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이 훤히 밝았을 무렵, 주 노야의 마차가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영업시간이 되지 않아 신선거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주 노야의 시종들은 사나운 기세로 문을 두드려 기어코 신선거의 문을 열어 버렸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너도 좋은 뜻에서 이러는 거겠지. 좋은 뜻에서 이러는 거라면, 뜻대로 하게 해 주는 게 맞아.”
주 노야가 담담하게 말했다.
식당일 때문에 지난 며칠을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한 정사낭은 놀란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식당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도 매한가지니까, 서로서로 도우면서 지내자꾸나. 가게 장사가 이렇게 잘 되는데, 우리끼리 이럴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네가 관리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네가 관리하거라.”
하루아침에 바뀐 주 노야의 태도를 보자, 정사낭의 기분은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지나가고 화창하게 갠 날씨와 같아졌다. 돌변한 주 노야의 모습이 당황스러웠지만, 정사낭은 딱 한 가지만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이의 것들이 남에게 넘어가서는 안 돼.
말주변이 없는 정사낭은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기만 했다.
“네가 아직 잘 모르기도 하고 해야 할 공부도 있으니, 노련하고 경험 많은 사람 하나를 옆에 두는 게 좋겠지.”
주 노야가 뒤에 있는 노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집 장부를 담당하는 이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정사낭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주 노야와 끝까지 맞서 소란을 피운다 한들, 딱히 좋을 게 없겠지. 이렇게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아.
어린 서생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보고 주 노야는 내심 우쭐해졌다.
장강주 선생이 있다고 해도 딱히 무서울 건 없지. 어찌 됐든 이건 남의 집안일이니까. 우리 주씨 가문의 일이란 말이다. 남의 집 재산의 귀속 문제에 장강주 선생이 무턱대고 나설 리는 없지 않은가. 남의 집 재산을 빼돌리려고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장강주 선생 같은 대유학자에게는 체면이 곧 생명이지. 물론 때로는 어떤 일 앞에서 인정사정없을 때도 간혹 있긴 하지만.
고작 서생 하나에 시종 몇 명이 이 많은 재산을 관리하겠다고? 너무 쉽게들 생각했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반년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시간이 더 길어지면?
둘 다 정씨 핏줄이긴 하다만, 이런 일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 앞.
열댓 명의 여종과 건장한 시종들이 주 부인과 함께 우르르 마차에서 내렸다. 지난번 방문 이후로 벌써 열흘이 지난 때였다.
“그 시녀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야. 그 아이 때문에 일을 망쳐서 또 망신을 당할까 봐 너희 모두를 데려온 것이다.”
집사 부인이 주위에 있는 여종들에게 신신당부하며 각자 해야 할 것들을 지시했다.
“너희들은 가서 문을 두드려라. 너희는 문 앞에 있는 사환을 잘 붙들고 있고. 그리고 너희는 시녀를 제압해 버려. 꼼짝도 못 하게. 너희는 곧장 들어가서 낭자를 들것에 옮기고…….”
이미 한 차례 내렸던 지시지만, 집사 부인은 몹시 중요한 일이라는 듯 여종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 안에 있는 시종 둘과 사환을 다 합쳐도 여기 있는 여종 하나 몸집만 못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여종 중 하나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뭘 웃어! 고작 세 사람만 있다고 방심하면 안 돼, 조심해야 한다고. 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말거라.”
집사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교 이 진인이 직접 사사한 제자이자 염라대왕과 술잔을 함께 들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그나마 저 낭자가 앓아누워 오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저 낭자가 깨어있을 때 성질을 긁었다면 말 한마디에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여종들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 부인은 마차에서 내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서 가 봐. 꼭 빨리빨리 움직이고!”
마지막 당부를 마친 집사 부인이 짧게 손뼉을 쳤다. 여종 네 명이 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문 열…….”
여종의 손이 문에 닿자마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몸에 잔뜩 힘을 실어서 거의 문을 밀다시피 했던 여종들은 한꺼번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집 큰 여종들이 서로를 깔아뭉개게 되자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본 다른 여종들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대문 앞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지나가던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소리는 왜 질러!”
주 부인이 화를 내면서 호통쳤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왜 너희들끼리 난리야!
여종들은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고, 넘어졌던 여종들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회랑 아래에 서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대문 쪽을 쳐다보는 금가아를 그제야 발견했다. 사환을 제압하기로 했던 여종들은 우왕좌왕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순순히 문까지 열어줬는데, 제압을 해, 말아?
“비켜라.”
주 부인이 소리치자 여종들이 길을 터주었다. 주 부인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회랑 아래에 있던 금가아가 손을 올렸다.
금가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여종들은 바짝 긴장하며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하지만 금가아는 별생각이 없는 듯 손을 들어 코를 비비기만 하고는 다른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맨 앞줄의 여종들은 금가아의 행동에 당황하여 급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 있던 여종들이 앞줄의 여종들과 서로 부딪히면서 또 한 번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인, 오셨어요?”
시녀가 대청 밖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주 부인은 짧게 응, 대꾸하고 시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장씨 가문의 시녀였고만! 어쩐지 건방지게 날뛴다 했어!
예전에 건방졌던 건 그러려니 하겠지만, 지금은 윗전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도 저리 건방진 건 윗전을 위하는 게 아니라 업신여기는 거야!
주 부인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시녀의 인사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낮추어 길을 비켰다.
길을 비켜주다니? 시녀를 제압하기로 했던 여종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예상했던 상황과 어쩜 이렇게 다르지?
“어서 이리 들어와 짐을 챙기거라. 교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주 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부인, 저희 아씨를 집으로 데려가시려고요?”
시녀가 물었다.
“왜? 그러면 안 돼?”
주 부인이 시녀를 보면서 언짢은 듯이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랫것이 말할 바가 아니지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매를 접으며 방 안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던 여종들은 다시 한번 주춤했다.
알면 됐어. 주 부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시녀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저희 아씨께 직접 여쭤보시는 건 어떠세요?”
시녀의 물음에 주 부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내가 가서 물어보마.”
주 부인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여라도 악취가 날까 봐 손을 들어 코를 막을 태세를 취했다.
보통 이렇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한테는 역한 냄새가…….
여종들이 재빨리 휘장을 양쪽으로 치우자, 주 부인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교교, 오늘 몸은 좀 어때?”
주 부인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외숙모랑 집에 가서 요양하자꾸나. 밖에 혼자 있으면 불편하잖니.”
주 부인은 말을 마치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해요.”
주 부인은 혼잣말로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해요.”
주 부인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래,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지. 그럼 아까 그 목소리는…….
“그럼요.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하지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일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주 부인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고개를 들어 침상을 쳐다보았다.
침상도 그대로고, 침상 위에 있던 사람도 그대로였다.
검은색 비단 겉옷은 바닥에 끌린 채로 있고, 묶지 않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옷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지탱하고, 다른 한 손은 편안하게 몸 위에 놓은 채 옆으로 누운 여인이 침상 위에서 주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어. 나를 보고 있다고!
주 부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문 앞에 잔뜩 몰려 있던 여종들과 마구 부딪히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의 집이라 익숙하지 않았는지, 주 부인은 문틀에 이마를 찧고는 발을 헛디디며 자신의 치마를 밟아 층계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눈앞이 새까매지나 싶더니 주 부인은 이내 의식을 잃었다. 여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 부인에게로 달려갔다. 여종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조그마한 마당을 순식간에 꽉 채웠다.
회랑 아래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금가아와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씨께서 뭘 하신 거지?”
금가아가 놀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셨어. 말 한마디만 하셨을 뿐이야.”
시녀도 똑같이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말 한마디라니. 고작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주 부인 스스로 자지러지게 놀라 기절까지 하다니.
시녀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손을 들어 입을 가렸지만, 웃느라 눈물까지 나왔다.
아씨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돼. 계시기만 하면, 잘 계시기만 하면 충분해.
“이리 와, 금가아. 너도 말 한마디 하러 가.”
시녀가 웃으면서 금가아에게 손짓했다.
“아씨께서 하신 말만큼 엄청난 거야?”
금가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자 시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가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금가아는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알겠다고 한 뒤, 우왕좌왕하는 주씨 여종들 사이를 잽싸게 뚫고 지나갔다. 금가아는 정교랑이 쓰러진 뒤 단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빗장까지 내팽개치고 문도 잠그지 않은 채 후다닥 뛰쳐나갔다.
이젠 괜찮아, 두려워할 거 없어, 아씨께서 계시니까, 아무것도 무서워할 게 없어.
금가아가 신선거에 도착할 즈음, 주 노야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부는 예전처럼 너희가 관리하거라. 이 노복은 관리인 밑에서 거들기만 할 테니.”
주 노야가 천천히 말했다.
거들기만 하는 거라면, 더욱이 괜찮지.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들기만 한다니까, 순진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뭐든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가는 것이거늘. 명분도 없는 노비 주제에, 명분이 있다 한들 얼간이 서생 주제에 감히 내 것을 뺏으려고 들어? 퉤!
주 노야가 웃음을 머금은 입가에 다시 찻잔을 가져갔다.
“공자님!”
문이 열리는 동시에 금가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멈칫하여 싱글벙글한 얼굴로 막 뛰어 들어온 금가아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아씨께서! 깨어나셨다고요!
실내는 일순간 공기까지 멈춰버린 듯 고요했고, 곧이어 쾅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사낭이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가아를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쾅 소리는 정사낭이 허둥지둥 나가느라 문에 몸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오 관리인도 재빨리 일어나려고 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단번에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는 간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뛰어갔다.
정사낭에게 밀쳐졌던 금가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안을 둘러보자, 신선거에는 주 노야와 주씨 집안의 노복만이 남아 있었다.
“저희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금가아는 주 노야를 빤히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주 노야의 찻잔은 아직 입가에 멈추어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던 주 노야는 금가아의 외침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갑자기 헛것이 보이듯 주 노야의 눈앞으로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에 화살이 꽂혀 눈도 못 감고 죽은 무뢰배, 풍질에 걸려 입이 삐뚤어지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유 교리,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조정의 대신들.
주 노야는 자신이 그 사람들이 된 듯한 느낌에 숨도 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주 노야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노야, 노야!”
이상함을 눈치챈 노복은 황급히 손을 뻗어 주 노야를 부축했다.
주 노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 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기침이 나오지 않자 주 노야는 양손으로 목을 잡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사람을 불러라! 음식이 목에 걸렸다!”
노복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주 노야의 등을 필사적으로 마구 쳤다.
“아이고, 세상에. 마시던 차가 목에 걸리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금가아는 숨이 막혀 죽을 듯한 모습의 주 노야를 보면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말 한마디면 사람을 자지러지게 놀릴 수 있다니까.
금가아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윗전만큼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陳)씨 가문.
여종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평소와 다르게 양손으로 치마를 들고 진 노태야의 대청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 낭자가 깨어났대요!”
진 노태야는 몹시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로 깨어났다더냐?”
진십팔랑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이 태의를 모시고 먼저 가셨어요. 할아버지, 저도 단랑과 함께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걸어 나오던 진 노태야가 멈추어 섰다.
“아니다, 너희들끼리 가 보거라.”
정 낭자가 다 나았다면, 굳이 가볼 필요는 없지. 진 노태야는 걸음을 서두르는 진십팔랑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났으면 된 거야, 깨어났으면 됐어.
옥대교 저택 앞.
주씨 가문 사람들은 일찌감치 떠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저택 대문 앞은 다른 집안의 마차와 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의 행인들이 옥대교 저택 앞을 보며 호기심 담긴 얼굴로 한 마디씩 던졌다.
“오늘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네.”
“집안에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
대문 밖은 붐벼 보이지만, 대문 너머의 저택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숨을 죽인 채 주인 자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주인 자리지만, 지금은 여느 때처럼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새까만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폭이 넓은 소매의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은 전과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전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팔걸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이 태의가 맥을 짚을 수 있도록 한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검은 비단옷의 넓은 소매가 손목 언저리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구어졌다.
딱히 특별한 점도 없어 보이고,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동작과 자태였다. 하지만 안에 앉은 사람들의 눈에는 잠시 착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더없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보였고, 구름과 같이 가벼운 동시에 자유로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참지 못한 정사낭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집안 가득 앉아 있는 낯선 여인들 때문에 정사낭은 놀라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지만, 바보인 누이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점포 세 곳의 주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았을 때 워낙 놀랐던 터라 이번에는 표정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오 관리인과 진 상공 가문 사람들 모두가 불안한 기색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손을 거둔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이 태의가 갑자기 정교랑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정말 깨어난 거요? 괜찮소?”
이 태의가 정교랑에게 묻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태의께서는 병을 진단할 줄은 모르고, 불치병인지 아닌지만 판별하실 수 있는 거예요?”
진십팔랑의 말에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소 부인이 나무라는 듯 진십팔랑을 흘겨보았다.
“교랑.”
진소 부인이 걱정 가득한 말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말 다 나은 거예요? 왜 앉아 있죠? 그냥 누워 있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진소 부인이 옥대교 저택에 들어섰을 때부터 정교랑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였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헷갈렸다. 원래 이 모습이지 않았나? 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정교랑이 눈을 떴다. 그러자 아무 표정 없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니, 원래 이 모습이 아니었어.
진소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속으로 외쳤다.
저 눈! 눈이 달라졌어!
여인의 두 눈은 크고 생기가 돌았다. 흰자위가 더 많이 보여 사백안처럼 보이던 동공이 지금은 밤하늘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눈빛은 보석같이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방 안의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참았다.
“정말 깨어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사낭과 오 관리인, 진 상공 가문의 여인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대청 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좀 전처럼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딱 한 사람만이 정교랑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대청 안에서는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선생이 머리를 흔들면서 심취한 모습으로 책을 읊기 시작했죠. ‘옛날에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대학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니…….’
선생이 정말 책을 읊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염라대왕이 요괴를 시켜서 선생을 자신의 앞으로 잡아 오라고 명했어요. 그러고는 말했죠. ‘네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 내 친히 너를 돼지로 만들어주마.’ 선생은 알겠다면서 염라대왕에게 청을 하나 올렸어요. ‘돼지가 되라고 하신다면, 돼지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남쪽에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 청을 기이하게 여긴 염라대왕은 선생에게 이유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의 돼지가 북쪽의 돼지보다 세다고…….’”
진(秦)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청 안에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녀는 배를 잡으며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진 부인은 웃지 않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 웃겨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웃겨요.”
진 부인이 토라진 표정을 하고는 한탄했다.
“왜 안 웃기지?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데. 일부러 강주 말씨까지 써가면서 이야기했거늘, 왜 웃지를 않는담?”
진 부인은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 시녀를 보며 말했다.
“저 애 좀 봐요. 저게 정상이지, 낭자는 정상이 아니야.”
정교랑이 진 부인을 보며 빙긋 미소 짓자 진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웃음은 재미없어요. 낭자는 이만 푹 쉬어요. 나는 돌아가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봐야겠네. 내 낭자를 기필코 웃기고 말 거예요.”
진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도 진 부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제지했다.
“나오지 않아도 돼요. 깨어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래 누워 있었으니 몸이 아직 허할 거예요. 그 몸으로 또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몸 관리를 잘해야 해요. 내가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서 다시 올게요. 낭자가 또 쓰러지면, 내가 아무리 낭자를 웃기고 싶어도 못 웃기잖아.”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진 부인을 목례로 배웅했다. 정교랑 뒤에 있던 시녀와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진 부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 부인이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랑 아래에 꿇어 앉아 있던 여종들은 서둘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진 부인이 막 마당을 나서는데 진십삼의 말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진십삼은 말이 제대로 서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려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진 부인을 본 진십삼이 우뚝 멈춰 섰다.
“어머니.”
“조심 좀 해. 뭘 그리 서둘러.”
진 부인이 입을 삐죽이며 호호 웃자 진십삼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갈 때 즈음 오면 어떡하니. 으이구, 내가 다시 같이 들어가 주마.”
진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진십삼은 그런 진 부인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어머니, 이번에는 소자가 졌습니다. 어렵사리 선생의 눈을 피해 몰래 나왔으니, 한 번만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시지요.”
진십삼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와, 정말 너무하네. 지금 네 어미를 내쫓는 거야? 키워 준 것도 다 소용없네.”
진 부인은 슬픔에 젖은 얼굴을 하며 여종들에게 한탄했다. 하지만 여종들은 당황하기는커녕 웃음을 지었다.
“이게 다 부인께서 말솜씨가 좋고 웃긴 이야기를 많이 할 줄 아셔서 그런 거예요. 정 낭자는 가뜩이나 목석처럼 굴며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부인께서 같이 계시면 비교가 되니 더욱 입을 열지 않겠지요. 그럼 공자님께서는 헛걸음하시는 게 아닙니까.”
진 부인이 부채를 흔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정 낭자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니지 않나. 십삼, 가 보아라.”
진 부인이 부채로 진십삼의 어깨를 툭 쳤다. 진십삼은 웃으면서 예를 표하고 서둘러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방에서 나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진십삼이 미소를 머금고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구나. 여느 때와 다름없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다니.
“난 누구죠?”
진십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모른다고요?”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공자의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소생은 진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호(弧), 자는 지락(之樂)입니다. 집안에선 열셋째지요.”
진십삼이 표정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몸을 낮춰 예를 올렸다.
“진 공자시군요.”
진호(秦狐)? 지락, 십삼공자?
“근데 왜 육공자께서는 공자님을 상자(桑子: 뽕나무)라고 부르죠?”
반근이 갑자기 진십삼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교랑이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며 대신 대답했다.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잡초로 화살을 엮어 천지를 향해 쏘면, 사내의 원대한 의지가 천지 사방 어디에나 뻗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거든.”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다 나았군요. 아니, 놀라울 정도로 더 좋아졌어요.”
진십삼은 정교랑의 탁자 위에 올려진 책 한 권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심지어 정사에 오르지도 못한 야사(野史)를 엮은 책이었다.
반근의 말에 따르면, 경성으로 오기 전의 정교랑은 뭐든 금세 잊어버렸기 때문에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성으로 오고 나서도 정교랑의 탁자 위에 놓인 책은 시종일관 이 한 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랑은 그 이름의 유래를 막힘없이 읊었다. 딱 봐도 정교랑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 서찰의 주인이 정말 정교랑의 스승이었을까? 낭자의 바보 병을 고쳐주고, 신선의 비방을 알려준 장본인.
정말 그 서찰 한 통으로 정 낭자를 깨운 걸까? 예전의 나처럼, 분통을 터트려 죽이지 않는 한 고칠 수 없는 병처럼, 부수지 않으면 나아지지 못하는 것처럼?
진십삼이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아씨를 쓰러트린 그 질문!
고작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반근과 시녀에게는 한평생의 고생을 다 한 듯 힘든 시간이었다. 반근과 시녀로서는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들은 일순간 표정이 어두워져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정교랑은 그 질문을 듣고도 미소를 지으며 회랑 아래에 멀쩡히 서 있었다.
“난 강주 정씨의 딸이고, 이름은 방(昉)이에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던 시간에 낳은 아이에게 지어주는 이름으로, 태양과 함께 빛나라는 뜻이었다.
너는 우리 정씨 집안에서 가장 밝은 딸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서 듬직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환영처럼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옥대교 저택을 떠난 뒤, 마음이 심란해진 이 태의는 진소 부인의 초대를 마다했다.
“정 낭자가 나아졌는지, 나아지지 않았는지는 부인께서도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제가 진 노태야께 가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소 부인은 멋쩍어하며 알겠다고 하고 이 태의를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깨어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때마다, 그 낭자는 번번이 거짓말처럼 환자를 고쳐냈어. 이번에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진단했더니, 그 낭자가 무려 스스로 자신을 고쳐내기까지 했다고!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어찌 이리 기묘한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야! 분명 그 낭자의 맥이 끊길 것이라 단언했는데,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싹 나아서 깨어날 수가 있지?
설마 저 낭자가 정말 소문대로 신선을 만난 건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마음의 병을 어떻게 고친 거야?”
이 태의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을 차리자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는 소년이 이 태의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제가 어쩌다 전하의 궁까지 들어왔지요?”
“난들 압니까.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태의께서 무작정 들어와서는 좌선을 하시지 뭡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하자 이 태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은 겁니까?”
진안 군왕은 이 태의를 보면서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이 태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태의께서 고칠 수 없다고 진단을 내리셨으니, 분명 나을 병인 거지요.”
진안 군왕은 자신의 손으로 허벅지를 때려 가며 더 크게 웃었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그 낭자는 어떤 내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소문대로 도교 이 진인의 제자인가? 그 낭자가 다 죽어갈 때 즈음, 이 진인이 직접 와서 명줄을 이어준 건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낭자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다 보니, 이런 별 황당한 생각까지 다 하는군!
“이 대인, 이 대인.”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면서 손을 뻗어 이 태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실 병을 치료한 건 정 낭자 본인이 아니라…….”
이 태의가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납니다.”
이 태의가 놀란 눈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정 낭자를 깨웠다고요.”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득의양양한 눈빛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어떻게요?”
이 태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기만 하면 되죠.”
진안 군왕의 대답을 들은 이 태의가 멈칫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준다고요? 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고요? 이 태의, 정말 의원 맞습니까? 환자가 병환이 뭔지도 몰라요? 정 낭자의 병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거잖습니까. 그럼 그 여인이 왜 그렇게 묻는지는 알고 있어요?”
진안 군왕이 묻자, 이 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은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낭자는 바보로 태어나 병을 앓았어요. 병이 나은 뒤로는, 예전의 기억이 전혀 없었죠.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만큼 말입니다. 자고로 사람은 태어난 지 석 달이 지나면 이름을 얻고, 이름을 얻은 뒤에야 영혼이 모여 사람으로 깨어날 수 있게 됩니다. 낭자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니, 당연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겠죠.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막막하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거고요.”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정교랑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또 무슨 이름이 있다고요?”
“교랑은 외조모가 부르던 아명일 뿐이지, 정씨 가문에서 준 이름이 아닙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자 이 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집안에서는 바보로 태어난 아이를 익사시키려는 데에 혈안이 올랐을 텐데, 정식 이름을 지어 족보에 올렸겠습니까!”
“아니요. 정씨 집안에서는 낭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단호한 진안 군왕의 말에 이 태의는 할 말을 잃었다.
“정 노태야는, 정 낭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기대에 부풀어 미리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나긴 했지만 정 노태야는 매우 기뻐했지요. 아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아이가 한 살이 지난 뒤였으니, 석 달이 되었을 때 지어준 이름은 그대로 있을 수밖에요.”
진안 군왕은 천천히 편전 안을 거닐며 말을 이어갔다.
“주씨 집안에서도 정 낭자를 교랑이라 부르는 걸 보아하니, 정식 이름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부(吏部)로 가서 낭자 부친의 신상을 알아보았지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문서라 그런지,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더군요. 정씨 집안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시켜 정씨 집안의 족보를 알아 오라고 시켰죠. 그랬더니 역시…….”
“역시 뭐요?”
이 태의가 물었다.
“낭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래서요?”
이 태의가 또 물었다.
“그래서, 낭자에게 이름을 알려 줬더니 깨어난 거죠.”
진안 군왕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흘겨보면서 소리쳤다.
“지금 무슨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쉬울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쉬운 걸 어떡합니까?”
진안 군왕도 똑같이 눈을 부릅뜨고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태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밀어붙였다.
어디 그런 병이 있다고! 이름을 알려 줬더니 고쳐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진안 군왕이 하얀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제가 이름을 외쳤더니, 바로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이 손바닥을 펼치면서 말했다.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일이 본디 그리 이상한 것을.”
이 태의만 이 병을 이상하다고 여긴 게 아니었다. 당시 진안 군왕 본인도 정교랑이 눈을 뜬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내가 정방이라고요?
여인은 눈을 떴을 뿐 아니라, 분명 입술을 움직여서 말을 했었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은 그녀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네, 낭자의 이름은 정방이에요.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의 눈빛은 별처럼 총총히 빛났다. 죽기 직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병세를 너무 과장해서 말한 건가? 내가 이 여인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난 건가? 아니면 혹시, 이 여인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건가?
이 생각이 스치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을 리가 있나. 아니 뭐, 사실 못 들어줄 정도까지는 아니지.
문밖에 있던 내시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환한 실내에서는 백발의 노인이 머리를 긁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소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하께서 저리 웃으시는 건 오랜만이네.
내시도 진안 군왕을 따라 조용히 미소지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던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드디어 고요를 되찾았다. 반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힘들어 죽겠어.”
반근이 회랑 아래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고작 하루야. 진소 부인과 진 부인께서는 차도 한잔 안 드셨는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 어서 일어나, 아씨께 차 한잔 우려 드려야지.”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살짝 밀었다.
“안 해. 정말 힘들어 죽겠다니까. 나도 좀 쉬어야겠어. 아씨께는…… 드시지 말라고 해.”
반근이 아예 난간에 몸을 기대며 대꾸했다. 시녀는 그런 반근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말 대담해졌네? 무려 아씨까지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겠다 이거지?”
“몰라, 상관 안 해. 난 다시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
반근이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녀는 반근을 툭 치면서 뭐라 말을 붙이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괜찮아졌잖아.”
시녀가 끝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반근의 옆에 앉았다. 반근이 울며 시녀를 돌아보았다.
“왜 앉아? 방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잖아. 아씨께서 뭐 필요하신 거 없나…….”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챙기시겠지.”
시녀는 울먹거리는 반근의 말을 자르고 반근을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이젠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 줄 사람이 생겼으니, 나도 같이 좀 쉬어야겠어.”
반근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밤하늘의 색이 더욱 짙어지자, 반근은 등불을 하나하나 끄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옆으로 누운 채 반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혹시 목이 마르세요?”
반근이 얼른 가까이 꿇어앉으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내젓고는 일어나 앉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반근은 이 광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번개가 내리친 뒤 폐허가 된 도관에서 정교랑이 깨어났을 때, 그때도 정교랑은 같은 얼굴로 반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기억이 좀 나세요?”
반근이 주춤하다가 먼저 물어보았다.
“조금 생각나.”
“노마님이랑 유모는 기억나세요? 제가 어렸을 때 사탕을 먹여드린 기억은요?”
반근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강주 정씨라는 게 기억나.”
반근이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굳이 기억해야만 생각이 나는 건가?
“강주 정씨는 촉주(蜀州) 출신이다. 위로는 검문(劍門), 아래로는 횡강(橫江)에 이르렀으며, 선조는 사람들이 저속하다 여기는 점괘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점을 칠 때 사악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물어오면, 가새풀과 거북점에 기대 대답하되, 그 이해관계가…….”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하시는 거지.
반근이 눈을 크게 뜨며 끔뻑거리는 것을 본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가서 자.”
반근은 네, 대답하고는 자신이 혹시 좋지 않은 질문을 했나 싶어 불안해했다.
바보로 지냈던 과거에, 좋은 일이 있었을 리가 있나.
“아씨,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반근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희미한 등불 아래 보이는 정교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잊어라, 그게 좋아.
떠오른 기억은 극히 일부였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집안인지, 조상이 누군지 떠올랐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떠오른 것은 오직 무미건조한 이름 두 글자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일 뿐, 희로애락이나 이전에 겪은 고통과 같은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반근, 거울을 가져와.”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침상 옆에서 구리거울을 가져왔다.
거울 속에는 등불에 희미하게 비추어진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낯선 여인의 모습이.
정교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똑같은 강주 정씨에 똑같은 정방인데, 왜 또 다른 것 같지? 이 정씨 가문과 나의 정씨 가문은 무슨 관계인 거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혹시 그 남자 때문인가? 내 마음을 가져간 남자.
눈을 떴지만, 마음은 여전히 없어. 그러니 난 완전하지 못한 거야.
그 남자는 누구일까?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그는 누구지? 왜 하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지?
“아씨,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밤에 거울을 보면 영혼이 비추어진다고 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거울을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씨께서는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정교랑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반근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어서 가서 쉬어.”
정교랑이 반근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반근은 여전히 정교랑이 걱정되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정말로 공자께서 아씨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나신 거예요?”
반근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기묘했던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반근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와 닿지 않았다.
정교랑이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반근과 시녀는 기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반근과 시녀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정교랑의 이름을 알려 주었던 그 소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야밤에 갑작스럽게 와서는 말도 없이 떠나고, 말 한마디로 아씨를 깨우다니. 혹시 신선인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반근이 물었다.
“왜냐면, 이름(名)은 운명에서 왔거든. 운명(命)이란 글자엔 구(口)와 석(夕)이 들어가지. 저녁(夕)은 어둡잖아. 어두우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으니, 사람들은 입(口)으로 자기 이름을 알린 거야.”
이름은 곧 운명이다. 이름을 입으로 불러내야만 운명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그 이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하늘의 뜻일까, 사람의 계산일까?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탁상 위에 놓여있던 서찰을 가져왔다.
넌 누구지?
“넌 누구지?”
정교랑은 서신 위의 글자를 조용히 읊었다.
* * *
작가의 말: 해가 지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상대에게 자신을 알리는 이야기의 출처는 <설문해자(說文解字)>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