동안 외숙부님과 넷째 도련님께서 가게를 봐 주셨어요. 정말이지…….”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주 노야를 흘겨보았다.

“정말이지, 고생을 많이 하셨죠.”

뭐야? 아직 말도 안 했었어?

주 노야는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나와 부인은 어쩌다 이리 죽을 지경이 된 게야? 분명히 저 여인이 약을 썼을 텐데! 부인이 깨어난 정교랑을 봤던 그날, 내가 신선거에서 차를 마시던 그 순간! 암, 틀림없어. 분명 저 여인은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교교, 우리는 정말 널 위하는 마음이었어!”

주 노야가 가슴팍을 손으로 치면서 울부짖자, 정교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외숙부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죠?”

“교교, 부디 우리의 목숨을 살려다오.”

주 노야가 눈물을 훔치면서 애원했다. 정교랑은 주 노야를 잠시 쳐다보았다.

“아무리 외숙부님이라 해도, 병을 고치는 원칙은 어길 수 없어요.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니,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 노야는 속으로 더욱 확신했다.

이거 봐, 이거 봐! 유 교리 때와 똑같잖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그놈의 원칙을 들먹이면서 발뺌하는 거야. 원칙을 고수하는 한, 병을 고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 여인을 탓할 사람은 없을 테지!

“교교, 교교! 난 정말 너를 위해 그랬다니까. 제발 우리 목숨만은 살려다오.”

주 노야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오자 정교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 아씨. 이제 인상도 쓸 줄 아시네요?”

옆에 있던 시녀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인상을 써?

정교랑이 다시 두어 번 미간을 좁혀보았다.

“진짜네, 진짜야!”

반근도 가까이 와서는 정교랑을 자세히 보면서 웃었다.

사람들은 원치 않은 일을 마주했을 때 미간을 찌푸리곤 한다. 미간을 찌푸린다는 것이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시녀와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는 아씨의 모습에 환호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주 노야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시녀와 반근의 모습에 머리가 점점 더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지? 날 우습게 만들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잖아!

“교교, 네가 그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차라리 우리가 먼저 알아서 사라져 주마. 하지만 제발, 우리 주씨 가문만은 살려다오.”

주 노야가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두 분한테 병이 난 게, 저 때문이라는 거예요?”

정교랑의 질문에 주 노야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너 때문이 아니다. 우리 때문이지.”

정교랑은 실소를 터트리고 말없이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외숙부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으니 이 일은 여기서 덮을게요.”

시녀와 반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았고, 주 노야는 몹시 기뻐했다.

“교교, 역시 네가 우리를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어.”

주 노야는 눈물을 닦으면서 기대 섞인 눈빛으로 앞으로 몇 걸음 더 내디뎠다. 정교랑이 주 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는 무슨 약을 먹어야 할까?”

주 노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약은 필요 없어요. 본인 때문에 얻은 병이니, 병을 고칠 수 있는 것도 본인뿐이죠.”

주 노야는 정교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해했다.

“외숙부님께서 하신 일들이 다 저를 위해서라고 하셨죠?”

정교랑의 물음에 주 노야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교교, 제발 우리를 믿어다오.”

“말 한마디면 나을 수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말 한마디면 다 낫는다고? 역시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 건가?

저 여인이 이 진인을 만난 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기인을 만난 건 확실해. 듣기로 그런 사람들은 저주나 주술을 써서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더군. 거리를 떠도는 무당들처럼.

“무슨 말이면 되겠니?”

주 노야가 다급하게 물었다.

“외숙부님께서 하신 말씀이요. 다 저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한 거라고 하셨잖아요. 두 분이 그 말을 진심으로 믿으신다면, 저도 믿겠습니다. 모두 다 같이 그 말을 믿게 된다면, 약을 먹지 않아도 며칠 뒤면 두 분 모두 깨끗이 나을 거예요.”

그게 다야? 그리 쉽다고?

주 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 노야의 방문으로 저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금가아는 대문 앞에 한가로이 서서 거리에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행인 중 두 사람이 저택을 향해 걸어왔다. 금가아가 두 사람 중 한 명을 알아보고는 엇 소리를 냈다.

“왜 또 왔어요?”

대문 앞에 선 금가아에게 지난번 이 사람을 마주할 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었다. 도리어 여유롭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꼬맹아, 우리 공자께서 낭자의 상태가 어떤지 걱정되신다고 의원을 보내셨다.”

젊은 시종이 자신과 함께 온, 약 가방을 들고 있는 의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금가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의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젊은 시종을 붙잡았다.

“지금 나한테 여기 사는 이의 병을 보라고 하는 거요?”

젊은 시종이 고개를 돌리자, 귀신이라도 본 듯 벌벌 떨고 있는 의원이 보였다.

“왜 그러시오? 의원이라는 자가, 병자를 가리면 쓰나.”

젊은 시종이 언짢은 말투로 말하자 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그렇소만, 여기가 누구 집인 줄…….”

젊은 시종이 성가시다는 듯 의원의 말을 끊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하시오.”

젊은 시종이 금가아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뭡니까?”

금가아가 시종의 손을 휙 뿌리치면서 말했다.

“이 집 낭자의 외숙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어.”

젊은 시종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엥? 그 사람이 뭐가 대단해요?”

금가아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리 대단한 숙부가 있다는 건 자랑할 거리지, 숨길 필요 없어. 외숙의 집안에 신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여기 낭자는 무탈한 거지?”

금가아는 젊은 시종을 흘겨본 후, 아예 입을 다물었다.

“아, 참. 그리고, 신선거랑 태평거가 다 주씨 가문 거라며?”

젊은 시종이 계속해서 캐물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기가 찬다는 듯이 하, 하고 소리쳤다.

젊은 시종이 말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까무잡잡한 피부에 거대한 얼굴의 중년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의 퉁퉁 부은 얼굴 때문에 젊은 시종은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온 주 노야는 젊은 시종의 말을 듣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신선거와 태평거가 내 것이라니! 어디서 나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지금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간다고!

“넌 누구냐?”

“왕씨 가문의 시종입니다. 주 노야의 사돈이지요. 우리 사돈 이야기인데, 제가 어찌 헛소리를…….”

젊은 시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노야는 그의 얼굴에 따귀를 두 대 올려붙였다.

주 노야는 무장 출신인지라, 그가 때린 따귀는 여태 시종이 여종들에게 맞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도가 셌다. 젊은 시종은 따귀를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몸을 휘청였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고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 썩을 놈아! 다시 그런 헛소리를 했다가는, 정말 맞아 죽을 줄 알아라!”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던 주 노야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긴 채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나는 왜 또 맞은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저 인간은 대체 누구야!

젊은 시종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무렵, 얼굴이 퉁퉁 부어있던 사내와 대문을 지키고 있던 사환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저택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데려왔던 의원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이 저택이랑 풍수지리적으로 안 맞나?

“에라이, 내가 여길 다시 오나 봐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젊은 시종은 소매를 뿌리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주 노야를 보낸 뒤, 정교랑이 먹은 밥상을 정리하고 이제 막 끼니를 챙기려던 시녀는 부엌 앞에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반근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시녀가 반근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반근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물었다.

“아씨가 정말로 주 노야 내외한테 병을, 아니 정말로 아씨 때문에 병에 걸린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시녀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 며칠 동안 겪은 두려움과 설움을 생각하니, 반근은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럼 그렇게 쉽게 낫게 해도 되는 건가?”

반근의 물음에 시녀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쉽다고? 하나도 안 쉬울걸?”

쉽지 않다고?

반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한마디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왜 그게 어려운 거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교교를 위해서야.”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교교를 위해서야.”

주씨 가문의 대청에는 남녀 한 쌍이 같은 말을 되뇌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주 부인은 머리에 고약을 바른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힘없고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움찔거렸다.

“노야, 정말 이 말만 계속 읊으면 된대요?”

“그렇소. 예전에 당신이 불경을 읊던 것과 마찬가지지. 진심을 다해 빌면 뜻대로 이뤄진다고 하지 않소.”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조금 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얼굴의 부기가 차차 빠지는 게 느껴지는군.”

주 노야는 나지막이 감탄하고는 불경을 읊듯이 계속해서 말을 반복했다. 주 부인도 다시 손을 가슴에 얹고 주 노야를 따라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인은 몇 마디 하지도 않고 또 말을 멈췄다.

“노야, 아까 진심을 다해 빌면 뜻대로 이뤄진다고 했죠?”

자꾸 흐름을 끊자 주 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니까. 교교가 그렇게 말했다지 않소. 우리가 믿으면, 교교도 믿고, 그럼 우리의 병도 나을 거라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교교를 위해서야.”

“노야! 정말 그 말을 믿어요?”

주 부인이 손을 뻗어 주 노야를 잡으며 외쳤다. 주 노야가 멈칫했다.

“당연히 믿지.”

하루 반나절 동안 이 말을 되뇌니, 정말로 좋아진 것 같아.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정말로 교교를 위한 거고, 교교 좋으라고 하는 일이에요?”

주 부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교교를 돕기 위함이고, 교교를 위한 거야.

맞지, 맞지 않나?

주 노야도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믿는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난 안 믿어요. 아이고, 나 죽네.”

주 부인이 가슴팍을 치면서 그대로 침상 위로 쓰러졌다.

주 부인의 말을 듣자, 주 노야는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다시 붓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붓기가 느껴진 것만이 아니라, 육안으로도 자신의 얼굴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 노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얼굴을 감싸며 뒤로 자빠졌다.

쉽다고? 자기 자신도 못 믿는 일을 믿게 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

교교, 살려다오, 우리는 정말 너를 위한 거야.

“또 얻어맞았다고?”

객잔 안. 왕씨 가문의 노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젊은 시종을 보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운 한편 그 꼴이 우습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자네는 어쩜 그리 운이 없나.”

“이번에는 또 누가 때린 건데?”

젊은 시종은 짜증이 확 솟구쳤다.

“내가 어떻게 알아! 때리고는 바로 도망쳤는데! 심지어 의원까지 도망갔다니까!”

노복은 웃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미간을 좁히며 젊은 시종의 두 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무공을 좀 했던 자로군.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리 성을 낸 것이냐?”

“별말 안 했습니다. 저는 상대가 누군지 자세히 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뛰쳐나와서는 이렇게 때렸다니까요!”

시종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노복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해 봐라.”

젊은 시종은 알겠다며 금가아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해 보았다.

“별거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젊은 시종의 말을 듣고는 의아해했다.

“그렇다니까? 이번에는 내가 억지웃음까지 지어가면서 좋게좋게 말한 건데.”

지난번에는 젊은 시종의 태도가 기고만장했기 때문에, 노복은 그 말투가 상대의 성질을 긁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히나 주씨 가문이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간 터라 젊은 시종의 태도가 더없이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또 얻어맞다니! 이 무슨 터무니없는 일인가!

“내 생각에는 신선거가 주씨 가문의 것이라고 해서 화가 난 것 같다. 그 사람은 신선거와 주씨 가문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게 듣기 싫었거나,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닐까?”

노복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귀신이나 알겠죠! 정신병이 있거나.”

분노하며 씩씩거리던 젊은 시종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맞습니다. 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요. 머리가 돼지 대가리처럼 부어올라 있었다고요!”

노복이 이제 그만하라는 듯 손짓했다.

“우선은 정 낭자의 병세부터 알아봐라. 어찌 됐든, 주씨 가문을 얕잡아보아서는 안 돼. 정 낭자의 병이 낫는다면 혼사는 당연히 치러야겠지만, 설령 정 낭자의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는 충분한 예를 표해야 해. 내가 노야께 주씨 가문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은 서신을 보내마.”

“그럼 어르신 말씀은, 주씨 가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겁니까?”

시종 중 하나가 물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주씨 가문만, 중시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씨 가문에서 왕십칠과 정씨 가문의 혼례를 동의했던 이유는, 왕십칠을 달래면서 동시에 정 대부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정씨 집안과 연을 맺게 된다면, 앞으로는 주씨 가문을 무시해도 되니까.

하지만 지금 노복이 한 말은, 앞으로 정씨와 주씨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왕씨 가문은 정씨 가문이 아니라 주씨 가문 편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주씨 가문이 그 정도로 대단한가?

대낮의 덕승루는 한산하고 운치가 있었다. 점원들 역시 그리 바쁜 시간은 아니었다.

“춘령, 춘령.”

점원 하나가 손짓하자 위층을 지나가던 몸종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몸종은 치맛자락을 살짝 올리고는 잰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어제 아씨랑 같이 가게 된 곳이 마침 오라버니가 말해줬던 강(康)씨 가문이었어요. 오라버니가 미리 알려준 대로 칠현금을 하나 더 들고 갔다가, 정말 제대로 써먹었죠.”

춘령이 말을 끝내고 점원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아씨께서도 저를 칭찬해주시고, 강씨 가문에서도 상으로 돈을 주셨어요. 이건 오라버니들 차 마실 때 써요.”

춘령이 점원에게 돈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춘령, 이러지 않아도 돼.”

“주 낭자가 너를 아끼는 이유를 알겠네.”

점원들이 입을 모아 춘령을 칭찬했다.

“자자, 그럼 오늘은 또 다른 두 가문 이야기를 해 줄게.”

점원 하나가 들떠서 춘령에게 또 다른 권문세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와, 그 가문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을 거예요. 참, 그 귀덕낭장 주씨 가문은 어떤 가문이에요?”

춘령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주씨? 주씨 가문이 궁금해?”

점원이 놀란 듯 되물었다.

“어제 간 곳에서 잠깐 얘기가 나왔어요. 강씨 가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집안이라면, 분명 대단한 곳이겠죠?”

춘령이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아, 강씨 가문에서 들었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주씨 가문이 그렇게 대단한 집안은 아니야.”

춘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빛을 반짝였다.

“왜요?”

대충 강씨 가문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얼버무리면서도 춘령은 내심 불안했다. 뜻밖에도 점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씨 가문이 그렇게 유명해졌다고? 근데 왜 별로 대단치 않다고 하는 거지?

“춘령, 넌 경성에 좀 늦게 올라와서 모를 거야. 작년 이맘때 경성에 아주 희귀한 일들이 있었어.”

“모두 그 사람이 죽을병이라고 했는데…….”

“오자마자 병을 고치고…….”

“경성에서 금석 단약을 먹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근데 술이랑 고기를 사 오라고 하더니, 동 내한의 병을 고쳐냈지 뭐야.”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신의 낭자. 그래서 주씨 가문이 경성에서 그리 유명했구나.

춘령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씨 집안에 신의 낭자가 있었다니!

“그래서 주씨 가문 자체는 별로 대단한 가문이 아니어도, 앞길이 창창하다고 하는 거야.”

“듣기로는 신선거, 태평거 그리고 이춘당이 전부 주씨 가문과 연관이 있대.”

“주씨 가문은 명예와 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지. 돈도 있겠다, 사람도 있겠다, 분명 잘나가는 가문이 될 거야.”

그 바보에게 이런 외조모 댁이 있었다니.

점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춘령은 잠시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 바보는 왜 그렇게 운이 좋은 거야? 바보, 그렇게 좋은 운을 낭비하고 있다니. 우리 자매가 그렇게 좋은 운을 타고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느님,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아 맞다. 주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춘령 너랑도 인연이 있어.”

점원의 말에 춘령이 화들짝 놀라서 점원을 쳐다보았다.

“제가요?”

“응. 그 신의 낭자는 주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 외손녀래. 그리고 그 외손녀가 강주에서 온 사람이라던데? 듣기로는 바보로 태어나 병을 앓았는데 이 진인의 비방을 얻고는 신의가 된 거래.”

“뭐 이상한 일도 아니지. 저기 동쪽 거리에 있던 눈먼 아낙네도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이 됐잖아. 역시 신선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은 꼭 어디 모자란 사람들만 찾더라.”

점원들은 신이 나서 자기들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뭐, 뭐라고?

춘령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귓가가 웅웅 울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 낭자.”

옥대교 저택 대문 앞에 도착한 왕씨 가문의 노복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대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노복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금가아가 상대를 알아봤다.

“또 왔네요? 무슨 일이세요?”

태도가 나쁘지는 않은데?

노복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아씨께서 요즘 많이 나아지셨는지 궁금해서 왔단다. 우리 공자님께서 걱정이 된다고 하셔서 말이야.”

노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나으셨어요.”

다 나았다고?

노복은 다시 한번 흠칫 놀랐다.

거짓말이겠지?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이리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나았어?

노복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대문 너머로 누구냐고 묻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씨 가문 사람이야.”

금가아가 고개를 돌려 안을 대고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더 안쪽에서 여인이 무언가를 묻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금가아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씨께서 안쪽으로 들이라고 하셔.”

들이라고? 이렇게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노복은 아리송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젊은 놈이 농땡이를 피우려고 일부러 과장해서 말한 건가?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데?

노복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리고, 검은 비단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여인이 단정한 자세로 노복을 쳐다보았다.

나를 보고 있어.

앞선 두 차례의 만남에서 노복은 이 소녀를 자세히 살펴본 적 있었다. 그때는 소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점 외에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새까맣고 깊은 두 눈동자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듯,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쉽사리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제 갈 준비를 하는 건가?”

소녀가 물었다. 노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눈빛이 곧 죽을병에 걸린 사람의 눈빛일 리는 없으니까.

역시 과장된 거였어! 아니면 주씨 가문의 기세가 워낙 대단하니까, 아부하고 환심을 사려고 지어낸 말이었거나.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하고 가야지.

“아씨의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내 몸은 다 나았네. 언제 떠나기로 했지?”

정교랑이 묻자 노복이 되물었다.

“아씨는 언제 가고 싶으세요?”

“열흘 후에.”

노복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했고, 어떻게 옥대교 저택을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저택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다니!

소녀와의 짧은 만남과 대화를 떠올려 본 노복은 소녀가 좀 전의 대화를 완전히 주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노복 자신조차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한 채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가 끝났다는 게 핵심이었다.

고작 바보를 상대하는 것뿐인데, 난 왜 왕씨 가문의 친족 앞인 듯 공경한 태도로 대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노복은 발걸음을 멈춘 채 거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주씨 가문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가? 우리가 주씨 가문에게 잘 보여야 해서, 그 여인을 그런 식으로 대했던 건가?

맞아, 분명 그런 거겠지.

주씨! 주씨 가문이 제일 중요해!

전에는 정 낭자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는 일을 굳이 주씨 가문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주씨 가문에 잘 얘기해서 허락을 받은 뒤에 떠나야 했다. 노복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주씨 가문에 예를 갖추려면 이제 왕십칠이 직접 가야 했다.

“아, 왜 이렇게 서둘러. 좀 더 요양하라고 해.”

왕십칠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뭐하러 주씨 가문까지 가? 고모부의 서신이 있으니, 바로 데려가면 되잖아. 주씨 가문의 동의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왕십칠이 노복의 윗전이라고는 하나 윗전이 갖춰야 할 위엄 따위는 없었기에 왕십칠은 결국 노복에게 질질 끌려 주씨 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여인 혼자 살고 있던 옥대교 저택에서도 노복을 문전박대하지는 않았는데 도리어 주씨 가문에서 왕십칠과 노복을 막아섰던 것이다.

“노야께서는 지금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문지기가 노복 일행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우리는 왕씨 가문의 사람들이오.”

노복이 공손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문지기는 그 말을 단칼에 잘랐다.

“가라면 좀 가시오. 뉘 집 가문이든 상관없이 안 만나시니까.”

이게 뭐 하자는 태도람!

“정 낭자의 집에서도 똑같았어요.”

젊은 시종이 재빨리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때 마차 한 대가 달려와 대문 앞에 다급하게 멈춰 섰다. 사환 하나가 노인을 부축하면서 마차에서 내렸다.

“의원님, 의원님. 빨리요. 서두르세요.”

“급할 게 뭐 있나. 본디 병이란 것은 산사태가 오듯이 갑작스럽게 오고, 나을 때는 가는 실을 뽑는 것처럼 서서히 낫는 것인데. 조금 서두른다고 달라질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분명 죽을병은 아닐 터, 정말 죽을병이었으면 내가 올 필요까지 없었겠지.”

노인은 사환의 재촉을 무시한 채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의원?

“이보시오, 여기 누가 병이 났소?”

갑작스러운 노복의 질문에 문지기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아닙니다. 누가 병에 걸렸다고 그래요! 여긴 병에 걸린 사람 없어요!”

문지기는 이 말만 남긴 채 쾅 하고 대문을 닫아버렸다. 대문 밖에 서 있던 왕씨 가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또 무슨 태도야?”

왕십칠은 눈을 부릅뜨면서 성을 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대문을 넘어섰으니, 나름대로 예의는 차렸던 셈이다. 비록 결박을 당하긴 했지만. 그런데 이번엔 최소한의 예의조차 내던지겠다, 이거야?

“보세요. 제가 지난번에 정 낭자 저택에 갔을 때도 이랬다니까요.”

젊은 시종은 이 틈을 놓칠세라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젊은 시종에게 돌아온 것 노복의 따귀였다.

“닥쳐라, 이놈아! 내가 정 낭자를 뵈러 갔을 때는 이런 대우가 아니었어!”

노복이 호통을 쳤다.

아직 붓기가 가시지 않은 뺨에 또 따귀를 맞으니 젊은 시종은 울화가 치밀었다. 젊은 시종은 양손으로 뺨을 부여잡고 노복을 노려보았다.

“내가 또 무슨 말을 했다고 날 또 때려요!”

“정문유.”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장강주 선생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사낭을 불렀다. 정사낭은 두려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거라.”

장강주 선생의 손짓에 정사낭의 얼굴이 일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요 며칠 수업도 많이 빠지고 사전에 강주 선생께 말씀드리지 않아 결국 이렇게 쫓아내시려는 건가?

“스승님, 저, 저는…….”

말을 더듬으며 상황을 설명하려던 정사낭은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우리 집안의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져야지. 이것 때문에 스승님의 오해를 산다고 한들 어쩔 수 없어. 이 일 때문에 구구절절 애원할 필요는 없잖아.

정사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서책을 정리했다.

“얼른 얘기 끝내고 일찍 와라. 놓친 수업이 벌써 몇 개더냐.”

장강주 선생의 말에 정사낭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자가 정말 그 여인과 남매라고?

장강주 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가족이 널 찾는다. 얼른 갔다가 냉큼 돌아오거라!”

장강주 선생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자, 정사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기뻐했다.

날 내쫓으시려는 게 아니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사낭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예를 올렸다. 하지만 장강주 선생을 통해 자신을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정교랑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정사낭의 표정은 다시금 어두워졌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서원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리저리 부딪히며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장강주 선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좌하거라.”

장강주 선생이 시선을 거두고 정색하며 책상을 치자, 수군대던 서생들은 서둘러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부유함과 고귀함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지만, 군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누리지 않는다(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빈곤함과 천박함은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것이지만, 군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벗어나지 아니한다(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낭랑한 서생들의 목소리가 서원 안에 울려 퍼졌다.

“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한달음에 대문 밖으로 뛰쳐나간 정사낭은 마중 나온 시녀를 보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차의 휘장이 걷히고 안에 앉아 있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사낭은 목소리를 줄이며 말끝을 흐렸다.

“오라버니께 감사드려요.”

정교랑이 정사낭에게 예를 올렸다.

“고맙기는 뭘. 딱히 도움이 된 것도 없는데.”

멋쩍어하며 대답하던 정사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근데 누이는 왜 나왔어? 이제야 몸이 좀 나아졌는데, 괜히 찬바람 맞지 말고.”

“난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정사낭은 아, 하고 짧게 대꾸했다. 정사낭은 원체 말주변이 없는 편에 속했지만, 유독 정교랑 앞에서는 더욱 심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9월의 경성은 벌써 꽤 쌀쌀했다. 옷을 얇게 입은 탓에 정사낭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건 가을과 겨울에 입는 옷들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시녀가 보따리 하나를 정사낭에게 건넸다.

“뭘 이런 것까지 챙겼어.”

정사낭은 쑥스러워하며 고맙다고 했다.

“오라버니가 날 챙겨 줬으니, 나도 당연히 오라버니를 챙겨야죠.”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정사낭은 보따리를 품에 꼭 안고는 멋쩍게 웃었다.

“오늘은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왔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사낭과 정교랑은 서원 밖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바른 자세로 앉은 정사낭은 바람을 막는 피풍의를 걸치고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정사낭이 친필로 작성한 종이 한 장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집중하면서 종이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사낭은 정교랑이 잠시 눈을 내리까는 틈을 타, 용기 내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사낭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은 연못에서 가슴 떨리던 눈빛을 보내던 여인이 아니었고, 자신이 직접 그려냈던 여인의 모습도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생생하게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수수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우아함을 뿜어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깜짝 놀란 정사낭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왜 그래? 뭘 더 적어야 할 게 있어?”

“이게 우리 정씨 가문의 족보라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되묻자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숙여 아직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종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선조 정순(程詢)? 아닌데.”

아니라고?

정사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손 된 자의 도리로서, 선조의 존함을 잊을 리가 없었다.

“‘정순’이 맞아.”

정사낭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주 본토 사람이고요?”

정교랑이 재차 물었지만 정사낭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아니야.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저으면서도 동시에 아닐 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아님을 이미 깨달았으니, 지금의 정씨 가문 족보와 맞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누이, 뭐가 아니라는 거야?”

정사낭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맞아요.”

눈앞의 여인은 웃고 있었지만, 정사낭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보였다. 일순간 그도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리고 오늘은 오라버니와 작별하러 온 거예요. 전 조만간 강주로 돌아가요.”

돌아간다고?

“그래, 그래. 돌아가는 게 낫지. 누이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거야.”

정교랑이 정사낭을 보며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맞아요. 혼자 밖에서 지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죠. 이제부터는 오라버니 혼자 경성에 있을 텐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이 아이를 찾아가세요.”

정교랑이 옆에 있던 시녀를 가리켰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시녀가 가까이 다가가 정사낭에게 인사를 올렸다.

“저는 경성에서 아씨의 가업을 관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니다, 당치 않아.”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시녀를 향해 답례했다. 답례를 마치자 시녀에게 이토록 공손한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개 시녀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다니.

요 며칠 이 시녀가 옆에 붙어서 나를 도와줬기 때문이겠지? 말로는 내가 저들을 돕는 거라지만, 사실 저 시녀가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을 거야.

음, 따지고 보면 난 아무 도움도 안 됐어. 음, 잘 생각해 보면 누이의 뜻은 이 시녀더러 날 잘 보살펴 주라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자,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차창 너머에는 태평거가 있었다.

“아씨, 한번 보시겠어요?”

마차 안에서 계속 눈을 감고 수양을 하고 있던 정교랑은 시녀의 물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네가 봐.”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태평거를 쳐다보았다.

아씨, 조 집사의 말로는 저 앞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 있대요. 아씨, 이 식당이 꽤 유명한가 봐요.

아씨,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시녀는 부글부글 끓던 솥과 사방에 퍼지던 열기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음, 정말 맛있다.

감탄하면서 쉼 없이 젓가락질을 하던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며, 시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만 해도 시녀는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렀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객잔과 대충 배나 채울 요량이었던 작은 솥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두칠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이 지나가던 신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진 않을까?

“아씨, 신선거예요.”

시녀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웃었다.

“뭐가 보여?”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가 휘장 너머로 화려한 색을 띤 신선거를 내다보았다. 문 앞에 나와 호객하는 점원들이 없는데도, 신선거는 전혀 적막해 보이지 않았다.

“세상살이가 힘든 것이 보여요.”

시녀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정교랑이 물었다.

“세상의 도리는 무정하다는 게 보여요.”

“그리고?”

“만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거요.”

“또?”

시녀가 입꼬리를 올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사람은 너그럽고 관대해야 한다는 거요.”

시녀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 정교랑은 눈을 뜨고 시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녀는 정교랑을 향해 한참 동안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저택에 있던 반근은 이미 정교랑의 짐을 다 정리해 두었다.

“사실 별로 정리할 것도 없었어.”

반근이 웃으면서 대문 쪽을 쳐다보았다. 대문 옆에 걸터앉은 시녀는 넋이 나가 보였다. 반근이 시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반근 언니, 사실 이 저택은 내가 지켜야 하는데 이렇게 됐네. 근데 뭘 그렇게 골똘히 쳐다봐?”

시녀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았다.

“내가 지켜야지. 이제 아씨께서 안 계시니, 이 저택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반근이 헤헤 웃었다.

“난 언니가 하는 말은 항상 못 알아듣겠어.”

반근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시녀는 손가락으로 반근의 이마를 쿡 찔렀다.

“나는 작별이 이렇게 슬픈데, 내 앞에서 이렇게나 환하게 웃다니 아주 미워 죽겠어.”

반근이 웃으면서 시녀의 팔을 안았다.

“언니, 나도 너무 아쉬워.”

시녀는 팔을 굳이 빼지 않고 말했다.

“반근, 앞으로 아씨를 잘 보살펴 드려야 해.”

당부하던 시녀는 혼자서 쿡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반근을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말을 했네. 원래부터 아씨를 보살피던 사람은 너잖아.”

“난 아씨를 보살피는 일밖에 못 해. 언니는 아씨를 도와드릴 수 있는걸?”

“다 아씨의 가르침 덕분이지. 아씨께서 주신 기회이기도 하고.”

시녀가 웃으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아씨를 따라다니면서 많이 보고 배웠어. 아마 한평생을 배워도 모자라겠지? 하지만 배우는 건 단순히 배우는 거고, 어떻게 해내는지는 자신에게 달린 거야.”

시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황궁 편전.

내시가 잰걸음으로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정 낭자가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해 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던 진안 군왕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와, 나를 먼저 찾아준 거야?”

진안 군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하! 분명히 내가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아냈는지 물어보러 온 거겠지!”

내시는 한껏 기뻐하는 소년을 보자, 차마 뒷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실은……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작별이었구나.

떠날 거면 가기 전에 잊지 말고 나한테 인사해요.

정말로 약속을 잘 지키는 친구네.

진안 군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환이 말을 끝내자 진십삼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드디어 먼저 한 번 말을 걸어오나 싶었는데, 그게 작별인사가 될 줄이야.”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진십삼은 몸을 돌려 천천히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짜 가는 거야? 주육낭 때도 그랬지만, 이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진십삼의 죽마고우였던 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천 리 밖으로 떠나갔다. 진십삼은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돌연 대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저기, 공자님, 공자님!”

사환이 두어 번 불렀지만, 그 사이에 진십삼은 벌써 사환의 말을 타고 떠나갔다. 사환은 고개를 긁적이면서 대문 쪽을 쳐다보았다.

도련님의 말은 저기 있는데, 저걸 타고 따라가야 하나?

하지만 진십삼의 엄격한 스승을 떠올리자 고개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결국 사환은 쫄래쫄래 뜀박질하며 진십삼의 뒤를 쫓았다.

진십삼이 정교랑의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대문 앞에는 이미 주씨 가문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진십삼은 말에서 내려 잠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주 공자님?”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주 공자라고 부르는 노복 하나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소인은 정 낭자의 정혼자가 계시는 왕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진십삼은 짧게 음, 대꾸하고는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안하무인인 공자들을 익히 봐 온 터라 노복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노복이 진십삼한테서 몇 걸음 떨어져 서는 찰나, 진십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네 윗전은 어디 있고?”

“경성 특산품을 사러 가셨습니다. 소인한테 정 낭자께 더 필요한 건 없는지 여쭤보라고 하셨고요. 주 공자님께서는…….”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고 노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노복은 뒷말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 공자가 나를 썩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굳이 억지로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단 말이지. 원치 않은 혼사지만, 어쩔 수 없이 사돈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족의 심정인가?

꼭 노복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소년 공자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됐든 정 낭자의 시댁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자네들은 어디에 묵고 있나? 가기 전에 그쪽 공자와 인사나 한번 하지.”

이제야 좀 가족답네.

“공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노복이 웃음 지으면서 가볍게 예를 올리고는 지금 묵고 있는 객잔의 이름을 말했다.

대문 밖에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저택 안에서는 사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복과 진십삼은 동시에 멈칫했다.

울음소리? 잘못 들었나?

노복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활짝 열린 대문 사이를 들여다보자,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사내 하나가 보였다.

노복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옆에 서 있던 소년 공자가 제지하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노복은 아차 싶은 마음에 옆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노복은 주 공자가 그를 따라 옆으로 비켜설 줄 알았지만, 공자는 도리어 대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교교, 내가 정말 잘못했다. 제발 우리 목숨만은 살려다오.”

주 노야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좋아요. 대신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낼게요.”

정교랑의 말에 주 노야는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쉽게? 일순간 주 노야의 뇌리에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쉽다고? 듣기에는 얼핏 쉬워 보이지만, 정작 해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잖아.

“곧 왕씨 가문의 사람들과 강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경성의 세 점포는 외숙부님께 잘 부탁드릴게요.”

역시!

“교교, 그건 다 네 점포잖니. 나는 절대 관심 두지 않을 거다! 내가 하늘에 맹세하마!”

주 노야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외쳤다.

어째 듣기에 말이 좀 이상한데? 뭐, 아무렴 어떠랴!

“그럼, 외숙부님. 도와주기 싫으시단 건가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와주기 싫다니?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잖아!

“아니다, 도와주고 싶지. 하늘에 맹세코 도와주고 싶어!”

주 노야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자 시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 웃어댔다.

“그래서 저를 도와주고 싶다는 거예요, 아닌 거예요?”

주 노야는 퉁퉁 부은 얼굴로 진땀을 뺐다.

“외숙부님, 외숙부님이 인정하든 안 하든, 제가 인정하든 안 하든, 세상 사람들은 이 세 점포를 모두 외숙부님의 가업이자 주씨 가문의 가업으로 여길 거예요. 그 말인즉, 이득은 제가 취하지만,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온갖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모두 외숙부님의 몫이란 거죠.”

그건 사실이지.

주 노야는 정교랑이 신의 낭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주씨 가문도 조금 이득을 봤다지만, 좋은 건 모두 정교랑 차지였다. 혹여나 정교랑이 정색하고 매정하게 굴어 일이라도 생기면, 조롱과 비난은 모두 주씨 가문의 몫이었고.

그렇다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나. 이런 게 바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가족이지.

“이건 외숙부님의 운명이고, 주씨 가문의 운명이에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태어난 날부터 이렇게 정해진 운명이죠.”

정교랑이 말했다.

맞아. 다 운명이지.

주 노야가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외숙부님, 어차피 이게 다 운명이라면, 행운을 택하시겠어요, 불운을 택하시겠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행운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행운.”

주 노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물었다. 주 노야는 정교랑이 고개를 기울인 의미를 알아채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행운!”

“그럼 됐어요. 경성의 점포는 외숙부님께서 잘 봐주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 노야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제가 잘 못 지내면 주씨 가문도 좋은 일이 없을 테고,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주씨 가문도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외숙부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시겠죠?”

주 노야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자는…….

아니지, 아니야. 이 여인의 습성을 봐서는 생사고락이고 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낙을 함께할 수 있는 건 좋지만, 누가 이 여인과 고난을 함께하고 싶겠나? 하하.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누가 함께한다고 하겠냐고.

그러니, 저 말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군.

당신은 아주 재수 없게 됐어. 내게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들을 방패로 삼을 거야. 물론, 내게 잘 보인다면 콩고물을 좀 얻어갈 수도 있을 테지.

“알겠다, 교교.”

주 노야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은 얼굴 때문에, 아무리 표정을 엄숙하게 지어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정교랑이 감사를 표했다.

“외숙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여간 금강 보살이라니까. 만에 하나 사람을 직접 죽일 일이 생긴다 해도, 분명 예의는 깍듯하게 차릴 여인이야.

주 노야도 서둘러 답례했다.

“교교, 정말 돌아가려는 게냐? 내 당장 가서 호위와 마차 행렬을 준비해주마.”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몇 명 데려가고…….”

주 노야가 정교랑의 눈치를 보면서 권했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를 표했다. 주 노야는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출 것 같이 기뻤다.

늘 혼자서만 다니던 교교가 우리 주씨 가문의 사람을 쓰겠다고 했어! 이게 뭘 뜻하냐고? 이 여인이 우리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게야!

“내가 직접 가서 사람을 골라 주마!”

기쁘게 외치고는 몸을 일으키던 주 노야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을 덧붙였다.

“골라서 네 앞으로 데려와 볼게.”

“괜찮아요.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으니 크게 염려치 마세요.”

쓸 수 있으면 쓰는 거고, 쓰지 못할 사람이면……. 제거해 버리겠지.

그때 정씨 가문에서 쫓겨났던 몸종들처럼 말이야. 이 여인의 눈에는 아랫것은 어디까지나 아랫것일 뿐, 이름 지어주는 것도 아까워하잖아.

주 노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못 가 다시 돌아와서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교교, 그럼 네 외숙모와 나는 무슨 약을 쓰면 되겠니?”

시녀는 멈칫했다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주 노야의 눈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이번에도 말 한마디면 돼요. ‘병이 다 나았어.’”

대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 주 노야를 보자, 진십삼은 옆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주 노야.”

진십삼이 가볍게 예를 올리자 주 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오던 노복은 진십삼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돼지 대가리를 한 사내가 주 노야라고?

하긴, 시종을 때렸던 얼굴 부은 사내도 무공을 단련한 사람이었어. 주씨 가문은 무장 출신이니, 딱 들어맞는군.

“주 노야.”

노복이 가까이 쫓아가 예를 올렸다. 주 노야는 노복을 슬쩍 보고 진십삼에게 눈길을 돌렸다.

진씨 가문 사람인가?

“왕씨 가문 사람입니다.”

진십삼이 주 노야의 눈짓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말에 주 노야는 곧장 자리를 뜨려고 했다.

“주 노야, 주 노야. 저희 공자님께서 지난번에 노야를 찾아뵈려고 주씨 가문에 가셨는데…….”

“날 찾아서 뭐하게?”

주 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노복의 말을 끊었다. 그러던 중 왕십칠이 정교랑의 환심을 사서 정교랑이 혼사에 동의했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강주로 돌아가는 일 때문에 그러는가?”

주 노야가 돌연 태도를 바꾸고 상냥한 말투로 웃으면서 노복에게 말을 걸어오니, 노복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예, 예.”

노복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길을 오를 수 있도록 내 친히 행차를 준비해 줄 것이야.”

주 노야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노복은 더욱 놀랐다.

“됐다. 더 이상 날 찾아올 필요는 없고, 먼 길 떠날 채비나 잘하게.”

주 노야는 노복을 향해 손짓하고 서둘러 마차를 몰아 대문 앞을 떠났다. 노복이 주 노야를 몇 번 불렀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가 저렇게 급해. 어디 사람이라도 살리러 가나.”

노복이 몸을 돌리자, 좀 전까지 대문 앞에 서 있던 소년 공자는 이미 저택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복도 저택 안으로 들어서려고 발을 내디뎠지만, 금가아가 그를 제지했다.

“아씨께서는 손님을 뵙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세요?”

노복이 자신이 온 이유를 말하자, 어린 사환은 말을 전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다.

“저희 아씨께서 뭘 사다 줄 필요는 없다고 하십니다. 공자님이 원하는 것만 사시면 된다고 하시네요.”

노복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저택 안으로 들이고자 하는 뜻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노복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주 노야까지 만나 뵙고.

음? 뭔가 좀 이상한데?

다리를 건너 저잣거리까지 걸어간 노복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옥대교 저택을 내다보았다.

아까 그 사환 말로는, 정 낭자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던데. 사촌이 무슨 손님이람? 설마, 사촌이 아닌가?

노복은 그제야 좀 전에 보았던 소년 공자와 주 노야의 인사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자연스러운 부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의 소년 공자인데도 주 노야에게는 가벼운 예를 올렸었다.

그렇다면, 소년 공자의 지위가 주 노야보다 높다는 의미가 아닌가. 자식의 신분이 부모보다 높지는 못할 터, 그럼 저 공자는 주 노야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데!

그럼, 그 공자는 누구지?

정 낭자의 저택을 드나들 수 있는, 주씨 가문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잘생긴 소년. 아니지, 아니지. 저택을 드나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추절 때도 꽃등을 같이 감상했었잖아!

여간 깊은 관계가 아닌가 보군. 우리 십칠 도련님께서 설마 정혼자를 도둑맞는 건 아니겠지?

이 생각이 노복의 뇌리에 스치자, 노복은 놀라서 몸을 살짝 떨고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나! 그 바보가!

진십삼은 시녀가 건넨 찻잔을 받아와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짜 가는 겁니까?”

진십삼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짧게 대답했다. 진십삼은 다시 한번 차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내가 작별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선상 연회는 했었으니, 이번은 다른 재미있는 곳으로 가죠.”

진십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낭자가 워낙 입맛이 까다로워서 말이죠.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아보겠습니다.”

그 후로 진십삼은 정교랑에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이런저런 음식은 어떤지 물었다.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삼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진십삼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앞에 앉아 있는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십칠한테 시집가지 마요. 내, 내 어머니께 부탁드려서 더 좋은 사람을 골라 줄게요.”

정교랑은 진십삼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싱긋 웃고, 진십삼의 앞으로 찬합 하나를 내밀었다.

“새로 만든 다과예요.”

진십삼은 자세를 고쳐앉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 그 집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사서 고생하며 자신을 괴롭힐 필요 있어요?”

정교랑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진 공자,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인 건데요?”

정교랑이 먼저 다과를 손끝으로 살짝 집었다.

“가문과 인품이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진십삼을 보며 입가를 가리고 다과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정교랑의 넓은 소매 위로 보이는 반쪽 얼굴의 두 눈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진십삼도 정교랑을 따라 다과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진 공자,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사실 다 똑같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다 똑같다고? 아무리 똑같다 해도, 왕씨 가문과 같을 수는 없지. 인품이 뛰어난 공자들도 그 쓸모없는 왕십칠과 같다는 말인가? 어떻게 같아?

“만약 나라면요?”

진십삼이 불쑥 물었다. 방문 앞에 앉아 있던 시녀와 반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 공자가 벌써 두 번째 이러는 거지?

정교랑이 진십삼을 보며 웃음 지었다.

“내 세 번째 원칙을 미리 알았더라도, 내가 공자의 다리를 고치게 해 줬을 건가요?”

정교랑이 진십삼의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진십삼은 정교랑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찻잔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한참인 것 같기도, 찰나인 것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났다.

“아닌 척하던 옛날 모습이 또 나왔네요. 낭자한테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시녀가 다시 반근과 눈을 마주치더니 쿡 하고 웃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거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어요. 이 세상에 만약이란 건 없고, 단지 일어난 일만 있을 뿐이에요. 굳이 열심히 생각하고, 물어볼 필요가 뭐 있나요. 자신만 난처해질 뿐이죠.”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가서 할 일이 조금 있어요. 이런 사소한 일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지요. 진 공자의 좋은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해요.”

정교랑이 물이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로 술을 대신하죠.”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로 술을 대신하겠습니다. 같이 술을 마실 날을 기다렸지만, 이루지 못하게 됐네요.”

“다음번에 볼 때는,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을 거예요.”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물었다.

“안 보겠다면, 어쩔 수 없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진 공자님, 조심히 가세요.”

시녀가 대문 앞에서 배웅했다. 진십삼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회랑 아래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간에, 적어도 얻어가는 건 있다고 진십삼은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가 더는 없고, 지금은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배웅해 주고 있으니까.

“먼저 가겠습니다.”

진십삼이 싱긋 웃고는 정교랑에게 손을 저으며 인사하자, 정교랑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진십삼은 말 위에 올라탄 뒤, 제자리에서 말굽을 몇 번 굴리고는 대문 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전하.”

걷고 있던 진안 군왕의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진안 군왕은 차분하게 걸음을 멈추고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진안 군왕을 불러 세운 이는 일고여덟 명의 내시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도지(都知) 장만성(張萬成)이었다.

“전하, 어딜 가시는 겝니까?”

장 도지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장 도지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다른 내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장 도지는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지라 진안 군왕을 윗전 받들 듯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장 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저기 거니는 거야 좋지요.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황궁의 사람으로서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해요. 전하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닌데, 철없이 굴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일개 내시에게 이런 훈계를 듣자, 진안 군왕은 어쩐지 조금 거북했다.

“그래. 나도 알지.”

“알고 계신다니 다행이군요. 마마와 폐하께서는 전하를 이리도 아끼시는데, 전하께서는 허구한 날 밖으로만 나다니고 계시지요. 내년이면 전하께서도 출궁하실 테니, 가고 싶은 곳은 그때 마음껏 가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출궁 이후에는 전하께서 궁 안에 들어오실 일이 얼마 없으니, 지금 궁에 계실 때 태후마마께 효를 다하고 오붓한 시간을 많이 보내심이 좋을 듯합니다.”

장 도지의 말에 진안 군왕은 헤헤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장 도지 일행이 자리를 뜨자, 진안 군왕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저 재수 없는 놈이.”

내시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진안 군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욱한 가을 안개 속에 보이는 황궁이 아득한 동시에 가깝게 느껴졌다.

“전하, 지난번 정 낭자의 일로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오시는 바람에, 마마와 폐하께서 의심하시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번 배웅은 자제하심이 어떠신지요? 선물 하나면 마음을 전하시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보지 못해도 괜찮아. 보고 싶다면,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니까.”

말을 마친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황궁을 쳐다보고는, 황궁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 낭자, 주 낭자!”

덕승루 안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자, 별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리의 정체는 주 낭자가 회랑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덕승루에서 벌어지는 소란이었다. 회랑 다리 위의 소녀는 화려하고 진한 화장을 한 밤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단아함이 풍겼고, 햇빛에 비친 그녀의 용모는 더없이 청아하고 수려해 보였다.

“주 낭자, 주 낭자. 나 왕십칠이오! 왕십칠!”

왕십칠이 두 팔을 높이 들며 외쳤다. 다리 위의 소녀는 왕십칠의 외침을 무시한 채, 어린 사슴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르긴 뭘 불러! 꼭 주 낭자가 자네를 알고 있는 것처럼.”

서로 밀쳐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왕십칠에게 옷깃을 밟힌 사내 하나가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주 낭자는 당연히 날 알지! 얼마 전에는 주 낭자가 직접 칠현금도 연주해 줬다니까? 나를 사내대장부라며 칭찬하기도 했다고.”

주위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왕십칠에게 몰려들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가서 주 낭자를 만나 보시오. 댁을 아직 기억하는지 물어보라고.”

도발을 못 이긴 왕십칠은 지나가던 점원 하나를 붙잡아 주 낭자에게 이를 통보하라 말했다. 점원은 왕십칠에게 비싼 심부름 값을 받아 챙기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왕십칠에게 돌아왔다.

“주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

왕십칠이 다급하게 묻자 점원은 웃으면서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주 낭자께서는, 모른다고 하던데요?”

덕승루 안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자식, 허풍이 하늘을 찌르는군!”

“상상이랑 현실을 구분을 못 하는 거 아니야?”

“썩 꺼져, 남방 촌뜨기야!”

주위의 조롱과 비웃음에 왕십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좀 전의 점원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냉큼 가서 주 낭자의 몸종인 춘령, 춘령을 찾아와라. 그 애가 다 알고 있어!”

이때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젊은 시종 두 명이 왕십칠을 좌우로 붙들었다.

“공자님, 내일 출발인데,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종 하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자, 왕십칠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서둘러 가야 합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와 있어요.”

시종들은 왕십칠의 말을 무시한 채, 그를 양쪽에서 꽉 붙잡고 덕승루 밖으로 끌고 나갔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끌려나가는 왕십칠을 본 주위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뉘 집 바보 녀석이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웃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한쪽에 모여 있던 잡부 한 명이 대청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웃으면서 춘령에게 물었다.

“춘령, 저 사람이 널 찾나 본데?”

춘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잡부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라버니들, 어서 얘기해 주세요. 그 무뢰배들이 태평거에 가서 난리를 치고는 어떻게 됐어요?”

4월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경성에서는 벌써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살인이 벌어진 자극적인 이야기인지라, 흥분한 사내들은 더욱 열을 올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또 화살 한 발이 날아갔지. 태평거 사람들이 무뢰배들을 하나씩 하나씩 화살로 쏴서 죽여버린 거야.”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잡부의 말솜씨에 춘령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잡부들은 그런 춘령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활을 잘 쏘던지, 화살 한 발 한 발이 다 머리를 관통했다니까. 뇌수까지 흘러나오더라고.”

뒷걸음질 치는 춘령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 드리워졌다.

“너무 끔찍하네요.”

춘령의 말에 잡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주씨 가문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거지.”

춘령은 여전히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주씨 가문이 대단한 게 아니야. 주씨 가문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그 여인이지. 그 여인이란 말이야.

춘령은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앞에서 번개가 두 번 내리치고 불길에 휩싸인 두 사람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왕십칠, 저 쓸모없는 놈을 손에 쥐어서 뭐에다 써? 그 여인의 눈엔 저놈이 뭣도 아닐 텐데!

“춘령!”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춘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의 시녀가 춘령의 앞에 서 있었다.

“춘령, 여기서 뭐 해? 몇 번을 불렀는데도 못 듣고.”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얘 겁먹어서 그래.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해줬거든.”

잡부들이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으이그, 도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자꾸 그런 이상한 이야기만 주워듣고.”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춘령을 나무라자, 춘령은 무안해했다.

“됐어. 어서 가자. 아씨께서 오늘 밤에 나가시잖아.”

시녀가 별말 하지 않고 재촉하자 춘령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 주 낭자를 초대한 거야? 어느 가문이길래?”

잡부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공주부 진(秦)씨 가문.”

“와, 진씨 가문이구나. 그 집에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주 낭자밖에 없겠지? 아주 중요한 연회인가 봐?”

잡부들은 일부러 주 낭자를 치켜세우며 아부를 떨었다. 주인의 영광은 곧 시녀들의 영광이다. 춘령과 시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지고 하늘색이 짙어지자, 진씨 가문 저택 앞에 마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춘령이 마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저택 앞에 빼곡히 세워진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공주는 별세했지만, 조정에서는 공주의 관저를 거둬들이지 않고 진씨 가문에 공주부를 하사하였다. 이에 대해 어사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당시 선황이 공주에게 각별했기에 눈 감고 귀 막으며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이전에도 주 낭자를 따라 유명한 가문 두 곳이 주최한 연회를 가 본 적 있는 춘령이었지만, 진씨 가문 저택 앞을 가득 메운 마차 행렬에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춘령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마차가 진짜 많네. 이번 연회는 엄청 큰가 봐.”

춘령이 옆에 앉아 있던 시녀에게 속삭였다.

진씨 저택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시종과 하인들은 측문을 통해 바삐 드나들었다.

춘령이 타고 있던 마차는 측문을 통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더 구석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마차가 쪽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옆문을 지나가려는 찰나, 진씨 저택의 하인이 마차를 제지하여 멈춰 세웠다.

춘령이 마차 휘장을 조금 들어 올려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여종 네다섯 명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존귀한 옷차림의 여자아이도 함께했다. 진씨 가문 하인들과 여종들이 마차 옆으로 우르르 몰려가 여인과 어린아이를 살갑게 맞이했다.

저 여인은 많아 봤자 열일곱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나는 평생 꿈도 못 꿀 삶을 살고 있구나. 저 어린아이 또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겠지.

“빨리 지나가시오. 어서요.”

좀 전에 마차를 제지했던 하인이 마부에게 재촉했다. 춘령이 타고 있던 마차가 흔들거리면서 측문을 지나쳤다.

“춘령, 바깥은 그만 보고, 아씨의 물건은 다 챙겼나 잘 확인해. 괜히 나중에 뭐 잃어버리거나 하면 골치 아파져.”

서둘러 시선을 거둔 춘령이 알겠다고 답하고는 주변에 놓인 크고 작은 상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관기가 다른 가문의 저택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모든 물건을 알아서 챙겨가야 한다. 좋게 말하면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남들이 관기가 쓰는 물건을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쪽문에 다다랐을 때 즈음, 춘령은 다시 한번 뒤를 힐끗 내다보았다.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측문 앞에 서자,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들을 에워싸면서 대우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동씨 가문 언니들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십팔랑, 어서 이리 와 봐. 오늘은 어떤 옷을 입었어?”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여인들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진십팔랑에게 다가갔다. 소녀들은 진십팔랑이 친숙한 듯 팔을 벌려 옷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오면 안 되고, 너희만 와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소녀들은 사이좋게 깔깔거리며 대문을 지났다.

진씨 가문의 연회 술상은 정원 안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물가에 정교하게 지어진 정자와 누각을 은은한 등롱이 운치 있게 비추자 흡사 인간 세상의 선경처럼 보였다.

크고 작은 상자들을 품에 안고 있던 춘령은 경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덕승루의 화려함에도 놀랐고, 이전 두 가문의 사치스러움에도 감탄했던 춘령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주 낭자 일행이 연회석에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기 좀 봐. 저 사람이 바로 주 낭자야.”

무수히 많은 시선이 불빛에 비친 주 낭자를 향했다.

등롱 아래로 걸어오는 여인은 붉은색 연지를 입술에 칠하고 이마에 매화꽃을 붙이는 매화장(梅花粧)으로 치장했으며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었다. 여인은 물기를 버금은 빛나는 눈길로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좁은 보폭으로 걸어갔다. 바닥까지 끌리는 치맛자락이 오색나비 떼처럼 펄럭거렸다.

“모란과 같은 화려함에 겨울에 피는 매화 같은 기세가 더해지다니. 괜히 화괴(花魁: 명기)가 아니야.”

소년 공자들이 주 낭자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자, 주위에 있던 소녀들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무리 화괴라고 해도, 일개 관기잖아.”

“감탄할 게 뭐 있다고.”

“하여간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 써.”

소년 공자들도 소녀들의 말이 썩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지내는 오누이인지라, 굳이 격식을 차릴 사이가 아니다 보니 몇몇이 반론하기 시작했다.

“주 낭자는 출신이 결백해.”

“재색을 겸했으니 당연히 감탄할 만하지.”

한쪽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래서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굳이 꼬마 낭자들과 말씨름할 필요가 있나?”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던 진십삼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소년에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럴 땐, 그냥 못 들은 척 웃어넘겨야 해.”

옆에 있던 소년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순식간에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소년 공자를 쳐다보았다.

“결백? 뭐가 어떻게 결백한데? 교방사 출신인데 어떻게 결백할 수가 있어?”

“주 낭자의 부친께서 조정의 관리셨는데, 누군가의 모함으로 교방사에 들어간 거라고.”

“아니, 그럼 지금은 부친의 누명이 벗겨졌는데 왜 교방사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그게 바로 주 낭자가 고결하다는 점이야.”

“고결은 무슨. 그런 식으로 지내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 거겠지. 다시 가난한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뿐이야.”

“기생에게는 정이 없고, 광대에게는 의리가 없다는 말 몰라?”

“낭자는 무슨 낭자야. 낭자 좋아하네. 교방사에는 창기밖에 없어!”

소년과 소녀가 논쟁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는데도 이 주제를 불편해하지 않았을 뿐더러, 불편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던 춘령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춘령은 주 낭자가 이런 상황에 놓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춘령은 소녀들 없이 오직 사내들만 가득한 연회에 갔었기 때문에, 항상 주 낭자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 왔다. 그런데 오늘 멸시와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춘령은 겁이 더럭 났다.

흔들리는 등롱에 따라 반짝이는 보석 때문에 춘령은 눈이 부시고 어지러웠다. 잔뜩 움츠러든 춘령은 앞서가고 있는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주 낭자는 자신을 주제로 한 논쟁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변함없는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올곧은 시선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주 낭자.”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며 예를 갖춰 말했다.

“분부가 있으신지요, 아씨.”

“잠깐 와 봐요.”

한 소녀가 손짓하면서 주 낭자를 부르자, 주 낭자는 즉시 알겠다고 답하고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 낭자는 소녀의 근처에 다다라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춘령은 시선으로 주 낭자를 쫓아갔다. 주 낭자의 앞에는 네다섯 명의 소녀들이 서 있었다. 그녀들의 차림새와 장식품은 주 낭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하지만 춘령은 주 낭자를 돋보이게 해 주는 갖가지 화려한 장식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게 도리어 수치스러울 때도 있구나.

“주 낭자, 당신 부친의 누명이 벗겨졌다고 들었는데, 왜 기적에서 이름을 빼지 않는 거죠? 스스로 부끄러워서 그런 거예요?”

소녀의 물음에 주 낭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고, 소인의 운명을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기적에서 이름을 빼더라도 소인이 교방사에 들어갔던 운명을 지울 수는 없으니. 굳이 기적에서 이름을 빼야 할 필요가 있나요.”

주 낭자의 대답을 들은 소년 공자들의 얼굴에 연민이 드리워졌다. 어떤 이는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말은 참 잘하는데. 어쨌든 부끄럽다는 거잖아요?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왜 얌전히 지내지 않고, 화괴니 뭐니 하면서 뽐내고 다니는 거죠?”

소녀가 주 낭자의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콧방귀를 뀌자, 춘령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말했다.

“소인 생각이 짧아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단지 소인은 무엇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소녀들은 주 낭자의 말을 듣자 실소를 터트렸다. 소녀 중 하나가 또 뭐라 말을 하려고 하던 찰나에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말이로군.”

청량한 소년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청색 장포에 옥대를 한 소년이 웃음 지으며 한쪽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그 소년의 용모를 본 춘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씨 가문의 공자님이잖아!

“그렇다면, 한 치의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다는 말이로군요.”

소년이 주 낭자를 쳐다보면서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높이 올려 말했다.

“낭자에게 한 잔 바치겠소.”

말을 마친 소년은 단숨에 찻잔을 비웠다. 주 낭자는 소년을 향해 싱긋 웃으며 몸을 낮춰 예를 표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걸어갔다.

지금 아씨를 도와준 거야? 그리고 저 사람이 입을 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조용해졌어. 역시 주씨 가문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

춘령의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댔다. 춘령은 고개를 돌려 그 소년을 흘깃 쳐다보았다.

저 사람과 비교한다면, 왕십칠이 무슨 대수야! 저 사람, 아씨께 마음이 있으니까 나서준 거겠지?

호흡이 가빠진 춘령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뒤에서 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드디어 왔네.”

누가 왔다는 거지?

춘령이 고개를 돌렸다. 좀 전의 주씨 공자는 벌써 한달음에 마중을 나간 터였다. 주 낭자를 비웃던 소녀들과 소년 공자들까지 모두 한쪽으로 몰려갔다.

이제 막 도착했다는 쪽에도 사람이 꽤 많이 온 모양이었다. 등불 아래에 비친 모습을 보니, 많은 사람이 한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은 가장 먼저 한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는 새 옷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낡지 않아 보이는 어두운색 옷을 입고 있었다. 넓은 소매를 가진 겉옷과 바닥까지 끌리는 치맛자락, 얇은 허리를 감싼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그 소녀는 경성에서 가장 눈부신 존재였다.

지금 그녀가 가장 눈부신 존재인 이유는, 한 곳으로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 때문일지도, 그녀의 깊은 두 눈동자 때문일지도, 어두운색의 겉옷 위로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 여인이야. 또 저 여인이야.

만약 그때 저 여인이 나를 내치지 않았더라면, 저 여인 근처에서 시중을 드는 저 두 시녀가 바로 우리 자매였겠지?

춘령은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입가에서 떫고 짠 맛이 났다. 춘령이 자신의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피가 난 것이었다.

“저 낭자가 오늘의 주빈(主賓)이구나.”

귓가에 들려오는 주 낭자의 목소리에 춘령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주 낭자도 몰려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불 아래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소녀의 모습은 빛나는 유리와도 같았다.

“정말 미인이네.”

주 낭자가 미소지으면서 그 소녀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가자. 주빈이 오셨으니, 우리도 서둘러서 준비해야지.”

주 낭자가 걸음을 옮겼다. 춘령도 한 번 더 뒤를 쳐다보고는, 잰걸음으로 주 낭자의 뒤를 따라 빛과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 하나하나에 술이 채워졌다.

“이건 우리 집에서 직접 빚은 술이에요. 은은한 향이 입에 감돌아서 여인들이 마시기 좋은 술이죠. 한 번 마셔 봐요.”

진(秦) 부인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술을 권하자,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십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정 낭자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습니다. 차도 됐으니 권하지 마세요.”

진 부인이 진십삼을 흘겨봤다. 정교랑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진십삼의 분부대로 물을 가져왔다.

딩딩 동동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던 비파 연주 소리가 멈췄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주 낭자가 몸을 일으켜 인사를 올리자 객석에서 박수갈채와 환호가 일었다. 환호 소리 때문에 진 부인과 진십삼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부인께서는 노래를 들으시겠어요, 춤을 보시겠어요?”

주 낭자가 공손하게 진 부인에게 여쭈었다.

“주 낭자는 춤을 잘 추지.”

진 부인의 대답에 주 낭자가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소인이 새로 만든 안무를 여러분께 선보일게요.”

진 부인은 더 이상 주 낭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정교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 낭자가 말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고개를 끄덕여 악공들에게 신호를 주자, 악공들은 잠시 악기의 음을 맞춰 보고는 맑고 경쾌한 연주를 시작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山寺待梅開).”

주 낭자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시작되자, 진십삼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갑작스럽게 차를 내뿜는 진십삼 때문에 사람들이 일제히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도 노래를 멈추고 진십삼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난 괜찮아요.”

진십삼은 시녀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는 웃으며 물었다.

“주 낭자, 이 노래는…….”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환한 등불이 그 웃는 얼굴을 비추자, 주 낭자의 빛나는 눈동자가 더욱 돋보였다. 주위에 있던 소년 공자들은 넋을 놓은 채 주 낭자를 바라보았다.

“공자님께 아뢰옵니다. 소인이 일전에 무명의 고수가 차정사에 남긴 글씨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글씨에 온 마음을 빼앗겨 온종일 글씨를 감상하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이 안무를 만들었죠. 그 내용을 첫 소절로 삼았고요.”

주 낭자가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고는 완곡하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주위 사람들은 주 낭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차정사 글씨가 생각나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진십삼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십삼낭, 그 글씨들을 안 봤던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라?”

진십삼이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야. 낭자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주 낭자가 웃으며 예를 올리고 다시 한번 악공에게 눈짓하자, 감미로운 연주에 맞춰 아름다운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기둥 뒤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춘령은 진십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주 낭자의 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춘령은 눈을 반짝였다.

이 세상의 어떤 사내가 주 낭자에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진 공자도 참 재밌어.”

“일부러 주 낭자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저런 게 아닐까?”

서로 속삭이듯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춘령은 고개를 돌렸다.

“진 공자가 누군데?”

놀란 얼굴의 춘령이 뒤에 앉아 있던 두 사환에게 물었다. 두 사환은 좀 전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주인 자리에 앉은 진씨 가문 십삼공자지. 남의 집 연회에 오면서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온 거야?”

사환이 웃으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춘령은 화들짝 놀랐다.

진십삼 공자!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구였던, 박학다식한 진씨 가문의 절름발이! 저 사람이 바로 그 진십삼 공자라니!

춘령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시선은 더 이상 주 낭자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쪽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그의 눈가에는 애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춘령이 진십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두운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던 여인도 진십삼을 향해 싱긋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저 봐요, 저 봐.”

진 부인이 웃으면서 팔꿈치로 옆에 앉아 있던 진소 부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두 사람, 눈짓으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모르겠네.”

진소 부인이 술을 한 모금 음미하고 조용히 웃었다.

“사내는 마음이 있지만, 여인은 마음이 없겠지.”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을 흘겨보았다.

“언니, 질투하지 마요. 우리 십삼이 정 낭자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데.”

“아무리 가까워도 소용없다니까.”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 부인을 부채로 가볍게 톡 쳤다.

“흥. 난 안 믿어요. 사람 감정이 그 빌어먹을 원칙 하나 못 이길까.”

진 부인은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 낭자의 춤을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는 진십삼을 쳐다보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감미로운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춤사위, 시끄럽고 떠들썩한 분위기, 다닥다닥 붙어서 앉은 여종들, 환한 불빛 아래에 있는 이 모든 게 더없이 화려하고 흥겨워 보인다고 진 부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한쪽에 앉은 저 여인은 여전히 조용하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어린 진단랑과 진십팔랑이 작은 소리로 깔깔대며 웃고 있는데도, 저 여인은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의 화려함과 왁자지껄함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아이도 참…….

“내 저 애를 기필코 웃기고 말겠어.”

진 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

작가의 말:

당나라 황궁의 태감 기구는 내시성(內寺省)이라고 불렸습니다. 품계로는 도지(都知), 부도지(副都知), 압반(押班)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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