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0권
-웃긴-
이 여인은 언제나 그랬다. 왕 공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면, 분명 한 치의 숨김 없이 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이 기쁨을 만끽하련다.
“낭자, 날 따라와요.”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화려한 불꽃이 하늘 곳곳에서 터지고, 알록달록한 꽃등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여름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를 연상케 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물가의 안개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말 아름답네. 역시 달라.”
진십삼이 감탄했다.
“뭐가 다른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십삼은 창밖의 은하수를 내다보며 대답했다.
“예전에 했던 꽃등 놀이도 즐거웠어요. 내가 남들과 같은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십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병이 낫고 보니 또 다르네요. 보통 사람의 기쁨은 이런 거구나 싶어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진십삼은 물가에 자욱한 물안개처럼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진지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정교랑이 진십삼의 다리를 고쳐줄 때였다. 하지만 당시 진십삼은 마음이 불안하여 정교랑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덕승루는 바깥의 등불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실내의 등불을 몇 개 꺼 두었다. 이따금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잠시나마 환하게 비췄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보니, 저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이네. 보통 사람이라면, 환골탈태하여 운명이 크게 바뀐 것에 대해 감개무량하겠지.
“아니요. 당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여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낭자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도 진정한 사내가 아니에요.”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정교랑이 자신을 분통 터트려 죽이려 할 때였다.
“과거를 돌이키며 감상에 젖어 허세를 부리고 있잖아요. 지나갔으면 지나간 거지, 감개무량할 게 뭐 있어요? 감당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는 태도는, 사내대장부답지 않죠.”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네. 맞아요. 낭자 말이 맞습니다. 낭자를 알게 된 후로 시시각각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네요.”
진십삼이 허리를 곧게 펴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 덕분이에요. 내가 할 모든 말들은, 전부 당신이 먼저 하는 말에 달렸으니까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와 대화를 나누는 게 책을 십 년 읽는 것보다 유익하네요.”
“그럼, 속수(束修: 옛날에 선생과 제자가 처음 만날 때, 제자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서 선생께 바치는 육포 묶음)는 어디 있죠?”
안팎으로 드리우는 불빛이 소녀의 진지한 얼굴을 비추었다. 진십삼은 멈칫했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정교랑의 말이 웃겼는지, 아예 창틀에 손을 짚으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고개를 돌린 시녀는 반근과 금가아를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웃겨?”
반근과 금가아도 진십삼을 따라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시녀의 질문을 듣자 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됐다. 안 물어본 거로 치자.”
시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감미로운 피리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오는 화려한 꽃배의 움직임에 꽃등으로 가득한 은하가 넘실거렸다.
“꽃배가 어딜 가는 거지? 왜 다시 돌아가는 거요?”
사람들 틈에 껴 있던 왕십칠은 돌아가는 꽃배를 보며 한탄하듯 외쳤다.
이제야 다리 위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싶어서, 꽃배가 내 쪽으로 오기만을 기다렸거늘. 손만 흔들면, 주 낭자가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왔는데!
물론 이 수많은 사람이 죄다 주 낭자를 불러대는 통에 주 낭자가 쉽사리 날 찾지는 못하겠지만, 내 편인 춘령이 그 계집애가 낭자 옆에서 나를 가리키기만 한다면 낭자는 바로 날 볼 수 있을 거야.
잠시 뒤의 광경을 상상하던 왕십칠은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기대에 찼다.
근데 왜 배가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돌아간 거지?
“타지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꽃배는 어쨌든 덕승루의 것이니 당연히 손님을 모으기 위한 용도 아니겠소. 주 낭자가 뭐하러 굳이 꽃배로 경성 바닥을 한 바퀴 도나? 꽃배로 손님을 좀 모은 다음에, 덕승루 앞으로 돌아가 가무를 선보이지.”
가무? 왕십칠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주 낭자의 가무라니!
“그건 부잣집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거요. 덕승루의 방을 예약한 사람들은 창가 앞에서 주 낭자의 가무를 감상할 수 있지. 댁과 나처럼 돈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즐길 수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해.”
옆 사람의 장광설을 듣던 왕십칠이 악 소리를 내질렀다.
“예약한 방에서 볼 수 있었단 말이오?”
왕십칠이 그 사람의 팔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당연하잖소. 무려 예약인데.”
옆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왕십칠은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일찍 좀 말해주지 그랬소! 이럴 줄 알았으면 바보같이 뛰어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왕십칠은 주위 사람을 밀치면서 서둘러 다리를 내려갔다. 그는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거꾸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연신 욕을 해댔다.
“퉤. 누가 들으면 예약해 둔 방이 있는 줄 알겠네.”
다리 위에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침을 뱉으며 욕했다.
주 낭자가 탄 꽃배가 덕승루 앞에 멈춰 섰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잦아들고, 곧이어 잔잔한 수면 위에 옥구슬을 떨구듯,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파 연주곡이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주위에서 열띤 환호를 보내왔다.
미소를 머금고 뱃머리에 앉아 있던 춘령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덕승루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덕승루의 이 층, 삼 층 예약 방들의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창가에 장식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들과 창문 너머로 방마다 가득한 사람들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시선 아래서, 춘령은 돌연 하던 동작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창문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춘령이 쳐다보고 있던 곳에는, 다른 이들처럼 주 낭자의 가무를 즐기고 있는 사람 몇 명이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에!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눈을 힘주어 껌뻑였다.
등불과 불꽃 때문에 방 안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지만, 춘령은 틀림없이 그 여인을 봤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잖아! 저 사람이 어떻게 예약 방에 들어갔지?
춘령은 왕십칠에게 방을 예약했다고 했지만 실은 거짓이었다.
일개 몸종이 어떻게 방을 예약할 수 있겠어? 아무리 내가 아씨의 몸종이라지만, 그건 아씨께서 직접 나서 주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씨께 가서 방을 달라고 말씀드릴 순 없잖아?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아씨의 의심을 사는 짓을 했다가는 내 앞길이 끝장나 버릴 거야. 복수도 당연히 물 건너가겠지.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방을 예약한 거야? 왕십칠이 그렇게 대단해?
춘령은 창가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춘령.”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춘령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춘령에게 비파를 건네고 있었다. 넋이 나간 춘령 대신 다른 시녀가 비파를 받아 준 덕에 민망한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춘령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처음이라 긴장될 거야.”
주 낭자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춘령을 다독였다. 춘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북소리가 울리자, 좀 전과는 다르게 꽃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배 위의 모든 빛이 중앙으로 모일 수 있도록 구리거울을 비스듬하게 세워 만든 무대는 대낮보다도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그새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 낭자가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매와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살랑이자 주 낭자의 모습은 마치 월궁의 선녀 같았다.
“춤을 잘 추네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단한 노력이 있었겠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의 춤은 어떻습니까?”
춤?
“아씨께서 춤을 추실 줄 아시나?”
반근이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 공자님이 갑자기 춤에 관해서 물으신다고?
“문외한은 구경만 하지만, 전문가는 기술을 본다잖아. 단번에 주 낭자가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하시는 걸 보니, 아씨께선 전문가가 맞는 것 같은데?”
시녀가 조용히 대답하고는 반근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근데 아씨께서 춤을 출 줄 아신다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하긴 그렇지. 반근은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춤이라……. 정교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며 빠르게 사라졌다.
“모르겠어요.”
정교랑이 눈을 뜨고 대답했다.
춤을 출 줄 모른다는 건가? 혹은 자신의 춤이 뛰어난지 모르겠다는 건가?
정교랑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진십삼은 그녀가 일순간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챘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요.”
진십삼이 강가에서 시선을 떼고 다소 불안한 듯 말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에요.”
“그럼, 내가 도울 수 있는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때,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진십삼의 말을 삼켰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불꽃놀이를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불꽃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춘령은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뎌 좀 전의 그 창문을 노려보았다. 창가에 있던 소년의 준수한 얼굴이 불꽃에 반짝 빛나다가, 사그라지는 불꽃을 따라 희미해졌다.
하지만 춘령은 그 소년이 어떤 눈빛과 웃음으로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건 왕십칠이 아니잖아! 그럼 누구지? 저 여자를 보며 왜 저토록 애틋하게 웃는 거야?
저 여자, 왕십칠한테 버림받은 창피함을 느끼긴커녕, 다른 사내가 와서 비위 맞추는 걸 받아주고 있어. 심지어 딱 봐도 왕십칠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소년 공자가!
춘령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주 낭자를 따른 이후 처음으로 후회란 것을 느꼈다. 그 후회란, 주 낭자와 함께 꽃배를 타고 있느라 지금 당장 아무나 붙잡고 저 공자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후회였다.
내가 저 바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었어!
등불이 또 한 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던 차에, 창가에 서 있던 소년이 춘령 쪽을 가리켰다. 춘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춘령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거렸다.
날 발견한 건가? 날, 날 알아본 거야?
“저기 좀 봐요.”
진십삼이 꽃배 위의 주 낭자를 가리켰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주 낭자의 모습은 흩날리는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의 인연을 말하다 보니 생각이 난 건데, 낭자는 저 여인의 은인입니다.”
정교랑은 진십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경쾌한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주 낭자는 힘든 기색도 없이 계속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며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저 사람이 바로 주 낭자예요.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예전에 유 교리가 한 관원의 집안을 모함한 적이 있어. 그 관리는 남주로 귀양을 가게 됐는데, 가던 길에 숨을 거뒀지. 그 관리의 아내는 겁…… 큼큼, 목숨을 끊었고, 여덟 살 먹은 어린 딸아이는 교방사로 팔려갔어. 그런데 관리의 부인이 혀를 깨물고 자결하기 전, 억울함을 호소한 혈서를 아이의 품에 증거로 남겨줬다더구나. 유 교리가 방심한 탓에 화근을 남긴 게야. 그 아이는 그동안 복수만을 다짐하며 칼을 갈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
말하는 속도는 느렸지만, 정교랑은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이 많은 말들을 단숨에 뱉어냈다. 정교랑이 말을 마치자, 진십삼을 포함한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그 사람이 바로 주 낭자예요.”
정신을 차린 진십삼이 말하다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근데, 겁큼큼은 무슨 뜻이에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녀는 차를 마시며 입을 축이려던 찰나, 진십삼의 물음을 듣고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유 교리가 숨겨 두었던 재산이 적발된 직후, 이춘당의 계약서를 들고 온 주 노야가 정교랑에게 흥미진진하게 말해 주었던 뒷이야기를 정교랑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주 노야의 기침 소리까지도.
시녀는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십삼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했다.
“몰라요. 그건 외숙한테 물어보지 못했네요.”
“그건…….”
진십삼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겁큼큼?
시녀는 두 사람이 겁탈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는 듯 더욱 거세게 기침을 했다.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진십삼은 실소를 터트리며 재빨리 손으로 웃음을 가렸다.
“그게 뭔데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향해 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다소 멍해 보이긴 했지만, 이런 점이 바로 그녀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정교랑이 말없이 진십삼을 주시하자, 진십삼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나른해졌다. 동시에 애써 숨기던 웃음을 더는 못 참겠는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정교랑은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나 좀 그만 봐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진십삼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웃음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진십삼이 다시 몸을 돌리자, 정교랑은 그제야 진십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분명히 악랄하고 매정한 사람인데, 어쩜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거지?
웃음을 멈추지 못한 진십삼은 아예 창가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하며 웃었다.
오늘 밤은 벌써 두 번씩이나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웃고 있구나. 참으로 통쾌하도다!
“진 공자님, 그만 좀 웃으세요. 이게 다 공자님 때문이잖아요!”
보다 못한 시녀가 나서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갈래요.”
진십삼이 서둘러 웃음을 삼키고 바른 자세로 고쳐 섰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만 웃을게요. 겁큼큼은 다른 게 아니라, 단어가 워낙 흉하다 보니 주 노야가 마른기침으로 숨기셨나 봅니다. 낭자한테 예의가 아닐까 봐서요.”
설명 안 하느니 못한 말을, 왜 또 설명하고 앉아 있대 정말!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진십삼을 쏘아보았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흘끔 쳐다보고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짜 화났어요? 낭자, 내가 잘못했습니다.”
진십삼이 서둘러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면서 사죄했다.
“화날 게 뭐 있나요. 난 단지 볼 걸 다 봤기에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춰 서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 터지는 불꽃들과 생동감 넘치는 북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한껏 즐거워 보였다.
왕십칠은 결국 주 낭자의 가무를 보지 못했다. 그가 간신히 덕승루까지 비집고 들어왔을 무렵 주 낭자는 이미 배에서 내려 덕승루 안에 있는 귀족들을 접대하러 간 뒤였다. 덕승루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나 시끌벅적했지만, 화괴를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없었다.
“도련님, 예약해둔 방이 없다는데요? 누구한테 시키셨습니까?”
왕씨 가문의 시종이 왕십칠 가까이에 다가와 말했다.
“여기 있는 아이한테 시켰어.”
왕십칠은 지친 표정으로 말하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없으면 없는 거지. 어차피 못 보니까 그냥 가자.”
풀이 죽은 왕십칠이 천천히 덕승루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뒤에 있던 시종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왕십칠은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왕십칠이 버럭 화를 냈다.
“도련님, 정 낭자는요?”
시종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묻자, 왕십칠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정신을 차렸다.
다른 시종들도 아차 싶은 마음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다급하게 정교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여인 하나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낭자라고요? 여기 오는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어떻게 이름을 다 기억하겠습니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점원이 시종에게 말했다.
“예쁘장하게 생겼고, 말은 별로 안 하오.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시녀 둘에 사환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데.”
시종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빠르게 정교랑에 대해 묘사했다. 왕십칠이 돈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자, 점원 중 하나가 그제야 무언가 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공자님이 왕십칠 공자십니까?”
왕십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낭자가 공자님께 자신은 먼저 간다고 전해 달라 했어요.”
대답을 마친 점원은 헤헤 웃고 옷소매를 쥐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벌이가 쏠쏠하네. 말 한마디 전해 주고 돈주머니 두 개나 얻다니.”
갔다고? 내팽개쳐지니까 화가 나서 갔을 수도 있어. 누구한테 납치된 게 아니라, 제 발로 돌아간 거면 괜찮겠지.
잠깐, 명절 때는 경성에 인신매매범이 많아서, 부유한 집안의 아녀자들을 잡아간다던데. 그 여인은 바보니까 더욱 잡혀가기 쉽지 않을까?
“정말 말을 안 듣네.”
왕십칠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정교랑이 괘씸해서 화가 났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어디 덧나나? 나중에 꽃등 놀이 못 한 걸 내 탓이라고 하기만 해 봐!”
왕십칠의 말을 들은 점원이 웃었다.
“공자님, 듣기로는 천가로 꽃등 놀이를 즐기러 간다고 하던데요? 거긴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천가? 왕십칠 일행은 깜짝 놀랐다.
어가에서 꽃등 놀이를 한다고? 그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천가로 갔다고?”
왕십칠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럼요. 소인이 낭자와 함께 있던 공자님께 들은 말입니다.”
공자님? 왕십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행하는 공자가 있었다고? 혼자가 아니었어?”
왕십칠의 물음에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던데요? 낭자는 공자님 한 분과 같이 나가셨어요.”
공자님 한 분과 같이 나가셨다? 입이 떡 벌어진 왕십칠 일행은 귀를 의심했다.
“이 정조도 지킬 줄 모르는 년이!”
왕십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감히 나를 두고 다른 남자랑 놀아났다고?
“어서 쫓아가거라! 이 방탕하기 짝이 없는 연놈들의 다리를 분질러버릴 테다!”
밤이 깊어지자, 선덕문에 있던 황제는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병약한 탓에 대신들의 걱정 어린 청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는 대황자에게 백성들과 마저 시간을 보내라 말했지만, 태후는 밤을 새우기엔 대황자가 아직 어린 나이라고 완곡하게 말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선덕문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이미 두봉을 걸친 이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외쳤다.
“아바마마, 소자도 이곳을 지킬 수 있습니다.”
대황자가 질 수 없다는 듯이 황제에게 말했다. 이들의 모습을 본 황제와 태후는 웃음을 터트렸다.
“위낭이 여기 남아 있거라. 너희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짐과 함께 돌아가자꾸나.”
황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형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이황자가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하루도 빠짐없이 위낭 옆에 딱 붙어 있으면서, 잠깐 헤어지는 게 그리도 아쉽더냐.”
태후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이황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어서 이리 오렴. 오늘 하루 종일 위낭 옆에 계속 붙어 있었잖니. 위낭에게도 조용히 꽃등 놀이를 할 시간을 주려무나.”
“인제 그만 황후마마께 가시지요. 마마께서는 바깥으로 나오실 수 없으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드리세요.”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번쩍 들어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황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시가 서둘러 이황자를 데려갔다.
황제는 신하들의 절을 받은 뒤 환궁했다. 황제가 떠나자 곁을 지키고 있던 대신들도 물러나서 북적거리던 선덕문이 고요해졌다. 이와 반대로, 선덕문 아래의 어가와 저잣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이 반짝이나 싶더니, 입꼬리에 걸려 있던 웃음이 서서히 얼굴 전체로 번졌다.
드디어 왔네.
환한 불꽃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위병들을 지나치며 천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길 보세요!”
시종 한 명이 외쳤다.
뛰다시피 덕승루에서 다리 위까지 갔다가, 다시 다리 위에서 덕승루까지, 그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 천가까지 뛰어온 왕십칠은 오늘 오간 거리가 자신이 평생 걸은 거리와 맞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시종의 말을 들은 왕십칠은 힘겹게 허리를 세우고 시종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았다.
왕십칠 일행은 어가 입구까지 쫓아왔다. 이쪽은 확실히 저잣거리보다 사람이 적어서, 앞쪽에 있는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던 한 소년 공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좀 더 밝은 구간을 지나고 있었던지라, 밝은 불빛에 정교랑의 얼굴이 환하게 비쳤다.
“저년이!”
왕십칠이 외치자마자, 정교랑 뒤에 있던 소년이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의 앞에 있던 등산을 올려다보았다.
아, 저 사람이었어? 왕십칠은 진십삼을 보더니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한집 식구잖아.”
시종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아시는 분입니까?”
“알고말고. 저 사람, 주씨 가문의 공자야.”
왕십칠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쩐지. 내가 정혼자를 도둑맞을 정도로 운이 나쁜 편은 아니긴 하지.
시종들도 왕십칠을 따라 긴장을 풀었다.
도둑맞은 것도 아니고, 납치당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가족을 만난 거구나.
“그런데 도련님, 주씨 가문은 품계가 낮은 무장 가문인데, 어떻게 천가에 자리를 얻었을까요?”
연륜이 있어 보이는 시종이 무언가 생각난 듯 왕십칠에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아무리 타지 사람이긴 해도, 천가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지. 주씨 가문이 천가에서 꽃등 놀이를 즐길 수 있다고? 정씨 가문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평범한 무장 가문일까?
왕십칠은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사방에서 몰려온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인들의 나이대는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정교랑을 살갑게 반기는 모습들이었다.
“저 바보가 어찌 저렇게 사람을 많이 알지?”
왕십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위병 한 명이 그를 향해 고함치며 앞을 막아섰다.
황실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중추절 어가의 수비는 무장한 군부 병사들이 맡았다. 위병의 무시무시한 고함에서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감히 이곳에서 말썽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현장에서 즉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화들짝 놀란 왕십칠은 자세를 낮추어 사람을 찾으러 왔다며 위병에게 공손히 주씨 가문을 언급했다.
“가서 물어볼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위병들이 사나운 기세로 왕십칠 일행 앞을 막아서면서 뒤로 가라고 손짓했다.
“좀 더 뒤로 물러나시오.”
왕십칠과 시종들은 허겁지겁 몇 걸음 물러난 뒤에 어가에 서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몰려든 사람들과 여전히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언니, 언니. 난 언니가 안 오는 줄 알았잖아요.”
진단랑은 정교랑의 옷소매를 끌어안은 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서 놀았어요? 누구와의 약속이길래?”
진십팔랑이 웃음기 가득하게 말하면서 일부러 진십삼을 향해 눈짓했지만, 진십삼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정혼자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혼자! 진십팔랑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다른 여인들도 깜짝 놀랐다.
이거 봐. 이 여인은 항상 이렇다니까. 숨기는 것 없이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지.
정혼자라……. 이 단어가 이렇게 아름답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진십삼은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십삼을 살짝 밀치면서 무리에 끼어들었다.
“정 낭자.”
진(秦) 부인이 미소지으면서 손에 있던 부채를 흔들었다.
“드디어 왔네요. 어서 이리 와요. 우리 둘이 이야기 좀 해요.”
“안 돼요, 안 돼요! 정 언니는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면서 외쳤다.
“아니면 진 백모님도 저희 쪽으로 오심이 어떠신지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다른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이 꼬마 아가씨들이 내 사람을 뺏겠다 이거지?”
진 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부채로 진십팔랑을 가리키면서 발걸음을 뗐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내가 너희와 다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야.”
진 부인이 정말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자, 진십팔랑과 진단랑은 꺅 소리를 지르면서 정교랑을 끌고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여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진(陳)씨 가문의 천막으로 향하는 것을 본 주 부인은 손을 툭툭 털었다.
난 그냥 꽃등 놀이나 구경해야겠다. 내 조카는 남들이 더 잘 돌봐 주고 있을 테니.
“주 대인, 어떤 사람이 대인 가문의 사람이라며 어가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합니다.”
아들들과 모여 앉아 잔뜩 흥이 오른 채로 술을 마시고 있던 주 노야는 위병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가문의 사람이라고?”
주 노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다 여기 있는데? 여기 없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일 터.
“왕가 성을 가진 자입니다.”
위병이 주 노야의 표정을 읽고 말을 덧붙였다.
왕씨라고? 그제야 주 노야는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모르는 자일세. 썩 꺼지라고 하게나.”
위병은 바로 알겠다고 답하고 천막을 나갔다.
“여기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
주 노야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에 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웃는 얼굴로 아들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자, 자. 어서 술을 따라 보거라.”
왕십칠 일행은 어가를 지키는 위병들에게 멀리멀리 내쫓긴 뒤에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허튼수작을 부리다가는, 네놈들을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
위병들이 삿대질을 하며 매섭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왕십칠은 분통이 터져 길길이 날뛰려 했지만, 주위의 시종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도련님, 여기는 무려 경성입니다. 선덕문 앞에서 난리를 피웠다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요.”
시종들이 왕십칠을 붙잡고 달랬다. 왕십칠은 분이 가시지 않은 듯 바닥을 발로 세게 구르고 외쳤다.
“주씨 놈들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가자!”
왕십칠이 소매를 휙 털고 몸을 돌리자, 시종들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시종 두 명이 몇 걸음 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어가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가만 보면, 주씨 가문에서 저 정씨 바보를 아예 내팽개치고 사는 것 같진 않아. 저 바보도 사람들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고.”
어렸을 때부터 바보가 됐다는 것 외에, 우리가 저 바보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나 보네.
천가에 위치한 진(陳)씨 가문의 천막 안에는 진 노태야와 진소도 앉아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꽃등 놀이를 만끽하는 여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용하게 여유를 즐기는 편이었다.
정교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설 때는 진 부자가 바둑판을 앞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천막 안은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간을 두 개로 갈라놓아서, 한쪽에서 여인들이 이야기를 하면 그 소리가 반대편으로 새어 들어갔다.
“상청노(常靑奴)가 ‘우아한 말 한 필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과의(果毅)는 아주 기뻐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틀린 대답을 했던 상청노가 하루 사이에 옳은 답을 해냈으니까. 과의가 신기해하며 누가 가르침을 준 것이냐고 물었지. 상청노는 전날 밤 형수가 해 준 당부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형수가 시킨 대로 형님이 알려줬다고 대답했어. 그러자 과의가 형님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상청노는 집에 있다고 답했지. 과의가 다시 형님은 집에서 뭐 하냐고 물었더니, 상청노가 ‘집에서 아들 낳느라 아직 침상에 누워 있어요’라고 대꾸했다지 뭐야.”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진 노태야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휘장 너머의 여인들도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의 팔을 끌어안은 진단랑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고 있었고, 진십팔랑 외 다른 여인들도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워온 농담이래?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어른스러운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네!”
진소 부인이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진 부인을 가리키면서 웃었다.
밖에 있던 시녀와 몸종들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농담을 전해 듣고는 밖에 나가서 들은 농담을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그러자 천막 밖에서도 아랫것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배를 잡고 쓰러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교랑은 아무런 미동 없이 멀뚱히 앉아 있었다.
“정 낭자, 안 웃겨요?”
진 부인이 입꼬리를 올린 채 정교랑에게 물었다.
“네, 안 웃겨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진 부인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웃긴 이야기도 안 웃길 수가 있다고? 그럼 낭자가 한 번 웃긴 이야기 좀 해봐요.”
“전 할 줄 몰라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정 낭자, 낭자는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좀 그래. 어린 나이인데도 잘 안 웃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진소 부인이 마른기침하고는 진 부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리 조금 친해졌다지만, 말을 너무 여과 없이 하는 거 아니야?”
정 낭자는 매일같이 너를 싸고도는 평범한 여인들과는 달라. 네가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그걸 영광인 줄 아는 여인들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다 나중에 정 낭자가 네 체면이고 뭐고 봐주지 않는 날이 오게 되면, 은혜는커녕 원수를 지게 된다고.
“악의 담긴 말이 아니니까 정 낭자가 기분 나빠하진 않을 거예요.”
진소 부인이 노파심에 한 말임을 알고, 진 부인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녀가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낭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해 줄게요. 이번엔 분명히 웃길걸요?”
“어머니, 그만하세요.”
옆에서 참다 못한 진십삼이 진 부인을 말렸다.
여인들의 시선이 진십삼에게로 쏠렸다. 두 집안의 자녀들은 모두 친한 사이인지라, 진십삼도 자연스럽게 천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일부러 더 웃어주는 걸 수도 있지요. 누구는 일부러 웃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요.”
말하던 진십삼은 정교랑이 덕승루에서 말실수를 한 게 생각나서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뒤쪽에 앉아 있던 시녀는 진십삼이 왜 웃음을 터트렸는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시녀도 참지 못하고 쿡 하고 웃었다가 서둘러 웃음기를 거두고 진십삼을 노려보았다.
천막 안의 여인들은 이 두 사람이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말인가 봐요. 십삼공자는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안 했으면서 자기 자신을 웃겼네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말하자 천막 안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진 부인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십삼에게 머물렀다가 정교랑에게로 갔다. 젊은 남녀를 번갈아 보던 진 부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정 낭자, 잠시 이리 와 앉으시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휘장 반대쪽에서 진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여인들끼리 한창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꼭 와서 흥을 깨셔야겠습니까.”
진 부인이 진 노태야를 가볍게 탓했다
“정 낭자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니, 여인들끼리 나누는 농담에는 관심이 없을 게요. 차라리 나와 바둑 한판을 두는 게 더 재미있겠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진십삼은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가 봐요. 좀 이따 내가 낭자를 데려다줄게요.”
진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그런 게 어딨어. 우리 집에서도 정 낭자를 데려다줄 마차를 준비해 둔걸?”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을 향해 말했다.
“언니만 보은하라는 법 있어요? 우리한테도 은혜에 보답할 기회 좀 줘요.”
진 부인이 조르다시피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서 자신이 데려온 시녀에게 지시했다.
“넌 여기 남아 정 낭자의 시중을 들거라.”
시녀는 웃으며 공손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배웅했다.
진십삼이 가장 먼저 천막 밖으로 나왔다.
“또 뭐 하려고 이래? 괜히 헛수고야.”
진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해 보지도 않고 헛수고인 줄 어떻게 알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웃지 않은 사람은 정 낭자가 처음이라 그래요. 두고 봐요, 내가 정 낭자를 기필코 웃기고 말겠어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소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진 부인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치고는 자리를 떴다.
두 집안의 딸들은 천막을 나온 김에 천가를 구경하러 흩어졌다. 천막 안은 그제야 고요를 되찾았다.
정교랑이 휘장 반대편으로 들어올 때도, 진 노태야와 진소는 여전히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였다.
“바둑 구경 좀 하다 가시오. 조용하니 좋잖소. 적어도 웃긴 이야기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진 노태야가 웃음 지으며 정교랑에게 말했다.
“각자의 즐거움이 있는 거지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원한을 품은 적이 없어 보입니다.”
“원한을 품을 만한 게 없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항상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렸기도 하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쩜 저리도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냐는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여인의 말이 맞긴 하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남에게 원한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저 말은 지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처음에는 다들 정 낭자가 더는 우리 집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정 낭자는 나에게 도움을 거절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았던가. 저 여인은 위로를 필요로 하는 가엾은 패자가 아니라, 경이로운 승리자인걸.
수많은 생각이 찰나에 스치는 바람에 진소의 손이 살짝 떨리면서, 바둑판에 내려놓던 흰 돌의 위치가 조금 틀어졌다.
정교랑의 대답에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잠깐 말없이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정교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둑판 위의 상황은 이미 교착 상태에 이르렀기에, 진 부자는 한 수씩 둘 때마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검은 돌을 손에 쥔 진 노태야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내젓고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바둑 두는 법은 생각이 났소? 낭자가 보기에 내가 아직 승산이 있소이까?”
바둑판 위를 잠시 쳐다보던 정교랑은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자리에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이겼어요.”
정교랑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둔 신의 한 수는 지금까지의 판국을 뒤엎었다. 그녀의 한 수로 승자는 패자가 되고, 패자는 승자가 되었다.
진소가 바둑판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 다음번에 수를 둘 때는 미리 귀띔 좀 해주면 안 되겠소?”
진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덧붙였다.
“내가 반나절 동안 노력했던 게 싹 다 무용지물이 되었잖습니까.”
“그건, 제 탓이 아니죠.”
정교랑은 진소의 말뜻을 알아챘는지 똑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만하면 됐다. 진 거면 진 거지. 자기 자신을 탓하지 못할망정, 남 탓을 하면 쓰나.”
진 노태야가 시녀들에게 손짓하여 차를 올리라고 했다.
“자자, 차나 마십시다.”
시녀들이 바둑판을 치우고 향긋한 차를 우려왔다.
“자, 한번 마셔 보시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차를 권했다. 정교랑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차를 한입 머금더니 멈칫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어차(御茶)라오.”
진 노태야가 말했다.
“폐하요? 황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황궁에 새로 들어온 향차지요. 내가 남겨둔 게 좀 있으니, 마음에 든다면 좀 가져가시구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차를 자주 마시지 않거든요.”
이어 정교랑은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머금은 채 정교랑을 눈으로 배웅했다. 몸을 일으켜 천막을 나가려는 정교랑을 진소가 불러 세웠다.
“정 낭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소를 쳐다보았다.
“선행을 많이 베풀고, 정도(正道)에 어긋난 일을 하지 마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선행이요? 정도요?”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대인께서 조정에 계신 이유가 그 때문인지요? 어쩐지 대인의 운이 썩 좋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낭자가 정도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낭자가 그 반대의 편을 들었다면, 결과가 어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진 대인, 자신이 뭘 하는지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이게 바로 진 대인께서 아셔야 할 정도입니다.”
정교랑의 말을 들은 진소는 정교랑이 천막을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 여인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고?
그건 고씨 패거리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아무나 걸리는 대로 물어뜯고, 일부러 모함에 빠트리고,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조정의 사람들을 해치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짓거리들.
저 여인이 감히 그런 짓들을 정도라고 말하다니!
“어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 낭자는 항상 저렇지 않았느냐.”
힘을 빌려 무뢰배를 활로 쏴 죽이고, 위협을 받으면 조정의 관리를 해치우고. 남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몸 사리기에 바쁠 일들을 그녀는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녀의 방법은 방어도 아니었고, 인내도 아니었다. 정교랑이 택한 방법은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진격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정교랑은 진소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이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녀는 상대방이 어떤 이유로 도움을 거절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용감히 나아갔다.
정 낭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행동한다. 나 또한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어린 낭자가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지…….”
진소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병을 치료할 줄 알고, 살인도 할 줄 안다는 것 외에, 진소는 정교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전하.”
선덕문 위로 다가간 내시가 커다란 모피 두봉을 건넸다.
“두툼한 두봉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진안 군왕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조용히 선덕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다. 이제 곧 끝나.”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덕문 아래에서 내시 몇 명이 긴 채찍을 들고 나왔다. 곧이어 맑고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채찍 소리를 듣자 선덕문을 향해 예를 올리고 어가 밖으로 물러났다.
밝고 화려한 등롱들도 하나둘씩 꺼졌다. 밤은 마치 하늘에 도사리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처럼, 거리의 불빛을 한 입 한 입 집어삼켰다. 꽃등 놀이로 환했던 경성은 점차 짙은 어둠에 덮였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불렀다.
선덕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오직 거리를 청소하는 잡부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자.”
진안 군왕이 두봉을 여미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문에서 쾅 소리가 나자 연못가에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던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 열어!”
밖에서 왕십칠의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도련님들도 안 계시고 불안해 죽겠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에 서서 근심했다. 도련님들도 떠나고, 짜증 나게 굴던 주육낭까지 떠나 아씨는 또다시 혼자가 되셨다.
“아씨, 우리 차라리 다시 주씨 저택으로 들어가 살아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대청 안을 보며 말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은 손에 든 서책을 내려놓았다.
“신선거에 가서, 오 관리인한테 뭐 필요한 거 없나 보고 와.”
또 그 심부름이네. 시녀는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들이 떠난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네,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대문에서는 아직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교랑이 금가아를 부르자 금가아가 얼른 대답하고 대문을 열었다. 왕십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넌 문 안 열고 뭐하는 거야!”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때였다면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어제 천가에서 여인이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지라 왕십칠의 시종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씨, 저희 도련님께서 아씨를 걱정하셨어요. 어젯밤에 혼자 가 버리셔서…….”
시종의 말이 왕십칠을 자극했다. 어젯밤 받은 수모가 떠오르자 대문을 왜 냉큼 열지 않았는지 따질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혼자 어디 갔던 거야?”
“왕 공자님, 혼자 먼저 간 게 누군데 이러세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졌다.
“난 일이 있었고.”
왕십칠이 언짢은 투로 대꾸했다.
“화괴를 보러 가는 것도 일인가 보죠?”
시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왕십칠한테는 미인을 보러 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뭐야?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내가 일이라고 하면 일인 거지, 네가 어쩔 건데?”
그러자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어서 네 일이나 하러 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왕십칠을 째려본 다음 걸음을 옮겼다.
“어젠 바빠 보여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서, 먼저 나왔고요.”
정교랑이 왕십칠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덕승루 점원한테 말도 하고 나왔어요. 돌아왔을 때 내가 안 보이면, 걱정하고 물어볼까 봐요.”
어쨌든 말은 잘 듣는단 말이지. 윽박을 질러도 울지도 않고,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도 않아. 차분히 말하는 것만 봐도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하거나 울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던 여인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이런 느낌도…… 나쁘진 않군.
“알면 됐어!”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고 회랑 아래에 앉았다.
“내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거기서 기다렸어야지.”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다음부턴 명심해. 혼자 도망쳤다간, 다신 너 안 볼 줄 알아.”
왕십칠의 경고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외숙부는 또 왜 그래? 어제 거기까지 찾아갔더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왕십칠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해도 너무하잖아!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앞으로 그 집이랑 왕래하지 마!”
옆에 있던 나이 든 시종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씨, 외숙부님 댁에서 천가에 자리를 잡으셨던데요? 거긴 조정의 고위급 관료만 갈 수 있는 곳 아닙니까.”
시종이 웃으며 떠보듯 말을 걸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천가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 아니었나?”
정교랑이 말했다.
하긴 물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그 집안 사정을 알 리가 있나. 아니, 근데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어젯밤엔 왜 그리 여러 사람한테 둘러싸여 있던 거야?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경성 사람들과는 꽤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시종이 또 떠보듯 물었다.
“그 몇 가문만 아는 거야. 가깝다고 할 수도 없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종은 무언가를 더 물으려 했지만, 왕십칠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가깝든 말든 알 게 뭐야. 우리 집은 남쪽에서 사업하니까, 외숙이란 자는 필요 없어. 그 사람한테 수모당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외숙네 집안이랑 멀리해.”
왕십칠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얼굴만 그림처럼 예쁜 줄 알았더니, 정말 그림인가 화도 안 내네.
“관두자. 좌우지간 분위기 깨는 덴 뭐 있어.”
왕십칠이 일어섰다.
“나 간다.”
“왕 공자님.”
정교랑이 왕십칠을 불러세웠다.
“우리, 언제 돌아가요?”
그 말에 반근과 금가아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돌아가?
어쩐지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던 왕십칠의 시종만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낭자가 경성에 별게 없나 보군. 여기서 잘 지냈다면 따라가고 싶지 않을 텐데. 어젯밤에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주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그런 거겠지. 천가에 천막을 치고 꽃등을 구경할 정도면, 주씨 가문도 듣던 바와 달리 대단한 모양이야. 좀 더 알아봤다가 돌아가면 노야께 말씀드려야겠어.
“곧 돌아가야죠. 정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안 왔습니까?”
시종이 나서서 대답하며 물어보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 가문에서는 별 신경을 안 쓰네.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그럼 우리랑 같이 가면 되겠다.”
왕십칠은 또 불러세울까 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때가 되면 부를게.”
왕십칠은 정교랑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대문을 나섰다.
“공자님.”
시종이 얼른 따라와 왕십칠 앞을 막아섰다.
“때가 되길 기다릴 게 아니라, 바로 출발하시죠.”
나이 든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고 아범, 급할 게 뭐 있어. 난 아직…….”
“공자님, 아무튼 이제 가셔야 해요. 안 그럼 노야와 부인께서 직접 오실 겁니다.”
고 아범이라고 불린 시종은 웃으며 왕십칠을 달랬다.
“그럼 더 좋겠네. 아버지랑 어머니도 경성 구경 좀 하시고.”
왕십칠의 말에 고 아범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공자님, 뭐라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시간을 많이 끌었어요. 구경도 실컷 하고 놀기도 실컷 노셨잖습니까.”
고 아범이 고개를 돌려 다른 시종에게 명했다.
“말과 마차를 준비해라.”
시종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하고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왕십칠을 에워싸고 압송하다시피 객잔으로 데려갔다.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왕십칠은 알았다고 하고, 시종들을 시켜 돌아갈 준비를 하게 한 후 객잔에 홀로 남았다.
“왕 공자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춘령!”
왕십칠은 안으로 들어오는 어린 몸종을 보고 반색을 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왕 공자님, 어젯밤엔 왜 안 오셨어요? 주 낭자가 묻기까지 한걸요.”
춘령이 말했다.
“갔었어. 예약된 방이 없다고 하던데, 너 혹시…….”
“그럴 리가요. 분명 잡아 놨어요. 제 이름을 대면 들어가게 해 주기로 했는데…….”
춘령 역시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인간들이 제 말을 무시한 거예요? 당장 가서 주 낭자한테 일러야겠어요.”
춘령은 씩씩거리며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랬구나. 의혹이 풀린 왕십칠은 서둘러 춘령을 불러 세웠다.
“그럼 내가 말을 제대로 못 전한 것 같구나. 괜찮아. 어차피 별일 아니야.”
왕십칠은 싱글벙글 웃으며 춘령을 쳐다봤다.
“주 낭자가 정말 나에 대해 물었어?”
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자님께서 정혼자랑 꽃등을 구경하러 오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정혼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낭자인지 보고 싶다고도 하신걸요.”
그 말에 왕십칠이 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춘령은 멈칫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교랑이 예쁜 걸 주 낭자가 어떻게 알았지?”
왕십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교랑? 이름이 교랑이었구나, 정교랑.
춘령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읊조려 봤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의외의 수확이네. 정교랑이라…….
“이름도 교랑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낭자인가 봐요.”
춘령이 웃으며 말했다.
“말도 마. 걔만 아니었으면, 어제 주 낭자를 보는 건데.”
왕십칠이 손을 내저었다.
“왜요? 덕승루에 가는 걸 싫어하세요?”
춘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다른 놈이랑 도망쳤지 뭐야. 걔 찾으러 다니느라 저녁내 시간만 낭비했다.”
다른 놈이랑 도망을 쳤다고…….
“도망을요? 납치된 거 아니에요?”
춘령은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늉을 했다.
“저, 저도 예전에 납치돼서 팔려갔거든요. 요즘 인신매매범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그분은 괜찮으실까요?”
춘령이 놀라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자 왕십칠이 헤헤 웃었다.
“아냐, 아냐. 오해였어. 외숙부 댁의 사촌 오라비였거든.”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슬리는 놈이야.”
외숙부, 사촌 오라비. 춘령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담 다행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공자님의 정혼자한테 경성에 외숙이 있으셨군요. 대단한 분이겠죠?”
“대단하긴 뭐. 그냥 무관이야. 뭐라더라…….”
왕십칠은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덕낭이라나. 아, 그래.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춘령은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인을 한 후에도 친척집에 들르려면 경성에 자주 오시겠어요.”
춘령은 밝게 웃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또 볼 수 있겠죠?”
“친척집에 들르든 말든, 난 와야지. 주 낭자한테 전해라. 내년에도 꼭 보러 오겠다고.”
“곧 떠나세요?”
춘령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응. 정혼자가 난리를 쳐서 집에 가야 해.”
왕십칠은 일부러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당한 사내로서 시종들한테 납치되다시피 돌아간다는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낭자와 함께 백년해로하시길 바랄게요.”
춘령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 경성에서 잘 지내고 있거라. 나중에 꼭 보러 올게.”
달콤한 말로 달래 놓아야, 주 낭자 앞에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 주겠지.
예상대로 춘령은 기쁘고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왕십칠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을 나온 춘령은 왕십칠이 상으로 준 돈과 서찰을 보낼 주소 쪽지를 힐끔 쳐다봤다. 얼굴에 있던 밝은 웃음은 걷힌 지 오래였고, 가소롭다는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디 백년해로해라!
“언니, 언니. 우리 오늘 정 언니네 놀러 가면 안 돼?”
진십팔랑을 쫄랑쫄랑 따라온 진단랑이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진십팔랑은 진단랑을 붙잡고 앞쪽 대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도 봤잖아.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매가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진소의 사환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조부님이랑 같이 계셔?”
진십팔랑의 물음에 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중이신 거야?”
“네, 병주로 갔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병주?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언니, 병주가 어디야?”
진단랑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병주라면…… 정교랑이 오랫동안 지낸 도관이 있는 곳인데…….
진십팔랑은 대청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거기서 정교랑과 관련된 소식이라도 온 건가?
진소가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진 노태야는 서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사람을 찾았을 땐, 이미 병이 깊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답니다. 며칠을 지켰지만 호전될 기미가 안 보였고요. 경성으로 데려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다더냐? 아무 말도 안 남겼어?”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말이 없어서 다들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 서찰을 내밀더랍니다.”
진소는 서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한테 주라고 했다는 걸 보면 정 낭자를 아는 듯싶습니다. 그 후 숨을 거뒀고요.”
진 노태야는 서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어떤 내력이 있는 자지? 세상 사람들 말처럼 고인이라면 왜 그리 허망하게 떠난 거야?
서찰엔, 뭘 쓴 거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더 많이 적어 놓았나? 죽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써 두었나? 아니면 사문(師門)의 내력이나 비밀?
손을 뻗던 진 노태야는 봉투를 만지던 손을 돌연 멈췄다.
“정 낭자한테 보내거라.”
진 노태야가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왕십칠이 떠난 후, 정교랑의 저택은 고요를 되찾았다. 금가아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었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반근은 차를 들고 대청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씨.”
반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돌아가는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돼서요?”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역시 웃음을 지었다. 반근이 앞으로 다가가 차를 올리자 정교랑이 찻잔을 받았다.
가을바람이 대청으로 들어오자 창가에 걸어둔 점풍탁(占風鐸: 바람이 부는 것을 알기 위해 쓰던 방울)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그럼 아씨, 정말 왕 공자와 혼인하시려고요?”
반근이 주저하다가 또 물었다.
“반근, 지금 나한테 가장 부족한 게 무엇인 것 같니?”
정교랑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질문하시는 건가? 난 생각하는 걸 제일 못하는데…….
반근은 긴장한 채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도련님들께서 떠나셨고, 짜증 나고 성가시게 굴지만 가끔은 우릴 지켜 주던 주육낭도 떠났다. 주 노야 일가와는 예를 지키되 가까이 지내지는 않고…….
“사람이 없죠.”
반근이 떠보는 투로 대답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지. 집이 없어.”
정교랑이 손을 펴서 내밀었다. 혈육이 있으나 가깝지 않으니, 집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왕 공자가 정말 아씨한테 집을 줄 수 있을까?
정교랑이 웃었다.
“내가 원하는 집은, 깨부수고 나서, 내 뜻대로 다시 합칠 수 있는 집이야.”
정교랑이 펼쳤던 손을 꽉 쥐었다.
“그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야.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한 가족이 필요해. 날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족 말이야. 그 사람이 적당해.”
반근은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했지만, 아씨께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이 아니라 이득을 보고자 결정한 일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아씨께서 계시는 곳이 소인의 집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책을 들었다. 반근은 조용히 찻잔을 정리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소 부부가 방문한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전에는 진십팔랑과 진단랑처럼 동년배끼리만 왕래했기에 진소 부부가 정교랑의 저택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금가아에게 진소 부부를 맞이하도록 하고, 정교랑에게 고하러 갔다.
진소 부인은 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진단랑의 손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단랑한테 들으니 여기 활을 쏘는 곳이 있다던데, 구경해도 될까?”
자리를 비켜 주려는 건가? 시녀는 얼른 일어섰다.
“절 따라오세요, 부인.”
시녀는 반근에게 차를 올리게 하고, 진소 부인과 진단랑을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대청에는 진소와 정교랑만 남았다. 반근은 차를 올린 후 문가로 물러나 꿇어앉았다.
“실은 낭자를 경성으로 청해 올 무렵, 우리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낭자의 이력을 알아봤습니다.”
진소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낭자.”
“당연한 일이에요. 저 역시 기회가 됐다면 알아봤을 거예요.”
정교랑이 진소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있나요?”
진소가 서찰을 한 통 꺼내 내밀었다.
“낭자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남긴 서찰입니다.”
진씨 가문은 누군가가 정교랑의 병을 고쳐 주고, 의술을 가르쳤다고 여겨 왔다. 정교랑은 그 점을 알면서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비술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쭉 자신을 따랐던 반근조차도 그에 관한 기억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소가 사람을 찾아내 서찰까지 받아 왔으니 놀랄 수밖에.
정교랑에게는 병이 낫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 걸까? 정말 그 사람이 병을 고쳐 준 걸까? 머릿속에 있는 이 어지러운 기억들도 그 사람이 넣어 준 걸까?
반근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인데요?”
반근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마흔 남짓한 서생입니다. 도관 근처에 머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더군요. 의술을 좀 알아서 병을 고치고 약도 지어 줬고요.”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네, 그런 사람이 있긴 했어요. 다들 노(路) 수재라고 불렀죠.”
반근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 듯했다.
“아, 참. 유모가 아플 때도 그 사람이 약을 지어 줬어요.”
노 수재? 정교랑의 기억 속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내 병을 고쳐 준 거야?”
정교랑이 물었다. 진소도 반근을 쳐다봤다.
“아니에요. 원래 거기 사람도 아닌걸요. 유모가 병을 얻은 후에야 오기도 했고요.”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도관엔 한두 번 정도 왔던 것 같아요. 유모의 병을 고쳐 주러 왔던 건데, 나중에 유모의 병이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안 왔어요. 유모가 세상을 뜬 후로는 본 적도 없고요. 그 기간이 한 일 년 남짓 됐던 것 같은데, 아씨의 병을 고쳐 준 일은 없어요.”
없다고? 저 애는 가장 가까이에서 정 낭자의 시중을 들었는데, 접촉한 일이 없다고 하다니.
진소가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님, 제가 잘 모를 수도 있고요.”
반근이 얼른 덧붙였다.
“유모의 병을 치료해 줄 때, 아씨도 옆에 같이 계셨거든요. 그 사람이 아씨를 보고, 유모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반근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만 해도 유모가 아씨를 보살폈거든요. 먹고 입는 부분에선 소인이 딱히 한 일이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손을 뻗어 서찰을 들었다. 서찰을 빤히 보면서도 왠지 주저하는 듯했다.
이 안에, 잃어버린 기억이 있으려나?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앞으로는 낭자의 일에 대해 알아보는 일이 없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진소가 일어나며 작별을 고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진소 부부의 배웅을 마친 시녀가 돌아왔다. 정교랑은 서찰을 손에 든 채로 여전히 대청에 앉아 있었다.
“저게 뭐야?”
자리에 없었던지라 자초지종을 모르는 시녀가 반근에게 물었다.
“진 대인 말씀으로는 아씨의 스승님이 남긴 서찰이래.”
반근의 대답에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씨의 스승님?”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누가 진 대인을 통해 아씨한테 전한 거래.”
시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시녀와 반근은 대청을 쳐다봤다. 대청에 있던 정교랑이 서찰을 열었다.
종이에 쓰인 건 단 한 문장이었다.
‘넌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야?
서찰을 읽은 정교랑은 물이 고여 있던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씨, 차를 더 올릴까요?”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교랑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새로 만든 간식을 드셔 보시겠어요?”
반근도 물었다.
“어떤 새로운 간식을 만들었는데?”
시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또 이상해서 못 먹는 건 아니지?”
“언니, 무슨! 어디가 이상해?”
반근이 따지자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아씨, 얘가 지난번에 만든 그 간식 이상했죠?”
시녀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반근과 시녀를 쳐다봤다.
“난 누구지?”
정교랑의 말에 시녀와 반근은 멈칫했다.
“네?”
두 사람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난 누구야?”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난 누구지?
시녀와 반근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지?
시녀와 반근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여인의 두 눈이 뒤집히더니 여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대청에서 흘러나온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어떻게 된 일이래요?”
주 부인이 밖으로 나가는 주 노야를 보며 다급한 투로 물었다.
“병으로 쓰러졌다는군.”
주 노야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쓰러져요? 자기가 신의인데, 어떻게 갑자기 쓰러지죠?”
“진 상공이 다녀간 후, 의식을 잃었다고 했소.”
“진 상공이요?”
주 부인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섰다.
“원수를 갚은 건 아니겠죠?”
“원수는 무슨 원수!”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무슨 원수냐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똑똑히 알잖아요! 당신, 그 애랑 둘이서 뭐 하느라 바삐 돌아다녔어요? 탈영병들 일 때문이었죠? 듣자니 진 대인이 탈영병을 문제 삼아 서북 군무의 죄상을 지적하려 했는데, 탈영병이 석방됐다면서요. 다들 진 대인이 이번에 크게 낭패를 봤다고 하던데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부인이 알아서 안 될 일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얘기를 꺼낸 적 없었는데 부인은 나름대로 정보를 수소문해 다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더해지거나 빠진 이야기가 있고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사실과 일치했다.
이 일이 최종적인 결과가 어쩌다 그렇게 나온 건지는 주 노야 자신도 몰랐지만, 탈영병이 석방된 것만 봐도 외조카가 중간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사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진 상공이 크게 낭패를 보긴 했지. 그래서 단죄하러 왔던 건가?
주 노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렇다면, 교교가 진 상공을 해치울 승산은 얼마나 되지?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친 주 노야는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후려쳤다.
이런 우라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단 상태가 어떤지부터 가서 봐야지.”
주 노야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진안 군왕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탁자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의식을 잃어 못 깨어난다고?”
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의원이 여럿 다녀갔지만 무슨 병인지도 진단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자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전하.”
내시가 막아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췄다.
“요 며칠 너무 자주 나가셨습니다. 태후마마와 폐하께서도 전하께서 어디를 가시는지 하문하셨고요.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만 지금 또 나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더는 속이기 힘들어요. 마마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도 안 좋습니다.”
진안 군왕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밖에는 그래도 빛이 남아 있었지만 실내는 햇빛이 거의 사라진 후라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어둑해지는 빛을 바라보는 소년의 어두운 얼굴에 내시 역시 기분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족 신분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몸이었고, 황궁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가셔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소인이 지켜보다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없이 서책을 들고 다시 서책에 고개를 박았다. 내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발소리를 죽여 물러났다.
“소인이 직접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내시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진안 군왕은 책에 몰두한 채 대꾸하지 않았다.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전부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듯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아침 해가 뜨고 날이 훤히 밝을 무렵, 정교랑 저택의 대문이 열리더니 주 부인이 급히 나왔다.
“약 잘 먹여라. 난 노야와 상의해서 의원을 더 찾아볼게.”
주 부인은 반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종의 부축을 받아 허둥지둥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반근은 대문간에 서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빨간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가 침상 위에 누운 아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 주전자의 약을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약은 대부분 입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녀는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계속해서 약을 먹였다.
반근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주 부인은 가셨어.”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갔다는 표현보다는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지……. 최대한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으니까.
“갈 테면 가라지.”
시녀가 반근을 보며 소리쳤다.
“울긴 뭘 울어. 그 사람들 없어도 우리가 있잖아. 아씨께선 무탈하실 거야. 어서 와서 아씨나 부축해.”
반근은 얼른 눈물을 닦고 달려와 꿇어앉았다.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린 주 부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주 노야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왜 돌아왔소? 교교가 깨어난 거요? 좀 어때? 별일 없지?”
주 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보기엔 좋아지긴 글렀어요.”
“뭐라고? 죽을 것 같소?”
주 노야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반응이 전혀 없어요. 약을 먹여도 넘기질 못하고요. 의원이 여럿 다녀갔는데 다들 몸은 아무 문제 없다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대요. 의식이 없으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라나. 산송장이 뭐겠어요? 또 어릴 때처럼 지각이 없는 바보로 돌아갔단 거잖아요”
또 바보가 됐다고? 주 노야는 경악했다.
“이 망할 진씨 놈들! 우리 교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주 노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당장 가서 따져야겠소!”
“거기 서요!”
주 부인이 얼른 일어나 다급하게 붙잡았다.
“미쳤어요, 거길 가게? 거기 가서 뭐 하려고요? 말 몇 마디 하고 서찰 한 통 건넨 일로 애가 죽게 생겼다고 하게요? 말이라도 새어 나가 봐요. 그 말을 누가 믿어요?”
하긴, 누가 믿겠나. 유 교리가 여인의 말 몇 마디에 풍질을 얻어 초주검이 됐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 노야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 상공은 여전히 진 상공이에요. 그 애는 이제 바보가 됐고요.”
주 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바보 시늉을 하는 사람은 두렵지만, 진짜 바보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주 노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여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아무리 큰일을 벌이겠다 한들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서 훌륭한 의원이나 더 찾아보시오.”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고는 몇 걸음 서성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 관리인이 대청을 나오자 시녀가 뒤에서 배웅했다.
“외숙부님은 왔다 가셨고?”
오 관리인의 물음에 시녀는 냉소를 지었다.
“오는 게 더 이상하죠. 의원을 청하러 갔다고 전갈이 오긴 했는데, 어디 가서 의원을 청해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니 말이죠.”
“서두를 것 없어. 내가 아는 의원이 하나 있는데, 특히 난치병에 용하거든. 내가 가서 모셔 오지.”
오 관리인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아씨를 돕는 게 곧 나 자신을 돕는 거야. 수고라니 당치도 않아.”
다른 이들은 아씨가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겠지만,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허둥지둥 문을 나서는 오 관리인의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대청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