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등놀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중추절이 되었다.
8월 15일, 경성의 경치는 정월 대보름 꽃등 축제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가가호호 각양각색의 꽃등을 준비하고 중추절이 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진단랑이 마당의 꽃등 사이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유모도 진단랑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어머니, 어머니.”
진소 부인은 대청에서 여종들과 함께 새로 만든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뛰어오는 진단랑을 본 여종 하나가 서둘러 옷을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진단랑이 진소 부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잘 다녀왔니? 배는 안 고프고?”
진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진단랑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 정 언니는 우리 집에서 중추절을 같이 안 보내요?”
진단랑이 다급하게 묻자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중추절을 어떻게 우리 집에서 보내겠니. 정 낭자도 가족이 있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진단랑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정 언니가 우리 집이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오지 않는 게 아니고요?”
진소 부인은 웃음기를 싹 걷고 문 앞에 꿇어앉은 유모와 몸종들을 쳐다보았다. 진단랑은 그런 진소 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모친의 소매를 늘어지게 잡으면서 흔들었다.
“어머니, 유모가 알려준 게 아니에요. 십팔랑 언니도 정 언니를 보러 가지 않고, 정 언니도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잖아요. 제가 정 언니를 보러 간다고 하면 십팔랑 언니랑 할아버지가 다 못 가게 막는단 말이에요. 셋째 언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들었고요. 정 언니도 셋째 언니처럼 다시는 우리 집에 안 오는 거예요?”
진단랑의 입에서 셋째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소 부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한 생각 말거라. 정 낭자가 요즘 바빠서 그래. 우리가 귀찮게 하면 안 되잖니.”
진소 부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미가 잘 봐뒀다가 정 낭자가 좀 한가해진다 싶으면 너를 데리고 보러 가마. 저기 정 낭자에게 줄 새 옷도 지어 놨어. 조금 이따가 사람을 시켜 보내려던 참이란다.”
진소 부인이 한쪽에 치워진 옷가지를 가리키자 진단랑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진소 부인은 화제를 돌리며 진단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단랑이 방을 나가자, 진소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진소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5일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가 천가(天街)의 어디에 위치한다더냐?”
진소 부인이 묻자 여종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대답했다.
“부인, 주씨 가문의 천막은 천가에 세울 자격이 못 됩니다.”
천가는 다름 아닌 어가(御街: 대궐로 통하는 길)였다. 중추절에는 황제와 백성이 함께 기쁨을 나누며 선덕문(宣德門)에 오르는 문화가 있었다. 조회에 참석하는 고위급 관료인 승조관(昇朝官) 이상의 가문들만 천가에서 천자를 뵐 자격이 있었다.
진소 부인도 아차 싶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천막을 하나 더 놓는다 한들, 크게 다를 바 없겠지. 바깥쪽에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하는 게 어려울지 노야한테 물어봐야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진소 부인은 좋은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야를 찾으러 갔다.
같은 시각 진(秦)씨 가문.
진 부인도 진십삼을 붙잡고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를 묻고 있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로 물으세요?”
진십삼이 물었다. 진 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혼사 얘기를 해야지. 나더러 혼담을 넣으러 가라고 했잖니. 왜? 필요 없어졌어?”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담을 넣을 만큼 알맞은 사람이 있으면요.”
진 부인이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네가 먼저 가서 말해 봐. 내가 고른 사람이 적당할지, 정 낭자를 한번 떠보는 건 어떠니?”
진십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씨 가문에서 적당하다고 여긴 이라면, 정 낭자도 괜찮다고 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정 낭자에 대해서 잘 알게 됐대? 다 얘기가 된 거야?”
진 부인이 문득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그날 밤엔 어딜 갔었어?”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의하고 말 것도 없죠.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를 뿐인걸요. 그날 일은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주육낭을 배웅하러 갔다고요.”
진 부인은 이미 진십삼의 사환에게서 똑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사환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진십삼에게 다시 한번 물어본 것이었다.
이 아들내미가 정말.
진십삼은 모친에게 알리고 싶은 것만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알리지 않고 싶은 건 사환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해두곤 했다.
요즘 진십삼이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교랑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진 부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알겠다.”
진 부인이 여종을 향해 말했다.
“가서 노야께 말씀드리거라. 이번 꽃등 행사 때, 주씨 가문의 천막을 우리 천막 옆으로 배치해 달라고.”
여종이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야기하기도 편하겠지.”
진 부인이 천천히 부채질을 하며 진십삼을 향해 웃었다. 진십삼도 진 부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께서 좋으시면 소자도 좋습니다.”
두 진씨 가문 덕분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는 하루 사이에 결정됐다. 남의 일에 선심 쓰듯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씨 가문은 금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신의 천막 자리를 알게 된 주 노야는 깜짝 놀라 집사가 수리한 등산(燈山: 산 모양의 대형 등롱)을 보러 가는 것도 미뤄 두었다.
“자리가 어가에 있다고? 그럴 리가!”
주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야. 진(陳) 상공 가문과 진(秦)씨 가문에서 그리 시킨 거라더군.”
주 노야는 대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陳) 상공 가문 하나로도 기뻐 죽겠는데, 진(秦)씨 가문까지 합세했다니, 진정 겹경사로구나.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하려는 걸까요?”
주 노야가 쯧 소리를 내면서 대꾸했다.
“뭘 하기는. 다 우리 교교의 은혜를 입어서 그런 게지. 난 또 저들이 은혜를 다 잊은 줄로만 알았네. 암,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교교 얘기가 나오자 주 부인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애는 15일에 정말 우리 집에 안 온대요? 우리랑 불화가 있다고 일부러 티 내려는 건 아니겠죠?”
“무슨 불화? 갑자기 불화는? 왕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직접 말했소. 교교를 데리고 꽃등을 보러 간다고.”
“정말로 꽃등을 보러 가자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나.”
주 노야는 주 부인의 마지막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
“안 될 건 또 뭐요?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바보든, 간덩이가 부었든, 정교랑 곁을 지키는 사람이 내 아들만 아니면 돼. 주 부인은 웃으며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아니, 내 말은 왕씨 가문 공자가 참 다정다감하다고요. 그러니 교교가 좋아하겠죠.”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주 노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교교가 혼례를 올리고 나서도 경성에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주 노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인네는 혼례만 올리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태평거, 신선거, 태평 두부가 떠올랐다. 마음먹은 대로 남을 쥐락펴락하는 수완이며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까지. 그 모든 게 남의 집 것이 된다니.
주 노야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듯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꾹 눌렀다. 정말 배 아파 죽겠군.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전령병이 이리저리 먼지가 나도록 뛰어다니며 야영 소식을 전했다.
“또 야영한다고? 겨우 며칠 걸었다고!”
서봉추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대인들께서 수성부(遂城府)에서 중추절을 보내시겠다는군.”
병졸 한 명이 나지막이 대꾸하자, 서봉추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집을 나선 마당에 중추절은 무슨 중추절이야.”
“급할 게 뭐 있나? 쉴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것 아니오.”
병졸이 웃으며 말했다.
“쉴 시간이 어딨다고 그래? 이 몸은 하루빨리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서봉추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평은 불평이고, 서봉추와 병졸들은 야영을 준비하기 위해 막사를 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모두 현지의 관원들에게 성 안으로 초대되었지만, 병영의 병사들은 모두 규율대로 성 밖 영지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넷째 형님은?”
천막을 다 치고 난 서봉추 형제들은 문득 사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다.
“어디 있겠어. 또 말들 돌보고 있겠지.”
범강림이 말했다. 서봉추와 다른 형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근처에 있는 말 울타리를 내다보자, 역시나 서사근이 말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넷째 형님은 저러다 저 말들을 받들고 살겠어.”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누이가 정말로 천금짜리 귀한 말을 선물해 준 건가?”
서무수가 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던 서사근의 옆으로 갔다.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서사근이 말에게 시선을 고정해둔 채 대답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굽을 보고 있었다. 정교랑이 선물해 준 말 일곱 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시선을 낮춰 말굽을 보면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로가 평평하기도 하고, 매일 행군하는 거리도 짧다 보니 아직은 다른 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사근이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흥분한 얼굴로 눈빛을 반짝이고는 목소리까지 떨면서 외쳤다.
“그래도 말입니다, 형님!”
서사근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서무수의 팔을 움켜잡았다.
“서북에 도착하면 차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사근은 두서없이 떠들어대며 서무수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형님, 형님. 볼 수 있을 거란 말이오! 다른 점을! 아주 다릅니다! 형님, 이건 정말로 큰 선물이오. 누이가 준 엄청난 선물이라고!”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사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나도 알아. 누이가 우리에게 평범한 선물을 줬을 리가 없지.”
“큰 선물입니다. 너무 큰 선물이에요. 정말, 정말로.”
서사근은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는 정교랑이 배웅 왔던 다음 날 아침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다들 모릅니다. 모른다고. 말들이 얼마나 아픈데. 내 마음도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게 많은 말들이, 그 좋은 말들이 죽을 일도 아닌 일로 버려져 죽어간다는 게……. 만약, 만약 이게 정말로 효험이 있다면!”
서사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굽을 바라보았다.
서무수는 머쓱하게 웃다가 누군가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중추절을 보내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던 관리와 군관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서무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쳐다보는 모습이 보이자 주육낭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몇 필 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상님 떠받들다시피 하고 있어. 못난 놈들!
마지막 노을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대지를 덮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뜨고 있는 둥그런 달을 올려다보았다.
“경성의 중추절은 볼거리가 많은데, 이쪽은 어떨지 모르겠소.”
관리와 군관들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경성의 중추가 시끌벅적하긴 하지. 그 여인도 꽃등 구경을 나가겠지?
아, 아닐 수도 있겠군. 그 여인은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이 북적거리는 걸 싫어했었잖아. 명절날인데, 뭘 하고 있으려나?
우리 집에는 오기 싫어할 텐데, 혼자 집에 가만히 있으려나?
“육낭, 가자.”
옆에서 누군가가 주육낭을 부르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 뒤 말을 재촉해 뒤따라갔다. 밝아오는 달빛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달빛이 훤히 비추는 경성은 마치 인간 세상의 선경과도 같았다.
거리는 온통 꽃등으로 가득해 눈이 어지러웠다. 권문세가나 부잣집에서는 위상을 뽐낼 수 있는 거대한 등산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선덕문 위에 서서 보니, 화려한 경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등불로 반짝이는 경성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아름다웠다.
“형님, 형님.”
성루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안 군왕을 이황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전하, 천천히 가세요.”
내시들은 행여나 이황자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외쳤다.
성루에는 황제 이외에도 후궁의 비빈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황실과 가깝게 지내는 정통 황족들과 조정 중신들, 시녀며 태감들까지 모두 성루에 모여 있어서인지 성루는 다소 비좁아 보였다.
진안 군왕은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황자가 진안 군왕의 손을 잡고 가까이에 섰다.
“형님, 예쁘지요?”
알록달록한 어가의 꽃등과 멀리서 보이는 경성의 화려한 등불들을 보며, 이황자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부터 형님한테 오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오고 방에서 잠만 잤잖아요. 이제 좀 후회되죠?”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향해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성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이 꽃등 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다가도, 등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님, 뭐 찾아요?”
이황자가 물었다.
어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천막은 얼추 삼사십 개 정도였다. 가까이에 있는 천막 자리는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천막은 불빛이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천막은 아마 제일 멀리 있겠지?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 꽃등 놀이를 할 수 있습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 질문에 태후가 직접 나서기도 전에 내시들이 극구 반대했다. 내시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 장난치시면 아니되옵니다!”
예상했던 바였는지 진안 군왕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 우리는 여기서 보죠.”
진안 군왕이 이황자의 손을 잡고 성루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높이 서 있어도 진안 군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가에 있는 몇몇 사람은 이미 성루 아래로 가까이 와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찾는 건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 낭자가 안 왔다고요?”
진소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그러게요.”
주 부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 자리를 여기 잡아 준 데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겠지. 아무렴 어때? 난 누릴 수 있는 걸 누리는 것뿐인데.
“그럼…….”
진소 부인이 또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에 천막 밖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 집 꽃등 정말 예쁘다. 들어가서 한번 볼까?”
진소 부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진(秦) 부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어? 언니도 있었네요?”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을 보자마자 부채를 흔들면서 웃었다. 진소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진 부인의 뒤에 서 있던 진십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크지 않은 천막에 갑자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일순간 공간이 협소해졌다. 조그마한 천막에 진소 부인과 진 부인이 모두 모여 있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집 여인들도 다가와 기웃거렸다.
주씨 가문의 딸들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피해 천막 밖으로 나갔다. 주 부인은 이 성가신 상황을 불만스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정 낭자는요?”
진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없대.”
주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 부인이 먼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딜 갔대? 밖에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나? 난 왜 못 봤지?”
진 부인이 뒤에 있던 진십삼을 살짝 밀치면서 말했다.
“가서 좀 불러오렴.”
이번엔 주 부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 안 왔어요.”
진 부인과 진소 부인 모두 놀란 눈으로 진십삼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안 왔다고? 그럼 집에 있다는 게야?”
“아니요. 오늘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십삼이 여유롭게 말했다.
“누구랑?”
두 부인이 또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혼자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혼자! 두 부인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진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십삼!”
진십삼은 진 부인을 놀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듯 눈썹을 꿈틀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지만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주 부인은 한쪽에서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조용히 들었다.
그냥 부인들에게 차나 우려 주는 게 나을 것 같네. 어차피 조카의 일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아니까.
“진작 알았으면서 왜 말을 안 했어?”
노여운 얼굴의 진 부인이 부채로 진십삼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 어머니의 흥을 깰 수 있겠습니까.”
진십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흘겨보았다.
“며칠 동안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대? 이 어미의 흥을 깨려고 그렇게 벼르고 있었단 말이야?”
진십삼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자가 억울합니다.”
진씨 모자는 주씨 가문의 천막을 나와 어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크고 작은 꽃등과 등산들이 한데 모여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등불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진십삼은 짙은 남색 장포를 입고 허리춤에 옥대를 묶어두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올림머리에 금색 장식을 한 진십삼은 반짝이는 등롱 사이에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 진십삼이 진 부인과 담소를 나누면서 싱긋 웃자, 더욱 준수해 보이는 그의 용모에 뭇 여인들이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으이구, 널 상대하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구나. 저리 가서 혼자 놀려무나.”
진 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발 앞서 나가 걷고 있던 진소 부인을 따라갔다.
진십삼은 제자리에 서서 진 부인이 진소 부인에게 가까이 간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어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십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차츰 사라져 갔다. 진십삼은 어가의 끝자락에서 고개를 들어 저잣거리를 내다보았다.
저잣거리의 꽃등은 어가의 등롱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꽃등이 잔뜩 모여 있다 보니 분위기는 더욱 흥겨웠다.
저 화려한 저잣거리는 미인과 함께 꽃등 놀이를 즐기기에 퍽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 그 여인도 저기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겠지?
높은 곳에서 저잣거리를 내려다보면 은하수와 같은 아름다움을 구경할 수 있겠지만, 은하수 안에 섞여 즐기면 그 나름대로 또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선 수시로 불꽃이 팡팡 터졌다. 반근과 금가아는 불꽃이 터질 때마다 고개를 치켜들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연신 감탄을 해댔다.
“아무 데나 뛰어다니지 말고. 길 좀 봐. 앞에 사람도 잘 보고.”
시녀는 계속 잔소리를 하며 금방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것 같은 금가아를 붙잡았다.
“매년 이맘때면 인신매매 장수가 사람을 납치해 가. 너 또 그러다 잡혀가지 말고!”
금가아가 얼굴을 붉히고 외쳤다.
“난 잡혀간 적 없어! 길을 잃은 거지!”
시녀와 반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좀 빨리빨리 와.”
앞서 걷고 있던 소년 공자가 고개를 돌리고 귀찮다는 듯이 외쳤다.
“서두르긴 뭘 서둘러요? 구경 나온 거 맞아요? 그냥 걸으러 온 건가?”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 계집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네! 왕십칠의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눈을 크게 뜨고 시녀를 눈여겨보았다.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왕십칠이 말하자 시녀가 즉시 반박했다.
“그럼 우리 아씨를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건데요?”
저 계집이! 왕십칠이 눈을 부릅떴다. 내 나중에 넌 필히 손봐 주마.
왕십칠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시녀와 정교랑 일행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앞쪽에 예쁜 게 많아. 곧 강물에 꽃등을 둥둥 떠내려 보내니까, 우리도 서둘러 가자고.”
왕십칠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왕씨 가문의 시종들은 저잣거리에 잔뜩 몰려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면서 간신히 길을 터 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 양쪽으로는 거대한 등산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금빛 찬란한 것도 있고 알록달록한 것들도 있어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어 등산과 꽃등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시종이 왕십칠에게 정교랑 일행이 또 뒤처졌다고 알리자, 왕십칠은 화가 솟구쳤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왕십칠이 정교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챘다.
“빨리 가자고.”
고개를 들고 불꽃놀이에 붉게 물든 하늘을 감상하고 있던 정교랑은 왕십칠이 갑자기 팔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걸음을 헛디딜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시녀는 화가 나서 고함을 빽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녀가 정교랑을 잡고 있던 왕십칠의 손을 마구 때렸다.
“그러는 넌 뭘 하는 거냐!”
왕씨 가문의 시종이 시녀를 확 밀치고는 깔보는 태도로 호통을 쳤다.
“몹쓸 년! 감히 우리 도련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반근과 금가아도 서둘러 정교랑을 에워쌌지만,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인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만 멈춰 서 있자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내가 빨리 걸을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왕십칠은 정교랑의 팔에서 손을 떼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 내가 특별히 데리고 나와서 구경시켜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 나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네가 어디 볼 수나 있겠어?”
정교랑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올 생각도 없었을 거예요.”
“알면 됐어. 내 말 잘 듣고 내 성질 긁지 마.”
콧방귀를 뀌며 말하던 왕십칠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참. 그리고 말도 하지 마. 넌 가만히 있으면 예쁜데, 입만 열면 깨.”
정교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왕십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줄게.”
귀걸이 외에 아무런 장식도 하고 있지 않은 정교랑을 본 왕십칠은 선심 쓰듯이 말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정교랑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왕십칠의 뒤를 따랐다.
“서둘러.”
왕씨 가문의 시종들이 나지막이 소리치면서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세 사람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겨보았다.
우리 왕씨 가문에 시집오길 원하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바보 윗전은 오죽하겠냐. 너희가 윗전을 따라 우리 가문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면, 닭이나 개가 승천하는 것과 다름없지. 벼락출세라고.
“이 사람들이!”
금가아와 반근이 울분에 찬 얼굴로 시종들을 노려보았지만, 시녀가 둘을 말리며 시종들을 쓱 훑어보았다.
“됐어. 제 발등 제가 찍는 거야. 죽고 싶으면 뭔 짓인들 못 할까.”
시녀가 금가아와 반근의 등을 떠밀며 걸음을 옮겼다.
“누가 죽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저런 것들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잖아? 사흘도 못 버티고 쫓겨날걸?”
시종이 혀를 차면서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가자. 도련님만 기쁘게 해드리면, 우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른 시종은 남을 흉보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인파 사이를 빠르게 비집어 가며 서쪽으로 향했다.
높은 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과 곳곳에 세워진 등산,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연등들이 모여 천상천하의 절경을 만들어 냈다.
등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는 바로 강가 근처였다. 강가 근처는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도 해서, 이미 부잣집이나 권문세가의 천막들로 길 양쪽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강가 양쪽에 자리를 잡은 찻집과 주점들은 좋은 입지 덕에 많은 손님을 끌어들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덕승루였다.
“어때, 이쪽에서 보는 게 더 예쁘지?”
인파 속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왕십칠이 덕승루 앞의 등산을 득의양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등산에는 온갖 주마등과 유리 같은 것들이 가득 걸려 있어서 언뜻 보아도 거금을 들인 티가 났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등산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원하는 곳에 오게 된 왕십칠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 이것저것 가리키면서 정교랑에게 알려 주었다.
“이게 다가 아니야. 덕승루 안에서 보면 더 예뻐. 그쪽은 강가 바로 옆이니까, 강가에 떠다니는 연등을 볼 수 있어.”
왕십칠이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예약도 해 놨어. 이맘때에 덕승루를 예약하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니야.”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십칠이 정교랑과 함께 덕승루에 들어서서 막 층계를 오르려던 찰나,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화괴(花魁) 주 낭자가 나왔어!”
“화괴 주 낭자가 나왔어!”
층계를 오르고 있던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한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화괴가 뭐야?”
금가아가 물었다.
“교방사의 관기야. 주점마다 기생을 둬서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데에 쓰거든. 화괴는 교방사 관기 중에서도 최고의 명기라는 뜻이야.”
대답해 주던 시녀가 잠시 멈칫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 낭자라, 왠지 귀에 익은데.”
시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반대편의 회랑 다리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장 앞서 걸어오고 있던 여인은 주홍색 치마를 두르고, 진주 보석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면서 여인의 걸음에 따라 흔들리자, 살랑대는 비단잉어의 꼬리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 없이 눈부시게 번진 등불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은 선녀보다 아름다웠다.
“진짜 예쁘다.”
반근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금가아는 벌써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던 사람들도 일제히 제자리에 멈춰 서서 회랑 다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낼 때, 오직 화괴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고, 화괴를 따라다니는 시종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비파를 품에 안은 춘령은 주 낭자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있었다. 부러움과 흠모가 가득 담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춘령은 이유와는 상관없이 지금 자신도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춘령은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각양각색의 등롱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덕승루 내부에 눈이 부셨지만, 춘령은 눈을 찌푸리기는커녕 더욱 크게 뜨며 인파 속에서 누군가를 찾으려 애썼다.
밀려 들어오는 인파에서 시선을 거두고 반대편을 쳐다보던 춘령은 일순간 온몸이 굳은 듯 숨이 멎었다.
반대편 층계에도 남녀노소가 뒤섞여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춘령은 자신이 찾고 있던 사람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소년 공자가 흥분한 얼굴로 춘령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춘령은 저 공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 공자 또한 자신이 찾던 사람은 아니었다.
춘령의 시선이 향한 곳은 왕십칠의 어깨 뒤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군계일학과도 같은 모습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소녀였다.
가녀리고 마른 체형의 소녀는 검붉은 빛의 치마를 입고 있어서 화려한 등불 사이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층계 위에 단정한 자세로 선 그녀는 회랑 다리를 향해 살짝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내로 들어온 탓에 머리에 쓴 너울의 가리개를 양쪽으로 들어 올려 소녀의 용모가 드러났다.
역시 저 얼굴이었어. 역시 아직도 저 얼굴이야.
아씨, 아씨. 저희가 잘못한 게 있다면 벌을 주시고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저희를 내쫓지 마세요.
나무 그늘 밑의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아이는 쉼 없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제발 내쫓지만 말아 달라고 빌었지만, 여인은 개미를 대하듯 손을 슬쩍 올리고 그들을 짓눌러 버렸다.
언니, 나 죽기 싫어.
묘령, 정신 차려. 내가 의원을 불러올게.
언니, 나 죽을 거 같아. 언니, 앞으로 혼자여도 무서워하지 마.
산속의 낡은 묘당 안에 한 아이가 왜소한 몸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큰 소나기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아이였다.
언니, 앞으로 혼자여도 무서워하지 마. 난 어머니랑 아버지 만나러 먼저 갈게.
이제 세상에 묘춘, 묘령 두 자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춘령만이 있었다. 춘령 한 사람만이.
“춘령.”
시끌벅적한 주위의 소란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춘령은 화들짝 놀랐다.
“겁먹지 마. 아씨 뒤를 잘 따라가기만 하면 돼.”
춘령의 뒤에 있던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작년 이맘때에는 지금보다 더 사람이 많았어. 차차 적응될 거야.”
시녀의 걱정 어린 말에 춘령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응, 하고 대답했다. 춘령은 뭐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주 낭자는 이미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몸종 몇 명이 주 낭자의 긴 치맛자락을 한쪽씩 들고 천천히 내려가자, 층계 위로 오색찬란한 구름이 떠다니는 듯했다.
“주 낭자가 꽃배를 타러 간다!”
주 낭자의 동선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외침을 듣자마자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춘령은 반대편 층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춘령은 그 여인의 곁에 서 있던 왕십칠이 얼마나 열광하고 얼마나 환호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왕십칠뿐만 아니라 층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앞다투어 밖으로 몰려나간지라 층계에는 정교랑과 그녀의 하인들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혼자가 다른 여인을 보면서 열광하고, 이 좋은 중추절에 너만 버려두고 간 심정이 어떤지 맛 좀 봐. 이건, 시작에 불과해.
춘령은 계속 비파로 얼굴을 가린 채 주 낭자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비파를 슬며시 아래로 내리자, 웃음이 만개한 춘령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몰려나간 탓에 덕승루는 한결 조용해졌다. 층계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정교랑 일행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감히 우리를 버리고 가? 초대받아 온 사람을 여기에 내팽개치고 달려갔단 말이야?
왕십칠이 밖으로 나가면 그의 시종들은 당연히 윗전을 따라야 했기에 정교랑과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말 해도 너무하네!”
시녀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화를 냈다.
“아님 우리 먼저 방에 들어가 있자.”
반근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덕승루 안에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하지만 층계 위에 멀뚱히 서 있는 사람은 정교랑 일행뿐이었기에 그들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시녀는 성이 난 얼굴로 점원 하나를 불렀다.
“왕씨 가문 공자님이 예약한 방이요?”
점원이 정교랑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인 혼자서 덕승루를 찾게 된다면, 직접 방을 예약했거나 남이 방을 잡아 주었을 텐데. 직접 예약했다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리 없을 테고, 남이 예약한 거라면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야지.
이런 식으로 이름만 대고 방을 몰라 점원을 붙잡고 물어보는 모양새를 보니 영 골칫거리를 만들려는 여인네처럼 보인단 말이야.
“화괴 구경하러 죄다 밖으로 나갔으니 우리는 방에서 기다려야겠다고요!”
점원의 생각을 읽었는지, 시녀가 더욱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 점원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시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씨, 죄송하지만 왕십칠 공자님 이름으로 예약된 방은 없습니다.”
점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없다고? 이 썩을 놈이! 아씨를 데리고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시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없으면 됐어. 나가서 봐도 똑같아.”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몹시 분했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점원 몇 명이 정교랑 일행을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속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시녀는 얼굴이 터질 듯이 창피하고 화가 났다.
내 이런 수모는 태어나서 처음 당해 봐! 저 무례한 놈, 아니 저 쓸모없는 놈한테 이렇게 당하다니!
그런 시녀의 모습과는 다르게, 정교랑은 차분한 표정으로 층계를 천천히 내려갔다. 몇 계단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엇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낭자도 여기 왔네요?”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걸음을 멈춘 정교랑이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사환을 데려온 진십삼이 덕승루 안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십삼은 정교랑을 보자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예를 표했다.
“벌써 돌아가려고요?”
예기치 못한 만남에 놀란 진십삼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천가를 벗어난 뒤,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주육낭도 없자 진십삼은 조용한 곳을 찾아 여유나 즐길까 하고 덕승루에 온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교랑과 마주칠 줄이야.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런 게 바로 인연인가?
“아니요. 나가서 보려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나가서 본다고?
“왕 공자는요?”
진십삼은 정교랑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고는 물었다.
“갔어요.”
정교랑이 짧게 대답했다.
갔다고?
진십삼은 살짝 놀랐다. 정교랑은 항상 같은 표정이라, 그녀의 얼굴에서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대신 그녀 옆에 있던 시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갔어? 제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감히! 이 여인을 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줄을 섰는데, 선약을 잡아 놓고도 감히 여기에 내팽개치고 갔단 말이야?
진십삼은 이걸 행운이라고 말해야 할지, 불운이라고 말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약속하고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것이 더 기쁘네요. 나도 여긴 처음입니다. 덕승루가 물 위의 연등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낭자, 나와 같이 꽃등 놀이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굳이 이리저리 둘러대며 체면 차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말하는구나.
-<교랑의경> 10권에 계속